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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립 | → | 제1대br김창숙 | → | 제2대br이훈구 |
김창숙 / [[한자]]: 金昌淑 | |
width=30대한민국 독립운동가width=30 | |
생몰년도 | 1879년 7월 10일 ~ 1962년 5월 10일(총 30255일.) |
출생지 | 조선 경상도 성주군 |
사망지 |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국립중앙의료원 |
국적 | 조선 -> 대한제국 -> 대한민국 임시정부 -> 대한민국 |
본관 | 의성 김씨(義城 金氏) |
별칭 | 자(字)는 문좌(文佐), 호(號)는 직강(直岡)[외]br별명(別)은 김우(金愚) |
직업 | 정치가, 독립운동가, 교육자 |
종교 | 유교(성리학) |
가족 | 김호림(부) 안동 장씨 부인(모)br누이동생4명(친지) 김찬기(아들)외 슬하2남(아들) |
학력 | 前 성균관대학교 총장br前 고려대학교 정치학과 특임 교수 |
width=30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무 위원 | |
임기 | 1947년 3월 3일 - 1947년 9월 5일 |
전임 | 조소앙, 이동녕, 김구, 조완구 |
동기 | 김성수, 오세창, 조만식, 이청천 |
후임 | 김성수, 오세창, 조만식, 이청천, 김창숙 |
width=30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무 위원 | |
임기 | 1947년 9월 5일 - 1948년 8월 15일 |
전임 | 김성수, 오세창, 조만식, 이청천, 김창숙 |
동기 | 김성수, 오세창, 조만식, 이청천 |
후임 | 폐지 |
김창숙
개요 ¶
생애 ¶
독립운동 ¶
1919년 3.1 운동 후[3] 망명을 결심, 전국 유림 대표들이 한국 독립의 호소에 서명한 유림단 진정서를 휴대하고 상하이로 건너가, 파리에서 열리는 만국 평화 회의에 우송하였다. 그해 4월 대한민국 임시 정부 의정원 의원이 되고, 이듬해 귀국하여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하다가 제1차 유림단 사건으로 체포되었다.
출옥 후 다시 중국으로 가서 1921년 신채호 등과 독립운동지인 《천고(天鼓)》의 발행에 이어, 박은식 등과 《사민일보(四民日報)》를 발간, 독립 정신을 고취하는 한편으로 서로 군정서(西路軍政署)를 조직, 쑨원과 교섭해 독립운동 기금을 원조받는 등 군사 선전 위원장으로 활약하였다.
1923년 의열 활동을 위해 '입을 다물고 실행한다'는 의미의 다물단을 조직하였다.[4]
1927년 상하이 주재 일본 영사관원에게 붙잡혀 본국으로 압송됐다. 이후 징역 14년형을 선고받고 대전 형무소에서 복역했다. 일제 말기 비밀 결사인 건국 동맹의 남한 책임자로 추대되었다가 광복 직전 발각되어 1945년 8월 왜관 경찰서에 구속 중 광복을 맞았다.
광복 후 ¶
8.15 광복 후, 초창기 박헌영의 조선공산당에 반대 의사를 분명히 나타냈으며 민족주의 계열에서 정치 활동하였다. 1945년 12월, 신탁 통치 반대 운동에 참여하였다. 이듬해 2월 남조선 대한국민 대표 민주 의원에 선출되었으나 친일파, 한민당 세력이 득세하는 것을 보고 바로 비난 성명서를 내어 민주 의원 직을 거부했다.
성균관은 일제 시대를 거치며 경학원, 명륜 전문 학교 등으로 격하되었고 1943년에는 폐교당했다. 1945년에 해방이 되면서 명륜 전문 학교가 부활하고[5] 경학원이 성균관으로 명칭을 회복했다.[6] 같은 해 11월 김창숙이 전국 유림 대회를 열어 전국에서 천여 명의 유림들이 성균관 명륜당에 모였다. 이를 통해 일제가 박탈한 고등 교육 기관으로서의 기능을 회복하고자 대학 설립을 위한 '성균관 대학 기성회'가 조직되고 '재단 법인 성균관 대학’이 설립되었으며, 이듬해인 1946년 9월 25일 문교부에 의해 성균관 대학이 정식으로 인가되어 김창숙이 초대 학장으로 취임하였다. 당시 성균관대 총장과 성균관장은 겸임이었다.
