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 문동환(文東煥) |
생년월일 | 1972년 5월 8일 |
국적 | 대한민국 |
출신지 | 경상북도 경산시 |
출신학교 | 대연초-대천중-동래고-연세대 |
포지션 | 투수 |
투타 | 우투우타 |
프로입단 | 1995년 1차 지명 (롯데) |
소속팀 | 롯데 자이언츠(1997~2003)br두산 베어스(2004)br한화 이글스(2004~2009) |
지도자 | 포항제철공업고등학교 투수코치 (2009~2010)br한화 이글스 2군 재활코치 (2011)br한화 이글스 1군 불펜코치 (2011~2012)br두산 베어스 2군 재활코치 (2013~2014)br두산 베어스 2군 투수코치 (2014~2016)br인창고등학교 투수코치 (2018) br 상우고등학교 감독 (2019~) |
종교 | 불교 |
1999년 한국프로야구 승률왕 | |||||
김수경(현대 유니콘스)br김용수(LG 트윈스) | → | 문동환(롯데 자이언츠) | → | 송진우(한화 이글스) |
목차
소개 ¶
아마추어 시절 ¶
연세대 시절 1992년과 1993년 회장기 전국대학야구 춘계리그 우수투수상을, 1994년에는 대학야구 춘계리그 MVP + 아마야구 MVP를 수상하는 기염을 토했다. 150Km는 우습게 찍는 구위에 제구력까지 갖춘 완성형 투수로 국가대표 1선발을 도맡아하다시피 했다. 심지어 아마 최강 쿠바 선수들이 한국 투수 중 유일하게 기억하는게 문동환이었을 정도.
그러나 졸업후에는 연고팀 롯데 자이언츠가 아닌 아마추어 야구 팀이었던 현대 피닉스에 계약금 3억이라는 당시 프로 아마를 망라해 역대 최고액의 계약금으로 입단하였다. 당시 현대 피닉스의 아마추어 선수 싹쓸이의 화룡점정. 롯데는 문동환의 현대 피닉스행이 확정된 시점이었음에도 1차지명권을 문동환에게 행사했다. 한마디로 언제 입단할 지도 모르는 선수에게 1차지명권을 날려먹은 것은데, 반대로 생각하자면 그만큼 문동환의 아마추어 시절 활약이 엄청났다는 것.
그러나 이후 1995년 현대그룹에서 태평양 돌핀스를 인수해 현대 유니콘스로 본격적인 프로구단을 운영하게 되면서 현대 피닉스가 애매하게 붕 뜨게 되었다. 현대 피닉스에서 더 뛰는 것이 무의미하다고 판단한 문동환은 1996년 공익근무요원으로 입대하지만 몸 이상으로 귀향 조치된데 이어 최종적으로 면제를 받게 된다.[3] 현대 유니콘스는 프로 첫 시즌을 마치고 2년차가 되던 시점 전력보강을 위해 롯데 자이언츠의 전준호를 영입하고자 문동환을 카드로 내세웠다. 현대 피닉스는 문동환과 입단 계약시 '계약을 해지할 경우 수령한 계약금과 연봉을 상회하는 액수의 위약금을 물어야 한다'를 조건으로 족쇄를 채워놨기 때문에 문동환으로선 롯데로 가기 힘든 상황이었는데, 롯데가 전준호를 현대와 현금 5억에 트레이드를 하고 → 이 5억을 문동환에게 계약금으로 지급해서 → 문동환이 그 계약금으로 현대 피닉스에 위약금을 지불하고 계약을 해지하는, 매우 편법스러운 방법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였다.
롯데 입장에선 전준호가 매년 연봉협상때마다 골치거리였고 마침 늦어진 연봉협상의 후유증으로 96년에 부진한 성적을 기록하자, 신인으로서 데뷔시즌을 잘 치른 김대익의 성장을 믿고 전준호를 기꺼이 포기했다. 마침 전준호의 장기인 도루도 눈에 띄게 줄어들기도 했고.[4] 게다가 좀 막장스러운게 전준호를 현대로 현금 트레이드 시킨게 시즌 개막을 불과 나흘(!) 앞둔 시점이었다. 실제로 전준호는 충격 탓인지 현대 유니콘스에서의 첫 시즌을 .247의 타율과 23개의 도루로 부진하며 롯데가 옳은 판단을 했다...는 평가를 받을 뻔 했으나, 이듬해부터 다시 리그 최강의 톱타자로 거듭나며 그 뒤의 결과는 다들 알듯이 전준호의 완승.
어찌됐건 이 딜로 문동환은 롯데 자이언츠에 입단하게 되었다.
롯데 자이언츠 시절 ¶
데뷔 해였던 1997년에는 선발로는 나오지 않고 마무리 투수 보직으로 활약했다. 그러나 기대치만큼의 성적은 거두지 못하면서 최종 성적은 2승 5패 8세이브 39이닝 ERA 4.85.
