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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사유(朴師愈, 1703년 - 1767년 6월 2일)는 조선 후기의 문신이다. 포의로 생활하다 만년에 음서로 통덕랑(通德郞)을 지냈다.<ref>이비가 2차 정사에서 정환익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였다{{깨진 링크|url=http://db.itkc.or.kr/index.jsp?bizName=MS&url=/itkcdb/text/nodeViewIframe.jsp?bizName=MS&jwId=K01&moId=010&daId=100&gaLid=194&gaId=&yoId=&ilId=&leId=&NodeId=ms_K001&setid=278013&Pos=2&TotalCount=5&vipyunid=undefined }}</ref> 사후 손자 박규수의 출세로 여러번 증직되어 증 이조판서에까지 이르렀다. 돈령부지사 박필균의 아들이고 연암 박지원의 아버지이며 환재 박규수의 증조부가 된다. 본관은 반남으로, 자는 퇴지(退之)이다.
생애 ¶
1724년(영조 즉위년) 12월 27일 노론계 인사인 생원 이덕보(李德普)등 197명과 함께 도봉서원에 송시열에 대한 제향을 회복해 주고 권상하(權尙夏) 등을 복관해 줄 것 등을 청하는 연명 상소를 올렸다.<ref>도봉서원의 송시열에 대한 제향을 회복해 주고 권상하(權尙夏) 등을 복관해 줄 것 등을 청하는 생원 이덕보(李德普) 등의 상소{{깨진 링크|url=http://db.itkc.or.kr/index.jsp?bizName=MS&url=/itkcdb/text/nodeViewIframe.jsp?bizName=MS&jwId=F00&moId=120&daId=270&gaLid=908&gaId=&yoId=&ilId=&leId=&NodeId=ms_F001&setid=278013 }}</ref>
아버지 박필균은 정2품의 고관이었지만 그는 오래도록 관직에 오르지 못하고 포의로 생활하다가 만년에 음서로 관직에 출사하여 통덕랑(通德郞)을 지냈다.<ref>아버지 박필균이 정2품에 이르렀다.</ref>
그뒤 손자 박규수의 출세로 1864년 증 통훈대부 장악원정에 추증되고<ref>이비가 2차 정사에서 정환익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였다{{깨진 링크|url=http://db.itkc.or.kr/index.jsp?bizName=MS&url=/itkcdb/text/nodeViewIframe.jsp?bizName=MS&jwId=K01&moId=010&daId=100&gaLid=194&gaId=&yoId=&ilId=&leId=&NodeId=ms_K001&setid=278013&Pos=2&TotalCount=5&vipyunid=undefined }}</ref>, 1865년 다시 증 통정대부 이조참의에 추증되었다가 1873년(고종 10년) 다시 증 자헌대부 이조판서로 거듭 추증되었다.<ref>오인영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였다{{깨진 링크|url=http://db.itkc.or.kr/index.jsp?bizName=MS&url=/itkcdb/text/nodeViewIframe.jsp?bizName=MS&jwId=K10&moId=120&daId=250&gaLid=666&gaId=&yoId=&ilId=&leId=&NodeId=ms_K001&setid=281663 }}</ref>
가족 관계 ¶
논란과 의혹 ¶
한때 그의 행적이 자세하게 전하지 않아 일찍 사망했다는 설이 돌기도 했다.
각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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