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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필수 . . . . 5회 일치
|출생일= [[1900년]] [[11월 6일]] 음력
'''한필수'''(韓弼洙, [[태양태음력|음력]] [[1900년]] [[11월 6일]] ~ [[태양태음력|양력]] [[1986년]] [[4월 10일]])는 대한민국의 교육자이며 국회의원이었다.
본관은 청주. 호는 동석(東石)이다. 서울 장교동에서 육군 정위 용호(龍鎬)의 둘째 아들로 [[태양태음력|음력]] [[1900년]] [[11월 6일]] 태어났다. 출생일과 출생지가 상이한 기록도 있으나 유가족을 통해 확인한 결과 1900년이며 장교동이 정확하다.
[[분류:1900년 태어남]][[분류:1986년 죽음]][[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
- 현진건 . . . . 5회 일치
'''현진건'''(玄鎭健, [[1900년]] [[8월 9일]] ~ [[1943년]] [[4월 25일]])<ref>{{웹 인용|url=http://preview.britannica.co.kr/bol/topic.asp?article_id=b25h0979b|제목=현진건|출판사=한국 브리태니커 온라인|확인날짜=2007-11-25}}</ref> 은 [[대한제국]]과 [[일제 강점기]] 조선(朝鮮)의 작가, [[소설|소설가]] 겸 [[언론|언론인]], 독립운동가이다.
현진건은 [[광무 (연호)|광무]](光武) 4년([[1900년]]) 8월 9일(양력 [[9월 2일]]) [[대구광역시|대구부]](大邱府)에서 현경운과 어머니 완산 이씨(完山 李氏) 정효(貞孝)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곳은 당시 대구군 2정목(町目), 지금의 대구광역시 [[중구 (대구광역시)|중구]] 속칭 '뽕나무골'이라 불리던 마을이었다. 어머니는 [[융희]](隆熙) 4년([[1910년]]) 6월 13일에 일찍 세상을 떠났다. 그의 위로는 홍건(鴻健), 석건(奭健), [[현정건|정건]](鼎健)의 세 형이 있었는데, 맏형 홍건은 대한 제국의 육군 참령과 외국어학교(外國語學校) 부교관(副敎官)을 지냈고 칭경시예식사무위원(稱慶時禮式事務委員)을 잠시 맡기도 했다. 석건은 일본 [[메이지 대학]](明治大學) 법학과를 졸업하고 [[변호사]]로 근무했으며, 정건은 훗날 중국으로 건너가 [[독립운동]]에 나섰다.
이들 형제는 현진건이 5촌 당숙 '''현보운'''([[1875년]]~[[1919년]])의 양자로 [[입양]]되어 들어간 뒤 법적으로는 친형제에서 6촌 형제로 바뀌었다. 관립 일어학교 출신의 보운은 고종 33년인 [[건양]](建陽) 원년([[1896년]]) 8월 3일에 외국어학교의 교관(敎官)이 되었고, 광무 3년([[1899년]])에는 궁내부 번역관, 광무 4년([[1900년]]) 12월 24일에는 예식원 참리관으로 임명되어 봉직하다가 [[러일전쟁]]이 일어난 광무 7년(1903년) 11월 11일에 주일공사관 이등참서관이 되었고, 광무 8년(1904년) 일본 보병대 수원(隨員)으로 일본으로부터 즈이호오 4등 훈장을 받기도 했다. 광무 9년(1905년)에는 [[병조|군부]] 군무국 포병과로 옮겨 정위가 되었다.
[[분류:1900년 태어남]][[분류:1943년 죽음]][[분류:병사한 사람]][[분류:대한제국의 사회 운동가]][[분류:이범석 (1900년)]][[분류:박헌영]][[분류:일제 강점기의 소설가]][[분류:대륜고등학교 동문]][[분류:일제 강점기의 언론인]][[분류:일제 강점기의 작가]][[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분류:연주 현씨]][[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
- 이장희 (시인) . . . . 4회 일치
'''이장희'''(李章熙, [[1900년]] [[1월 1일]] ~ [[1929년]] [[11월 3일]])는 [[일제 강점기]]의 [[시문학|시인]], [[번역]][[작가|문학가]]이다. 본관은 [[인천 이씨|인천]](仁川)이고 호는 고월(古月)이다.
