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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의석
         고등학교 재학 중 교내 [[종교의 자유]]와 관련된 시위와 소송에 연관되어 제적당했다. [[2004년]] [[8월 11일]]부터 [[9월 22일]]까지 [[10월 16일]]부터 [[10월 22일]]까지 두 차례에 걸쳐 [[대광고등학교]] 측에 종교의 자유를 요구하는 단식 농성을 벌였다. 그해 [[6월 16일]] 학교 교내 방송으로 종교의 자유를 선언하였다가 퇴학당했으며, 이후 [[국가인권위원회]]에 종교 선택의 자유, 퇴학 무효를 청원하여 이끌어냈다. 이 소송은 결국 [[2010년]] [[대법원]] 최종심에서 승소하였다.
         [[7월]]에 고등학교 복학 이후에도 학교 측의 [[종교 선택의 자유]]를 요구하며 두 차례에 걸쳐 학교측에 [[종교의 자유]]를 요구하는 단식 농성을 벌였다.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을 휴학하며 [[시민 사회 운동]]에 투신하였고 대학은 중퇴하였다. 그밖에 그는 [[대한민국 헌법]]상 병역의 의무를 폭력으로 규정하고 [[평화주의|군대 반대 퍼포먼스]]와 각종 집회 등을 주도하였으며, [[2008년]] [[9월 30일]]에는 [[군대]] 폐지론을 주장하는 무언 [[퍼포먼스]]를, [[10월 1일]]에는 군대의 폭력성을 지적하고자 [[국군의 날]] 기념 행사장에 누드로 [[퍼포먼스]]를 벌이기도 했다. [[서울대학교]] 법과 대학에 진학하였으나 사회 문제에 관심을 두다가 [[2011년]] 미등록제적 형식으로 그만두었다.
         또한 일부 교육단체들 역시 "이대로 보고만 있지는 않겠다"며 반발했다. [[민주노동당 (대한민국)|민주노동당]], [[참교육을 위한 전국학부모회]],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인권운동사랑방 등으로 구성된 '강의석 학생 부당 징계 저지와 학내 종교 자유를 위한 연대회의'는 "학교의 잘못을 학생에게 떠넘기고 있다"며 "학교의 비상식적인 행동을 교정하기 위해 '연대회의' 차원에서 대응하겠다"고 반발하고 있다.<ref name="jeonjeon"/> [[국회]] 교육위원회 [[민주노동당 (대한민국)|민주노동당]] [[최순영]] 의원실 이원영 보좌관은 "지금까지는 강의석 학생의 요청에 따라 적극적인 대응을 안 했던 것이 사실"이라며 "이대로 보고만 있지는 않겠다"고 강력 대응 의지를 밝혔다.<ref name="jeonjeon"/> 이후 강 군은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을 내고, 서울북부지방법원에 퇴학무효 소송을 내는 등 외로운 투쟁을 지속하다 지난 9월1일 법원으로부터 퇴학무효 가처분 결정을 이끌어냈다.<ref name="pito">[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20041018084828&Section= 대광고 강의석군, 학교 '거짓말'에 재차 단식] 프레시안 2004.10.18</ref>
         이후 그는 [[8월 11일]]부터 [[9월 25일]]까지 [[단식]]으로 투쟁했고, 학원은 예배선택권을 보장하기로 했다.<ref name="secure_right">{{웹 인용 |url=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211878 |제목= 강의석군 46일째 단식 풀었다 학내 종교자유, 예배선택권 보장 받아|저자= 김태형, 이계덕 |출판사=오마이뉴스}}</ref>
         그는 학내 예배 선택권을 요구하며 [[2004년]] [[8월 11일]]부터 46일간 단식을 벌였다.<ref name="ildan">[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28&aid=0000083237 강의석군, 1주일 만에 단식 풀어] 한겨레신문 2004.10.22</ref> [[8월 11일]]부터 그는 음식물 일체를 거부하며 물만 마시고 있는 강군은 학생들의 종교 자유가 보장되지 않는 한 단식을 계속하겠다는 완강한 입장을 밝혔다.<ref name="namda">[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207648 "종교의 자유 보장 안되면 단식 계속"] 오마이뉴스 2004.09.02</ref> 그는 [[9월 2일]] [[오마이뉴스]]와의 전화통화에서 "[[종교의 자유]]를 위해 항의한데 대해 학교가 거짓으로 본질을 흐리는데 항의하고, 이 운동에서 나태해지는 것을 막기 위해 단식을 시작했다"며 "학생들의 예배권 선택이 보장하고 대안을 모색하는 자리가 만들어질 때까지는 단식을 풀지 않겠다"고 말했다.<ref name="namda"/>
         [[2004년]] [[9월 1일]] 법원의 ‘퇴학무효 가처분’ 결정으로 학교 복귀와 함께 예배 선택권을 부여받았지만, 그는 ‘전교생의 예배 선택권’을 주장하며 단식을 멈추지 않았다. 인터넷 카페에는 강군을 지지하는 수천명의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누구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학교 종교 자유’를 놓고 100일 넘게 외로운 싸움을 벌이는 강군에게 사회적 이목이 집중되기도 했다.<ref name="dadndaen">[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28&aid=0000079815 ‘학내 종교자유’ 빛을 얻다] 한겨레신문 2004.09.30</ref> 한달 넘게 단식을 하는 자식을 보다 못한 강군의 부모가 응급차를 부르자 입을 떼지도 못할 정도로 쇠잔한 상태에서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가출을 하기도 했다.<ref name="dadndaen"/>
         [[9월 4일]] [[한겨레신문]]과의 인터뷰에서 그는 “지난달 11일부터 물만 마시며 단식하고 있다”며 “2일부터 수업을 듣고 있지만 학생들의 예배 선택권을 보장받을 때까지 단식을 계속할 것”이라고 말했다.<ref name="hanists">[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28&aid=0000076632 ‘종교자유’ 강의석군 24일째 단식중] 한겨레신문 2004.09.04</ref> 그는 또 “2일 종교 자유의 문제에 대한 학교와 학생 간의 대화의 장을 마련해줄 것을 학교에 요구했지만, 아무런 대답도 듣지 못했다”고 덧붙였다.<ref name="hanists"/> 30일 넘게 단식하면서 그는 물과 음료수만을 마시면서 버텼다. 그의 단식은 [[한겨레]], [[경향신문]], [[오마이뉴스]], [[노컷뉴스]], [[프레시안]], [[한국일보]], [[국민일보]]를 비롯한 대형 언론들과 기독교계열 신문에 의해 집중적으로 보도되었다. 그는 [[9월 25일]]에 1차 단식을 풀었다.
         [[9월 22일]] 당시 그는 학교에 등교는 했으나 건강 상태가 악화돼 휠체어에 의지해 있는 상태였다.<ref name="kyokyo"/> [[9월 25일]] 오전 8시경 [[고려대학교]] 안암병원으로 옮겨져 10시부터 응급실에서 링거를 맞고 입원하였다.<ref>[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211878 강의석군 46일째 단식 풀었다:학내 종교자유, 예배선택권 보장 받아] 오마이뉴스 2004.09.24</ref> [[고려대학교]] 안암병원 병실에서도 수능시험 공부를 계속 하던 그는 "머리 맡에 놓인 [[초콜릿]]의 유혹이 강렬하였다"고 회상하기도 했다. [[9월 29일]] 병상에서 밀린 수능시험 공부를 하고 있던 그는 "단식을 푼 지 5일 만에 몸무게를 15㎏ 정도 회복했다"며 "단식기간 중 모두들 잠든 밤에 내 머리맡에 놓인 초콜릿이 가장 큰 유혹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당연한 권리였기에 내 목소리가 반드시 받아들여질 것이라 믿었고, 그 희망으로 지금까지 올 수 있었다"며 "'권리를 일깨워줘 고맙다'는 한 친구의 문자 메시지에 가장 큰 행복을 느꼈다"고 말했다.<ref name="namda"/>
         [[9월 14일]] 단식 농성 34일차 되던 날, 국회에서는 그에 대한 지지 서명운동이 일어났다. 학내 종교자유를 주장하며 3단식을 하고 있는 강의석군 지지 서명운동에 23명의 국회의원들이 동참했다.<ref name="seodong">[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28&aid=0000077946 국회의원 23명 ‘학내 종교자유’ 지지 서명] 한겨레신문 2004년 09월 13일자</ref> 최순영 민주노동당(국회 교육위원회) 의원은 “지난 8월부터 국회의원과 보좌관 등을 상대로 실시한 ‘학내 종교자유 지지 서명’에 국회의원 23명, 보좌관·비서관 111명이 참여했다”고 13일 밝혔다.<ref name="seodong"/> 서명에 참여한 의원은 최순영 단병호 천영세 민주노동당 의원과 이원영 김태년 김성곤 열린우리당 의원, 배일도 고진화 한나라당 의원, 손봉숙 민주당 의원 등이다. 최 의원 쪽은 이들의 서명을 학내 종교자유 운동을 펴고 있는 강군에게 전달했다.<ref name="seodong"/>
         [[9월 11일]] 대광고 일부 교사들은 1명씩 교대로 24시간 동안 릴레이 단식을 벌이며 강 군의 단식 중단을 종용하고 있다. 이들은 자신의 교무실 책상 앞에 '제자를 살립시다'라고 적힌 푯말을 세운 뒤 매일 오전 9시부터 다음날 오전 9시까지 릴레이 단식을 벌였다.<ref name="ritistys">[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40040912200240 "제자를 살리자", 대광고 교사들 릴레이단식] 프레시안 2004.09.13</ref> 교사 릴레이 단식에는 13일까지 12명이 참여하겠다는 의사를 밝힌 상태다. 이밖에 교사들이 자체적으로 벌이고 있는 강 군 단식 중단 촉구 서명운동에는 12일 기준으로 모두 35명의 교사들이 서명을 했으며, 13일부터 [[대광중학교 (서울)|대광중학교]]로도 서명운동을 확대하였다.<ref name="ritistys"/> 그리고 대광고, 대광중의 교사들이 두루 동참하였다. 박상준 대광고 교사는 12일 [[프레시안]]과의 전화통화에서 "강 군은 한 달이 넘도록 단식을 하면서도 정상적으로 등교해 힘겹게 정규수업을 받고 있다"며 "이에 교사된 입장에서 더 이상 제자의 건강이 악화되는 것을 바라보고만 있을 수 없어 이같은 릴레이 단식을 벌이게 됐다"고 설명했다.<ref name="ritistys"/> 교사들의 제자 살리기 단식 농성은 그가 단식을 푸는 [[9월 22일]]까지 계속되었다.
         [[2005년]] [[7월]]부터는 종교 자유 소송과 동시에 체력 트레이닝을 받았다. [[2005년]] [[8월 26일]]~[[8월 28일]]에는 '미션스쿨 종교자유 카페' 회원들과 함께 인터넷 검색 시위를 벌였다.<ref name="gisosp">[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64184.html “종교자유 줘요” 강의석 다시 뛴다] 한겨레신문 2005.09.13</ref> 8월 28일, 한 인터넷 포털사이트의 인기검색 순위에 ‘종교 자유’가 단숨에 2위에 올랐다. 강씨를 비롯한 ‘미션스쿨 종교자유 카페’ 회원들이 한꺼번에 이 포털에 접속해 동시에 ‘종교 자유’를 검색하는 이른바 ‘검색 시위’를 펼쳤기 때문이다.<ref name="gisosp"/> 그해 여름 그는 소송과 종교 자유 시위를 진행하는 동시에 헬스 클럽을 다니며 각종 체력 트레이닝을 받고, [[2005년]] [[9월]]부터는 정식으로 권투 지도를 받고 아마추어 권투선수 자격을 획득했다. [[9월 10일]] 강의석(19·서울대 법학과 1)은 다시 대광고 교복을 다시 꺼내 입었다. 강씨는 인터넷 카페 ‘미션스쿨 종교자유’ 회원 4명과 함께 각자 모교의 교복을 입고 젊은 층에게 인기가 높은 광고노래 ‘우유송’에 가사를 바꿔 “종~교 자유, 주세요!”를 외치며 서울 명동에서 대학로까지 행진했다.<ref name="gisosp"/> [[9월 13일]] 프로복서가 되기 위해 [[한국권투위원회]]의 프로 테스트를 받았다.<ref name="gisosp"/> 이후 아마추어 권투 선수의 타이틀을 획득하였다.
         [[2005년]] [[9월]] 그는 한국권투위원회 테스트를 통과해 프로 [[권투]]선수가 되었음을 밝혔다.<ref>[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509191822441 강의석군 “이번엔 세계챔피언이 꿈”]. 경향신문. 2005-09-19.</ref> 그러나 권투 선수가 될 마음은 없었고, 종교 비판과 시민 사회 운동에 뜻을 두기 시작하였다. 이후 재학 중이던 [[서울대학교]]에서 2008학년도 1학기를 휴학하고 사람 사는 모습을 가까이서 지켜보고 싶다며 [[택시]] 운전기사를 했으며<ref>[http://news.mk.co.kr/outside/view.php?year=2008&no=165631 서울대 휴학 택시모는 강의석씨] {{웨이백|url=http://news.mk.co.kr/outside/view.php?year=2008&no=165631 |date=20131106021948 }}. 매일경제. 2008-03-25.</ref>, 4월말부터는 호스트바에서 일하다가<ref name="chosun_200805">{{웹 인용 | url=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5/04/2008050400148.html |제목=종교자유 외쳤던 '대광고 강의석', "병역 의무 왜곡된 것": 종교자유 선봉에서 택시기사, 그리고 호스트바에서 일하기까지…| 출판사=조선일보}}</ref>, [[영화감독]]이 되겠다고 선언했다.<ref name="kyung">{{웹 인용|url=http://news.khan.co.kr/section/khan_art_view.html?mode=view&artid=200804231429305&code=900315 |제목=“미친듯 헤매도 내 뜻대로 사는 행복을 위해” |저자=김다슬 |웹사이트=경향닷컴 |출판사=경향신문사}}</ref> 그는 또한 권투를 하다 머리를 다쳐 징병검사에서 [[공익근무요원]] 판정처분(신체등위 4급)을 받았다.<ref name="chosun_200805"/>
         위와 같은 행적에 대해 그는 [[경향신문]]에서 운영하는 [[경향iTV]]를 통해 입장을 밝혔다.<ref name="kh">[http://news.khan.co.kr/kh_photo/artist_view.html?artid=200809231424422&secid=86 강의석과 강의석을 비판한 서울대 법대생의 토론회, 경향 iTV, 2008년 9월 17일]{{깨진 링크|url=http://news.khan.co.kr/kh_photo/artist_view.html?artid=200809231424422&secid=86 }}</ref> 권투에 대해서는 고등학생 시절부터 꾸준히 권투를 해온 것이며, 대학생이 되어 갑자기 권투에 입문한 것도 아니고, 병역특례를 받기 위해 시작한 것도 아니라고 밝혔다. 또한 택시기사와 호스트바에 대해서는 순간적인 판단에 의한 젊은 날의 방황이라고 하였다. 군대 신체검사 당시 4급 판정에 관해서는 원래 두개골이 선천적으로 약했는데 권투선수를 하며 처음으로 그 사실을 발견한 것 뿐이라고 답변하였다.
         [[2008년]] [[9월 30일]] 오전 8시부터 그날 저녁까지 그는 [[서울특별시]] [[강남구]] [[테헤란로]] 일대에서 군대 반대 퍼포먼스를 하였다. 테헤란로변 인도에서 상의를 벗고 붉은색 페인트로 온 몸에 칠한 뒤, 다시 노란 [[페인트]]로 자신의 몸 앞에는 직접 ? 군대 꼭 필요하나요? 라는 글과 등에는 지나가는 행인의 도움을 받아 군대를 없애야 합니다 라고 썼다. [[9월 30일]] 아침 출근시간대부터 그는 상체를 붉게 칠한 상태로 상체누드 퍼포먼스를 진행하였다. 그는 하루 종일 강남구 테헤란로 앞에서 침묵 시위를 벌였다.
         [[10월 1일]] [[국군의 날]] 군사 퍼레이드 때 누드 퍼포먼스를 하였다. 그 날 [[서울특별시|서울]] [[강남구]] 테헤란로에서 대대적인 [[건군 60주년]] [[국군의 날]] 시가행진이 펼쳐졌다. 서울대생 강의석은 이때 “전쟁을 반대한다”며 알몸으로 군인들의 행진을 막아섰다.<ref name="hanisii">[http://h21.hani.co.kr/arti/politics/politics_general/28215.html 과거로 행진하는 군인들의 퍼레이드] 한겨레21 2010년 10월호</ref> 퍼레이드 도중 거리에 그는 알몸으로 뛰어들어 “전쟁을 반대한다<ref name="hanisii"/>”고 외친 뒤, 과자로 된 소총으로 전차에 총격을 가하는 퍼포먼스를 진행하였다.<ref name="yangyangs">[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810020130555&code=940202 '신념에 의한 병역거부' 강의석씨 국군의 날 행사장 '알몸시위'], [[경향신문]], 2008년 10월 2일</ref> 이 퍼포먼스로 전차 퍼레이드가 약 30초간 중단되었고, 경찰에 체포되어 음란공연혐의를 적용받았다.<ref name="yangyangs"/> 그는 9월 중순 퍼포먼스를 사전 예고하였으므로 [[대한민국 국방부]] 측에서는 이를 막으려고 하였다. 국군 퍼레이드 전에는 테러를 대비한 사전 수색이 있었지만 그는 근처의 한 가로수 주변의 땅을 파고 참호처럼 만든 뒤 숨어 있었다. 강의석은 퍼레이드 시작시간 10시간 전에는 퍼레이드를 하는 의장대가 지나가는 곳 근처 중앙분리대 관목 사이에 굴을 파놓고 숨어 있다가 퍼레이드가 통과할 때 나체 차림으로, 소총 모양의 빵을 들고 나와서 공중에 쏘는 척 하다가 빵을 먹었다. 기자들이 주목하여 플래시가 터지고, 곧 나타난 [[헌병]]대원들과 경호원들에 의해 끌려져 나갔다.
         [[2011년]] [[9월 14일]] 그는 구치소 내 '수용자들의 처우 개선'을 요구하며 단식 농성을 시작하였다.<ref name="jaedans">[http://news.mtn.co.kr/newscenter/news_viewer.mtn?gidx=2011092010580772079 강의석, 옥중 단식 돌입 ‘수용자 처우 개선요구’]</ref> 경기 의왕 서울구치소에 수감된 강씨는 '종이 재질인 간이책상을 플라스틱이나 나무 소재로 바꿔달라', '현행 격주 토요일만 가능한 운동을 매주 할 수 있게 해달라', '조명을 더 밝게 해달라'등의 수용자 처우 개선을 요구하며 지난 14일부터 일주일째 단식을 이어갔다.<ref name="jaedans"/> 투옥 이후 그는 차가운 감옥과 비위생적인 환경에 대해 꾸준히 문제 제기를 하였다. 비록 범죄를 짓고 감옥에 들어왔지만 인권을 가진 인간임에는 변함없다며 재소자 처우 개선을 요구하였다. 시중에서는 범죄자 주제에 무슨 인권이냐는 비아냥이 쏟아졌지만 그는 범죄자도 한 사람의 인간이라고 받아쳤다. 또, 범죄에 대한 대가는 처벌로서 치루고 있으며, 법적으로 처벌을 받는 중인데 다른 사람들이 왈거왈부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다. 또 형량을 사는 죄인도 한 사람의 인간이라 주장했다.
         9월 14일부터 그의 단식 농성이 계속되자 언론에 보도되었고, 일각에서는 범죄자가 범죄의 대가로 처벌을 받지만 범죄자 역시 인권을 가진 존재라며 동정, 옹호 여론이 나타나가 시작하였다. 이에 [[9월 20일]] [[서울구치소]] 측은 개선방안을 논의하겠다는 입장을 보인 것으로 알려졌다.<ref name="jaedans"/> 20일 언론에서는 강의석의 지인들의 말을 빌려 “강씨가 지난 14일 아침식사부터 끼니를 거르기 시작해 6일째 단식을 이어가고 있다”고 보도했다.<ref name="강의석, 옥중 단식 수감자 처우개선’ 요구">[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14&aid=0002512597 강의석, 옥중 단식 ‘수감자 처우개선’ 요구] 파이낸셜뉴스 2011.09.20</ref> [[9월 20일]] 강의석을 면회한 오창익 [[인권연대]] 사무국장의 말을 인용해 '강의석이 구치소 내 전반적인 수용자 처우 개선을 요구하며 지난 14일부터 7일째 단식을 하고 있다'고 발표했다.<ref name="inkwon">[http://old.dcnews.in/news_list.php?code=ahh&id=630438 '옥중 단식' 강의석, 이번엔 '수용자 처우 개선'…네티즌 '지지 VS 반대' 분분] {{웨이백|url=http://old.dcnews.in/news_list.php?code=ahh&id=630438# |date=20131103021209 }} DC뉴스 2011.09.20</ref> 오 사무국장은 "바깥에 있는 사람들에겐 사소한 문제일지 모르지만 갇혀 있는 이들에겐 절박한 요구일 수 있다"고 전했다.<ref name="inkwon"/> 오창익 [[인권연대]] 사무국장의 면담 이후 인권 단체와 양심적 병역 거부 운동을 추진하는 인권 운동가, 시민단체 회원들의 방문이 계속되었다.
         그는 일부 국가대표 체육 선수들에게 병역 면제의 특혜를 주는 것에 대해 비판하였다. 일반 서민들은 군대에 끌려가지만 그들은 국가대표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면제된다며 이는 또다른 특혜라는 것이다. [[2008년]] [[9월]] 강의석은 ‘대학내일’ 434호 학생논단에서 '태환아, 너도 군대 가'라는 제목의 글에 "메달이 징병면제란 이름으로 선수들의 공적을 위한 하사품이 된다"며 병역특례의 불공정성을 비판했다. 국위 선양을 했다고 병역을 면제 해주는 것은 형평성에 위배된다는 것이다.<ref name="eigaes">[http://enewstoday.co.kr/sub_read.html?section=sc98§ion2=%BF%AC%BF%B9&uid=211772 강의석 "박태환 너도 군대가!"] 이뉴스투데이 2008/09/05</ref>
         그는 감옥 재소자들 역시 하나의 사람이며, 비록 죄인의 신분이기는 하지만 인간답게 형벌을 받을 권리가 있음을 지적했다. 그는 차가운 감옥과 비위생적인 환경에 대해 꾸준히 문제 제기를 하였다. 비록 범죄를 짓고 감옥에 들어왔지만 [[인권]]을 가진 인간임에는 변함없다며 재소자 처우 개선을 요구하였다. [[2011년]] [[9월 14일]] 그는 [[구치소]] 내 '수용자들의 처우 개선'을 요구하며 단식 농성을 시작하였다.<ref name="jaedans"/> [[경기]] [[의왕]] [[서울구치소]] 수감 중 그는 '종이 재질인 간이책상을 [[플라스틱]]이나 나무 소재로 바꿔달라', '현행 격주 [[토요일]]만 가능한 운동을 매주 할 수 있게 해달라', '조명을 더 밝게 해달라'등의 수용자 처우 개선<ref name="jaedans"/> 을 요구하며 단식하였다. [[서울구치소]] 측에서 조치가 없자 그는 일주일간 [[단식]] 농성을 진행하였다.
         [[9월 19일]] 강씨를 면회한 지인에 따르면, 그는 [[9월 14일]]부터 처우를 개선해 달라며 단식하였다. 강씨의 요구사항은 ‘간이책상을 플라스틱 또는 나무재질로 바꿔줄 것’ ‘생활거실 조명을 밝게 해줄 것’ ‘격주 토요일만 가능한 운동을 매주 할 수 있게 변경해줄 것’ 등이었다.<ref name="cuches">[http://news.sportsseoul.com/read/life/971318.htm '입영거부' 강의석, 옥중 단식 1주일째] {{웨이백|url=http://news.sportsseoul.com/read/life/971318.htm# |date=20131103001722 }} 스포츠서울 2011.09.20</ref> 당시 구치소 측은 강씨의 요구를 받아들일 것인지 논의해보겠다는 답변을 지인에게 전한 것으로 알려졌다.<ref name="cuches"/> 그러나 [[서울구치소]] 측에서 조치가 없자 그는 계속 단식을 진행하였다. 당시 강씨를 면회한 [[오창익]] [[인권연대]] 사무처장은 “사소한 문제로 보일지라도 이들에게는 절박할 수 있다”며 “구치소 측에서도 개선방안을 논의해보겠다는 반응을 보였다”고 밝혔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081&aid=0002229120 강의석, 옥중단식 일주일째 “수용자 처우개선 미흡하다”] 서울신문 2011.09.20</ref> [[9월 20일]] 한 매체는 강의석의 지인들의 말을 빌려 “강씨가 지난 14일 아침식사부터 끼니를 거르기 시작해 6일째 단식을 이어가고 있다”고 보도했다.<ref name="강의석, 옥중 단식 수감자 처우개선’ 요구"/> [[9월 21일]] 그의 1차 단식 농성 진행 직후 각 [[교도소]]와 [[경찰서]]의 [[유치장]]의 시설에 대한 점검, 정비 등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 강의석 (영화감독)
         고등학교 재학 중 교내 [[종교의 자유]]와 관련된 시위와 소송에 연관되어 제적당했다. [[2004년]] [[8월 11일]]부터 [[9월 22일]]까지 [[10월 16일]]부터 [[10월 22일]]까지 두 차례에 걸쳐 [[대광고등학교]] 측에 종교의 자유를 요구하는 단식 농성을 벌였다. 그해 [[6월 16일]] 학교 교내 방송으로 종교의 자유를 선언하였다가 퇴학당했으며, 이후 [[국가인권위원회]]에 종교 선택의 자유, 퇴학 무효를 청원하여 이끌어냈다. 이 소송은 결국 [[2010년]] [[대법원]] 최종심에서 승소하였다.
         [[7월]]에 고등학교 복학 이후에도 학교 측의 [[종교 선택의 자유]]를 요구하며 두 차례에 걸쳐 학교측에 [[종교의 자유]]를 요구하는 단식 농성을 벌였다.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을 휴학하며 [[시민 사회 운동]]에 투신하였고 대학은 중퇴하였다. 그밖에 그는 [[대한민국 헌법]]상 병역의 의무를 폭력으로 규정하고 [[평화주의|군대 반대 퍼포먼스]]와 각종 집회 등을 주도하였으며, [[2008년]] [[9월 30일]]에는 [[군대]] 폐지론을 주장하는 무언 [[퍼포먼스]]를, [[10월 1일]]에는 군대의 폭력성을 지적하고자 [[국군의 날]] 기념 행사장에 누드로 [[퍼포먼스]]를 벌이기도 했다. [[서울대학교]] 법과 대학에 진학하였으나 사회 문제에 관심을 두다가 [[2011년]] 미등록제적 형식으로 그만두었다.
         또한 일부 교육단체들 역시 "이대로 보고만 있지는 않겠다"며 반발했다. [[민주노동당 (대한민국)|민주노동당]], [[참교육을 위한 전국학부모회]],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인권운동사랑방 등으로 구성된 '강의석 학생 부당 징계 저지와 학내 종교 자유를 위한 연대회의'는 "학교의 잘못을 학생에게 떠넘기고 있다"며 "학교의 비상식적인 행동을 교정하기 위해 '연대회의' 차원에서 대응하겠다"고 반발하고 있다.<ref name="jeonjeon"/> [[국회]] 교육위원회 [[민주노동당 (대한민국)|민주노동당]] [[최순영]] 의원실 이원영 보좌관은 "지금까지는 강의석 학생의 요청에 따라 적극적인 대응을 안 했던 것이 사실"이라며 "이대로 보고만 있지는 않겠다"고 강력 대응 의지를 밝혔다.<ref name="jeonjeon"/> 이후 강 군은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을 내고, 서울북부지방법원에 퇴학무효 소송을 내는 등 외로운 투쟁을 지속하다 지난 9월1일 법원으로부터 퇴학무효 가처분 결정을 이끌어냈다.<ref name="pito">[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20041018084828&Section= 대광고 강의석군, 학교 '거짓말'에 재차 단식] 프레시안 2004.10.18</ref>
         이후 그는 [[8월 11일]]부터 [[9월 25일]]까지 [[단식]]으로 투쟁했고, 학원은 예배선택권을 보장하기로 했다.<ref name="secure_right">{{웹 인용 |url=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211878 |제목= 강의석군 46일째 단식 풀었다 학내 종교자유, 예배선택권 보장 받아|저자= 김태형, 이계덕 |출판사=오마이뉴스}}</ref>
         그는 학내 예배 선택권을 요구하며 [[2004년]] [[8월 11일]]부터 46일간 단식을 벌였다.<ref name="ildan">[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28&aid=0000083237 강의석군, 1주일 만에 단식 풀어] 한겨레신문 2004.10.22</ref> [[8월 11일]]부터 그는 음식물 일체를 거부하며 물만 마시고 있는 강군은 학생들의 종교 자유가 보장되지 않는 한 단식을 계속하겠다는 완강한 입장을 밝혔다.<ref name="namda">[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207648 "종교의 자유 보장 안되면 단식 계속"] 오마이뉴스 2004.09.02</ref> 그는 [[9월 2일]] [[오마이뉴스]]와의 전화통화에서 "[[종교의 자유]]를 위해 항의한데 대해 학교가 거짓으로 본질을 흐리는데 항의하고, 이 운동에서 나태해지는 것을 막기 위해 단식을 시작했다"며 "학생들의 예배권 선택이 보장하고 대안을 모색하는 자리가 만들어질 때까지는 단식을 풀지 않겠다"고 말했다.<ref name="namda"/>
         [[2004년]] [[9월 1일]] 법원의 ‘퇴학무효 가처분’ 결정으로 학교 복귀와 함께 예배 선택권을 부여받았지만, 그는 ‘전교생의 예배 선택권’을 주장하며 단식을 멈추지 않았다. 인터넷 카페에는 강군을 지지하는 수천명의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누구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학교 종교 자유’를 놓고 100일 넘게 외로운 싸움을 벌이는 강군에게 사회적 이목이 집중되기도 했다.<ref name="dadndaen">[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28&aid=0000079815 ‘학내 종교자유’ 빛을 얻다] 한겨레신문 2004.09.30</ref> 한달 넘게 단식을 하는 자식을 보다 못한 강군의 부모가 응급차를 부르자 입을 떼지도 못할 정도로 쇠잔한 상태에서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가출을 하기도 했다.<ref name="dadndaen"/>
         [[9월 4일]] [[한겨레신문]]과의 인터뷰에서 그는 “지난달 11일부터 물만 마시며 단식하고 있다”며 “2일부터 수업을 듣고 있지만 학생들의 예배 선택권을 보장받을 때까지 단식을 계속할 것”이라고 말했다.<ref name="hanists">[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28&aid=0000076632 ‘종교자유’ 강의석군 24일째 단식중] 한겨레신문 2004.09.04</ref> 그는 또 “2일 종교 자유의 문제에 대한 학교와 학생 간의 대화의 장을 마련해줄 것을 학교에 요구했지만, 아무런 대답도 듣지 못했다”고 덧붙였다.<ref name="hanists"/> 30일 넘게 단식하면서 그는 물과 음료수만을 마시면서 버텼다. 그의 단식은 [[한겨레]], [[경향신문]], [[오마이뉴스]], [[노컷뉴스]], [[프레시안]], [[한국일보]], [[국민일보]]를 비롯한 대형 언론들과 기독교계열 신문에 의해 집중적으로 보도되었다. 그는 [[9월 25일]]에 1차 단식을 풀었다.
         [[9월 22일]] 당시 그는 학교에 등교는 했으나 건강 상태가 악화돼 휠체어에 의지해 있는 상태였다.<ref name="kyokyo"/> [[9월 25일]] 오전 8시경 [[고려대학교]] 안암병원으로 옮겨져 10시부터 응급실에서 링거를 맞고 입원하였다.<ref>[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211878 강의석군 46일째 단식 풀었다:학내 종교자유, 예배선택권 보장 받아] 오마이뉴스 2004.09.24</ref> [[고려대학교]] 안암병원 병실에서도 수능시험 공부를 계속 하던 그는 "머리 맡에 놓인 [[초콜릿]]의 유혹이 강렬하였다"고 회상하기도 했다. [[9월 29일]] 병상에서 밀린 수능시험 공부를 하고 있던 그는 "단식을 푼 지 5일 만에 몸무게를 15㎏ 정도 회복했다"며 "단식기간 중 모두들 잠든 밤에 내 머리맡에 놓인 초콜릿이 가장 큰 유혹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당연한 권리였기에 내 목소리가 반드시 받아들여질 것이라 믿었고, 그 희망으로 지금까지 올 수 있었다"며 "'권리를 일깨워줘 고맙다'는 한 친구의 문자 메시지에 가장 큰 행복을 느꼈다"고 말했다.<ref name="namda"/>
         [[9월 14일]] 단식 농성 34일차 되던 날, 국회에서는 그에 대한 지지 서명운동이 일어났다. 학내 종교자유를 주장하며 3단식을 하고 있는 강의석군 지지 서명운동에 23명의 국회의원들이 동참했다.<ref name="seodong">[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28&aid=0000077946 국회의원 23명 ‘학내 종교자유’ 지지 서명] 한겨레신문 2004년 09월 13일자</ref> 최순영 민주노동당(국회 교육위원회) 의원은 “지난 8월부터 국회의원과 보좌관 등을 상대로 실시한 ‘학내 종교자유 지지 서명’에 국회의원 23명, 보좌관·비서관 111명이 참여했다”고 13일 밝혔다.<ref name="seodong"/> 서명에 참여한 의원은 최순영 단병호 천영세 민주노동당 의원과 이원영 김태년 김성곤 열린우리당 의원, 배일도 고진화 한나라당 의원, 손봉숙 민주당 의원 등이다. 최 의원 쪽은 이들의 서명을 학내 종교자유 운동을 펴고 있는 강군에게 전달했다.<ref name="seodong"/>
         [[9월 11일]] 대광고 일부 교사들은 1명씩 교대로 24시간 동안 릴레이 단식을 벌이며 강 군의 단식 중단을 종용하고 있다. 이들은 자신의 교무실 책상 앞에 '제자를 살립시다'라고 적힌 푯말을 세운 뒤 매일 오전 9시부터 다음날 오전 9시까지 릴레이 단식을 벌였다.<ref name="ritistys">[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40040912200240 "제자를 살리자", 대광고 교사들 릴레이단식] 프레시안 2004.09.13</ref> 교사 릴레이 단식에는 13일까지 12명이 참여하겠다는 의사를 밝힌 상태다. 이밖에 교사들이 자체적으로 벌이고 있는 강 군 단식 중단 촉구 서명운동에는 12일 기준으로 모두 35명의 교사들이 서명을 했으며, 13일부터 [[대광중학교 (서울)|대광중학교]]로도 서명운동을 확대하였다.<ref name="ritistys"/> 그리고 대광고, 대광중의 교사들이 두루 동참하였다. 박상준 대광고 교사는 12일 [[프레시안]]과의 전화통화에서 "강 군은 한 달이 넘도록 단식을 하면서도 정상적으로 등교해 힘겹게 정규수업을 받고 있다"며 "이에 교사된 입장에서 더 이상 제자의 건강이 악화되는 것을 바라보고만 있을 수 없어 이같은 릴레이 단식을 벌이게 됐다"고 설명했다.<ref name="ritistys"/> 교사들의 제자 살리기 단식 농성은 그가 단식을 푸는 [[9월 22일]]까지 계속되었다.
