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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체의 마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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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준규(1925) . . . . 13회 일치
         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경상북도 [[달성군]]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조재천]]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58년 [[제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1955년)|민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자유당]] [[김성곤]]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60년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당시 민주당 구파에 속하였으마 같은 해 말 민주당 구파 소속 정치인들과 민주당을 탈당하여 [[신민당(1960년)|신민당]]을 창당하였다.
         1963년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공화당(1963년)|민주공화당]] 후보로 [[서울특별시]] [[성동구]] 을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65년부터 1969년까지 [[대한민국 국회]] 외무위원장을 역임하였다. 1967년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민주공화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그러나 1971년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공화당 후보로 서울특별시 성동구 병 선거구에 출마하였다가 [[신민당(1967년)|신민당]] [[정운갑]]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그 해 [[10.2 항명 파동]]으로 [[중앙정보부]]에서 [[고문]]당한 [[김성곤]]이 [[대한민국 국회의원|국회의원]]직을 사퇴하여 치러진 경상북도 달성군-[[고령군]] 선거구 재보궐선거에서 민주공화당 후보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73년 [[제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공화당 후보로 경상북도 달성군-고령군-[[경산시|경산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친여 무소속 [[박주현(1923)|박주현]] 후보와 동반 당선되었다. 같은 해부터 1979년까지 민주공화당 정책위의장을 역임하였다. 1978년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공화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신민당 [[김종기]] 후보와 동반 당선되었다. 1979년 민주공화당 당의장에 임명되었다.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정의당]] 후보로 대구직할시 [[동구(대구)|동구]] 선거구에 출마하여 [[통일민주당]] [[목요상]] 후보를 꺾고 당선되었다. 1989년 1월 민주정의당 대표위원에 임명되어 1년 동안 재임하였다. 1990년부터 1992년까지 13대 국회 후반기 [[국회의장]]을 역임하였다.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자유당]] 후보로 대구직할시 동구 을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고, 14대 국회가 개원하자 13대 후반기에 이어 다시 [[국회의장]]에 선출되었다. 그러나 1993년 [[김영삼]] 정권이 출범하여 공직자 재산 공개를 할 때 재산이 문제가 되어 국회의원직을 사퇴하였다.이후 1995년 [[김종필]]이 [[자유민주연합]]을 창당하자 그와 손을 잡고 자민련에 합류하여 당 최고고문이 되었다.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자유민주연합|자민련]] 후보로 대구광역시 [[중구(대구)|중구]] 선거구에 출마하여 [[신한국당]] [[유성환]] 후보를 꺾고 당선되었다. [[박철언]]과 함께 자민련 내 대구경북세력을 대표했으며, 1997년 [[제15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DJP 연합을 성사시키는 데 적극적으로 앞장섰는데, 이는 박준규가 1공화국과 2공화국 시절 [[김대중]]과 함께 [[민주당(1955년)|민주당]]에 몸을 담고 친밀한 관계를 맺어온 데 기인한다.~~하지만 김대중은 신파, 박준규는 구파~~ [[대한민국 제3공화국|제3공화국]]이 출범하면서 박준규는 여당으로, 김대중은 야당으로 진로를 달리 했지만 인간관계는 계속 유지되었다. 박준규의 활약은 대구경북에서 [[김대중]]의 득표율이 상승하는 데(8.7%에서 13.1%로 상승) 기여했다. 이러한 공로에다 김대중과의 친밀한 관계 덕분에 15대 국회 후반기 국회의장 선거에서 공동여당인 [[새정치국민회의|국민회의]]와 [[자유민주연합|자민련]]의 국회의장 단일후보로 지명되었고, [[경선]]에서 무려 3차 투표까지 간끝에 당시 [[한나라당]]의 반란표가 쏟아져 나오며 국회의장에 당선될 수 있었다. 박준규는 이로써 의정 사상 최초로 국회의장 3선의 고지에 올랐다. 반면 [[한나라당]]은 [[오세응]]이 후보로 출마하였으나 패배하고 [[조순(1928)|조순]] 총재 이하 지도부 전원이 국회의장 선거 패배의 책임을 지고 총사퇴하는 후유증을 겪어야 했다.
  • 나체의 마하 . . . . 10회 일치
         [[스페인]]의 화가 [[프란시스코 고야]]의 명화. 스페인의 재상 [[마누엘 고도이]]의 주문으로 제작되었으며, 나체의 여성이 누워 있는 누드화이다. 짝을 이루는 그림으로 같은 여성을 모델로 한 [[옷을 입은 마하]]가 있다.
          * 당시 누드화는 누드의 '미美'를 드러내기 위하여 [[여신]]이나 고전 조각상 같은 완벽한 인체비례를 추구하였다. 하지만 나체의 마하는 그냥 일반 여성의 관능적인 누드를 드러내고 있다.
          * '''[[음모]]를 그렸다'''. 중세의 윤리관으로 체모 등은 남성의 욕망을 자극한다고 보아 금기시 되었고, 여성의 음모는 나체라고 해도 순수한 미에 방해가 된다고 보고 그리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었기 때문에 나체의 마하에서 음모를 그린 것은 매우 파격적인 사례였다.
         [[마누엘 고도이]]가 실각된 이후에 고도이의 재산이 몰수되면서 나체의 마하도 발견되었는데 이 그림 때문에 고야는 종교재판을 받게 되었다. 다행히 신임 국왕 [[페르난도 7세]]가 고야를 총애했기 때문에 무사할 수 있었다. 이 때 똑같이 고도이가 소장하고 있던 벨라스케스의 [[거울을 보는 비너스]] 역시 몰수당했는데, 같은 누드화라도 옆에 [[천사]]를 그려놓고 [[여신]]을 그린 그림이라 괜찮았다고 한다(…).
         나체의 마하의 모델이 누구인가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다. 당시 스페인의 권력자였던 [[알바 공작부인]]이라는 설이 있다. 스페인에서는 유해검사까지 했다고 한다.
  • 김영환(1955) . . . . 8회 일치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새정치국민회의]] 후보로 [[경기도]] [[안산시]] 갑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같은 해 새정치국민회의 정세분석실장에 임명되었다.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새천년민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이후 새천년민주당 대변인을 역임하였다. 2001년부터 2002년까지 과학기술부(현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을 역임하였다. 2003년 [[열린우리당]] 분당 때 따라가지 않았다.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새천년민주당 후보로 경기도 안산시 [[상록구]] 갑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열린우리당 [[장경수]]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2006년에는 [[민주당(2005년)|민주당]] 서울시장 후보로 출마하려고 하였으나, [[박주선]] 의원이 전략공천되면서 경선을 요구하며 당 지도부와 갈등을 빚기도 했다. 2007년에는 [[이인제]] 민주당 대선후보의 충청선대위원장을 역임하였다. 2008년 1월 [[민주당(2005년)|민주당]]을 탈당하여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한나라당]] [[이화수]]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열린우리당 계열과의 반목이 심했던 터라, 합당에 반발하여, 한나라당 입당도 진지하게 검토했다고 한다.] 이후 [[민주당(2008년)|민주당]]에 복당하였다.
         [[2009년 재보궐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경기도 안산시 상록구 을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2010년에 재산신고를 -8.2억으로 해서 보유재산 국회 최하위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다만 부채액이 많아서 -8.2억인 것이고, 이후 19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부동산을 공시지가가 아닌 실거래가로 신고해서 1억원 정도로 신고했다. ~~그리고 2018년 지방선거를 거하게 망해서 수십억대의 부채가 추가~~][* 2008년 기준으로 최하위는 이회창 자유선진당 총재로, 대선자금을 선관위에서 환급받기 이전이어서 -120억원을 신고했다. 이후 선거비용을 환급받으면서 30억대로 재산이 다시 늘어났다. 2009년에는 서청원 친박연대 대표가 1억 438만원, 2010년에 김영환 의원이 -8억원, 2011년에 자유선진당 김창수 의원이 1억 500만원을 기록하여 최하위를 기록했다.] 이후 [[4대강 정비 사업]]을 강력히 비판하였다. 2010년부터 2012년까지 [[대한민국 국회]] 지식경제위원장을 역임하였다.
         2012년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통합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2016년 1월 8일 탈당하고 [[국민의당(2016년)|국민의당]] 합류를 선언했다. 2016년 초 국민의당 인재영입위원장을 역임하였다. 당시 총선 전 국민의당 지지율이 마구 떨어지면서 도로 민주당으로 합류하자는 의견이 거셀 때 국회의원 중 거의 홀로 국민의당을 지키자는 주장을 펼치기도 했다.
         2016년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국민의당 후보로 경기도 안산시 상록구 을 선거구에 출마하였다. 선거 이전에는 [[새누리당]] 후보인 [[홍장표(정치인)|홍장표]] 후보와의 양자대결에서 패배할거라는 여론조사와, 김철민 후보와 홍장표 후보와의 양자대결에서는 김철민 후보가 승리할 것이라는 여론조사 결과와 3당구도로 가면 홍장표 의원이 오차범위의 한참 밖에서 안전한 당선이 가능하다는 결과치가 나왔기 때문에 김철민 더불어민주당 후보와 단일화를 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왔다. 그러나 결국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당의 후보 단일화는 무산되었고, 3파전이 되었다.
  • 김기철 . . . . 7회 일치
         [[8.15 광복]] 후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충주군 청년연맹위원장, 대동청년단 충주군단장 등을 역임하였다. 1948년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서 [[대동청년단]] 후보로 충청북도 충주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무소속 [[조대연]]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자유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현역]] [[지역구]] [[대한민국 국회의원|국회의원]]인 무소속 조대연 후보를 꺾고 당선되었다. 그러나 이후 [[이승만]] [[대한민국 대통령|대통령]]의 독재에 반대하여 자유당을 탈당하여 [[민주당(1955년)|민주당]]에 입당하였다. 1958년 [[제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충청북도 충주시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자유당 홍병각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60년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충청북도 [[충주시]]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같은 해 8월부터 1961년 5월까지 농림부(현 [[농림축산식품부]]) 정무[[차관]]을 역임하였다.
         [[5.16 군사정변]] 이후 치러진 1963년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충청북도 충주시-중원군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자유민주당(대한민국)|자유민주당]] [[이희승(1913)|이희승]]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이후 [[민중당(1965년)|민중당]]에 몸담았다가 1967년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민당(1967년)|신민당]] 공천에서 탈락하자 재건 민주당 전국구 국회의원으로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다. 이후 다시 신민당에 몸담았다.
  • 김만수(정치인) . . . . 7회 일치
         1992년 [[민주당(1991년)|민주당]] [[원혜영]] [[대한민국 국회의원|국회의원]]의 보좌관으로 정치에 입문하였다. 1995년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 1998년 [[제2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경기도]] 부천시의회 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2003년 [[청와대]] [[대통령비서실]] 춘추관장을 지냈다.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열린우리당]] 후보로 경기도 부천시 [[소사구]]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현역]] [[지역구]] 국회의원인 [[한나라당]] [[김문수]]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언론에서는 이를 두고 '''문수 대 만수'''라는 드립을 쳤다.(...) 원래 시의원일 때도 지역구가 오정구에 속한 원종2동이었지만, 오정구는 자신이 모신 [[원혜영]]이 철옹성처럼 지키고 있어서 결국 김문수가 지키고 있는 소사 지역구를 선택해야 했다. 그리고 이때는 김문수가 아직 개념잡고 국회의원으로서 의정활동 성실히 하고 지역구 관리 아주 제대로 하던 때였으니 탄핵풍을 등에 업었음에도 도저히 상대가 안되었다.
         2005년 청와대 대통령비서실 대변인을 지냈다. 김문수가 ~~[[도지삽니다]]~~도지사 선거에 출마하면서 생긴 [[2006년 재보궐선거]]에서 열린우리당 후보로 출마했으나 집권여당의 인기가 최악이어서 낙선, 2008년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2008년)|통합민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2008년은 뉴타운 광풍으로 인해 민주당계 정당이 역대 최악의 패배를 당한 선거여서 김만수 역시도 그 광풍을 빗겨가지 못했다. 2006년과 2008년 모두 김문수의 보좌관 출신으로써 지역구를 물려받은 한나라당 [[차명진(정치인)|차명진]]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다만 실제로는 차명진 전 국회의원과 절친한 사이라고 한다. 2010년에 부천시장으로 당선되었을때 당이 다름에도 차명진 당시 의원이 축하 연설을 해 주기도 했다.
         2010년 [[제5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시장으로 방향을 바꿔, [[민주당(2008년)|민주당]] 후보로 경기도 부천[[시장(공무원)|시장]] 선거에 출마하여 현직 시장인 한나라당 [[홍건표]] 후보를 꺾고 당선되었다. 본래는 3차례 연속 낙선을 하고 정치는 자신의 길이 아닌 것으로 추정하고 정계 은퇴까지 고려했으나, 자신이 모셨던 노무현 대통령의 서거를 계기로 다시 일어섰다고 당선 인터뷰에서 회고했다. 실제로 노무현 대통령 서거로 인한 여론의 반전과, 현직 시장이었던 홍건표의 연이은 실정으로 인한 심판론으로 인해 22%, 7만표 차이라는 엄청난 차이로 당선되었고, 드디어 선거 첫 승리를 맛봤다.
         2014년 [[제6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새정치민주연합]] 후보로 역시 경기도 부천시장 선거에 출마하여 부천 토박이 출신인 전 경기도의원 [[새누리당]]의 이재진 후보를 꺾고 재선에 성공하였다.
         2018년 지방선거에서는 3선 불출마를 선언했다. 경기도지사 출마 혹은 2020년 21대 총선에서 부천 지역 출마를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는 해석이다. 다만 경기도지사에 출마하려면 3월까지 시장직을 사퇴하여야 하는데, 본인이 임기를 다 마치지 않고 중도사퇴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여러 번 공헌했고, 실제로 공직자 사퇴시한까지 시장직을 유지하면서 차기 총선 출마 쪽으로 가게 되었다. 아무래도 자신의 본래 지역구였던 소사구의 현직 국회의원인 김상희나, 자신의 선임이었던 오정구 국회의원 원혜영, 서울에서 부천 원미구 을로 옮겨온 동교동계 중진 설훈 의원 모두 고령이라 다음 총선 공천이 불투명한 상황이라, 일찌감치 지방선거 불출마를 선언하고 네 번째 국회의원 도전을 준비하는 것. 아마도 본래 지역구가 소사구였던 지라 차명진 전 의원과의 3번째 대결이 유력할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본인이 시장직을 재임하면서 2016년 일반구를 폐지했기 때문에 갑을병정식으로 선거구 명칭 변경은 물론 선거구 변동이 일어날 가능성도 있다.
  • 박기환(정치인) . . . . 7회 일치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통일민주당]] 후보로 경상북도 영일군-[[울릉군]]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민주정의당]] [[이상득]]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90년 [[3당 합당]] 때 [[민주자유당]]에 합류하지 않고 [[민주당(1990년)|꼬마민주당]]에 잔류하였다.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1991년)|민주당]] 후보로 경상북도 포항시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친여 [[무소속]] [[허화평]]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95년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경상북도 포항시장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97년 [[제15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민주당의 후신 [[통합민주당(1995년)|통합민주당]]이 [[신한국당]]에 흡수되어 [[한나라당]]이 되자 한나라당에 속하였다.
         1998년 [[제2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한나라당을 탈당하여 [[자유민주연합]] 후보로 포항시장 선거에 출마하였으나 한나라당 [[정장식]]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2002년 [[제3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무소속으로 포항시장 선거에 출마하였으나 한나라당 정장식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열린우리당]] 후보로 경상북도 포항시 [[남구(포항)|남구]]-울릉군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한나라당 이상득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2006년 [[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무소속으로 포항시장 선거에 출마하였으나 한나라당 [[박승호(정치인)|박승호]]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 박희부 . . . . 7회 일치
         1980년 [[전두환]] 정권이 출범하자 정치규제를 당하였다가 1984년 해금되었다. 1985년 [[제1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한민주당]] 후보로 충청남도 연기군-[[대덕구|대덕군]]-[[금산군]]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민주정의당]] [[천영성]] 후보와 [[민주한국당]] [[유한열]]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9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통일민주당]] 후보로 충청남도 연기군-대덕군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신민주공화당]] [[이인구]]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90년 [[3당 합당]]으로 [[민주자유당]]이 출범할 때 합류하였다.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자유당 [[공천]]을 받지 못하자 [[통일국민당]] 후보로 충청남도 연기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같은 해 치러진 [[제14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통일국민당을 탈당하여 민주자유당에 복당하였다. 이후 민주자유당, [[신한국당]]에서 원내부총무를 임명하였다.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한국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자유민주연합]] 김고성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97년 한보그룹 비리로 구속되었다.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국민당(2000년)|민주국민당]] 후보로 충청남도 [[공주시]]-연기군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자유민주연합 [[정진석(정치인)|정진석]]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새천년민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열린우리당]] [[오시덕]]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2007년 [[제17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한나라당]] [[대한민국 대통령|대통령]] 후보 [[경선]] [[전당대회]]에서 [[박근혜]]를 지지하였다.
