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명 | 남진(南珍) |
본명 | 김남진(金南鎭)[1] |
출생 | 1945년[2] 9월 27일 (age(1945-09-27)세), 충청남도 부여군 |
데뷔 | 1965년 서울 플레이보이 |
신체 | O형 |
가족 | 부친 김문옥[3], 슬하 1남 3녀 |
직업 | 트로트 가수 |
종교 | 개신교 → 불교 → 개신교(장로회)[4] |
특징 ¶
원래 스탠다드 팝과 엘비스 프레슬리의 록큰롤 창법을 선호했고, 선이 굵은 저음의 남자다운 보이스를 가지고 있다.
90년대 두번째 컴백 이후로는 나이도 있고 해서 트로트 곡 위주로만 발표했지만, 60년대 중반부터 70년대 중반까지 최전성기에 트로트와 로커빌리 로큰롤을 오고 가면서 다양한 장르를 소화했다. 또한, 엘비스 프레슬리를 깊게 의식하여 엘비스를 벤치마킹 한 것도 유명하다. 그래서 그가 부르는 트로트는 다른 트로트 가수들에게서 나오는 뽕끼가 없어서 지금 들어도 중후하고 세련된 느낌이 든다.
현재는 가수로서만 기억되지만 원래 영화배우를 지망한 연극영화과 출신이었고, 전성기에는 수십편의 영화에 출연한 영화배우다. 출연작을 보면 외모로 여느 남자배우과 비교해도 빠지지 않는다.
활동 ¶
전라남도 목포에서 목포일보의 발행인이자 제5대 국회의원을 지낸 김문옥의 늦둥이 장남으로 태어난 남진은, 부유한 환경에서 어린 시절부터 연극 음악에 심취했다. 중학교때부터 닐세다카 나 폴앵카등의 팝송을 즐겨 불렀던 그는 고등학교때 서울로 전학하게 된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레스토랑에서 팝송을 불러 밴드마스터에게 가수 제의를 받게된다. 그 후 아버지는 반대했지만 대학도 연극영화과를 진학해 영화배우로서의 꿈을 꾸었다. 남진의 집안이 목포에서 상당히 부유한 집안이였는데, 경찰관들이 자전거를 타고 순찰을 돌던 시절에 일본산 오토바이를 타고 학교에 등하교를 했다고 한다. 원조 폭주족
앞서 레스토랑의 밴드 마스터로부터 당시 최고 인기가수 남일해의 곡을 만들었던 작곡가 한동훈을 소개 받고, 그로부터 자신의 음악학원에 등록하고 연습생 생활을 할것을 제의 받는다. 영화배우의 길을 꿈꿨던 그 였지만 당시 순전히 학원에 있던 여학생이 이뻐서 등록을 하고 연습생겸 연애 생활을 시작한다. 불과 몇개월 후인 1965년 드디어 첫 음반을 레코딩 하게 된다. 데뷔곡은 한동훈이 작곡한 ‘서울 푸레이보이’라는 스탠다드 팝을 연상시키는 곡이었지만 철저하게 폭망하자 실망한 그는 낙향했다.
다시 작곡가 한동훈이 당시 오아시스레코드사의 전속가수 제안을 하고, 두번째 음반을 발표했으며 첫번째 음반과 달리 방송에도 제법타고 히트 바로직전 까지 갔지만, 당시 노래 제목이 퇴폐적이라는 이유로 국가에 의해 금지곡 처분이 되었다. 금지곡이 된 타이틀 곡명은 '연애 0번지'.