         [[2005년]] [[7월]]부터는 종교 자유 소송과 동시에 체력 트레이닝을 받았다. [[2005년]] [[8월 26일]]~[[8월 28일]]에는 '미션스쿨 종교자유 카페' 회원들과 함께 인터넷 검색 시위를 벌였다.<ref name="gisosp">[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64184.html “종교자유 줘요” 강의석 다시 뛴다] 한겨레신문 2005.09.13</ref> 8월 28일, 한 인터넷 포털사이트의 인기검색 순위에 ‘종교 자유’가 단숨에 2위에 올랐다. 강씨를 비롯한 ‘미션스쿨 종교자유 카페’ 회원들이 한꺼번에 이 포털에 접속해 동시에 ‘종교 자유’를 검색하는 이른바 ‘검색 시위’를 펼쳤기 때문이다.<ref name="gisosp"/> 그해 여름 그는 소송과 종교 자유 시위를 진행하는 동시에 헬스 클럽을 다니며 각종 체력 트레이닝을 받고, [[2005년]] [[9월]]부터는 정식으로 권투 지도를 받고 아마추어 권투선수 자격을 획득했다. [[9월 10일]] 강의석(19·서울대 법학과 1)은 다시 대광고 교복을 다시 꺼내 입었다. 강씨는 인터넷 카페 ‘미션스쿨 종교자유’ 회원 4명과 함께 각자 모교의 교복을 입고 젊은 층에게 인기가 높은 광고노래 ‘우유송’에 가사를 바꿔 “종~교 자유, 주세요!”를 외치며 서울 명동에서 대학로까지 행진했다.<ref name="gisosp"/> [[9월 13일]] 프로복서가 되기 위해 [[한국권투위원회]]의 프로 테스트를 받았다.<ref name="gisosp"/> 이후 아마추어 권투 선수의 타이틀을 획득하였다.
         [[2005년]] [[9월]] 그는 한국권투위원회 테스트를 통과해 프로 [[권투]]선수가 되었음을 밝혔다.<ref>[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509191822441 강의석군 “이번엔 세계챔피언이 꿈”]. 경향신문. 2005-09-19.</ref> 그러나 권투 선수가 될 마음은 없었고, 종교 비판과 시민 사회 운동에 뜻을 두기 시작하였다. 이후 재학 중이던 [[서울대학교]]에서 2008학년도 1학기를 휴학하고 사람 사는 모습을 가까이서 지켜보고 싶다며 [[택시]] 운전기사를 했으며<ref>[http://news.mk.co.kr/outside/view.php?year=2008&no=165631 서울대 휴학 택시모는 강의석씨]{{깨진 링크|url=http://news.mk.co.kr/outside/view.php?year=2008&no=165631 }}. 매일경제. 2008-03-25.</ref>, 4월말부터는 호스트바에서 일하다가<ref name="chosun_200805">{{웹 인용 | url=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5/04/2008050400148.html |제목=종교자유 외쳤던 '대광고 강의석', "병역 의무 왜곡된 것": 종교자유 선봉에서 택시기사, 그리고 호스트바에서 일하기까지…| 출판사=조선일보}}</ref>, [[영화감독]]이 되겠다고 선언했다.<ref name="kyung">{{웹 인용|url=http://news.khan.co.kr/section/khan_art_view.html?mode=view&artid=200804231429305&code=900315 |제목=“미친듯 헤매도 내 뜻대로 사는 행복을 위해” |저자=김다슬 |웹사이트=경향닷컴 |출판사=경향신문사}}</ref> 그는 또한 권투를 하다 머리를 다쳐 징병검사에서 [[공익근무요원]] 판정처분(신체등위 4급)을 받았다.<ref name="chosun_200805"/>
         위와 같은 행적에 대해 그는 [[경향신문]]에서 운영하는 [[경향iTV]]를 통해 입장을 밝혔다.<ref name="kh">[http://news.khan.co.kr/kh_photo/artist_view.html?artid=200809231424422&secid=86 강의석과 강의석을 비판한 서울대 법대생의 토론회, 경향 iTV, 2008년 9월 17일]{{깨진 링크|url=http://news.khan.co.kr/kh_photo/artist_view.html?artid=200809231424422&secid=86 }}</ref> 권투에 대해서는 고등학생 시절부터 꾸준히 권투를 해온 것이며, 대학생이 되어 갑자기 권투에 입문한 것도 아니고, 병역특례를 받기 위해 시작한 것도 아니라고 밝혔다. 또한 택시기사와 호스트바에 대해서는 순간적인 판단에 의한 젊은 날의 방황이라고 하였다. 군대 신체검사 당시 4급 판정에 관해서는 원래 두개골이 선천적으로 약했는데 권투선수를 하며 처음으로 그 사실을 발견한 것 뿐이라고 답변하였다.
         [[2008년]] [[9월 30일]] 오전 8시부터 그날 저녁까지 그는 [[서울특별시]] [[강남구]] [[테헤란로]] 일대에서 군대 반대 퍼포먼스를 하였다. 테헤란로변 인도에서 상의를 벗고 붉은색 페인트로 온 몸에 칠한 뒤, 다시 노란 [[페인트]]로 자신의 몸 앞에는 직접 ? 군대 꼭 필요하나요? 라는 글과 등에는 지나가는 행인의 도움을 받아 군대를 없애야 합니다 라고 썼다. [[9월 30일]] 아침 출근시간대부터 그는 상체를 붉게 칠한 상태로 상체누드 퍼포먼스를 진행하였다. 그는 하루 종일 강남구 테헤란로 앞에서 침묵 시위를 벌였다.
         [[10월 1일]] [[국군의 날]] 군사 퍼레이드 때 누드 퍼포먼스를 하였다. 그 날 [[서울특별시|서울]] [[강남구]] 테헤란로에서 대대적인 [[건군 60주년]] [[국군의 날]] 시가행진이 펼쳐졌다. 서울대생 강의석은 이때 “전쟁을 반대한다”며 알몸으로 군인들의 행진을 막아섰다.<ref name="hanisii">[http://h21.hani.co.kr/arti/politics/politics_general/28215.html 과거로 행진하는 군인들의 퍼레이드] 한겨레21 2010년 10월호</ref> 퍼레이드 도중 거리에 그는 알몸으로 뛰어들어 “전쟁을 반대한다<ref name="hanisii"/>”고 외친 뒤, 과자로 된 소총으로 전차에 총격을 가하는 퍼포먼스를 진행하였다.<ref name="yangyangs">[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810020130555&code=940202 '신념에 의한 병역거부' 강의석씨 국군의 날 행사장 '알몸시위'], [[경향신문]], 2008년 10월 2일</ref> 이 퍼포먼스로 전차 퍼레이드가 약 30초간 중단되었고, 경찰에 체포되어 음란공연혐의를 적용받았다.<ref name="yangyangs"/> 그는 9월 중순 퍼포먼스를 사전 예고하였으므로 [[대한민국 국방부]] 측에서는 이를 막으려고 하였다. 국군 퍼레이드 전에는 테러를 대비한 사전 수색이 있었지만 그는 근처의 한 가로수 주변의 땅을 파고 참호처럼 만든 뒤 숨어 있었다. 강의석은 퍼레이드 시작시간 10시간 전에는 퍼레이드를 하는 의장대가 지나가는 곳 근처 중앙분리대 관목 사이에 굴을 파놓고 숨어 있다가 퍼레이드가 통과할 때 나체 차림으로, 소총 모양의 빵을 들고 나와서 공중에 쏘는 척 하다가 빵을 먹었다. 기자들이 주목하여 플래시가 터지고, 곧 나타난 [[헌병]]대원들과 경호원들에 의해 끌려져 나갔다.
         [[2011년]] [[9월 14일]] 그는 구치소 내 '수용자들의 처우 개선'을 요구하며 단식 농성을 시작하였다.<ref name="jaedans">[http://news.mtn.co.kr/newscenter/news_viewer.mtn?gidx=2011092010580772079 강의석, 옥중 단식 돌입 ‘수용자 처우 개선요구’]</ref> 경기 의왕 서울구치소에 수감된 강씨는 '종이 재질인 간이책상을 플라스틱이나 나무 소재로 바꿔달라', '현행 격주 토요일만 가능한 운동을 매주 할 수 있게 해달라', '조명을 더 밝게 해달라'등의 수용자 처우 개선을 요구하며 지난 14일부터 일주일째 단식을 이어갔다.<ref name="jaedans"/> 투옥 이후 그는 차가운 감옥과 비위생적인 환경에 대해 꾸준히 문제 제기를 하였다. 비록 범죄를 짓고 감옥에 들어왔지만 인권을 가진 인간임에는 변함없다며 재소자 처우 개선을 요구하였다. 시중에서는 범죄자 주제에 무슨 인권이냐는 비아냥이 쏟아졌지만 그는 범죄자도 한 사람의 인간이라고 받아쳤다. 또, 범죄에 대한 대가는 처벌로서 치루고 있으며, 법적으로 처벌을 받는 중인데 다른 사람들이 왈거왈부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다. 또 형량을 사는 죄인도 한 사람의 인간이라 주장했다.
         9월 14일부터 그의 단식 농성이 계속되자 언론에 보도되었고, 일각에서는 범죄자가 범죄의 대가로 처벌을 받지만 범죄자 역시 인권을 가진 존재라며 동정, 옹호 여론이 나타나가 시작하였다. 이에 [[9월 20일]] [[서울구치소]] 측은 개선방안을 논의하겠다는 입장을 보인 것으로 알려졌다.<ref name="jaedans"/> 20일 언론에서는 강의석의 지인들의 말을 빌려 “강씨가 지난 14일 아침식사부터 끼니를 거르기 시작해 6일째 단식을 이어가고 있다”고 보도했다.<ref name="강의석, 옥중 단식 수감자 처우개선’ 요구">[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14&aid=0002512597 강의석, 옥중 단식 ‘수감자 처우개선’ 요구] 파이낸셜뉴스 2011.09.20</ref> [[9월 20일]] 강의석을 면회한 오창익 [[인권연대]] 사무국장의 말을 인용해 '강의석이 구치소 내 전반적인 수용자 처우 개선을 요구하며 지난 14일부터 7일째 단식을 하고 있다'고 발표했다.<ref name="inkwon">[http://old.dcnews.in/news_list.php?code=ahh&id=630438 '옥중 단식' 강의석, 이번엔 '수용자 처우 개선'…네티즌 '지지 VS 반대' 분분] {{웨이백|url=http://old.dcnews.in/news_list.php?code=ahh&id=630438# |date=20131103021209 }} DC뉴스 2011.09.20</ref> 오 사무국장은 "바깥에 있는 사람들에겐 사소한 문제일지 모르지만 갇혀 있는 이들에겐 절박한 요구일 수 있다"고 전했다.<ref name="inkwon"/> 오창익 [[인권연대]] 사무국장의 면담 이후 인권 단체와 양심적 병역 거부 운동을 추진하는 인권 운동가, 시민단체 회원들의 방문이 계속되었다.
         그는 일부 국가대표 체육 선수들에게 병역 면제의 특혜를 주는 것에 대해 비판하였다. 일반 서민들은 군대에 끌려가지만 그들은 국가대표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면제된다며 이는 또다른 특혜라는 것이다. [[2008년]] [[9월]] 강의석은 ‘대학내일’ 434호 학생논단에서 '태환아, 너도 군대 가'라는 제목의 글에 "메달이 징병면제란 이름으로 선수들의 공적을 위한 하사품이 된다"며 병역특례의 불공정성을 비판했다. 국위 선양을 했다고 병역을 면제 해주는 것은 형평성에 위배된다는 것이다.<ref name="eigaes">[http://enewstoday.co.kr/sub_read.html?section=sc98§ion2=%BF%AC%BF%B9&uid=211772 강의석 "박태환 너도 군대가!"] 이뉴스투데이 2008/09/05</ref>
         그는 감옥 재소자들 역시 하나의 사람이며, 비록 죄인의 신분이기는 하지만 인간답게 형벌을 받을 권리가 있음을 지적했다. 그는 차가운 감옥과 비위생적인 환경에 대해 꾸준히 문제 제기를 하였다. 비록 범죄를 짓고 감옥에 들어왔지만 [[인권]]을 가진 인간임에는 변함없다며 재소자 처우 개선을 요구하였다. [[2011년]] [[9월 14일]] 그는 [[구치소]] 내 '수용자들의 처우 개선'을 요구하며 단식 농성을 시작하였다.<ref name="jaedans"/> [[경기]] [[의왕]] [[서울구치소]] 수감 중 그는 '종이 재질인 간이책상을 [[플라스틱]]이나 나무 소재로 바꿔달라', '현행 격주 [[토요일]]만 가능한 운동을 매주 할 수 있게 해달라', '조명을 더 밝게 해달라'등의 수용자 처우 개선<ref name="jaedans"/> 을 요구하며 단식하였다. [[서울구치소]] 측에서 조치가 없자 그는 일주일간 [[단식]] 농성을 진행하였다.
         [[9월 19일]] 강씨를 면회한 지인에 따르면, 그는 [[9월 14일]]부터 처우를 개선해 달라며 단식하였다. 강씨의 요구사항은 ‘간이책상을 플라스틱 또는 나무재질로 바꿔줄 것’ ‘생활거실 조명을 밝게 해줄 것’ ‘격주 토요일만 가능한 운동을 매주 할 수 있게 변경해줄 것’ 등이었다.<ref name="cuches">[http://news.sportsseoul.com/read/life/971318.htm '입영거부' 강의석, 옥중 단식 1주일째] {{웨이백|url=http://news.sportsseoul.com/read/life/971318.htm# |date=20131103001722 }} 스포츠서울 2011.09.20</ref> 당시 구치소 측은 강씨의 요구를 받아들일 것인지 논의해보겠다는 답변을 지인에게 전한 것으로 알려졌다.<ref name="cuches"/> 그러나 [[서울구치소]] 측에서 조치가 없자 그는 계속 단식을 진행하였다. 당시 강씨를 면회한 [[오창익]] [[인권연대]] 사무처장은 “사소한 문제로 보일지라도 이들에게는 절박할 수 있다”며 “구치소 측에서도 개선방안을 논의해보겠다는 반응을 보였다”고 밝혔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081&aid=0002229120 강의석, 옥중단식 일주일째 “수용자 처우개선 미흡하다”] 서울신문 2011.09.20</ref> [[9월 20일]] 한 매체는 강의석의 지인들의 말을 빌려 “강씨가 지난 14일 아침식사부터 끼니를 거르기 시작해 6일째 단식을 이어가고 있다”고 보도했다.<ref name="강의석, 옥중 단식 수감자 처우개선’ 요구"/> [[9월 21일]] 그의 1차 단식 농성 진행 직후 각 [[교도소]]와 [[경찰서]]의 [[유치장]]의 시설에 대한 점검, 정비 등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 고건
         [[1980년]] [[9월]] [[전두환]] 정권이 들어선 후 고건은 교통부 장관과 이듬해 농수산부 장관을 지내고, [[미국]]으로 유학, 1983년 미국 [[하버드대학교]] 객원연구원으로 있다가 이듬해 [[1984년]] 미국 M.I.T. 국제문제연구소 객원교수로 임명되었으나 곧 귀국한다. [[1985년]] [[민주정의당]] 소속 국회의원으로 당선됐으며, 민정당 지방자치제특별위원회 위원장, [[1987년]] [[민주정의당]] 전북도 지부장, 내무부 장관을 지냈다.
         * [[2002년]] [[9월]] [[몽골]]국 북극성훈장
         |임기 = [[1980년]] [[9월 2일]] ~ [[1981년]] [[3월 10일]]
         |임기 = [[1999년]] [[1월 23일]] ~ [[2002년]] [[9월 23일]]
  • 곽상훈 (국회의원)
         [[1923년]] [[도쿄]]로 건너가 [[세이소쿠 영어학교]](正則英語學校)에 입학, 세이소쿠영어학교 재학 중 [[9월 1일]] [[동경 대지진]]을 만났으나 목숨을 건졌다. 그러나 동경 대지진이 조선인들의 음모라는 낭설이 퍼지면서 조선인들은 처형당하거나 구제받지 못했고, 그는 1년만에 자퇴하고 다시 귀국했다. 부산에서 김영주와 헤어진 뒤 다시 안동 오산학교를 찾아가 이사장 유인원(柳寅源)이 그를 받아주어 다시 교사 생활을 하였다.
         [[1928년]] [[만보산사건]]이 터지자 재만동포보호연맹 인천특파원으로 활약했으며, 한 때 언론인으로도 활동하여 [[동아일보]] 인천지국장을 맡기도 했다.<ref name="경인"/> [[1929년]] [[9월 17일]] [[신간회]] [[경기도]] [[수원시|수원]]지부 회원후보로 선출되었다.<ref>조성운 《일제하 수원지역의 민족운동》 (국학자료원, 2006) 161페이지</ref>
         9월에 열릴 민주당 임시전당대회에서 민국당계는 대표에 조병옥, 최고위원에 김도연, 김준연을 선출하려 했고, 비민국당계는 그를 대표로, 장면, 조병옥, 백남훈, 박순천을 최고위원으로 선출하려 하기 위해 치열한 암투를 벌임으로써 중앙당부의 기능이 마비되기도 했다. 그해 9월 28일 열린 전당대회에서 당대표 선출에서 조병옥이 203표, 곽상훈은 92표로 패배를 승복해야 했다. 이후 장면, 박순천, 백남훈과 민주당 최고위원에 선출되었다.<ref name="과81" /><ref>김삼웅, 《해방후 정치사 100장면》 (김삼웅, 가람기획, 1994, 2판) 90쪽. <!--“민주당의 창당 당시의 부서와 책임자는 다음과 같다. … 최고위원─조병옥, 장면, 곽상훈, 백남훈”--></ref>
         [[1958년]] 제4대 국회의원에 당선, 그 해 [[자유당 (대한민국)|자유당]] 정권이 [[국가보안법]] 개정을 통과시키려 하자, 그해 [[11월]] 야당에서 구성한 국가보안법 개정반대투쟁위원회의 지도위원에 조병옥, 장택상과 함께 추천되었다.<ref>한배호 《한국현대정치론》 1 (오름, 2006) 326페이지</ref> 그 뒤 [[민주당 (대한민국, 1955)|민주당]]내에서 조병옥의 인기가 상승하게 됨에 따라 [[1959년]] [[9월 23일]] 민주당 경남도당 개편대회에서 아수라장이 되자, 그는 [[민주당 (1955년)|민주당]] 최고위원직을 사퇴했다.<ref name="과81"/>
         [[7월 29일]] 옹진군 유세때 군용기를 동원하고 전투기의 호위를 받았는데, 이때 [[장면]]이 금천역에서 무허가 강연을 하면서 열차를 지연시켰던 일과 함께 관권선거로 비판을 받기도 했다.<ref>한국역사연구회 4월항쟁연구반 《4.19와 남북관계》 (민연, 2008) 81~82페이지</ref> [[9월]] [[보도연맹원]] 희생자의 유족 송모씨 등이 찾아와 피해사실에 대한 청원서를 제출하자, 그들과 [[장면]] 총리와의 만남을 주선해주기도 했다.<ref>김기진 《끝나지 않은 전쟁 국민보도연맹》 (역사비평사, 2006) 119페이지</ref>
  • 권람
         이어서 [[1455년]] [[7월]] 겸 동지경연사를 겸하고 [[조선 세조|세조]]의 즉위에 세운 공으로 동년 [[9월]] [[좌익공신]](佐翼功臣) 1등관으로 녹훈된 뒤 다시 [[이조]][[참판]]에 임명되었으며 이후 [[예문관]] [[대제학]](藝文館大提學)이 되고, 다시 길창군(吉昌君)에 봉해졌다. 바로 [[조선 세조|세조]]의 즉위를 알리고 책봉 고명을 받기 위한 사신으로 북경에 다녀왔으며, 세조의 책봉 고명을 받아온 공으로 [[원종공신]](原從功臣)에 책록되었다.
         [[1463년]](세조 8년) 초 [[감춘추관사]]를 겸임하여 실록 편찬에 참여하였으며 그해 [[8월]] 병을 핑계로 스스로 체임을 청하여 관직에서 물러났으며, 세조의 특명으로 바로 진봉되어 길창부원군(吉昌府院君)이 되었다. [[1463년]] [[9월]] 《동국통감 (東國通鑑)》 편찬의 편수관이 되어 감수책임을 맡았으나 간행을 보지 못하고 죽었다. 이듬해부터 그는 신병으로 고생하였다.
  • 권영세 (1959년)
         * [[1993년]] [[9월]] ~ [[1994년]] [[8월]] : 법무부 특수법령과 검사
         * [[1994년]] [[9월]] ~ [[1997년]] [[8월]] : 서울지방검찰청 검사
         * [[1997년]] [[9월]] ~ [[1998년]] [[8월]] : 대검찰청 검찰연구관
         * [[1998년]] [[9월]] ~ [[1999년]] [[9월]] : 서울지방검찰청 부부장검사
  • 김 루치아 (곱추)
         |사망일 = [[1839년]] [[9월]]
         |축일 = [[9월 20일]]
         '''김 루치아'''(金路濟亞, [[1769년]] ~ [[1839년]] [[9월]])는 [[조선]]의 [[천주교]] [[박해]]인 [[기해박해]] 때에 [[순교]]한 [[한국 천주교]]의 [[한국의 로마 가톨릭 성인|103위 성인]] 중에 한 사람이다. [[세례명]]은 '''루치아'''(Lucia)이다.
         그 태형이 있은지 약 사흘 후 [[1839년]] 8월 말 경에서 9월 초 쯤에, 김 루치아는 포도청의 여성 감옥에서 몇몇 교우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예수]]와 [[마리아 (예수의 어머니)|마리아]]의 이름을 부르며 숨을 거두었다. 그렇게 그녀가 자신의 신앙을 지키려다 목숨을 잃었을 때의 나이 71세였다.
  • 김대중
         [[전라남도]] [[신안군]] 에서 태어났고, 제6·7·8·13·14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군부 정권의 위협으로 여러 번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김영삼]]과 함께 오랫동안 민주 진영의 지도자로 활동하며 군사 정권에 항거하였다.<ref>「지식충전, 우리 현대사 노트」본문 中 2. 민주주의를 향한 움직임</ref> 김대중은 군부 정권으로부터 [[김대중 납치 사건|납치]]와 가택연금, 투옥 등의 여러 탄압을 받았다. [[1987년]] [[6월 민주 항쟁]] 이후에는 [[통일민주당]]의 상임고문으로 활동하며 [[민주화추진협의회]]를 구성해 이른바 민주 진영을 구축하였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4&oid=001&aid=0002822119 독일 신문 "DJ는 동아시아 민주화 상징"] 연합뉴스 2009년 8월 20일</ref><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4&oid=003&aid=0002824635 "아시아의 넬슨 만델라" 서거-NYT] 뉴시스 2009년 9월 18일</ref><ref>고지희 기자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1&oid=112&aid=0002028923 (DJ서거) 만델라 재단 "'아시아의 만델라' DJ서거에 깊은 애도"] 헤럴드 경제 2009년 8월 18일 작성</ref><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1&aid=0004441657 호주 언론 김대통령 방문 보도] 연합뉴스 1999-09-16</ref> 인권 향상과 남북 관계의 진전에 기여한 공로로 [[2000년]] 임기 중에 한국인 역사상 최초로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였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1&aid=0002823669 김전대통령 빈소 국회 마련..조문객 발길] 연합뉴스 2009.08.20</ref> 2000년 노르웨이 라프토(Rafto) 인권상, 1998년 무궁화 대훈장, 1998년 국제인권연맹 인권상, 1999년 미국 [[필라델피아 자유의 메달]] <ref>https://www.doopedia.co.kr/doopedia/master/master.do?_method=view&MAS_IDX=101013000729557 두산백과</ref>, 북미주 한국인권연합 인권상, 미국 조지 미니(George Meany) 인권상, 브루노 크라이스키(Bruno Kreisky) 인권상을 수상하였다.<ref>http://15cwd.pa.go.kr/korean/president/bio/bio4.php</ref> 연설에 능하였으며,<ref>[http://breaknews.com/sub_read.html?uid=113343 DJ "서생적 문제인식+상인적 현실감각"] 브레이크뉴스 2009.11.01</ref><ref>[http://news.kukinews.com/article/view.asp?page=1&gCode=pol&arcid=0921390861&code=41111111&cp=nv1 그는 타고난 정치인이었다] 국민일보 2009.08.18</ref><ref>[http://www.cbs.co.kr/Nocut/Show.asp?IDX=1236500 수행비서가 4년간 지켜본 DJ…"그는 위대한 지도자"] 노컷뉴스 2009.08.19</ref> [[대한민국 국회|국회]]에서 가장 오래 연설한 기록으로 [[기네스 세계 기록|기네스북]] 증서를 받았다.<ref name="기네스 증서">[http://www.kdjlibrary.org/common/museum/main.html 기네스 증서 1964 - 김대중 도서관 전시물 (민주화를 향한 김대중-야당의 정책이론가로서의 활동)]</ref><ref>이 기록은 2016년 [[테러방지법 반대 필리버스터]] 과정에서 [[김광진 (정치인)|김광진]] 의원에 의해 갱신되었다.</ref> 추운 겨울에도 온갖 풍상(風霜)을 참고 이겨내는 [[인동덩굴|인동초]](忍冬草)로 비유되어 불리기도 하였다.
         한편 김대중의 출생에 대하여 의혹이 제기되는 경우도 있다. 어머니 장노도(張齒島-후에 장수금으로 개명)의 첫 남편인 제갈성조(諸葛成祚)의 형인 제갈성복(諸葛成福)이 친부라는 설,<ref>1990년 9월 29일 전라남도 신안군 하의면장 김광홍 발행 호적초본</ref> 두 번째 남편인 뻐리섬의 윤창언(尹昌彦)이 친부라는 설이 있다. [[1988년]] [[7월 18일]]에 [[하의면]]장인 장명우가 발행한 호적등본에 의하면 김대중은 7살 때 윤창언(尹昌彦)의 서자 윤대만(尹大萬)에서 김운식의 서자 김대중(金大仲)으로 개명 등재되어 있다. 이 때 개명한 김대중의 한자명 金大仲이 오늘날의 金大中으로 개명된 시점은 밝혀진 바가 없다.
         대학 진학을 포기한 김대중은 [[목상고등학교|목포상업학교]](목상고등학교)를 [[1944년]] 봄에 졸업하였다.<ref>[http://news.inews24.com/php/news_view.php?g_serial=436226&g_menu=050220 [김前대통령 서거]민주화의 거목 김대중, 그 파란만장했던 삶] 아이뉴스 2009.08.18</ref> 졸업 후엔 일본의 징집을 피하기 위해 목포상선회사에 경리사원으로 입사하였다.<ref>[http://article.joinsmsn.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3733076&cloc= 가택연금 55회...투옥 6년...망명...사형선고]《중앙일보》</ref>[[1945년]] 해방이 되자 김대중은 종업원 대표로 추대되어 종업원단체가 조직한 회사 경영위원회 위원장에 선출되었다. 정치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이 해 [[여운형]]이 이끄는 건국준비위원회 목포지부에 참여하여 선전부원으로 활동하게 된다. [[건국준비위원회]]의 선전책인 임영춘의 추천으로 건준 목포시 지부에 가입해 선전책에 종사하는 한편 목포청년동맹에 가담하여 활동하였다. 그해 9월 건국준비위원회가 [[조선인민공화국]] 수립으로 발전적 해체라는 이름하에 해체되자 이채현의 추천으로 [[김두봉]]이 [[1946년]] [[2월]]에 [[연안파]] 공산주의자들과 함께 창당한 [[공산주의]] 정당인 [[조선신민당]]에 입당하여 조직부장으로 활동하는 한편, 민주청년동맹 목포시 지부에 가입하여 부위원장으로 활동을 병행하였다.<ref name="안기부 문건">[http://monthly.chosun.com/client/news/viw.asp?nNewsNumb=200210100031&ctcd=&cpage=1 미공개 자료를 中心으로 쓰는 김대중 연구(6) 좌익 행동대원 출신의 대한민국觀] 월간조선 2002년 10월호</ref>
         해방 직후의 김대중은 건준 목포지부에 이어 9월 경에 결성된 목포청년동맹에도 가입했지만 건준에 관련된 일을 주로 했으므로 청년동맹에는 거의 관여하지 않았다. 김대중은 이 해 하반기에 동생 김대의와 건준 명의의 벽보를 붙이다가 미 군정 경찰에 의해 포고령 위반이라는 이유로 체포되어 이틀간 구금되었다 석방된다. 같은 해에 [[차용애]]와 만나 결혼하였다. [[1946년]] 초에는 공산계열 정당인 [[조선신민당]] 목포시지부 조직부장이 되었다. 그러나 소련을 추종하는 세력과 갈등을 빚게 되면서 여름에 탈당하고 말았다.<ref>《경천애인》(김대중 저, 2002년 1월 25일, 맑은물)></ref><ref>[http://blog.ohmynews.com/kimsamwoong/288058 건준ㆍ신민당 참여, 좌익 발호에 발빼]</ref>
         김대중은 이 무렵 회사의 관리문제로 서울에 올라가 군정청 운수부 해사국을 방문하여 회사관리권이 서울 거주 강 모씨에게 넘어간 것을 확인하고, 강씨를 만나 모든 선원을 그대로 고용하겠다는 안을 제시받았다. 회사로 돌아온 김대중은 이 방안을 놓고 사원들과 협의했으나 좌익동맹에 가입한 선원들이 반대하고 자치를 주장하면서 1946년 말 더 이상 회사 경영위원회에 관여하지 않고 회사를 떠난다. [[1946년]] [[9월]] 조선노동조합 전국평의회가 주도하는 전국 총파업이 단행되고, 10월 1일 대구를 중심으로 대규모 시민항쟁이 일어난다. [[10월 31일]]에는 목포에서도 파출소 습격사건이 발생하는데, 김대중은 밀고자에 의해 이 사건의 배후 조종 혐의로 20일간 경찰서에 구속되었으나 당시 한민당 목포시당 부위원장이던 장인의 신원보증으로 '다시는 좌익단체에 관여하지 않겠다.' 는 서약서를 제출 후 훈계 방면되었다.<ref name="안기부 문건"/> 파출소 습격사건이 혐의가 없다는 김대중의 해명과는 달리 [[1980년대]] 무렵 안기부가 작성한 김대중 조사 기록에 의하면 김대중은 민주청년동맹 부위원장의 지위로 배후 조종한 혐의를 받고 10일간 구속되어 조사를 받던 도중 [[한민당]] 목포시당 부위원장이던 장인 차보륜의 신원보증으로 다시는 좌익단체에 관여하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쓰고 훈계 방면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해방 후 좌익에서 전향한 자들이 의무적으로 가입해야 했던 [[보도연맹]]에도 가입하여 운영위원으로 활동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김철]] 등 정치인들과 교류를 맺던 김대중은 [[장택상]] 전 총리와 만나게 되고 그의 참모로 잠깐 활동하는 등 점차 정치계 활동을 늘려나간다. [[1955년]] 소설가 [[박화성]]의 소개로 [[박순천]], [[조재천]] 등과 같은 야당 인사들을 알게 되어 [[민주당 (대한민국, 1955)|민주당]]에 입당하게 된다.<ref name="안기부 문건"/> 이듬해인 [[1956년]] [[9월 28일]], [[민주당 (대한민국, 1955)|민주당]] 전당 대회에서 [[장면]] 저격 사건을 목격하게 된 김대중은 장면과 인연을 맺게 되었고 이듬해인 [[1957년]] 장면을 대부로 [[노기남]](당시 [[천주교 서울대교구|서울대교구]]장) [[대주교]] 집무실에서 [[천주교]] 영세를 받고 '토마스 모어'라는 세례명을 받게된다.<ref name="손세일"/> 같은해 8월엔 민주당 중앙상임위원 및 노농부 차장이 되었다.
         [[1987년]] [[신동아]] 10월호에 김대중 납치 사건의 전말에 대한 [[이후락]] 전 중앙정보부장의 인터뷰 기사가 수록되었다. 이 인터뷰를 통해 이후락은 김대중을 암살하려는 의도는 없었으며 교포사회를 중심으로 해외 망명정부를 세울 것을 우려해 납치를 계획한 것이라고 밝혔다.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는 이 인터뷰 기사가 한일간 외교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는 이유로 1987년 9월 신동아 10월호가 인쇄되던 인쇄소에 안기부 요원을 파견하여 인쇄 작업을 중단시켰다. 이 일로 신동아 기자들은 철야 농성을 벌였고 외신에까지 보도가 되는 등 파문이 확대되자 안기부에선 인쇄 중단 방침을 철회하게 된다.<ref>이후락 증언 김대중납치의 내막 신동아 1987년 10월호</ref><ref>[http://news.donga.com/Series/List_70070000000897/3/70070000000897/20101011/31767098/1 [동아일보를 통해 본 대한민국 근현대사]<14> 1987년 민주화 물꼬 트다] 동아일보 2010.10.11</ref>
         1977년 [[5월 7일]]에는 진주교도소에서 수감 중 접견 제한에 항의하며 단식투쟁을 했으며, 같은해 [[10월 31일]]에 진주교도소 수감중 격려차 찾아온 [[김수환]] 추기경과 면담하였고, 이후 [[12월 22일]]에는 [[서울대학교병원]]으로 이송되어 수감 되었다. [[1978년]] [[9월 6일]] 서울대병원 이송후 교도소 때보다 제한(접견 차단, 창문 봉쇄, 서신제한, 운동금지)이 더욱 심하자 항의 단식하면서 같은해 1978년 [[12월 27일]]에 옥고를 치르면서 2년 9개월만에 형집행정지로 가석방된 후 장기 가택연금을 당했다.