         2012년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새누리당]] [[공천]]에서 탈락하자 [[무소속]]으로 세종특별자치시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민주통합당]] [[이해찬]]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같은 해 치러진 [[제18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김덕룡]], [[문정수]], [[심완구]], [[강삼재]], [[이신범]], [[김정수(정치인)|김정수]], [[최기선]] 등과 민주통합당 [[문재인]] 후보를 지지하였다.
  • 안동준 . . . . 7회 일치
         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자유당]] 후보로 충청북도 괴산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현역]] [[지역구]] [[대한민국 국회의원|국회의원]]인 [[무소속]] [[연병호]] 후보를 꺾고 당선되었다. 1956년부터 1958년까지 [[대한민국 국회]] [[국방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하였다. 1958년 제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김원태]]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60년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자유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그러나 1961년 초에 이승만 정권 때의 행적을 이유로 반민주행위자로 결정되어 국회의원직이 상실되었다.
         1963년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공화당(1963년)|민주공화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67년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공화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같은 해 [[대한민국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위원장에 임명되었다. 1971년 국제관광공사 [[총재]]에 임명되었다.
         1973년 [[제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공화당에 충청북도 [[진천군]]-[[음성군]]-괴산군 선거구로 공천 신청을 하였으나 탈락하자 [[무소속]]으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였다. 그러나 민주공화당 [[김원태]] 후보와 [[신민당(1967년)|신민당]] [[이충환]]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78년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무소속으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민주공화당 [[오용운]] 후보와 신민당 이충환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 한창희(전공기업인) . . . . 7회 일치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한나라당]] 후보로 충청북도 충주시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새천년민주당]] [[이원성]]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한나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열린우리당]] [[이시종]]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이시종의 충주시장직 사임으로 치러진 [[재보궐선거]]에서 한나라당 후보로 충주시장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2006년 [[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도 한나라당 후보로 충주시장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그러나 [[공직선거법]] 위반으로 같은 해 9월 충주시장직을 상실하였다. [* 한나라에서 [[영구제명]]되어 아직까지도 복당이 안된다. 2014년 [[새정치민주연합]](현:[[더민주]])으로 소속을 바꿨다고 한다.출처:[[http://blog.naver.com/choongjuhan/90195670102]] ]2011년 4월 [[한국농어촌공사]] [[감사]]로 임명되었다.
         [[우건도]]의 충주시장직 상실로 치러진 [[2011년 하반기 재보궐선거]]에서 [[무소속]]으로 충주시장 선거에 출마하였으나 한나라당 (현 한국당)[[이종배]]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2014년 [[제6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새정치민주연합]] 후보로 충주시장 선거에 출마하였으나 [[새누리당]](현 한국당) [[조길형(1962)|조길형]]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윤진식의 국회의원직 사퇴로 치러진 [[2014년 상반기 재보궐선거]]에서 새정치민주연합 후보로 충청북도 충주시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새누리당 [[이종배]]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 김승목 . . . . 6회 일치
         1959년 [[민주당(1955년)|민주당]] [[박순천]] [[대한민국 국회의원|국회의원]]의 비서관으로 일하면서 정계에 입문하였다. 1971년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박기출]]의 뒤를 이어 [[부산광역시|부산직할시]] [[동구(부산)|동구]]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73년 [[제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김영삼]]과 신민당 복수공천을 받아 부산직할시 [[서구(부산)|서구]]-동구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김영삼과 [[민주공화당(1963년)|민주공화당]] [[박찬종]] 후보에 밀려 3위 이하 득표로 낙선하였다. 1974년 [[정일형]] 등이 화요회라는 계보를 창설하자 화요회에 속하였다. 1978년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부산직할시 [[남구(부산)|남구]] 선거구에 출마하여 민주공화당 [[김재홍(1932)|김재홍]] 후보와 동반 당선되었다.
         1981년 [[제1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한국당]] 후보로 부산직할시 [[해운대구]]-남구 선거구에 출마하여 [[민주정의당]] [[이흥수(1928)|이흥수]] 후보와 동반 당선되었다. 1985년 [[제1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한국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신한민주당]] [[이기택]] 후보와 민주정의당 [[유흥수]]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평화민주당]] 후보로 [[서울특별시]] [[마포구]]을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통일민주당]] [[강신옥]]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민주당(1991년)|민주당]] 공천에서 [[김현규]]에 밀려 탈락하였다.
  • 윤진식(국회의원) . . . . 6회 일치
         2007년 [[제17대 대통령 선거]] 직후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산하 국가경쟁력강화특별위원회 부위원장, 대통령직인수위원회 투자유치TF팀 팀장 등을 역임하며 정치적 노선을 변경하였다. --[[우디르|윤진식급 태세전환]]-- 2008년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한나라당]] 후보로 충청북도 충주시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민주당(2008년)|통합민주당]] [[이시종]]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그래도 이때 일방적으로 패할 것이란 여론조사 예측을 깨고 이시종과 2% 차의 격전을 벌여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이후 한국투자금융지주 [[회장]], 대통령실(현 [[대통령비서실]]) 경제[[수석비서관]], 대통령실 정책실장 등을 역임하였다. 여담으로 이시종은 [[민주자유당]]-[[신한국당]]-[[한나라당]]에서 충주시장을 맡았으나, 2003년 돌연 시장직을 사퇴하고 한나라당을 탈당했으며, 2004년 [[열린우리당]]에 들어간 이후 지금까지 [[더불어민주당]] 소속이다.
         2010년 이시종이 [[제5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충청북도지사]] 선거에 출마하기 위해 [[국회의원]]직을 사임하여 치러진 [[2010년 재보궐선거|재보궐선거]]에서 한나라당 후보로 충청북도 충주시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2012년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새누리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같은 해부터 2013년까지 새누리당 충청북도당 위원장을 역임하였다.
         2014년 [[제6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새누리당 후보로 충청북도지사 선거에 출마하였다. 이는 2010년에 제대로 참패한 새누리당의 전략적 선택이었는데, 2010년 당시 [[정우택]] 후보는 나름 중진이고 거물임에도 인구가 적은 진천이 출신지여서 '''충주 출신의 이시종'''에게 그야말로 처참히 발렸다. 이때 정우택은 이시종에게 36,267표차로 졌는데 청주권(구 청주시, 청원군)에서 29,606표차, 이시종의 텃밭 '''충주에서 23,963표차'''로 패했다. 때문에 새누리당은 같은 충주 출신인 윤진식으로 맞불을 놓은 것.(사실 다른 경선 후보들이 모두 중도하차하면서 후보가 윤진식 혼자밖에 남지 않았던 탓도 있다)
         이후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에는 출마하지 않았다. 충주 지역구는 자신의 후임인 [[이종배]] 의원이 지키고 있어 뺏는 모양새가 안 좋았고, 청주권은 오랜 기간 자리를 지킨 후보들이 많아서 밀고 들어가기 어려웠던 탓이다.~~그런데 청주권에선 정우택 의원 하나 살고 새누리당 모두 낙선~~
  • 이갑성 . . . . 6회 일치
         [[1947년]] [[10월]] [[미군정]]이 설치한 [[남조선과도입법의원]] 의원에 출마하여 당선, 그해 [[12월]]부터 [[남조선과도입법위원회]] 의원을 지냈다.
         이때 [[김규식]](金奎植) 등의 좌우합작에 협력하던 중 그뒤 단정 수립론과 남북협상론이 나오자 [[이승만]]의 단정 수립론을 지지하였다. [[1948년]] [[3월]] [[미 군정]]청 군정장관 딘 소장으로부터 [[5·10 총선거]]를 관리하기 위한 중앙선거위원회 위원의 한 사람에 임명되었다. [[1948년]] [[5월]]에는 [[이승만]]의 친위조직화된 [[대한인국민회]] 소속으로 대구에서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다. 이후 [[대한인국민회]]를 지도, 운영하였다.
         [[1953년]] 집권당이던 [[자유당 (대한민국)|자유당]]의 최고위원과 당 정무부장이 되었고, 정·부통령 선거에 [[부통령]] 후보로도 출마하였다. [[1953년]] [[3.1 운동]] 관련 단체인 민족대표 33인유족회의 회장이 되고, 국산부흥회장 등을 역임하였다. 족청계가 숙청된 뒤 [[이승만]]의 특별 부탁으로, 혼란에 휩싸인 자유당을 재건하기 위한 8인 재건위원회 위원의 한 사람이 되어 [[자유당 (대한민국)|자유당]] 정무부장(政務部長)으로 활동하였다. 그러나 [[이기붕]] 계열과 주도권을 두고 암투를 벌이던 중 [[이기붕]]계열에 의해 숙청되어 당의 실세에서 밀려나게 된다.
         [[1956년]] 정, 부통령 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하기 위해 [[자유당 (대한민국)|자유당]]을 일시 탈당하고 부통령 후보로 출마하였다. 이때 대통령 후보로는 [[이승만]]을 지지한다 하고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다. [[1960년]]의 정부통령 선거에도 부통령으로 입후보하였으나 군소부호로 낙선하였다.
  • 이병석(정치인) . . . . 6회 일치
         1994년부터 1996년까지 [[청와대]] [[대통령비서실]] 정무비서관을 역임하였다.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한국당]] 후보로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포항)|북구]]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옥중 출마한 [[무소속]] [[허화평]]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97년 허화평의 [[국회의원]]직 상실로 치러진 [[재보궐선거]]에서도 신한국당 후보로 출마하였으나 무소속 [[박태준]]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한나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한나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이후 [[친이]]계 정치인으로서 2007년 [[제17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치러진 한나라당의 [[대한민국 대통령|대통령]] 후보 선출 [[전당대회]]에서 [[이명박]] 후보를 지지하였다.
         2008년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한나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2010년부터 2012년까지 [[대한민국 국회|국회]] 국토해양위원장을 역임하였다. 2012년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새누리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같은 해부터 2014년까지 제19대 국회 전반기 국회부의장을 역임하였다.
  • 이종근(1923) . . . . 6회 일치
         1963년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공화당(1963년)|민주공화당]] [[전국구]] [[대한민국 국회의원|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다. 1967년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공화당 후보로 충청북도 충주시-중원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현역 지역구 국회의원인 [[한국독립당(1963년)|한국독립당]] [[이희승(1913)|이희승]] 후보를 꺾고 당선되었다. 1969년부터 1971년까지 [[대한민국 국회]] 농림위원장을 역임하였다. 1971년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신민당 이택희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73년 [[제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이해원(1930)|이해원]]과 민주공화당 복수공천을 받아 충청북도 충주시-중원군-[[제천시|제천군]]-[[단양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둘 다 당선되었다. 1978년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민주공화당 단수공천을 받아 같은 지역구에 출마하여 [[신민당(1967년)|신민당]] [[이택희]] 후보와 동반 당선되었다. 1979년 대한민국 국회 교통체신위원장이 되었다.
         1981년 [[제1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한국국민당(1981년)|한국국민당]] 후보로 같은 지역구에 출마하였으나 [[민주정의당]] 이해원 후보와 [[민주한국당]] [[김영준(1941)|김영준]]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이후 농사를 지으면서 잠시 정치와 거리를 두었다.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민주공화당]] 후보로 충청남도 충주시-중원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같은 해 신민주공화당 부총재, 대한민국 국회 선거부정조사특별위원장이 되었다.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자유당]] 후보로 같은 지역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같은 해부터 1996년까지 대한민국 국회 윤리위원장을 역임하였다. 1995년 민주자유당을 탈당하여 [[자유민주연합]]에 입당하였다.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불출마를 선언하였다.
  • 이희승(1913) . . . . 6회 일치
         [[8.15 광복]] 후 충북자동차주식회사 취체역, 주한미군 제7사단통역관, 경기도청 및 내무부(현 행정자치부) 통역관 등으로 활동하였다. 1948년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충청북도 충주군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대동청년단]] [[김기철]]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무소속으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무소속 [[조대연]]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6.25 전쟁]]이 일어나자 UNKRA 및 KCAC 정치고문, 문교부(현 [[대한민국 교육부]]) 기술교육원부원장서리, [[미군]] 작전과 포로심사관 등으로 활동하였다. 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무소속으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자유당]] 김기철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58년 [[제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1955년)|민주당]]에 충청북도 충주시 선거구로 [[공천]]을 신청하였으나 [[현역]] [[지역구]] [[대한민국 국회의원|국회의원]]인 김기철에 밀려 탈락하였다. 1960년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충청북도 중원군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현역 지역구 국회의원인 무소속 [[정상희]]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63년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자유민주당(대한민국)|자유민주당]] 후보로 충청북도 충주시-중원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64년 자유민주당이 [[민정당]]에 흡수되자 민정당 충청북도당 위원장이 되었다. 1967년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민당(1967년)|신민당]] 공천에서 탈락하자 [[한국독립당(1963년)|한국독립당]] 후보로 해당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민주공화당(1963년)|민주공화당]] [[이종근(1923)|이종근]]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 김선길(국회의원) . . . . 5회 일치
         [[대한민국]]의 전 교육자, [[공무원]], [[정치인]]이다. 호는 선산(宣山)이다. 친형인 김선적은 민족종교인 [[대종교]]의 지도자로 통일광복민족회의 회장을 역임했고 [[제13대 대통령 선거]]에 일체민주당 후보로 출마하다 중도 사퇴하였다.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정의당]] 후보로 충청북도 충주시-중원군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신민주공화당]] [[이종근(1923)|이종근]]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자유당 공천을 받지 못하자 [[무소속]]으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역시 민주자유당 이종근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자유민주연합]] 후보로 충청북도 충주시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98년 3월부터 1999년 3월까지 [[해양수산부]] [[장관]]을 역임하였다. 1999년 [[한일어업협정]]이 문제가 되어 경질되었다.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자유민주연합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새천년민주당]] [[이원성]]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 김정재 . . . . 5회 일치
         2006년 [[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한나라당]] 후보로 [[서울특별시의회]] 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2008년 한나라당 중앙여성위원회 기획분과위원장에 임명되었다. 2010년 [[제5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도 한나라당 후보로 서울특별시의회 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다만 이 과정이 좀 특이했는데 4회 지선에선 지역구 의원으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는데 5회 지선에선 비례대표로 당선되었다. 국회나 지방의회나 보통 비례대표로 당선된 사람들이 다음 선거에서 지역구 선거에 나서는 것과는 정반대. 덕분에 5회 지방선거에서 괴멸당하다시피 한나라당 서울시의회의 몇 안 되는 재선이었다. 이후 2012년부터 2014년까지 서울특별시의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하였다.
         5회 지방선거 및 19대 총선으로 서울, 그것도 자신의 활동영역이던 서대문 지역에서는 보수정당으로 희망이 없다고 생각한 듯 고향인 포항으로 지역기반을 바꾼다. 2014년 [[제6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새누리당 후보로 경상북도 포항[[시장(공무원)|시장]] 선거에 출마하려 하였으나 [[컷오프]]되었다. 같은 해부터 2015년까지 새누리당 부대변인을 역임하였다.
         2016년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새누리당]] 후보로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포항)|북구]] [[선거구]]에 출마하여 전직 포항시장 출신인 친여 [[무소속]] [[박승호(정치인)|박승호]] 후보를 꺾고 당선되어 경북 최초의 여성 국회의원이 되었다.[* 심지어 20대 총선 기준 영남권의 유일한 여성 국회의원이다.] 같은 해 5월 8일 [[김명연]]([[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갑)과 새누리당 원내대변인에 임명되었다. [[정우택]] 원내대표 체제 하에서도 유임되었다.
  • 김종호(1935) . . . . 5회 일치
         1981년 [[제1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정의당]] [[전국구]]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같은 해부터 1983년까지 [[대한민국 국회]] 내무위원장을 역임하였다. 1985년 [[제1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정의당 후보로 충청북도 진천군-음성군-괴산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한국국민당(1981년)|한국국민당]] [[김완태(정치인)|김완태]] 후보와 동반 당선되었다. 같은 해 대한민국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장을 역임하였다. 1986년 내무부[[장관]]에 임명되었으나 1987년 1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에 따른 민심 수습책으로 경질되었다. 내무부 장관으로 민주화운동세력, 학생운동권에 대한 강경대응을 지시해서 [[박종철]] 사건을 촉발시켰다는 비판도 받고 있다. 경찰관계자들의 증언으론 김종호 장관이 '‘대통령 임기가 1년밖에 안 남았다. 정치일정이 있으니까 3월 개학 때까지 모든 사건을 끝내라’'는 지시를 내렸고, 일선 경찰들은 장관이 제시한 일정에 맞추기 위해서 즉 개학전까지 그럴싸한 결과물을 만들어내기 위해서 무차별적인 연행과 무리한 강압수사(=[[고문(범죄)|고문]])을 했다는 것이다.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정의당 후보로 충청북도 괴산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91년 [[민주자유당]] 원내총무, 대한민국 국회 운영위원장을 역임하였다.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자유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같은 해부터 1993년까지 정무제1장관을 역임하였다. 1993년부터 1994년까지 민주자유당 정책위의장을 역임하였다. 1995년부터 1996년까지 다시 민주자유당, [[신한국당]] 정책위의장을 역임하였다.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한국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같은 해부터 1998년까지 대한민국 국회 정보위원장을 역임하였다.