[[1900년]] [[대구광역시|경상북도 대구]]에서 아버지 [[이병학 (1866년)|이병학]]의 11남 8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대구의 부호이며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를 지낸 [[이병학 (1866년)|이병학]]이며, 어머니는 박금련이다. 다섯 살때, 어머니를 잃고 이후 계모 밑에서 크며 아버지와 불화했다. 아버지 이병학은 두 번째 부인과 5남 6녀를 두었고, 이장희가 죽기 5년 전에 세 번째 결혼을 하였으며 그 외에 측실도 1명을 거느렸다. 이장희 자결 당시 형제는 모두 10남 8녀로 매우 복잡한 가계였다. [[경상북도]] [[대구광역시|대구]]보통학교를 거쳐 [[일본]] [[교토]] 중학교를 졸업하였다. 교우관계는 [[양주동]], 유엽, 김영진, [[오상순]], 백기만, [[이상화 (시인)|이상화]], [[현진건]] 등 극히 제한되어 있었다. 부친이 중추원 참의로서 일본인들과의 교제가 빈번하여 아들 이장희 시인에게 중간 통역을 맡기려 했으나, 이장희 시인은 한 번도 복종하지 않았고, 총독부 관리로 취직하라는 지시도 거역하여 부친은 이장희 시인을 버린 자식으로 아주 단념하였다 한다. 그래서 극도로 빈궁한 삶을 벗어나지 못하였다. [[1929년]] [[11월 3일]] 대구 자택에서 음독 자살하였다.<ref>장백일, 〈고월 이장희시 연구〉, 《국어국문학》84권, 국어국문학회, 1980, 79~82쪽</ref>
* [[소설|소설가]] [[현진건]](玄鎭健, [[1900년]] [[8월 9일]] 출생 ~ [[1943년]] [[4월 25일]] 사망. 아호는 빙허(憑虛). [[저널리스트|언론인]]으로도 활동하였다.)
[[분류:1900년 태어남]][[분류:1929년 죽음]][[분류:일제 강점기의 시인]][[분류:자살한 작가]][[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분류:음독 자살한 사람]][[분류:대구초등학교 (대구) 동문]][[분류:교토 대학 동문]]
- 백기만 . . . . 3회 일치
* [[시 (문학)|시인]] [[이장희 (시인)|이장희]](李章熙, [[1900년]] [[1월 1일]] 출생 ~ [[1929년]] [[11월 3일]] 사망. 아호는 고월(古月). [[번역|번역문학가]]로도 활동하였다.)
* [[소설|소설가]] [[현진건]](玄鎭健, [[1900년]] [[8월 9일]] 출생 ~ [[1943년]] [[4월 25일]] 사망. 아호는 빙허(憑虛). [[언론|언론인]]으로도 활동하였다.)
[[분류:1902년 태어남]][[분류:1966년 죽음]][[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분류:일제 강점기의 시인]][[분류:대한민국의 시인]][[분류:염상섭]][[분류:이범석 (1900년)]][[분류:박헌영]][[분류:대한민국의 문학 평론가]][[분류:대구초등학교 (대구) 동문]][[분류:경북고등학교 동문]][[분류:동아대학교 교수]][[분류:대한민국의 작가]][[분류:한국독립당]][[분류:일제 강점기의 문학 평론가]]
- 이인 . . . . 3회 일치
1963년 [[민정당]](民政黨) 창당에 참여하고 최고위원이 되었으나 범국민단일야당운동 추진에 실패하자 정계에서 은퇴했다. [[1965년]] 이인은 [[안재홍]] 사망 소식을 접하고, [[서울특별시|서울]] 정의여고 강당에서 그의 장례식을 집행, 주관하였다. 당시 [[안재홍]]은 자진월북자라는 오해와 편견으로 금기시되었고, 꺼려했다. 그러나 이인은 [[이범석 (1900년)|이범석]] 등과 함께 [[안재홍]]의 시신없는 장례식을 진행하였다. 군사정권은 그의 의도가 불순함을 의심하여 내사하였으나 혐의점을 찾지는 못하였다. [[1972년]] 민족통일촉진회를 결성했으며 [[국토통일원]] 고문에 선임되었다. [[1974년]]에는 [[국토통일원|통일원]] 고문에 재선임되었다.