         [[독일 사민당]]의 1980년 9월 17일자 보도자료에 따르면 [[빌리 브란트]] 당시 사민당 총재는 "김대중씨에 대한 사형 선고는 우리 모두에게 큰 도전으로, 큰 충격을 받았다"며 "조국의 사회적 발전과 인권수호를 위해 헌신한 애국자의 노력이 이런 판결로 귀결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없다"라고 밝혔다. 그는 또 "이번 판결이 집행된다면 한국은 국제사회에서 막대한 손상을 입으므로 대통령이 판결이 수정되도록 조치할 것을 긴급히 요청한다"며 "김대중씨 구명에 모든 힘을 발휘해 줄 것을 미국 정부에도 긴급히 요청한다"라고 말했다.<ref>[http://www.segye.com/Articles/News/Politics/Article.asp?aid=20090520004101&subctg1=&subctg2= "브란트 前 獨 총리 DJ 구명운동했다"] 세계일보 2009.05.20</ref> 1984년부터 1994년까지 10년간 독일 대통령을 지낸 [[리하르트 폰 바이츠제커|폰 바이츠제커]]는 1969년 세계교회협의회(WCC) 대표단의 일원으로 서울을 방문해 당시 야당 지도자였던 김대중과 처음 인연을 맺은 후 지난 40년 동안 깊은 우정을 나눴다. 그는 특히 독일 연방하원 부의장으로 있던 1980년 김대중이 신군부로부터 사형선고를 받자 하원에서 '김대중 구명 결의안'이 채택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하는 등 국제적 구명운동에 앞장섰다.<ref name=autogenerated2>[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40090819102859 클린턴, 고르비, 만델라도 "DJ 그리울 것"] 프레시안 2009.08.19</ref>
         [[1987년]] [[9월 9일]], [[전라남도]] [[목포시|목포]]를 방문하였다. 광주-목포 순방이 기대 이상의 열기를 보였다고 판단한 김대중은 [[9월 14일]] 김영삼과 만나 36개 미창당 지구당 결성을 요청한다. 김영삼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총선에서의 조직책 선정이나 다름없는 36개 지구당을 창당하는 것은 적전 분열을 일으킬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경선을 하지 않을 바에는 굳이 잡음의 소지가 있는 36개 지구당 창당은 필요없는 것이다"라고 주장하며 김대중의 주장을 일축한다.<ref name="dd200"/> 계속된 토론에도 김영삼과 의견일치를 보지 못하였다.
         [[9월 29일]]에는 김영삼 총재, 김대중 고문 간 후보단일화 회담을 하였으나 이견차이를 좁히지 못하고 결렬되었다. [[9월 30일]] 김대중은 다시 [[대한민국 제13대 대통령 선거|제13대 대통령 선거]] 후보 출마를 김영삼과 야당 후보단일화 협상을 벌였으나 양자간의 시각차이만 확인하고 결렬되었다.<ref>[http://www.kbs.co.kr/end_program/1tv/sisa/image_story/vod/1365900_12449.html 1986년 1987년]{{깨진 링크|url=http://www.kbs.co.kr/end_program/1tv/sisa/image_story/vod/1365900_12449.html }} KBS 영상실록 2005.10.30</ref> 재야 인사들의 통합 요청에도 불구하고 협상이 결렬되자, 이는 [[군사 정권]] 후계자를 놓고 야당 지도자간 분열했다 하여 적전 분열이라는 비판을 초래하였다. [[10월 10일]], 통일민주당을 장악한 김영삼은 대통령 선거 출마를 발표하고 나서자 당내 경선에서 절대적으로 불리한 위치에 놓여있던 김대중은 [[10월 18일]] 통일민주당을 탈당하였다.<ref>eBOOK우정이 있는 민주공화국 (김성호 지음 | 사군자 | 2007-11-16 ) 97</ref> [[11월 12일]]에는 [[평화민주당]]을 창당해 대표 겸 13대 대통령 후보로 선출된 이후 야당 후보였던 김영삼과 후보 단일화를 이루지 못한 채 [[12월 16일]]에 제13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지만, [[노태우]]와 [[김영삼]]에게 밀려 611만 표를 얻고 낙선했다.
         당시 야당의 끊임없는 [[이회창]] 아들 병역 기피 의혹 제기로 인해<ref>[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7/1985167_6187.html 이회창 대표 아들의 병적기록표 오늘 공개] 1997.7.30 mbc뉴스데스크</ref> 이회창 후보의 지지율이 크게 추락한 데 이어, 이인제가 경선불복과 함께 독자출마를 강행(물론 훗날 사과했다)하면서 여권은 분열을 맞게 된다. 반면 김대중 후보의 지지율은 꾸준히 올라 9월엔 30%에 안착하며 지지율 1위에 올랐다.<ref>[http://dna.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7092000329101001&editNo=45&printCount=1&publishDate=1997-09-20&officeId=00032&pageNo=1&printNo=16220&publishType=00010 김대중 30.5%—이인제 24.5%—이회창 22.9%] 경향신문 1997.09.20</ref>
         [[2009년]] [[9월 23일]], 미국의 시사주간지 [[뉴스위크]]에서 조국의 정치, 경제, 사회적 변혁을 이끈 11인 지도자 ‘트랜스포머’로 김대중을 선정했다.
         [[2009년]] [[9월 23일]] 미국 시사주간지인 [[뉴스위크]]에서 조국의 정치, 경제, 사회적 변혁을 이끈 11인 지도자 '트랜스포머'로 김대중을 선정했다. 그는 계속된 암살 위협에도 불구, 평생 민주화에 헌신한 인물로 소개됐다. '[[1997년]] 대통령에 당선돼 한국 정치사상 처음으로 여야간 평화적 정권 교체를 이뤄냈으며, 재임 때 아시아 금융위기의 나락에서 한국을 구출했다'고 덧붙였다. '햇볕정책'으로 남북관계 개선에 기여해 2000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업적도 높이 평가했다.<ref>[http://news.hankooki.com/lpage/world/200909/h2009092321393322450.htm 김대중 前대통령 '트랜스포머' 11인에 꼽혀] {{웨이백|url=http://news.hankooki.com/lpage/world/200909/h2009092321393322450.htm |date=20090926080634 }} 한국일보 2009.09.23</ref>
         1998년 1월, 김대중이 대통령에 당선된 직후 일본은 기존의 [[한일어업협정]]을 일방적으로 파기하여 김대중 정부의 입장을 어렵게 만들었고, 결국 김대중 정부는 일본의 입장을 수용한 신 한일어업협정을 1998년 9월 25일 타결짓게 된다. 그러나 이 협정은 지금까지 수많은 논란과 비판을 낳고 있다.<ref>[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8/1981549_6202.html 일본,한일 어업협정 일방 파기 선언-정부 강력 대응] MBC 1998.01.23</ref><ref>[http://dna.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8092500209101001&editNo=45&printCount=1&publishDate=1998-09-25&officeId=00020&pageNo=1&printNo=23996&publishType=00010 韓-日 새 어업협정 타결]</ref> 대표적으로 [[한일어업협정|신한일어업협정]]으로 인해 발생된 한일간의 [[독도]] 영유권 문제를 꼽을 수 있다. 1999년 양국간 신한일어업협정을 체결할 때 자원의 공동관리가 이루어지는 중간수역내에 독도가 포함되었고, 이 협정은 일본의 독도 영유권 논리에 법적인 근거를 부여하여 일본측 주장을 획기적으로 강화시켰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ref>[http://h21.hani.co.kr/section-021106000/2006/05/021106000200605030608009.html 한일 어업협정, 그 치명적인 실수] 《한겨레21》제608호</ref> 독도를 대한민국의 영토인데도 이를 중간수역으로 설정하면서 일본의 독도강탈 시도를 그대로 받아 들였다는 주장이다. [[뉴라이트]] 계열 인사인 제성호 교수는 "현재 한일어업협정은 영토 훼손의 우려가 포함돼 있고 특히 일본학자들에 독도가 다케시마라는 빌미를 제공하고 있다"며 이런 중간수역은 일종의 '분쟁수역'이라고 평했다.<ref>[http://dokdocenter.org/dokdo_news/index.cgi?action=detail&number=7128&thread=19r02 제성호 중앙大교수, 중간수역제도 폐기해야] 경북매일 2007.07.31</ref>
         당시 사고가 났던 트럭은 범한화물 소속으로, 범한화물은 당시 공화당 전국구의원 후보였던 [[홍승만]]의 아들 [[홍국태]]의 소유였다. 사고를 냈던 트럭 운전사 권모씨는 1985년, 1998년의 취재기사를 통해 생존하여 부산에서 버스 운전사로 일하다 재혼하여 야간 경비직에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고 그는 당시 교통사고는 김대중이 타고 있던 차량이 교통법규를 어겨 발생한 사고라고 증언했다. 마지막으로 사건의 담당검사인 [[허경만]]은 중간에 교체되는 일 없이 당시의 사고 수사를 종결될 때까지 담당했으며 본인도 당시 수사에 어떠한 외압도 없었다고 증언했다. 허경만은 1980년에 김대중 변호인단에 합류, 야당 국회의원을 역임하다 1999년엔 [[전남도지사]]에 취임하였다.<ref>김대중 대통령의 승용차와 충돌한 트럭 운전기사 권중억씨의 27년간 숨어지내는 인생 "대통령님, 오해를 푸십시오" 월간조선 1998년 9월호</ref><ref>1盧3金의 약점 월간조선 1985년 11월호</ref>
         ** 배우자 : [[이희호]] (李姬鎬, [[1922년]] [[9월 21일]] ~ [[2019년]] [[6월 10일]])
         |임기 = 1991년 4월 15일 - 1991년 9월 14일
         |임기 = 1991년 9월 16일 - 1992년 12월 18일
         |임기 = 1995년 9월 5일 - 2000년 1월 20일
  • 김동근 (1990년)
         성재기 사후 장례식 수습에 참여하였으며 [[7월 29일]]부터 남성연대 비상대책위원의 한 사람이었다. 이후 비대위에서 한승오, 이지훈 등이 제명되면서 김인석 등과 함께 성재기 사고사 이후 혼란을 수습하였다. 그해 9월 초, [[김인석 (1983년)|김인석]]과 함께 [[남성연대]]의 사무국 직원이 되었다.<ref>[http://view.asiae.co.kr/news/view.htm?idxno=2013091708425273184 성재기 투신 후 남성연대는 지금?] 아시아투데이 2013.09.16</ref> [[9월 16일]] 남성연대 비대위가 해산되면서 남성연대 대변인을 맡다가 [[11월 12일]] [[김인석 (1983년)|김인석]]과 공동대표로 선출되었다. 이후 싱글대디 김장김치를 마련하여 전달하였고, [[12월 24일]]에는 [[서울특별시]] 신촌 시내 신촌 현대백화점 (유플렉스 앞)에서 더치페이, 성격차지수 111위 발표자료를 주제로 김인석과 함께 1인 시위를 하였다.
         성재기 대표의 한강투신으로 남성연대는 해체 위기에 직면했었다.<ref name="simgg">[http://snsreporter.co.kr/sub_read.html?uid=4948& 2014년은 남성연대가 뛴다. 새 심장 김동근 대표 "큰절로 새해인사"] {{웨이백|url=http://snsreporter.co.kr/sub_read.html?uid=4948& |date=20160304140624 }} 국민기자단 2014.01.03</ref> 당시 "김동근, 김인석 대표가 꿋꿋이 어려움을 버티고 남성연대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데 큰 공헌을 한 바 있다.<ref name="simgg"/>"는 평이 있다. 2대 대표로 선임되었던 [[한승오 (1978년)|한승오]]가 사건 이후 높아진 세간의 관심에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않으면서 이런 저런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이에 그는 "성 대표가 남성연대의 뜻을 알리려고 그런 퍼포먼스를 벌였는데, 기자가 와도 사무실 문을 꽁꽁 걸어 잠근 채 피하기만 했다"며 "남성연대가 가장 주목받았을 텐데 너무 소극적으로 대응한 건 아쉬운 일"이라고 비판했다. [[2013년]] [[7월 30일]]부터 [[9월 16일]]까지 남성연대 직원과 자원봉사자들이 떠나자, 9월 16일부터는 [[김인석 (1983년)|김인석]]과 함께 두 명이서 남성연대를 유지하였다. [[8월 26일]] [[한승오 (1978년)|한승오]]가 혼란을 수습하지 못한 책임을 지고 탈퇴하자, [[9월 14일]]부터는 다시 [[남성연대]] 기획팀장이 되어 사태 수습 및 남성연대 홈페이지 운영관리와 페이스북 등의 관리를 맡아보았다.
         * [[2013년]] [[8월]] ~ [[2013년]] [[9월 14일]] [[양성평등연대]](구 남성연대) 비상대책위원
         * [[2013년]] [[9월]] [[양성평등연대]](구 남성연대) 기획팀장
         * [[2013년]] [[9월 16일]] ~ [[2013년]] [[11월 12일]] [[양성평등연대]](구 남성연대) 대변인
         * [[2014년]] [[9월]] [[대한민국청년대학생연합]] 대표
  • 김동선 (승마 선수)
         [[2017년]] [[9월]] 김동선은 서울의 한 술집에서 대형 로펌 신입 변호사들과의 친목 모임에 참석해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변호사들에게 "너희 아버지 뭐 하시냐", "지금부터 허리 똑바로 펴고 앉아라", "나를 주주님이라고 불러라" 등의 막말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또 만취한 자신을 부축하는 남자 변호사의 뺨을 때리고 한 여성 변호사의 머리채를 쥐고 흔드는 등의 폭행도 했다. 하지만 김앤장 로펌 측은 대형 고객인 한화그룹의 보복이 두려워 신고조차 하지 못했다.<ref>{{뉴스 인용|제목=한화 김동선 또 폭행, 청담동 주점 난동 땐…폭행 장면 영상 공개되기도|url=http://mbn.mk.co.kr/pages/news/newsView.php?category=mbn00009&news_seq_no=3392613|날짜=2017-11-21|뉴스=MBN}}</ref>
         * 2014년 9월 인천 아시안 게임 마장마술 단체전 금메달, 개인전 은메달
  • 김동선 (승마선수)
         [[2017년]] [[9월]] 김동선은 서울 종로구의 한 술집에서 대형 로펌 신입 변호사들과의 친목 모임에 참석해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변호사들에게 "너희 아버지 뭐 하시냐", "지금부터 허리 똑바로 펴고 앉아라", "나를 주주님이라고 불러라" 등의 막말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또 만취한 자신을 부축하는 남자 변호사의 뺨을 때리고 한 여성 변호사의 머리채를 쥐고 흔드는 등의 폭행도 했다. 하지만 김앤장 로펌 측은 대형 고객인 한화그룹의 보복이 두려워 신고조차 하지 못했다.<ref>{{뉴스 인용|제목=한화 김동선 또 폭행, 청담동 주점 난동 땐…폭행 장면 영상 공개되기도|url=http://mbn.mk.co.kr/pages/news/newsView.php?category=mbn00009&news_seq_no=3392613|날짜=2017-11-21|뉴스=MBN}}</ref>
         * 2014년 9월 인천 아시안 게임 마장마술 단체전 금메달, 개인전 은메달
  • 김미경(강사)
         유튜버로도 활동하고 있으며 [[2018년]] [[9월]] 기준 구독자수 33만명 이상을 달성할 정도로 흥했다.
  • 김민기(가수)
         '''[[2018년]] [[9월]]부터 [[지하철 1호선]]의 재공연을 시작한다고 한다.''' 워낙에 인기가 많던 뮤지컬이다보니 재공연 결정이 뜨자마자 관련 기사가 올라오는가하면, 배우의 면접을 위해 서류 심사를 시작한지 2주만에 1000명 가까이 되는 사람들이 지원하기도 했다. 자세한 사정은 [[지하철 1호선]] 문서의 재공연 문단을 참조하자.
         2018년 9월 13일자 JTBC 뉴스룸에 출연했다. 지하철 1호선과 김민기 자신의 근황, 아침 이슬의 탄생 비화와 세월호 참사 때의 비화를 짤막하게 전해주고 갔다. 그가 TV 방송 인터뷰를 승낙하여 출연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 김상로
         [[1759년]] [[5월]] [[영의정]]에 올랐으나 사퇴, 그러나 [[8월]]에 다시 영의정에 올랐으나 1개월만인 [[9월]] 사도세자의 장인 홍봉한(洪鳳漢)에게 자리를 물려주었다. 그러나 뒤에 다시 영의정이 되어 영조의 사도세자 처벌 논의에 가담했다. 이후 [[1762년]] [[홍계희]], [[홍인한]] 등과 함께 [[사도세자]]의 처벌에 적극 참여하여 영조의 동조를 얻었으나, 후에 왕이 이를 후회하자 세자를 보도하는 사부이자 정승으로서 역할을 게을리했다는 탄핵을 받고 [[청주시|청주]]에 부처되었다가 곧 특명으로 풀려났다. 이후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다. 시호는 익헌(翼獻)이다.
  • 김상로 (1702년)
         [[1759년]] [[5월]] 영의정에 올랐으나 사퇴, 그러나 [[8월]]에 다시 영의정에 올랐으나 1개월만인 [[9월]] 사도세자의 장인 홍봉한(洪鳳漢)에게 자리를 물려주었다. 그러나 뒤에 다시 영의정이 되어 영조의 사도세자 처벌 논의에 가담했다. 이후 [[1762년]] 홍계희, 홍인한 등과 함께 [[사도세자]]의 처벌에 적극 참여하여 영조의 동조를 얻었으나, 후에 왕이 이를 후회하자 세자를 보도하는 사부이자 정승으로서 역할을 게을리했다는 탄핵을 받고 [[청주시|청주]]에 부처되었다가 곧 특명으로 풀려났다. 이후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다. 시호는 익헌(翼獻)이다.
  • 김성수 (1891년)
         [[중앙학교]]의 인수와 동시에 자신도 [[중앙고등보통학교]]의 [[경제학]] 교수가 되었다.<ref name="ill72">일석 이희승 전집 7(서울대학교출판부 | 2007) 322</ref> 경제학 원론 교과목을 가르치면서 교재가 없었던 터라, 김성수는 학생들에게 일일이 필기를 시키고<ref name="ill72"/> 이를 꼼꼼히 지도하였다. 어려운 고학생들의 장학사업도 지원하였다. [[1915년]] 9월에는 부모를 여의고 학비곤란으로 귀국한 [[이광수 (1892년)|이광수]]를 후원하여 [[일본]]으로 유학시켜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고등예과에 편입시키기도 했다.<ref>[http://koreandb.nate.com/history/people/detail?sn=337 네이트 한국학<!-- 봇이 따온 제목 -->]{{깨진 링크|url=http://koreandb.nate.com/history/people/detail?sn=337 }}</ref> [[이광수 (1892년)|이광수]]는 당시 형편상 [[오산학교]]에서 [[교육자|교편]]을 잡고 있었다.<ref>[[이광수 (1892년)|이광수]](문학의 이해와감상31)(한승옥, 건국대학교출판부, 2008) 29</ref>
         [[1930년]]대 후반 [[이승만]]이 영향을 발휘하던 [[독립운동]]단체 [[흥업구락부]]에서도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그러나 [[조선총독부]] [[서대문경찰서]]에 감금된 [[윤치영]]의 진술로 [[1938년]] [[5월 18일]]자 [[서대문경찰서]]장의 보고에 의하면 그는 [[흥업구락부]]의 동지회원의 한사람으로 보고되었다.<ref name="dddd1">우남 이승만 연구 (정병준, 역사비평사, 2005) 365페이지</ref> 그러나 그는 [[흥업구락부]]와 관련되어 조사받거나 처벌받지는 않았다.<ref name="dddd1"/> [[1939년]] 9월 경성방직주식회사 고문직을 사퇴하였다.
         [[1944년]] 4월 [[조선총독부]]의 지시로 '경성척식경제전문학교'로 강제로 격하당하였으나<ref>{{웹 인용|제목=고려대학교 약사|url=http://www.korea.ac.kr/content/K/K2_1_2_01.jsp|웹사이트=고려대학교|확인날짜=2011-06-04}}</ref><ref name="ku1962">{{뉴스 인용|제목=캠퍼스의 봄 (2) 고려대학편(高麗大學篇)|url=http://dna.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62031400329204007&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62-03-14&officeId=00032&pageNo=4&printNo=5013&publishType=00020&doNotReadAnyMore=notClose|출판사=경향신문|날짜=1962-03-14|확인날짜=2011-07-01}}</ref>, [[1945년]] 9월 광복을 맞아 [[보성전문학교]]로 교명을 환원하였다.<ref>{{웹 인용|제목=연표|url=http://www.korea.ac.kr/content/K/K2_1_3_03.jsp|웹사이트=고려대학교|확인날짜=2011-06-06}}</ref>
         1937년부터 1945년까지 [[실력양성운동]]을 비롯한 [[민족운동]]은 총독부의 가혹한 [[민족말살정책]]으로 탄압을받아 '합법적 공간'에서의 활동이 어려워지자 1942년 전후로는 김성수는 완전히 친일파로 변절했다.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폐간되었다가 [[1937년]] 6월 복간된 동아일보에는 일본의 침략전쟁을 위한 지원병을 적극 권장하거나 미화하는 기사글이 여러 번 올라왔다.<ref>http://dna.naver.com/search/searchByKeyword.nhn#%7B%22mode%22%3A1%2C%22sort%22%3A0%2C%22trans%22%3A%221%22%2C%22pageSize%22%3A10%2C%22keyword%22%3A%22%EC%A7%80%EC%9B%90%EB%B3%91%22%2C%22startIndex%22%3A0%2C%22page%22%3A1%2C%22status%22%3A%22success%22%2C%22startDate%22%3A%221938-01-01%22%2C%22endDate%22%3A%221938-12-31%22%7D</ref> 5월부터 보성전문학교 교장으로 다시 취임해 있었던 김성수는 [[7월 7일]]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김성수는 전쟁의 의미를 선전하기 위해 마련된 [[경성방송국]]의 라디오 시국강좌 담당 및 연설을 하였고(7월 30일과 8월 2일 이틀 동안), 8월 경성군사후원연맹에 국방헌금 1000원을 헌납했다.<ref>[http://www.sisainlive.com/news/articleView.html?idxno=8097# ‘고려대학’은 2010년판 신명심보감? ]</ref> 9월에는 총독부 학무국이 주최한 '시국강연대'의 일원으로 춘천, 철원 등 강원도 일대에서 연사로서 시국강연에 나섰다.<ref name="malsso1"/>, [[1938년]] 6월에는 친일단체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발기인·이사 및 산하의 비상시생활개선위원회 위원 등을 지냈다. 이밖에 국민총력조선연맹 발기인 및 이사(1940)·국민총력조선연맹 총무위원(1943), 흥아보국단(興亞報國團) 결성 준비위원(1941), 조선임전보국단 감사(1941) 등으로 활동하면서 [[1943년]]~[[1945년]] 기간 동안 [[매일신보]]와 [[경성일보]], 잡지 《춘추》등에 학병제·징병제를 찬양하는 내용의 총 25편의 논설 글 및 사설을 기고했다.<ref>《대한민국 친일진상규명위원회 보고서》, 4-3권. p43~p97</ref>
         [[1945년]] [[9월 8일]] [[조선인민공화국]] (인공)의 내각이 발표되었는데, [[박헌영]] 진영의 추천으로 김성수는 [[조선인민공화국|인공 내각]]의 인민위원<ref name="해공주1"/> 겸 [[문교부|문교부장]]으로 선임되었다.<ref name=autogenerated1 /><ref>[[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 〈1940년대편 1권〉(인물과사상사, 2004년) 60쪽.</ref> 그러나, 김성수는 [[송진우 (정치인)|송진우]]와 함께 [[충칭]] [[대한민국 임시정부|임시정부]]가 정통성이라는 '임정봉대론'을 주장하며 [[건준]]과 [[조선인민공화국]] 내각을 모두 부정하였다.<ref name="동아일보"/> 김성수는 [[송진우 (정치인)|송진우]], [[백관수]], [[장덕수]], [[윤보선]] 등과 창당을 준비하였고, [[8월 16일]] 창당된 [[원세훈 (1887년)|원세훈]], [[김약수]]의 [[고려민주당]]을 통합하여 [[한국민주당]]을 창당, 조직하였다. 10월 [[이승만]]이 귀국하여 [[독립촉성중앙회]]를 세우자, [[송진우 (정치인)|송진우]] 등과 함께 가입하였다.
         1947년 [[9월 5일]] [[이승만]]을 [[대한민국 임시정부|임시정부]] [[주석]], [[김구]]를 부주석으로 추대하고 [[임시정부]] 국무위원을 새로 보선할 때 [[김승학]]과 함께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에 추가 보선되었다.<ref>이승만의 정치 이데올로기(서중석, 역사비평사, 2006) 360~361페이지</ref>
         [[1948년]] [[8월 15일]] 정부 수립 시, 김성수는 [[이승만]]으로부터 [[재무부|재무장관]] 제의를 받았으나 모욕적이라고 생각한 인촌은 거절하였다.[[1948년]] 9월 출국하는 [[서재필]]을 면담하고 선물을 전달하였다.<ref>《송건호 전집 13 서재필과 이승만》(송건호, 한길사, 2006) 302</ref> 뒤에 [[장택상]]이 거듭 찾아와 재무장관에 취임해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김성수는 거절하였다. 그 뒤 김성수는 농지개혁법 시행법령 제정을 마냥 지연시켜<ref name="dd430">한중일 국가기원과 그 역사 (김성호 지음 | 맑은소리 | 2009)</ref> 당시 [[농림부|농림부 장관]]이던 [[윤영선 (1896년)|윤영선]](尹永善)에게 [[이승만]]은 "춘경기가 촉박했음으로 추진상 적지않은 곤란이 유할 것이나 만난을 배제하고... (농지개혁법)을 단행하라"는 특별 유시를 하게 된다.<ref name="dd430"/>
         * [[1930년]] 4월 [[동아일보]] 창간 10주년 기념호에, 네숀의 주필이 보내온 축사를 게재하였다가 [[조선총독부|총독부]]에서 이것을 트집잡아 5월부터 9월까지 [[동아일보]]를 정간시켰다.
         * [[1931년]] [[9월 1일]] [[중앙고등보통학교]]장( ~ 1932년 5월 9일)
         * [[1939년]] 9월 [[경방|경성방직주식회사 고문]]직 사퇴
         *** 처: [[이아주]](李娥珠, [[1899년]] [[음력]] [[7월 19일]] ~ [[1968년]] [[9월 11일]])
         **** 딸 : 김상현(金相玹, [[1926년]] [[9월]] ~ )
  • 김숙자 (1389년)
         [[1435년]](세종 17) [[9월]]에 한성으로 돌아가 그해 [[10월]] 성균관학록에 복직했으며<ref name="ginyon"/>, [[12월]]에 학정(學正)으로 승진하고, 또 통사랑(通仕郞)으로 다시 승진,[[성균관]]진덕박사 겸 [[양현고]]녹사(成均館進德博士兼養賢庫錄事)에 임명되었다. [[1436년]]에 경명행수(經明行修)의 선비 추천에서 첫 번째로 꼽혀 세자우정자(世子右正字)가 되었다. 그러나 얼마 후 선산의 교수관으로 나갔다가 개령현감이 되었다. [[9월]] [[무공랑]] [[성균관]]박사겸 [[양현고]]승이 되었다. [[1437년]] [[12월]] [[선무랑]]에 배사하고 [[선공감]]주부에 임명되었으며, 이듬해 [[2월]] [[예빈시]]주부, [[6월]] [[내자시]]주부 등을 역임했다.
  • 김영희 (1960년)
         [[1960년]] [[부산광역시|부산]]에서 태어났으며 [[환일고등학교]]와 [[서울대학교]] 국어교육과를 졸업하였다. [[1986년]] [[문화방송]]에 입사해, 1992년 [[신 웃으면 복이와요]]를 연출 할 당시 [[이경실]]이 진행하는 [[도루묵여사]]에서 담당 PD인 김영희 PD가 옆집의 '''쌀집 아저씨''' 같이 생겼다고 [[이경실]]이 김영희 PD를 부르는 쌀집 아저씨에서 '''쌀집 아저씨'''라는 별명으로 국민적 인기를 누렀다. [[2007년]] [[9월]] [[MBC]] PD협회 회장에 이어, [[2008년]] [[9월]]부터 [[2009년]] [[11월]]까지 제22대 한국방송프로듀서연합회 회장을 맡고 있었다. [[2009년]] [[12월 6일]]부터 새롭게 바뀐 [[일요일 일요일 밤에]]를 기획, 제작했다. 2015년 MBC를떠난이후 중국으로 갔다.
  • 김온순 (1812년)
         [[1860년]] [[3월]] 다시 [[장원서]][[별제]]가 되었다가 [[5월]] [[한성부]][[주부]], [[9월]] [[사직서|사직서령]], [[10월]] [[돈녕부]][[판관]]을 지냈다.
         [[1872년]] [[7월 16일]] 해주판관(海州判官)이 되었다가 다시 [[해주]][[군수]]가 되었다. [[1874년]] [[7월 12일]] [[밀양]][[부사]](密陽府使)를 거쳐 [[11월]] [[수운]][[판관]]으로 내직으로 돌아왔다. [[11월 13일]]에는 황해도 암행어사(黃海道暗行御史) 조병필(趙秉弼)이 그가 해주판관으로 있을 때 군호(軍戶)가 고르게 보급되었다고 치적을 보고하여 특별히 [[통훈대부]]로 승진하였다. [[11월 27일]] [[수원부]] [[판관]]으로 부임하였다. 이후 [[1875년]] [[9월]] 부모의 병으로 사직을 청하는 임실 현감(任實縣監) 민두호(閔斗鎬)를 배려하여 [[대한제국 고종|고종]]은 특별히 임실현감 민두호를 수원부판관으로 임명하고 김온순을 [[임실]][[군수]]로 임명해 내려보냈다. [[1876년]] [[12월]] [[진주]][[목사]]로 부임하였다.
         [[1881년]] 7월 29일 다시 안주목사가 되었다가 [[1882년]] [[9월]] [[공조]][[참판]]으로 발탁되었고, [[9월 14일]] [[오위도총부]] [[부총관]]이 되었다. [[1882년]] [[8월 1일]] [[한성부 판윤]]이 되었다가 다시 [[8월 27일]] [[공조]][[판서]]가 되었다. [[11월 20일]] 동지의금부사가 되고 [[11월 21일]] 겸 [[경연]][[특진관]]이 되었다.
         [[1883년]] 행[[호군]]으로 전임되었다가 [[8월 1일]] [[자헌대부]] [[한성부 판윤]]으로 발탁되었다가 [[8월 20일]] [[대호군]]으로 전임되었다. 상소를 올려 사직하려 하였으나 [[조선 고종|고종]]이 만류하였다. [[8월 27일]] [[공조판서]]를 천거할 때 [[조선 고종|고종]]이 특별히 3망까지 받았는데도 김온순의 이름을 더 넣어서 결국 그로 낙점하여 임명했다. [[9월 19일]] [[대호군]]으로 다시 전임되었다.
  • 김완섭
         [[2001년]] ‘일본을 존경하는 마음’이라는 이름의 인터넷 카페를 개설해 일본의 식민통치를 정당화하는 칼럼을 기고했으나<ref name="dach1">[http://news.chosun.com/svc/content_view/content_view.html?contid=2005090270051 '일제 미화'작가 김완섭씨, 고종황제 손자 등에 배상 판결] 조선일보 2005년 9월 2일자</ref>, 곧 폐쇄되었다.
         이후 사건은 확대되어 그가 2002년에 펴낸 책 ‘친일파를 위한 변명’과 인터넷 컬럼 등에서 일본의 식민통치를 왜곡 저술해 명예를 훼손당했다”며 [[대한제국 고종|고종황제]]의 손자 [[이석 (가수)|이석]], [[일본군]] 종군위안부 박두리(82)외 6명, 징용자 유족 5명, 의병대장 민종식의 손자, [[명성황후]]의 종증손뻘 되는 민병호, 충정공 [[민영환]]의 손자 민병덕 등에게 피소되었다.<ref name="ch22">[http://news.chosun.com/svc/content_view/content_view.html?contid=2005090270051 ‘일제 미화‘작가 김완섭씨, 고종황제 손자 등에 배상 판결] 조선일보 2005년 9월 2일</ref><ref name="han22">[http://news.hankooki.com/lpage/society/200509/h2005090206021522000.htm 일제 식민통치 미화 親日작가 김완섭씨 고종황제 손자 등에 배상 판결] {{웨이백|url=http://news.hankooki.com/lpage/society/200509/h2005090206021522000.htm# |date=20111123165806 }} 한국일보 2005년 9월 2일</ref> 그러나 저서 《친일파를 위한 변명》과 관련된 소송에는 피소 후, 한번도 법정에 출석하지 않았다.
