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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승조 (축구선수)
         [[2017년]] [[6월]] [[박주성]], [[전상훈 (1989년)|전상훈]]과 2:1 트레이드로 [[경남 FC]]에 입단하며 4년만에 친정팀에 복귀하였다.<ref>{{뉴스 인용|url=http://sportalkorea.mt.co.kr/news/view.php?gisa_uniq=2017062111125812§ion_code=10&cp=se&gomb=1/|제목=경남, FA컵 준우승 주역 강승조 재영입…전상훈-박주성 대전행|출판사=스포탈코리아|날짜=2017-06-21}}</ref>
  • 강의석
         고등학교 재학 중 교내 [[종교의 자유]]와 관련된 시위와 소송에 연관되어 제적당했다. [[2004년]] [[8월 11일]]부터 [[9월 22일]]까지 [[10월 16일]]부터 [[10월 22일]]까지 두 차례에 걸쳐 [[대광고등학교]] 측에 종교의 자유를 요구하는 단식 농성을 벌였다. 그해 [[6월 16일]] 학교 교내 방송으로 종교의 자유를 선언하였다가 퇴학당했으며, 이후 [[국가인권위원회]]에 종교 선택의 자유, 퇴학 무효를 청원하여 이끌어냈다. 이 소송은 결국 [[2010년]] [[대법원]] 최종심에서 승소하였다.
         그는 군대의 폭력성과 [[인권침해]]를 비판하여 군대 폐지론을 주장하기도 했다. [[2011년]] [[6월 2일]] [[병역법]] 위반혐의로 징역 1년 6개월의 실형을 선고받아 법정 구속 수감됐으며, 실형을 받은지 1년 2개월인 [[2012년]] [[8월 15일]] [[가석방]]을 받았다. 투옥 중에는 [[수감자 처우 개선]]을 요구하며 [[단식투쟁]]을 벌였다.<ref name="trusts">[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518291.html 강의석, 구치소서 ‘단식투쟁’ 하다 쓰러져] 한겨레신문 2012년 02월 9일자</ref> 그는 또 일부 국가대표 체육 선수들의 병역면제(엄밀히는 [[예술체육요원]]) 혜택에 대해 서민 남성들은 군대 가야 하는데 체육 하나 잘한다는 이유로 부당하게 [[병역면제]]를 받는다며 모 국가대표 선수들을 비판하기도 했다. [[서울특별시|서울]] 출신이다.
         강의석은 [[1986년]] [[8월 25일]] [[서울특별시]] [[동대문구]]에서 회사원 아버지 강재정과 약학자 어머니 [[백완숙]]의 아들로 태어났다. [[1999년]] [[3월]] [[서울]] [[동대문구]]의 [[성일중학교]]를 거쳐 [[2002년]] [[대광고등학교]]로 진학했다. 강의석은 [[서울특별시|서울]] [[동대문구]] [[대광고등학교]]의 평범한 학생이었으나, 종교 강요에 대한 반발로 학생운동가가 되었다. 고등학교 3학년 재학 중인 [[2004년]] [[6월]] 학교가 학생들에게 [[개신교]] [[예배]]를 강요하는 데 반발하여 시위하였다.<ref name="relision_protest">{{웹 인용 |url=http://search.ytn.co.kr/ytn/view.php?s_mcd=0103&key=200406220808011584 |제목='특정종교 강요' 고교생 1인시위 |출판사=YTN |확인날짜=2007년 11월 7일 |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131029204916/http://search.ytn.co.kr/ytn/view.php?s_mcd=0103&key=200406220808011584 |보존날짜=2013년 10월 29일 |깨진링크=예 }}</ref> 이후 그는 학생운동가가 되어 종교의 자유와 사회 비판을 시작하였다. 한편 예배 반대 시위를 한 이유로 그는 곧 학교에서 [[제적]]당했다.<ref name="expulsion">{{웹 인용 |url=http://search.ytn.co.kr/ytn/view.php?s_mcd=0103&key=200407091627002179 |제목='종교자유' 1인시위 고교생 제적 |출판사=YTN |확인날짜=2013년 10월 29일 |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131104011209/http://search.ytn.co.kr/ytn/view.php?s_mcd=0103&key=200407091627002179 |보존날짜=2013년 11월 4일 |깨진링크=예 }}</ref>
         [[2004년]] [[6월 16일]] 아침, 강의석은 학내방송을 통해‘종교자유 선언’을 했다.<ref name="jongja"/> [[대광고등학교]] 학생회장 신분이자 [[6월]] 첫째 주까지도 예배에 성실하게 나와서 활동하던 그의 돌발 계획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2008년]] [[5월]] 이명박정부 시절 청와대 인턴으로 채용됐던 적이 있었다고 밝혔다. 하지만 그는 최종 채용에서는 탈락하였다.<ref name="chungsin">[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112&aid=0002402628 강의석 MB정부때 청와대 특별인턴 채용] 해럴드생생 경제뉴스 2013.03.10</ref> 그는 “택시 운전일을 하고 있었는데 청와대에서 특별인턴 제도를 만들어 채용할 의향이 있는데 혹시 해볼생각이 없냐고 전화가 왔다”며 “한달동안 두차례 청와대에 들어가 사전모임을 가지기도 했다” 한다.<ref name="chungsin"/> 그러나 그해 [[6월]] “같은달 있었던 광우병 쇠고기 촛불집회에 참가했다는 이유로 청와대에서 특별인턴 채용이 (더이상) 어렵다는 답변을 받았다”며 “두 번의 사전모임에서 정확히 어떤 업무를 하게될지는 언급하지 않았다”고 한다.<ref name="chungsin"/> 그는 곧 인턴직을 그만두게 되었다.
         [[2011년]] [[6월 2일]], [[서울중앙지방법원]]은 강의석을 [[병역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개월의 실형을 선고하여 법정 구속 수감했다.<ref name="mcnom">[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POD&mid=sec&oid=001&aid=0005093765&isYeonhapFlash=Y `병역거부' 강의석 징역 1년6월…법정구속] 연합뉴스 2011-06-02</ref> 서울중앙지법 형사11단독 권기만 판사는 2일 종교수업 반대운동으로 알려진 강의석(25)씨에게 입영을 거부한 혐의(병역법 위반)를 인정, 징역 1년6월을 선고하고 법정구속했다.<ref>[http://news.hankooki.com/lpage/society/201106/h2011060218205721950.htm <nowiki>[</nowiki>입영 거부<nowiki>]</nowiki> 군대 폐지 주장 강의석씨 법정구속] {{웨이백|url=http://news.hankooki.com/lpage/society/201106/h2011060218205721950.htm# |date=20131102222105 }} 한국일보 2011.06.02</ref> 재판 과정에서 강의석은 군 법무관으로 복무하고 싶다는 등의 발언을 했으며 이로 인해 재판부는 강의석이 신념에 갈등이 있는지 의문이 있다고 하였다. 재판부는 '신념 형성의 자유는 절대적 자유이지만, 이를 실현할 자유는 제한될수 있다'고 판결했다.<ref name="mcnom"/> {{출처|날짜=2012-11-19|서울구치소에서 수감되는 중에 재소자 인권을 주장하면서 2번의 단식투쟁을 하다가 2번째 단식투쟁에서 쓰러지고, 2월 9일에 해남교도소로 이감되었다.}}
         강씨는 “군대 제도는 사라져야 한다”며 입대를 거부하다 지난해 6월 병역법 위반으로 징역 1년6개월을 선고받아 경기 의왕 서울구치소에 수감되었다.<ref name="trusts"/> {{출처|날짜=2012-11-19|실형 선고를 받은지, 1년 2개월인 2012년 8월 15일 가석방되어 나왔다.}}
         그는 [[9월 19일]] 당시 가출인 신고만 된 상태로 경찰은 가출인 신고 전산망인 '182'에 강 군의 신원을 등록하는 데 그치지 않고 형사 3개팀 18명을 동원, 강군의 행방을 수색하였다.<ref name="susaek">[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210702 실종학생 '강의석을 찾아라' 경찰 18명 동원] 오마이뉴스 2004.09.19</ref> [[서울]] [[청량리경찰서]] 관계자는 19일 "단순 가출인이지만 강군이 단식을 오래한 특 수 상황인 만큼 형사들을 투입했다"며 "이를 [[서울경찰청]]에도 보고했다"고 말했다.<ref name="susaek"/> 이에 따라 청량리서 형사 6명이 18일 그가 갔을 것으로 추정되는 [[강원도]] [[정동진]]과 [[상원사]] 등을 직접 방문해 강군의 행방을 찾았으나 강군은 발견되지 않았다.<ref name="susaek"/> 그는 학교에서 제적 통보를 받은 6월 하순에도 [[강원도]] 상원사 등에서 사흘간 머문 적이 있다. 경찰은 또 강군이 주도하는 종교자유 모임 '로이'의 구성원들과도 접촉하고 강 군의 휴대전화 통화기록을 통해 그의 행방을 찾고 있었다.<ref name="susaek"/> 그러나 확인하지 못했다.
         경찰은 강군이 지난 [[6월]] 말 학교에서 제적당한 직후 찾아갔던 [[강원도]] [[강릉시]] [[정동진]]과 [[상원사]] 등에 지난 18일 형사 6명을 보냈으나 강군을 찾지 못했다. 경찰은 강군의 학교와 인터넷 카페 친구들을 수소문하고, 그가 집에 두고 나간 [[휴대전화]] 통화기록을 추적하였다. 경찰 관계자는 “추석 연휴 특별 경계강화 등으로 인력을 계속 배치할 수 없어 2개팀은 철수시킬 것”이라고 밝혔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81&aid=0000014305 단식중 가출 ‘강의석군을 찾아라’ 경찰 출동] 서울신문 2004년 09월 20일자</ref> [[9월 20일]] 전국 수배 끝에 경남 고성시외버스터미널에서 신고를 받고 출동한 고성경찰서 직원에 의해 발견되었다. 경남 고성경찰서는 가출인으로 수배된 강군을 오늘 오후 고성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발견해 경찰서로 데려갔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34&aid=0000136976 가출 강의석군 경남 고성서 발견] YTN 2004년 09월 20일자</ref> 이어 곧 서울 청량리서를 거쳐 집으로 인계되었다.
  • 강의석 (영화감독)
         고등학교 재학 중 교내 [[종교의 자유]]와 관련된 시위와 소송에 연관되어 제적당했다. [[2004년]] [[8월 11일]]부터 [[9월 22일]]까지 [[10월 16일]]부터 [[10월 22일]]까지 두 차례에 걸쳐 [[대광고등학교]] 측에 종교의 자유를 요구하는 단식 농성을 벌였다. 그해 [[6월 16일]] 학교 교내 방송으로 종교의 자유를 선언하였다가 퇴학당했으며, 이후 [[국가인권위원회]]에 종교 선택의 자유, 퇴학 무효를 청원하여 이끌어냈다. 이 소송은 결국 [[2010년]] [[대법원]] 최종심에서 승소하였다.
         그는 군대의 폭력성과 [[인권침해]]를 비판하여 군대 폐지론을 주장하기도 했다. [[2011년]] [[6월 2일]] [[병역법]] 위반혐의로 징역 1년 6개월의 실형을 선고받아 법정 구속 수감됐으며, 실형을 받은지 1년 2개월인 [[2012년]] [[8월 15일]] [[가석방]]을 받았다. 투옥 중에는 [[수감자 처우 개선]]을 요구하며 [[단식투쟁]]을 벌였다.<ref name="trusts">[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518291.html 강의석, 구치소서 ‘단식투쟁’ 하다 쓰러져] 한겨레신문 2012년 02월 9일자</ref> 그는 또 일부 국가대표 체육 선수들의 병역면제(엄밀히는 [[예술체육요원]]) 혜택에 대해 서민 남성들은 군대 가야 하는데 체육 하나 잘한다는 이유로 부당하게 [[병역면제]]를 받는다며 모 국가대표 선수들을 비판하기도 했다. [[서울특별시|서울]] 출신이다.
         강의석은 [[1986년]] [[8월 25일]] [[서울특별시|서울]]에서 회사원 아버지 강재정과 약학자 어머니 [[백완숙]]의 아들로 태어났다. [[1999년]] [[3월]] [[서울특별시|서울]] 의 [[성일중학교]]를 거쳐 [[2002년]] [[대광고등학교]]로 진학했다. 강의석은 [[서울]] [[동대문구]] [[대광고등학교]]의 평범한 학생이었으나, 종교 강요에 대한 반발로 학생운동가가 되었다. 고등학교 3학년 재학 중인 [[2004년]] [[6월]] 학교가 학생들에게 [[개신교]] [[예배]]를 강요하는 데 반발하여 시위하였다.<ref name="relision_protest">{{웹 인용 |url=http://search.ytn.co.kr/ytn/view.php?s_mcd=0103&key=200406220808011584 |제목='특정종교 강요' 고교생 1인시위 |출판사=YTN |확인날짜=2007년 11월 7일 |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131029204916/http://search.ytn.co.kr/ytn/view.php?s_mcd=0103&key=200406220808011584 |보존날짜=2013년 10월 29일 |깨진링크=예 }}</ref> 이후 그는 학생운동가가 되어 종교의 자유와 사회 비판을 시작하였다. 한편 예배 반대 시위를 한 이유로 그는 곧 학교에서 [[제적]]당했다.<ref name="expulsion">{{웹 인용 |url=http://search.ytn.co.kr/ytn/view.php?s_mcd=0103&key=200407091627002179 |제목='종교자유' 1인시위 고교생 제적 |출판사=YTN |확인날짜=2013년 10월 29일 |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131104011209/http://search.ytn.co.kr/ytn/view.php?s_mcd=0103&key=200407091627002179 |보존날짜=2013년 11월 4일 |깨진링크=예 }}</ref>
         [[2004년]] [[6월 16일]] 아침, 강의석은 학내방송을 통해‘종교자유 선언’을 했다.<ref name="jongja"/> [[대광고등학교]] 학생회장 신분이자 [[6월]] 첫째 주까지도 예배에 성실하게 나와서 활동하던 그의 돌발 계획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2008년]] [[5월]] 이명박정부 시절 청와대 인턴으로 채용됐던 적이 있었다고 밝혔다. 하지만 그는 최종 채용에서는 탈락하였다.<ref name="chungsin">[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112&aid=0002402628 강의석 MB정부때 청와대 특별인턴 채용] 해럴드생생 경제뉴스 2013.03.10</ref> 그는 “택시 운전일을 하고 있었는데 청와대에서 특별인턴 제도를 만들어 채용할 의향이 있는데 혹시 해볼생각이 없냐고 전화가 왔다”며 “한달동안 두차례 청와대에 들어가 사전모임을 가지기도 했다” 한다.<ref name="chungsin"/> 그러나 그해 [[6월]] “같은달 있었던 광우병 쇠고기 촛불집회에 참가했다는 이유로 청와대에서 특별인턴 채용이 (더이상) 어렵다는 답변을 받았다”며 “두 번의 사전모임에서 정확히 어떤 업무를 하게될지는 언급하지 않았다”고 한다.<ref name="chungsin"/> 그는 곧 인턴직을 그만두게 되었다.
         [[2011년]] [[6월 2일]], [[서울중앙지방법원]]은 강의석을 [[병역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개월의 실형을 선고하여 법정 구속 수감했다.<ref name="mcnom">[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POD&mid=sec&oid=001&aid=0005093765&isYeonhapFlash=Y `병역거부' 강의석 징역 1년6월…법정구속] 연합뉴스 2011-06-02</ref> 서울중앙지법 형사11단독 권기만 판사는 2일 종교수업 반대운동으로 알려진 강의석(25)씨에게 입영을 거부한 혐의(병역법 위반)를 인정, 징역 1년6월을 선고하고 법정구속했다.<ref>[http://news.hankooki.com/lpage/society/201106/h2011060218205721950.htm <nowiki>[</nowiki>입영 거부<nowiki>]</nowiki> 군대 폐지 주장 강의석씨 법정구속] {{웨이백|url=http://news.hankooki.com/lpage/society/201106/h2011060218205721950.htm# |date=20131102222105 }} 한국일보 2011.06.02</ref> 재판 과정에서 강의석은 군 법무관으로 복무하고 싶다는 등의 발언을 했으며 이로 인해 재판부는 강의석이 신념에 갈등이 있는지 의문이 있다고 하였다. 재판부는 '신념 형성의 자유는 절대적 자유이지만, 이를 실현할 자유는 제한될수 있다'고 판결했다.<ref name="mcnom"/> {{출처|날짜=2012-11-19|서울구치소에서 수감되는 중에 재소자 인권을 주장하면서 2번의 단식투쟁을 하다가 2번째 단식투쟁에서 쓰러지고, 2월 9일에 해남교도소로 이감되었다.}}
         강씨는 “군대 제도는 사라져야 한다”며 입대를 거부하다 지난해 6월 병역법 위반으로 징역 1년6개월을 선고받아 경기 의왕 서울구치소에 수감되었다.<ref name="trusts"/> {{출처|날짜=2012-11-19|실형 선고를 받은지, 1년 2개월인 2012년 8월 15일 가석방되어 나왔다.}}
         그는 [[9월 19일]] 당시 가출인 신고만 된 상태로 경찰은 가출인 신고 전산망인 '182'에 강 군의 신원을 등록하는 데 그치지 않고 형사 3개팀 18명을 동원, 강군의 행방을 수색하였다.<ref name="susaek">[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210702 실종학생 '강의석을 찾아라' 경찰 18명 동원] 오마이뉴스 2004.09.19</ref> [[서울]] [[청량리경찰서]] 관계자는 19일 "단순 가출인이지만 강군이 단식을 오래한 특 수 상황인 만큼 형사들을 투입했다"며 "이를 [[서울경찰청]]에도 보고했다"고 말했다.<ref name="susaek"/> 이에 따라 청량리서 형사 6명이 18일 그가 갔을 것으로 추정되는 [[강원도]] [[정동진]]과 [[상원사]] 등을 직접 방문해 강군의 행방을 찾았으나 강군은 발견되지 않았다.<ref name="susaek"/> 그는 학교에서 제적 통보를 받은 6월 하순에도 [[강원도]] 상원사 등에서 사흘간 머문 적이 있다. 경찰은 또 강군이 주도하는 종교자유 모임 '로이'의 구성원들과도 접촉하고 강 군의 휴대전화 통화기록을 통해 그의 행방을 찾고 있었다.<ref name="susaek"/> 그러나 확인하지 못했다.
         경찰은 강군이 지난 [[6월]] 말 학교에서 제적당한 직후 찾아갔던 [[강원도]] [[강릉시]] [[정동진]]과 [[상원사]] 등에 지난 18일 형사 6명을 보냈으나 강군을 찾지 못했다. 경찰은 강군의 학교와 인터넷 카페 친구들을 수소문하고, 그가 집에 두고 나간 [[휴대전화]] 통화기록을 추적하였다. 경찰 관계자는 “추석 연휴 특별 경계강화 등으로 인력을 계속 배치할 수 없어 2개팀은 철수시킬 것”이라고 밝혔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81&aid=0000014305 단식중 가출 ‘강의석군을 찾아라’ 경찰 출동] 서울신문 2004년 09월 20일자</ref> [[9월 20일]] 전국 수배 끝에 경남 고성시외버스터미널에서 신고를 받고 출동한 고성경찰서 직원에 의해 발견되었다. 경남 고성경찰서는 가출인으로 수배된 강군을 오늘 오후 고성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발견해 경찰서로 데려갔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34&aid=0000136976 가출 강의석군 경남 고성서 발견] YTN 2004년 09월 20일자</ref> 이어 곧 서울 청량리서를 거쳐 집으로 인계되었다.
  • 공성진
         * [[2010년]] [[6월]]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위원
         * [[2011년]] [[6월]] 18대 의원직 상실
         이후 2011년 6월 집유형이 확정되어 의원직을 상실했다. 한편 [[삼화저축은행]] 관련 비리에도 연루된 상태이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55&aid=0000206685]</ref>
         2012년 2월 23일(현지시간) 미국 로스엔젤레스 국제공항에서 입국심사도중 전자여행허가 시스템에 범죄관련 유무를 허위로 기재했다가 발각되어 입국이 거부, 한국으로 돌아왔다. 공성진 새누리당 전 의원은 삼화저축으로부터 억대의 불법정치자금을 받은 혐의로 징역6월, 집행유예1년, 추징금 1억 7000만원을 선고받았다.<ref>{{뉴스 인용|url=http://kr.news.yahoo.com/service/news/shellview.htm?linkid=rank_news&articleid=20120226004350774g7&newssetid=768|제목=공성진 전 의원, 미국 공항서 쫓겨나... 범법사실 허위기재
         |임기 = [[2008년]] [[5월 30일]] ~ [[2011년]] [[6월 9일]]
  • 곽상도
          - [[2016년]] [[6월]] ~ [[2018년]] [[5월]] : 제20대 국회 전반기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회 위원
         * [[2018년]] [[5월 23일]] ~ [[2018년]] [[6월 13일]] : 6.13지방선거 자유한국당 대구시당 공동선거대책위원회 전략본부 본부장
         * [[대한민국 국가정보원 여론 조작 사건]] 검찰 수사에 압박을 가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ref>임혜리,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306101140301&code=910402 신경민 "곽상도, 검사들 회식 자리 전화해 '니들 뭐하는 사람들이냐'고 말해"], 한겨레, 2013년 6월 10일</ref>
  • 곽상훈 (국회의원)
         [[3.1만세운동]]에 가담했다가 투옥된 이후, [[신간회]]·[[상해한인청년동맹]] 등 여러 단체에 가담해 활약하였다. 광복 이후 반탁 운동에 가담했다가 [[대한민국]] 정부 수립론에 지지를 보냈다. [[제헌국회의원]]에 선출되고, [[1949년]] 반민특위 위원으로 특위 검찰차장에 임명되어 활약하였으며 [[1955년]] [[민주당 (1955년)|민주당]] 창당에 참여하여 [[민주당 (1955년)|민주당]] 신파의 지도자로 활동한다. 5선 [[대한민국의 국회의원|국회의원]]을 지내고 4,5대 국회에서는 국회의장을 역임하였다. 1955년 민주당 최고 위원이 되었으며, [[1960년]] [[6월]] 일시적으로 [[대한민국의 대통령|대통령 권한대행]]직을 수행하였다. 이어 제5대 국회의원으로 뽑히어 국회 의장이 되었으나 [[5·16 군사 정변]]으로 그만두고 곧 [[민주당 (1955년)|민주당]]을 탈당하였다. 5.16 직후 [[군사 정권]]이 주는 감투는 거절하고 야인으로 생활하였다. 그러나 이후 [[1972년]] [[유신 체제]]에 참여하여 육영재단 이사장, [[통일주체국민회의]] 운영위원장 등을 역임하여 야당 동료들의 비판을 받기도 했다.
         [[신간회]](新幹會)가 결성되자 [[1920년]] 신간회(新幹會)에 가입하여 신간회 중앙간부로도 활약하였다.<ref name=autogenerated2>http://news.itimes.co.kr/Default.aspx?classCode=101&id=view&seq=330448{{깨진 링크|url=http://news.itimes.co.kr/Default.aspx?classCode=101&id=view&seq=330448 }}</ref> 이후 신간회 검찰위원을 지냈다.<ref name="다음"/> [[1920년]] [[6월 16일]] [[경성부]] 명월관에서 열린 [[조선체육회]]발기인회에 발기인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였다.<ref>이학래 《한국체육사연구》 (국학자료원, 2006) 375~376페이지</ref> [[1920년]] [[8월]] 한용단 단장으로 활동하며 이우구락부와 공동으로 열린 음악회를 후원하였다.<ref name="신정회1">[http://www.kihoilbo.co.kr/news/articleView.html?idxno=314737 국악동호인회를 조직했던 서병훈] 기호일보 2008년 11월 16일</ref> [[1921년]] 원산의 부두노동자들이 [[원산총파업]]을 강행하자 신간회 인천지부에서 활동하며 국민들을 상대로 원산의 인부모집에 응하지 말라며 설득, 호소하였다.<ref>이이화 《한국사 이야기 21:해방 그날이 오면》(한길사, 2006) 98페이지</ref>
         25년 중국의 상하이 한인 교포들을 통해 동경대지진 당시 조선인이 대량학살당한 소식을 전달하고, 25년 8월 동경대지진 조선인학살자 2주기 추도식을 주관했다. [[1927년]] [[6월 6일]] 계급과 파벌을 타파하고 전인천적 집단체로 인천의 유지들이 창립한 신정회(新正會) 창립에 참여, 신정회의 창립멤버가 되었다.<ref name="신정회1"/>
         |임기 = [[1960년]] [[6월 16일]] ~ [[1960년]] [[6월 23일]](권한대행)
         |임기= [[1960년]] [[5월 2일]] ~ [[1960년]] [[6월 6일]]
         |임기= [[1960년]] [[6월 7일]] ~ [[1960년]] [[6월 23일]]
         임기=[[1960년]] [[6월 16일]] ~ [[1960년]] [[6월 23일]]
  • 구하라
         [[1991년]] [[1월 13일]]<ref>[http://weibo.com/u/5509625679 1월 13일은 호적상 생일이며, 실제 생일은 1월 3일이다. 본인 웨이브 계정에 생일이 1월 3일이라고 나와있다.]</ref>,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종로구]] [[경운동]]에서 태어났다. 광주 출신으로 [[운현초등학교]], [[서울교동초등학교]]를 다닐 적에 2년 동안 육상부에서 활동한 경험이 있다.<ref>{{뉴스 인용|제목=구하라 달리기 괴력 이유 있었네‘초중시절 2년간 육상부 활동’|url=http://www.newsen.com/news_view.php?uid=200910061039561002|출판사=뉴스엔|저자=김형우 기자|날짜=2009-10-06}}</ref> [[서울경운학교]]를 다니다가 연예계 활동의 편의를 위해 전학한 [[서울경운학교]]를 졸업하고, [[성신여자대학교]] 미디어영상연기학과에 진학하였다.<ref>{{뉴스 인용 |제목 = 카라 성신여대 수시 합격…"운전면허 딴 것보다 기뻐"|url =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018&aid=0002333851|출판사 = 이데일리 |저자 = 양승준|날짜 = 2010-11-02 |확인날짜 = 2010-11-03}}</ref> 학창시절 인터넷 의류 쇼핑몰 모델로 활동한 경력이 있다.<ref>{{뉴스 인용 |제목 = 구하라, 피팅모델때부터 '완벽미모'로 유명해|url = http://www.asiatoday.co.kr/news/view.asp?seq=268707|출판사 = 아시아투데이 |저자 = 인터넷뉴스팀|날짜 = 2009-07-20 |확인날짜 = 2010-01-11}}</ref> 2007년에 [[JYP 엔터테인먼트]]가 주최한 오디션에 참가해 결선까지 진출했으나, 최종 관문에서 탈락하였고,<ref>[https://www.youtube.com/watch?v=NlmiOxIDZBY [[JYP]]오디션 최종본선 26번], 《유튜브》, 2011년 06월 21일 확인.</ref><ref>{{뉴스 인용 |제목 = [스타의 모든것③] 구하라|url = http://isplus.joins.com/article/article.html?aid=1284463|출판사 = 일간스포츠 |저자 = 이경란 기자 |날짜 = 2009-12-08 |확인날짜 = 2010-01-11}}</ref> 이후 [[DSP 미디어]]의 오디션을 통해 [[카라 (음악 그룹)|카라]]의 구성원으로서, [[2008년]] [[7월 24일]]에 [[Mnet]] [[엠 카운트다운]]을 통해 데뷔하였다.
         [[2019년]] [[5월 26일]] 구하라는 [[서울특별시]] [[강남구]] [[청담동]] 자택에서 자살을 시도하였으나 발견 이후 응급실로 이송되어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다.<ref>{{뉴스 인용 |제목=가수 구하라, 극단 선택 시도…"의식 없지만 호흡·맥박 정상" |url=https://www.yna.co.kr/view/AKR20190526022100004 |출판사=연합뉴스 |저자=정래원 |날짜=2019-05-26 |확인날짜=2019-11-24 }}</ref> 이후 [[2019년]] [[6월]]에 활동을 재개하고 일본의 프로덕션 오기와 전속계약을 체결하였으며<ref>{{뉴스 인용 |제목=구하라, 日유명 소속사 프로덕션 오기 전속계약…카라 인연 |url=http://isplus.live.joins.com/news/article/aid.asp?aid=23096060 |출판사=일간스포츠 |저자=황지영 |날짜=2019-06-22 |확인날짜=2019-11-24 }}</ref>, [[11월 13일]]에 첫 번째 일본 싱글 《[[Midnight Queen]]》을 발매하였다.<ref>{{뉴스 인용 |제목=구하라, 日 솔로 앨범 '미드나잇 퀸' 실물음반 직접 공개 |url=http://tenasia.hankyung.com/archives/1848543 |출판사=텐아시아 |저자=우빈 |날짜=2019-11-06 |확인날짜=2019-11-24 }}</ref> 그러나 발매 12일만인 [[2019년]] [[11월 24일]] 오후 06시 09분경 서울특별시 강남구 [[청담동]] 자택에서 숨진 채로 발견되었다.<ref><!--최초 보도-->{{뉴스 인용 |제목=[속보] 가수 구하라 자택서 숨진 채 발견(1보) |url=http://www.market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38696 |출판사=마켓뉴스 |저자=김민수 |날짜=2019-11-24 |확인날짜=2019-11-24 }}</ref> 사인은 자살로 밝혀졌다. 유골은 [[서울성모병원]]에서 장례 후 원지동 [[서울추모공원]]에서 화장된 뒤 오포읍 신현리 [[스카이캐슬 (납골당)|스카이캐슬]]에 안치되었다.
         * 2015년 4월 05일 ~ 2015년 6월 21일 [[KBS 제2TV|KBS2]] 《[[어 스타일 포 유]]》 진행자 ([[희철|김희철]], [[윤보라 (배우)|보라]], [[하니 (가수)|하니]]와 공동 진행)
         * 2016년 In style 6월
  • 권람
         [[조선 단종|단종]] 즉위 초 [[계유정난]](癸酉靖難)때 [[김종서 (1383년)|김종서]], [[황보 인]] 등을 제거할 때에 적극 가담, 앞장섰으며 김종서, 황보 인 등 대신들의 세력을 제거하고 이들이 왕을 능가하는 권력남용을 했다며 이들을 비판하였다. 그 뒤 정난의 성공을 위해 노력한 공로로 수충위사협책정난동덕좌익공신[[정난공신]](輸忠衛社協策靖難同德佐翼功臣) 1등관에 녹훈되고 바로 [[승정원]]동부승지에 승진했다가 이후 우부승지에 올랐다. [[1454년]](단종 2년) [[2월]] [[승정원]][[우부승지]], [[8월]] [[좌부승지]]로 승진했다. [[1455년]] 여름 우승지를 거쳐, [[1455년]](세조 즉위년) [[6월]] [[조선 단종|단종]]이 강압으로 양위하고 [[조선 세조|세조]]가 즉위하자 [[6월]] [[이조]] [[참판]](吏曹參判)에 발탁되고 길창군(吉昌君)에 봉군되었다.
  • 권영세 (1959년)
         * [[1991년]] [[3월]] ~ [[1992년]] [[6월]] : 춘천지방검찰청 강릉지청 검사
         * [[2013년]] [[6월]] ~ [[2015년]] [[3월]] : 주중국 대한민국 대사관
         |임기 = [[2013년 6월]] ~ [[2015년]] [[3월 26일]]
  • 권희로
         [[일본]] 경찰에 체포된 권희로는 1971년, 1974년, 1975년 3심을 거쳐 [[일본 최고재판소]]에서 무기징역이 확정되었다. 이후 [[구마모토 형무소]]에서 24년을 복역하고 1999년 6월에 [[도쿄]] 시내 [[후추 형무소]], [[지바 형무소]]로 이감되었다.
         [[1971년]] 1심, [[1974년]] 2심을 거쳐 1975년 11월 [[일본]] 최고재판소에서 무기징역이 확정되었던 권희로는 이후 24년간 구마모토 형무소에서 복역해 오다가 [[1999년]] [[6월]] 하순 [[도쿄 시]]내 후추 형무소, [[지바 형무소]]로 이감되었다.
  • 김 로사
         [[1839년]] [[6월]], [[천주교]]를 병적으로 싫어하던 [[조병구]]가 [[조선]] [[조정 (정치)|조정]]의 실권을 장악했다. [[7월 5일]]에는 [[교회]]를 완전히 박멸하라는 [[칙명|교지]]가 내려졌다. 그 이후에 [[순교]]한 첫번째 인물들은 이미 수감되어 있던 여덟 명의 천주교 신자들이었다. 그들 중 김 로사가 맨 먼저 체포되었다.
  • 김 로사 (1784년)
         [[1839년]] [[6월]], [[천주교]]를 병적으로 싫어하던 [[조병구]]가 [[조선]] [[조정 (정치)|조정]]의 실권을 장악했다. [[7월 5일]]에는 [[교회]]를 완전히 박멸하라는 [[칙명|교지]]가 내려졌다. 그 이후에 [[순교]]한 첫번째 인물들은 이미 수감되어 있던 여덟 명의 천주교 신자들이었다. 그들 중 김 로사가 맨 먼저 체포되었다.
  • 김기섭 (1939년)
         * [[1993년]] [[6월]] [[안기부]] 운영차장
         |임기 = [[1995년]] [[6월]] ~ [[1997년]] [[2월 28일]]
  • 김대우 (1900년)
         '''김대우'''(金大羽, [[1900년]] [[7월 10일]] ~ [[1976년]] [[4월 22일]])는 [[일제 강점기]]의 독립운동가, 친일반민족행위자 관료로 출신이며 본적은 [[서울특별시]] [[종로구]] 이다. [[1943년]] [[전라북도지사]], [[1945년]] [[6월]] [[경상북도지사]]에 임명되었다. 그해 [[8월]] 광복 직후 행정, 치안권 교섭에 총독부측 대표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였으며, 해방 직후에도 해방된 한국의 초대 경상북도지사를 지내다가 그해 [[10월 12일]] 물러났다.
         |장="나를 손가락질 해다오" - 전 홍익대학교 총장 이항녕}}</ref> 이렇게 승진을 거듭하던 김대우는 [[태평양 전쟁]] 종전 두달 전인 [[1945년]] 6월 [[경상북도]] 지사에 임명되어 광복을 맞았다.
         이후 [[1960년]] [[대한민국 제5대 국회의원 목록|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 [[민주당]] 공천으로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그해 [[6월 22일]] 그가 민주당 공천을 받고 국회의원에 입후보한 것이 문제시되기도 했다. 일각에서는 [[장면]] 당시 민주당 대표가 그의 입후보를 권고하고 도왔다는 의혹도 제기되었다. [[1961년]] [[7월]]에는 [[5.16 군사 정변]] 직후 군정이 [[민주당]] 정권 관련자들을 용공으로 몰아 재판할 때 그가 민주당 각료들을 도와 일본 약품을 밀입수하려 했다는 혐의를 받기도 했다. [[1963년]] [[대한민국 제6대 국회의원 목록|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였으나 역시 낙선하였다.
         |임기 = [[1943년]] [[8월 18일]] ~ [[1945년]] [[6월 16일]]
         |임기 = [[1945년]] [[6월 16일]] ~ [[1945년]] [[8월 15일]]
  • 김동우 (1981년)
         [[1999년]] 프로게이머 활동을 시작하였으며, [[2000년]] [[6월]] [[삼성전자 칸]]의 초창기 맴버로 활동하였다.
  • 김동한 (1919년)
          | 생애 = [[1919년]] [[6월 25일]] ~ [[1983년]] [[9월 28일]] (65세)
         '''김동한'''(金東漢, [[1919년]] [[6월 25일]] ~ [[1983년]] [[9월 28일]])은 [[대한민국]]의 [[대한민국 해군|해군]] [[군인]]이며 [[로마 가톨릭교회|가톨릭]] [[사제|성직자]] 겸 [[수필|수필가]]이다.
         [[1945년]] [[12월 15일]] 사제 서품을 받았다. 그 뒤 [[1948년]] [[8월]] [[경상북도]] [[상주시|상주군 함창읍]] 소재 함창동성당에서 본당 사제로 부임하여<ref>[http://www.catholicimage.org/comm/board/view.php?tid=church&division=&cate=&cate1=&schf=&schv=&lskin=list&idxNo=3434&refresh=true Catholic Image - Catholic Image<!-- 봇이 붙인 제목 -->]</ref> 1949년 6월까지 사목하였다.
         그 뒤 김동한 가롤로 사제는 [[1949년]] [[6월]]부터 [[1951년]] [[3월]]까지 [[창원시|경상남도 창원]]에서 사목하다가 [[1951년]] [[대한민국 해군|해군]]의 첫 [[군종장교|군종사관]](군종 신부)로 [[대한민국 해군|해군]] [[대위]] 임관하였다.<ref name="가톨1">[http://www.catholictimes.org/news/news_view.cath?seq=36413 (한국교회사 인물 80) (하)]{{깨진 링크|url=http://www.catholictimes.org/news/news_view.cath?seq=36413 }} 가톨릭뉴스</ref><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3&aid=0002528492 김동환 신부와 함께하는 故 김수환 추기경 :: 네이버 뉴스<!-- 봇이 붙인 제목 -->]</ref> 1953년 4월 진해 및 인근 본당들과 함께 ‘군민 합동 성체대회’ 개최했으며 이 대회는 진해 지역의 천주교 활성화에 크게 기여했다.<ref name="가톨1"/> 그 이후 [[대구광역시|경상북도 대구]] [[계산성당]] 등에서 사목하였다.
  • 김민희(1982)
          * 김민희는 과거 배우 [[이정재]], 모델 출신 배우 [[이수혁(배우)|이수혁]]과 공개연애를 했다. 그런 뒤 2013년 4월, 한 [[디스패치|인터넷 매체]]에서 [[조인성]]과의 [[파파라치]] 사진을 공개하면서 열애를 인정했다. 2014년 9월 24일 조인성과의 결별을 공식 발표했다. [[http://m.news.naver.com/read.nhn?sid1=106&oid=109&aid=0002886201|관련기사]] 그리고 [[2016년]] [[6월]], [[홍상수]] 감독과의 스캔들이 터지고 말았다. 문제는, 홍상수 감독은 기혼자라서 명백한 [[간통]]이라는 점이다.
