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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권필
         [[광해군]] 비 [[문성군부인]]의 아우 [[유희분]](柳希奮)의 부패와 권력남용이 자행되자, [[유희분]]을 풍자한 궁류시(宮柳詩)를 지었다고 귀양가서 객사하였다. 작품에 한문소설 《주생전》등과 유저에 《석주집(石洲集)》이 있다.
  • 김굉필
         [[1610년]](광해군 2년)에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황]]과 더불어 동방 5현으로 성균관 [[문묘]]에 종사되었다. [[아산]]의 [[인산서원]], [[서흥]]의 [[화곡서원]], [[회천]]의 [[상현서원]], [[현풍군|현풍]]의 [[달성 도동서원|도동서원]], [[순천시 (전라남도)|순천]]의 [[옥천서원]]에 배향되어 있다.
         종사를 의논하도록 했다. 이때 조광조가 이심원을 거론하자 정광필이 반대했는데 임금도 이에 동의했다.<ref>이순형, 한국의 명문 종가 (서울대학교출판부, 2000) 50</ref> 참찬관 김정(金淨)이 대학연의를 강의하다가 김굉필의 문묘종사를 건의했다.<ref>이순형, 한국의 명문 종가 (서울대학교출판부, 2000) 50</ref> 그를 문묘에 종사하는 것은 자신들의 직계 스승을 배향하기 위한 것이라며 훈구파는 물론 온건 사림파들, [[김종직]]의 다른 제자들이나 다른 제자의 문인들 역시 반대하였다. 결국 [[광해군]]때 가서야 문묘에 종사된다.
  • 김규철(배우)
         데뷔 초에는 일일연속극 《[[당신이 그리워질 때]]》가 인기를 끌면서 순한 인상의 소시민 이미지였다. 그런데 의외로 이 시기에 왕 역할도 많이 맡았다. 그러다가 서궁에서 [[광해군]] 역[* 그 [[이영애]]가 그를 모시는 상궁 [[김개시]] 역이었다.]을 맡으면서 [[악역]] 연기를 개척하여[[http://blutom.tistory.com/536|#]] 선악을 오가는 수많은 배역을 맡게 되었다. --하지만 서궁은 영 망했다-- [[드라마]] [[소설 목민심서(드라마)|소설 목민심서]]의 고뇌하는 지식인이자 외곬수 개혁가인 [[정약전]] 역을 맡기도 했다.
          * [[1995년]] KBS2 [[서궁]] - [[광해군]]
  • 김륵
         '''김륵'''(金玏, [[1540년]] ~ [[1616년]])은 조선 [[조선 선조|선조]]·[[조선 광해군|광해군]] 때의 문신·학자이다. 본관은 [[예안 김씨|예안]], 자는 희옥(希玉), 호는 백암(栢巖)이다. 시호는 민절(敏節). [[임진왜란]] 당시 경상좌도 안집사와 체찰부사로 민심 수습에 기여하였으며, 진주에서 [[이순신]]을 만난 뒤 그가 백의 종군할 때 구명 운동을 벌였다. 광해군 때는 [[이황]], [[이언적]]의 문묘 종사 운동을 주도했다. 또한 광해군의 생모 [[공빈 김씨]]의 추숭을 반대하기도 했다.
         === 광해군 시절 ===
         [[1608년]](선조 41) 성균관대사성을 거쳐 이후 이조참판 등을 지냈다. [[1610년]](광해군 2) 다시 [[성균관]][[대사성]]이 되었다가 [[사헌부]][[대사헌]]에 올라 [[기축옥사]]에 연루된 [[동인 (정치)|동인]](東人)들이 [[정여립]]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음을 들어, 기축옥사때 희생된 동인들의 억울함을 신원해줄 것을 청하였고, [[이황]]과 [[이언적]]을 비롯한 5현의 [[성균관]] 문묘종사(文廟從祀) 논의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그러나 그의 [[이황]], [[이언적]]의 문묘 종사는 [[북인]]들의 반대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북인들은 자신들의 스승인 [[조식 (1501년)|조식]]이 제외된 것에 불만을 품고 그의 이황, 이언적 문묘 종사를 반대했는데, [[북인]]과 [[남인]]간 갈등을 초래하게 된다. [[광해군]]은 즉위 초부터 자신의 생모 [[공빈 김씨]]를 왕후로 추존하려 하였으나, 그는 생모를 왕비로 [[추증]]하려는 [[광해군]]의 뜻을 비판, 반대하다가 왕의 노여움을 받고 [[강릉]] [[부사]](江陵府使)로 좌천되었다.
         [[1611년]] 그는 관직을 버리고 고향 영주시로 물러났다. [[1612년]](광해군 4) 대북(大北) 세력이 꾸며낸 [[김직재]](金直哉)의 옥사에 그가 연루되었다는 누명을 쓰고 심문을 받은 뒤 삭탈관직(削奪官職)되었다가 복관되었다.
         이후 영주시내에 귀학정과 영주시 이산면 석포리에 천운정을 짓고 시문으로 소일하며 이수광·한석봉등 당대의 명사들과 교류했는데, 이때 석봉 한호로부터 친필 글씨로 귀학정 현판을 선물로 받았다. 1616년(광해군 8) 병으로 사망했다. 묘소는 경북 봉화군 상운면에 있다. [[1623년]] [[인조반정]] 후에 [[광해군]] 시절의 행동이 참작되어 1653년에 이조 판서로 증직되었다.
         * 광해군일기, 백암집
  • 김상용 (1561년)
         '''김상용'''(金尙容, [[1561년]] ~ [[1637년]] [[1월 22일]])은 [[조선]]시대 중·후기의 문인, 시인, 정치가, 서예가로 [[조선 선조|선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관작은 보국숭록대부 의정부우의정, 판돈녕부사에 이르렀고, [[병자호란]] 때 강화도가 함락되자 문루에 화약을 쌓고 불을 붙여 자폭하였다. 자는 경택(景擇), 호는 선원(仙源)·풍계(楓溪)·계옹(溪翁), 시호는 문충(文忠), 본관은 [[신 안동 김씨|(신)안동]]<ref name=autogenerated1> http://kgib.co.kr/new/04_project/project_news.php?idx=281254&cate=ps13 </ref>. [[1614년]](광해군 6년) [[8월 27일]] [[위성공신|위성]][[원종공신]] 1등(衛聖原從功臣)에 책록되었다.
         [[조선 광해군|광해군]]의 가까운 인척이었음에도 권세에는 관심이 없었다. [[조선 광해군|광해군]] 때 한성부판윤·호조참판·승정원도승지·지의금부사·사헌부대사헌·지의금부사·형조판서·지중추부사 등을 지냈으나 '폐모론'에는 관여하지 않았으며, 도총관과 지중추부사를 지내는 동안 [[인목대비]]가 폐비되자 벼슬을 버리고 [[강원도]] 원주(原州)로 낙향했다.
         [[1614년]](광해군 6년) [[8월 27일]] [[위성공신|위성]][[원종공신]] 1등(衛聖原從功臣)에 책록되었다.
         광해군의 비 문성군부인의 이종 사촌로, [[광해군]]과 가까운 외척이었지만 광해군 폐출 후 김상용과 후손들은 불이익을 당하지는 않았다.
  • 김승수(배우)
         || [[허준(드라마)|허준]] || [[광해군]] || [* 55회부터 등장한다.] ||
  • 김육
         그러나 그 5현에 자신들의 스승인 [[조식]]이 빠진 것에 분개한 북인측에서 반발하였다. [[1611년]](광해군 3) [[정인홍]](鄭仁弘) 등이 [[이황]](李滉)을 극렬하게 비난하는 상소를 올리자 그는 선현을 헐뜯는다며 이에 격분하여, [[정인홍]]의 이름을 유생들의 명부인 청금록(靑襟錄)에서 삭제하는 부황에 앞장서서 가담했다가 [[성균관]]에서 퇴교당했다.
         이 사건으로 김육은 과거 응시 자격이 박탈되는 정거 처분을 받았다. 이 사건은 [[광해군]]이 양보해 다음해에 오현이 문묘에 종사되고 그의 과거 응시 자격 박탈 조치가 취소되었다.<ref name="dangjaen179"/> 다른 관학생들은 모두 [[성균관]]에 복귀했으나 그는 [[경기도]] [[가평]]으로 내려가 끝내 복귀를 거부했다.<ref name="dangjaen179"/> 이후 관직을 단념하고 [[경기도]] [[가평군]] 고향으로 낙향, 농사지으며 학업에 열중하였다.