하지만 1998년과 1999년 12승과 17승을 기록하며 명실상부한 롯데 자이언츠의 에이스로 거듭나게 된다. 참고로 1999년에는 189⅓이닝 동안 17승 4패 141탈삼진 ERA 3.28을 찍는데, 이 해는 역대급 타고투저 시즌이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매우 뛰어난 성적이었다.[5] 다만 포스트시즌에는 매우 부진하였고, 결국 롯데 자이언츠는 한화 이글스에게 맥없이 무너져버렸다. 실제 한국시리즈 최종 5차전에서 결승타를 내준 선수가 문동환이었다. 참고로 경기는 삼성쪽으로 기울고로 유명한 플레이오프 7차전의 선발투수이기도 했다.
하지만 2000년의 선수협 파동 당시 선수협을 지지하다가 구단에게 제대로 찍혔다. 게다가 선수협 사태 동안 구단 단체 훈련에서 제외되고 훈련을 제대로 할 수 없었기 때문에, 몸이 제대로 만들어지지 않은 상태로 투구 내용이 좋을리가 없었다. 그나마 2000년은 3점대 평균자책점으로 7승 3패의 성적을 거두고 있었으나 결국 오른팔꿈치 부상을 당하면서 시즌 아웃되었고, 이후 2001~2002년 동안 고작 4승 11패 2세이브의 성적에 그쳤다.
기나긴 부상과의 사투, 그리고 재활을 거쳤지만 상황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으며 2003년은 아예 시즌을 날려버렸다. 팔꿈치 뼛가락 수술과 인대접합수술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구위는 좀처럼 회복되지 않았다. 그리고 결국 2004년 정수근의 FA 영입 당시 보상 선수로 선택되며 두산 베어스로 이적하게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롯데 자이언츠는 톱타자를 버리면서 투수를 데려왔지만 다시 그 투수를 톱타자를 위해 버리는 모습을 보여줬다. 그리고 하루 만에 한화 이글스의 채상병과 트레이드 되어 한화 이글스 유니폼을 입게 된다.
여담으로 한화에서 뛸 당시 자신의 야구인생에서 가장 기억하기 싫은 시절은 롯데에서 뛰던 시절이라고 회고했다.
한화 이글스 시절 ¶
2006년 한국시리즈 2차전에서 두 번째 투수로 역투하고 있는 모습.
유승안 감독(현 경찰청 감독, 유원상의 아버지) 하에서 2004년 다시 선발로 돌아왔으나 성적은 처참했다. 120⅔이닝 4승 15패 ERA 5.37. 더 이상 선발로는 뛸 수 없을 것이라 다들 생각했다.
그러나 2005년에는 173⅔이닝동안 10승 9패 103K ERA 3.47, 2006년에는 189이닝동안 16승 9패 85K ERA 3.05로 완벽히 부활하여 돌아왔다. 2006년에는 특히 동산고등학교 출신의 신인 류현진과 함께 원투펀치로 활약했으며 팀의 준우승에 기여한다. 이때 문에이스로 불리우며 한화 이글스 마운드의 든든한 선발로써 묵묵히 자기가 할 일을 해왔다.[6] 또한 자신을 버린 팀을 상대로 멋지게 복수하기도 한다. 복수장면(+덤) 2005년도 PS에서는 준PO 1차전에서 완투승을 기록하는 등 선전하였다. 2006년에는 분투하였으나 팀은 한국시리즈에서 삼성 라이온즈에게 무릎꿇게 된다.
하지만 이 당시 김인식 감독의 말도 안되는 혹사[7]로 인해 2007 시즌 이후 다시 부상이 재발해 버렸다.[8] 게다가 2007년 포스트시즌에서는 허리부상을 안고도 피칭을 강행했다가 이것이 장딴지-고관절-허리-종아리에까지 영향을 미쳤고, 이후 그는 더 이상 1군 마운드에 올라올 수 없었다. 가뜩이나 부상이 완치되지도 않은 상황에서 무리하게 2군 경기를 치루려고 했으며, 결국 그 부상은 더욱 악화되어 더 이상 선수 생활을 유지하기 어려운 정도까지 치닫고 말았다.
결국 2009년 7월 8일 최상덕과 함께 웨이버 공시되어 방출되었다. 이후에도 개인 훈련을 하면서 팀을 모색해봤지만 결국 불발되었다.
특이한 기록으로는 2006년 8월 20일 고작 88구만 던져 10피안타 5실점을 허용했음에도 불구하고 완투승을 거둔 적이 있다. 상대는 LG 트윈스.