          * 영화 《[[아가씨(영화)|아가씨]]》의 대히트로 인해 여성 관람객들에게 큰 인기를 끌어서 아이돌 못지 않은 인기를 얻었다. 김민희가 팬들에게 아이돌 못지 않는 팬서비스를 했을 뿐더러, 한창 얼굴도 빛나 [[여초]] 사이트에서는 가장 인기 있는 여배우로 떠올랐다. 원래부터 여성들의 워너비나 다름없었지만, 주가가 폭발적으로 오른 셈이다. 보름도 안 되는 기간 동안 약 600만원 가까이 조공 금액이 모이는 등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었으나… 2016년 6월 21일, [[홍상수]] 감독과의 간통 보도가 터지고 난 후 역대급으로 모였던 조공금액을 다시 환불해주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2016년]] [[6월 21일]], [[http://me2.do/GXMuEUFO|기사]]에서 [[홍상수]] 감독과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를 통해 호흡을 맞추고서 연인 관계로 발전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문제는 홍상수 감독은 이미 결혼해 아내와 대학생 딸까지 있다는 것.
         더욱 놀라운 것은 두 사람의 [[간통]]은 영화계에 암암리에 알려져 있던 사실이었고, [[홍상수]] 감독의 지인들이나 다른 [[영화 감독]]들이나 영화 [[제작자]]들과 [[배우]]들까지, 여러 연예업계 종사자들도 이에 대해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http://me2.do/5VnEezht|#]] 영화계에선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로 유명한 내용이었지만 기사가 나오지 않은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었다고 한다. [[http://me2.do/GsSnT8ET|홍상수 김민희 불륜설 비하인드 (뉴스엔 윤가이 기자)]] 영화 《[[아가씨(영화)|아가씨]]》가 [[칸 영화제]]로 진출할 때까지, 해당 영화 관계자들은 이 사실을 암암리에 아는 기자들에게 "영화에 흠이 되지 않게끔, 기사를 쓰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실제로 실명을 언급하지 않은 기사가 6월 1일자로 보도된 바 있다. [[http://www.ikoreadaily.co.kr/news/articleView.html?idxno=232065#074z|#]] ~~실명 대신 제목으로..~~
         하지만 [[2016년]] [[7월 20일]]에 방영된 [[리얼스토리 눈]]에서, 홍상수 감독의 부인은 '''자신은 인터뷰를 한 적이 없으며 일부 기사는 기자들의 악의적인 보도로 심하게 과장되었다고 밝혔다.''' 한 마디로 6월 21일 단독보도라면서 나온 김민희의 [[막장 드라마]]스러운 발언 외에 기타 여러가지 자극적인 관련 보도는 정작 당사자와는 한 마디도 나누지 않은 한마디로 [[카더라]] 통신에 불과 한 것. 자세한 것은 [[홍상수]] 항목 참조.
         [[2016년]] [[7월 17일]], 6월에 출국한 지 약 1개월 만에 [[프랑크푸르트]]에서 아시아나 항공기로 [[인천국제공항]]에 입국했고, 마중 나온 것으로 보이는 젊은 남자와 함께 공항을 떠났다는 보도가 나왔다. 하지만 이 보도 역시 사실인지 아닌지 불확실하다.
         2017년 6월, 홍상수 감독과 [[성동구]] [[옥수동]]의 아파트인 [[래미안 옥수 리버젠]]에서 [[http://m.news.nate.com/view/20170614n19422|함께 거주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 김병현 (독립운동가)
         '''김병현'''(金柄鉉, [[1925년]] ~ [[2008년]] [[6월 29일]])은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이다.<ref name="조선일보">[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6/30/2008063001752.html <nowiki>[부음]</nowiki> 애국지사 김병현 선생 별세], 조선일보. </ref>
         [[1940년]] [[동래중학교]] 재학 중 양중모·남기명·김지훈 등과 함께 [[독서회]]를 조직하였다.<ref name="조선일보" /><ref name="서울신문">[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080701027019 <nowiki>[부고]</nowiki> 독립운동가 김병현 선생 별세], 서울신문. </ref> 졸업후 [[1941년]] 독서회를 강화하고 [[조선독립당]]을 조직하여 항일투쟁을 하였다. 이후 항일결사단체인 자일회(紫一會)와 순국당(殉國黨) 등과 연대하여 광범위한 항일투쟁을 주관하다가 [[1944년]] [[8월]] [[조선독립당]]이 [[일본 제국|일제]]에 발각되자 수감되어 [[1945년]] [[6월]]까지 [[부산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1982년]] [[대통령표창]],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ref name="조선일보" /><ref name="서울신문" /><ref name="한국일보">[http://news.hankooki.com/lpage/people/200806/h2008063003102184840.htm 애국지사 김병현 선생 별세]{{깨진 링크|url=http://news.hankooki.com/lpage/people/200806/h2008063003102184840.htm }}, 한국일보.</ref>
  • 김상훈 (1963년)
         * 2004년 8월 ~ 2006년 6월 : 미국 오리건 대학교 대학원 행정학 석사
         * [[2006년]] [[6월]] ~ [[2007년]] [[12월]] : 대구시청 경제산업국장
         * [[2014년]] [[6월]] ~ [[2015년]] [[2월]] : 제19대 국회 후반기 국회운영위원회 위원
         * [[2016년]] [[6월]] ~ [[2018년 5월]] : 제20대 국회 전반기 보건복지위원회 간사
         * [[2017년]] ~ [[2018년 6월]] : 자유한국당 정책위원회 보건복지 정책조정위원장
         * [[2017년]] [[6월]] ~ : [[자유한국당]] 민생AS센터 맞춤복지위원회 위원장
         * [[2018년]] [[5월 23일]] ~ [[2018년]] [[6월 13일]] : 6.13지방선거 자유한국당 대구시당 공동선거대책위원회 위원장
  • 김숙자 (1389년)
         [[1435년]](세종 17) [[9월]]에 한성으로 돌아가 그해 [[10월]] 성균관학록에 복직했으며<ref name="ginyon"/>, [[12월]]에 학정(學正)으로 승진하고, 또 통사랑(通仕郞)으로 다시 승진,[[성균관]]진덕박사 겸 [[양현고]]녹사(成均館進德博士兼養賢庫錄事)에 임명되었다. [[1436년]]에 경명행수(經明行修)의 선비 추천에서 첫 번째로 꼽혀 세자우정자(世子右正字)가 되었다. 그러나 얼마 후 선산의 교수관으로 나갔다가 개령현감이 되었다. [[9월]] [[무공랑]] [[성균관]]박사겸 [[양현고]]승이 되었다. [[1437년]] [[12월]] [[선무랑]]에 배사하고 [[선공감]]주부에 임명되었으며, 이듬해 [[2월]] [[예빈시]]주부, [[6월]] [[내자시]]주부 등을 역임했다.
  • 김순악
         | 출생일 = [[1928년]] [[6월]] [[경상북도]] [[경산시]]
         '''김순악'''([[1928년]] 6월 ~ [[2010년]] [[1월]])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이자 [[대한민국]]의 인권운동가이다.
  • 김영래
         * [[1983년]] [[6월]] : 부산지방철도청 기술과 과장
         * [[2002년]] [[6월]] : 철도청 차량본부 차량계획과 과장
         * [[2003년]] [[6월]] : 한국고속철도건설공단 파견
         * [[2004년]] [[6월]] : 철도청 기술개발본부 본부장
  • 김온순 (1812년)
         [[1852년]] [[6월]] 헌릉참봉(獻陵參奉), [[12월]] [[사옹원]]봉사를 지냈다. [[1853년]] [[12월]] [[예빈시]][[직장]]과 [[사옹원]][[직장]], [[1855년]] [[6월]] [[장원서]][[별제]], [[한성부]][[주부]]가 되었다가 [[7월]]에 다시 상을 당하여 사퇴하였다. [[1857년]] [[12월]] 빈전도감의 낭청으로 참여하여 특별히 승진서용되었으며, [[1859년]] [[12월]] [[빙고]]별제가 되었다.
         [[1861년]] [[6월]] [[종친부]]전부(典簿), [[1862년]] 음력 윤 8월 문화현령(文化縣令)으로 부임하였다. 이후 해주판관(海州判官)으로 나갔다가 [[1865년]] [[1월 7일]] [[합천]][[군수]](陜川郡守)로 나갔다가 종3품으로 승진했다. 그해 [[5월 23일]] 순창 군수(淳昌郡守) 이승락(李承洛)과 직책을 교체하여 그가 [[순창군|순창]][[군수]](淳昌郡守)로 부임하였다.
         [[1866년]] [[2월]] [[조선 고종|고종]]의 왕비 간택 때 그의 딸 중 한명도 간택대상자에 해당되었으나 그는 병을 이유로 [[예조]]를 통해 간택에 불참하였다. [[1866년]] [[6월]] 선정으로 별천되기도 했다. 그해 [[6월 18일]] 선치를 베푼 지방관들을 포상할 때 활과 화살과 통개(筒箇)를 [[조선 고종|고종]]에게 선물로 하사받았다.
  • 김윤정 (1869년)
         </ref>, [[1869년]] [[6월 25일]] ~ [[1949년]] [[10월 23일]])은 [[조선]] 후기의 문신, 외교관이자 [[대한제국]]과 [[일제 강점기]]의 관료이다. 경무관 재직 시절 [[일본인]] 쓰치다 조스케(土田讓亮)를 살해한 혐의로 끌려온 [[김구|김창수]](독립운동가 백범 김구의 본명)를 심문하기도 했고, 외교관으로 있을 때는 미국 국무부에 고종의 밀서를 전달해 달라던 [[이승만]]의 청을 거절하였다.
         [[1945년]] [[4월]] 중추원 고문직에 올랐다. 다시 [[1945년]] [[6월]]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으로 임명되었지만<ref name="네이트1"/> 2개월 뒤인 [[8월]] 광복을 맞이하였다.
  • 김정남 (1972년)
         * [[2001년]] [[6월]] 터보 해체가 되고 후임 멤버였던 마이키와 같이 기자회견을 가지고 터보 히스토리앨범을 제작해서 마지막 작품을 남겼고 하반기에는 MBC 목표달성 토요일 프로젝트인 악동클럽의 멤버를 가르치는데 참여하였다.
  • 김정배 (역사학자)
         |임기 = [[1998년]] [[6월]] - [[2002년]] [[6월]]
  • 김종수 (1728년)
         그 뒤 [[예조]][[정랑]], [[홍문관]]부수찬(副修撰)을 거쳐 [[세손시강원]]필선(弼善)으로 다시 세손을 성실히 보좌하였다.<ref name="nate01">[http://koreandb.nate.com/history/people/detail?sn=8604 김종수:네이트 한국학]{{깨진 링크|url=http://koreandb.nate.com/history/people/detail?sn=8604 }}</ref> 이때 외척의 정치간여를 배제해야 한다는 의리론이 정조에게 깊은 감명을 주어, 뒷날 정치의 제1의리로 삼은 정조의 지극한 신임을 받았다.<ref name="nate01"/> 그해 [[4월]] [[사간원]]정언, [[5월]] [[홍문관]]부수찬을 지냈다. 그해 [[6월]] 필선, 겸 사서, [[12월]] 부교리를 지냈다.
         [[1769년]] [[3월]] [[홍문관]]부교리, [[세손시강원]]필선, [[6월]] [[홍문관]]교리(校理)를 거쳐 응교가 되었다. [[12월]] 장연 현감(長淵縣監)에 임명되었으나 왕의 특별 배려로 다시 [[홍문관]]수찬으로 직책이 바뀌었다. 이어 [[경연]]시강관을 겸하였으며 그 뒤 다시 [[홍문관]]교리로 임명되었으나 [[1772년]] 당폐(黨弊)를 일으킨 죄로 탄핵을 받고 [[조선 영조|영조]]의해에 유배되었다.
  • 김질 (1422년)
         [[음서]]로 무관이 되고, 부사직(副司直)에 이르렀을 때 사가독서(賜暇讀書)를 청원하여, 특별히 허락받았다. 그 뒤 [[1447년]] 에 2등으로 합격했으며 [[1450년]](문종 즉위년) 문과에 급제하여 집현전 수찬, 사간원 우정언, 성균관 사예 등을 거쳐 [[1455년]] [[성삼문]](成三問)·[[박팽년]](朴彭年) 등과 함께 [[단종 복위 운동]]에 가담했다가 여러 번 기회를 놓치고 위험을 느끼게 되자, 뜻을 바꾸어 [[조선 세조|세조]]에게 사육신의 거사를 알렸으며 이 공로로 1456년(세조 2) 6월 25일 판군기감사(判軍器監事)가 되고,<ref>[http://sillok.history.go.kr/inspection/insp_king.jsp?tid=kga&pos=0&mTree=0&inResult=0&indextype=1&keyword=%ED%8C%90%EA%B5%B0%EA%B8%B0%EA%B0%90%EC%82%AC 세조 4권, 2년(1456 병자 / 명 경태(景泰) 7년) 6월 25일(계해) 2번째기사] "윤사로와 정창손에게 품계를 더하고, 박중손·성봉조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ref> 1455년 9월 5일 [[좌익공신]](佐翼功臣) 3등과<ref>[http://sillok.history.go.kr/inspection/insp_king.jsp?tid=kga&pos=0&mTree=0&inResult=0&indextype=1&keyword=%EA%B9%80%EC%A7%88+3%EB%93%B1 세조 2권, 1년(1455 을해 / 명 경태(景泰) 6년) 9월 5일(정축) 1번째기사] "좌익 공신을 정하다"</ref> 1459년(세조 5) 8월 25일 상낙군(上洛君)에 봉해졌고<ref>[http://sillok.history.go.kr/inspection/insp_king.jsp?tid=kga&pos=0&mTree=0&inResult=0&indextype=1&keyword=%EC%83%81%EB%9D%BD%EA%B5%B0 세조 17권, 5년(1459 기묘 / 명 천순(天順) 3년) 8월 25일(갑술) 3번째기사] "윤사흔·조석문·김질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ref> 뒤에 부원군으로 진봉되었다.
         [[조선 단종|단종]] 폐위 이후 [[1456년]] [[성삼문]]·[[박팽년]]·[[하위지]]·[[유성원]] 등과 함께 단종 복위운동에 가담하였으나 마음을 바꾸어, 이를 [[조선 세조|세조]]에게 알렸다. [[1456년]] [[성삼문]] 등의 단종복위운동에 김질이 가담하자, 장인 [[정창손]]은 이를 설득하였다. 김질은 거사가 성공하지 못할 줄로 알고 장인인 정창손에게 달려가 수시로 상의하였다. 그해 [[6월]] [[운검]] 설치가 취소되면서 일이 여의치 않자 불안감을 느꼈던 김질은 전향, 이 사실을 [[정창손]]에게 알렸다.
         그해 [[6월 2일]] 김질은 [[의정부시|의정부]][[우찬성]]인 장인 [[정창손]]과 함께 궐로 찾아가 사육신의 거사를 폭로하였다.<ref>세조실록 4권, 세조 2년(1456 병자 / 명 경태(景泰) 7년) 6월 2일(경자) 2번째기사 "성균 사예 김질과 우찬성 정창손이 성삼문의 불궤를 고하다"</ref> 정창손은 김질과 같이 대궐로 달려가 고변하며 '신은 실로 모르고 김질만 혼자 참여하였는데, 김질의 죄는 만번 죽어 마땅합니다.'라고 하니, 세조가 특별히 김질을 사면하였다.
         [[1459년]] [[4월]] 왕명으로 선물인 연회에 쓰이는 탁자들을 2품 이상의 대신들에게 나누어주었다.<ref>세조실록 16권, 세조 5년(1459 기묘 / 명 천순(天順) 3년) 4월 12일(계해) 2번째기사 "연탁을 종2품 이상의 문관과 무관에게 내리다"</ref>, 그해 [[6월]] 다시 좌승지가 되었다. 그해 [[7월]]에는 대신들과 함께 군정의 점고를 의논하였다.<ref>세조실록 17권, 세조 5년(1459 기묘 / 명 천순(天順) 3년) 7월 2일(신사) 1번째기사 "강맹경 등과 군정의 점고를 의논하고, 이계전·김연지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ref> 그는 변방을 약탈하는 [[여진족]]에 대한 강경 대응을 건의하는 한편 북방에 성곽을 쌓고 정병을 파견하여 미구에 있을 [[여진족]]의 침략에 대비해야 함을 역설하였다. 또한 삼남의 남해안, 동해안에도 병력을 배치하고 성곽을 개보수하여 왜구의 침입과 노략질에 방비할 것을 건의하였다.
  • 김한중
         |복무 기간 = [[1974년]] [[3월]] ~ [[1979년]] [[6월]]
         * 2000년 7월 ~ 2002년 6월 : 한국보건행정학회 회장
         * 2010년 6월 ~ 2012년 1월 : 한국대학스포츠총장협의회 회장
  • 김혜리 (배우)
         | 배우자 = 강찬구 ([[2008년]] ~ [[2014년]] [[6월]])<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111&aid=0000090707 김혜리, 2일 한살 연상 사업가와 결혼]</ref>
         2008년 2월 한살 연상의 사업가 강찬구 씨와 결혼하였으나,<ref>[http://entertain.naver.com/read?oid=117&aid=0001939046 김혜리, 한 살 연상 사업가와 '파티 결혼식']</ref> 2014년 6월 성격차이로 이혼하였다.<ref>[http://entertain.naver.com/read?oid=144&aid=0000400161 미스코리아 출신 배우 김혜리, 6년 만에 협의이혼]</ref>
  • 남궁염
         '''남궁염'''(南宮炎, [[1888년]] [[3월 17일]] [[경기도|경기]] [[서울특별시|서울]] ~ [[1961년]] [[11월 29일]], 미국명 데이비드 남궁(David Y. Namkoong))은 한국의 독립운동가 겸 외교관이다. [[대한인동지회]] 뉴욕시 지부의 지부장이었으며, [[대한민국]] 정부 수립 직후부터 [[1960년]] [[6월]]까지 제1대 뉴욕 한국 총영사관 총영사를 역임하였다.
         그는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일체의 비용을 받지 못하였으나 자신이 활동비를 조달하고 영사관 건물을 마련하였다. 가난한 나라의 청빈한 외교관이었으나 한인 교민들의 정착에 크게 기여하였다. [[1955년]] [[7월 8일]]에는 [[외자청]](外資廳) 겸임 이사관(兼任理事官)에 임명되었다.<ref>"정부인사발령", 경향신문 1955년 07월 08일자 1면, 정치면</ref> [[1960년]] 4.19가 터지자 이승만의 사퇴 후 그해 [[6월]] 그도 총영사직을 사직하고 하와이로 은퇴하였다. 사직서는 그해 [[7월 14일]]에 수리되었다.
  • 리엄 헴스워스
         그는 [[2009년]] [[6월]] [[영화]] 《라스트 송》 촬영하는 동안 상대역 [[마일리 사이러스]]와 데이트를 시작했다. [[2010년]] [[8월]] 두 사람 관계가 끝난 것으로 알렸지만 한 달 후 보도에 따르면 재결합하였고, [[2011년]] 초 다시 결별했고, 그해 [[11월]] 2번째 재결합하였다.<ref>{{웹 인용 |url=http://www.showbizspy.com/article/229653/miley-cyrus-and-liam-hemsworth-back-together-2.html |title=Miley Cyrus and Liam Hemsworth: Back Together? | Showbiz Spy – celebrity news, rumors & gossip |publisher=Showbiz Spy |date=2011-04-01 |accessdate=2011-08-07 |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111125030022/http://showbizspy.com/article/229653/miley-cyrus-and-liam-hemsworth-back-together-2.html |보존날짜=2011-11-25 |깨진링크=예 }}</ref> 이후, [[2012년]] [[6월]] 리엄은 마일리와 약혼을 발표했다.<ref>{{웹 인용|url=http://www.people.com/people/article/0,,20601230,00.html|title=Miley Cyrus, Liam Hemsworth Are Engaged|publisher=People Magazine |date=2012-06-06 |accessdate=2012-06-06}}</ref> [[2013년]] [[9월]] 두 사람은 결별하였지만, 2016년 재결합한 뒤 2018년 12월에 결혼식을 올렸다. 그러나 두 사람은 결혼 8개월 만에 이혼했다.
  • 마이키
         * [[2001년]] [[6월]]에는 전멤버 김정남과 같이 기자회견에 참여후 터보 히스토리 앨범으로 마지막으로 거두었다.
  • 마일리 사이러스
         마일리 사이러스는 [[1992년]] [[11월 23일]], [[광주광역시]] [[광산구]] 에서 컨트리 가수 [[빌리 레이 사이러스]]와 티쉬(옛 핀레이)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다.<ref>{{웹 인용|언어=영어|url=http://images.eonline.com/static/news/pdf/miley_cyrus_name_change_2.pdf|제목=Court documents (faxed copy)|포맷=PDF|쪽=4|웹사이트=eonline.com|날짜=2008년 3월 14일|확인날짜=2015년 1월 2일|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080820170057/http://images.eonline.com/static/news/pdf/miley_cyrus_name_change_2.pdf|보존날짜=2008년 8월 20일|깨진링크=예}}</ref> 마일리의 부모님은 마일리가 나중에 큰 일을 해낼 것이라고 믿었기에 이름을 ' Destiny Hope ' (데스티니 호프) 라고 지었다. 마일리는 아기였을때 자주 웃고 있어서 별명이 ' Smiley ' (스마일리) 였는데, 나중에 별명을 ' Miley' (마일리) 로 줄였고, 곧 예명이 된다.<ref name="signonsandiego">{{웹 인용|이름=Hiltbrand|성=David|url=http://www.signonsandiego.com/uniontrib/20060520/news_1c20hannah.html|제목=Miley Cyrus braced for Disney stardom|웹사이트=The San Diego Union-Tribune|출판사=Platinum Equity|날짜=2006년 5월 20일|확인날짜=2010년 5월 30일|언어=영어}}</ref> 마일리는 아주 위험한 수준까지는 아니지만, 어쩔때 한번씩 일어나는 가벼운 빈맥을 앓고 있었다.<ref name="foxheartcondition">{{뉴스 인용|url=http://www.foxnews.com/entertainment/2009/03/10/miley-cyrus-discloses-heart-condition-new-book|제목=Miley Cyrus Discloses Heart Condition in New Book|날짜=2009년 3월 10일|뉴스=폭스 뉴스 채널|출판사=News Corporation|언어=영어|확인날짜=2010년 6월 1일|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101121003636/http://www.foxnews.com/entertainment/2009/03/10/miley-cyrus-discloses-heart-condition-new-book/#|보존날짜=2010-11-21|깨진링크=예}}</ref> 이 때문에 마일리는 무대에 올라갈때마다 심장 걱정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마일리가 출생한 한 달 뒤인 [[1992년]] [[12월 28일]], 빌리는 레코드 회사의 반대와는 달리 몰래 티쉬와 결혼식을 올렸다.<ref name="abcnews" /> 빌리는 티쉬 이전에 트레이스와 브랜디라는 두 명의 아이가 있었다. 빌리 레이는 트랜스와 브랜디가 어렸을 때 입양을 했었다.<ref name="people">{{웹 인용|언어= 영어|url=http://www.people.com/people/archive/article/0,,20061306,00.html|제목=My Girl: How to Keep a Teen Superstar Out of Trouble? Billy Ray Cyrus Lays Down the Law for His Daughter, Hannah Montana Phenom Miley: Chores, Church and a Lot of Love|이름=Tan|성=Michelle|날짜=2007년 7월 2일|출판사=Time Warner|웹사이트=[[피플 (잡지)|피플]]|확인날짜=2010년 2월 14일}}</ref> 또한 마일리와 같은 해에 태어난 의붓 남매가 있었는데, 이름은 크리스토퍼 코디로 크리스토퍼는 사우스 캐롤라이나에 있는 집에서 그의 어머니와 함께 지냈다.<ref name="abcnews">{{웹 인용|url=http://abcnews.go.com/Primetime/story?id=132388&page=1|제목=Once a Country Superstar, He Got Out of the Spotlight for Fatherhood|확인날짜=2008년 8월 14일|날짜=2004년 3월 13일|출판사=The Walt Disney Company|웹사이트=[[ABC 뉴스]]|언어=영어}}</ref> 그리고 티쉬와 빌리 사이에서 마일리의 동생인 브라이슨과 노아가 태어났다. 한편, 마일리의 대모는 미국의 연예인 [[돌리 파튼]]이었다.<ref>{{웹 인용|url=http://www.people.com/people/article/0,,20184725,00.html|성=Brian|이름=Orloff|제목=Dolly Parton Calls Miley Cyrus a 'Little Elvis' - Backwoods Barbie, Music News, Dolly Parton, Miley Cyrus|웹사이트=피플|출판사=Time Warner|날짜=2008년 3월 17일|확인날짜=2010년 5월 30일|언어=영어}}</ref> 또한 마일리의 친할아버지는 미국 정치가로 [[민주당 (미국)|민주당]]의 의원 로널드 레이 사이러스였다.<ref name="sunjournal">{{웹 인용|언어=영어|url=http://www.newbernsj.com/articles/sparks-47739-nicholas-latest.html|제목=Nicholas Sparks interview|날짜=2009년 9월 4일|출판사=Freedom Communications, Inc|웹사이트=Sun Journal|확인날짜=2010년 2월 14일}}</ref> 마일리의 할아버지는 2006년에 사망하였고, 마일리는 할아버지를 그리워해 자신의 중간 이름을 "레이"로 바꿨다.<ref>{{웹 인용|author=Miley Cyrus|url=http://www.eonline.com/uberblog/b594_miley_turns_her_back_on_destiny.html|제목=Miley Turns Her Back on Destiny|웹사이트=E!|날짜=2008년 5월 1일|확인날짜=2010년 6월 4일|언어=영어}}</ref> 마일리의 아버지에 따르면, "많은 사람들이 내 이름인 빌리 레이에 따라 중간이름을 바꿨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이 아니에요. 마일리는 할아버지를 많이 사랑했기 때문에 이름을 바꾼거죠."<ref name="foxheartcondition" />
         마일리는 8살이 되었을때 연기를 하고 싶어했다. 결국 마일리의 몇몇 형제들과 음악에 관한 일을 시작해 일렉트로닉 팝 밴드 메트로 스테이션이라는 밴드를 만들었고 트레이시는 보컬과 기타를 맡았다.<ref name="RollMiley">{{웹 인용|url=http://www.billboard.com/#/news/metro-station-ready-to-roll-with-miley-1003986213.story|title=Metro Station Ready To Roll With Miley|work=Billboard Magazine|publisher=Nielsen Business Media, Inc|date= 2009년 6월 19일|accessdate= 2009년 8월 4일|author=Graff, Gary|location=[[Detroit, Michigan]]}}</ref> 노아는 배우가 되었으며, 브랜디 또한 기타리스트가 되었다.<ref>{{웹 인용|url=http://www.people.com/people/article/0,,20285859,00.html?xid=rss-fullcontent|last=Tan|first=Michelle|title=Miley's Sister Brandi Hits the Stage|date= 2009년 6월 18일|accessdate= 2009년 8월 20일|publisher=Time Warner|work=People}}</ref>
         2007년 4월 23일부터 2008년 10월 12일까지 《한나 몬타나》의 두 번째 시즌이 방영되었다.<ref>{{웹 인용|url=http://www.tvguide.com/tvshows/hannah-montana/episodes-season-2/278865|title=Hannah Montana Episodes ? Hannah Montana Full Episode Guides from Season 2 on Disney|work=[[TV Guide]]|accessdate=2010-05-30|언어=영어}}</ref> 직후 마일리는 디즈니 소유의 [[할리우드 레코드]]와 계약을 체결했다.<ref>{{웹 인용|url=http://www.contactmusic.com/news-article/cyrus-daughter-signs-record-deal_28_04_2006 |title=Cyrus' Daughter Signs Record Deal |publisher=Contactmusic.com |date= |accessdate=2013-04-29|언어=영어}}</ref> 2007년 6월 26일에는 더블 디스크로 구성된 한나 몬타나 두 번째 시리즈의 첫 사운드트랙이자 사이러스의 데뷔 [[정규 앨범]] ''[[Hannah Montana 2: Meet Miley Cyrus]]''를 발매했다.<ref>{{웹 인용|url=https://itunes.apple.com/us/album/hannah-montana-2-meet-miley/id257915495 |title=iTunes - Music - Hannah Montana 2 - Meet Miley Cyrus by Hannah Montana & Miley Cyrus |publisher=Itunes.apple.com |date=2007-06-27 |accessdate=2013-04-29|언어=영어}}</ref> 앨범은 발매 첫 주 326,000만 장이 팔려 빌보드 200 1위로 데뷔했다.<ref>{{웹 인용|url=http://www.billboard.com/articles/news/1051137/cyrus-sidesteps-clarkson-to-debut-at-no-1 |title=Cyrus Sidesteps Clarkson To Debut At No. 1 |work=Billboard |date=2007-07-04 |accessdate=2013-04-29|언어=영어}}</ref> 이후 300만 장 이상 팔리면서 [[미국 음반 산업 협회]]로부터 트리플 플래티넘 인증을 받았다.<ref name="autogenerated1">{{웹 인용|url=http://www.riaa.com/goldandplatinumdata.php?table=SEARCH_RESULTS&artist=Miley%20Cyrus&format=ALBUM&go=Search&perPage=50 |title=Gold & Platinum Searchable Database - April 29, 2013 |publisher=RIAA|accessdate=2013-08-29|언어=영어}}</ref> 데뷔 싱글 "[[See You Again]]"은 빌보드 핫 100 10위권에 진입하면서 첫 10위권 진입 노래가되었다.<ref>{{웹 인용|url=http://new.music.yahoo.com/blogs/chart_watch/39922/week-ending-july-19-2009-daughtry-makes-idol-history|title=Week Ending July 19, 2009: Daughtry Makes "Idol" History|publisher=Chart Watch|accessdate=2009-07-22|언어=영어}}</ref> 또 RIAA로부터 처음으로 플래티넘 인증을 받은 싱글이다.<ref>{{웹 인용 |url=http://riaa.com/goldandplatinumdata.php?resultpage=1&table=SEARCH_RESULTS&action=&title=&artist=Miley&Cyrus&format=SINGLE&debutLP=&category=&sex=&releaseDate=&requestNo=&type=&level=&label=&company=&certificationDate=&awardDescription=&catalogNo=&aSex=&rec_id=&charField=&gold=&platinum=&multiPlat=&level2=&certDate=&album=&id=&after=&before=&startMonth=1&endMonth=1&startYear=1958&endYear=2009&sort=Artist&perPage=25 |title=Gold & Platinum Searchable Database - April 29, 2013 |publisher=RIAA |date= |accessdate=2013-04-29 |언어=영어 |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140907035818/http://riaa.com/goldandplatinumdata.php?resultpage=1&table=SEARCH_RESULTS&action=&title=&artist=Miley&Cyrus&format=SINGLE&debutLP=&category=&sex=&releaseDate=&requestNo=&type=&level=&label=&company=&certificationDate=&awardDescription=&catalogNo=&aSex=&rec_id=&charField=&gold=&platinum=&multiPlat=&level2=&certDate=&album=&id=&after=&before=&startMonth=1&endMonth=1&startYear=1958&endYear=2009&sort=Artist&perPage=25 |보존날짜=2014-09-07 |깨진링크=예 }}</ref> 이 외에 오스트레일리아, 캐나다에서도 10위권에 진입하면서 성공을 거뒀다.<ref name="billboard1">{{웹 인용|url={{BillboardURLbyName|artist=hannah montana|chart=all}} |title=Hannah Montana - Chart history |work=빌보드 |date= |accessdate=2013-04-29|언어=영어}}</ref><ref>{{웹 인용|author=Steffen Hung |url=http://australian-charts.com/showitem.asp?interpret=Miley+Cyrus&titel=See+You+Again&cat=s |title=Miley Cyrus - See You Again |publisher=australian-charts.com |date= |accessdate=2013-04-29|언어=영어}}</ref> 후속 싱글 "[[Start All Over]]"는 2008년 초에 발매되었고, 빌보드 핫 100 68위에 그치면서 이전보다 덜한 성과를 거뒀다.<ref name="billboard" /><ref name="acharts">{{웹 인용|url=http://acharts.us/song/31413|title=Miley Cyrus - Start All Over - Music Charts|accessdate= 2009년 9월 13일|publisher=aCharts.us}}</ref> 2007년에 앨범의 홍보를 위해 [[Best of Both Worlds Tour]]를 시작했다. [[조나스 브라더스]], [[78바이얼릿]], [[에버라이프]]가 오프닝 게스트로 섰으며, 미국과 캐나다를 순회하는 투어로 2007년 10월 17일부터 2008년 1월 31일까지 진행되었다.<ref>{{웹 인용|last=Nudd |first=Tim |url=http://www.people.com/people/article/0,,20165807,00.html |title=Miley Mania Continues: Cyrus Extends Her Tour |publisher=People.com |date= 2007년 12월 12일 |accessdate= 2010년 8월 27일}}</ref> 티켓은 몇 분에 매진되었다.<ref>{{웹 인용|last=Kaufman|first=Gil|url=http://www.mtv.com/news/articles/1571314/20071005/cyrus__miley.jhtml|title=Hannah Montana Ticket Bonanza Spurs Officials To Investigate Resellers |work=Mtv.com|date= 2007년 10월 8일|accessdate= 2010년 5월 30일}}</ref> [[티켓마스터]]의 말에 따르면 "[[비틀즈]]와 [[엘비스 프레슬리]] 이후로 음악계에서 이런 수준의 수요는 없었다고"한다.<ref>{{뉴스 인용|url=http://www.latimes.com/entertainment/news/music/la-et-montana6oct06,1,2223991.story|title='Hannah Montana' stirs a U.S. tizzy|author=Geoff Boucher and Chris Lee|publisher=[[The Los Angeles Times]]|date= 2007년 10월 6일|accessdate= 2007년 10월 7일}}{{깨진 링크|date=August 2010}}</ref> 2008년 1월 투어가 끝나고나서 2월 1일 [[월트 디즈니 픽처스]]는 일주일동안 투어 실황을 담은 3D 콘서트 영화 《[[한나 몬타나 & 마일리 사이러스: 베스트 오브 보스 월드 콘서트]]》를 개봉했다. 영화는 3,100만 달러의 수익을 거둬들였다.<ref>{{웹 인용|url=http://www.boxofficemojo.com/movies/?id=hannahmontanaconcert.htm |title=Hannah Montana/Miley Cyrus: Best of Both Worlds Concert Tour (2008) |publisher=Box Office Mojo |date= |accessdate= 2011년 8월 7일}}</ref> [[Hannah Montana & Miley Cyrus: Best of Both Worlds Concert|영화의 사운드트랙]]은 2008년 3월 11일 월트 디즈니 레코드와 할리우드 레코드를 통해 발매되었고, 빌보드 200 3위로 데뷔했다.<ref>{{웹 인용|work=[[Billboard.com]]|title=Artist Chart History ? Miley Cyrus|publisher=[[Nielsen Company]]|year=2008|url={{BillboardURLbyName|artist=hannah montana|chart=all}}|accessdate= 2008년 12월 18일}}{{깨진 링크|date=June 2010|bot=DASHBot}}</ref>
         2008년 2월 마일리와 친구 맨디 지루스와 [[유튜브]]에 ''The Miley and Mandy Show''라고 하는 비디오를 올렸는데, 유튜브에서 많은 인기를 얻었고 이 둘은 재미를 위해서 촬영한 동영상이라고한다.<ref>{{웹 인용|last=Tan|first=Michelle|title=Behind the Scenes of Miley Cyrus' YouTube Hit|work=People.com|date= 2008년 3월 8일|url=http://www.people.com/people/article/0,,20183035,00.html|accessdate= 2009년 8월 21일}}</ref> 2008년 5월에는 마일리의 연기 경력에 있어서 지원이 더 필요하다고 판단해 유나이티드 탤런트 에이전시와 계약을 맺었다.<ref name="hollywoodreporter">{{뉴스 인용|last=Swertlow|first=Frank|url=http://www.hollywoodreporter.com/hr/content_display/film/news/e3ifc258f6318477ab07a346c93c847b2ab?pn=1|title=Showbiz Kids|work=The Hollywood Reporter|publisher=Global Media|date= 2009년 10월 26일|accessdate= 2010년 6월 1일}} {{깨진 링크|date=October 2010|bot=H3llBot}}</ref><ref>{{웹 인용|last=Borys|first=Kit|url=http://www.backstage.com/bso/esearch/article_display.jsp?vnu_content_id=1003798813|title=Miley Cyrus' agent moves to UTA|work=[[The Hollywood Reporter]]|date=2008년 5월 4일|accessdate=2011년 1월 19일|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120121160923/http://www.backstage.com/bso/esearch/article_display.jsp?vnu_content_id=1003798813|보존날짜=2012년 1월 21일|깨진링크=예}}</ref> 2008년 4월에는 10대 해커가 마일리의 [[G메일]] 계정을 해킹하면서 속옷과 수영복 착용 사진이 유출되었다.<ref>{{뉴스 인용|url=http://articles.latimes.com/2008/apr/25/business/fi-disney25|title=Cyrus photos may taint image|work=[[로스앤젤레스 타임스]]|accessdate= 2010년 5월 28일|author=Chmielewski, Dawn C. | date= 2008년 4월 25일}}</ref><ref>{{웹 인용|author=Davies, Shawn|url=http://news.ninemsn.com.au/article.aspx?id=595152|title=Hacker leaks racy Miley Cyrus pics|work=[[ninemsn]]|accessdate=2010년 5월 29일|date=2008년 7월 14일|archiveurl=https://archive.today/20120703152720/http://news.ninemsn.com.au/article.aspx?id=595152|archivedate=2012년 7월 3일|깨진링크=예}}</ref><ref>{{뉴스 인용|url=http://a.abcnews.com/TheLaw/Technology/Story?id=6948781&page=1|title=Hacker Claims He Used Celeb E-mail, MySpace Accounts to Send Spam|확인날짜=2013-10-10|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130818162209/http://a.abcnews.com/TheLaw/Technology/Story?id=6948781&page=1|보존날짜=2013-08-18|깨진링크=예}}</ref><ref>{{뉴스 인용|url=http://www.wired.com/threatlevel/2009/02/miley-cyrus-hac-2|title=Miley Cyrus Hacker Raided by FBI|work=[[Wired News]]|accessdate= 2010년 5월 29일|author=Zetter, Kim|date= 2009년 2월 23일}}</ref> 마일리는 2008년 《타임》에서 선정한 [[타임 100]]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100인 중 한 명으로 올랐다. 목록에서 이전 어린이 스타 [[도니 오즈몬드]]는 "세계를 넘은 15살의 아이돌 가수이자 배우 마일리 사이러스는 자신 커리어의 정점에서 거대한 해일에 올라탔다. 이것은 훌륭하며 사이러스가 그것을 즐기길 바란다. 3~5년이 지나면 마일리는 성인이 되어야한다. 그때가 되면 이미지를 바꾸고 싶어 할 것인데, 그 과정에서 역경과 직면 할 것이다"라고 소개했다.<ref>{{뉴스 인용|authorlink=Donny Osmond|last=Osmond|first=Donny|url=http://www.time.com/time/specials/2007/article/0,28804,1733748_1733752_1734628,00.html#ixzz0pT6GawvW|title=Miley Cyrus ? The 2008 TIME 100|work=[[타임 (잡지)|Time]]|date= 2009년 4월 30일|accessdate= 2010년 6월 4일}}</ref> 또 2009년 《빌보드》에서 가장 많이 음반을 판매한 여자 가수 4위에 올랐고,<ref>{{웹 인용|url=http://www.billboard.com/articles/news/266426/taylor-swift-kanye-west-named-top-female-and-male-artists-of-2009|title=Taylor Swift, Kanye West Named Top Female and Male Artists of 2009|work=Billboard.com|date= 2009년 9월 14일|accessdate= 2010년 3월 8일}}</ref> 가수 전체에서는 5위에 해당한다.<ref>{{웹 인용|url=http://www.billboard.com/articles/news/266432/2009-artists-of-the-year|title=2009 Artists Of The Year|publisher=[[빌보드|Billboard]]|date=2009년 12월 10일|accessdate=2010년 6월 4일|보존url=https://www.webcitation.org/5mW9hgHyq?url=http://www.billboard.com/|보존날짜=2010년 1월 4일|깨진링크=예}}</ref> 16살인 2009년 사이러스는 빌보드 200 1위 앨범을 네 장이나 보유한 가장 젊은 아티스트였다.<ref>{{웹 인용|url=http://www.nbc.com/news/2011/02/28/snl-roars-into-march-with-host-miley-cyrus-and-musical-guest-the-strokes-on-march-5/|title=SNL Roars Into March with Host Miley Cyrus and Musical Guest the Strokes on March 5|date= 2011년 2월 28일|publisher=[[NBCUniversal]]|accessdate= 2011년 4월 4일}}</ref> 2008년 7월 22일 사이러스의 두 번째 정규 앨범 ''[[Breakout]]''이 발매되었다.<ref name="billboard">{{웹 인용|url=http://www.billboard.com/articles/news/1044960/exclusive-miley-cyrus-grows-up-on-breakout|title=Miley Cyrus grows up on 'Breakout'|work=[[Billboard.com]]|publisher=[[Nielsen Company]]|author=Cortney Harding|date= 2008년 6월 27일|accessdate= 2008년 6월 27일}}</ref> 앨범에 실린 12곡은 사이러스가 공동 작업으로 참여했다.<ref name="billboard"/> ''Breakout''은 발매 첫 주 371,000만 장을 팔아 빌보드 200 1위로 데뷔했다.<ref>{{웹 인용|url=http://www.billboard.com/articles/news/1044636/miley-trumps-sugarland-to-lead-billboard-200|title=Miley Trumps Sugarland to Lead Billboard 200|author=Caulfield, Keith|author2=Katie Hasty|date= 2008년 7월 31일|publisher=Billboard|accessdate= 2010년 2월 14일}}</ref> 앨범은 100만 장 이상 팔리며 플래티넘 인증을 받았다.<ref name="autogenerated1"/> ''Breakout'' 발매에 앞서 리드 싱글 "[[7 Things]]"는 핫 100 10위권에 진입하며 10위권에 진입한 두 번째 노래가 되었다.<ref name="acharts_2">{{웹 인용|url=http://acharts.us/song/36150|title=7 Things|work=aCharts.us|accessdate= 2008년 6월 26일}}</ref><ref>{{웹 인용|url=http://www.people.com/people/article/0,,20199628,00.html?xid=rss-topheadlines|title=Miley Cyrus debuts her new single|work=[[People (magazine)|People.com]]|publisher=[[Time Inc.]]|date= 2008년 5월 13일|accessdate= 2008년 5월 13일}}</ref> 두 번째 싱글 "[[Fly on the Wall]]"은 핫 100 84위로, 리드 싱글보다 못한 성적을 보였다.<ref>{{웹 인용|url={{BillboardURLbyName|artist=miley cyrus|chart=Hot 100}} |archiveurl=http://web.archive.org/web/20080822150806/http://www.billboard.com/artist/311278/miley+cyrus/chart?f=379 |archivedate= 2008년 8월 22일 |title=Miley Cyrus - Chart history | Billboard |publisher=Web.archive.org |date= |accessdate= 2013년 4월 29일}}</ref> 그러나 영국에서는 16위까지 올라갔다.<ref name="chartarchive1"/> 2008년 4월에는 아빠와 함께 CMT 뮤직 어워드 진행자로 나섰고,<ref>[http://www.cmt.com/news/country-music/1582299/billy-ray-cyrus-and-miley-cyrus-to-host-cmt-music-awards.jhtml "Billy Ray Cyrus and Miley Cyrus to Host CMT Music Awards"] at CMT.com. Retrieved March 6, 2008.</ref> 8월에는 혼자서 [[틴 초이스 어워드]] 진행을 맡았다.<ref>{{뉴스 인용|url=http://www.foxnews.com/story/0,2933,395884,00.html|title=Miley Cyrus to Host Sunday's Teen Choice Awards ? Celebrity Gossip | Entertainment News | Arts And Entertainment|work=[[Fox News Channel]]|publisher=[[News Corporation]]|date=2008년 8월 1일|accessdate=2010년 6월 4일|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100602194039/http://www.foxnews.com/story/0,2933,395884,00.html#|보존날짜=2010-06-02|깨진링크=예}}</ref> 같은 해 《[[볼트 (2008년 영화)|볼트]]》에서 페니 성우 역을 맡았고, 이 영화는 비평가들의 호평을 받으며 2008년 11월 21일 개봉되었다.<ref>{{웹 인용|url=http://www.rottentomatoes.com/m/bolt|title=Bolt Movie Reviews, Pictures|publisher=[[Rotten Tomatoes]]|accessdate=November 23, 2008}}</ref> [[존 트라볼타]]와 함께 부른 영화의 사운드트랙 "[[I Thought I Lost You]]"는 [[골든 글로브]] 후보로 오르기도했다.<ref>{{웹 인용|accessdate= 2008년 12월 11일|url=http://www.people.com/people/article/0,,20245120_2,00.html|title=Angelina Jolie, Brad Pitt Score Golden Globe Nods|publisher=[[People (magazine)|People]]|author=Silverman, Stephen|date= 2008년 12월 11일}}</ref>
