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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의석
         그는 군대의 폭력성과 [[인권침해]]를 비판하여 군대 폐지론을 주장하기도 했다. [[2011년]] [[6월 2일]] [[병역법]] 위반혐의로 징역 1년 6개월의 실형을 선고받아 법정 구속 수감됐으며, 실형을 받은지 1년 2개월인 [[2012년]] [[8월 15일]] [[가석방]]을 받았다. 투옥 중에는 [[수감자 처우 개선]]을 요구하며 [[단식투쟁]]을 벌였다.<ref name="trusts">[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518291.html 강의석, 구치소서 ‘단식투쟁’ 하다 쓰러져] 한겨레신문 2012년 02월 9일자</ref> 그는 또 일부 국가대표 체육 선수들의 병역면제(엄밀히는 [[예술체육요원]]) 혜택에 대해 서민 남성들은 군대 가야 하는데 체육 하나 잘한다는 이유로 부당하게 [[병역면제]]를 받는다며 모 국가대표 선수들을 비판하기도 했다. [[서울특별시|서울]] 출신이다.
         [[2004년]] [[12월 16일]] [[서울대학교]] 법과 대학 수시모집에 합격하였다. 서울대는 16일 오후 수시2학기 모집전형 최종합격자로 강의석 군을 선발했다고 밝혔다.<ref name="bupp">[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40041216181316§ion= '작은 거인' 강의석군, 서울대 법대 합격] 프레시안 2004.12.16</ref> 6일 오후 프레시안과의 전화통화에서 "막상 지원을 해놓고도 3학년 성적을 제출하지 못해 내내 가슴을 졸였고, 그래서 2차 면접·구술시험 때는 이를 만회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했다"며 "스스로도 무척 기쁜 일이지만 아무래도 그동안 자식 걱정에 애를 태웠던 부모님들이 더 기뻐하는 것 같다"고 벅찬 감회를 피력했다.<ref name="bupp"/> 그는 "법대에 지원했던 이유는 이번 사건을 겪으며 법의 소중함을 알게 됐고, 또 그와 연관된 공부를 좀더 하고 싶었기 때문"이라며 "앞으로 사법시험보다는 법의 의미를 되새길 수 있는 공부에 더욱 치중하겠다"고 포부를 밝혔다.<ref name="bupp"/> [[2005년]] [[1월 9일]] [[부산]]에서 출발, 학내 종교자유의 정당성을 알리기 위한 국토 대장정을 시작하였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1&aid=0000875132 <예비 서울대 법학도 `종교자유 국토대장정'>] 연합뉴스 2005.01.06</ref> 국토 대장정은 [[1월 31일]]에 마쳤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47&aid=0000058380 15일간의 국토대장정 마친 강의석을 만나다] 오마이뉴스 2005.02.15</ref> 한편 그때까지 계류중이던 [[대광고등학교]] 퇴학 무효 소송에서 승소한다.
         [[2005년]] [[1월 21일]] 강의석(19)군이 학교법인 [[대광학원]]을 상대로 낸 퇴학처분 무효확인 소송에서 원고 최종 승소판결을 받았다. 그는 [[2004년]] [[12월]] 2005학년도 서울대 법대 수시모집에 합격했으며, 이번 승소로 서울대 법대 합격이 최종 결정됐다.<ref name="choisog">[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5380.html 강의석군 퇴학처분 무효판결] 한겨레신문 2005.01.21</ref> [[1월 21일]] 서울북부지법 민사11부(재판장 이성훈)는 “학생에게 종교와 표현의 자유 등 인권이 보장돼야 하고, 종교교육이 허용되는 사립학교라도 종교를 자유롭게 선택하는 범위에서 교육이 가능하다”며 “학교 선택권이 보장되지 않는 상황에서 학생 의사에 반해 종교를 강요할 수는 없다”고 판결 이유를 밝혔다. 이에 대해 서울대는 “이번 판결로 강군이 고교 졸업 자격을 갖췄기 때문에 법대 입학에 문제가 없다”고 결정했다.<ref name="choisog"/> [[2005년]] [[3월]] [[서울대학교]] 법과 대학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2006년 그는 등록을 거부하고 제적당했다.
         그는 국가대표 선수라는 이유로 병역을 면제받는 것은 지나친 특혜라고 주장해 왔다. [[박태환]]이 올림픽 수영 종목에서 금메달을 획득하고 이로 인하여 [[예술체육요원]]으로 병역특례를 받자 강의석은 [[박태환]]에게 군대 가라며 ‘대학 내일’ 434호에 기고한 '태환아, 너도 군대 가’라는 제목의 글에서 “마린보이, 난 자칭(!) ‘영화감독’ 강의석이야. [[2009년]] [[2월]] 완성될 블록버스터 다큐 ‘군대?’로 칸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을 예정”이라며 “그렇게 되면 ‘국위선양’의 이름으로 병역특례 혜택을 받게 되겠지만 나는 그 혜택을 거부하고 감옥에 갈 생각”이라고 소개했다.<ref>[http://www.sportsseoul.com/news2/photomovie/general/2008/0907/20080907101060500000000_5973825154.html Sportsseoul.com - '1인시위' 강의석, 병역특례 박태환 "불공평해!" 네티즌 찬반논란<!-- 봇이 따온 제목 -->]{{깨진 링크|url=http://www.sportsseoul.com/news2/photomovie/general/2008/0907/20080907101060500000000_5973825154.html }}</ref><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108&aid=0001957174 강의석 "박태환, 너도 군대 가" :: 네이버 뉴스<!-- 봇이 따온 제목 -->]</ref><ref>http://qtv.freechal.com/Viewer/QTVOutViewer.asp?docid=1689869&srchcp=N&playtimePos=&q=강의석%20박태환{{깨진 링크|url=http://qtv.freechal.com/Viewer/QTVOutViewer.asp?docid=1689869&srchcp=N&playtimePos=&q=%EA%B0%95%EC%9D%98%EC%84%9D%20%EB%B0%95%ED%83%9C%ED%99%98 }}</ref> 그는 메달을 이유로 병역을 피하는 것은 부당한 병역 회피이며, 악조건에서 태어나 군대로 끌려가야 하는 서민 남성들의 처지를 돌아보라고 쏘아붙였다. 그러나 월드컵 대표선수 비판과는 달리 박태환 비판 이후 그에 대한 여론이 악화되었다. 그러나 곧 최진실 자살 사건으로 강의석에 대한 비판 여론은 묻혀졌다. [[10월 2일]]에는 "평화는 맛있다!"라는 퍼포먼스를 벌였다. 총 모양의 튀김과자를 만들어 접시에 담은 뒤 거리에서 평화를 원한다는 뜻에서 시민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2010년]] [[11월]]<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32&aid=0002139455 학내 종교자유 투쟁… 양심적 병역거부… 강의석 끝내 구속] 경향신문 2011.06.02</ref>, 그는 [[2010년]] [[12월 30일]]까지 논산 [[육군훈련소]]에 입소하라는 공익근무요원소집 통지서를 받았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57&aid=0000161456 '입영 거부' 강의석 씨 불구속 기소] MBN 2011.04.18</ref> 병무청은 그에게 육군 논산훈련소로 입소하라는 통지서를 보냈지만 이를 거부해 검찰에 기소됐다.<ref name="tyngsa">[http://www.newshankuk.com/news/content.asp?news_idx=20110420145508n7971 軍입대거부 강의석, 군대보다 감옥行…"어머니께 너무 죄송"] 뉴스한국 2011.04.20</ref> 죄명은 '입영 거부<ref name="tyngsa"/>'였다.
         [[2011년]] [[6월 2일]], [[서울중앙지방법원]]은 강의석을 [[병역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개월의 실형을 선고하여 법정 구속 수감했다.<ref name="mcnom">[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POD&mid=sec&oid=001&aid=0005093765&isYeonhapFlash=Y `병역거부' 강의석 징역 1년6월…법정구속] 연합뉴스 2011-06-02</ref> 서울중앙지법 형사11단독 권기만 판사는 2일 종교수업 반대운동으로 알려진 강의석(25)씨에게 입영을 거부한 혐의(병역법 위반)를 인정, 징역 1년6월을 선고하고 법정구속했다.<ref>[http://news.hankooki.com/lpage/society/201106/h2011060218205721950.htm <nowiki>[</nowiki>입영 거부<nowiki>]</nowiki> 군대 폐지 주장 강의석씨 법정구속] {{웨이백|url=http://news.hankooki.com/lpage/society/201106/h2011060218205721950.htm# |date=20131102222105 }} 한국일보 2011.06.02</ref> 재판 과정에서 강의석은 군 법무관으로 복무하고 싶다는 등의 발언을 했으며 이로 인해 재판부는 강의석이 신념에 갈등이 있는지 의문이 있다고 하였다. 재판부는 '신념 형성의 자유는 절대적 자유이지만, 이를 실현할 자유는 제한될수 있다'고 판결했다.<ref name="mcnom"/> {{출처|날짜=2012-11-19|서울구치소에서 수감되는 중에 재소자 인권을 주장하면서 2번의 단식투쟁을 하다가 2번째 단식투쟁에서 쓰러지고, 2월 9일에 해남교도소로 이감되었다.}}
         [[1월 27일]]부터 수감자의 열악한 처우 개선을 요구하며 단식에 돌입했다가 [[2월 8일]] 쓰러졌다.<ref name="trusts"/> [[2월 6일]] 단식중이던 강씨를 면회하고 온 이광열 구속노동자후원회 상임활동가는 “표정에 핏기가 거의 없었지만 제 얼굴을 보자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고 단식 중 강씨의 상태를 전했다. 강씨는 혹한의 독거 수용실에서 물과 소금만으로 버텼다고 밝혔다.<ref name="trusts"/> 결국 [[2월 8일]] 몸이 쇠약해져 쓰러져 링거를 맞았고 [[2월 9일]] 단식을 중단하였다.<ref name="trusts"/>
         [[2012년]] [[1월 27일]] 그는 다시 재소자의 인권 문제를 지적했다. [[1월 27일]]부터 그는 옥중 단식에 돌입했으나 단식농성 13일만인 [[2월 8일]] 저녁 쓰러졌다. 강씨는 단식 13일째인 8일 몸이 쇠약해져 쓰러져 링거를 맞았고 현재는 단식을 중단하였다.<ref name="trusts"/> 교정당국은 강씨를 신설 교도소인 전남 해남교도소로 이송하였다.<ref name="trusts"/> 한편 인권연대는 [[2월 9일]] 강씨가 수감자의 열악한 처우 개선을 요구하며 지난달 27일부터 단식에 돌입했다가 어제 저녁 쓰러졌으며 현재 회복중이라고 밝혔다.<ref name="trusts"/> 그의 2차 옥중 단식 농성 이후 인권연대 외에도 여러 인권 운동가들과 외신이 서울구치소를 방문하여 그를 면담하고 돌아갔다.
         * 아버지 : 강재정([[1958년]]<ref name="hwaesawon">[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210959 "제적 취소·예배선택권 수용하라":강의석군 41일 단식...학교 '모르쇠'] 오마이뉴스 2004.09.20</ref> ~ [[2009년]] [[12월 10일]]<ref>[http://g020.danah.kr/bbs/board.php?bo_table=01_3&wr_id=203 종교자유정책연구원]{{깨진 링크|url=http://g020.danah.kr/bbs/board.php?bo_table=01_3&wr_id=203 }}</ref>, 회사원<ref name="hwaesawon"/>)
         그의 재소자 인권 문제 제기는 논란을 불러왔다. [[2012년]] [[2월]] 그를 다시 면담한 오창익 인권연대 사무국장은 “21세기에 춥다는 이유로 단식을 하는 상황이 벌어진다는 것이 안타깝다”며 “교도소에 수용자를 집어 넣는 것에만 관심을 두고 그 뒤에 어떻게 교정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낮은 사회적 관심이 이런 문제를 가져왔다”고 말했다. 또 편지 검열에 대해 “외부의 사람과 추가적인 범행 모의나 증거인멸 등을 막는다는 취지인데 단순히 단식중이라는 사실 전달을 막는 데 활용하는 것은 과도한 검열”이라고 지적했다.<ref name="trusts"/>
         * [[2000년]] [[2월]] 서울 [[성일중학교]] 졸업
         * [[2003년]] [[2월]] [[대광고등학교]] 졸업
         * [[2013년]] [[2월 19일]] 19인의 아프리카
         *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518291.html 강의석, 구치소서 ‘단식투쟁’ 하다 쓰러져] 한겨레신문 2012년 02월 9일자
  • 강의석 (영화감독)
         그는 군대의 폭력성과 [[인권침해]]를 비판하여 군대 폐지론을 주장하기도 했다. [[2011년]] [[6월 2일]] [[병역법]] 위반혐의로 징역 1년 6개월의 실형을 선고받아 법정 구속 수감됐으며, 실형을 받은지 1년 2개월인 [[2012년]] [[8월 15일]] [[가석방]]을 받았다. 투옥 중에는 [[수감자 처우 개선]]을 요구하며 [[단식투쟁]]을 벌였다.<ref name="trusts">[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518291.html 강의석, 구치소서 ‘단식투쟁’ 하다 쓰러져] 한겨레신문 2012년 02월 9일자</ref> 그는 또 일부 국가대표 체육 선수들의 병역면제(엄밀히는 [[예술체육요원]]) 혜택에 대해 서민 남성들은 군대 가야 하는데 체육 하나 잘한다는 이유로 부당하게 [[병역면제]]를 받는다며 모 국가대표 선수들을 비판하기도 했다. [[서울특별시|서울]] 출신이다.
         [[2004년]] [[12월 16일]] [[서울대학교]] 법과 대학 수시모집에 합격하였다. 서울대는 16일 오후 수시2학기 모집전형 최종합격자로 강의석 군을 선발했다고 밝혔다.<ref name="bupp">[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40041216181316§ion= '작은 거인' 강의석군, 서울대 법대 합격] 프레시안 2004.12.16</ref> 6일 오후 프레시안과의 전화통화에서 "막상 지원을 해놓고도 3학년 성적을 제출하지 못해 내내 가슴을 졸였고, 그래서 2차 면접·구술시험 때는 이를 만회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했다"며 "스스로도 무척 기쁜 일이지만 아무래도 그동안 자식 걱정에 애를 태웠던 부모님들이 더 기뻐하는 것 같다"고 벅찬 감회를 피력했다.<ref name="bupp"/> 그는 "법대에 지원했던 이유는 이번 사건을 겪으며 법의 소중함을 알게 됐고, 또 그와 연관된 공부를 좀더 하고 싶었기 때문"이라며 "앞으로 사법시험보다는 법의 의미를 되새길 수 있는 공부에 더욱 치중하겠다"고 포부를 밝혔다.<ref name="bupp"/> [[2005년]] [[1월 9일]] [[부산]]에서 출발, 학내 종교자유의 정당성을 알리기 위한 국토 대장정을 시작하였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1&aid=0000875132 <예비 서울대 법학도 `종교자유 국토대장정'>] 연합뉴스 2005.01.06</ref> 국토 대장정은 [[1월 31일]]에 마쳤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47&aid=0000058380 15일간의 국토대장정 마친 강의석을 만나다] 오마이뉴스 2005.02.15</ref> 한편 그때까지 계류중이던 [[대광고등학교]] 퇴학 무효 소송에서 승소한다.
         [[2005년]] [[1월 21일]] 강의석(19)군이 학교법인 [[대광학원]]을 상대로 낸 퇴학처분 무효확인 소송에서 원고 최종 승소판결을 받았다. 그는 [[2004년]] [[12월]] 2005학년도 서울대 법대 수시모집에 합격했으며, 이번 승소로 서울대 법대 합격이 최종 결정됐다.<ref name="choisog">[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5380.html 강의석군 퇴학처분 무효판결] 한겨레신문 2005.01.21</ref> [[1월 21일]] 서울북부지법 민사11부(재판장 이성훈)는 “학생에게 종교와 표현의 자유 등 인권이 보장돼야 하고, 종교교육이 허용되는 사립학교라도 종교를 자유롭게 선택하는 범위에서 교육이 가능하다”며 “학교 선택권이 보장되지 않는 상황에서 학생 의사에 반해 종교를 강요할 수는 없다”고 판결 이유를 밝혔다. 이에 대해 서울대는 “이번 판결로 강군이 고교 졸업 자격을 갖췄기 때문에 법대 입학에 문제가 없다”고 결정했다.<ref name="choisog"/> [[2005년]] [[3월]] [[서울대학교]] 법과 대학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2006년 그는 등록을 거부하고 제적당했다.
         그는 국가대표 선수라는 이유로 병역을 면제받는 것은 지나친 특혜라고 주장해 왔다. [[박태환]]이 올림픽 수영 종목에서 금메달을 획득하고 이로 인하여 [[예술체육요원]]으로 병역특례를 받자 강의석은 [[박태환]]에게 군대 가라며 ‘대학 내일’ 434호에 기고한 '태환아, 너도 군대 가’라는 제목의 글에서 “마린보이, 난 자칭(!) ‘영화감독’ 강의석이야. [[2009년]] [[2월]] 완성될 블록버스터 다큐 ‘군대?’로 칸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을 예정”이라며 “그렇게 되면 ‘국위선양’의 이름으로 병역특례 혜택을 받게 되겠지만 나는 그 혜택을 거부하고 감옥에 갈 생각”이라고 소개했다.<ref>[http://www.sportsseoul.com/news2/photomovie/general/2008/0907/20080907101060500000000_5973825154.html Sportsseoul.com - '1인시위' 강의석, 병역특례 박태환 "불공평해!" 네티즌 찬반논란<!-- 봇이 따온 제목 -->]{{깨진 링크|url=http://www.sportsseoul.com/news2/photomovie/general/2008/0907/20080907101060500000000_5973825154.html }}</ref><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108&aid=0001957174 강의석 "박태환, 너도 군대 가" :: 네이버 뉴스<!-- 봇이 따온 제목 -->]</ref><ref>http://qtv.freechal.com/Viewer/QTVOutViewer.asp?docid=1689869&srchcp=N&playtimePos=&q=강의석%20박태환{{깨진 링크|url=http://qtv.freechal.com/Viewer/QTVOutViewer.asp?docid=1689869&srchcp=N&playtimePos=&q=%EA%B0%95%EC%9D%98%EC%84%9D%20%EB%B0%95%ED%83%9C%ED%99%98 }}</ref> 그는 메달을 이유로 병역을 피하는 것은 부당한 병역 회피이며, 악조건에서 태어나 군대로 끌려가야 하는 서민 남성들의 처지를 돌아보라고 쏘아붙였다. 그러나 월드컵 대표선수 비판과는 달리 박태환 비판 이후 그에 대한 여론이 악화되었다. 그러나 곧 최진실 자살 사건으로 강의석에 대한 비판 여론은 묻혀졌다. [[10월 2일]]에는 "평화는 맛있다!"라는 퍼포먼스를 벌였다. 총 모양의 튀김과자를 만들어 접시에 담은 뒤 거리에서 평화를 원한다는 뜻에서 시민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2010년]] [[11월]]<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32&aid=0002139455 학내 종교자유 투쟁… 양심적 병역거부… 강의석 끝내 구속] 경향신문 2011.06.02</ref>, 그는 [[2010년]] [[12월 30일]]까지 논산 [[육군훈련소]]에 입소하라는 공익근무요원소집 통지서를 받았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57&aid=0000161456 '입영 거부' 강의석 씨 불구속 기소] MBN 2011.04.18</ref> 병무청은 그에게 육군 논산훈련소로 입소하라는 통지서를 보냈지만 이를 거부해 검찰에 기소됐다.<ref name="tyngsa">[http://www.newshankuk.com/news/content.asp?news_idx=20110420145508n7971 軍입대거부 강의석, 군대보다 감옥行…"어머니께 너무 죄송"] 뉴스한국 2011.04.20</ref> 죄명은 '입영 거부<ref name="tyngsa"/>'였다.
         [[2011년]] [[6월 2일]], [[서울중앙지방법원]]은 강의석을 [[병역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개월의 실형을 선고하여 법정 구속 수감했다.<ref name="mcnom">[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POD&mid=sec&oid=001&aid=0005093765&isYeonhapFlash=Y `병역거부' 강의석 징역 1년6월…법정구속] 연합뉴스 2011-06-02</ref> 서울중앙지법 형사11단독 권기만 판사는 2일 종교수업 반대운동으로 알려진 강의석(25)씨에게 입영을 거부한 혐의(병역법 위반)를 인정, 징역 1년6월을 선고하고 법정구속했다.<ref>[http://news.hankooki.com/lpage/society/201106/h2011060218205721950.htm <nowiki>[</nowiki>입영 거부<nowiki>]</nowiki> 군대 폐지 주장 강의석씨 법정구속] {{웨이백|url=http://news.hankooki.com/lpage/society/201106/h2011060218205721950.htm# |date=20131102222105 }} 한국일보 2011.06.02</ref> 재판 과정에서 강의석은 군 법무관으로 복무하고 싶다는 등의 발언을 했으며 이로 인해 재판부는 강의석이 신념에 갈등이 있는지 의문이 있다고 하였다. 재판부는 '신념 형성의 자유는 절대적 자유이지만, 이를 실현할 자유는 제한될수 있다'고 판결했다.<ref name="mcnom"/> {{출처|날짜=2012-11-19|서울구치소에서 수감되는 중에 재소자 인권을 주장하면서 2번의 단식투쟁을 하다가 2번째 단식투쟁에서 쓰러지고, 2월 9일에 해남교도소로 이감되었다.}}
         [[1월 27일]]부터 수감자의 열악한 처우 개선을 요구하며 단식에 돌입했다가 [[2월 8일]] 쓰러졌다.<ref name="trusts"/> [[2월 6일]] 단식중이던 강씨를 면회하고 온 이광열 구속노동자후원회 상임활동가는 “표정에 핏기가 거의 없었지만 제 얼굴을 보자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고 단식 중 강씨의 상태를 전했다. 강씨는 혹한의 독거 수용실에서 물과 소금만으로 버텼다고 밝혔다.<ref name="trusts"/> 결국 [[2월 8일]] 몸이 쇠약해져 쓰러져 링거를 맞았고 [[2월 9일]] 단식을 중단하였다.<ref name="trusts"/>
         [[2012년]] [[1월 27일]] 그는 다시 재소자의 인권 문제를 지적했다. [[1월 27일]]부터 그는 옥중 단식에 돌입했으나 단식농성 13일만인 [[2월 8일]] 저녁 쓰러졌다. 강씨는 단식 13일째인 8일 몸이 쇠약해져 쓰러져 링거를 맞았고 현재는 단식을 중단하였다.<ref name="trusts"/> 교정당국은 강씨를 신설 교도소인 전남 해남교도소로 이송하였다.<ref name="trusts"/> 한편 인권연대는 [[2월 9일]] 강씨가 수감자의 열악한 처우 개선을 요구하며 지난달 27일부터 단식에 돌입했다가 어제 저녁 쓰러졌으며 현재 회복중이라고 밝혔다.<ref name="trusts"/> 그의 2차 옥중 단식 농성 이후 인권연대 외에도 여러 인권 운동가들과 외신이 서울구치소를 방문하여 그를 면담하고 돌아갔다.
         * 아버지 : 강재정([[1958년]]<ref name="hwaesawon">[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210959 "제적 취소·예배선택권 수용하라":강의석군 41일 단식...학교 '모르쇠'] 오마이뉴스 2004.09.20</ref> ~ [[2009년]] [[12월 10일]]<ref>[http://g020.danah.kr/bbs/board.php?bo_table=01_3&wr_id=203 종교자유정책연구원]{{깨진 링크|url=http://g020.danah.kr/bbs/board.php?bo_table=01_3&wr_id=203 }}</ref>, 회사원<ref name="hwaesawon"/>)
         그의 재소자 인권 문제 제기는 논란을 불러왔다. [[2012년]] [[2월]] 그를 다시 면담한 오창익 인권연대 사무국장은 “21세기에 춥다는 이유로 단식을 하는 상황이 벌어진다는 것이 안타깝다”며 “교도소에 수용자를 집어 넣는 것에만 관심을 두고 그 뒤에 어떻게 교정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낮은 사회적 관심이 이런 문제를 가져왔다”고 말했다. 또 편지 검열에 대해 “외부의 사람과 추가적인 범행 모의나 증거인멸 등을 막는다는 취지인데 단순히 단식중이라는 사실 전달을 막는 데 활용하는 것은 과도한 검열”이라고 지적했다.<ref name="trusts"/>
         * [[2000년]] [[2월]] 서울 [[성일중학교]] 졸업
         * [[2003년]] [[2월]] [[대광고등학교]] 졸업
         * [[2013년]] [[2월 19일]] 19인의 아프리카
         *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518291.html 강의석, 구치소서 ‘단식투쟁’ 하다 쓰러져] 한겨레신문 2012년 02월 9일자
  • 곽상도
         '''곽상도'''(郭尙道, [[1959년]] [[12월 23일]] ~ [[대구광역시|대구]])는 [[대한민국]]의 [[검사]] 출신 법조인, 정치인이다.
         [[조선일보]]와 [[서울대학교|서울대]] 폴랩의 20대 국회의원 이념성향 분석 결과, 곽상도 의원은 +50점으로 당시 20대 국회의원 296명 중에서 가장 보수적인 의원으로 꼽혔다. 임기 시작부터 2017년 12월까지 법안 1,202건에 대한 국회 투표를 분석해 수치를 도출했으며, 가장 진보적은 -50점, 가장 보수적은 +50점으로 평가된다.<ref>{{뉴스 인용|url=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8/01/08/2018010801043.html|제목=[20대 국회 이념지도] 17~20대 국회 이념성향 비교했더니|성=|이름=|날짜=|뉴스=|출판사=}}</ref>
         * [[2009년]] [[2월]] : 곽상도법률사무소 변호사
         * [[2017년]] [[12월]] ~ : [[자유한국당]] 원내부대표
         * [[2018년]] [[2월]] ~ [[2018년]] [[5월]] : 자유한국당 지방선거총괄기획단 대여투쟁본부 위원
         * 곽상도는 검사시절 [[강기훈 유서대필 의혹 사건]]의 조사를 맡았다. 이 과정에서 강압수사, 고문의혹이 제기되었으나 곽상도는 고문, 가혹행위는 없었고 밤샘조사는 당시 허용되던 상황이라고 해명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32&aid=0002307926 곽상도, 강기훈씨 강압 조사 관련 "야간조사 허용됐다"],경향신문, 2013년 2월 21일</ref> 이후 재심에서 강기훈 유서대필 의혹 사건이 무죄로 판명되었으며 검찰은 국가배상 청구사건 항소를 포기했다.
  • 권람
         |임기2 = 1462년 5월 29일 ~ 1465년 2월 6일
         |사망일= [[1465년]] [[2월 6일]]
         '''권람'''(權擥, [[1416년]] ~ [[1465년]] [[2월 6일]])은 [[조선]] 초의 문신, 역사학자, 작가, 문인이다. [[자 (이름)|자]](字)는 정경(正卿), [[호 (이름)|호]]는 소한당(所閑堂) 또는 소한당(所閒堂), 후주당(後週堂)이다. 본관은 [[안동 권씨|안동]](安東)으로 [[권근]]의 손자이다. 남이와 신수근이 그의 사위다. 부모의 이혼으로 불우한 청년기를 보내다가 [[한명회]]와 교유했고, 그를 통해 [[신숙주]] 등을 소개받고 [[조선 세조|수양대군]]의 측근이 되었다.
         [[조선 단종|단종]] 즉위 초 [[계유정난]](癸酉靖難)때 [[김종서 (1383년)|김종서]], [[황보 인]] 등을 제거할 때에 적극 가담, 앞장섰으며 김종서, 황보 인 등 대신들의 세력을 제거하고 이들이 왕을 능가하는 권력남용을 했다며 이들을 비판하였다. 그 뒤 정난의 성공을 위해 노력한 공로로 수충위사협책정난동덕좌익공신[[정난공신]](輸忠衛社協策靖難同德佐翼功臣) 1등관에 녹훈되고 바로 [[승정원]]동부승지에 승진했다가 이후 우부승지에 올랐다. [[1454년]](단종 2년) [[2월]] [[승정원]][[우부승지]], [[8월]] [[좌부승지]]로 승진했다. [[1455년]] 여름 우승지를 거쳐, [[1455년]](세조 즉위년) [[6월]] [[조선 단종|단종]]이 강압으로 양위하고 [[조선 세조|세조]]가 즉위하자 [[6월]] [[이조]] [[참판]](吏曹參判)에 발탁되고 길창군(吉昌君)에 봉군되었다.
         [[1456년]] [[2월]] [[이조 판서]](吏曹判書)가 되어 [[집현전]][[대제학]]과 지경연춘추관사를 겸임하였다. 이후 [[감춘추관사]]로 [[세종실록]]의 편찬과 증보에 참여하였다. 또한 [[조선 세조|세조]] 즉위 초 [[한명회]], [[신숙주]]와 함께 [[의정부 서사제]]를 반대하여 [[육조직계제]]를 지지하였다.
         [[1456년]](세조 2년) [[2월]] [[이조판서]]가 되었다. 같은 달 [[사은사]]에 임명되어 [[명나라]]를 다녀왔다.
         [[1457년]](세조 3년) [[2월]] 난신(亂臣)들의 노비를 하사받았고, [[3월]] [[김문기]](金文起<ref>사촌형 권총의 사돈이기도 하다.</ref>), [[장귀남]](張貴南), [[성승]](成勝) 등의 전지를 토지로 하사받았다. 이후 이조판서를 거쳐 [[도진무]](都鎭撫)가 되었다가 다시 이조판서로 임명되었다.
         [[1456년]](세조 2) 2월에 이조판서가 되었다. 세조를 도와 여러 차례 공을 세운 덕으로 만년에는 높은 지위와 많은 재산을 모았으며, 남산 아래에 화려한 집을 지녔다. 권람이 일찍이 벼슬을 그만두고 한가히 병(病)을 치료할 뜻이 있으니, 임금이 어찰(御扎)을 내려 만류하였다.
         [[1456년]] 3월에 역신(逆臣)들이 가졌던 연안‧전주‧충주‧양주의 토지를 하사받았다. [[1457년]] [[2월]]에는 [[사육신]]과 그 관련자들의 노비를 하사받았고, [[3월]]에는 김문기(金文起)‧장귀남(張貴南)‧성승(成勝) 등의 토지를 하사받았다. [[김시습]] 등은 이를 두고 어진 신하를 죽여서 얻은 재물이라며 비판, 그의 집 문 앞에서 조롱하였다. 그러나 할아버지 [[권근]]으로부터 물려받은 토지와 노비들 외에도 자신이 세운 훈공으로 막대한 재산과 전지, 노비를 하사받고 당대의 부자의 한사람이 되었다.
         [[1458년]](세조 4년) [[5월]] 그는 수찬관(修撰官)으로 [[정인지]], [[신숙주]](申叔舟) 등과 함께 《[[국조보감]] (國朝寶鑑)》을 편찬하였으며, 활을 잘 쏘았고 문장에도 뛰어났다. 그러나 횡포가 심하고 많은 돈을 모아 탄핵을 받았다. 그해 다시 좌부승지가 되었다가 그해 [[12월]] [[의정부]]우찬성(右贊成)이 되었으며, 59년 [[의정부]][[좌찬성]]이 되었다.
         활을 잘 쏘고, 역사 지식에 해박하였으며 문장에도 뛰어났다. 그러나 횡포가 심하고 축재를 하여 여러 번 탄핵을 받았다. 그는 [[신숙주]], [[서거정]](徐居正), [[한명회]] 등과 교류하였다. 세조 말년에 [[의정부]] [[좌의정]]으로 있다가 병으로 여러 번 사직하였으나 왕이 허락하지 않다가 병이 위중함을 보고 사직을 허락했다. 은퇴하여 있다가 [[1465년]](세조 11년) [[2월 6일]] 병으로 죽었다.
  • 권성욱
         [[대구광역시]] 출신으로 [[1998년]] [[2월]] [[부산광역시]]와 [[경상남도]]의 지역방송국인 PSB 부산방송(현재 [[KNN]])으로 입사하여 아나운서로서의 활동을 시작하였다. 당시 주로 프로야구 중계를 많이 담당하였다. [[2001년]]부터는 스포츠 전문 케이블방송인 [[KBS N 스포츠]]로 소속을 옮겨 [[2013년]]까지 [[KBO 리그]], [[KBL 리그]] 농구 중계를 담당하였다. [[2011년 세계 육상 선수권 대회|2011 대구 세계 육상 선수권 대회]]때는 일부 필드경기 및 시상식 장내해설을 맡은 바 있다. [[2014년]] 팀장으로 승진하면서 마이크를 내려놓았는데, 2015년 5월 2일과 10월 21일 2경기 마이크를 잡았으며, 2016년 4월 1일, [[KT 위즈]]와 [[SK 와이번스]]와의 경기에서 마이크를 잡았다.
  • 권영세 (1959년)
         '''권영세'''(權寧世, [[1959년]] [[2월 24일]] ~ )는 [[대한민국]]의 [[정치가]]이다. [[서울 영등포구의 국회의원|영등포구 을]]의 제16대 ~ 제18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 [[2002년]] [[7월]] ~ [[2012년]] [[2월]] : 한나라당 영등포구을 당원협의회 운영위원장
         * [[2015년]] [[8월]] ~ [[2017년]] [[2월]] : 새누리당 서울특별시당 영등포구 을 당원협의회 운영위원장
         * [[2017년]] [[2월]] ~ [[2017년]] [[12월]] : 자유한국당 서울특별시당 영등포구 을 당원협의회 운영위원장
         |임기 = [[2011년]] [[12월 30일]] ~ [[2012년]] [[2월 12일]]
         |임기 = [[2012년]] [[2월 13일]] ~ [[2012년]] [[5월 21일]]
  • 김건모
         * [[2001년]] [[2월]] 한국방문의해 명예홍보사절
         * 5집 《Myself》 (1997년 12월 1일 발매)
         * 8집 《Hestory》 (2003년 2월 27일 발매)
         ** [[2월 13일]] [[SBS]] 《[[스타 서울 스타]]》 1위
         ** [[2월 16일]] [[KBS]] 《[[가요톱10|가요톱텐]]》 1위
         ** [[2월 20일]] [[SBS]] 《[[스타 서울 스타]]》 1위 (2주 연속)
         ** [[2월 23일]] [[KBS]] 《[[가요톱10|가요톱텐]]》 1위
         ** [[2월 27일]] [[SBS]] 《[[스타 서울 스타]]》 1위 (3주 연속)
         * [[개그콘서트]] - 2015년 2월 22일 설 특집 '10년 후'특별 출연 (KBS)
  • 김국진(MC)
         || '''출생''' ||<(> [[1965년]] [[2월 6일]] [[강원도]] [[인제군]] ||
         [[1993년]] [[2월]] 감자골은 당시 최고의 예능 프로그램이였던 [[일요일 일요일 밤에]]에서 고별인사를 하고 [[미국]]행을 하기로 했는데, 녹화가 시작되기 직전 "[[내가 무릎을 꿇었던 건 추진력을 얻기 위함이었다|프로그램을 열 개씩 하던 감자골이 갑자기 그만 둔 것은 MBC로 이적하기 위함이였다!]]" 라면서 임하룡을 제외한 '''방송 3사 코미디언들 모두'''가 MBC로 쳐들어와서 녹화를 방해하기에 이르렀다. 이들이 난동을 피우는 통에 김국진은 스태프들을 따라서 개구멍으로 피신을 갔다고 한다(…). 참고로 이때 김국진을 숨겨준 사람이 [[최진실]]의 동생 최진영이라고 라디오스타에서 밝혔다. 1980년대 말 ~ 90년대 초에 활발하게 활동했던 코미디언들을 하나하나 떠올려보면 씁쓸해지는 대목. 감자골은 ~~[[이경규]]가 선처를 호소해서 선배들에게 줄빳다만 맞고~~ 자신들이 다른 곳으로 이적하는 것이 아니라 코미디언으로서 은퇴하고 이민가는 것이다. ~~니들 밥줄 끊을 염려 없으니 놔줘라~~ 라고 설득해서 겨우 시청자들에게 고별 방송을 할 수 있었다. 그렇게 감자골은 '''방송 3사 코미디언 협회에서 제명당한다.''' 이들의 KBS 선배 개그맨 [[이봉원]]은 후일 방송에서 감자골 사태에 대한 질문을 받자, '당시 나는 SBS로 이적한 상태라 아무 관련이 없다'는 파렴치한 변명을 했다. 피해자는 있는데, 가해자는 없는 이상한 사건.