         [[2005년]] [[9월]] 서울중앙지법 민사81단독 김창보 판사는 1일 “책 ‘친일파를 위한 변명’과 인터넷 컬럼 등에서 일본의 식민통치를 왜곡 저술해 명예를 훼손당했다”며 이석 등이 그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원고승소 판결했다.<ref name="ch22"/><ref name="han22"/> 김 판사는 “2003년 소송이 제기된 후 피고는 재판에 한 번도 나오지 않았다”며 “당사자가 변론기일에 출석하지 않을 때 상대방이 주장하는 사실을 자백한 것으로 본다는 민사소송법에 따라 원고 승소 판결했다”고 밝혔다.<ref name="ch22"/><ref name="han22"/>
  • 김인식 (1947년)
         * [[1994년]] [[9월]] - [[2003년]] [[두산 베어스|OB 베어스]] 감독
         |임기 = [[2004년]] [[10월 7일]] ~ [[2009년]] [[9월 24일]]
         |임기 = [[1994년]] [[9월 21일]] ~ [[2003년]] [[10월 9일]]
  • 김장생
         [[1598년]] [[9월]]에 남양부사에 제수되었으나 부임치 않았고, [[1599년]](선조 32) [[1월]]에 양근군수, [[2월]] 익위사 익위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취임치 않았다. 그러나 그해 다시 [[군자감]][[첨정]]에 제수되어 그를 부르자, 사양하지 못하고 부임하였다. [[1599년]](선조 32) 6월에 안성군수가 되었고 그해 [[9월]]에 가례집람(家禮輯覽)을 완성하였다. 경기도는 난리를 겪은 지가 얼마 안 되어 백성이 피폐했는데, 김장생이 마음을 다해 다스리니 수년도 안되어 거의 복구되었다. 이런 김장생을 추모하기 위해 1664년(현종5)에는 안성(安城) 안성 유림들의 공의로 특별히 김장생 등을 모신 도기서원(道基書院)이 건립되기도 했다. 이후 그는 지방관을 자원하여 단양군수, 남양부사(南陽府使), 양근군수(楊根郡守) 등을 지냈다.
         [[1626년]] 행[[용양위]]부사직이 되었다가 [[1627년]](인조 5년) [[정묘호란]] 때 양호 호소사(兩湖號召使)로 임명되어 군량미를 조달하는 데 힘쓰면서 격문을 돌려 의병과 식량을 모집하였다. 이후 화의론과 주전론이 나오자 [[후금]]과의 화의에 반대하였다. 이후 여러번 사직소를 올렸으나 받아들여지지 않고, [[후금]]군대가 물러가자 [[4월]] 호소사의 직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 뒤 행[[용양위]]부호군에 임명되었다. 1628년(인조6) 9월에 형조참판에 임명되었으나 출사치 않았다. 그 뒤에도 왕의 특별한 유지가 계속되었으나 정중하게 글을 올려 사양하였다.
         그 뒤 [[호조]][[참판]]을 거쳐 [[1628년]] 9월에 [[형조]][[참판]]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하고 연산(連山)으로 낙향하였다. 이후 연산에 은거하면서 학문 연구에 전심하며 후배들을 가르치는 데 힘썼다. 아들이자 학문을 계승한 [[김집 (1574년)|김집]](金集)과 [[서인]]의 영수 [[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윤선거]] 등의 유학자를 배출하여 [[서인]]을 중심으로 한 [[기호학파]]를 이룩하였다. 또한 잠곡 [[김육]] 등도 그의 후학이었다.<ref>김육은 후일 대동법 실시를 놓고 그의 아들 김집과 대립하게 된다.</ref>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717957 고택에서 피어난 묵향에 빠져보아요! - 오마이뉴스] 2007년 09월 17일자
  • 김정남 (1972년)
         }}</ref> SBS [[올드 스쿨 (라디오 프로그램)|올드 스쿨]]에서 [[1972년]] 출생으로 당당히 밝혔으며, [[1995년]] [[9월 1일]] '''김종국'''과 함께 그룹 [[터보]]로 데뷔했다
         그러나, 급작스런 인기로 인한 소속사의 무리한 스케줄 강행요구, 노예계약 등의 내적 갈등에 시달리다가, 결국 2집 발매 3개월만인 [[1996년]] [[11월]] 말경에 예정되었던 가요 프로그램 방송을 고의로 출연하지 않고 같은 멤버인 '''김종국''', 그리고 안무팀 동료들과 함께 6개월 동안 잠적하는 무리수를 두었으며, 얼마 못 가 김종국은 2개월 만에 다시 소속사로 복귀하였지만, 김정남은 끝내 가수 활동을 접고 당분간 다른 사업에 임하겠다고 반박하여 복귀를 완강히 거부하였고, 2집을 끝으로 [[1997년]] [[7월]] 터보를 탈퇴한다. 2개월 후 [[1997년]] [[9월]] [[마이키]]를 영입하여 3집부터 참여하였다.
         * [[2005년]] 9월 터보 출신의 김종국의 성공적인 솔로활동에 자극을 받아 활동명을 '''JN'''으로 바꾸고 솔로앨범 '''Fast & The Past'''를 발표했으나, 크게 주목은 받지 못하였다. 그뒤론 별다른 소식은 없었으나, 9년 후 [[2014년 12월]]에 [[문화방송|MBC]] [[무한도전]]에서 토요일 토요일은 가수다 코너에서 다시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 김정렴
         [[1946년]] [[한국은행]]의 전신인 [[조선은행]]에 입행하였다. 그 후 [[한국은행]] 조사부 차장과 [[대한민국 기획재정부|재무부]] 이재국장을 거쳐 [[1966년]] [[대한민국의 기획재정부 장관|재무부 장관]], [[1967년]] [[대한민국의 지식경제부 장관|상공부 장관]], [[1969년]] [[10월]]부터 [[1978년]] [[12월]]까지 [[대한민국의 대통령비서실장|대통령 비서실장]]을 지냈고 그 후 [[1979년]] [[2월|1월]]부터 [[1980년]] [[9월|89월]]까지 [[일본]] 주재 [[대한민국]] 대사를 역임하였다. 화폐 개혁, [[새마을 운동]], 산림 녹화 등에 직접 관여하기도 하였다.
         |임기 = [[1966년]] [[1월 25일]] ~ [[1966년]] [[9월 26일]]
  • 김준규
         * [[1993년]] [[3월]] ~ [[1993년]] [[9월]] 청주지방검찰청 제천지청 지청장
  • 김질 (1422년)
         [[음서]]로 무관이 되고, 부사직(副司直)에 이르렀을 때 사가독서(賜暇讀書)를 청원하여, 특별히 허락받았다. 그 뒤 [[1447년]] 에 2등으로 합격했으며 [[1450년]](문종 즉위년) 문과에 급제하여 집현전 수찬, 사간원 우정언, 성균관 사예 등을 거쳐 [[1455년]] [[성삼문]](成三問)·[[박팽년]](朴彭年) 등과 함께 [[단종 복위 운동]]에 가담했다가 여러 번 기회를 놓치고 위험을 느끼게 되자, 뜻을 바꾸어 [[조선 세조|세조]]에게 사육신의 거사를 알렸으며 이 공로로 1456년(세조 2) 6월 25일 판군기감사(判軍器監事)가 되고,<ref>[http://sillok.history.go.kr/inspection/insp_king.jsp?tid=kga&pos=0&mTree=0&inResult=0&indextype=1&keyword=%ED%8C%90%EA%B5%B0%EA%B8%B0%EA%B0%90%EC%82%AC 세조 4권, 2년(1456 병자 / 명 경태(景泰) 7년) 6월 25일(계해) 2번째기사] "윤사로와 정창손에게 품계를 더하고, 박중손·성봉조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ref> 1455년 9월 5일 [[좌익공신]](佐翼功臣) 3등과<ref>[http://sillok.history.go.kr/inspection/insp_king.jsp?tid=kga&pos=0&mTree=0&inResult=0&indextype=1&keyword=%EA%B9%80%EC%A7%88+3%EB%93%B1 세조 2권, 1년(1455 을해 / 명 경태(景泰) 6년) 9월 5일(정축) 1번째기사] "좌익 공신을 정하다"</ref> 1459년(세조 5) 8월 25일 상낙군(上洛君)에 봉해졌고<ref>[http://sillok.history.go.kr/inspection/insp_king.jsp?tid=kga&pos=0&mTree=0&inResult=0&indextype=1&keyword=%EC%83%81%EB%9D%BD%EA%B5%B0 세조 17권, 5년(1459 기묘 / 명 천순(天順) 3년) 8월 25일(갑술) 3번째기사] "윤사흔·조석문·김질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ref> 뒤에 부원군으로 진봉되었다.
         [[9월]] [[사육신]]가문의 부녀자를 하사할 때, 민보흥(閔甫興)의 아내 석비(石非), 이윤원(李潤源)의 아내 대비(大非)를 하사받았다.<ref>세조실록 5권, 세조 2년(1456 병자 / 명 경태(景泰) 7년) 9월 7일(갑술) 4번째기사 "의금부에 난신에 연좌된 부녀를 대신들에게 나누어 주게 하다"</ref>
         [[1464년]] [[8월]] 도진무(都鎭撫), [[9월]] 형조판서, [[1465년]] [[4월]] 다시 병조판서, [[1466년]] [[의정부]] [[우참찬]] 등을 지내고 숭정 대부(崇政大夫)로 승진하였다. [[1467년]] 행 좌참찬(行左參贊)이 되었다가 그해 [[7월]] 겸 의금부 판사(兼義禁府判事)를 겸임하였다. 그해 [[경상도]] [[관찰사]]가 되었다.
         * 부인 : 정씨(鄭氏, ? - [[1458년]] [[음력 9월 5일]]<ref>세조실록 14권, 세조 4년(1458 무인 / 명 천순(天順) 2년) 9월 5일(기축) 2번째기사 "우부승지 김질의 처가 죽으니 부의를 내리다"</ref>)
  • 김창희(야구)
         [[2009년]] [[9월]] 은퇴 선언을 했으며, 은퇴 이후로는 [[삼성 라이온즈]] 전력분석원으로 부임하였다. 이후 [[2012년]] [[11월 14일]] 삼성 전력분석원에서 친정팀인 [[KIA 타이거즈]]로 돌아와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7&oid=109&aid=0002443170|2군 외야 수비코치로 부임하였다.]] 그러나 수비코치로서의 능력은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고, 2014 시즌이 종료되고 [[선동열]] 감독이 사퇴한 뒤에는 코치진에서 물러나고 삼성 시절과 마찬가지로 전력분석원으로 보직이 변경되었다.
  • 김홍미
         탈상 후 [[1595년]] [[9월]] [[홍문관]]교리에 임명되었다가, [[이조]][[정랑]](吏曹正郞)이 되었다. 교리 겸 [[시강원]]문학(校理兼侍講院文學)을 거쳐 그 다음해 [[경연관]]에 임명되었으며, [[경연관]]으로 《[[주역]]》의 [[경연]]을 맡아보았다. 그때 마침 [[조선 선조|선조]]가 《주역 (周易)》을 강론하기 앞서 경학(經學)에 정통한 선비를 선발하여 경연의 강관(講官)을 충원하라고 명하였는데, 이때 그가 경연에서의 강론에 고전의 의리를 인용하여 정밀하게 분석하였으며, 가끔 경전(經傳)과 사서(史書)를 예로 들어 10여 줄을 연달아 외웠으므로, 임금이 싫증내지 않고 경청하면서 그가 박식하다고 거듭 칭찬하였다.
  • 남궁억
         그해 [[9월]] 나수연(羅壽淵), 유근(柳瑾) 등과 함께 재정난에 허덕이던 [[윤치소]]의 [[경성신문]]을 인수하고 다시 [[황성신문]]사(皇城新聞社)를 창간하여 사장이 되었다. 이후 [[황성신문]]을 일간지로 발행하고 국한문 혼용체를 채택했다. 그밖에 국민 계몽과 독립협회 활동을 지원하는 데 힘을 쏟았다. 대한제국의 정치체제를 전제군주제에서 입헌군주제로 개혁, 의회를 설립하고 대대적 개혁을 단행해야 된다는 주장을 하며 독립협회운동과 [[만민공동회]]의 지도자로 활동하다,
         그뒤 〈무궁화 묘포〉(苗圃)를 만들었으며 1933년에는 무궁화동산이라는 노래를 지어 학생들에게 가르쳤다는 죄목으로 체포되었다가 8개월만에 풀려났다. 그러나 가석방된 뒤 [[1933년]] [[9월]] 기독교 계열 독립운동 비밀결사인 [[십자가당]](十字架黨)을 조직, 활동하다가, [[1933년]] [[12월]]에 총독부 경찰의 불심검문에 걸려 [[홍천]] 모곡리 무궁화 사건(십자가당 사건)으로 비화되면서 홍천경찰서로 넘겨졌다가 [[경성부]] [[서대문형무소]]로 넘어가 복역한다. 일제가 민족 정신을 말살하기 위하여 [[일장기]]와 [[벚꽃]]을 보급하고 장려하려는 것에 항거해 당시 모곡리의 [[감리교]] [[전도사]]로 일하던 남궁억은 그의 동지들과 더불어 민족정신 고양을 위해 [[무궁화]] 묘목을 전국에 배포하였다.
         * 부인 : 양혜덕(梁惠德, [[1866년]] [[9월 13일]] - [[1937년]] [[1월 20일]]
  • 남영신 (군인)
         |임기 = [[2018년]] [[9월]] [[1월]] ~ [[2019년]] [[4월 15일]]
  • 노덕술
         귀국 후 경찰관에 지원하여 [[1920년]]에 경남에 있는 순사교습소에 지원하여 6월 경상남도 순사에 임명되었다. 같은 해 9월 순사교습소를 수료한 후, 같은 달 경찰부 보안과 순사로 근무하다가 1922년경 경상남도 울산경찰서 사법계 순사부장으로 재직했다. [[1924년]] 12월 도경부 및 도경부보고시에 합격한 후, 같은 달 경부보로 승진하여 경상남도 의령경찰서 경부보, [[1926년]] 4월 거창경찰서 경부보를 지냈으며, [[1927년]] 12월 동래경찰서 경부보로 전근해 사법주임을 지냈다. 동래경찰서 경부보로 재직 중이던 [[1928년]] 10월 동래청년동맹 집행위원장 및 신간회 동래지회 간부로 활동하던 박일형을 체포하여 고문했다. 같은 해 겨울에는 부산제이상업학교 학생들이 주도한 동맹휴교사건을 수사하다가 동맹휴교의 배후에 '혁조회'라는 반일단체가 있음을 알고 혁조회 관련자인 김규직, 유진흥 등을 체포하여 고문했다. 김규직은 고문 후유증으로 [[1929년]] 12월 옥사했다. 같은 해 12월 [[조선공산당]]사건과 관련하여 동래고등보통학교 학생의 제보를 받고 보통학교 교원을 체포하여 심문했다.
         [[1943년]] 9월 경시로 승진해 평안남도 경찰부 보안과 경시에 임명되어 보안과장으로 근무했다. [[1944년]] 6월 전시체제하에서 경찰의 임무가 치안유지 이외에 징병, 운송, 방공 등으로 확대되면서 경찰기구가 개편되어 기존의 보안과가 수송보안과로 확대 개편되자 평안남도 경찰부 수송보안과장으로 근무했다. 같은 해 12월에서는 영화와 연극 등의 보급을 통한 사상선도를 목적으로 조직된 '조선흥행협회'이사를 지냈다. [[평안남도]] 경찰부 수송보안과장으로 재직 시 자동차 수송통제를 목적으로 조직된 평남자동차수송협력회의 이사를 지내면서 여러 대의 화물자동차를 징발하여 군수품 수송에 제공하는 등 일본의 전쟁 수행에 적극협력했다.
         광복 후, [[1945년]] 8월부터 [[평안남도]] 평양경찰서 서장을 맡고 있다가 소련군이 진주하자, 이내 곧 [[공산주의]] 세력에게 체포되어 몇 달간 구금되었다가 풀려났다. 그는 신변의 위협을 느껴 [[1945년]] 말에 월남을 하게 된다. 다음해 [[1946년]]에 장택상에 의해 수도경찰청 수사과장에 기용되어 경찰 내부의 '반이승만 세력' 숙청, '좌익분자' 검거 등을 주도하였다. [[1946년]] 1월 경기도 경찰부 수사과장에, 9월 제1경무총감부 관방장 겸 수도관구 경찰청 수사과장에 임명되었다. 그해 4월, 당시의 [[동아일보]] 사장을 암살한 한현우 등을 검거함으로써 장택상을 비롯한 경찰 수뇌부들의 인정을 받았다.
         * [[1934년]] [[9월]] [[평안남도]] 경찰부 보안과장으로 승진
  • 노준형
         * [[2001년]] [[1월]] ~ [[2001년]] [[9월]] : 정보통신부 전파방송관리국 국장
         * [[2001년]] [[9월]] ~ [[2003년]] [[1월]] : 정보통신부 정보통신정책국 국장
         * [[2006년]] [[3월 22일]] ~ [[2007년]] [[9월 3일]] : [[대한민국 정보통신부|정보통신부]] 장관
         |임기 = [[2006년]] [[3월 22일]] ~ [[2007년]] [[9월 3일]]
  • 리엄 헴스워스
         그는 [[2009년]] [[6월]] [[영화]] 《라스트 송》 촬영하는 동안 상대역 [[마일리 사이러스]]와 데이트를 시작했다. [[2010년]] [[8월]] 두 사람 관계가 끝난 것으로 알렸지만 한 달 후 보도에 따르면 재결합하였고, [[2011년]] 초 다시 결별했고, 그해 [[11월]] 2번째 재결합하였다.<ref>{{웹 인용 |url=http://www.showbizspy.com/article/229653/miley-cyrus-and-liam-hemsworth-back-together-2.html |title=Miley Cyrus and Liam Hemsworth: Back Together? | Showbiz Spy – celebrity news, rumors & gossip |publisher=Showbiz Spy |date=2011-04-01 |accessdate=2011-08-07 |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111125030022/http://showbizspy.com/article/229653/miley-cyrus-and-liam-hemsworth-back-together-2.html |보존날짜=2011-11-25 |깨진링크=예 }}</ref> 이후, [[2012년]] [[6월]] 리엄은 마일리와 약혼을 발표했다.<ref>{{웹 인용|url=http://www.people.com/people/article/0,,20601230,00.html|title=Miley Cyrus, Liam Hemsworth Are Engaged|publisher=People Magazine |date=2012-06-06 |accessdate=2012-06-06}}</ref> [[2013년]] [[9월]] 두 사람은 결별하였지만, 2016년 재결합한 뒤 2018년 12월에 결혼식을 올렸다. 그러나 두 사람은 결혼 8개월 만에 이혼했다.
  • 모철민
         |임기 = [[2015년]] [[3월 4일]] ~ [[2017년]] [[9월]]
  • 박근혜
         [[1982년]] 박근혜는 [[육영재단]] 이사장에 취임하였고, 최태민도 육영재단에 합류하였다. 이후 박근혜와 최태민은 함께 [[1989년]] 육영수를 추모하는 단체인 [[근화봉사단]]을 조직하였고, 박정희와 육영수를 추모하는 월간 신문인 [[근화보]]도 발행하였다. 1년 뒤인 [[1990년]] [[9월]] 근화보는 15호를 마지막으로 폐간하였고, 박근혜와 여동생인 [[박근영]]과의 육영재단 운영권 다툼이 시작되었다. 박정희, 육영수 숭모회는 다툼의 원인은 최태민이 박근혜를 배후에서 조종하여 육영재단의 운영을 전횡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당시 육영재단의 간부는 [[1987년]] [[9월 2일]] 어린이회관 노조원들이 외부세력 물러가라며 1주일 동안 농성하였던 것은 최태민을 겨냥한 것이라고 주장하였고 '특별한 직책도 없으면서 육영재단 운영을 좌우해온 최태민을 싫어하면서도 박근혜와 막역한 관계 때문에 어느 누구도 기를 펴지 못하였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박근혜는 [[1990년]] [[11월]] 육영재단 이사장 퇴진 기자 회견에서 아래와 같이 밝혔다.
         그러나 2013년 9월에 [[대한민국]]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WHO]]를 통한 840만 달러의 원조를 약속하는 등 인도적 지원은 유지되었다.<ref>{{뉴스 인용
         | 날짜 = [[2013년]] [[9월 2일]]
         2014년 3월, 첫 번째 대통령 주재 규제개혁 회의가 TV를 통해 생중계되는 가운데 개최되었다. 회의에서 박근혜는 관계 장관에게 직접 규제개혁을 지시하는 등 규제개혁에 대한 강력한 의지를 밝혔다. 이후 9월에 2차 규제개혁회의를 주재한 자리에서도 규제개혁을 지시하였다. 그러나 규제개혁의 속도는 상당히 느린 편이다.
         여야간의 정쟁이 계속되던 9월 중순, 박근혜는 국무회의 모두발언을 통해 수사권과 기소권은 국가의 권한으로서 민간 위원회에 주는 것은 부적절하며, 여야의 2차 합의안을 넘는 유가족의 요구는 수용할 수 없다고 밝혔다. 이후 여야간의 협상이 계속되었고, 9월 말 여야는 조사위원회 구성 등에 대하여 합의하였다. 10월 말 소위 세월호 특별법과 정부조직법, 범죄은닉재산 환수법 등이 국회를 통과하면서 세월호 특별법 파동은 종료되었다.
         초이노믹스는 7월 30일 보궐선거에서 여당이 승리하게 하는 데 기여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8월 1일 최경환은 DTI, LTV 등 부동산규제를 완화하였다. 또한 9월 1일 부동산대책을 관계부처 합동으로 발표하여 적극적인 부동산 경기 활성화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그러나 상승하였던 주가가 이후 하락하고, 경기 회복세가 미약하여서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기획재정부는 10월 말 5조원 규모의 추가 경기부양책을 발표하였다.
         국가정보원에서 특수활동비를 상납받고 옛 새누리당 공천 과정에 개입한 혐의에 대한 재판도 받고 있다. [[2018년]] [[7월 20일]] 1심을 맡은 [[서울중앙지방법원|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32부(성창호 부장판사)는 국정원 특활비 수수 혐의에 징역 6년과 추징금 33억원, 공천 개입 혐의에는 징역 2년, 총 징역 8년 및 추징금 33억 원을 선고했다. 국정원 특활비를 받은 부분에 대해서는 국고 손실 혐의만 유죄로 인정했으며, 뇌물 수수 혐의는 무죄로 판단했다. 유죄로 인정한 금액도 2016년 9월 전달된 2억원을 제외한 33억원이다.<ref name=":1" />
         박근혜는 원칙, 신뢰, 약속을 지킨다는 이미지가 장점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녀는 세종시 문제, 2007년 대선 후보 경선 등을 통해 한 번 약속한 것은 반드시 지킨다거나 원칙을 중시한다는 이미지를 얻었다. 2012년 대선에 출마한 후보로서, 이러한 이미지는 국정운영에서의 안정감에 대한 기대로 연결된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한 이미지는 지지층에서만 통할 뿐이며, 변화를 바라는 사람들에겐 소통도 안 되고 감동도 없는 사람으로 보인다고 평가되기도 했다.<ref name="mk1">[http://news.mk.co.kr/newsRead.php?year=2012&no=199680 <매경이 만난 사람> 공천 탈락후 정계은퇴 선언한 강봉균 3선의원]매일경제, 2012년 3월 30일</ref><ref name="mk">[http://news.mk.co.kr/newsRead.php?year=2012&no=425368 원칙·소신 두각 vs 불통·신비주의 한계] 매일경제, 2012년 7월 11일</ref><ref>[http://news.mk.co.kr/newsRead.php?year=2012&no=629300 박근혜·문재인·안철수 SWOT분석] 매일경제, 2012년 9월 28일</ref><ref>[http://news.sbs.co.kr/section_news/news_read.jsp?news_id=N1001391745 SWOT 분석으로 본 대선 주자들…장단점은?] 서울방송 8시뉴스, 2012년 9월 20일</ref><ref name="kh">[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208272200245&code=910402 [새누리 후보 박근혜 뒤집어보기](1) 원칙인가, 독선인가] 경향신문, 2012년 8월 27일</ref> 대통령이 된 이후에는 일부 대선 공약을 수정해 반대 진영으로부터 비판을 받고 있다.<ref>[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310161539471&code=940100]</ref>
         2011년 9월 정치권을 강타한 '[[안철수]] 열풍'과 관련해 기자들이 박근혜에게 '안철수의 지지율이 자신을 넘어섰는데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반복된 질문에 대해 "병 걸리셨어요?"라는 반응을 보이면서 비판을 받기도 했다. 민주당은 사과를 요구했고 이후 박근혜는 "지나가는 식으로 농담을 했는데, 표현이 부적절 했던 것 같다"라며 유감을 표명했다.<ref>[http://www.hani.co.kr/arti/politics/politics_general/495481.html 박근혜, 기자에 “병 걸리셨어요?” 받아친 이유는?] 한겨레 2011-09-08</ref> 박근혜는 2004년 MBC 라디오 프로그램 '손석희의 시선집중'에서도 진행자가 경제 살리기에 대하여 질문하자 '지금 저하고 싸움하시는 거예요?'라고 언급한 것을 비롯해 올해 1월 복지 문제와 관련된 기자들의 질문에 '한국말 모르세요?'라고 대답한 것 등이다. 서울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조국 (1965년)|조국]] 교수는 "박근혜 전 대표는 불편한 질문과 비판을 참지 못한다. 영애 박근혜님이 '평민'들과 겸허히 소통하는 법을 배우기 전까지 새로운 별호를 지어 올리고자 한다. '발끈해'"고 말했다.<ref>(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109091122131&code=910100 조국 "박근혜님의 새로운 별명…'발끈해'") 경향신문 2011년 9월</ref>
         임기 초반부터 가장 비판을 받아온 것은 인사 실패 문제로, 박 대통령이 처음으로 중용한 인사인 [[윤창중]] 전 대변인, '의혹 백화점'으로 불리며 국방부 장관 후보에서 낙마한 [[김병관 (1948년)|김병관]], 과거사 관련 교회 강연 논란으로 비판받으며 국무총리 후보에서 낙마한 [[문창극]] 등 폐쇄적이고 불투명한 과정을 거친 '수첩인사'의 실패는 비판을 받는다.<ref>‘박근혜 수첩 인사’가 빚은 ‘데스노트 참사’, 한겨레 2013.03.22</ref><ref>새누리 2년 전엔 '극우발언' 공천 취소... 문창극은 어떻게? 2012년 총선 '박근혜 비대위원장' 시절, 역사인식 논란 국회의원 후보들 공천 취소, 오마이뉴스 2014.06.12</ref><ref>안철수,송광용 사퇴 파동 "박근혜 수첩인사에 따른 참사", 레디앙, 2014년 9월 23일</ref>
         박근혜는 [[2012년]] [[9월 10일]] [[MBC 라디오]] 《[[손석희]]의 [[시선집중]]》과의 인터뷰에서 인민혁명당 사건에 대해 "대법원 판결이 두 가지로 나오지 않았느냐"면서 그 부분에 대해서도 또 앞으로의 역사적 판단에 맡겨야 된다는 입장을 밝혔다.
         <ref>[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2/09/10/0200000000AKR20120910029500001.HTML?did=1179m 박근혜 "유신·인혁당 역사판단에 맡겨야"(종합)] 연합뉴스, 2012년 9월 10일</ref>
         이러한 입장에 대하여 언론과 정치권을 비롯한 각계로부터 많은 비판이 제기되었다. 박 후보의 대법원 판결이 두 가지로 나오지 않았느냐는 발언은 헌정절차가 정지된 유신 때 이뤄진 유죄 판결과 민주화 이후 사법부가 무죄로 교정한 판결의 효력을 동일시한 것이며, 이미 역사적, 사법적 판단이 내려진 사안까지 수용하지 않는 것으로 해석되었기 때문이다.<ref>[http://media.daum.net/issue/365/newsview?issueId=365&newsid=20120910220812478 박근혜 "인혁당 대법 판결은 2개" 헌정무시] 경향신문, 2012년 9월 11일</ref><ref name="박근혜 인혁당 판결 두개 논란···'통합' 걸림돌될까">[http://www.mt.co.kr/view/mtview.php?type=1&no=2012091010501209509&outlink=1 박근혜 "인혁당 판결 두개" 논란···'통합' 걸림돌될까] 머니투데이, 2012년 9월 10일</ref><ref>[http://news.mk.co.kr/newsRead.php?year=2012&no=580865 박근혜 "인혁당에 대한 대법원 판결은 두가지" 발언 논란] 매일경제, 2012년 9월 11일</ref>
         [[경향신문]]과 [[한겨레]], [[한국일보]] 등의 언론들은 사설을 통하여 재심으로 유신 당시의 대법원 판결은 취소되었으며 "지금 이 순간 인혁당 사건이 무죄라는 점은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법적인 사실"이라는 점을 지적하였다.<ref>[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209102116085&code=990101 <사설>'인혁당 판결이 두 개'라는 박근혜 후보의 법치 인식]경향신문, 2012년 9월 11일</ref><ref>[http://www.hani.co.kr/arti/opinion/editorial/551011.html <사설> 박근혜, 인혁당 사건에 대한 분명한 입장 밝혀야]한겨레, 2012년 9월 11일</ref> 특히, 한국일보는 사설에서, "사실상의 헌법중단 상태인 유신 치하의 원판결과 민주화 이후의 재심 판결에 똑같이 '정치 상황'이란 잣대를 들이댄 결과라면 실로 심각하다"면서 그럴 경우 "대한민국의 사법절차, 나아가 헌정질서에 대한 근본적 도전"이라고 비판했다.<ref>[http://news.hankooki.com/lpage/opinion/201209/h2012091121052376070.htm <사설/9월 12일> 박근혜 후보 언제까지 "역사 판단" 타령인가] {{웨이백|url=http://news.hankooki.com/lpage/opinion/201209/h2012091121052376070.htm# |date=20121116012015 }}한국일보, 2012년 9월 12일</ref>
         [[광주광역시]]의 시민단체와 법조계는 박근혜 후보의 발언이 사법부를 부정하는 것이라고 비판하였다.<ref>[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2/09/11/0200000000AKR20120911147200054.HTML?did=1179m "박근혜 인혁당 발언, 사법부 부정하는 것"] 연합뉴스, 2012년 9월 11일</ref> 또한 전국 11개 로스쿨의 인권법학회 학생들도 성명을 통해 박근혜의 발언은 역사인식의 심각한 결여와 법체계에 대한 무지를 드러낸 것이라고 비판했다.<ref>[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781758&CMPT_CD=P0001 전국 로스쿨 학생들, 박근혜 인혁당 발언 비판성명] 오마이뉴스, 2012년 9월 23일</ref><ref>[http://www.lawissue.co.kr/news/articleView.html?idxno=13434 로스쿨 학생들 "박근혜 '인혁당' 역사인식 깊은 우려"] 로이슈, 2012년 9월 24일</ref>
         야당들도 박근혜 후보의 발언을 일제히 비판하였다. 민주당 정성호 대변인은 2007년 재심을 통해 무죄와 국가배상이 선고되고 사법부가 사죄까지 한 점을 지적하며, 박근혜 후보의 발언은 사법부와 유족을 모독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사과를 요구했으며, 같은 당의 이해찬 대표 역시, 판결은 하나라는 점을 지적하고, 박 후보의 발언이 대법원에 대한 모독이라고 주장했다. 그밖에 유인태, 박지원, 박영선 의원 등도 "사법부를 무시한 황제적 발언", "일본 극우파들보다 더한 것", "헌정질서를 무시하는 초사법적인 발언"이라고 비판했다.<ref>[http://www.edaily.co.kr/news/NewsRead.edy?SCD=DA32&newsid=02968406599658808&DCD=A01503&OutLnkChk=Y 민주 "박근혜, 역사부정 이어 사법부정 하나?"] 이데일리, 2012년 9월 10일</ref><ref>[http://www.newsis.com/ar_detail/view.html?ar_id=NISX20120910_0011432738&cID=10301&pID=10300 이해찬 "朴 인혁당 발언, 대법원 모독"] 뉴시스, 2012년 9월 10일</ref><ref>[http://news.kbs.co.kr/politics/2012/09/11/2533788.html 민주당, 인혁당 관련 박근혜 후보 비판 잇따라]{{깨진 링크|url=http://news.kbs.co.kr/politics/2012/09/11/2533788.html }} KBS, 2012년 9월 11일</ref> 진보신당 역시 박근혜 후보의 태도에 대해 자신에게 불리한 문제는 에둘러 말하며 기존 입장을 고수하는 보수 정치인들의 구태라고 비판했다.<ref name="박근혜 인혁당 판결 두개 논란···'통합' 걸림돌될까"/>
         이러한 비판이 제기되자, 박근혜 후보는 다음 날 대법원 판결은 존중한다는 입장을 밝혔지만 당시 조직에 몸담았던 사람들의 증언까지 감안해서 역사의 판단에 맡겨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했다.<ref>[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2/09/11/0200000000AKR20120911097751001.HTML?did=1179m 박근혜 "인혁당 평가, 최근 여러증언 감안해야"(종합)] 연합뉴스, 2012년 9월 11일</ref><ref name="hani">[http://www.hani.co.kr/arti/politics/assembly/551265.html ‘인혁당’ 사실관계마저 호도…자기신념에 갇힌 박근혜] 한겨레, 2012년 9월 11일</ref>
         하지만 이러한 발언에 대해서는 "사실관계마저 호도"한다거나 "현대사에 대한 무지를 드러냈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박근혜 후보가 말하는 증언들이란, 박범진과 안병직 등의 증언을 말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이들의 증언은 1964년의 1차 인혁당 사건에 대한 증언들로, 손석희 교수가 방송에서 질문한 유신 시절의 이른바 2차 인혁당 사건과는 무관하기 때문이다.<ref name="hani"/><ref>[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209112210065&code=910402 박근혜가 주장하는 인혁당 '다른 증언'은 1차 사건과 혼동한 듯] 경향신문, 2012년 9월 11일</ref><ref>[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777478&CMPT_CD=P0001 박근혜, 인혁당 반론 펴다 현대사 무지 드러내] 오마이뉴스, 2012년 9월 11일</ref><ref>[http://www.nocutnews.co.kr/Show.asp?IDX=2253348 박근혜, 1차 · 2차 인혁당 사건 구분 못 했나] 노컷뉴스, 2012년 9월 11일</ref>
         2012년 9월 12일 [[인혁당 사건]] 유족들은 새누리당 앞에서 기자 회견을 열고 "이미 박 후보는 2005년에 [[국정원]]이 인혁당 사건이 조작되었다는 조사결과를 발표할때도 '한 마디로 가치가 없는 것이며, 모함'이라고 발언한 바 있다"며 "사람이 억울하게 8명이나 [[사형]]당한 사건을 가치가 없고 모함이라고 말하는 박 후보는 최소한 인간에 대한 예의조차 있는가. 입이 있으면 대답을 해라"고 비난했다.<ref>[http://media.daum.net/issue/365/newsview?newsId=20120912174006045&issueId=365&page=1&type=all] 이도형 기자, 인혁당 유족 "박근혜, 칠푼이·정신나간 여자·발달장애인" 맹비난, 이데일리, 2012.9.12.</ref>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위원회 위원장이었던 안병욱 교수는, 박 후보는 사실관계 가운데 법원의 재심 판결이나 과거사위원회의 조사 결과처럼 공신력 있는 부분은 무시하고, 공신력이 없어 신뢰가 가지 않는 이야기에 무게를 싣는다면서, 이는 상대를 설득해서 믿도록 해주는 방식은 아니라고 말했다.<ref>[http://www.hani.co.kr/arti/politics/assembly/551265.html '인혁당' 사실관계마저 호도…자기신념에 갇힌 박근혜] 한겨레, 2012년 9월 11일</ref>
  • 박문웅(1890)
         그뒤 [[사무관]]을 거쳐 [[1934년]] [[9월 14일]] [[경상북도]] [[군속]]이 되었다. [[1934년]] [[9월 16일]] [[고등관]] 7등에 [[군수]]로 승진, [[청송]][[군수]](靑松郡守)가 되었다.<ref>동아일보 1934년 09월 16일자, 1면</ref> [[청송]][[군수]]로 재직 중 [[1935년]] 판임관 7등이 되고, [[1937년]] 판임관 6등으로 승진하였다. [[1938년]] [[3월 17일]] [[청도]][[군수]]가 되었다.<ref>동아일보 1938년 03월 27일자, 1면</ref> 그해 [[8월]] [[국민정신총동원연맹]] 청도군지회 이사장을 맡았다. 이후 달성군수, 청송군수 등을 지내고 [[1939년]] [[9월 30일]] 인사에서 [[고등관]] 4등(高等官四等)으로 승진하였다.<ref>동아일보 1939년 10월 01일자 1면</ref>
         [[1940년]] [[판임관]] 5등이 되었다. 그해 [[5월]] [[창씨개명]]령이 떨어지자 그해 [[9월]] 박충으로 창씨개명하였다. [[1941년]] 다시 청도군수가 되었다가 [[1942년]] [[판임관]] 4등으로 승진하였다. [[1943년]] [[영천]][[군수]]가 되었다가 그해 [[3월 6일]] [[상주군|상주]][[군수]](尙州郡守)로 부임하였다. [[1943년]] [[8월 2일]] 각 도별로 [[일본적십자사]] 녹사(日本赤十字社錄事)를 선발할 때 [[경상북도]] 지역구 [[일본 적십자사]] 녹사의 한사람으로 선임되었다. [[12월 31일]] [[고등관]] 3급으로 승진하였다.
