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조(金東祚, 1918년 8월 14일 ~ 2004년 12월 9일<ref>{{뉴스 인용
|url=http://www.hani.co.kr/section-005100036/2004/12/005100036200412092135001.html
|제목=‘한국외교 산증인’ 김동조 전 외무부장관 별세
|출판사=한겨레신문
|확인날짜=2007-10-23
|날짜=2004-12-09
}}</ref>, 부산)는 대한민국의 정치인, 외교관, 공무원이다. 본관은 언양. 주 일본 공사, 초대 주 일본 대사와 대한민국의 외무부 장·차관을 지냈고, 1965년 체결된 한일회담의 수석대표였다. 브루스 커밍스는 《한국현대사》라는 그의 책에서, 김동조를 일제 강점기 때 일본에 협력한 한국인의 한 사람으로 지목하기도 했다. 체육인 겸 정치인 정몽준과 GS그룹 오너일가인 허광수의 장인이며 영화배우 남궁원 가문, 독립운동가 손정도, 손원일 가문과도 사돈간이다.
|url=http://www.hani.co.kr/section-005100036/2004/12/005100036200412092135001.html
|제목=‘한국외교 산증인’ 김동조 전 외무부장관 별세
|출판사=한겨레신문
|확인날짜=2007-10-23
|날짜=2004-12-09
}}</ref>, 부산)는 대한민국의 정치인, 외교관, 공무원이다. 본관은 언양. 주 일본 공사, 초대 주 일본 대사와 대한민국의 외무부 장·차관을 지냈고, 1965년 체결된 한일회담의 수석대표였다. 브루스 커밍스는 《한국현대사》라는 그의 책에서, 김동조를 일제 강점기 때 일본에 협력한 한국인의 한 사람으로 지목하기도 했다. 체육인 겸 정치인 정몽준과 GS그룹 오너일가인 허광수의 장인이며 영화배우 남궁원 가문, 독립운동가 손정도, 손원일 가문과도 사돈간이다.
생애 ¶
1943년 일본 규슈제국대학 법학과를 졸업하였다. 1951년 외무부 정무국장을 거쳐 외무부 차관을 지냈다. 1960년 2월, 한국 정부는 동남아 각국과의 우호 증진을 위한 정책의 일환으로 중화민국, 말레이시아, 필리핀, 타이, 남베트남 등 5개국에 김동조를 단장으로 하는 친선사절단을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친선사절단은 단장 외에 차균희(車均禧) 부흥부 경제계획관, 외무부 삼등서기관으로 구성되었다.<ref>{{뉴스 인용 |url = | 제목 = 團長에金東祚氏 | 날짜 = 1960-02-12 | 출판사 = 동아일보 }}</ref> 1960년 2월 23일, 친선사절단은 말레이시아와의 외교 관계 수립을 발표하였다.<ref>{{뉴스 인용 |url =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60022400209201018&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60-02-24&officeId=00020&pageNo=1&printNo=11646&publishType=00020 | 제목 = 外交使節을 交換... 韓國․馬來兩國間 合意 |날짜 = 1960-02-24 |쪽=석간1 | 출판사 = 동아일보 | 인용문 = 韓國과 馬來聯邦은 二十三日 經濟 및 文化面에서의 緊密한 協調에 合意하는 한편 共産主義에 對한 兩國의 鞏固한 立場을 確認하였다. 韓國과 馬來兩國은 馬來政府官吏들과 韓國親善使節團(團長=金東祚氏)間에 있은 協商에 뒤이어 二十三日밤 聲明書를 發表하였다. 兩國은 또한 共同聲明書에서 外交使節을 交換할 것이라고 發表하였다.}}</ref> 1965년 6월, 재일거류민단, 상공인연합회, 부인회는 공동명의로 김동원 대사를 경질해달라고 국회에 진정서를 보냈다.