* [[이범석 (1900년)|이범석]]
[[분류:1896년 태어남]][[분류:1979년 죽음]][[분류:대한민국의 반일 감정]][[분류:대한민국의 반공주의자]][[분류:19세기 한국 사람]][[분류:20세기 대한민국 사람]][[분류:대한제국의 유학자]][[분류:유교 신자]][[분류:일제 강점기의 대학 교수]][[분류:일제 강점기의 법조인]][[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분류:조선어학회 사건]][[분류:한국의 군정기]][[분류:대한민국의 한국 전쟁 관련자]][[분류:대한민국의 저술가]][[분류:대한민국의 기업인]][[분류:대한국민당 (1948년) 당원]][[분류:한국독립당]][[분류:신민당]][[분류:대한민국의 법조인]][[분류:대한민국의 법무부 장관]][[분류:이승만 정부의 국무위원]][[분류:대한민국 제1공화국]][[분류:대한민국 제2공화국]][[분류:대한민국 제3공화국]][[분류:이범석 (1900년)]][[분류:대한민국 제4공화국]][[분류:이승만| ]][[분류:메이지 대학 동문]][[분류:니혼 대학 동문]][[분류:경주 이씨]][[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
- 김영한 (1900년) . . . . 2회 일치
'''김영한'''(金永漢, [[1900년]] ~ [[1980년]]<ref>《한국일보》 (1987.12.18) [http://www.kinds.or.kr/imgdata8/1987/12/18/19871218HKM07.pdf 알뜰살림 속에 숨은 內助... "보통 부인"]</ref>)은 [[대한민국]] 제13대 대통령 [[노태우]]의 장인이다.
[[분류:일제 강점기의 교육인]][[분류:1900년 태어남]][[분류:1980년 죽음]][[분류:경상북도 출신 인물]][[분류:안동 김씨 (신)]][[분류:노태우 가]]
- 김초향 . . . . 2회 일치
'''김초향'''(金楚香, [[1900년]] ~ [[1983년]])은 [[대한민국]]의 [[판소리]] 명창이다. [[대구광역시|대구]]에서 태어났다. 광무대 극장에 들어가 가무를 배웠고 [[김창환 (국악인)|김창환]], [[송만갑]]의 가르침을 받아 대성하였으며, [[이화중선]]과 더불어 당대 여성 명창의 쌍벽을 이루었다. 그 중에서 [[흥보가]]를 잘 불렀다.
[[분류:대한민국의 국악인]][[분류:1900년 태어남]][[분류:1983년 죽음]][[분류:판소리 명창]][[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
- 박태준 (작곡가) . . . . 2회 일치
'''박태준'''(朴泰俊, 영어 이름은 '''Travis Jones Park'''(트래비스 존스 파크), [[1900년]] [[11월 22일]] ~ [[1986년]] [[10월 20일]])은 대한민국의 [[작곡가]]이다.
[[분류:1900년 태어남]][[분류:1986년 죽음]][[분류:대한민국의 작곡가]][[분류:동요 작곡가]][[분류:연세대학교 교수]][[분류:서울여자대학교 교수]][[분류:유교 이탈자]][[분류:대한민국의 장로교도]][[분류:20세기 대한민국 사람]][[분류:미국에 거주한 대한민국인]][[분류:계성고등학교 (대구) 동문]][[분류:숭실대학교 동문]][[분류:투스큘럼 칼리지 동문]][[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분류:밀양 박씨]]
- 육홍균 . . . . 2회 일치
1900년 10월 1일 ~ 1983년 7월 5일
1900년 [[경상북도]] [[선산]][[군(행정구역)|군]](현 [[구미시]])에서 태어났다. 수원고등농림학교(현 [[서울대학교]] 농업생명과학대학)를 졸업하고 [[일본]] 니혼 대학 문과를 수료하였다.