지도자 시절 ¶
연도별 주요 성적 ¶
역대기록 | |||||||||||||||||
연도 | 소속팀 | 경기수 | 이닝 | 승 | 패 | 세 | 홀 | 승률 | ERA | 피안타 | 피홈런 | 볼넷 | 사구 | 탈삼진 | 실점 | 자책점 | WHIP |
1997 | 롯데 자이언츠 | 22 | 39 | 2 | 5 | 8 | 0 | 0.286 | 4.85 | 40 | 2 | 15 | 1 | 23 | 21 | 21 | 1.410 |
1998 | 31 | 136⅔ | 12 | 5 | 6 | 0 | 0.706 | 3.16 | 121 | 7 | 39 | 1 | 86 | 50 | 48 | 1.171 | |
1999 | 30 | 189⅓br(4위) | 17br(3위) | 4 | 0 | 0 | 0.810 | 3.28br(4위) | 171 | 12 | 67 | 9 | 141 | 75 | 69 | 1.257 | |
2000 | 12 | 72 | 7 | 3 | 0 | 0 | 0.700 | 3.88 | 71 | 6 | 24 | 1 | 58 | 33 | 31 | 1.319 | |
2001 | 13 | 37 | 2 | 4 | 0 | 0 | 0.333 | 6.57 | 44 | 4 | 22 | 0 | 21 | 29 | 27 | 1.784 | |
2002 | 17 | 67 | 2 | 7 | 2 | 0 | 0.222 | 5.10 | 83 | 8 | 22 | 3 | 49 | 46 | 38 | 1.567 | |
2003 | 1군 기록 없음 | ||||||||||||||||
연도 | 소속팀 | 경기수 | 이닝 | 승 | 패 | 세 | 홀 | 승률 | ERA | 피안타 | 피홈런 | 볼넷 | 사구 | 탈삼진 | 실점 | 자책점 | WHIP |
2004 | 한화 이글스 | 25 | 120⅔ | 4 | 15 | 0 | 0 | 0.211 | 5.37 | 147 | 20 | 45 | 5 | 56 | 88 | 72 | 1.591 |
2005 | 26 | 173⅔br(3위) | 10 | 9 | 0 | 0 | 0.526 | 3.47 | 174 | 12 | 57 | 3 | 103 | 74 | 67 | 1.330 | |
2006 | 31 | 189br(4위) | 16br(2위) | 9 | 1 | 0 | 0.640 | 3.05 | 186 | 10 | 67 | 11 | 85 | 78 | 64 | 1.339 | |
2007 | 21 | 84 | 5 | 3 | 0 | 1 | 0.625 | 3.11 | 87 | 8 | 37 | 3 | 37 | 32 | 29 | 1.476 | |
2008 | 1군 기록 없음 | ||||||||||||||||
2009 | |||||||||||||||||
KBO 통산br(13시즌) | 228 | 1108⅓ | 77 | 64 | 17 | 1 | 0.546 | 3.78 | 1124 | 89 | 395 | 37 | 659 | 526 | 466 | 1.37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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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그러나 바로 1년후 92년 졸업생으로 휘문고 임선동, 신일고 조성민, 공주고 박찬호가 쏟아지면서 약간 묻힌 감이 있다. 이때는 대전고 정민철도 앞의 3인방에 밀려서 언급도 안되던 시절이었고은 투수로서도 괜찮았지만 타자 쪽 재능을 더 높이 평가받았다. 그야말로 꿈의 92학번. 게다가 그의 소속 팀이었던 동래고는 지역 예선 통과도 못하는 만년 약체로 메이저 대회라고는 전국 모든 팀이 다 나가는 봉황기에만 간신히 출전했을 정도였다.
- [2] 또한 고교 시절에는 같은 학번으로 대학 동료이기도 한 대전고의 안희봉, 인하대로 진학한 동산고의 위재영이 있기 때문에 독보적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이후 안희봉은 고교 시절 겪었던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투수로서의 가치가 완전히 사라져 버렸지만.
- [3] 후술하는 바와 같이 이는 비슷한 상황을 겪은 주형광과 마찬가지로 문동환의 향후 커리어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 [4] 92년부터 33-75-25-69-23의 도루 수를 기록하였다.
- [5] 이 당시 2점대 ERA 투수는 정민태와 임창용을 제외하면 없었다.
- [6] 만약 팀이 한화만 아니었다면 맏형이 되었을 수도... 최영필이 한화의 영건 소리를 듣던 바로 그 시절이다.
- [7] 2006년도에는 31경기(29선발), 2007년에는 11번 선발 출장에 10번 구원 출장을 기록했다. 이 당시 몸이 성치 않았다는 걸 감안하면 이건 완전히 선수를 보내 버리는 기용이었다. 사족으로 경기당 평균 투구수조차도 동년배였던 정민철과 비교하면 더 많이 던졌다.거의 100개를 넘기는 투구수가 그의 선발 등판시 강판의 기준이였고, 완봉, 완투도 나이에 비해 많았다.
- [8] 정확히는 시즌 중반부터 허리에 이상이 생겼고 병원 검진 결과 허리 디스크였다. 그런 상황에서도 던지게 한 김인식 감독님의 용단에 경의를 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