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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우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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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버지 : 김용하(金容河, 1896년 ~ ? , 6·25때 납북)
* 어머니 : 전인항(全仁恒)
** 부인 : 정희자(鄭姬子, 1940년 2월 20일 ~)
*** 장녀 : 김선정(金善政, 1965년 9월 17일 ~)
*** 장남 : 김선재(金善宰, 1967년 ~ 1990년 11월 21일)
*** 차남 : 김선협(金善協)
*** 삼남 : 김선용(金善勇)



{{인물 정보
|이름 = 김우중
|정당 = 무소속
출생일 = {{출생일과 나이
1936|12|19}}
|출생지 = 일제 강점기 경상북도 대구부</br>(現 대한민국 대구광역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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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주지 =
|국적 = 대한민국
본관 = [[광산 김씨
광산]]
|학력 = 연세대학교 경제학 학사
|직업 = 기업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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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자 = [[정희자 (1940년)
정희자]]
|자녀 = 슬하 3남 0녀<ref>장남 김선재, 차남 김선협, 3남 김선용</ref>
|부모 = 아버지 김용하, 어머니 전인항
|전직 = 대우그룹 회장
|수상 = 1999년 20세기 한국을 빛낸 30대 기업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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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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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
}}
김우중(金宇中, 1936년 12월 19일 ~ )은 대한민국기업인이다.

학력

* 1960년 연세대학교 경제학 학사

가족 관계

* 아버지 : 김용하(金容河, 1896년 ~ ? , 6·25때 납북)
* 어머니 : 전인항(全仁恒)
** 부인 : 정희자(鄭姬子, 1940년 2월 20일 ~)
*** 장남 : 김선재(金善宰, 1967년 ~ 1990년 11월 21일)
*** 차남 : 김선협(金善協)
*** 삼남 : 김선용(金善勇)

생애

유년기

광산김씨 김우중은 1936년 12월 19일대구에서 김용하와 전인항 사이의 6남매 중 4남으로 태어났다.

6.25 전쟁으로 아버지가 납북되자 15세에 홀어머니 아래서 소년가장으로 가족들의 생계를 도맡게 된다. 휴전 후 상경해 경기중학교와 경기고등학교 진학하고 1956년 연세대학교 경제학과에 입학해 학창생활을 보냈다.

대우실업 설립

1960년 25세에 연세대학교를 졸업하고 1966년까지 한성실업에서 근무하다가, 1967년 32세에 서울 충무로에서 대우실업을 설립했다. 자본금은 500만원이었지만, 동남아시아, 미국 시장에서 성공하여 1970년대 초반부터 대우건설, 대우증권, 대우전자, 대우조선 등을 창설하며 1974년에 1억불의 수출탑을 달성하는데 성공하며 신흥 재벌이 되었다. 1981년에 스스로 회장의 자리에 올랐다. 1982년 1월에는 (주)대우를 출범시키며 재계 4위에 올랐다.

1989년에 펴낸 자서전인《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는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1992년 제14대 대한민국 대통령에 출마하려 했으나 김영삼의 압박으로 불발되었다. 1993년 대우그룹은 세계경영을 선포하였고 또한 김우중은 1987년부터 1993년까지 대한축구협회의 회장을 맡았다. 하지만 1990년 장남 선재를 잃고, 1996년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의 비자금 사건에 연루되었으나 위기를 잘 넘기며 대우그룹1998년에 재계 2위로 이끌며 성장시켰다.

IMF로 인한 대우그룹 해체

그러나 1997년 IMF 구제금융으로 한국경제가 큰 타격을 받았고, 그로 인한 여파로 부채비율이 400% 이상이었던 대우그룹은 쌍용을 인수하는등 확장정책을 이어나갔지만 일본 노무라 증권이 1998년 10월 25일에 발표한 '대우에 비상벨이 울린다'는 보고서 1장으로 사실상 대우그룹이 위기를 맞게 된다. 후에 계열사를 41개에서 4개업종 10개 회사로 구조조정 단행과 삼성그룹과의 빅딜도 추진하나 둘다 실패했다. 1999년 8월 26일 이미 구조조정으로 회사 41개중 16개가 매각되었고 남은 25개 회사중 12개가 워크아웃을 신청하였다. 당시 부채는 500억 달러였다. 당시 대우그룹은 금융부문을 중점으로두고 사업확장을 하여 내부적으로 부채가 많았다. 사실상의 그룹 해체였다. 1999년 11월 1일 김우중은 13명의 대우그룹 사장단들과 함께 경영포기 및 회장직을 사퇴하였다. 검찰의 수사를 피하기 위해 출국한 후 도피생활을 하였으며, 중국에서 호화롭게 생활을 했다는 주장과, 반대로 유럽 등지의 3류 호텔에서 햄버거로 끼니를 때우며 어렵게 생활했다는 주장이 있다. 당시 대우그룹은 당시 김대중 정부가 정치적으로 탄압했다는 설과 단순한 구조조정 실패라는 의혹이 있다.

대우그룹 해체 이후

5년 8개월 간의 해외로 도피 생활을 지속하다가, 2005년 6월 14일 입국하여 검찰의 조사를 받았으며,<ref>관련기사</ref>2006년 11월 3일 열린 서울고등법원 항소심에서 분식회계 및 사기대출, 횡령 및 국외 재산도피 혐의로 징역 8년 6개월, 벌금 1000만원, 추징금 17조 9천 253억원의 형을 구형받았고, 항소를 포기하여 형이 확정되었다. 2007년 12월 31일 대통령 특사로 사면되었다. 2014년 기준으로 전체 추징금의 0.5%정도인 약 887억원을 납부하였다. 2013년 김우중법에 대해 논란이 일었고, 여전히 17조 8000여억에 달하는 추징금을 미납한 상태이다. 2014년 대우그룹 창립 기념일에 추징금 문제가 불거져 참석하지 못했다. 그해 8월 26일대우그룹 해체 15주기를 맞아《아직도 세계는 넓고 할일은 많다》라는 회고록을 출간하였다.

==각주==
<references/>

{{전임후임
|전임자 = (창업)
|후임자 = (폐지)
|대수 =
|직책 = 대우그룹 회장
|임기 = 1982년 1월 ~ 1999년 11월
}}
{{전임후임
|전임자 = 최종현 (SK 회장)
|후임자 = 김각중 (경방 회장)
|대수 = 25
|직책 =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
|임기 = 1998년 ~ 1999년
}}
{{전임후임
전임자 = [[이종환 (축구인)
이종환]]
|후임자 = 김우중
|대수 = 45
|직책 = 대한축구협회 회장
|임기 = 1988년 2월 17일 ~ 1989년 2월 21일
}}
{{전임후임
|전임자 = 김우중
|후임자 = 정몽준
|대수 = 46
|직책 = 대한축구협회 회장
|임기 = 1989년 2월 21일 ~ 1993년 1월 12일
}}



{{전거 통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