- 윤태동 . . . . 2회 일치
[[1900년]] 5월 13일 [[충청북도]] [[충주시|충주]]에서 출생하였다. [[경기고등학교|경성제일고보]]를 거쳐 [[1925년]] [[일본]] [[도쿄대학|동경제국대학]] 문학부 철학과를 졸업한 후, [[서울대학교/학부/농업생명과학대학|수원고등농림학교]], [[보성전문학교]], [[중동고등학교|중동학교]] 등에서 강사로, [[경성제국대학]]에서 조수로 근무하였다. [[1934년]] 7월에는 [[경성제대]] 예과 [[교수]]로 임명되어 그해 11월까지 근무하였다. 조선인이 [[경성제국대학]] 교수로 임명된 것은 윤태동이 3번째이며, 전 기간을 통틀어 4명에 불과하다.
[[분류:친일반민족행위자]] [[분류:충주시 출신 인물]] [[분류:1900년 출생]]
- 이상백 (1904년) . . . . 2회 일치
* [[이범석 (1900년)|이범석]]
[[분류:여행 작가]][[분류:대한민국의 군사 평론가]][[분류:대한민국의 정치 평론가]][[분류:대한민국의 과학 평론가]][[분류:대한민국의 교육 평론가]][[분류:대한민국의 스포츠 평론가]][[분류:대한민국의 시사 평론가]][[분류:IOC 위원]][[분류:이병도]][[분류:김구]][[분류:이범석 (1900년)]][[분류:박헌영]][[분류:여운형]][[분류:김규식]][[분류:장건상]][[분류:박중양]][[분류:서울대학교 교수]][[분류:대륜고등학교 동문]][[분류:경북고등학교 동문]][[분류:와세다 대학 동문]][[분류:서울대학교 대학원 동문]][[분류:경주 이씨]][[분류:유교 신자]][[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
- 최태영 . . . . 2회 일치
'''최태영'''(崔泰永, [[1900년]] [[3월 28일]] ~ [[2005년]] [[11월 30일]])은 [[대한민국]]의 [[법학자]]이이다. 한국인 최초로 [[1925년]]에 법학 정교수가 되어 한국 근대 법학의 초기에 [[보성전문학교]]와 [[서울대학교]] 등 많은 대학에서 상법·민법·헌법·국제법·행정법·법제사·법철학 등 다양한 분야를 가르치며 법학 교육에 크게 기여하였다. [[고대사]]에 관심을 두고 여러 저서를 출간하였다.