지금 성균관 대학교 인문 사회 과학 캠퍼스와 자연 과학 캠퍼스에는 각각 심산 김창숙을 기리는 동상이 건립되어 있다.
국제 구락부 사건 - 1952년 6월 이승만의 개헌안에 반대하는 시위 도중 체포되는 심산 김창숙.
국제 구락부 사건 - 1952년 6월 이승만의 개헌안에 반대하는 시위 도중 체포되는 심산 김창숙.
6.25 전쟁 후 대통령 이승만의 하야 경고문 사건으로 부산 형무소에 40일간 수감되고, 1952년 부산정치파동이 일어나자 이시영, 김성수, 조병옥 등과 반독재 호헌 구국 선언을 발표하였고, 1959년 국가보안법 개악 당시 망국의 법이라고 강력히 비난했었다. 이러한 반독재 민주화 운동 행보로 인해, 독재 비호 세력으로부터 테러당하였다.
1962년 3월 1일 건국 훈장 대한민국장을 받았으며, 그해 5월 10일 노환으로 별세한 뒤 사회장(社會葬)으로 예장(禮葬)되었다.
말년의 김창숙 선생. 1962년 5월,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투병 중인 김창숙의 병상을 방문하였다.# 이 사진을 가리켜 김창숙이 박정희를 외면한 모습으로 해석하는 경우가 종종 있으며, 김창숙 관련 추모 단체에서도 대체로 이러한 해석을 받아들이는 편이다.[7] 반면 노컷뉴스 임기상 기자의 연재에 따르면 당시 김창숙 선생은 인사불성 상태로 병문안으로 찾아온 박정희를 알아보지 못하였다고 한다. 실제로 김창숙 선생은 병문안 며칠 뒤에 작고하셨다. 그 외에도 1962년 2월 27일 경향신문 기사 "혁명 정부하선 상 받을 터"라는 기사를 보면 김창숙은 당시 박정희 정부에 대해 일부 비판함과 동시에 독립 유공자 포상에 대해서는 감사의 뜻(謝意)을 표하고 있다.
기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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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 심산(心山), 벽옹(躄翁)
- [2] 김수환 추기경이 2000년 심산상을 수여받은 후 심산상 수상자의 관례대로 김창숙 묘소에서 절을 올리며 했던 말이다. 이 때 김 추기경은 절뿐만 아니라 음복까지 했다. 당시 영상
- [3] 다만, 좀 안타까운 사실이 있는데 3.1 운동 당시에 유림 대표로 서명을 하려고 했으나 부친의 장례식 때문에 늦어 기회를 놓쳐서 통곡하며 중죄를 지었다고 바닥에 뒹굴었는데, 이를 보던 사람들이 "늬들이 그동안 나라를 망쳐놓고서는 이제 와서 반성하기냐? 차라리 참여라도 해라!"라며 비아냥을 들었다고(...)
- [4] '고토 수복'이라는 뜻의 고구려어였던 '다물'에서 따왔기도 하다.
- [5] 군정 법령 제6호 참조
- [6] 군정 법령 제15호 참조
- [7] 이러한 관점은 일생을 기득권, 지배층에 굴종하지 않고, 민족과 민주라는 가치에 충실하여 당대와 후세의 존경을 받은 분인데, 말년에 와서 쿠데타의 주동 세력과 원만하게 지냈다고 비춰지면 선생의 업적에 누가 될 수 있음을 감안된 것으로 여겨진다.
- [8] 세화 3개교와 반포 종합 운동장 근처에 위치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