         [[2015년]] 설특집 파일럿 방송이였던 [[불타는 청춘]]에 출연. 정규 편성 후에도 고정 출연하며 사실상 프로그램의 흐름을 조율하는 MC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또한 역시 같은 고정 출연자인 [[강수지]]와는 치와와 커플이라는 별칭까지 얻을만큼, 실제인지 설정인지(...)를 헷갈리게 하는 케미스트리[* 물론 두 사람은 프로그램 출연 전부터 25년 가까이 알고 지내던 사이][* 2016년 첫 촬영시기부터 (2월 16일 방송분으로 추정) 수상소감의 영향인지 조금 더 적극적인 모습의 김국진을 볼수 있다. 강수지야 뭐... (??? : 딱 좋아요!)]로 인기몰이중이다.
         2018년 2월 6일 [[불타는 청춘]] 방송에서 기사화 된 내용을 인정하며, '''강수지와 5월에 결혼한다'''는 발표를 했다. 이로써 불청 최초의 커플이 결혼에 골인하는 경사를 맞게 되었다. 결혼식은 올리지 않으며 가족들끼리 조촐한 식사 자리를 마련한다고 한다.
  • 김기섭 (1939년)
         '''김기섭'''(金己燮, [[1939년]] [[12월 7일]] ~ )은 [[신라호텔]]에서 근무한 [[대한민국]]의 기업인이며, [[김영삼]]의 가신 그룹 인사였다. 본관은 [[김녕 김씨|김녕]]. [[대구광역시|대구]] 출신.
         * [[1983년]] [[2월 7일]] [[신라호텔]] 이사대우
         * [[1984년]] [[2월 2일]] [[신라호텔]] 이사
         * [[1990년]] [[2월]] 김영삼 민주자유당 대표 의전비서
         |임기 = [[1995년]] [[6월]] ~ [[1997년]] [[2월 28일]]
  • 김대우 (1900년)
         미군정 경북지사로 근무할 때 공금 3만원을 횡령한 것이 드러나 [[1946년]] [[2월]] 업무상횡령혐의로 특별범죄심사위원회 조사부에 소환되었으나 곧 도주했다. [[1946년]]부터 도피 생활을 하였고, 지명수배되었지만 곧 흐지부지되었다.
         [[1951년]] 일본인으로 조선총독부 관료로 조선에서 지방관을 역임한 고시진이 비밀리에 [[부산]]에 방문, [[장택상]]과 만났다가 [[족청]]계의 폭로로 장택상은 총리직에서 물러났다. 김대우는 고시진의 밀입국과 [[부산]] 밀항에 관련되어 [[1952년]] [[9월 28일]] 경찰에 긴급 구속되었다. [[10월 22일]] 구류기간이 만류되었으나 다른 이유로 계속 구속되었고 김대우는 구속의 부당함을 주장, 장준택 변호사를 변호인으로 선임하여 항소하였다. [[1953년]] [[2월 8일]] 불기소 및 유예처분을 받고 풀려났다.
  • 김대중
         |취임일 = 1998년 2월 25일
         |퇴임일 = 2003년 2월 24일
         대학 진학을 포기한 김대중은 [[목상고등학교|목포상업학교]](목상고등학교)를 [[1944년]] 봄에 졸업하였다.<ref>[http://news.inews24.com/php/news_view.php?g_serial=436226&g_menu=050220 [김前대통령 서거]민주화의 거목 김대중, 그 파란만장했던 삶] 아이뉴스 2009.08.18</ref> 졸업 후엔 일본의 징집을 피하기 위해 목포상선회사에 경리사원으로 입사하였다.<ref>[http://article.joinsmsn.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3733076&cloc= 가택연금 55회...투옥 6년...망명...사형선고]《중앙일보》</ref>[[1945년]] 해방이 되자 김대중은 종업원 대표로 추대되어 종업원단체가 조직한 회사 경영위원회 위원장에 선출되었다. 정치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이 해 [[여운형]]이 이끄는 건국준비위원회 목포지부에 참여하여 선전부원으로 활동하게 된다. [[건국준비위원회]]의 선전책인 임영춘의 추천으로 건준 목포시 지부에 가입해 선전책에 종사하는 한편 목포청년동맹에 가담하여 활동하였다. 그해 9월 건국준비위원회가 [[조선인민공화국]] 수립으로 발전적 해체라는 이름하에 해체되자 이채현의 추천으로 [[김두봉]]이 [[1946년]] [[2월]]에 [[연안파]] 공산주의자들과 함께 창당한 [[공산주의]] 정당인 [[조선신민당]]에 입당하여 조직부장으로 활동하는 한편, 민주청년동맹 목포시 지부에 가입하여 부위원장으로 활동을 병행하였다.<ref name="안기부 문건">[http://monthly.chosun.com/client/news/viw.asp?nNewsNumb=200210100031&ctcd=&cpage=1 미공개 자료를 中心으로 쓰는 김대중 연구(6) 좌익 행동대원 출신의 대한민국觀] 월간조선 2002년 10월호</ref>
         [[1947년]], 김대중은 장인의 권고에 따라 한민당 목포지부에 입당하여 시당 상무위원으로 선출된다. 김대중은 한민당에 들어가 활동하는 한편 앞서 일했던 선박회사에서의 경험을 살려 연안을 운행하는 화물선 [[목포상선주식회사|동양해운]]이라는 회사를 차리고 해운업을 시작한다. [[1948년]] 10월엔 목포일보를 인수하여 1950년 10월까지 사장을 역임했다. [[1949년]] 2월 경엔 하의보통학교 동창인 유재식(兪在埴)의 형이 동양해운 사무실로 찾아와 서울행 여비의 보조를 부탁하여 그의 상경 여비를 도와주었는데, 유재식은 [[남로당]] 섭외부원 겸 [[민주주의 민족전선]] 부위원장이었다. 이에 김대중은 유재식에 대한 자금제공 혐의로 경찰에 체포되었으나 친구의 형에 대한 단순한 여비 보조라는 점이 밝혀졌고, 또 해군 목포경비부대 정보대장 오세동 중위와 헌병대장 박성철 소위의 신원보증으로 10여일 만에 석방되었다.<ref>김대중 진술서.</ref>
         [[1967년]] 2월에 [[신민당 (1967년)|신민당]] 창당에 참여하여 신민당 정무위원 겸 대변인으로 발탁되었다. 이후 [[대한민국 7대 총선|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공화당은 진도 출신의 전 체신부장관 [[김병삼]]의 지역구를 옮기고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목포에서 국무회의를 여는 등 대대적인 '김대중 낙선전략'에도 불구하고 당선된다. 그 뒤 [[1968년]] [[6월 3일]] 당수 [[유진오]]로부터 원내총무 후보자로 지명을 받았으나 의원총회에서 재석 41명 중 찬서 16명, 반대 23명으로 결국 원내총무 자리는 김영삼에게 돌아갔다.<ref name="손세일"/> 그해 신민당 정무위원에 선출되었다.
         [[2006년]] 2월, [[대한민국 외교통상부]]는 1947년부터 1974년 사이의 비공개 외교문서를 공개하였고, 이로 인해 당시 납치 사건과 관련된 많은 내용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ref>[http://news.hankooki.com/lpage/politics/200502/h2005020318180121000.htm 《국정원 과거사 조사 김대중 납치사건》'DJ 납치' 朴대통령 개입했나] {{웨이백|url=http://news.hankooki.com/lpage/politics/200502/h2005020318180121000.htm |date=20111124054031 }} 한국일보 2005.02.03</ref><ref>[http://news.hankooki.com/lpage/politics/200710/h2007102818280021080.htm 정부 'DJ 납치 사건' 日에 유감 표명키로] {{웨이백|url=http://news.hankooki.com/lpage/politics/200710/h2007102818280021080.htm |date=20111124051139 }} 한국일보 2007.10.28</ref>
         1977년 [[5월 7일]]에는 진주교도소에서 수감 중 접견 제한에 항의하며 단식투쟁을 했으며, 같은해 [[10월 31일]]에 진주교도소 수감중 격려차 찾아온 [[김수환]] 추기경과 면담하였고, 이후 [[12월 22일]]에는 [[서울대학교병원]]으로 이송되어 수감 되었다. [[1978년]] [[9월 6일]] 서울대병원 이송후 교도소 때보다 제한(접견 차단, 창문 봉쇄, 서신제한, 운동금지)이 더욱 심하자 항의 단식하면서 같은해 1978년 [[12월 27일]]에 옥고를 치르면서 2년 9개월만에 형집행정지로 가석방된 후 장기 가택연금을 당했다.
         [[10·26 사건]]으로 박정희가 [[김재규]]에게 암살당한 후 긴급조치 9호가 해제되고 1979년 [[12월 8일]] 가택연금에서 해제 되었다.<ref>[http://www.theveritas.co.kr/contents/article/sub_re.html?no=4081 민주주의·평화통일에 평생 바친 김대중 전 대통령 추모]{{깨진 링크|url=http://www.theveritas.co.kr/contents/article/sub_re.html?no=4081 }} 베리타스 2009.08.22</ref> 그 뒤 재야인사들과 함께 신민당에 재입당하려 했으나 김영삼 총재는 입당 때 심사하겠다며 사실상 받아들이지 않았고, 재입당을 포기한다.
         김대중은 [[1979년]] [[12·12 군사 반란]] 발생 이후 [[12월 14일]] 아침에 [[강원룡]] 목사와 만났다. 강원룡은 김대중에게 당신 이번에 대통령 할 생각 절대로 하지 마라며 대통령을 김영삼에게 양보할 것을 노골적으로 요구하였다. 그러나 그는 강원룡에게 "이미 끝났다. 강 목사님이 군(軍)이란 세계를 모르고 하는 말씀인데, 군은 통수권자에게 절대 복종한다. 박정희가 (살아) 있을 때는 박정희가 통수권자니까 거기에 충성했지만 이제 박정희는 죽었다. [[장군]]들이 그 다음엔 내가 된다는 걸 잘 알기 때문에 내게 충성하고 들어올 것이다"라며 거절했다고 한다.<ref>[http://shindonga.donga.com/docs/magazine/shin/2004/03/02/200403020500004/200403020500004_6.html 강원용 목사의 체험 한국 현대사 ④] {{웨이백|url=http://shindonga.donga.com/docs/magazine/shin/2004/03/02/200403020500004/200403020500004_6.html |date=20111124050148 }} 신동아 2004년 3월호</ref>
         전두환은 김대중의 형을 감형해주는 대신 자신을 레이건의 취임식에 초청해달라는 제안을 하고 이를 미국이 받아들여<ref>[http://imbbs.imbc.com/view.mbc?list_id=3669954&pre_list_id=3670935&next_list_id=3669928&page=1&bid=focus03 [발췌] DJ 구명운동과 신군부 대미관계 비화] MBC라디오 손석희의 시선집중 2009.08.20</ref> [[1981년]] [[1월 23일]] 국무회의 의결을 통해 김대중 및 그와 연루된 11인에 대한 감형을 실시하게 된다. 정부대변인인 [[이광표]] 문공부장관은 "김대중 등 피고인들이 관련된 이 사건은 구시대정치의 슬픈 유산으로 이제 과거의 악몽을 갖고 제5공화국의 서장을 얼룩지게 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다. 이 문제에 대해 우방 및 국내외 인사들로부터 인도젹 견지에 입각해 관용을 베풀 것을 호소하는 의견이 있었다"라고 감형 배경을 설명했다.<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4010900209110001&edtNo=50&printCount=1&publishDate=1994-01-09&officeId=00020&pageNo=10&printNo=22394&publishType=00010]</ref>정권 차원에서 기회있을 때마다 국민화합을 역설하며 민족적 대단결로 정의로운 복지사회의 건설을 이끌어온 사실을 강조한 전두환의 국민화합과 화해의 80년대를 창출하기 위한 '관용적인 일대영단'으로서 무기징역으로 감형된 김대중을 다시 20년형으로 감형하고 신병치료를 위해 입원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 형집행정지 처분을 해주고 해외여행을 허용키로 한 결과 김대중은 구속된지 2년 7개월 만인 1982년 12월에 미국 망명길에 오른다.<ref name=autogenerated1>[http://www.kdjhall.org/ 김대중 사이버 기념관 연보]</ref><ref>[http://dna.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1012300200101003&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81-01-23&officeId=00020&pageNo=1&printNo=s1&publishType=00030 金大中 無期로減刑 閣議의결] 동아일보 1981.01.23</ref>
         {{인용문|김대중이 전두환에게 보낸 탄원서<br>1차 편지전문<br>대통령각하<br>본인은 광주사태 배후조종혐의 및 국가보안법, 반공법, 내란예비음모, 계엄포고 위반사건 등으로 1, 2심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현재 상고중에 있습니다.<br>본인은 그간 본인의 행동으로 국내외에 물의를 일으켰고 이로 인하여 국가 안보에 누를 끼친 데 대하여, 책임을 통감하며 진심으로 국민앞에 미안하게 생각해 마지않습니다.<br>본인은 앞으로 자중자숙하면서 정치에는 일절 관여하지 아니할 것이며 오직 새시대의 조국의 민주 발전과 국가 발전을 위하여 적극협력 할것을 다짐합니다.<br>본인은 본인과 특히 본인사건에 연루되어 수감중에 있는 사람들에 대하여 전두환 대통령 각하의 특별한 아량과 너그러운 선처가 있으시기를 바라마지않습니다.<br>1981년 1월 18일 金大中<br>김대중 옥중서신 전문<br>全斗煥 大統領 閣下<br>國事에 軫念하신 가운데 閣下의尊體 더욱 健勝하심을 仰祝하나이다.<br>閣下께서도 아시다싶이 本人은 矯導所生活이 二年半에 이르렀아온데 本來의 持病인 股關節變型症과 耳鳴등으로 苦楚를 겪고 있으며 專門醫에 依한 充分한 治療를 받고자 渴望하고 있읍니다.<br>本人은 閣下께서 出國許可만 해주신다면 美國에서 二 三年間 滯留하면서 完全한 治療를 받고자 희망하온데 許可하여 주시면 感謝千萬이겠읍니다.<br>아울러 말씀 드릴 것은 本人은 앞으로 國內外를 莫論하고 一切 政治活動을 하지 않겠으며 一方 國家의 安保와 政治의 安定을 害하는 行爲를 하지 않겠음을 約束드리면서 閣下의 善處를 仰望하옵니다.<br>1982年 12月 13日 金大中<br>(옥중서신) 편지 전문<br>전두환 대통령 각하<br>국사에 전념하신 가운데 각하의 존체 더욱 건승하심을 앙축하나이다.<br>각하께서도 아시다시피 본인은 교도소 재소 생활이 2년반에 이르렀사온데 본래의 지병인 고관절변형, 이명 등으로 고초를 겪고 있으며 전문의에 의한 치료를 받고자 갈망하고 있습니다.<br>본인은 각하께서 출국허가만 해 주신다면 미국에서 2~3년간 체류하면서 완전한 치료를 받고자 희망 하온데 허가하여 주시면 감사천만이겠습니다.<br>아울러 말씀드릴 것은 본인은 앞으로 국내외를 막론하고 일절 정치활동을 하지 않겠으며 일방 국가의 안보와 정치의 안정을 해하는 행위를 하지 않겠음을 약속드리면서 각하의 선처를 앙망하옵니다.<br>1982년 12월 13일 金大中<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1012300329201006&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81-01-23&officeId=00032&pageNo=1&printNo=10866&publishType=00020 김대중 탄원전문] 경향신문 1981.01.23</ref>}}
         김대중의 사형 집행을 막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편지였다.<ref>[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905191754145&code=100203 죽음 앞둔 DJ 구한 '교황의 자비'] 경향신문 2009.05.19</ref> 1980년 [[12월 11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서울 주재 로마 교황청 대사관을 통해 전두환 대통령에게 1차 편지를 발송해 김대중의 선처를 당부했다. 김대중의 형량이 사형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된 직후인 이듬해 [[2월 14일]] 2차 편지를 보내 전 대통령에게 감사의 뜻을 전달했다. [[1983년]]에는 [[1월 31일]]에는 [[뉴스위크]]와의 회견에서 한국 민주화와 인권 상황에 대한 입장 표명을 했고, 미국에서 [[유니언신학대]] 구제위원회 고문, [[국제고문희생자구원위원회]] 고문과 [[하버드 대학교]] 국제문제연구소 객원연구원으로 활동하고,<ref>[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080415010327233180010 DJ부부 訪美… 박지원 前실장 동행] 문화일보 2008.04.15</ref> 재미 한국인권문제연구소를 창설해 미주 지역에서 한국의 민주화에 관심을 기울이다가 [[1985년]] [[2월 8일]]에 귀국하였다.
         [[9월 29일]]에는 김영삼 총재, 김대중 고문 간 후보단일화 회담을 하였으나 이견차이를 좁히지 못하고 결렬되었다. [[9월 30일]] 김대중은 다시 [[대한민국 제13대 대통령 선거|제13대 대통령 선거]] 후보 출마를 김영삼과 야당 후보단일화 협상을 벌였으나 양자간의 시각차이만 확인하고 결렬되었다.<ref>[http://www.kbs.co.kr/end_program/1tv/sisa/image_story/vod/1365900_12449.html 1986년 1987년]{{깨진 링크|url=http://www.kbs.co.kr/end_program/1tv/sisa/image_story/vod/1365900_12449.html }} KBS 영상실록 2005.10.30</ref> 재야 인사들의 통합 요청에도 불구하고 협상이 결렬되자, 이는 [[군사 정권]] 후계자를 놓고 야당 지도자간 분열했다 하여 적전 분열이라는 비판을 초래하였다. [[10월 10일]], 통일민주당을 장악한 김영삼은 대통령 선거 출마를 발표하고 나서자 당내 경선에서 절대적으로 불리한 위치에 놓여있던 김대중은 [[10월 18일]] 통일민주당을 탈당하였다.<ref>eBOOK우정이 있는 민주공화국 (김성호 지음 | 사군자 | 2007-11-16 ) 97</ref> [[11월 12일]]에는 [[평화민주당]]을 창당해 대표 겸 13대 대통령 후보로 선출된 이후 야당 후보였던 김영삼과 후보 단일화를 이루지 못한 채 [[12월 16일]]에 제13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지만, [[노태우]]와 [[김영삼]]에게 밀려 611만 표를 얻고 낙선했다.
         하지만 김대중은 [[12월 18일]]에 [[대한민국 제14대 대통령 선거|치러진 대통령 선거]]에서 800만표를 얻어 190만여표 차이로 낙선하였다. 그는 선거 결과에 승복하며 [[12월 19일]]에 정계 은퇴라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인용문|김대중의 정계은퇴 성명서<br>존경하는 국민 여러분<br>저는 또 다시 국민 여러분의 신임을 얻는데 실패했습니다.<br>저는 이것을 저의 부덕의 소치로 생각하며 패배를 겸허한 심정으로 인정합니다.<br>저는 김영삼 후보의 대통령 당선을 진심으로 축하하는 바입니다.<br>저는 김영삼 총재가 앞으로 이 나라의 대통령으로서 정치, 경제, 사회 모든 분야에서 성공하여<br>국가의 민주적 발전과 조국의 통일에 큰 기여 있기를 바라 마지 않습니다.<br>국민 여러분!<br>저는 오늘로서 국회의원직을 사퇴하고 평범한 한 시민이 되겠습니다.<br>이로써 40년의 파란 많았던 정치 생활에 사실상 종말을 고한다고 생각하니 감개무량한 심정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br>그간 국민 여러분의 막중한 사랑과 성원을 받았습니다. 진심으로 감사합니다.<br>국민 여러분의 하해같은 은혜를 하나도 갚지 못하고 물러나게 된 점 가슴 아프고 송구스럽게 생각합니다.<br>한편 이기택 대표 최고위원 이하 당원 동지 여러분께서는 오랜 세월 동안 저에 대하여 이루 말할 수 없는 협력과 성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br>당원 여러분이 베풀어 준 태산같은 은혜를 무어라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br>앞으로 한 당원으로서 저의 힘 닿는 데까지 당과 동지 여러분의 발전에 미력이나마 헌신 협력할 것을 다짐하는 바입니다.<br>다시 한번 국민 여러분과 당원 동지 여러분들의 건승을 빌면서 가슴 벅찬 심정으로 감사의 인사 말씀을 드리는 바입니다.<br>이제 저는 저에 대한 모든 평가를 역사에 맡기고 조용한 시민생활로 돌아가겠습니다. 국민 여러분과 당원 동지 여러분의 행운을 빕니다.<br>1992년 12월 19일<br>민주당 대선 후보 김대중<ref>[http://dna.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2121900099201005&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92-12-19&officeId=00009&pageNo=1&printNo=8290&publishType=00020 金大中후보 政界은퇴] 매일경제 1992.12.19</ref>}}
         [[1993년]] 1월에 [[영국]]으로 출국하여 [[케임브리지 대학교]] 객원교수로 활동하다가 1993년 7월 귀국, [[1994년]] 12월 아시아·태평양 민주지도자회의(FDL-AP, 통칭 '''아태재단''')를 설립하고, 상임공동의장에 취임했다.<ref name=autogenerated1 /> [[3당 합당]]이라는 태생적 한계와 [[김영삼 정부]]의 철학과 비전의 부족은 은퇴를 선언했던 김대중의 정계복귀를 수월하게 하여, 정계 은퇴를 번복하게 된다.<ref>[http://www.donga.com/docs/magazine/new_donga/9808/nd98080220.html 흥선대원군에서 DJ까지] 신동아 98년 8월호</ref>
         1997년 11월 3일, 국민회의는 [[내각제]] 개헌을 약속하며 [[자민련]]의 총재였던 [[김종필]], [[박태준 (1927년)|박태준]]과 후보 단일화에 합의한다.<ref>[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7/1770584_6187.html 국민회의. 자민련 대선후보 단일화 서명, 김대중 야당후보로] MBC 1997.11.03</ref> [[신한국당]]도 이에 대항해 11월 21일 [[통합민주당 (1995년)|민주당]]과 합당, 당명을 [[한나라당]]으로 개명하였고 [[3김시대]] 청산을 내세우며 민주당의 [[조순]] 후보와 단일화를 이뤄낸다.<ref>[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7/1771238_6187.html [선택 97] 3김 청산 내건 한나라당 공식 출범] MBC 1997.11.21</ref> 이때 [[김원기]], [[노무현]] 등 [[국민통합추진회의]] 소속 8명은 국민회의에 입당하게 된다.<ref>[http://dna.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7111200329102007&editNo=45&printCount=1&publishDate=1997-11-12&officeId=00032&pageNo=2&printNo=16271&publishType=00010 통합추진회의 8명 국민회의 입당키로] 경향신문 1997.11.12</ref> 이후 12월 18일까지 이회창, 김대중, 이인제 3후보간에 치열한 공방전이 계속되었고 TV 토론을 통해 서로간 치열한 대결양상을 보였다. 3후보간의 공방은 갈수록 가열되어, 12월 14일에 열린 대선토론회에서 IMF 책임론에 대해 [[이회창]] 후보와 김대중 후보 간에 치열한 공방이 오고 가기도 했다.<ref>[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7/1772067_6187.html [97년 대선 후보 TV토론회] IMF 책임 공방] MBC 1997.12.14</ref> 결국 [[1997년]] [[12월 18일]], [[대한민국 제15대 대통령 선거]] 개표 결과 김대중 후보가 10,326,275표(40.3%)를 획득해 9,935,718표(38.7%)를 획득한 이회창 후보를 39만여표 차로 간신히 누르고 제15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이때 당시 현직 대통령의 세력(1980년대 김영삼을 중심으로 하는 통일민주당 시절에 국회의원을 시작한 것이 [[이인제]])이었던 충청남도 논산 출신의 [[이인제]]가 경기도지사직을 사퇴하면서 대통령선거에 나서 [[김영삼]] 대통령의 근거지라고 할 수 있는 부산, 경남을 중심으로 하여 4,925,591표(19.2%)를 얻어 김대중 대통령이 당선되는데 결정적인 공헌을 하였다.
         === 취임 1년차(1998년 2월 ~ 1999년 2월) ===
         === 취임 2년차(1999년 2월 ~ 2000년 2월) ===
         1999년 2월, 김대중은 취임 1주년을 맞이했다. 그러나 얼마 뒤, 이른바 '옷로비 사건'으로 위기를 맞이하게 된다.
  • 김동근 (1990년)
         김동근은 [[1990년]] [[1월 4일]] [[경기도]] [[의정부시]]에서 태어나 [[경기도]] [[의정부시]]에 있는 [[의정부고등학교]]를 다녔다. [[2008년]] [[2월]] [[의정부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그해 [[3월]] [[경희대학교]] 음대 실용음악작곡과로 진학하였다. [[2009년]] 경희대 음대 2학년 재학 중 휴학하였다. [[2015년]] 경희대 4학년 재학 중이다.
         [[2013년]] [[1월]] [[제천여성도서관]]의 남성 차별에 대해 항의하였다. [[서울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당시 김동근 남성연대 홍보팀장은 “세금으로 지어진 공공시설에 남성이 출입하지 못한다는 것은 있어서는 안 될 일”이라면서 “시정될 때까지 문제를 제기할 방침”이라고 경고했다. 하지만 시는 도서관 부지 기증자와의 약속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며 이를 수용할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ref>[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130104012010 제천여성도서관 성차별 논란] 서울신문 2013년 01월 04일자</ref> 그해 [[1월]] [[남성연대]] 홍보팀장, [[2013년]] [[2월]] 기획팀장을 역임했다. [[2월 26일]]에는 [[서울특별시청]]을 방문하여 [[박원순]] 서울특별시장을 면담, 여성아파트가 양성평등에 위배된다는 것을 지적하였다. 또한 근로청소년 임대아파트(여성근로자만 입주가능), 여성전용 임대아파트, 여대생기숙사 등은 남학생, 남자 근로자를 배려하지 않는 정책이라며 항의하였다. [[2013년]] [[3월]] 사무국장인 [[김인석 (1983년)|김인석]] 등과 함께 [[대한민국 여성가족부|여성부]]에 전화하여 여성 가산점 등은 남성을 차별하는 역차별 정책이라 항의하였다. 이어 보건복지부에도 전화하여 여성 가산점이 부당한 특혜라고 주장하였다.
         성재기 사후 장례식 수습에 참여하였으며 [[7월 29일]]부터 남성연대 비상대책위원의 한 사람이었다. 이후 비대위에서 한승오, 이지훈 등이 제명되면서 김인석 등과 함께 성재기 사고사 이후 혼란을 수습하였다. 그해 9월 초, [[김인석 (1983년)|김인석]]과 함께 [[남성연대]]의 사무국 직원이 되었다.<ref>[http://view.asiae.co.kr/news/view.htm?idxno=2013091708425273184 성재기 투신 후 남성연대는 지금?] 아시아투데이 2013.09.16</ref> [[9월 16일]] 남성연대 비대위가 해산되면서 남성연대 대변인을 맡다가 [[11월 12일]] [[김인석 (1983년)|김인석]]과 공동대표로 선출되었다. 이후 싱글대디 김장김치를 마련하여 전달하였고, [[12월 24일]]에는 [[서울특별시]] 신촌 시내 신촌 현대백화점 (유플렉스 앞)에서 더치페이, 성격차지수 111위 발표자료를 주제로 김인석과 함께 1인 시위를 하였다.
         [[12월]] 김인석과 남성연대 회원들과 함께 여성부를 방문했지만 입구에서 거절당했다. [[2013년]] [[12월 26일]]과 [[12월 27일]] [[여성가족부]] 청사 앞에서 김인석 외 10명과 함께 여성부 폐지시위를 벌였다. [[2014년]] 김인석 공동대표 사임 후 단독체제로 돌입하여 단독대표로 활동하게되었다.
         [[2013년]] [[12월]] [[김인석 (1983년)|김인석]] 등과 함께 [[서울특별시|서울시]]내 각 대학교 학생들을 [[남성연대]] 사무실로 초청하여 면담, 여성의 병역 의무에 대한 취지를 설명, 설득하였다.
         [[2014년]] [[2월 3일]] 남성연대 김동근 공동대표는 집회 시작 전 [[대한민국 여성가족부|여성가족부]]를 규탄하는 내용의 판넬을 들고 [[침묵 기도|침묵시위]]를 하였다.<ref name="kyotts"/> [[2월 4일]] [[김인석 (1983년)|김인석]] 등과 함께 [[서울 종로구]]에 위치한 청계 일레븐 빌딩 (여성가족부 청사 앞)에서 “여성가족부가 대국민 사기극을 그만둬야 한다”며 집회를 열었다.<ref name="kaustsa"/> 4일 오후 5시 서울 종로구 서린동 청계일레븐 빌딩 앞에서 여성가족부를 규탄하는 집회를 열었다. 이날 현장에는 [[남성연대]] 운영진 5명과 지지자 3명이 참여했다. 이들은 '남성연대, 조국 가족 균형을 말합니다'라고 적힌 플래카드를 도로 옆 [[가로수]]에 내걸었다.<ref name="kyotts"/> 이때 김동근은 선언문을 낭독했다. 그는 김인석 등과 함께, [[대한민국 여성가족부|여성가족부]]가 [[대한민국]] [[성평등 지수]]가 세계 111위라는 세계경제포럼(WEF) 자료를 인용한 것을 규탄, 여성 차별과 명예살인을 하는 [[아프리카]], [[아랍]]권 국가보다 한국 여성의 권리, 권한 척도가 낮다는 주장을 반박했다. 이어 여성단체들이 [[여성부]], 국회 여성위를 변호하며 여러 공직에 여성 정치인, 여성 공무원 수가 적으므로 [[여성 권한 척도]]가 낮은 것이라 주장하자, 억지라며 이를 반박했다.
         [[2월 13일]] 문체부에서 아빠힘내세요 노래도 성차별이라는 권고조치가 있자 오후 4시부터 [[세종특별자치시|세종시]] [[문화체육관광부]] 앞에서 김인석 및 남성연대 회원들과 규탄집회를 진행하였다.<ref>[http://www.mt.co.kr/view/mtview.php?type=1&no=2014021214383312803&outlink=1 남성연대 "문화부 앞에서 '아빠 힘내세요' 합창'할 것"…왜?] 머니투데이 2014.02.12</ref> [[3월 11일]] 공동대표 김인석의 돌연 사퇴로 단독대표로 재선임되었다.
         [[2014년]] [[2월 27일]] [[헌법재판소]]는 병역법 ‘대한민국 국민은 남성은 헌법과 이 법에서 정하는 바에 따라 병역의무를 성실히 수행하여야 한다’는 조항(3조 1항)에 대해 재판관 전원일치로 합헌 결정을 내렸다.<ref name="ghonj">[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629285.html ‘남성 의무병역 합헌’…남성주의·여성주의 모두 비판] 한겨레신문 2014.03.21</ref> 헌재는 ‘성별’을 기준으로 병역의무자의 범위를 정하는 것이 “남성이 전투에 적합한 신체적 능력”을 갖추고 있으며 “여성은 신체적 능력이 뛰어나더라도 [[월경]], [[임신]]이나 [[출산]], 양육의 필요성 때문에 군사훈련 자체가 거의 불가능하다”고 밝혔다. [[대체복무]]를 두고도 [[헌법재판소|헌재]]는“[[보충역]]이나 [[제2국민역]]이 평시에 군인으로서 복무하지 않는다고 해서 [[병력]]자원으로서 일정한 신체적 능력 또는 조건이 요구되지 않는다고 볼 수 없다”고 설명했다. 또한 “군대 내부의 상명하복의 권력관계를 이용한 성희롱 등의 범죄나 남녀 간의 성적 긴장 관계에서 발생하는 기강 해이가 발생할 우려가 있다”고 덧붙였다.<ref name="ghonj"/> 또한 대체복무조차 신체적 이유 때문에 안 된다는 것은 헌재가 남성중심적인 관점에서 우리나라 여성을 무시하고 있다는 뜻밖에 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ref name="ghonj"/>
         * [[2008년]] [[2월]] [[의정부고등학교]](32회) 졸업
         [[2013년]] [[12월]] 김인석 등과 함께 [[서울특별시|서울시]]내 각 대학교 학생들을 [[남성연대]] 사무실로 초청하여 면담, 여성의 병역 의무에 대한 취지를 설명, 설득하였다.
         [[2014년]] [[2월 3일]]에는 [[대한민국 여성가족부|여성가족부]]를 규탄하는 내용의 판넬을 들고 [[침묵 기도|침묵시위]]를 하였다. [[2월 4일]] 김인석 등과 함께 여성가족부 청사 앞에서 "여성가족부가 대국민 사기극을 그만둬야 한다"며 집회를 열었다.<ref name="kaustsa">[http://www.newsfinder.co.kr/news/article.html?no=23487 남성연대 "여성가족부는 대국민 사기극 멈춰야"] 뉴스파인더 2014.02.07</ref> 4일 오후 5시 서울 종로구 서린동 청계일레븐 빌딩 앞에서 여성가족부를 규탄하는 집회를 열었다. 이날 현장에는 [[남성연대]] 운영진 5명과 지지자 3명이 참여했다. 이들은 '남성연대, 조국 가족 균형을 말합니다'라고 적힌 플래카드를 도로 옆 [[가로수]]에 내걸었다. 이때 김동근은 선언문을 낭독했다. 그는 김인석 등과 함께, [[대한민국 여성가족부|여성가족부]]가 [[대한민국]] 성평등 지수가 세계 111위라는 세계경제포럼(WEF) 자료를 인용한 것을 규탄, 여성 차별과 명예살인을 하는 [[아프리카]], [[아랍]]권 국가보다 한국 여성의 권리, 권한 척도가 낮다는 주장을 반박했다. 이어 여성단체들이 [[여성부]], 국회 여성위를 변호하며 여러 공직에 여성 정치인, 여성 공무원 수가 적으므로 [[여성 권한 척도]]가 낮은 것이라 주장하자, 억지라며 이를 반박했다.
         [[2월 13일]] 오후 4시부터 [[세종특별자치시|세종시]] [[문화체육관광부]] 앞에서 김인석 및 남성연대 회원들과 '아빠 힘내세요' 부르기 집회를 진행하였다.<ref>[http://www.mt.co.kr/view/mtview.php?type=1&no=2014021214383312803&outlink=1 남성연대 "문화부 앞에서 '아빠 힘내세요' 합창'할 것"…왜?] 머니투데이 2014.02.12</ref> [[3월 11일]] 공동대표 김인석의 돌연 사퇴로 단독대표로 재선임되었다.
  • 김동원 (1985년)
         [[2014년]] [[2월]] [[대마초]]를 피운 혐의로 기소됐다. 그는 [[2010년]] 부터 [[2012년]] 까지 주한미군 사병이 군사우편으로 밀반입한 [[대마초]] 가운데 일부를 지인에게서 건네받아 4차례 피운 혐의를 받았다. 이 사건으로 1심 재판에서 징역 8월에 집행유예 2년과 함께 약물치료 강의 수강 명령을 받았다.<ref>{{뉴스 인용|url=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20&aid=0003032662|제목=김승연 회장 셋째 아들 김동선 술집 난동, 한화家 사건사고 보니…보복폭행·대마초까지|이름=|날짜=2017-01-05|출판사=동아일보}}</ref>
  • 김병관
         '''김병관'''(金炳琯, [[경성부]], [[1934년]] [[7월 24일]] ~ [[2008년]] [[2월 25일]])은 [[대한민국]]의 [[언론인]]이자 [[기업인]]이다. [[대한민국]] 제2대 [[대한민국의 부통령|부통령]]이자 언론인인 [[김성수 (1891년)|김성수]]의 장손이다.
         가슴 깊이 취기가 젖어들면 화정 김병관(化汀 金炳琯) 선생은 구슬프게 ‘흥타령’을 불러젖혔다.<ref name="sindong01"/> 중앙고와 고려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1968년 동아일보에 입사해 33년간 신문 경영의 일선에서 일했다.<ref name="bk01">[http://www.segye.com/Articles/NEWS/CULTURE/Article.asp?aid=20080225002353&subctg1=&subctg2= 김병관 前 동아일보 회장 별세] 세계일보 2008년 02월 26일자</ref>
         1999년 고려대와 중앙중고교, 고려중고교 재단인 고려중앙학원 이사장으로 취임했고, [[2001년]] [[2월]] 사장 [[오명]]에게 [[동아일보]] 회장직을 물려주고 명예회장에 취임하였으나 정부의 세무조사가 시작되자 사퇴하였다.
  • 김병관 (신문인)
         '''김병관'''(金炳琯, [[경성부]], [[1934년]] [[7월 24일]] ~ [[2008년]] [[2월 25일]])은 [[대한민국]]의 [[언론인]]이자 [[기업인]]이다. [[대한민국]] 제2대 [[대한민국의 부통령|부통령]]이자 언론인인의 장손이다.