         관료의 길을 걸으면서 그는 전생애를 국가 경제와 농촌 경제의 안정, 그리고 농민 생활의 향상에 바쳤다.<ref name="dangjaen179"/> [[1623년]](광해군 15년) [[인조 반정]]으로 [[서인]]이 집권하게 되자 유일(遺逸)로 추천되어 조정에 나가 [[의금부]] 도사가 됐고,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인조를 모시고 피난했다가 돌아왔으며, 환도 후에 [[1624년]] [[2월]] [[충청북도|충북]] [[음성군|음성]] [[현감]](陰城縣監)으로 부임하였다.<ref name="hanafos">[http://myhome.hanafos.com/~sluger/html/43.htm 김육<!-- 봇이 붙인 제목 -->]{{깨진 링크|url=http://myhome.hanafos.com/~sluger/html/43.htm }}</ref> 1624년 음성현감으로 재직할 때는 백성의 피폐하고 곤궁한 상황을 직접 조사하여 보고서를 작성, 백성들의 재난과 피폐한 가계 등을 구체적으로 지적, 열거하면서 조정에 부세를 재촉하지 말고 요역과 조세를 감면해줄 것을 주장하는 상소를 올렸다.
         대동법은 이원익이나 조익 등의 건의로 광해군 즉위년인 1608년에 [[경기도]]에서 시험 실시되었으며 인조 원년인 [[1623년]]에는 [[강원도]]에 확대 실시되었다. 대동법은 이처럼 점차 확대 실시되어 성과를 거두고 있었으나 그 실시 과정에서 양반 지주들의 격렬한 반대에 부딛쳐 곤란을 겪고 있었다.<ref name="dangjaen179"/>
         기근과 질병, 부상과 각종 재난에 시달리는 백성을 구하고 치료할 목적에서 선조, 광해군 대에 편찬된 각종 의학 서적의 인쇄, 복사, 배포하였으며 《구황촬요(救荒撮要)》 《벽온방(瘟方)》 등을 편찬하였다.
  • 김장생
         |군주 = 조선 광해군 이혼
         ==== 광해군 집권 시절 ====
         그 뒤 [[광해군]]의 정책에 반발하여 여러 번 불렀으나 출사하지 않았다. 1605년(선조38) 아들 반(槃)이 사마시에 합격하고 그 해에 안동김씨 첨추(僉樞) 김진려(金進礪)의 딸과 결혼했다. 이후 주로 향리 연산에 주에 주로 머물렀다.
         1609년(광해군 1) [[세자익위사]]익위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고 [[8월]]에 회양부사(淮陽府使)에 임명되어 여러 번 사양하였으나 허락을 얻지 못하였다. 그해 [[11월]] 다시 [[회양]]부사에 임명되었다. [[1610년]](광해군 2)에 10월 회양은 북방의 요충지대 이기 때문에 무인(武人)으로 임명하는 것이 적합하다는 대간의 건의로 체임, 철원부사(鐵原府使)로 부임하였다.
         [[1613년]](광해군 5년) [[철원]]부사로 재직 중 계축옥사(癸丑禍獄)이 발생했다. 7명의 서자는 무륜당을 짓고 화적으로 살아갔는데, 고문을 당하고는 [[인목대비]]의 아들 [[영창대군]]을 추대하려 했다고 자복한다. 이때 그의 서제 경손(慶孫)과 평손(平孫)의 이름이 거론되어 그 역시 연좌되었다. 서제 경손과 평손이 계축화옥에 연루되어 옥사하였고, 그 역시 체포되었으나 형문 과정에서 무혐의로 풀려났다. [[사헌부]]는 김장생을 파직시키도록 상소하고 연루 사실을 밝히려고 박응서를 친국하는 자리에서 여러 가지 관련 여부를 추궁했다. 이때 박응서는 “김모는 어진 사람으로서 죄인들이 계획할 때 김모가 들어서 알까 두려워했습니다”고 대답하여 위기를 모면하였다.
         김장생은 계축화옥을 계기로 또 다시 연산으로 내려와 문을 닫은 채 외인과 접촉하지 않고 오직 경서를 연구하는데 몰두했다. 하지만 누이와 동생들에게도 우애가 독실했던 김장생은 두 서제(庶弟)의 죽음을 무척이나 가슴 아파했다 한다. 이를 계기로 관직을 버리고 충남 연산에 내려가 은둔하여 경서와 고훈(古訓)을 탐독하며 학문 연구와 후학 양성에 전념하였다. [[1617년]](광해군 9년) [[정철]]의 아들 [[정홍명]]의 부탁을 받고 [[정철]]의 행록(行錄)을 찬하였다. [[1618년]](광해군 10) 경서변의(經書辨疑) 8권을 완성하였다. 그 뒤 [[조선 광해군|광해군]]이 여러번 불렀으나 [[인목대비]] 폐모론, [[영창대군]] 사형에 반대하여 관직에 나가지 않다가 [[인조반정]] 이후 출사하였다.
         1618년(광해군 10년) 그가 쓴 󰡔경서변의󰡕(經書辨疑) 8권은 이처럼 그가 오랫동안 경서를 읽고 토론하며 의심나는 곳은 그때그때 기록해 두었다가, 이를 다시 정리한 것이다.
  • 김집 (1574년)
         [[조선 선조|선조]], [[광해군]], [[조선 인조|인조]] 때의 [[서인]] 지도자로, [[인조 반정]] 이후 비공신계 서인과 산림세력의 지도자로 활동하였다. [[소현세자]]와 [[민회빈 강씨]] 등이 연이어 죽자 이들의 죽음에 의혹을 제기하고 복권 운동을 시작하였다. 그 뒤 청음 [[김상헌]], 우산 [[안방준 (1573년)|안방준]] 등과 함께 [[북벌론]]을 제창하였다. [[서인]] 산림의 당수로 [[송시열]], [[송준길]], [[이유태 (1607년)|이유태]]와 [[윤선거]], [[윤문거]], [[박세채]] 등이 그의 문하에서 배출되어 학문적으로는 [[노론]]과 [[소론]]의 공동조상이다. [[조선 효종|효종]] 초에는 [[안방준 (1573년)|안방준]]과, 송시열, 송준길 등과 함께 [[김육]]의 [[대동법]]을 적극 반대하였다.
         [[1614년]](광해군 6년) [[8월 27일]] [[위성공신|위성]][[원종공신]] 3등(衛聖原從功臣三等)에 책록되었다. 사계 [[김장생]]의 아들이며 율곡 [[이이]]의 서녀사위이다. 또한 [[조선 숙종|숙종]]의 정비 [[인경왕후]]의 종증조 할아버지이며, 양관대제학 [[김익희]] 광남군 [[김익훈]]의 숙부가 된다. [[서포만필]]과 [[구운몽]]의 작가 서포 [[김만중]]은 그의 종손자였다. [[한성부]] 출신.
         [[1596년]] 전란으로 가족을 이끌고 피신하였다가 [[1597년]] [[4월]] 아버지 김장생을 모시고 [[연산]]으로 돌아왔다. [[1610년]](광해군 2년) 헌릉[[참봉]](獻陵參奉)이 되었으나 [[광해군]] 조정의 [[북인]]들의 문란한 정치와 상궁 [[김개시]]가 전권을 휘두르는 것에 염증을 느껴 관직을 사퇴하였다. [[1614년]](광해군 6년) [[8월 27일]] [[위성공신|위성]][[원종공신]] 3등(衛聖原從功臣三等)에 책록되었다. 그 뒤 세자익위사 위솔(世子翊衛司衛率), [[전라도]] 도사(全羅道都事) 등을 제수하였으나 나가지 않았다.
         [[1623년]](광해군 15년) [[인조반정]] 직후 학행으로 천거되어 [[사헌부]][[대사헌]]에 제수되었지만 사양하고 취임하지 않았다.그러나 [[인조반정]] 직후 [[정사공신|공신]]들의 월권행위와 권력남용, 탐욕스러움을 논하다가 그는 반정공신들로부터 밉보이게 되었다. [[이괄의 난]] 역시 공신들의 잘못된 논공행상이 원인이라 지적하였다.
  • 김희정 (1992년)
         |배우자 = [[광해군]]
  • 남명학파
         붕당이 형성되면서 이들은 처음에는 퇴계등 기타 영남학파와 함께 [[동인]]을 형성했으며, 이후 정철의 처리문제로 인해 류성룡등 퇴계파와 갈라져 북인을 형성하다. 이후 유영경등 일부 소북인사들이 떨어져 나가면서 결국 대북으로 완전히 갈라진다. 선조 말기 이들은 후계로 [[광해군]]을 지지했고, 광해군의 가장큰 지지세력으로 남았다. 이에 대한 보상으로 광해군 즉위뒤 유영경등의 탁소북이 제거되고 난뒤, 그들은 청소북과 함께 광해군 시기 정국을 장악했으며, 광해군 중기때엔 아예 국정의 중심을 대북이 잡기까지 한다. 아예 광해군 말기때는 그가 대북을 견제하기 위해 서인의 세를 키운 행적까지 보일 정도였다. [* 그 보답은 인조반정으로 돌아오지만....]