         2008년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미래희망연대|친박연대]] 후보로 충청북도 진천군-음성군-괴산군-[[증평군]]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민주당(2008년)|통합민주당]] [[김종률]]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 김태룡(정치인) . . . . 5회 일치
         1963년 [[국민의당(1963년)|국민의당]] 창당에 참여하였다. 이후 민주당, [[민중당(1965년)|민중당]] 등의 야당에 몸담았다. 1971년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민당(1967년)|신민당]] 후보로 충청남도 대전시 을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민주공화당(1963년)|민주공화당]] [[김용태(1926)|김용태]]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73년 [[제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민당 후보로 충청남도 대전시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민주공화당 김용태 후보와 [[민주통일당]] [[박병배]][* 재검표로 당선 확정]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75년 [[긴급조치]] 9호로 구속되었다. 1977년 [[이철승]] 대표최고위원의 온건노선에 반발하여 신민당야당성회복투쟁위원회 공동의장 겸 대변인을 역임하였다.
         1985년 [[제1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한민주당]] 후보로 [[충청남도]] [[대전광역시|대전시]] [[중구(대전)|중구]] 선거구에 출마하여 [[민주정의당]] [[강창희]] 후보와 동반 당선되었다. 1987년 1월 [[홍사덕]]의 뒤를 이어 신한민주당 대변인에 임명되었다. 같은 해 4월 신한민주당을 탈당하여 [[통일민주당]]에 입당하였고 통일민주당에서도 대변인을 역임하였다.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통일민주당 후보로 충청남도 대전시 [[서구(대전)|서구]]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신민주공화당]] 박충순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90년 [[3당 합당]]으로 [[민주자유당]]이 출범하자 참여하였다.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자유당 [[공천]]에 탈락하자 [[통일국민당]] 후보로 [[대전광역시|대전직할시]] 서구-[[유성구]]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친여 [[무소속]] [[이재환(정치인)|이재환]]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 마누엘 고도이 . . . . 5회 일치
          * 당시 기준에서 상당히 호색한이었던 모양으로, [[프란시스코 고야]]의 명작 [[나체의 마하]]와 [[옷을 입은 마하]]를 주문제작했던 본래 소유주였다. 벨라스케스의 [[거울을 보는 비너스]] 역시 고도이가 주문제작한 작품이다. 본래 종교적으로 엄격했던 스페인에서 나체의 마하 같은 작품은 너무나 선정적이라서 제작되기 어려웠는데, 권력자인 고도이였기 때문에 그 같은 작품을 주문제작할 수 있었던 것이다.
  • 박순석 . . . . 5회 일치
         1948년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경상북도 영일군 갑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지역구]] 개편으로 무소속으로 경상북도 영일군 갑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대한청년당]] 김판석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52년 자유당에 입당하였다. [[6.25 전쟁]] 중인 1951년 전시원호대책중앙위원회에서 피난민 구호부장으로 임명되어 활동하였다. 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자유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이후 자유당에서 원내부총무, 경상북도당 위원장 등을 역임하였다. 1958년 [[제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자유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그러나 상대 후보의 표를 절취했다는 이유로 선거소송이 제기되어 1959년 당선 무효형을 선고받고 [[국회의원]]직을 상실하였다.
         1960년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자유당 후보로 경상북도 [[참의원]] 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다. 설상가상으로 1961년 [[3.15 부정선거]] 연루를 이유로 반민주행위자로 결정되어 공민권이 제한되고 피선거권이 상실되었다.
  • 유한식 . . . . 5회 일치
         [[1949년]] [[6월 20일]] 생 ([age(1949-06-20)]세), [[충청남도]] 연기군 (현 [[세종특별자치시]])에서 출생하였다. [[종교]]는 [[천주교]]이며, [[세례명]]은 비오이다. 농어촌 관련 공무원으로 활동하다 [[2006년]], [[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국민중심당]] 소속으로 도의원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2007년]] [[10월]]에 [[이기봉]] 전 [[군수]]가 공직선거법 위반으로 당선이 무효되자 연기군수 재보궐 선거에 출마를 선언하였으나 같은 당의 최준섭에게 공천에서 밀려 탈락하자 무소속으로 출마했지만 3위로 [[낙선]]한다. 그런데 최준섭 군수 또한 선거법 위반으로 당선이 무효되면서 다시 보궐에 선거에 국민중심당 공천을 받아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이후 [[자유선진당]]에 속하였다.
         연기군지역에 세종특별자치시 출범이 되면서 [[2012년]] 총선과 같이 실시되는 세종특별자치시장 선거에 자유선진당 후보로 출마하여 [[민주통합당]] [[이춘희]] 후보를 꺾고 당선되었다. 이후 당이 [[새누리당]]과 합당하면서 새누리당에 속하게 된다.
         [[2014년]], [[제6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새누리당 후보로 출마하였으나 [[새정치민주연합]] [[이춘희]] 후보에게 밀려 낙선하였다.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도 출마하지 않았다.
  • 이기택 . . . . 5회 일치
         1980년 [[5.17 내란]]으로 신군부에 의해 정치활동이 규제되었다가 1984년 해금되면서 [[신한민주당]]에 입당하였다. 그러나 동래구 지역구에는 이미 민주한국당을 탈당하여 신한민주당에 입당한 자신의 비서 출신 [[박관용]]이 있었다. 이에 지역구를 [[해운대구]]-[[남구(부산)|남구]]로 옮기고 [[제12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 부산 해운대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89년 [[서석재]]의 뒤를 이어 통일민주당 원내총무에 선출되었다. 당시 5공비리 특별조사위원회가 설치되었을 때 위원장을 맡아 원만한 청문회 진행으로 국민들에게 좋은 인상을 남겼다.[* [[노무현]]이 5공비리 청문회로 스타덤에 올랐을 때 조연으로 활약(?)하였다.]
         [[제14대 대통령 선거]]에서 김대중이 대통령 후보로 출마하자, 김대중을 도와 목이 쉴 정도로 열심히 전국 유세를 하고 다녔다. 김대중이 패배하고 정계은퇴를 선언한 자리에서는 김대중 뒤에 서서 눈물을 흘렸으며, 그 후 김대중의 뒤를 이어 민주당 대표가 되었다. --드디어 야권의 제[[1인자]]로 부상한 셈--
         1997년에는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포항)|북구]] [[재보궐선거]]에서 죽어가는 당의 명운과 함께 자신의 마지막 정치적 생명을 걸고 출마하였다. 그러나 [[무소속]]으로 출마한 [[박태준]]에 밀려 낙선. 사실 태어나기는 포항에서 태어났지만 대부분의 정치적 기반을 부산에서 잡은 이상 당선되기는 어려웠다고 봐야 할 것이다.[* 게다가 상대가 포항의 경제를 쥐고 있는 [[포항제철]]의 창립자이니 이건 처음부터 안되는 싸움이었다.]
         2000년에는 [[제16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이회창]] 총재의 독선에 반발하여 [[김윤환]], [[이수성(정치인)|이수성]], [[신상우]], [[조순(1928)|조순]] 등과 함께 탈당하여 [[민주국민당(2000년)|민주국민당]]을 창당하고 부산광역시 [[연제구]]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한나라당 [[권태망]]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이기택뿐만 아니라 김윤환, 신상우, 조순, [[김상현(1935)|김상현]], [[김동주(정치인)|김동주]] 등이 모두 낙선하였으며, 지역구에서 홀로 당선된 [[한승수]]를 제외한 거의 모든 민국당 인사들이 결국 낙선의 충격을 이겨내지 못하고 정계 은퇴를 하게 되었다. --그중 가장 [[안습]]인 인물이 재야에 있다가 뜬금없이 김윤환 등과 손을 잡은 장기표. 어쨌든 이때 이기택은 [[망했어요]].-- ~~아무 실익도 없이 통합민주당만 갖다바친 꼴~~ ~~통합민주당을 그냥 지키고만 있었어도 이런 꼴은 보지 않았을 것을~~
  • 강대식 . . . . 4회 일치
         2006년 [[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한나라당]] 후보로 대구광역시 동구의회 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2010년 [[제5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한나라당]] 후보로 대구광역시 동구의회 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2012년부터 2014년까지 대구광역시 동구의회 [[의장]]을 역임하였다. 그런데 2012년 11월 20일 [[음주운전]] 상태로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3&aid=0004837775|경찰에 적발되었다]].
         2014년 [[제6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새누리당]] 후보로 대구광역시 동[[구청장]]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인하여 2017년 2월 [[윤순영]] 대구광역시 [[중구(대구)|중구]]청장과 함께 새누리당을 탈당하여 [[바른정당]]에 입당하였다.
         2018년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바른미래당]] 후보로 동구청장 재선에 출마하였으나 [[자유한국당]] [[배기철]], [[더불어민주당]] 서재헌 후보에 이은 3위로 낙선하였다.
  • 김영준(1941) . . . . 4회 일치
         1981년 [[제1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한국당]] 후보로 충청북도 충주시-중원군-[[제천시]]-제원군-[[단양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민주정의당]] [[이해원(1930)|이해원]] 후보와 동반 당선되었다. 당선 직후 민주한국당 당직개편에서 인권옹호위원회 부위원장에 임명되었다. 1982년 민주한국당 충청북도지부장에 임명되었다. 1983년 민주한국당 부총무에 임명되었다.
         1985년 [[제1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한국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민주정의당 [[이춘구]] 후보와 [[신한민주당]] [[이택희]]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통일민주당]] 후보로 충청북도 제천시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민주정의당 이춘구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자유당]]에 충청북도 제천군-단양군 선거구로 [[공천]]을 신청하였으나 현역 국회의원 안영기에 밀려 탈락하였다.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충청북도 제천시-단양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현역 [[대한민국 국회의원|국회의원]]인 [[신한국당]] [[송광호]] 후보를 꺾고 당선되었다. 당선 직후 신한국당에 입당하였다.
  • 김우동 . . . . 4회 일치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경상북도 선산군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현역 [[지역구]] [[대한민국 국회의원|국회의원]]인 대한국민당 육홍균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52년 지방선거]]에서 경상북도의회 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현역 지역구 국회의원인 자유당 육홍균 후보에 설욕하였다. 당선 후 [[자유당]]에 입당하였다.
         1958년 [[제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자유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그러나 해당 선거구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했던 [[김동석]]이 재검표 소송을 제기하여 재검표 결과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58102400209103011&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58-10-24&officeId=00020&pageNo=3&printNo=11159&publishType=00010|당락이 뒤바뀌면서 국회의원직을 상실하였다]].
  • 김장섭 . . . . 4회 일치
         1958년부터 1959년까지 내무부(현 [[행정자치부]]) 차관을, 1959년 농림부(현 [[농림축산식품부]]) 차관을 역임하였다. 1960년 1월 [[김익노]]의 당선 무효로 치러진 [[제4대 국회의원 선거]] [[재보궐선거]]에서 [[자유당]] 후보로 경상북도 영일군 을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같은 해 [[4.19 혁명]] 이후 치러진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참의원]](경상북도)에 출마하였다. 그러나 1961년 초 [[3.15 부정선거]]를 이유로 반민주주의자로 결정되었다. 이에 공민권 제한 대상자가 되어 국회의원직이 상실되었다.
         1963년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공화당(1963년)|민주공화당]] 후보로 경상북도 포항시-영일군-[[울릉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67년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공화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같은 해부터 1969년까지 [[대한민국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하였다.
  • 박상돈(정치인) . . . . 4회 일치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열린우리당]] 후보로 충청남도 [[천안시]] 을 [[선거구]]에 출마하여 [[현역]] [[지역구]] [[국회의원]]인 [[한나라당]] [[함석재]] 후보를 꺾고 당선되었다.
         2008년 [[제18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열린우리당의 후신 [[민주당(2008년)|통합민주당]]을 탈당하여 [[자유선진당]]에 입당하였다. 원래 박상돈 의원은 열린우리당 내에서도 가장 보수적인 의원이라 평가받고 있었다. 자유선진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이후 자유선진당에서 원내대표, 사무총장 등을 역임하였다.
         2010년 [[제5회 전국동시지방선거]]를 앞두고 [[국회의원]]직을 사퇴하고 [[자유선진당]] 후보로 충청남[[도지사]] 선거에 출마하였으나 [[민주당(2008년)|민주당]] [[안희정]]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2012년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자유선진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민주통합당]] [[박완주]]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같은 해 자유선진당이 [[국민생각]]과 합당하여 [[선진통일당]] 소속이 되었다가 선진통일당이 새누리당에 흡수되자 [[새누리당]] 소속이 되었다. 이후 [[자유한국당]] 소속이 되었다.
  • 박재홍(1941) . . . . 4회 일치
         1981년 [[제1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정의당]] 후보로 경상북도 구미시-[[선산]]군-[[칠곡군]]-[[군위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민주한국당]] [[김현규]] 후보와 동반 당선되었다. 같은 해 민주정의당 원내부총무에 임명되었다. 1985년 [[제1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정의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무소속]] 김현규 후보와 동반 당선되었다.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정의당 후보로 경상북도 구미시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이 때 숙부 [[박상희]]의 아들, 즉 사촌 동생인 [[박준홍]]이 [[신민주공화당]] 후보로 출마함에 따라 지역에서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조카 두 명이 대결하는 게 보기 좋지 않다는 여론이 있었다.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구미시 지역구 공천이 [[박세직]]에게 밀려 [[민주자유당]] [[전국구]]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다. 1994년부터 1995년까지 [[대한민국 국회]] 교통위원장을, 1995년부터 1996년까지 대한민국 국회 건설교통위원장을 역임하였다. 1996년 초 [[신한국당]]을 탈당하여 [[자유민주연합]]에 입당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 치러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박준홍 대신 자유민주연합 후보로 경상북도 구미시 갑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신한국당 박세직 후보에게 밀려 낙선하였다.
  • 박정수(정치인) . . . . 4회 일치
         [[전두환]]의 신군부가 집권하고 나서도 정치규제를 당하지 않아서 1981년 [[제1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김천시-금릉군-상주군 지역구에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민주정의당 정휘동 후보와 동반 당선되었다. 그러나 1985년 [[제1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무소속으로 같은 지역구에 출마하였다가 민주정의당 [[김상구]] 후보와 [[신한민주당]] 이재옥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민주정의당]]의 공천을 받아 김천시-금릉군 지역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90년부터 1992년까지 [[대한민국 국회]] 외무위원장을 역임하였다.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민주자유당]]의 공천을 받아 역시 김천시-금릉군 지역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 백남억 . . . . 4회 일치
         그러다가 [[4.19]] 이후 치러진 1960년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1955년)|민주당]] 후보로 [[참의원]](경상북도)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5.16 군사정변]] 이후 같은 민주당 소속이었던 박준규, [[김재순]], [[민관식]] 등과 함께 [[민주공화당(1963년)|민주공화당]]에 입당하였다. 이후 1963년 [[제6대 국회의원 선거]]부터 1971년 [[제8대 국회의원 선거]]까지 민주공화당 후보로 경상북도 김천시-금릉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내리 당선되었다. 이때 민주공화당 정책위원회 의장과 당무의원을 지냈다.
         항명파동으로 박정희의 분노를 사면서 자연스레 4인체제는 무너졌고, 백남억은 권력의 중심에서 밀려났지만 쫓겨나지는 않았다. 1973년 [[제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공화당 후보로 경상북도 김천시-금릉군-[[상주시|상주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친여 [[무소속]] [[김윤하]] 후보와 동반 당선되었다. 1978년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공화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친여 무소속 [[박정수(정치인)|박정수]] 후보와 정휘동 후보에 밀려 3위 이하 득표로 낙선하자 정계에서 은퇴하였다.
  • 육홍균 . . . . 4회 일치
         1948년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서 대한독립촉성국민회 후보로 경상북도 선산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대한국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그리고 민주국민당 중앙상무위원을 역임하였다. 1953년 자유당에 입당하였다. 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자유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무소속]] [[김우동]]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60년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무소속]] [[신준원]]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 이명규(국회의원) . . . . 4회 일치
         1995년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무소속]]으로 [[대구광역시]] 북[[구청장]]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98년 [[제2회 전국동시지방선거]], 2002년 [[제3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한나라당]] 후보로 북구청장 선거에 출마하여 3선을 기록하였다.
         2004년 초 북구청장직을 사임하고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한나라당 후보로 대구광역시 [[북구(대구)|북구]] 갑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2007년 [[제17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 [[경선]] [[전당대회]]에서 [[이명박]]을 지지하여 [[친이]]계에 속하였다.
         2008년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한나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한편 같은 해 한나라당 사무부총장에 임명되었다. 2011년 한나라당 원내수석부대표에 임명되었다.