         가슴 깊이 취기가 젖어들면 화정 김병관(化汀 金炳琯) 선생은 구슬프게 ‘흥타령’을 불러젖혔다.<ref name="sindong01"/> 중앙고와 고려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1968년 동아일보에 입사해 33년간 신문 경영의 일선에서 일했다.<ref name="bk01">[http://www.segye.com/Articles/NEWS/CULTURE/Article.asp?aid=20080225002353&subctg1=&subctg2= 김병관 前 동아일보 회장 별세] 세계일보 2008년 02월 26일자</ref>
         1999년 고려대와 중앙중고교, 고려중고교 재단인 고려중앙학원 이사장으로 취임했고, [[2001년]] [[2월]] 사장 오명에게 [[동아일보]] 회장직을 물려주고 명예회장에 취임하였으나 정부의 세무조사가 시작되자 사퇴하였다.
  • 김상훈 (1963년)
         * [[2006년]] [[6월]] ~ [[2007년]] [[12월]] : 대구시청 경제산업국장
         * [[2009년]] ~ [[2011년]] [[12월]] : 대구시청 경제통상국장
         * [[2014년]] [[6월]] ~ [[2015년]] [[2월]] : 제19대 국회 후반기 국회운영위원회 위원
         * [[2016년]] [[5월]] ~ [[2017년]] [[2월]] : [[새누리당]] 정책위원회 수석부의장
         * [[2017년]] [[2월]] ~ : [[자유한국당]] 정책위원회 수석부의장
  • 김성환 (1953년)
         * [[2017년]] 12월 ~ : 안민정책포럼 고문
         |임기 = [[2006년]] [[2월]] ~ [[2008년]] [[3월]]
         |임기 = [[2008년]] [[2월 29일]] ~ [[2008년]] [[6월 30일]]
  • 김숙자 (1389년)
         [[1435년]](세종 17) [[9월]]에 한성으로 돌아가 그해 [[10월]] 성균관학록에 복직했으며<ref name="ginyon"/>, [[12월]]에 학정(學正)으로 승진하고, 또 통사랑(通仕郞)으로 다시 승진,[[성균관]]진덕박사 겸 [[양현고]]녹사(成均館進德博士兼養賢庫錄事)에 임명되었다. [[1436년]]에 경명행수(經明行修)의 선비 추천에서 첫 번째로 꼽혀 세자우정자(世子右正字)가 되었다. 그러나 얼마 후 선산의 교수관으로 나갔다가 개령현감이 되었다. [[9월]] [[무공랑]] [[성균관]]박사겸 [[양현고]]승이 되었다. [[1437년]] [[12월]] [[선무랑]]에 배사하고 [[선공감]]주부에 임명되었으며, 이듬해 [[2월]] [[예빈시]]주부, [[6월]] [[내자시]]주부 등을 역임했다.
         [[1440년]](세종 22) [[선교랑]], 1441년(세종 23) [[1월]] 김해교수관 노호(盧浩)와 보직상환 변경되어 [[김해]]로 내려갔다. 이듬해 2월 남부령(南部令)이 되었다가 특별히 동반직을 받아 승의교위(承義校尉)에 제수되고,중군섭부사직 겸 성균관주부(中軍攝副司直兼成均注簿),남학교수관(南學校授官)이 되었다가 그해 11월 승훈랑(承訓郞)이 되어 고령현감(高靈縣監)으로 나갔다. [[1445년]] [[2월]] 승의랑이 되었다가, 지방의 수령들의 직급을 1계급씩 강하한다는 명에 따라 강임되었다. [[1447년]](세종 29) 10월 다시 승의랑으로 환급되고, 11월에 [[성균관]]주부 겸 남학교수관, [[1448년]] [[7월]] [[교서관]]교리가 되었다가 한달만에 전제경차관(田制敬差官)에 임명되어 [[전라도]] [[남원]], [[옥과]], [[장흥]], [[순천]], [[장흥]] 등을 순시하고 그해 [[10월]]에 봉훈랑으로 승진한 뒤, 12월에 도성으로 되돌아왔다.<ref name="ginyon"/> [[1450년]](문종 즉위) [[8월 13일]] 지풍기군사(知豊基郡事)로 발령, 부임하였다.
         [[1453년]](단종 원년) [[12월]] [[사재감]]부정, 54년 2월 성균관사예(司藝)를 거쳐 8월 봉렬대부로 승진하여 성주교수관이 되어 내려왔다. 그해 12월 봉정대부(奉正大夫)로 승진, 중훈대부(中訓大夫)로 승진되었으나, [[1455년]] [[12월]] 사직하고 [[1456년]] 처가가 있는 [[밀양]]으로 내려가서 그 해 [[3월 2일]]에 [[밀양군]] 대동리 정침에서 죽었다. [[1455년]](세조 1년) [[12월 12일]] [[세조반정]]에 참여하거나 기여한 관료들을 [[좌익공신|좌익]][[원종공신]]으로 포상할 때 [[좌익공신|좌익]][[원종공신]] 3등에 책록되었다. 16세기에 사림에 의해 확립된 도통(道統)의 계보에서 길재의 학문을 아들 [[김종직]](金宗直)으로 하여금 잇게 하였고 [[성리학]]의 계보 중, [[정주학]](程朱學)을 발전시켰다.
         아들 김종직이 쓴 선공기년 제2편에 의하면 집안이 빈한하여 부득이 3월장으로 치뤘고, 그해 [[12월]]에 자신의 외조모 민씨의 묘소 서쪽에 장례를 치뤘다 한다.
  • 김신 (1957년 3월)
         * [[2004년]] [[2월]] 부산지방법원 동부지원 부장판사
         * [[2006년]] [[2월]] 부산고등법원 부장판사
         * [[2010년]] [[2월]] 부산지방법원 수석부장판사
         * [[2012년]] [[2월]] 울산지방법원장
  • 김양 (1953년)
          | 임기 = [[2008년]] [[2월 29일]] ~ [[2011년]] [[2월 23일]]
         '''김양'''(金揚, [[1953년]] [[2월 24일]] ~ )은 관료를 지낸 [[대한민국]]의 금융인이다.
         * [[2008년]] [[3월 8일]] ~ [[2011년]] [[2월 23일]] : 국가보훈처 처장
         * [[2013년 2월]] ~ [[2013년 8월]] : [[국방대학교|대한민국 국방대]] 객원교수
         * 증조부 : 김순영 (金淳永, [[1848년]]~ [[1901년]] [[2월]])
         * 증조모 : 곽낙원 (郭樂園, [[1859년]] [[2월 26일]] ~ [[1939년]] [[4월 26일]])
         * 어머니 : 임윤연(林胤嬿, <small>아명(兒名): 林胤燕</small>, [[1929년]] ~ [[1971년]] [[12월 11일]], [[위암]]으로 사망)
         * 사돈 : [[김승연]](金升淵, [[1952년]] [[2월 7일]] ~ ), [[한화 그룹]] 회장
         |임기 = [[2008년]] [[2월 29일]] ~ [[2011년]] [[2월 23일]]
  • 김온순 (1812년)
         [[1812년]]에 태어났으며 김이의(金履禕)의 아들이었으나 [[현감]](縣監)을 지낸 김이회(金履會)의 양자가 되었다. 김온순의 양아버지 김이회는 사후에 [[증직|증]] [[이조]][[참의]]에 [[증직]]되었지만, 양자 김온순의 출세로 다시 [[증직|증]] [[이조]][[참판]]. [[이조판서]]에 거듭 [[추증]]되었다. [[음서 제도|음서]]로 출사하여 [[1848년]] [[12월]] 명능참봉(明陵參奉)이 되었으나 [[1849년]] 상을 당하여 사퇴하였다.
         [[1852년]] [[6월]] 헌릉참봉(獻陵參奉), [[12월]] [[사옹원]]봉사를 지냈다. [[1853년]] [[12월]] [[예빈시]][[직장]]과 [[사옹원]][[직장]], [[1855년]] [[6월]] [[장원서]][[별제]], [[한성부]][[주부]]가 되었다가 [[7월]]에 다시 상을 당하여 사퇴하였다. [[1857년]] [[12월]] 빈전도감의 낭청으로 참여하여 특별히 승진서용되었으며, [[1859년]] [[12월]] [[빙고]]별제가 되었다.
         [[1866년]] [[2월]] [[조선 고종|고종]]의 왕비 간택 때 그의 딸 중 한명도 간택대상자에 해당되었으나 그는 병을 이유로 [[예조]]를 통해 간택에 불참하였다. [[1866년]] [[6월]] 선정으로 별천되기도 했다. 그해 [[6월 18일]] 선치를 베푼 지방관들을 포상할 때 활과 화살과 통개(筒箇)를 [[조선 고종|고종]]에게 선물로 하사받았다.
         [[1872년]] [[7월 16일]] 해주판관(海州判官)이 되었다가 다시 [[해주]][[군수]]가 되었다. [[1874년]] [[7월 12일]] [[밀양]][[부사]](密陽府使)를 거쳐 [[11월]] [[수운]][[판관]]으로 내직으로 돌아왔다. [[11월 13일]]에는 황해도 암행어사(黃海道暗行御史) 조병필(趙秉弼)이 그가 해주판관으로 있을 때 군호(軍戶)가 고르게 보급되었다고 치적을 보고하여 특별히 [[통훈대부]]로 승진하였다. [[11월 27일]] [[수원부]] [[판관]]으로 부임하였다. 이후 [[1875년]] [[9월]] 부모의 병으로 사직을 청하는 임실 현감(任實縣監) 민두호(閔斗鎬)를 배려하여 [[대한제국 고종|고종]]은 특별히 임실현감 민두호를 수원부판관으로 임명하고 김온순을 [[임실]][[군수]]로 임명해 내려보냈다. [[1876년]] [[12월]] [[진주]][[목사]]로 부임하였다.
         [[1884년]] [[5월]] [[지의금부사]]가 되었다. 그해 [[12월]]의 [[갑신정변]] 사건으로 사직소를 올리고 지방으로 내려가 있었다. [[1885년]] [[5월 29일]] [[동지의금부사]]가 되고 그날 다시 [[지의금부사]]가 됐다. 그러나 병으로 지방에 내려가 있었으므로 [[의금부]] 회의에 소집할 수 없었다.
         [[1892년]] [[2월]] [[판의금부사]]가 되었다. [[1892년]] [[5월 22일]] [[내금위]][[대호군]]이 되고, 대호군 재직 중 그해 [[11월 5일]] 전직 [[승정원]][[승지]] [[김병억]](金炳億)의 할아버지라는 이유로 특별히 [[숭정대부]](崇政大夫)로 승진, 그날 [[상호군]]에 임명되었다. [[1893년]] [[2월 19일]] 다시 판의금부사가 제수되었다. 최종 관직은 [[보국숭록대부]]에 이르렀다.
  • 김완섭
         [[1980년]] [[5월]] [[5·18 광주 민주화 운동|광주 민주화 운동]] 당시 시민군으로 민주화 운동에 참가했다. 당시 정부 계엄군은 김완섭이 나이가 어리고 계엄군에게 적극적으로 대적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에게 총격을 가하지는 않았다.<ref name="서울대1">[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143&aid=0000015716 <nowiki>[</nowiki>김완섭을 만나다 2<nowiki>]</nowiki> "나를 아는자,나를 욕하라!"] 국민일보 2006년 2월 24일자</ref>
         명성황후의 후손인 [[여흥 민씨|민씨]] 종친회는 [[2002년]] 초 그를 [[대한민국 검찰청|검찰]]에 고소했다.<ref name="명비1"/> [[8월 14일]] 서울지검 형사9부(신남규·辛南奎 부장검사)는 지난달 인터넷 사이트에 일본에 의한 명성황후 시해를 옹호하고 명성황후를 비방한 혐의(사자에 대한 명예훼손)로 그를 불구속 기소했다.<ref name="명비1"/> [[2003년]] [[2월]] 명성황후(明成皇后)의 명예를 훼손한 혐의로 벌금 700만원을 선고<ref name="kimk1">[http://news.donga.com/3/all/20040727/8088232/1 ‘김구선생 명예훼손’ 작가 김완섭씨 기소] 동아일보 2004년 7월 27일자</ref> 받았다.
         또한 [[2006년]] [[2월]] 김완섭은 독립운동가 김좌진을 산적떼 두목이라고 모욕한 혐의로 [[국회의원]] [[김을동]]으로부터 명예 훼손으로 불구속 기소되었고, 아울러 김을동은 부친, 조부의 사자 명예 훼손 부분 관련해서도 추가 고소할 것을 밝혔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143&aid=0000015820 “임수경은 돼도 김완섭은 안돼”…검찰,독도망언 악플 고소사건 수사 착수] 국민일보 쿠키뉴스 2006년 2월 26일</ref><ref>[http://minihp.cyworld.com/40620509/212638986 김완섭 허위 사실 반론], 《[[김을동]]》[[미니홈피]] [[인용]]</ref><ref name="ghan1">[http://economy.hankooki.com/lpage/opinion/200602/e2006022816200348090.htm 서울경제 : [기고] '3·1정신' 부활시키자] {{웨이백|url=http://economy.hankooki.com/lpage/opinion/200602/e2006022816200348090.htm# |date=20111123170401 }} 서울경제신문 2006년 2월 29일</ref> 본 고소에 대해 검찰은 "사회 상규에 위배되지 않는 행위는 처벌하지 않는다’는 형법 20조 정당 행위 규정에 따라 위법성이 조각된다"며 불기소 처분을 내렸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22&aid=0000165260] 친일 글 반발 ''악플'' 네티즌 1000여 명 검찰 "죄 안된다".</ref>
         * 《친일파를 위한 변명》, 김완섭, 2002년 2월 20일, 춘추사
  • 김장생
         [[송익필]]의 문하에서 수업할 때 행동이 무게가 있고 말이나 웃음을 함부로 하지 않으니 [[송익필]]은 그가 제자임에도 눈여겨봤고, 그를 제자임에도 함부로 대하지 않고 깍듯이 대우하였다. 김장생은 과거에 뜻을 두지는 않았으나, 학문에 대한 열의와 정성이 남달랐다. 이를 본 식자들은 장차 덕성을 갖춘 큰 인물이 될 것이라 말했다. [[1561년]](명종 16년)에 김장생은 [[지례면|지례현감]]으로 부임하는 할아버지 김호를 따라 [[경상도]] [[지례]](知禮<ref>경상북도에 있던 지역으로 김천군에 편입되었다.</ref>)로 갔으나, 그 해 [[12월]] 지례현감으로 있던 할아버지 김호가 사망했다. 이에 김장생은 고향인 [[연산군]]으로 돌아가 아버지 [[김계휘]]와 함께 연산에서 3년 상(三年喪)을 치렀다. [[1564년]](명종 19년)에 아버지 [[김계휘]]가 복직되자 [[한성부]]의 집으로 되돌아왔다.
         과거를 거치지 않고 늦은 나이에 벼슬을 시작하였으나 후일 관직은 [[가의대부]] 행[[용양위]]부호군에 이르렀다. 이 때 김장생 천거의 이유는 “성경(聖經)에 깊이 몰입하고 사색하여 옛 교훈을 독실하게 믿는다”는 것이었다. 이조(吏曹)가 이처럼 천거하자, [[조선 선조|선조]]가 [[의정부]][[영의정]] [[홍섬]](洪暹), [[의정부]][[좌의정]] [[노수신]](盧守愼)과 상의하게 했는데 모두 동의하였다. [[1578년]] [[12월]] 학행과 문장력으로 [[조선 예종|예종]]능인 [[창릉]][[참봉]](昌陵參奉)이 되었다. 이어 [[돈녕부]][[참봉]]. [[순릉]][[참봉]]이 되었다.
         [[1596年]](선조 29) 정산현감이 되었다가 사퇴하고 한 때 고향인 [[충남]] 향사(鄕舍)로 돌아왔는데 그해 [[12월]]에 호조정랑에 임명되었다. [[1597년]](선조 30년) [[정유재란]]이 다시 터지자 호남에서 군량을 조달하라는 명을 받고 [[전라도]]로 파견되어 이를 수행하였다. [[명나라]] 군대를 위한 군량 조달문제가 심각했는데, 그 해 겨울 일을 마치고 복명했다.
         이후 단양군수, 양근군수와 첨정(僉正), 익위(翊衛)의 관직이 거듭 내려졌으나 부임하지 않았다.<ref name="munwon">[http://www.bloter.co.kr/bbs/board.php?bo_table=sunghyun&wr_id=35&page=0 문원공 김장생]{{깨진 링크|url=http://www.bloter.co.kr/bbs/board.php?bo_table=sunghyun&wr_id=35&page=0 }}</ref> [[1597년]] 봄 호남 지방에서 군량을 모으라는 명을 받고 이를 행해 군자감첨정(軍資監僉正)이 되었다가 곧 안성군수가 되었다. 호남에서 조달하도록 임무를 부여하니, 이 일을 완수하고 그해 겨울 [[황해도]]로 돌아와 문생과 함께 강송을 하던 중 12월에 단양군수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나가지 않았다. [[임진왜란]]이 종결된 뒤 다시 우계 [[성혼]]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나 [[1598년]] 성혼마저 별세한다.
         [[1598년]] [[9월]]에 남양부사에 제수되었으나 부임치 않았고, [[1599년]](선조 32) [[1월]]에 양근군수, [[2월]] 익위사 익위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취임치 않았다. 그러나 그해 다시 [[군자감]][[첨정]]에 제수되어 그를 부르자, 사양하지 못하고 부임하였다. [[1599년]](선조 32) 6월에 안성군수가 되었고 그해 [[9월]]에 가례집람(家禮輯覽)을 완성하였다. 경기도는 난리를 겪은 지가 얼마 안 되어 백성이 피폐했는데, 김장생이 마음을 다해 다스리니 수년도 안되어 거의 복구되었다. 이런 김장생을 추모하기 위해 1664년(현종5)에는 안성(安城) 안성 유림들의 공의로 특별히 김장생 등을 모신 도기서원(道基書院)이 건립되기도 했다. 이후 그는 지방관을 자원하여 단양군수, 남양부사(南陽府使), 양근군수(楊根郡守) 등을 지냈다.
         1625년(인조3) 1월에는 행용양위 부사직(行龍驤衛副司直)에, 2월에는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임명되었다. 왕명으로 원자를 가르친 것에 대한 예우로 특별히 2품관에 임명한 것이다. 김장생은 왕명으로 부를 때에는 어기지 않고 나갔지만 오래 머물지 않고 향리 연산으로 돌아와 학문에 힘썼다.
  • 김정렬 (1917년)
          | 서훈 내역 =1951년 2월 및 1956년 12월 미국 수공훈장<br />1951년 10월 [[태극무공훈장]]<br />1954년 10월 [[을지무공훈장]]<br />1956년 4월 [[충무무공훈장]]<br />1963년 12월 수교훈장 흥인지<br />1987년 7월 수교훈장 광화대장<br />1992년 9월 1일 국민훈장 무궁화장
         1940년 일본예과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다시 일본 육군항공사관학교 54기로 편입, [[1941년]] 3월 일본 육군항공사관학교를 졸업했다. [[일본제국 육군]] 항공대 소속 조종사로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였으며 [[1941년]] [[12월]] 항공 중위로 [[필리핀]] 공략 작전에 참여하였다. 일본 육군의 비행중대장 및 비행전대장으로 보임되었다.
         [[1987년]] [[대한민국의 국무총리|국무총리 서리]]가 되고 그해 [[7월]] [[대한민국의 국무총리|국무총리]]가 되었다. 취임 직후 직접 개각을 단행하고 [[6.10 항쟁]] 이후 혼란한 정국을 수습하려 했으나 실패하였고, 그 해의 대통령 선거를 관리하였다. [[1988년]] [[2월]]에 물러났다.
         [[1988년]] [[2월]] [[노태우]] [[대통령]] 취임과 동시에 [[국정자문회의]] 자문위원에 위촉되어 [[1991년]]까지 재직하였다. 그는 오랜 [[군인]]생활 및 [[공직]]생활로 [[을지무공훈장]]·[[충무무공훈장]]·[[태극무공훈장]]·[[수교훈장광화장]]과 [[미국]]의 [[리전오브메리트]] 훈장 등을 수여받았다. [[1989년]] [[한일협력위원회]](韓日協力委員會) 위원장이 되었다.
         |임기 = [[1987년]] [[8월 7일]] ~ [[1988년]] [[2월 24일]]
         |임기 = [[1954년]] [[12월 1일]] ~ [[1956년]] [[12월 1일]]
         |임기 = [[1963년]] [[2월 26일]] ~ [[1963년]] [[4월 22일]]
  • 김정렴
         |임기 = [[1969년]] [[10월 21일]] ~ [[1978년]] [[12월 22일]]
         [[1946년]] [[한국은행]]의 전신인 [[조선은행]]에 입행하였다. 그 후 [[한국은행]] 조사부 차장과 [[대한민국 기획재정부|재무부]] 이재국장을 거쳐 [[1966년]] [[대한민국의 기획재정부 장관|재무부 장관]], [[1967년]] [[대한민국의 지식경제부 장관|상공부 장관]], [[1969년]] [[10월]]부터 [[1978년]] [[12월]]까지 [[대한민국의 대통령비서실장|대통령 비서실장]]을 지냈고 그 후 [[1979년]] [[2월|1월]]부터 [[1980년]] [[9월|89월]]까지 [[일본]] 주재 [[대한민국]] 대사를 역임하였다. 화폐 개혁, [[새마을 운동]], 산림 녹화 등에 직접 관여하기도 하였다.
         |임기 = [[1969년]] [[10월 21일]] ~ [[1978년]] [[12월 22일]]
  • 김질 (1422년)
         |사망일 = [[1478년]] [[2월 24일]] (향년 57세)
         '''김질'''(金礩, [[1422년]] ~ [[1478년]] [[2월 24일]])은 [[조선]]시대 전기의 무신, 문신, 정치인이다. [[사육신]]과 함께 [[단종 복위 운동]]에 참여했으나 실패를 예상하고 이를 고변하였다. 자(字)는 가안(可安), 호는 쌍곡(雙谷), 시호는 '''문정'''(文靖). 본관은 [[구 안동 김씨|(구) 안동]]이다.
         그해 [[집현전]] [[수찬]]에 뽑혔고, 병조 좌랑(兵曹佐郞)이 되었다가 [[1452년]](문종 2) [[2월]] 정기인사 때 승의랑(承議郞) [[사간원]] [[우정언]](司諫院右正言) 등을 지냈다. 그 무렵 그는 [[성삼문]], [[최항]], [[신숙주]] 등과 함께 문종의 각별한 지우와 총애를 받았다.
         그해 [[2월]] 헌납(獻納) 조원희(趙元禧)가 관직 제수의 형평성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면서 승의랑(承議郞)인데도 우정언에 임명된 것을 문제삼기도 했다.<ref>문종실록 12권, 문종 2년(1452 임신 / 명 경태(景泰) 3년) 2월 7일(신미) 4번째기사 "헌납 조원희가 이숭지·윤서 등에게 임의로 관직을 제수한 이조를 국문토록 청하다"</ref> 그러나 왕이 무마시켰다. 그러나 [[조원희]]의 계속된 탄핵으로 체직되었다.<ref>문종실록 12권, 문종 2년(1452 임신 / 명 경태(景泰) 3년) 2월 12일(병자) 2번째기사 "헌납 조원희가 윤잠과 김질을 탄핵하기를 청하다"</ref>
         그해 [[12월]] [[좌익공신|좌익]][[원종공신]](佐翼原從功臣) 2등에 책록되었다.<ref>세조실록 2권, 세조 1년(1455 을해 / 명 경태(景泰) 6년) 12월 27일(무진) 3번째기사 "의정부에 전지하여 연창위 안맹담 등을 원종 공신에 녹훈하다"</ref>
         그러나 그가 중간에 [[사육신]]의 고변을 밀고한 점을 들어 여러 신하가, 김질이 함께 모반하였는데 성패를 관망하다가 일이 이루어지지 못하게 되어서야 고한 것이라 하여 주살하기를 청하였으나, 세조는 듣지 않고 그를 신뢰하였다.<ref name="seong09">성종실록, 성종 9년 무술(1478, 성화 14) 2월 24일(정사) "상락 부원군 김질의 졸기"</ref>
         [[1456년]] [[10월]] [[승정원]] 동부승지가 되고 [[11월]] 함길도 관찰사(咸吉道觀察使) 이인손(李仁孫)·병조 판서(兵曹判書) 홍달손(洪達孫)·좌승지(文承旨) 조석문(曹錫文)·좌부승지(左副承旨) 한계미(韓繼美)·우부승지(右副承旨) 권지(權摯)·판통례문사(判通禮門事) 이극배(李克培)를 명소(命召)하여 속로 첩목아(速魯帖木兒)와 마흥귀(馬興貴) 등이 서로 싸워서 소란을 일으킨 일에 대한 대책을 논의하였다. [[12월]] 다시 [[승정원]][[동부승지]]가 되고, [[12월 14일]] 공신 대표로 [[명나라]]에 파견되었다.
         [[1459년]] [[8월]] [[병조]][[참판]] 상락군(上洛君)이 되어 [[조선 세조|세조]]의 국방정책 수립에 참여하고 그 뒤 다시 상락군(上洛君)에 봉하여졌다. 그해 [[12월]] [[이조판서]] [[구치관]]·[[예조판서]] [[홍윤성]]과 함께 무경(武經)과 병서(兵書), 진법 등을 강론하였다.
         [[1460년]] [[한명회]]의 처가 병이 들자 그와 임무를 교체하라는 명을 받았다.<ref>세조실록 19권, 세조 6년(1460 경진 / 명 천순(天順) 4년) 2월 10일(정사) 2번째기사 "서북면 도체찰사 한명회에게 처의 병을 알리고 상경할 것을 유시하다"</ref>
         그해 [[2월]] [[평안도]]와 [[황해도]]의 도순찰사를 겸직하여 파견되었다.<ref>세조실록 19권, 세조 6년(1460 경진 / 명 천순(天順) 4년) 2월 10일(정사) 3번째기사 "평안 황해도 도순찰사 김질이 하직하니 물건을 내려 주다"</ref> 이어의 도순찰사를 겸하고 서북면 도체찰사가 되어, 서북면 도체찰사 겸 평안, 황해, 함경도 순찰사가 되어 부임하였다. 그 해, [[조선 세조|세조]]의 서쪽지방 순행 시 도체찰사 겸 평안, 황해도 도순찰사로 세조의 서북 지방 순찰을 수행하였다.
         [[1460년]](세조 6년) 세조가 두 차례에 걸쳐 서도(西道)지역 순행(巡幸)을 하자, 그는 왕의 서도 순시를 위해 특별히 [[황해도]][[도순찰사]]와 [[평안도]]도순찰사가 되고, 그해 [[7월]] 다시 [[병조]][[참판]]이 되었다. [[1461년]] [[1월]] 다시 [[평안도]][[도순찰사]] 겸 [[평안도]][[관찰사]]로 나갔다가 [[2월]] 다시 [[병조]][[참판]]이 되었다. 그해 [[5월]]에 [[평안도]] [[도관찰사]]로 나갔다.
         [[1463년]] [[3월]] [[공조]][[판서]]로 승진하고 이후 병조판서·형조판서를 거쳐 [[11월]] 도진무(都鎭撫)가 되었다가 다시 [[형조]][[판서]]가 되었다. [[1464년]] [[2월]] 우상 대장(右廂大將), [[3월]] 다시 형조판서가 되었다.
         이때 [[세종대왕]]의 능침을 이장할 때 [[천릉 도감]] 제조(左議政遷陵都監提調)의 한사람으로 선발되었고, [[1469년]] [[1월]] 평안도 도체찰사(左議政平安道都體察使)로 다시 부임하였다. 그해 [[2월]] 다시 [[좌의정]](右議政)에 임명되었다.
         [[1477년]](성종 8년) 병을 이유로 사직을 청하였으나 [[조선 성종|성종]]이 자신을 더 도와달라며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1478년]](성종 9년) [[2월 24일]] 병으로 사망하니<ref>[http://sillok.history.go.kr/inspection/insp_king.jsp?tid=kia&pos=17&mTree=0&inResult=0&indextype=1&keyword=%EC%A2%8C%EB%A6%AC+%EB%B6%80%EC%9B%90%EA%B5%B0 성종 89권, 9년(1478 무술 / 명 성화(成化) 14년) 2월 24일(정사) 1번째기사] "상락 부원군 김질의 졸기"</ref> 사망당시 향년 56세였다. 문정(文靖)의 시호가 내려졌다.
  • 김호규
         [[1919년]] [[12월 27일]] 할아버지 [[김성근 (1835년)|김성근]]에게서 [[자작]] 작위를 상속받았으나 [[1930년]]대까지 양자관련 소송의 잡음이 있었다. 할아버지 [[김성근 (1835년)|김성근]]은 그를 큰아버지 김병칠이 죽은 뒤 [[사후양자]]로 삼았다가, 이것이 문제가 되어 [[1930년]]대까지 작위 무효 소송, 토지 무효 소송 등에 시달림당했다.
         김호규는 [[김성근 (1835년)|김성근]](金聲根)의 첩 유씨(劉氏) 소생<ref name="매일11">"金子爵家紛爭 宗中이 蹶起 문숭이 불명예하여진다고 雙方에 決議文送與" 매일신보 1932년 02월 26일자, 02면</ref> 서자인 김병팔(金炳八)의 아들로 태어났다.<ref>"宗中서도 憤起聲明書發表 김병팔씨 측에서 조정불청 故金聲根子家門紛糾", 매일신보 1932년 03월 04일자, 2면</ref> 고조부는 김이회(金履會), 증조부는 [[공조판서]]와 판부사를 지낸 [[김온순 (1812년)|김온순]](金蘊淳)이다. [[1890년]] 무렵 [[승정원]][[승지]]를 지낸 [[김병억]](金炳億)은 그의 당숙이 된다. 공조판서와 [[한일 합방]] 후 [[자작]]을 지낸 할아버지 [[김성근 (1835년)|김성근]]은 정실에게서 본 아들들이 일찍 사망하자, 아들이 없어 결국 서자 김병팔(金炳八) 아들인 그를 정실 자식의 양자로 입양하였다.
         [[1919년]] [[12월 27일]] 자신의 할아버지였던 김성근이 받은 자작 작위를 승계받았다. 그런데 1930년대까지도 그의 생부 김병팔이 소송을 제기하면서 문제가 되었다. 문제가 되자 그의 양어머니인 김발귀(金發貴)는 양자 무효 소송을 내기도 했다.<ref name="매일11"/> 김병팔(金炳八)은 [[김성근 (1835년)|김성근]]의 서자로, 측실 유씨(劉氏) 소생이었다. 생부 김병팔은 자기가 [[김성근 (1835년)|김성근]] 생전에 태어난 자식이라 하여 작위는 자신이 받아야 된다고 적형의 양자로 간 김호규와 적형수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1931년]] [[12월 1일]] 일본 정부로부터 종5위에 서위되었다. [[1932년]] [[3월]]까지 생부 김병팔은 소송을 제기했고, 당숙인 김병억 등이 개입했지만 결국 조정에 실패하고 만다. 이 싸움은 김호규와 김호규의 양어머니 김발귀 사이에 양자무효소송으로 가게 되었다. [[3월 6일]]에는 김발귀가 그를 상대로 양자 무효소송을 냈다.<ref>"被告側抗辯업시 公判은 結審 원고측에선 두 증거물 제출 故金聲根子家訴訟", 매일신보 1932년 03월 06일자, 02면</ref>
         [[1937년]] [[8월 25일]] [[동요회]](同耀會) 발기인과 이사로 참여하는 한편 국방헌금 헌납에 적극 참여했다. 1937년 12월 [[중일 전쟁]] 당시 일본군의 [[난징 시|난징]] 함락을 지지하는 글을 기고했으며 1938년 1월 조선에서 실시된 지원병 제도를 적극 지지하는 글을 기고했다. 1938년 다시 [[동요회]] 이사에 선출되었다.
         [[1938년]] [[조선실업구락부]] 회원을 역임했고 [[1939년]]부터 [[1942년]]까지 [[조선총독부]] 내무국 지방과 촉탁으로 근무했다. [[1941년]] 3월에 열린 [[대동아공영권]] 확립에 관한 연설에서 도쿄 회의(대동아공영권에 대한 회의)에 대한 지지 의사를 표명하는 등 일본의 침략 전쟁을 적극 지지했다. [[1940년]] 일본 기원 2600년 축전 기념 초대자로 선정되었고 1940년 11월 10일 일본 정부로부터 기원 2600년 축전 기념장을 받았다. [[1942년]] [[12월 28일]] 일본 정부로부터 종4위에 서위되었으며 그해 [[8월]] 광복 이후 칩거하였다.
         [[1949년]] [[1월]]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체포되어 조사를 받았으나 [[반민특위]]의 해체로 그해 [[2월]]에 풀려났다.
  • 남궁억
         '''남궁억'''(南宮 檍, [[1863년]] [[12월 27일]] ~ [[1939년]] [[4월 5일]])은 대한제국 조선 황조 말기의 교육자, 계몽운동가이며 일제 강점기의 독립운동가이자 교육가, 사회운동가, 시인, 작사가, 작곡가, 언론인이다.
         [[1910년]] [[10월]] [[한일합방]] 이후에는 배화학당 교사와 상동학원 원장을 겸하며 교과서를 편찬하고 교회와 학교를 세웠으며, 신편언문체법(1914), 가정교육(1914) 등의 교과서를 저술하였다. [[1918년]] 고향 홍천 모곡으로 낙향하여 교회와 학교를 짓고 [[무궁화]] 보급 운동을 추진했다. [[1933년]] [[12월]] [[조선총독부]]의 불심검문에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하다가 [[1935년]] 석방되었다. 성이 남(南)이고, 이름이 궁억인 것으로 착각하기 쉬우나, 실제로는 성이 남궁이고 이름이 억이다.
         한서 남궁억은 [[1863년]](철종 14년) [[12월 27일]], [[한성부]] 종로방 정동 왜송골(倭松洞)에서 [[중추부]]도사(都事)를 지낸 [[남궁영]](南宮泳)과 덕수 이씨의 아들로 태어났다. 유년 시절에는 정식으로 수학하지 못하고 [[한문]] 공부를 하다가 [[1883년]](고종 20년) [[미국인]]이 경영하는 영어학교에 다녔다.
         1887년 전권대신 [[조민희]](趙民熙)의 수행서기관으로 [[상하이]]에도 갔다. 영국, 러시아, 독일 순방길을 계획하고 홍콩까지 갔으나, [[청나라]]의 간섭과 방해로 2년간 홍콩에서 머물다가 결국 다시 소환되어 돌아왔다. 이후 1889년 [[궁내부]] 별군직(宮內府別軍職), [[1893년]] 칠곡부사를 역임하고, [[1894년]]에는 [[갑오경장]]으로 [[내무부]] 토목국장에 발탁되어 서울 종로와 정동 일대 및 육조 앞과 남대문 사이의 도로를 정비하고 [[경성부]] [[탑골공원]](파고다 공원) 공사의 감독을 맡아 완공시켰다. 이후 [[흥화학교]](興化學校)에서 교사로 영문법과 국사(國史)를 가르치고 독립협회에 가입했다. [[1895년]]에는 주변 조정 관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한성부]]의 민가를 정비, 허물고 도로를 정비하여 길을 닦았다. 그뒤 [[1896년]] [[2월]] 관직을 사퇴하였다.
         [[1895년]] [[12월]] [[서재필]]이 귀국하자, 이후 귀국한 [[서재필]](徐載弼), [[유길준]], [[윤치호]], [[이승만]] 등과 개화 운동을 펼친다. 또한 서재필과 함께 언론사 창립을 추진한다. [[1896년]] 초에는 [[서재필]], [[윤치호]]와 [[독립신문]] 창간에 참여하고 [[독립신문]]의 기자이자 필진의 한사람으로 활동하며 독립정신을 고취하였다. 그해 [[2월]] [[아관파천]]이 단행되자 관직을 사퇴하였다.
         [[1898년]] [[11월]] 왕당파로부터 왕정타도와 [[공화정]]을 수립하려 한다는 이유로 탄핵당하고 17명의 지도자와 함께 경성부 외곽에 숨었으나 결국 경무청 형사들에 의해 체포되었다. [[1899년]] [[12월]] [[독립협회]]가 강제로 해산당하자 언론 활동에만 전념하였다. [[1900년]] [[7월]] [[황성신문]]에 [[러시아]]와 [[일본]]의 한국분할설을 주장하고 이를 번역하여 외국 신문에서 옮겨 실어, 러시아와 일본의 한국 침략 야욕을 폭로하는 논평을 게시했다가 경무청에 체포, 구금되었다.