         그러나 인조반정으로 인해 광해군이 쫓겨난뒤, 남은 대북들은 정인홍등 중심인물들이 모두 참수당하는 등 철저하게 서인들에게 숙청되었고, 그결과 정국에서 완전히 제거된다.
  • 능창대군
         1601년 3세 나이로 '''능창수'''(綾昌守)에 첫 책봉되었으며 11년 후 1612년 14세 나이로 겨울에 '''능창군'''으로 개봉되었으며 광해군(光海君) 때 왕위를 위협한다 하여 왕이 되고자 한다는 고변이 있은 뒤 역모로 몰려 교동(喬桐)에 위리안치(圍籬安置) 된 후 스스로 목매 자진(自盡)하였다.<ref name="능창군 이전의 졸기">[http://sillok.history.go.kr/inspection/insp_king.jsp?tid=kob&pos=1&mTree=0&inResult=0&indextype=1&keyword=%EB%8A%A5%EC%B0%BD+%EC%A3%BD 능창군 이전의 졸기]</ref>
         [[1608년]](광해군 즉위) [[유영경]]의 옥사 직후 [[조선의 공신|정운]][[원종공신]] 1등(定運功臣一等)에 책록되었다. [[1613년]](광해군 5) [[임해군]]의 옥사 직후 [[익사공신|익사]][[원종공신]] 1등에 책록되었다.
         [[1615년]](광해군 7) [[8월 14일]] 능창군을 추대하려 했다는 역모 고변이 있자, 양사와 [[홍문관]]에서는 능창군을 국문할 것을 계속 청했다. [[8월 22일]] [[광해군]]은 능창군을 잡아다가 인정문(仁政門)에서 직접 친히 국문을 한 뒤 옥에 가두었다가 [[강화]] [[교동도]]로 유배보냈다.
         그는 배소에서 [[위리안치]](圍籬安置)형을 받고, 구시백(具峕伯)은 그의 목에 칼을 채웠다. 아무도 그를 찾지 않았지만 [[정숙옹주]] 등이 그를 찾아 위문하였다. [[광해군]]은 지역 주민 고봉생(高封生)을 지정하여 하여금 위리 안에 같이 거주하게 하고, 밖에서 [[석회수]]로 밥을 지어서 위리안치된 집으로 들여보내게 했다. 그러나 고봉생은 날마다 제 밥을 덜어서 그에게 주었다고 한다. 그밖에 [[강화군청]]의 사동인 수생(壽生) 역시 배소로 유배된 능창군을 돌보았고, 자신의 밥을 그에게 주었다. 이를 확인한 수문장은 수생에게 [[위리안치]]된 곳에서 밥을 먹지 못하게 했다.
         [[1615년]](광해군 8) [[11월 17일]] 관청의 사동 수생에게 부모에게 고하는 글을 써서 전해준 뒤 자결하였다. [[수생]]은 그의 편지를 바로 정원군 내외에게 전달하지 못하고 사합(沙盒)에 넣어 흙속에다 묻어 두었다가, [[1623년]] [[3월]] [[인조 반정]] 이후 인조에게 올렸다.
         그가 자결한 것을 알지 못한 [[광해군]]은 [[11월 19일]] 의원을 보내 그의 병구완을 하라는 지시를 내렸다가, 그의 자결 소식을 접하게 된다. 광해군은 [[현감]]과 [[별장]] 등을 처벌하였다. [[술]]을 좋아하던 [[정원군]]은 이 일로 [[홧병]]을 얻어 [[술]]을 더 마시다가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1623년]](광해군 15) [[3월]] [[인조 반정]] 이후 [[3월 15일]] [[김제시|김제남]], [[영창대군]], [[진릉군]] 이태경 등과 함께 복권되었고, 처음 [[증직|증]] [[가덕대부]](贈嘉德大夫)에 [[추증]]되었다가 [[1629년]](인조 7년) [[10월 15일]] 인조의 특명으로 다시 [[증직|증]] [[현록대부]](贈顯祿大夫)로 가증(加贈)되었으며, [[1630년]] 정원대원군이 논란 끝에 원종으로 추존되면서 1632년(인조 10년) [[5월 4일]] 능창대군으로 추봉되었다. 따라서 그의 묘비는 증 능창대군 묘라 이름하게 되었다.
         그의 집은 [[광해군]]이 몰수하여 [[경덕궁]](慶德宮)을 지었다.
  • 대군
         [[조선왕조]]의 [[작위]]. [[태종]] [[이방원]] 시기에 만들어졌다. [[왕자]], 적손에게 주어진다. 적손이 아닐 경우에는 그냥 군(君).[* 이 '군'이라는 칭호는 그 외에 반정으로 폐출된 왕에게도 붙여진다. [[연산군]]이나 [[광해군]], 왕좌를 빼앗긴 뒤 '노산군'으로 격하당한 [[단종]] 등이 그 예.]
  • 류형원
         유형원의 집안은 뒤에 [[남인]](南人)으로 돌아서지만 [[광해군]] 시기에는 [[북인]]계열이었다.<ref name="shil309">임형택, 《우리 고전을 찾아서》(한길사, 2007) 309페이지</ref> 2세 때 아버지 유흠([[1596년]]~[[1623년]])은 당색으로는 [[북인]] [[대북]] 계열로 [[인조쿠데타]]([[1623년]]) 직후 [[유몽인]]의 옥사에 연좌되어 광해군 복위를 꾀했다는 누명을 쓰고 감옥에서 28세의 젊은 나이로 자결하였다.(일설에는 [[서인]]에 의해 옥중 장살되었다는 설도 있다.) 아버지 유흠이 의문의 죽음을 당한 뒤 외숙부 [[이원진]]과 고모부 [[김세렴]]에 의해 양육되었으며, 그들의 문하에서 평생 학문에 전념하게 되었다. 유형원의 연보를 지은 [[안정복]]은 그의 연보에서 "당쟁이 횡행할 때에 태어나서 세상을 등지고 스스로 저술하기를 즐기셨다"고 하여, 유형원이 실학자로서의 길을 걷게 된 데는 당쟁이 큰 원인이 되었음을 증언한다.
  • 배용준(배우)
          [[가토 기요마사]]의 군대에 붙들린 ~~[[광해군]]~~[[임해군]][* 광해군은 분조를 이끌고 잘 있었고 뻘짓하다 잡혀간 건 임해군이다. 어떤 의미로는 디스?]이 배용준으로 나온다(...). 배용준을 어째서인지는 몰라도 어색한 일본어 구사를 패러디한 대사를 하는데, 이 대사가 아무리 봐도 현대의 아줌마 한류 팬들을 패러디한 것 같은 나이가 좀 있는 시녀를 한방에 뿅 가게 만들어서, 그 도움을 받아 탈주하려고 하다가 들켜서 가토에게 한대 얻어맞는다.
  • 서성 (1558년)
         숙부 서엄에게서 글을 배우다가 뒤에 [[이이]], [[송익필]]의 문하생이 되어 글을 배웠다. 그 뒤 [[조선 선조|선조]] 때에 문과에 급제하여 병조좌랑이 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왕을 피란시켰으며 그 후, [[암행어사]]·경기도 관찰사·판중추 부사 등을 지냈다. [[1608년]]에는 [[조선 선조|선조]]의 임종 당시 유교 7신의 한 사람으로 [[영창대군]]의 안위를 부탁받기도 했다. [[광해군]] 때 [[계축옥사]]에 연관되어 11년간 유배되었다가 [[인조반정]]으로 다시 등용되었다. [[이괄]]의 난과 [[정묘호란]] 때에 왕을 피란시켰다. 그는 [[이인기]]·[[이귀]] 등과 남지 기로회를 조직하여 역학을 토론했으며, 서화에도 능하였다. 저서로 《약봉집》이 있다.<ref name="gwe" />
  • 선조
          13대 [[명종]] 이환→ '''14대 선조 이연'''→ 15대 [[광해군]] 이혼
         왜란 이후에도 그의 삽질은 계속되어, 당시 세자인 '''광해군보다 10살 가까이 어린''' 인목왕후를 들이지 않나[* 사실 이는 현대 관점에서 보면 충공깽이지만, 관례적으로 중전의 지위를 공석으로 놔둘 수 없었던 조선 시대에서는 불가피한 측면이 크다. 중전은 궁녀들의 모임인 내명부를 통솔하는 안주인 역할을 맡고 있다. 중전은 단순히 사적인 '왕의 배우자'가 아니라, 업무를 통솔하는 직책이기도 하므로 중전이 부재하면 궁궐의 기능에 문제가 나타나는 것이다. 또한 일반적으로 중전은 정치적으로 왕권과 후계의 안정에 큰 기여를 한다. 문종 때 새 중전을 들이지 않았던 탓에 단종이 '수렴청정'을 통한 왕권 수호를 받지 못한 것이 세조의 쿠데타를 쉽게 했다는 분석도 나올 정도.--인목왕후는 오히려 불안정만 불러왔지만--], 심지어 그 사이에 낳은 아들인 [[영창대군]]을 [[유영경]]등과 영합해 나중에 영창대군이 좀더 장성할 때 왕위에 오르게 하려고 했다! 그것때문에 광해군은 비정상적으로 보일 정도로 왕위에 집착하게 되고, 영창대군의 최후와 [[인조반정]]의 원인에 어느 정도 영향을 줬다고 볼 수 있다.