두번째 음반도 실패를 하자 그는 다시 고향 목포로 낙향하여, 술로 세월을 보냈다고 한다. 그러던 중 그의 어머니가 두번째 앨범에 담긴 다른 곡인 '울려고 내가 왔나'라는 트로트 곡을 밀면서 이 곡으로 다시 도전할것을 권유했다. 이 곡은 2집 레코딩 중 작곡가인 김영광이 남진에게 부르게 했으나, 남진이 트로트 부르기가 창피 하다는 이유로 거절했던 곡이었다. 이에 김영광이 그래도 노래가 아까우니 내가 불러서 곁다리로 음반 맨 끝에 넣겠다 라고 했으나, 그가 사정이 생겨 녹음 시간에 오지 못하게 됐다. 어쩔수 없이 곡 수는 채워야 했기에 남진은 내키지는 않지만 녹음해서 앨범 맨끝에 집어 넣었는데 이 곡이 그야말로 대 히트를 치면서 남진이란 이름을 대중에게 널리 알리게 된다.
트로트를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일단 트로트 곡으로 이름을 알린 그는 이듬해인 1966년 박춘석이 작곡한 '가슴아프게' 가 최고의 인기를 누리면서, 그 해 MBC 신인가수상을 수상했다. 이때부터 남진은 영화배우로도 대활약 하게 되며 가요계와 영화계를 넘나드는 빅스타의 자리에 올랐다.
그 후에 나온 로커빌리 스타일의 불멸의 히트곡인 '마음이 고와야지' 는 그를 단순히 트로트 가수로만 국한 시키지 않고, 가요계의 독보적인 캐릭터로 인정 받는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잘생긴 얼굴, 그리고 엘비스 프레슬리를 모방한 창법과 무대 액션에 당시의 소녀 팬들은 열광하기 시작했고, 이 는 그 후 '그대여 변치 마오', '님과함께' 같은 대표곡으로 이어졌다..
한창 인기를 누리고 있던 때인 1969년에 해병대에 입대했고 이후 베트남전에도 파병되었다. 남진이 무릎팍도사에서 말한 바에 따르면, 원래 1년간 파병가기로 되어 있었지만 귀국해서 베트남에서 동료들이 죽어가는 것을 지켜보고만 있는 것은 대한남아에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해서 여단장에게 부탁해서 2년간 파병생활을 하게 됐다고 한다. 수많은 동료들의 전사를 겪으면서 사람은 죽으면 다 똑같다라는 사실이 와 닿았다고 한다. 언론에 나온 월남전에 파병된 남진의 모습을 담은 사진은 파병초기에 촬영된 것이라고 한다. 베트남의 날씨가 너무 더워서 나중에는 군복을 제대로 입을 수 없었다고 한다. 남진의 인터뷰에 따르면 베트남에서 몇 차례 죽음의 위기를 넘기기도 했다고 한다. # [5]
근데 남진이 월남전에 파병된 실제 이유는, 해병대 입대 후 군무를 완전히 이탈하여 자기 집에 돌아가 평소처럼 집에서 지내며 연예활동을 계속 하는 등 어처구니 없을 정도의 군복무위반 비리를 저지르다가 군 수사당국에게 들통나서 그 벌로 베트남에 강제로 보내진 거였다고 당시엔 보도됐었다. 남진 외에도 진송남, 박일남 등 당시 해병대 소속이던 10여명의 연예인들이 해병대 간부들의 비호 아래 모두 그런 혜택을 봤던 조직적인 비리였다. 당시 그 사건을 보도한 뉴스 기사 링크들 기사1, 기사2 44년뒤에 비슷한 일이 발생한다 베트남에서도 실은 전투병이 아니라 오늘날의 용어로 치면 연예병사로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저 사건에서 해병대 복무 중에도 집에서 지내고 왔다갔다 하며 자유롭게 연예활동을 한 것은 남진 등 해당 연예인들이 군율을 어기는 잘못을 한게 아니라 해병대측의 약속과 비호에 따른 행위였을 뿐이었다[6]. 애초에 해병대가 군복무 중에도 계속 연예계 활동을 할 수 있도록 보장해 주는걸 약속하고 그 조건으로 스타들의 "해병대 연예대" 입단을 추진하여 해병대 연예부대의 구성원을 유명스타들로 빵빵하게 채운 것이었다. 즉 유명 연예인들을 해병대로 데리고 오기 위해 파격적인 조건과 대우를 걸고 스카웃한 것이었다. 근데 모 신문사 회장이 자기 딸의 생일파티에 당시 해병대 일병이던 남진을 포함한 연예병사 5명을 초청했지만 군인 신분에 사적인 초대이기에 거절했고, 이에 신문기사를 통해 군복무 중에도 사회에서 연예계 활동을 계속 해왔던 것을 폭로하는 보복성 기사를 보도한 것이었다고 박일남이 티비쇼에서 밝혔다. 해병대측이 당초 약속하여 보장한 바에 따른 연예인 활동이었을 뿐이었다는 원인 내용은 쑥 빼버리고 자유로운 사적생활과 연예계 활동을 했다는 결과만 폭로한 이 보도가 나가서 남진 등의 연예인과 해병대에 대한 여론이 악화되자 이를 무마시키기 위해 해병대 고위간부들이 국내 연예활동을 보장했던 당초의 약속을 뒤집고 베트남으로 파병시켜버린 것이었다.
