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생애 ¶
1855년, 빅토리아 주 베버리지에서 아일랜드 출신 부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0대 중후반 때부터 중국인을 습격하거나 산적의 공범으로 활동했다는 이유로 체포되었지만, 두 경우 모두 증거 불충분으로 풀려났다.
1878년 4월, 피츠패트릭 순경(Constable Fitzpatrick)이라는 경찰이 켈리 가족에게 찾아온다. 피츠패트릭은 네드의 동생인 댄 켈리(Dan Kelly)를 말도둑 혐의로 체포하려고 했다. 피츠패트릭은 총에 맞았고[2], 켈리 가족의 어머니인 엘렌 켈리(Ellen Kelly)는 이 일을 사주한 혐의로 체포되었다. 유력한 용의자인 네드와 댄은 도주했다. 훗날 네드의 친구인 조 번(Joe Byrne)과 댄의 친구인 스티브 하트(Steve Hart)가 합류, 켈리 갱(Kelly Gang)이라고 불리는 범죄 조직을 만들었다.
1887년 10월, 경찰은 켈리 갱을 체포하기 위해 무장한 경찰관 네명을 보냈다. 하지만 캘리 갱은 이 사실을 알고 있었고, 경찰 팀이 야영지를 차린 스트링이바크 크리크(Stringybark Creek)를 습격했다. 이들은 경찰관들을 습격해 세명[3]을 살해하고 한명[4]을 붙잡았다. 이후 켈리 갱은 호주의 은행을 털었다. 1889년 2월에 네드 켈리에게 걸린 현상금은 8,000 파운드로 올라갔지만 켈리 갱은 잡히지 않았다. 켈리 갱이 최후를 맞은건 1880년 6월이 되어서였다.
1880년 6월 27일, 켈리 갱은 빅토리아 주 글렌로완(Glenrowan)의 한 여관에서 경찰에게 포위당한다. 네드는 근거리에서 총알을 막아낼 수 있는 갑옷을 입고 밖으로 나타났지만 보호되지 않은 두 다리에 총을 맞고 쓰려졌으며, 조 번은 경찰이 불을 지른 여관에서 뛰쳐나오다가 사타구니에 총을 맞고 죽었다. 댄 켈리와 스티브 하트는 여관이 불타 무너진 후 잔해 속에서 소사체로 발견되었다. 이렇게 켈리 갱은 괴멸했다. 유일한 생존자는 네드 켈리 뿐이었다.
네드 켈리는 스트링이바크 크리크에서 로니건 순경을 살해한 혐의로 사형 선고를 받았다. 1880년 11월 11일 아침, 멜버른 교도소에서 교수형이 집행되었다. 그의 유언은 "사는게 다 그런거지,"[5]로 알려져 있다.
3. 그외 이야기 ¶
네드 켈리는 제릴더리(Jerilderie)의 은행을 털며 편지 하나를 남겼다. "제릴더리 편지[6]"라고 불리는 이 편지는 1870년부터의 켈리 갱의 이야기를 담고 있으며 당시 호주의 경찰이 부패했다는 주장을 담고 있었다. 이 편지는 경매에 나와 빅토리아 주립 도서관이 사들였다. 전자책으로도 보게 해 주는 것 같으니 관심 있으면 클릭. 오른쪽의 View Online을 누르면 된다. 흘려쓴 영문을 읽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19세기에는 사형된 범죄자의 얼굴로 데스마스크를 만들었다. 골상학에 근거해 분석하기 위한 용도였는데, 그 이유로 네드 켈리의 데스마스크도 만들어졌다. 현재 이 데스마스크는 국립 호주 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2011년에 네드 켈리의 유해가 발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