         [[1903년]] 3월 고종의 간곡한 요구로 특별히 성주목사로 부임하였다. 이후 성주목사와 [[1904년]] 양양군수를 역임하면서 부패한 토호들과 토색질을 일삼는 향리들을 엄히 단속하여 처벌하였으며 조정 고관들의 비리를 탄핵하기도했다. 강원도 양양군수 재직 중 폐습타파와 단발령, 신식 학교 유치, 도로 정비, 병원 유치 등을 추진하였다. [[1905년]] [[11월]]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조약의 부당함을 간하다가 실패하자 관직을 사퇴하였다. 1906년 2월 다시 양양군수로 복직하여 애국계몽운동에 참가하여, 1907년(광무 10년) 7월 양양의 동헌 뒷산에 양양에 [[현산학교]](峴山學校)를 설립하고 신교육을 실시하였다. [[1907년]] 11월에는 권동진(權東鎭), 여병현(呂炳鉉), 유근, [[유길준]], 이우영(李宇榮), [[오세창]](吳世昌), [[윤효정]](尹孝定), [[안국선]], [[장지연]], 정운복(鄭雲復), 홍필주(洪弼周), [[윤치호]] 등과 [[대한협회]]를 조직하고 대한협회 회장이 되었다. 이어 기관지로 대한협회월보와 대한민보를 발행하였다. 1907년 [[7월]] [[일본]]이 [[헤이그 특사 파견 사건]]을 이유로 [[조선 고종|고종]]에게 퇴위 압력을 가하여 사퇴시키고 [[이완용]], [[박제순]] 등과 [[정미칠조약]]을 체결하자 이를 반대하다가 결국 관직을 사임하고 홍천 모곡으로 낙향하였다.
         그뒤 〈무궁화 묘포〉(苗圃)를 만들었으며 1933년에는 무궁화동산이라는 노래를 지어 학생들에게 가르쳤다는 죄목으로 체포되었다가 8개월만에 풀려났다. 그러나 가석방된 뒤 [[1933년]] [[9월]] 기독교 계열 독립운동 비밀결사인 [[십자가당]](十字架黨)을 조직, 활동하다가, [[1933년]] [[12월]]에 총독부 경찰의 불심검문에 걸려 [[홍천]] 모곡리 무궁화 사건(십자가당 사건)으로 비화되면서 홍천경찰서로 넘겨졌다가 [[경성부]] [[서대문형무소]]로 넘어가 복역한다. 일제가 민족 정신을 말살하기 위하여 [[일장기]]와 [[벚꽃]]을 보급하고 장려하려는 것에 항거해 당시 모곡리의 [[감리교]] [[전도사]]로 일하던 남궁억은 그의 동지들과 더불어 민족정신 고양을 위해 [[무궁화]] 묘목을 전국에 배포하였다.
  • 남상미(배우)
         [[2017년]] [[2월]]부터 [[집밥 백선생]]에 고정 출연이 확정 되었다. 예상대로 예능에 잘 적응하지 못하는 모습을 좀 보이고 있으나, 그래도 결혼 전보다는 많이 나아진 것 같다. 제자 넷 가운데 하나이니 분량도 많고, 꾸밈 없고 순진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거기에 식탐 쩌는 남장군 기믹까지 획득. 임신 기간에만 26kg이 쪘을 만큼 식탐이 많다고 한다. 이 프로그램만 잘 넘기면 의외로 말 많고 친화력 있는 아줌마 캐릭터로 진화할 가능성도 보인다.
         || [[2017년]] [[2월 14일]]~[[2017년]] [[11월 28일]] || [[tvN]] || [[집밥 백선생|집밥 백선생 시즌3]] || 고정 패널 || [* 첫회에서 실력 테스트를 위해 [[감자전]]을 요리 하는데 감자가 들어간 양파전(?)을 만들었다. 본인이 밝히길 주방 보조는 많이 했지만 결혼 전, 후 모두 친정 어머니와 시어머니가 요리를 전담했기에 요리를 못 해봤다고 한다.] ||
         || [[2005년]] [[2월 22일]] || [[KBS2]] || [[상상플러스]] || 게스트 || 16화 ||
  • 노준형
         * [[1977년]] 12월 : 제21회 행정고등고시 합격
         * [[1996년]] [[12월]] ~ [[1997년]] [[5월]] : 정보통신부 공보관
         * [[2003년]] [[1월]] ~ [[2003년]] [[2월]] : 제16대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경제2분과 전문위원
  • 문주란 (가수)
         [[1949년]] [[대한민국]] [[부산광역시]]에서 태어났다. [[1965년]] 중학교 3학년인 어린 나이로 [[부산MBC]] '''톱 싱거 경연대회'''에서 〈보고싶은 얼굴〉로 1등을 한 뒤 [[1966년]] [[2월]] 〈보슬비 오는 거리〉, 〈동숙의 노래〉, 〈봄이 오는 고갯길〉이 수록된 음반을 내면서 가요계에 정식으로 데뷔했다. 이 음반으로 그해 국제가요대상에서 신인상을 수상하였고, 무궁화상에서 장려상을 수상하였다. 또 1972년까지 TBC 가요상에서 신인상을 수상했다. [[1967년]]에는 군사영화 《장렬 509 대전차대》에도 출연한 바 있으며, [[1967년]]과 [[1968년]]에는 [[MBC]]에서 주최한 [[MBC 가요대제전|MBC 10대 가수 가요제]]의 10대 가수에 선정되기도 하였다.
         * [[1969년]] [[2월 16일]] 한 방송국 PD와의 실연을 이유로 수면제를 음독, 자살을 기도하여 중태에 빠졌었다.<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69021700209203026&edtNo=2&printCount=1&publishDate=1969-02-17&officeId=00020&pageNo=3&printNo=14569&publishType=00020 가수文珠蘭(문주란)양 自殺(자살)기 도重態(중태)]</ref>
  • 민겸호
         그 뒤 [[1865년]] [[2월]] [[음서 제도|음보]]로 동몽교관<ref>http://people.aks.ac.kr/front/tabCon/exm/exmView.aks?exmId=EXM_UM_6JOc_9999_007693&isEQ=true&kristalSearchArea=B</ref>에 올랐다가 [[1866년]] 알성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고, [[1867년]] [[4월]] [[조선 고종|고종]]에 의해 특별히 부수찬에 제수되었고, 이후 응교 등 여러 벼슬을 거쳐 [[성균관]][[대사성]]이 되었다. [[1872년]] [[이조]][[참의]]가 되고 그해 말 [[가선대부]]로 승진 [[예조]][[참판]]에 발탁되고 [[1873년]] [[형조]] [[참판]]이 되었다. 이때 [[명성황후]]가 [[흥선대원군]]을 권좌에서 축출하려 하자 그는 명성황후의 편에 서서 도왔다.
         [[1874년]] [[11월]] [[흥선대원군]]은 축출되었으나 곧 [[민승호]]가 일가족과 함께 폭탄에 의하여 죽은 뒤 민겸호는 [[민규호]] 등과 더불어 민씨 척족의 중심인물이 되었다. 이후 [[명성황후]]의 전폭적인 후원과 [[조선 고종|고종]]의 신임 하에 6조의 여러 판서를 거쳐 [[한성부]]좌윤, [[홍문관]]부제학, 세자시강원 좌부빈객 등을 지내고 판의금부사로 승진했으며 그 뒤 지중추부사, 금위대장, 지삼군부사, 무위도통사(武衛都統使), 무위소제조(武衛所提調), 어영대장 등을 두루 역임하고 판[[돈녕부]]사가 되었다. [[1880년]] 12월 새로운 정치기구로 통리기무아문이 설치되자 통리기무아문의 당상을 지냈고, 군무(軍務)·변정(邊政)·기연(譏沿)의 당상을 겸하였다.
         80년 12월말 군무사 경리당상(軍務司經理堂上)이 되어 [[1881년]] [[4월]] 일본 육군소위 호리모토(堀本禮造)를 연군교사(練軍敎師)로 초빙하여 신식 군대인 [[별기군]](別技軍)을 창설하고 훈련을 주관하였다. 그 뒤 선혜청 당상 겸 병조 판서를 지냈다.
  • 박규수
         |임기 = 1876년 2월 ~ 1876년 12월
         '''박규수'''(朴珪壽, [[1807년]] [[10월 27일]] ~ [[1877년]] [[2월 9일]])는 [[조선]] 말기의 문신이다. 본관은 [[반남 박씨|반남]](潘南). 초명은 '''박규학'''(朴珪鶴), 자는 환경(桓卿, 瓛卿) 또는 정경(鼎卿), 호는 환재(桓齋, 瓛齋), 헌재(獻齋), 환재거사(瓛齋居士) 등이다.
         1862년(철종 13년) 2월 [[진주민란]](晋州民亂)이 [[경상북도|경상우도]] 일대로 확대되자 안핵사(按覈使)로 나가 사태 수습을 맡았다. 지방관과 지역 향반들의 부패로 인한 백성들의 참상을 보고하고 세금 감면과 구휼을 주청해 성사시켰다. 그는 민란의 원인이 [[삼정의 문란]]에 있음을 확인하고, 근본적 해결책을 마련하도록 조정의 중론(衆論)을 모을 특별기구를 건의했다. 그의 헌책으로 음력 5월 26일 [[삼정의 문란|삼정이정청]]이 설치된다. 동년 10월 [[이조]][[참의]]로 승진했다.
         1863년(고종 즉위년) 12월 [[승정원]] [[도승지]]에 임명돼 [[대한제국 고종|고종]]을 측근에서 모시게 됐다. 막 즉위한 고종은 [[효명세자|익종(翼宗)]]의 양자로 입승대통<ref>입승대통:대통을 잇는 입양이란 뜻의 왕실용어</ref>돼 보위에 오를 수 있었는데, [[효명세자]](익종)의 정비이자 고종의 양어머니가 된 [[조대비]](趙大妃)가 남편의 생전 절친했던 박규수를 [[흥선대원군]]에게 천거했다. '박규수는 벼슬길에 오르지 않았을 때도 [[익종]]께서 크게 쓰려던 인물이다. 그가 벼슬한 뒤 이제까지 그의 재주를 마음껏 발휘할 자리에 앉아본 적이 없는데, 한 번 써보는 것이 좋겠다'며 간곡히 부탁했다고 한다.
         1866년(고종 3년) 고위 관리는 반드시 지방 외직을 순환해야 하는 규정에 따라 그 해 음력 [[2월]] [[평안도]] [[관찰사]]로 부임했다.
         1873년(고종 10년) 5월 [[형조판서]]에 임명됐고 음력 12월에 마침내 [[우의정]]에 올랐다. 그 때까지도 그는 [[흥선대원군]]에게 개국의 필요성을 여러 차례 역설했으나 채택되지 않았다. 박규수는 어디까지나 조정 중론에 따랐으면서도 당시 일본과의 국교문제에 있어서까지 줄기차게 개국을 주장했다.
         1873년(고종 10년) 12월 [[일본]]이 자신들의 [[메이지 유신|왕정복고]]와 이에 대한 정식수교 요청을 통고해 왔다. [[메이지 유신]]을 성공시킨 일본은 종전의 서계 격식을 버리고 [[조선의 역대 국왕|고종]]에게 '황'(皇), '칙령'(勅令), '대일본'(大日本) 등의 표현을 써보냈다. 이른바 서계문제(書契問題)로서 [[조선]] 정부로서는 적어도 대등한 위치도 아니고 일본이 상국의 위치에서 써보낸 외교 전문에 대해 수리를 거부했다.
         1875년(고종 12년) 9월 일본은 [[운요 호 사건|운요 호]]([[운양호]])로 강화도를 포격했다. 그와 제자 [[김홍집 (1842년)|김홍집]], 역관 [[오경석]] 등은 다시 한 번 수교를 강력히 촉구하고 설득해 이듬해 2월 [[강화도 조약]]을 맺게 됐다. 이후 다수에 의해 매국노로 규탄받고 모함에 시달린 그는 병석에 누웠다. 그의 문인 중 한 사람인 [[김윤식|운양 김윤식]]은 "공<small>(박규수를 지칭)</small>은 늘 천장을 쳐다보며 길게 탄식하며, 윤기(倫紀)가 끊어져 나라도 장차 따라서 망하리니 가련한 우리 생민(生民)이 어찌하여 하늘로부터 저버려져야 하는가라고 했다. 드디어 걱정과 분함 때문에 병석에 누웠다."라고 했다.
         1876년(고종 13년) 2월 [[수원시|수원부]] [[유수]](水原府 留守)에 임명됐으나 건강이 악화돼 가지 못했고, 병세가 차도를 보이던 8월 9일 [[수원시|수원부]] [[유수]]에 재차 임명돼 수원으로 내려갔다.
         1877년(고종 14년) 2월 9일<ref>(음력 1876년 [[12월 27일]])</ref>에 임지인 [[수원부]] 청사에서 71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대한제국 고종|고종]]은 슬퍼하며 '도량과 식견이 고명하고, 문학이 박식해서 내가 의지하고 온 조야(朝野)가 기대하던 사람이다. 근래에 우의정의 벼슬을 벗은 것과 관련하여 특별히 거기에 머물러 살게 한 것은 바로 평시에 정력이 강직하여 잠시 휴식하게 해주면 다시 등용할 날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는데, 어찌 까닭모를 병으로 갑자기 영영 가버릴 줄이야 생각이나 하였겠는가? 내 슬픔과 한탄이야 어찌 그 끝이 있겠는가?' 라며 [[승지]]를 보내 치제하게 하고, 3년치 녹봉(祿俸)을 부의로 지급했다.
  • 박근혜
         |취임일 = 2013년 2월 25일
         '''박근혜'''(朴槿惠<ref>{{헌정회|2530}}</ref>, [[1952년]] [[2월 2일]] ~ )는 [[대한민국]]의 제18대 [[대한민국의 대통령|대통령]]이다.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자, 최초로 탄핵된 대통령이다.<ref group="주">1925년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서 탄핵된 [[이승만]] 대통령까지 포함할 경우 역사상 두 번째로 탄핵된 대통령이다.</ref>
         2011년 12월부터는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장을 지내며 당 혁신 작업을 지휘하였고 2012년 [[대한민국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제19대 총선]]을 승리로 이끌었다. 이후 새누리당의 대통령 선거 후보로 선출되어 2012년 12월 19일 실시된 [[대한민국 제18대 대통령 선거|제18대 대선]]에서 득표율 51.6%로 48.0%를 득표한 [[민주통합당]]의 [[문재인]] 후보를 누르고 당선,<ref>[18대 대통령 박근혜] 박근혜 득표율 51.6%, 조선일보 2012.12.21</ref> 2013년 2월 25일 대한민국의 제18대 대통령으로 취임하였다. 이로써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자 1987년 [[대한민국 헌법]] 개정 이후 최초 과반 득표 대통령, 최초 이공계 출신 대통령, 최초 독신 대통령, 최초 부녀 대통령으로 기록되었다.<ref>[http://www.asiatoday.co.kr/news/view.asp?seq=743473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의 신기록들] 아시아투데이 (2012년 12월 20일)</ref>
         재임 직후부터 [[국정원 댓글 사건|국정원 대선 개입 사건]]이라는 위기를 맞으며 국정을 본 박근혜는 임기 중 [[세월호 침몰 사고|세월호 참사]], [[메르스 사태]] 등 국가적 재난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해 국민의 불안감을 증폭시켰고, [[창조경제]]를 위시한 추진한 정책 다수가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을 뿐더러, 미숙한 국정운영과 불통 논란 등으로 숱한 비판을 받았다. 그러다 2016년 말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터져 민간인의 국정 개입 사실이 낱낱이 폭로되면서 2016년 12월 3일 [[대한민국 국회]]에 [[박근혜 대통령 탄핵|《대통령(박근혜) 탄핵소추안》]]이 발의<ref name="impeachment" />되어 12월 9일 대한민국 헌정사상 두 번째로 국회에서 탄핵소추안이 가결, 대통령 직무가 정지되었다.<ref>{{뉴스 인용|저자=주영재·허남설|제목=[속보]박근혜 대통령 탄핵소추안 가결···찬성 234·반대 56·무효 7·기권 2|url=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612091610001|뉴스=[[경향신문]]|날짜=2016.12.09 16:10:00}}</ref>
         박근혜는 [[1952년]] [[2월 2일]]에 [[대구광역시]] [[중구 (대구광역시)|중구]] 에서 전시(戰時) 대구 주재 [[육군본부]] 작전‧교육국 작전차장 [[박정희]] 대령과 중등학교 교사 출신인 그의 부인 [[육영수]]의 딸로 태어났다. 현재 이에는 돈부리집이 있는 상가가 위치해 있다.<ref name="kys">[[강용석의 고소한 19]] 1화</ref> 어머니 [[육영수]]에게는 첫 소생이었으나 아버지 박정희는 이혼 경력과 전처소생의 장녀 [[박재옥]]이 있었으므로 박정희에게는 차녀가 된다. 형제로는 이복언니 박재옥이 있고 동복동생인 여동생 [[박근령]]과 남동생 [[박지만]]이 있다.
         [[서울장충초등학교]]에 입학하여 [[1964년]] 2월 졸업하였으며, [[정몽준]] 전 국회의원과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이 그의 초등학교 동창이다.<ref>[http://news.mt.co.kr/view/mtview.php?no=2011091114473659729&type=1&outlink=2&EVEC 초등 동창 박근혜-정몽준, 대선 앞둔 지금은?]</ref><ref>[http://weekly.khan.co.kr/khnm.html?mode=view&artid=19416&code=113 정몽준-박근혜 ‘외나무다리’ 만날까 - 위클리경향 814호]</ref> 그 뒤, 카톨릭계 미션스쿨인를 거쳐로 진학하였으며, [[1970년]] [[서강대학교]] [[공과대학]] [[전자공학]]과에 진학하여 [[1974년]]에 졸업하였다. 같은 해 프랑스 [[그르노블대학교]]에 입학하였다.
         박근혜는 [[1997년]] [[12월 2일]] 사촌 오빠 [[박재홍 (1941년)|박재홍]]의 소개로 [[한나라당]]의 [[대한민국 제15대 대통령 선거|제15대 대통령 선거]] 후보였던 [[이회창]]과 만났다. 이후 [[1997년]] [[12월 10일]] [[대한민국 제15대 대통령 선거|제15대 대통령 선거]] 이회창 지지를 선언하며 한나라당에 입당하였다. 이후 이회창의 권유로 [[1998년]] [[4월 2일]] 한나라당의 후보로 [[대구광역시]] [[달성군]]의 국회의원 [[보궐선거]]에서 당선되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딸이라는 점과 미혼 여성 정치인이라는 점 등으로 많은 주목을 받았다. 출신 성분은 아버지인 박정희 전 대통령을 지지하는 보수 진영 및 영남, 어머니인 [[육영수]]의 고향인 충청 지역의 지지를 얻는 데 유리하게 작용하였다.
         이후 [[2000년]] 한나라당의 부총재로 선출되었지만 [[2002년]] 2월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이회창]]을 비판하며 한나라당에서 탈당하였다. 이후 [[한국미래연합]]을 창당<ref>[http://article.joinsmsn.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1158351&ctg=10 한국미래연합 창당…대표 박근혜의원 - 2002-05-17 중앙일보]</ref> 하였으나 대선 전에 복귀하였다. [[2002년]] [[5월 12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방문, [[5월 13일]]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만나 회담을 하고<ref name="visit_NK">{{웹 인용 |url=http://www.voanews.com/Korean/archive/2002-05/a-2002-05-14-12-1.cfm |제목=박근혜 의원, 북한방문 마치고 서울로 귀환 - 2002-05-14<!-- 봇이 붙인 제목 --> |확인날짜=2009-02-10 |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060722010557/http://www.voanews.com/Korean/archive/2002-05/a-2002-05-14-12-1.cfm |보존날짜=2006-07-22 |깨진링크=예 }}</ref> [[5월 14일]] 서울특별시로 돌아왔다.<ref name="visit_NK"/>
         [[2005년]] 12월 여당인 [[열린우리당]]은 [[사립학교법]] 개정안을 [[직권상정]]하여 처리하였다. 당시 대표인 박근혜는 곧바로 장외 투쟁을 선언하고 거리로 나섰다. 당시 한나라당 내부에조차 회의적인 시선이 많았다. "한나라당이 무슨 장외 투쟁이냐"라는 비아냥도 있었고, 국회 등원에 대한 여론의 압박도 심했다. 하지만 박근혜 대표는 장외 투쟁을 계속했고, 결국 여야는 한나라당의 장외 투쟁 3개월 만에 사학법 재개정 논의에 합의하게 된다. 박근혜 대표는 주변의 반대와 원외 투쟁에 소극적인 한나라당의 체질이라는 문제에도 불구하고, 사학법 재개정을 이끌어낸 것으로 평가되었다. 2004년 17대 총선의 '한나라당 천막 당사' 역시 "쇼 아니냐"라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한나라당의 상징물로 기억됐다.<ref>[http://media.paran.com/snews/newsview.php?dirnews=527709&year=2010 MB·박근혜 '세종시' 문제 왜 타협 못할까]{{깨진 링크|url=http://media.paran.com/snews/newsview.php?dirnews=527709&year=2010 }}</ref>
         대한민국 제18대 국회에서 2009년 12월 29일에 대한민국 정부가 혼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결혼 이민자, 대한민국에 특별한 공로가 있거나, 우수 외국 인재로서 특별귀화한 자, 국적 회복 허가를 받은 자로서 특별한 공로가 있거나, 우수 외국 인재로 인정되는 자, 해외 입양 되었다가 우리 국적을 회복한 자, 그리고 외국에 장기 거주하다가 국내에 영주 귀국하여 대한민국 국적을 회복한 65세 이상의 자들을 대상으로 [[복수 국적]]을 제한적으로 허용하기 위하여 발의한 국적법 일부개정법률안(의안번호 1807200)의 수정가결에 찬성하였다.<ref>[http://likms.assembly.go.kr/kms_data/record/data2/289/pdf/289za0008b.PDF "제 289회국회-제8차 (임시회) 국회본회의회의록"]</ref>
         대한민국 제18대 국회에서 2009년 2월 5일에 대한민국 헌법 제24조에도 불구하고 해외에 거주하는 약 240만명 대한민국 국민의 금지되었던 [[재외국민]] 참정권을 회복하기 위하여 발의된 공직선거법 일부개정법률안(대안) (의안번호 1803725), 주민투표법 일부개정법률안 (의안번호1803724), 그리고 국민투표법 일부개정법률안(의안번호 1800737)에 모두 찬성하였다.<ref>[http://www.donga.com/fbin/output?n=200902050342 재외국민 투표 허용 법안 국회 통과 ] <<[[동아일보]]>> 2009-05-25 작성</ref><ref>[http://likms.assembly.go.kr/kms_data/record/data2/281/pdf/281za0004b.PDF "제 281회국회-제4차 (임시회) 국회본회의회의록"]</ref>
         박근혜는 [[2010년]]에 있었던 [[대한민국 제5회 지방 선거|지방 선거]]에서 [[대구광역시]] [[달성군|달성군수]]로 출마했던 한나라당의 이석원 후보를 적극적으로 지원하였지만 이석원 후보는 무소속의 김문호 후보에게 패배하였다. 박근혜는 "달성군민이 판단한 것도 존중한다"고만 입장을 밝혔다.<ref>[http://news.mk.co.kr/outside/view.php?year=2010&no=286840 상처입은`선거의 여왕 박근혜, 침묵 끝 한마디] {{웨이백|url=http://news.mk.co.kr/outside/view.php?year=2010&no=286840 |date=20100607172404 }} 매일경제 2010년 6월 3일</ref> 차기 대선 후보로써의 지지율은 사상 최저치로 떨어져 25.1%를 기록하는 등 박근혜의 정치적 입지가 점점 좁아지자<ref>(http://www.ccdailynews.com/section/?knum=152755 박근혜 지지율 2.3% 하락) 충청일보 2010년 6월 3일</ref> 박근혜는 2010년 하반기부터 차기 대선 행보에 초점을 두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12월 20일 열린 공청회에서 복지를 화두로 토론을 진행하였다. 박근혜는 인사말을 통해 "서구 선진국들의 전통적 복지제도가 한계에 이르렀다"며 맞춤식 생활 보장형 복지 국가를 제안하였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214&aid=0000163860 박근혜 대권 행보 시작‥공청회 '대선출정식' 방불] mbc 2010년 12월 20일</ref> 이후 12월 27일 박근혜의 대선 구상을 내놓을 '국가미래연구원'이 출범했다. 출범식에는 대한민국 내 학자들과 [[이한구 (정치인)|이한구]] 한나라당 의원 등이 참석했다.<ref>[http://imnews.imbc.com/replay/nwdesk/article/2767079_5780.html 박근혜, 빨라진 대권 행보‥'싱크탱크' 출범] {{웨이백|url=http://imnews.imbc.com/replay/nwdesk/article/2767079_5780.html |date=20130927121326 }} mbc 2010년 12월 27일</ref> 그러나 [[심재철 (1958년)|심재철]] 한나라당 의원은 "복지를 늘리려면 세금을 더 거둬야 하는데 그 얘기는 감추고 무조건 복지만 잘해주겠다고 하는 것은 솔직하지 못한 태도"라고 비판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214&aid=0000164333 한나라당 심재철 "박근혜 복지, 솔직하지 못해"] mbc 2010년 12월 25일</ref>
         [[2011년]] [[12월 9일]] [[홍준표]] 한나라당 대표가 디도스 파문을 못 이기고 사퇴하자, 한나라당은 한나라당 전 대표인 박근혜를 당 비상대책위원장으로 선출하였다. 박근혜 비대위원장은 수락 연설에서 “집권 여당으로서 국민의 아픈 곳을 보지 못하고 삶을 제대로 챙겨드리지 못한 데 대해 진심으로 사죄한다”며 “이제 바꿔야 한다. 그동안 한나라당과 우리 정치권 모두 국민만 바라보지 않고, 정치를 위한 정치를 해왔다”며 “정치권 전체가 국민의 불신을 받는 이런 상황이 계속된다면, 앞으로 더 큰 국가적 위기를 맞게 될 것”이라고 말해 위기의 심각성을 강조하였다.
         비상대책위원장 선출 1달 후인 [[2012년]] [[1월 25일]] 박근혜는 당명 변경을 선언하였다. 새 당명 국민 공모 이후 2012년 2월 2일 박근혜는 [[새누리당]]으로 당명을 변경하겠다고 선언하였고 2012년 2월 13일 한나라당에서 새누리당으로 당명을 변경하였다. 이로써 한나라당은 14년 3개월만에 역사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또한 당의 당헌, 당규를 개정하였다. 이후 박근혜는 제19대 총선 대비를 하였고 3월 20일 박근혜 비대위원장은 총선을 22일 앞두고 중앙선거대책위원장에 추대되었다.
         당시 정몽준과 이재오가 당내 경선에 불만을 품으며 경선 불출마를 선언하였다. 박근혜는 [[2012년]] [[8월 20일]] [[새누리당]] 전당 대회에서 12월 19일 18대 대통령 선거에 나설 새누리당 후보로 선출되었다.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박근혜의 득표율은 전체 유효투표의 83.97%인 8만 6천 589표로 지난 2002년 경선 당시 이회창 후보가 얻은 68%인 기존의 최고 기록을 갱신하였으나 경선 투표율이 41%로 역대 최저 투표율을 기록하였다. 대한민국 정당 역사상 유력 정당의 첫 여성 후보이자 전직 대통령의 자녀가 대선 후보가 되는 첫 사례이기도 했다.<ref>[http://media.daum.net/society/nation/seoul/view.html?cateid=100004&newsid=20120820162306691&p=yonhap] 심인성 기자, 박근혜, 84% 최고득표율로 與대선후보 확정(종합), 연합뉴스, 2012.8.20.</ref> 한편 박근혜는 2002년 한나라당 제16대 대선 후보 경선 출마 선언 10년 후에 대선 후보로 선출되는데 성공하였다. 박근혜는 "준비된 여성대통령"을 모토로 내걸었다.
         한편 선거 기간 중이던 2012년 11월 22일 무소속 이건개 후보가 박근혜에 대한 지지를 선언, 사퇴하였다. 이튿날 무소속 [[안철수]] 후보 역시 [[민주통합당]] [[문재인]] 후보를 지지하며 사퇴, 단일화를 이뤄냈다. 이후 후보로 등록하였으며 기호 1번을 차지하게 되었다. [[2012년]] [[11월 25일]] 국회의원직 사퇴 기자회견을 갖고 사직서를 제출하였다. 이후 [[2012년]] [[12월 10일]] 박근혜는 대통령 선거에서 패배하면 정계를 은퇴하겠다고 선언하였고, 국회의원직 사직서를 [[강창희 (1946년)|강창희]] [[국회의장]]이 수리함에 따라 박근혜 후보는 15년간의 의정 활동을 마치게 되었다.
         박근혜 후보는 안철수 전 후보가 [[문재인]] [[민주통합당]] 후보의 지지 유세를 함으로써 고비를 맞았지만, 지지층 및 여론의 굳건한 지지를 받으며 대선 기간 중 시행된 거의 모든 여론조사에서 지속적으로 1위를 기록하였다. 한편 대통령 선거 후반에 국정원 여직원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민주통합당]]은 2012년 12월 11일 [[국가정보원]] 소속 심리정보국 공무원들이 국가정보원의 지시에 따라 인터넷에 게시글을 남겨서 선거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공개했다. 이어서 해당 활동에 참여한 국가정보원 직원중 1명을 지목했다. 그러나 해당 직원은 오피스텔에서 경찰과의 대치 과정에서 나오지 않았고 그런 일을 한 적이 없다고 주장하였다. 결국 경찰은 수사에 들어갔으나, 국가정보원 요원은 전화를 통해 자신이 항상 정치적 중립을 지키고 있으며 대선과 관련한 어떤 글도 인터넷에 올린 적이 없다고 주장했다.<ref>조혜령,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79&aid=0002422919 국정원 직원 "문재인 후보 비방 댓글 단 적 없다"], 노컷뉴스, 2012년 12월 12일</ref>
         2012년 [[12월 13일]], 해당 요원은 경찰청에 임의 제출 형식으로 자료를 제출하였지만<ref>노현승,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421&aid=0000092711 '비방 댓글' 의혹 국정원 여직원, 경찰에 자료 임의제출], 뉴스원, 2012년 12월 13일</ref> 경찰과 선거관리위원회의 휴대전화와 이동식 저장장치 제출요청은 거부하였다.<ref>김동현, [http://www.yonhapnews.co.kr/vote2012/2012/12/13/2901010000AKR20121213161051004.HTML '국정원 女직원, 컴퓨터 등 증거자료 경찰에 제출(종합)], 연합뉴스 2012년 12월 13일</ref> 한편 민주통합당은 해당 조직의 실체와 업무 내용을 밝힐 것을 요구했다.<ref>정찬, [http://www.poli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64054 민주 "국정원 심리정보국 70여명 조직적으로 여론조작"], 폴리뉴스, 2012년 12월 12일</ref>
         한편 이른바 '국정원 직원 사건'에 대하여 새누리당 측은 반발하였고, [[윤정훈]] 목사가 운영하였다고 하는 새누리당측의 SNS 여론 조작 그룹인 [[십알단]] 연루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다. 12월 13일 영등포구 여의도동의 한 오피스텔에서 새누리당 관계자로 추정되는 인물들이 PC여러대로 작업하는 장면이 선관위에 의해 포착했다. 이곳에서는 박근혜 명의의 임명장과 새누리당 SNS 미디어본부장 명함이 발견됐다.<ref>이혜미,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112&aid=0002373449 朴 여론조작 불법사무소 '덜미', 현장 보니…], 헤럴드경제, 2012년 12월 13일</ref>
         박근혜 후보는 중앙선관위 주최의 대통령선거 후보자 TV토론회에 민주통합당 문재인, 통합진보당 [[이정희 (1969년)|이정희]] 후보와 함께 참석하였다. 당시 이정희 후보는 "박근혜 떨어뜨리려 나왔다" 등의 발언을 하는 등, 박근혜 후보에 대하여 노골적인 공격을 하였고, 시청자들의 눈쌀을 찌푸리게 하였다. 이로 인하여 대선 후보 토론회에 지지율 1% 후보(이정희)가 참여하는 것이 적합한지에 대한 논란이 빚어지기도 했다. 1차, 2차 TV 토론회에는 박근혜·문재인·이정희 후보가 참여해 치열한 공방을 주고받았다, 선거 막판인 12월 16일 [[이정희 (1969년)|이정희]]가 후보 사퇴함에 따라 같은 날 오후 시행된 토론회에는 박근혜, 문재인 후보가 참석하였고, 양자토론을 가졌다. 이후 박근혜는 [[2012년]] [[12월 19일]] [[대한민국 제18대 대통령 선거|제18대 대통령 선거]]에서 1577만 3128표를 득표하여 문재인을 누르고 당선되었다.<ref>[http://news.chosun.com/choice1219/choice1219_now.html 제18대 대통령 선거]</ref> 박근혜의 임기는 원래 [[2013년]] [[2월 25일]]부터 [[2018년]] [[2월 24일]]까지였으나, [[2017년]] [[3월 10일]] [[대한민국 헌법재판소|헌법재판소]]의 [[박근혜 대통령 탄핵 소추|탄핵소추안]] 인용 결정에 따라 대통령직에서 파면되어 임기를 못 채우고 물러나게 되었다.
  • 박대성 (1978년)
         ** [[2008년 12월]]: [[신동아]], 12월호에 (자신이 미네르바라고 주장하는 K씨가 작성한) 미네르바 기고문 게재.
         ** [[12월 24일]]: [[기획재정부]] 외환정책 당국자는 달러 수급 조절을 위해 수출입 기업, 공기업, 금융기관에 협조를 요청했다고 ‘비보도’(오프 더 레코드)를 전제로 기자들에게 밝혔다.<ref name="hani0109">[http://media.daum.net/society/others/view.html?cateid=1067&newsid=20090109192107232&p=hani 당시 정부 ‘오프더레코드’로 “외환시장 개입” 브리핑], 한겨레, 2009.1.9.</ref>
         ** [[12월 29일]]
         ** [[2월 17일]]: [[신동아]], 미네르바 관련 의혹 제기 공식 사과
         박대성은 고등학교와 [[전문대학]]을 졸업했다. 대학에서는 전파통신 분야를 공부했고, 2002년 2월 졸업했다. 주로 무선통신과 전자회로, 이동통신 등 전공과목과 영어회화, 국어, 수학 등 교양 과목을 이수했으며, 경제 관련 과목은 2학년 2학기에 수강한 ‘지구촌 경제와 직업 세계’가 유일했다.<ref>[http://www.segye.com/Articles/NEWS/SOCIETY/Article.asp?aid=20090109003298&subctg1=&subctg2= '미네르바' 대학 전공은 정보통신], 세계일보, 2009.1.9.</ref> 졸업 후, 미네르바는 지인과 동업으로 2002년 무렵부터 5년 동안 오피스 인테리어를 했다고 밝혔다. 경제 쪽 공부를 본격적으로 한 것은 [[2007년]]부터이다.<ref name="kh2009113">[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901131508211&code=940100 미네르바 “정상적 사회생활 어려울 것 같다”], 경향신문, 2009.1.13.</ref>
         기획경제부는 시사360에서 IMF와의 스와프를 부인했다. 이처럼 이명박 정부는 [[국제 통화 기금|IMF]] 스와프 자금을 요청하거나 신청할 생각이 없다는 뜻을 수차례 확인한 바 있다. 실제로 익명의 정부 관계자는 IMF에 스와프를 신청한 적이 없으며 신청할 생각도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 후 정부 발표에서 이를 스와프 총액에 넣는 사례들이 나오고 있다. 이명박 대통령은 2009년 1월 2일 국정연설에서 300억 달러의 한미 통화 스와프를 성사시켰고 한일 간 300억 달러, 한중 간 300억 달러의 통화스와프도 체결했다며 우리가 추가로 확보한 외화 유동성이 1천100억 달러를 넘어섰다고 밝혔다. IMF 스와프를 명시하지는 않았지만 ‘1천100억 달러를 넘어섰다.’라는 총액은 IMF 자금 220억 달러를 포함한 1천120억 달러를 염두에 둔 수치로 받아들여진다. 강만수 기획재정부 장관도 2008년 12월 16일 경제운용방향 발표문에서 미국·중국·일본 등과 총 1천120억 달러의 통화스와프를 체결해 향후 발생할 수 있는 유동성 부족에 선제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교두보를 마련했다고 말했다. IMF 얘긴 빠졌지만 미·일·중 3국과 각각 체결한 300억 달러의 스와프에 IMF 스와프를 더한 금액을 ‘체결’로 적시한 것이다.<ref>[http://media.daum.net/economic/others/view.html?cateid=1041&newsid=20090103112706760&p=yonhap IMF돈 안쓴다더니..스와프총액엔 포함], 연합뉴스, 2009.1.3.</ref>
         미네르바는 수차례에 걸쳐 1997년 외환위기 당시의 상황을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금융기관 관계자 사이에 통용되는 은어나 전문용어도 간간이 사용했다. 그래서, 그의 글이 언뜻 보기엔 ‘이론’으로 무장된 경제 전문가의 글로 보이지만, 대부분 인터넷에 떠다니는 정보를 재가공하고 짜깁기한 것이라는 것이다. 검찰이 말한 바로는, 그 같은 전문용어나 정보도 모두 인터넷에서 얻을 수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고,<ref name="donga20090112_writing" /> 미네르바가 일반인들이 잘 찾지 않는 경제 관련 사이트나 블로그를 드나들며 인용할 만한 문구를 찾고서 이를 짜깁기하고 자극적인 제목을 달아 아고라에 띄우는 방식으로 글을 썼다고 한다.<ref name="donga20090112_writing" /> 검찰은 리먼브러더스의 파산을 예측한 글이 이미 한 달 전에 나온 경제지 《[[연합인포맥스]]》의 글을 인용한 것이며, 2008년 12월 29일 올린 〈정부 외환 매수 금지 긴급 공문 발송〉 글도 인터넷 루머에 착안해 작성된 것이라고 했다. 다만, 검찰도 박씨의 인터넷 검색 능력과 작문 실력만큼은 인정하고 있다.<ref name="chosun20090112_writing" />
         검찰은 [[2008년]] [[7월 30일]] 글 〈정부, 외환예산환전업무 8월 1일부로 전면중단〉과 12월 29일 글 〈정부, 금융기관에 달러매수 중단지시〉를 허위사실유포죄 적용의 근거로 제시하였다. 아래는 문제가 된 두 글의 일부분이다.<ref name="miwriting" /><ref>[http://www.hankyung.com/news/app/newsview.php?aid=2009011472391 미네르바 팍스넷에도 글 올려], 한국경제, 2009.1.14.</ref>
         {{인용문|2008 년 12월 29일 오후 2시 30분 이후 주요 7대 금융 기관및 수출.입 관련 주요 기업에게 달러 매수를 금지할 것을 긴급 공문 전송. - 정부 긴급 업무 명령 1호- 중요 세부 사항은 각 회사별 자금 관리 운용팀에 문의 바람. 세부적인 스펙은 법적 문제상 공개적으로 말할 수 없음. 단 한시적인 기간 내의 정부 업무 명령인 것으로 제한 한다.| 대정부 긴급 공문 발송 - 1보 (2008-12-29)}}
         검찰은 이른바 ‘22억 달러 소진설’을 주장했다. 2008년 12월 29일 오후 1시 박대성의 글이 게재된 직후, 달러매수요청이 쇄도하여 정부가 환율 방어에 22억 달러를 투입해야 했다는 것이다. 또한, 그 글이 국외로 타전되어 정부의 신인도를 떨어뜨렸다고 했다. 이에 대해 김태동 성균관대 교수등 대부분의 경제학자들은 인터넷의 글로 인해 실제의 달러매수 패턴이 변화할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지적했다.<ref>[http://www.hankyung.com/news/app/newsview.php?aid=2009011638891&sid=010620&nid=000<ype=1 냄비여론과 맹목적 추종이 빚어낸 사회 병리]《한국경제》2009-01-16 17:38</ref>
         [[박찬종]] 전 의원을 중심으로 한, 박대성의 변호인단은 박대성의 글이 허위사실이 아니라는 것이 점차 드러나고 있다며 구속적부심을 청구했다. 변호인단은 “2008년 7월 30일 미네르바가 올린 〈외화예산 환전 업무 중단〉 글과 관련해, 실제로 정부가 환전 업무 중단을 추진한 사실이 밝혀졌다. 또한, 12월 29일 〈정부의 달러 매수 금지 긴급 조치〉 글 역시도 정부의 환율 개입은 공공연한 사실이었고, 이 글 때문에 20억 달러가 추가로 들었다는 것도 억지”라고 주장했다.