1965년 10월 26일, 외무부에 대한 국정감사에서 김동조는 그 후 재일교포들이 그와 같은 진정서를 제출한 것은 교포와 재일교포 사이의 오해에 기인했던 것이고, 그 후 그 오해는 풀렸다고 설명했다. 또 이동원 외무부장관은 김대사가 본부 훈령에 충실치 아니한 점은 없다고 답변했다. 그러나, 같은 날 국회 외무분과위원회는 위원장을 비롯하여 공화당의원, 야당의원은 위 진정서를 검토한 결과, 김대사가 (1) 교포보호에 소흘하고 (2) 본부의 훈령에 충실치 못하며 (3)특정 재벌을 편애하므로 정부가 김대사를 될수록 조속한 시일 안에 해임할 것을 만장일치로 정부에 건의하였다.<ref>{{뉴스 인용 |url = http://dna.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65102600209201011&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65-10-26&officeId=00020&pageNo=1&printNo=13543&publishType=00020 | 제목 = 金大使解任건의 | 날짜 = 1965-10-26 | 출판사 = 동아일보 }}</ref> 1965년 12월 18일 상오 10시반 중앙청 제1회의실에서 열린, 대한민국과 일본 양국의 국교정상화를 최종적으로 매듭짓는 기본조약 및 협정에 의한 비준서 교환에 김동조는 한일회담수석대표로서 참석했다.<ref>{{뉴스 인용 |url = http://dna.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65121800329201001&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65-12-18&officeId=00032&pageNo=1&printNo=6208&publishType=00020| 제목 = 오늘부터 韓日國交正常化 | 날짜 = 1965-12-18 | 출판사 = 경향신문 }}</ref> 1965년 12월 말, 한국 정부가 주일 대사에 김동조를 내정하자, 12월 23일, 민중당의 김대중 의원은 국회 본회의에서 "국회 외무위가 만장일치로 그 해임을 건의했으며 재일교포단체에서도 소환을 건의한 바 있는 김동조 대사를 재임명할 수 있는가"를 추궁했다.<ref>{{뉴스 인용 |url = http://dna.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65122300329201029&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65-12-23&officeId=00032&pageNo=1&printNo=6212&publishType=00020 | 제목 = 獨島領有權따져 | 날짜 = 1965-12-23 | 출판사 = 경향신문 }}</ref><ref>{{뉴스 인용 |url = http://dna.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65122300209201001&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65-12-23&officeId=00020&pageNo=1&printNo=13593&publishType=00020 | 제목 = 어떻게對處할것인가 | 날짜 = 1965-12-23 | 출판사 = 동아일보 }}</ref> 그러나, 12월 24일 한국정부는 일본정부에 대해 정식으로 김대사에 대한 아그레망을 요청했다.<ref>{{뉴스 인용 |url = http://dna.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65122500329201012&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65-12-25&officeId=00032&pageNo=1&printNo=6214&publishType=00020 | 제목 = 金東祚大使任命 | 날짜 =1965-12-25 | 출판사 = 경향신문 }}</ref> 1966년 1월 14일, 주한 초대 대사 김동조는 일본 일왕에 신임장을 제정하였다.<ref>{{뉴스 인용 |url =http://dna.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66121700329203003&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66-12-17&officeId=00032&pageNo=3&printNo=6517&publishType=00020 | 제목 = 日誌1年| 날짜 =1966-12-17 | 출판사 = 경향신문 }}</ref> 1965년~1967년 주 일본 대사를 지냈다.