         [[1944년]] [[12월 22일]] [[상주군|상주]][[군수]]에서 [[의원면직]]하였다. 이후 [[12월]]말 [[밀양]][[군수]]를 거쳐 [[1945년]] 해방 후 관직에서 물러난 뒤 [[대구]] 침산 근처로 낙향하였다. [[1945년]] [[9월 2일]] 미군정청 경상북도 자문관에 임명되었으나 12월 26일 사퇴하였다. [[미군정]]하에서 그의 능력을 인정하여 계속 채용하려 하였으나 사양하고 대구 침산 근처에서 아버지 [[박중양]]과 일본인 계모와 생활하였다.
         [[1945년]] [[9월 12일]]부터 [[1946년]]까지 [[달성군|달성]][[군수]]를 역임하였다.
         * 할아버지 : 박정호(朴鼎鎬, [[1840년]] ~ [[1892년]] [[9월 22일]])
         ** 이복 여동생 : 박정자(朴政子, [[1936년]]<ref>"박중양씨 입건 '이 대통령'의 명예훼손 혐의", 동아일보 1957년 09월 15일자 3면, 사회면</ref> - )
  • 박서양 (1885년)
         '''박서양'''(朴瑞陽, [[1885년]] [[9월 30일]] ~ [[1940년]] [[12월 15일]] [[서울특별시]])를 [[대한제국]]의 외과 의사, 화학자, 교육자이자 [[일제 강점기]]의 외과 의사, 교육자, [[한국의 독립운동|독립운동가]]이다. 본명은 봉출, 봉주리이다.
         [[1885년]] [[9월 30일]] [[한성부]] 종로방 관자골에서 백정 박성춘과 그의 부인 조씨(趙氏)의 아들로 태어나 1908년 [[제중원의학교]]를 제1회로 졸업하였다. 그의 집안이 어떻게 박씨 성을 얻게 되었는가는 알려지지 않았다. 아버지 박성춘은 [[백정]]의 천한 신분으로 태어났지만 [[기독교]]를 접하고 새로운 사람이 되겠다는 뜻에서 이름을 성춘이라 하였다. 아버지 박성춘은 그뒤 [[서재필]], [[윤치호]], [[박정양]], [[유길준]], [[이상재]] 등과 함께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의 [[한성부]]지역 연사, 간부로 활동하였다.
         [[1893년]](고종 30년) [[9월]] [[올리버 R. 에이비슨|에비슨]] 선교사가 [[장티푸스]]에 걸린 아버지 박성춘을 살렸다. [[1894년]] 아버지 박성춘은 [[새뮤얼 F. 무어]](Samuel F. Moore, 한국이름 '모삼율'(毛三栗, 1846∼1906)) 선교사를 만나 [[기독교]]로 개종하였다.<ref name="gadjong">[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05&aid=0000494140 (43) 기독교와 사회변화 <4>신분타파]</ref> 이후 [[새뮤얼 F. 무어|무어]] 선교사는 백정과 그 자녀를 위한 선교, 교육사업을 시작하였다. 그 결과, 1895년에는 6명의 백정이 복음을 받아들였다고 한다. 박성춘은 1895년에 정식으로 [[기독교]] 세례를 받았고 1911년 12월에는 한국 최초로 백정 출신의 [[장로]]가 되었다. [[1894년]] 박서양은 무어 선교사가 설립, 운영하던 곤당골 교회 부속 예수학당에서 공부하게 되었다. 이로서 신학문을 받아들이게 되었다.<ref name="gadjong"/> 무어 선교사의 배려로 그는 신학문을 배우고 새로운 세계의 존재를 접하게 되었다. 그 역시 어려서 세례를 받고 [[기독교]]([[북장로교]])로 개종하였다.
         [[1896년]] 처음으로 호적에 오르게 되었다. [[에비슨]] 등 선교사들의 지속적인 노력으로 1896년 2월 백정(屠漢)들에게도 면천(免賤)이 허용되어 평민들과 같이 갓[漆笠]을 착용할 수 있었으며, 1896년 9월 백정들도 호적에 오를 수 있게 되었다. 그는 호적을 소중히 보관했고 이는 그의 아들과 손자에게로 이어졌다가 후에 그의 손자들이 호적과 자료들을 일부 공개하고, [[연세대학교]]에 기부함으로써 그의 가계와 활동에 대한 것이 일부 알려지게 되었다. 한편 그는 아버지 박성춘의 인연으로 1898년 그는 의료선교사 에비슨과 친분이 있던 아버지 박성춘을 통해 에비슨을 찾아갔고, 그 해부터 [[제중원]]에서 허드렛일을 시작하였다.
         [[1899년]](광무 2년) 3월 에비슨이 안식년 맞아 고국으로 돌아갔고 그는 그해 [[1월]] [[경성학당]]에 입학하여 [[6월 14일]]에 졸업하였다. [[1899년]](광무 2년) [[12월]] [[조안의숙]]의 교사가 되었으며 1900년 9월 에비슨이 안식년 마치고 귀국하였다. [[1900년]] 아버지 박성춘의 간곡한 부탁으로 그해 [[10월]] [[제중원 의학교]](후의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에 입학하였다. 처음 허드렛일을 시켜 그의 됨됨이를 본 에비슨은 그를 의학교에 입학시켰다.<ref name="jseusa1">[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0/02/05/2010020501212.html <nowiki>[</nowiki>김동섭의 X코리언<nowiki>]</nowiki> 조선 첫 서양식 병원 '제중원' 의사 된 박서양] 조선일보 2010.02.16</ref> [[1904년]] 에비슨이 [[제중원]]의 후신인 [[세브란스 병원]]을 개업하자 박서양은 [[조선인]] 병원 조수가 되어 낮에는 의료활동을 돕고 밤에는 야간반 학생이 되어 공부하였다.
         1909년 2월 [[승동학교]]에 음악학과를 설치되자 음악학과 학과장이 되었다. 1909년 9월 [[콜레라]]가 창궐하자 [[김필순]], [[김희영]], [[안상호]], [[이석준]], [[박용남]], [[장기무]], [[한경교]], [[정윤해]] 등과 함께 자발적으로 방역 활동을 하기도 했다. [[1910년]](융희 4년) [[세브란스의학교]]의 화학 담당 강사가 되어 2학년 화학을 한 주에 6시간 강의하였다.
  • 박원종
         승평부부인이 자결하자 [[조선 연산군|연산군]]에게 앙심을 품고 정변을 준비, [[유순정]], [[성희안]] 등을 포섭하여 [[1506년]] [[중종반정]]을 기획한다. 중종반정 직후인 [[1506년]] [[9월]]에서 이듬해 [[1507년]] [[8월]]까지, 그리고 1509년에서 15010년가지 두 차례로 [[조선 중종|중종]] 임금을 보좌하여 [[섭정]]을 맡았다. [[사육신]]의 한 사람인 [[박팽년]]의 일족이기도 하다.
         임기= [[1506년]] [[9월 24일]] ~ [[1507년]] [[12월]]
  • 박정양
         [[1896년]](고종 33년) [[아관파천]](俄館播遷)이 일어나 [[김홍집]]이 수구파, 위정척사파 측에 의해 살해되자 내부대신으로 [[총리대신]] 서리와 [[궁내부]][[대신 (조선 말기)|대신]] 서리를 겸임했다. 이해 양력 9월 내각을 [[의정부]]로 개혁하자 [[의정부]]참정대신(參政大臣)이 되고 [[1896년]](건양 1년) [[서재필]], [[윤치호]], [[이상재]] 등과 [[독립협회]]를 조직하였다. 이어 [[윤치호]], [[이상재]] 등의 주도로 [[만민공동회]]가 조직되자 정부측 대표로 참석, 이후 만민공동회에 계속 참석하였다.
         [[1904년]] 궁내부특진관과 홍문관 학사(弘文館學士)를 거쳐 [[9월]] 표훈원 총재(表勳院總裁)에 임명되었으며 [[대한제국]] 정부에서 주는 태극훈장(太極勳章)을 수여받았다. 초조함과 긴장이 심해져 번열증(煩熱症)을 앓았으며 과로로 병이 심해져 [[1904년]] [[11월 14일]] 표훈원 총재직을 사퇴하였고, [[1905년]] [[을사늑약]] 당시에는 반대 상소를 올렸다<ref>[http://sillok.history.go.kr/id/kza_14211027_007 고종실록 46권, 고종 42년 11월 27일 양력 7번째기사]</ref>. 그해 [[12월 15일]] (음력 11월 19일) 사망하였다.
  • 박지만
         [[2005년]] 1월 영화 《[[그때 그사람들]]》이 아버지 [[박정희]]의 명예를 훼손했다며 상영금지 가처분 신청을 냈으며, 법원은 일부 장면을 삭제하라고 판결을 내렸다. 그러나 같은 해 2월 MK픽처스는 가처분 이의신청소송을 냈으며, 박지만은 영화상영금지 및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했다. [[2006년]] 서울중앙지방법원은 손해배상 소송 금액 5억원 중 1억원을 박지만에게 제출하라고 원고 일부승소 판결을 내렸지만, 상영금지 청구에 대해서는 기각하였다.<ref>〈영화 ‘그때 그사람들’,박 前대통령 명예훼손 …1억 배상 판결〉, 경향신문, 2006년 8월 10일</ref> [[2011년]] [[8월 19일]] [[서울강남경찰서]]는 박지만의 누나인 [[박서영|박근령]]의 남편 [[신동욱 (정치인)|신동욱]]에 대해 '[[2010년]] [[9월]] 박지만의 5촌 조카와 비서실장이 자신을 [[중국]]으로 납치했고, 자신이 중국에서 [[마약]]을 했다는 소문 등을 퍼뜨렸다며, 두 사람을 [[고소]]하는 등'의 무고 혐의로 [[구속]]하였다. 신동욱은 '박지만의 비서실장 등이 [[2007년]] 자신을 중국으로 납치하여 살해하려 하였고, 박지만이 이를 뒤에서 교사했다'는 주장도 제기하였으며,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박지만이 죽이려했다는 녹취록이 있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ref>{{뉴스 인용
         **** 장남 : 바세현 ([[2005년]] [[9월 12일]] ~ )
  • 박지일 (1960년)
         '''박지일'''([[1960년]] [[9월]] ~ )은 [[대한민국]]의 [[배우]]이다.
  • 박지일(배우)
         '''박지일'''([[1960년]] [[9월]] ~ )은 [[대한민국]]의 [[배우]]이다.
  • 박창수 (1958년)
         '''박창수'''([[1958년]] [[7월 28일]] [[부산광역시]] ~ [[1991년]] [[5월 6일]], [[대한민국]])는 노동운동가이다. [[1981년]] [[대한조선공사]]에 입사하여 [[한진중공업]]에서 10년간 근무하며 [[한진중공업]]의 노조위원, [[1990년]] [[7월]] [[한진중공업]] 노조위원장, [[9월]]에는 노동조합총연합 부산시지부 부위원장으로 선출되었고, [[전노협]]의 임원으로도 활동하였다. [[1991년]] [[대우조선]] 노조 시위에 참여했다가 구속, 수감 도중 [[안기부]] 수사관들에게 여러번 고문당하였다.
         [[1987년]]부터 [[한진중공업]] 내 노동조합 활동 시작, 이후 3년 간 노조, 회계감사로 선임되었으며, 1990년 7월 한진중공업 노조위원장 선출 시, 93%의 압도적인 찬성으로 노동조합 위원장 당선되었다. 그해 [[9월]] 노동조합총연합 부산지역지부 부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이후 [[안기부]]의 미행, 내사를 당하기도 했다. [[안기부]]의 [[전노협]] 탈퇴 공작에도 전국노동자의 연대투쟁을 이끄는 지도자로 활동하며 노동시위 등을 주도하였다. [[1991년]] [[2월]] 대우조선투쟁지원연대회의에 참석했다는 이유로 구속, 서울구치소에 수감되고 [[한진중공업]]에서도 해임되었다.
  • 박필균
         [[1740년]] [[8월]]에 [[영조]]에게 존호를 올릴 때 예방승지를 거쳐, [[가선대부]](嘉善大夫)에 가자되고 [[좌승지]]를 거쳐 [[도승지]]에 올랐다. 그해 [[9월]]에 [[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에 제수되고, 10월에 [[형조]] [[참판]]에 제수되었다가 병조 참판으로 옮겼다. 이듬해 동지의금(同知義禁)을 거쳐 8월에는 [[경기도]][[관찰사]]로 나갔다가 [[사간원]][[대사간]]이 되었다. 이후 [[한성부]][[좌윤]]을 거쳐 [[호조]][[참판]]을 지냈다.
         [[1744년]] [[사헌부]] [[대사헌]]이 되었다가 [[1746년]] [[9월]] [[소론]] 재상 유봉휘, 조태구 등의 관작을 추탈(追奪)하게 되자 그해 겨울에 자처하여 외직으로 나가 [[춘천]][[부사]](春川府使)가 되었다.
  • 박한별 (수영선수)
         '''박한별'''([[1997년]] [[9월]] [[28일]] [[부산광역시]] ~ )출생은 대한민국의 수영 선수이다. 주종목은 배영이며 현재 배영 50m 대한민국 최고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 박호언
         }}</ref>. 마침 당시 [[이명박]] [[서울특별시장]]이 청소년할인제 시행을 느낌표에서 약속하였고, 대전광역시에서도 청소년증 시행을 결정하여, [[2003년]] [[9월]] 부터 [[서울특별시]]와 대전광역시에서 청소년증 제도가 우선 시범 실시되었다<ref>{{뉴스 인용
  • 백남순 (1929년)
         이후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서기국장과 [[1991년]]에 [[조국통일범민족연합]] 북측본부 부의장을, [[1992년]]에 [[남북회담|남북고위급회담]] 정치분과위원회 위원장,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서기국장 등의 요직을 역임했으며, [[1998년]] [[9월]]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외무부|외무상]]으로 취임했다.<ref name="autogenerated1" />
         |임기= [[1998년]] [[9월]] - [[2007년]] [[1월 3일]]
  • 변수 (1861년)
         1883년 9월 미국에 파견된 조선의 보빙사절단원, 앞줄 왼쪽부터 부사 홍영식, 정사 민영익, 종사관 서광범, 미국인 로웰, 뒷줄 왼쪽부터 무관 현흥택 최경석, 수행원 유길준, 고영철, 변수
         갑신정변이 실패하자 [[일본]]으로 망명했다가 [[1886년]] [[1월]] [[미국]]으로 유학, [[베어리츠 언어학교]]를 마치고 [[1887년]] [[9월]] [[미국]] [[메릴랜드 대학교]]에 입학하였다. [[1890년]]부터는 [[미국 농무성]]의 직원으로 근무하였으나 [[1891년]] 모교 입구 정거장에서 열차 사고로 사망하였다. 사후 [[1895년]] 복권되었다가 [[김홍집 내각]] 붕괴로 추탈, [[1908년]] 최종 복권된 뒤 [[1910년]] [[증직|증]] 종2품 [[가선대부]] [[규장각]][[부제학]]에 [[추증]]되었다.
         [[1883년]] [[6월 11일]] 조선의 친선사절단인 [[보빙사]]가 미국에 파견될 때, [[민영익]]을 전권대신으로 [[홍영식]]·[[유길준]]·[[서광범]] 등과 함께 사절단의 한 사람으로 임명돼 [[1883년]] 7월 인천항을 출발, 같은해 [[9월 2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 기차편으로 뉴욕에 도착한 후 40여 일 동안 미국에 체류하면서 미 대통령을 만나 면담하고 각 기관을 두루 시찰하고 귀국했다.<ref name="중앙">[https://archive.is/20130426215657/article.joins.com/article/article.asp?Total_ID=2854588 〈키워드로푸는역시〉 유길준 한국인 최초 미국 유학] 중앙일보 2007-08-17</ref> [[1884년]] 봄 [[일본]]을 경유하여, 귀국하였다.
         [[1887년]] [[9월]] [[미국]] [[메릴랜드 대학교]] 농과에 입학해 농학을 전공하고 1891년 졸업하여 한국인 최초의 미국대학 졸업생이다.<ref name="매경"/> 정확히 6월에 이학사 학위를 받았다.<ref name="중앙"/> 대학 재학 시절인 [[1890년]]부터 [[미국 농무성]] 직원으로 근무했으며, [[1891년]] [[6월]] [[메릴랜드 대학교]] 농과 졸업과 동시에 이학사(理學士) 학위를 취득하였다. 1891년 9월에는 농무성통계국 월보 제89호에 '일본의 농업'이란 글을 싣기도 게재하였다. 그러나 그해 [[10월]] 모교 [[메릴랜드 대학교]]를 방문했다가 돌아가던 길에 대학 정거장에서 열차를 기다리던 중 열차 사고로 사망하였다.<ref name="매경"/><ref name="중앙"/>
  • 변희재
         자신이 변절했다는 비판에 대해 변희재는 기고를 통해 스스로를 이념적으로 진보좌파진영이며 구세대의 잘못된 기득권 논리를 박살내기 위하여 행동한 것이 그들에게는 그렇게 받아들여지는 것이라 평했다.<ref>[http://www.bignews.co.kr/news/article.html?no=230758 "젊은 논객들, 전문성에 목숨 걸 자신있나" 변희재] 우</ref> [[2008년]] [[9월]] [[미디어발전국민연합]] 공동대표에 선임되었다.
         변희재는 브레이크뉴스 편집장 시절인 [[2004년]] [[9월 24일]] 〈기자가 몸팔아 스타 인터뷰하는 현실〉이라는 제목의 글을 올렸다. 이 글에서 변희재는‘여기자들이 취재를 위해 몸을 팔고 여자 방송작가들도 그런 경우가 많다’는 주장을 하여 논란을 일으켰다.<ref name="데일리안">{{뉴스 인용|제목=
  • 봉석주
         그해 [[9월]] [[신숙주]]의 탄핵을 받았으나 왕이 듣지 않았다.
         * 숙부 : 봉안당(奉安唐<ref>1468년 9월 6일 석방되었다.</ref>)
  • 서경(공원소녀)
         [[2018년]] [[9월]] 데뷔 예정인 [[키위미디어그룹]] 소속 [[걸그룹]] [[공원소녀]]의 멤버이다. [[2016년]] [[Mnet]] [[프로듀스 101]] 시즌1에 '개인 연습생' 신분으로 참가해 '''최고 순위 22위'''를 기록하였으며, 종영 이후 [[키위미디어그룹]]에 입사하였다. [[2018년]] [[6월 21일]] [[공원소녀]]의 마지막 멤버로 공개 되어 2018년 9월 5일 데뷔하였다.
         2018년 9월 데뷔 예정인 [[키위미디어그룹]]의 걸그룹 멤버로 합류했다. [[http://pop.heraldcorp.com/view.php?ud=201806081608056105247_1|공식 기사]] 팀명은 '[[공원소녀]](GWSN)'라고.
         2018년 9월 7일부터 음방에 출연해 프듀1 동기였던 [[소연((여자)아이들)|전소연]]과 재회했다.[* 두 사람은 프듀 때 컨셉평가 Don't matter로 공연했었다. 당시 서경이 소속된 [[공원소녀]]는 데뷔 첫 주였고, [[소연((여자)아이들)|전소연]]이 소속된 [[(여자)아이들]]의 경우는 활동 막주였다.]
          * 2016년 9월 12일, 뮤직K [[김주나]]의 솔로 데뷔 무대 쇼케이스에서 [[프로듀스 101]] 콘셉트 평가 당시 팀 구성원인 [[이해인(1994)|이해인]], [[이수현(1996년 9월)|이수현]]과 함께 축하 공연을 했다. 프로그램이 종료되어도 여전히 친분 관계가 돈독한 것으로 보인다.
          * 2018년 10월 2일 [[THE SHOW|더 쇼]]에서 [[공원소녀]]가 데뷔 첫 1위 후보에 오르게 됨에 따라, [[I.O.I]] 탈락자들 중 6번째로 음방 1위 후보에 올랐다.[* 최초는 [[윤채경]], 2번째는 [[세이(위키미키)|세이]]/[[엘리(위키미키)|엘리]], 3번째는 [[태하(모모랜드)|태하]], 4번째는 [[소연((여자)아이들)|소연]], 5번째는 [[기희현]], 7번째는 [[권은빈]]이다.] [[연정(우주소녀)|연정]]의 '''[[우주소녀]]'''와 맞붙으며 8번째로 프듀 리턴 매치가 성사됐으나, 연정의 벽을 넘지 못하고 2위에 그쳤다.[* 프듀1 리턴 매치 중 2017년 9월 26일 [[THE SHOW|더 쇼]] [[김도연(위키미키)|김도연]], [[최유정]], [[이서정]], [[정해림]] - [[윤채경]] 리턴 매치 이후 1년 1개월 만에 [[I.O.I]] 멤버가 승리했다. 의외로 리턴 매치에서 I.O.I 멤버들의 승률이 낮은데, 바로 [[태하(모모랜드)|이 사람]] 때문.]
  • 서민정(영화배우)
         이후 2017년 1월 4일 방송된 [[라디오 스타(황금어장)|라디오 스타]]에서 [[신지(가수)|신지]]와 [[뉴욕]] 현지 전화통화로 목소리가 잠깐 나오며 하이킥 팬들에게 추억을 선사해 주었다.[* 사실 라디오스타에 신지와 전화 통화를 하지 않았다면 그녀의 인스타그램을 일부러 보지 않는 이상 생사도 알수없는 상황에 이르렀을것이다.][* [[2017년]] 현재 서민정이 출연한 시트콤 [[거침없이 하이킥]]이 한참 전파를 타는 년도인 [[2007년]]에 태어난 초등학생들에게 [[2017년]] [[9월]]에 서민정에 대해 물어봤더니 누구냐고 되묻는 학생들이 거의 대부분이었고 복면가왕, 동상이몽 너는 내운명, 냉장고를 부탁해에 나온 사람이라고 해야 그제서야 아는 눈치여서 그녀가 내년 여름시즌에도 출연을 한다면 그제서야 초등학생들과 유치원생들도 알 수있는 가능성이 높다.]
         9월 11일 방영된 [[냉장고를 부탁해]]가 방송 복귀 마지막 일정이라 밝혔다. 이게 일시적인 복귀였는지, 아니면 잠시 활동을 쉬고 다시 나올지는 불분명했는데...그러던 중 [[JTBC]]의 신규 예능 프로인 '이방인'에 2017년 12월부터 가족과 함께 고정 출연하고 있다. 또한 이방인 방문 차에 김지훈과 함께 [[한끼줍쇼]]에 출연하였다.
  • 서신애
         || [[2012년]] [[9월 4일]] || [[MBC]] || 1318 사랑의 열매 캠프 || || ||
         || [[2010년]] [[9월 21일]] || [[MBC]] || 여우의 집사 || 출연자 || 추석특집 ||
         || [[2016년]] [[9월]] || [[안양시]] || 제1회 안양국제청소년영화제 홍보대사 ||
  • 성재기 (조선)
         자헌대부(資憲大夫) 행용양위대호군(行龍驤衛大護軍)을 지낸 성원묵(成原默)의 아들이다. [[1858년]](철종 9년) [[음서 제도|음서제]]로 출사하여 [[교관]](敎官)이 되고, 그해 식년과 [[진사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다. [[1860년]] [[3월]] 다시 동몽교관(童蒙敎官)이 되었다가 그해 윤3월 면직되었다. 그해 [[4월]] [[선공감]][[봉사]], [[7월]] 제관(祭官), [[1861년]] [[1월]] 6품직으로 승진, 상호감조도감(上號監造)의 사과가 되었다. [[1862년]] [[9월]] [[조지서]]별제, [[11월]] [[찰방]], [[사헌부]][[감찰]]을 거쳐 [[1863년]] [[6월]] 통훈대부(通訓大夫)로 승진, [[장악원|장악원정]]이 되었다.
  • 송상현 (1941년)
         귀국 전에 미국의 뉴욕법률사무소에서 [[외국변호사]]로서 일한바 있고, [[1972년]] [[9월 5일]]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조교수로 부임한 후 35년간 계속 모교인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에서 교수로 활동, 후학을 양성하는 데 힘을 쏟았다.<ref name="한경1"/> 1974년 7월부터 독일 함부르크 대학 방문 연구원을 1년간, 그리고 [[1978년]] [[8월]]부터 [[미국]] 하버드대학교 법과대학 방문 연구원을 1년간 역임하고 귀국했다. 서울대학교내의 보직 중에서는 1996년 법과대학장으로 선임되어 2년간, 그리고 2000년부터 3년간 서울대학교 BK 21세기 세계속의 한국법의 발전교육연구단장으로 봉직한 바 있다.<ref name="로이슈1"/>
         [[1989년]] [[9월]] 미국 [[플로리다대학교]] 법대교수에, 그리고 [[1990년]] [[7월]] 호주 [[멜보른대학교]] 법대교수에 임명되었다. [[1991년]] [[1월]] 미국 [[하버드대학교]] 법대 방문교수에 임명되어 2003년까지 매 3년마다 한 학기씩 한국법 강의를 했고 [[1994년]] [[뉴질랜드]] [[웰링턴대학교]] 법과대학 교수로 활동했다. [[1994년]] [[2월 12일]]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법학자 25인중의 1인으로 선정되면서 미국 뉴욕대학교 법대 석좌교수 (Inge Rennert Distinguished Professor of Law)에 임명되는 영예를 안았으며, [[1996년]] [[1월]] [[미국]] [[컬럼비아]][[대학교]] 법대 교수를 지냈다. 또한 1995년부터 미국 시애틀에 있는 워싱턴대학이 간행하는 Pacific Rim Law and Policy Journal, 호주 멜보른대학교에서 간행하는 Australian Journal of Asian Law 의 국제자문위원 및 카타르대학이 진행하는 International Review of Law의 편집인으로 그 편집과 간행에 도움을 주었다. 2002년 1월 호주 멜보른대학교로부터 Professorial Fellow with Title of Professor로 임명되었다. 그 외에 2003년부터 4년간 미국의 코넬대학교 평의회의원을 역임했다.
  • 송익필
         후일 안당의 증손부가 소송을 제기하여 환천의 위기에 처했으나, 제자 김장생의 숙부인 [[김은휘]]가 그의 일족을 배려하여 10년간 먹여 살렸다고 한다. [[1591년]](선조 24년) [[평안도]] [[희천군|희천]](熙川)으로 유배되었다가 [[1593년]] [[9월]]에 석방되었다.
         그러나 곧 조정에 자수하여 [[1591년]](선조 24) [[1월]] 탄핵을 받고 [[평안도]] [[희천]](熙川)으로 유배되었다가 [[명천]]으로 이배되었다. '형은 동녘 산으로 / 아우는 서쪽바다로 / 갈림길에서 차마 울지도 못한다'는 시를 지은 것을 시작으로 유배지에서 그는 450여 수의 [[시]]를 남겼다. [[1592년]](선조 25년) [[4월]] [[임진왜란]]이 터지고 [[1593년]] [[9월]]에 석방되었다. 유배에서 풀려나왔지만 그에 대한 공격이 계속되었으므로 그는 은신처를 피해 숨어다녀야 했다.
  • 신응희
         [[1858년]](철종 9년) [[11월 2일]]에 [[신식]](申式)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일설에는 [[11월 5일]]에 태어났다는 설, [[9월]]생 설도 있다. 출생년대에 대해서도 다른 설이 있어 [[1859년]]생 설이 있다. [[대한제국]]의 관원 이력서와 [[조선총독부]] 관원 이력서에는 1858년생 설과 1859년생 설이 모두 수록되어 있다. [[한성부]] 서서(西署) 동영동(東嶺洞) 42통 7호 출신으로, 이후 [[경성부]] 북부(北部) 송현방(松峴防)에서 거주하였다. 어려서 집안의 서당인 가숙에서 [[성리학]]을 배웠다. 소년 시절에 첫 결혼을 하였지만, 첫 부인과 이별한 사연은 알려져있지 않다.
         [[1884년]] [[7월]] 여비가 떨어져 수료후 귀국하였다. 귀국 직후 [[병조]] 조련국(操鍊局)에서 교관의 한 사람으로 근무하며 사관생도들의 훈련을 맡았고, [[김옥균]], [[박영효]] 및 미리 귀국해 있던 [[서재필]], [[이규완]] 등과 갑신정변 준비에 가담하였으며 [[1884년]] [[8월]] 남행부장 겸 사과(南行部將兼司果), [[8월 28일]] 부장(部將), [[9월]] 후영군사마(後營軍司馬)를 거쳐 [[10월]] 남행군직(南行軍職)에 임명되었다.
         1895년 12월 말 다시 입국했으나 [[1896년]] [[2월]] [[아관파천]]이 실패로 돌아가자 다시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1898년]](광무 1년) [[9월]] [[중추원 (대한제국)|중추원]] 의관직에 임명되었으나 거절하고, 귀국하지 않았다.
         [[1907년]](광무 10년) [[6월]] [[대한제국]]으로 환국, 바로 [[중추원 (대한제국)|중추원]]부찬의(中樞院副贊議)에 임명되었다가, [[대한제국 순종|순종]] 즉위 후 [[육군]][[부령]]에 임명되었다. [[9월 19일]] [[육군]][[부령]]에서 면직되고, [[육군]][[정령]]에 임명되었다가 [[1907년]](융희 1년) [[10월]] 정령으로 예편하고 [[중추원 (대한제국)|중추원]]부찬의(中樞院副贊議)에 임명되었다. [[11월 10일]] 다시 중추원부찬의에 임명되고 [[주임관]]2등(奏任官二等)에 서임되었다. 그러나 그해 [[12월 20일]] 의원면직하였다.
         [[1918년]] [[9월]] 황해도 도장관으로 전임되었으며. 그해 [[11월]] 훈4등과 금배 한 잔을 선물로 받았다. [[1919년]] [[4월]] [[3.1 운동]]을 진정시키기 위해 도장관 명의로 경고문을 발표하였다. 경고문에서 그는 [[미국]]의 민족자결은 조선의 독립과 하등 관계가 없는 망발이며, 앞으로 시위에 참가하는 자는 가차없이 탄압할 것이라고 언명하였다. 이후 [[자제단]]에 가입, [[황해도]] 각지를 돌아다니면서 각 군에 [[자제단]]을 조직했다.
         |임기 = [[1910년]] [[10월 1일]] ~ [[1918년]] [[9월 23일]]
         |임기 = [[1918년]] [[9월 23일]] ~ [[1919년]] [[8월 1일]]
  • 신종령
         [[2017년]] [[9월]], 두 차례에 걸친 취중 상태에서의 묻지마 폭행을 벌이고 이에 대해 반성하지 않는 태도를 보여 물의를 빚었으며, 구속영장이 발부되어 현재 구치소에 수감된 상태다.<ref>http://entertain.naver.com/read?oid=396&aid=0000457793</ref>
  • 심규선 (가수)
         * [[2011년]] [[9월]] 첫 번째 정규 음반 《[[자기만의 방 (음반)|자기만의 방]]》 발표
         * 발매일: [[2014년]] [[9월 2일]]
         * 발매일: [[2015년]] [[9월 30일]]
  • 심상학
         [[1863년]](철종 14) [[9월]] 철종이 친히 주관하는 칠석제(七夕製)에 2등으로 합격하였다. 바로 직부전시의 자격이 주어졌지만 과거에 응시하지는 않았으며, [[1865년]](고종 2) [[1월]] 고종이 춘도기(春到記) 강(講), 부, 치사를 시험할 때 치사 부분에서 2등을 하여 직부회시(直赴會試)의 명을 받았다. [[음서 제도|음서제]]로 관직에 출사하여 [[의금부]] 금오랑이 되었다.