         2009년 마일리는 《[[한나 몬타나: 더 무비]]》에 출연했다. 12곡이 수록된 사운드트랙<ref>{{웹 인용|url={{올뮤직|class=album|id=r1479519|pure_url=yes}}|work=[[Allmusic]]|publisher=[[Macrovision Corporation]]|accessdate= 2009년 10월 8일|title=Hannah Montana: The Movie [Soundtrack]> Review|first=Heather|last=Phares}}</ref> 과 영화 모두 상업적 성공을 거뒀다.<ref>{{뉴스 인용|url=http://goldderby.latimes.com/awards_goldderby/2009/04/hannah-montana-the-movie-miley-cyrus-news-36285-.html|title='Hannah Montana: The Movie' bolsters Miley Cyrus' Oscar dreams|work=[[The Los Angeles Times]]|date= 2009년 4월 2일|accessdate= 2010년 6월 4일}}</ref><ref>{{뉴스 인용|first=Keith|last=Caulfield|title='Hannah Montana' Takes Top Spot On Billboard 200|url=http://www.billboard.com/articles/news/268841/hannah-montana-takes-top-spot-on-billboard-200|work=Billboard|publisher=Nielsen Business Media, Inc|date= 2009년 4월 22일|accessdate= 2009년 10월 9일}}</ref> 사운드트랙의 리드 싱글 "[[The Climb]]"은 12개 국가에서 40위권에 진입했고<ref>{{웹 인용|url=http://acharts.us/song/42195|title=Miley Cyrus ? The Climb ? Music Charts|work=aCharts.us|accessdate= 2009년 10월 9일}}</ref> 전형적인 틴 팝 팬들 뿐 아니라 일반 대중 팬들도 끌어들였다.<ref>{{웹 인용|url=http://kidsmusic.about.com/od/musicreviews/fr/hmmovie.htm|title=Miley Cyrus ? Hannah Montana: The Movie Soundtrack|work=[[About.com]]|first=Warren|last=Truitt|accessdate= 2009년 10월 8일|publisher=[[The New York Times Company]]}}</ref> 2009년 6월 5일 《한나 몬타나》 세 번째 시리즈 제작을 끝내고나서 하차를 고려했으나,<ref>{{웹 인용|author=Ryan, Joal|url=http://www.eonline.com/uberblog/b126865_hannah_montana_staying_jonas_moving.html|title=Hannah Montana Staying, Jonas Moving|publisher=[[E!]]|date= 2009년 6월 1일|accessdate= 2010년 6월 4일}}</ref> 몇가지 조건을 추가하고 네 번째 시리즈를 제작하기로 했다.<ref>{{웹 인용|author=Rice, Lynette|url=http://news-briefs.ew.com/2009/06/13/miley-cyrus-season-four-was-her-choice-dad-insists/|title=Miley Cyrus: Season 4 was her choice, dad insists|publisher=[[Entertainment Weekly]]|date= 2009년 6월 13일|accessdate= 2010년 6월 4일}}</ref> 2009년 9월 항암제 캠페인 Stand Up to Cancer를 지원하는 자선 싱글 "[[Just Stand Up!]]"과<ref>{{뉴스 인용|author=Tim Saunders|title=Female Stars Unite For New Charity Single|work=looktothestars.org|date= 2008년 8월 20일|url=http://www.looktothestars.org/news/1142-female-stars-unite-for-new-charity-single|accessdate= 2008년 12월 14일}}</ref> 암 연구와 훈련 프로그램을 지원하는 자선 콘서트 City of Hope에 참여했다.<ref>{{웹 인용|url=http://www.cityofhope.org/about/publications/news/Pages/walt-disney-company-presenting-miley-cyrus-jonas-brothers-demi-lovato-in-a-special-concert-to-benefit-city-of-hope-sept-14.aspx|title=The Walt Disney Company is presenting Miley Cyrus, Jonas Brothers and Demi Lovato in a special concert to benefit City of Hope on September 14|date=2008년 8월 11일|publisher=[[City of Hope National Medical Center]]|accessdate=2010년 6월 4일|format=[[Microsoft Word|DOC]]|archiveurl=https://archive.today/20120524134932/http://www.cityofhope.org/about/publications/news/Pages/walt-disney-company-presenting-miley-cyrus-jonas-brothers-demi-lovato-in-a-special-concert-to-benefit-city-of-hope-sept-14.aspx|archivedate=2012년 5월 24일|깨진링크=아니오}}</ref> 또한 환경 운동 단체 디즈니 프랜즈 포 체인지의 일환으로 다른 디즈니 채널 스타들과 함께 자선 싱글 "[[Send It On]]" 녹음에 참여했다.<ref>{{웹 인용|url=http://www.disneychannelmedianet.com/DNR/2009/doc/Send_It_On_Disneys_Friends_for_Change%20_081909.doc|title="Send It On," an Anthem by the World's biggest Teen Stars, Miley Cyrus, Jonas Brothers, Selena Gomez and Demi Lovato, for Disney's "Friends for Change: Project Green," Will Debut on Radio Disney, Disney Channel, Disney.com and iTunes|date=2009년 8월 6일|publisher=[[Disney Channel]]|accessdate=2009년 8월 20일|format=[[Microsoft Word|DOC]]|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110511155245/http://www.disneychannelmedianet.com/DNR/2009/doc/Send_It_On_Disneys_Friends_for_Change%20_081909.doc|보존날짜=2011년 5월 11일|깨진링크=예}}</ref> 그런 후 [[Hannah Montana 3|세 번째 한나 몬타나 사운드트랙]]을 발매해 첫 주 137,000만 장을 팔아 빌보드 200 2위로 데뷔했다.<ref>{{웹 인용|url=http://content.usatoday.com/communities/idolchatter/post/2009/07/68494541/1#.UXwbhMrNS1c |title=What's Hannah Montana doing in the American Idol sales report? |publisher=Content.usatoday.com |date= 2009년 7월 15일 |accessdate= 2013년 4월 29일}}</ref> 이 앨범은 전의 앨범에 비해 훨씬 낮은 첫 주 판매량을 기록했으며 마일리의 앨범 중 최초로 RIAA 인증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싱글 "[[He Could Be the One]]"은 핫 100 10위권에 진입했다.<ref name="billboard1" /> 2009년 3월 16살이 되는 지금까지의 삶을 책으로 담은 ''[[Miles to Go]]''를 힐러리 리프틴과 공동으로 출간했다.<ref>{{뉴스 인용|first=Hillel|last=Italie|title=Miley Cyrus becomes author with upcoming memoir|work=[[Seattle Times]]/[[Associated Press]]|date= 2009년 2월 23일|accessdate= 2009년 3월 24일|url=http://seattletimes.nwsource.com/html/books/2008767856_zboo23miley.html}}</ref>
         마일리는 2009년 [[막스 아즈리아]]와 [[월마트]]의 협력으로 첫 의류 라인을 런칭했다.<ref>{{웹 인용|author= |url=http://www.clevvertv.com/miley-cyrus/4579/new-miley-cyrus-ads-for-walmart-clothing-line.html |title=New Miley Cyrus Ads For Walmart Clothing Line |publisher=Clevvertv.com |date= 2009년 8월 11일 |accessdate= 2013년 4월 29일}}</ref><ref>{{웹 인용|url=http://www.accesshollywood.com/miley-cyrus-talks-walmart-clothing-line-gears-up-for-fall-tour_article_21256 |title=Miley Cyrus Talks Walmart Clothing Line, Gears Up For Fall Tour |publisher=Accesshollywood.com |date= |accessdate= 2013년 4월 29일}}</ref> 2009년 8월 31일에는 첫 EP 앨범 ''[[The Time of Our Lives]]''를 발매했다.<ref>{{웹 인용|url=https://itunes.apple.com/us/album/the-time-of-our-lives/id348638946 |title=iTunes - Music - The Time of Our Lives by Miley Cyrus |publisher=Itunes.apple.com |date= 2009년 8월 31일 |accessdate= 2013년 4월 29일}}</ref> 마일리는 ''The Time of Our Lives''에 대해 "지금까지와 다른 앨범이다. 나는 사람들에게 다음 앨범의 소리를 약간 들려주고 시간을 좀 더 벌기 위해 이 앨범을 만들었다"고 말했다.<ref name="associatedpress">{{뉴스 인용|url=http://www.foxnews.com/story/0,2933,554920,00.html|title=Miley Cyrus Says She Has No Plans to Retire 'Hannah Montana' Character ? Yet|date=2009년 9월 24일|accessdate=2010년 6월 6일|agency=Associated Press|publisher=[[Fox News Channel]]|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090927074203/http://www.foxnews.com/story/0,2933,554920,00.html#|보존날짜=2009-09-27|깨진링크=예}}</ref> 앨범은 발매 첫 주 62,000만 장을 팔아 빌보드 200 3위로 데뷔했다.<ref>{{웹 인용|url=http://www.billboard.com/articles/news/267524/colbie-caillats-no-1-miley-crashes-party-on-billboard-200 |title=Colbie Caillat's No. 1, Miley Crashes Party On Billboard 200 |publisher=Billboard |date= 2009년 9월 2일 |accessdate= 2013년 4월 29일}}</ref> 그러나 다음 주에 153,000만 장을 팔며 2위로 상승했다.<ref>{{웹 인용|url=http://www.billboard.com/articles/news/267451/whitney-houston-debuts-at-no-1-on-billboard-200 |title=Whitney Houston Debuts At No. 1 On Billboard 200 |publisher=Billboard |date= 1987년 6월 27일 |accessdate= 2013년 4월 29일}}</ref> 리드 싱글 "[[Party in the U.S.A.]]"는 빌보드 핫 100 2위로 데뷔해 지금까지의 싱글 중 가장 높은 순위를 기록했다.<ref>{{웹 인용|title=Miley Cyrus Catapults to # 2 Debut on Billboard Hot 100 with 'Party In The USA;' Tied for Highest Debut of the Year|url=http://www.billboard.com/articles/news/267653/miley-cyrus-jay-z-make-noise-on-hot-100|work=[[빌보드|Billboard]]|date= 2009년 8월 20일|accessdate= 2009년 8월 21일|author1=Ben-Yehuda, Ayala|author2=Caulfield, Keith|author3=Pietroluongo, Silvio}}</ref> 앨범의 홍보를 위한 미국, 영국, 아일랜드를 방문하는 50회로 이루어진 [[Wonder World Tour]]를 시작했다. 투어는 혹평을 듣긴했지만 세계적으로 6,710만 달러를 벌어들여 상업적인 성공을 거뒀다.<ref>{{웹 인용|url=http://celebnetworth.org/miley-cyrus-net-worth-earnings |title=Miley Cyrus Net Worth, Annual Earnings ? How rich is she? 2012 |publisher=Celebnetworth.org |date= |accessdate= 2013년 4월 29일}}</ref> 2009년 12월 7일 마일리는 [[노스웨스트잉글랜드]] [[블랙풀]]에서 열린 로얄 버라이어티 퍼포먼스에서 공연을 했는데, [[엘리자베스 2세]]와 수 많은 영국 왕족이 지켜봤다.<ref>{{뉴스 인용|url=http://news.bbc.co.uk/2/hi/entertainment/8320913.stm|title=Entertainment | Kay to present Royal Variety show|publisher=BBC News|date= 2009년 10월 22일|accessdate= 2010년 3월 5일}}</ref>
         2008년 말부터 마일리는 이전보다 성숙해진 이미지를 추구하기 시작했다. 노벨 수상자 [[니콜라스 스파크스]]와 제프 반 위가 공동으로 만들어낸 영화 《[[라스트 송]]》에 출연한다.<ref name="valong">{{뉴스 인용|last=Fleming|first=Michael|title=Miley Cyrus to star in Disney film|work=[[Variety (magazine)|Variety]]|publisher=[[Reed Business Information]]|date=2008년 9월 16일|url=http://www.variety.com/article/VR1117992306.html?categoryid=1236&cs=1|accessdate=2009년 6월 18일|archiveurl=https://web.archive.org/web/20090628170912/http://www.variety.com/article/VR1117992306.html?categoryid=1236&cs=1|archivedate=2009년 6월 28일|깨진링크=예}}</ref> 마일리는 가수로써 맞는 배역은 아니였다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또 다른 영화에서 가수가 되고싶지 않다. 더 이상 원하지도 않는다. 사람들은 내가 얼마나 많은 음악 쇼들을 했는지 모를 것이다. 난 좀 더 진지하고 심각한 역할을 맡고싶다."<ref>{{웹 인용|author=Dawson, Angela|url=http://www.philly.com/philly/entertainment/20100329_Miley_s__Last_Song_.html#ixzz0pTWj2FuO|title=Miley's {{'}}Last Song{{'}}|work=[[The Philadelphia Inquirer]]|date=2010년 3월 29일|accessdate=2010년 6월 4일|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100505020634/http://www.philly.com/philly/entertainment/20100329_Miley_s__Last_Song_.html#ixzz0pTWj2FuO|보존날짜=2010년 5월 5일|깨진링크=예}} </ref> 《라스트 송》 제작은 2009년 6월 15일부터 8월 18일까지 진행되었다.<ref>{{웹 인용|last=Mach|first=Tuquyen|title=Filming for New Miley Cyrus Movie Starts Monday|work=[[WSAV-TV]]|publisher=[[Media General]]|date=2009년 6월 8일|url=http://www.wsav.com/sav/news/local/article/filming_for_new_miley_cyrus_movie_starts_monday/13251|accessdate=2009년 6월 18일|archiveurl=https://archive.today/20130105080502/http://www2.wsav.com/news/2009/jun/09/filming_for_new_miley_cyrus_movie_starts_monday-ar-131349/|archivedate=2013년 1월 5일|깨진링크=예}}</ref> 2010년 3월 31일 《라스트 송》이 개봉되었고, 대부분 평론가들은 마일리의 연기력에 부정적인 평가를 했다.<ref>{{웹 인용|url=http://www.metacritic.com/film/titles/lastsong?q=the%20last%20song|title=Last Song, the reviews at Metacritic.com|publisher=Metacritic.com|accessdate= 2010년 6월 4일}}</ref> 연기력에서는 비판을 받았을지라도 세계적으로 박스오피스 8,800만 달러의 수익을 거두면서 상업적인 성공을 했다.<ref>{{웹 인용|url=http://www.boxofficemojo.com/movies/?id=lastsong.htm|title=The Last Song (2010)-Box Office Mojo|accessdate=2010년 5월 27일|archiveurl=https://web.archive.org/web/20100528063755/http://www.boxofficemojo.com/movies/?id=lastsong.htm|archivedate=2010년 5월 28일|deadurl=예}}</ref> 박스오피스 분석기관 이그지비터 릴레이션스는 "영화의 흥행 요인은 마일리의 성숙한 역할"이라고 분석했다.<ref>{{웹 인용|author=Bible, Karie|url=http://www.ercboxoffice.com/index.php?section=news&subsection=show_news_details&news_id=283|title=Box Office Obits|publisher=Exhibitor Relations Co. Inc.|date= 2010년 5월 12일|accessdate= 2010년 6월 4일}}</ref> 영화 작업을 끝내기 전 마일리는 그동안 9달 동안 사귀어왔던 모델 [[저스틴 가스톤]]과 헤어졌고,<ref>{{웹 인용|last=Heldman|first=Breanne L.|title=Miley Cyrus and Justin Gaston are Totally Dunzo|work=Eonline.com|date= 2009년 6월 9일|url=http://www.eonline.com/uberblog/b128212_miley_cyrus_justin_gaston_are_totally.html|accessdate= 2009년 8월 21일}}</ref> 오스트레일리아 출신의 배우 [[리엄 헴스워스]]와 영화 촬영 중에 연인관계로 발전했다.<ref>{{웹 인용|url=http://www.mtv.com/news/articles/1634665/20100325/cyrus__miley.jhtml|title=Miley Cyrus Discusses Her Chemistry With Liam Hemsworth On 'Ellen'|publisher=MTV|work=[[MTV News]]|date= 2010년 3월 25일|accessdate= 2010년 3월 25일}}</ref> 이후 "처음으로 진지하게 만나는 남자친구"라고 소개했다.<ref>{{웹 인용|url=http://www.accesshollywood.com/miley-cyrus-on-the-end-of-hannah-montana-and-her-first-serious-boyfriend_article_30260|title=Miley Cyrus On The End Of 'Hannah Montana' & Her 'First Serious Boyfriend'|work=[[Access Hollywood]]|date= 2010년 3월 17일|accessdate= 2010년 6월 4일}}</ref> 영화가 개봉되고 나서는 결별을 선언했으나,<ref>{{웹 인용|url=http://www.usmagazine.com/celebritynews/news/miley-cyrus-liam-hemsworth-split-2010258|title=Miley Cyrus, Liam Hemsworth Split|work=[[US Magazine]]|date= 2010년 8월 25일|accessdate= 2010년 8월 25일}}</ref> though they later reconciled.<ref>{{웹 인용|url=http://www.people.com/people/article/0,,20425223,00.html|title=Miley Cyrus & Liam Hemsworth Are Back Together|work=[[People Magazine]]|date= 2010년 9월 12일|accessdate= 2010년 9월 12일}}</ref> 《한나 몬타나》 마지막 시즌을 촬영하고 있을 시기 다시 재결합을 했다.<ref>{{웹 인용|author=Alwill, Cara|url=http://hollywoodcrush.mtv.com/2010/01/08/hannah-montana-series-will-end-after-a-fourth-season/|title='Hannah Montana' Series Will End After A Fourth Season|publisher=MTV|date= 2010년 1월 8일|accessdate= 2010년 6월 4일}}</ref> 마지막 시즌은 디즈니 채널에서 2010년 7월 11일부터 2011년 1월 16일까지 방영되고 끝났다.<ref>{{웹 인용|url=http://www.disneychannelmedianet.com/DNR/2010/doc/HMA_011510.doc|title=Hannah Montana Season 4|publisher=Disney Channel Media Net|date=2010년 1월 15일|accessdate=November 3, 2010|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130819000624/http://www.disneychannelmedianet.com/DNR/2010/doc/HMA_011510.doc#|보존날짜=2013-08-19|깨진링크=예}}</ref>
         이러한 배우 활동을 하던 중 마일리는 세 번째 정규 앨범 ''[[Can't Be Tamed]]'' 녹음을 진행하고 있었고, [[2010년 아이티 지진]]을 후원하기 위한 자선 싱글 "[[We Are the World: 25 for Haiti]]"와 "[[Everybody Hurts]]"에 참여했다.<ref>{{뉴스 인용|url=http://www.usatoday.com/life/music/news/2010-02-02-we-are-the-world-list_N.htm|title=Complete list of 'We Are the World' artists|date= 2010년 2월 2일|work=[[USA Today|USAToday.com]]|publisher=Gannett Co. Inc|accessdate= 2010년 2월 17일|first=Edna|last=Gundersen}}</ref><ref>{{웹 인용|url=http://music-mix.ew.com/2010/02/02/simon-cowell-haiti-song-everybody-hurts/|title=Hear Simon Cowell's Haiti benefit single, 'Everybody Hurts': Miley, Mariah, Susan Boyle, and more sing the R.E.M. classic|accessdate= 2010년 2월 7일|publisher=ew.com}}</ref> 세 번째 정규 앨범은 할리우드 레코드에서 발매하는 마지막 앨범으로 2010년 6월 21일 발매되었다.<ref>{{웹 인용|url=https://itunes.apple.com/us/album/cant-be-tamed/id375866638 |title=iTunes - Music - Can't Be Tamed by Miley Cyrus |publisher=Itunes.apple.com |date= 2010년 6월 21일 |accessdate= 2013년 4월 29일}}</ref> 앨범은 발매 첫 주 106,000만 장을 팔면서 빌보드 200 3위로 데뷔했는데, 지금까지 정규 앨범중 가장 낮은 첫 주 판매량을 기록함녀서 처음으로 빌보드 200 1위를 놓치게 되었다. 또 미국에서 총 판매량 343,000만 장을 기록해 RIAA 인증을 받지 못했다.<ref>{{웹 인용|url=http://www.mstarz.com/articles/9365/20130306/miley-cyrus-breaks-up-twitter-signs-britney-spears-manager-larry.htm |title=Miley Cyrus Breaks Up from Twitter and Signs with Britney Spears Manager; Can Larry Rudolph Orchestrate Another Comeback? : News |publisher=Mstarz |date= 2013년 3월 6일 |accessdate= 2013년 4월 29일}}</ref> 리드 싱글 "[[Can't Be Tamed]]"은 2010년 5월 18일 발매했고 빌보드 핫 100 최고 8위까지 올랐다.<ref>{{웹 인용|first=Silvio|last=Pietroluongo|title=Usher's 'OMG' Stands Pat Atop Hot 100, Miley Tames Top 10|url=http://www.billboard.com/articles/news/958016/ushers-omg-stands-pat-atop-hot-100-miley-tames-top-10|publisher=Nielsen Business Media, Inc|work=Billboard|date= 2010년 5월 27일|accessdate= 2010년 5월 28일}}</ref> 두 번째 싱글이자 앨범의 마지막 싱글 "[[Who Owns My Heart]]"는 유럽 국가에서만 발매되었다.<ref>{{웹 인용|url=http://www.amazon.de/dp/B00410C1OS|title=Who Owns My Heart: Miley Cyrus: Amazon.de: Musik|work=''Amazon.de''|publisher=[[Amazon.com]]|accessdate= 2010년 10월 15일}}</ref><ref>{{웹 인용|url=https://www.amazon.com/dp/B00410C1OS|title=Amazon.com: Who Owns My Heart (2-Track): Miley Cyrus: Amazon.com: Music|publisher=Amazon.com|accessdate= 2010년 10월 15일}}</ref> 2011년 2월 사이러스는 [[Gypsy Heart Tour]]를 시작한다고 발표했다.<ref>{{웹 인용|url=http://www.cambio.com/news/miley-cyrus-is-heading-back-to-music |title=Miley Cyrus Back to Music |publisher=Cambio.com |date= 2011년 2월 14일 |accessdate= 2011년 8월 7일}}</ref> 투어는 총 21회로 이루어져 2011년 4월 29일 시작해 7월 2일 끝냈다. 사이러스는 이번 활동을 하면서 이전보다 자극적이고 선정적인 의상과 안무를 선보여 대중들로부터 비판을 받았다.<ref>{{웹 인용|author=5/7/10 |url=http://www.mtv.com/news/articles/1640765/20100604/cyrus__miley.jhtml |title=Miley Cyrus (Sorta) Kisses A Girl On 'Britain's Got Talent'|publisher=MTV |date= 2010년 6월 4일 |accessdate=November 1, 2011}}</ref>
         2012년 마일리는 트리븃 앨범 ''[[Chimes of Freedom: Songs of Bob Dylan Honoring 50 Years of Amnesty International]]''에서 [[밥 딜런]]의 노래 "[[You're Gonna Make Me Lonesome When You Go]]"를 커버했다.<ref>{{웹 인용|url=http://www.ibtimes.com/miley-cyrus-covers-bob-dylans-youre-gonna-make-me-lonesome-when-you-go-video-399524 |title=Miley Cyrus Covers Bob Dylan's ‘You’re Gonna Make Me Lonesome When You Go’ |publisher=Ibtimes.com |date=2012-01-15 |accessdate=2013-09-10}}</ref> 2012년부터 마일리는 클래식 노래를 커버 하는 등 다양한 음악 활동을 했다.<ref>{{웹 인용|author=Sam Lansky |url=http://idolator.com/7356722/miley-cyrus-covers-jolene-in-stunning-backyard-sessions-video-watch |title=Miley Cyrus Covers "Jolene" In Stunning ‘Backyard Sessions’ Video: Watch | Music News, Reviews, and Gossip on |publisher=Idolator.com |date= 2012년 12월 27일 |accessdate= 2013년 4월 29일}}</ref> 같은 해 [[CBS]] 시트콤 《[[두 남자와 1/2]]》에 제이크 하퍼의 여자친구 역으로 게스트 출연을 했다.<ref>{{웹 인용|url=http://www.kpopstarz.com/articles/26062/20130427/two-and-a-half-men-angus-t-jones.htm |title=Two And A Half Men Returning for 11th Season, Fate Of Angus T Jones To Be Determined |publisher=KpopStarz |date= 2013년 4월 25일 |accessdate= 2013년 4월 29일}}</ref><ref>{{웹 인용|url=http://screenrant.com/two-and-a-half-men-season-10-miley-cyrus/ |title=‘Two and a Half Men’ Season 10 Adds Miley Cyrus |publisher=Screenrant.com |date= |accessdate= 2013년 4월 29일}}</ref> 또 애니메이션 영화 《[[몬스터 호텔]]》에서 마비스 역으로 출연하기로 했지만,<ref>{{웹 인용|url=http://www.eonline.com/news/marc_malkin/miley_cyrus_checks_out_of_adam_sandlers/292954 |title=Miley Cyrus Checks Out of Adam Sandler's Vampire Hotel Flick: Is Partying to Blame? |publisher=E! Online |date= 2012년 2월 9일 |accessdate= 2012년 2월 13일}}</ref> 가수 활동때문에 무산되었다.<ref>{{웹 인용|url=http://mileyonline.com/2012/02/10/miley-checks-out-of-hotel-transylvania-to-work-on-music/ |title=// Get Ready For 2012 ≫ Miley checks out of ‘Hotel Transylvania’ to work on music |publisher=Mileyonline.com |date= 2010년 9월 2일 |accessdate= 2012년 2월 13일}}{{깨진 링크|date=March 2013}}</ref> 2012년 5월 31일 마일리와 헴스워스는 3.5캐럿 다이아몬드 반지와 함께 약혼식을 올렸다.<ref>{{뉴스 인용| url = http://www.people.com/people/article/0,,20601230,00.html | title = Miley Cyrus and Liam Hemsworth Engaged | work = [[People (magazine)|People]] |date= 2012년 6월 6일| first = Marisa | last = Laudadio | accessdate = 2013년 3월 6일}}</ref>
         2012년 사이러스는 오랫동안 해왔던 갈색의 긴 머리를 금발의 단발로 자르면서 언론들의 관심을 끌었다. 이에대해 "평범한 삶에서 많은 것을 느끼지 못했다. 인생을 정말로 다르게 살아야한다"고 말했다.<ref>{{웹 인용|url=http://www.eonline.com/news/337305/miley-cyrus-chops-off-her-hair-do-you-like|title=Miley Cyrus Chops Off Her Hair—Do You Like?|author=Bruna Nessif|publisher=E! Online. NBCUniversal|date= 2012년 8월 12일|accessdate= 2013년 8월 31일}}</ref><ref>{{웹 인용|url=http://www.torontosun.com/2013/07/16/miley-cyrus-busy-making-music-having-fun|title=Miley Cyrus busy making music, having fun|author=Jane Stevenson|work=[[Toronto Sun]]|publisher=[[Sun Media]]|date= 2013년 7월 16일|accessdate= 2013년 9월 1일}}</ref> 2013년 사이러스는 이전에 [[브리트니 스피어스]]의 매니저 경력이 있는 래리 루돌프를 새로운 매니저로 고용했다.<ref>{{웹 인용|last=SieczkowskI|first=Cavan|title=Miley Cyrus Signs With Britney Spears' Manager, Larry Rudolph|url=http://www.huffingtonpost.com/2013/03/06/miley-cyrus-britney-spears-manager-larry-rudolph_n_2819485.html|publisher=Huffington Post|accessdate= 2013년 3월 10일|date=6|month=March|year=2013}}</ref> 다음 해 10월 네 번째 정규 앨범 ''[[Bangerz]]''를 발매하면서 [[할리우드 레코드]]를 나와 [[RCA 레코드]]와 새로이 계약을 맺었다.<ref>{{웹 인용|url=http://www.entertainmentwise.com/news/122942/Miley-Cyrus-Announces-Bizarre-New-Album-Title|title=Miley Cyrus Announces Bizarre New Album Title 'Bangerz'|author=Shaun Kitchener|publisher=Entertainmentwise. Giant Digital|date=2013년 8월 6일|accessdate=2013년 9월 1일|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130809193429/http://www.entertainmentwise.com/news/122942/Miley-Cyrus-Announces-Bizarre-New-Album-Title#|보존날짜=2013-08-09|깨진링크=예}}</ref><ref>{{웹 인용|url=http://www.billboard.com/articles/columns/pop-shop/5657600/miley-cyrus-reveals-bangerz-release-date|title=Miley Cyrus Reveals 'Bangerz' Release Date|author=Jason Lipshutz|work=Billboard|publisher=Prometheus Global Media|date= 2013년 8월 15일|accessdate= 2013년 9월 1일}}</ref> 2013년 6월 3일 새 앨범의 리드 싱글 "[[We Can't Stop]]"이 발매되었다.<ref>{{웹 인용|url=http://www.billboard.com/articles/events/bbma-2013/1562889/miley-cyrus-we-cant-stop-single-due-june-3 |title=Miley Cyrus' 'We Can't Stop' Single Due June 3 |publisher=Billboard |date= 2013년 5월 19일 |accessdate= 2013년 9월 10일}}</ref> 싱글은 [[빌보드 핫 100]] 최고 2위까지 올라갔다. 또 뉴질랜드와 영국에서 처음으로 1위에 올랐다.<ref>{{웹 인용|author=Steffen Hung |url=http://www.charts.org.nz/showitem.asp?interpret=Miley+Cyrus&titel=We+Can%27t+Stop&cat=s |title=Miley Cyrus - We Can't Stop |publisher=charts.org.nz |date= |accessdate= 2013년 9월 10일}}</ref><ref>{{웹 인용|url=http://www.digitalspy.co.uk/music/news/a505799/miley-cyrus-earns-first-uk-number-one-single-with-we-cant-stop.html |title=Miley Cyrus earns first UK number one single with 'We Can't Stop' - Music News |publisher=Digital Spy |date= 2013년 8월 11일 |accessdate= 2013년 9월 10일}}</ref> 뮤직비디오는 엇갈린 반응을 받았는데, 마일리는 좀 더 선정적인 이미지로 변신했다.<ref>{{웹 인용|url=http://www.huffingtonpost.com/bonnie-fuller/miley-cyrus-we-cant-stop-_b_3468060.html# |title=Bonnie Fuller: Miley Cyrus: 'We Can't Stop' Video Celebrates Female Sexual Liberation |publisher=Huffingtonpost.com |date= |accessdate= 2013년 9월 10일}}</ref> 뮤직비디오는 [[Vevo]]에서 공개 24시간만에 조회수 1,000만 건을 넘기는 기록을 세웠고,<ref>{{웹 인용|url=http://daveryanshow.iheart.com/pages/news.html?feed=104650&article=11528508 |title=Miley Cyrus 'We Can't Stop' breaks Vevo record | Trending |publisher=Daveryanshow.iheart.com |date= 2013년 7월 30일 |accessdate= 2013년 9월 10일}}</ref> 37일만에 1억건을넘어 신기록을 세웠다.<ref>{{웹 인용|url=http://www.billboard.com/articles/columns/pop-shop/5047747/miley-cyrus-we-cant-stop-video-breaks-vevo-record |title=Miley Cyrus' 'We Can't Stop' Video Breaks VEVO Record |publisher=Billboard |date= 2013년 7월 29일 |accessdate= 2013년 9월 10일}}</ref>
         [[2009년]] [[6월]] [[영화]] 《라스트 송》 촬영하는 동안 2살 연상 상대 배우인 [[리엄 헴스워스]]와 연인으로 발전해, [[2010년]], [[2011년]] 두 차레 이별과 재결합을 반복하였고,<ref>{{웹 인용 |url=http://www.showbizspy.com/article/229653/miley-cyrus-and-liam-hemsworth-back-together-2.html |title=Miley Cyrus and Liam Hemsworth: Back Together? | Showbiz Spy ? celebrity news, rumors & gossip |publisher=Showbiz Spy |date=2011-04-01 |accessdate=2011-08-07 |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111125030022/http://showbizspy.com/article/229653/miley-cyrus-and-liam-hemsworth-back-together-2.html |보존날짜=2011-11-25 |깨진링크=예 }}</ref>[[2012년]] [[6월]] 두 사람은 약혼하였다.<ref>{{웹 인용|url=http://www.people.com/people/article/0,,20601230,00.html|title=Miley Cyrus, Liam Hemsworth Are Engaged|publisher=People Magazine |date=2012-06-06 |accessdate=2012-06-06}}</ref> 2013년 9월 약혼을 파기했지만, 2016년 재결합한 뒤 2018년 12월에 결혼식을 올렸다. 그러나 결국 두 사람은 결혼 8개월 만에 이혼했다.