[[분류:1900년 태어남]][[분류:2005년 죽음]][[분류:일제 강점기의 전문학교 교수]][[분류:대한민국의 법학자]][[분류:연세대학교 교수]][[분류:고려대학교 교수]][[분류:중앙대학교 교수]][[분류:대한민국의 역사가]][[분류:대한민국학술원 회원]][[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분류:메이지 대학 동문]][[분류:법철학자]][[분류:대한민국의 저술가]][[분류:20세기 대한민국 사람]][[분류:21세기 대한민국 사람]][[분류:대한민국의 백세인]][[분류:상법학자]][[분류:부산대학교 교수]][[분류:서울대학교 교수]]
- 흥친왕 . . . . 2회 일치
|재위 = [[1900년]] ~ [[1910년]]
[[1900년]](광무 4년) [[4월]] 완흥군(完興君)에 봉해졌다. 그러나 [[을미사변]]의 관련자로 지목되어 언관들의 탄핵을 받았다. 이재면이 [[을미사변]]에는 직접 참여하거나 동조하지 않았으나, 을미사변으로 생겨난 제1차 [[김홍집]] 내각에서 궁내부 대신을 역임한 것이 비난의 이유였다. 한동안 벼슬이 없던 그는 생활이 곤란한 처지에 놓였다.<ref>"韓國의 名建物 (2) 雲峴宮", 경향신문 1984년 10월 10일자 9면, 생활/문화면</ref>
- Y2K 버그 . . . . 1회 일치
연도를 두글자로 기억하는 컴퓨터들이 2000년이 되면 연도를 1900년으로 인식, 오작동을 일으킬 것이라는 버그. 당시 1990년대만 해도 컴퓨터가 상당히 많은 곳에 퍼져 있었기에 이 버그는 회사나 국가의 전산 시스템, 병원의 의료기기 등에 심각한 결과를 가져올것이라고 예상되었다.[*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8122900099118001&editNo=15&printCount=1&publishDate=1998-12-29&officeId=00009&pageNo=18&printNo=10254&publishType=00010|매일경제 1998년 12월 29일 기사,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 경순왕 . . . . 1회 일치
** [[견훤]] ([[900년]] - [[935년]])
- 부산광역시 . . . . 1회 일치
1900년대 초의 부산항
- 연하장 . . . . 1회 일치
우편제도가 등장하자 우정국에서 연하장을 발매하게 되었다. 최초의 연하장은 1900년에 발매되었으며, 전통의상을 걸친 우정국 관리들의 모습을 컬러 인쇄하고, '신년을 맞이하여 한국 황실과 우정국의 임직원들은 여러분들에게 축하 메시지를 보냅니다'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 요시다 세이지 . . . . 1회 일치
요시다 세이지는 야마구치현 노무보국회 시모노세키 지부에서 동원부장으로 일했다고 주장했으며, 1977년 '조선인 위안부와 일본인', 1983년 '나의 전쟁범죄'라는 책을 저술하여, 이 책에서 자신이 군부대를 이끌고 [[제주도]]의 마을 등에서 200여명의 여성을 강제로 징병하여 위안부로 삼았다고 진술했다. 또한 1982년 9월 [[아사히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이를 증언하였다. 1900년대 아시히 신문은 요시다 세이지의 증언을 바탕으로 다수의 기사를 작성했고, 이는 일본 사회에서 위안부 문제가 널리 인식되는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이 소위 '요시다 증언'에는 의혹도 뒤따르게 되었다.
- 울릉군 . . . . 1회 일치
[[신라]] [[지증왕]] 때인 512년 [[이사부]] 장군이 '''입에서 연기나는 목각 [[사자]]상'''을 섬에 풀어 놓겠다는 [[야바위]]를 시전하여 울릉도에 있는 [[우산국]](于山國)을 정벌했다는 사실은 유명. 이후 신라에게 꾸준히 조공을 바쳤고, [[후삼국시대]]인 930년 완전히 한반도에 귀속되어 이 때부터 공고히 한국령으로 자리잡는다. 이후 1454년 강원도 울진현에 편입되어 1900년 울릉군이 설치되기 전까지 그대로 유지된다.