  • 이정무 . . . . 4회 일치
         1987년 [[제13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경북고등학교,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1년 후배인 [[박철언]]이 조직한 월계수회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정의당]] 후보로 대구직할시 남구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89년 민주정의당 원내부총무에 임명되었다.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자유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통일국민당]] [[김해석(정치인)|김해석]]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자유민주연합]] 후보로 [[대구광역시]] [[남구(대구)|남구]]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같은 해 자유민주연합 원내총무에 임명되었다. [[DJP연합]]에 따른 [[새정치국민회의]]-자유민주연합 [[연정|공동정부]]의 몫으로 1998년 3월부터 1999년 5월까지 건설교통부(현 [[국토교통부]]) [[장관]]을 역임하였다.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자유민주연합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한나라당]] [[현승일]]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이후 정계에서 은퇴하였다.
  • 이종배(국회의원) . . . . 4회 일치
         민주당 [[우건도]] 시장의 시장직 상실 판결로 인해 치뤄진 [[2011년 하반기 재보궐선거]]에서 한나라당 후보로 영입되어 충주시장 선거에 출마하였다. 당시 충주시는 절대적인 영향력을 갖고 있던 이시종이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 출마를 위해 사퇴한 이후로 후임 시장들의 수명이 그리 길지 못하는 헬게이트를 맞이하고 있었다. 이시종 사퇴 이후 재보궐에서 당선된 [[한창희]]가 겨우 2년(...), 그나마 후임 김호복이 재보궐로 당선되었지만 다음 선거에서 패하여 낙선. 그리고 [[제5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우건도가 당선되었으나 1년여만에 또 당선무효.(...)
         임기가 다 끝나가던 2014년 3월 31일, 시장직을 사퇴한다. 이는 지역구 국회의원 윤진식이 충북지사 선거에 출마하기 위해 국회의원직을 사퇴하자, 그 자리를 대신하여 출마하기 위해서였다. 이후 [[2014년 상반기 재보궐선거]]에서 [[새누리당]] 후보로 충주시 [[선거구]]에 출마, 옛 한나라당 출신 시장인 [[새정치민주연합]] 한창희 후보에게 승리하고 당선되었다. 정작 이종배에게 국회의원 자리를 물려준 윤진식은 도지사 선거에서 석패했다.[* 전국에서 제일 박빙이어서. 다음날 새벽4시까지 개표가 진행됐다.].(...) 이후 [[친박]]계에 속하였다. [[정우택]]의 최측근이며 2015년부터 2016년까지 새누리당 원내부대표를 역임하였다.
         2016년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새누리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 이철우(1955) . . . . 4회 일치
         2008년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경상북도 김천시 선거구에 [[한나라당]]의 공천을 받아 출마하여 당선됐다. [[친이]]와 [[친박]]계의 대립이 심했던 제18대 국회에서 계파모임에 가담하지 않아 중립 성향으로 분류되는 편이었다. 국가정보원 출신으로 초선에 정보위원회 간사를 맡았다. 국회 교육과학기술위원회와 문화체육관광방송통신위원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소속으로 활동했고 한나라당 재해대책위원장과 국민공감위원장을 역임했다.
         2012년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새누리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전국 최고득표율인 83.5%로 당선됐다. 국회직으로 정보위원회 간사를 맡았고 [[테러방지법]]을 대표발의 했다. 국회 국토교통위원회와 안전행정위원회 소속으로 활동했고 새누리당 원내대변인, 원내수석부대표, 경상북도당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국회지방살리기포럼]]을 창립해 지방살리기 전도사로 나섰다. 전라남도와 경상북도 국회의원의 모임인 동서화합포럼 창립을 주도하고 [[박정희]], [[김대중]] 대통령 생가를 함께 방문해 동서화합 및 국민대통합 행보로 언론에서 큰 주목을 받았다.
         [[2016년]]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새누리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화령중학교 교사 때의 제자이던 [[임이자]]도 해당 선거에서 새누리당 [[비례대표제|비례대표]]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다. [[2016년]] 6월 13일 [[대한민국 국회]] [[정보위원회]] 위원장에 선출되었다. 국회 헌법개정특별위원회 간사이자 자유한국당 헌법개정특별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다.
         2017년 4월 1일 [[자유한국당]] [[사무총장]]에 임명됐고, 제19대 대통령선거 자유한국당 선거대책위원회 총괄선대본부장을 맡았다. 그러나 대선 이튿날인 5월 10일 사무총장 직을 스스로 사퇴했다. 대선 패배의 책임을 지고 자진 사퇴한 유일한 당직자였다. 이후 2017년 7월 3일 전당대회에 출마하여 최다득표로 자유한국당 최고위원에 당선됐다.
  • 진헌식 . . . . 4회 일치
         [[1948년]]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서 대한독립촉성국민회 후보로 충청남도 연기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그러나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대한국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였다가 무소속 이긍종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51년 12월부터 1952년 8월까지 관선 [[충청남도지사]]를 지냈다. 충청남도지사 임기 중이던 1952년 5월부터 1952년 8월까지 [[충남대학교]] [[총장]] [[서리]]를 [[충남대학교/역사|겸직하였다]]. 이어서 1952년 8월부터 1953년 5월까지 내무부(현 [[행정자치부]]) [[장관]]을 지냈다가 [[곡물]] 관리상의 문제로 경질되고 구속되었다가 [[대법원]]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1958년 [[제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자유당]] [[류지원]]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60년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충청남도 [[참의원]] 선거에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다.
  • 경대수 . . . . 3회 일치
         [[2009년 재보궐선거]] 당시 김종률의 피선거권 상실로 치뤄진 고향 충북 진천, 음성, 괴산, 증평 선거구에 한나라당 공천을 받아 출마하였으나 민주당 정범구 후보에게 큰 표차로 패하였다. 정범구 후보는 음성 출신이라 음성쪽의 지원을 받았고, 경대수는 괴산 출신이라 괴산의 지원을 받았는데 그만 공천에 탈락한 진천군수 출신 김경회가 무소속 출마하여 진천쪽의 표심을 잠식하고 나아가 여권 성향의 표를 분산한 것이 원인이었다.
         2012년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새누리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정범구 후보에 설욕하고 당선되었다. 지난 선거와 달리 여권성향 무소속 후보 없이 1:1 매치가 이루어져서 비교적 쉽게 당선될 수 있었다. 이후 [[친박]]계에 속하였다.
  • 구자춘 . . . . 3회 일치
         1987년 [[김종필]]이 [[신민주공화당]]을 창당하자 입당하였다. 이듬해인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달성군]]-[[고령군]] 지역구에 [[신민주공화당]] 후보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신민주공화당이 [[3당 합당]]으로 [[민주자유당]]으로 통합되고 나서,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달성군]]-[[고령군]] 지역구에 [[민주자유당]] 후보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대 총선]], [[20대 총선]]에서 달성군 지역구에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던 [[구성재]]는 구자춘의 아들이다.
  • 김동석 . . . . 3회 일치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경상북도 선산군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현역 [[지역구]] [[대한민국 국회의원|국회의원]]인 [[대한국민당]] [[육홍균]]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무소속 [[김우동]]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58년 [[제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였다가 현역 지역구 국회의원인 자유당 [[김우동]] 후보에 밀려 낙선한 것으로 나오자 [[재검표]] 소송을 제기하였다. 재검표 결과 당락이 뒤바뀌어 당선되었다. 같은 해 [[자유당]]에 입당하였다.
  • 김봉환(1921) . . . . 3회 일치
         1963년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공화당(1963년)|민주공화당]] 후보로 경상북도 선산군-[[군위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자유민주당(대한민국)|자유민주당]] [[김현규]] 후보를 꺾고 당선되었다. 1965년부터 1967년까지 [[대한민국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하였다. 1967년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공화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신민당(1967년)|신민당]] [[박만원]] 후보를 꺾고 당선되었다. 1971년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공화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신민당 김현규 후보를 꺾고 당선되었다. 같은 해부터 1972년까지 대한민국 국회 예산결산위원장을 역임하였다.
  • 김성조 . . . . 3회 일치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김윤환]]을 제치고 [[한나라당]] 공천을 받았다. 그리하여 한나라당 후보로 경상북도 구미시 선거구에 출마하였고 [[민주국민당(2000년)|민주국민당]] 김윤환 후보를 꺾고 당선되어 화제가 되었다.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한나라당 후보로 경상북도 구미시 갑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같은 해부터 2006년까지 한나라당 사립학교법 재개정특별위원회 위원장, [[대한민국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 한나라당 위원장 등을 역임하였다.
         2008년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한나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같은 해부터 2009년까지 한나라당 [[여의도연구원|여의도연구소]] [[소장]]을 역임하였다. 2009년부터 2010년까지 한나라당 정책위의장을 역임하였다. 2010년부터 2012년까지 [[대한민국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하였다.
  • 김태환(1943) . . . . 3회 일치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한나라당]] 후보로 경상북도 구미시 을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2005년 한나라당 제1사무부총장에 임명되었다. 2005년 골프장에서 시비가 붙어서 건방지다면서 골프장 경비원을 폭행했는데 비슷한 시기 맥주병 폭행을 일으킨 당시 같은 당적의 [[곽성문]]의원 등과 더불어 진보 네티즌들의 빈축을 사기도 하였다. 더 가관이었던건 이때 사용한 도구가 건어물(...)이어서 '오징어 의원'이라는 비아냥이 돌았었다.
         2008년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한나라당 내 [[친이]]계 수뇌부의 공천학살에 따라 공천을 받지 못하자 한나라당을 탈당하여 [[무소속]]으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당선 후 한나라당에 복당하였다. 그리고 한나라당 경상북도지부 수석부위원장, 경상북도당 운영위원장 등을 역임하였다. 2010년 12월 5일 일왕 축하파티가 [[서울특별시]] [[중구(서울)|중구]] 소공동에서 열렸는데 거기에 참석하였다는 이유로 논란이 되었다.
         2012년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새누리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2012년부터 2013년까지 [[대한민국 국회]] 행정안전위원장을, 2013년부터 2014년까지 대한민국 국회 안전행정위원장을 역임하였다.~~이게 다 부서 이름 앞뒤만 바꿔서 그렇다~~
  • 몽키 D. 루피/작중행적 . . . . 3회 일치
         이후 피카에 의해 조로, 로, 리쿠 드루드 3세, 퀴로스, 비올라와 함께 궁전 정원으로 떨어지고 도플라밍고가 새장을 펼치며 시작한 게임[* 도플라밍고를 먼저 죽이느냐, 그가 지목한 12인을 먼저 죽이느냐.]에서 별 3개[* 별 하나당 1억과 동급]를 배정받았다.[* 같은 입장으로 리쿠 드루드 3세와 트라팔가 로, 사보가 있다. 하지만 우솝은 입장을 떠나 도플라밍고를 제일 열받게 해서 별이 5개가 걸렸다.] 그리고 로빈에게 걸려온 전보벌레로 레베카에게 퀴로스의 정체를 알림과 동시에 도플라밍고를 작살내놓겠다 선언한다. 로는 동맹의 본래 목적을 다시 말하며 카이도와의 연전도 각오한 거냐고 물어보지만, 그에 대한 입막음으로 말한 루피의 대사가 실로 압권. 그리고 조로, 로를 끌어안고 도플라밍고의 궁전으로 직행하였고 도플라밍고를 포함한 돈키호테 패밀리앞에 등장하였다. 루피의 발을 잡고 [[마하바이스]]와 [[델린저(원피스)|델린저]]가 그를 막으려 했지만 마하바이스의 무게공격은 피했고 델린저는 조로가 뒤에서 차버려서 델린저와 마하바이스를 쌍방으로 데미지를 입히게 한다. 그리고 돈키호테 패밀리사이에 일반인이 끼여있자 그들을 패왕색으로 기절시키려는 찰나에 [[후지토라]]가 나타났고 조로가 그를 막아선다. 그리고 [[피카]]의 고음을 듣고 미친듯이 웃는바람에(...)[[어그로|그것이 피카를 도발한 꼴이 되어]]. 그래서 빡친 피카의 주먹에 의해 조로, 로와 함께 멀리 날아가게 되는데, 여기서부터가 중요하다.
  • 박보생 . . . . 3회 일치
         2006년 [[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한나라당]] 후보로 경상북도 김천시장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2010년 [[제5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한나라당 후보로 경상북도 김천시장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2014년 [[제6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새누리당]] 후보로 경상북도 김천시장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 스틸오션/미국 . . . . 3회 일치
         >오마하급 순양함은 고속 성능과 적 구축함을 격퇴하기 위한 대구경 함포를 가진 순양함이었다. 구식 함선답게 오마하급 함선들은 2선에 보내졌다. 10척의 오마하급 중 격침된 함선은 없다. 밀워키(Milwaukee)는 소련 해군에 대여되었다.
  • 이승현(농구선수) . . . . 3회 일치
         세 번째 장점은 발전속도이다. 14년 아겜 국대에서 낙마하게 된 원인이 신체적 열세를 극복할 수 있는 공격툴이 부족하다는 것이었는데, 이때부터 집중적으로 외곽슛을 연마하기 시작해 신인 시즌에 3점 성공률 2위를 기록하기도 했고, 현재 시점인 2017년말에는 동포지션 대비 상급의 슛터치를 보여주고 있다. 슛 뿐만 아니라 포스트업 기술이나 대인수비나 박스아웃 등 공수 전반적으로 꾸준하게 발전을 보이고 있어 [[전준범]]과 함께 국대에서도 핵심 멤버로 등극하게 되었다. 상무 복무자의 경우 훈련하는 공인구가 달라 국대 경기 적응에 어려움이 있을 것이라는 우려와는 다르게 오히려 시즌때보다 정교한 필드골 성공률을 보여주고 있는것도 고무적이다.
         다만 슈팅 모션이 느리기 때문에 오픈찬스가 아니면 득점하기 쉽지 않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고, 체력 저하가 시작되는 3쿼터 막판부터 야투 성공률이 급감한다는 단점이 있다.[* 70점 이하의 득점으로 패배하는 경기를 보면 이 단점이 매우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이지샷도 놓치는 모습이 4라운드 이후 점차 늘어나는 추세.] 문제는 1대1 능력이 부족하다는점. 본인이 공을 잡고 득점하는 기술이 거의 없으며, 라이벌이자 동기인 김준일에 비해 밀린다고 평가를 받는 부분이다. KBL이 용병이 에이스롤을 맡아 국내선수는 롤플레이어 역할로 그쳐도 크게 무리는 없지만, 그래도 대학때 모습에 비하면 아쉽다. 물론 워낙 BQ가 좋고 볼 없는 움직임도 좋은 선수라 매경기 10점 정도는 가능하다. 그 외에는 속공 가담 후 받아 먹기나, 포스트업 이후 페이드 어웨이 점퍼. 조 잭슨이 살아나면서 볼 없는 움직임이 좋은 이승현도 덩달아 득점력이 상승하기도 했다. 16-17시즌 이후에는 포지션의 구분없이 피지컬에서 미스매치가 나면 곧장 인사이드로 파고드는 움직임이 많아지고, 이에따라 포스트업이나 훅슛 등 공격스킬을 연마하는 모습을 보여 페인트존 공격기술이 없다는 비판도 점차 줄어들고 있다.
  • 이인 . . . . 3회 일치
         '''이인'''(李仁, [[1896년]] [[10월 26일]] ~ [[1979년]] [[4월 5일]])은 [[한국]]의 독립운동가이며 법률가, 정치인이다. 자(字)는 자옥(子玉), 호(號)는 애산(愛山). [[일본]] 유학 후, [[1923년]] 변호사시험에 합격, 변호사를 개업하고 이후 [[일제 강점기]] 당시 [[김병로]], [[허헌]]과 함께 독립운동가 및 애국자, 사회저명인사들을 상대로 무료변호를 하여 등과 함께 '''3대 민족 인권 변호사'''로서 명망을 날렸다. 일제 강점기 말기에는 창씨개명을 거절하였고, 해방 후 우익 정치인으로 활동하다가 [[이승만]]의 단독정부 수립론에 가담하였다. [[1948년]] [[5월]] [[제헌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고, 정부수립 이후 국회의원과 법무부장관을 역임하였다. [[1949년]] 7월에 [[반민특위]] 위원장에 임명되어 반민특위를 와해, 해체시켰다.<ref>{{서적 인용
         1949년 3월 [[서울]] [[종로구]]의 국회의원인 [[장면]]이 주미대사 임명 관계로 국회의원직을 사퇴하자 그는 보궐선거에 출마하였다. 3월의 보궐선거에서 당선되어 제헌국회의원이 되었고, 6월에 법무부장관직을 사임하였다. [[1949년]] 6월 경찰의 [[반민특위]] 특경대 습격사건 이후 [[7월 7일]]에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위원장이 되었다. 이인은 [[반민특위]] 특경대를 해산시키고 신변보호를 담당하던 경찰마저도 모두 철수시켜 '더이상 반민족 행위자의 체포가 없을 것'임을 분명히 하였다.<ref>1949년 7월 16일자 [[조선일보]] 기사 발췌</ref> 나아가 이인은 반민특위 해체를 주요내용으로하는 반민법 개정안을 제출하였고, 그나마 기소된 [[친일파]]도 제대로 처벌하지 못하는 결과를 초래시켰다.