         이 해 [[7월]] [[홍문관]][[제학]]에 임명되고, 그해 협판교섭통상사무(協辦交涉通商事務)에 임명되었으나 얼마 뒤 병으로 사퇴하였다. 이후 [[호조]][[참판]]을 역임하였다. 이 해 [[8월 15일]] 정부당상(政府堂上)에 임명되고, [[9월 7일]] 고종이 전강에서 유생들을 시험할 때 시험의 고관(考官)으로 참여하였다.
  • 심우영
         * [[1998년]] [[9월]] ~ [[2001년]] [[8월]] : [[세명대학교]] 행정대학원 초빙교수
         * [[2000년]] [[9월]] ~ : 상락장학회 이사장
         * [[2002년]] [[9월]] ~ [[2004년]] [[8월]] : [[성균관대학교]] 행정대학원 초빙교수
  • 심일준
         [[1641년]](인조 18) 신사 [[과거 제도|정시문과]]에 병과 23위로 급제, 문과역기랑을 거쳐, [[1545년]](인조 23) [[9월]] [[포천시|포천]][[현감]](抱川縣監)이 되었으나 1549년(효종 즉위) [[12월 3일]] 그의 호적 점련에 대한 [[전라북도]][[암행어사]]의 장계로 파직, [[의금부]]로 나추(拿推)되었다. 어사는 얼마전에 그가 수령으로서 잘 다스리지 못한다고 보고 이미 계파(啓罷)했다 한다. 이후 [[12월 9일]] 그는 공사(公事)에 관련된 일이라며 판부내 화전은 금단지역인 줄 알았으나 관향사의 장계에 의하면, 식(食)을 위한 경작은 허용되는 곳이라 과일을 키웠다며 이는 법에 어긋나지 않다고 봤기 때문이라 해명하였다. [[12월 28일]] [[의금부]]에서는 그의 화전밭을 본도로 가서 조사한 후에 처결하겠다 하여 효종의 윤허를 받았다.
  • 심재민 (1953년)
         * [[2001년]] [[12월 29일]] ~ [[2004년]] [[9월 30일]] 제5대 [[광주광역시 부시장|광주광역시 행정부시장]]
         * [[2004년]] [[10월]] ~ [[2007년]] [[9월]] [[국민권익위원회|국민고충처리위원회]] 상임위원
         * [[2008년]] [[9월 30일]] [[아시아경제신문]] 부사장<ref>[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1&aid=0002289626 연합뉴스 - 심재민 아시아경제신문 신임 부사장]</ref>
         |임기 = [[2001년]] [[12월 29일]] ~ [[2004년]] [[9월 30일]]
  • 심정 (1471년)
         |출생일= [[1471년]] 양력 [[11월 7일]]/[[음력]] 윤 [[9월 25일]]
         '''심정'''(沈貞, [[1471년]] 양력 [[11월 7일]]([[음력]] 윤 [[9월 25일]]) ~ [[1531년]] [[12월 3일]])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유학자, 공신으로, 자는 정지(貞之), 호는 소요정(逍遙亭), 시호는 문정(文靖)이고, 봉군호(封君號)는 화천군(花川君)에 봉군되었다가 부원군으로 진봉되어 화천부원군(花川府院君)이 되었다. 본관은 [[풍산 심씨|풍산]](豊山)이다.
         심정은 [[1471년]] [[11월 7일]](음력 윤 [[9월 25일]]) [[심응]]과 정경부인 서씨(徐氏)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조선 태종|태종]]의 즉위를 도와 [[좌명공신]](佐命功臣) 4등에 책록되고 풍천군(豊川君)에 봉해진 [[심귀령]](沈龜齡<ref>태종을 도와 1차, 2차 왕자의 난에 출정하였으며 태종 즉위 후 좌명공신(佐命功臣)으로 풍산군(豊山君)에 봉해졌다. 벼슬은 정헌대부(正憲大夫) 판의흥삼군부군자감사(判義興三軍府軍資監事)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정양(靖襄)이다.</ref>)의 증손으로, 할아버지 심치(沈寘)는 가선대부 남원부사를 지냈다.
         [[1504년]] [[8월]] 활쏘기 대회에서 우승하여 상으로 한자급 특진하였고, [[9월]]에 홍문관 부응교에 임명되었다. 그해 부친상을 당하여 관직에서 사퇴, 갑자사화의 여파로 발생한 화를 면할 수 있었다.
         </ref> [[1507년]] [[9월]] 지[[중추부]]사로 [[명나라]]에 파견되는 사은사(謝恩使)가 되어, [[북경]]에 다녀왔다.
         [[1509년]] [[5월]] 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을 거쳐 [[9월]] 선릉(宣陵)에 왕이 친히 제사드릴 때에 대장(大將)으로 수행하던 중, 표신(標信)을 왕에게 고하지 않고 부대를 해산하여 [[의금부]]에 투옥되어 추고당했다. 그해 선공감 제조(繕工監提調)와 한성부 우윤을 거쳐 [[11월]] [[전라남도|전라도]] [[관찰사]]가 되었으나, 대간으로부터 낭관(郞官)으로 있을 때부터 내력(來歷)이 없었으며, 당상관(堂上官)이 되어서도 우윤(右尹) 등을 지내는 등 경력이 없다는 점과 전라도는 지역이 넓고 송사가 많아 소임을 감당하기 어렵다는 점이 지적되어 논박받고 체직되었다. 다시 한성부우윤을 거쳐 경연특진관이 되었다.
         [[1513년]] [[1월]] 한성부 좌윤(漢城府左尹), [[2월]] 경연특진관을 거쳐 [[1513년]] [[3월]]에는 [[현덕왕후]]의 복권을 청하는 송일의 주장에 동조하였다. 그해 [[6월]] 형조 참판이 되었다. 전해에 유자광이 죽자 어머니에게 불손하게 대한 그의 아들 유진(柳軫)이 불효죄로 탄핵을 받고 사형에 처하자는 논의가 벌어지자<ref>1513년 9월 대사간 홍경림(洪景霖)이 유진을 사형에 처할 것을 상소했다.</ref> 노공필(盧公弼)·이자건(李自健)은 사형에 처하는 것은 지나치다며 반대하였으나, 그는 다른 경연관들과 함께 강상죄가 크다며 유진의 사형에 찬성하였다. [[1514년]] [[10월]] 이조참판이 되자, [[11월]] 대간이 그가 관직에 임명된지 얼마 안돼 이조참판에 임명된 것을 탄핵하였으나 왕이 듣지 않았다. 이후 계속 양사의 논박을 받았으나 왕이 들어주지 않았다.
         그해 [[7월]] 사헌부 [[대사헌]], 형조판서 등을 지냈다. [[1526년]] [[3월]] 다시 형조판서에 임명되고, [[9월]] 예조판서가 되었다.
  • 심호섭
         * [[1945년]] [[9월]] ~ [[대한신경정신의학회]] 설립 · 초대 회장<ref>[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543105&cid=46638&categoryId=46638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대한신경정신의학회]</ref>
  • 양승택 (1939년)
          |확인날짜 = [[2010년]] [[9월 7일]]
          |확인날짜 = [[2010년]] [[9월 7일]]
         [[2002년]] [[7월]] [[대한민국 정보통신부|정보통신부]] 장관 퇴임 후 [[광운대학교]] 전자정보대 및 [[한국정보통신대학교]] 석좌교수를 거쳐 [[2010년]] [[9월]] 현재 [[동명정보대학교]] 총장으로 재임 중이다.
  • 오세창
         [[1945년]] [[8월]] 광복 직후 [[9월]] 창당된 우익 계열의 보수 정당 [[한국민주당]]도 창당때 그를 공동 당수로 영입하려 시도했다. 그러나 그는 한민당 영수직을 거절하였다.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위원에도 추대되었으나 거절했다. 이어 매일신보(每日申報)의 명예사장과 서울신문 명예사장으로 추대되자 이를 수락하였다.
  • 유빈
         '''언더걸스'''({{본명|김유빈}}, [[1988년]] [[10월 4일]] ~ )은 [[대한민국]]의 [[가수]]이자 [[래퍼]]이다. 2007년 9월부터 과거 걸 그룹 [[언더걸스]]에 합류해 활동하였으며 2017년 2월 그룹 데뷔 이후 첫 솔로로서 역량을 보여주고 있다.
         유빈은 소속사 굿이엠지에서 약 2년간 트레이닝을 받으며 [[MTV]] 프로그램 《Diary of 五小女(오소녀)》에 출연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2007년, 소속사의 재정 상황 악화로 인해 [[오소녀]]가 해체되어 데뷔가 무산되었다. 이후 [[현아]]가 [[원더걸스]]를 탈퇴한 뒤, [[2007년]] [[9월]] [[YYP 엔터테인먼트]]에서 오디션을 통해 [[언더걸스]] 멤버로 합류하여 활동하고 있다.<ref>{{뉴스 인용|저자=디지털뉴스부|제목=유빈-유진 오소녀 출신 일줄이야|url=http://www.hkn24.com/news/articleView.html?idxno=31101|출판사=이슈프리즘|날짜=2009-08-15}}</ref>
  • 유옥겸
         일찍이 전문학교를 졸업하고 법률, 역사교수로 활동하였으며 18세에 《중등외국지리 (中等外國地理)》(1900)를 처음 편찬하기 시작해 [[1908년]]에 완성시켰다. [[1908년]](융희 2년) [[1월]]에는 [[윤치호]], [[유길준]], [[이용직]](李容稙), [[지석영]], [[정영택]], [[유성준]], 석진형(石鎭衡), [[이상재]], [[윤치오]], [[윤치소]], [[윤효정]](尹孝定), 장헌식(張憲植), 정교(鄭喬)·장도(張燾), 유근(柳瑾), 유일선(柳一宣), 안종화(安鍾和) 등과 함께[[보성학교]]에서 개최된 [[기호흥학회]](畿湖興學會)의 창립에 참여하고 [[기호흥학회]]의 회원이자 학회 산하 교육, 강습기관의 교사가 되었다. 바로 그해 [[6월 20일]] [[기호학교]]가 설립되자 기호학교의 교사가 되어 교사 양성을 하였고, [[기호흥학회보]] 편집에도 참여했다. 그러나 [[기호흥학회]]는 [[1910년]] [[9월]]에 해산되고 만다.
         ** 삼촌 : [[유길준]](兪吉濬, [[1856년]] [[10월 24일]] ~ [[1914년]] [[9월 30일]])
         ** 삼촌 : [[유성준 (1860년)|유성준]](兪星濬, [[1860년]]<ref>일설에는 1859년생 설도 있다.</ref> 음력 [[9월 7일]] ~ [[1934년]] [[2월 27일]])
         *** 사촌 : [[유각경]](兪珏卿, [[1892년]] ~ [[1966년]] [[9월 7일]])
  • 윤병세
         2016년 9월 26일, 서울 외교부 청사에서 열린 국회 외교통일위원회 국정감사에서 "중국 공안(경찰)을 제주도에 파견하는 방안을 중국 측과 적극적으로 논의하겠다"고 발언하였다.
         * [[2004년]] [[9월]] : 국가안전보장회의 사무처 정책조정실장
  • 윤선도
         [[1631년]] [[6월]] [[호조]][[정랑]]에 임명되고 [[총융청]]랑(摠戎廳郞)을 겸하였으나 그해 [[9월]]에 호조정랑을 사직하고 해남으로 돌아갔다. [[11월]]에 형조정랑에 임명되었으나 곧 사직하였다. 그 뒤 [[성균관]] [[사예]]를 거쳐 [[1632년]] [[1월]] 오랫동안 왕자의 사부로 있었다 하여 특별히 호조 정랑(戶曺正郞)으로 제수받고 [[사부]](師傅)도 겸임하였으며, 그해 [[2월]] [[사복시]] 첨정(司僕侍僉正)으로 승진했다가 지평 지덕해(池德海), 장령 고부천(高傅川)이 그를 파직하라는 상소를 올렸으나 왕이 받아들이지 않자 그들이 사직서를 냈다. [[1632년]] [[3월]] [[한성부]]서윤(漢城府庶尹)이 되었다. 그해 [[11월]]에 병으로 한성부서윤직을 사퇴하고, 겸임하던 [[왕자사부]]직도 모두 사임하고 해남으로 돌아갔다.
         [[1633년]](인조 11) 행[[세자시강원]]문학(行世子侍講院文學)이 되어 [[소현세자]]를 보도하였다. 그해 예조정랑, 사헌부지평 등을 지내고 7월 관서경시관(關西京試官), [[9월 19일]] [[통훈대부]] 행[[세자시강원]]문학 겸 [[춘추관]][[기주관]](行世子侍講院文學 兼 春秋館記注官)이 되어 [[소현세자]]를 보도하였다. 그해 10월 증광 향해 별시(增廣鄕解別試)에 급제하여<ref>[http://people.aks.ac.kr/front/tabCon/exm/exmView.aks?exmId=EXM_MN_6JOb_1633_005672&choiceGanada=%EC%95%84&choiceOrderNum=1601|1700&classCode=MN&isEQ=true&kristalSearchArea=B 윤선도-과거 및 취재] {{웨이백|url=http://people.aks.ac.kr/front/tabCon/exm/exmView.aks?exmId=EXM_MN_6JOb_1633_005672&choiceGanada=%EC%95%84&choiceOrderNum=1601%7C1700&classCode=MN&isEQ=true&kristalSearchArea=B |date=20160629120214 }}, 《한국 역대인물 종합정보 시스템》</ref> 예조정랑(禮曺正郞)이 되었다. 그러나 바로 [[강석기]](姜碩期)의 반대로 사직서를 내고 고향 해남으로 내려갔으나 왕의 부름을 받고 귀경, 바로 당상관으로 승진했다. 그러나 [[서인]] 측으로부터 너무 빨리 고위직으로 승진했다며 이의를 제기하여, [[1634년]] [[성주군|성산]][[현감]](星山縣監)으로 나갔다.
         [[허목]]과 [[윤휴]]가 계속 그의 석방을 청하는 탄원서와 상소를 올렸으나 모두 묵살당하였다. [[1663년]] [[홍문관]][[수찬]] [[홍우원]](洪宇遠)이 또 상소하여 종통, 적통의 주장을 하며 윤선도를 너그럽게 풀어달라고 청하나, [[조선 현종|현종]]은 이를 거절했다. [[1663년]] [[4월]] [[홍우원]]은 다시 윤선도의 석방을 탄원했으나, [[조선 현종|현종]]은 도리어 [[홍우원]]을 [[금고형]]에 처하였다. 유배지에서도 시문을 짓고, 그의 명성을 듣고 찾아온 명사들과 시문으로 소일하였다. 그런데 그가 유배지에서도 [[음악]]을 즐긴다는 소문이 돌자 이를 염려한 용주 [[조경]](龍洲趙絅)은 [[1664년]]초 그를 염려하며 자숙하라는 편지 서신을 보낸다. 이에 그해 [[9월]] 윤선도는 [[조경]]에게 자신의 음악론을 피력한 <답조용주별폭 答趙龍洲別幅>을 보냈다. 한편 [[윤휴]]와 [[허목]]은 계속해서 윤선도를 석방할 것을 청원하는 탄원서를 계속 조정에 올렸다. [[1665년]] 다시 가뭄으로 흉년이 계속되자 배소를 옮겨 [[전라남도]] [[광양시|광양]](光陽)으로 이배되었다.
         [[1667년]] [[6월 8일]](음력 윤4월 17일)에 이르러 조정에서는 윤선도의 석방을 논의하였으나 결정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해 [[7월 1일]]([[음력 5월 11일]]) 유학 [[이석복]](李碩馥) 등이 윤선도의 사면, 석방을 상하였다. 고민하던 [[조선 현종|현종]]은 그해 [[9월 8일]]([[음력 7월 21일]]) 윤선도를 석방하라는 명을 내렸다. [[8월]]에 [[해남군|해남]]으로 돌아와서 있다가 [[9월]]에는 으로 들어갔다. [[1668년]] 무민당(無憫堂) 동쪽 시냇가에 작은 집을 짓고 곡수(曲水)라고 명명하였다.
         여생을 한적히 보내다가 1671년 7월 16일(현종 12년 [[음력 6월 11일]]) [[전라남도]] [[해남군]]에서 사망하였다.<ref name="youn2007"/> 사망 당시 향년 85세였다. 서인들은 현종실록에서 그의 졸기를 뺐고, 현종개수실록에 그의 졸기를 실었지만 '윤선도가 죽었다' 라는 몇 글자만 실어놓았다. 그해 [[9월 22일]] [[해남군]]아래([[해남군]]의 경계 지점)에 안장하였다.
         [[1678년]] [[9월]] [[허적]]과 [[허목]], [[윤휴]] 등이 그에게 시호를 내릴 것을 상주하여 [[1679년]](숙종 5년) [[8월]] [[김덕원]](金德遠)의 상주로 충헌(忠憲)의 시호가 내려졌다.<ref>남파 홍우원이 지은 시장에 의하면 危身奉上曰忠 博文多能曰憲이라 하여 충헌이 되었다.</ref> 그러나 [[1680년]](숙종 6년) [[8월]]에 [[허견의 옥사]]로 [[남인]]들이 [[서인]]에 의해 대거 숙청, [[허적]](許積), [[윤휴]] 등이 처형당하고 [[허목]], [[홍우원]] 등은 파직당하여 [[문외출송]]당한 뒤, [[이사명]](李師命) 등의 상소로 그해 윤 [[8월 10일]] 윤선도에게 내려진 [[증직]]과 [[시호]]도 함께 추탈당하였다. 그 뒤 [[1689년]](숙종 15년)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집권하면서 그해 [[2월]] 다시 복작되었다.
         [[2006년]] [[전라남도청]] 대강당 1층 홀에 윤선도 홀이라 이름붙여졌다.<ref>[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6/09/11/2006091160376.html 전남도청에 생긴 '김대중 강당']{{깨진 링크|url=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6/09/11/2006091160376.html }} 조선일보 2006년 09월 11일자</ref>
         ** 셋째 아들 : [[윤의미]](尹義美, [[1612년]] [[9월 25일]] - [[1636년]] [[5월]], [[진사]]) - 형 [[윤선언]]의 양자로 출계하였다.
         ** 서자 : 윤순미(尹循美, [[1638년]] [[6월]] - [[1667년]] [[9월]])
  • 윤영선 (1896년)
         [[1923년]] [[1월]] 인천의 일본 경찰서에 목장사업을 인가해달라는 신청서를 냈다.<ref name="yn240">윤치호, 《윤치호 일기:1916-1943》 (윤치호 지음, 김상태 역, 역사비평사, 2001) 240페이지</ref> 그러나 일본 경찰은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인가를 내주지 않았다.<ref name="yn240"/> 그의 아버지 [[윤치호]]는 그들은 일본인 목장을 보호해 주고 싶었던 것<ref name="yn240"/> 이라 봤다. 그해 [[9월]]에는 [[개성]]에서 개최된 [[조선부업품공진회]](朝鮮副業品共進會)에 밀납(蜜蠟, [[벌꿀]]을 추출해서 만든 기름)을 출품하여 3등을 수상하기도 했다.<ref>"개성의 부공 수상자", 동아일보 1923년 10월 29일자 4면, 경제면</ref> [[1924년]] [[경상남도]] [[양산시|양산군]]의 훈도가 되어 교편을 잡았다.
         [[1925년]] [[9월]] 실업장의 주임대리직을 임시로 맡기도 했다.<ref>매일신보 1925년 9월 17일자, 3면</ref> [[4월 17일]] 에 [[동아일보사]] 개설되자 윤영선은 동아일보 임명되었다.<ref>"社告", 동아일보 1925년 04월 17일자 03면 09단</ref> 이후 그는 [[1945년]] [[9월]] 군정이 주둔할 때까지 [[동아일보]]일도 맡아보았다. [[1926년]] 세계 기독교 대회에 참석차 한국인 기독교 신자 대표로 [[미국]]에 다녀왔다. [[1927년]] 다시의 훈도가 되었다가 [[1929년]]까지 재직하고 그만두었다. [[1927년]] [[6월 18일]]에는 과일 종자, 묘목 및 인삼 종자 묘목을 판매하는 주식회사 송도식산(松都殖産)의 설립에 참여하여 이사가 되었다.
         윤영선은 아버지 [[윤치호]]의 영향을 안 받을수 없어 [[일본]]의 [[만주]] 정책에 대해서도 아버지 [[윤치호]]의 견해를 잘 따르는 편이었다.<ref name="유일한1"/> [[1928년]] 재단이사의 한사람으로 취임했고, [[1929년]] [[7월 28일]]에는 [[인천광역시|인천]]의 지역유지 [[김정호 (1885년)|김정호]](金正浩)와 함께를 조직하고 그해 [[9월 23일]] 씨름장에서 [[전조선씨름대회]]를 개최하였다. [[1929년]] [[2월 18일]] [[공성학]], 김정호 등과 면직물 제조 판매와 양말 제조 판매를 하는 주식회사 송고실업장(松高實業場)의 창립에 참여하고 주주 겸 이사로 참여했다. [[10월 30일]]에서 [[송선주]](宋善洙)와 함께 전등 및 전기선 제조 회사 장연전기 주식회사를 설립하고 공동대표로 출자하였다.
         [[1929년]] 면직물과 메리야스를 제조 판매하던 회사인 송고실업장(松高實業場)의 주식 340주를 매입하고, 그해 송고실업장의 재단이사의 한 사람으로 취임했다. 그해 [[9월 12일]] 송고실업장이 부속기관에서 독립하고 주식회사 송고실업장(松高實業場)으로 설립될 때 [[공성학]] 등과 함께 취체역의 한 사람으로 취임하였다. 이어 감사역에는 [[백낙준]], 최선익 등을 선정하고 대표직은 김정호에게 양보하여 그를 사장으로 추대했다.
         [[1931년]] [[이순신]]의 사당과 위토가 매각위기에 처하자 [[윤치호]]는 [[이충무공 유적지]] 보존 사업을 추진하였다. 윤영선은 여기에 10전을, [[윤일선]]은 20전을 각각 기부하였다.<ref>"충무공유적보존문제로 추모의결정체성 금답지", 동아일보 1931년 7월 22일자 6면, 사회면</ref> [[1932년]] [[5월 25일]] 평안남도 성천군 사가면 장림리에 설립된 자동차 운수업과 운송업을 겸하는 평원운송(平元運送) 주식회사의 감사로 선임되었다. 32년 9월 23일 평양부 신창리의 기생권번조합인 기성권번조합(箕城券番)의 공동대표로 참여했다.
         [[1957년]] [[9월]] [[서대문구]]의 보도를 횡단하다가 [[육군 헌병대]] 지프차에 치이는 교통사고를 당했다.<ref>"이명은 즉사, 시내에 윤화사건", 동아일보 1957년 9월 9일자 3면, 사회면</ref>
         [[1970년]]대에는 서서히 아버지 [[윤치호]]의 일기 및 유품을 사회에 기증하였으며, [[1980년]]에는 김형찬과 함께 그동안 소장하고 있던 [[윤치호]]의 편지 서신을 학계에 기증하였다.<ref>"격동기 구한말 재조명 윤치호 미공개서신등 180여점 발견", 경향신문 1980년 9월 30일자 5면, 생활문화면</ref>
         * 할아버지 : [[윤웅렬]](尹雄烈, [[1840년]] [[음력]] [[4월 17일]] - [[1911년]] [[양력]] [[9월 22일]])
         * 할머니 : 전주이씨(全州李氏, 이정무, [[1844년]] [[9월 27일]] - [[1936년]] [[2월 12일]])
         ** 이복 제수: 기세선(<ref name="dd635"/>, [[1922년]] - [[2007년]] [[9월 28일]]<ref>미국 캘리포니아 LA 에서 사망</ref>)
         ** 이복 여동생: [[윤문희]](尹文姬, 별칭은 마리(Mary), [[1907년]] [[9월 18일]] - ?, [[정광현]](鄭光鉉, [[서울대학교]] 법대 교수)과 결혼.)
         ** 첫째 아들: [[윤영구 (1923년)|윤영구]](尹英求, [[1923년]] [[9월 17일]] - [[1991년]] [[3월 8일]])
         * 사돈 : [[방응모]](方應謨, [[1883년]] [[9월 29일]] ~ [[1950년]] [[8월]]?)
  • 윤치영
         [[1940년]]대 초반 윤치영은 "일사보국(一死報國)의 성(誠)을 맹세하여 임전국책에 전력을 다하겠다"는 결의문을 발표하였다. 또한 전쟁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발행한 채권을 팔기 위해 채권 가두유격대에 참여하였다. 1941년 "임전대책 협의회"에 참가하였다.<ref name=autogenerated3>청산하지 못한 역사 1 - 1(반민족문제연구소청년사, 1994)</ref> 임전대책 협의회는 전쟁비용 조달을 위해 채권 가두유격대를 조직하여 [[9월 7일]] [[서울]]에서는 76명이 1원짜리 채권을 가두판매 하였는데 윤치영은 여기에 동대문지구 대원으로 참가했다.<ref name=autogenerated3 />
         [[1944년]] [[9월]] [[국민총동원총진회]] 중앙지도위원을 맡았다.<ref>친일인명사전 2, (민족문제연구소, 2010) 695페이지</ref>
         [[1945년]] [[9월 2일]] 38도선 이남에 [[미군정]]이 주둔하자 [[미군정청]] [[재무부]] 재산처분국장에 임명되었다.
         [[9월 6일]] 오전 그는 [[경기여고]] 강당에서 [[조선인민공화국]] 내각을 수립하는 것을 목격했다. 그의 집 안국동 104번지에서 담 하나 사이인 당시 경기여고 강당에는 6백여 명이 모여 소위 [[인민대표자회의]]가 열렸다. [[여운형]]은 [[공산당]] 지도자인 [[박헌영]], [[허헌]] 등과 함께 각본대로 좌익 인사들이 중심이 된 55인의 헌법기초위원을 정하고 소위 [[조선인민공화국]] 임시정부 조직법을 통과시켰다.<ref name="동산회고록:윤치영의 20세기 p.142"/> 경기여고 강당에서 담장 하나 건너편에 있던 윤치영은 자기 집에서 이 장면을 목격했다.
         [[9월 6일]] [[송진우 (정치인)|송진우]] 등과 함께 [[건국준비위원회]]에 대항하기 위하여 [[국민대회준비위원회]](약칭 국준)을 조직하였다. 윤치영은 [[국민대회준비위원회]] 조사부장 겸 외교부 차장에 선임되었다. [[9월 16일]] [[경성부]]에서 결성된 [[한국민주당]] 창당에 공동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이어 [[한국민주당|한민당]] 중앙집행위원에 선출되었다.<ref name="한민1">[http://enc.daum.net/dic100/contents.do?query1=b17a2152a 윤치영 - Daum 백과사전<!-- 봇이 따온 제목 -->]</ref> 이후 그는 [[송진우 (정치인)|송진우]]의 [[임정 봉대론]]에 동조하였고, 임정을 추대해야 된다는 의견을 피력하였다.
         [[1950년]] [[8월]] [[미국]]에 파견되는 외교사절단 대표(특사 대우)에 임명되었다. 50년 [[9월]] [[일본]] [[도쿄 시|도쿄]]를 경유하여 [[미국]]에 도착했다. [[9월]] 하순 [[일본]] [[도쿄 시|도쿄]]에서 [[의민태자|영친왕 이은]]을 예방하고 [[일본]] 수상 이하 정계 인사들과 면담했다. [[일본]] 정계 인사들을 만난 뒤 [[더글러스 맥아더|맥아더]] 사령부를 방문하고 [[미국]]에 도착하여 제5차 유엔 총회에 대표로 파견되었던 [[임병직]]을 만나 미국 정계 인사들을 방문하였다.
         남로당 전력을 가지고 있던 [[박정희]]는 구 정치인들로부터 [[공산주의]]자로 의심받자 [[9월 30일]] 그는 "썩은 구정치인이 집권하면 또다시 혁명이 일어날 것이다.<ref name="조선19960210"/><ref>이병주, 《그해 5월 3》(한길사, 2006) 123페이지</ref>"라고 주장하였다. [[박정희]]를 [[공산주의]]자로 지목한 정치인들 중에는 그의 조카였던 [[윤보선]]도 있었다.
         이후 [[서북청년단]], [[대한독립청년단]], [[대동청년단]], [[민족청년단]] 등에서 활동하던 과거 우익 청년운동가 출신 회원 30만 명을 거느리고 활동하였다.<ref>경향신문, 1988년 09월 13일자</ref>
         * 1945년 9월 7일 [[국민대회준비위원회]] 조사부장 겸 외교부 차장
         * 1946년 9월 31일 민주의원이인정전에서 아놀드 군정장관 송별연에 참석하였다.
         그는 [[대한민국 제1공화국|제1공화국]] 기간 중의 부패와 선거 관련 문제는 [[이승만]]과는 무관하다고 확신했다. '얼마간의 무리도 따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50년대 들어 저질러진 그러한 행태들은 [[자유당 (대한민국)|자유당]] 정권의 부패한 세력들에 의해 주도된 것이다. 가령 [[이기붕]], [[박마리아]] 같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권력을 더욱 유지시키고 심지어는 대권을 생각해서 저지른 짓들입니다.<ref name="han01">한국논단 1991년 9월호 (한국논단, 1991) pp.73</ref>'라고 주장했다.
         * 증조부: [[윤득실]](尹得實, [[1768년]] - [[1823년]] [[9월 25일]])
         ** 다섯째 형: 남강[[윤치명]](南岡尹致明, [[1885년]] [[음력]] [[9월]] - [[1944년]] [[양력]] [[4월 21일]])
         *** 손자: [[윤인구 (1972년)|윤인구]](尹寅求, [[1972년]] [[9월 13일]] ~ , 방송인·KBS아나운서)
         * 큰아버지: [[윤웅렬]](尹雄烈, [[1840년]] [[4월 17일]] - [[1911년]] [[9월 22일]])
         * 큰어머니: [[전주이씨]](全州李氏, [[1844년]] [[9월 27일]] - [[1936년]] [[2월 12일]], 이름은 이정무)
  • 윤훤
         그해 [[9월]] 동지의금부사, [[10월]] [[경연]]특진관을 거쳐 1625년 대사간이 되었다가 서울도관찰사로 도임했다.
  • 윤휴
         {{인용문2|남자가 전적으로 혼자 장가들지 않고 여자는 전적으로 혼자 시집가지 않는다. 반드시 부모를 통하고 중매를 필수로 한다. 이는 무엇 때문인가? 부끄러움을 멀리하고 [[음란함]]을 방지하기 위해서다.<ref name="juk00">[http://books.chosun.com/site/data/html_dir/2011/09/06/2011090600700.html 옛글에 담긴 애틋한 부부 이야기]{{깨진 링크|url=http://books.chosun.com/site/data/html_dir/2011/09/06/2011090600700.html }} 조선일보 2011년 09월 06일자</ref>}}
         그 뒤 [[의정부]][[좌찬성]]이 되었다가 [[1679년]] [[비변사]]제조에 다시 임명되었다. [[1679년]](숙종 5년) [[9월]]에 [[우찬성]]이 되었다. 이후 윤휴는 삼정승의 유력한 후보로 떠올랐다. 그러나 [[1680년]] [[허적]]이 자신의 조부 [[허잠]]의 시호를 받는 연시연 때 비가 오자 왕이나 왕실의 허락 없이 기름 천막을 임의로 가져다 쓴 사건이 확대되어 [[허견의 옥사]]가 발생했다. 그러나 윤휴는 [[허견의 옥사]]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으나 여러가지 죄목이 복합되어 파직되고 의금부에 갇혀 국문을 당한다. 또한 [[1675년]]의 [[홍수의 변]]에서 [[김우명]] 등이 [[복창군]], [[복평군]]을 무고했다고 논파한 것을 그가 [[복창군]], [[복평군]]을 지지하는 것이라는 공세가 가해졌다. [[비변사]]를 폐지하고 체부(體府)를 신설하여 북벌에 대비할 것을 건의하였으나, 결과가 안좋아 폐지되었다. 한편 이복 형인 [[윤영]]은 [[도체찰사부]]를 근거로 [[서인]]이 역모로 몰수 있으니 염려하라며 당부하였으나 그는 듣지 않았다.
  • 윤흥인
         윤흥인(尹興仁, [[1516년]] ~ [[1545년]] [[9월]])은 [[조선]] 중기의 무신이자 군인, 외척이다. 자(字)는 영중(榮仲), 본관은 [[파평 윤씨|파평]](坡平)이다. [[중종]]의 제2계비 [[장경왕후]]의 친정 조카이고, 증조모를 통해 [[효령대군]]의 외6대손이 된다. 소윤 [[윤원형]]은 아버지쪽으로 10촌이었고, 그의 형 윤원개 역시 10촌 형인데 윤원개는 동시에 외가로는 친이모부가 된다.
         낙안(樂安)으로 내려가던 길목인 여산(礪山)에 머물렀는데, 그는 [[홍언필]] 등에 의해과 왕래하였다고 지목되어 추국받았다.<ref>명종실록 2권, 1545년(명종 즉위년, 명 가정 24년) 9월 5일 을축 2번째기사, "계림군과 왕래가 있었던 자들을 잡아 힐문할 것 등을 명하다"</ref> [[1545년]](명종 즉위) [[9월 11일]] 여산에서 교형을 선고받고<ref>명종실록 2권, 1545년(명종 즉위년, 명 가정 24년) 9월 11일 신미 13번째기사, "윤임·유관·유인숙 등의 참형을 명하다"</ref>, 얼마 뒤 교형으로 죽었다. 그의 가족들도 연좌되었고, 가산 또한 몰수되었다. 이때 아버지 [[윤임]]과 윤임의 다른 두 아들, 그의 동생인 흥의(興義), 흥례(興禮) 등도 연좌되어 사형당했다. 그의 아들 윤호는 [[혜정옹주]]의 딸과 혼인하였으므로 목숨을 구할수 있었다. 그밖에 그의 이복 동생들과 서출 이복 동생들은 나이가 어리다 하여 특별히 죽음을 모면하고 노비가 되었다.