  • 문무왕
         '''문무왕'''(文武王, [[626년]]~[[681년]] [[7월 21일]] ([[음력 7월 1일]]))은 [[신라]] 제30대 [[군주|왕]](<small>재위:</small> [[661년]] [[음력 6월]] ~ [[681년]] [[음력 7월 1일]])이다.
         원년([[661년]]) [[6월]] 상중(喪中)이던 문무왕에게 당은 [[고구려]]를 치는 당군과 [[웅진도독부]]에 고립된 당군에 군수물자를 지원하고 [[신라]]가 [[백제]] 부흥군(復興軍)을 진압하는데 나서줄 것을 거듭 요청해왔다. 평양으로 먼저 군량을 보내면 웅진으로 통하는 물자 수송로가 끊어질 것이고, 그 수송로가 끊어지면 [[웅진도독부]]의 당군들은 [[백제]]군에게 궤멸될 것이라는 판단을 내린 왕은 8월에 직접 여러 장수를 거느리고 시이곡정(始飴谷停)으로 향했다. 그 길목에 있는 [[대전 계족산성|옹산성]](甕山城)에 주둔하고 있던 백제 부흥군을 9월 25일부터 공격하기 시작해 27일에 함락시켰다.<ref name="삼국사기-661"/> 옹산성을 함락시키고 웅현성(熊峴城)을 쌓아 [[웅진도독부]]로 통하는 군량수송로를 다시 개통시킨 뒤, 상주(上州) 총관(摠管) 품일(品日)과 일모산군(一牟山郡) 태수 대당(大幢)·사시산군(沙尸山郡) 태수 철천(哲川) 등이 이끄는 군사들이 [[우술성]](雨述城)을 쳐서 또 함락시키고, [[10월 29일]]에 [[서라벌]]로 돌아와 당의 조문 사절을 맞이했다. 한편 [[평양]]을 포위하고 있던 [[소정방]]이 보낸 함자도(含資道) 총관(摠管) 유덕민(劉德敏)<ref group="주">《삼국사기》 [[김유신]] 열전에는 대감(大監) 문천(文泉)이라 표기됨</ref>이 와서 문무왕에게 당군에 대한 군량 지원을 요청하였다.<ref name="삼국사기-661"/> 왕은 이듬해 1월 [[김유신]]으로 하여금 수레 2천여 대에 쌀 4천 섬과 조(租) 2만 2천여 섬을 싣고 [[평양]]으로 가게 하였다. 이들 군은 이듬해 2월에 무사히 군량을 전달하고 귀환하였다.<ref name="삼국사기-662">《삼국사기》 권제6 신라본기 제6 문무왕 2년(662)</ref>
         3년([[663년]]) 봄 정월에는 [[서라벌]] 근교의 [[경주 남산신성|남산신성]](南山新城)에 장창(長倉)을 지었다. 또한 [[경주 부산성|부산성]](富山城)을 쌓았다.<ref name="삼국사기-663"/> 이보다 앞서 [[백제]] 부흥군은 662년 12월에 험준한 주류성(周留城)에서 주변에 평야와 강이 많은 피성(避城)으로 수도를 옮겼는데,<ref name="일본서기-662">《일본서기》 권27 天命開別天皇 天智天皇 원년(662)</ref> 663년 2월에 [[김흠순|흠순]]과 [[김천존|천존]]은 백제 [[거열성]]을 쳐서 빼앗고 거물성과 사평성을 공격하여 항복시켰으며, 덕안성을 쳐서 1,070명을 목베는 등 [[백제]] 부흥군을 더욱 압박해왔다.<ref name="삼국사기-663"/> 결국 부흥군은 피성을 떠나 주류성으로 돌아갔고,<ref name="일본서기-663">《일본서기》 권27 天命開別天皇 天智天皇 2년(663)</ref> 왕은 이미 [[백제]]를 평정하였다며 유사에 명해 큰 잔치를 베풀고 술과 음식을 내려 주게 한다.{{출처|날짜=2018-06-27}} 한편 여름 4월, 당은 [[신라]]를 [[계림대도독부]](雞林大都督府)로 삼고, 문무왕을 계림주대도독(雞林州大都督)으로 삼았다.<ref name="삼국사기-663">《삼국사기》 권제6 신라본기 제6 문무왕 3년(663)</ref> 6월, [[백제]] 부흥군 내의 내분으로 [[복신]]이 [[풍왕]]에게 살해당한 것을 계기로 [[신라]]는 곧장 [[백제]] 부흥군을 쳐서 진압하려 했고,<ref name="일본서기-663"/> 당에서도 [[웅진도독부]]의 장군 유인궤(劉仁軌)의 요청에 따라 우위위장군(右威衛將軍) 손인사(孫仁師)가 40만 군사를 보냈고, 유인궤와 별장(別將) 두상(杜爽), 새로 [[백제]]왕으로 임명된 [[부여융]] 등의 수군은 덕물도(德物島)를 경유해 수로로 곧장 웅진부성(熊津府城)으로 나아갔다.<ref name="삼국사기-663"/><ref name="의자왕-662">《삼국사기》 권제28 백제본기 제6 唐 高宗 龍朔二年(662)</ref> 문무왕 역시 [[김유신]]과 [[김인문]]·[[김천존]], [[화랑]] [[죽지랑]]을 위시한 28명(또는 30명)의 장군을 데리고 당의 손인사·유인원과 군사를 합쳐 [[8월 13일]]에 두솔성(豆率城)<ref group="주">문헌에 따라 두량이성(豆良伊城)·두릉윤성(豆陵尹城)·두곶성(豆串城)·윤성(尹城)이라고도 기록되어 있다.</ref>을 함락했다. 문무왕은 [[왜인]]들에게 훈계하고 본국으로 돌려보냈다.<ref name="김유신-중">《삼국사기》 권제42 열전 제2 김유신 중</ref> 28일에는 백강 어귀에서 당의 수군과 [[백제]]·[[왜]]의 선단이 충돌한 네 번의 싸움 모두 [[백제]]·[[왜]] 선단의 궤멸로 끝났고, [[백제]]의 [[풍왕]]은 몇 사람과 함께 배 한 척에 의지해서 [[고구려]]로 망명해 버렸다([[백강구 전투]]). 요충지인 가림성을 제치고 먼저 주류성을 치기로 결정한 나·당 연합군 지휘부는 9월 7일<ref group="주">《[[자치통감]]》에는 8일로 표기됨</ref>에 마침내 주류성을 함락시켰다.<ref name="일본서기-663"/><ref name="자치통감-663">《자치통감》 권201 唐紀十七高宗天皇大聖大弘孝皇帝 龍朔 3년(663)</ref> [[웅진도독부]]의 당군에게 의복을 공급해주고 겨울 11월 20일에 [[서라벌]]로 돌아와, 문무왕은 여러 장수들에게 논공행상을 행했다. 앞서 당은 [[신라]]와의 합의 없이 일방적으로 [[신라]]를 계림대도독부로 삼고 문무왕을 도독에 임명한 뒤, 임존성을 함락시키지 못하고 돌아오려는 문무왕을 향해 "평정을 마친 뒤 함께 모여 맹약을 맺으라"던 고종의 칙령을 들며 두 나라 사이의 맹약을 제의했다. [[신라]]는 임존성이 함락되지도 않은 상황에서 너무 이르다는 이유로 거절했지만,{{출처|날짜=2018-06-27}} 결국 문무왕 4년([[664년]]) 2월에 [[각간]] [[김인문]], [[이찬 (신라 관직)|이찬]] [[천존]](天存)을 보내어 당의 칙사 [[유인원 (당나라)|유인원]](劉仁願)과 새로 웅진도독이 된 옛 [[백제]]의 왕자 [[부여융]]과 웅진에서 동맹을 맺었다.<ref name="삼국사기-664">《삼국사기》 권제6 신라본기 제6 문무왕 4년(664)</ref> [[백제]] 부흥군은 문무왕 4년([[664년]]) 3월에 [[사비산성]](泗沘山城)에서 최후의 저항을 시도했지만 그마저도 실패로 돌아가면서<ref name="삼국사기-664"/> [[백제 부흥운동|백제 부흥]]은 사실상 종말을 고한다.
         8년([[668년]]) 2월 [[이세적|이적]] 등이 이끄는 당군이 고구려의 [[부여성]]을 비롯한 40여 성을 함락시켰다. 이에 [[연남건|남건]]이 5만의 군사로 그 땅을 수복하려 애썼지만 설하수(薛賀水)에서 3만 명이 죽는 대패를 당하고 퇴각했다.<ref name="고구려-668">《삼국사기》 권제22 고구려본기 제10 보장왕 27년(668)</ref> 3월에 신라는 북방의 요충지였던 비열홀(比列忽, 비열성)에 주를 설치하고 파진찬 용문(龍文)을 총관으로 삼았다.<ref name="삼국사기-668">《삼국사기》 권제6 신라본기 제6 문무왕 8년(668)</ref> [[6월 12일]]에{{refn|group=주|문무왕이 설인귀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유인궤가 신라군과 함께 평양으로 간 것이 5월이라고 기록돼 있다.<ref name="삼국사기-671"/>}} 당의 우상(右相)<ref group="주">정확한 관직명은 요동도안무부대사(遼東道安撫副大使) 요동행군부대총관(遼東行軍副大摠管) 겸 웅진도안무대사(熊津道安撫大使) 행군총관(行軍摠管) 우상(右相) 검교태자좌중호(檢校太子左中護) 상주국(上柱國) 낙성현개국남(樂城縣開國男)이다.</ref> 유인궤가 당 고종의 칙명을 받들고 신라의 숙위 사찬 김삼광과 함께 당항진(党項津)에 도착하자 왕은 [[각간]] 인문을 보내 성대한 예식으로 맞이하게 했다.<ref name="삼국사기-668"/> 이에 유인궤는 약속을 마치고 신라의 선발군을 이끌고 고구려 땅인 천강(泉岡)으로 향하고, 문무왕 역시 [[6월 21일]]에 한성주에서 후발부대를 사열했다. 이때 신라군의 주요 장수들의 명단은 다음과 같다.<ref name="삼국사기-668"/>
         이때 대당대총관으로 임명된 대각간 김유신은 풍병(風病) 때문에 전투에 직접 참가하지는 못하고 수도 서라벌에 남았고,<ref name="김유신-하">《삼국사기》 권제43 열전 제3 김유신 하</ref> 일찍이 백제를 치는데 선두로 나섰던 여러 장수들이 모두 지도부의 요직을 맡아 고구려 공격에 나서게 되었다. 임명된 관직으로 추정한 진격루트는 한성주(한산주)와 비열주(비열홀주) 그리고 하서주(하슬라주) 세 곳으로, 수도 서라벌에서 조직된 군사들은 닷새 후 북쪽을 향해 출발했다.{{출처|날짜=2018-06-28}} [[6월 22일]]에 유인원이 신라의 귀간(貴干) 미힐(未肹)을 보내어 고구려의 대곡성(大谷城)과 한성(漢城) 등 2군 12성이 항복해왔음을 알렸고, 신라군 장수인 인문·천존·도유 등은 일선주 등 일곱 군과 한성주의 병마를 이끌고 당의 군영으로 나아갔다.<ref name="삼국사기-668"/> [[6월 27일]]에는 드디어 문무왕 자신이 서라벌을 출발했고, 이틀 뒤에는 여러 도의 총관들이 일제히 출발했다. 당군 총사령관 이적을 만난 신라의 김인문은 고구려의 평양 북쪽 20리 되는 지점인 영류산(嬰留山) 아래까지 진군하였다.<ref name="삼국사기-668"/>
         10년([[670년]]) 봄 정월, 당 고종은 신라의 사신 김흠순에게는 귀국을 허락하였지만 김양도는 억류하여 감옥에 가두었는데 마침내 감옥에서 죽었다. 이것은 신라가 백제의 땅과 유민을 취한 데 대한 보복 조치였다.<ref name="삼국사기-670">《삼국사기》 권제6 신라본기 제6 문무왕 10년(670)</ref> 3월, 사찬 [[설오유]](薛烏儒)가 고구려 [[태대형]] [[고연무]]와 함께 각각 병사 1만 씩을 거느리고 [[압록강]]을 건너서 옥골(屋骨)에 이르렀다. [[4월 4일]] 개돈양(皆敦壤)에 주둔하고 있던 [[말갈족]]<ref group="주">당나라의 지휘를 받고 있었다</ref>과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다. 이후 당나라가 병력을 지속적으로 충원하자 백성(白城)<ref group="주">지금의 [[경기도]] [[안성]] 일대</ref>으로 후퇴했다.<ref name="삼국사기-670"/> [[6월]]에는 고구려 대형(大兄) [[검모잠]]이 당나라 관리와 승려 법안(法安) 등을 죽이고 신라로 향하였다. 검모잠은 [[안승]](보덕왕)을 왕으로 추대하고 신라에 충성을 약속했다. 문무왕은 이들을 금마저(金馬渚)<ref group="주">지금의 [[전라북도]] [[익산]]</ref>에 머물게 하였다. 7월, 백제의 남은 세력이 배반할까 의심하여 대아찬 김유돈(金儒敦)과 옛 백제의 주부(主簿) 수미(首彌)·장귀(長貴)를 웅진도독부로 보내, 신뢰 차원에서 양측간의 인질 교환을 제의했다. 웅진도독부는 이에 응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군사와 말을 모아 신라군에 대한 야간 기습을 수차례 반복했다.<ref name="삼국사기-671"/> 한편 김흠순 등이 귀국해 당에서 가져온 지도를 바쳤는데, 그 지도는 신라가 차지하게 되어있던 옛 백제령을 모두 백제(웅진도독부)에 돌려주도록 하는 것이었다.<ref name="삼국사기-671"/> 신라는 이를 빌미로 앞서 웅진도독부에서 파견한 백제의 사마(司馬) 예군(禰軍)을 첩자의 혐의를 물어 억류하고, 군사를 일으켜 웅진도독부를 쳐서 땅을 빼앗았다. 이때 신라 장수들 중 싸우지 않고 퇴각한 이들도 있었는데, 이들에 대해서는 특별히 처벌 대신 면직으로 매듭지었다.<ref name="삼국사기-670"/> 같은 달, 사찬 수미산(須彌山)을 보내 안승을 고구려 왕으로 ‘책봉’했다.<ref name="삼국사기-670"/> 12월, 한성주(漢城州) 총관(摠管) 수세(藪世)가 반란을 도모하려 하자, 대아찬(大阿湌) 진주(眞珠)를 보내 목을 베었다.<ref name="삼국사기-670"/>
         11년([[671년]]) 군사를 일으켜 웅진도독부를 침공하였다. 당의 지휘를 받던 말갈병이 설구성(舌口城)을 포위했다가 물러가는 것을 후방에서 쳐서 3백 명을 죽이고, 당군이 백제를 구원하러 올 것에 대비해 대아찬 진공(眞功) 등을 시켜 수군으로 옹포(甕浦)를 지키게 했다.<ref name="삼국사기-671"/> 또한 6월에 장군인 화랑 죽지 등을 시켜 군사를 거느리고 백제 가림성(加林城)의 벼를 짓밟게 했으며, 당병과 석성(石城)에서 싸워 5,300명을 죽이고 백제 장군 두 명과 당의 과의(果毅) 여섯 명을 사로잡는 전과를 거두었다.<ref name="삼국사기-671"/> 7월에 당은 행군총관 설인귀를 신라에 파견했는데, 왕은 사신을 맞아 위로하는 대신 강가의 풀이 우거진 낮은 언덕에 군사를 숨기고 강 어귀에는 무기를 감춰둔 채, 수풀 사이를 오가며 틈을 노려 기습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설인귀는 26일에 당이 신라를 도와서 백제와 고구려를 멸해주었는데 신라가 그 은혜를 잊고, 고구려를 도와 당을 치고 있다며 항의하는 내용과 함께 마음만 먹으면 당이 신라를 집어삼킬 수도 있음을 은근히 협박하는 내용의 편지를 적어 법사 임윤(琳潤)을 시켜 왕에게 보냈다.<ref name="삼국사기-671"/> 문무왕은 설인귀에게 신라가 선왕 때로부터 당에 협조하고 여러 번 신라의 백성이 헐벗고 굶주리는 지경이 되는 것도 마다하지 않고 국고를 내어 번번이 당군을 지원했던 사실과 당이 처음 신라와 했던 약속들을 어기고 신라가 점령하여 지배하던 땅을 무단으로 거둬들인 일을 비난하며 자신의 입장을 표명하였다.<ref name="삼국사기-671"/> 같은 날, 백제 수도였던 사비성에 소부리주(所夫里州)를 설치하고 아찬 진왕(眞王)을 도독으로 삼았다. [[10월 6일]] 당의 조운선(漕運船) 70여 척을 공격하여 낭장(郞將) 겸이대후(鉗耳大侯)와 병사 100여 명을 사로잡는 등 큰 전과를 올렸다.<ref name="삼국사기-671"/>
  • 민겸호
         '''민겸호'''(閔謙鎬, [[1838년]] ~ [[1882년]] [[6월 10일]])는 조선 시대의 문신이자 외척이다. 돈령부판사 [[민치구]]의 셋째 아들이며, [[민승호]]의 친아우이다. 본관은 [[여흥 민씨|여흥]]이다.
         이때 선혜청에서 군인들의 녹봉으로 지급된 쌀에 겨와 모래 등이 섞여서 파문이 되었고, 민겸호의 하인이 [[선혜청]]의 군료 지급 담당자였다. 그러나 사과나 책임자 처벌이 없자 군인들의 불만이 폭발하였다. 사태는 확산되어 [[1882년]] [[6월]] [[임오군란]] 이 발생하자 선혜청당상 겸 병조판서였던 그는 주동자인 김춘영(金春永) 등을 잡아 포도청으로 넘겨 형살(刑殺)시키려고 했다. 그러나 이 문제로 집을 습격당했으며, 난의 진상이 밝혀지자 파직되었다.<ref>http://enc.daum.net/dic100/contents.do?query1=b08m2000a</ref> 민겸호 외에도 그의 하인이 선혜청의 창고지기가 되어 횡령한 재물들도 있었고, 이것은 병사들의 분노를 촉발하게 된다.
         [[1882년]] [[6월 9일]] 경영군이 시끄러웠다. [[1873년]] 이래 대궐에서 사용되는 비용은 끝이 없었다. 호조나 혜청에 저축해 온 것 모두가 바닥나 경관의 월급도 제대로 지급하지 못했으며 5영 군사들도 자주 급식을 받지 못했다. 5영을 파하고 2영만 남겨두었는데 이때 쫓겨난 노약자들은 갈 곳이 없었다. 그래서 이들은 무력으로 난을 일으킬 것을 모의하였다.<ref name="hwang51">황현, 《매천야록》 (정동호 역, 일문서적, 2011) 51페이지</ref> 이때까지 군사들에게 월급을 지급하지 않은 것이 6개월을 경과하였다. 때마침 호남 세선(세금을 받은 양곡을 실어 나르는 배) 수 척이 경창에 짐을 풀었는데 그는 그것으로 먼저 밀린 월급을 지급하라 지시했다.<ref name="hwang51"/>
         다시 복직, 그 뒤 강압적으로 진압시키려다 실패, 피신하던 중 민겸호는 [[한성부]] 도심에서 난병에 붙잡혔다. [[6월 10일]] 전임 선혜청 당상인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김보현 (1826년)|김보현]](金輔鉉)과 함께 포승줄에 묶여 궁중에 끌려갔다가 중희당(重熙堂) 아래에서 난병에 의해 칼로 살해되었다.
         그해 [[8월]] 충숙공(忠肅公)의 시호가 내려졌고, 이듬해 [[6월]] 증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시|의정부]] 에 추증되었다.
  • 박대만
         [[2004년]] 하반기 [[웅진 스타즈]] 입단을 통해 프로게이머 생활을 시작했다. 팀에서 주축 프로토스 카드로 자리매김했고 [[2007년]] [[6월 25일]] [[공군 에이스]]에 입단하면서 다시 프로게이머 활동을 시작했다. 그리고 2년 2개월후인 [[2009년]] [[8월]] 다시 친정팀인 웅진 스타즈로 복귀하자마자 주장으로 임명되었다. 그 이후 1년여만인 [[2010년]] [[5월 24일]] [[이스트로]]와의 [[신한은행 프로리그 09-10]] 시즌 4라운드 3세트에 출전해 상대팀의 저그 에이스 [[김성대]]를 꺾으며 팀 승리에 일조했다. [[2010년]] [[6월]] 임진묵에게 주장 자리를 넘겼고 [[2010년]] [[8월]] [[글로벌 스타크래프트2 리그|GSL]]의 해설을 맡게 되면서 프로게이머를 은퇴하게 되었다. [[2010년]]부터 [[2014년]]까지 4년동안 곰exp의 [[스타크래프트 II]], [[도타 2]] 등의 해설자로 활동하다가 [[2018년]]부터 배틀그라운드 프로게임단인 팀 스퀘어의 감독을 맡아 같은 해 5월 6일 OGN PUBG 서바이벌 시리즈 시즌 1 프로 투어 결승전에서 팀을 우승으로 이끌면서 선수 시절 이루지 못했던 우승의 꿈을 감독이 되면서 이뤄냈다.
  • 박서양 (1885년)
         [[1899년]](광무 2년) 3월 에비슨이 안식년 맞아 고국으로 돌아갔고 그는 그해 [[1월]] [[경성학당]]에 입학하여 [[6월 14일]]에 졸업하였다. [[1899년]](광무 2년) [[12월]] [[조안의숙]]의 교사가 되었으며 1900년 9월 에비슨이 안식년 마치고 귀국하였다. [[1900년]] 아버지 박성춘의 간곡한 부탁으로 그해 [[10월]] [[제중원 의학교]](후의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에 입학하였다. 처음 허드렛일을 시켜 그의 됨됨이를 본 에비슨은 그를 의학교에 입학시켰다.<ref name="jseusa1">[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0/02/05/2010020501212.html <nowiki>[</nowiki>김동섭의 X코리언<nowiki>]</nowiki> 조선 첫 서양식 병원 '제중원' 의사 된 박서양] 조선일보 2010.02.16</ref> [[1904년]] 에비슨이 [[제중원]]의 후신인 [[세브란스 병원]]을 개업하자 박서양은 [[조선인]] 병원 조수가 되어 낮에는 의료활동을 돕고 밤에는 야간반 학생이 되어 공부하였다.
         박서양, 신창희 외 5명에게 의사면허 수여를 보도한 기사, <황성신문> 1908년 6월 7일자
         1908년 6월 13일 제중원 의학교 졸업사진의 한 장 (가운데 오른쪽이 박서양)
         최초로 영어를 배웠으나 영어가 어려웠고, 그의 동기 여섯 명 중에서 세 명이 중간에 자퇴한 뒤에도 그는 끝까지 남아 있었다고 한다. [[1908년]](융희 2년) [[6월 3일]] [[제중원 의학교]]를 졸업하여 1회 졸업생이 되고 [[6월 4일]] 의사 면허를 받았다.
         [[세브란스]]가 처음 제대로 훈련받은 의사를 졸업시킨 것은 1908년 6월 3일이었는데 첫 졸업식에서는 7명이 졸업했다. [[김필순]], [[신창희]], [[김희영]], [[홍종은]], [[홍석후]], [[주현칙]], 박서양 등 7명이다.<ref>[[박성래]], 《인물과학사》 (책과함께, 2011) 228페이지</ref> 졸업 직후 박서양은 기존에 출강하던 [[중앙학교]] 외에 [[오성학교]], [[중앙고등학교|중앙학교]], [[휘문고등학교|휘문학교]] 등에서 화학과 물리를 가르쳤으며,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교수와 [[세브란스 간호원양성소]]의 교수로도 재직했다.
         이후 [[1917년]] [[만주]] [[길림성]] [[용정]](龍井)으로 이주해 [[구세의원|구세의원(救世醫院)]]을 개업하여 의료 활동을 하고, 교회를 설립하였다. 이어 그해 6월 30일 [[숭신소학교]](崇信小學校)를 세워 교장이 되고, 직접 한 반을 맡아 학생들을 교육했다. 그는 교사 5명을 초빙하여 첫 반 28명의 학생들을 가르쳤고 이후 연길현 27개 학교의 연합운동회에도 적극 참여하였다. 그는 [[소학교]]를 세워 아이들을 가르쳤을 뿐 아니라 [[독립군]]들의 의료도 도맡아 하였다고 한다. 그는 자신의 학교에 신분, 반상의 차별을 받지 않고 학생들을 받아들여 무료로 가르쳤으며 실력이 우수한 학생들의 중학교, 고등보통학교 진학을 주선해 주기도 했다.
         [[1923년]] [[8월 21일]] [[숭신학교]]에서 간도 지역의 조선인학교 운영자들과 [[간도교육협회]]의 조직에 참여하였다. 박서양은 집행위원의 한 사람이 되었고 [[김영학]]을 회장으로 선출하였다. 한편 1924년 2월 [[김성수]], [[송진우 (정치인)|송진우]] 등의 부탁으로 [[동아일보]] 간도지국의 총무 겸 특파 기자 일을 맡아보기도 했다. 1924년 6월 연합 운동회에 간도 전체 48개 학교가 참여하였고 [[숭신소학교]]에서 이를 주관하였다. 그러나 이때 간도 총영사가 [[숭신학교]]를 불령선인이 건립한 배일학교라 보고하여 이를 해명, 폐교 위기를 겨우 모면하기도 했다.
         [[1932년]] [[6월]] [[훙커우 공원 사건|윤봉길 의거 사건]] 직후 그의 [[숭신소학교]]는 불온사상을 고취한다는 이유로 일본 영사관 경찰에 의해 임시로 폐교당했다가 다시 복교되었으나 1935년 최종 폐교당하고 만다.
         그는 [[1906년]] [[제중원 의학교]] 재학 중 [[황성기독청년회]]의 화학 강사였고, 또한 [[중앙고등학교|중앙학교]]에 초빙되어 화학을 가르쳤으며 낮에는 소학교 교사로 밤에는 야간반 학생이었다. [[1908년]](융희 2년) [[6월 3일]] [[제중원 의학교]] 졸업 후에는 [[오성학교]], [[중앙고등학교|중앙학교]], [[휘문고등학교|휘문학교]] 등에서 화학과 물리를 가르쳤으며,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교수와 [[세브란스 간호원양성소]]의 교수로도 재직했다.
  • 박신영 (1984년)
         * [[2002년]] [[6월]] 2002 KPGA 투어 2차 리그 3위
  • 박지원 (1737년)
         [[1780년]](정조 4) 44세 때 처남 이재성의 집에 머물고 있다가 삼종형 진하사 박명원(朴明源)을 따라 [[북경]]을 갔다. 1780년 6월 25일 출발하여 압록강을 거쳐 [[베이징]]에 도착했다.
         [[1789년]](정조 13년) [[6월]] [[평시서]][[주부]], [[사복시]]주부(主簿)가 되었다. 문하생 [[최진관]]의 아버지가 사망하자 '치암최옹묘갈명 (癡菴崔翁墓碣銘)'을 지어 주었고, [[개성]]의 선비 김형백이 죽자 '취묵와김군묘갈명 (醉默窩金君墓碣銘)'을 써서 죽음을 애도하였다. 그해 가을에 휴가를 얻어 다시 연암골로 들어갔다. 그해 [[의금부|금부]][[도사]], [[사헌부]][[감찰]]을 거쳐 [[제능]][[능령|령]](齊陵令)을 지냈다.
         * 아버지 : [[박사유]](朴師愈, [[1703년]] - [[1767년]] [[6월]])
  • 박태환
         |[[2006년]] [[6월]]
  • 박태환 (수영선수)
         |[[2006년]] [[6월]]
  • 박필균
         [[1740년]] [[홍문관]]부응교(副應敎)에 제수되고 그해 [[6월]]에 [[조선 효종|효종]]의 존호(尊號)를 가상(加上)할 때 축문을 읽는 제관 중 우두머리인 대축(大祝)의 직임을 맡은 노고로 [[통정대부]](通政大夫)에 가자(加資)되고 [[승정원]][[동부승지]]를 제수받았다.
         **** 삼남 : [[박사유]](朴師愈, [[1703년]] - [[1767년]] [[6월]])
  • 박호언
         [[1998년 6월]] 학생 시절 [[학교폭력예방 및 대책에 관한 법률]]을 제정을 목표로 결성된 학교폭력방지전국연합에 가입하여 집행위원회 학생위원을 역임한 것으로 인권 활동을 시작하였다. 그 후 [[한밭고등학교]] 재학시절인 [[2003년]] [[5월]], [[국가인권위원회]]에서 지역 순회 상담을 위해 [[대전광역시청]]을 방문했을때, 청소년 신분을 증명할 수 있는 수단이 학생증 밖에 없으므로, 학생이 아닌 청소년은 할인혜택을 받지 못하고 있으며 이는 명백한 차별이라는 요지의 진정서를 접수하고, [[대전광역시]]에도 청소년할인제 정책 시행을 건의하였다. 이와 동시에, [[문화방송]]에 당시 방영된 인기프로그램이자 사회적 문제를 적극적으로 다룬 [[느낌표 (텔레비전 프로그램)|느낌표]]에 청소년할인제와 청소년증 발급 캠페인을 진행할 것을 제안해, 하자하자! 제4탄 '청소년 할인'으로 방영되게 하였다. 그 후 국가인권위원회에서는 박호언 학생의 진정을 인용하여, [[대한민국 문화관광부|문화관광부]]에 청소년 우대정책과 비학생청소년을 대상으로 하는 신분증을 발급할 계획을 수립할 것을 권고하였다<ref>{{뉴스 인용
         }}</ref> 해당 위원회는 동년 [[6월]] 청소년 행정에 대한 독립성 강화 측면에서 [[국가청소년위원회]]로 전환되었으며, 박호언의 상장 반납은 철회되었다.
  • 변수 (1861년)
         [[1883년]] [[6월 11일]] 조선의 친선사절단인 [[보빙사]]가 미국에 파견될 때, [[민영익]]을 전권대신으로 [[홍영식]]·[[유길준]]·[[서광범]] 등과 함께 사절단의 한 사람으로 임명돼 [[1883년]] 7월 인천항을 출발, 같은해 [[9월 2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 기차편으로 뉴욕에 도착한 후 40여 일 동안 미국에 체류하면서 미 대통령을 만나 면담하고 각 기관을 두루 시찰하고 귀국했다.<ref name="중앙">[https://archive.is/20130426215657/article.joins.com/article/article.asp?Total_ID=2854588 〈키워드로푸는역시〉 유길준 한국인 최초 미국 유학] 중앙일보 2007-08-17</ref> [[1884년]] 봄 [[일본]]을 경유하여, 귀국하였다.
         [[1887년]] [[9월]] [[미국]] [[메릴랜드 대학교]] 농과에 입학해 농학을 전공하고 1891년 졸업하여 한국인 최초의 미국대학 졸업생이다.<ref name="매경"/> 정확히 6월에 이학사 학위를 받았다.<ref name="중앙"/> 대학 재학 시절인 [[1890년]]부터 [[미국 농무성]] 직원으로 근무했으며, [[1891년]] [[6월]] [[메릴랜드 대학교]] 농과 졸업과 동시에 이학사(理學士) 학위를 취득하였다. 1891년 9월에는 농무성통계국 월보 제89호에 '일본의 농업'이란 글을 싣기도 게재하였다. 그러나 그해 [[10월]] 모교 [[메릴랜드 대학교]]를 방문했다가 돌아가던 길에 대학 정거장에서 열차를 기다리던 중 열차 사고로 사망하였다.<ref name="매경"/><ref name="중앙"/>
  • 변은종
         [[2008년]] [[6월]] 은퇴하였으며, 은퇴 직후부터 2010년까지 포커 선수로 활동하였다.
         *[[2003년]] [[6월]] MBC게임 계몽사배 팀리그 신인왕
         *2006년 6월 9일 신한은행 스타리그 시즌1 4강 vs [[조용호]] 0:3 패
         *2006년 6월 14일 신한은행 스타리그 시즌1 3,4위전 vs [[홍진호]] 0:3 패
  • 변희재
         변희재는 한국인터넷미디어협회 명의로 [[안철수]] 의원실, MBC [[문화방송]](대표 김종국), [[방송문화진흥회]](이사장 김문환)에, [[2009년]] [[6월 17일]]에 방영된 MBC [[무릎팍 도사]]에서 안철수 의원이 직접 유포한 세 가지 거짓말과 한가지 확인되지 않은 사실을 정정하라는 내용증명을 발송하기도 했다.<ref>[http://mediawatch.kr/news/article.html?no=240610 변희재, "안철수 거짓말 100만인 소송, 모든 소송의 꽃" |미디어치치 홈페이지 -- 링크오류]</ref>
         [[2003년]] [[6월]]에는 각 방송사에서 젊은 여성 앵커들을 간판스타로 내세우는 점을 문제점으로 지적, 비판하였다. [[2003년]] [[6월]]에 발간된 <인물과 사상> 6월호는 ‘왜 여성앵커는 젊고 예뻐야 하는가’ 라는 글을 실었다.<ref name="insa">[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10&oid=006&aid=0000004126 여성앵커 여전히 ‘말하는 꽃’] 미디어 오늘 2003.06.09</ref> 여기서 그는 방송 앵커의 성차별, 그리고 여성 앵커의 연령 차별 문제를 다루었다.
         그는 [[인물과 사상]] 6월호에서 방송사의 앵커, 진행자 임명의 비합리성을 지적, 논박했다. 이후 방송사에서는 중장년 남성과 젊은 여성 진행자 위주로 선정하던 것을 개정, 젊은 여성 사회자 외에도 중년 여성 사회자, 중년 여성과 젊은 남성 사회자로 편성한 방송, 프로그램들도 등장하기 시작했다.
         2013년 6월 미디어워치 대표인 변희재는 자신의 서울대학교 미학과 12년 선배인 진중권 동양대학교 교수가 서울대학교에서 받은 석사의 학위논문이 표절이라는 주장을 재차 했다.
         2013년 6월 4일 [[안철수]]는 국회의원 당선 직후 첫 정책간담회에서 라면 값이 얼마냐는 영세 대리점주의 질문에 제대로 답변하지 못했다. 변희재는 이를 트집 잡았다. 변 대표는 "라면 마니아 안철수, 라면 값 모를 수 있습니다.... (중략) 협찬 받아 먹었으면... (중략)"이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이어 "'안철수는 라면 마니아. 신제품은 모조리 먹어본다', 아무리 라면 협찬받았다 해도 이건 좀 심하네요. 라면 마니아가 어떻게 라면 가격을 모릅니까."라며 한 매체에 올라온 관련 동영상을 올렸다.<ref name="raden">[http://www.etoday.co.kr/news/section/newsview.php?idxno=743169 변희재 “안철수, 라면 마니아라더니...그동안 서민 흉내내느라 사기쳤어”]</ref>
         * [http://www.sisaon.co.kr/news/articleView.html?idxno=13123 변희재 ˝임수경은 막말을 한 게 아니다˝] 시사온 2012년 06월 12일자
  • 봉석주
         일찍이 무과에 급제하여 [[훈련원]]봉사를 지냈다. [[1442년]] [[6월]] 부사정(副司正)으로 재직 중, 주서(注書) 권효량(權孝良)와 함께 관기 패강아(浿江兒)와 관계하였는데 이는 [[중국]] 사신 오양(吳良)이 관계한 여기(女妓)라 하여 [[의금부]]의 탄핵을 받고 장 80대형을 받았다.