  • 성혼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 때 세자인 광해군의 부름을 받아 그를 돕고 평양에 올라가 선조를 만났으나, 왜란 초 선조가 피난할 때 행차하는 길목에 살면서도 호종하지 않았다 하여 [[동인]] [[이홍로]]로부터 공격을 받았다. 이후 죽은 후에까지 동인들과 남인들의 공격을 받았다. [[윤선거]]의 외할아버지이자 [[윤증]]의 진외증조부이다.
         [[이황]]의 이기이원론과 [[이이]]의 이기일원론의 절충을 취하였으며, 학문 연구를 하다 생애 후반에는 관직에 투신하여 [[찬성]](讚成)에 이르렀고, [[서인]]의 당수로 활동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광해군|광해 세자]]를 모시었고, [[1594년]] 의정부 좌참찬(議政府左參贊)에 임명되어 취임했다. 그해에 [[좌찬성]]으로 승진했고 [[비변사]] 회의에 참여하여 시무 12조를 올렸다. [[1594년]] 좌참찬으로 있을 때 [[영의정]] [[유성룡]](柳成龍)과 함께 주화론을 주장한 일이 문제되어 매국노로 낙인찍혀 정계에서 은퇴한다. 율곡 [[이이]], 송강 [[정철]], 구봉 [[송익필]]과 친분이 깊었다. [[조헌]], [[김덕령]], [[정철]], [[윤황]], 황신, [[이귀]], [[김자점]] 등이 그의 문하생이다. 아버지 [[성수침]]과 휴암 [[백인걸]]의 문인.
         하였다. 광해군이 급히 성천(成川)으로 옮기니, 그는 어렵사리 성천에 도착하여 광해군을 뵙고 광해군이 그를 배려하여 붙여준 경호 병사들과 함께 즉시 말을 타고 의주(義州)에 있는 행재소(行在所)로 달려갔다. 그가 분조(分朝)에서 행재(行在)로 달려오자 [[이홍로]]는 그가 행재소로 바로 오지 않고 [[광해군]]의 처소를 들렸다가 올라왔다며 비난하였다.
         그 근거로 그가 바로 행재소로 달려오지 않고 [[광해군]]의 처소를 거쳐서 달려온 것을 근거로 들었다. [[선조]]가 일단 그런 이야기를 누차 들어오다가 성혼이 도착하자 대노하였다. [[선조]]는 그에게 하교를 하여 변란 초기의 일까지 소급해 거론하였는데 그 사지(辭旨)가 준열하고 엄하였다. 즉시 성혼을 파직해야 된다, 처벌해야 된다는 여론이 나타났다.
         그러나 왕을 호종한 신하들은 그의 상소를 변명으로 이해하여 그를 공격하려 들었다. 바로 [[의정부]][[우참찬]]에 임명되었다가, [[사헌부]][[대사헌]]에 제수되었다. 그 뒤 이천에 머무르던 [[광해군|광해 세자]]의 부름을 받아 의병장 [[김궤]](金潰)를 돕고, 경기 지역의 의병장들을 도왔으며 곧이어 검찰사(檢察使)에 임명되어 부임, 개성유수 [[이정형]](李廷馨)과 함께 일했다.
         1593년에 잦은 병으로 대가가 정주, 영유(永柔), 해주를 거쳐 서울로 환도할 때 따르지 못하였고, 특히 해주에서는 중전을 호위하던 중 발병하여 파주로 다시 내려갔다. 1594년 석담정사(石潭精舍)에서 서울로 들어와 비국당상(備局堂上)을 거쳐 좌참찬이 되었다. 이후 임진왜란 중 [[광해군|광해 세자]]를 모시었고, [[1594년]] [[의정부]] [[좌참찬]](議政府左參贊)에 임명되어 취임했다. 좌참찬으로 〈편의시무14조〉를 올렸으나 이 건의는 시행되지 못하였다. 그해에 [[좌찬성]]으로 승진했고 [[비변사]] 회의에 참여하여 시무 12조를 올렸다.
  • 송준길
         어머니 광산김씨는 김은휘(金殷輝)의 딸로, 김은휘는 노비로 환천될 뻔한 [[송익필]], [[송한필]] 형제의 일가족을 보살피기도 했었다. 어머니 광산김씨는 사계 [[김장생]]과 사촌 남매간이며 외조부 [[김은휘]]는 [[김계휘]]의 동생으로, 김계휘는 [[서인]] 예학의 대가인 김장생의 아버지였다. 외할아버지 김은휘는 광해군이 세자로서 동궁에 거처하게 되자 세자빈의 아버지인 류자신(柳自新)이 궁중의 서헌(西軒)에 거처하고 있었다. 그러자 김은휘는 그의 무례함을 논책하면서 왕봉(王鳳 : 한나라 성제의 외삼촌으로 정권을 잡아서 무례한 행동으로 임금의 거처인 궁정을 빌린 일이 있었다)의 고사에 비교하니 깜짝 놀라서 피하였다고 한다. 특히 그는 송익필이 아버지인 송사련(宋祀連)의 잘못으로 세론의 증오를 받아 멸문의 궁지에 몰리자 10년 동안이나 먹여 살려 선조의 잘못으로 누를 입는 현량(賢良)들을 그늘에서 구원하였다.
         [[김장생]] 못지 않게 정경세에게 많은 영향을 받은 송준길이 정경세가 죽자 사위이기도 했지만, 스승의 예로서 사제의 복을 입었다. 사계가 별세하자 그 아들 신독제 [[김집 (1574년)|김집]]에게 배웠다. 송준길의 명민함은 유별하며 글씨를 잘 썼다. 당대 선배 명필 이시직이 일찍이 말하기를 "네가 이미 나보다 낫다."고 경탄했다. [[광해군]] 시절 소년기였으나 광해군 조정이 어지러운 조정이라 인식한 그는 과거시험에 응시하지 않는다.
  • 신사헌
         유배에서 풀려나 곧 정랑(正郞)이 되고, 그 뒤 그는 이량의 심복으로 활약하면서이후 [[성균관]]사예(成均館司藝), [[사간원]]사간 등을 역임했다. 그는 [[윤백원]] 등과도 가깝게 지냈고, 한때 [[이조]][[정랑]]으로 있던 [[이양원]]을 미워하여 남몰래 그를 내쫓기게 하고 [[강극성]]이 이조정랑이 되게끔 하였다. 이후 [[1561년]](명종 16) [[10월]] 성균관사예, [[1563년]](명종 18년) [[봉상시]]부정(奉常寺副正)에 임명되었으나, 그해 이량이 [[사림파]]를 제거하려다가 이를 알게 된 [[심의겸]]의 사주로, [[기대항]]의 탄핵으로 이량이 몰락하였다. 그 또한 곧 [[기대항]]의 탄핵, 공격을 받게 되었다. 곧 여론이 조성되어 이량이 실세하자 [[1563년]] [[8월]] [[이량]], [[고맹영]], [[이감]], [[윤백원]], 김백균 등과 함께 6간(六奸)으로 몰려 좌천, 해직될 때 그도 해직되고, [[충청북도]] [[제천시|제천]]으로 유배되었다가 이 해 [[10월]] [[거제도]]로 이배되었다. 한편 그의 외손자는 [[광해군]] 때의 [[북인]]과 [[소북]]의 지도자였던 [[남이공]] 등이다. 이후의 행적은 알려져 있지 않으며 사망년대와 사망일자는 모두 미상이다.