         * 제4대 국회에 출마하였으나 낙선
  • 이인영(정치인) . . . . 3회 일치
         2015년 2월 전당대회 당대표 선거에 출마하기도 하였다. 결과는 3위로 낙선.
         참고로 이때 20대 총선에서 이인영이 고향인 충북 충주로 사실상 '''하방'''하게 되는 것 아니냐는 이야기도 나왔다. 그런데 2016년 당시 충북 충주는 민주당에게 사지(死地)라고 보는 것이 맞았다. [[이시종]]이 충북지사로 출마하면서 국회의원을 사퇴한 이후의 모든 선거에서 새누리당이 64% 이상의 득표를 했던 것. [* 다만 [[19대 대선]]에선 [[문재인]] 34.4% vs [[홍준표]] 30.4%로 문재인이 약 4%차로 승리했다.] 이인영이 아무리 야당 당대표 경선까지 출마한 나름 거물일지라도 당선을 장담할 수 없는 곳이었다.
         이러한 우여곡절 끝에 20대 총선에서 [[더불어민주당]]의 단수 공천을 받으면서 자신의 지역구인 서울 구로 갑에 그대로 출마하게 되었다. 재미있는 점은 당시 경쟁자로 불린 새누리당의 [[이범래]] 역시 20대 총선에서 타 지역구로 옮길 것을 주문 받았는데, 이범래는 실제로 지역구를 옮겼고 낙천했다(..)
  • 임각수 . . . . 3회 일치
         2006년 [[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무소속]]으로 충청북도 괴산군수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2010년 [[제5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무소속]]으로 충청북도 괴산군수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2014년 [[제6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무소속]]으로 충청북도 괴산군수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그러나 [[농지법]] 위반 등 여러 비리로 2016년 [[군수]]직을 상실하였다.
  • 임동규(정치인) . . . . 3회 일치
         [[1991년 지방선거]]에서 [[민주자유당]] 후보로 [[서울특별시의회]] 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95년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도 민주자유당 후보로 서울특별시의회 의원 선거에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다. 1998년 [[제2회 전국동시지방선거]], 2002년 [[제3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한나라당]] 후보로 서울특별시의회 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2002년부터 2004년까지 [[서울특별시의회]] [[의장]]을 지내면서 당시 [[이명박]] [[서울특별시장]]과 인연을 맺었다. 2007년 [[제17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치러진 한나라당의 [[대한민국 대통령]] 후보 [[경선]] [[전당대회]]에서 이명박 후보를 지지하며 [[친이]]계에 속하였다. 제17대 대통령 선거 본선에서 직능정책본부 행정자치위원회 위원장을 지냈고, 선거 후에는 제17대 대통령 인수위원회 자문위원을 지냈다.
  • 임인배 . . . . 3회 일치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한국당]] 후보로 경상북도 김천시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같은 해 신한국당 원내부총무에 임명되었다. 1999년 한나라당 원내부총무에 임명되었다.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한나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이후 [[이회창]] [[총재]]의 특별보좌관, 한나라당 원내수석부총무를 역임하였다.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한나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2006년부터 2008년까지 [[대한민국 국회]] 과학기술정보통신위원장을 역임하였다. 2007년 [[제18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치러진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 선출 [[전당대회]]에서 [[친이]]계로 [[이명박]] 후보를 지지하였다.
  • 정무식(정치인) . . . . 3회 일치
         1971년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공화당(1963년)|민주공화당]] 후보로 경상북도 영일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73년 [[제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공화당 후보로 경상북도 포항시-영일군-[[울릉군]]-[[영천시|영천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친여 [[무소속]] [[권오태]] 후보와 동반 당선되었다. 1978년 초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77122400329201017&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77-12-24&officeId=00032&pageNo=1&printNo=9921&publishType=00020|뇌물수수 혐의로]] 국회의원직을 사퇴한 [[지종걸]] [[유신정우회]] [[대한민국 국회의원|국회의원]]의 뒤를 이어 [[대한민국 국회]] 농수산위원회 위원장 직무대리에 임명되었다.
         1978년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공화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친여 무소속 권오태 후보와 [[신민당(1967년)|신민당]] 조규창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79년 6월 권오태가 민주공화당에 입당하자 해당 지구당위원장직에서 사임하였다. 그리고 원양어업협회 [[회장]]이 되었다.
  • 정상희(정치인) . . . . 3회 일치
         1958년 [[제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자유당]] 후보로 충청북도 중원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59년 자유당 충청북도당 위원장이 되었다.
         1960년에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그러나 [[부정선거]]라는 이유로 소송을 당했다. 1961년 [[3.15 부정선거]] 가담을 이유로 반민주행위자공민권제한법에 의해 공민권이 제한되었다.
         1963년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공화당(1963년)|민주공화당]] 후보로 충청북도 [[충주시]]-중원군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자유민주당(대한민국)|자유민주당]] [[이희승(1913)|이희승]]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67년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민주공화당 [[공천]]에서 [[이종근(1923)|이종근]]에 밀려 탈락하였다.
  • 정태성(정치인) . . . . 3회 일치
         1963년,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공화당(1963년)|민주공화당]] 후보로 충청북도 [[청주시]] 선거구에 출마하여 [[민정당]] [[이민우(1915)|이민우]] 후보를 꺾고 당선되었다.
         1967년,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민주공화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그러나 친 [[김종필]]계에 속하면서 [[3선 개헌]] 반대 운동을 하다가 민주공화당에서 제명되었다.
         1971년,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공화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다.
  • 조대연(1888) . . . . 3회 일치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충청북도 충주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현역]] [[지역구]] [[대한민국 국회의원|국회의원]]인 무소속 [[김기철]] 후보를 꺾고 당선되었다. 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무소속으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자유당]] 김기철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60년 7월부터 같은 해 12월까지 관선 [[충청북도지사]]를 지냈다. 같은 해 12월 치러진 [[1960년 지방선거]]에서 [[민주당(1955년)|민주당]] 후보로 충청북도지사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그러나 1961년 [[5.16 군사정변]]으로 경질되었다.
  • 조원진 . . . . 3회 일치
         [[한국외대]] 총장을 지낸 [[황병태]]가 제15대 국회에 [[대한민국 국회의원|국회의원]]으로 출마하면서 조원진에게 러브콜을 보냈고, 이에 응한 조원진은 그를 따라 보좌관으로 1996년 정계에 입문하였다.
         초기 정치 경력은 잘 알려져 있지는 않은데, [[이인제]]가 이끌던 [[국민신당(대한민국)|국민신당]]에도 가담해서 대구 수성 갑 지구당위원장을 역임한 적도 있었지만, 1998년 7월 재보궐선거를 앞두고 국민신당을 탈당하고 북구 갑 지역에 무소속으로 출마하면서 처음 선거 경력을 시작했다. 이때는 4등으로 보기 좋게 낙선했고, 16대 총선에서도 다시 무소속으로 북구 갑에 출마했지만, 역시나 4등으로 낙선했다. 이때까지는 [[극우]] 성향은 아니었다. 그리고 중국에서 사업을 했는데, 이때 몽골까지 진출하고 (몽골 현지 법인의 대표 역임) 세계한인무역협회의 상임이사 겸 베이징회장을 지냈다.
         2008년에 열린 제18대 총선 당시 [[미래희망연대|친박연대]] 소속으로 [[달서구]] 병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시 한나라당 후보로 출마한 유재한을 꺾고 당선된 후 한나라당에 복당했다. 사실 달서구 지역은 그가 두 번 출마했던 북구도 아니었고, 정치 경력도 상대인 유재한이 주택금융공사 사장 출신인 반면에 두 차례의 국회의원 출마와 중국에서의 소규모 기업 경영이 경력의 전부였다. 더군다나 친박연대에서 해당 지역에 송영선 출마를 검토하는 바람에[* 송영선은 비례대표로 옮겨가 당선되었고, 이후 남양주시 갑으로 옮겨서 현직 당협위원장인 심장수의 지역구를 빼앗아 논란이 있었다. 알다시피 송영선은 이후 비리로 당에서 제명되었다.] 실제 출마 여부도 선거 등록 당일에서야 결정되는 등, 도저히 이길 수 없을 것처럼 보였는데도 이 당시 선거에서 불었던 친박 바람에 힘입어 당선되었다. 그리고 이때 이후로 3선 의원이 되는 동안 내내 쭉 [[친박]]계 세력의 핵심 인물로 자리매김한다.
  • 최수환 . . . . 3회 일치
         1981년 [[제1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한국당]] [[전국구]] [[대한민국 국회의원|국회의원]](제13번)으로 당선되었다. 1984년 말 [[홍사덕]], [[김현규]], [[서석재]], [[허경만]], [[박관용]], 손정혁, [[김찬우(1933)|김찬우]] 등과 민주한국당 탈당 선언을 하고 [[신한민주당]]에 입당하였다. 그러나 1985년 [[제1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한민주당 후보로 경상북도 포항시-영일군-[[울릉군]] [[선거구]]에 출마하였다가 [[민주정의당]] [[박경석(1937)|박경석]] 후보와 민주한국당 [[서종렬]]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통일민주당]] 후보로 경상북도 포항시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민주정의당 [[이진우(1934)|이진우]]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95년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민주자유당]] 후보로 경상북도 포항시장 선거에 출마하였으나 [[민주당(1991년)|민주당]] [[박기환(정치인)|박기환]]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 허화평 . . . . 3회 일치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경상북도 포항시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같은 해 [[김영삼]] 지지를 선언하며 [[제14대 대통령 선거]] 전 [[민주자유당]]에 입당하였다. 그러나 1995년 김영삼의 [[12.12 군사반란]] 및 [[5.18 민주화운동]] 관련 사법처리 조치로 기소되었다. 이에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포항)|북구]] 선거구에 무소속으로 옥중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그러나 12.12 군사반란 및 5.18 광주민주화운동과 관련하여 유죄 판결을 받아 국회의원직을 상실하였다. 이후 사면되었다.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국민당(2000년)|민주국민당]] 후보로,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같은 지역구에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다.
  • 구성재 . . . . 2회 일치
         2012년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새누리당]] [[공천]]에서 탈락하자 [[무소속]]으로 대구광역시 [[달성군(선거구)|달성군]]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새누리당 [[이종진]]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2016년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새누리당]] [[공천]]에서 탈락하자 [[무소속]]으로 대구광역시 [[달성군(선거구)|달성군]]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새누리당 [[추경호]]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 김만제 . . . . 2회 일치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자유당]] 후보로 [[서울특별시]] [[강남구]] 을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국가안전기획부]]의 흑색선전 공작에 대한 역풍으로 [[민주당(1991년)|민주당]] [[홍사덕]]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이후 1994년부터 1998년까지 [[포스코|포항종합제철]] [[회장]]을 역임하였다. 이는 역대 포스코 회장 중 유일한 외부인사 영입 사례이다.[[http://www.opinion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7672|#]]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한나라당]] 후보로 [[대구광역시]] [[수성구]] 갑 선거구에 출마하여 [[자유민주연합]] [[박철언]] 후보를 꺾고 당선되었다. 같은 해부터 2001년까지 한나라당 정책위의장을 역임하였다.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한나라당 공천에서 탈락하였다.
  • 김형태(정치인) . . . . 2회 일치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경상북도 [[포항시]] [[남구(포항)|남구]]-[[울릉군]]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현역]] [[지역구]] [[대한민국 국회의원|국회의원]]인 한나라당 [[이상득]]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2006년 [[한나라당]] [[여의도연구원|여의도연구소]] 정책자문위원회 홍보분과 부위원장에 임명되었다.
         2012년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새누리당]] 후보로 경상북도 포항시 남구-울릉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허나 선거 기간부터 과거 [[제수]]씨 [[성폭행]] 미수 의혹으로 곤욕을 치뤘다. 이후 조카에게 사과하는 녹취록이 유포되어서 큰 망신을 당했다. 동생의 아내와 외도를 한 [[라이언 긱스]]를 빗대 '포항긱스'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리하여 당선 직후 출당되어 [[무소속]]으로 지내다가 [[공직선거법]] [[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37169&yy=2013|위반]]으로 2013년 7월 의원직이 상실되었다.
  • 남유진 . . . . 2회 일치
         2006년 [[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5.31 지방선거]]에서 [[한나라당]] 후보로 [[경상북도]] 구미시장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이때까지는 경제가 호황이었고 D램 시장이나 여러 디스플레이 시장이 호황이었기 때문에 이 때까지는 괜찮았다. 수출액도 2006~2007년 400억 달러에 육박하는, 구미 역사상 최고액을 기록하기도 했고 [[2008년 글로벌금융위기|2008년 금융 위기]]가 터지긴 했지만, 갑자기 전 세계적으로 불황이 덮쳤기 때문에 이는 전국 모든 도시의 일부 대기업들과 꽤 많은 중소기업들이 박살나는, [[1997년 외환위기|IMF]]와 비견되는 그런 상황이었기에 남유진 한 사람 만의 책임으로 몰기엔 무리가 있었다. 어쨌든 기업들은 피터지는 환경을 겪긴 했어도 나름 선방했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그런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결국에는 또 3선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게다가 그 당시 [[박근혜|대통령이 대통령인지라]]. 결국 2014년 [[제6회 전국동시지방선거|6.4 지방선거]]에서도 [[새누리당]] 후보로 구미시장 선거에 출마하여 3선 고지에 올랐다. 그러나 이때 시민단체인 구미참여연대에서 만든 성남시와 비교카드뉴스가 화제가 되기도 하는 등 민심 이반이 곳곳에서 감지되고 있었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210856|*]]
  • 박경석(1937) . . . . 2회 일치
         1981년 초 민주정의당 대변인에 임명되었다. 같은 해 3월 치러진 [[제1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정의당]] [[전국구]] [[대한민국 국회의원|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다. 1985년 [[제1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이진우(1934)|이진우]] 대신 민주정의당 후보로 경상북도 포항시-영일군-[[울릉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민주한국당]] [[서종렬]] 후보와 동반 당선되었다.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자유당]] 공천에서 탈락하자 [[통일국민당]] 후보로 경상북도 영일군-울릉군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민주자유당 [[이상득]]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94년부터 1997년까지 [[대한지적공사]] [[사장]]을 역임하였다. 1998년부터 [[배재대학교]] 행정학과 객원[[교수]]로 근무하였다.
  • 박상규(정치인) . . . . 2회 일치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새천년민주당]] 후보로 [[인천광역시]] [[부평구]] 갑 선거구에 출마하여 현역 국회의원인 한나라당 [[조진형]] 후보를 꺾고 당선되었다. 같은 해부터 2001년까지 새천년민주당 사무총장을 역임하였다.
         [[이명박]] 정권 때인 2010년 [[민주당(2008년)|민주당]]에 복당하였다. [[2011년 하반기 재보궐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충주시장 선거에 출마하였으나 한나라당 [[이종배]]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 박세직 . . . . 2회 일치
         1992년 [[민주자유당]] 소속으로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 [[전국구]] [[국회의원]]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96년 [[신한국당]] 공천후보로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경상북도]] [[구미시]] 갑 선거구에 출마하여 자유민주연합 [[박재홍(1941)|박재홍]] 후보를 꺾고 재선되었다.
  • 박승호(정치인) . . . . 2회 일치
         2006년 [[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 2010년 [[제5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한나라당]] 후보로 경상북도 포항시장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친이]]계에 속하였다. 2008년 [[이상득]]의 국정개입 논란이 있었을 때 영포회 회원이라는 것이 거론되어 논란이 되었다.
         2016년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새누리당]] [[공천]]에서 [[김정재]]에 밀렸다. 이후 새누리당을 탈당하여 [[무소속]]으로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새누리당 김정재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이후 바른정당에 합류하여 2017년 3월 [[바른정당]]의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당협위원장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다시 탈당하여 자유한국당에 복당을 신청하였다.
  • 박종준 . . . . 2회 일치
         2012년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새누리당]] 후보로 충청남도 공주시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민주통합당]] [[박수현(정치인)|박수현]]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이후 2013년 6월부터 2015년 10월까지 청와대 [[대통령경호실]] 차장을 역임하였다.