  • 빅토르 안
         [[대한빙상경기연맹]]과의 갈등 및 파벌 논란, 소속 팀 해체, 국가대표 선발전 탈락 등으로 어려운 처지에 빠진 안현수는 새로운 여건에서 운동할 수 있는 [[러시아]]로 귀화하기로 결정하였다.<ref name="russia"/> [[2011년]] [[6월]] [[러시아]]로 이주하였고,<ref>[http://sports.khan.co.kr/news/sk_index.html?cat=view&art_id=201106011408113&sec_id=530101&pt=nv 안현수의 도전은 끝나지 않았다, 러시아 진출위해 오늘 출국], 스포츠경향, 2011년 6월 1일</ref> [[러시아]] 국적까지 취득하여 [[러시아]] 국가대표로 국제대회에 출전할 계획도 세웠다.<ref>[http://news.donga.com/3/all/20110817/39582346/1 쇼트트랙 안현수, 러시아 대표로 뛸 듯], 동아일보, 2011년 8월 17일</ref> 귀화에 앞서 2011년 7월, 국민체육진흥공단에서 자신의 남은 연금을 일시불로 수령하였다.<ref>[http://www.dailian.co.kr/news/view/419760/?sc=naver 러시아 귀화’ 안현수…연금혜택 받을 수 있나], 데일리안, 2014년 2월 7일</ref> [[2011년]] [[12월 28일]] [[러시아]]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대통령은 안현수의 [[러시아]] 국적 취득을 인정하는 대통령령에 서명하여, 그는 정식으로 [[러시아]] 국적을 취득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4&oid=001&aid=0005442037 쇼트트랙 안현수 러시아 국적 취득], 연합뉴스, 2011년 12월 28일</ref> 귀화와 동시에 [[러시아]]에서 명성을 떨친 [[우크라이나]]-고려인 혼혈 록 가수 [[빅토르 초이]]처럼 유명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빅토르 안({{lang|ru|Виктор Ан}})으로 개명하였다고 한다.<ref>[http://news.naver.com/sports/index.nhn?ctg=ranking_news&mod=read&ranking_type=popular_day&date=2011-12-29&rank_id=34593966&office_id=001&article_id=0005442090 러시아 국적 취득한 빅토르 안 인터뷰], 연합뉴스 2011년 12월 29일</ref><ref>{{언어링크|ru}} [http://sport.ria.ru/other_sport/20111228/528481521.html Мастер шорт-трека Ан Хен Су хочет догнать по популярности Виктора Цоя], [[리아 노보스티]] 2011년 12월 28일</ref> [[러시아]] 국적 취득으로 [[대한민국 국적법]]에 의해 그의 [[대한민국]] 국적은 자동 소멸되었다.
  • 서기원 (1930년)
         그의 [[본관|본관(관향)]]은 [[대구 서씨|대구(大邱)]]이고 [[일제 강점기 조선|일제 강점기]] [[서울특별시|경성]][[경성부|부]] [[종로구|종로방]] [[교남동|송월정]]에서 출생하였고 이후 [[장쑤 성|중화민국 장쑤 성]] [[상하이 시|상하이]]에서 잠시 유년기를 보낸 적이 있는 그는 [[광복절|8·15 광복]] 이후 고국에 귀국을 하여 이후 [[충청남도|미 군정 남조선 과도정부 충청남도]] [[홍성군]] [[홍성읍]]과 [[공주시|미 군정 남조선 과도정부 충청남도 공주군 공주읍]]에서 청소년기를 보내었으며 [[서울대학교|서울대학교 경제학과]] 중퇴 이후 [[1950년]] [[11월]]에는 [[대한민국 공군사관후보생|공군사관후보생 6기]]로 [[대한민국]] [[대한민국 공군|공군]] [[소위]] 임관을 하여 [[한국 전쟁]]에 참전하였고 이듬해 [[1951년]] [[6월]] [[대한민국 공군|공군]] [[중위]] 진급하였으며 2년 후 [[1953년]] [[3월]] [[대한민국 공군|공군]] [[대위]] 진급을 하였고 그로부터 2년 후 [[1955년]] [[11월]]에는 [[대한민국]] [[대한민국 공군|공군]] [[대위]] 예편 이후 이듬해 [[1956년]] [[11월 28일]]에는 2년 연하의 성기원(成耆媛)과 결혼하여 그녀와의 사이에서 슬하 3남 1녀를 두었다.
         * [[1967년]] [[동화통신]] 경제부 부장([[1967년]] [[6월]]).
  • 성승
         '''성승'''(成勝, ? ~ [[1456년]] [[6월 8일]])은 조선 전기의 무신, 군인이며 [[단종 복위 운동]]의 가담자의 한사람이다. [[사육신]] [[성삼문]]의 아버지이고 [[생육신]] [[성담수]], [[성담년]]의 5촌 당숙이다. [[조선 중종|중종]] 때의 형제 정승 [[이기 (1476년)|이기]], [[이행 (조선)|이행]] 형제의 외종조부가 된다. [[무과]]에 급제하여 관직은 [[오위도총부]]도총관에 이르렀다.
         [[김종서]], [[황보인]] 등을 제거한 공신들을 축하하는 한 연회에 참여하지 않았고, 그 뒤 기회를 엿보던 중 1456년(세조 2) 6월 1일 세조가 상왕인 단종과 함께 명나라 사신을 위하여 창덕궁에서 큰 잔치를 여는 그날을 거사일로 정하고, 동지중추원사인 유응부와 당상(堂上) 무신인 박쟁과 함께, 왕의 뒤에 운검(雲劒)으로 섰다가 그 자리에서 세조를 제거하고 단종을 복위하기로 계획하였다.
         그 뒤 [[1456년]] [[6월]] [[명나라]]에서 사신이 파견될 때 거사를 정하여 [[별운검]]으로 참여하여 [[조선 세조|세조]]와 [[조선 덕종|의경세자]], [[조선 예종|해양대군]] 삼부자의 목을 치기로 결정하였으나, 이를 눈치챈 [[신숙주]], [[한명회]] 등이 연회를 취소하고 조사하면서 체포되었다.
         [[1456년]] [[6월 7일]] 세조가 잔치의 장소가 좁다는 이유로 운검을 폐지하라고 명을 내렸으므로 그날의 거사는 중지되고, 뒷날 임금이 곡식의 씨를 뿌리는 것을 관람하는 행사인 관가(觀稼)때에 다시 거사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거사의 실패로 체포를 염려한 김질의 밀고로 발각됨에 따라 모의하던 이들과 함께 체포되어 그해 [[6월 8일]] [[군기시]] 앞에서 [[능지처참]]형(凌遲處斬刑)을 당했다. 이때 그의 아들과 손자도 모두 죽음을 당했고, 조카들과 사촌 [[성희]] 등도 연좌되어 유배되었으며 아버지 [[성달생]]의 묘소는 석물을 뒤엎어버리고 부관참시되었다.
         ** 아들 : [[성삼문]](成三問, [[1418년]] ~ [[1456년]] [[6월 8일]])
         ** 며느리 : 김씨(金氏<ref>세조실록 30권, 세조 9년(1463 계미 / 명 천순(天順) 7년) 6월 23일(신사) 1번째기사 "옥리가 창원 부사 권유순을 잡으려 하자 목매어 죽은 그의 아내 김씨에 대한 사론"</ref>, 한림(翰林) 김수손(金首孫)과 재혼하였다.), 이름은 사금(四今.<ref name="sil00"/>), 김련(金憐)의 딸, 김잉의 손녀
  • 성재기 (조선)
         자헌대부(資憲大夫) 행용양위대호군(行龍驤衛大護軍)을 지낸 성원묵(成原默)의 아들이다. [[1858년]](철종 9년) [[음서 제도|음서제]]로 출사하여 [[교관]](敎官)이 되고, 그해 식년과 [[진사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다. [[1860년]] [[3월]] 다시 동몽교관(童蒙敎官)이 되었다가 그해 윤3월 면직되었다. 그해 [[4월]] [[선공감]][[봉사]], [[7월]] 제관(祭官), [[1861년]] [[1월]] 6품직으로 승진, 상호감조도감(上號監造)의 사과가 되었다. [[1862년]] [[9월]] [[조지서]]별제, [[11월]] [[찰방]], [[사헌부]][[감찰]]을 거쳐 [[1863년]] [[6월]] 통훈대부(通訓大夫)로 승진, [[장악원|장악원정]]이 되었다.
  • 성혼
         |출생일= [[1535년]] [[6월 25일]]
         '''성혼'''(成渾, [[1535년]] [[6월 25일]] ~ [[1598년]] [[6월 6일]])은 [[조선]]중기의 문신, 작가, 시인이며 [[성리학]]자, 철학자, 정치인이다. 자(字)는 호원(浩原), 호는 우계(牛溪), 또는 묵암(默庵). 시호는 문간(文簡). 본관은 [[창녕 성씨|창녕]]. [[성수침]]의 아들이자 문하에서 수학하다 휴암 [[백인걸]] 문하에서 배웠다. 이때 [[이이]]를 만나 평생 친구로 지냈다. 학행으로 천거되어 거듭 사퇴하였으나 [[이이]]의 권고로 출사했고, [[이이]] 사후에 출사하여 [[의정부]][[좌찬성]]에 이르렀다. [[문묘]]에 종사된 [[동방 18현|해동 18현]] 중의 한 사람이다.
         그리고 장례는 간소하게 할 것과 성현의 말씀대로 행할 것을 주문한다. 또한 어가를 보고도 묵살했다는 주장은 참소임을 호소하였다. 그해 [[6월]] [[경기도]] 파주 파산서실(坡山書室)에서 병으로 사망한다. 당시 그의 향년 63세였다. 죽은 후, 반대파들에 의해 관작을 빼앗겼다. 저서로는 《우계집》, 《주문지결 (朱門旨訣)》, 《위학지방 (爲學之方)》 등이 있다.
  • 세븐 (가수)
         * 2006년 06월 단독콘서트 실황을 담은 [[DVD]] 첨부
         * 발매일: [[2007년]] [[6월]]
         ** [[6월 7일]] [[MBC]] 《[[음악캠프]]》 1위 (5주 연속)
  • 소연 (1987년)
         [[2005년]] 친친가요제에서 [[거미 (1981년)|거미]]와 [[휘성]]의 듀엣곡 《Do it》으로 금상을 수상했고 [[SM 엔터테인먼트]]의 연습생이 된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001&oid=020&aid=0002067516& 티아라 여섯 멤버들을 소개할게요] - 동아일보</ref> 여성 그룹 [[소녀시대]]의 예비 멤버였지만 탈퇴했고<ref>[http://www.gooddaysports.co.kr/news/?cset=star&bset=view&tot_code=49&code=8490 '티아라' 소연, "원래 '소녀시대' 탈퇴 후 많이 후회하며 마음고생해"] {{웨이백|url=http://www.gooddaysports.co.kr/news/?cset=star&bset=view&tot_code=49&code=8490# |date=20140812011541 }} - 굿데이</ref> [[2009년]] [[6월]] 코어콘텐츠미디어 소속의 여성 그룹 [[유밴드]]의 멤버에 합류하였다. 하지만 [[2017년]] [[5월]] 계약만료와 동시에 [[보람]]과 함께 탈퇴했다.
  • 손민한
         또한 [[2009년]]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WBC]] 대표팀의 주장으로 뽑혔다. 하지만 결승전까지 단 1경기에도 등판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컨디션 난조 때문이었으며 실제로 그는 그 때 어깨가 좋지 않았다. 이를 본 팬들은 "그가 실종됐다"는 패러디성 유머를 만들어 희화화하기도 했다.<ref>[http://www.asiatoday.co.kr/news/view.asp?seq=224314 "다섯 번째 한국전을 남겨둔 일본 '손민한은 누구?' "] 《글로벌 종합일간지》 2009-03-25 인터넷 뉴스팀</ref> 2009 프로 야구가 개막한 이후로도 자신이 회장으로 있던 [[한국 프로 야구 선수협회|선수협]]의 노조 결성 논란으로 인해 출전이 없었다가, [[2009년]] [[6월 7일]] [[두산 베어스]]전에 [[2008년]] 준 플레이오프 2차전 이후 7개월만에 1군 경기에 등판하여 6이닝 동안 무실점으로 팀의 영봉승을 이끌어 냈다.<ref>[http://osen.freechal.com/news/view.asp?code=G0906070128 '손민한 무실점 쾌투' 롯데, 두산 꺾고 2연승]{{깨진 링크|url=http://osen.freechal.com/news/view.asp?code=G0906070128 }}, 《OSEN》 [[2009년]] [[6월 7일]]</ref> 같은 해 [[6월 26일]]에 [[한화 이글스]]전에서 역대 20번째 통산 100승을 거뒀다.
         하지만 결국 정식 선수 등록 마감일까지 이적할 팀을 찾지 못했다. [[2013년]]에 선수로 복귀하기 위해서 [[신고선수]]로 입단해 [[6월 1일]] 이후부터 1군 등록이 가능한 [[신고선수]] 등록 기간에 돌아오는 길밖에 없었다. [[NC 다이노스]]에서도 그의 부상 이력 때문에 최대한 몸을 만들 때까지 복귀를 서두르지 않을 거라 판단하고, 코칭스태프가 전지 훈련을 마치고 돌아오는 3월에 테스트를 거쳐 [[신고선수]] 영입 여부를 결정하려고 했다.<ref>[http://www.sportsworldi.com/Articles/Sports/BaseBall/Article.asp?aid=20130131023242&subctg1=25&subctg2=00&OutUrl=naver 선수등록 마감일을 넘긴 손민한…6월에는 돌아올까] - 스포츠월드</ref> 이후 [[2013년]] [[4월 15일]]에 연봉 5,000만원의 조건으로 [[신고선수]] 계약을 맺었다. 퓨처스 팀에 합류해, 몸 상태를 고려하여 퓨처스 경기에 등판했다.<ref>[http://osen.mt.co.kr/article/G1109576398 NC, 손민한과 연봉 5,000만원에 입단 계약] - OSEN</ref>
         [[2013년]] [[6월 5일]] [[노성호]]를 대신해 4년 만에 1군 경기에 올라왔다. [[SK 와이번스]]전에서 선발 등판하여<ref>그가 1군에 올라오면서 4승으로 선발진에서 활약한 마무리로 보직을 바꿨으나, 난조를 보여 다시 선발 [[투수]]로 보직이 변경됐다.</ref> 1,378일 만에 1군 복귀전을 치뤘고, [[김광현 (야구 선수)|김광현]]을 상대로 1,407일 만에 선발 승을 거뒀다.<ref>[http://sports.news.naver.com/sports/index.nhn?category=baseball&ctg=news&mod=read&office_id=109&article_id=0002548990 ‘살아 있네’ 손민한, 화려한 귀환 알리다] - OSEN</ref> [[2013년]] [[6월]] 한 달 동안 4경기에 선발 등판해 3승, 평균자책 0.77, 8탈삼진으로 활약했으며, [[KBO 리그]] 6월 MVP에 선정됐다.<ref>[http://xportsnews.hankyung.com/?ac=article_view&entry_id=343139 '6월 MVP' 손민한 "앞으로도 좋은 모습으로 야구할 것"] {{웨이백|url=http://xportsnews.hankyung.com/?ac=article_view&entry_id=343139# |date=20131203015121 }} - 엑스포츠뉴스</ref> 하지만 그는 선발로 나설 때마다 투구 수에 대한 부담으로 당시 감독이었던 [[김경문]]에게 불펜 전환 의사를 표명했고, [[김경문]]도 이를 승인해<ref>[http://sports.news.naver.com/sports/index.nhn?category=kbo&ctg=news&mod=read&office_id=241&article_id=0002146767 불펜 전환 손민한, “선발로 이기기 쉽지 않더라”] - 일간스포츠</ref> 불펜으로 전환했으며, 마무리 [[투수]]도 겸했다. [[2013년]] [[7월 24일]] [[삼성 라이온즈]]전에서는 데뷔 첫 홀드를 기록했다.<ref>[http://sports.news.naver.com/sports/index.nhn?category=kbo&ctg=news&mod=read&office_id=117&article_id=0002357821 역전패에 빛 바랜 손민한의 생애 첫 홀드] - 마이데일리</ref> [[2013년]] [[8월 13일]] [[한화 이글스]]전에서는 프로 데뷔 후 처음으로 타석에 섰으나, [[김혁민]]을 상대로 삼진을 당했다.<ref>[http://sports.news.naver.com/sports/index.nhn?category=kbo&ctg=news&mod=read&office_id=109&article_id=0002595915 NC 손민한, 프로 데뷔 17년 만에 첫 타석 '삼진'] - OSEN</ref>
         [[4월 5일]] [[한화 이글스]]와의 경기에서 6이닝 5피안타, 3탈삼진, 1실점(비자책)으로 선발 승을 기록했다. 그는 40세 3개월 3일의 나이로 [[박철순]]에 이어 3번째 최고령 선발 승을 기록했다.<ref>[http://www.mydaily.co.kr/new_yk/html/read.php?newsid=201504051658882228&ext=na '40세 선발승' 손민한, 송진우-박철순 이어 역대 3위] - 마이데일리</ref> [[5월 28일]] [[두산 베어스]]와의 경기에서 역대 17번째 통산 7,000타자 상대를 달성했다.<ref>[http://sports.khan.co.kr/news/sk_index.html?cat=view&art_id=201505281942433&sec_id=510201&pt=nv NC 손민한, 개인 통산 7000타자 상대 달성…역대 17번째] - 스포츠경향</ref> 경기에서는 6이닝 5피안타, 1볼넷, 무실점으로 시즌 6승을 기록했고, 이 승리로 팀 창단 최다 연승인 8연승을 기록했다. [[6월 18일]] [[kt 위즈]]와의 경기에서 5이닝 6피안타, 3탈삼진, 4실점(2자책)을 기록하면서 시즌 7승을 기록했으며, 역대 19번째 통산 1700이닝을 기록했다.<ref>[http://www.xportsnews.com/jsports/?ac=article_view&entry_id=599697&_REFERER=http%3A%2F%2Fnews.search.naver.com%2Fsearch.naver%3Fsm%3Dtab_hty.top%26where%3Dnews%26ie%3Dutf8%26query%3D%25EC%2586%2590%25EB%25AF%25BC%25ED%2595%259C%2B1700#close_kova NC 손민한, 1700이닝 출장 달성…통산 19번째] - 엑스포츠뉴스</ref> [[6월 24일]] [[KIA 타이거즈]]와의 경기에서 5이닝 5피안타, 2볼넷, 2탈삼진, 무실점으로 시즌 8승이자 역대 13번째 개인 통산 120승을 달성했다.<ref>[http://sports.khan.co.kr/news/sk_index.html?cat=view&art_id=201506250600033&sec_id=510201&pt=nv ‘120승’ 손민한, NC이기에 가능했다] - 스포츠경향</ref> [[2015년 한국프로야구 올스타전]]에 감독 추천 선수로 발탁됐다. 특히, 올스타전 기준 나이 40세 6개월 16일로 종전 최고령 투수이던 [[김용수]]의 40세 2개월 21일을 깨고 최고령 올스타전 투수가 됐다.<ref>[http://osen.mt.co.kr/article/G1110195893 안지만-유희관 등 올스타전 감독 추천선수 확정] - OSEN</ref>
         * 2013년 : 한국프로야구 6월 MVP
         | 통산 100승 || [[2009년]] 6월 26일 || [[롯데 자이언츠|롯데]] || [[한화 이글스|한화]] || [[대전야구장|대전]] ||2008년 8월 26일 [[이상목]] || 역대 20번째<br />패전투수 : 정민철
         | 통산 120승 || [[2015년]] 6월 24일 || [[NC 다이노스|NC]] || [[KIA 타이거즈|KIA]] || [[마산야구장|마산]] ||2014년 6월 25일 [[배영수]] || 역대 13번째<br />패전투수 : [[서재응]]
         | 통산 1700이닝 || [[2015년]] 6월 18일 || [[NC 다이노스|NC]] || [[kt 위즈|kt]] || [[수원야구장|수원]] || || 역대 19번째
  • 손소벽
         [[1839년]] [[기해박해|기해년의 박해]] 동안에, 그녀는 친척집에서 숨어지냈지만, [[6월]]에 가족과 함께 [[체포]]되었다. 포장은 그녀를 [[심문]]했다. "네 동료 [[천주교]]도 들이 어딨는지 불어라." "저는 제 동료 교우들이 있는 곳을 발설하여 그들에게 해를 입히고 싶지 않습니다. 저는 절대 [[하느님]]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네가 그 한 마디만 한다면, 석방되어 네 남편과 자식들과 함께 살 수 있지만, 고집을 부린다면, 너는 죽을 것이다." "제 삶은 제 것이 아닙니다. 저는 제 삶을 [[구원]] 받기 위하여 제 [[하느님]]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 수호 (가수)
         * [[MBC]] 《[[듀엣가요제]]》 (2016년 6월 10일)
         * [[2016년]] [[6월 24일]] [[KBS2]] 《[[뮤직뱅크]]》 842회 스페셜 MC
         * [[2018년]] [[6월]] 영화 《[[여중생A (영화)|여중생A]]》 - 현재희 역 (주연)
         * [[2019년]] [[6월]] DIMF 홍보대사
  • 신응희
         [[1907년]](광무 10년) [[6월]] [[대한제국]]으로 환국, 바로 [[중추원 (대한제국)|중추원]]부찬의(中樞院副贊議)에 임명되었다가, [[대한제국 순종|순종]] 즉위 후 [[육군]][[부령]]에 임명되었다. [[9월 19일]] [[육군]][[부령]]에서 면직되고, [[육군]][[정령]]에 임명되었다가 [[1907년]](융희 1년) [[10월]] 정령으로 예편하고 [[중추원 (대한제국)|중추원]]부찬의(中樞院副贊議)에 임명되었다. [[11월 10일]] 다시 중추원부찬의에 임명되고 [[주임관]]2등(奏任官二等)에 서임되었다. 그러나 그해 [[12월 20일]] 의원면직하였다.
         [[1908년]](융희 2) [[1월]]에는 그의 친구인 [[특진관]] [[장박]](張博)이 [[평리원]]판사(平理院判事) [[박만서]](朴晩緖)에게 신응희를 위해서 사퇴하라고 압력을 넣어 물의를 빚기도 했다. 정미 7조약 이후 그는 [[내무부]]대신 [[송병준]](宋秉畯) 등의 추천과 통감부의 비호를 받아 [[1908년]] [[2월 19일]] [[전라남도]][[관찰사]] [[칙임관]] 3등(勅任官三等)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그는 [[전라남도|전남]][[관찰사]]직을 여러번 사양했다. 총리대신 [[이완용]]과 [[이토 히로부미]] 통감이 여러번 권하였으나 그는 마다하였다.<ref>"신씨강직", 대한매일신보 1908년 2월 19일자 2면, 잡보외방통신</ref> 결국 그해 [[6월 11일]] [[전라남도]] [[관찰사]](全羅南道觀察使) [[칙임관]]3등에 재임명되자 취임하였다. [[1908년]] [[6월 25일]] 겸임[[전라남도]][[재판소]][[판사]](兼任全羅南道裁判所判事)를 겸임하였다.
         [[1908년]](융희 2년) [[3월]] [[대동학회]]의 평의원의 한 사람에 위촉되었고, 그해 [[5월]]에는 [[대한학회]] 찬성회 창립발기인이 되었으며 [[대한학회]]의 평의원이 되었다. 그해 [[6월]]에는 [[대한협회]]의 회원으로 임명되었다.
  • 심기식
         * [[2009년]] [[6월]] : CBS 춘천방송본부 편성팀 팀장
  • 심상학
         [[1876년]] 부교리와 교리에 임명되고 중학교수직에 임명되었으나 신병으로 사직을 청하여 중학교수직에서 해임되었다. [[1877년]] [[홍문관]]부수찬에 임명되고 바로 겸임 [[어영청]]종사관직을 겸임하였다. 이 해 [[3월]] 잠시 부사과로 전직되었다가 다시 부수찬 겸 어영청종사관이 되고, 그해 [[6월]] [[병조]][[정랑]], 12월 [[사헌부]][[장령]]이 되었다.
         * 부인 : 연안 이씨([[1847년]] ~ [[1913년]] [[6월 8일]]), 자녀 없음
  • 심정 (1471년)
         [[5월]] 밤에 숙직근무하던 중 [[조선 연산군|연산군]]의 명을 받아 홍문관 응교(應敎) 정환(鄭渙)과 함께 선정전 월랑(月廊)에서 '간신을 베어 없애다.'는 뜻으로 율시(律詩)를 지어 바쳤다. [[6월]] 왕이 밤까지 사냥을 나가자, 다른 언관들과 함께 밤늦게까지 사냥을 다니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간했다가 끌려가 공초를 당했고, 바로 태형 40대를 받고 유임되었다.
         [[1513년]] [[1월]] 한성부 좌윤(漢城府左尹), [[2월]] 경연특진관을 거쳐 [[1513년]] [[3월]]에는 [[현덕왕후]]의 복권을 청하는 송일의 주장에 동조하였다. 그해 [[6월]] 형조 참판이 되었다. 전해에 유자광이 죽자 어머니에게 불손하게 대한 그의 아들 유진(柳軫)이 불효죄로 탄핵을 받고 사형에 처하자는 논의가 벌어지자<ref>1513년 9월 대사간 홍경림(洪景霖)이 유진을 사형에 처할 것을 상소했다.</ref> 노공필(盧公弼)·이자건(李自健)은 사형에 처하는 것은 지나치다며 반대하였으나, 그는 다른 경연관들과 함께 강상죄가 크다며 유진의 사형에 찬성하였다. [[1514년]] [[10월]] 이조참판이 되자, [[11월]] 대간이 그가 관직에 임명된지 얼마 안돼 이조참판에 임명된 것을 탄핵하였으나 왕이 듣지 않았다. 이후 계속 양사의 논박을 받았으나 왕이 들어주지 않았다.
         [[1515년]] [[7월]] 인사행정 잘못에 책임을 지고 [[이조판서]] [[안당]]과 함께 사직을 청했으나 왕이 듣지 않았다. [[1515년]] [[이조판서]]로 승진했으나 삼사(三司)의 탄핵을 받아 물러났다. [[1516년]] [[6월]] [[개성부]] 유수(開城府留守), [[8월]] [[형조판서]]를 거쳐 [[1518년]](중종 13년) [[1월]] 경연특진관이 되었다.
         [[1521년]] [[3월]] 지중추부사, [[5월]] 의정부 좌참찬을 거쳐 안당 등의 추국에 참여한 공로로 1계급 특진되자 스스로 사양하였으나 왕은 그에게 1자급을 특진시켰다. 그해 [[10월]] 다시 좌참찬에 임명되고, [[1522년]] [[4월]] [[왜구]]가 [[조선]]에 침략하자 대책을 논의하였으며, 김전, 남곤 등과 함께 [[일본]]에 끌려간 백성들의 쇄환을 건의하였다. [[6월]]에 순변사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였다.
         이후 병을 얻은 [[정경부인]] [[하양 허씨]](河陽 許氏)는 [[1534년]](중종 29년) [[4월 19일]]에 사망하여 이해 6월에 심정의 묘에 합장하였다. 그 뒤 정적인 김안로가 패사(敗死)한 뒤 김안로의 형 김안정(金安鼎)이 사건의 진상을 밝히자 부자가 함께 신원 복작되었다.
  • 심현섭
         《[[개그콘서트]]》의 원조 멤버인 [[김미화]], [[백재현 (1970년)|백재현]] 등과 함께 [[개그콘서트]]의 중심멤버로 활약하다가 [[김미화]], [[백재현]] 등이 직접 출연하지 않게 되자 그가 핵심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는데 개인사정 탓인지 [[2000년]] [[6월]] 해당 프로그램에서 잠정 하차했으며 같은 해 가을개편 때 복귀했다<ref>{{뉴스 인용
  • 안미선
         * 《[[아침마당]]》 ([[KBS]], [[2012년]] [[6월]]) 전문 대역모델
         * 《태요가: 섹시 보디라인을 살린다》 2013년 6월 20일 {{ISBN|9788962605983}}
  • 안미선 (모델)
         * 《[[아침마당]]》 ([[KBS]], [[2012년]] [[6월]]) 전문 대역모델
         * 《태요가: 섹시 보디라인을 살린다》 2013년 6월 20일 {{ISBN|9788962605983}}
  • 어유구
         이후 [[호조]][[참의]]와 [[예조]][[참의]]를 여러번 역임하고유수로 발령되었다. 유수 재직 중이던 [[1720년]] [[6월]] [[조선 숙종|숙종]]이 죽고 [[조선 경종|경종]]이 즉위하자 [[돈령부]]영사 함원부원군(咸原府院君)에 봉해지고, [[1721년]](경종 1) 호위대장을 겸직하고, [[1721년]] 사직 [[김일경]](金一鏡) 등이 상소를 올려, [[노론]] 4대신([[김창집]], [[이이명]], [[이건명]], [[조태채]])의 세제 대리청정 주장이 역모라고 규탄하여 4대신이 파직되자, 그는 오히려 노론 4대신을 옹호하며 김일경 등의 상소를 비판했다. 그 해 어영대장(御營大將) 겸 훈련대장, 22년 영돈령부사가 되었다. 이때 유생 황욱(黃昱), 김수구(金壽龜) 등이 [[윤선거]](尹宣擧), [[윤증]](尹拯) 부자의 사면과 복권을 상소하자, 그는 [[윤증]]에 대해 스승을 배반한 죄를 지적하며 이들의 복권을 반대하였다.
         사후 [[증직|증]] [[의정부시|의정부]]에 추증되었다. 묘비문은 그해 [[6월]] 형 [[어유봉]]이 지었는데, 그의 사망 원인을 [[1740년]] [[1월]] [[감기]]에 걸려 1월 16일에 사망했다고 상세히 기록하였다.
  • 여릉군
          | 출생일 = [[1680년]] [[6월]]
         '''여릉군 이기'''(驪陵君 李圻, [[1680년]] [[6월]] ∼ [[1730년]])는 [[조선]]의 [[왕족|왕족 종실]]이다.
  • 여릉군 (사람)
          | 출생일 = [[1680년]] [[6월]]
         '''여릉군 이기'''(驪陵君 李圻, [[1680년]] [[6월]] ∼ [[1730년]])는 [[조선]]의 [[왕족|왕족 종실]]이다.
  • 여흥부대부인
         [[1882년]] [[6월]] [[흥선대원군]]은 [[임오군란]] 당시 봉기한 구식 군대의 추대로 재집권하였다. 대원군의 측근인 '[[허욱 (1827년)|허욱]]은 [[임오군란]] 때 병사 복장을 하고 대궐로 들어가 명성황후를 가리켜 주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ref name="oh1">오영섭 《한국 근현대사를 수놓은 인물들(1)》(오영섭 저, 한영희 발행, 2007.4, 경인문화사) 312쪽.</ref> 그러나 끝내 왕비를 찾아내지 못했다. [[허욱 (1827년)|허욱]] 등이 [[경복궁]]에 들이닥치기 전에 [[명성황후]]는 변복을 하고 [[홍계훈]]의 등에 업혀 궁궐을 벗어나 [[여주]]로 내려가 은신하였다. 이때 민비는 홍계훈의 누이 행세를 하여 도성을 빠져나갈 수 있었다.
         [[6월 10일]] 난병들이 대궐을 침입했는데 민비는 밖으로 도망가고, [[이최응]], [[민겸호]], [[김보현]] 등은 살해되었다. 난병이 궁전으로 올라가 [[민겸호]]를 만나 그를 잡아끌자 당황하면서 흥선대원군을 쳐다보며, "대감 나를 제발 살려주시오."라고 호소하였다. 그러자 흥선대원군은 쓴웃음을 지으며 "내 어찌 대감을 살릴 수 있겠소"라고 말하였다.<ref name="hwang55">황현, 《매천야록》 (정동호 역, 일문서적, 2011) 55페이지</ref> 그는 계단으로 내동댕이쳐졌다. 대원군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난병들은 계단 밑에서 그를 죽이고 총칼로 시체를 난도질했다. 또 "중궁은 어디 있느냐"며 소리쳐 언사가 좋지 않았고, 처참한 광경은 계속되었다.<ref name="hwang55"/>
  • 영덕군
         ||<bgcolor=#21439c> {{{#FFFFFF '''인구'''}}} ||<bgcolor=#CEECF5> 38,381명 [br] ([[2018년]] [[6월]] 기준 [[http://rcps.egov.go.kr:8081/pplStat.do?command=month|주민등록인구]]) ||
  • 영양군
         ||<bgcolor=#FA5858> {{{#FFFFFF '''인구'''}}} ||<bgcolor=#F8E0E6> 17,482명 [br] ([[2018년]] [[6월]] 기준 [[http://rcps.egov.go.kr:8081/pplStat.do?command=month|주민등록인구]]) ||
  • 영주시
         ||<-2><bgcolor=#04B486> {{{#FFFFFF '''인구'''}}} ||<bgcolor=#EFFBEF> 107,578명 [br] ([[2018년]] [[6월]] 기준 [[http://kosis.kr/statisticsList/statisticsListIndex.do?menuId=M_01_01&vwcd=MT_ZTITLE&parmTabId=M_01_01#SelectStatsBoxDiv|주민등록인구]]) ||
         2018년 6월 26일 서울신문이 입수한 자료에 따르면 영주시청이 2019년부터 2022년 3월까지 영주시 순흥면 청구리(소수서원)~단산면 병산리(선비세상 관광단지) 2.8㎞ 구간에 총 사업비 100억원(국비 50억, 경북도비 5억, 영주시비 45억원)을 투입해 모노레일을 설치할 계획이라고 한다. 모노레일 설치와 함께 탑승장 3곳과 정거장 5곳, 회랑(1548㎡)을 설치하고 모노레일 차량 14량(8인승)을 투입한다고 한다. [[http://gall.dcinside.com/board/view/?id=superidea&no=65078|꿈은]] [[http://gall.dcinside.com/board/view/?id=train&no=868480|이루어진다]].
  • 영천시
         ||<-2><bgcolor=#4C0B5F> {{{#FFFFFF '''인구'''}}} ||<bgcolor=#E3CEF6> 100,312명 [br] [* [[2018년]] [[6월]] 기준 [[http://www.mois.go.kr/frt/sub/a05/totStat/screen.do|주민등록인구통계 행정안전부 기준]]] ||
  • 예천군
         ||<-2><bgcolor=#005CAA> {{{#FFFFFF '''인구'''}}} ||<bgcolor=#FFFFFF> 52,068명 [br] ([[2018년]] [[6월]] 기준 [[http://kosis.kr/statisticsList/statisticsListIndex.do?menuId=M_01_01&vwcd=MT_ZTITLE&parmTabId=M_01_01#SelectStatsBoxDiv|주민등록인구]]) ||
  • 오현경(1936)
         [[2017년]] [[6월]]에는 부인 [[윤소정]]과 사별했다.
  • 울릉군
         ||<bgcolor=#01A9DB> {{{#FFFFFF '''인구'''}}} ||<bgcolor=#CEECF5> 10,010명 [br] ([[2018년]] [[6월]] 기준 [[http://rcps.egov.go.kr:8081/pplStat.do?command=month|주민등록인구]]) ||
         2016년, 국내 기초자치단체 최초로 인구 네자리로 떨어지는 불명예를 얻기도 했다.[* [[http://biz.chosun.com/site/data/html_dir/2010/09/07/2010090701865.html?rsMobile=false|2005년엔 9,538명을 기록하기도 했는데, 1만 명 넘어섰다고 마냥 좋아하기도 그런 게 지역주민들에게 배값을 정부에서 지원해주는 걸 노리고, 유령주민이 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주민등록을 옮겨놓으면 10분의 1가격에 배를 타니 꽤나 혹하는 듯 하다.] 그러나 2017년 7월 기준으로 다시 1만 명을 넘어갔다...는 2017년 11월 기준 9,996명으로 떨어지며 네 자릿수가 되었다..가 2018년 6월 기준 10,010으로 다시 1만 명 선을 회복했다.~~다이나믹 인구~~
         2018년부터 울릉도에 1개 중대 규모의 해병대 전투병력이 순환배치될 예정이라 한다. 2017년 7월 6일, 울릉도에 거주하는 주민에 의하면 폐교된 모 초등학교에 해병대원 20여 명이 6월에 며칠 동안 깨끗이 청소하고 갔다며 주둔지로 쓸 것 같다고 한다. [[http://www.ksmnews.co.kr/default/index_view_page.php?idx=179567&part_idx=288|#]]
         패스트푸드점은 전혀 없었는데, [[롯데리아]]가 울릉도에 생길 예정이다. 도동에 생길 예정으로, 2017년 6월 현재 [[http://gall.dcinside.com/mgallery/board/view/?id=infra&no=71986|직원 모집중이다.]] 그리고 2017년 9월쯤 부터 영업을 시작했다.
  • 울진군
         ||<-2><bgcolor=#04B431> {{{#FFFFFF '''인구'''}}} ||<bgcolor=#CEF6CE> 50,454명 [br] ([[2018년]] [[6월]] 기준 [[http://rcps.egov.go.kr:8081/pplStat.do?command=month|주민등록인구]]) ||
  • 윤기선
         1945년 이화여자전문학교 음악과에서 재직하다가 그해 [[5월]] [[미국]]으로 건너갔다. 1948년 [[6월]] 하와이 연주에 갔다가 바로 [[미국]] [[줄리어드 음악학교|줄리어드 음악대학원]]에 입학하면서 눌러앉게 된다. [[1949년]] [[12월]]에는 뉴욕에서 성공적인 연주회를 하기도 했다.
         * 적조모: 전의이씨(全義李氏, [[1838년]] [[6월 9일]] - [[1907년]] [[3월 4일]])
  • 윤덕주 (농구인)
         '''윤덕주'''(尹德珠, [[1921년]] [[6월 23일]] - [[2005년]] [[7월 8일]])는 [[일제 강점기]]와 대한민국의 [[농구]] 선수이자, 대한체육협회 부회장, 명예회장을 역임했다. 구한말의 계몽 운동가 [[윤필오]]의 손녀이자, [[남조선과도입법위원회]] 의원 [[윤홍열]]의 딸이다. 4,5대 국회의원과 재무부 차관, [[호남정유]]사장을 지낸 [[서정귀]]의 부인이다.
         * [[1999년]] [[4월 27일]] ~ [[1999년]] [[6월]] 제18회 아시아여자농구선수권대회(5월2-9일, 일본 시즈오카) 한국 선수단 단장<ref>[http://sports.news.naver.com/sports/index.nhn?category=kbl&ctg=news&mod=read&office_id=001&article_id=0004570997 한국 여자농구대표팀 28일 결단식]</ref>
         *** 외당숙 : [[이상정]](李相定, [[1897년]] [[6월 10일]] ~ [[1947년]] [[10월 27일]], 독립운동가. 아호(雅號)는 청남(晴南), 산은(汕隱). [[대한독립군]] [[3성 장군|중장]])
         * 사돈 : [[허억]](許億, [[1889년]] [[6월 1일]] ~ [[1957년]]) - 대구시장
  • 윤병세
         |임기 = [[2013년]] [[3월 11일]] ~ [[2017년]] [[6월 18일]]
         2017년 6월 19일 이임식과 함께 외교부장관에서 퇴임하였다. 윤병세장관은 4년 3개월 동안 장관직을 수행했으며 역대 3번째로 오래동안 복무한 외교부장관으로 남았다.
