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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준 (1904년)

김용준(金瑢俊, 1904년 2월 3일 ~ 1967년 11월 3일?) 한국화가이며 미술평론가, 미술사학자이다. 수필가로도 알려져 있다. 아호는 근원(近園)이다.

생애

경북 선산에서 태어나 경성부중앙고등보통학교를 졸업했다. 화가 이종우에게 수학한 뒤 1924년 조선미술전람회에서 〈건설이냐? 파괴냐?〉로 입선하면서 화단에 데뷔했다. 1926년 일본에 유학하여 도쿄 미술학교에 입학해 서양화를 공부했다. 이때 같 도쿄 유학생이던 동갑의 이태준을 만나 평생 동안 교유했다.

1928년 귀국한 후로는 서울에서 미술 교사로 재직하면서 길진섭과 함께 목일회를 창립하는 등 활발히 활동했다. 그는 작품 활동 뿐 아니라 미술사 연구와 미술 평론계에서도 선구자 격의 위치를 차지한 인물이다. 본래는 서양화가로 출발하였으나 목일회가 일제의 탄압으로 해체된 1930년대 후반부터 조선화의 기법들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북한에서 그린 말년의 작품들 조선화가 대다수이다.

광복 후 서울대학교동국대학교에서 교수로 재직하였으며 1948년 그의 호를 딴 수필집인 《근원수필》을 출간하기도 했다. 1950년 한국 전쟁이 일어나 조선인민군서울을 점령했을 때 서울대학교 예술대학의 임시 학장을 맡았고, 그 해 가을 후퇴하는 조선인민군을 따라 월북했다. 월북한 후에는 조선미술가동맹조선건축가동맹에 참가했으며 평양미술대학의 강좌장이 되었다.

전통적인 모더니즘 계열에서 정지용, 이태준과 궤를 같이 하면서 광복 전·후로 좌익 예술계와는 일정한 거리를 유지했던 김용준의 월북 동기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학생으로 국대안 파동미 군정과 충돌해 수감되었다가 풀려난 김진항의 추대로 한국 전쟁 중 얼떨결에 학장이 되었다가 월북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는 설과, 공산주의자였던 부인의 권유로 함께 북으로 갔다는 설이 있다.

그의 죽음에 대해서는 성혜랑2000년에 출간한 《등나무집》에서 자살이라고 기록하고 있다.<ref>{{저널 인용
|제목=해방∼1970년대 북한, 그리고 ‘가장’ 곁에서 본 김정일
|url=http://www.dailynk.com/korean/keys/2001/16/09.php
|저널=KEYS
|연도=2001
|작성월=7
|issue=제16호}}</ref> 성혜랑과 김용준 이웃에 살고 있었는데, 1967년 김용준이 김일성의 사진이 들어 있는 신문을 그대로 밖에 버린 사실이 드러나 큰 처벌을 받을 위기에 놓이자 자결했다는 것이다. 성혜랑의 증언 외에 이 사실을 증명할 수 있는 다른 근거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같이 보기

참고자료

* {{서적 인용
|저자=조영복
|제목=월북 예술가, 오래 잊혀진 그들
|날짜=2002-09-10
|출판사=돌베개
|출판위치=서울
id={{ISBN
978-89-7199-150-3}}
|장=김용준 - 자살과 초탈 사이에 선 예술가의 표정}}

각주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