         2016년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새누리당]] 후보로 [[세종특별자치시]]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친야 [[무소속]] [[이해찬]]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 백승주(정치인) . . . . 2회 일치
         2. 한국국방연구원 소속 연구자인 동시에 국방부 차관을 엮임하였기에 차관 임기를 마친 후에는 곧바로 조기퇴직과 함께 국회의원 출마하겠다는 의사를 주변인들에게 밝혔다고 한다. 전(前) 국방부 차관은 예비역 중장에 준하는 대우를 해줘야하는데, 한국국방연구원장도 예비역 중장이기에 모양새가 이상해져서 그냥 국회의원을 하기로 했다고...--한 하늘에 두 개의 4스타는 있을 수 없다!--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새누리당]] 후보로 3월 13일 공천되었다. 출마 지역구는 본인의 고향인 구미 갑 지역. 여당 텃밭인 경북, 그것도 박정희 전 대통령의 고향으로서 박근혜 현 대통령에 대한 지지가 높은 구미에서 출마하는 만큼, 무난히 국회에 입성할 것으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 서상기 (1946년) . . . . 2회 일치
         '''서상기'''(徐相箕, [[1946년]] [[1월 29일]] ~ , [[대구광역시|대구]])는 [[대한민국]] 정치가이다. [[한나라당]] 비례대표로 제17대 국회의원이 되었고, [[새누리당]]으로 [[대구 북구]]에 출마하여 제18대, 제19대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다.
         [[2012년]] [[4월 11일]] [[대한민국 제19대 국회의원 선거|19대 총선]]에서도 대구 북구을에 출마하여 당선, 3선의원이 되었다.
  • 안병용(기초단체장) . . . . 2회 일치
         [[2010년]], [[제5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민주당(2008년)|민주당]] 후보로 경기도 의정부시장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현직 시장인 [[김문원]] 시장이 한나라당을 탈당하여 무소속으로 출마함으로써 보수 표가 분산되어서 당선될 수 있었으며, [[한나라당]] 김남성 후보가 [[경민대학교]] 교수여서 경민학원의 [[홍문종(정치인)|홍문종]], 신흥학원의 [[강성종]] 간 대리전이라는 분석이 있다.
         [[2014년]], [[제6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새정치민주연합]] 후보로 의정부시장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이번에는 김문원 전 시장의 지지 선언을 받았다.
  • 유승민(정치인) . . . . 2회 일치
         무소속으로 20대 국회의원 당선 이후 새누리당에 복당하여 당내에서 꾸준히 당 개혁의 목소리를 내고 당의 진로와 박근혜 대통령에 대해 쓴소리를 하다가 최순실 게이트를 계기로 2017년초 탈당하고 나와 바른정당을 창당했다. 현재는 대선주자로도 뛰는 등 바른정당의 간판으로 활동 중이며, [[2017년]] [[11월]] [[전당대회]]에 출마하여 '''제3대 바른정당 대표'''가 되었다.
         당시 파업 중인 노조대표들과 면담하는 유승민. 심지어 당시는 2012년 총선 직전이였다. 당시 여당이였던 [[한나라당]]의 심장과도 같은 [[대구광역시]]에서 출마하는 한나라당 후보자가 당시 정부에 반대되는 소신을 지킨 것.
  • 이강덕 . . . . 2회 일치
         2014년 [[제6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새누리당]] 후보로 포항시장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2018년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자유한국당]] 후보로 포항시장 선거에 출마하였다 여론조사 상으로는 5% 안팎의 치열한 접전이 예상되었고, 실제로도 불과 7.7% 차이로 재선에 성공하였다.
  • 이민호(1987) . . . . 2회 일치
         특히 [[필리핀]]에서 이민호는 이름만 대면 다 아는 어마어마한 스타라고 한다. [[필리핀]]에서는 팬미팅할 때 [[비욘세]]나 [[머라이어 캐리]]보다 더 많은 인원이 몰려든다고 할 정도.[* [[필리핀]]에서 디바형 [[미국]] 가수의 인기는 어마어마하다. 유튜브만 검색 해 봐도 남녀노소 디바의 노래를 따라 부르는 영상이 수두룩하다. 즉 이민호의 인기가 정말로 어마어마하다는 소리.]
  • 이원형(1951) . . . . 2회 일치
         [[1991년 지방선거]]에서 [[민주자유당]] 후보로 대구직할시의회 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고 1995년까지 역임하였다.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정창화(정치인)|정창화]]와의 [[공천]] 경합에서 승리하여 [[신한국당]] 후보로 [[대구광역시]] [[수성구]] 갑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자유민주연합]] [[박철언]]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97년 [[제15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한나라당 중앙당 부대변인에 임명되었다.
  • 이준섭(군인,정치인) . . . . 2회 일치
         1978년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공화당(1963년)|민주공화당]] 후보로 충청남도 연기군-대덕군-[[금산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신민당(1967년)|신민당]] [[유한열]] 후보와 동반 당선되었다. 이후 민주공화당 원내부총무를 역임하였다.
         1981년 [[제1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한국국민당(1981년)|한국국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민주정의당]] [[천영성]] 후보와 [[민주한국당]] 유한열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이후 석유개발공사 부사장 등을 역임하였다.
  • 이판석 . . . . 2회 일치
         1995년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무소속]]으로 경상북도지사 선거에 출마하였으나 [[민주자유당]] [[이의근]]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97년 [[제15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자유민주연합]]에 입당하였다. 1998년 [[제2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자유민주연합 후보로 경상북도지사 선거에 출마하였으나 역시 [[한나라당]] 이의근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 전관 . . . . 2회 일치
         그는 2007년 [[대한민국 제17대 대통령 선거]]에 기호 9번으로 출마하였다.
         2007년 대선 출마 당시 [[새시대참사람연합]] 소속으로 출마하여, 당시 대선 포스터는 '''지키자, 대한민국!'''이라는 로고를 새겨넣고 철모와 함께 있는 모습이었다. 보병 제9사단장 및 [[학생중앙군사학교]]장을 지낸뒤 소장으로 예편하였다.
  • 정승화(육군) . . . . 2회 일치
         이후 남한산성에서 형기를 채우다가 형집행 정지로 출옥하여 조용히 지내다가 세간에 등장하게 되는 계기가 생기니 그것이 87년 대선이다. [[1987년]] [[6월 항쟁]]의 결과로 직선제로 치러지게 된 [[제13대 대통령 선거]]에는 야당의 [[김영삼]]-[[김대중]]이 후보단일화에 실패했고, 거기다가 재야 진보진영에서 [[백기완]]까지 출마하면서 야당표의 분산으로 노태우 당선(당시 김영삼과 김대중 등 두명이 하나로 단일화됬어도 노태우가 대선에 당선될일은 없었을것이라고 한다. 노태우는 어부지리로 대통령에 무혈입성)이 유력하였다. 정승화는 이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김영삼]]의 삼고초려 끝에 1987년 대선 직전 [[통일민주당]]의 상임고문 겸 부총재로 전격 등장했다.
         공식선거운동 시작 직후 김영삼이 정승화를 통일민주당 부총재로 영입하자 김영삼의 지지율이 1위로 치솟았다. 그러나 [[대한항공 858편 폭파 사건]]이 터지고 선거 바로 전날 [[김현희(1961)|김현희]]가 [[김포국제공항]]에 도착하면서 엄청난 북풍이 불었고, 3김이 서로 먼저 대통령 해보겠다고 동시출마하는 병크까지 터뜨려, 결국 제13대 대통령 선거 결과는 노태우-36%, 김영삼-27%, 김대중-26%, 김종필-7%[* 보면 알 수 있듯, 3김이 단일화만 했어도 노태우는 절대 당선될 수 없었다.], 즉 여당인 [[민주정의당]] 대표 노태우의 당선으로 마무리되었다.
  • 토리코/378화 . . . . 2회 일치
          * 그는 열심히 기술을 연마하다 새벽2시 쯤 돼서 쉬러 가는데, 다른 조리실에서 누군가 밤늦도록 조리에 몰두하고 있다.
          * 때마침 나카우메도 합류. 우메도 그 시절부터 함께 밤을 새가며 기술을 연마하던 친구이자 라이벌이다.
  • 풍운 . . . . 2회 일치
         회공이 나중에 사부의 복수를 위해서 연철수를 연마하기 위해 제석천을 찾아가 천문과 엮이게 되면서, 천문 스토리가 시작된다. 제석천의 정체를 알게 되자 상대가 안됨에도 제석천과 필사적으로 대결을 벌이게 되고, 제석천을 경악하게 만들 정도의 연철수의 위력을 보여주지만, 결국 제석천에게 죽음을 맞고 만다. 회공의 죽음을 보고 보경운이 '회형제'라고 하면서 눈물을 흘리며 감명을 받을 정도로 감동적. 정말 이 만화에서 보기 드물게 순수하고 올곧은 청년이라 회공의 죽음은 감명이 깊다.
         이후 어찌어찌 흘러가서 '천문'에 가담. 그러나 이미 풍운과의 실력차가 어마어마하게 나서 별다른 활약을 보여주지 못하고 은근슬쩍 퇴장한다.
  • 권은희 (1959년) . . . . 1회 일치
         '''권은희'''(權恩嬉, [[대구광역시|대구]], [[1959년]] [[5월 24일]] ~ )는 [[대한민국]]의 컴퓨터공학자이다. 정계에 진출하여 [[2012년]] [[새누리당]]으로부터 공천을 받아 대구에서 당선되어 [[대한민국 제19대 국회의원 목록|대한민국 제19대 국회의원]]이 되었다. 20대 총선에는 공천을 받지 못하고 컷오프 되었으며, 탈당하여 무소속으로 출마하였다.<ref>[http://www.newsis.com/ar_detail/view.html?ar_id=NISX20160320_0013969591&cID=10301&pID=10300 與권은희 무소속 출마…유승민계 두 번째 탈당] 뉴시스, 2016년 3월 20일</ref> 바른미래당 전당대회에서 6.85%를 얻어 4위 안에 들지 못했으나, 여성 몫으로 최고위원이 되었다.<ref>{{뉴스 인용|url=https://news.sbs.co.kr/news/endPage.do?news_id=N1004917155|제목=바른미래당, 전당대회…손학규 신임 대표 선출|성=남정민|날짜=2018-09-02|뉴스=SBS NEWS}}</ref>
  • 긴나라 . . . . 1회 일치
         고대 베다 문헌, [[마하바라타]],[[라마야나]] 등에는 킴푸루사(Kiṃpuruṣa)라는 유사성이 많은 존재와 등장하는데, 긴나라와 킴푸루사의 관계는 불분명하다. 킴푸루사 역시 ‘(어떤) 사람인가’라는 뜻으로서, [[자타카]]에서 운문 자타카가 산문 자타카로 옮겨지면서 킴푸루사가 긴나라로 바뀌는 경우가 있어 후대에 혼동이 일어난 것으로 보기도 한다.
  • 김대환 (법조인) . . . . 1회 일치
         자격정지3년을 선고하면서 박일룡 전 안기부 1차장에게 징역2년 집행유예3년 자격정지2년, 임광수 전 101실장과 임경묵 전 102실장 등 전직 안기부 간부 4명에게 징역8월~1년6월 집행유예2~4년 자격정지1~2년을 선고하면서 [[김대중]] 후보를 비방하는 X파일 시리즈를 게재한 격주간지 인사이더월드 발행인 손충무에게 징역2년을 선고했다.<ref>한겨레 1999년 1월 23일자</ref> 4월 26일에 대통령과 함께 찍은 것처럼 합성한 사진을 선거공보에 실은 허위사실공표죄에 대해 벌금150만원을 선고했다.<ref>한겨레 1999년 4월 27일자</ref> 5월 20일에 [[자민련]] 후보가 시장 후보를 결정하자 무소속 후보로 출마하면서 [[새정치 국민회의]]의 추천을 받았다며 선거운동을 했던 경기 안성시장 [[한영식]]에게 원심대로 징역8월 집행유예2년을 선고했다.<ref>동아일보 1999년 5월 21일자</ref> 8월 31일에 성남시 지하상가 개발업자로부터 금품을 받은 [[오성수]] 전 성남시장에 대해 징역5년 추징금 1억6천만원을 선고하면서 공직선거법 위반에 대해 벌금100만원, 업무상 횡령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ref>한겨레 1999년 9월 1일자</ref>
  • 김민희(1982) . . . . 1회 일치
         그 뒤로 [[2012년]] 《[[화차(영화)|화차]]》, [[2013년]] 《연애의 온도》, [[2014년]] 《[[우는 남자]]》, [[2015년]]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 [[2016년]] 《[[아가씨(영화)|아가씨]]》 등을 통해 좋은 연기[* 데뷔 때와 비교하면 연기가 어마어마하게 자연스러워지고 섬세한 표현력이 증가하였다.][* 《서프라이즈》와 《[[아가씨(영화)|아가씨]]》의 편집 감독이 같은 사람인데, "그 때의 김민희와 지금의 김민희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라며 극찬했다.]를 선보이며 다수의 영화제에서 수상하고 흥행에 있어서도 안정적인 면모를 과시하며 평단과 대중 모두에게 "연기 잘 하는 배우"라는 평가를 새롭게 듣게 되었다.
  • 김병윤 . . . . 1회 일치
         1971년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공화당(1963년)|민주공화당]] 후보로 신설 [[지역구]]인 경상북도 포항시-[[울릉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 김옥이 . . . . 1회 일치
         육군 대령 예편 이후 [[새누리당|한나라당]] 소속의 제18대 국회의원(비례대표)을 지냈고, 18대 총선에 비례대표로 출마하기 전에는 경기도 의회 비례의원이었다.<ref>[http://cnbnews.com/category/read.html?bcode=34888]</ref>
  • 김우중 . . . . 1회 일치
         [[1989년]]에 펴낸 자서전인《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는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1992년]] 제14대 대한민국 대통령에 출마하려 했으나 [[김영삼]]의 압박으로 불발되었다. [[1993년]] [[대우그룹]]은 세계경영을 선포하였고 또한 김우중은 [[1987년]]부터 [[1993년]]까지 [[대한축구협회]]의 회장을 맡았다. 하지만 [[1990년]] 장남 선재를 잃고, [[1996년]]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의 비자금 사건에 연루되었으나 위기를 잘 넘기며 [[대우그룹]]을 [[1998년]]에 재계 2위로 이끌며 성장시켰다.
  • 김진선(군인) . . . . 1회 일치
         1998년 당시 공동여당이던 [[자유민주연합]]에 입당했다.이후 자유민주연합을 탈당하고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여당이던 [[새천년민주당]] 후보로 고향이 포함된 [[진천군]]-[[음성군]]-[[괴산군]] [[선거구]]에 출마하지만 [[현역]] [[지역구]] [[대한민국 국회의원|국회의원]]이던 자유민주연합 [[정우택]] 후보에 밀려 낙선. 낙선 이후에는 별다른 활동이 없었다.
  • 김충섭 . . . . 1회 일치
         공직을 퇴직한 이후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 무소속으로 김천시장에 출마하게된다. 김천시장직은 박보생 시장이 3선 연임제한에 걸려 출마할 수 없었기에 도전하는 사람이 많았는데 아무래도 TK지역 여당인 [[자유한국당]] 공천을 바라며 경선에 참여한 사람이 많았다. 하지만 공천을 정하는 과정에서 불투명한 여론조사와 당원투표 등 여러 문제로 공천 잡음 들이 생겨나게된다. 이러한 문제 들로 인해 이에 불복한 [[최대원|시장 후보 중 한명]]은 아예 탈당하고 체급을 올려 국회의원 재보궐 선거에 나가게 되었다. 공천 문제로 분열된 자유한국당은 원래 보수층의 지지를 받고 [[더불어 민주당|친여 세력]]의 지원사격까지 받으며 진보층 세력까지 흡수한 김충섭 후보에게 시장직을 내주고 [[이철우(1955)|전직 의원]]이 경북도지사 후보로 영전함에도 불구하고 후계자 격인 [[송언석]] 후보는 최대원 후보에게 1%정도 차이로 초박빙 승부를 벌이는 모습을 보이며 국회의원직도 겨우 당선되는 등 옆동네인 구미와 함께 자유한국당에게 엄청난 충격을 안겨주었다.
  • 나용찬 . . . . 1회 일치
         2014년 [[제6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는 [[새누리당]]의 괴산군수 공천에서 탈락하였다. 전임자 [[임각수]]의 [[군수]]직 상실로 치러진 [[2017년 4월 재보궐선거]]에서 무소속으로 충청북도 괴산군수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그러나 [[공직선거법]] 위반으로 2018년 4월 군수직을 상실하였다.
  • 나의 히어로 아카데미아/123화 . . . . 1회 일치
          * [[토오가타 밀리오]]는 어마어마하게 포지티브하지만 심각한 마이페이스다.
  • 나의 히어로 아카데미아/126화 . . . . 1회 일치
          * 나이트아이가 인턴을 받는 조건은 "반드시 그를 웃길 것"인데, 원래 유머감각이 없는 미도리야는 필사적으로 연마하던 "올마이트 흉내내기"를 시전한다.
  • 나의 히어로 아카데미아/98화 . . . . 1회 일치
          * 쉬어가는 에피소드지만 정보량이 어마어마하다.
  • 마기/343화 . . . . 1회 일치
          알리바바가 백룡과 싸우다 잠시 죽었을 때의 일이다. 알리바바는 잠시 여행 다녀온 것 같은 말투로 말하지만 그 내용이 어마어마하다.