         * [[2013년]] [[3월]] ~ [[2017년]] [[6월]] : 외교부 장관
         |임기 = [[2013년]] [[3월 13일]] ~ [[2017년]] [[6월 18일]]
  • 윤선도
         |출생일= [[1587년]] [[음력 6월 22일]]
         |사망일= [[1671년]] [[음력 6월 11일]] (85세)
         '''윤선도'''(尹善道, [[1587년]] [[7월 27일]]([[음력 6월 22일]]) ~ [[1671년]] [[7월 16일]]([[음력 6월 11일]]))는 [[조선]]시대 중기, 후기의 시인·문신·작가·정치인이자 음악가이다. 본관은 [[해남 윤씨|해남]], 자는 약이(約而)<ref>[http://people.aks.ac.kr/front/dirservice/dirFrameSet.jsp?pUrl=/front/dirservice/ppl/viewDocumentPpl.jsp?pLevel2Name=&pLevel3Name=&pAgeCode=&pAgeName=&pGanadaFrom=&pRecordID=PPL_6JOb_A1587_1_0008531&pPplCount=&pOrderByType=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깨진 링크|url=http://people.aks.ac.kr/front/dirservice/dirFrameSet.jsp?pUrl=%2Ffront%2Fdirservice%2Fppl%2FviewDocumentPpl.jsp%3FpLevel2Name%3D&pLevel3Name=&pAgeCode=&pAgeName=&pGanadaFrom=&pRecordID=PPL_6JOb_A1587_1_0008531&pPplCount=&pOrderByType= }}</ref> 이고, 호는 고산(孤山) 또는 해옹(海翁)이다. [[시호]]는 충헌(忠憲)이다. 예빈시부정(禮賓寺副正) 윤유심(尹唯深)의 아들이며, 강원도관찰사 윤유기(尹唯幾)의 양자이다. 화가 공재 [[윤두서]]의 증조부이며 다산 [[정약용]]의 외5대조부이다.
         고산 윤선도는 [[1587년]] [[7월 27일]]([[음력 6월 22일]]) [[한성부]] 동부 연화방 [[삼각산]] 근처(후일의 [[서울특별시]] 종로구)에서 생부인 예빈시직장 [[윤유심]](尹唯深)과 생모 순흥 안씨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러나 8세 때인 [[1594년]](선조 27년) 아들이 없던 큰아버지 [[관찰사]] [[윤유기]](尹唯幾)의 양자가 되어 [[전라남도]] [[해남군]]으로 내려가 [[해남 윤씨]]의 대종(大宗)을 잇는다. 윤유기는 어초은 윤효정의 4대 종손이었으나 늦도록 아들이 없었다.<ref name="daum01">[http://enc.daum.net/dic100/contents.do?query1=b17a2091a daum:윤선도]</ref> 생부 윤유심은 벼슬이 부정(副正)에 이르렀지만, 양아버지 윤유기는 관찰사(觀察使, 종2품)에 이르렀다. 생모 안씨는 [[안현]](安玹)의 손녀이다.
         유년기에 그는 후사가 없던 숙부지의 양자로 입양되었다. [[1602년]](선조 35년) [[6월 2일]] [[윤유심]](尹唯深)의 아들인 선도를 윤유심의 동인 유생唯幾)에게 양자로 입양할 것을 신고하여 [[예조]]에서 허가한 결재문서가 현재까지 전하고 있다.<ref name="yang01">[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378243 19 종통 계승을 위한 안전장치 입양 - 오마이뉴스]</ref>
         [[1623년]](광해군 15년) [[인조 반정]]으로 [[광해군]]이 폐위되고 인조가 왕위에 오르자, 윤선도는 8년 만에 귀양에서 풀려 나서 한성으로 돌아왔다. 이후 학행으로 천거되어 [[승의랑]] [[도사]](都事)·[[병조]] [[정랑]] 등의 벼슬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고는 고향인 [[전라남도]] [[해남군|해남]]으로 내려갔다. 이후 여러 벼슬에 임명되었지만 모두 고사하고 취임하지 않았다. 그해 6월 [[도사]] [[승의랑]]에서 [[봉직랑]]으로 승진하였다.
         왕자사부로 재직 중 [[4월]] 건공장군(建功將軍) 행[[충무위]][[부사맹]](行忠武衛副司猛), [[6월 25일]] 건공장군 행[[호분위]][[부사맹]](行虎賁衛副司正), [[10월 8일]] 행[[충무위]]사맹(行忠武衛司猛)을 제수받았다. [[1629년]] [[1월 12일]] 행충무위부사과(行忠武衛副司果), [[4월 8일]] 건공장군 행[[충무위]][[부사정]](行忠武衛副司正) 등 한직을 겸임하다가 [[1629년]] [[5월 7일]] 왕자사부로 특별히 [[통훈대부]]로 승진했다.
         [[1631년]] [[6월]] [[호조]][[정랑]]에 임명되고 [[총융청]]랑(摠戎廳郞)을 겸하였으나 그해 [[9월]]에 호조정랑을 사직하고 해남으로 돌아갔다. [[11월]]에 형조정랑에 임명되었으나 곧 사직하였다. 그 뒤 [[성균관]] [[사예]]를 거쳐 [[1632년]] [[1월]] 오랫동안 왕자의 사부로 있었다 하여 특별히 호조 정랑(戶曺正郞)으로 제수받고 [[사부]](師傅)도 겸임하였으며, 그해 [[2월]] [[사복시]] 첨정(司僕侍僉正)으로 승진했다가 지평 지덕해(池德海), 장령 고부천(高傅川)이 그를 파직하라는 상소를 올렸으나 왕이 받아들이지 않자 그들이 사직서를 냈다. [[1632년]] [[3월]] [[한성부]]서윤(漢城府庶尹)이 되었다. 그해 [[11월]]에 병으로 한성부서윤직을 사퇴하고, 겸임하던 [[왕자사부]]직도 모두 사임하고 해남으로 돌아갔다.
         [[조선 인조|인조]]의 피난 행렬 근처에 있었으나 임금을 [[호종]]하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서인]] 언관들의 탄핵을 받았으며, 그해 대동찰방에 임명되었다가 처음에 거부했었다는 이유로 [[1638년]] [[6월]] [[경상북도]] [[영덕군|영덕]](盈德)에 유배되었다.
         [[1649년]](효종 즉위년) [[6월]] [[조선 효종|효종]] 즉위 직후 석방, 특별 복권되어, [[조선 효종|효종]]의 부름을 받았으나 계속 사양하였다. [[1650년]] [[2월]] [[성균관]]사예(司藝)에 임명하자 처음에는 거절하였으나 [[조선 효종|효종]]의 거듭된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고 취임하였다. 그해 [[3월]] 효종은 그에게 [[통정대부]] [[승정원]][[승지]](承旨)를 제수하고 이어 [[동부승지]]겸 [[경연]][[참찬관]]에 임명하여 늘 경연(經筵)에 참여하게 하였으나, [[서인]]계 경연관들이 그를 꺼리고 기피하자, [[4월]]초 여러 번 상소하여 강력히 물러날 의사를 밝히고 떠났다. [[조선 효종|효종]]이 특별히 배려하여 동부승지에 제수했지만 그가 한사코 거절하자 [[사간원]]의 언관이던 [[민정중]](閔鼎重)과 [[김시진]]이 그를 탄핵하는 상소를 올리기도 했다. 그러나 예전 스승으로 있을 때처럼 지도해줄 것을 거듭 요청하는 [[조선 효종|효종]]의 거듭된 청을 받고 그해 여름 다시 출사하였다.
         이때 서인 [[유계]]가 그가 올린 상소를 불태워야 한다고 건의하여, 그의 상소를 불태워 버렸다. 1차 [[예송논쟁]]이 진행되는 가운데 그는 송시열이 [[조선 효종|효종]]의 종통을 부인했다는 과격한 상소를 올렸으나 오히려 자신이 역공격을 받고 [[부호군]]으로 체임되었다가, [[1660년]] 6월 [[함경남도]] [[삼수]](三水)에 유배되었다.
         [[서인]]들은 윤선도를 귀향시키는 데 그친 현종의 처분이 너무 약하다 하여 연일 상소를 올렸다. 이에 따라 왕은 "선도를 [[삼수]](三水)로 귀양보내라"는 하교를 다시 내리게 되었다.<ref name="leedeok250"/> [[1660년]] [[4월]] 명이 바뀌어 함경도(咸鏡道) 삼수군(三水郡)에 유배령을 받고 출발, 그해 [[6월]]에 [[삼수군|삼수]]에 도착하였다. 그해 겨울에 <예설 禮說> 2편을 지어 복제 문제를 소상히 밝혀 놓았다. 여기서 그는 장자가 죽고 차자가 왕위를 계승했으면 장자로 보는 예설의 근거 조목을 찾아서 정리, 저술하였다.
         [[조경]]은 윤선도를 옹호하며 흉작지에 유배된 윤선도를 구명하였으나 [[서인]]의 탄핵상소가 빗발쳤고, [[조선 현종|현종]]은 분노하여 [[조경]](趙絅)을 삭탈관작하였다. 이어 [[1660년]] [[겨울]], 윤선도가 유배지 삼수에서 지은 <예설 禮說>이 문제가 되어 다시 [[서인]] 삼사의 공격을 받게 되었다. 그해 [[5월 15일]]에는 이배의 명이 취소되고 [[6월 13일]]에는 반성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죄를 추가하여 [[위리안치]](圍籬安置) 형이 추가되었다. 이듬해인 [[1662년]] [[3월 28일]] [[위리안치]]를 철거하였다.
         [[1665년]] [[1월]] 흰무지개가 해를 꿰뚫고 [[2월]]에는 [[혜성]]이 나타나자 현종은 자신을 책망하며 구언(求言)을 하였는데 이때, 그해 [[2월 21일]] 유학(幼學) [[성대경]](成大經)이 구언에 따라 상소를 올려 윤선도의 방환을 탄원하였다. 이를 계기로 [[허목]]과 [[윤휴]] 등 [[남인]]에서는 계속 윤선도를 구명하는 상소를 올렸다. [[2월 27일]]에 다시 재앙으로 큰 가뭄이 발생하였는데, 그 결과 윤선도를 전라도(全羅道) 광양(光陽)으로 이배의 명이 내려졌다. 윤선도는 [[4월]]에 [[삼수]]를 출발, [[6월]]에 [[전라남도|전남]] [[광양시|광양]]에 도착하여 아래에서 유배생활을 하였다.
         [[1667년]] [[6월 8일]](음력 윤4월 17일)에 이르러 조정에서는 윤선도의 석방을 논의하였으나 결정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해 [[7월 1일]]([[음력 5월 11일]]) 유학 [[이석복]](李碩馥) 등이 윤선도의 사면, 석방을 상하였다. 고민하던 [[조선 현종|현종]]은 그해 [[9월 8일]]([[음력 7월 21일]]) 윤선도를 석방하라는 명을 내렸다. [[8월]]에 [[해남군|해남]]으로 돌아와서 있다가 [[9월]]에는 으로 들어갔다. [[1668년]] 무민당(無憫堂) 동쪽 시냇가에 작은 집을 짓고 곡수(曲水)라고 명명하였다.
         여생을 한적히 보내다가 1671년 7월 16일(현종 12년 [[음력 6월 11일]]) [[전라남도]] [[해남군]]에서 사망하였다.<ref name="youn2007"/> 사망 당시 향년 85세였다. 서인들은 현종실록에서 그의 졸기를 뺐고, 현종개수실록에 그의 졸기를 실었지만 '윤선도가 죽었다' 라는 몇 글자만 실어놓았다. 그해 [[9월 22일]] [[해남군]]아래([[해남군]]의 경계 지점)에 안장하였다.
         ** 서자 : 윤순미(尹循美, [[1638년]] [[6월]] - [[1667년]] [[9월]])
  • 윤영구 (1928년)
         [[1942년]] 에 입학하여 [[1945년]] 졸업하였다. 이후 [[서울대학교]] 음악학과에 입학, [[1950년]] [[2월]] [[서울대학교]] 음대를 졸업하였다. 바로 [[미국]]으로 건너가 미국 항공사에 취직했다가 [[1950년]] [[6월]] [[6.25 전쟁]]이 발생하고 미군이 한국에 파견되자 그는 미국 공군 군종장교 군목의 통역관으로 [[한국]]으로 들어와 [[1950년]]부터 [[1952년]] 휴전까지 활동했으며, 미공군 군목의 한국 전쟁 고아 구호사업을 지원하였다.
         * 아버지 : [[윤일선]](尹日善, [[1896년]] [[10월 5일]] ~ [[1987년]] [[6월 22일]])
         ** 동생: [[윤탁구]](尹鐸求, [[1932년]] [[6월 15일]] - , 의사·원자력 병원장 역임)
  • 윤영선 (1896년)
         [[1922년]]에 [[6월]] [[오하이오 주|오하이오]] 주립 [[콜럼버스 오하이오 대학교]] 축산과를 졸업하였다. 미국 체류 중 그는 [[유일한]] 등과 연락하였다. [[유일한]]이 있던 [[미시간주]]와 그가 있던 [[오하이오 주|오하이오]]는 붙어 있었으므로 [[한국]] 유학생 모임에서나 [[대한인국민회]]일로 종종 만나 교류할<ref name="유일한1">조성기, 《유일한 평전》 (작은씨앗, 2005) 221페이지</ref> 수 있었다. 귀국 이후 목장을 경영하였고, 경성 YMCA 청년회에 참여하여 YMCA 청년회 이사와 총무, 고려의약품주식회사 부사장 등을 역임하였다.
         [[1922년]] [[6월]] 귀국 직후 [[인천광역시|인천]] [[고려청년회]]에 가입하여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1925년]] [[9월]] 실업장의 주임대리직을 임시로 맡기도 했다.<ref>매일신보 1925년 9월 17일자, 3면</ref> [[4월 17일]] 에 [[동아일보사]] 개설되자 윤영선은 동아일보 임명되었다.<ref>"社告", 동아일보 1925년 04월 17일자 03면 09단</ref> 이후 그는 [[1945년]] [[9월]] 군정이 주둔할 때까지 [[동아일보]]일도 맡아보았다. [[1926년]] 세계 기독교 대회에 참석차 한국인 기독교 신자 대표로 [[미국]]에 다녀왔다. [[1927년]] 다시의 훈도가 되었다가 [[1929년]]까지 재직하고 그만두었다. [[1927년]] [[6월 18일]]에는 과일 종자, 묘목 및 인삼 종자 묘목을 판매하는 주식회사 송도식산(松都殖産)의 설립에 참여하여 이사가 되었다.
         [[1932년]] 재단이사에 취임하고, [[1933년]] 의 교장에 취임했다. 그해 [[6월]] [[미국]] [[남감리교]] 선교부로부터 자금 지원이 줄어들어 운영난에 처한 의 재정문제를 구제하였다. 바로 [[김정호 (1885년)|김정호]], [[마종유]]와 함께 송도고보 재정유지 실행위원의 한 사람이 되어 [[공성학]]과 함께 각각 1백원의 기금을 기부하였다. [[1934년]] [[4월]]에는 [[인천광역시|인천]]에서 개최된 전조선육상경기대회 계시부원과 기록부원을 겸하였다. [[5월 11일]] [[송도학원]] 재단설립 실행위원의 한 사람이 되었다.
         또한 농림부 장관 재직 당시 정부 비축 양곡의 수를 늘려, 곡가 조절과 식량 수급의 원활을 기하고 전시와 흉년기의 빈민들을 구제하고, 농수산물 가격을 안정시켰다. 또한 농수산물 증산과 품종 개량 정책 및 미국 잉여농수산물의 국내 유치를 추진하였다. [[1950년]] [[6월 6일]]에는 정부미 쌀 방출 수익금 70억환을 비료차액으로 농민에 반환하였다.<ref>농수산부, 《한국양정사》 (농수산부, 1978) 643쪽</ref> [[1950년]] [[3월 24일]] [[농지개혁]]을 목적으로 구성된 농지개혁위원회 위원장에 위촉되었다.<ref>"農改 위원 명부", 자유신문 1950년 03월 24일자 02면 05단</ref>
  • 윤철구
         [[대한제국 고종|고종]] 때 [[진사]]시에 합격했으나 관직에 나가지는 못했다. 사후 [[1900년]] [[6월]] 아들 [[윤덕영]]의 영귀로 종2품 가선대부(嘉善大夫) 의정부참찬(議政府參贊)에 추증되었다가 아들 윤덕영이 국구가 됨에 따라 대광보국숭록대부 영돈령부사가 추증되었다.
  • 윤치영
         이듬해 [[1924년]] [[6월]] 중앙YMCA야구단은 이들을 답방했다. 중앙YMCA야구단의 주장은 윤치영이었다. 당시 그는의 야구 코치도 맡고 있었는데, [[윤치호]]가 그에게 하와이로 가서 시합도 하고 [[이승만]]을 만나보라고 했다. 6월 초 윤치영은 중앙YMCA야구단을 이끌고 출국, [[미국]] [[하와이]]에 도착했다. 윤치영이 이끈 팀은 [[하와이]] 한국인 동포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으면서 [[하와이]]의 [[일본인]] 팀과 서울를 했다. 그러나 결과는 4대 0 패배였다.<ref name="끝나지 않는 신드롬"/>
         [[1925년]] 미국 본토로 건너가 학업을 계속하였으며, 동시에 각지에 동지회 지부를 설치하고, 순회 강연을 하는 등 활동을 계속하였다.<ref name=autogenerated2>{{웹 인용 |url=http://narasarang.mpva.go.kr/person_search/merit_search_view.asp?idx=5109 |제목=나라사랑 광장<!-- 봇이 따온 제목 --> |확인날짜=2010-01-03 |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160305013959/http://narasarang.mpva.go.kr/person_search/merit_search_view.asp?idx=5109 |보존날짜=2016-03-05 |깨진링크=예 }}</ref> 이후 그는 [[미국]] [[프린스턴 대학교]], [[컬럼비아 대학교]], [[조지워싱턴 대학교]], [[아메리칸 대학교]] 등에서 수학하였다. [[1928년]] [[6월]]에는 뉴욕에서 [[삼일신보]](三一申報) 창간에 참여하여 사장인 허 정을 중심으로 [[김도연 (1894년)|김도연]]·김양수 등과 편집을 맡아 일하였다. 그리고 [[1929년]]부터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구미외교위원부|임시정부 구미외교위원부]] 위원에 임명되어 구미위원부에서 활동하였다.
         [[1946년]] [[6월 15일]] 오후 5시 40분 [[서울역]]에 마중나가 [[서울역]]에 도착한 삼의사 유골을 영접하였다. 이어 태고사(太古寺)에 마련된 빈소에 참석하였다. 그해 조선국제법학회와, 외교학회 회장에 피선되었다.
         13명의 후보가 난립한 가운데 승리하여 [[5월 30일]] [[1948년 서울특별자유시 중구의 선거|국회의원에 당선]], [[6월]] 헌법기초위원회 위원으로 [[서상일]], [[유진오]], [[조봉암]] 등과 함께 [[헌법]] 제정에 참여하였다.
         [[1949년]] [[6월 26일]] [[김구]]가 암살되자 바로 [[경교장]]을 방문하고 돌아왔다. [[6월 30일]] [[김구]]의 국민장 장례기간 중 국민장 준비위원회에 참석, 상주하였다. 이후 그는 [[한국독립당]] 탈당파를 [[대한국민당 (1948년)|대한국민당]]으로 입당, 유치하는 정책을 펼친다.
         [[1950년]] [[6월]] [[한국 전쟁]]이 터지자 [[서울특별시|서울]]을 탈출, [[대전광역시|대전]]에서 합류한 이후 [[한국 전쟁]] 당시 정부가 이전할 때 함께 이동하였다. [[서울특별시|서울]]을 탈출하기 전 가족들을 미리 피신시킨 그는 인척인 [[이범석 (1900년)|이범석]]을 데리고 가려다가 그가 먼저 탈출한 것을 알고 배신감을 느꼈다고 한다. 그는 비밀리에 전화연락과 서신으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서울특별시|서울]]점령 소식을 알리고 피난, 은신할 것을 알리고 다녔다. 그러나 일부 인사들은 미처 피난하지 못하고 [[인민군]]에 의해 납북되었다.
         후일 그는 한 인터뷰에서 [[조봉암]]을 회고하면서 '비극의 주인공<ref name="ji43">〈인터뷰 전직 내무부장관을 찾아서 : 윤치영 전장관에게 듣는다〉《지방행정 1986년 6월호》 (대한지방행정공제회, 1986) pp.43</ref> 이라며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그에 의하면 [[조봉암]]의 사법살인은 [[이기붕]]일파와 [[자유당 (대한민국)|자유당]] 당원들의 농간이라는 것이었다. 그는 [[조봉암]]이 [[대통령 선거]]에 도전한 것이 화근이 되었다고 보면서도 [[자유당 (대한민국)|자유당]] 일파들의 정치인 법살행위에는 분개했다.
         [[1963년]]초 [[박정희]]가 대통령 후보로 출마할 의사를 보이자 그는 적극 환영하였다. 63년 [[제5대 대통령 선거]]에서 윤치영은 [[박정희]]의 선거 사무장으로 활약했다. [[광주시 (경기도)|광주]]에서 그는 "반만년래의 위대한 지도자이신 [[박정희]] 씨를 [[대통령]]으로!"라며 [[박정희]]의 지원 유세를 하였다.<ref>한상범, 《박정희와 친일파의 유령들》 (삼인, 2006) 94페이지</ref> 그는 [[박정희]] 후보의 선거사무장 겸 선거대책본부 본부장으로 전국 순회강연, 유세를 다녔다. 그는 [[박정희]]라는 청년 정치인의 참신성과 함께 상대방이 [[한민당]]에서부터 내려온 구태 정치집단임을 강조했다.<ref>그러나 윤치영도 [[1945년]] [[8월]]부터 [[10월]]까지 [[한민당]]의 당원이자 중앙집행위원으로 참여하였다.</ref> [[6월 26일]] [[서울특별시|서울]] [[효창공원]]에서 열린 백범 [[김구]] 14주기 추도식에 참석하였다.
         [[1970년]] [[12월]]과 [[1971년]] [[6월]] [[국무총리]]의 물망에 올랐으나 [[신민당 (1967년)|신민당]]의 집단 반발로 무산되었다. [[1971년]] [[미국]]을 방문, [[고든대학교]]로부터 명예[[문학]][[박사]](Doctor of Letters)학위를 받았다. [[7월 1일]] [[대통령 특별보좌관]]에 임명되었다. [[1972년]] [[10월]] [[박정희]]의 [[10월 유신]]이 발표된 후, 학생 운동권으로부터 그가 [[10월 유신]]의 원흉이라는 성토가 쏟아져나왔으나 곧 긴급조치 발표로 묻혀졌다. 이후 그는 각종 반공 척사대회와 [[이승복]] 추모행사 등에 참여하며 야당이 학생들을 선동하여 정권을 차지하는데 혈안이 되어 있다는 점과 야당은 국익보다 권력욕에 눈먼 집단이라며 야당, 학생 운동가들을 성토했다. 또한 일부 야당은 [[미국]]을 등에 업고 외세에 의존하려 든다며 질타하였다.
         [[1986년]] [[국회의원동우회]] 회장에 선출되고 [[1987년]] 재선되었으며 [[전국청년운동협의회총본부]] 회장 등을 지냈다. [[1987년]] [[3월 12일]] 구순 기념 논문집을 봉헌하였다. [[1987년]] [[11월 4일]] 총리공관에서 열린 만찬에 [[국무총리]] [[김정렬 (1917년)|김정렬]]의 초청을 받았다. [[1989년]] [[6월]] 모교인 [[중앙고등학교]]로부터 자랑스러운 중앙인상을 수상하였다.
         [[1995년]] [[3월 27일]] [[이승만]] [[박사]] 탄신 120주년 기념예배에 참석하였다.<ref>[http://news.chosun.com/svc/content_view/content_view.html?contid=1995032773803 이승만 박사 탄신 백20주년 예배/조선일보-선경에 감사패 전달도] 조선일보 1995년 03월 27일자</ref> 만년에 그는 자신이 20년대 미국 유학시절부터 수집해온 장서 3천118권과 [[제헌국회]] 개헌기념사진등 기념물 1백21점을 에 기증했다.<ref name="조선19960210"/> 만년에 그는 서울 충정로에서 거주하였다. 그는 자신의 집에 이름을 쓴 문패를 달지 않고 윤저(尹邸)라는 문패를 달았다.<ref>〈인터뷰 전직 내무부장관을 찾아서 : 윤치영 전장관에게 듣는다〉《지방행정 1986년 6월호》 (대한지방행정공제회, 1986) pp.41</ref> [[1990년]] 조카인 [[윤보선]]이 [[서울대학교|서울대]] 병원에 입원하자 직접 찾아 병간호를 하였고, [[윤보선]]이 92세를 일기로 사망하자 90대의 고령에도 윤보선의 아들, 며느리 등과 함께 문상객들을 맞이하기도 했다.
         * [[1989년]] [[6월]] 모교인 자랑스러운 중앙인상
         ** 넷째 형: 간송[[윤치병]](澗松尹致昞, [[1880년]] [[음력]] [[6월 4일]] - [[1939년]] [[양력]] [[1월 24일]])
         ** 둘째 누나: [[윤정숙]](尹貞淑, [[1889년]] [[6월 14일]] - [[1979년]] [[11월 24일]], 아명은 노덕(老德)): 사학자 [[이병도]]의 6촌 형 이병림(李丙琳)과 결혼)
         ** 이복 여동생 : 윤길희(尹吉喜, [[1924년]] [[6월 16일]] ~ [[1973년]] [[6월 28일]])
         * 〈인터뷰 전직 내무부장관을 찾아서 : 윤치영 전장관에게 듣는다〉《지방행정 1986년 6월호》 (대한지방행정공제회, 1986) pp. 40–51
         |임기 = 1968년 6월 5일 ~ 1970년 12월 26일
  • 윤호 (1424년)
         [[1472년]] [[조선 성종|성종]]의 광릉 참배에 배종하였고, 그해 [[3월]]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승진하여 다시 행양주 목사(行楊州牧使)에 임명되었으며, [[6월]] 병조참지가 되었다. [[1473년]] 딸 윤씨가 [[조선 성종|성종]]의 후궁 숙의(淑儀)로 간택되어 입궐하였다.
  • 윤훤
         [[1603년]] [[성균관]]직강, [[1604년]] [[세자 시강원]] [[문학]](世子侍講院文學), 장악원 첨정을 거쳐 그해 [[6월]] 삼척 부사(三陟府使)로 부임하였다. [[1604년]](선조 37년) [[호성공신|호성]][[원종공신]] 3등(扈聖原從功臣三等)에 책록되었다. 1605년 동래부사(東萊府使)가 되었다.
  • 윤휴
         그러나 [[1679년]] [[5월]] [[허목]]이 [[허적]]의 아들 [[허견]]의 권력남용을 이유로 탁남의 영수인 [[허적]]을 탄핵했다가 오히려 자신이 역공격을 당하였다. [[6월 16일]] 윤휴는 [[허목]]의 허물을 지탄하는 상소를 올렸다.
         이어 [[허목]]을 탄핵하는 상소가 올라왔고, [[6월 18일]] 숙종은 허목을 추궁하였다. [[6월 21일]] 사헌부장령 김정태(金鼎台)가 허목을 신구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파직당하고, 이어 태학생(太學生) 이택(李澤) 등이 허목을 변호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묵살당했다.
         * 어머니 : 경주김씨(慶州金氏, ? - [[1656년]] [[6월]], 첨지중추부사 김덕민(金德民)의 딸)
  • 윤흥인
         [[1545년]](인종 1) [[내승]](內乘)을 거쳐 그해 [[2월]] [[공조]] [[좌랑]]을 거쳐 [[형조]][[정랑]](刑曹正郞)을 역임하였다. 그해 [[6월]] [[인종]]이 위급하자 입직을 섰고, 인종의 상태를 보고하였다.<ref>인종실록 2권, 1545년(인종 1년, 명 가정 24년) 6월 26일 정사 5번째기사, "상의 증세가 위급해지다"</ref> 병세가 악화되자 그해 [[7월 1일]] [[인종]]은 유언을 하며 '윤흥인(尹興仁)·윤흥의(尹興義) 형제로 하여금 내 상사를 감호(監護)하게 하라고 대신에게 말하라<ref>인종실록 2권, 1545년(인종 1년, 명 가정 24년) 7월 1일 신유 2번째기사, "승전 내시 김승보가 나와서 상의 유교를 전하다"</ref>' 하였다. [[1545년]] 대윤과 소윤의 갈등에서 아버지 [[윤임]]이 패하자 [[을사사화]]가 발생, 그 역시 연좌되어 [[전라남도|전남도]] 낙안(樂安)으로 유배되었다. 이때 그의 아버지 [[윤임]]은 다른 외조카인 계림군을 왕으로 추대하려 했다는 혐의를 받았다.
  • 은신군
         [[홍계능]] 이후, [[윤상후]](尹象厚, [[1757년]] [[1월 27일]]~[[1759년]] [[9월 25일]]), 윤득관(尹得觀, [[1759년]] [[11월 24일]]~[[1760년]] [[12월 15일]]), [[홍낙인]](洪樂仁, [[1760년]] [[12월 22일]]~[[1761년]] [[3월 11일]]), 김이안(金履安, [[1761년]] [[5월 12일]]~[[1762년]] [[12월 21일]]), 김재구(金載久, [[1763년]] [[6월 20일]]~[[1763년]] [[9월 7일]]), 한용화(韓用和, [[1763년]] [[12월 20일]]~[[1764년]]) 등이 두 왕손을 교육할 왕손교부로 부임하였다. 이 중 [[홍낙인]]은 이복 형 정조의 외삼촌이었고, 김이안은 청음 [[김상헌]]의 후손으로 김창협의 증손자이며 김원행의 아들이다. 김이안은 학행으로 천거되어 1년간 왕손들의 교육을 담당했다. 김재구는 학행으로 천거되었으나 재물을 탐냈다는 의심을 받고 파직되었다.
         그의 시신은 도성으로 운구되었다가, 그해 [[6월]] 임시 장지에 안장되었다가 후에 정조의 명에 의해 [[경기도]] [[양주시|양주군]](현 [[남양주시]]) 계암(鷄岩) 해질머루부락 서쪽 손좌(巽坐)에 어머니 [[숙빈 임씨|양제 임씨]] 묘소 근처에 안장되었다. [[1774년]](영조 50) [[5월 12일]] 특명으로 복직되었고, 형 [[은언군]] 인도 복권되었다. 그의 어머니 [[숙빈 임씨|양제 임씨]]는 정조 즉위 후 [[1776년]](정조 즉위) [[8월 3일]]에 [[양제]]로 복작되었다.
  • 은언군
         |사망일= [[1801년]] [[6월 30일]]
         '''은언군 이인'''(恩彦君 李䄄, [[1754년]] [[5월 29일]] ~ [[1801년]] [[6월 30일]])은 [[조선]] 후기의 왕족으로, [[조선]] [[조선 영조|영조]]의 손자이자 [[조선 장조|장조]]의 서장자이며 [[조선 정조|정조]]의 이복동생이다. [[조선 장조|장조]]의 아들 중 [[조선 정조|정조]], [[은전군]]과 함께 성년기까지 살아남았다. [[조선 철종|철종]]의 할아버지로, 25대 왕 [[조선 철종|철종]]은 그의 서자 [[전계대원군]]의 서자이자 셋째 아들이었다. 본관은 전주, 자는 명흥(明興), 시호는 충정(忠貞)이다.
         [[홍계능]] 이후, [[윤상후]](尹象厚, [[1757년]] [[1월 27일]]~[[1759년]] [[9월 25일]]), 윤득관(尹得觀, [[1759년]] [[11월 24일]]~[[1760년]] [[12월 15일]]), [[홍낙인]](洪樂仁, [[1760년]] [[12월 22일]]~[[1761년]] [[3월 11일]]), 김이안(金履安, [[1761년]] [[5월 12일]]~[[1762년]] [[12월 21일]]), 김재구(金載久, [[1763년]] [[6월 20일]]~[[1763년]] [[9월 7일]]), 한용화(韓用和, [[1763년]] [[12월 20일]]~[[1764년]]) 등이 두 왕손을 교육할 왕손교부로 부임하였다. 이 중 [[홍낙인]]은 이복 형 정조의 외삼촌이었고, 김이안은 청음 [[김상헌]]의 후손으로 김창협의 증손자이며 김원행의 아들이다. 김이안은 학행으로 천거되어 1년간 왕손들의 교육을 담당했다. 김재구는 학행으로 천거되었으나 재물을 탐냈다는 의심을 받고 파직되었다.
         [[1777년]](정조 1) [[3월 5일]] 흥록대부(興祿大夫)에 가자(加資)되었고 이해 [[8월 28일]] [[현록대부]](顯祿大夫)에 가자되었다. 같은 날 [[오위도총부]]도총관으로 임명되었다. 한편 그는 매년 [[6월]] [[혜경궁 홍씨]]의 생일을 전후하여 혜경궁의 탄신일을 각별히 챙기고 준비하였다 한다.
         [[1778년]](정조 2) [[12월]] 은언군 집에서 [[소]]를 밀도살하여 팔았다는 물의를 일으켰다. 이후 양사와 [[홍문관]], [[의금부]] 등로부터 여러 번 탄핵을 당했으나, 그때마다 정조가 무마시켰다. [[1779년]](정조 3) [[5월 7일]] [[수묘관]](守墓官)에 임명된 뒤, 같은 해 [[6월 28일]] 다시 [[서울특별시|서울]]제조(宗簿提調)을 거쳐 [[7월 23일]] 다시 서울시 유사당상을 겸임하고, [[1779년]](정조 3) [[12월]] [[교정청]]제조(校正廳提調)가 되었다.
         [[1801년]](순조 1) [[2월]] [[신유박해]]에 체포된 양제궁 나인의 진술로 부인 [[상산군부인 송씨]]와 며느리 [[평산군부인]] 신씨가 [[청나라]]에서 온 [[천주교]] [[선교사]]인 [[주문모]](周文謨)[[신부]]에게 [[세례]]를 받은 [[천주교]] 신자라는 사실이 밝혀지고<ref>당시 조선의 국교는 유교 성리학이었다.</ref>, [[상산군부인 송씨]]이 [[주문모]] 신부를 양제궁에 숨겨둔 것도 밝혀지면서 대간과 사헌부의 탄핵을 무수히 받고 [[1801년]](순조 1년) [[3월 17일]] [[사약]]형을 받게 되었다. 이때 은언군은 삼사로부터 가족이 사교(邪敎)에 물들도록 단속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줄기차게 탄핵을 받았고, 삼사와 정부 관료들은 [[상계군]], [[홍낙임]] 등과 관련해서도 계속 탄핵하였다. 그해 [[6월 13일]] [[사사]]령이 내려지고, [[6월 30일]] [[강화도]] 배소에서 사약을 받고 사사되었다. 이때 그의 향년 48세였다.
         [[1849년]](헌종 15) [[조선 헌종|헌종]]이 후사 없이 사망하여 그해 [[6월 8일]] 그의 서손자 원범(元範)이 추대되어 [[조선 철종|철종]]으로 즉위하자 곧 작위가 복구되었고, 이해 [[9월 12일]] 대왕대비 [[순원왕후]](純元王后)의 명에 의하여 은언군가의 역모에 관한 일을 적은 모든 문적(文蹟)이 세초(洗草)되었으며, [[1851년]]에 대제학 [[서기순]](徐箕淳)에 의하여 신유사옥 때 은언군의 무죄를 변증하는 주문(奏文)이 지어 올려졌다. [[신도비]]문은 운석 윤정현(雲石 尹定鉉, 1793~1874)이 지었다. 한편 그의 묘비석은 후일 1989년 9월26일 후손 우용이 [[천주교]]에 기증, [[서울특별시]] [[마포구]]로 이송되었다. 한편, 철종이 즉위하면서 은언군가문에 대한 문적들을 상당수 세초하거나 없애버려, 그 내용을 확인할 수 없게 되었다.
  • 은전군
         [[1765년]](영조 41) [[6월 26일]] 그의 이름이 [[의소세자]]의 이름 정(琔)과 음이 비슷하다는 이유로, 할아버지 [[조선 영조|영조]]는 이름을 찬에서 명(䄙)으로 개정하라고 지시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이름은 개명되지 않았다. [[1767년]] [[11월]] 군호는 은전으로 정해지고, 곧 은전군에 책봉되었다. [[1768년]](영조 44) [[1월 1일]] [[승정원]]의 건의로 [[은언군]], [[은신군]], 은전군은 [[종친부]]유사당상(宗親府有司堂上)에 임명되었다.
         [[1769년]](영조 45) [[6월]] 출궁하여 [[6월 10일]] [[호조]]에서 그의 집터를 마련하였다. 이는 [[호조]]에서 올린 장계를 통해 승지 이재협(李在協)이 영조에게 직접 보고하였다. [[1771년]](영조 47) [[2월 10일]] 영조의 특명으로 [[종친부]]유사당상에 임명되었다.
         [[1772년]](영조 47) [[10월 19일]] 영조의 명으로 관례를 올리고 주관자로 종실 응선군 희(凝善君爔), 광릉부수 정(廣陵副守烻) 등이 정해져 [[10월 20일]] 관례를 올렸다. [[1773년]] [[3월 4일]] 영조의 특명으로 [[예조]]에서 은전군의 부인을 간택하였고, [[3월 5일]] 바로 영조의 명으로 조성(趙峸)의 딸을 낙점하여 [[6월 15일]] 길례날자를 정한 뒤, [[6월 28일]] 친영으로 [[결혼|혼례]]를 올렸다.