  • 윤선도
         [[1613년]](광해군 6년)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광해군]] 조정의 [[임해군]], [[영창대군]]의 옥사 등과 [[북인]](北人)정권의 전횡을 비난하고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 [[1616년]] 30세에 [[성균관]] 유생으로 [[이이첨]](李爾瞻) 등의 횡포를 규탄했다가 [[전라북도|전북도]] [[무주군|무주]] [[경상남도|경남도]] [[기장군|기장]](機張) 등으로 유배되었다가 풀려났다. [[1623년]](인조 1년) 도사(義禁府都事)가 되었으나 곧 사직하고 낙향했다. 이후 [[인조 반정]] 이후에도 관직을 사양하고 학문 연구에 전념하다가 [[조선 효종|봉림대군]], [[인평대군]] 형제의 대군사부로 발탁되었다. 사부는 관직을 겸할 수 없음에도 특명으로 공조좌랑·형조정랑·한성부서윤 등을 5년간이나 역임하였다. [[1629년]](인조 6년)부터는 [[세자시강원]]문학으로 발탁되어 [[소현세자]]를 보도하였다.
         청년기에 그는 [[북인]]들의 학문과 사상 역시 반대하여 광해군 때 관직에 나가지 않고 유교 학문 연구와 후학 양성에 전념하였다. [[1606년]] [[승보시]](陞補試)에 1등하였다. 그 뒤 [[1612년]](광해군 4년) [[향시]]에 합격하였다.
         [[1616년]](광해군 8년) [[성균관]] 유생으로 있을 때 [[인목대비]]의 친정아버지 [[김제남]]이 다른 뜻을 품고 있음을 규탄하는 상소를 올렸다. 그해 [[이이첨]], [[권신]] 등 [[대북]]계열 인사들이 왕을 제대로 모시지 않고 권세를 휘두르자, 그해 12월 이를 비난하는 글을 써서 왕에게 올렸다. 그해 이이첨 일파의 월권행위를 비판하는 상소를 올렸으며, 이후 [[광해군]]의 권세를 등에 업고 뇌물수수와 권력남용 등의 부패행위를 자행하는 이이첨, [[김개시]] 등을 비판하고, [[인목대비]] 폐모론과 [[영창대군]], [[임해군]], [[능창군]] 등의 처형을 규탄, 비판했다.
         또한 1616년(광해군 8) 성균관유생으로서 [[이이첨]]의 정치를 난정(亂政)으로 규정하고, 이와 함께 [[박승종]](朴承宗)·[[유희분]](柳希奮) 등의 망군(忘君)의 죄를 탄하는 상소를 올렸다가등 3사에서 탄핵이 빗발쳤고 [[1617년]] 유배를 당해, [[전라북도]] [[전주시|전주]]으로 유배, 이후 경원과 [[경상남도]] [[기장군|기장]](機張) 등지에서 유배생활을 하였다.<ref name="youn2007"/> 이를 병진소(丙辰疏)라 한다.
         [[경원군|경원]]에 유배된 그는 유배지에서 서당을 짓고 벽촌의 젊은이들에게 학문을 가르쳤다. 경원 유배살이 중 그는 〈견회요 (遣懷謠)〉 5수와 〈우후요 (雨後謠)〉 1수 등 시조 6수를 지었다. [[1618년]] [[광해군]]과 이이첨 일파를 비난하다가 변방에 유배된 이들이 [[여진족]] 등과 내통한다는 이유로, 그도 배소가 [[경상남도]] [[기장군]]으로 이배되었다.
         [[1623년]](광해군 15년) [[인조 반정]]으로 [[광해군]]이 폐위되고 인조가 왕위에 오르자, 윤선도는 8년 만에 귀양에서 풀려 나서 한성으로 돌아왔다. 이후 학행으로 천거되어 [[승의랑]] [[도사]](都事)·[[병조]] [[정랑]] 등의 벼슬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고는 고향인 [[전라남도]] [[해남군|해남]]으로 내려갔다. 이후 여러 벼슬에 임명되었지만 모두 고사하고 취임하지 않았다. 그해 6월 [[도사]] [[승의랑]]에서 [[봉직랑]]으로 승진하였다.
         윤선도는 [[송시열]]이 그랬던 것처럼 [[광해군]] 때 [[이이첨]]을 탄핵하다가 도리어 유배를 간 일이 있었다. 이이첨을 탄핵했던 송시열은 이이첨이 실각한 후 그 공로를 높이 인정받았으나, 윤선도는 유명수(柳命壽)의 사주를 받고 한 일이라고 깎아내려져 공으로 인정되지 않았다.<ref name="leedeok245"/> 인조 반정 이후에 그의 기개를 높이 사는 상소들이 올라왔지만 그가 유명수 등의 사주를 받았다는 비방도 계속 제기되자 그는 실망한다. 그 뒤 [[찰방]] 등의 관직에 여러 번 임명되었으나 이를 모두 사양하였다.
         * 조선왕조실록ㅡ광해군
  • 윤치영
         윤치영의 9대조 [[윤두수]]와 [[윤근수]]는 [[조선]] [[조선 선조|선조]] 때 형제 정승이었다. 8대조 [[윤흔]]은 [[조선 선조|선조]] 때 [[문과]]에 급제하고 [[삼사]]를 거쳐 [[자헌대부]] [[중추부]]지사에 이르렀고, [[호종공신]]으로 사후 [[증직]]으로 [[의정부시|의정부]][[좌의정]]에 [[추증]]되었다. 7대조 [[윤취지]]는 [[광해군]] 때 [[생원시]]에 합격하고 관직은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에 이르렀다. 6대조 윤채(尹埰, 1603~1671) [[조선 인조|인조]] 때 [[진사시]]에 합격하여 관직은 세자익위사 사어에 이르렀다. 5대조 [[윤세겸]](尹世謙, 1668~1748)는 윤채의 아들이며 [[가선대부]] [[동지돈녕부사]]를 지냈다. 그러나 고조부 윤발(尹潑, 1728~1798) 때에 가계가 몰락하여 윤발은 관직을 지내지 못했다. 증조부 [[윤득실]](尹得實, 1768~1823)은 생전 관직이 [[통덕랑]]에 이르렀으나 술을 좋아하여 가세가 몰락하였다.
  • 윤휘
         과거 급제 후 삼사의 요직을 거쳐 1613년(광해군 5) 계축화옥에 관련, 삭직되었다가 다시 기용되어, 1618년 동지겸진주사(冬至兼陳奏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광해군]]이 [[명나라]]에 구원군을 보낼 때는 광해군의 중립외교론을 지지했다가 [[인조반정]] 직후 파면되었다. [[1626년]] 복관되고, 성주목사, 청주목사 등을 지냈다. 그뒤 [[1636년]] [[병자호란]] 당시 어가를 [[남한산성]]까지 호종하였고, 주화론에 참여하여 [[조선]]측 대표로 [[청나라]]군과의 사이를 오가며 타협을 주관, [[강화 조약]]을 체결하였다. 환도 뒤 도승지가 되어 청나라와의 외교를 전담하였다.
         뒤에 [[형조]][[판서]]를 거쳐 [[의정부]][[우찬성]] 등을 지냈다. 사후 아들 [[윤면지]]의 공로로 [[의정부]][[영의정]]이 [[추증]]되었다. [[윤두수]]의 셋째 아들이다. [[윤흔]]의 동생이며 [[윤훤]]의 형이다. 당색으로는 [[서인]]이었으나 [[광해군]]의 조정에 참여했다. 본관은 해평(海平)으로 자는 정춘(靜春), 호는 장주(長洲) 또는 천상(川上), 시호는 장익(章翼)이다. 성혼(成渾)의 문인이다.
         [[1603년]] [[좌부승지]], [[참찬관]]을 지냈다. 한편 [[선조]]의 특명으로 돈피 사모 이엄(獤皮紗帽耳掩) 1부(部)을 하사받기도 했다. [[1604년]] [[승지]], [[호조]][[참의]]를 거쳐 [[1605년]] [[해주]][[목사]](海州牧使), 그뒤 [[전라도]] [[관찰사]]·[[경상도]] [[관찰사]]로 나가 치적을 올렸다. 당색으로는 [[서인]]이었으나 [[광해군]]의 조정에 참여하였다.
         ==== 광해군 조정에 참여 ====
         [[1609년]](광해군 1년) [[좌승지]]가 되고, [[장례원]][[판결사]]를 거쳐 [[1610년]] [[전라도]][[관찰사]]로 나갔다. 그해 호패(號牌) 사용으로 민심이 혼란함을 들어 호패제에 대한 무마책과 대책을 건의하였다. 그해 겨울 병을 이유로 여러번 사직상소를 올려 체직되었다. [[12월]] 행 부호군(行副護軍)을 거쳐 [[1611년]] [[호조]][[참의]]가 되었다. [[1611년]] 다시 [[전라도]][[관찰사]]로 나갔고, 영녕전 이안청 영건청(永寧殿移安廳營建廳) 건립에 참여한 공로로 아마 1필을 하사받았다. [[1612년]] [[경상도]][[관찰사]]로 재직 중 [[가선대부]]로 승진하였다.