  • 바키도/108화 . . . . 1회 일치
          * 따지고 보면 무사시의 과시욕, 공명심은 바키 월드의 "순수한 투쟁심"이란 테마하고는 전혀 이질적이다.
  • 박근혜 . . . . 1회 일치
         [[1998년 대한민국 재보궐선거|1998년 재보궐선거]]에서 당선된 박근혜는 [[대한민국 제19대 국회|제19대]]까지 5선 국회의원을 지냈다. 2004년부터 2006년까지는 [[한나라당]]의 대표최고위원을 역임하였으며, 2007년 한나라당의 [[대한민국 제17대 대통령 선거|제17대 대선]] 후보 경선에 출마하였지만 [[이명박]]에게 석패하였다. 이후 [[이명박 정부]] 기간 동안 한나라당 내 비주류계를 이끌었다.
  • 박창달 . . . . 1회 일치
         15대 총선에서 전국구 26번으로 출마하였지만 너무 순번이 뒤쪽에 있어서 당연히 낙선...했는데 임기 다 끝나가는 2000년 3월에 현역 [[윤원중]] 전국구 의원이 탈당하면서 의원직을 승계, 3달짜리 국회의원직을 수행했다. 물론 15대 국회 막바지여서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이 문제는 16대 국회에서 새천년민주당 전국구 의원이 '''2004년 5월'''에 사퇴하여 '''임기가 1달도 안되는 의원'''이 탄생하여 다시 문제제기되었고, 이후 잔여임기가 얼마 안남은 비례대표 의원이 자격을 상실 혹은 사퇴할 경우에는 승계하지 않도록 법이 바뀐다.] 대신 16대 총선에서 안정권인 15번을 받고 당선되었다.
  • 북유럽 신화 . . . . 1회 일치
          * 위그드라실 : 유그드라실, 이그드라실 등등 다양한 이름이 있다. 어마어마하게 거대한 나무로 온 세계를 떠받치고 있다고 한다. 라그나로크에서 불타버린다.
  • 블랙 클로버/82화 . . . . 1회 일치
          * 바네사의 실 마법은 계속 연마하면 운명 조차 조종하는게 가능하다고 말한다.
  • 블러드와인드 . . . . 1회 일치
         미국에 노예제도가 있던 시절, 제이콥 휘트니라는 인물이 운영하는 면 재배지가 있었는데 그곳의 노예들은 모든 노예들의 불행과 눈물에서 창조된 블러드젬을 연마하기 위해 25일 밤 넘게 자신들의 혈액을 이용한 고대의식을 치루었고, 이후 블러드젬은 휘트니를 영원히 가두었다.
  • 상디 . . . . 1회 일치
          * 현상금이 걸리고부터 굉장히 안습한 행보를 걷고 있는데, 그 첫째가 발라티에 종업원들이 포스터를 보고 대폭소하고는 손님들한테 어마어마하게 뿌리고 있다는 것이요, 그 둘째가 우연히 포스터 사진과 같은 얼굴을 한 [듀발]한테 처음 보는데도 엄청나게 미움 받은 것이요, 그 셋째가 여자를 좋아하는데 2년 간 오카마만 넘쳐나는 뉴하프만 왕국에 쳐박혔던 것이다. ~~사실 이게 제일 불쌍해~~ ~~[[몽키 D 루피|선장]]은 [[보아 행콕|해적 여제]]와 그 여전사들이랑 알콩달콩 잘 지냈는데...~~
  • 서상일 . . . . 1회 일치
         그러나 그후 [[한민당]]을 탈당하고 야당 정치인으로 활동했다. 48년 5월 초대 제헌국회의원 선거에서 대구 을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6월 1일]] 헌법기초위원회 위원장에 선임되었다.<ref>[http://100.nate.com/dicsearch/pentry.html?s=B&i=208337&v=44 '헌법기초위원회' - 네이트 백과사전<!-- 봇이 따온 제목 -->]{{깨진 링크|url=http://100.nate.com/dicsearch/pentry.html?s=B&i=208337&v=44 }}</ref>
  • 서훈 (1942년) . . . . 1회 일치
         경북대학교 법대 재학시 총학생 회장으로 6.3 한일 굴욕회담 반대 투쟁을 주도하였고 ROTC 대위로 전역한 이후 신민당 시절 김영삼 의원 보좌관으로 정치에 입문했다. 이후 대구에서 신민당, 통일민주당 공천으로 국회의원에 출마하였으나 번번히 낙선하였다. 영남지역 재야 민주화 운동 지도자로 교육에도 관심이 높아 가난한 지역학생들을 위해 팔공 재건학교와 같은 야학을 오랬동안 운영하였다. 1990년에 김영삼 총재가 3당 합당을 선언하고 민주자유당을 창당했을때 이를 민주화 세력에 대한 배신으로 규정하고 오랜 정치적 후원자였던 김영삼 총재와 결별하게 된다.
  • 송아영 . . . . 1회 일치
         [[이명박 정부]] 때 자유선진당에서 충청남도당 여성위원장, 뉴 선진비전 여성위원회 대표 등을 지내며 정치에 입문하였다. 2012년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자유선진당]] [[비례대표제|비례대표]] [[대한민국 국회의원|국회의원]](제5번)으로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다. [[제18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자유선진당의 후신 [[선진통일당]]이 [[새누리당]]에 흡수될 때 합류하였고 새누리당 세종특별자치시당 대변인을 지냈다.
  • 송언석 . . . . 1회 일치
         [[이철우(1955)|이철우]]가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 출마하기 위해 당협위원장직을 사퇴하자 2018년 2월 자유한국당에 입당하여 김천시 당협위원장으로 임명되었다.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와 동시에 치러질 [[2018년 재보궐선거]]에서 경상북도 김천시 [[선거구]]에 출마할 후보로 [[공천]]되었다.
  • 슈가(방탄소년단) . . . . 1회 일치
          * 본가에서 홀리라는 강아지를 키우고 있다. 홀리의 종은 갈색 푸들로, 현재 슈가가 홀리만 생각하면 입동굴을 개장하는 등 상당히 팔불출적인 면모를 보이고 있다. 사실 이전에 홀리를 키우기 전에는 강아지를 그닥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다는데 홀리 자랑하는 모습만 보면 영락없는 사랑꾼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I6bYnc6KWvg|슈가의 홀리 사랑]] 멤버 피셜 홀리부심이 어마어마하다고 한다. [[제이홉]]이 키우는 강아지 미키를 보고 자기가 본 강아지 중 이렇게 말 안 듣는 강아지는 처음 봤다고 말하는 반면[* 사실 알고 보니 그 강아지는 미키가 아닌 다른 강아지였다고 한다. 누구의 강아지인지는 모른다고 한다.] 우리 홀리는 너무 똑똑하다는 말을 하여 [[방탄소년단]]의 견주들에게 빈축을 샀다. [[https://www.youtube.com/watch?v=WJolE9dumds|링크]] 처음 홀리의 모습을 공개했을 때의 조막만한 모습과는 달리 사진이 올라올 때마다 놀라울 정도로 폭풍성장한 모습을 보여 팬들에게 볼 때마다 초면인 인상을 주고 있다. --[[RM]]: 홀리 솔직히 처음에가 더 예뻤어요-- --RM의 말에 고개를 떨구는 슈가가 킬링--
  • 식극의 소마/218화 . . . . 1회 일치
          멋대로 무언가를 양보한 소마가 "에리나가 벌써 3명을 정했을지 모른다"며 서둘러 돌아가자고 한다. 쿠가가 분위기에 휩쓸려 그를 따라가지만 곧 "빚이라고 생각하지 않겠다"고 츤데레스럽게 선을 긋는다. 그러면서 답지도 않은 연극까지 한다고 툴툴대는데 소마는 모른척하며 그런거 보단 자기는 [[식극의 소마/162화|전에 츠카사 에이지와 싸운 적]]이 있으니 이번엔 쿠가 선배의 차례라는 논리를 펼쳤다. 그런데 이게 쿠가의 심기를 건드렸다. 자신과의 대전은 한사코 피하는 츠카사가 왜 소마하고는 승부했단 말인가?
  • 식극의 소마/222화 . . . . 1회 일치
          * 메기시마는 자신의 "라면도"를 연마하기 위해 포장마차를 끌고 전국을 돌던 도중, 분쟁이 일어난 가게들의 크고 작은 문제를 해결해주며 명성을 쌓았다.
  • 심학봉 . . . . 1회 일치
         2012년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새누리당]] 후보로 경상북도 [[구미시]] 갑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그런데 성폭행 의혹을 사면서 형사법 위반 여부를 떠나 품위에 맞지 않는 성관계 (기혼이면서 기혼여성과 성관계)로 제명위기에 몰리자 2015년 본회의 표결 당일 자진사퇴하였다.
  • 야마우바 . . . . 1회 일치
         야만바(ヤマンバ) 라고도 하며, 다른 이름으로는 야마온나(山女), 야마히메(山姫), 야마죠요로우(山女郎), 야마하하(山母), 오니바바(鬼婆) 같은 것이 있다.
  • 요괴:냉장고 . . . . 1회 일치
         || 엄마가 밥먹듯이 해주던 말이 혼자서 냉장고 근처에 가지 말라는 거였어요. 그건 내가 중학생이 될 때까지 계속됐는데 사이다나 아이스크림 꺼내먹으려고 냉장고에 기웃거리자면 어김 없었죠. 엄마는 내가 문을 열고 멍청하게 서있는다고, 그러면 전기세가 어마어마하게 늘어난다고 핑계를 댔는데 나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그 말은 믿지 않았어요. 엄마도 간장병을 찾는다고 5분씩 문을 열어놓기가 일쑤였거든요. 또 엄마는 자기가 보는 앞에서는 내가 아무리 문을 열었다 닫았다 해도 뭐라고 하지 않았어요. 그러니까 그 얘기는 핑계에 지나지 않는다고 눈치 챌 수 밖에 없죠.
  • 우건도 . . . . 1회 일치
         2010년 [[제5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민주당(2008년)|민주당]] 후보로 충청북도 충주시장 선거에 출마하여 현직 시장인 [[한나라당]] 김호복 후보를 누르고 당선되었다. 그러나 허위사실 유포([[공직선거법]] 위반)로 [[대법원]]의 판결에 의해 2011년 시장직을 상실하였다.
  • 울릉군 . . . . 1회 일치
         포항시-영일군 통합 전에는 영일군과 같은 선거구에 소속하였다. 꽤 오랫동안 이상득 의원이 의원직을 6번이나 했다가 불출마했는데, 후임 김형태 의원은 성추행 논란을 일으키며 그 당에서 쫓겨나더니 결국 선거법 위반으로 의원직을 상실했다. 물론 재선 결과 [[새누리당]] 박명재 후보가 당선되었으며, 이후 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재선에 성공했다. 다만, 20대 국회의원 선거 당시 박명재 의원을 제외한 나머지 야당 후보[* 당시 [[민중연합당]] 후보가 출마했다.]와 무소속 후보는 '''울릉도를 한 번도 방문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리 새누리당 텃밭이라 하지만 다른 후보들의 무관심으로 박명재[* 행정고시를 합격한 관료 출신으로 노무현 정권기에 행정자치부 장관을 하다가 2013년 새누리당에서 국회의원 출마하였다.] 의원이 여유있게 몰표를 가져갔다.
  • 원피스/852화 . . . . 1회 일치
          보물전 앞에서 경비를 총괄하고 있는 [[샬롯 스무디]]는 이 또다른 난동을 접하고 골치 아파한다. 그녀는 징베의 모반 사실을 은폐하기로 결정한다. 기분파인 빅맘이 이 소식을 들으면 어떻게 돌변할지 모르고 내일의 "계획"도 장담할 수 없다. 스무디는 보물전이 있는 4층을 철저히 봉쇄하고 3층 이하에서 루피 일행을 몰살하는 걸로 사건을 무마하려 한다.
  • 윤덕홍 . . . . 1회 일치
         민주진보진영 서울시교육감 후보 단일화 경선에 참여하지 않았던 윤덕홍은 단일화 불참 이유에 대해 "경선을 몰랐고, 서울시교육감 선거에 갑자기 출마하게 됐기 때문에 그때는 경선에 관심도 없었다"고 해명했지만, '서울 교육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는 상태에서 출마를 했다'는 또 다른 논란을 낳았다.
  • 은혼/601화 . . . . 1회 일치
          * 지난 회의 똥잔치를 시리어스로 무마하려는 듯 하다 결국 본성을 드러내고 만 에피소드.
  • 은혼/613화 . . . . 1회 일치
          그러나 이 거대한 칭코가 불행이 되어 말을 타던 중 칭코가 절벽 위의 나뭇가지에 휘감기는 사고가 발생, 그대로 낙마하면서 절벽 아래로 떨어져 절명하고 만다.
  • 이광수(배우) . . . . 1회 일치
          * 런닝맨 '7개의 숟가락' 특집에서 이광수의 집이 공개됐는데 어마어마하게 많은 피규어로 덕밍아웃을 했다. 스타워즈, 마블, 디씨 뿐만 아니라 원피스, 드래곤볼 등등 미국, 일본 구분 없이 덕질을 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 이만섭 . . . . 1회 일치
         하지만 [[한국국민당 (1981년)|한국국민당]]은 [[1987년]] [[10월]]부터 소속 의원들이 대거 탈당하여 [[신민주공화당]]에 입당하며 점차 와해되기 시작했고 다음 해 [[대한민국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제13대 총선]]에서 본인을 비롯하여 모두 낙마하였다. 이후 [[3당합당]]으로 탄생한 [[민주자유당]]에 합류하였고 이후 제14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어 국회의장을 지내기도 하였으며, 그 후 [[민주자유당|민자당]]의 상임고문을 거쳐 [[신한국당]]의 제15대 국회의원으로 다시 당선되었다.
  • 이차영 . . . . 1회 일치
         [[2018년]]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더불어민주당 후보로 [[충청북도]] 괴산[[군수]]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 인왕 . . . . 1회 일치
         절을 지키는 수호신으로서, 분노한 표정을 짓고 있다. 2체의 금강역사를 묘사할 때는 한 쪽은 입을 벌리고, 다른 한쪽은 입을 다물고 있다. 입을 "아~!"하고 벌리고 있는 것을 아형(阿形), 입을 "훔~!" 하고 다물고 있는 것을 훔형(吽形)이라고 부른다. 아형은 나라연금강, 훔형은 밀적금강이라고도 부른다. 갑옷을 입은 형상으로 묘사되거나, 상반신 나체의 모습으로도 그려진다. 오분율에 따르면 석가모니 곁에는 항상 500명의 금강역사가 있다고 한다.
  • 장서희(1972) . . . . 1회 일치
         [[인어 아가씨]]에 출연하기 이전까지는 무려 '''13년 동안''' 조연이나 단역으로 출연하였다. 아역 시절까지 더하면 21년(...). 그래서 출연 작품도 어마어마하게 많다. 하여 아래에는 주연, 꽤나 비중있는 조연을 맡은 작품만 기술하였다.
  • 장성환 . . . . 1회 일치
         [[1973년]] 제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서울특별시 용산구-마포구 선거구에 [[민주공화당]] 후보로 출마하였으나 중선거구제임에도 신민당 복수공천을 받은 [[김원만]], [[노승환]]에 밀려 낙선하였다.
  • 장후영 . . . . 1회 일치
         [[4·19 혁명]]이 성공한 뒤 [[대한민국 제2공화국|제2공화국]]에서 특별검찰부장으로 내정되었다가 반대가 심해 낙마하였다.<ref>{{뉴스 인용
  • 전태일 . . . . 1회 일치
         [[1970년]] [[9월]] 전태일은 [[한미사]]의 재단사가 되었다가, 같은 [[9월]] [[왕성사]]의 재단사가 되었다. 재봉사보다 지위가 높은 재단사로 일하며 이전의 바보회를 발전시킨 [[삼동친목회]]를 조직하고 회장에 선임되었다. 그 뒤 다시 노동실태 조사 설문지를 돌려 126장의 설문지와 90명의 서명을 받아 '[[평화시장 (서울)|평화시장]] 피복제품상 종업원 [[노동권|근로조건]]개선 진정서'라는 이름으로 [[노동청]]에 진정서를 제출한다. 이 내용이 [[경향신문]]에 실려 주목을 받자, 전태일 등 삼동회 회원들은 본격적으로 임금, 노동 시간, 노동환경의 개선과 [[노동 조합]] 결성 등을 위해 사업주 대표들과 협의를 벌였으나, 일을 무마하려는 [[정부]]의 약속 위반으로 인해 번번이 무위로 돌아갔으며, [[자본가]]들도 삼동회는 [[사회주의]] 조직이라고 헐뜯음으로써 [[노동자]]들이 노동운동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방해하였다. 그해 [[10월]]부터 그는 [[노동권|근로조건]]개선 시위를 주관하였다.