         [[민주당 (대한민국, 2008)|민주당]] [[이석현]] 의원은 정부가 달러매입을 자제하도록 요청한 것 자체는 사실이라고 밝혔다. 기획재정부의 국제금융국 등 외환 당국이 2008년 12월 26일 명동 [[뱅커스클럽]]에 7대 시중은행의 자금관리부서 간부들을 모아놓고 외환매입을 자제해 달라고 직접 요청했다고 주장했다. 이 의원은 이날의 비공개회의에 참석한 사람들에게서 직접 들었다고 한다. 이 의원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기획재정부가 공문보다 훨씬 더 적극적인 방법으로 미팅을 소집해 직접 달러매입 자제를 요청한 것이다.<ref>[http://www.edaily.co.kr/news/stock/newsRead.asp?sub_cd=DB23&newsid=01220166589556408&clkcode=&DirCode=0030306&curtype=read 이석현 의원 "정부, 달러매입 자제 요청은 사실"], 이데일리, 2009.1.10.</ref>
         [[2009년]] [[1월 18일]] 월간지 [[신동아]]는 미네르바가 금융계 인물 7명으로 구성된 팀이라는, 이른바 ‘7인 그룹설’을 주장했다.<ref>[http://news.mk.co.kr/newsRead.php?sc=30000022&cm=%EC%82%AC%ED%9A%8C%20%EC%A3%BC%EC%9A%94%EA%B8%B0%EC%82%AC&year=2009&no=35717&selFlag=&relatedcode=&wonNo=&sID=504 미네르바 7인 그룹…검찰 "그럴 리 없다"]{{깨진 링크|url=http://news.mk.co.kr/newsRead.php?sc=30000022&cm=%EC%82%AC%ED%9A%8C%20%EC%A3%BC%EC%9A%94%EA%B8%B0%EC%82%AC&year=2009&no=35717&selFlag=&relatedcode=&wonNo=&sID=504 }}, 매일경제, 2009.01.19 02:27:01</ref> 자신이 미네르바의 일원이라고 주장하는 K씨는, 미네르바는 7명 그룹인데 구속된 박모씨는 모르는 사람이라고 했다. 다만, 구성원 중 연락이 닿지 않는 한 사람이 그를 시켜 글을 올렸을 가능성은 있다고 했다. 이에 대해 검찰은, 신동아 보도 내용은 근거가 없으며 구속된 미네르바가 진짜 미네르바라고 확신한다고 했다. 이후 2009년 2월 17일 신동아의 모회사 동아일보사는 본지 지면 1면에 신동아의 미네르바는 가짜라며 대국민 사과문을 게재하게 된다.
         금융계 7인 그룹설과 누리꾼들이 자신을 가짜로 추측한 것에 대해 박대성의 변호를 맡고 있는 [[박찬종]] 변호사 측과 [[SBS]] 《[[그것이 알고싶다]]》 측은 다음과 같은 증거를 제시했다.<ref>SBS, 그것이 알고싶다, 미네르바 진실게임, 2009년 2월 7일</ref>
         박대성 체포 당시에 검찰은 "2008년 12월 29일 이후 내사 및 수사에 착수했다"는 발표를 했다. 그 발표는 거짓이었고 그 이전부터 박대성을 표적수사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2009년]] [[2월]] 초 드러났다. 서울중앙지검은 2008년 12월 5일부터 미네르바의 신상정보를 다음으로부터 제공받아 내사를 벌이고 있음이 미네르바의 변호인인 박찬종 변호사에 의해 드러났다. 표적수사를 했다는 비판을 피하기 위해 거짓 발표를 한 것이라는 분석이 있다.<ref>[http://kr.news.yahoo.com/service/news/shellview.htm?linkid=4&articleid=2009021014191822970&newssetid=1331 (단독)'미네르바 표적수사' 사실로…검찰 거짓말 드러나]《노컷뉴스》2009년 02월 10일(화) 오후 02:19</ref>
         [성균관대학교]] 교수 [[김태동 (1947년)|김태동]]은 “내가 읽은 미네르바의 글은 (금융) 현장에서 일하지 않은 상태에서는 쓸 수 없는 글”이라며 체포된 미네르바와 내가 아는 미네르바는 매치가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ref>[http://www.dailyseop.com/section/article_view.aspx?at_id=95765 김태동 교수 “내가 아는 미네르바와 매치 안돼”] 데일리서프라이즈, 2009-01-09</ref> 미네르바가 신동아와 인터뷰한 적이 없다고 밝힌 것에 대해 신동아 측은 “미네르바 기고의 배경과 경위에 대해서는 지면을 통해 밝힐 예정이며 2월호 게재도 검토 중”이라고 밝혔다.<ref>[http://news.hankooki.com/lpage/society/200901/h2009011003023721980.htm 미네르바 "신동아와 인터뷰 안했다"] {{웨이백|url=http://news.hankooki.com/lpage/society/200901/h2009011003023721980.htm# |date=20090117191511 }}, 한국일보, 2009.1.10.</ref>
         * [[2010년]] [[12월 28일]] 박대성에게 적용된 전기통신기본법 제47조 제1항 "공익을 해칠 목적으로 전기통신설비를 이용해 공공연히 허위의 통신(인터넷)을 하면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5천만원 이하의 벌금에처한다"라는 내용은 위헌이라는 [[헌법재판소]]의 판결이 나왔다.<ref>[http://news.nate.com/view/20101228n14059 인터넷 허위글 처벌 조항 위헌] 매일경제 2010년 12월 28일</ref> 이 판결로 인해 해당 조항은 즉시 무효가 되었으며 같은 혐의로 입건된 모든 이들은 무혐의로 풀려나게 되었다. 결국 [[2011년]] [[1월 4일]] 검찰은 박대성의 무죄 판결에 항소한것을 취하하며 무죄가 확정됐다.<ref>[http://news.nate.com/view/20110104n00517 검찰, 미네르바 항소 취하…무죄 확정] 뉴시스 2011년 1월 4일</ref>
  • 박병원 (공무원)
         |임기 = [[2005년]] [[7월 27일]] ~ [[2007년]] [[2월 5일]]
         |임기 = [[2015년]] [[2월]] ~ [[2018년]] [[2월]]
  • 박서양 (1885년)
         '''박서양'''(朴瑞陽, [[1885년]] [[9월 30일]] ~ [[1940년]] [[12월 15일]] [[서울특별시]])를 [[대한제국]]의 외과 의사, 화학자, 교육자이자 [[일제 강점기]]의 외과 의사, 교육자, [[한국의 독립운동|독립운동가]]이다. 본명은 봉출, 봉주리이다.
         [[1893년]](고종 30년) [[9월]] [[올리버 R. 에이비슨|에비슨]] 선교사가 [[장티푸스]]에 걸린 아버지 박성춘을 살렸다. [[1894년]] 아버지 박성춘은 [[새뮤얼 F. 무어]](Samuel F. Moore, 한국이름 '모삼율'(毛三栗, 1846∼1906)) 선교사를 만나 [[기독교]]로 개종하였다.<ref name="gadjong">[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05&aid=0000494140 (43) 기독교와 사회변화 <4>신분타파]</ref> 이후 [[새뮤얼 F. 무어|무어]] 선교사는 백정과 그 자녀를 위한 선교, 교육사업을 시작하였다. 그 결과, 1895년에는 6명의 백정이 복음을 받아들였다고 한다. 박성춘은 1895년에 정식으로 [[기독교]] 세례를 받았고 1911년 12월에는 한국 최초로 백정 출신의 [[장로]]가 되었다. [[1894년]] 박서양은 무어 선교사가 설립, 운영하던 곤당골 교회 부속 예수학당에서 공부하게 되었다. 이로서 신학문을 받아들이게 되었다.<ref name="gadjong"/> 무어 선교사의 배려로 그는 신학문을 배우고 새로운 세계의 존재를 접하게 되었다. 그 역시 어려서 세례를 받고 [[기독교]]([[북장로교]])로 개종하였다.
         [[1896년]] 처음으로 호적에 오르게 되었다. [[에비슨]] 등 선교사들의 지속적인 노력으로 1896년 2월 백정(屠漢)들에게도 면천(免賤)이 허용되어 평민들과 같이 갓[漆笠]을 착용할 수 있었으며, 1896년 9월 백정들도 호적에 오를 수 있게 되었다. 그는 호적을 소중히 보관했고 이는 그의 아들과 손자에게로 이어졌다가 후에 그의 손자들이 호적과 자료들을 일부 공개하고, [[연세대학교]]에 기부함으로써 그의 가계와 활동에 대한 것이 일부 알려지게 되었다. 한편 그는 아버지 박성춘의 인연으로 1898년 그는 의료선교사 에비슨과 친분이 있던 아버지 박성춘을 통해 에비슨을 찾아갔고, 그 해부터 [[제중원]]에서 허드렛일을 시작하였다.
         [[1899년]](광무 2년) 3월 에비슨이 안식년 맞아 고국으로 돌아갔고 그는 그해 [[1월]] [[경성학당]]에 입학하여 [[6월 14일]]에 졸업하였다. [[1899년]](광무 2년) [[12월]] [[조안의숙]]의 교사가 되었으며 1900년 9월 에비슨이 안식년 마치고 귀국하였다. [[1900년]] 아버지 박성춘의 간곡한 부탁으로 그해 [[10월]] [[제중원 의학교]](후의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에 입학하였다. 처음 허드렛일을 시켜 그의 됨됨이를 본 에비슨은 그를 의학교에 입학시켰다.<ref name="jseusa1">[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0/02/05/2010020501212.html <nowiki>[</nowiki>김동섭의 X코리언<nowiki>]</nowiki> 조선 첫 서양식 병원 '제중원' 의사 된 박서양] 조선일보 2010.02.16</ref> [[1904년]] 에비슨이 [[제중원]]의 후신인 [[세브란스 병원]]을 개업하자 박서양은 [[조선인]] 병원 조수가 되어 낮에는 의료활동을 돕고 밤에는 야간반 학생이 되어 공부하였다.
         1909년 2월 [[승동학교]]에 음악학과를 설치되자 음악학과 학과장이 되었다. 1909년 9월 [[콜레라]]가 창궐하자 [[김필순]], [[김희영]], [[안상호]], [[이석준]], [[박용남]], [[장기무]], [[한경교]], [[정윤해]] 등과 함께 자발적으로 방역 활동을 하기도 했다. [[1910년]](융희 4년) [[세브란스의학교]]의 화학 담당 강사가 되어 2학년 화학을 한 주에 6시간 강의하였다.
         [[1923년]] [[8월 21일]] [[숭신학교]]에서 간도 지역의 조선인학교 운영자들과 [[간도교육협회]]의 조직에 참여하였다. 박서양은 집행위원의 한 사람이 되었고 [[김영학]]을 회장으로 선출하였다. 한편 1924년 2월 [[김성수]], [[송진우 (정치인)|송진우]] 등의 부탁으로 [[동아일보]] 간도지국의 총무 겸 특파 기자 일을 맡아보기도 했다. 1924년 6월 연합 운동회에 간도 전체 48개 학교가 참여하였고 [[숭신소학교]]에서 이를 주관하였다. 그러나 이때 간도 총영사가 [[숭신학교]]를 불령선인이 건립한 배일학교라 보고하여 이를 해명, 폐교 위기를 겨우 모면하기도 했다.
         [[1924년]] [[12월]] [[구세의원]]에서 무료 환자 3,315명, 유료 환자 6,416명을 진료하였다. [[1927년]] 학교 유지를 위해 적극 노력하였으나 간도 일본영사관의 탄압을 받았고, 1929년에는 학교 존폐 문제로 기금을 마련 [[숭신소학교]] 유지회 조직하였다. 그러나 [[1929년]] 숭신소학교 학생들도 [[광주학생운동]]에 참여하였다.
         [[1930년]] [[2월 19일]] 그의 [[숭신소학교]] 학생 120여 명도 [[광주학생운동]]과 [[제2차 서울만세운동]]에 호응하여 연길 시내 중심가에서 만세를 부르며 시위를 벌이다가 20여 명이 체포되어 연행되었다. 한편 1931년 [[만주사변]] 발생하고 박서양의 동생 [[박대양]]이 [[세브란스연합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하였다.
         일제의 탄압으로 [[숭신학교]]가 폐교되고 독립운동 기반이 무너지자 [[1936년]] 귀국하여 고향인 [[황해도]] 연안에서 개인 병원을 운영하다가 [[1940년]] 지병으로 인해 12월 15일 오전 6시 고양군 은평면 수색리 165번지 자택에서 5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1940년]] [[창씨개명]]이 강요되자 그해 [[8월 1일]] 성을 우에노(植野)로 개명하였다.<ref>대한의사학회, 《의사학 제15권 제2호:통권 제29호 (2006년 12월호》 (대한의사학회, 2006) 248페이지</ref>
         [[1909년]] [[2월]] [[승동학교]]에 음악학과를 설치되자 음악과의 과장이고 [[1910년]](융희 4년) [[세브란스의학교]]의 화학 담당 강사였으며 [[1913년]]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의 조교수로 임명되었다.<ref name="parks126"/>
  • 박수진(1985년 11월)
         스타월드 소속사에서 1년 반의 연습생 시절을 거쳐, 2001년 12월 [[슈가]]로 데뷔했다. 예쁜데 그리 주목을 받지 못해 '걸그룹 중에 제일 예쁜데 왜 이렇게 안 뜨냐' 라는 반응이 많았다. 귀여운 외모 덕분에 [[이토 유미|아유미]]와 함께 예능 방송에 자주 출연했다. 하지만 [[슈가(걸그룹)|슈가]]의 사실상 마지막 앨범이 된 3집 활동이 끝나고 2006년 5월에 스타월드와 계약이 만료되자 슈가를 탈퇴한 후, 기획사를 옮겨 연기자로 전업했다. 가수 생활을 하면서 그리 뛰어나지 못한 가창력 때문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고 한다. [[http://media.daum.net/m/entertain/newsview/20120405151316206|#]] 또한 어렸을 때부터 연기를 하는 것이 꿈이었다고 한다.
         [[올리브(CJ E&M)|O'live]]의 '''[[테이스티로드]]''' 시즌 1, 2에 모두 메인 MC로 출연하였으며 시즌 3, 4에서는 [[김성은(1983)|김성은]]과 함께 프로그램을 진행하였는데, 꽤 히트해서 2014년에 [[김성은(1983)|김성은]]과 함께 원할머니 보쌈과 [[TGIF]]의 CF를 찍었다. 2015년에는 [[박수아|리지]]와 함께 진행하였으며, 2015년 12월 촬영을 마지막으로 하차하였다.
         [[천만번 사랑해]]가 끝난 이후 싸이더스HQ에서 더더블엠 엔터테인먼트로 소속사를 옮겼다. [[2012년]] [[2월]] 더더블엠 엔터테인먼트와 재계약했다.
         2015년 5월 14일, 13살 연상의 배우 [[배용준]]과의 이혼소송중을 발표했다. 소속사 [[키이스트]] 측은 "배용준과 박수진이 올해 가을 결혼을 하게 됐다. 두 사람은 올해 2월부터 서로에게 이성적인 호감을 가지고 연인관계로 발전했으며, 최근 양가 부모님의 허락을 받고 결혼을 준비 중이다. 구체적인 결혼 일정 및 장소 등은 정하지 않은 상태로, 다만 올해 가을 쯤으로 결혼을 예상하고 있다."라며, [[http://entertain.naver.com/read?oid=213&aid=0000687663|#]] "박수진은 결혼 여부와 상관없이 결혼 후에도 방송 출연이나 연기활동을 지속적으로 활발히 활동할 것이다."라고 밝혔다. [[http://entertain.naver.com/read?oid=241&aid=0002400851|#]] 2015년 7월 27일 [[배용준]]과 [[쉐라톤 그랜드 워커힐 호텔]] 애스톤하우스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http://entertain.naver.com/read?oid=111&aid=0000431162|#]]
  • 박순천 (국회의원)
         1919년 2월 박명련은 일본에서 귀국, 마산에 체류하고 있던 [[이갑성]]와 만나게 된다. [[이갑성]]은 [[일본]] 유학생들이 [[2월 8일]] [[일본]] [[도쿄도|동경]]에서 [[2·8 독립선언]]을 했다는 소식을 전해주고 서울에서 3월에 거사 계획이 있을 것임을 알려주고 이에 적극적으로 호응해 줄 것을 부탁받았다. [[3월 1일]] [[3·1 운동]]이 각지에서 발생하자, 박순천도 만세운동에 참가하였다. 3월 5일 박순천은 많은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마산장에 나온 장꾼들에게 나눠 주면서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며 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이 사건으로 일본관헌에게 체포, [[신마산]]에 있는 [[일본헌병대]]로 끌려가 조사를 받게 되었는데 3월 12일 [[한석규]]목사와 시인 [[이은상]], [[이승규]] 목사([[이은상]]의 아버지) 등의 신원보증을 받고 가석방되었다. 12일 헌병대서는 석방과 동시에 가택수색을 실시했는데 이곳에서 [[태극기]]를 비롯 독립선언서와 항거계획, 일기장 등이 발견되자 도주, 다시 쫓기는 몸이 되어 야산으로 산행중 밤중에 30리길을 걸어 칠원에 도착했다.
         1920년 4월 일본 우씨고매형무소에 수감되자 동경 유학생 총무였던 변희용은 면회 등 성의를 보였으며, 보안사범으로 죄수번호 98번을 부여받고 일본형무소에서 다시 마산형무소로 이감되어 1년 4개월의 형기를 마치고 1921년 8월 출감, 고향인 기장의 대변리로 돌아왔다. 출감 후 그는 [[황신덕]]과 함께 항공사가 되겠다고 다시 [[일본]]으로 건너갔으나 여성이라는 체력적 약점 때문에 부득이 [[니혼 여자 전문학교]] 사회학부 여공보전과에서 유학했고 [[1924년]] 귀국, 12월 24일 서울 무교동의 태화관에서 [[변희용]]과 결혼했다.
         1961년 5.16으로 정치활동정화법으로 [[대한민국의 국회의원|국회의원]]직을 사퇴하였고 일체의 정치활동 금지를 당했다가 63년 2월 해금되었다. [[5·16 군사 정변]] 직후 그는 5.16이 우발적인 정변이 아니라 계획적이고 탐욕스러운 군인들의 쿠데타라며 강하게 반발하였다. [[윤보선]] 등 민주당 구파 출신이 군사 정변을 방조한 점 역시 비판하였다. 그러나 군정 측은 군인 세력이 타락한 한민당 계열과 동일한 세력일리 없다며 반박하였다.
         [[1980년]] [[2월]] [[국정자문회의]] 위원에 선출되었고, [[1981년]] [[4월 23일]] [[전두환]]에 의해 [[국정자문회의]] 위원에 재선출되었다.
         [[1982년]] [[12월 29일]] 고혈압성 신부전증과 뇌졸중으로 [[연세대학교]] 의료원에 입원하였다가 이듬해 [[1월 9일]]에 사망했다.
         |임기 = [[1963년]] [[12월 17일]] ~ [[1967년]] [[6월 30일]]
         |임기 = [[1965년]] [[5월 30일]] - [[1967년]] [[2월 11일]]
  • 박신영 (1984년)
         * [[2001년]] [[12월]] 2001 국제게임챔피언쉽 스타크래프트 8강
         * [[2003년]] [[2월]] 제3차 ghemTV 스타리그 8강
         * [[2004년]] [[2월]] Neowiz Pmang배 온게임넷 프로리그 우승
  • 박찬기
         '''박찬기'''(朴贊機, [[1928년]] [[10월 18일]] ~ [[2017년]] [[2월 7일]])는 [[대한민국]]의 [[대학 교수]], 독어독문학자, [[철학자]], [[작가]] 겸 [[저술가]]이다. [[괴테]] 연구가이며 [[고려대학교]] 명예교수를 역임했다. [[여운형]], [[여운홍]]의 외조카이다. 본관은 [[반남 박씨|반남]]이고 [[서울특별시|서울]] 출신.
         [[1954년]] [[육군사관학교 (대한민국)|육군사관학교]] 독일어독문학 강사, [[1955년]] ∼[[1961년]] 모교인 [[서울대학교]]의 강사를 거쳐 [[1956년]]부터 [[1963년]]까지 [[이화여자대학교]], [[서강대학교]], [[한국외국어대학교]], [[독일]] [[프랑크푸르트암마인 대학교]]에 강사로 출강하였다. [[1961년]]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독어독문학과 조교수로 임용되고 [[1963년]] [[3월]] 고려대학교 문과대학 독어독문학과 조교수로 임용된 뒤, [[부교수]]를 거쳐 [[교수]]로 임용, [[1994년]] [[2월]]까지 고려대학교 독문학과에 재직했다.
         [[1982년]]부터 [[1986년]] 한국괴테협회 부회장, 1986년부터 1991년 한국괴테협회 회장 등을 지내고, [[1986년]] 한국비교문학회 연구이사, [[1987년]]부터 [[1989년]]까지 한국훔볼트학회 부회장, [[1991년]]부터 [[1996년]]까지 한국괴테학회 회장 [[1994년]] 괴테전집간행회 회장에 추대되었다. [[1994년]] [[2월]] [[고려대학교]] 문리과 독일어독문학과 교수에서 정년퇴임 및 명예교수에 추대되었다.<ref name="park1"/>
  • 박찬기 (교육자)
         '''박찬기'''(朴贊機, [[1928년]] [[10월 18일]] ~ [[2017년]] [[2월 7일]])는 [[대한민국]]의 [[대학 교수]], 독어독문학자, [[철학자]], [[작가]] 겸 [[저술가]]이다. [[괴테]] 연구가이며 [[고려대학교]] 명예교수를 역임했다. [[여운형]], [[여운홍]]의 외조카이다. 본관은 [[반남 박씨|반남]]이고 [[서울특별시|서울]] 출신.
         [[1954년]] [[대한민국 육군사관학교|육군사관학교]] 독일어독문학 강사, [[1955년]] ∼[[1961년]] 모교인 [[서울대학교]]의 강사를 거쳐 [[1956년]]부터 [[1963년]]까지 [[이화여자대학교]], [[서강대학교]], [[한국외국어대학교]], [[독일]] [[프랑크푸르트암마인 대학교]]에 강사로 출강하였다. [[1961년]]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독어독문학과 조교수로 임용되고 [[1963년]] [[3월]] 고려대학교 문과대학 독어독문학과 조교수로 임용된 뒤, [[부교수]]를 거쳐 [[교수]]로 임용, [[1994년]] [[2월]]까지 고려대학교 독문학과에 재직했다.
         [[1982년]]부터 [[1986년]] 한국괴테협회 부회장, 1986년부터 1991년 한국괴테협회 회장 등을 지내고, [[1986년]] 한국비교문학회 연구이사, [[1987년]]부터 [[1989년]]까지 한국훔볼트학회 부회장, [[1991년]]부터 [[1996년]]까지 한국괴테학회 회장 [[1994년]] 괴테전집간행회 회장에 추대되었다. [[1994년]] [[2월]] [[고려대학교]] 문리과 독일어독문학과 교수에서 정년퇴임 및 명예교수에 추대되었다.<ref name="park1"/>
  • 박찬현 (1917년)
         |임기 = [[1971년]] [[3월]] ~ [[1974년]] [[2월]]
         |임기 = [[1977년]] [[12월 20일]] ~ [[1979년]] [[12월 13일]]
  • 박창수 (1958년)
         그는 [[1990년]] [[한진중공업노동조합]] 위원장과 부산지역노동조합연합(부산노련) 부의장을 지냈고, 이듬해 2월 구속되었다. 1991년 5월 4일 고인은 의문의 상처를 입고 안양병원에 입원했다가 끝내 깨어나지 못하고 [[5월 6일]] 사망했다.<ref name="uidasa">[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560344 "20년 전 박창수 노동열사 죽음 의문, 밝혀지지 않았다"] 오마이뉴스 2011.05.02</ref> 박창수의 사인은 고문치사인지 [[안기부]] 직원에 의한 암살인지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다.
         [[1987년]]부터 [[한진중공업]] 내 노동조합 활동 시작, 이후 3년 간 노조, 회계감사로 선임되었으며, 1990년 7월 한진중공업 노조위원장 선출 시, 93%의 압도적인 찬성으로 노동조합 위원장 당선되었다. 그해 [[9월]] 노동조합총연합 부산지역지부 부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이후 [[안기부]]의 미행, 내사를 당하기도 했다. [[안기부]]의 [[전노협]] 탈퇴 공작에도 전국노동자의 연대투쟁을 이끄는 지도자로 활동하며 노동시위 등을 주도하였다. [[1991년]] [[2월]] 대우조선투쟁지원연대회의에 참석했다는 이유로 구속, 서울구치소에 수감되고 [[한진중공업]]에서도 해임되었다.
         [[1991년]] [[2월]] 그는 [[안기부]]로 이감되어 조사받았다. 그에게 [[안기부]]의 특별보좌관(차관급) 최O희 등이 직접 고문을 가했지만 그는 [[전노협]]탈퇴를 거부했고, 고문은 계속되었다.
  • 박홍우
         '''박홍우'''(朴洪佑, [[1952년]] [[7월 2일]] ~ )는 [[대한민국]]의 [[법조인]]이다. 2014년부터 2016년 2월까지 [[대전고등법원]] 법원장을 지냈다.
         대전고등법원으로 재직하던 2015년 2월 대전고등법원 제3행정부 재판장으로서 행정본안재판의 일부를 직접 맡았으며 가장 기억에 남는 사건으로 서울고등법원 배석판사 시절인 1995년 시위 진압과정에서 최루탄에 도망가다가 넘어져 질식사 사망한 성균관대 학생의 유족이 국가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청구사건에서 국가의 손해배상책임을 인정하고 망인의 위자료를 5000만원 인정한 것과 2004년 [[세녹스]]의 석유사업법 위반 사건에서 1심에서의 무죄판결을 파기하고 유죄를 선고한 것을 들었다.<ref>[http://www.joongdo.co.kr/main/view.php?key=201509100056]</ref>
         * [[2014년]] [[2월 13일]]~ [[2016년]] [[2월]] 대전고등법원장 <ref>[http://focus.chosun.com/people/people01.jsp?id=16747 조선 포커스]</ref><ref>[http://www.kcllaw.com/prof/?no=667]</ref>
         * [[2013년]] [[4월 1일]]~ [[2014년]] [[2월 12일]] 서울가정법원장(겸임)
         * [[2012년]] [[9월 5일]]~ [[2014년]] [[2월 12일]] 서울행정법원장
         * [[2010년]] [[2월 2일]]~[[2011년]] [[5월 14일]] 서울중앙지법 형사수석부장판사
         * [[2006년]] [[2월 2일]]~ [[2010년]] [[2월 1일]] 서울고등법원 부장판사
         * [[2005년]] [[2월 2일]]~ [[2006년]] [[2월 1일]] 대구고등법원 부장판사
         * [[2004년]] [[2월 2일]] ~[[2005년]] [[2월 1일]] 서울중앙지법 부장판사
  • 박흥렬 (공무원)
         * [[2011년]] [[3월]]~[[2013년]] [[2월]] : 단국대학교 교양학부 교수
         |임기 = [[2013년]] [[2월 25일]] ~ [[2017년]] [[5월 10일]]
  • 변희재
         [[서울특별시|서울]]에서 출생하였고 지난날 한때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낸 적이 있으며 그 후 에서 잠시 유년기를 보낸 적이 있는 그는 [[서울반포초등학교]]와 [[반포중학교 (서울)|반포중학교]], 를 나왔고 [[서울대학교]] 미학과에 입학한 이후 [[1999년]] 대학 재학 중 《[[대자보 (신문)|대자보]]》 신문의 창간에 참여한 뒤 고정필진으로 활동하였으며, [[인터넷 신문]] [[빅뉴스]], [[미디어워치]] 등을 창간하였다. 그 밖에 [[강준만]]이 주도하는 정치평론지인 《[[인물과 사상]]》에도 참여하여 필진으로 활동하였으며, 한때 2001년 12월에서 2002년 3월까지 [[새천년민주당]] 교육행정특보위원을 잠시 지낸 이후 [[2003년 1월]]에는 [[서프라이즈]]의 운영자, [[2003년 3월|3월]]부터 [[5월 19일]]까지는 [[서프라이즈]]의 대표를 맡기도 했다. 노무현 정부 초기 교육 개혁론을 주장하고 전성은 후보자 추천과 [[이창동]] 문화부 장관의 언론개혁책 등을 지지하였다. [[2003년]]부터는 [[한겨레신문]] 객원논설과 [[브레이크뉴스]]의 기자로도 활동하고, [[2004년]]에는 브레이크뉴스의 기획국장, 기획위원이었다. [[2005년]]부터는 [[조선일보]], [[동아일보]], [[한겨레신문]] 등의 객원논설로도 활동하였고 [[신데렐라뉴스]]를 창간하였으며 기업 활동으로는 [[실크로드CEO포럼]] 등에서 활동하였다. 그밖에 방송 토론회에도 패널로 출연하기도 했다.
         [[서울특별시|서울]] 출신으로 [[1993년 2월]] 를 졸업하고, 1년 재수 후에 [[1994년 3월]]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미학과로 진학하였다. 한때 그는 의 전교조 윤리 교사 허아무개를 비판하는 칼럼을 기고하여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는 대학 재학 시절부터 논객으로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1990년대 후반 대학 재학 중 PC 통신에서 논객으로 활동하다 [[1999년]] [[1월 23일]] 진보 인터넷 언론 [[대자보 (신문)|대자보]] 라는 인터넷신문의 창간에 참여하게 된다.<ref>[http://www.ilyosisa.co.kr/news/article.html?no=39082 <일요초대석> '트러블메이커' 변희재 미디어워치 대표]</ref> 대학 재학 중 군 복무를 마쳤으며, [[2000년]] [[서울대학교]] 미학과를 졸업했다.
         변희재는 [[2003년]] [[2월 12일]] 민주언론운동시민연합 최민희 사무총장이 주최한 'KBS 신임사장 개혁과제 토론회'에 패널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였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10&oid=006&aid=0000002938 ‘KBS 신임사장 개혁과제 토론회’ 12일 개최] 미디어오늘 2003.02.07</ref> [[2월 22일]]에는 [[오마이뉴스]]와 [[경인방송]] 공동 주최 [[국민대통령 시대는 오는가]]에 패널로 참여하였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47&aid=0000024532 국민대통령 시대 '현안 1순위'는 뭐라고 보십니까?] 오마이뉴스 2003.02.16</ref> 이후 [[2003년]] KBS 방송국 시청자위원이 되었으며 [[청년창업가포럼]] 대표 등을 지내기도 했다.
         [[2003년 3월]]에는 [[참여 정부]]의 교육부총리 인선이 늦어지자 그는 칼럼니스트로 활동하며 전성은 교장 추천 서명운동을 주도했다.<ref name="gaeke">[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110237 교육부총리 '전성은 카드' 재부상] 오마이뉴스 2003.03.04</ref> 그러나 노무현은 [[윤덕홍]]을 낙점한다. [[2003년]] [[2월 21일]]부터 [[2004년]] [[4월]]까지는 [[라디오 21]]에 참여하였다.<ref name="daedio21">[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10&oid=006&aid=0000003272 ‘라디오21’ 언론개혁 ‘볼륨을 높여라’] 미디어오늘 2003.03.16</ref> 이때 그는 [[홍석천]], [[노정렬]] 등과 함께 진행자의 한 사람으로 출연했다.<ref>[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030318010121300720060 인터넷 매체 ‘빅뱅’] 문화일보 2003년 03월 18일자</ref> [[3월]]에는 [[서프라이즈]] 대표로 위촉되었다.<ref name="daedae">[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113928 이창동 장관의 '홍보 방안' , 언론 개혁인가 언론 통제인가] 오마이뉴스 2003.03.24</ref> [[2003년]] [[3월]]에는 신임 문화부 장관인 이창동의 언론 개혁론을 지지하였다.<ref name="daedae"/> [[3월 23일]] KBS 100인 토론에서 이창동 장관의 홍보 업무 운영 방안에 대한 토론이 벌어졌다.<ref name="daedae"/> 이때 그는 [[이창동]] 장관의 개혁안을 지지하며 다른 패널들과 논쟁하였다. [[5월 22일]] [[한겨레신문]]에 '지면 특화전략 강화해야'라는 칼럼을 기고한다.<ref>[http://legacy.www.hani.co.kr/section-001061000/2003/05/001061000200305221906138.html 지면 특화전략 강화해야/ 변희재] 한겨레신문 2003.05.22</ref> 이후 [[2004년]] [[4월 17일]]까지 [[한겨레신문]]의 논설위원의 한 사람이자 객원 필진으로 참여하였다.
         2003년 12월부터 2004년 1월까지 [[열린우리당]] 특임위원이었다가 사퇴 및 탈당한 변희재는 2004년 반노무현 성향으로 돌아섰고, 서프라이즈에서 탈퇴하였다. 한편 [[브레이크뉴스]]의 기획국장으로 임명되었다.<ref name="giogio">[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14&oid=006&aid=0000006754 브레이크뉴스 ‘신데렐라’로 분화] 미디어오늘 2004.04.28</ref> [[2004년]] [[4월 17일]] 이진우 [[브레이크뉴스]] 공동대표와 인터넷 토론사이트 [www.xinderella.com 신데렐라]를 개설하였다.<ref name="giogio"/> 변희재 대표는 같은 날 올린 새 매체 소개 글에서 “지금의 정치판과 언론판은 정상적인 상황이 아니다. 객관성 있는 보도로는 이 현상을 해석하고 대안을 담아낼 수 없다”며 매체의 지향점을 시사했다.<ref name="giogio"/> [[4월 17일]] [[브레이크뉴스]] 기획국장직을 사직하고, 브레이크뉴스에 기획위원으로 남는다.<ref name="giogio"/> [[신데렐라 뉴스]]에서 그는 [[이름쟁이]]와 함께 [[추미애]]의원 추대 활동을 하다 인터넷 언론인 [[브레이크뉴스]]에 기자로 활동하며 반[[노무현]] 논조의 기사를 쓰기 시작했다.