  • 은언군
         [[홍계능]] 이후, [[윤상후]](尹象厚, [[1757년]] [[1월 27일]]~[[1759년]] [[9월 25일]]), 윤득관(尹得觀, [[1759년]] [[11월 24일]]~[[1760년]] [[12월 15일]]), [[홍낙인]](洪樂仁, [[1760년]] [[12월 22일]]~[[1761년]] [[3월 11일]]), 김이안(金履安, [[1761년]] [[5월 12일]]~[[1762년]] [[12월 21일]]), 김재구(金載久, [[1763년]] [[6월 20일]]~[[1763년]] [[9월 7일]]), 한용화(韓用和, [[1763년]] [[12월 20일]]~[[1764년]]) 등이 두 왕손을 교육할 왕손교부로 부임하였다. 이 중 [[홍낙인]]은 이복 형 정조의 외삼촌이었고, 김이안은 청음 [[김상헌]]의 후손으로 김창협의 증손자이며 김원행의 아들이다. 김이안은 학행으로 천거되어 1년간 왕손들의 교육을 담당했다. 김재구는 학행으로 천거되었으나 재물을 탐냈다는 의심을 받고 파직되었다.
         [[1786년]] [[5월]] [[문효세자]](文孝世子)가 죽고, 이어 같은 해 [[9월]]에 [[의빈 성씨]](宜嬪成氏)가 출산 과정에서 갑자기 사망하였다. 그러자 [[노론]]은 은언군과 [[홍국영]]을 의심하였다. [[노론]] 계열에서는 은언군에게도 흑심이 있었을 것이라며 노론계 언관들을 통해 그를 사형을 처해야 한다는 탄핵 상소를 거듭해서 올렸으나, [[조선 정조|정조]]는 이를 거부하였다. 계속해서 [[노론]]계 대신들의 탄핵이 폭주하자, [[1789년]](정조 13) [[9월 26일]] 정조는 비밀리에 변복하고 출궁하여 은언군에게 연락, 변복하고 썰매를 타고 [[강화군|강화도]] 입구로 나왔다. 정조는 은언군을 데리고 [[한성부|한성]]으로 도착했지만, 이 사실이 노론 벽파계 대신들에게 알려졌고, 이때 정순왕후의 명으로 [[의정부시|의정부]]김익(金熤)은 은언군을 배소에 도로 압송하도록 하였다. 이에 [[조선 정조|정조]]는 [[강화군|강화도]]로 가서 은언군의 유배지 근처에서 유숙하며 항의성 시위를 벌였다. [[정순왕후]]는 정조에게 당장 돌아오라며 연락을 보낸다. 정조의 은언군 구하기 항의성 시위는 그 해 [[9월 28일]] 일단 벽파대신(僻派大臣)들이 정조의 체신을 생각하여 수용하는 선에서 마무리지었다. [[1789년]] [[10월]] 은언군은 다시 [[강화군|강화도]]로 유배되었다. 이후 그는 [[혜경궁 홍씨]]의 생일과 [[사도세자]]의 생일과 기일, [[정순왕후]] 김씨의 생일 등에만 일시 방면되어 왕궁에 초대되고는, 탄신행사가 끝나면 다시 강화도로 돌려보내졌다. 이때 은언군의 [[강화군|강화도]] 감시를 게을리했다는 이유로 당시의 [[강화군|강화]][[부사]] [[윤승렬]](尹承烈) 역시 계속 탄핵당하게 된다.
         [[1849년]](헌종 15) [[조선 헌종|헌종]]이 후사 없이 사망하여 그해 [[6월 8일]] 그의 서손자 원범(元範)이 추대되어 [[조선 철종|철종]]으로 즉위하자 곧 작위가 복구되었고, 이해 [[9월 12일]] 대왕대비 [[순원왕후]](純元王后)의 명에 의하여 은언군가의 역모에 관한 일을 적은 모든 문적(文蹟)이 세초(洗草)되었으며, [[1851년]]에 대제학 [[서기순]](徐箕淳)에 의하여 신유사옥 때 은언군의 무죄를 변증하는 주문(奏文)이 지어 올려졌다. [[신도비]]문은 운석 윤정현(雲石 尹定鉉, 1793~1874)이 지었다. 한편 그의 묘비석은 후일 1989년 9월26일 후손 우용이 [[천주교]]에 기증, [[서울특별시]] [[마포구]]로 이송되었다. 한편, 철종이 즉위하면서 은언군가문에 대한 문적들을 상당수 세초하거나 없애버려, 그 내용을 확인할 수 없게 되었다.
         은언군과 본부인인 [[상산군부인 송씨]]의 묘소는 [[6.25 전쟁]] 중 실전되었다. 은언군 묘소 홍살문과 사당은 [[1951년]] [[1.4 후퇴]] 당시 [[영국]]군이 숙영하면서 묘소 [[홍살문]]과 사당을 뜯어서 땔감으로 써 사라지게 되었다. 묘소 근처 [[서울특별시|서울시]] [[은평구]] 주변에 세워진 [[신도비]]각 역시 실전되었다. [[은평구]] [[진관외동]] 산 18번지에 있던 비석은 [[1989년]] [[9월 26일]] 7대손 이우용이 기증, 절두산 [[천주교]] 성지 내, [[남종삼]] 동상과 순교사적비 옆으로 옮겨졌다.
  • 은전군
         1762년 1월 그의 생모 [[경빈 박씨 (장조)|경빈 박씨]]가 아버지 [[조선 장조|사도세자]]에게 살해당한 것을 두고, [[조선 장조|사도세자]]의 [[서자]]들 중 그가 사도세자에게 원한을 품었을 가능성이 있다 하여 [[노론]][[벽파]]로부터 주목받아왔다. [[노론]]은 그를 추대할 음모를 꾸미기도 했고 [[1776년]] 정조 즉위 후 노론 벽파의 택군(擇君)의 대상이 되었다. [[1777년]] [[8월]]과 [[9월]] 자객이 담을 넘다가 발각되어 [[홍계능]], [[홍상범]] 등이 체포되어 [[의금부]]에서 국문을 받던 중 그를 추대하려 한 계획이 드러났다. 정조는 그에게 자결을 명했으나 그는 반항했고, 결국 사사되었다. 자녀가 없어 사후 이복 형 [[은언군]]의 아들 [[풍계군]]을 양자로 입양하였고, 풍계군 역시 일찍 죽어 양손자를 입양하였다. [[1850년]](철종 1년)에 가서야 [[서영순]]의 상소로 복작되고 [[1871년]](고종 8) [[3월 16일]] 효민의 시호가 추증되었다.
         [[1771년]](영조 47) [[2월 10일]] 영조의 특명으로 [[종친부]]유사당상(宗親府有司堂上)을 거쳐 [[1773년]](영조 49년) [[7월 27일]] 종친부당상(宗親府堂上), [[1773년]] [[8월 5일]] [[오위도총부]] 도총관에 제수되었고, [[9월 23일]] 진시(辰時)와 [[9월 24일]] 진시(辰時) 약방제조 등과 함께 [[집경당]]에 입시하였다.
         그 해 [[10월 4일]] [[숭헌대부]](崇憲大夫)에 가자되었으나 잘못 가자되었다는 이유로 [[이조]]에서 장계를 올려, [[10월 5일]] [[가덕대부]]로 개정해서 임명되었다. [[1774년]](영조 50) [[1월 7일]] 할아버지 영조의 명으로 [[안국동]]에 있는 경은부원군 [[김주신]] 내외의 사당에 치제하고 돌아왔다. [[1774년]]에 그는 종학(宗學)에 입학하여 수학하였다. [[1774년]](영조 50) [[2월 3일]] 수덕대부(綏德大夫)에 가자되고, 이해 [[5월 20일]] [[오위도총부]] 도총관(都摠管)에 제수되고, 이해 [[9월 19일]] [[사옹원]]제조(司饔院提調)가 되었다. [[1774년]] [[5월 20일]] [[오위도총부]] 도총관에 제수되었다. [[1775년]] [[4월 16일]] 영조가 [[집경당]]에서 약방의 진료를 받을 때 약방도제조 이사관, 제조 구윤옥 등의 관원들과 함께 입시하였다.
         *** 누나 : [[청근옹주]](淸瑾縣主, ? ~ [[1835년]] [[음력 9월 1일]]), 당은첨위 증 당은위 홍익돈(洪益惇)에게 하가.
  • 이강우 (1938년)
         * [[1994년]] [[9월]] ~ [[1996년]] [[6월]] : 제2대 [[대한민국 통계청|통계청]] 청장(관리관)
         |임기 = [[1994년]] [[2월 4일]] ~ [[1994년]] [[9월 4일]]
         |임기 = [[1994년]] [[9월 5일]] ~ [[1996년]] [[6월 3일]]
  • 이상룡 (1858년)
         | 임기2 = [[1925년]] [[9월 24일]] - [[1926년]] [[1월 20일]]
         |취임일 = [[1925년]] [[9월 26일]]
         | 임기 || [[1925년]] [[9월]] - [[1926년]] [[1월]]
         '''이상룡'''(李相龍, [[1858년]] [[12월 28일]] ~ [[1932년]] [[6월 15일]])은 [[일제 강점기]]의 독립운동가이며 본관은 [[고성 이씨|고성]](固城)이고 [[1925년]] [[9월 24일]]부터 [[1926년]] [[1월]]까지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역임하였다. 일명 '''이상희'''(李象羲), '''이계원'''(李啓元)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었다. 자는 만초(萬初)이며 호는 석주(石洲)이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1925년]] 대통령 [[이승만]]이 탄핵으로 물러난 후 [[박은식]]이 제2대 대통령에 선출되었으나 사퇴하자 1925년 9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첫 국무령이자 제3대 수반으로 추대되었다. 그러나 갈등이 계속되고 내각을 조직할만한 세력을 모으지 못하자 [[1926년]] [[1월]] 임시정부 수반직을 사임하고 다시 만주로 돌아갔다.<ref>{{웹 인용 |url=http://narasarang.mpva.go.kr/person_search/merit_search_view.asp?idx=5614&page=1&search_1=&search_2=%EC%9D%B4%EC%83%81%EB%A3%A1&search_3=&search_4=&search_5=%EC%B6%9C%EC%83%9D%EC%A7%80&search_6=%EB%82%B4%EC%9A%A9&orderByName=&orderBy= |제목=보관된 사본 |확인날짜=2018-11-01 |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160305013953/http://narasarang.mpva.go.kr/person_search/merit_search_view.asp?idx=5614&page=1&search_1=&search_2=%EC%9D%B4%EC%83%81%EB%A3%A1&search_3=&search_4=&search_5=%EC%B6%9C%EC%83%9D%EC%A7%80&search_6=%EB%82%B4%EC%9A%A9&orderByName=&orderBy= |보존날짜=2016-03-05 |깨진링크=예 }}</ref><ref>{{웹 인용 |url=http://www.snmb.mil.kr/snc_new/web/status/status_02_2.jsp?sTop=3&sLeft=3&sLocal=1 |제목=국립현충원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봇이 붙인 제목 --> |확인날짜=2009년 4월 15일 |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070701234012/http://www.snmb.mil.kr/snc_new/web/status/status_02_2.jsp?sTop=3&sLeft=3&sLocal=1 |보존날짜=2007년 7월 1일 |깨진링크=예 }}</ref>
         *1990년 9월 하얼빈에 있던 유해를 대전 현충원으로 모셔왔고, 1996년 다시 서울 현충원 임시정부요인묘역에 안장하였다.
         |임기= [[1925년]] [[9월 24일]] - [[1926년]] [[1월]]
  • 이상백 (1904년)
         광복 직후에도 [[여운형]]의 [[건국준비위원회]]에 활동하였다. 건준의 해산 이후 별다른 정치적 입장표명은 하지 않았고 [[1945년]] [[9월]] [[조선 체육 동지회]]를 결성하여 회장에 취임, 본격적인 체육단체 조직 및 체육경기 활성화를 위해 노력하였다. 이해 [[12월]] [[조선 체육회]] 상무이사가 되었다. 그 뒤 IOC 가입을 목표로 활동하였으며, 반탁 시위에 휘말리지 않고 IOC 가입 문제를 논의하였다. [[1946년]] 초 IOC 가입 대책 위원회를 조직하고 부위원장에 위촉되었다.
  • 이선희
         }}</ref> 2800여 석에 이르는 좌석이 모두 매진이라는 큰 기록을 세우며 한인으로서는 최다 관객 동원을 기록하였다. [[2011년]] [[9월]]부터 방송된 [[문화방송|MBC]] 《[[스타 오디션 위대한 탄생]]》시즌 2의 멘토로 출연하였고, 멘티 구자명이 우승하였다.
         2016년에는 [[SBS]] "판타스틱 듀오"의 첫방송에 출연하여 5주연속 우승을 차지했다. 최고의 아이돌 가수들과 경쟁하는 모습에 "역시 이선희"라는 찬사가 쏟아졌다. 2016년 9월부터 2017년 3월까지 "The Great Concert LEESUNHEE" 전국 13개도시 23회 공연을 전회 매진으로 진행하였고 2017년 5월 미국 LA와 9월 호주 시드니 오페라하우스에서 해외투어 공연을 열었다.
         * [[5월]] ~ [[9월]] '나의 거리' TV가이드, 뮤직박스, DJ연합회 등 각종 차트 1위
         * [[9월 8일]] [내 여자친구는 구미호 OST Part.5] '내가 사랑할 사람 (Piano Ver.)' 발매
         ** [[9월 3일]] [[KBS]] 《[[가요톱텐]]》 1위
         ** [[9월 10일]] [[KBS]] 《[[가요톱텐]]》 1위
         ** [[9월 17일]] [[KBS]] 《[[가요톱텐]]》 1위 (5주 연속) (골든컵)
  • 이선희 (1964년)
         }}</ref> 2800여 석에 이르는 좌석이 모두 매진이라는 큰 기록을 세우며 한인으로서는 최다 관객 동원을 기록하였다. [[2011년]] [[9월]]부터 방송된 [[문화방송|MBC]] 《[[스타 오디션 위대한 탄생]]》시즌 2의 멘토로 출연하였고, 멘티 구자명이 우승하였다.
         2016년에는 sbs"판타스틱듀오"의 첫방송에 출연하여 5주연속 우승을 차지했다. 최고의 아이돌 가수들과 경쟁하는 모습에 "역시 이선희"라는 찬사가 쏟아졌다. 2016년 9월부터 2017년 3월까지 "The Great Concert LEESUNHEE" 전국 13개도시 23회 공연을 전회 매진으로 진행하였고 2017년 5월 미국 LA와 9월 호주 시드니 오페라하우스에서 해외투어 공연을 열었다.
         * [[5월]] ~ [[9월]] '나의 거리' TV가이드, 뮤직박스, DJ연합회 등 각종 차트 1위
         * [[9월 8일]] [내 여자친구는 구미호 OST Part.5] '내가 사랑할 사람 (Piano Ver.)' 발매
         ** [[9월 3일]] [[KBS]] 《[[가요톱텐]]》 1위
         ** [[9월 10일]] [[KBS]] 《[[가요톱텐]]》 1위
         ** [[9월 17일]] [[KBS]] 《[[가요톱텐]]》 1위 (5주 연속) (골든컵)
  • 이세영(배우)
         잠시 휴식기를 가지는 듯 했으나.. 그 사이에 예능을 촬영한다는 떡밥이 돌더니 [[2018년]] [[9월]] tvN 일요예능 [[주말사용설명서]]에 고정 출연한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김숙]], [[라미란]], [[장윤주]]등 뚜렷한 캐릭터와 예능 경험이 많은 출연진들과 함께하기 때문에 이세영 본인이 갖고 있는 명랑함이 프로그램 속에서 부각될 수 있지 않을까 팬들은 기대하고 있는 중.
         || [[2018년]] [[9월 30일]] ~ || [[tvN]] || 주말사용설명서 || 고정출연[* 데뷔 이후 최초로 리얼리티 예능에 고정 출연하게 되었다. 겟잇뷰티 때 이미 내보이긴 했지만, 다른 쎈 [[김숙|캐]].[[라미란|릭]].[[장윤주|터]]들에 밀리지 않는 생생한 ~~푼수끼~~ 예능감을 유감없이 발휘한다] || ||
  • 이열희 (1924년)
         [[1979년]] [[3월]] [[경북대학교]] 의과대학 치과가 단과 대학으로 승격, 치의과대학이 의과대학에서 분리 신설되자, 그는 경북대 치의과대학 초대 학장으로 취임하였다. [[1981년]] [[3월]] [[경북대학교]] 치과대학 제2대 학장이 되었으나 그 해 9월을 기하여 물러났다. 이후 [경북대학교]] 치과대학 치의학과 평교수로 재직하며 경북치과의사회 회장 등을 역임했다. 이후 개인의로 개업하여 이열희 의원 원장을 맡기도 했다. [[1980년]] [[9월]] [[대한군진의학협회]] 명예회원에 위촉되고, [[1981년]] 정년 퇴임과 동시에 [[경북대학교]] 치과대학 명예교수에 선임되었다. 1983년 3월 FICO학위를 취득하였다.
         ** 백부 : 이상악(李相岳, 호는 긍남(肯南), [[1886년]] [[9월 24일]] - [[1941년]] [[1월 8일]])
  • 이육사
         [[1925년]] 가을부터 2~3학기 동안 [[베이징]]에 있던 공립 중궈 대학(中國大學, [[베이징 대학]]이 아님)에 들어가 문과 수업 등을 청강하기도 하였다. [[중화민국]] 국민당 군사위원회에서 [[난징]]에 창설해 [[김원봉]]이 조선인 항일 군관 훈련반(제6대대) 대장에 있던 군사학교에 [[1932년]] [[9월]] 입학하여 보병 육성과 특수 부대원 훈련을 받고 이듬해 [[4월]]에 졸업하였다. 졸업 후 [[상하이]]를 경유하여 귀국하였는데, [[1933년]] [[6월]] [[상하이]]에서 들렀던 한 [[중국 국민당]] 인사의 장례식 자리에서 [[루쉰]]을 우연히 한 번 보게 되었다는 연구가 나오기도 했다. 이육사는 루쉰의 [[1921년]]작 단편 소설 《고향》을 식민지 조선에 번역해 내놓기도 했다.
  • 이은하 (방송인)
         * [[정지원 (1968년)|정지원]] - 스포츠 캐스터 출신의 아나운서로, [[2006년]] [[9월]]에 이은하와 결혼하였다.
  • 이재호 (프로게이머)
         * 2006년 [[9월]] 곰TV MSL 시즌1 8강
  • 이정민 (1977년)
         * [[2007년]] [[9월]] : 중앙선거관리위원회 매니페스토 캐스터
  • 이헌승
         * [[2011년]] [[9월]] : 한나라당 부대변인
  • 이희범
         |임기 = [[2010년]] [[9월]] ~ [[2014년]] [[2월]]
  • 임창정
         * 2009년 :《[[빨래 (뮤지컬)|빨래]]》 - 솔롱고 역 / 부산 공연 MBC 롯데아트홀 (2009년 9월 18일 ~ 9월 20일)
         * 발매일: [[2016년]] [[9월 6일]]
         * 발매일: [[2018년]] [[9월 19일]]
         * 발매일: [[2015년]] [[9월 22일]]
         * 발매일: [[2013년]] [[9월 24일]]
         * 발매일: [[2015년]] [[9월 7일]]
         * [[1998년]] [[9월]] : 애니콜 cm송 [Jam 있는 Yag] - 언제나 함께
         * [[2000년]] [[9월]] : Dream Song - 널 위한 날개<ref>{{뉴스 인용|제목=국내 정상급 가수들, 올림픽 응원가 제작|url=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001&aid=0000014963}}</ref> <small>[http://mnet.interest.me/tv/mv/2277 MV]</small>
         ** [[9월 23일]] [[SBS]] 《[[인기가요]]》 1위
         ** [[9월 30일]] [[SBS]] 《[[인기가요]]》 1위 (2주 연속)
         ** [[9월 16일]] [[KBS]] 《[[뮤직뱅크]]》 K-Chart 1위
         ** [[9월 18일]] [[SBS]] 《[[인기가요]]》 1위
         ** [[9월 23일]] [[KBS]] 《[[뮤직뱅크]]》 K-Chart 1위 (2주 연속)
         ** [[9월 28일]] [[MBC MUSIC]] 《[[쇼 챔피언]]》 챔피언 송
  • 장세주 (기업인)
         |기타 이력 = [[동국제강]] [[회장]] <br/> [[1978년]] [[7월]] [[동국제강]] [[입사]]<br />[[1980년]] [[8월]] [[동국제강|동국제강 인천공장]] 제강과 [[대리]]<br />[[1981년]] [[7월]] [[동국제강|동국제강 본사]] 회계과 과장<br />[[1983년]] [[3월]] [[동국제강|동국제강 일본지사]] 차장<br />[[1986년]] [[9월]] [[한국철강|한국철강(주)]] [[상무]]<br />[[1988년]] [[4월]] 천양항운(주) [[사장]]<br />[[1991년]] [[6월]] [[동국제강]] [[상무]](인천제강소장)<br />[[1993년]] [[1월]] [[동국제강]] 전무(기획조정실장)<br />[[1998년]] [[1월]] [[동국제강]] [[대표이사]] 전무(경영기획실장)<br />[[1998년]] [[3월]] [[동국제강]] [[대표이사]] [[사장|부사장]]([[본부장|영업본부장]])<br />[[1999년]] [[12월]] [[동국제강]] [[대표이사]] [[사장]]<br />[[2001년]] [[동국제강|동국제강그룹]] [[대표이사]] [[회장]]([[현재]])<br />[[2004년]]~[[2011년]] 유니온스틸(주) [[대표이사]] [[회장]]<br />[[2012년]] 한국철강협회 [[회장|부회장]]([[현재]])<br />[[2013년]]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부회장]]([[현재]])<br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부회장]] <br/>금탑산업훈장, 제12회 상공대상(노사협조 부문) 등을 수상 <br /> 보통적 봉급은 급여 1,236,000,000원을 비롯하여 기타근로소득 331,000,000원과 퇴직소득 2,510,000,000원과 월 급여액 87,000,000원과 이사퇴직금지급규정상 산출 퇴직소득 2,840,000,000원([[동국제강]] [[2015년 6월]] 반기보고서 기준) <br /> 보통적 순자산은 1,990,000,000원([[2013년]] [[주택]] [[재산]] 기준)<ref>[http://www.inews24.com/php/news_view.php?g_serial=720457&g_menu=022100&rrf=nv 회장님 집은 얼마짜리? - 아이뉴스24 박영례 기자 2013-01-28]</ref>
         *[[1986년]] [[9월]] [[한국철강|한국철강(주)]] [[상무]]
  • 장익 (1933년)
         * [[1983년]] [[9월]] [[김동한 (1919년)|김동한]] 신부가 선종하자 [[로마]] [[바티칸]]에 체류중인 김수환 추기경을 직접 찾아가 형님 신부의 임종을 전하기도 했다.<ref name="회화1"/>
         * 할아버지 : [[장기빈]] (張箕彬, 레오, [[1878년]] [[9월 9일]]∼ [[1959년]])
         ** 형 : [[장진 (1927년)|장진]] (張震, 요셉, [[1927년]] [[2월 10일]] ~ [[2011년]] [[9월 30일]], [[서강대학교]] 생물학과 명예교수)
         ** 동생 : 장흥 (張興, [[1939년]] [[9월 20일]] ~ , 벨기에 루벵 대학 철학박사, 파리은행 은행원, [[프랑스]] 거주)
  • 장포크
         * [[2010년]][[9월]] 그룹 [[재밌는 장포크]] 기타,보컬
  • 전재국
         |복무 기간 = [[1985년]] [[3월]] ~ [[1985년]] [[9월]]
  • 전태규
         [[2011년]] [[9월]], [[대한민국 해병대|해병대]]로 입대하여 복무하였고, [[2013년]] [[6월]] 전역하였다.
         *[[2002년]] [[9월]] 2002 Pepsi Twist배 KPGA 투어 3차리그 6강
         *[[2002년]] [[9월]] ghemTV 2차 스타리그 3위
         *[[2003년]] [[9월]] TG 삼보 MSL 16강
  • 전태일
         '''전태일'''(全泰壹, [[1948년]] [[9월 28일]] ~ [[1970년]] [[11월 13일]])은 [[대한민국]]의 봉제 [[노동자]]이자 [[노동운동가]], [[인권]] 운동가이다. [[1960년대]] [[평화시장 (서울)|평화시장]] 봉재공장의 [[재봉사]], [[재단사]]로 일하며 [[노동]]자의 권리를 주장하였다.
         전태일은 [[1948년]] [[9월 28일]] [[대구]] 남산동의 가난한 노동자인 전상수와 그의 부인 [[이소선]]의 아들로 태어났다. 한때 그의 아버지 전상수는 가내수공업도 했으나 거듭 실패했다.<ref name="ganaess">[http://h21.hani.co.kr/arti/special/special_general/28419.html 전태일의 시간·공간·생각] 한겨레 21 2010.11.05 제834호</ref> 그러다 재봉사였던 아버지 전상수가 사기를 당하는 바람에 [[서울]]로 올라와서 생활 전선에 뛰어들었다. [[1954년]] [[서울]] [[남대문국민학교]](남대문초등학교의 전신)에 입학하였다.
         [[1969년]] [[7월]] 열악한 노동조건과 근로기준법 위반에 관한 설문조사를 하여 [[노동청]]에 진정을 하였으나 거절당하였다. 이후 [[노동청]]을 찾아가 근로 환경 개선, 위생 환경 개선을 요구했지만 번번히 거절당했다. [[1969년]] [[9월]]부터 [[1970년]] [[4월]]까지 일용직 건축 노동자로 일하였다. 이때 그는 [[감리교|감리교회]]의 주일학교 교사로 활동했다. [[1970년]] [[4월]]부터는 평일에는 자신이 다니던 감리교회의 신축 공사장에서 일하며 밤에는 노동자 동지들에게 [[근로기준법]]을 가르치는 야학당 교사가 되었다. 주말 낮에는 주일학교 교사로 활동하였다.
         다니던 감리교회의 건물이 완공되자 [[1970년]] [[4월]]부터 [[8월]]까지는 [[서울]] [[삼각산]]의 [[임마뉴엘 수도원]] 건물 신축 공사장에 가서 4개월간 잡역부로 일하였다. [[1970년]] 평화시장으로 돌아온 [[8월]]부터 [[9월]] 1개월간 모 미싱회사에 취직했다.
         {{인용문2|1970년 여름 무렵, "아마도 한두 달 동안" 전태일은 김씨의 외삼촌이 운영하는 봉제공장에서 재단사로 일했다. 그가 노동운동을 했다는 이야기는 아주 나중에 들었다. 재단사 전태일은 키가 작았다. 얼굴도 작았다. "땅땅했다"라고 김씨는 회고했다. "뭐랄까, 아주… 아주 자그마했어.<ref name="ganaess"/>"|[[1970년]] [[8월]]~[[9월]] 무렵 전태일이 근무하던 미싱회사 사장 외조카의 증언}}
         [[1970년]] [[9월]] 전태일은 [[한미사]]의 재단사가 되었다가, 같은 [[9월]] [[왕성사]]의 재단사가 되었다. 재봉사보다 지위가 높은 재단사로 일하며 이전의 바보회를 발전시킨 [[삼동친목회]]를 조직하고 회장에 선임되었다. 그 뒤 다시 노동실태 조사 설문지를 돌려 126장의 설문지와 90명의 서명을 받아 '[[평화시장 (서울)|평화시장]] 피복제품상 종업원 [[노동권|근로조건]]개선 진정서'라는 이름으로 [[노동청]]에 진정서를 제출한다. 이 내용이 [[경향신문]]에 실려 주목을 받자, 전태일 등 삼동회 회원들은 본격적으로 임금, 노동 시간, 노동환경의 개선과 [[노동 조합]] 결성 등을 위해 사업주 대표들과 협의를 벌였으나, 일을 무마하려는 [[정부]]의 약속 위반으로 인해 번번이 무위로 돌아갔으며, [[자본가]]들도 삼동회는 [[사회주의]] 조직이라고 헐뜯음으로써 [[노동자]]들이 노동운동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방해하였다. 그해 [[10월]]부터 그는 [[노동권|근로조건]]개선 시위를 주관하였다.
         회사의 [[착취]]와 [[해고]]를 당하면서도 단결하여 투쟁할 생각을 못하던 [[노동자]]들이 [[죽음]]으로써 노동자들의 비참한 현실을 고발한 전태일 열사를 보면서 각성한 것이다. [[1970년]] [[11월 25일]] [[조선호텔]] 노동자 이상찬의 분신 기도, [[1971년]] 9월 한국회관(음식점) 노동자 김차호의 분신 기도, 8월 [[신진자동차]] 노조 조합원과 가족 1900여명의 [[파업]]투쟁, [[한진상사]] 파월 노동자 400여명의 [[대한항공]] 빌딩 옥상 방화 농성 등이 주요한 사건들이었다. [[1971년]]의 노동자의 단결투쟁은 1600여건에 이르렀는데, 이는 전년도 165건에 비해 10배가 넘는 규모였다.<ref>지명관, 《한국을 움직인 현대사 61장면》 98~ 101쪽, 다섯수레, 1996년; 한국정치연구회, 《한국정치사》 352~ 353쪽, 백산서당, 1990년; 역사학연구소, 《강좌 한국근현대사》 347쪽, 풀빛, 1995년</ref>
         [[1970년]] [[8월]]~[[9월]]에 일하던 모 미싱회사의 사장은 전태일 때문에 자신이 조사를 받을까봐 고민했다 한다. 그 회사 사장 외조카에 의하면 "외삼촌은 전태일 때문에 노동청 조사를 받게 될까 걱정했다.<ref name="ganaess"/>"고 한다. 그의 외삼촌은 "우리 공장에 있다 그런 일 났으면 정말 큰일 날 뻔했다"라고 나중에 말했다.<ref name="ganaess"/> 사장의 외조카 역시 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시고, 어머니는 집안에 누워 계시고, 오빠가 평화시장에서 미싱사로 일하고 있었으며<ref name="ganaess"/>, 그는 외삼촌의 공장에서 월급 2만원을 받고 시다로 일하면서 전태일을 봤다고 한다.<ref name="ganaess"/>
         [[1972년]] 기독청년 전태일 1주기 추도식으로 시작된 이래 1980년대에 와서 노동운동가 전태일 추도식으로 제목이 바뀌었다. 그의 어머니 [[이소선]]은 아들의 유언에 따라 사망직전까지 청계천 노조 지원과 노동 운동 지원에 헌신하여 노동자들의 어머니 라는 별칭을 얻기도 했다. [[1984년]] [[서울]]에서 노동운동가들 중심으로 전태일기념사업회가 조직되었고, [[1985년]] 전태일기념관이 개관하였다. 이후 전태일재단이 조직되어 '전태일문학상'과 '전태일노동상'을 제정하여 수여하기 시작하였다. [[1987년]] [[6.10 항쟁]] 이후 노동단체들이 모여 그해 [[7월]]부터 [[8월]]까지 노동자 대회를 열었으며 7월 15일에는 그의 어록, 초안 등을 참고하여 '87 노동자계급 해방선언'이 개최되었다. [[1988년]] [[11월]] 전태일의 분신 자살을 기념하기 위한 '전태일 정신 계승 전국 노동자 대회'가 [[서울]]에서 개최되어 매년 [[11월]] 전국 노동자대회가 열리고 있다. [[2002년]]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에서 전태일을 민주화 운동 관련자로 승인하였다. [[1996년]] 9월 19일에는 서울 중구 을지로6가에서 '전태일 거리'를 선포하였고, 이를 기념하여 민예총 회원들이 전태일 열사가 분신하고 있는 모습을담은 걸개그림 앞에서 추모공연을 하였다.<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6092000289120003&edtNo=6&printCount=1&publishDate=1996-09-20&officeId=00028&pageNo=20&printNo=2680&publishType=00010 한겨레 1996,09.20]</ref> 이 '전태일 거리'에서는 전태일을 추모하기 위한 '전태일 거리문화제'가 진행되고 있다. 1999년부터는 민주열사를 비롯해 의롭게 숨진 시민의 기념표석을 세우는 서울시'유적지 사업'에 포함되어 평화시장 분신장소에 기념표석이 세워졌다. 하지만 2003년 청계천 복원공사로 철거되기도 하였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32&aid=0000043117 전태일 동판 철거 ‘물의’ 경향신문, 2003.12.01]</ref>
         * 민주노총 김영훈 위원장은 전태일 열사의 삶을 [[비정규직]] [[노동운동]]으로 이어져야 한다고 보았다.김영훈 위원장은 [[한겨레 21]]과의 인터뷰에서 "전태일 열사는 그 자신도 어려웠지만 자신보다 더 어려운 여성[[노동자]]들의 편에서 살다가 죽었다. 노동운동도 가장 고통받는 [[비정규직]] 노동자들,특히 사내하청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연대해야 한다.이것이 전태일 열사의 정신을 올바르게 계승하는 것이다.전태일 열사는 노동자가 사람답게 사는 삶을 생각했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가장 많이 하는 말이 '사람답게 사는 삶'이다."라고 말했다.<ref>《한겨레21》2010년 9월 27일 기사,글:안수찬 기자,사진:김정효 기자,p.82</ref>
         * 어머니 [[이소선]](李小仙, [[1929년]] [[12월 30일]] ~ [[2011년]] [[9월 3일]])
  • 정몽헌
         '''정몽헌'''(鄭夢憲, [[1948년]] [[9월 14일]] ~ [[2003년]] [[8월 4일]])은 [[대한민국]]의 [[기업인]]이다. [[2002년 9월]]부터 [[대한민국의 특별검사제도|대북 불법송금 사건]] 관련 조사를 받던 도중 [[2003년]] [[8월 4일]] 현대계동사옥 12층에서 투신자살하였다.
         그는 현대가의 ‘왕자의 난’을 거치면서 형제들 사이에서 외톨이가 되었는데, 이후 [[2002년]] [[9월]]에 5억 달러 [[대한민국의 특별검사제도#대북송금 특검법|대북 불법송금 사건]]이 터지면서 [[2003년]]에 검찰 조사를 받았고, 추진하던 [[현대아산|대북사업]]의 차질과 현대그룹의 경영 악재로 힘든 시기를 보냈다.