- 이갑성 . . . . 1회 일치
* [[이범석 (1900년)|이범석]]
- 이상오 . . . . 1회 일치
[[분류:일제 강점기의 스포츠 평론가]][[분류:경주 이씨]][[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분류:김구]][[분류:한국독립당]][[분류:염상섭]][[분류:이범석 (1900년)]][[분류:박헌영]][[분류:대한민국의 사회 운동가]][[분류:대한민국의 과학 평론가]][[분류:대한민국의 문학 평론가]][[분류:대한민국의 군사 평론가]][[분류:대한민국의 정치 평론가]][[분류:대한민국의 시사 평론가]][[분류:대한민국의 역사 평론가]][[분류:대한민국의 스포츠 평론가]][[분류:유교 신자]][[분류:대한민국의 기업인]][[분류:대륜고등학교 동문]][[분류:호세이 대학 동문]]
- 이상정 (1897년) . . . . 1회 일치
[[분류:1897년 태어남]][[분류:1947년 죽음]][[분류: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분류:경주 이씨]][[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일제 강점기의 시인]][[분류:일제 강점기의 장교]][[분류:한국의 장군]][[분류:반일 감정]][[분류:김구]][[분류:염상섭]][[분류:이범석 (1900년)]][[분류:박헌영]][[분류:육군 장군]][[분류:한국독립당]][[분류:일제 강점기의 화가]][[분류:자유 연애]][[분류:일제 강점기의 서예가]][[분류:일제 강점기의 저술가]][[분류:일제 강점기의 조각가]][[분류:대륜고등학교 동문]][[분류:도쿄 공업대학 동문]][[분류:도쿄 예술대학 동문]][[분류:히토쓰바시 대학 동문]][[분류:고쿠가쿠인 대학 동문]][[분류:유교 신자]][[분류:대한민국의 정치인의 배우자]]
- 이헌일 . . . . 1회 일치
[[분류:1917년 태어남]][[분류:1979년 죽음]][[분류:대륜고등학교 동문]][[분류:경북고등학교 동문]][[분류:연희전문학교 동문]][[분류:연세대학교 문과대학 동문]][[분류:육군 장교]][[분류:국방대학교 동문]][[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분류:경주 이씨]][[분류:대한민국의 반일 감정]][[분류:대한민국의 반공주의자]][[분류:김구]][[분류:이범석 (1900년)]][[분류:유교 이탈자]][[분류:대한민국의 장로교도]][[분류:광복군]][[분류:제2차 세계 대전 참전 군인]][[분류:한국독립당]][[분류: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 자시키로우 . . . . 1회 일치
법률적으로 1900년에 『사택감치(私宅監置)』라는 제도가 도입되었다. 당시 정신의학에서는 정신질환자를 일단 감금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삼았는데, 당시 일본에서는 정신병원의 시설이 부족한 편이었다. 게다가 이미 자시키로우의 관습이 있었으므로 쉽게 도입되었다.
- 장도 (1876년) . . . . 1회 일치
[[1899년]] 도쿄법학원을 졸업하고, 일본의 법원을 순회하면서 견습까지 마친 뒤 귀국했다. [[1900년]]부터 사립 광흥학교 교사로 법학과 일본어 등을 가르쳤고, 이후 [[한성법학교]] 강사와 [[보성전문학교]] 강사로 일하면서 [[형법]] 전문가로 활동했다.
- 존 루터 존스 . . . . 1회 일치
1900년 4월 30일 오전 3시, 존스는 [[미시시피]] 본에서 열차 충돌로 사망한다. 그는 열차가 충돌하기 전까지 경적을 울리며 제동기를 작동시켰다고 전해진다. 이로인해 기관차의 속도가 최대한 감속되었고, 이 사고의 사망자는 존 루터 존스 한 명 뿐이었다.
- 최동 . . . . 1회 일치
* [[이범석 (1900년)|이범석]]
- 표양문 . . . . 1회 일치
[[분류:1907년 태어남]][[분류:1962년 죽음]][[분류:대한민국의 과학 평론가]][[분류:대한민국의 저술가]][[분류:대한민국의 시인]][[분류:한국독립당]][[분류:20세기 대한민국 사람]][[분류:대한민국의 수필가]][[분류:이승만]][[분류:자유당]][[분류:이범석 (1900년)]][[분류:대한민국의 문학 평론가]][[분류:대한민국의 음악 평론가]][[분류:대한민국의 시사 평론가]][[분류:대한민국의 정치 평론가]][[분류: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동문]][[분류:연세대학교 의과대학 동문]][[분류:국방대학교 동문]][[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분류:대한민국의 개신교도]][[분류:신창 표씨]]
- 한규복 (1881년) . . . . 1회 일치
[[1899년]](광무 2년) 초, 그해의 정부 관비유학생으로 뽑혀 [[4월]] [[일본]] [[도쿄]]로 유학, 그해 [[9월]] [[도쿄]] 신전중학교(神田中學校)에 편입학하였다. [[1900년]] [[3월]] [[신전중학교]]를 졸업하고 [[도쿄 전문학교]]에 입학했다. 동경 전문학교를 거쳐 [[1901년]] [[9월 11일]] [[와세다 대학]](早稻田大學) 정치경제학과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1903년]](광무 6년) [[7월 15일]] 3학년 재학 중 [[와세다 대학]] 정치경제과를 수료하고 [[7월]] 정부의 명으로 귀국하여, [[대한제국]]의 관리로 근무를 시작했다.