  • 의친왕
         | 재위5 = [[1910년]] [[8월 29일]] ~ [[1930년]] [[6월 12일]]
         1901년 3월 [[버지니아주]] 세일럼의 [[로노크 대학교]](Roanoke College)에서 수학하였다. 이때 [[김규식 (1881년)|우사 김규식]] 등을 만나며 친분 관계를 쌓기도 했다. [[1901년]] [[6월]] [[매사추세츠주]] 노스필드에서 열린 학생대회에 수행원 및 [[김규식 (1881년)|우사 김규식]] 등과 함께 참석하였다.<ref>한국사 인물 열전 3(한영우 지음 | 돌베개 | 2007) 260페이지</ref>
         [[1948년]] [[8월 15일]] 정부가 수립되자 황실을 배척하던 [[대통령]] [[이승만]]의 정책에 의해 망국의 황자로서 고난의 세월을 보내다가 [[1950년]] [[6월 25일]] [[6·25 전쟁|한국 전쟁]]으로 피난갔다가 [[1953년]] [[7월 27일]] 휴전 협정 후 다시 [[서울특별시|서울]]로 되돌아왔다. 그 후 [[사동궁]] 별궁에서 거주하였다. 그러나 황족으로서의 어떠한 예우도 없는 조건이 붙었다.
         * 《나의 아버지 의친왕》(1997년 6월 1일), 이해경 저, 진.
         |임기= [[1905년]] [[6월]] - [[1910년]] [[8월]]
  • 이강우 (1938년)
         * [[1976년]] [[2월]] ~ [[1979년]] [[6월]] : 경제기획원 경제기획국 투자2과{{·}}투자3과 과장(서기관)
         * [[1994년]] [[9월]] ~ [[1996년]] [[6월]] : 제2대 [[대한민국 통계청|통계청]] 청장(관리관)
         * [[1996년]] [[6월]] ~ [[1998년]] [[7월]] : 공정거래위원회 부위원장(차관급)
         |임기 = [[1994년]] [[9월 5일]] ~ [[1996년]] [[6월 3일]]
         |임기 = [[1996년]] [[6월 4일]] ~ [[1998년]] [[7월 31일]]
  • 이기백(군인)
         [[1983년]] [[6월]] [[김윤호]]의 뒤를 이어 [[합동참모의장]]이 되었다. 합동참모의장으로 있던 [[1983년]] [[10월]] 전두환 대통령과 함께 버마(現 [[미얀마]])에 갔다가 [[아웅산 묘소 폭탄 테러]]로 인해 부상을 당하였으나, 다행히 그가 입고 있던 [[장교]] [[정복]]과 정복에 달린 [[훈장(상훈)|훈장]]이 [[방탄복]] 역할을 하여 살아남았다. 그리고 수행했던 [[전속부관]] [[전인범]] [[중위]]에 의해 구조되었다. 귀국 후 그 정복을 육군사관학교에 기증하여 육군사관학교 내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 이상백 (1904년)
         [[1957년]] [[한국사회학회]]의 창립에 참여하고, [[한국사회학회]]의 1대 회장이 되었으며 2대 회장으로 연임되었다. [[1961년]] [[6월]] [[5·16 군사 정변]] 이후 군정에서 조직한 [[재건국민운동본부]] 중앙위원회 위원의 한 사람으로 위촉되었다.
         **** 5촌 조카딸 : [[윤덕주 (농구인)|윤덕주]](尹德珠, [[1921년]] [[6월 23일]] - [[2005년]] [[7월 8일]]<ref>[http://www.hani.co.kr/arti/society/obituary/48641.html 윤덕주 농구협회 명예회장 별세] 한겨레신문 2005.07.08</ref>), 농구선수, [[대한체육회]] 부회장·명예회장 역임
         ** 형: [[이상정]](李相定, [[1897년]] [[6월 10일]] ~ [[1947년]] [[10월 27일]], 독립운동가. 아호(雅號)는 청남(晴南), 산은(汕隱). [[대한독립군]] [[3성 장군|중장]])
         * 사돈 : [[허억]](許億, [[1889년]] [[6월 1일]] ~ [[1957년]]) - 대구시장
  • 이선희
         이후 한때 1995년 12월 6일에서 1996년 2월 17일까지 [[새정치국민회의]] 문화예술행정특보위원 직위에 보임되어 잠시 활약하였으며 [[새정치국민회의|국민회의]] 탈당 직후 1996년 3월 21일에서 1996년 6월 1일까지 [[민주당 (대한민국, 1995년)|통합민주당]] 문화예술행정특보위원 직위에 보임되어 활약하였고 [[민주당 (대한민국, 1995년)|통합민주당]] 탈당 직후 1996년 10월 발표한 10집 《First Love》(대표곡 <라일락이 질 때>)는 모든 노래의 작사, 작곡에 직접 참여하였다. <회색 도시>는 락의 느낌으로, <성안의 아이>는 몽환적인 느낌으로 팬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또한 <아카라카치>는 삶에 희망을 주는 메시지를 담고 응원 구호를 접목시키며 가창력까지 돋보이게 해 응원가로도 쓰인다. 이 앨범 이후로 이선희는 싱어송라이터의 면모도 보여 주기 시작했다.
         * [[4월]] ~ [[6월]] '나 항상 그대를' TV가이드, 뮤직박스, DJ연합회 등 각종 차트 1위
         * [[6월]] 시낭송 앨범 '떠나는 자만이 사랑을 꿈 꿀 수 있다' 출반
         * [[6월 20일]] 서울특별시의회 시의원 당선
         ** [[6월 1일]] [[KBS]] 《[[가요톱텐]]》 1위
         ** [[6월 8일]] [[KBS]] 《[[가요톱텐]]》 1위 (5주 연속) (골든컵)
  • 이선희 (1964년)
         이후 한때 1995년 12월 6일에서 1996년 2월 17일까지 [[새정치국민회의]] 문화예술행정특보위원 직위에 보임되어 잠시 활약하였으며 [[새정치국민회의|국민회의]] 탈당 직후 1996년 3월 21일에서 1996년 6월 1일까지 [[민주당 (대한민국, 1995년)|통합민주당]] 문화예술행정특보위원 직위에 보임되어 활약하였고 [[민주당 (대한민국, 1995년)|통합민주당]] 탈당 직후 1996년 10월 발표한 10집 《First love》(대표곡 <라일락이 질 때>)는 모든 노래의 작사, 작곡에 직접 참여하였다. <회색 도시>는 락의 느낌으로, <성안의 아이>는 몽환적인 느낌으로 팬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또한 <아카라카치>는 삶에 희망을 주는 메시지를 담고 응원 구호를 접목시키며 가창력까지 돋보이게 해 응원가로도 쓰인다. 이 앨범 이후로 이선희는 싱어송라이터의 면모도 보여 주기 시작했다.
         * [[4월]] ~ [[6월]] '나 항상 그대를' TV가이드, 뮤직박스, DJ연합회 등 각종 차트 1위
         * [[6월]] 시낭송 앨범 '떠나는 자만이 사랑을 꿈 꿀 수 있다' 출반
         * [[6월 20일]] 서울특별시의회 시의원 당선
         ** [[6월 1일]] [[KBS]] 《[[가요톱텐]]》 1위
         ** [[6월 8일]] [[KBS]] 《[[가요톱텐]]》 1위 (5주 연속) (골든컵)
  • 이수영
         세 번째 정규 앨범 《[[Made in Winter]]》는 [[2001년]] [[12월 11일]]에 발매되었다. 기존 앨범과 달리 현악기 세션을 최대한 자제한 이 앨범의 타이틀곡인 〈그리고 사랑해〉는 〈라라라〉와 함께 팬들에게 이수영 최고의 명곡으로 꼽히고 있다. 3집 활동의 주된 변화는 예능 프로그램출연을 통한 홍보였다. 많은 이들이 노래는 아는데, 그녀의 얼굴은 모르는 상황이었다. 각종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하여 연변 사투리 개인기를 선보여 많은 사랑을 받았고, 이후 이수영은 [[MBC TV|MBC]] 예능 프로그램인《[[일요일 일요일 밤에]]》의 코너 〈[[게릴라 콘서트]]〉에 출연해 자신의 이미지를 대중에게 더욱 강하게 인식시켰다.<ref>《소년한국일보》[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13&oid=041&aid=0000010816 '눈물로 부른 게릴라콘서트' 이수영]</ref> 홍콩의 유명 영화배우인 [[청룽]]과 함께 청룽의 앨범에 수록된 듀엣곡인 〈몽상적천제〉를 녹음하며 동남아시아 프로모션의 모습도 보였으나 보도자료에서와 달리 프로모션 행사 이후 동남아시아에 더 이상 방문하지 않았고 활동 또한 전무했다. 이수영은 일본 유명 비디오게임인 《[[파이널 판타지]]》 열 번째 편의 인터내셔널 버전의 OST를 한국어로 번안하여 녹음했다. OST 참여 였지만 〈얼마나 좋을까〉는 게임유저들에게 이수영이란 존재를 알리는 데 도움을 주었다. 후속곡〈차라리〉로 활동하던 중 MBC 라디오 프로그램 《감성시대》를 진행하게 되었다. [[2002년]] [[6월]] 월드컵 개막과 동시에 3집 활동을 마무리 지었다.
  • 이외수(소설가)
         [[2014년]] [[10월]], 위출열로 인해 진단을 받았더니 위암 2기 판정을 받아 일시적으로 모든 활동을 중단하고 1달 가까이 투병생활을 하였다. [[https://twitter.com/oisoo/status/524529984417722370|#]][[https://twitter.com/oisoo/status/532007654919401472|#]] 위 절제 수술까지 수반해야 할 정도의 병세였고 수술은 성공적으로 마쳐서 고비는 넘겼지만 항암치료는 지속적으로 받았고, [[2015년]] [[6월]]에 항암치료를 마쳤다. [* [[아침마당]] [[2015년]] [[10월 12일]]자 방영분에서 암 투병 경험담을 술회했다. [[http://www.kbs.co.kr/1tv/sisa/amplaza/view/vod/index,1,1_list003,40.html?searchStatus=0&articleIndex=2&vosample=¤tUrl=http://www.kbs.co.kr/1tv/sisa/amplaza/view/vod/index,1,1_list003,40.html|참고]].]
         [[2014년]] 6월, 홍명보호가 가나에 4:0으로 지자 '한국 축구 4 대 0으로 가나에 침몰. '''축구계의 [[청해진해운 세월호 침몰 사고|세월호]]를 지켜보는 듯한 경기였습니다.''''라는 트윗으로 아무리 그래도 참사에 비유하는게 올바른 표현이냐?라는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이외수는 오히려 적반하장격으로 '''난독증 환자들 많네'''라는 식으로 비꼬아서 논란에 불을 지폈다. [[http://mlbpark.donga.com/mbs/articleV.php?mbsC=bullpen2&mbsIdx=490530|#]] '이외수가 축구 국대팬이라 국대에 쏟아지는 비난을 모두 본인이 흡수하시겠다며 분연히 나섰다'라는 소리마저 나올 지경이다. 이후 엄청나게 욕을 먹자 원문만 싹 지우고 반성한다며 글을 올렸다. [[http://mlbpark.donga.com/mbs/articleV.php?mbsC=bullpen2&mbsIdx=490555&cpage=2&mbsW=&select=&opt=&keyword=|#]] 결국 네이버 실시간 검색과 기사[[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020&aid=0002588710|#]][[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277&aid=0003266890|#]]로도 떠서 위대한 [[트인낭]]의 법칙을 또 다시 증명하였다.
  • 이육사
         [[1925년]] 가을부터 2~3학기 동안 [[베이징]]에 있던 공립 중궈 대학(中國大學, [[베이징 대학]]이 아님)에 들어가 문과 수업 등을 청강하기도 하였다. [[중화민국]] 국민당 군사위원회에서 [[난징]]에 창설해 [[김원봉]]이 조선인 항일 군관 훈련반(제6대대) 대장에 있던 군사학교에 [[1932년]] [[9월]] 입학하여 보병 육성과 특수 부대원 훈련을 받고 이듬해 [[4월]]에 졸업하였다. 졸업 후 [[상하이]]를 경유하여 귀국하였는데, [[1933년]] [[6월]] [[상하이]]에서 들렀던 한 [[중국 국민당]] 인사의 장례식 자리에서 [[루쉰]]을 우연히 한 번 보게 되었다는 연구가 나오기도 했다. 이육사는 루쉰의 [[1921년]]작 단편 소설 《고향》을 식민지 조선에 번역해 내놓기도 했다.
         # 1930년 1월 중순에 동맹휴학이 시도되었고 6월에도 동맹휴학이 단행되었으며, 대구에서도 10월에 대구농림학교, 1931년 1월에는 대구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이 동조하여 동맹휴학에 들어가게 되었음.
         * 서대문감옥 수감 (1934년 6월)
         # 중국에서 군사간부로 육성된 목적에 충실하기 위하여 국내 공작원으로서 부여받은 사명을 행동으로 옮기기 전 1934년 3월 22일 경찰에 체포됨. 일본 경찰은 육사가 만주로 사라진 1932년 4월 이후 그를 추적하고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음. 일본경찰의 기록에 따르면 "1932년 4월에 다시 만주로 갔으나 그 뒤에 소재불명이어서 요주의 인물로 수배중에 있었음"이라고 적혀 있으며, 체포 후 6월 23일 기소유예로 풀려남.
  • 이인
         1949년 3월 [[서울]] [[종로구]]의 국회의원인 [[장면]]이 주미대사 임명 관계로 국회의원직을 사퇴하자 그는 보궐선거에 출마하였다. 3월의 보궐선거에서 당선되어 제헌국회의원이 되었고, 6월에 법무부장관직을 사임하였다. [[1949년]] 6월 경찰의 [[반민특위]] 특경대 습격사건 이후 [[7월 7일]]에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위원장이 되었다. 이인은 [[반민특위]] 특경대를 해산시키고 신변보호를 담당하던 경찰마저도 모두 철수시켜 '더이상 반민족 행위자의 체포가 없을 것'임을 분명히 하였다.<ref>1949년 7월 16일자 [[조선일보]] 기사 발췌</ref> 나아가 이인은 반민특위 해체를 주요내용으로하는 반민법 개정안을 제출하였고, 그나마 기소된 [[친일파]]도 제대로 처벌하지 못하는 결과를 초래시켰다.
         |임기 = [[1948년]] [[8월 2일]] ~ [[1949년]] [[6월 5일]]
         |임기 = [[1949년]] [[6월]]<ref>전임자인 [[장면]]이 1949년 2월에 주미국 대사로 부임하고, 1949년 3월에 종로구 을 선거구에 대한 보궐선거가 치러졌으며 이인은 1949년 6월 5일 법무부장관에서 해임되었으므로 임기가 1949년 6월경에 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ref> ~ [[1950년]] [[5월 30일]]
  • 이재균 (1974년)
         '''이재균'''([[1974년]] [[6월 21일]] ~ )은 [[대한민국]]의 전 [[프로게임단]] 감독이다. 웅진의 전신 한빛 스타즈 시절부터 감독자리에 있었으며 [[웅진 스타즈]]로 변경된 이후부터 해체될 때까지 감독직을 맡고 있었다. 현재는 스타크래프트 프로리그 경기 위원장으로 감독직 이후에도 e스포츠와 인연을 계속 이어가고 있다.
         *[[2001년]] [[6월]] 제1회 월드사이버게임즈 국가대표 감독
         *[[2013년]] [[6월]] SK플래닛 스타크래프트 Ⅱ 프로리그 12-13 정규시즌 우승
         *[[2013년]] [[6월]] SK플래닛 스타크래프트Ⅱ 프로리그 12-13 정규시즌 감독상
  • 이재호 (프로게이머)
         * 2007년 [[6월]] 곰TV MSL 시즌2 16강
         * 2008년 [[6월]] 아레나 MSL 2008 16강
  • 이정백(광역의원)
         ||<bgcolor=#808080> '''{{{#FFFFFF 출생일}}}''' ||<(> [[1950년]] [[6월 7일]]([age(1950-06-07)]세) ||
         ||<bgcolor=#808080> '''{{{#FFFFFF 임기}}}''' ||<(> [[2006년]] [[7월]]~[[2010년]] [[6월]][br][[2014년]] [[7월]]~[[2018년]] [[6월]] ||
  • 이진주 (1678년)
         [[1726년]](영조 2) [[12월 28일]] [[성균관]]박사, 1727년 3월 양현고직장, 8월 7일 전적,1728년(영조 4) [[2월 3일]] [[양현고]]주부, [[6월]] 직강, [[1729년]] [[11월 25일]] 병조좌랑이 되었으며 겸춘추(兼春秋)직을 겸하여 입직하였다. [[1730년]] [[2월 10일]] 성균관직강, 3월 25일 사예 등을 역임했다. [[1730년]] [[3월]] 진보현감(眞寶縣監)으로 부임하였다. 이후 [[조선 영조|영조]] 조정에서 입시한 신하가 아뢰기를, '이진주는 조용히 자신을 지켜 성균관에서 공부한 10여 년 동안 재신(宰臣)과 명사(名士)가 그의 얼굴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하니, 영조가 수령을 선발할 때는 마땅히 조용히 자신을 지키는 자를 취해야 한다 하고, 곧이어 다시 진보현감에 재임명되었으나 얼마 뒤에 사망하였다. 1737년
  • 이창명
         [[2014년]] [[6월]]의 실미도 프로젝트 방송분에서는 오래전부터 드림팀으로 [[인연]]을 맺어 온 [[이상인]]에게 또다시 예전처럼 막말을 자꾸만 해대는 등 그를 격식없이 대하는 이창명의 행동이 방송되었다. 결국 참다가 [[빡]]친 이상인이 "내가 어떤 사람인지 모르지?"와 "[[또라이]] [[새끼]]야 만만해보이냐?"(묵음처리)와 함께 이어지는 폭발하는 장면도 나온다.[* 정확히는 6월 22일 방송분으로 발단은 멤버들이 식사 도중 설거지를 하지 않았다는 멤버들의 물음에 지적을 한 것이 원인이었고 결국 이 일로 이상인은 '''"내가 나가든 이창명이 나가든 둘 중 하나는 나가야 될 것 같다"'''며 심경을 토로했다.] [[나이]]로는 이상인이 동생이지만, (이상인이) 얼마나 화났으면 이렇게까지 [[하극상]]을 했는지를 잘 알 수가 있다.
  • 이헌승
         * [[2003년]] [[6월]] ~ [[2003년]] [[12월]] : 한나라당 보좌관협의회 부회장
         * [[2007년]] [[6월]] ~ [[2007년]] [[8월]] : 한나라당 박근혜 경선수행부단장
         * 2016년 6월 ~ 2018년 5월 : 제20대 국회 전반기 국토교통위원회 위원
  • 이호성 (대한제국)
         [[1864년]](고종 1년) 증광과 진사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음서 제도|음서제]]로 관직에 올라 [[군수]]에 이르렀다. [[1872년]] [[12월]] [[동몽교관]], [[1873년]] [[8월]] 사용, [[1875년]] [[7월]] [[예빈시]]주부와 [[호조]][[좌랑]] 등을 역임했다. 그해 [[12월]] [[세자익위사]]사어, [[1878년]] [[6월]] [[의빈부]]도사 등을 역임하였다. [[1879년]] [[1월]] [[토산]][[군수]](兎山郡守)로 부임하였고, [[1880년]] [[8월]] [[양근]][[군수]](楊根郡守)로 발령되었다. 그해 [[8월]] 상을 당하여 사퇴한 뒤 3년후 다시 [[양근]][[군수]]로 복직되었다.
  • 이황
          | 임기2 = 1548년 3월 ~ 1549년 6월
         그러나 이후 조정에서 다시 불러 [[1545년]](인종 원년) 6월 홍문관 전한(弘文館典翰)이 되었다. 바로 [[일본]]과 강화를 하고 변경을 방어할 것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그해 [[1545년]](명종 즉위년) [[10월]] [[이기 (1476년)|이기]](李芑)로부터 [[을사사화]]의 역신인 [[김저]]와 같은 무리라 탄핵 당하여 삭탈관직 되었으나, 곧바로 [[10월]]말 [[이기 (1476년)|이기]]가 죄가 없다고 하여 다시 복관되었다. 그 뒤 사복시 정 겸 승문원 참교가 되었다.
         그해 5월 [[사헌부]]집의, 6월 홍문관 부응교(弘文館副應敎), 7월 성균 대사성 지제교(成均大司成知製敎)를 거쳐 그해 11월 사직하였다. [[1553년]] 행[[성균관]]사예를 거쳐 다시 [[대사성]]에 임명되었으나 스스로 사직상소를 올렸다. 이후 [[성균관]]대사성·부제학·공조참판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앞서 풍기 군수의 직을 버리고 고향에 내려왔을 때 그는 한서암을 짓고 1557년에는 [[도산서당 (안동시)|도산서당]](陶山書堂)을 세우기 시작했다. [[이이]]가 그를 방문한 것도 이때의 일이며, 명종이 그가 관직에 나오지 않음을 애석히 여겨 화공에 명하여 도산(陶山)의 경치를 그려오게 하여 완상한 것도 이때의 미담이다.
         [[1554년]](명조 9) [[5월]] [[형조]][[참의]]에 임명되어 상경하였고, [[6월]] [[병조]][[참의]]를 거쳐 그해 12월 첨지중추부사로 전임되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1983년 6월 11일부터 2007년 1월 21일까지 쓰였던 대한민국 1000원권에 실린 이황의 초상
  • 임상규
         '''임상규'''(任祥奎, [[1949년]] [[7월 4일]] ~ [[2011년]] [[6월]], [[광주광역시|광주]])는 [[대한민국]]의 공무원이다.
         * 2008년 6월 : [[순천대학교]] 생명산업과학대학 웰빙자원학과 교수
         * 2010년 7월 ~ 2011년 6월 : 제6대 순천대학교 총장
  • 임창정
         영화에 매진하던 임창정은 [[2008년]]에는 계약했던 영화가 무기한 제작 연기되며 1년간 공백기를 가지기도 했으나, [[2009년]] [[3월 10일]] 6년 만에 정규 11집 《Return To My World》를 발<ref>[http://star.moneytoday.co.kr/view/stview.php?no=2007020109540021606&type=1&outlink=1], 임창정 "다시 노래하고 싶다"..가수복귀 의사 밝혀</ref>하 복귀 명랑씨어터 수박의 뮤지컬 <[[빨래]] >에 솔롱고 역으로 뮤지컬에 출연하기도 했다. 같은 해에 [[김창렬]], [[이하늘]]과 함께 창단멤버로써 KBS [[천하무적야구단]] 출연하였으나, [[2010년]] [[6월]] 최종 하차하였다. [[2009년]] 영화 《[[청담보살]]》이 개봉되었고 [[2010년]] 베스트 앨범&리메이크 앨범인 《Remind》를 발매하였다. [[2010년]]에는 가수 故 김현식의 추모 영화로 기획, 제작한 《[[비처럼 음악처럼]]》은 촬영을 마친 뒤 후반 작업 중 故 김남경 감독의 갑작스런 사망<ref>[http://nownews.seoul.co.kr/news/newsView.php?id=20100713603158],'비처럼 음악처럼' 김남경 감독, 향년 47세 나이로 별세</ref>으로 개봉이 미뤄지다 2012년 4월 개봉<ref>[http://eto.co.kr/common/Result.asp?sCode=20120329104938393] {{웨이백|url=http://eto.co.kr/common/Result.asp?sCode=20120329104938393 |date=20160105021057 }},임창정-유인영 주연 ‘비처럼 음악처럼’ 4월 26일 개봉</ref>하려 했으나 무기한 연기되었다. 같은 해 11월에는 [[엄지원]]과 함께 주연한 영화《[[불량남녀]]》가 개봉되었다. [[2011년]] 《[[사랑이 무서워]]》, [[2012년]] 《[[공모자들]]》에 출연 하였으며 또한 영화 《[[창수]]》의 주연을 맡았다. 해당 작품은 2012년 제17회 [[부산국제영화제]]에 초청 및 상영<ref>[http://joynews.inews24.com/php/news_view.php?g_menu=701100&g_serial=693293&rrf=nv], 韓 최대 영화 축제 BIFF, 오늘(4일) 개막</ref>되었으며 이후 [[2013년]] 11월 정식 개봉하였다. 2015년에는 《치외법권》이 개봉했지만 좋은 성적을 거두지는 못하였다.
         * 2009년 :《[[빨래 (뮤지컬)|빨래]]》 - 솔롱고 역 / 서울 공연 [[두산아트센터]] 연강홀 (2009년 4월 28일 ~ 6월 14일)
         * 발매일: [[2003년]] [[6월 5일]]
         * [[2002년]] [[6월]] : 2002 월드컵 응원가 - Korea Team Fighting 캠패인송 / Tonight (with 김조한)
         * [[2007년]] [[6월]] : [[제드 (가수)|JED]] 1st Single <Show Time Projec> - 사랑의 숲에서 길을 잃다<ref>{{뉴스 인용|제목=가수은퇴한 임창정, 후배위해 마이크 다시 잡다|url=http://www.hankyung.com/news/app/newsview.php?aid=2007080407097}}</ref>
         ** [[6월 23일]] [[SBS]] 《[[인기가요]]》 1위
         ** [[6월 30일]] [[SBS]] 《[[인기가요]]》 1위
  • 장세주 (기업인)
         |기타 이력 = [[동국제강]] [[회장]] <br/> [[1978년]] [[7월]] [[동국제강]] [[입사]]<br />[[1980년]] [[8월]] [[동국제강|동국제강 인천공장]] 제강과 [[대리]]<br />[[1981년]] [[7월]] [[동국제강|동국제강 본사]] 회계과 과장<br />[[1983년]] [[3월]] [[동국제강|동국제강 일본지사]] 차장<br />[[1986년]] [[9월]] [[한국철강|한국철강(주)]] [[상무]]<br />[[1988년]] [[4월]] 천양항운(주) [[사장]]<br />[[1991년]] [[6월]] [[동국제강]] [[상무]](인천제강소장)<br />[[1993년]] [[1월]] [[동국제강]] 전무(기획조정실장)<br />[[1998년]] [[1월]] [[동국제강]] [[대표이사]] 전무(경영기획실장)<br />[[1998년]] [[3월]] [[동국제강]] [[대표이사]] [[사장|부사장]]([[본부장|영업본부장]])<br />[[1999년]] [[12월]] [[동국제강]] [[대표이사]] [[사장]]<br />[[2001년]] [[동국제강|동국제강그룹]] [[대표이사]] [[회장]]([[현재]])<br />[[2004년]]~[[2011년]] 유니온스틸(주) [[대표이사]] [[회장]]<br />[[2012년]] 한국철강협회 [[회장|부회장]]([[현재]])<br />[[2013년]]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부회장]]([[현재]])<br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부회장]] <br/>금탑산업훈장, 제12회 상공대상(노사협조 부문) 등을 수상 <br /> 보통적 봉급은 급여 1,236,000,000원을 비롯하여 기타근로소득 331,000,000원과 퇴직소득 2,510,000,000원과 월 급여액 87,000,000원과 이사퇴직금지급규정상 산출 퇴직소득 2,840,000,000원([[동국제강]] [[2015년 6월]] 반기보고서 기준) <br /> 보통적 순자산은 1,990,000,000원([[2013년]] [[주택]] [[재산]] 기준)<ref>[http://www.inews24.com/php/news_view.php?g_serial=720457&g_menu=022100&rrf=nv 회장님 집은 얼마짜리? - 아이뉴스24 박영례 기자 2013-01-28]</ref>
         |복무 기간 = [[1976년]] [[2월]] ~ [[1978년]] [[6월]]
         *[[1991년]] [[6월]] [[동국제강]] [[상무]](인천제강소장)
         보통적 봉급은 급여 1,236,000,000원을 비롯하여 기타근로소득 331,000,000원과 퇴직소득 2,510,000,000원과 월 급여액 87,000,000원과 이사퇴직금지급규정상 산출 퇴직소득 2,840,000,000원([[동국제강]] [[2015년 6월]] 반기보고서 기준) <br /> 보통적 순자산은 1,990,000,000원([[2013년]] [[주택]] [[재산]] 기준)<ref>[http://www.inews24.com/php/news_view.php?g_serial=720457&g_menu=022100&rrf=nv 회장님 집은 얼마짜리? - 아이뉴스24 박영례 기자 2013-01-28]</ref>
  • 전예용
         [[1947년]] [[고려대학교]] 강사가 되었다가 [[1948년]] [[8월 15일]][[외무부]] 통상국장에 임명되었다. 1949년 [[서울특별시 부시장]]에 임명되었으며 [[6.25 전쟁]] 중인 [[1951년]] [[5월]]부터 [[6월]]에는 [[서울특별시장]]직무대리를 역임하였다.
         |임기 = 1951년 5월 8일 ~ 1951년 6월 26일
  • 전초아
         * [[2007년]] [[6월]] 예인 1집 예인(霓人) vol.1 어쩌다가 두 번째 이야기 (대표곡:사랑아 사랑아..., 어쩌다가 (with 손호영))
         * [[2008년]] [[6월]] Loving You(Single)
         * [[2010년]] [[6월]] Stay with me (Single)
         * [[2010년]] [[6월]] '노블레스 - 트라우마' 피쳐링 참여
         * [[2010년]] [[6월]] '술제이 - 미친 사랑의 추억' 피쳐링 참여
  • 전태규
         [[2011년]] [[9월]], [[대한민국 해병대|해병대]]로 입대하여 복무하였고, [[2013년]] [[6월]] 전역하였다.
         *[[2000년]] [[6월]] Game-Q Challger League 3위
         *[[2004년]] [[6월]] 스프리스 MSL 16강
         *[[2005년]] [[6월]] 우주닷컴 MSL 8강
  • 전태일
         [[1969년]] [[6월]] [[청계천]] 공장단지 노동자들의 노동운동 조직 [[바보회]]를 결성하고, 다니던 교회와 [[엠마누엘 수도원]] 등에서 잡역부로 일하던 중 다시 [[왕성사]]의 재단사로 [[청계천]]으로 돌아와 노동운동을 주도했다. 그는 [[동대문구]]청과 [[서울특별시]]의 근로감독관과 [[노동청]]을 찾아가 열악하고 위험한 노동환경 개선을 요구했으나 묵살당했고, [[박정희]] [[대한민국의 대통령|대통령]]에게 서한을 보냈으나 전달되지 못했다. [[1970년]] [[10월]]에는 본격적으로 근로조건 시위를 주도하였다. [[11월]] [[근로기준법]] 화형식과 함께 [[평화시장]] 입구에서 온 몸에 [[휘발유]]를 끼얹고 라이터로 분신 자살하였다. 그의 죽음을 계기로 [[11월 27일]] [[청계피복노동조합]]이 결성되었고, [[노동 운동]]이 재확산되었다.
         [[1968년]]에 우연히 노동자의 [[인권]]을 보호하는 법인 [[근로기준법]]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ref>[[위기철 (작가)|위기철]]이 쓴 전태일 위인전(산하)에 의하면, [[노동운동]]을 했었던 부친의 영향으로 읽게 되었다고 한다.</ref> 그 뒤 해설서를 구입해 그 내용을 공부하면서 법에 규정되어 있는 최소한의 근로조건조차 지켜지지 않는 현실에 의로운 분노를 느끼고, [[1969년]] [[6월]] 평화시장 최초의 노동운동 조직인 [[바보회]]<ref>바보회라는 이름은 전태일의 노동자로서의 반성이 담긴 이름이다.노동자도 인권을 가진 사람이라고 주장함으로써 투쟁을 하기보다는 착취적이고 억압적인 노동환경에 순응한 바보라는 뜻이 담긴 것이다.</ref> 를 창립하여 평화시장 노동자들에게 근로기준법의 내용과 현재 근로조건의 부당성을 알리기 시작하고 설문을 통해 현재의 근로실태를 조사하였다.
         그는 재단회사 시다들과 인근 공장 노동자들의 생활을 듣고 집에 와서 말하는 일이 잦아지다가 나중에는 노동 운동에 본격 투신하게 되었다. 어머니 이소선은 처음에는 그를 말렸지만, [[1969년]] [[6월]] 아버지 전상수가 [[고혈압]]으로 사망하면서 아들이 하는 일을 막지 말라고 하여 이때부터는 말리지 않게 되었다.
         [[1969년]] [[6월]]부터 재단사 친구들, 근처 공장의 노동자들을 찾아다니며 [[바보회]]의 회원을 모집하였다. 그는 바보회의 취지에 대해 지금은 우리가 아무 것도 모르는 바보처럼 당하고 살지만 우리도 깨우쳐서 바보로 남지 말자는 뜻을 담았다고 설명했다. 일부 노동자들은 그의 권고를 기피하였지만, 그가 부당하게 해고당하는 노동자들을 변호하여 해고를 막거나 재입사 시키면서 그의 [[바보회]]에 참여하는 이들이 나타났다.
         {{인용문2|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야수와 같은 북괴는 평화 속에 잠긴 남녁 땅을 피로 물드렸다.<ref>전태일,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 (돌베개, 1983) 127쪽</ref>}}
         * 아버지 전상수(全相洙, [[1924년]] ~ [[1969년]] [[6월]])
  • 정몽헌
         * 2000년 6월 현대아산 이사회 회장
         |임기 = [[2000년]] [[6월]] ~ [[2003년]]
  • 정용화
         '''정용화'''([[1989년]] [[6월 22일]] ~ )는 [[대한민국]]의 [[가수]]이자 [[배우]]이다. [[FNC 엔터테인먼트]] 소속의 남성 4인조 [[음악 그룹|밴드]] [[씨엔블루]]의 리더이며 메인보컬, 랩, 기타, 건반을 맡고 있다.
         정용화는 1989년 6월 22일 2남 중 막내로 태어났다.<ref name="mynameis">{{뉴스 인용|제목=정용화│My name is…|url =http://tenasia.hankyung.com/archives/2873|출판사 = 텐아시아|저자 = 최지은|날짜 = 2009-12-01|확인날짜 = 2014-04-05}}</ref> 제주를 다녔으며, 자신의 고향은 부산이라고 생각한다고 한 인터뷰에서 말했다.<ref name="mynameis"/> 데뷔 전 스키장 [[얼짱]]으로 인터넷 상에서 유명하였다.
         |url=http://www.hg-times.com/news/articleView.html?idxno=15717|출판사 = 한강타임즈 |날짜 = [[2010년]] [[6월 10일]]}}</ref>
         * [[2010년]] [[6월 23일]] 일본에서 발매한 《The Way》앨범 타이틀 One Time 을[[작사]], [[작곡]] 하였고 이 곡으로 씨엔블루로는 오리콘 싱글차트 11위에 진입하였다.<ref>{{뉴스 인용|제목 = 씨엔블루, 日 싱글 'The Way' 오리콘 데일리 11위|url=http://joynews.inews24.com/php/news_view.php?g_menu=700100&g_serial=500570|출판사 = 조이뉴스24 |날짜 = [[2010년]] [[6월 24일]]}}</ref>
         * [[2010년]] [[7월 31일]]에는 서울에서 「Listen to the CNBLUE」이란 타이틀로 한국에서의 첫 단독콘서트를 진행하였다.<ref>{{뉴스 인용|제목=씨엔블루, 데뷔 첫 단독 콘서트 `Listen to the CNBLUE` 개최|url=http://www.hankyung.com/news/app/newsview.php?aid=2010061670037|출판사=한국경제|날짜=[[2010년]] [[6월 16일]]}}</ref>
         * [[2011년]] [[6월]]부터 [[8월]]까지 [[문화방송 수목 미니시리즈|MBC 수목 미니시리즈]] 《[[넌 내게 반했어]]》에서 주인공인 이신 역을 맡았으며 정용화 효과로 《[[넌 내게 반했어]]》가 일본 정규방송에 편성되었다.
         * [[2012년]] [[7월]]부터 [[2011년]] [[6월]]부터 [[8월]]까지 방영된 [[문화방송 수목 미니시리즈|MBC 수목 미니시리즈]] 《[[넌 내게 반했어]]》가 일본 공중파 후지TV에 방영을 시작하게 되었다.<ref>{{뉴스 인용|제목= 정용화, 일본 인기 파워 실감- ‘넌 내게 반했어’ 일본 공중파 입성 |url=http://nanumnews.com/sub_read.html?uid=42246§ion=sc208|출판사 = 나눔뉴스|날짜 = [[2012년]] [[5월 16일]]}}</ref><ref>{{뉴스 인용|제목= 정용화 출연작 '넌 내게 반했어' 日 후지TV 진출 '경사났네' |url=http://www.tvreport.co.kr/?c=news&m=newsview&idx=226944TM=news&SM=4101&idxno=587637|출판사 = TV리포트 |날짜 = [[2012년]] [[5월 16일]]}}</ref> 또한, 공중파 방영 전에 [[2012년]] [[7월 16일]]에 일본에서 공식적인 팬미팅을 개최하였으며,<ref>{{뉴스 인용|제목= 정용화 박신혜, 日 '넌 내게 반했어' 방영 앞두고 팬미팅 개최 |url=http://www.etoday.co.kr/news/section/newsview.php?TM=news&SM=4101&idxno=595980|출판사 = 이투데이|날짜 = [[2012년]] [[6월 13일]]}}</ref><ref>{{뉴스 인용 |제목= 정용화-박신혜, '넌 내게 반했어' 日 팬미팅 성료 |url= http://thestar.chosun.com/site/data/html_dir/2012/07/17/2012071701006.html |출판사= 조선일보 |날짜= [[2012년]] [[7월 17일]] }}{{깨진 링크|url=http://thestar.chosun.com/site/data/html_dir/2012/07/17/2012071701006.html }}</ref> 티켓이 모두 매진되는 기염을 토했다.<ref>{{뉴스 인용|제목= 정용화·박신혜, ′넌 내게 반했어′ 日팬미팅 1만석 매진 ″현지 열기 후끈″ |url=http://www.asiatoday.co.kr/news/view.asp?seq=667085|출판사 = 아시아투데이|날짜 = [[2012년]] [[7월 11일]]}}</ref>
         | 넌 내게 반했어 (노래)|넌 내게 반했어<ref name="test">[http://music.naver.com/album/index.nhn?albumId=200171 넌 내게 반했어 OST Part 1 발매], 《네이버 뮤직》, 2011년 6월 29일 발매.</ref>
         | [[2014년]] [[6월 18일]] 방송
  • 정인숙 (1945년)
         한동안 선운각의 얼굴마담으로 주가를 높이던 정인숙은 [[1968년]] [[6월]] 아들 성일을 낳았다. 그리고 이 해에 그녀는 해외로 나가기 위해 갑자기 수속을 밟았다.<ref name="hp104">김환표 외, 《스캔들에 갇힌 영혼들:시사인물사전 16》 (인물과사상사, 2002) 104페이지</ref> 사후 시신 해부에서도 드러났듯이 그녀는 임신중절 수술을 받은 바 있다. 유흥업소에서는 보통 접대부가 아이를 낳는 것은 금기로 되어 있다. 그러나 정인숙은 아기를 낳았다. 아이의 아버지는 유력 인사였고, 아이의 아버지가 누구냐 하는 것은 그녀 자신만이 알고 있었다.