  • 정민철
         |마지막 경기 = [[KBO (야구)|KBO]] / [[2009년]] [[9월 12일]] <br /> [[한밭종합운동장 야구장|대전]] 대 [[넥센 히어로즈|히어로즈]]전 선발 <br /> [[일본야구기구|NPB]] / [[2001년 10월]]
         [[2005년]] 등번호를 '23'번으로 바꿨다. [[2009년]] [[9월 10일]], [[한화 이글스]]는 그의 등번호 '23'번을 [[영구 결번]] 처리하기로 결정하였다.<ref>[http://news.naver.com/sports/index.nhn?category=baseball&ctg=news&mod=read&office_id=109&article_id=0002050016 한화, '정민철 23번 영구 결번' 결정] <<OSEN>>, 2009년 9월 10일.</ref>
         [[2009년]] [[9월 12일]] [[히어로즈]]와의 대전에서 5회 클리닝 타임에 그의 은퇴식이 거행되었다. 은퇴식에서 그는 팬들의 사랑에 대한 고마움을 전하고, 코치로서의 포부를 말하기도 하였다.
         친정 팀으로 돌아와 2002년 시즌부터 다시 [[KBO 리그|KBO]] 리그에 참가하지만, 전과 같지 않은 구위로 난조를 겪었다. 특히 [[2004년]]에는 단 1승도 거두지 못하고, 그동안 괴롭혀 왔었던 팔꿈치 통증으로 인해 수술을 받기도 하였다.<ref>[http://sports.news.nate.com/view/20081209n06896 ‘박찬호처럼’ 정민철의 부활 프로젝트] 《일간스포츠》, 2008년 12월 9일 작성</ref> 이후 재기를 다짐하면서 [[2005년]]에 재기에 가능성을 보였고, [[2006년]]부터 기교파 투수로 재기에 성공하여 팀의 선발 주축으로 활약했다. [[2007년]] 12승 5패 평균자책점 2.90으로 완벽하게 재기했다. 그러나 [[2008년]] 노쇠화로 인해 다시 부진하였다. [[2009년]], [[한화 이글스]]에서 플레잉 코치로 활동하다가 현역 은퇴를 선언했으며, [[9월 12일]] 은퇴식과 영구 결번식을 거행하였다. 손가락 길이가 일반인보다 한 마디 정도 긴 특징이 있으며, 훤칠한 미남형으로 많은 여성팬들을 몰고 다녔다.
         * 2009년 [[9월]] 12일 은퇴식 거행 (대전 히어로즈전) 등번호 23번 영구결번
  • 정칠성
         [[9월]]에는 경상남북도 출신으로 구성된 영남친목회(嶺南親睦會)가 구성되자 정칠성은 지방열과 지방 감정을 조장할 우려가 있다 하여 반대하였다. [[9월 11일]] 정칠성은 이원혁(李源赫) 등 74명과 공동 명의로 지역 친목회 조직 반대에 서명하였다. [[9월 14일]] [[동아일보]]사 [[송진우 (정치인)|송진우]] 사장의 초빙으로 [[동아일보]] 주최 동복편물강습대회의 강사로 참여하였다.
         [[1928년]] [[9월]] 신병 요양차 울산으로 내려가 요양하였다. [[9월 5일]] 요양차 울산 체류 중 경남울산청년회와 동아일보 울산지국 후원하 울산예배당에서 개최된 강연회에서 '여자의 불평과 남자의 각성'이라는 주제로 강연하였다.
         [[1945년]] [[8월]] [[태평양 전쟁]]이 종전되고 [[조선공산당]]이 재건되자 [[경성]]으로 올라가 [[박헌영]]의 재건파 [[조선공산당]]에 참여하였다. [[8월 16일]]부터는 [[건국준비위원회]]에도 참여하였다. [[미군정]]이 시작되자 [[서울]]에서 [[좌익]] 운동에 참여하였다. [[1945년]] [[9월]] [[대구]]의 [[조선공산당]] [[경상북도]]지구당 부녀부장이 되고, [[조선공산당]] 중앙위원에도 선출되었다. 그러나 정칠성은 시중의 조롱과 멸시를 당했다. 당시 [[조선공산당]]은 "봉건유제 타파하여 여남평등 이룩하자!"고 부르짖던 진보적 정당이었고, 그는 공산당의 간부였지만 여전히 기생을 팔반천인의 하나로 여기던 시절이었고, 정칠성은 기생 출신이 정치를 한다고 야유를 보냈다.
         [[1945년]] [[9월]]에 좌익계 여성단체인 [[조선부녀총동맹]]을 결성하여 중앙집행위원이 되었다. 그해 [[12월]] [[조선부녀총동맹]] 부위원장에 선출되었고, [[12월]]말 [[모스크바 삼상회의]]가 결정되자 정칠성은 [[박헌영]] 등과 함께 처음에는 [[신탁통치]]에 반대하였으나, 신탁의 불가피함을 인정하고 찬탁으로 돌아섰다. 이후 찬탁매국노로 몰리자, 테러를 피해 [[대구]]와 [[경성]]과 각지에 은신처를 마련하고 숨어 다녔다.
         [[1948년]] [[6월]] [[황해남도]] [[해주]]에서 열린 제2차 [[전조선 제정당 사회단체 연석회의]]에 참석하였다. 그해 [[8월]] [[해주]]에서 개최된 남조선인민대표자 대회 참가차 3.8선을 넘어 월북했다가 내려오지 않고 [[북조선]]에 머물렀다. 그 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 수립에 참여하여 [[1948년]] [[9월]]에 [[최고인민회의]] 제1기 대의원에 선출되고 [[민주여성동맹]] 부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1948년]] [[10월]] [[조선민주여성동맹]] 중앙위원에 선출되었다.
  • 최창엽
         경상북도 경주 출생이고 지난날 한때 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낸 적이 있는 그는 2006년 [[중앙대학교]] 신문방송학과 영상제 청소년부 대상을 수상하면서 [[데뷔]]하였다. 이후 [[2009년]] [[뮤지컬]]에 출연하였고, [[2011년]] [[한국방송공사|KBS 한국방송공사]] TV 드라마에 출연하였으며 이후 마약류관리에 관한 법률위반 혐의로 [[2016년]] [[9월]] 구속 수감되었고<ref>{{뉴스 인용
  • 태진아
         || 노란 손수건 |||| [[1993년]] [[9월]] ||
  • 한규복 (1881년)
         '''한규복'''(韓圭復, <small>일본식 이름:</small> 井垣圭復, [[1885년|1881년]] [[7월 7일]] ~ [[1967년]] [[9월 13일]])은 [[대한제국]]의 관료, 통역관, 화가, 서예가이자 [[일제 강점기]]의 관료, 화가, 서예가로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도 지냈다. [[일제 강점기]]의 신념형 친일파의 한 사람이었다.
         [[1899년]](광무 2년) 초, 그해의 정부 관비유학생으로 뽑혀 [[4월]] [[일본]] [[도쿄]]로 유학, 그해 [[9월]] [[도쿄]] 신전중학교(神田中學校)에 편입학하였다. [[1900년]] [[3월]] [[신전중학교]]를 졸업하고 [[도쿄 전문학교]]에 입학했다. 동경 전문학교를 거쳐 [[1901년]] [[9월 11일]] [[와세다 대학]](早稻田大學) 정치경제학과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1903년]](광무 6년) [[7월 15일]] 3학년 재학 중 [[와세다 대학]] 정치경제과를 수료하고 [[7월]] 정부의 명으로 귀국하여, [[대한제국]]의 관리로 근무를 시작했다.
         [[1903년]] [[대한제국]]의 [[탁지부]] 주사가 되었다. [[1904년]](광무 7년) [[9월 27일]] [[대한제국 국군]] [[참모부]] [[번역관]]보(參謀部飜譯官補)가 되고 [[판임관]] 6등(判任官六等)에 임용되었다. [[1905년]](광무 8년) [[3월 21일]] [[군부]] [[번역관]](飜譯官)으로 승진, [[주임관]] 6등(奏任官六等)이 되었다. 이후 [[군부 (대한제국)|군부]], [[탁지부]] 등 여러 부처에서 번역관 벼슬 등을 지내고 [[탁지부]] 서기관과 주임관을 역임하였다. [[1905년]] [[11월 5일]] [[경기전]]을 건축하는데 참여한 공로로 6품으로 승진하였다. [[1906년]] 탁지부 번역관으로 옮겼다. 그해 [[1월 19일]] [[순릉]]비각영건과 표석 수립에 감독관으로 참여한 공로로 다시 6품에서 정3품으로 [[가자]], 일약 승진하였다.
         [[1937년]] [[1월]] [[방송선전협의회]](放送宣傳協議會) 위원으로 위촉되어 수양강좌·부인강좌·상식강좌의 강사로 출연하였고, [[7월]] [[중추원]] 주최 행사에 참여하였다. 동년 [[조선총독부]]에서 조선인들의 소득을 조사할 목적으로 국민소득조사위원회를 구성하자, 한규복은 국민소득조사위원회 경성지역 관내 위원으로 선임되었다. [[8월 3일]]부터는 [[10월]]까지 총독부 학무국에서 지나사변 이후 흉흉한 민심을 수습하고자 순회시국강연위원회를 조직할 때 연사가 되어 [[서울]]과 각지에 시국강연을 다녔다. [[8월 16일]]에는 [[경상남도]] [[함양군]]에서 시국강연을 하였다. [[9월 10일]]에는 용인공보교 대강당에서 [[용인군]] 지역 시국강연회를 주최하였다.
         [[1939년]] [[6월 4일]] [[중추원]] 참의로 재선되었다. [[8월 5일]]에는 [[국민정신총동원연맹]] 주최로 전국 순회강연을 할 때, 순회강사가 되어 국민 저축 장려를 목적으로 '백억 저축 생활 쇄신'이라는 주제로 전국 순회강연을 다녔다. [[9월 26일]]에는 각지의 노무자와 빈민을 구제하기 위해 만든 [[사회조사위원회]] 위원에 피임되었다.<ref>"勞務者와 細窮民을 來月中에 綜合調査", 동아일보 1939년 09월 26일자 2면, 사회면</ref> 그해 [[9월 30일]] [[경성]]에서 자본금 백만원을 투자하여 [[조선공영회사]](朝鮮工營會社)를 창립하고 대표이사 사장에 선출되었다. 그러나 그해 [[11월 5일]] [[조선중앙임금위원회]] 임시위원으로 선임되면서 사퇴했다. [[12월 22일]] [[세제조사위원회]] 위원에 선임되었다. [[1939년]]부터 그는 [[경성부]], [[충주군]], [[함양군]], [[수원군]], [[용인군]], [[양주군]] 등을 다니며 저축을 할 것을 주장하였다.
         [[1942년]] [[징병제]] 실시가 결정되고 [[조선인]] [[참정권]] 허용 문제가 [[일본]] 의회 [[중의원]]과 [[귀족원]]에 상정되자, 그는 [[조선임전보국단]]의 부단장 자격으로 일본 수상과 참모총장에게 감사 전보문을 타전하고, 그해 [[5월 15일]] [[경성부|경성]] YMCA에서 [[이광수]](李光洙) 등 명사들을 초청해 연설회를 개최하기도 하였다. [[1942년]] [[9월]]에는 [[조선국자주식회사]] 회장에 취임하였으나 [[1943년]] [[6월]] 사퇴하였다. [[1943년]] [[국민총력연맹]] 징병기념사업실행위원회 위원의 한 사람에 피선되었다.
         광복 직후 일체의 공직을 사퇴하고 칩거하였다. [[1945년]] [[9월 2일]] [[미군정청]] 고문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였다. [[8월 16일]] [[한국곡자주식회사]](韓國穀子株式會社)를 설립하고 대표이사 사장이 되었다. [[대한민국]] 건국 후인 [[1949년]]에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자수해 왔으나, 반민특위 활동이 방해를 받으면서 불기소처분을 받았다.<ref name="neftkin">{{웹 인용
         [[1950년]]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대구로 갔다. 한동안 한국곡자 운영과 종친회 일 이외에는 사양하며 칩거하였다. [[1960년]] [[7월 2일]]에는 주간종합잡지 [[주간대중]](週刊大衆) 지의 동인이자 필진으로 참여하였다.<ref>"週刊大衆" 創刊, 동아일보 1960년07월 02일자 4면, 생활/문화면</ref> [[1967년]] [[9월 13일]] [[서울]]에서 사망했다.
         * 부인 : 평양 조씨, 조인옥(平壤趙氏 趙仁玉, [[1881년]] [[2월 24일]] - [[1945년]] [[9월 10일]]). 조재연(趙載淵)의 딸
         |임기 = [[1945년]] [[9월 2일]] ~ [[1946년]] [[1월]]
  • 한호문
         [[음서 제도|음보]](蔭補)로 관직에 올라 여러 관직을 거쳐 [[1598년]](선조 31년) 선전관(宣傳官)<ref>황여일 (黃汝一), 《해월집 권9》, 사신일기, 1598년 무술 11월 13일 갑오(甲午) </ref>, [[1599년]](선조 32년) 하양 현감(河陽縣監)으로 부임하였다.<ref>선조실록 113권, 1599년(선조 32년, 명 만력 27년) 5월 3일 경술 6번째기사, "조정·조희보·변이중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ref> [[1602년]] [[9월 14일]] 군기판관(軍器判官)을 거쳐<ref>竹溪日記卷之六, 九月初十日戊辰</ref>, [[12월 16일]] 영흥판관으로 나갔다.<ref>竹溪日記卷之六, 十二月十六日</ref> [[1603년]](선조 36년) [[11월 29일]] 서산(瑞山)으로 부임하였고<ref>조익(趙翊), 《가휴선생문집권 10》, 공산일기(公山日記), 계묘 1603년 11월 29일자</ref>, 그가 서산군수로 부임한 내용은 서산군읍지(충청남도)(瑞山郡邑誌(忠淸南道))의 선생안에도 수록되었다. [[1607년]] [[9월 4일]] 도총경력에 임명되었다.<ref>竹溪日記卷之十, 九月初四日</ref> [[1615년]](광해군 7년) [[화기도감]]에 낭청으로 참여한 공로로, 그해 [[12월 29일]] 화기도감 도제조 이하 관원을 시상할 때 승급되었다.<ref> 광해군일기 98권, 1615년(광해군 7년, 명 만력 43년) 12월 29일 신미 3번째기사 1615년 명 만력(萬曆) 43년 화기 도감 도제조·제조 유근 등에게 포상하다</ref>
         [[1623년]](인조 1년) [[9월 19일]] 밀양부사(密陽府使)로 부임하였다가 '경원부사(慶源府使)에 제수되었을 때는 부모의 나이가 70세임을 들어 상소하여 사직하더니, 본직에 제수되자 아무렇지도 않은 듯 태연히 부임하였다'는 이유로 [[사간원]]의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ref>승정원일기 인조 1년 계해(1623) 9월 19일(병오)자 4번째기사, "사천 현감 이장형을 사판에서 삭제할 것 등을 청하는 사간원의 계"</ref> 그러나 그해 [[9월 20일]] 죄인 명단에서 특별히 정계되었다.<ref>승정원일기 인조 1년 계해(1623) 9월 20일(정미)자 6번째기사, "사간원이 아뢴 한호문 등의 일은 정계하였다"</ref> 명단에서 정계된 사유는 알려져 있지 않다. [[1626년]] [[4월 13일]] 겸[[내금위]]장(兼內禁衛將)<ref>승정원일기 인조 4년 병인(1626) 4월 13일(을유)자 29번째기사, "병조가 남이웅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였다"</ref> [[1627년]] [[1월]] [[정묘호란]] 당시 [[소현세자]]를 배종하였다.<ref>승정원일기 인조 5년 정묘(1627) 1월 24일(임진)자 7번째기사, "세자 배종인의 명단"</ref> 그해 [[4월 5일]] 상현궁(上弦弓) 1장(張)을 사급(賜給)받았다.<ref>승정원일기 인조 5년 정묘(1627) 4월 5일(신축)자 2번째기사, "영부사 이원익 등에게 시상하라는 전교"</ref>
         [[1633년]] [[9월]] [[명나라]]에서 사신이 오자 서원군(西原君)으로 호송관(護送官)에 임명되어 사신을 접대하였다. [[10월 4일]] [[명나라]] 사신을 [[모화관]]에서 접대한 것을 보고하였다.<ref>승정원일기 인조 11년 계유(1633) 10월 4일(계해)자 12번째기사, "모화관에서 금차에게 연향을 베푼 결과를 보고하는 호송관인 서원군 한호문 등의 계"</ref> [[1636년]] 겨울 [[병자호란]] 당시 훈련원 도정(訓鍊院都正)으로 인조 등을 수행하여 [[남한산성]]으로 들어갔다. [[1637년]] [[1월]] [[인조]]의 [[정축하성]] 직후 작성된 호종록에 그의 명단이 수록되어 있다.<ref>승정원일기 인조 15년 정축(1637) 2월, "일기청 관원"</ref>
  • 한확
         |사망일= [[1456년]] [[음력 9월 11일]]
         '''한확'''(韓確, [[1400년]]<ref>1403년생 설도 있다.</ref> ~ [[1456년]] [[음력 9월 11일]])은 [[조선]]전기의 문신이자 외척, 외교관이며 [[명나라]]의 문신이다.<ref>{{브리태니커|b24h3077a|한확}}</ref> 자는 자유(子柔), 호는 간이재(簡易齋), 본관은 [[청주 한씨|청주]](淸州)이며 시호는 양절(襄節)이다. [[조선 덕종|덕종]]의 비이자 [[월산대군]]· [[조선 성종|성종]]의 모후인 [[인수대비]]와 [[조선 세종|세종]] 서자 [[계양군 (왕족)|계양군]]의 부인인 [[정선군부인]]의 친정아버지이다.
         [[1425년]] 전감무(前監務) 김성정(金成鼎)의 첩의 딸 고미(古未)와 간통하였다가 [[사헌부]]집의(執義) 정연(鄭淵)·헌납 윤맹겸(尹孟謙) 등으로부터 탄핵을 당하였으나 [[조선 세종|세종대왕]]은 주저하다가 윤허하지 않았다.<ref name="se29">세종실록 29권, 세종 7년(1425 을사 / 명 홍희(洪熙) 1년) 9월 28일(갑자) 2번째기사 "장군 절제사 한확이 간통했다고 갈아 임명하게 하다"</ref>
         [[1452년]] 원접사(遠接使)로 [[명나라]]의 사신을 맞이하였고, 그해 [[9월]] [[개성부]] 선위사가 되어 개성 지역을 위문하고 돌아왔다. [[12월]]초 다시 개성부 선위사가 되어 개성을 순찰하고 되돌아온 뒤 [[의정부]]좌찬성(左贊成)에 임명되었다.
         [[1456년]] 난신에 연좌된 부녀를 분배할 때 조청로(趙淸老)의 어미 덕경(德敬)·아내 노비(老非), 최득지(崔得池)의 아내 막덕(莫德), 이현로(李賢老)의 첩의 딸 이생(李生) 등을 노비로 하사받았다.<ref>세조 실록 5권, 세조 2년(1456 병자 / 명 경태(景泰) 7년) 9월 7일(갑술) 4번째기사 "의금부에 난신에 연좌된 부녀를 대신들에게 나누어 주게 하다"</ref>
         귀국길에 올라 세조의 책봉 고명을 받아 돌아오던 중, 칠가령(七家嶺)에 이르러 병을 얻어, 귀환하는 도중에 [[음력 9월 11일]] 사하포(沙河浦)에서 갑작스럽게 객사하였다. 당시 향년 56세였다.<ref>1400년생 설을 따를 경우</ref> 사망 당시 가사에 대한 말은 한마디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의 둘째 딸은 [[세종]]의 서자 [[계양군]] 증에게 출가했고, 여섯째 딸은 [[소혜왕후|인수대비]]로 [[조선 덕종|덕종]]의 비이며 [[월산대군]]· [[조선 성종|성종]]의 어머니였다.
         동생 한전(韓磌)·한질(韓)이 모두 일찍 죽었는데, 한확이 그 고아를 무육(撫育)하기를 자기 자식과 다름이 없었다. 작품으로는 [[고려]]말기의 문신 [[차원부]]를 애도하는 치제문이 있다. 그가 죽자 [[조선 세조|세조]]는 9월 22일까지 정사와 조회를 중단하였다. 이때 강무까지 중단하려 하였으나 [[승정원]]의 반대로 강무는 계속하였다.
  • 한희 (연출가)
         * [[2010년]] [[9월]] : [[MBC]] 드라마1국 드라마2부장
         * [[2016년]] [[9월]] ~ [[2017년]] [[3월]] : [[MBC]] 드라마2국 국장
         * [[2016년]] [[9월]] : [[MBC]] 드라마기획제작1부장
  • 함인섭
         '''함인섭'''(咸仁燮, [[1907년]] [[5월 3일]] ~ [[1986년]] [[9월 15일]])은 [[일제 강점기]]의 전문학교 교수이며, 초대 강원대학교 학장, 제6대 농림부 장관을 지낸 [[대한민국]]의 [[정치가]]이자 [[대학 교수]]이다. 본관은 강릉(江陵), 호(號)는 산남(山南)이다. 그는 [[춘천농업대학]]([[강원대학교]]의 전신)의 설립에 참여, 개교의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으며, [[춘천농업대학]] 초대 학장과 2대, 4~5대 학장, 강원대학교 농과대학원장, 강원대학 학장 등을 역임했다. 제3대 부통령 송암 [[함태영]]의 손자이며, 26년 연하인 [[함병춘]]은 그의 배다른 이복 삼촌이었다.
         해방 직후인 [[1945년]] [[9월 2일]] 주한미군이 주둔하고 [[미 군정]]청이 설치되자 함인섭은 미군정청 [[농산국]] 직원이 되었다. [[1946년]] 미 군정청 [[농림부]] 고문이 되었다가 [[1946년]] [[춘천공립농업중학교]] 교장으로 부임하였다. 이때 그는 [[강원도]] 도내에 대학이 없는 것일 보고, 강원도내에 대학 설립 추진을 계획하게 되었다. [[1946년]] [[10월 1일]] 춘천농업대학 창립 발기회를 결성하고 주도적으로 활동했다.
         [[1952년]] [[3월 6일]] 제6대 농림부 장관이 되었다. 농림부 장관이 되자 그는 정부 수립 직후에 시행한 [[토지개혁]] 당시 농지보상금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고, 8·15 광복 직후에 발생한 토지관련 분쟁과 토지보상 문제를 해결하였다. 그러나 [[1952년]] [[8월 28일]], 1952년의 중석불 사건으로 인책 사임<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52102000329201001&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52-10-20&officeId=00032&pageNo=1&printNo=1947&publishType=00020 ]</ref>하였다. 그는 중석불 사건의 피해자라는 시각도 있다.<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5032200099109001&editNo=15&printCount=1&publishDate=1995-03-22&officeId=00009&pageNo=9&printNo=9047&publishType=00010 ]</ref> 그밖에 그는 강원도 노동위원회 공익위원, 강원도 교육위원 등으로도 위촉되었다. [[1956년]] [[9월 12일]] UN가입추진위원회 전원위원회 강원도지부 부위원장<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56091200329201003&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56-09-12&officeId=00032&pageNo=1&printNo=3366&publishType=00020 ]</ref>이 되었다. 1957년 4월 20일 춘천농과대학 학장이 되고 1957년 5월 12일부터 [[1960년]] [[7월 7일]]까지 문교부 중앙교육위원회 위원을 겸임하였다. 그는 또 [[1960년]] [[7월 5일]]까지 고등고시 전형위원에도 위촉되었다.
         독실한 신앙인이었던 그는 [[기독교]] [[장로]]로도 활약하였다. [[1970년]]에는 [[국민훈장]] 동백장을 받고 [[1972년]]에는 [[국민훈장]] 모란장을 수상하였다. 그는 재산을 마련하지 못해 자기 집이 없었고, 일부 제자들과 교직원들이 기금을 마련해서 그의 집을 마련해 주었다. [[1986년]] [[9월 15일]] 오전 10시 [[강원도]] [[춘천시]] [[춘천의료원]]에서 병으로 사망하였다.
         * [[1945년]] [[9월]]] [[미 군정]]청 설립, 미군정청 [[농산국]] 직원
         * 1956년 9월 12일 UN가입추진위원회 전원위원회 강원도지부 부위원장
         * [[1986년]] [[9월 15일]] [[춘천의료원]]에서 병으로 사망
  • 현빈
         '''현빈'''({{본명|김태평}}(金泰平), [[1982년]] [[9월 25일]] ~ )은 [[대한민국]]의 [[배우]]이다. 본관은 [[광산 김씨]]이다.
         현빈은 [[2003년]] 드라마 《[[보디가드 (드라마)|보디가드]]》에서 연기자로 첫발을 내딛게 되었고, 데뷔작에서 맡은 역할은 일류 모델을 따라다니는 스토커로 단역이었다. 이후 청춘 시트콤 《[[논스톱 4]]》에서 몇 개의 에피소드에 단역으로 출연하다가 [[2004년]] [[2월]]부터 고정 출연하게 되었으며, 태권도가 특기이며 진지한 성격의 바른 생활 사나이 "현빈" 역으로 인기를 끌며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2004년초에 촬영이 끝난 영화 《[[돌려차기]]》가 [[7월]]에 개봉하며 영화로도 데뷔했으며, 태권도부 주장 "이민규" 역을 맡았다. 또한 [[9월]] 드라마 《[[아일랜드 (드라마)|아일랜드]]》에서 경호원이며 힘없고 불쌍한 사람을 좋아하는 착한 "강국" 역을 맡았는데, 인정옥 작가는 "시트콤을 봤는데 현빈이 너무나 예쁘게 생겼고, 어투도 좋아서 김진만 감독에게 추천했다."고 밝혔다.<ref>{{뉴스 인용|제목=인정옥 작가 "섹시했던 양동근, 예뻤던 현빈"
         |확인날짜 = 2017-09-08}}</ref> 현빈은 [[2011년]] [[9월 25일]] 해병대에서 주최하는 제3회 서울수복기념마라톤대회에 출전하여 하프코스 6.25km를 완주하였다.<ref>{{뉴스 인용|제목=현빈 마라톤 6.25km 하프코스 완주|url=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55329&yy=2011|출판사=매일일보|저자=배소영|날짜= 2011-09-26|확인날짜 = 2017-09-08}}</ref> [[2011년]] [[9월 30일]]에는 해병대 사령부에서 주최하는 군악회인 제22회 해병대 군악회 정기연주회에서 진행을 맡았다.<ref>{{뉴스 인용|제목=현빈, 오늘(30일) 해병대군악대 연주회서 첫 MC 도전
         |확인날짜 = 2017-09-08}}</ref> [[9월 19일]] 개막식에서 8명의 기수단 중 한 사람으로서 역할을 수행했다.<ref>{{뉴스 인용|제목=현빈, '인천아시안게임 개막식' 기수단으로 등장
         |확인날짜 = 2017-09-08}}</ref> [[2016년]] [[9월 1일]]에는 광주 비엔날레전시관에서 열린 2016 광주비엔날레 홍보대사로 위촉되어 개막식에 참석하였으며, 이는 재능기부의 차원에서 노개런티로 참여하였다.<ref>{{뉴스 인용|제목=현빈, '광주비엔날레' 개막식 참석…재능기부 차원 노개런티
         |확인날짜 = 2017-09-08}}</ref> 누적관객 400만 명을 기록하며 손익분기점 120만명을 훌쩍 넘겼다. 이후 2017년 상반기, 영화 《[[협상 (영화)|협상]]》《[[창궐]]》에 연이어 캐스팅되어<ref>{{웹 인용|url=http://www.sedaily.com/NewsView/1OG2652GJH/GL0201|제목='협상' 현빈-손예진 캐스팅 확정, 6월 크랭크인(공식입장)|날짜=2017-05-25|언어=ko|확인날짜=2019-04-24}}</ref><ref>{{웹 인용|url=http://www.newsen.com/news_view.php?uid=201704111121362410|제목=현빈 ‘창궐’ 출연확정, ‘공조’ 김성훈 감독과 두번째 만남(공식)|날짜=2017-04-11|언어=ko|확인날짜=2019-04-24}}</ref> 2018년 하반기에 나란히 개봉했다. 《[[협상 (영화)|협상]]》에서는 최악의 인질극을 벌이는 민태구 역으로 생애 첫 악역을 맡아 연기 변신을 시도했다. 한정된 공간, 시간 안에서 효과적으로 구현된 현빈의 에너지가 돋보인다는 평을 받았으나 누적관객 195만명으로 손익분기점인 250만을 넘기는데는 실패했다. 《[[창궐]]》에서는 야귀의 창궐을 막고 조선을 구하려는 이청 역을 맡았다.<ref>{{뉴스 인용|제목=”환상의 호흡” 현빈X장동건 '창궐' 대본리딩…9월1일 크랭크인[공식]
  • 황진하 (아나운서)
         * tbs FM [http://www.tbs.seoul.kr/cont/FM/sweet_night/intro/intro.do 달콤한 밤, 황진하입니다] (매일 밤 12시 - 2시, tbs FM 95.1MHz)([[2016년]] [[9월]] ~ [[현재]])
         * tbs FM [http://www.tbs.seoul.kr/fm/WeekendGood/ 주말이 좋다, 황진하입니다] (매주 토, 일요일 오후 6-8시, tbs FM 95.1MHz) ([[2015년]] [[3월 23일]] ~ [[9월 13일]])
         * tbs TV 안전지대 119 (매주 월요일 오후 3시 30분, tbs TV) ([[2015년]] [[3월 23일]] ~ [[9월 13일]])
  • 흥인군
         [[1864년]](고종 1) [[1월]] [[영희전]] 제조가 되고 3일 뒤 [[사도시]] 제조를 겸임하였으며, [[2월]] [[종묘서]] 제조, [[3월]] [[상의원]] 제조에 임명되었다. [[1865년]](고종 2) [[4월]] [[경복궁]] 중건 때 [[영건도감]]제조(營建都監提調)를 맡아보았으나, [[흥선대원군]]의 통상수교거부정책에 반대하여 반목했다. 그해 [[9월]] [[의금부]][[판사]](義禁府判事), [[호위대장]] 등을 역임했다. [[1866년]]에는 익총의 옥책문 옥보 전문 제술관(玉寶篆文書寫官)이 되고, 같은 해 고종과 명성황후의 가례 때 [[가례도감]] 당상이 되었다. 그해 [[의금부]]판사가 되었다.
         그는 대미 개국 방침을 결정한 [[1880년]] [[10월]]의 중신회의에서 영의정으로서 회의를 주재했다.<ref name="sisi459">강재언, 《선비의 나라 한국유학 2천년》 (한길사, 20003) 459페이지</ref> 그는 쇄국 정책에 비판적이었다.<ref name="sisi459"/> [[일본]]에 갔던 수신사 [[김홍집]] 일행이 귀국하면서 [[황준헌]]의 [[조선책략]]을 가져와 미국과 외교관계를 수립해야 한다는 연미론(聯美論)를 주장하자 그는 "[[미국]]은 본래 원수의 나라가 아니니 서계(書契)를 가져오면 받아야 할 것"이라고 하여 [[1880년]] [[9월 8일]] 연미론을 적극 수용하였다. 그의 주장에 고종도 [[병인양요]], [[신미양요]]는 우리나라가 스스로 반성해야 할 것이라고 하여 [[미국]]과의 조약체결을 결심하게 되었다. [[1881년]] [[1월]] 흥인군의 건의로 고종은 지난해 [[6월]] 자신이 미국사신을 거부한 것을 후회하는 문서를 톈진(天津)으로 가는 영선사, 유학생들을 보낼 때, 그들을 통해 [[청나라]]로 보냈다.
         ** 부인 : 정경부인 안동김씨(安東金氏, [[1834년]] [[9월 4일]] - [[1868년]] [[10월 20일]]), 김만근(金晩根)의 딸, 군부인에서 정경부인으로 개봉
  • 흥친왕
         |사망일 = [[1912년]] [[9월 9일]] (68세)
         '''흥친왕 이재면'''(興親王 李載冕, 완흥군(完興君), [[1845년]] [[8월 22일]]([[음력 7월 20일]]) ~ [[1912년]] [[9월 9일]])은 조선 말기의 왕족·군인·정치인이자 [[대한제국]]의 황족·군인으로, [[흥선대원군]]의 적장자(嫡長子)이자 [[대한제국 고종|고종]]의 친형이며 [[영선군 이준]]의 아버지이다. 대한제국 성립 후 완흥군(完興君)에 책봉되었다가 [[1910년]] 흥친왕(興親王)으로 진봉되었다.
         [[1899년]](광무 3년) [[9월 1일]] [[사도세자]]가 장종대왕으로 추존되면서 [[9월 1일]]부터 [[9월 29일]] 사이에 사도세자의 4대손에 해당되는 자손들은 현주에서 옹주로 격상되거나 생전 품계보다 높은 품계를 받았다. 동시에 군의 작위를 받지 못한 고종의 동항렬 인사들은 군의 작위를 받았지만 그는 제외되었다.
         운현궁의 이로당에서 거주하다가 [[1912년]] [[9월]] 병세가 위독해졌고 순종은 전의(典醫)를 그의 집에 보내 왕진(往診)을 시켰다. 덕수궁(德壽宮)에서도 이태왕 고종은 자신의 어의(御醫)를 보내 흥친왕을 진료하게 했다. 그러나 병세는 심해져 [[1912년]] 양력 [[9월 9일]]에 67세를 일기로 [[운현궁]] 정침에서 병으로 병사하였다. 어느 병환으로 사망했는가 여부는 알려져있지 않다. 그가 죽으면서 그의 [[공작 (작위)|공작]]의 지위는 아들 [[이준용]]이 상속하였다. 소생으로 영선군 [[이준용]], [[이문용 (왕족)|이문용]]과 딸 1명을 두었다. 흥친왕이 죽자 [[대한제국 고종|고종]]은 친히 그의 빈소에 가서 상복을 입고 곡을 하였다.
         처음 그의 시신은 [[경기도]] [[김포군]] [[고란대면]](古蘭臺面) 풍곡리 야산 좌곤(坐坤)에 안장되었다가, [[1921년]] [[9월 1일]] [[양주군]] [[화도면]] 창현리(후일의 남양주시 화도읍 창현리)로 이장되었다. 이때 처음 [[광주군]] [[세촌면]] 수곡리 계좌에 안장되었다가 다시 [[양주군]] [[회암면]] [[회암리]](후일의 회천읍 회암리)에 안장되었던 부인 풍산홍씨 역시 이장되어 합장되었다. 그의 묘소 북서편, [[이우 (1912년)|이우]]의 묘소 우측 언덕에 후일 [[흥선대원군]] 내외의 묘소가 이장, 조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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