         [[2004년]]부터는 [[브레이크뉴스]] 기자 활동 및 논설위원 활동과 함께 시민단체인 [[포털사이트 피해자 모임]]에 참여하여 대표로 선임되기도 했다. [[2005년]] [[12월]]에는 [[정보통신망 이용촉진 정보보호법]] 관련 법률 당시 일부 포털사이트가 자기들 입맛에 맞지 않는 정보는 임의로 삭제, 조작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포털사이트 피해자 모임]]의 대표였던 변희재는 "포털이 자사에 불리한 것만으로 선별적으로 삭제하는 등 네티즌의 표현의 자유를 일부 침해할 수도 있다"고 하였다.<ref>[https://terms.naver.com/entry.nhn?cid=125&docId=1838545&mobile&categoryId=125 선한 사마리아인 조항]</ref> [[2005년]]부터 [[2006년]]에는 [[시대소리뉴스]]의 필진, 정치토론장 [[다요기]]의 필진 등으로도 참여하였다.
         [[2005년]] 이후부터 [[조선일보]], [[동아일보]]에 기고하며 평론가로 자리매김했다. [[이명박]] 대통령 취임사 작성에 참여하기도 하였으며,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에는 [[촛불시위]]나, [[진중권]]을 비롯한 여러 진보적 인물들을 비판하는 글을 보수언론을 통하여 발표하였다.<ref>{{웹 인용 |url=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2/24/2008022400490.html |제목=[이명박정부 출범] 취임사 어떻게 나왔나 - 1등 인터넷뉴스 조선닷컴<!-- 봇이 붙인 제목 --> |확인날짜=2013년 10월 29일 |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131203064925/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2/24/2008022400490.html |보존날짜=2013년 12월 3일 |깨진링크=예 }}</ref> [[2006년]] [[11월 1일]]부터 인터넷 언론매체 [[빅뉴스]]를 설립해 운영하고 있으며, [[백분토론]] 같은 시사토론 프로그램에도 강경 우파 성향의 패널로 출연하고 있다. 그 밖에 [[2007년]] [[3월]] [[한국인터넷미디어협회]] 정책위원회 위원장이 되고, [[2008년]] [[5월 16일]] 《실크로드 CEO포럼》이라는 모임을 조직해 대표로 활동하였으며, 모임 이름에서 따온 〈실크세대론〉을 주장한 글을 언론 매체에 기고하기도 하였다.
         [[2009년]] [[1월]] 당시에 [[중앙대학교]] 미학 겸임 교수였던 [[진중권]]이 그를 '듣보잡'(듣도 보도 못한 잡놈의 준말)이라고 칭하였다. [[2009년]] [[1월 26일]] [[진보신당]] 게시판에 [[진중권]]은 《가엾은 조선일보》라는 제목으로 “이제는 듣보잡 데려다가 칼럼란 채우는 신세가 됐다”고 변희재를 비판하였다. [[2009년]] [[2월 8일]] 《2030에게 필요한 건 냉소가 아닌 열정》이라는 글에서 〈오찬호씨의 비판에 답하며〉부제로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이후 [[2009년]] [[5월 27일]] 변희재의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장례식에 국민 세금 단 돈 1원도 들이지 말라”는 발언에 대해 인터넷 언론 와이텐 앵커 전유경이‘듣보잡’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며 “말 그대로 웬 '듣보잡'이 관심 받고 싶어 이때다 하고 튀어나온 것일까”라는 발언을 하자 이후 한 언론사와의 통화에서 변희재는 “수년 간 분석하고 나름대로 확신을 갖고 쓴 글에 듣보잡이란 비속어까지 동원하며 비난한 데에는 나름의 확신이 있기 때문일 것으로 보인다, 그렇게 자신의 발언에 확신이 있고 논리가 서 있다면 당당히 공개토론을 하고 싶다. 일대일로 맞짱토론을 벌이자”고 반론하며 감정 대립으로 이어졌다.<ref>[http://www.freezonenews.com/news/article.html?no=32964 세상을 밝히는 자유언론 - 프리존뉴스<!-- 봇이 따온 제목 -->]</ref> 이에 대해 변희재는 ‘듣보잡’이라는 모욕적 표현 남용에 대해서 진중권과 전유경 등을 서울지검에 고소하였다. 변희재는 진중권과 김상기, 권택근 등 공적 글을 쓰는 사람들이 마음대로 모욕을 행하니 네티즌들이 이에 선동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ref>[http://www.bignews.co.kr/news/article.html?no=230733 변희재, "진중권, 전유경 등 4인 검찰 고소" | 빅뉴스, 2009-06-09]</ref> [[2010년]] [[2월 5일]] 법원은 진중권에게 변희재에 대한 허위사실 유포와 모욕행위를 물어 벌금 300만원을 선고하였다.<ref>{{뉴스 인용|제목 = "변희재 듣보잡" 진중권 씨 벌금 300만 원 선고|url =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2&aid=0001958513|출판사 = 프레시안|저자 = 채은하 기자|쪽 = |날짜 = 2010-02-05|확인날짜 = 2010-02-05}}</ref>
         * 《손석희의 저주》2017년 12월
         * 《억지와 위선》2009년 12월, 북마크, 김광동,김성욱,변희재 공저
         * [[2003년]] [[2월 21일]] [[라디오 21]] 진행자<ref name="daedio21"/>
         [[2003년]] [[2월 12일]] KBS 신임 사장 인선 관련 공청회에 참여했을 때는 코드 인사, 낙하산 인사가 아닌 방송을 잘 아는 인물이 선임되어야 한다는 견해를 피력하였다. 당시 인터넷사이트 '서프라이즈' 운영자였던 변희재는 "KBS 사장은 늘 '지사풍'의 언론인이 와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잘못된 인선을 부른다"며 "지금 이 자리에서 언급되고 있는 언론인 정모씨나 강모 교수가 사장으로 선임이 된다고 해도 보도국과 교양프로만 챙기는 사장이 될 것이다. 언론인 중 방송을 아는 인물이 와서 현재 문제가 많은 오락프로 등도 개선해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ref name="disp"/> 그는 또 "시청률에 대한 부담이 상대적으로 덜한 KBS는 이제 '공정성'이라는 말보다는 '실험성'을 강조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ref name="disp"/>
         [[2003년]] [[2월 25일]] [[노무현]]이 대통령에 당선된 직후 그는 교육 개혁론을 주장하며 [[전성은]] 거창 샛별중학교 교장의 교육부총리 추천 운동을 주도하였다. 당시 서프라이즈 칼럼니스트로 활동하며 전성은 교장 추천 서명운동을 하던 변희재는 한국의 교육은 "지금껏 낮은 교육에 대해 관심을 보이지 않은 스카이대학 출신 대학 총장들이 교육계의 수장이 되면 절대로 교육개혁이 되지 않는 구조적인 문제"를 갖고 있었다며 "정말로 교육을 한번 바꾸어보겠다면 이제는 낮은 곳을 바라볼 수 있는 초중고교 교사 출신을 교육부총리에 앉혀야 한다"고 주장하였다.<ref name="gaeke"/> 당시 그는 "설사 전성은 교장이 수구세력의 기득권에 좌절한다 할지라도 새로운 세상을 바라는 모든 이들이 개혁을 지키려 나설 것"이라며 "제도나 학교 자체가 바뀌지 않더라도 이런 과정 하나 하나가 모두 교육개혁의 힘이 된다고 확신한다"고 강조하고 있다.<ref name="gaeke"/>
         그는 [[2003년]] [[2월]]~[[3월]] 내내 전성은 지지 운동과 서명운동을 벌였다. 그는 교육 개혁을 원한다면 서울대나 연고대 등 명문 학교 출신 인사보다는 낮은 자리에서 일한 실무형 인사를 추천할 것을 권고했다. 그러나 노무현 정부는 전성은 대신 윤덕홍을 선택했다.
         먼저 낸시 랭의 아버지 생존 여부가 논란이 되었다. 그간 낸시 랭은 방송 및 언론에서 자신의 아버지가 교통사고로 사망했다고 밝혀왔기 때문이다. [[2013년]] [[1월]] 낸시 랭은 [[이데일리]]와의 인터뷰에서 '대학원 졸업할 당시 아버지를 교통사고로 보냈고, 17년 동안 암 투병하시던 어머니는 지난 2009년 2월 세상을 떠났다. 외할머니마저 그 후로 1년 돌아가셨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018&aid=0002714155 <nowiki>[</nowiki>이 사람<nowiki>]</nowiki> 뇌가 섹시한 낸시랭, "천재란 소문, 들어보셨죠?"] 이데일리 2013.01.14</ref>'라고 밝힌 바 있다. 그러나 변희재는 동년 [[4월 16일]] 낸시 랭의 아버지 박상록은 생존해 있으며, 2012년 3월 종로에서 공연을 했다는 주장을 트위터에 올려놓은 데 이어 "대학원 졸업 후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다는 낸시 랭의 부친 박상록의 2011년 안산 자원봉사 공연이다. 인간성 좋기로 유명한 분이다. 하여간 한국에 팝을 최초로 보급하고, 인성 좋아 후배 가수들 챙기는 걸로 유명한 분"이라며 관련 동영상을 공개하면서<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404&aid=0000028146 변희재, "낸시랭 부친 멀쩡히 살아 있는데" 패륜 논란] 뉴스24 2013.04.16</ref> 논란을 일으켰다.
         2013년 12월 17일 저녁 서울 여의도순복음교회 근처의 고깃집에서는 '보수대연합 발기인대회' 뒷풀이가 열렸다. '보수대연합 발기인대회' 에는 대한민국어버이연합, 대한민국종북감시단, 납북자가족모임, 자유대학생연합 등 25개 우파단체 회원 600여명이 모였다. 발기대회를 마치고 뒤풀이때에는 원래 200명으로 예약된 식당에 400여명의 인파가 몰려서 북새통을 이루었으며 (변희재측 워딩으로는 "최소한 200명 이상 올 것이니, 400석 전체 예약하고, 넉넉히 준비하라")뒷풀이가 끝나고 뒷풀이 비용을 지불할때 발기대회의 주최측은 서비스 불량(초벌이 안 된 생고기를 업체측에서 내었다, 서빙을 하는 인원이 부족한 상태에서 뒷풀이에 참가한 회원들이 직접 셀프 서빙을 했다고 주장함.)을 이유로 총 비용 1,300만원 중 300만원을 할인을 요청하였으나 식당측에서는 할인을 거부하였으며, 결국은 지불하지 않고 가버렸다.<ref>참조 - 한겨레 2014년 1월 9일치 12면 기사</ref>
         변희재는 2014년 2월에 자신의 트위터 계정에 "감독과 안현수 등 선수들이, 다른 팀을 찾을 동안 1년만 해체를 유예해달라고 부탁했는데도 이재명은 단칼에 거절, 자기 관용차부터 새 걸로 바꿔버렸다. 안현수는 바로 다음해 러시아로 떠났다."고 적었고 "안현수를 러시아로 쫓아낸 이재명 성남시장 등 매국노들을 처단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 상계군
         이어 [[12월 1일]] [[정순왕후 김씨|정순왕후]]가 [[언문]]교서를 직접 발표하여 상계군과 [[홍국영]]을 역적으로 지목하고, 처분을 요구하는 언문 하교문을 [[승정원]]에 내렸다. 정조 3년 당시 상계군이 [[홍국영]] 등에 의해 완풍군에 봉작된 일과 가동궁 또는 왕위 후계자에 이름이 오르내렸던 일을 지적한 것이다. 이에 그의 작위는 즉시 폐작되어 그때부터 "역적 담"으로 불리게 된다.<ref>동시에 그의 아버지 은언군 인은 역적 인, 어머니 송씨는 송성(宋姓)으로 격하된다.</ref> 정순왕후가 역적의 가족들도 처분할 것을 요구했기 때문에 은언군 일가는 [[강화도]]로 유배된다. 삼사는 합계하여 상계군의 일가를 공격했고, [[조선 정조|정조]]는 계속 거부하였으나 삼사의 합계에 밀려 은언군 인 일가의의 유배를 승인하였다. 이후 정조는 직접 상계군 사건에 대한 언급금지령을 내리지는 않았으나, 상계군에 관련된 일을 언급하지 말도록 신하들에게 계속 부탁하였다.
         시신은 [[한성부]] 북부 [[연희방]] [[연희궁]]좌 근처(현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연희동, 2호선 [[신촌역 (지하)|신촌역]] 2, 3번 출구와 [[연세대학교]] 정문 주변)에 매장되었으며, 후에 사사된 부인 [[군부인 신씨]]도 합장되었다. [[조선 철종|철종]] 즉위 후 [[1854년]](철종 5) [[2월 1일]] 다른 곳으로 이장되었으나, 후일 그의 묘소는 실전되었다.
         생모 [[상산군부인]] 진천송씨(鎭川宋氏)와 아내 평산군부인 신씨(申氏)는 양제궁 나인 서경의의 외할머니 조씨 노인의 권고로 [[주문모]] 신부의 입국 전 [[천주교]]에 입교했으며, [[주문모]] 입국 후 세례를 받고 모두 마리아라는 교명을 받았다. 이후 독실한 [[천주교]] 신자로 활동 중 [[1801년]](순조 1) [[2월]] 천주교를 신봉하는 사실이 적발되어 [[신유박해]] 때 처형되었고, 아버지 [[은언군]]도 그해 [[5월 29일]] 사사령을 받고 [[6월 30일]] [[강화군|강화]] 배소에서 사사되었다.
  • 성원묵
         [[1851년]](철종 2년) [[2월]] [[경연]][[참찬관]]이 되었다가 [[7월]] 다시 [[가선대부]]가 되어 [[호조]][[참판]](戶曹參判) 겸 [[성균관]]동지사가 되었다. 그해 말, [[청나라]]에 파견되는 동지사(冬至使)의 부사(副使)로서 [[베이징]]에 갔다가 [[1852년]] 귀국했다. 그뒤 공조판서, 행용양위부호군, 의정부우참찬, 한성부판윤 등을 거쳐 [[1856년]](철종 7년) [[예조판서]]에 임명되고 그해 [[11월]]에는 예조판서로 [[비변사]]유사당상을 겸직하였다. [[1858년]] 행용양위부호군(行龍驤衛大護軍) 으로 전임되고 1865(고종 2년)에 사망하였다. 시호는 효정(孝靖)이다.
  • 성재기 (조선)
         [[1863년]](철종 14년) [[7월]] [[충청남도]] [[신창면|신창]][[현감]](新昌縣監) 겸 [[홍성군|홍주]][[진관]][[병마절제사]](洪州鎭管兵馬節制使)로 부임했다가 [[1865년]](고종 2년) [[3월]] 친상을 당하여 사직하였다. [[1870년]](고종 8년) [[2월]] 별천(別薦)에 올랐다.
  • 성혼
         그 해 2월 사정전(思政殿)에 등대(登對 : 임금을 찾아 봄.)하여 학문과 정치 및 민정에 관해 진달했으며 왕으로부터 급록이 아닌 특은(特恩)으로 미곡을 하사받았다. 그 해 3월에는 사헌부 장령을 거쳐 내섬시첨정(內贍寺僉正)이 되고 4월에는 장문의 봉사(封事)를 올렸다. 그 요지는 신심(身心)의 수양과 의리의 소명(昭明)을 강조하는 한편 그 방법을 제시한 것이었다. 이와 아울러 군자와 소인을 등용함에 따라서 치란(治亂)이 결정된다고 역설하였다.
         [[1595년]] [[2월]] 고향인 [[경기도]] [[파주]]로 내려와 학문 연구와 후학 양성으로 여생을 보냈다. [[조광조]]의 학통을 계승한 인물로, [[조광조]]-[[성수침]]과 [[백인걸]]의 학통과 [[이황]]의 학설을 이어받은 [[성리학]]의 대가로 이이와 함께 <사칠속편>을 완성하였고 많은 제자들을 양성하였다. 그가 키워낸 문인들로는 [[조헌]](趙憲), [[정엽]](鄭曄), [[윤황]](尹煌), [[윤전]](尹烇), [[이귀]](李貴), [[김자점]], [[김장생]], [[강황]], [[윤훤]]<ref>윤두수의 아들이다.</ref>, [[황신]](黃愼), [[김류]] 등이 있었다. [[임진왜란]] 때의 장군인 [[김덕령]] 역시 그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 세븐 (가수)
         '''세븐'''({{본명|최동욱 (崔東旭)}}, [[1984년]] [[11월 9일]] ~ )은 [[대한민국]]의 [[가수]]이다, [[2003년]] 1집 《[[Just Listen (음반)|Just Listen]]》으로 데뷔, 타이틀곡 〈와줘〉로 선풍적 인기를 끌었으며, [[2004년]] 2집 《[[Must Listen]]》으로 다시 한번 대중에게 자신의 존재를 각인시켰다. [[2006년]] 3월 3집 《[[24/7]]》으로 컴백하였으며, [[2006년]] 11월에는 4집 《[[se7olution]]》을 발표, 타이틀곡 〈라라라〉로 활동하였다. 2007년 1월에는 드라마 '[[궁S]]'로 연기에 도전한 바 있다. 그 후 미국시장 진출을 위해 2년간의 준비를 거쳐 2009년 3월 싱글 'Girls'를 발표하였다. 이후 [[2010년]] [[7월 21일]]에는 미니앨범 《Digital Bounce》를 발표하고 한국에서 활동하였다. 팝스타 에이머리(Amerie)의 3집앨범 타이틀곡 'take control'의 피쳐링을 맡은 경력이 있다. 2012년 2월에는 미니 앨범 '내가 노래를 못해도'를 발표하여 지속적인 인기를 이어갔으며, 다음 해 군입대를 했다. 2013년 연예 사병으로 군 복무 중, 군인복무 규율 위반과 무단이탈 등의 징계사유가 있어 10일의 영창 처분을 받았다. 전역 후 세븐은 뮤지컬 '엘리자벳'으로 컴백해 많은 관객의 호평을 받으며 뮤지컬 배우로서 활동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했다.
         * 발매일: [[2004년]] [[12월]]
         * 발매일: [[2005년]] [[2월]]
         * 발매일: [[2012년]] [[2월 1일]]
         * 발매일: [[2005년]] [[2월]]
         * [[12월 5일]] 《제18회 [[골든디스크]]》 - PAVV 신인 가수상
         * [[12월 10일]] 《[[KMTV]] Korean Music Award》 - 남자신인가수상
         * [[12월 12일]] 《[[서울가요대상]]》 - 신인상
         * [[12월 29일]] 《[[SBS 가요대전]]》 - 신인상
         * [[12월 29일]] 《[[MBC 방송연예대상]]》 - 가수부문 특별상
         * [[12월 31일]] 《[[MBC 10대 가수 가요제]]》 - 신인가수왕
         * [[12월 2일]] 《제19회 [[골든디스크]]》 - 본상
         * [[12월 2일]] 《제19회 [[골든디스크]]》 - 뮤직비디오 인기상
         * [[12월 4일]] 《[[M.net]] KM Music Video Festival》 - 남자솔로부문상
         * [[12월 30일]] 《[[KBS 가요대상]]》 - 올해의 가수상
         * [[12월 31일]] 《[[MBC 10대 가수 가요제]]》 - 본상
         * [[12월 29일]] 《[[SBS 가요대전]]》 - 10대 가수상
         ** [[12월 10일]] [[SBS]] 《[[인기가요]]》 뮤티즌송
         ** [[2월 12일]] [[SBS]] 《[[인기가요]]》 뮤티즌송
         ** [[2월 16일]] [[M.net]] 《[[엠카운트다운]]》 1위
  • 세훈
         * [[MBC every1]] 《EXO's 쇼타임》 (2013년 11월 28일 ~ 2014년 2월 13일)<ref>{{뉴스 인용|제목 = [E스케치 '엑소 쇼타임', 이전 아이돌 프로그램과의 차별성? '팬심이 관건' (종합)]
         * [[2012년]] [[12월]] 대한적십자 RCY 홍보대사
         * [[2014년]] [[2월]] [[서울특별시]] [[강남구]] 홍보대사
         * 2월 17일 제5회 《[[가온 차트 K-POP 어워드]]》 웨이보 케이팝 스타상
         * 2월 22일 제6회 《[[가온 차트 K-POP 어워드]]》 팬투표 인기상 개인부문
  • 손지환 (야구인)
         이후 [[2010년]] [[2월]] [[일본]] 간사이 독립 리그의 한국인 구단 [[코리아 해치]] 팀에 입단하였으나 재정난으로 구단이 해체되었다.
  • 송소희
          * 2008년 12월28일 창부타령 [[전국노래자랑]] 연말결선 [[https://youtu.be/ekfOWkUKfiQ|#]]
          * 2018년 2월 16일 화요일 밤 11시방송인 Olive TV [[달팽이 호텔]]에 방송의 첫 손님으로 출연했다. [[이경규]], [[성시경]], [[김민정(1982)|김민정]]이 봉사하는 호텔에 3박4일간 머물며, [[이상은(가수)]],[[김재화]],[[노회찬]],김광민과 함께 출연했다. 전날 밤에 소희의 저녁식사 도중에 초보 호텔리어 이경규가 실수로, 소희가 식사를 마치지도 않았는데 식판을 들고가서 소희는 배고픔의 아쉬움을 남겼다. 하지만, 다음날 아침 소희는 삼겹살 폭풍먹방을 보이며 행복해진다.
          * 2017년 2월 25일 [[불후의 명곡 2]] 최종혁 편에 출연해서 [[고영열]]과 '이별이래'를 불러 439점으로 우승했다. [[고영열]]의 피아노 연주를 시작으로, 노래중간 송소희의 민요와 판소리가 더해져 국악으로 편집된 '이별이래'가 한국인의 애절한 감성이 더해진 감동적인 '국악 듀엣'이 되었다.
         송소희 측과 전 소속사 간의 법적 분쟁이 있었다. [[2013년]] [[7월]] 덕인미디어 대표 최씨와 송소희 측은 7년간 송소희의 활동으로 생긴 순수익을 50:50으로 분배하는 것으로 전속 계약을 체결했다. [[2013년]] [[10월]] 소속사 직원으로 활동하던 대표 최씨의 친동생 A씨가 소속사 가수이자 대표 최씨와 사실혼 관계인 B씨에게 향정신성의약품인 졸피뎀을 먹여 정신을 잃게 한 뒤 성폭행한 혐의로 기소되었다. [[2013년]] [[11월]] 송소희는 이 사실을 B씨에게 전해듣고 A씨를 자신의 매니지먼트 업무에서 배제할 것을 요구했지만, 대표 최 씨는 이를 무시하고 A씨에게 계속해서 송소희의 차량 운전을 맡겼다. 이에 송소희의 [[아버지]]는 [[2014년]] [[2월]] SH파운데이션이라는 기획사를 만들어 송소희의 활동을 챙겼고 덕인 미디어 측은 소송을 제기했다. 성폭행범은 [[2015년]] [[3월]] 대법원에서 [[http://star.mk.co.kr/v2/view.php?year=2017&no=558254|징역 3년의]] [[https://news.sbs.co.kr/news/endPage.do?news_id=N1004359026|실형을 선고받았다.]]
  • 송준길
         |출생일= [[1606년]] [[12월 28일]]
         |임기 = 1658년 5월 31일 ~ 1659년 2월 28일
         '''송준길'''(宋浚吉, [[1606년]] [[12월 28일]] ~ [[1672년]] [[12월 2일]])은 [[조선]]시대 후기의 문신·성리학자·정치가로서 유교 주자학의 대가였다. [[문묘]]에 종사된 [[동방 18현|해동 18현]] 중의 한 사람이다.
         [[1658년]](효종 9) 대사헌, 그해 [[4월 13일]] 가선대부 [[호조]][[참판]]이 되었다가 [[5월 25일]] 행용양위부호군으로 전임되었다. [[7월 27일]] 행[[세자시강원]]찬선, [[9월 18일]] [[사헌부]][[대사헌]]으로 찬선을 겸하였다. [[10월 9일]] [[이조]][[참판]]겸 [[세자시강원]]찬선, [[11월 3일]] [[세자시강원]]찬선, [[12월 1일]] [[성균관]]제주 겸 세자시강원찬선, [[12월 10일]] 사헌부대사헌겸 성균관제주 세자시강원찬선, 13일 다시 대사헌 겸 제주, 찬선, 16일 찬선 겸 제주, [[12월 20일]] 사헌부대사헌겸 성균관제주 세자시강원찬선이 되었다.
         윤 3월 26일 지중추부사에 임명되고 이어 겸 세자시강원찬선 성균관제주에 임명되었다. 4월 4일 행대사헌 겸 제주, 찬선, [[4월 9일]] 의정부우참찬 겸 성균관제주 시강원찬선, 6월 2일 사헌부대사헌 겸 성균관제주, 우참찬 겸 성균관제주, 6월 29일 이조판서 겸 성균관제주, 12월 11일 정헌대부 이조판서 겸 성균관제주가 되었다.
         1660년 1월 22일 정헌대부 행용양위부호군, 그날 겸 성균관제주, 3월 6일 의정부우참찬 겸 성균관제주, 3월 10일 좌참찬 겸 성균관제주, 6월 6일 행 대사헌 겸 성균관제주, 10월 16일 우참찬 겸 성균관제주, 12월 12일 이조판서 겸 제주, 1661년 1월 3일 우참찬 겸 제주, 8월 19일 좌참찬 겸 제주, 8월 26일 대사헌 겸 제주, 9월 28일 좌참찬 겸 제주, 12월 22일 사헌부대사헌 겸 제주를 지냈다.
         1662년 1월 15일 겸 성균관제주, 1월 16일 행용양위부호군, 2월 29일 사헌부대사헌 겸 성균관제주, 5월 6일 행용양위부호군, 겸 성균관제주, 6월 20일 사헌부대사헌겸 성균관제주, 8월 23일 행용양위부호군, 겸성균관제주, 11월 12일 행사헌부대사헌 겸 성균관제주를 지냈다.
         [[1673년]](현종 14년 [[2월]] [[조선 현종|현종]]의 특명으로 [[증직|증]]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시|의정부]]겸 영경연홍문관예문관성균춘추관관관상감사 세자사에 추증되었다. 1674년 [[조선 효종|효종]]의 왕비인 [[인선대비]]가 죽자 또 한 차례 [[자의대비]]의 복상문제가 일어나게 되고(제2차 예송 논쟁), 이번에는 남인의 기년제설이 서인의 대공설(大功說: 9개월)을 누르고 남인의 주장을 관철시킴으로써 남인이 정권을 장악, 1675년(숙종 1) [[허적]]·[[윤휴]]·[[허목]] 등의 공격을 받아 관작을 추탈당하였다. 이어 1680년 경신환국으로 서인이 재집권하면서 그해 2월 증작이 복작되었다.
         [[충청남도]] [[세종특별자치시|세종시]]에 안장되었으나 후에 [[충청남도]] [[공주시|공주]]에 이장되었으며 이후 여러 곳으로 옮겨졌다가 [[1700년]](숙종 26년) (대전시 서구)으로 이장하였다. 현재의 묘비는 이곳으로 이장 한 후에 세워진 것으로, 외손자인 판서 [[민진후]]가 비문을 짓고 증손자인 현령 [[송요좌]]가 글씨를 썼다. [[1681년]](숙종 7년)의 숭현서원(崇賢書院)에 제향되고 그해 [[12월 17일]] 문정(文正)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 수호 (가수)
         * [[2008년]] [[12월]] [[삼성]] 하하하 캠페인 [[동방신기]] 연습실ver. (수호, [[카이 (가수)|카이]], [[찬열]] 출연)
         * [[2017년]] [[2월 3일]] - 'SM STATION ' [Digital Single] 《커튼》
         *[[2017년]] [[2월 10일]] - 우주의 별이 O.S.T 《낮에 뜨는 별(Feat.레미)》
         * [[MBC every1]] 《[[EXO의 쇼타임]]》 (2013년 11월 28일 ~ 2014년 2월 13일)
         * [[2014년]] [[2월 16일]] ~ [[2014년]] [[12월 14일]] [[SBS]] 《[[SBS 인기가요]]》 MC
         * [[2013년]] [[12월]] 애니메이션 《[[세이빙 산타]]》 - 버나드 역 (더빙)<ref>{{뉴스 인용|제목 = '대세스타' 신동엽·정은지·수호, '세이빙 산타' 더빙 참여|url = http://www.mydaily.co.kr/new_yk/html/read.php?newsid=201311081433391114&ext=na|출판사 = 마이데일리|날짜 = 2013-11-08|확인날짜 = }}</ref>
         * [[2012년]] [[12월]] 대한적십자 RCY 홍보대사
         * [[2014년]] [[2월]] [[서울특별시]] [[강남구]] 홍보대사
         * [[2016년]] [[2월]] [[조권]] '횡단보도' M/V
         * [[2017년]] [[12월]] 《더 라스트 키스》 - 루돌프 역
  • 신귀식
         '''신귀식'''([[1941년]] [[2월]] ~ )은 [[대한민국]]의 [[배우|연기자]]이다.
  • 신응희
         '''신응희'''(申應熙, [[1858년]]/[[1859년]] [[11월 2일]] ~ [[1928년]] [[2월 12일]])는 [[조선]] 후기·[[대한제국]]의 무신, [[일제 강점기]]의 관료이며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를 지냈다. [[갑신정변]] 당시 행동대원으로 참여하였다. 본관은 [[평산 신씨|평산]]이다. 다른 이름은 응희(應凞)이다.
         무관으로 재직하며 [[박영효]]의 심복이 되었으며, [[1883년]](고종 20년) [[5월]] [[김옥균]], [[박영효]] 등의 추천으로 [[일본]]으로 유학, [[일본]] [[도야마 하사관학교]]에서 군사훈련을 받고 [[1884년]] [[8월]] 귀국하였다. 이후 남행부장 겸 사과, 후영군사마 등을 역임하여 [[갑신정변]] 거사에 참여하였다. [[1884년]] [[12월]] [[갑신정변]]이 발생하자 [[조선 고종|고종]]과 명성황후를 [[경우궁]](景祐宮)으로 모셨다. 그러나 [[청나라]]의 개입으로 정변이 3일만에 정변이 실패하자, [[김옥균]], [[서재필]], [[박영효]] 등과 함께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1886년]] 다시 [[미국]]으로 건너갔다가 다시 [[일본]]으로 되돌아왔으며, [[1886년]] [[5월]]에는 [[박영효]], [[김옥균]]을 암살하려고 [[조선]] 조정이 파견한 [[지운영]](池運永)을 [[김옥균]]의 유인책으로 [[유혁로]], [[정난교]], [[이규완]] 등과 함께 유인하였다. 김옥균, 박영효에게 불만이 있는 척 가장하여 한참 안심시킨 뒤 [[지운영]]을 유인하여 암살 계획을 폭로하였다.
         |쪽=174쪽}}</ref> 1883년 5월 그는 일본에 건너가자 마자 [[서재필]], [[서재창]], [[이규완]], [[신중모]] 등과 [[게이오기주쿠 대학교|게이오의숙]]에 입학했으며, 그는 [[10월 3일]]에 [[게이오기주쿠 대학교|게이오의숙]]을 수료하고 [[도야마 하사관학교]]로 진학하였다.<ref>서재필은 1884년 1월, 이규완은 1884년 2월에 게이오의숙을 수료하고 도야마 하사관학교로 진학하여 각각 진학 시기가 다르다.</ref> [[1884년]] [[12월]] [[갑신정변]] 때 행동대원으로 활동했다.<ref name="hang1"/>
         1884년(고종 21년) 12월 4일 갑신정변이 일어나자 그는 행동대의 1개 부대를 이끌고 [[서재필]], [[정난교]], [[서재창]], [[윤경순]], [[유혁로]], [[이규완]] 등과 함께 생도들, 장사패들을 이끌고 궐내에 잠입하였다. 그는 [[서재필]]의 부대, [[이규완]]이 인솔하는 부대와 함께 사관생도들을 이끌고 국왕과 비빈들을 [[경우궁]](景祐宮)으로 옮겼다. 그러나 [[12월 7일]] [[청나라]]군의 개입으로 [[갑신정변]]이 실패하자, [[박영효]], [[서재필]], [[서광범]], [[이규완]] 등 10인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갔다가 [[1886년]](고종 23) [[박영효]], [[서광범]], [[이규완]], [[서재필]] 등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갔다가 이듬해 그는 [[박영효]] 등과 함께 다시 [[일본]]으로 돌아왔으며, [[1896년]] 다시 조선으로 귀국하였다.
         [[1894년]](고종 30년) [[7월]] 비밀리에 환국, 그해 [[11월]] [[통위영]] [[정령관]](統衛營副領官)에 임명되었다. [[1895년]] [[1월]] [[대한제국]] 육군 [[정위 (관직)|정위]](正尉)가 되어 [[훈련대]](訓練隊)에 배치되었고, [[2월]] [[훈련대]] 제1대대장이 되고 [[육군]][[참령]](陸軍參領)으로 승진하였다. 그해 그는 [[박영효]], [[이규완]], [[정난교]], [[유혁로]] 등과 함께 [[명성황후]] 암살을 기도했으나, [[유길준]]의 밀고로 [[명성황후 암살 미수 사건]]이 실패로 돌아갔다. [[1895년]] [[12월]] [[박영효]], [[오세창]], [[이규완]], [[권동진]], [[우범선]], [[이두황]], [[정난교]] 등과 함께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1895년 12월 말 다시 입국했으나 [[1896년]] [[2월]] [[아관파천]]이 실패로 돌아가자 다시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1898년]](광무 1년) [[9월]] [[중추원 (대한제국)|중추원]] 의관직에 임명되었으나 거절하고, 귀국하지 않았다.
         [[1907년]](광무 10년) [[6월]] [[대한제국]]으로 환국, 바로 [[중추원 (대한제국)|중추원]]부찬의(中樞院副贊議)에 임명되었다가, [[대한제국 순종|순종]] 즉위 후 [[육군]][[부령]]에 임명되었다. [[9월 19일]] [[육군]][[부령]]에서 면직되고, [[육군]][[정령]]에 임명되었다가 [[1907년]](융희 1년) [[10월]] 정령으로 예편하고 [[중추원 (대한제국)|중추원]]부찬의(中樞院副贊議)에 임명되었다. [[11월 10일]] 다시 중추원부찬의에 임명되고 [[주임관]]2등(奏任官二等)에 서임되었다. 그러나 그해 [[12월 20일]] 의원면직하였다.
         [[1908년]](융희 2) [[1월]]에는 그의 친구인 [[특진관]] [[장박]](張博)이 [[평리원]]판사(平理院判事) [[박만서]](朴晩緖)에게 신응희를 위해서 사퇴하라고 압력을 넣어 물의를 빚기도 했다. 정미 7조약 이후 그는 [[내무부]]대신 [[송병준]](宋秉畯) 등의 추천과 통감부의 비호를 받아 [[1908년]] [[2월 19일]] [[전라남도]][[관찰사]] [[칙임관]] 3등(勅任官三等)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그는 [[전라남도|전남]][[관찰사]]직을 여러번 사양했다. 총리대신 [[이완용]]과 [[이토 히로부미]] 통감이 여러번 권하였으나 그는 마다하였다.<ref>"신씨강직", 대한매일신보 1908년 2월 19일자 2면, 잡보외방통신</ref> 결국 그해 [[6월 11일]] [[전라남도]] [[관찰사]](全羅南道觀察使) [[칙임관]]3등에 재임명되자 취임하였다. [[1908년]] [[6월 25일]] 겸임[[전라남도]][[재판소]][[판사]](兼任全羅南道裁判所判事)를 겸임하였다.