최고의 순간에 군대행을 택하고 해병대의 모습으로 월남전까지 갔다 온 그는 묘하게도 그가 벤치마킹한 엘비스 프레슬리의 행보와도 매우 닮아 있었다. 이는 69년 그가 베트남 에 있던 시기에도 TBC에서 최고남자가수상을 수상한다
엘비스는 1950년대 후반 로큰롤 음악이 기성 사회로부터 집중 공격을 받고 몰락 위기에 빠지자, 군대에 자원 입대하여 (당시에는 이미 미국에서 징병제가 중단된 상황이었지만 한국 전쟁이 끝난지 몇년 안 된 시점이었고 제 2차 세계대전이 끝난지 10년 정도 되는 시점이어서 군대에 가는 것이 이상한 것도 아니었고, 오히려 애국심도 있고 책임감 있는 젊은이들은 군대에 자원해서 가는 경우가 꽤 있었다.) 이미지 쇄신을 노린 바 있다. 그 이후 G.I. Blues라는 곡과 동명의 영화를 발표하면서 "성실한 미국인 젊은이"의 이미지로 거듭났다. 남진 역시 엘비스의 G.I. Blues를 한국어로 번안하여 불렀다. 그리고 1973년 하와이 공연때 엘비스가 입었던 점프수트를 매니저가 직접 미국까지 가서 엘비스 프레슬리의 매니저를 직접 만나서 구해온 것도 유명하다
엘비스는 1950년대 후반 로큰롤 음악이 기성 사회로부터 집중 공격을 받고 몰락 위기에 빠지자, 군대에 자원 입대하여 (당시에는 이미 미국에서 징병제가 중단된 상황이었지만 한국 전쟁이 끝난지 몇년 안 된 시점이었고 제 2차 세계대전이 끝난지 10년 정도 되는 시점이어서 군대에 가는 것이 이상한 것도 아니었고, 오히려 애국심도 있고 책임감 있는 젊은이들은 군대에 자원해서 가는 경우가 꽤 있었다.) 이미지 쇄신을 노린 바 있다. 그 이후 G.I. Blues라는 곡과 동명의 영화를 발표하면서 "성실한 미국인 젊은이"의 이미지로 거듭났다. 남진 역시 엘비스의 G.I. Blues를 한국어로 번안하여 불렀다. 그리고 1973년 하와이 공연때 엘비스가 입었던 점프수트를 매니저가 직접 미국까지 가서 엘비스 프레슬리의 매니저를 직접 만나서 구해온 것도 유명하다
71년 군 제대후 국내에 돌아와 보니, 자신의 영혼의 파트너 박춘석이 라이벌 나훈아와 손을 잡고 '물레방아 도는데' 등의 히트곡을 쏟아내는 중이라 이쪽과의 협력은 접고 다른 파트너(남국인)를 찾아 곡을 받고 다시 정상의 반열에 서게 되는데 그 노래가 바로 남진의 최고 히트곡 중 하나인 '님과 함께'였다. 제대후에 더욱 폭발적인 사랑을 받게 된 그는 국내 가수 최초로 서울 시민회관에서 귀국 기념 공연을 열었고 컴백 4개월만에 TBC 남자가수상과 MBC 최고 가수상에 오른다.