  • 정해창(정무직공무원) . . . . 1회 일치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경상북도 김천시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신한국당]] [[임인배]]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 조길형(1962) . . . . 1회 일치
         2014년 [[제6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새누리당]] 후보로 충청북도 충주시장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당시 [[서울특별시]] [[영등포구]]청장 당선자가 [[동명이인]][* [[새정치민주연합]](현 [[더불어민주당]]) [[조길형(1957)|조길형]] 후보. 한자도 항렬도 같다.]이라서 화제가 되었다. 2018년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도 [[자유한국당]]의 공천을 받아 접전 끝에 당선된다.
  • 조응천 . . . . 1회 일치
         결국 불출마 선언을 했던 [[더불어민주당]] [[최재성(정치인)|최재성]] 의원의 지지를 받아 [[최재성(정치인)|최재성]] 의원의 지역구인 [[경기도]] [[남양주시 갑]] 선거구에 출마하였다. 상대 후보인 [[새누리당]] [[심장수]] 후보는 [[남양주시]]에서 3번이나 국회의원 선거에 도전했던 지역 토박이였던 데다가 지역구 관리를 상당히 갈고닦았던 반면, 조응천 후보는 [[남양주시]]와는 어떠한 연고도 없는 정치 초년생이었기 때문에 우려의 시선을 보내는 이들이 많았으나, 최종 개표 결과 [[새누리당]] 심장수 후보를 249표 차이로 아슬아슬하게 꺾고 신승했다.[* 조응천이 [[수동면]]과 [[화도읍]]에서 심장수에 밀렸지만 젊은 층 인구가 많이사는 [[호평동]]과 [[평내동]]에서 심장수를 앞섰다.] 이는 경기도 내에서는 최소표차로 당선된 것이다. 또한 정권 심판론이 좀 더 강하게 작용한 결과로 풀이된다.
  • 진격의 거인/96화 . . . . 1회 일치
          * 애니가 역할을 너무 잘 수행한 덕에 예상보다 많은 무지성 거인이 몰려왔다. 라이너는 갑옷의 거인으로 변해 거인화를 푼 애니를 보호했다. 그리고 베르톨트를 벽 앞에 내려주었다. 이제 베르톨트의 차례다. 벽을 부수고 빠져나와야 한다. 하지만 처음 마주한 벽은 어마어마하게 컸다. 기가 약한 베르톨트는 금방 "내가 이런걸 파괴할 수 있을까?"라고 의문을 품었다. 그의 눈 앞에 있는건 윌 마리아의 본체가 아니라 미끼 구역의 장벽, 방어선에 지나지 않았다. 정말 그에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일행은 두 개의 벽을 전부 돌파할 수 잇을까? 그러는 동안에도 무지성 거인들이 산사태처럼 쏟아져오고 있었다. 여기서 벽을 파괴하지 못하면 작전은 시작도 못한다. 일행은 벽과 무지성 거인 사이에 끼어 죽을 것이다.
  • 최서일 . . . . 1회 일치
         1906년 서울에서 출생하였다.<ref>통천최씨 족보에는 전라남도 완도군 약산면 관산리에서 출생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ref> [[도쿄 대학|동경제국대]] 수산대를 졸업하였다. 대학 졸업 이후 [[조선총독부]] 산업기사를 지냈다. 해방 이후 (주)조선수산개발 사장으로 사업을 펼치다 공직에 들어섰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대한민국 상공부|상공부]] 수산국장과 초대 해무국장을 지냈다. [[1960년]] 해무청 청장에 임명되었다. 1963년 [[민주공화당 (대한민국)|민주공화당]] 소속으로 [[완도군]]에 국회의원으로 출마하여 제 6대 국회의원으로 선출되었다. 민주공화당 중앙상임위원을 지냈다. 1970년에 사망하였고, 묘는 양주군 모란공원에 위치하고 있다.
  • 최선 (정치인) . . . . 1회 일치
         '''최선'''(崔善, [[1974년]] [[1월 28일]]~)은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다. 서울시 강북구 삼양동에서 태어났으며 [[서경대학교]] 일어학과를 졸업했다. 현재 서울시 강북구 의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현재 [[민주통합당]] 소속이다. 2005년 어린이집 [[꿀꿀이죽 사건]]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2006년 5월 31일 기초의회선거의 강북구 구의원에 출마하여 당선하였으며 이후 '보육조례개정안'제정 활동등을 하였다. 최근 강북구 의회의 의정비 인상에 반대하는 활동을 벌여 주목을 받고 있다. 2009년에는 강북구청장이 공공근로 인력을 동원하여 부인 땅을 경작했다는 사실을 폭로해 MBC 뉴스데스크 등 언론의 관심을 끈 바 있다.
  • 최종원(국회의원) . . . . 1회 일치
         정치적으로는 민주당계 정당과 가까운데 국회의원 경력도 있다. [[2010년 재보궐선거|2010년 7.28 재보궐선거]] 강원도 태백시·[[영월군]]·[[평창군]]·[[정선군]] 선거구 민주당 후보로 나서 55.01%(35271표)의 득표율을 기록, 44.98%(28841표)의 한나라당 [[염동열]] 후보를 제치고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2010년부터 2012년까지 제18대 [[국회의원]]([[민주당(2008년)|민주당]], [[민주통합당]])을 역임하였다. 이 와중에 [[문화체육관광부]]의 [[장관]]을 맡았던 [[유인촌]]과 마찰을 빚고 대립을 세우곤 했다.[* [[애초에]] 국회 입성을 앞두고 유인촌 장관과 마주치는걸 엄청나게 별렀는데 '''"유인촌 장관은 나랑 만나면 일단 한 대 맞고 시작하자."'''라는 막말을 남겼을 정도(...) 실제로 당선 후 두 달 남짓 지난 2010년 10월 국정감사에서 유인촌 장관을 예상대로 거하게 몰아붙였다.] 다만 [[19대 총선]]엔 출마하지 않고 다시 본업으로 돌아갔다.
  • 최홍만 . . . . 1회 일치
         결국 최홍만은 이 경기에서 허벅지 부상을 입어 한동안 불참하게 되었는데, 이 때문에 [[일본어 위키피디아]]의 최홍만 항목에서는 '''로우킥 부상 부위에 세균에 감염되어 사망하였다'''는 반달이 있기도 했다(...). 사실 경기 내용으로는 완벽히 말렸지만 피지컬 자체는 본야스키를 훨씬 능가하는 괴물이었기에 시합 도중에 본야스키의 로우킥을 맞고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어께를 들썩이기도 하고, 경기가 끝난 뒤 "본야스키의 로우킥에 대미지를 입지 않았다"라고 했지만 인터뷰 이후 다리를 절뚝이며 퇴장해서 허세라는 지적도 있었다. 훗날 인터뷰에서 악수 거부 논란에 대해 최홍만은 "너무 아쉬워서 그랬던 것 같다"고 말했다. 또한 로우킥 관련해선 경기를 치를 당시 이미 왼쪽 허벅지가 부상당한 상태였다고 주장했다.[[http://sports.news.naver.com/general/news/read.nhn?oid=038&aid=0000307310|#]] 사실 이때 최홍만이 판정에 불만을 표한 것도 좀 에러였던 게, 워낙 상대 선수보다 훨씬 크고 강하니 버텨낸 거지 유효타를 정말 어마어마하게 많이 허용한 반면 본야스키는 최홍만의 타격을 대부분 막아냈다.(물론 워낙 타격이 세서 막아도 대미지가 들어갔지만) 애초에 이건 그냥 싸움이 아니라 (KO가 안 나온다면) 기술적으로 점수를 따내서 비교하는 격투기이기 때문에 확실한 본야스키의 승리가 맞다.
  • 컴퍼니 오브 히어로즈 . . . . 1회 일치
          컴퍼니 오브 히어로즈에서 지원되는 캠페인. 주인공 세력은 미군으로, 오마하 해변에서 [[https://ko.wikipedia.org/wiki/%EC%83%B9%EB%B6%80%EC%95%84_%EC%A0%84%ED%88%AC|샹부아 전투]]까지 미군이 치룬 전투를 다루고 있다.
  • 토리코/373화 . . . . 1회 일치
          * 금관두를 비롯해 황금색의 식기들이 어마어마하게 쌓여있다.
  • 트로피코 4 . . . . 1회 일치
         다수의 시민들은 몇몇 진영을 지지한다. 유아나 소년도. 3살짜리 유아가 "우리의 영광스런 군대가 나라를 밝은 미래로 이끌리!"나 "난 공산당에서 출마하는 동지들을 지지할 거야"같은 생각을 하는걸 보면 할 말이 없어진다.
  • 페어리 테일/535화 . . . . 1회 일치
          * [[루시 하트필리아]]가 END의 서를 고쳐써서 [[나츠 드래그닐]]이 구사일생 하나, 그 작업은 술자의 생명력을 어마어마하게 갉아먹는 자살행위였다.
  • 표창원 . . . . 1회 일치
         [[더불어민주당]]에서 대중적인 범죄학자 표창원을 1호 인재로 영입하면서 많은 관심을 모았는데, 영입 초반에는 [[http://m.news.naver.com/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421&aid=0001807908|#'''오세훈 전 시장'''과 대결시킨다는 이야기가 나오기도 했다.]] 이때 본인은 이에 대해 '''"[[오세훈]] 전 시장 아니라 [[박근혜]] 대통령과 붙으라고 해도 하겠다"'''며 당락에 신경쓰지 않겠다는 모습을 보였으며 [[http://m.news.naver.com/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421&aid=0001807908|#]] [[국민의당|안철수 신당]]과의 중재자 역할을 자청하기도 했다. 그러나 오세훈 전 시장은 서울 [[종로구]]로, 표 교수는 밑에 서술되어 있듯 경기도 [[용인시 정]] 선거구에 출마하게 되면서 둘의 대결은 없던 일이 됐다.
  • 피우진 . . . . 1회 일치
         2006년 건강검진에서 [[유방암]] 수술로 인한 유방 절제를 이유로 장애 판정을 받고 전역 조치되자,[* 참고로 유방절제로는 장애인복지법 기준으로는 장애인으로 분류되지 않는다. 피우진 중령이 받은 장애 판정은 군 내부 규정에 따른 것.] 복직 소송을 진행하여 승소 후 2008년 5월에 복직하였다. 암 수술을 받았다지만 군 생활은 물론 일상생활에도 전혀 문제가 없는 건강한 군인을 강제로 장애 판정을 받게 하고 전역시킨 군 내부의 문제가 이때 알려진다. 강제 전역당했던 기간인 2008년 4월 [[18대 총선]]에서 [[진보신당]]의 비례대표 3번으로 출마하기도 했다.[* 당시 1심에서 승소했고 2심이 진행 중이었다. 어쨌건 강제로 민간인이 된 상태라서 출마가 가능했다.] 당시 진보신당의 비례대표 득표율이 2.9%에 머물러 비례대표 당선자를 내지는 못했다. 피 보훈처장이 비례대표로 당선되려면 진보신당의 득표율이 약 5.56%를 넘었어야 하는데, 그건 둘째치고 애초에 비례대표 당선자를 배출할 수 있는 조건인 정당득표율 3%에 0.1% 차이로 아깝게 도달하지 못했기 때문에 1명도 나오지 못 한 것.
  • 하이큐/248화 . . . . 1회 일치
          * 스가와라는 관중석에서 미야 아츠무의 극성팬을 본 일을 이야기한다. 부채에 커다랗게 아츠무의 이름을 써서 가지고 다니는게 마치 아이돌 팬덤같다. [[우카이 케이신]] 코치는 실제로 그들은 아이돌 같다며 1위팀 이타치야마하곤 다른 의미로 인기를 모으고 있다고 말한다. 실력과 화려함을 겸비한 "최강의 도전자"라는 캐릭터. TV에서도 이걸 살려서 자주 취재 대상으로 삼고 있다.
  • 하이큐/255화 . . . . 1회 일치
          * 그리고 이번 경기는 전일본 남자 대표팀의 감독 "히바리다 후키" 감독도 관람 중이다. [[하이큐/210화|카게야마의 전일본 유스 합숙]]에서도 감독 역할을 맡기도 했던 인물이다. 동행한 코치가 카라스노의 10번, 히나타를 거명하며 "키는 작지만 득점율이 높다."고 평한다. 하지만 유일무이한 필살기가 카피 당해서 풀이 죽은거 같다고 말하는데, 히바리다 감독의 견해는 조금 달랐다. 지금까지 히나타는 카게야마 없이는 별다른 평가를 받은 적이 없다. 그렇다고 앞으로 카게야마하고만 선수생활을 할 수도 없는 노릇. 하지만 괴짜 속공을 아츠무도 올릴 수 있다는게 증명됨으로써, 반대로 말하면 히나타는 카게야마 없이도 그 속공이 가능하다는 증명이기도 하다.
  • 한국영 . . . . 1회 일치
         [[2011년]] [[대한민국 U-23 축구 국가대표팀|U-23 대표팀]] [[홍명보]] 감독의 눈에 들어 다시 대표팀에 선발되었다. 그러나 부상으로 [[2012년 하계 올림픽]] 대표팀에서 낙마하였고 [[정우영 (축구 선수)|정우영]]이 그를 대신하였다.
  • 한선교 . . . . 1회 일치
         1984년부터 [[문화방송]]에서 아나운서로 일하다가 1995년부터 프리랜서가 되었다. 2004년 [[한나라당]] 대변인이 되었고,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의 국회의원|용인시 병]]에 출마하여 제[[대한민국 제17대 국회의원 선거|17]]·[[대한민국 제18대 국회의원 선거|18]]·[[대한민국 제19대 국회의원 선거|19]]·[[대한민국 제20대 국회의원 선거|20]]대 [[대한민국의 국회의원|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2011년 제7대 [[한국농구연맹]] 총재에 선출되었다.<ref>박세운. [http://sports.news.naver.com/general/news/read.nhn?oid=079&aid=0002256700 KBL 신임 총재에 한선교 "스킨십 소통으로 프로농구 살리겠다"]{{깨진 링크|url=http://sports.news.naver.com/general/news/read.nhn?oid=079&aid=0002256700 }}. 노컷뉴스. 2011년 6월 3일.</ref>
  • 한인수(탤런트) . . . . 1회 일치
         [[1991년 지방선거]] [[재보궐선거]]에서는 [[민주자유당]] 소속으로 [[경기도]]의회 의원으로 당선되었다. [[2014년]] [[제6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경기도]] [[시흥시]]장 선거에 [[새누리당]] 후보로 출마하였으나 현직 시장인 [[새정치민주연합]] [[김윤식(1966)|김윤식]]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 한현규 . . . . 1회 일치
         * 2004년 2월 ~ 4월 4.15 국회의원 총선거 수원 영통에 [[한나라당]] 후보자로 출마하였으나, 낙선
  • 혜은이 . . . . 1회 일치
         [[1977년]] [[일본]] '야마하가요제'에 출전한 그녀는 일본 빅터 레코드사에서 영입 제안을 받기도 했다. '당신만을 사랑해'를 일본어로 내고 [[조용필]]에 앞서 일본 활동도 짧게 했다. 당시 일본에선 '강코쿠(한국) 아이돌'로 소개되었다.<ref>[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5/06/18/0200000000AKR20150618054000005.HTML 40주년 혜은이 "가수인생 골든타임 놓쳐 아쉬움 투성이죠"] 연합뉴스. 2015년 06월 18일</ref>
  • 홍정욱 . . . . 1회 일치
         '''홍정욱'''(洪政旭, [[1970년]] [[3월 14일]] ~ )은 [[대한민국]]의 [[기업인]], [[언론인]]이다. 현재 [[헤럴드 (기업)|헤럴드]] 및 [[올가니카]]의 회장이며, 사단법인 올재의 이사장이다. 중학교 때 미국으로 유학을 가 로스쿨 졸업 후 미국에서 투자금융가로 일했고 [[2001년]] 귀국 후 헤럴드를 인수해 기업가로 활동했다. [[2008년]] [[대한민국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총선]]에 출마하여 대한민국 제18대 국회의원을 지내기도 했다.
  • 황효진(기업인) . . . . 1회 일치
         2016년 상반기에[* 자세한 날짜는 [[추가바람]].] [[조선일보]]에서 "성공한 '''강소기업''' 대표"로 황효진을 취재한 적이 있다.[* 본지의 별도 부록으로 나왔으며, 기사 1면을 차지했다.] 그러나 시기가 좋지 않았다. 이미 스베누에 관련된 진실들이 차츰 드러나면서 한창 좋지 않은 소리를 듣기 시작했던 때였다. 인터뷰 당시에 황효진은 "사업이 어렵고 빚이 조금 있긴 하지만, 나는 좀 더 [[큰 그림]]을 그리고 있다. [[그런 거 없다|신발은 생필품에 가까운 물건인 만큼 금방 성장세를 되찾을 것]]"이라는 말로 비판을 무마하듯 답변했었다. 하지만 현실은 익히 알려졌다시피 시궁창이었고, 이 인터뷰는 그의 마지막 변명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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