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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시열(柳時烈, 1938년 9월 5일 ~ )은 대한민국의 금융인이다. 본관은 풍산이며, 경상북도 안동 출생이다.
생애 ¶
1학년 재학 시절에 대입 검정고시에 합격, 바로 서울대학교 법대에 진학했다. 1962년 대학 졸업과 동시에 한국은행에 입행, 1981년 비서실장<ref>{{뉴스 인용|url=
http://dna.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1060600329205019&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81-06-06&officeId=00032&pageNo=5&printNo=10979&publishType=00020 |날짜=1981-06-06 |출판사= 경향신문, |제목= “복잡한 業務털고 自然즐기는 財界의 週末” }}</ref>, 1983년 5월 30일 임원부속실장(1급)<ref>{{뉴스 인용|url= http://dna.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3053000209202015&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83-05-30&officeId=00020&pageNo=2&printNo=18969&publishType=00020|날짜=1983-05-30 |출판사= 동아일보 |제목= “人事” }}</ref>, 1983년 11월 24일 국제금융부장<ref>{{뉴스 인용|url=http://dna.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3112400209202027&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83-11-24&officeId=00020&pageNo=2&printNo=19121&publishType=00020|날짜=1983-11-24 |출판사= 동아일보 |제목= “人事” }}</ref>, 1986년 6월 26일 외환관리부장<ref>{{뉴스 인용|url= http://dna.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6062600209202026&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86-06-26&officeId=00020&pageNo=2&printNo=19918&publishType=00020 |날짜=1986-06-26 |출판사= 동아일보 |제목= “人事” }}</ref> 을 두루 거쳤다. 특히 무역 수지 흑자가 본격화되던 1987년 7월 23일에 자금부장을 맡아 어려운 통화관리를 무난히 해냈다.<ref>{{뉴스 인용|url=http://dna.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7072300209202018&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87-07-23&officeId=00020&pageNo=2&printNo=20247&publishType=00020|날짜=1987-07-23 |출판사= 동아일보 |제목= “人事” }}</ref> 이어서 1989년 1월 20일에 한국은행 이사에 발탁되었다.<ref>{{뉴스 인용|url=http://dna.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9012000099202013&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89-01-20&officeId=00009&pageNo=2&printNo=7043&publishType=00020|날짜=1989-01-20 |출판사= 매일경제 |제목= “새얼굴” }}</ref>
http://dna.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1060600329205019&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81-06-06&officeId=00032&pageNo=5&printNo=10979&publishType=00020 |날짜=1981-06-06 |출판사= 경향신문, |제목= “복잡한 業務털고 自然즐기는 財界의 週末” }}</ref>, 1983년 5월 30일 임원부속실장(1급)<ref>{{뉴스 인용|url= http://dna.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3053000209202015&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83-05-30&officeId=00020&pageNo=2&printNo=18969&publishType=00020|날짜=1983-05-30 |출판사= 동아일보 |제목= “人事” }}</ref>, 1983년 11월 24일 국제금융부장<ref>{{뉴스 인용|url=http://dna.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3112400209202027&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83-11-24&officeId=00020&pageNo=2&printNo=19121&publishType=00020|날짜=1983-11-24 |출판사= 동아일보 |제목= “人事” }}</ref>, 1986년 6월 26일 외환관리부장<ref>{{뉴스 인용|url= http://dna.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6062600209202026&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86-06-26&officeId=00020&pageNo=2&printNo=19918&publishType=00020 |날짜=1986-06-26 |출판사= 동아일보 |제목= “人事” }}</ref> 을 두루 거쳤다. 특히 무역 수지 흑자가 본격화되던 1987년 7월 23일에 자금부장을 맡아 어려운 통화관리를 무난히 해냈다.