팝업레이어 알림

팝업레이어 알림이 없습니다.
E D R , A S I H C RSS

마성린

마성린(馬聖麟, 1727년1798년)은 조선의 문신, 서예가이다. 본관은 장흥(長興). 자는 성희(聖羲), 호는 미산(眉山)이다. 관직은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역임하였다.<ref>{{뉴스 인용|제목=기증유물로 보는 수원 박종식 묘표|url=http://www.suwon.com/news/articleView.html?idxno=64171|날짜=2011-03-14|뉴스=수원일보}}</ref>

생애

1727년 3월 28일 조선 한성부 (大貞洞, 지금의 서울특별시 중구) 외가에서 태어나, 외가와 두석동 본가 및 다방동 외종가를 다니면서 자랐다. 마성린의 5대조 마시봉(馬時鳳)은 호조서리, 증조부 마점석(馬點碩)은 내수사 별제(別提), 부 마수한(馬壽漢)은 내수사 제원이었다. 내수사와 호조는 각각 왕실과 국가의 재정을 관장하는 곳인 만큼 수입이 좋은 관직이었다. 마성린(馬聖麟)이 일생을 시와 글씨로 보낸 것은 세전된 경제력 위에서 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ref>한국콘텐츠진흥원</ref>

11세에 동네 친구인 김순간·정택주 등과 함께 인왕산 누각동 김첨지 집에서 글을 배웠다. 12세에는 김팽령·원덕홍과 함께 두석동 고동지 집에서 글을 읽었다. 어린 시절 문덕겸·최윤벽·최윤창·김순간·김봉현 등의 중인 자제들과 더불어 글을 지으며 놀았다. 이들은 평생 글친구가 되었으며, 나중에 백사와 구로회의 동인이 되었다.

15세에는 첨지 한성만의 여섯째 딸과 혼인하였다. 이 무렵 육조동 어귀에 있는 친구 김봉현의 집에서 함께 글을 읽었다. 16세에는 유세통 형제와 더불어 유괴정사(柳槐精舍)에서 글씨 공부를 했다. 마성린은 어린 나이에 선배들과 함께 어울리던 기억을 이렇게 기록했다.

{{인용문|매번 꽃이 피고 꾀꼴새가 우는 날이거나 국화가 피는 중양절이면 이 일대의 시인·묵객·금우(琴友)·가옹(歌翁)들이 이곳에 모여 거문고를 뜯고 피리를 불거나, 시를 짓고 글씨를 썼다. 그 중에서도 여러 노장들 즉 동지 엄한붕, 사알 나석중, 선생 임성원, 별장 이성봉, 동지 문기중, 동지 송규징, 첨정 김성진, 동지 홍우택, 첨지 김우규, 주부 문한규, 첨지 이덕만, 동지 고시걸·홍우필·오만진·김효갑 등이 매번 시회(詩會) 때마다 나에게 시초(詩草)를 쓰게 하였다.}}

십여 년 글씨 공부 끝에 마성린은 명필로 이름을 날리게 되었다.

18세에는 필운동으로 이사했으며, 인왕산 언저리에 살던 겸재 정선(鄭敾)의 문하에 드나들며 산수화를 배웠다. 마성린은 《안화당사집》이란 문집에서 “선생님의 제자로 10년 있었는데 하도 대필을 많이 시켜 힘들어서 그만두었다”는 내용의 기록을 남겼다. 조선시대 화가 중에 정선은 다작을 남긴 작가이기 때문에 아직까지도 대필 논란이 있다.<ref>{{뉴스 인용|제목=‘조영남 사건’으로 본 ‘代作과 創作의 경계’|url=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16052501032327097001|날짜=2016-05-25|뉴스=문화일보}}</ref>

19세에는 한의학 서적을 보면서 틈틈이 필운동 어귀에 있는 처갓집 노조헌(老棗軒)에서 글과 글씨로 나날을 보냈다. 이때 유세통 형제와 김순간·최윤창·최윤벽 등 여러 친구들이 날마다 이 집에 모여서 시를 지으며 노닐었는데 이 모임이 7∼8년 계속되었다.

24세에는 여러 친구들과 더불어 인왕산의 명승지를 찾아다니며 시를 짓고 노래를 불렀다.

43세에는 필운대 아래 북동으로 이사하였다. 집안에 정원이 있었으며, 정원 아래에는 초가 삼간이 있었다. 안화당(安和堂)이라고 이름 지은 이 초당에는 시인·가객(歌客)·화사(畵師)·서동(書童)들이 날마다 모여들었다. 48세에는 인왕산의 청풍계·도화동·무계동에서 노닐었으며, 49세에는 누각동에 있는 직장 권군겸의 집인 만향각이나 옥류동에서 모였다.

51세에는 신윤복의 아버지인 신한평이나 김홍도 같은 화가들과 함께 중부동에 살던 강희언의 집에 모여 그림을 그리거나 화제(畵題)를 써주었다.

52세 되는 1778년 9월 14일에 이효원·최윤창과 함께 김순간의 집인 시한재(是閑齋)에 모여 국화꽃을 구경하며 시를 지으려고 하였다. 그런데 뜻밖에도 거문고를 타는 이휘선과 가객 김시경, 화원 윤도행이 약속도 없이 찾아오자 밤새도록 촛불을 밝혀 놓고 시와 노래, 글씨와 그림을 즐겼다. 이날의 모임을 기록한 시첩이 《청유첩(淸遊帖)》이다.

마성린은 58세에 다시 승문원으로 들어가 근무했다.<ref>{{뉴스 인용|제목=조선후기 신지식인 한양의 中人들 (14) 서예가 마성린의 일생|url=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070402015002|날짜=2007-04-02|뉴스=서울신문|저자=허경진 연세대학교 교수}}</ref>

각주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