1967년 9월 16일, 대한민국 정부는 김동조를 주미 대사에 임명하여,<ref>{{뉴스 인용 |url = http://dna.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67091600209201011&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67-09-16&officeId=00020&pageNo=1&printNo=14129&publishType=00020| 제목 = 12國大使任命의결 | 날짜 = 1967-09-16 | 출판사 = 동아일보 |인용문 = 國務會議는 16일 駐美·駐英·駐日·駐獨大使를 포함해서 12개國駐在大使를 새로 任命키로 議決했다. 이날 議決된 大使級의 大幅移動은 朴大統領의 決裁가 나는대로 月內에 發令케 되었다. … ▲駐美 大使〓金東祚(49·外務次官·駐日大使)}}</ref> 김동조는 1967년 11월 9일, 백악관에서 존슨 대통령에게 신임장을 제정하였다.<ref>{{뉴스 인용 |url = http://dna.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67111000209201016&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67-11-10&officeId=00020&pageNo=1&printNo=14176&publishType=00020| 제목 = 金東祚 駐美大使 존슨에信任狀제정 | 날짜 =1967-11-10 | 출판사 =동아일보 }}</ref> 1967년부터 1973년까지 주 미국 대사, 1973년부터 1975년까지 외무부장관, 석유개발공사장을 역임하고 1981년 변호사를 개업하였다. 외무부장관으로서 김동조는 1975년 3월 초, 말레이시아를 방문하여 압둘 라자크 후세인 총리와 아마드 리라우덴 외무장관을 만났다.<ref>{{뉴스 인용 |url =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75030400209201014&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75-03-04&officeId=00020&pageNo=1&printNo=16437&publishType=00020|제목= 金外務 말聯에 도착...오늘 라자크와 會談 |출판사 = 동아일보 | 날짜 = 1975-03-04 |인용문=金東祚外務長官이 4일간의 「말레이지아」방문을 위해 3일밤 「쿠알라룸푸르」에 도착했다. 19일간에 걸쳐 「아시아」각국을 순방중인 金長官은 도착후 기자들에게 자기는 4일 「압둘 라자크」「말레이지아」首相 및 「아마드 리라우덴」公報相 겸 外相과 공동관심사를 토의할 것이라고 말했다. }}</ref> 2004년 12월 9일, 숙환으로 향년 87세로 별세했다.
브루스 커밍스는 《한국현대사》라는 그의 책에서, 김동조를 일제 강점기 때 일본에 협력한 한국인의 사례로 기술하였다.<ref>{{뉴스 인용|url=http://ilyosisa.co.kr/SUNDAY/SUN_0350/TM_0303.html|제목=정몽준 장인 김동조 전 외무장관 ‘친일전력’ 논란|확인날짜=2007-10-23|날짜=2002-09-30|출판사=일요시사|인용=대선 출마를 공식 선언한 정몽준 의원의 장인 김동조 전 외무장관의 친일의혹 부문은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현대사’(2001년·창작과비평사)에서 등장한다.|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070415142251/http://ilyosisa.co.kr/SUNDAY/SUN_0350/TM_0303.html#|보존날짜=2007-04-15|깨진링크=예}}</ref> 일본 후생성 보험국과 일본 내무성 산하 교토부 부청 내무국 지방과 및 경찰국에 근무한 경력으로 인해,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포함되었다.
가족 관계 ¶
{| class="wikitable"
! 관계 !! 이름!! 출생일 !! width=60%|활동사항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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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계 !! 이름!! 출생일 !! width=60%|활동사항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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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2년 |
| 1945년 | 모건스탠리 부사장. 최융호(1943년~, 제너럴 마리타임 사장)과 결혼. |
| 1947년 | 손원일의 장남 손명원(孫明源, 1941년~, 현대미포조선·쌍용자동차 사장, 스카이웍스솔루션코리아 고문)과 결혼. 김영숙의 딸은 손정희(孫貞姬)이고 사위는 홍정욱. |
| 1948년 | 해오실업 사장. 박봉인(1953년~ )과 결혼. |
| 1950년 6월 20일 | 허정구 의 셋째 아들 허광수(1946년~, 전 GS칼텍스정유 부회장, 현 삼양인터내셔널 회장)와 결혼. 첫째 딸 허유정(1974년~ ) 아들 방준오(1974년~, 조선일보 기자)과 결혼. |
| 1958년 | 한국외국어대학교 교수. 정다미(1961년, 명지대 교수)와 결혼. |
| 김영명(金寧明) | 1959년 9월 13일 | 현대중공업그룹 대주주. 새누리당 최고위원과 결혼. |
참고 자료 ¶
* 외교통상부{{깨진 링크|url=http://www.mofat.go.kr/mofat/mk_a007/mk_b041/mk_c90/1172570_27881.html }}
* {{저널 인용
* {{저널 인용
|인용 =
|저자 = 임재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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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본가보다 처가 혼맥이 더 화려: 국내 주요그룹 가계 / 혼맥도16 - 현대중공업그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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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본가보다 처가 혼맥이 더 화려: 국내 주요그룹 가계 / 혼맥도16 - 현대중공업그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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