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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영해 (1888년)

{{정치인 정보
| 국적 = {{KOR}}
| 이름 = 권영해 <br/> 權永海
출생지 = [[조선]] [[대구광역시
경상도 대구]]
| 사망지 = {{KOR}} 서울특별시
출생일 = {{출생일
1888|8|12}}
| 사망일 = {{사망일과 나이|1949|6|23|1888|8|12}}
| 직업 = 독립운동가, 기독교 목회자
거주지 = {{국기나라
대한제국}} 경상북도 선산 <br/> {{국기|일제 강점기}} 경상북도 칠곡 <br/> {{KOR}} 서울특별시
| 종교 = 유교(성리학) → 개신교
본관 = [[안동 권씨
안동]](安東)
| 학력 = 경상북도 대구 우현고등보통학교
| 경력 = 한국독립당 특임행정촉탁위원
| 정당 = 무소속
}}
권영해(權永海, 1888년 8월 12일 ~ 1949년 6월 23일)는 대한민국독립운동가이다. 본관은 안동(安東)이고 호(號)는 산남(山南)이다.

생애

일제 강점기 시대

1919년 경상북도 칠곡군 인동면 진평리 진평교회(眞坪敎會) 목사로 재직 당시 독립 만세 시위 운동이 대대적으로 발발하였다는 소식을 접하고 교회 집사 이상백(李相柏)·이내성(李乃成) 등과 함께 1919년 3월 12일에 동민을 규합하여 대대적인 시위를 하기로전격 결의하였다. 그리하여 1919년 3월 12일이 되자 그와 일행들은 미리 준비해 둔 태극기(太極旗)와 조선독립선언서(朝鮮獨立宣言書)를 동리 주민들에게 배포하고 동리 곳곳에 횃불을 붙였으며 끝끝내 동리 야산에서 300여명의 동민을 규합하고 대한 독립 만세를 고창하며 만세 시위 운동을 주도하다가 일경들과 일본 헌병들에게 제압이 되며 끝내 강제로 해산되었지만 이후 이곳 민중들의 항일 저항의식이 더욱 높아짐에 따라 만세 시위 운동 관련 계획을 다시 협의하여 1919년 3월 14일 21시경을 기하여 2백 명의 동민과 아울러 동리 야산에서 다시 대한 독립 만세를 고창하는 등 만세 시위 운동을 주도하다가 결국 일경에 피체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1919년 4월 25일을 기하여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관련으로 징역 1년 10월형을 언도받고 1년여의 옥고를 치르다가 1920년 4월 26일을 기하여 특별사면 석방되었다.

광복 이후

1948년 6월에서 이듬해 1949년 3월까지 한국독립당 특임행정촉탁위원을 잠시 지냈다.

국가 수훈

*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 3월 1일을 기하여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외부 링크


{{토막글|한국 근현대사|독립운동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