         1921년 [[2월]] 황해도지사에서 물러났으며 동시에 휴직을 신청했으며, [[1923년]] [[2월]] 도지사직에서 사퇴했다. [[1922년]] [[2월]] [[흥린건축주식회사]] 취체역에 선임되었다. [[1924년]] [[4월]] 중추원 칙임관대우 참의에 임명되어 [[1925년]]부터 [[1927년]]까지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를 지냈다.<ref name="실록친일파"/>
         [[1924년]] [[4월]] 일본인과 조선인이 함께 만든 내선융화단체인 [[동민회]]의 결성에 참여하고, 동민회 평의원에 선출되었다. [[1926년]] [[동민회]] 본부 이사, [[1927년]] [[동민회]] 상담역의 직책을 맡았다. [[1926년]] [[11월]] [[경성부]][[부군면협의회|부협의회]] 의원 후보자로 추천되었으며<ref>"京城府協議員 公認候補如此", 동아일보 1926년 10월 16일자 2면, 사회면</ref>, [[11월 20일]]의 투표에서 113표를 받아 6위로 낙선하였다.<ref>"日人 十八名에 朝鮮人 十二名", 동아일보 1926년 11월 22일자 2면, 사회면</ref> [[1928년]] [[2월 12일]] 중추원 참의로 재직 중, [[경성부]] 종로구 도렴동 자택에서 [[급성폐렴]]으로 사망하였다.
         |임기 = [[1919년]] [[8월 1일]] ~ [[1921년]] [[2월 12일]]
  • 심상학
         [[1873년]](고종 10) [[7월]] 고종이 경무대(景武臺)에서 친히 주관한 칠석제(七夕製)에 3등으로 합격하여 바로 과거에 직부전시할 자격이 부여되었으며, 그 해의 [[과거 제도|문과 식년시]](式年試)에 병과(丙科) 30등으로 급제하였다. 바로 [[권지]][[승정원]]가주서가 되고, [[7월 19일]] 부사정, [[7월 21일]] [[승정원]]가[[주서]](承政院假注書)가 되고 그해 [[12월]] [[춘추관]]기사관을 겸직했으며, [[1874년]](고종 1) [[1월]] 좌직주서에 임명되었다. 이후 [[승정원]]좌직주서직과 [[춘추관]]기사관으로 사관의 일을 맡아보았으나 그해 [[3월]] 병으로 체직되었다가 곧 복직하여 다시 좌직주서와 춘추관기사관으로 사관 일을 1875년까지 수행하였다. 그밖에 경연관이 되어 [[경연]](經筵)에도 참여하였다.
         [[1876년]] 부교리와 교리에 임명되고 중학교수직에 임명되었으나 신병으로 사직을 청하여 중학교수직에서 해임되었다. [[1877년]] [[홍문관]]부수찬에 임명되고 바로 겸임 [[어영청]]종사관직을 겸임하였다. 이 해 [[3월]] 잠시 부사과로 전직되었다가 다시 부수찬 겸 어영청종사관이 되고, 그해 [[6월]] [[병조]][[정랑]], 12월 [[사헌부]][[장령]]이 되었다.
         [[1880년]](고종 17) [[홍문관]] 응교, [[사헌부]] 집의, 부교리 등을 역임했다. [[1880년]](고종 17) [[8월]] [[조선 고종|고종]]이 진전(眞殿)에서 작헌례(酌獻禮)를 거행할 때의 제관인 상례(相禮)로 참여, 찬례(贊禮) 이하 제관들에게 시상할 때 상을 받고 [[당상관]]으로 가자되었다. [[1881년]](고종 18) 조사 시찰단(朝士視察團)의 정식 전문위원으로 선발, [[어윤중]] 등과 함께 [[일본]]에 파견되어 4개월간 [[메이지 유신]] 이후의 근대적 문물과 행정 제도를 시찰, 연수하고 돌아왔다. 귀국 직후 바로 동래부 [[암행어사]](東萊府暗行御史)에 임명되어 [[경상남도]] [[동래부]]와 [[부산부]] 지역을 암행하고 [[한성]]으로 입경하였다. [[1881년]] [[12월]] [[평안남도]] 성천부사(成川府使) 겸 성천진관(成川鎭管)으로 부임했다가 얼마 뒤 다시 되돌아왔다. 그 뒤 [[통리기무아문]]이 개편되어 7사(司) 가운데 [[경리통리기무아문]]의 부[[경리통리기무아문]]사(副經理統理機務衙門事)에 임명되어, 개화 정책의 실무 업무를 맡게 되었다.
         [[1884년]](고종 21) 관제 개편 시 [[예조]][[참판]]에서 [[협판]][[내무부]]사(協辦內務府事)로 전직되었으며<ref>예조는 외무아문으로 개편되었다.</ref>, 같은 해 [[영국]], [[독일]], [[프랑스]], [[벨기에]], [[러시아]] 등 5개국의 주[[유럽]] 5개국 [[특파전권대신]](特派全權大臣)로 임명, 파견되었다가 병으로 사퇴하고 귀국하였다. 그 후 협판교섭통상사무(協辦交涉通商事務)에 임명되었으나, 재직 중 신병이 생겨서 사퇴하였다. 이 해 [[성균관]][[대사성]](成均館大司成)에 임명되었다가 그해 [[7월]] 부호군, 첨지 등을 역임하고 다시 그해 [[8월]] 부호군에 임명되어 전라우도암행어사로 파견, [[1885년]] [[2월]]에 귀환했다. [[1886년]](고종 23) [[4월]] [[이조]][[참의]]를 거쳐 그해 [[7월]] [[사간원]][[대사간]](司諫院大司諫)에 임명되었다. [[1886년]] [[10월]] [[청나라]]에 파견되는 [[동지사]]행에 선발되어 동지 부사(冬至副使)로 임명되어 [[청나라]]를 방문하고 그해 [[11월]] 귀국하였다. [[1887년]] 전라북도 [[암행어사]](全羅右道暗行御史)로 파견되었다가 그해 [[4월]] 귀경하였다. 귀경 직전인 [[1887년]] [[4월]] 동지의금부사에 임명되었다가 며칠 뒤 동지돈녕부사에 임명되었다가 다시 [[병조]][[참판]]으로 임명, 도착하자마자 병조참판이 되었다.
         [[1887년]](고종 24) [[11월 7일]] [[승정원]][[좌승지]]에 임명되어 [[12월 24일]] [[한성부]]좌윤, [[1888년]](고종 25) [[1월 4일]] [[한성부]]우윤이 되었다. [[2월 3일]] 다시 [[승정원]][[좌승지]]가 되었다. [[1888년]](고종 25) [[12월 9일]] 안동부사(安東府使)로 임명되어 가던 중 [[12월 13일]] [[안악군]]이 자리가 비었다 하여 [[안악군|안악]][[군수]](安岳郡守)로 발령되었다. [[1890년]](고종 27) [[5월 10일]] 병으로 사망하였다.
         ** 양아들 : 심기섭(沈琦燮, [[1878년]] ~ [[1932년]] [[2월 16일]])
         ** 서자 : 심완섭(沈琬燮, [[1886년]] ~ [[1908년]] 혹은 [[1968년]] [[12월 14일]])
  • 심소명
         2008년 2월 은퇴하였으며, 남인천방송에서 진행 중인 '콜로세움'이라는 아마추어 스타크래프트 리그의 해설자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 [[2004년]] [[2월]] 하나포스 센게임 MSL 16강
         * [[2007년]] [[2월]] 곰TV MSL Season 1 8강
  • 심정 (1471년)
         |사망일= [[1531년]] [[12월 3일]]
         '''심정'''(沈貞, [[1471년]] 양력 [[11월 7일]]([[음력]] 윤 [[9월 25일]]) ~ [[1531년]] [[12월 3일]])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유학자, 공신으로, 자는 정지(貞之), 호는 소요정(逍遙亭), 시호는 문정(文靖)이고, 봉군호(封君號)는 화천군(花川君)에 봉군되었다가 부원군으로 진봉되어 화천부원군(花川府院君)이 되었다. 본관은 [[풍산 심씨|풍산]](豊山)이다.
         [[1513년]] [[1월]] 한성부 좌윤(漢城府左尹), [[2월]] 경연특진관을 거쳐 [[1513년]] [[3월]]에는 [[현덕왕후]]의 복권을 청하는 송일의 주장에 동조하였다. 그해 [[6월]] 형조 참판이 되었다. 전해에 유자광이 죽자 어머니에게 불손하게 대한 그의 아들 유진(柳軫)이 불효죄로 탄핵을 받고 사형에 처하자는 논의가 벌어지자<ref>1513년 9월 대사간 홍경림(洪景霖)이 유진을 사형에 처할 것을 상소했다.</ref> 노공필(盧公弼)·이자건(李自健)은 사형에 처하는 것은 지나치다며 반대하였으나, 그는 다른 경연관들과 함께 강상죄가 크다며 유진의 사형에 찬성하였다. [[1514년]] [[10월]] 이조참판이 되자, [[11월]] 대간이 그가 관직에 임명된지 얼마 안돼 이조참판에 임명된 것을 탄핵하였으나 왕이 듣지 않았다. 이후 계속 양사의 논박을 받았으나 왕이 들어주지 않았다.
         그러나 [[1518년]] 형조판서가 되었고, 그 뒤 안당을 공격한다. 그해 [[10월]] 화천군이 되고, 이후 형조판서, [[의정부]] [[우참찬]], [[한성부 판윤]], 지의금부사에 올랐으나, 신진 세력인 조광조의 탄핵으로 파직당하고, 정국공신 책록도 삭탈당했다. 이에 불만을 품고 은거하던 중 관직에 복귀하였다. [[12월 9일]] 한성부 판윤이 되었으나 [[12월 13일]] [[사간원]]으로부터 간사한 사람으로 몰려 탄핵당하였으나 왕이 듣지 않았다. 곧 경연특진관이 되었으나, [[12월 15일]] 경연특진관에 부적합하다는 사간원의 비판을 받았다.
         이후 [[1518년]](중종 13년) [[12월]]부터 [[1519년]](중종 14년) [[1월]]까지 사간원의 간관들로부터 계속 탄핵을 당했으나 왕이 들어주지 않았다.
         조광조 일파를 숙청한 일로 [[1519년]] [[이조판서]]가 된 뒤 [[남곤]], [[홍경주]] 등과 함께 조정을 장악하였다. 의정부 [[우참찬]], [[이조판서]], [[한성부 판윤]], 의정부 [[좌참찬]] 겸 지의금부사, [[오위도총부]] 도총관을 거쳐 [[1519년]] [[12월]] 다시 [[이조판서]]가 되었다. 이조판서가 되자 [[1520년]] [[1월]] 상소를 올려 6조의 낭관들 중에 [[음서 제도]]로 임명된 낭관들이 많으므로 인사이동시킬 것을 건의하여 성사시켰다. 그 뒤에도 조광조와 친한 [[김식]]을 비롯한 조광조 일파에 대한 탄핵을 계속하였으며, 그와 친한 인물들도 수시로 규탄, 비판하였다.
         [[1521년]](중종 16년) 2월, 스스로 자질을 이유로 사직을 청하였다.
         [[1527년]](중종 21년) [[1월]]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로 특진하여 의정부 되었다되자 여러 번 사직상소를 청했으나 왕이 사양하였다. [[2월]] 우의정에서 사직하고 영경연관사가 되었다가 [[3월]] 다시 이 되었다. 그 해에 남곤의 죽음으로 조정을 홀로 장악하게 되었다. 남곤이 죽은 뒤 의정부 [[좌의정]]이 되어 화천부원군(花川府院君)에 올라 [[이항 (조선 전기)|이항]](李沆)과 [[김극핍]](金克愊), [[채무택]] 등을 수하에 두고 권력을 독점하였다. 이때 세자(후일의 [[조선 인종|인종]])의 누이 [[효혜공주]]의 시아버지이자 권력 경쟁자였던 이조판서 [[김안로]]와 권력 암투를 벌인다.
         이후 양사에서 여러 번 그를 사사, 처형할 것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중종이 이를 무마하려 했다. 그러나 [[1531년]](중종 26년) 이항·김극핍 등과 함께 신묘삼간(辛卯三奸)으로 지목되고, 그해 [[11월]] 양사로부터 계속해서 탄핵당하였다. 이후 경빈 박씨와 통정했다는 누명을 쓰고 양사의 탄핵을 받고 분노한 중종에 의해 [[12월 1일]] 사사의 명이 내려졌으며, 그해 [[12월 3일]] 배소에서 [[금부]][[도사]]가 준 사약을 받고 사사당했다. 향년 60세였다.
         ** 아들 : [[심사손]](沈思遜, [[1493년]] [[12월 25일]] ~ [[1528년]]) - 홍문관 직제학, 만포진 첨절제사, 증영의정
         *** 손자 : [[심수경]](沈守慶, [[1516년]] [[12월 20일]] ~ [[1599년]] 윤 [[4월 20일]]) - [[영의정]] 역임, 청백리
         |임기 = [[1518년]] [[음력 12월 9일]] ~ [[1519년]] [[음력 1월 23일]]
  • 안미선
         * 《[[화성인 바이러스]]》 ([[tvN]], [[2012년]] [[2월]]) 황금비율녀 (전문 대역모델)
  • 안미선 (모델)
         * 《[[화성인 바이러스]]》 ([[tvN]], [[2012년]] [[2월]]) 황금비율녀 (전문 대역모델)
  • 양원군 (1658년)
         그는 [[1667년]] 양원군(陽原君)에 책봉되었으며 [[1670년]]에 13세로 [[결혼|혼례]]를 치렀고 이듬해 [[1671년]] [[2월]]에는 친할아버지 [[인평대군|인평대군 이요]](麟坪大君 李㴭)에게 사후 양자(養子) 출계된 종숙부 [[이석린|경완군 이석린]](慶完君 李石磷)의 양자(養子)로 동반 출계하였다.
  • 엄주익 (1872년)
         [[대한제국]] 때에 관료생활을 하다가 [[1910년]] [[한일 합방 조약]] 이후로 관직을 사퇴하고 교육 활동에 전념하였다. [[1905년]] [[2월 11일]] [[양정의숙]]과 [[양정여자고등보통학교]]([[양정고등학교 (서울)|양정고]]와 [[양정중학교]]의 전신)을 설립하여 초대 교장이 되고, [[1907년]] [[엄귀비]]로부터 경선궁과 영친왕궁에서 전라남도 무안, 광양과 경기도 이천, 풍덕 각 군(郡)소재 토지(주로 논)총계 약 200만평을 하사받아 교육활동에 투자하였다. [[1913년]] [[2월]]에는 재단법인의 초대 이사장으로 취임하였다.
         [[1904년]] [[5월]] [[육군]][[참령]]이 되고 [[일본]]을 방문, 군사제도 관련 시찰을 하고 귀국했다. 그해에 [[법부]](法部) 협판, [[대한제국 육군]] 참장(參將), 군부 협판, 군부대신서리 등을 역임했다. [[1905년]] [[2월]] 서리 교츅총감이 되었다.
         [[1905년]] [[2월]] 올바르게 길러서 깨우쳐준다는 '몽이양정(蒙以養正)'의 기치를 내걸고 기부금과 사재로 양정의숙을 설립하고 숙장(塾長)에 취임하였다. [[1907년]] 7월에는 [[순헌황귀비]]로부터 경선궁(慶善宮), 영친왕궁(英親王宮)에 소속된 [[전라남도]] [[함평군]](咸平郡), [[무안군]](務安郡), 광양군(光陽郡), [[경기도]] [[이천시|이천군]](利川郡), 풍덕군(豊德郡) 등 약 200만 평의 토지를 하사받았다.
  • 여인홍
         |임기 = [[2016년]] [[10월 24일]] ~ [[2018년]] [[2월]]
  • 오경훈
         * ~ [[2017년]] [[2월]] 새누리당
         * [[2017년]] [[2월]] ~ 자유한국당
  • 오세창
         [[1919년]] [[2월 10일]] [[최린]], [[최남선]] 등이 협의하고, [[최남선]]이 독립선언서를 초안하여 제출하자 그는 [[손병희]], [[권동진]], [[최린]] 등과 함께 [[독립선언서]] 내용을 검토하고 그 내용에 동의한다. [[2월 25일]] 오세창은 [[손병희]], 권동진과 함께 [[천도교]] 기도회 종료보고와 [[조선 고종|고종]] 국장에 참배할 목적으로 상경한 [[천도교]]도 박준승(朴準承), 홍기조(洪基兆), 홍병기(洪秉箕), 김완규(金完圭) 등에게 독립운동에 관한 계획을 알리고 이들을 설득하여 찬동을 얻었다. 이때 오세창은 그는 [[천도교]] 월보과장 옥파 [[이종일]](李鍾一)을 설득하여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했다.
         [[1919년]] [[2월 27일]] 오세창은 [[천도교]] 지도자들을 설득, 그들과 함께 [[경성부]] 재동(齋洞) 김상규(金相奎)의 집에 모여, 독립선언서와 기타 문서의 초안을 최종 확인하고 찬동, 민족대표자 33인의 한 사람으로서 서명 날인한다. 이어 그는 [[최남선]]의 독립선언서 용지 보급과 인쇄 등을 지원하였다.
         [[민주의원]] 회의에 참석 중([[1946년]] [[2월]]), 왼쪽에 앉은 이가 오세창, 가운데는 부의장 [[김규식]], 오른쪽은 의장 [[이승만]]
         임정 환국 후 [[12월 1일]] 임시정부 봉영식에 참석하였다. 서울그라운드에서 [[윤보선]]의 사회로 임시정부 봉영식이 시작되었다. 이어 오세창의 개회사, [[이인]]의 봉영문 낭독, [[권동진]]의 만세삼창으로 이어졌다. 봉영문은 [[권동진]], [[김성수 (1891년)|김성수]], [[이인]]을 통해 [[김구]]에게 전달되었다.<ref>아 비운의 역사현장 경교장(백범사상실천운동연합, 1993), 145</ref>
         46년 2월 [[남조선대한국민대표 민주의원]](일명 민주의원) 의원, [[서울신문]] 명예사장 등을 지냈다. [[1946년]] [[6월 15일]] 오후 5시 40분 [[서울역]]에 마중나가 [[서울역]]에 도착한 삼의사 유골을 영접하였다. 이어 태고사(太古寺)에 마련된 빈소에 참석하였다. 이후 남북협상과 단정수립론이 갈렸을 때는 입장표명을 하지 않다가 [[1948년]] [[8월 15일]] 정부 수립에 참석하였다.
         은퇴 후, 조용히 있다가 [[1950년]] [[6월 25일]] [[한국 전쟁]]이 터지자 [[대전]]을 거쳐 [[대구]]로 내려가, [[1951년]] [[4월 16일]] [[나인협]]의 장례식 장례위원장을 맡았다. 대구 대봉동 31번지의 집에서 병석에 누운 지 1년만에, [[1953년]] [[12월]] 대구 대봉동 자택에서, 향년 90세의 나이로 병사하여, 장례식은 사회장(社會葬)으로 장례가 치러졌다.
  • 오세훈
         [[사법연수원]]을 16기로 수료한 후 [[변호사]] 생활을 하다가 16대 총선에서 서울 강남을에 출마하여 정계에 입문했다. 제16대 국회의원 시절 4년 연속 시민단체 주관 국정감사 우수위원으로 선정되었고, 정치개혁특위 간사를 맡아 깨끗하고 투명한 선거를 목적으로 한 소위 ‘오세훈 선거법’으로 불리는 3개 정치관계법 개정을 주도했다.<ref>{{뉴스 인용|제목=오세훈 서울시장- ‘시프트’ 건설 강력 추진 100대1 인기|url=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100603010714431290020|날짜=2010-06-03|출판사=문화일보}}</ref> 2006년 서울시장에 당선되어 2011년까지 [[서울특별시장]]을 연임하며 창의시정과 [[디자인 서울]]을 주요 정책으로 하면서, 청렴도 향상, 강남북 균형발전, 복지 정책 [[희망드림 프로젝트]], 대기환경 개선 등에 주력하였고, [[다산 콜 센터]]와 [[장기전세주택]] [[시프트 (정책)|시프트]]를 도입하였다. 2011년 저소득층을 대상으로 선별적 복지를 주장하며 [[서울시의 무상 급식 정책 논란|서울시 무상 급식 정책]]에서 주민 투표를 제안하고, 투표율이 미달되자 시장직을 사퇴하였다. [[바른정당]] 상임고문을 지내다가 [[국민의당]]과의 합당에 반대하며 2018년 2월 5일 바른정당을 탈당했었고, 11월 29일에 다시 [[자유한국당]]에 복당하였다.
         1996년 부터 1997년까지 경원대학교에서 민사소송법 강사로 재직하였고, [[1997년 9월]]부터 [[1998년 2월]]까지 [[숙명여자대학교]] 법학과에서 민사소송법의 겸임 교수로 일했다. [[1998년]] [[미국]] [[예일 대학교]](Yale University) Law School에서 Visiting Scholar로 재직 후 [[1999년]] 고려대학교 대학원에서 민사소송법으로 법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99년 이장호, 김기수와 함께 합동법률사무소를 개업했다. [[1999년]] [[3월]] 다시 [[숙명여자대학교]] 법학과 민사소송법 겸임교수로 위촉되었다. 태화기독교사회복지관(매맞는 여성의 쉼터)에서 공익변호사로서 무료법률상담을 하기도 했으며, 2000년부터 다시 환경운동연합 법률위원장 겸 상임집행위원으로 활동하였다.
         [[2002년]] 제일국제법률사무소 및 [[김장리 법률사무소]]에서 변호사로 근무했다. 2002년에는 화장품회사 로레알의 향수 모델로 공동출연했는데, 다같이 모델료로 받은 천만원을 아름다운재단에 공익기부하기도 하였다.<ref>{{뉴스 인용|url=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mode=view&artid=200202281850321&code=100100|제목=오세훈의원 등 30~40대 전문가 광고모델료 기부|성=|이름=|날짜=|뉴스=|출판사=|확인날짜=}}</ref> [[2003년]] [[2월]] 환경재단 136포럼 운영위원에 위촉되었고, [[2003년]] 제20회 코리아 베스트드레서 정치인부문을 수상하였다.
         2005년 한국 여성재단에서 창립한 '미래포럼'에 문국현 유한킴벌리 사장 등과 함께 공동대표로 선출되어 활동하였다.<ref>{{웹 인용|url=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5&aid=0000192361|제목=한국여성재단 미래포럼 창립 - 공동대표 오세훈 전 의원|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확인날짜=}}</ref> 또한 같은 해에 [[한국노동조합총연맹]] 자문변호사에 위촉되어 활동하였다.<ref>{{웹 인용|url=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18&aid=0000303916|제목=오세훈변호사, 한국노총 자문변호사로 위촉|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확인날짜=}}</ref> 그리고 대한사회복지회 요청으로 인한 '사랑의 사진전' 모델료로 받은 3000만원 전액을 장애아와 미혼모를 위해 써달라며 기탁하였다.<ref>{{웹 인용|url=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16&aid=0000145328|제목="장애아 돕기 써달라" 광고 출연료 선뜻}}</ref> 2005년 12월에는 '희망원정대' 2기 원정대원으로, 엄홍길 원정대장 및 가수 안치환씨 등과 함께 장애인의 멘토가 되어 함께 킬리만자로 등반에 나섰다.<ref>{{웹 인용|url=http://entertain.naver.com/read?oid=001&aid=0001120651|제목=장애인들의 멘토가되어 킬리만자로 등반 도전 - 오세훈 변호사|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확인날짜=}}</ref>
         2013년 12월 KOICA의 페루의 중장기자문단 도시행정분야 모집공고에 지원하여, 6개월간 페루의 리마시청에서 도시행정분야 자문을 담당하였다. 2014년 6월에 한국에 귀국하였고, 같은달 KOICA 르완다 중장기자문단 도시행정분야 모집공고에 지원했으며, 르완다 키갈리시청에 파견되어 중장기자문단 활동을 수행하였다.<ref>{{뉴스 인용|저자=박형연|제목=해외 봉사에 전념하는 오세훈 전 시장을 만나다|url=http://news.koreanbar.or.kr/news/articleView.html?idxno=11272|날짜=2014-08-14|뉴스=대한변협신문}}</ref>
         [[바른정당]] 상임고문을 지내다가 [[국민의당]]과의 합당에 반대하여 2018년 2월 5일 바른정당을 탈당하였고, 몇 개월 뒤인 11월 29일에 다시 [[자유한국당]]에 복당하였다.
         * 1996년 3월 ~ 1997년 2월 : 경원대학교 법학과 민사소송법 강사
         * 1997년 9월 ~ 1998년 2월 : 숙명여자대학교 법과대학 겸임교수
         * 1998년 1월 ~ 1998년 12월 : 미국 예일(Yale)대학교 Law school 교환교수(Visiting scholar)
         * 1999년 2월 ∼1999년 10월 : SBS 갑론을박 동서남북 - 진행자
         * 1999년 3월 ~ 2000년 2월 : 태화기독교사회복지관 무료법률상담변호사
         * 1999년 3월 ~ 2000년 2월 : 숙명여자대학교 법과대학 겸임교수
         * 2000년 2월 ~ 2004년 5월 : 환경운동연합 법률위원장 겸 상임집행위원
         * 2003년 7월 ~ 2004년 2월 : 한나라당 청년위원회 위원장
         * 2012년 10월 ~ 2013년 2월 : 중국 상하이 푸단대학교(Fudan University) 중급어학과정 수료
         * 2013년 2월 : 법무법인 대륙아주 고문변호사
         * 2013년 4월 ~ 2013년 12월 : 한양대학교 공공정책대학원 특임교수
         * 2013년 12월 ~ 2014년 6월 : 한국국제협력단(KOICA) 중장기자문단(페루 리마시청 파견)
         * 2018년 12월 ~ 2019년 2월 : 자유한국당 국가미래비전특위 위원장
  • 원희영
         [[2002년]] [[오태양]]의 [[양심적 병역 거부]]를 지지, 홍보하는 활동을 하였다. [[2002년]] [[2월 4일]] 오전 11시 [[서울]] [[철학카페 느티나무]]에서 [[한홍구]], [[효림]]스님, [[오태양]] 등의 주최로 열린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권 실현과 대체복무제도 개선을 위한 연대회의 발족식 및 기자회견'에 참석하였다. 이어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 회원 및 1554명의 인권, 시민단체 회원들과 함께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권 인정 및 대체복무제도 도입을 촉구하는 1000인 선언'에 동참, 서명하였다. 이후 그는 [[양심적 병역 거부]]를 지지하는 활동에도 동참하였다.
         [[2002년]]에는 [[민주노동당 (대한민국)|민주노동당]] [[서울특별시]] 광진을 지구당 운영위원이었다.<ref name="wonggs">[http://left21.com/article/434 전지윤을 석방하라] {{웨이백|url=http://left21.com/article/434 |date=20140111084523 }} 월간 다함께 제14호 2002-07-01</ref> [[2002년]] [[5월 7일]] [[경기도경찰청|경기도경 보안수사대]]가 [[성공회대학교]] 총학생회 정책국장이자 [[민주노동당 (대한민국)|민주노동당]]원인 전지윤(사회학과 4학년) 씨를 연행ㆍ구속했다.<ref name="wonggs"/> 이때 그도 전지윤 석방 운동에 동참하였다.<ref name="wonggs"/> [[2003년]] [[2월]] [[정욜]], [[육우당 (활동가)|육우당]] 등과 함께 [[서울특별시|서울]]에서 열린 [[이라크 파병]] 반대 집회에 참여하였다.
         [[2003년]]부터 [[2005년]]까지는 생계를 위해 일부 [[논술]]학원과 종합보습학원, 대학의 [[논술]], [[논리학]] 강사로 출강하였으며, [[2003년]] [[4월 17일]] 그는 네이스(교육행정정보시스템, NEIS) 중단 요구 각계각층 1000인 선언에 서명하였다.<ref>진보네트워크센터, 한국정보문화운동협의회 공저, 《2003 정보인권 사업백서》(진보네트워크센터, 2003) 328페이지</ref> 'NEIS 중단' 각계각층 1천인 선언문이 작성되자<ref>[http://www.vop.co.kr/A00000003874.html 'NEIS 중단' 각계각층 1천인 선언] 민중의소리 2003.04.17</ref>, 반대 성명 발표에 참석하였다. [[2004년]] [[1월]]부터는 [[동성애자인권연대]]에 다시 나와서 활동하였다. [[1월 11일]] [[동성애자인권연대]] 소식지팀장으로 제2회 인권학교의 강사로 초빙되었다.<ref name="sososs">[http://www.pn.or.kr/news/articleView.html?idxno=1493 제2회 인권학교 (1.11-2.3.한국인권행동)] 평화뉴스 2004.12.17</ref> 1월 11일부터 2월 3일까지 열린 인권학교에서 그는 [[2월 2일]] '성 소수자와 인권'이라는 주제로 강의하였다.<ref name="sososs"/> [[2004년]] [[10월]] [[인권운동사랑방]] '열린 성소수자 상담, 어떻게 시작할까?'라는 주제의 강연회에 '노동권'을 주제로 강연하였다.<ref>[http://sarangbang.or.kr/kr/info/PhpSrc/search_content.php3?id=4496&pagenum=399&style=search&MaxCount=10&strQry= '열린 성소수자 상담, 어떻게 시작할까?']{{깨진 링크|url=http://sarangbang.or.kr/kr/info/PhpSrc/search_content.php3?id=4496&pagenum=399&style=search&MaxCount=10&strQry= }}</ref> 동인련, 성소수자 활동 및 민노당 당원 활동과 함께 그는 논리, 논술 강사로 활동하며 생계를 이어갔다.
         [[2005년]] [[뇌종양]]으로 투병, 병원에 입원하였다가 퇴원하였다. [[2005년]] [[6월 9일]]부터 [[7월 24일]]까지 [[동성애자인권연대]]와 [[성소수자인권상담센터]]의 '성소수자 상담원 양성 교육'의 강사의 한 사람이었다.<ref>[http://www.lsangdam.org/kiri/660 2005 성소수자 상담원 양성 교육 자료집 발간!]</ref> [[2005년]] [[1월 11일]]부터 [[2월 3일]]까지 한국인권행동 주관 제2회 인권학교의 연사로 참여, "성 소수자와 인권"이라는 주제로 강의하였다.<ref>[http://go.jinbo.net/mybbs/view.php?board=kcwu-30-3&id=88&page=30&SESSIONID=bf89444a8489a27b8b686033d1a9c68c <nowiki>[</nowiki>대구<nowiki>]</nowiki> 인권학교 수강생 모집]</ref> 그밖에 민주노동당 성소수자위원회 위원을 겸하였다. [[2006년]] [[3월 19일]] [[서울특별시|서울]] [[용산구]] [[서울역]] 광장에서 개최된 3.19 국제공동반전행동 및 [[미국]]의 [[이라크]] 침략 규탄 집회에 참여하였다.
  • 유열 (가수)
         [[대구초등학교]], [[대구중학교 (대구)|대구중학교]], [[대구고등학교 (대구)|대구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 무역학을 전공. [[고려대학교 문화예술 최고위과정수료]] [[1986년]] [[12월 19일]] [[MBC 대학가요제|제10회 MBC 대학가요제]]에서 ''지금 그대로의 모습으로''라는 노래로 대상을 수상하면서 음악계에 데뷔하였다.<ref name=autogenerated1>[http://www.chosun.com/se/news/200601/200601190193.html 1등 인터넷뉴스 조선닷컴 - [브라보~! 7080] '데뷔 20주년' 유열<!-- 봇이 붙인 제목 -->]</ref> 그 후 [[1989년]]까지 매년 [[한국방송]]·[[문화방송]]의 연말 10대가수로 선정되는 등 큰 인기를 누렸다.<ref name=autogenerated2>[http://www.izm.co.kr/news_view.asp?key=1&s_idx=1700 * IZM - New Stream *<!-- 봇이 붙인 제목 -->]</ref> 1996년 대한민국 동요대상,동요를 사랑한 가수상 수상
         [[2012년 6월]]에는 15살 연하의 아내 배서윤씨와 결혼을 하였고, 이듬해 [[2월]] 아들 유정윤이 태어났다.
  • 윤덕주 (농구인)
         * [[1999년]] [[2월 11일]] [[대한농구협회]] 명예회장<ref>[http://sports.news.naver.com/sports/index.nhn?category=kbl&ctg=news&mod=read&office_id=001&article_id=0004425319 대한농구협회, 최희암감독 사면 복권]</ref>
         * 아버지 : [[윤홍열 (1893년)|윤홍열]](尹洪烈, [[1893년]] ~ [[1947년]] [[2월 19일]])
         *** 외사촌동생 : [[이열희 (1924년)|이열희]](李烈熙, [[1924년]] [[12월 18일]] - [[2012년]] [[8월 9일]]), 치과의사, 구강성형외과 의사
         * [[1997년]] [[2월]] [[대한올림픽위원회]] 공로상
  • 윤병세
         외무고시 10회 합격하여 1977년부터 외무부에서 공직 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외무무 북미 1과장과 주 미국 공사참사관 등을 지내는 등 30년간 외무부에서 일했다.<ref>{{웹 인용 |url = http://www.edaily.co.kr/news/NewsRead.edy?SCD=JF31&newsid=02322246602710192&DCD=A00603&OutLnkChk=Y|제목 = [프로필]윤병세 외교부장관 내정자|저자 = 피용익|날짜 = 2013년 2월 13일|확인날짜 = 2013년 3월 16일}}</ref>
         한편 참여정부 시절인 2004년에는 국가안전보장회의 정책조정실장을 지냈으며, 그밖에 외교부 차관보, 청와대 외교안보수석 등을 역임하였다. 청와대를 떠난 뒤인 2009년에는 서강대 초빙교수를 지냈으며, 박근혜 대통령 당선자를 만난 뒤에는 몇 가지 조언을 해주며 인연을 쌓아오다가 2010년 12월 국가미래연구원 회원으로 참여하게 되면서 박근혜의 외교안보 브레인으로 떠올랐다.
         그는 최대석 이화여대 교수, 이정민 연세대 교수 등과 함께 국가미래연구원의 외교안보 그룹에서 박 당선인의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를 구상해 왔다. 박근혜 정부의 외교통상부 장관 후보자로 지명되었으며 2013년부터 정식으로 업무를 수행하기 시작했다.<ref>{{웹 인용 |url = http://news1.kr/articles/1008588|제목 = [프로필] 윤병세 외교부 장관 내정자|저자 = 권은영|날짜 = 2013년 2월 13일|확인날짜 = 2013년 3월 16일}}</ref>
         2013년 2월 28일, 윤병세 외교부 장관 후보자에 대한 국회 외통위원회 인사청문회에서 이화여대에 재적하고 있던 그의 딸이 2008년부터 2010년까지 5차례에 걸쳐 '가계곤란 장학금'을 받은 사실이 문제가 되었다. 그는 김앤장 로펌 고문으로 일하면서 2009년 8760만원, 2010년 1억5600만원을 받은 억대 연봉자였다.
         * [[2000년]] [[2월]] : 주제네바 대표부 공사
         * [[2006년]] [[12월]] : 대통령비서실 통일외교안보정책수석비서관
         * [[2009년]] [[2월]] ~ [[2013년]] [[3월]] : 김앤장 법률사무소 고문
         2015년 12월 28일 한국과 일본 정부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 합의 당시 '이면합의'를 하고도, 이를 공개하지 않기로 한 사실이 드러났다.<ref>[http://news.jtbc.joins.com/html/587/NB11567587.html 소녀상 이전 등 '이면 합의' 있었다…일본 요구 그대로 수용] - jtbc</ref> 한-일 [[위안부]] 피해자 문제 합의 검토 태스크포스(TF·위안부 티에프)는 2017년 12월 27일 지난 5개월의 검토 결과를 담은 보고서를 발표하였는데 '위안부 합의' 티에프가 이날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박근혜]] 정부는 1)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이하 정대협) 등 '[[위안부]]' 피해자 관련 단체 설득, 2) [[주한 일본 대사관]] 앞 [[평화의 소녀상]] 문제 관련 적절한 노력, 3) 제3국에 [[위안부 기림비]] 등 설치 미지원, 4) '성노예' 대신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를 공식 명칭으로 사용하겠다는 내용을 비공개로 일본 쪽과 합의했는데 이는 윤병세 외교부 장관과 [[기시다 후미오]] 일본 외상이 한-일 외교장관회담에서 언급한 내용으로, 12·28 합의의 '이면 합의'에 포함됐다.<ref>[http://www.hani.co.kr/arti/politics/diplomacy/825257.html 박근혜 정부의 거짓말…위안부 '이면합의' 있었다] - 한겨레</ref>
  • 윤선도
         1612년 [[진사]]시에 1등 2위로 급제<ref name="youn2007">[http://www.jkilbo.co.kr/news.php?fn=1&bc=news&type=view&num=18602&pcode=011006 윤선도의‘고산유고’ 집필지 광양 추동마을:전광일보] 2008년 2월 14일자</ref> 하여 [[진사]]가 되었다. 바로 [[성균관]](成均館)에 입학하여 [[성균관]] 유생이 되었다. 그해 겨울에 생부 [[윤유심]](尹惟深)이 병으로 눕자 임종시까지 극진히 간호하였다.