<ref>{{뉴스 인용|url=http://dna.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7072300209202018&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87-07-23&officeId=00020&pageNo=2&printNo=20247&publishType=00020|날짜=1987-07-23 |출판사= 동아일보 |제목= “人事” }}</ref> 이어서 1989년 1월 20일에 한국은행 이사에 발탁되었다.<ref>{{뉴스 인용|url=http://dna.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9012000099202013&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89-01-20&officeId=00009&pageNo=2&printNo=7043&publishType=00020|날짜=1989-01-20 |출판사= 매일경제 |제목= “새얼굴” }}</ref>
1995년 1월 12일 금융통화운영위원회는 그를 한국은행 부총재로 임명하였다.<ref>{{뉴스 인용|url= http://dna.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5011300099101011&editNo=15&printCount=1&publishDate=1995-01-13&officeId=00009&pageNo=1&printNo=8983&publishType=00010 |날짜=1995-01-13 |출판사= 매일경제신문, |제목=韓銀부총재 柳時烈씨 금융결제원장 申復泳씨 }}</ref> 1997년 3월 8일 류시열은 제일은행 주주총회에서 은행장에 선임되었다.<ref>{{뉴스 인용|url= http://dna.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7030800099107003&editNo=15&printCount=1&publishDate=1997-03-08&officeId=00009&pageNo=7&printNo=9697&publishType=00010 |날짜=1997-03-08 |출판사= 매일경제신문, |제목=인터뷰 : 신임 柳時烈 제일은행장 “행장직 걸고 외부청탁 막겠다” }}</ref> 1997년 5월, 한보와 삼미 등의 부도로 크게 떨어진 제일은행의 이미지 쇄신을 위해서 제일은행의 TV광고에 직접 출연하여 “한눈 팔지 않겠습니다”라는 약속을 하기도 했다.<ref>{{뉴스 인용 |url = http://dna.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7050800209107007&editNo=45&printCount=1&publishDate=1997-05-08&officeId=00020&pageNo=7&printNo=23530&publishType=00010 |제목 = 제일銀, “이젠 한눈팔지 않겠습니다” 柳행장 TV광고 출연 “한보후유증 탈출” 다짐 | 출판사 = 동아일보 | 날짜 = 1997-05-08 }}</ref> 1999년 4월 당시 재계 2위의 대우그룹 몰락 과정에서 채권단 대표로서 구조조정을 지휘했다<ref>{{웹 인용|url=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oid=011&aid=0000086437&sid1=001|제목=秘錄, 김우중신화의 몰락 刑場은 꾸려지고|언어=ko|확인날짜=2019-03-05}}</ref>. 1999년 11월 12일 은행연합회 회원총회에서 회장으로 추대되었다.<ref>{{뉴스 인용 |url = http://dna.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9111300099101014&editNo=16&printCount=1&publishDate=1999-11-13&officeId=00009&pageNo=1&printNo=10522&publishType=00010|제목 = 새 은행연합회장 류시열씨 선출 | 날짜 = 1999-11-13 |출판사 = 매일경제 |}}</ref>
1999년 11월부터 2002년 11월까지 전국은행연합회 제6대 회장으로 활동했다. 2005년부터 2010년까지 신한금융지주 사외이사를 역임하였다.<ref>{{웹 인용|url=http://www.fntimes.com/html/view.php?ud=2005033020574883139_18|제목=신한지주 신임 사외이사 3명 선임|날짜=2005-03-30|언어=ko|확인날짜=2019-03-04}}</ref> 2010년 9월 신한금융지주가 신상훈 사장을 검찰에 고발하며 10월에는 회장, 사장 그리고 행장이 동시에 물러나는 사태가 일어났을 때 신한금융지주 회장 대행을 맡아서 사태 수습을 지휘했다<ref>{{웹 인용|url=http://biz.heraldcorp.com/view.php?ud=20101030000086|제목=류시열 신한금융 회장 대행은 누구?…향후 과제는|성=헤럴드경제|날짜=2010-10-30|언어=ko|확인날짜=2019-03-04}}</ref>.
1999년 11월부터 2002년 11월까지 전국은행연합회 제6대 회장으로 활동했다. 2005년부터 2010년까지 신한금융지주 사외이사를 역임하였다.<ref>{{웹 인용|url=http://www.fntimes.com/html/view.php?ud=2005033020574883139_18|제목=신한지주 신임 사외이사 3명 선임|날짜=2005-03-30|언어=ko|확인날짜=2019-03-04}}</ref> 2010년 9월 신한금융지주가 신상훈 사장을 검찰에 고발하며 10월에는 회장, 사장 그리고 행장이 동시에 물러나는 사태가 일어났을 때 신한금융지주 회장 대행을 맡아서 사태 수습을 지휘했다<ref>{{웹 인용|url=http://biz.heraldcorp.com/view.php?ud=20101030000086|제목=류시열 신한금융 회장 대행은 누구?…향후 과제는|성=헤럴드경제|날짜=2010-10-30|언어=ko|확인날짜=2019-03-04}}</ref>.
성격이 원만하고 차분해 주위에 따르는 사람이 많다. 부인 신동인(申東仁)과 사이에 2남 1녀를 두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