- 한병주 . . . . 1회 일치
[[분류:1879년 태어남]][[분류:1950년 죽음]][[분류:청주 한씨]][[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김구]][[분류:의친왕]][[분류:유교 신자]][[분류:한용운]][[분류:김좌진]][[분류:이범석 (1900년)]][[분류:한국독립당]][[분류:병사한 사람]][[분류: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 함화진 . . . . 1회 일치
함화진은 [[이왕직 아악부]]의 수장인 제2세 아악사장을 역임한 함재운의 장자로 태어나 이병문에게서 거문고를, [[명완벽]]에게서는 [[가야금]]을 전수받았다. 전공은 거문고였으나 국악이론 부문에서도 일인자가 되었다. 10대 시절인 [[1900년]]에 가전악(假典樂)이 된 뒤 [[1901년]] 전악(典樂), [[1913년]] 아악수장, 그 뒤 아악사를 차례로 지냈다. [[1932년]]에는 아버지가 맡았던 자리인 제5세 아악사장에까지 올랐고, [[1939년]]에 은퇴했다.
- 현정건 . . . . 1회 일치
[[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고려공산당]][[분류:윤치호]][[분류:한국독립당]][[분류:이범석 (1900년)]][[분류:대한제국 순종]][[분류:이승만]][[분류:김구]][[분류:의친왕]][[분류:윤치영]][[분류:윤보선]][[분류:연주 현씨]][[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
- 홍성유 . . . . 1회 일치
[[분류:대한민국의 한국 전쟁 참전 군인]][[분류:대한민국의 군사 평론가]][[분류:대한민국의 정치 평론가]][[분류:대한민국의 시사 평론가]][[분류:대한민국의 문화 평론가]][[분류:대한민국의 스포츠 평론가]][[분류: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문학부 동문]][[분류:육군보병학교 동문]][[분류:한국독립당]][[분류:이범석 (1900년)]][[분류:정일권]][[분류:신민주공화당]][[분류:유교 이탈자]][[분류:대한민국의 로마 가톨릭교도]][[분류:남양 홍씨 (당홍)]]
- 홍승목 . . . . 1회 일치
[[한성부]] 출신으로 [[1875년]] [[조선의 과거 제도|과거]]에 합격하여 [[승정원]]에서 관직을 시작했다. 이후 [[홍문관]]과 [[사헌부]] 등에서 근무하다가 [[1879년]] 형조와 병조의 참의 자리에 올랐으며, [[1881년]]과 [[1883년]]에는 각각 [[사간원]]의 대사간과 [[성균관]]의 대사성에 임명되었다. [[1890년]] 형조참판과 병조참판을 지냈고, [[1900년]] [[궁내부]] 특진관에 올랐다.
- 황옥 (1885년) . . . . 1회 일치
의열단은 황옥, 김시현 등이 밀반입시킨 무기류를 통해 [[조선총독부]], [[동양척식주식회사]], [[매일신보]] 등을 동시에 테러하는 제2차 국내 거사를 준비했지만 김재진이 밀고하여 실패했다. 김재진은 재판 이후 흔적이 증발하는데, [[유석현 (1900년)|유석현]]은 1983년 [[중앙일보]]에 기고한 회고록에서 김재진은 가명이고 [[권태일]]이 본명이라고 주장했다. 이 과정에서 김원봉, [[김지섭]] 등 소수만 탈출했고 황옥, 김시현, [[김진기]], [[조동근]], [[홍종우]], [[홍종무]], 유석현 등은 1923년 3월 15일에 체포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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