         [[1613년]](광해군 5년) [[경상도]][[관찰사]]로 재직 중 지역 유림들의 [[조목]]의 [[월천서원]] 배향 건의를 받아들여 시행하였다. [[1613년]](광해군 5) [[계축옥사]]에 형 [[윤흔]]의 첩 서씨의 남동생 서양갑과 관련, 연좌되어 벼슬에서 쫓겨났고, [[서양갑]]에게 군관 직위와 월급을 준 일이 문제되어 양사의 공격을 당하다가 뒤에 다시 기용되었고, [[인목대비]] 폐모론 때는 불참하였다.
         한편 [[광해군]]이 [[명나라]]와 [[후금]] 사이에서 중립적인 외교를 펼칠 때, [[강홍립]], 임연(任兗) 등과 함께 [[광해군]]의 중립 외교를 적극 지지하였다.
         [[1618년]](광해군 11년) [[5월]] [[명나라]]에 파견되는 동지 겸 진주사(冬至兼陳奏使)로 임명되었으나 사양하여 체차되었으나 다시 성절사로 임명되어 [[명나라]]를 다녀왔다. 이 기간 중 [[누르하치]]와 [[여진족]]의 움직임을 수시로 장계를 올려 조선 조정에 보고하였고, 염초(焰硝)를 구해서 [[조선]]조정으로 보냈다. 그 뒤 [[공조]][[참판]]·[[예조]][[참판]]을 역임했다.
         [[1618년]] 궁궐 영건 도감 제조가 되고, [[1621년]] [[승문원]]제조의 한사람에 임명되었으며 그해 공조 참판, [[1622년]] [[의금부]]당상, [[비변사]]의 유사당상, [[예조]][[참판]]이 되었다. [[1623년]] 초, 차언심(車彦諶) 등과 함께 역적으로 몰려 죽은 [[허균]]의 노비들을 차지하여 자신의 노비로 부리다가 [[박홍도]] 등의 공격을 받고 스스로 사직을 청하였으나 [[광해군]]이 이를 듣지 않았다.
         반정 초반 같은 [[서인]] 당원임에도 버림받았으나 반정 공신인 훈신들의 특별 사면 건의로 [[1625년]] 사면되었다. 그러나 계속 서인 간관들은 그를 처벌하거나 [[문외출송]]시킬 것을 상소하였다. 사면된 후 [[1626년]] [[용양위]][[부호군]]이 되고, 그해 [[사은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러나 그가 [[광해군]] 조정에 참여한 일로 탄핵 상소와 비난이 계속되었다.
         [[분류:1571년 태어남]][[분류:1544년 죽음]][[분류:조선의 문신]][[분류:조선의 정치인]][[분류:조선의 외교관]][[분류:서예가]][[분류:조선 광해군]][[분류:조선 인조]][[분류:병자호란 관련자]][[분류:정묘호란 관련자]][[분류:해평 윤씨]][[분류:경상북도 출신 인물]][[분류:병사한 사람]]
  • 윤휴
         아버지 [[윤효전]]은 [[남해군]] 때에 [[영월군]]의 옥사를 주관했고, [[대사헌]], 지의금부사 등을 지냈으나 [[1617년]](남해군 9)에 [[사헌부]][[대사헌]]으로서 대비의 유폐를 반대하다가 [[경주시|경주]][[부윤]]으로 밀려났다. 그러나 당색이 [[북인]](北人)이었고, [[광해군]] 정권에 참여했으며 [[임해군의 옥사]]를 지지했던 탓에 후일 [[서인]]이 아들 윤휴의 가계전력을 문제삼는 원인이 되었다. 윤휴는 아버지 [[윤효전]]이 후처 김씨에게서 늦게 얻은 만득자로, 그에게는 6년 연상의 서형(庶兄) [[윤영]](尹鍈)이 있었다.
  • 윤흔
         당색은 [[서인]](西人)으로, [[광해군]] 때 [[승정원]][[우승지]] 등을 지냈으나 한때 첩의 남동생이 칠서지변의 서양갑이라서 [[계축옥사]]로 파직되었다가, [[1623년]](광해군 15년) [[인조반정]] 뒤에 관작이 복구되어 [[예조]][[참판]]·[[중추부]][[지사]], 예조판서 등을 역임했다. [[1624년]] [[이괄의 난]] 때에는 [[조선 인조|인조]]를 [[공주시|공주]]까지 호종하였고, 왕을 공주로 호종한 공으로 가의대부에 오르고 예조참판을 지냈다.
         이후 형조좌랑, 예조좌랑, 호조좌랑 등 다시 3조의 좌랑을 거쳐 [[평안도]][[도사]]로 나갔다. 복귀하여 [[형조]][[정랑]](刑曹正郞), [[예조]][[정랑]], [[호조]][[정랑]]을 거쳐 [[평안도]][[도사]](平安道都事)로 나갔다. 그 뒤 내직으로 복귀하여 [[형조]][[정랑]]을 세 번 역임한 뒤 [[세자시강원]] 문학(侍講院文學)으로 [[광해군]]을 보도하였다. 그 뒤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 지제교(知製敎)에 임명되고,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 사간원사간(司諫院司諫)으로 올랐다가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로 옮겼다. 그 뒤 옥당(玉堂)에 선발되어 [[홍문관]]수찬(修撰)이 되고, 교리(校理)를 거쳐 부응교(副應敎)에 올랐다. [[1601년]] 모친상을 당하여 사직하고 3년상을 치뤘다. [[1603년]](선조 36년)에 3년상을 마치고 복직, [[통례원]]상례(通禮院相禮), [[군자감|군자감정]](軍資監正), 통례원 좌통례(左通禮)를 역임하였다. 이후 내외의 관직을 두루 역임하고 [[승정원]][[우승지]]가 되었다.
         이후 [[서인]]의 당원으로 활동하였으며, [[1605년]]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승진, [[여주목|여주]][[목사]](驪州牧使)로 부임하였고, [[여주]][[목사]]로 재직 중 [[여주]]의 향토지인 [[황려지]]를 썼다. [[1608년]](선조 41년) 겨울 [[명나라]]에 [[동지사]]가 파견될 때 동지부사(冬至副使)로 임명되어 [[연경]]에 다녀왔다. 귀국 직후 [[승정원]][[동부승지]](承政院同副承旨)로 임명되었다가 [[1609년]](광해군 1년) 행[[장례원]] [[판결사]](行掌隷院判決事)로 전임되었다가 다시 [[승정원]][[우부승지]]와 [[좌부승지]]를 역임한 뒤, [[승정원]][[우승지]]가 되었으며 [[가선대부]](嘉善大夫)로 가자되었다.
         [[1613년]](광해군 5) [[칠서의 변]]이 일어났을 때 첩의 남동생인 서매제 [[서양갑]](徐羊甲)에게 연루되어 파직당하였다. 옥사가 확대되어 [[계축옥사]]가 되어 심문받았으나 그는 특별한 혐의점이 없어서 처벌받지는 않았다. 그 뒤 6년간 칩거하였다.
         [[1620년]](광해군 13년) 서반(西班)의 무관직에 여러 번 임명되었으나 병을 핑계로 사직상소를 올려 물러난 뒤, 당시 [[북인]] 정권이 장악하고 있던 조정에 나가지 않았다.
         [[1623년]](광해군 15년) [[3월]] [[인조반정]] 이후 [[김류]], [[이귀]] 등의 요청으로 조직에 복귀하였으며 [[동지중추부사]], [[오위도총부]][[부총관]], [[한성부]][[좌윤]], [[한성부]][[우윤]] 등을 역임하였다.
  • 이인(배우)
         || [[2004년]] || [[KBS1]] || [[불멸의 이순신]] || [[광해군]] ||
  • 이평 (1572년)
         [[1612년]](광해군 4) 증광사마시에 합격하여 생원이 되고, 그 해 [[9월 9일]]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으나 관직에 발령되기 전에 병으로 사망했다.
         [[1612년]] [[유영경]]의 추죄와 광해군에게 존호를 올리기를 상소하였다.