언론은 그의 컴백과 더불어 당시 촉망받는 신인인 나훈아와의 라이벌 구도를 만들어 냈다. 하지만 초기 3년간은 남진이 내리 3연속 가수상을 타며 나훈아를 완전히 압도했다.
1976년에 윤복희와 결혼하여 화제를 끌었지만 1979년 법적 이혼을 하고[7] 1980년대 신군부의 등장으로 조직적으로 탄압받으며 미국으로 가게 된다. 조용필 등 후진들이 치고 올라온 탓도 있다... 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이거는 한참 나중 일이고, 김대중과 친분이 있는 집안 자손이라는 이유로 아예 방송 출연을 금지시킨 탓이 훨씬 크다. 김대중이 학생 때 남진 아버지가 운영하던 목포일보에서 사장상을 받았고, 그 외에도 남진 아버지 덕[8]을 많이 봤다고 한다. 목포에 내려가면 항상 남진 아버지 집에 묵었다고. 1990년대에 국내로 다시 복귀했다.
1980년대 이후 태어난 세대에겐 가수만로 알려져서인지 오랜만에 영화 대한민국 헌법 제1조에 집창촌 부근 성당의 욕쟁이 주임신부 역할로 출연하자 "남진이 영화에도 나온다"는 얘기가 돌았는데, 이미 전성기이던 1970년대에 히트곡의 이름을 딴 님과 함께 등 수십 편의 영화에 출연한 적이 있어서 가수 겸 배우라고 해도 문제가 없다. 물론 잘 생긴 얼굴과 큰 인기 덕에 영화에도 나온 거고 배우로서는 연기가 좋다고 할 수 없어 별다른 성과가 없긴 하였지만. 나훈아도 인기빨(..)로 연기를 몇번 한 적 있는데, 이 두 사람은 '어머님 생전에(1973년)'같은 영화에 나란히 출연하기도 했다.
1989년에 조폭에게 칼로 허벅지를 찔리는 큰 부상을 입었으며, 지금도 한쪽 다리가 불편하다고 한다.## 허벅지에는 큰 동맥이 지나가는 곳이라, 조금만 옆으로 맞았으면 그 자리에서 사망할 수도 있었다고. 그래도 여전히 허리는 튼튼하다
21세기에도 방송에서 다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2000년에 낸 "둥지"가 대표적. "신비주의" 컨셉의 나훈아와 대비된다. 2008년 이후 나훈아가 모종의 섹시코만도 바지 사건 이후 활동을 중단하면서 최근 더욱 두드러진다. 본업인 가수로서 각 지방 공연은 2018년 현재에도 쉬지 않고 꾸준히 하고 있으며, 곧잘 매진이 되고 있다. [9]
대표곡 ¶
이야깃거리 ¶
비슷한 시기의 인기가수 나훈아와 여러면에서 상반된 이미지로 활동했는데, 나훈아가 시골의 정서나 고향의 향수를 노래했다면, 남진은 철저히 도시에서 벌어지는 에피소드나 도시의 느낌을 다룬 노래로 유명했다. 또 나훈아는 선원인 아버지를 둔 부산의 평범한 집안이었고 남진은 목포의 부유한 집안이라는 출신의 차이도 있다. 나훈아가 프로필에 자신의 생년월일을 1947년 2월 11일이라고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1950년생이라고 주장하는 등 아직도 애증이 남아있다. 덤으로 지역드립도 오죽하면 신문에서도 두 사람을 대놓고 비교하는 칼럼을 시리즈로 실으면서 두 가수 팬덤간의 견제와 싸움을 부추겼다.