         [[1991년]] [[6월 5일]] 그의 아들 정성일은 [[서울가정법원]]에 [[정일권]]을 상대로 친자 확인소송을 제기하였다. 그러나 [[6월 27일]] 외삼촌 정종구의 권유로 소송을 취하하고 다음날 다시 [[미국]]으로 출국했다. 그러나 [[1993년]] 다시 [[정일권]]을 상대로 서울가정법원에 친자확인소송을 냈으나, 소송 진행 중 정일권의 사망으로 무효화되었다.
         [[1991년]] [[6월 5일]] 정성일은 [[서울가정법원]]에 [[정일권]]을 상대로 친자 확인소송을 제기하였다.<ref name="hp107"/> 정성일은 "어릴 때부터 외할머니와 외삼촌으로부터 [[정일권]] 씨가 [[1967년]] 어머니와 교제해 다음해 나를 낳았다는 얘기를 들었다"며 친자확인 소송을 제기했다. 그러나 [[6월 27일]] 외삼촌 정종구의 권유로 소송을 취하하고 다음날 다시 [[미국]]으로 출국했다.<ref name="hp107"/>
  • 정칠성
         그는 [[동아일보]]와 매일신문 [[삼천리]]지 등에 칼럼과 논설, [[대구]], [[부산]], [[전주]] 등지의 전국으로 순회강연을 다니며 여자의 자유 연애와 여자의 남자, 가정으로부터의 독립, 자립을 역설하였다. [[1927년]] [[6월 6일]]에는 [[평양여성동우회]] 주최로 [[평양]]부내 평양천도교당에서 열린 평양여우강연회와 여성문제대강연회(女性問題大講演會)의 연사로 참여하였다. 여성문제대강연회의 연사로 연설을 끝마친 뒤 평양경찰이 난입해 강연을 중단시켰다. 이후에도 그는 각지로 돌아다니며 가사노동 등으로부터의 여성의 해방을 주장하였고, 경찰의 감시망에 오르게 되었다.
         1928년 5월 12일 경성부 경운동 천도교기념관에서 근우회 창립1주년 기념식 때 사회자이자 연사로 활동했다. 이때 그는 '근우회 창립 일주년 기념식을 맞으며'라는 주제로 강연하였다. [[6월 5일]]에는 [[경상북도]] [[영천]]에 파견되어 [[근우회]] 영천지회 조직에 착수하였다. [[6월 7일]]에는 근우회 영천지회 창립발기식을 지원하고 근우회 조직 취지를 설명하였다.
         5월 22일 평양 백선행기념관에서, 5월 25일에는 진남포에서 에버트 청년회관에서 '근우회운동의 의의'라는 주제로 강연하였다. [[6월 1일]] 근우회 경성지회 상무위원을 겸하였고, 의주에 도착하여 의주공회당에서 강연하였다. 이후 신의주 강연을 거쳐 [[6월 14일]] 인천 내리에서 조선여성운동의 의의라는 주제로 순회강연을 마쳤다. [[6월 18일]]에는 개성 고려청년회관에서 개최된 근우회개성지회 대회 행사에 사회자로 참석하였다.
         [[1948년]] [[6월]] [[황해남도]] [[해주]]에서 열린 제2차 [[전조선 제정당 사회단체 연석회의]]에 참석하였다. 그해 [[8월]] [[해주]]에서 개최된 남조선인민대표자 대회 참가차 3.8선을 넘어 월북했다가 내려오지 않고 [[북조선]]에 머물렀다. 그 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 수립에 참여하여 [[1948년]] [[9월]]에 [[최고인민회의]] 제1기 대의원에 선출되고 [[민주여성동맹]] 부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1948년]] [[10월]] [[조선민주여성동맹]] 중앙위원에 선출되었다.
         * 김중순, 〈근대화의 담지자 기생〉, 계명대학교, 《한국학논집 제43집:2011년 6월호》 (계명대학교 한국학연구소, 2011) pp 161 ~ pp 194
  • 제이 (1983년)
         제이는 경북 예천 출신으로 [[영어]], [[일본어]]에 능하다. 그는 [[2004년]]에 그룹 [[트랙스]]로 데뷔하였으며 정규 1집 초우(初雨)에서 [[린아]], 강정우와 같이 연기를 했다. 그러나 [[2007년]] 성대 결절로 인해 성대 수술을 받았는데 생각보다 낭종의 뿌리가 깊어 수술 후 1년 동안 말을 하지 못했다고 한다. 3년의 공백기간 동안 [[트랙스]]의 베이시스트 강정우가 탈퇴하고 그는 [[김정모]]와 함께 트랙스에 남게 되었다. 그는 [[2009년]] 상반기부터 [[하자전담반 제로]]를 통해 연기자로 전향했고 [[김정모]]는 [[2009년]] [[6월]]부터 10월 말까지 [[오빠밴드]] 멤버로 활약하면서 [[트랙스]]도 인기를 얻게 되었다. 그 해 [[2009년]] [[12월]]경 음반을 발매하려고 했으나 그러지 못하고 [[2010년]] [[1월 23일]] 《[[뮤직뱅크]]》에서 '가슴이 차가운 남자 (Let You Go)'라는 곡으로 컴백하게 되었다.
  • 지호(1997년 4월)
          * [[6월 13일]], 잠실 야구장에서 [[두산 베어스]] 홈경기 시타를 하였다.[* 시구는 [[유아(오마이걸)|유아]]가 맡게 되었다.] 당일, [[오마이걸]]은 축하 공연으로 〈[[OH MY GIRL#s-2.2|CUPID]]〉를 선보였다.
          * [[2월 8일]], [[SBS]] 설특집 먹스타 총출동에 출연, 잦은 카메라 원샷과 짜장면 스피드먹방 1등으로 아주 큰 분량을 차지했다. 게다가 짜장면 타임어택 상대 중에는 '''[[김민경(개그우먼)|김민경]]'''이 있었다. 기록은 39초 56(...) --[[김정민(1968)|???]]: '''[[나의 아스카는 그러지 않아|걸그룹의 이런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았거든요.]]''' 실망입니다-- --[[김민경(개그우먼)|???]]: 가장 큰 실수가 있었던 거 같아요. '''비볐어요'''-- 이게 방송 관계자들에게 강렬한 임팩트를 남겨서였는지 몰라도 [[2016년]] [[6월 15일]] 녹화를 개시한 [[JTBC]] 프로그램 '잘먹는 소녀들'에 고정 멤버로 뽑혔다. --하지만 조기종영 크리--
          * [[6월]] [[잘 먹는 소녀들]]에 출연해서 먹방을 선보였다. 하지만 첫 회 방송 후, 걸그룹 멤버를 출연시켜 짧은 시간 내에 먹방을 요구하는 [[잘 먹는 소녀들|이 프로그램]]의 포맷에 많은 비판이 가해졌고 2회만에 포맷을 교체한다고 공언하며 사실상 폐지되었다.[* 방송을 시청한 많은 팬들도 폐지를 오히려 다행으로 여길 정도로 프로그램 자체에 다양한 문제점이 있었다.]
         || [[2016년]] [[6월 15일]] ||<|4> [[JTBC]] || [[잘 먹는 소녀들]] || 잘 먹는 소녀들 || 고정 출연[* [[생방송]] 날짜가 [[6월 15일]], 본방송 날짜는 [[6월 29일]], [[7월 6일]]이다.] ||
         || [[2017년]] [[6월 4일]] || [[유튜브]] • [[V LIVE]] || [[유용근밴드리즈]] || 멤버|| 웹예능 • [[https://youtu.be/86sRZ12affY|영상]] • [[https://youtu.be/m0J4L7dd08A|영상]] ||
  • 청도군
         ||<-2><bgcolor=#04B4AE> {{{#FFFFFF '''인구'''}}} ||<bgcolor=#E0F2F7> 43,171명 [br] ([[2018년]] [[6월]] 기준 [[http://rcps.egov.go.kr:8081/pplStat.do?command=month|주민등록인구]]) ||
  • 청송군
         ||<bgcolor=#04B486> {{{#FFFFFF '''인구'''}}} || 25,874명 [br] ([[2018년]] [[6월]] 기준 [[http://rcps.egov.go.kr:8081/pplStat.do?command=month|주민등록인구]]) ||
  • 최영이 (종교인)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최영이는 남편과 함께 피신했지만, [[6월]]에 그녀의 친정을 습격한 포졸들에게 [[체포]]되었다. 그녀는 체포될 때, 자신의 아들을 데리고 감옥에 들어갔다. 그러나 감옥은 혼탁한 공기에 어둡고 음식도 부족했으므로, 유아가 지내기에는 매우 어려운 곳이었다. 또한 그녀는 아들 때문에 확고한 신앙이 흔들릴 수 있음을 염려하였으므로, 최영이는 아들을 밖의 한 친척에게 맡겼다.
  • 최창흡
         그는 [[1839년]] [[6월]]에 체포되었는데, 그때 그의 사위 [[조신철]]이 [[베이징]]에서 가져온 [[성물]]들이 발견되어, 극심한 [[심문]]과 [[고문]]을 받았다. 그는 일곱 차례의 극심한 [[주뢰형]]과 주장질을 받고 [[태형]] 150대를 맞으면서도 결코 배교하지도 교우들의 위치를 발설하지도 않았다. 그는 [[형조]]에서도 세 차례를 더 극심한 고문을 받았지만, 신심으로써 견뎌냈다. 그는 사형장으로 압송되기 직전에, 한 형졸을 불러 수감되어 있는 자신의 아내와 딸에게 울지 말며 [[하느님]]께 감사하고 [[찬미]]하며 [[순교]]로서 자신을 따라오라는 말을 전해달라고 청했다.
  • 태진아
         || [[사모곡]] |||| [[1993년]] [[6월]] ||
  • 한규복 (1881년)
         [[1875년|1881년]](고종 17년) [[7월 7일]] [[한성부]] 평동(平洞) 19번지에서 주사 한만홍(韓晩洪)과 평산 백씨(平山白氏)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형 한규호는 구한 말 군인으로 활동, [[보병]][[참위]]와 [[보병]][[부장]]을 지냈고 통정대부에 이르렀으며, 퇴역 후 [[1908년]](융희 2년) [[기호흥학회]]의 창립에 참여, 회보인 기호흥학회월보의 후원자의 한 사람이 되었으며 기업인으로도 활동하여 1908년 6월 4일 [[한성]]의 연강목선운륜(沿江木船運輸) 주식회사의 중역으로 활동하였다.
         [[1906년]] [[3월 31일]] [[탁지부]][[번역관]](度支部繙譯官) 주임관 4등(奏任官四等), [[5월 31일]] [[탁지부]] 문서과 수석번역관(度支部首席繙譯官) 주임관 4등(奏任官四等), [[1907년]] [[탁지부]][[서기관]] 양지과장(量地課長)을 역임했다. [[1907년]](융희 2년) [[6월 27일]] 탁지부 서기관, 풍지과장으로 재직 중 [[주임관]] 3등으로 승급하였다. [[1907년]] 수석번역관, 이어서 [[탁지부]] [[서기관]](書記官), [[토지조사국]] 서기관을 역임했다. [[1910년]](융희 4년) [[3월]] [[탁지부]] [[토지조사국]] [[서기관]], [[주임관]] 2등이 되고, 탁지부 토지조사국 정리과장에 보직되었다.
         [[1926년]] [[8월]]에 다시 도지사로 승진, [[8월 14일]] [[충청북도]]도지사가 되고 [[1929년]] [[4월]] [[고등관]]1등(高等官1等)으로 승급되었다. [[1929년]] [[11월 28일]] [[황해도]][[도지사]]로 부임하였다. [[1930년]] [[1월 24일]] [[황해도농민회]] 회장에 임명되었다.<ref>조선총독부 관보 1930년 01월 24일자</ref> [[1930년]] [[2월]] [[황해도]] 도지사에 재임명된 뒤 [[1933년]] [[4월 7일]]에 사직서를 내고 퇴직했으나 그해 [[6월 4일]] [[조선총독부 중추원|중추원]] [[칙임관]]대우 [[참의]](中樞院勅任官待遇參議)에 임명되었다. 중추원 참의로 재직하면서도 그는 수당에만 의존하지 않고 기업인으로 활동하면서 경성부 교화단체연합회 서부교화구위원장을 지내기도 했다. [[1934년]] 중추원 참의에 재선되었다. 특히 [[태평양 전쟁]] 기간 중 [[흥아보국단]], [[임전대책협의회]], [[조선임전보국단]], [[국민동원총진회]] 등 여러 전쟁 지원 단체에 적극 가담했다. 서예에도 일가견이 있던 그는 [[1926년]]부터 [[1930년]]의 선전(鮮展)에서 4회 걸쳐 수상하였다.
         [[1935년]] [[6월]] [[경성양조주식회사]] 취체역 회장(京城釀造株式會社取締役會長)이 되고, [[중앙주조조합연합회]] 회장(中鮮酒造組合聯合會會長)에도 피선되었다.
         [[1939년]] [[6월 4일]] [[중추원]] 참의로 재선되었다. [[8월 5일]]에는 [[국민정신총동원연맹]] 주최로 전국 순회강연을 할 때, 순회강사가 되어 국민 저축 장려를 목적으로 '백억 저축 생활 쇄신'이라는 주제로 전국 순회강연을 다녔다. [[9월 26일]]에는 각지의 노무자와 빈민을 구제하기 위해 만든 [[사회조사위원회]] 위원에 피임되었다.<ref>"勞務者와 細窮民을 來月中에 綜合調査", 동아일보 1939년 09월 26일자 2면, 사회면</ref> 그해 [[9월 30일]] [[경성]]에서 자본금 백만원을 투자하여 [[조선공영회사]](朝鮮工營會社)를 창립하고 대표이사 사장에 선출되었다. 그러나 그해 [[11월 5일]] [[조선중앙임금위원회]] 임시위원으로 선임되면서 사퇴했다. [[12월 22일]] [[세제조사위원회]] 위원에 선임되었다. [[1939년]]부터 그는 [[경성부]], [[충주군]], [[함양군]], [[수원군]], [[용인군]], [[양주군]] 등을 다니며 저축을 할 것을 주장하였다.
         [[1939년]] [[조선금융조합연합회]] 참여에 선임되었다. [[1940년]] [[5월 30일]]에는 [[동아일보]]에 "저축과 국민생활"이라는 주제의 칼럼을 발표하였다.<ref>"貯蓄과 國民生活", 동아일보 1940년 05월 30일자 5면, 생활/문화면</ref> [[5월 30일]]과 [[5월 31일]], [[6월 1일]]에는 경성중앙방송국에 출연하여 저축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5월 31일]] 오후 7시 30분에는 경성제2방송국에 출연하여 저축의 필요성에 대하여 강연하였다.
         [[1942년]] [[징병제]] 실시가 결정되고 [[조선인]] [[참정권]] 허용 문제가 [[일본]] 의회 [[중의원]]과 [[귀족원]]에 상정되자, 그는 [[조선임전보국단]]의 부단장 자격으로 일본 수상과 참모총장에게 감사 전보문을 타전하고, 그해 [[5월 15일]] [[경성부|경성]] YMCA에서 [[이광수]](李光洙) 등 명사들을 초청해 연설회를 개최하기도 하였다. [[1942년]] [[9월]]에는 [[조선국자주식회사]] 회장에 취임하였으나 [[1943년]] [[6월]] 사퇴하였다. [[1943년]] [[국민총력연맹]] 징병기념사업실행위원회 위원의 한 사람에 피선되었다.
         * 어머니 : 평산 백씨(平山白氏, ? [[8월 12일]] - [[1945년]] [[6월 12일]])
         ** 자부 : 여흥민씨 민정순(閔貞順, [[1930년]] [[6월 19일]] - ?), 민학수의 딸
  • 한명회
         그가 태어났을 때, 10개월도 안되어 태어나 병으로 위기를 넘기고 기적적으로 살아남았다. 몸 전체가 완전치 못하고 병약하여 온 집안이 거두려 하지 않으니 한 늙은 여종이 그를 거두어 솜털 속에 싸서 정성껏 보살폈는데, 점점 자라서 몇 달 만에 웃고 안아 볼 수 있는 아이가 되었다. 또한 그가 태어날 때 배 위에 검은색 별 모양 점이 있었다고 한다.<ref name="hwan1">[http://article.joinsmsn.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3642700&cloc=rss%7Cnews%7Csociety 한명회, 황보인 사위 될 뻔했다?] 중앙일보 2009년 6월 10일자 </ref> 이후 그의 몸에 북두칠성이 새겨져 있었다는 소문의 근원이 된다. 그러나 그는 일찍이 아버지와 어머니를 여의고 동생 명진과 함께 고아가 된다. [[한학]]을 수학하였지만, 불행한 가계와 빈한함, 작은 체구로 주변의 멸시와 놀림을 받으며 불우한 소년기를 보냈다. 한명회는 어려서부터 기억력이 좋고 민첩하였는데, 그의 종조 할아버지 [[한상덕 (조선)|한상덕]](韓尙德)은 그를 가리켜 집안의 천리마가 될 것이라 예견하였다.
         [[1455년]](단종 3년) [[경연]] [[참찬관]](經筵參贊官) 겸[[사재감|판사재감사]](兼判司宰監事) 지예조사(知禮曹事)를 거쳐, 그해 [[6월]] [[우부승지]](右副承旨)가 되었다. [[1455년]](세조 즉위) [[6월]] [[조선 세조|세조]]가 [[조선 단종|단종]]의 양위를 받아 [[조선]]국왕으로 즉위하자 한명회는 다시 [[승정원]][[좌부승지]](左副承旨)에 [[좌익공신|동덕좌익공신]](同德左翼功臣)이 되었다가 곧이어 그해 가을 [[승정원]][[우승지]]에 올랐다.
         [[6월 1일]] [[명나라]]의 사신이 [[한성부]]에 도착하자 운검(雲劒)들이 출입하려 하였다. 그러자 그는 미구의 사태를 대비해, 명나라 사신들을 접대하는 [[광연루]]에 사신이 많아서 자리가 좁다는 이유로 세자는 연회에 참석하지 말 것과, [[홍달손]]과 [[홍윤성]]을 시켜서 병력을 동원할 것이니 운검의 제장(諸將)들도 입시하지 못하게 하기를 주청하여 [[조선 세조|세조]]는 이를 이상하게 여기면서도 이를 윤허하였다. [[성삼문]]의 아버지 [[성승]](成勝)이 운검을 차고 곧장 들어오려 하기에 운검은 안 들어와도 된다며 제지하였다. 이에 거사의 실패를 우려한 운검의 병력들이 그를 해치려고 하였으나 민첩하게 피하였다.
         [[1456년]] 초부터 그는 [[정창손]]에게 사위를 설득하게 했는데, 그해 [[6월 2일]], [[사육신]]과 함께 [[조선 세조|세조]] 3부자 척살에 가담하기로 한 [[김질]]이 장인인 [[정창손]]의 설득으로 거사의 가담자들을 폭로함으로써 [[성삼문]], [[하위지]], [[유응부]] 등을 체포하였다. 바로 이들을 국문한 후 처형하고, 800여 명의 관련자들을 처형했으며, 수천 명을 유배시켰다. [[성삼문]] 등 사육신이 사형된 후 [[사육신의 의거]]를 진압한 공로로 [[승정원]][[좌승지]]를 거쳐 그해 겨울 [[도승지]]로 발탁되었다가 [[이조판서]]가 되었다.
         [[2000년]] 그의 묘소가 도굴되어 지석(誌石) 등이 유출되었으나 [[2009년]] 6월 도굴범들은 검거되었다.<ref>[http://cheonan.grandculture.net/Contents/Index?contents_id=GC04503015&local=cheonan 한명회 지석] "디지털천안문화대전"</ref> <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3&aid=0003008038 청주한씨 종친회, '한명회 지석' 천안 박물관에 기탁] "뉴시스 2009년 12월 21일자 기사내용"</ref>
         [[1456년]] [[6월]] 단종복위사건이 일어나자, [[정보 (조선)|정보]]는 서매제인 한명회를 찾아가 사육신의 무죄를 주장하였으나 한명회가 이를 들어주지 않자 [[정보 (조선)|정보]]는 천추의 악인이라며 규탄하였다. 그해 12월 한명회가 그를 난언죄(亂言罪)로 고발하여 죽음을 받게 하였다.<ref name="정보1">[http://www.sugmo-jeon.co.kr/haenglog/haenglog-jeongbo.htm 정보(鄭保)<!-- 봇이 붙인 제목 -->]</ref>
         * [http://article.joinsmsn.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3642700&cloc=rss%7Cnews%7Csociety 한명회, 황보인 사위 될 뻔했다?] 중앙일보 2009년 6월 10일자
         임기= [[1475년]] [[6월 1일]] ~ [[1476년]] [[7월 25일]]
  • 한승주 (공무원)
         [[2002년 6월]]부터 [[2003년 2월]] 그리고 [[2007년 3월]]부터 [[2008년 1월]]까지 [[고려대학교 총장]]서리를 맡았다.
         |임기 = [[2002년]] [[6월]] ~ [[2003년]] [[2월]]
  • 한희 (연출가)
         * [[2014년]] [[6월]] : [[MBC]] 드라마국 드라마R&D센터장
  • 함병춘
         미국 유학 후 귀국, 1959년부터 70년, 1979년 10월부터 1983년 6월까지 [[연세대학교]] 법학 교수로 재직, 강의하였으며, 한국 사회의 법사회학, 한국인의 법에 대한 태도 등을 전문으로 연구하였다. [[1970년]] 대통령 [[박정희]]의 요청으로 대통령 정치담당 특보, 외무부 본부대사, 대통령 외교담당 특보를 역임했다. [[1973년]] [[12월]]부터 [[1977년]] [[6월]]까지는 [[주미한국대사]]로 부임하였다. 다시 교단에 섰다가 [[1983년]] 대통령 [[전두환]]의 부름을 받고 대통령 비서실장이 되었으며, 그 해 전두환 대통령의 동남아시아 5개국 순방길에 동행했다가 [[10월 9일]] [[버마]] [[아웅산 국립 묘지]] 방문행사 예행연습 중 피폭되어 사망했다.
         [[1977년]] [[6월]] 임기를 마치고 귀국, [[외무부]] 본부대사로 전임되었다가 1979년 [[1월 12일]] 대통령외교담당 특별보좌관에 임명되었다.
         [[10·26 사태]] 이후 다시 연세대학교 법학 교수로 복직하여 법철학, 동양법제사, 법인류학 등을 강의하였으며 [[12월 17일]] 다시 [[최규하]]대통령에 의해 대통령 외교안보특보로 기용되었다. 1980년 8월 2일 외교안보연구원 연구위원에 위촉되었다. [[1981년]] [[8월]] 다시 연세대학교 법학 교수로 출강했다가 다시 [[1982년]] [[6월]]에 [[전두환]] 대통령의 비서실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자신이 정치 전문가가 아니라 외교분야에서 활동한 것을 들어 거절했고 [[이순자]]가 공식 석상에서 활동하는 것을 전두환의 면전에서 비판하기도 했다. 그러나 [[전두환]]은 [[이학봉]] 비서관을 보내 함병춘을 설득했다.
         [[1983년]] [[1월 28일]]부터 [[2월 14일]]에는 대통령 특사에 임명되어 아프리카를 순방하고 되돌아왔고, [[5월 20일]]부터 [[6월 4일]]까지 대통령 특사에 임명되어 뉴질랜드와 인도네시아, 오스트레일리아를 순방하고 돌아왔다.
         [[1983년]] [[6월]] 대통령 비서실장이 되고 그해 [[10월]] 전두환 대통령의 동남아시아 5개국 순방길에 동행했다가 [[10월 9일]] [[미얀마|버마]]에서 일어난 [[아웅산묘역 폭탄테러사건]]으로 순직하였다. [[전두환]] 대통령을 태운 차량이 도착하기 전, 80여명의 각료, 기자단과 함께 예행연습을 하던 중, 음악 소리를 들은 [[북한 인민군]] 공작원들이 버튼을 눌러 80여 명의 수행원, 기자들과 함께 사망했다.
         |임기 = [[1982년]] [[6월 6일]] ~ [[1983년]] [[10월 9일]]
  • 허근욱
         그러나 북한 생활을 숨막혀했던 그는 [[1950년]] 남편 박노문 등과 함께 자신이 추구하는 문학과 자유를 찾아 다시 월남한다. 그 해 [[6월]] [[한국 전쟁]] 중에 이복 언니 [[허정숙]] 등을 만났지만 이내 그는 남편과 아들을 데리고 [[1·4 후퇴]] 때 남으로 내려갔다. 이후 호적 없이 가명으로 살기도 했다.<ref>한겨레신문 1991년 6월 27일자 10면, 생활문화면</ref> 한때 [[대한민국 제1공화국|제1공화국]] 기간중 남편 박노문 등과 함께 북한의 간첩 혐의를 받고 체포, 수감되기도 하였다. 그의 아버지 [[허헌]]과 이복 언니 [[허정숙]]이 북한의 고위층이라는 이유로 혐의가 없었는데도 여러 번 의심을 받기도 했다.
         * 《공백지대》, 문학춘추사, 《문학춘추 1965년 6월호》 (문학춘추사, 1965)
         * 《젖소》, 《북한 1973.6월호》
         * [[1976년]] [[6월 29일]] [[한국문화예술진흥원]] 반공문학상 소설 부문, 문화공보부장관상
  • 현경련
         [[1893년]] [[기해박해|기해년의 박해]] 초기에, [[교리]] [[선생]]이 된 현경련은 박해를 피해 숨었지만, [[6월|6]] [[7월]] 경에 [[체포]]되었다. 관리들은 현경련이 [[선교사]]들을 위해 중요한 역할을 하던 [[현석문]]의 누나인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그가 숨은 위치를 알아내기 위해 더 가혹하게 그녀를 고문했다. 그녀는 여덟 차례 [[심문]]과 두 차례의 [[주뢰형]] 그리고 300 여대의 [[장형 (형벌)|장형]]을 받았다. 형리들은 선교사들을 체포해서 포상을 받고 싶어했기 때문에, 선교사들에 대한 정보를 캐내기 위해 더 혹독하게 그녀를 고문했다. 그러나 현경련의 강한 의지로 인해서, 그들의 탐욕적인 노력은 허사로 돌아갔다. 그녀는 [[형조]]로 압송된 후에, 다리를 거의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격심하게 매질을 당했다. 그녀의 온몸에 상처가 깊어서 피와 [[고름]]이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또한 그녀는 [[감옥]]에서 [[콜레라]]에 걸려 앓았다.
  • 현빈
         [[2005년]] [[6월]] 드라마 《[[내 이름은 김삼순]]》에서는 상처로 인해 더 냉정해지고 삐딱해진 성격의 레스토랑 사장 "현진헌" 역을 맡았다. 전작의 강국 역이 강한 탓에 그 캐릭터를 벗어나 진헌으로 태어나기 위해 일찌감치 출연이 결정된 뒤 다른 활동 없이 작품 준비에만 전념하였다. 연기 연습은 물론이고 극중 수영과 샤워 장면을 위해 수영과 웨이트트레이닝으로 몸을 만들었고, 피아노 연주 장면을 위해 집에 피아노를 들여놓고 연습하였다.<ref>{{뉴스 인용|제목=<연합인터뷰>MBC '내 이름은 김삼순'의 현빈
         [[2009년]] [[6월]] 드라마 《[[친구, 우리들의 전설]]》에서는 외로운 반항아 "한동수" 역을 맡았다. 이 작품은 [[곽경택]] 감독의 첫 TV 드라마 연출과 사전제작으로 화제를 모았지만, 그의 출연 결심에 있어 주위의 반대가 심했다고 한다. 이는 영화가 엄청난 흥행작이고 장면과 대사들이 대중들에게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비교만 당할 것이라는 의견들이었다. 하지만 그는 과감히 도전을 선택하였고 호평받은 작품 속에서 그만의 서정적이고 처연한 '슬픈 동수'를 만들어냈다.<ref>{{뉴스 인용|제목=명품 드라마 "시청률이 대수냐"
         |확인날짜 = 2017-09-08}}</ref> 그런 그가 이 작품에 임하면서 안경과 헤어스타일 등 외적인 모습으로 인격의 구분짓는데도 신경을 많이 썼지만, 전반적으로 목소리와 말투, 눈빛, 얼굴근육 등을 이용한 연기만으로 인격의 변화를 완벽하게 표현해냈다. 이후 그는 [[2015년]] [[6월 6일]] 국립서울현충원에서 열린 제60회 [[현충일]] 추념식에 참석하여 국악인 이용구의 대금 연주에 맞춰 추모 헌시 '옥토'를 낭송하여 시선을 집중시켰다.<ref>{{뉴스 인용|제목=현빈, 현충일 추념식서 추모헌시 낭독...박하선 큰 나무 배지 패용
         |확인날짜 = 2017-09-08}}</ref> 누적관객 400만 명을 기록하며 손익분기점 120만명을 훌쩍 넘겼다. 이후 2017년 상반기, 영화 《[[협상 (영화)|협상]]》《[[창궐]]》에 연이어 캐스팅되어<ref>{{웹 인용|url=http://www.sedaily.com/NewsView/1OG2652GJH/GL0201|제목='협상' 현빈-손예진 캐스팅 확정, 6월 크랭크인(공식입장)|날짜=2017-05-25|언어=ko|확인날짜=2019-04-24}}</ref><ref>{{웹 인용|url=http://www.newsen.com/news_view.php?uid=201704111121362410|제목=현빈 ‘창궐’ 출연확정, ‘공조’ 김성훈 감독과 두번째 만남(공식)|날짜=2017-04-11|언어=ko|확인날짜=2019-04-24}}</ref> 2018년 하반기에 나란히 개봉했다. 《[[협상 (영화)|협상]]》에서는 최악의 인질극을 벌이는 민태구 역으로 생애 첫 악역을 맡아 연기 변신을 시도했다. 한정된 공간, 시간 안에서 효과적으로 구현된 현빈의 에너지가 돋보인다는 평을 받았으나 누적관객 195만명으로 손익분기점인 250만을 넘기는데는 실패했다. 《[[창궐]]》에서는 야귀의 창궐을 막고 조선을 구하려는 이청 역을 맡았다.<ref>{{뉴스 인용|제목=”환상의 호흡” 현빈X장동건 '창궐' 대본리딩…9월1일 크랭크인[공식]
  • 황문수 (장기 기사)
         * [[1988년]] [[6월]] 프로 입단
  • 황용식
         |임기2 = [[2000년]] [[7월]] ~ [[2003년]] [[6월]]
  • 흥인군
         '''이최응'''(李最應, [[1815년]] [[2월 17일]] ~ [[1882년]] [[6월 10일]])은 [[조선]] 후기의 왕족, 정치인으로, 자는 양백(良伯), 호는 산향(山響), 군호는 흥인군(興寅君)이다. [[남연군]] 이구와 여흥군부인 여흥 민씨의 셋째 아들이자 [[흥선대원군]]의 바로 윗 형이었다. 자는 양백(良伯)이고 호는 산향(山響), 시호는 효헌(孝憲) 또는 충익(忠翼), 문충(文忠)이었다. 본관은 [[전주 이씨|전주]]이다.
         흥선대원군의 친형이었으나 그의 무시를 당했고, 사이가 좋지 않았다. [[흥선대원군]] 실각 후 좌의정, 세자부, 영의정 등을 지냈으며 통리기무아문 총리대신으로 개화정책을 추진했다가 유림과 갈등하였다. 그는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에 반대하여 [[1880년]] 이후 [[미국]], [[일본]]과의 개항 정책에 적극 동조하였다. [[1882년]](고종 19) [[6월]] [[임오군란]] 때 [[흥선대원군]]의 사주를 받은 난병에게 [[민겸호]](閔謙鎬) 등과 함께 살해되었다. [[신도비]]문에는 [[조선 고종|고종]]이 어의를 보내 진료했으나 차도를 보지 못하고 죽었다 하나, 난병을 피해 도주하다가 추락사했다는 설도 있다. 한편 동생인 흥선대원군과의 감정대립으로 민씨 정권의 측근으로 지냈는데, 민승호와 흥선대원군은 그를 이용해서 상대방의 정세를 염탐하는데 이용하려 하였다. 별칭은 '''유유정승'''(唯唯政丞)이다.
         그는 대미 개국 방침을 결정한 [[1880년]] [[10월]]의 중신회의에서 영의정으로서 회의를 주재했다.<ref name="sisi459">강재언, 《선비의 나라 한국유학 2천년》 (한길사, 20003) 459페이지</ref> 그는 쇄국 정책에 비판적이었다.<ref name="sisi459"/> [[일본]]에 갔던 수신사 [[김홍집]] 일행이 귀국하면서 [[황준헌]]의 [[조선책략]]을 가져와 미국과 외교관계를 수립해야 한다는 연미론(聯美論)를 주장하자 그는 "[[미국]]은 본래 원수의 나라가 아니니 서계(書契)를 가져오면 받아야 할 것"이라고 하여 [[1880년]] [[9월 8일]] 연미론을 적극 수용하였다. 그의 주장에 고종도 [[병인양요]], [[신미양요]]는 우리나라가 스스로 반성해야 할 것이라고 하여 [[미국]]과의 조약체결을 결심하게 되었다. [[1881년]] [[1월]] 흥인군의 건의로 고종은 지난해 [[6월]] 자신이 미국사신을 거부한 것을 후회하는 문서를 톈진(天津)으로 가는 영선사, 유학생들을 보낼 때, 그들을 통해 [[청나라]]로 보냈다.
         [[1881년]] 흥선대원군의 서자 [[완은군]] [[이재선]]이 흥선대원군의 추대로 반란을 일으켰다가 사사되자, 그의 백부가 되는 흥인군 이최응은 이재선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대한제국 고종|고종]]이 받아들이기를 거부했다. [[1882년]] [[광주부]][[유수]](廣州府留守)로 부임했다가 같은 해 다시 돈령부영사가 되었다. 그해에 안국동 별궁에서 열린 세자 순종과 순명효황후의 가례 때 종실의 원로로서 참석하였다. [[1882년]] [[6월 10일]] [[임오군란]] 때 난군을 피하여 달아나다가 사로잡혀 살해되었다.
         이때 난병이 흥인군 저택 을 포위하자 이최응은 담장을 넘으려다 떨어져 고환이 터져 결국 사망한다.<ref>노용필, 《개화기 서울사람들:우리 역사속의 사람들 2》 (어진이, 2004) 97 페이지</ref> 6월 9일 [[임오군란]]이 발생하자 그는 밤새 잠을 못 자고, 6월 10일 새벽에 겨우 잠이 들었다. 그러나 집 밖에서 별안간 떠들썩하는 바람에 급히 일어나 뒷담을 뛰어 넘으려 하였다.<ref name="yiyi">이현희, 《한국의 역사 16권. 개혁·개방과 외세의 침투》(청아출판사, 2014)</ref> 담에서 떨어진 그는 고환이 터져 신음하다가 난병의 창에 찔렸다.<ref name="yiyi"/> 그는 대원군의 형으로써 민씨 일파를 도와주었다고 하여 대원군이 일으킨 난병에게 무참하게 참살당하였다.<ref name="yiyi"/> [[황현]]은 [[매천야록]]에서 그가 난병을 피해 도망쳐 담을 넘다가 고환이 터져 죽었다 하였고, 이는 [[유주현]]의 [[대원군]] 등의 작품에 인용되었다.
         ** 어머니: 군부인 여흥민씨(驪興閔氏, [[1788년]] [[6월 26일]] ~ [[1831년]])
  • 흥친왕
         [[1882년]] [[6월]] [[임오군란]]으로 아버지 [[흥선대원군]]이 다시 섭정으로 재추대되자 일시적으로 무위대장(武衛大將)으로 사태수습에 힘썼다. [[호조]][[판서]]·[[선혜청]]당상(宣惠廳堂上)·지[[삼군부]]사(知三軍府事)·[[훈련원|훈련]]대장을 겸하였다.
         대원군의 구조 요청을 비밀리에 접한 흥친왕은 배편으로 [[1884년]] [[6월]]부터 [[텐진]]의 보정부로 왕래한다. 그해 [[12월]] 그는 [[인천항]]을 출국, [[청나라]]에 유폐중이던 아버지 [[흥선대원군]]을 방문하여 위로하고, [[1883년]] [[3월]]에 일시 귀국하였다. 다시 그해 [[5월]]에 다시 [[청나라]]에 가서 [[흥선대원군]]을 봉양하다 귀국하였다.
         [[1894년]](고종 31) [[6월]] 특별히 상보국숭록대부(上輔國崇祿大夫)로 승진하여 영종정경과 영돈녕부사를 역임했다.
         [[1894년]] [[6월]] 일본군의 경복궁 쿠데타로 대원군이 집정하자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의 동문사당상경리사(同文司堂上經理事)가 되었다.<ref name="daum1"/> [[7월 14일]] 특별 가자되어 상보국숭록대부(上輔國崇祿大夫)의 품계를 받고, [[7월 15일]] 궁내부 대신에 임명됐다. [[8월 13일]] 영돈녕원사(領敦寧院事)에 임명되었다. 이어 궁내부 대신을 거쳐 [[1895년]] [[8월]]에 다시 궁내부 대신에 임명되었다.
         * 둘째 부인(계실) : 흥친왕비 여주 이씨(驪州 李氏, [[1883년]] [[6월 7일]] ~ [[1978년]] [[1월 8일]]), 참봉(參奉) 여주인(驪州人) [[이인구]](李麟九)의 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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