         유학(儒學)으로 [[1612년]](광해군 4년) 과거에 응시하기 위해 서울로 상경했다. [[1612년]](광해군 4년) [[5월 12일]] [[광해군]]의 즉위를 방해한 [[유영경]](柳永慶)을 강경하게 탄핵하였다. 대동야승과 연려실기술, 광해군일기에 그가 유영경의 죄를 탄핵한 기록이 실려 있다. 유영경(柳永慶) 등을 추형(追刑)하고, [[광해군]]에게 존호(尊號)를 올리고, 공신(功臣)을 녹훈하고, 역당(逆黨)의 흉서(兇書)를 중외에 반포할 것을 요청하는 상소였다.<ref>광해군일기 53권, 1612년(광해군 4년, 명 만력 40년) 5월 2일 을미 1번째기사, 이평이 유영경 등의 추형, 존호를 올리는 일, 공신을 녹훈하는 일 등을 상소하다</ref> 이에 그해 [[5월 29일]] 대신이 백관을 거느리고 존호를 올리는 일을 아뢰었는데 입계하였다. 광해군은 "임금은 부귀하기는 한 나라를 소유하였고 귀하기는 군왕이니, 그 영화와 높게 드러난 것이 그 이상 더할 수 없다. 저 존호를 올려 찬양하는 일은 하늘 끝의 한 점 뜬 구름에 지나지 않는다. 명예에 대해 옛날의 지사(志士)들은 얻고 잃고 가고 오는 것을 역시 개의치 않았으니, 임금에게 헛된 칭호를 가하는 것이 무슨 털끝만한 보탬이라도 있겠는가. 도리어 손상만 시키는 것이다. 나는 감히 과장하지 못하겠으며 명예도 원치 않고, 다만 본분을 지키다 자연을 따라 죽고자 할 뿐이다. 더구나 지금 이평(李坪)의 상소 하나로 인하여 경들이 정청(庭請)을 그치지 않으니, 내가 더욱 통탄스럽게 여긴다. 내가 비록 불초하지만 어찌 한 애숭이 유자의 망언으로 인하여 경솔하게 당치도 않은 큰 칭호를 받겠는가. 만에 하나라도 이럴 리는 없으니, 번잡하게 하지 말고 빨리 물러가도록 하라.<ref>광해군일기 53권, 1612년(광해군 4년, 명 만력 40년) 5월 29일 임술 3번째기사, 대신이 백관을 거느리고 존숭의 일을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다</ref>" 하였다.
         이후 [[이항복]] 등이 신하들을 데리고 입계하여 그에게 존호 올리기를 청하기도 했다.<ref>광해군일기 54권, 1612년(광해군 4년, 명 만력 40년) 6월 1일 갑자 4번째기사, 우의정 이항복이 백관을 거느리고 존호를 올릴 것을 재차 청하다</ref> 일설에는 [[이이첨]]이 이평을 사주하여 유영경의 추죄를 청하는 상소를 올리게 했다는 의견도 있다.<ref>광해군일기 54권, 1612년(광해군 4년, 명 만력 40년) 6월 4일 정묘 5번째기사, 양사에서 시관으로서 시험 출제를 잘못한 김시언을 국문할 것을 청하다</ref>
         [[1612년]](광해군 4) 임자(壬子) 증광시(增廣試) 생원에 합격하여 [[생원]]이 되고, 바로 전시에 응시할 자격이 주어져 그해의 [[9월 9일]]의 [[증광 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으나 관직에 발령되기 전에 병으로 사망한다. [[선교랑]] [[홍문관 부수찬]]이 증직으로 추서된다.
         * 광해군 일기
  • 인교진
         * 2013년 [[MBC]] 특별기획 《[[구암 허준 (드라마)|구암 허준]]》 ... [[광해군]] 역
  • 인조
         15대 [[광해군]] 이혼'''→16대 '''인조''' 이종→17대 [[효종]] 이호
         인조는 [[조선]]의 16대 왕이다. [[인조반정]]을 통해 집권했으며, 명과 후금사이에서 중립외교를 표방한 [[광해군]]을 비판하면서 존명배금(명을 따르고 후금을 배척한다)를 내걸었다. 그러나 현실은 명이 후금보다 여러모로 딸리는 상황이었기에 애매한 외교정책을 실시할 수 밖에 없었으며, 결과적으로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이 일어나게 된다.
  • 지성 (1977년)
         |《[[왕의 여자]]》||[[광해군]] 역||[[SBS 월화드라마|월화 대하사극]]
  • 지성(배우)
         ||<|2> 2003 ||<|2> SBS || [[왕의 여자]] || 주연 || [[광해군]] || ||
  • 허목
         [[1613년]](광해군 5) [[이원익]](李元翼)의 손녀와 혼인하였다.
         [[1617년]](광해군 9년) [[거창군|거창]][[현감]]에 임명된 아버지 허교의 임지를 따라 [[거창군|거창]](居昌)으로 따라가 삼종형인 관설 [[허후]](觀雪 許厚)와 함께 유학자 모계 [[문위]](茅溪 文緯)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그뒤 모계 [[문위]]의 추천으로 다시 삼종형 관설 [[허후]]와 함께 [[경상북도]] [[성주]](星州)로 [[정구 (1543년)|한강 정구]](鄭逑)를 찾아가 스승으로 모시고 오랫 동안 학문을 연마했다. [[한강 정구]]는 [[이황|퇴계 이황]]과 [[조식 (1501년)|남명 조식]]의 문하에 모두 출입하면서 수학하며 학문 연마에 정진하였고, [[남인]]계 예학과 왕사부동례(왕과 사대부의 예는 같을수 없다.)설의 창시자이기도 했다.
         ==== 광해군의 정책 비판과 낙향 ====
         [[광해군]]의 [[임해군]] 사형과 연이어 [[영창대군]]을 사사하고 [[인목대비]] 폐모론이 나오자 그는 유생의 신분으로 [[광해군]]의 인목대비 폐모론에 반대하였다. 그러나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이후 [[광해군]]의 [[인목대비]] 폐모 등에 반발하여 관직에 나가지 않고 스승 [[정구 (1543년)|정구]]의 문하에서 [[성리학]]과 예학 등을 수학하며 학문을 연마하다가, [[정구 (1543년)|정구]] 사후 [[인조반정]] 이후 고향으로 돌아왔다.
         [[1620년]](광해군 13년) 스승 [[한강 정구]]가 타계하자 상복을 입고 애사(哀詞)를 지어 바쳤다. 수 많은 [[정구 (1543년)|정구]]의 문도 가운데 허목은 가장 연소하였으나 뒷날 퇴계 이황, 남명 조식, 한강 정구의 학통을 근기지방으로 가져와 근기학파(近畿學派)를 형성시킴으로써 [[이황]]의 다른 제자들인 서애(西厓) [[유성룡]], 소고 [[박승임]] 학봉 [[김성일]](鶴峯 金誠一)의 문인과 후계자들이 영남학파를, [[조식]]의 다른 제자들인 [[김우옹]] 등이 경상좌도 학파를 이룬데 비해, [[경기도]] 지역에 [[이황]]과 [[조식]]의 학통을 전수하여 근기학파를 형성했다. 근기학파에서 남인계[[실학]]이 분파되었으며, [[이황]]과 [[조식]]의 학통을 모두 계승하였기에 다소 [[이황]]의 이기이원론이나 [[조식]]의 실용사상이 혼재되어 있었다. 이후 그는 관직에 욕심부리지 않고, 50여 세가 되도록 세상에 알려지지 않고 학문 연구와 후학 교육 등에 진력하여 일가를 이루었다.
         [[광해군]] 때 삼척부사로 왔던 [[김효경]]의 공적을 추모하여 세운 사당이 있었으나 역시 퇴락해 있었다. 부사 허목은 사당을 옮겨 짓고 제사를 지냈으며, 사당중수를 기록한 기문을 지었다.
         또한 [[광해군]] 때의 [[대북]]계열인 권진(權縉)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불이익을 당한 [[권수]](權脩)를 실력을 인정하여 천거하기도 한다. 그가 [[북인]]계 열 가문의 후손들을 적극 추천하여 현관이 되게 하고, [[서얼 허통]]까지 공공연히 주장하자 [[서인]]들은 그가 [[북인]]들을 천거한다며 비난했고, [[허적]] 등도 이를 경계하였다. 그러나 그는 실력이 있는 자들을 그에 합당한 청요직에 앉히는게 뭐가 잘못되었느냐며 항변한다.