전체적으로 남진은 저음의 목소리에 수려한 외모를 가진 타고난 슈퍼스타로서 높은 대중성으로 가요대상을 매년 수상했고, 나훈아는 투박한 외모에 간드러지는 목소리를 가졌다. 지금은 라이벌로 비교 되는 2명이지만 남진이 인지도를 얻게 된 것은 나훈아보다는 한참 앞서고 라이벌이라고 불리게 된 건 1970년대에 들어서이다.
베트남 파병당시 어머니가 보내주신 파김치(담그자마자 부쳤는데 오는 도중에 다 쉬어버린...)를 동료들과 싸워가며 잘때도 끌어안고 아껴 먹었다고 한다. 평생 그렇게 맛있는 음식은 다시 먹어본 일이 없었다고.
영화 국제시장에서 아이돌그룹 동방신기의 멤버 유노윤호가 1970년대의 아이콘이자, 당대의 아이돌 스타였던 가수 남진의 베트남전 참전 시절을 연기했다. 작중에서는 전투기술 면에서 상당한 베테랑인 것으로 나온다.[10] 능숙한 전라도 사투리와 털털하고 정감있는 캐릭터로 영화에 활력을 더했다는 호평을 받았다. 베트남 전쟁으로 파견을 간 주인공들을 위기에서 구해주는데 작 중 주인공 윤덕수(황정민 분)의 생명의 은인[11]이라 현재 장면에서 나훈아 팬인 부인한테 "가수는 남진!"이라고 주장하며 언쟁한다. 덤으로 끝순이 남편이 나훈아랑 닮아서 더욱 질색하는 듯...
한때 콘서트 홍보 포스터의 영어 문구 때문에 온라인에서 화제가 된 적이 있다.
대한가수협회의 초대 협회장을 맡은 적이 있으며, 벤츠 S63AMG 쿠페의 오너다. 벤츠를 워낙 좋아해서 S63AMG 말고도 마이바흐와 G바겐 등 6~7대의 벤츠 차량을 더 보유하고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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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여담으로, 동명이인의 배우가 있다.
- [2] [프로필상 46년이라 되어 있으나 완벽히 잘못된 정보이다. 본인이 운전면허증을 제시하면서 45년생이라고 직접 밝혔다.]
- [3] 金文玉. 1896년에 태어나 1966년 7월 7일에 사망했으며 제5대 국회의원으로, 호남매일신문사 사장을 지냈다.
- [4] 1993년에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면서 잠시 불교로 개종했다가 2000년대 이후에 다시 개신교로 재개종했다. 개종 직후에는 평강제일교회에 다녔다가 이단 논란으로 인해 죽전 새에덴교회로 옮겼다. 2017년 새에덴교회 장로로 임명되었다.
- [5] 영화 국제시장에도 해병대원 시절의 남진이 잠깐 등장한다. 참고로 이 영화에서 청년 남진의 역할을 맡은 배우는 동방신기의 멤버인 유노윤호이다.
- [6] 해병대 부대측이 허락하고 보장해주지 않으면 현역 군인이 밖에서 생활하며 연예계 등 사회활동하는건 당연히 불가능하다.
- [7] 윤복희가 이 이혼에 대해서 무릎팍도사에 나와서 사정을 털어놨는데 이게 전부 사실이라면 남진은
정우성을 능가하는엄청난호구대인배인 셈이다.# - [8] 대표적으로 국회의원 지역구를 물려받았다.
- [9] 방송에 자주 나오는 아이돌 가수와 트로트 가수는 팬 층의 두께가 다르다.
- [10] 물론, 시대상으로 배경은 고증오류다.
- [11] 두 번이나 구해주는데 한번은 베트콩에게 사로잡히려는 찰나에 베트콩들을 사살해 구출해 줬고 물에 빠진 베트남 소녀를 구하려다 베트콩이 쏜 총에 맞고 강물에 빠졌을 때 이를 구해준 것도 남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