         예송논쟁은 조선 정치사 중 붕당정치가 최 고조에 인른 사건 중에 하나 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붕당 정치가 조선을 망하게 했다고 이야기 하는 한 편, 예송논쟁은 국력만 소모한 쓸데 없는 기득권 싸움이라고 이야기 하나 이는 일제시대 때의 일본 사람들에 의한 식민사관에 의한 인식들입니다. 붕당정치는 민주주의의 근간이 되는 정치 이며 붕당정치의 출현은 민주주의 싹의 출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16세기에 태어난 조선의 붕당정치는 조선이 그 어느나라 보다도 민주주의의 싹을 먼저 자라게 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현재 전 세계 모든 나라들이 여당(집권세력)과 야당으로 나뉘어져 정치 주도권 싸움을 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도 마찮가지 입니다. 예송논쟁이 예학의 측면 뿐만 아니라 정치, 사회적인 다른 모든 면에서도 중요하게 재 조명되고 있는 것은 백성들의 더 좋은 삶의 질을 위해 통치자의 힘의 균형을 어떻게 끌고 가야 하는 가에대한 논쟁입니다. 조선의 건국 이념이 성리학을 바탕으로 하고 있기에 성리학이 무너지면 조선의 건국이념이 무너지게 되고, 조선의 건국이념이 무너지면 조선사회의 질서는 혼란에 휩싸여 지탱을 할 수 없게 되고, 결국 파국을 맞게 된다는 것입니다. 즉 대한민국에도 건국이념이 있고, 이에따라 만들어진 헌법이 있습니다. 대한민국 국민들이 대한민국의 건국이념과 헌법을 지키지 않고 무질서 하게 살게된다면 대한민국은 국가로서 더 이상 지탱을 할 수 없게 된는 것과 동일한 이치입니다. 이렇게 볼 때, 예송논쟁의 쟁점은 상복을 갖고 논쟁을 한 것이 아니라, 큰 틀에서 왕권보다는 사림들의 세력이 강화되기를 바란 것(서인들의 주장)이고, 사림보다는 왕권이 강화되어야 한다(남인들의 주장)는 인식의 차이 인 것입니다. 즉 현 시대에서 내각제냐 대통령제냐 하는 것과 비슷한 내용이라 하겠습니다. 예송논쟁을 볼 때, 당시의 조선시대에 왕권을 강화하는 것이 더 좋은지, 사림들의 세력을 강화시키는 것이 더 좋은지는 독자들이 결론을 내야할 내용입니다. 하지만, 예송논쟁이 불거졌을 당시의 전 후시대 상황(조선,중국,일본)을 보면, 14대 선조때 임진왜란이 있었고, 15대 광해군때는 쇠약해 가는 명나라와 후금(훗날 청나라)에 대한 양면정책을 폇으며, 반정으로 등극한 16대 인조때는 정묘호란, 병자호란이 일어나서 인조가 삼전도 굴욕을 당했고 이에대한 결과로 소현세자(장자)와 봉림대군(차자, 훗날 17대 효종)이 청나라로 볼모로 8년간 잡혀갔었고. 17대 효종 즉위 후 이를 설욕하고자 국력을 양성하였으나 서인들(북벌론)과 남인들(북벌론 폐지)의 대립으로 뜻을 이루지 못 했습니다. 즉 조선은 긴 세월동안 치루어진 여러 번의 전쟁과 가뭄(조선왕조실록)등으로 인해 민심이 아주 흉흉한 시대였습니다. 이러한 사항에서 더 좋은 정치를 위해 서인과 남인이 조선 통치의 근본인 성리학을 바탕으로 예학을 놓고, 왕권 강화냐, 사림들의 세력 강화냐를 놓고,붕당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의 붕당속에서도, 서인의 영수 송시열이 남인의 영수 허 목에게 아들을 보내 약을 지어오게 한 내용이나, 남인의 영수 허 목이 같은 남인 이면서 12촌인 당시 영의정 허 적의 서자 허 견의 못 된짓을 꾸짓었으나, 개선되지 않자, 영의정 허적에 대한 탄핵상소를 숙종에게 올리고 관직을 떠나, 향리 연천으로 돌아간 사건등, 서인들과 남인들 사이에서도 많은 사림들이 정도 앞에서는 많은 내용을 두고 서로 협조와 공조를 했다는 점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 홍순언 (1530년)
         그의 이야기는 [[조선 효종|효종]]의 부마인 동평위 [[정재륜]]의 동평위공사견문록과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의 옥갑야화 편, [[이익]]의 [[성호사설]] 17권 임진재조 편 등에 기록되어 후대에 전하게 되었다. 첫째 아들 [[홍건]]은 [[임진왜란]] 때 공을 세워 [[당상관]]을 지냈고, 넷째 아들 [[홍운]](洪運)은 [[광해군]] 때인 [[1612년]] 생원시에 합격하였고, 홍건의 아들인 손자 [[홍효손]]은 숙천부사를 지냈다.
  • 희빈 장씨
         언니는 관상감 관원인 김지중에게 출가하여 1691년 당시 관직이 종7품 직장이었다. 오빠 장희재는 일찍이 무과에 급제하여 희빈 장씨가 [[조선 숙종|숙종]]의 후궁이 되기 7년 전인 경신년(1680년)에 키가 크고 외모와 무술이 뛰어난 명문가의 자제만으로 구성된 [[내금위]]에 재직<ref>《조선왕조실록》숙종 35권, 27년(1701 신사 / 청 강희(康熙) 40년) 10월 22일(을해) 3번째기사</ref> 하였으며 1683년에는 좌포청 부장으로 있었다. 아버지 [[장형 (조선)|장형]]의 사촌형인 [[장현 (조선)|장현]]은 [[조선 효종|효종]] 8년에 이미 정2품 자헌대부를 제수받고 숙종 1년에는 이미 종1품 숭록대부에 올라 공을 세워도 더이상 품계가 올라갈 수 없어<ref group="주">생전에 정1품 관직에 오를 수 있는 건 [[문관]]에게 한정된다. 《동의보감》의 저자이기도 한 명의관 [[허준]]은 [[광해군]]에게 정1품 [[보국숭록대부]]를 제수받았다가 문관의 반발에 의해 취소되었고, 사후에야 비로소 추증됐다.</ref> 자식과 조카가 대신 승봉되어야 했던 거물 역관으로 재산은 국중거부의 명성을 얻을 정도였으며, [[장현 (조선)|장현]] 형제의 자식들은 무관 및 역관, 혹은 의관으로 고위직에 있었다. 그녀의 일족이 비록 문신 사대부 가문은 아니었지만 조선에서 손 꼽히는 대부호였으며 사회적 위치 또한 결코 떨어지지 않았음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임해군]]의 동복 동생인 [[광해군]]은 큰 아들이 아니기에 당연히 원자가 아닌 신분으로 세자가 되었다. 후궁 소생이 원자가 될 자격이 없지는 않지만 서른이 되지 않은 [[조선 숙종|숙종]]이 후궁 소생을 원자로 정한 것은 비정상적으로 급한 결정이었다.그러나, 부왕인 [[조선 현종|현종]]이 34세에 죽었고, 왕의 평균수명이 짧았던 시대였던 만큼, 30세가 다 되어가도록 후사가 없는 상황이 비정상적이었다는 반론이 있기도 하다.</ref> 하고 있던 서인은 숙종의 선언에 당황했지만 제대로 반대를 하거나 저지를 할 준비도 되지 않은 상황 속에 [[조선 숙종|숙종]]은 불과 닷새 후인 1월 15일에 왕자 윤에게 원자 명호를 내려 종묘 사직에 고했다. 또한, 숙종은 원자 윤의 생모 소의 장씨를 정1품 빈(嬪)으로 책봉하여 귀인 김씨를 제치고 후궁 1위로 만들었다.<ref group="주">숙종실록에는 15일에 빈으로 책봉된 것으로 기록됐지만 승정원일기에는 17일로 기록되어 있다.</ref> 앞서 [[조선 숙종|숙종]]이 원자 정호에 대한 불만이 있으면 관직을 내놓고 떠나라는 선언이 있었으며, 이미 종묘 사직에 고한 일을 무르라는 것은 선대 왕들을 한꺼번에 능멸하는 행위이자 신권이 왕권의 위에 있음을 입증하는 행위나 다름없기에 [[서인]]은 소극적인 반박으로 의사를 표현할 수 밖에 없었고, 숙종은 이 또한 용서하지 않아 그들을 파직하였다.
         신당의 존재가 1699년부터 존재하였다면 [[숙빈 최씨]]를 비롯한 궁인 전원은 물론 [[조선 숙종|숙종]] 또한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주자학을 신봉하는 조선 사회에서 무속 행위는 국법으로 엄중히 금하였지만 궁 밖은 물론 궁 안에서도 자주 치루어졌고<ref group="주">광해군 부부, 인조, 민회빈 강씨도 굿을 즐겨 하였다.</ref>, 숙종의 모후 [[명성왕후 김씨]]도 [[인현왕후]]와 함께 숙종의 두창의 쾌유를 기원하는 굿을 하였던만큼 장씨의 신당 설치 자체는 굳이 문제 삼을 사안이 아니었다. 하지만 [[숙빈 최씨]]는 신당의 존재에 이견을 주장하였고, [[조선 숙종|숙종]]은 [[숙빈 최씨]]가 거론한 신당의 존재를 조정 대신들에게 공식화하며 장씨가 몰래 신당을 차려 [[인현왕후]]를 시해하는 저주굿을 하였다고 발표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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