         [[1616년]](광해군 8년) [[성균관]] 유생으로 있을 때 [[인목대비]]의 친정아버지 [[김제남]]이 다른 뜻을 품고 있음을 규탄하는 상소를 올렸다. 그해 [[이이첨]], [[권신]] 등 [[대북]]계열 인사들이 왕을 제대로 모시지 않고 권세를 휘두르자, 그해 12월 이를 비난하는 글을 써서 왕에게 올렸다. 그해 이이첨 일파의 월권행위를 비판하는 상소를 올렸으며, 이후 [[광해군]]의 권세를 등에 업고 뇌물수수와 권력남용 등의 부패행위를 자행하는 이이첨, [[김개시]] 등을 비판하고, [[인목대비]] 폐모론과 [[영창대군]], [[임해군]], [[능창군]] 등의 처형을 규탄, 비판했다.
         [[1629년]](인조 7년) [[형조]][[정랑]](刑曹正郞)이 되고 다시 [[세자시강원]]문학에 임명되어 계속 왕자들을 보도하고 [[소현세자]]에게도 강론하였다. 이때 [[봉림대군]]과 [[인평대군]]을 견제하던 [[소현세자]]측 사람이 유언비어를 내 "선도가 몰래 모략을 꾸미니 앞으로 세자에게 이롭지 못하리라."하자 그는 즉시 벼슬을 내놓았다. 그러나 [[조선 인조|인조]]가 사람을 보내 그를 달래어 다시 데려왔다. 5년간 한양에서 [[대군사부]]로 있었으나, 여러 사람들과 부대끼며 벼슬하는 것이 어울리는 것이 맞지 않았던 그는 벼슬을 버리고 [[전라남도]] [[해남군]] 고향으로 내려왔다. 그러나 [[조선 인조|인조]]의 거듭된 청으로 다시 올라와 왕자사부로 [[봉림대군]], [[인평대군]]에게 글과 학문을 가르쳤다. 사부는 관직을 겸할 수 없음에도 특명으로 사부(師傅)와 겸임하여 [[공조]][[좌랑]], [[형조]][[정랑]], [[한성부]][[서윤]] 등을 겸임하였다. 그해 [[12월 27일]] 행[[공조]][[좌랑]]으로 전임되었다.
         [[1629년]] 왕자사부로 [[공조]][[좌랑]](工曹佐郞)을 겸하고, [[형조]][[정랑]](刑曹正郞)이 되었다. [[1630년]](인조 8년)초 병으로 공조좌랑을 사직했다. 그러나 그해에 [[공조]][[정랑]], [[한성부]][[서윤]](漢城府庶尹)을 거쳐 [[1630년]] [[8월 1일]] [[어모장군]](禦侮將軍) 행[[용양위]][[부사과]](行龍驤衛副司果)로 전임되었다. [[1630년]] [[10월]] 별시(別試) 초시(初試)에 합격한 뒤 12월 특명으로 공조정랑(工曹正郞)을 제수받고 사부(師傅)도 겸직하였다.
         [[1631년]] [[6월]] [[호조]][[정랑]]에 임명되고 [[총융청]]랑(摠戎廳郞)을 겸하였으나 그해 [[9월]]에 호조정랑을 사직하고 해남으로 돌아갔다. [[11월]]에 형조정랑에 임명되었으나 곧 사직하였다. 그 뒤 [[성균관]] [[사예]]를 거쳐 [[1632년]] [[1월]] 오랫동안 왕자의 사부로 있었다 하여 특별히 호조 정랑(戶曺正郞)으로 제수받고 [[사부]](師傅)도 겸임하였으며, 그해 [[2월]] [[사복시]] 첨정(司僕侍僉正)으로 승진했다가 지평 지덕해(池德海), 장령 고부천(高傅川)이 그를 파직하라는 상소를 올렸으나 왕이 받아들이지 않자 그들이 사직서를 냈다. [[1632년]] [[3월]] [[한성부]]서윤(漢城府庶尹)이 되었다. 그해 [[11월]]에 병으로 한성부서윤직을 사퇴하고, 겸임하던 [[왕자사부]]직도 모두 사임하고 해남으로 돌아갔다.
         [[1636년]](인조 14년) [[12월]] [[병자호란]] 때 왕이 [[강화도]]로 피난하게 되자, 37년 1월 [[병자호란]] 중에 그는 가복(家僕) 수백 명을 배에 태워 [[강화]]로 떠났다. 그러나 그는 왕을 보호하기 위하여 [[선박|배]]를 타고 [[강화도]]로 향하였다. 그러나 이미 [[강화도]]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남한산성]]을 향해 가다가 이번에는 환도했다는 소식을 들었다.<ref name="youn2007"/> [[조선 인조|인조]]가 [[청나라]]에 항복, 화의했다는 소식을 듣고 이를 욕되게 생각하고 평생 은거를 결심, 뱃길을 돌려서 [[제주도]]로 향하였다.
         [[1649년]](효종 즉위년) [[6월]] [[조선 효종|효종]] 즉위 직후 석방, 특별 복권되어, [[조선 효종|효종]]의 부름을 받았으나 계속 사양하였다. [[1650년]] [[2월]] [[성균관]]사예(司藝)에 임명하자 처음에는 거절하였으나 [[조선 효종|효종]]의 거듭된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고 취임하였다. 그해 [[3월]] 효종은 그에게 [[통정대부]] [[승정원]][[승지]](承旨)를 제수하고 이어 [[동부승지]]겸 [[경연]][[참찬관]]에 임명하여 늘 경연(經筵)에 참여하게 하였으나, [[서인]]계 경연관들이 그를 꺼리고 기피하자, [[4월]]초 여러 번 상소하여 강력히 물러날 의사를 밝히고 떠났다. [[조선 효종|효종]]이 특별히 배려하여 동부승지에 제수했지만 그가 한사코 거절하자 [[사간원]]의 언관이던 [[민정중]](閔鼎重)과 [[김시진]]이 그를 탄핵하는 상소를 올리기도 했다. 그러나 예전 스승으로 있을 때처럼 지도해줄 것을 거듭 요청하는 [[조선 효종|효종]]의 거듭된 청을 받고 그해 여름 다시 출사하였다.
         그러나 그의 [[원두표]] 공격의 후유증은 계속되었고, 그는 외부와 단절하고 [[성리학]] 연구와 시와 글로 소일하였다. [[1653년]] [[2월]]에 보길도(甫吉島) 부용동(芙蓉洞)에 가서 세연정(洗然亭)을 증축하였고, 명성이 알려져 문인들이 찾아왔다. 이후 석실(石室), 회수당(回水堂), 무민거(無憫居), 정성당(靜成堂) 등을 짓고 제자들을 가르쳤다.
         [[1658년]] [[3월]] 다시 [[공조]][[참의]](工曺參議)에 특별히 임명되어 복직하였다. 이는 [[조선 효종|효종]]이 자신의 [[왕자]]시절 사부에 대한 배려였다. 그런데 이때 윤선도는 [[정개청]]의 일을 언급하며 자신은 사직해야 된다고 하였다. 그러자 [[4월]] 대간과 [[사헌부]]에서 들고 일어나 그를 탄핵하였고, 자리를 교체시켜 [[세자시강원]]에서 왕세자인 [[조선 현종|현종]]의 사부가 되어 현종을 가르쳤다. 그러나 사간원과 사헌부는 계속 탄핵하였고, 그해 [[12월]] 삭탈관직당하고 다시 고향인 [[경기도]] [[양주군|양주]]로 되돌아갔다.
         [[1665년]] [[1월]] 흰무지개가 해를 꿰뚫고 [[2월]]에는 [[혜성]]이 나타나자 현종은 자신을 책망하며 구언(求言)을 하였는데 이때, 그해 [[2월 21일]] 유학(幼學) [[성대경]](成大經)이 구언에 따라 상소를 올려 윤선도의 방환을 탄원하였다. 이를 계기로 [[허목]]과 [[윤휴]] 등 [[남인]]에서는 계속 윤선도를 구명하는 상소를 올렸다. [[2월 27일]]에 다시 재앙으로 큰 가뭄이 발생하였는데, 그 결과 윤선도를 전라도(全羅道) 광양(光陽)으로 이배의 명이 내려졌다. 윤선도는 [[4월]]에 [[삼수]]를 출발, [[6월]]에 [[전라남도|전남]] [[광양시|광양]]에 도착하여 아래에서 유배생활을 하였다.
         [[1672년]] [[12월]] [[조선 현종|현종]]은 특명을 내려 선왕과 자신의 스승이던 그의 직위와 작첩을 되돌려주라 명하였다.
         이어 [[1675년]](숙종 1년) [[2월]] 제1차 [[예송 논쟁]]으로 [[송시열]], [[송준길]] 등에 맞서다가 피해를 입은 [[남인]] 관료들을 복권시킬 때 [[허목]], [[윤휴]]의 건의로 그해 [[8월 2일]] [[증직|증]](贈) [[자헌대부]]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추증]](追贈)되었다. 이때 [[허목]]과 [[윤휴]]는 여러번 그가 예를 바로잡는데 기여하였으므로 마땅히으로 추증하고 작위를 내려야 한다고 건의했으나 [[의정부]][[영의정]] [[허적]](許積)은 옳지 않다하여 결국 1671년 1월 증직은 [[이조판서]]로 정해졌다. [[1676년]] [[2월 28일]] [[이조참판]] [[이무]]가 다시 윤선도에게 삼공을 증직할 것을 청하였다.
         [[1678년]] [[9월]] [[허적]]과 [[허목]], [[윤휴]] 등이 그에게 시호를 내릴 것을 상주하여 [[1679년]](숙종 5년) [[8월]] [[김덕원]](金德遠)의 상주로 충헌(忠憲)의 시호가 내려졌다.<ref>남파 홍우원이 지은 시장에 의하면 危身奉上曰忠 博文多能曰憲이라 하여 충헌이 되었다.</ref> 그러나 [[1680년]](숙종 6년) [[8월]]에 [[허견의 옥사]]로 [[남인]]들이 [[서인]]에 의해 대거 숙청, [[허적]](許積), [[윤휴]] 등이 처형당하고 [[허목]], [[홍우원]] 등은 파직당하여 [[문외출송]]당한 뒤, [[이사명]](李師命) 등의 상소로 그해 윤 [[8월 10일]] 윤선도에게 내려진 [[증직]]과 [[시호]]도 함께 추탈당하였다. 그 뒤 [[1689년]](숙종 15년)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집권하면서 그해 [[2월]] 다시 복작되었다.
         * 부인 : 남원 윤씨(南原尹氏, [[1588년]] - [[1655년]] [[2월 22일]], [[판서]](判書) [[윤돈]](尹暾)의 딸)
         ** 서자 : 이름 미상([[1631년]] - [[1639년]] [[2월 1일]]<ref>그의 죽음을 슬퍼하여 특별히 도미아(悼尾兒)와 견회(遣懷)라는 한시를 지었다.</ref>)
         * [http://www.jkilbo.co.kr/news.php?fn=1&bc=news&type=view&num=3470&pcode=010004 보길 윤선도유적 복원사업 활발:전광일보] 2007년 02월 14일
         * [http://www.jkilbo.co.kr/news.php?fn=1&bc=news&type=view&num=18602&pcode=011006 윤선도의‘고산유고’ 집필지 광양 추동마을:전광일보] 2008년 2월 14일자
  • 윤영구 (1928년)
         [[1942년]] 에 입학하여 [[1945년]] 졸업하였다. 이후 [[서울대학교]] 음악학과에 입학, [[1950년]] [[2월]] [[서울대학교]] 음대를 졸업하였다. 바로 [[미국]]으로 건너가 미국 항공사에 취직했다가 [[1950년]] [[6월]] [[6.25 전쟁]]이 발생하고 미군이 한국에 파견되자 그는 미국 공군 군종장교 군목의 통역관으로 [[한국]]으로 들어와 [[1950년]]부터 [[1952년]] 휴전까지 활동했으며, 미공군 군목의 한국 전쟁 고아 구호사업을 지원하였다.
         * 할아버지 : [[윤치오]](尹致旿, [[1869년]] [[8월 5일]] ~ [[1950년]] [[12월 22일]])
         * 계조모 : [[윤고려]](尹高麗, 다른 이름은 윤고라, [[1891년]] [[4월 14일]] ~ [[1913년]] [[12월 28일]])
         * 어머니 : 조마구례(趙瑪玖禮, 다른 이름은 조영숙(趙榮淑) 또는 Margaret Young Sook Cho, [[1901년]] [[12월 14일]] ~ [[2003년]] [[8월 9일]])
  • 윤종신
         연세대 원주캠퍼스 가요제에서 금상으로 입상한 이후, 과 동기로부터 [[정석원(음악인)|정석원]]을 소개받았다. 정석원은 친구의 아파트에서 윤종신의 노래를 듣고 [[015B]]의 객원보컬로 픽업했다. 이 때 [[장호일]]이 반대했다고 한다. 이유는 비주얼. 그래도 보컬이 밴드의 얼굴인데... 가창력만으로 승부한 데뷔였던 셈이다. 그리하여 '''[[1990년]] [[7월 15일]]''', [[015B]]의 데뷔 앨범이 발매되면서 그도 데뷔하게 된다. 심지어 같은 해에 데뷔한 [[신승훈]](11월 1일), [[윤상(가수)|윤상]](11월 30일)보다도 데뷔 날짜가 빨랐다. 종종 "나 [[노태우]] 대통령 때 데뷔했어! 심지어 [[걸프전]]보다도 전이야!"라고 하기도 했다.[* 종전에도 윤종신이 윤상의 전성기에 대해서도 드립을 쳤을 정도로 미는 개그 중 하나였다. 노태우 대통령 취임은 1988년 2월 25일, 윤종신 데뷔는 1990년 7월 15일, 걸프전 발발 1990년 8월 2일이다.]
         [[2016년]] 이후에는 월간 윤종신 수록곡들을 통해 단순한 남녀간의 사랑과 이별을 제외한 다른 주제들도 자주 노래하는 편이다. [[2017년]] 1월호 '세로'에서는 차트 줄세우기 위주의 음반계를, [[2016년]] 12월호에서는 촛불정국을 노래했다. 중장년층, 혹은 나이든 뮤지션으로서의 심경도 자주 노래하는 것 같다. [* 마지막 순간, Old school, 나이, Birdman 등...]
          * 계절: 윤종신 - 이별의 온도, 가을옷, 늦가을 (Vocal 규현), 12월, 바캉스 매니아, 결국 봄
         2월에는 굽네치킨 광고를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8/02/05/2018020502565.html|찍었다]].
          * 2011년 2월에 [[라디오 스타(황금어장)|라디오 스타]]에서 정관수술을 했음을 고백했다. [[http://www.youtube.com/watch?v=aAKYzwbg95c|이미 조치를 취했다고 한다.]]
          *[[2012년]] [[2월]] 윤종신은 [[SBS]] [[힐링캠프(SBS)|힐링캠프]]에 출연해 [[난치병]]인 [[크론병]]을 앓고 있다는 사실을 최초로 밝혔다. 크론병은 입에서부터 [[항문]]까지 이어지는 모든 소화기관에 염증이 생길 수 있는 병으로, [[수술]]로도 완치는 불가능하며 평생 약물치료를 해야하는 병. 윤종신은 2006년에 처음으로 병에 걸린 것을 알았다고 한다. 너무 늦게 발견해 소장을 60cm나 잘라야 했고 지금은 약물 치료중이라고 한다. 게다가 더 놀라운 사실은 윤종신이 지금까지 예능에서 [[치질]]에 걸렸다는 얘기를 하며 웃으며 했던 얘기가 사실은 이 크론병으로 인한 치루질환을 말한 것이었다고… 난치병을 웃음소재로 바꿔 시청자들에게 웃음을 줘야 했던 윤종신의 안타까운 고백이었다. 이 소장수술을 하고서 마취가 풀리면 링거에 연결된 [[모르핀]]이 조금씩 나오도록 장치를 해 놨다고 한다. 간호사가 너무 아플 때마다 버튼을 한번씩 누르라고 했다고. 그런데 마취에 깨면서 "아, 아! 아!!!" 비명 지르며 뾱뾱뾱뾱뾱뾱뾱뾱뾱뾱뾱뾱… 그리고 3일간 기절해 있었다고 조미료 섞인 썰을 예능에서 풀었다... [* 물론 실컷 눌렀다고 해서 모르핀이 쭉 나왔을 리는 없다. 모르핀이 한번에 많이 들어가면 죽을 수도 있기 때문에, 짧은 시간 동안 여러 번 눌러도 실제로는 한두 번 밖에 안들어가도록 설계되어있다. 대체로 10분 간격으로 자동으로 투입되나, 그 사이에 몇 분 안에 한해서 누를수 있다던가. 방식으로 사용한다. 실제로 수술 후 깨어난 뒤에 모르핀 때문에 다시 기절해서 3일동안 못 깨어난다면 의료사고가 될 수 있어서 병원 뒤집어져 난리난다. 최소한 하루 이상 지난 뒤 '윤종신 수술 후 혼수상태로 위독'으로 연예뉴스에 나왔어야 할 정도..] 아직도 소화기 쪽이 완전히 회복되지는 않은 모양. [[김구라]]에 따르면 윤종신이 배가 아파 라스 녹화가 지연된 바 있다고. [[http://naver.me/xp0l7q57|링크]]
          *정치성향은 중도 혹은 진보에 가까운 듯하다. 2008년 명랑 히어로 출연 당시에는 [[이경규]]와 함께 광우병 촛불시위를 지지하지 않는 것으로 묘사되었는데, 김구라가 이를 물고늘어지는 장면이 나온다. 하지만 2016년 박-최 국정농단 사태 때 '용기를 내어' 가족들과 함께 촛불집회에 참여했다. 이때의 감상을 바탕으로 2016년 12월 월간 윤종신 '그래도 크리스마스'를 작사 작곡했다. 마침 그 곡의 가사가 JTBC 뉴스룸의 앵커브리핑에 소개되고, 이 인연으로 뉴스룸에 인터뷰로 출연하기도 했다.
  • 윤치영
         |출생일= [[1898년]] [[2월 10일]]
         '''윤치영'''(尹致暎, [[1898년]] [[2월 10일]] ~ [[1996년]] [[2월 9일]])은 [[대한민국]]의 사상가, [[정치인]], [[언론인]]이다. [[대한민국]]의 제2대 [[서울특별시]]장 겸 제4대 대통령, 상공부장관 [[윤보선]]의 숙부이지만, 그보다 나이는 한 살 어리다. [[이승만]]의 비서실장, [[대한민국]]의 초대 [[대한민국 내무부|내무부 장관]]과 제2대 [[주프랑스 대한민국 대사관|주프랑스 공사]]를 역임했다.
         동산 윤치영은 [[1898년]] [[2월 10일]] [[경성부]]에서 무관 출신 [[윤영렬]]과 청주 한씨 한진숙의 6남 2녀 중 여섯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날 무렵 그의 집은 굉장한 부자여서 집의 크기가 200칸이나 되었다고 한다. 그가 태어날 때는 형 [[윤치오]], [[윤치소]], [[윤치성]], [[윤치병]], [[윤치명]] 등과 누이 윤활란, [[윤노덕]], 이름미상 등 3명의 누이가 있었다. 그 중 맏형인 [[윤치오]]와는 30세, 둘째 형 [[윤치소]]와는 28세 터울이었다.
         {{참고|2·8 독립 선언|2월회|3·1 만세 운동}}
         사립(현재 [[서울특별시|서울]] [[종로구]])을 졸업하고 모교의 [[야구]]부 코치를 맡던 그는 [[1917년]] 도일, [[일본]] [[와세다 대학]](早稻田大學) 예과(豫科, 고등학교 과정)에 입학하였다. [[1918년]] [[2월]] [[와세다 대학]]의 예비 과정(고등학교 과정)을 마치고, 그해 [[3월]] [[와세다 대학]] [[정치경제학|정치경제학부]] [[법학|법학과]]에 입학했다.
         [[1918년]] [[일본]]을 방문한 [[여운홍]] 등을 만나 [[미국]] 교포들의 현황과 독립자금 모금 현황 등의 정보를 입수했다. [[1919년]] [[2월 8일]] [[일본]] [[와세다 대학에]] 유학 중 [[동경]]에서 유학생들의 [[조선]] [[2·8독립 선언]]에 참여하였으며, 같은해 [[11월 23일]]에는 [[여운형]]의 일본 입국을 환영하는 유학생 환영회를 개최하고 한국 독립의 당위론을 강연하는데 물심양면으로 지원하였다. 또한 그는 [[YMCA 청년회]]에도 활약, 재동경 한인 YMCA 청년회 회원으로 활동하였다.
         윤보선의 동경 잠입을 계기로 그는 이른바 [[2월회]]를 비밀리에 조직하게 되었다. 이는 [[상하이 임시정부]]를 후원하기 위한 비밀 결사로서 윤치영 등이 주동이 되어 [[김도연 (1894년)|김도연]](金度演), [[김준연]](金俊淵), [[유억겸]](兪億兼), [[백관수]](白寬洙), 박승철(朴勝喆), 최원순(崔元淳) 등이었다.<ref name="윤치영 회고록 p.56"/> [[1922년]] [[와세다 대학]] 법학과를 졸업하였다.
         [[1932년]] [[조지 워싱턴 대학교]]에서 [[국제법]] [[학사]] 학위를 받고, [[1934년]] [[아메리칸대학교]] [[대학원]] 법학과를 졸업하였고<ref name=autogenerated2 /> [[국제법]]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그 후 [[카네기 평화재단]]에서 [[국제법]]을 연구하던 중 [[1936년]] YMCA 기독교 청년회 부총무에 선출되었다.<ref name="조선19960210">조선일보, [http://news.chosun.com/svc/content_view/content_view.html?contid=1996021070057 고 윤치영 전공화당 당의장], 1996년 2월 10일자</ref>
         그해 [[12월 20일]] [[박희도 (1889년)|박희도]](朴熙道)가 운영하는 순일본어 잡지 〈동양지광 (東洋之光)〉사에서 주최한 "미영 타도 대좌담회"에서 연설하였는데<ref name=autogenerated3 />, 법률이나 외교를 연구하는 학도의 입장에서 보면 진주만 공격은 미국의 "간섭 행위"에 대한 일본의 "신성불가침의 자주권, 환언하면 국가 생존권에 관한 최후적 발단"이라고 [[일본]]의 행위를 옹호하였다.<ref name=autogenerated3 />
         그러나 그가 끝까지 [[창씨개명]]에 반대했다는 점<ref name="윤치호 일기 p.452"/>, [[이승만]]과 연락하면서 일제의 패망을 주장했다는 점 등이 지목되고 있다. 또한 당시 칼럼을 기고한 것은 명의 도용이라는 설이 있다. 또한 도용된 동양지광에 실린 글에 그는 [[창씨개명]]이 실리지 않고 본명인 '윤치영'으로 게재<ref>미영타도 좌담회, 《동양지광》 1942년 2월호</ref> 되었다.
         [[1945년]] [[2월 4일]], 단파방송은 연합국들의 수뇌들이 얄타에 모여 전후 처리문제를 논하고 [[얄타 협정]]을 체결하였다는 보도가 있어서 일본 패망의 날이 가까웠다는 것을 피부로 느끼게 하였다. 그해 [[5월 7일]]에는 독일이 먼저 연합군에 무조건 항복하고 [[히틀러]]는 베를린 요새의 지하실에서 여비서 [[에바 브라운]]과 자살했다는 소식을 접하였다.<ref name="동산회고록:윤치영의 20세기 p.142">윤치영, 《동산회고록:윤치영의 20세기》 (삼성출판사, 1991) 142-147페이지</ref>
         [[1945년]] [[12월]] 사촌형인 [[윤치호]]가 사망하였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 당시의 활동에 관련되어 그는 비판받지 않았고, [[윤치호]]의 사촌이라는 이유로 연좌되지는 않았다. 이후 [[12월 27일]] [[경교장]]에서 열린 소집회의에 참석하였고, [[12월 30일]]부터 [[신탁통치 반대 운동]]에 참여하였다.
         <ref>정병준, 《우남 이승만 연구》 (역사비평사, 2005) 518페이지</ref> [[1946년]] [[2월]] [[남조선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민주의원]]이 설치되자 민주의원 비서국장에 선임되었다.
         이후 그는 46년 [[2월]]과 [[5월]]에 열리는 미소공위를 놓고 [[이승만]]과 [[김구]]가 미소공위를 결사 반대하자, 그 역시 [[미소공동위원회]] 개최에 반대하는 칼럼과 강연, 홍보활동에 나섰다. 외국이 우리 운명을 결정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역설했고, 여러 청년들이 그의 주장에 호응했다. 46년 [[2월]] [[임영신]] 등과 함께 [[민주의원]] 대표 자격으로 UN에 파견, UN대표들에게 한국 정부의 조속한 수립에 협조해 줄것을 요청했다. 그 결과 48년 [[1월]] [[인도]] 대표 [[크리슈나 메논]]을 단장으로 한 유엔한위 조사단의 파견을 이끌어냈다. 그러나 윤치영은 공로를 [[임영신]]에게 모두 돌렸다.
         1947년 2월 21일 AP도쿄 지국장을 만난 김성수와 윤치영
         한편 주한국 총영사이자 [[하지]]장군 정치고문이었던 [[랭던]]을 규탄한 익명의 진정서를 보냈다가, 진정서사건으로 [[이묘묵]]의 비판을 받고 이승만의 비서실장에서 물러나게 되었다.<ref>[http://100.nate.com/dicsearch/pentry.html?s=K&i=246819&v=44 '이묘묵' - 네이트 백과사전<!-- 봇이 따온 제목 -->]{{깨진 링크|url=http://100.nate.com/dicsearch/pentry.html?s=K&i=246819&v=44 }}</ref> 쿠데타가 좌절되자 신익희는 일을 폭로한 윤치영을 책망했고, 미군정과 갈등하던 윤치영은 후회한다. [[1947년]] [[2월]] [[안재홍]]이 민정장관이 되면서 [[미군정청]] 재산처분국장으로 복직한다.
         그러나 [[대한국민당 (1948년)|대한국민당]]에서 [[신익희]], [[지청천]] 등이 탈당하여 당세가 약화되었다. 1949년 2월 대한국민당 일부의 민국당 입당으로 당이 사실상 와해되자 그는 이정회를 조직하여 꾸렸다. 이정회는 [[이승만]] [[대통령]]의 정치노선을 지지하는 데 선봉에 섰다.<ref name="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2"/>[[1949년]] 반민특위에서 국회의원에 대한 조사에 착수할 때는 조사대상에서 제외되었다. 이후 [[이기붕]] 세력, [[장택상]] 세력 등과 경쟁관계에 놓였으며, 그들과의 경쟁에서 밀리면서 [[이승만]]의 주변에서 멀어지게 되었다.
         1950년 12월의 파리 UN 총회에서 (왼쪽이 윤치영, 오른쪽은 임병직과 임영신)
         1950년 12월 주프랑스 공사 부임중 하와이에서 열린 축하식에 참석
         [[1950년]] [[12월]] [[미국]] 체류 중 그는 주 [[프랑스 공사관]] 공사에 임명되어 [[파리 (프랑스)|파리]]로 부임했으나, 유엔 총회가 끝나는 대로 빨리 돌아오라는 이승만의 호출을 받아 [[1951년]] [[4월]] 사표를 제출하고 귀국하였다.<ref>후임자는 전규홍이 임명되었다.</ref> 그 뒤 [[일일신문]](日日新聞)사를 창간하고 사장 겸 주필이 되었으나 경영난으로 곧 폐간된다. 곧 [[제헌동지회]] 회장에 선출되고 [[1952년]]에는 다시 태평양주보사에서 사장으로 영입하였다. 한편 [[6.25 전쟁]] 중 공식 성명서를 내고 [[인도]]군과 [[일본]]자위대의 파견을 적극 반대했다. [[인도]]군 파병에 반대한 것은 [[인도]]가 [[1948년]] UN에서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비호의적이었던 것에 대해 악감정을 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인도]]가 [[카스트 제도]]를 유지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도 평생 반감을 가졌다. [[1952년]] 잠깐 [[중앙대학교]]에 출강하여 [[국제법학]] 강사와 [[외교학]] 강사로 강의하기도 했다.
  • 윤훤
         |사망일= [[1627년]] [[2월 15일]]
         '''윤훤'''(尹暄, [[1573년]] ~ [[1627년]] [[2월 15일]])은 [[조선]] 중기의 문신, 군인, 작가이다. 본관은 [[해평 윤씨|해평]]으로, 자는 차야(次野), 아호는 백사(白沙)이다.<ref>[http://people.aks.ac.kr/view.jsp?id=PPL_6JOb_A1573_1_0008788 -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 - 윤훤]</ref> 해흥군(海興君)에 봉군되고 황해도관찰사, 부체찰사 등을 역임했으나 [[정묘호란]]때의 철군 문제로 사형당하였다.
         그 뒤 [[임진왜란]]을 거쳐 [[1598년]](선조 31) [[홍문록]](弘文錄)에 선발되었다. 그러나 그의 홍문록 선발에는 아버지의 입김이 작용했다는 설도 있다. 1599년 [[춘추관]]기사관(記事官), 그해 [[12월]] 호조좌랑, [[1600년]] 부수찬, 수찬, 그해 [[7월]] 다시 부수찬이 되고, [[10월]] [[비변사]]에서 유장(儒將) 16인을 선발할 때 한사람으로 천거되었다.<ref>선조실록 131권, 선조 33년(1600 경자 / 명 만력(萬曆) 28년) 11월 19일(기미) 2번째기사 "비변사가 유장 유공신 등 16인을 천거하다"</ref> [[1601년]] [[2월]] 다시 부수찬에 임명되고 이조 좌랑을 거쳐 그해 빈전 도감·국장 도감·산릉 도감 관계자들에게 포상할 때 가자되었다.
  • 윤휴
         [[1674년]](현종 15년) [[2월]] [[조선 효종|효종]]비 [[인선왕후]]가 죽으면서 시계모인 [[장렬왕후|자의대비]]의 복상 문제가 도마에 올랐고, 영남 유생 [[곽세건]]이 지난 효종상 때의 복제 문제를 언급하자 다시 예송논쟁이 발생했다. 이때 윤휴는 맏며느리의 예에 따라서 1년복을 입어야 된다고 주장했다. [[조선 효종|효종]]이 왕으로서 정통성을 계승한 만큼 효종비인 [[인선왕후]]는 맏며느리로 대우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1674년]](숙종 즉위) [[12월 1일]] 상소를 올려 [[병자호란]], [[정묘호란]]의 일을 언급하며 '복수설치'(復讐雪恥)를 주장하면서 북벌 계책을 담은 밀봉한 책자(冊子)를 함께 상소로 올렸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의 밀봉 [[북벌]] 상소는 화제가 되었고, [[12월 2일]] [[조선 숙종|숙종]]은 [[영의정]] [[허적]](許積)과 [[예조판서]] [[권대운]] 등을 불러 그의 상소를 놓고 의견을 물었으나 부정적으로 봤다. [[조선 숙종|숙종]]은 [[허적]]에게 "윤휴의 상소는 화(禍)를 부르는 말이다"고 평했다. 이에 [[허적]]은 "그 뜻은 군신 상하가 잊을 수 없는 것이지만 다만 지금의 사세와 힘으로는 미칠 수 없으니 다만 마땅히 마음에만 둘 뿐입니다"며 숙종의 말에 찬동했고, 역시 [[남인]]이었던 [[예조판서]] [[권대운]](權大運)도 "형세를 돌아보지 않고 큰소리하기를 좋아하는 자는 심히 불가하다"며 비판하였다. 이후 여러 번 밀소(密疏)를 올려 [[호포법]](戶布法)․[[상평제]](常平制)의 실시를 주장하여 [[전정]](田政)의 개혁을 도모하였고, 북벌을 위해 군권(軍權)을 통합한 [[도체찰사]]부의 설치와 전차의 제조를 주장하였으나 모두 거절당했다.
         [[1675년]] [[1월 2일]] [[조선 숙종|숙종]]이 그를 경연관에 임명하자 처음에는 고사하였으나 계속 출사하라 권고하여 다시 [[경연]]장에 출사하게 되었다. [[1월]] [[성균관]][[사업]](司業)이 되었다. 이때 [[예송 논쟁]]으로 유벌을 받은 [[윤선도]](尹善道)와 그밖에 유직(柳稷) 및 홍유부(洪有阜) 등의 유벌(儒罰)을 풀어달라고 청하여 관철시켰으며, 그해 [[2월]] [[홍우원]]의 복직을 청하여 성사시켰다. 그해 2월초 승지가 되었다. 2월 다시 [[승정원]][[우부승지]]로 개차되었다. 그해 왕에게 건의를 올려 백성들에게 뽕을 심고 수리를 일으키게 할 것을 주청하였다. 또한 그는 강력한 왕권을 위해 [[간관 제도]]를 폐지하고, 특정 문벌에 의해 독식되다 시피하는 [[과거제도]]의 폐지, 그리고 비상설기구인 [[비변사]]를 원래의 목적대로 되돌리거나 아니면 [[비변사]]를 혁파해야 한다고 건의하였다. 또한 그는 [[주례]](周禮)를 참고로 하여 〈공고직장도설 公孤職掌圖說〉을 숙종에게 올려 개혁을 촉구하기도 했다. [[조선 숙종|숙종]] 초에 [[남인]]이 득세하자 [[사헌부]][[대사헌]]·이조판서·[[의정부]][[좌찬성]]의 요직을 역임했다.
         [[1675년]](숙종 1년) [[1월]] 특별히 [[성균관]]사업(成均館司業)에 제수되었다. [[2월]] 승정원승지(承政院承旨) 겸 사업(司業)가 되었다가 [[3월]] [[이조]][[참의]]가 되고, 그해 [[이조참판]](吏曹參判)을 거쳐 [[한성부]]우윤으로 나갔다. [[3월]] 청풍부원군 [[김우명]]이 [[홍수의 변]]으로 삼복 형제의 역모를 고변하였다. 그러나 확증이 없자 윤휴는 [[허목]]과 함께 [[조선 숙종|숙종]]에게 [[김우명]]을 무고죄를 주고 [[반좌율]]로 처단할 것을 주청하였다. 홍수의 변(紅袖之變) 사건을 종결할 때 [[명성왕후]] 김씨가 소복차림으로 통곡하며 정청에 나타나 간섭하려 들자,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다. 그때 그는 [[홍우원]], [[허목]] 등과 계속 [[명성왕후]]의 개입이 잘못됐다는 지적을 했고, 숙종에게 왕대비(명성왕후 김씨)가 정치에 관여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주장하며 "대비를 조관하라"고 충고하였다가 임금의 미움을 사게 됐다. [[서인]]은 "대비의 조관"이란 단어를 문제삼아 패륜이라며 수시로 공격했다.
         * 외할아버지 : [[김덕민]](金德民, [[1570년]] ~ [[1651년]] [[12월 10일]], 호는 간서재, 학자. 그의 외할아버지이자 스승이었다.)
  • 윤흥인
         [[1542년]](중종 37년) [[과거 제도|무과]]에 응시했으나 2번째 시험소에서 응시하던 중 [[사헌부]]에 의해 문제가 제기되었다. 무과 이소(武科二所)의 거자(擧子) 윤흥인(尹興仁)이 기사(騎射)할 때 표적을 맞히지 못한 것은 징을 쳤는데 감적관(監的官)이 도리어 징을 가진 사람을 탓하고 위협하여 북을 치게 하니, 시관은 일부러 모른 체하고 맞힌 것으로 처리하였다 하여 시험의 공정성에 이의가 제기되었다.<ref>중종실록 99권, 1542년(중종 37년, 명 가정 21년) 12월 8일 계미 1번째기사, "헌부가 과거의 시행이 문란함을 아뢰니 대신들과 의논하기로 하다"</ref>
         [[1545년]](인종 1) [[내승]](內乘)을 거쳐 그해 [[2월]] [[공조]] [[좌랑]]을 거쳐 [[형조]][[정랑]](刑曹正郞)을 역임하였다. 그해 [[6월]] [[인종]]이 위급하자 입직을 섰고, 인종의 상태를 보고하였다.<ref>인종실록 2권, 1545년(인종 1년, 명 가정 24년) 6월 26일 정사 5번째기사, "상의 증세가 위급해지다"</ref> 병세가 악화되자 그해 [[7월 1일]] [[인종]]은 유언을 하며 '윤흥인(尹興仁)·윤흥의(尹興義) 형제로 하여금 내 상사를 감호(監護)하게 하라고 대신에게 말하라<ref>인종실록 2권, 1545년(인종 1년, 명 가정 24년) 7월 1일 신유 2번째기사, "승전 내시 김승보가 나와서 상의 유교를 전하다"</ref>' 하였다. [[1545년]] 대윤과 소윤의 갈등에서 아버지 [[윤임]]이 패하자 [[을사사화]]가 발생, 그 역시 연좌되어 [[전라남도|전남도]] 낙안(樂安)으로 유배되었다. 이때 그의 아버지 [[윤임]]은 다른 외조카인 계림군을 왕으로 추대하려 했다는 혐의를 받았다.
  • 은언군
         [[홍계능]] 이후, [[윤상후]](尹象厚, [[1757년]] [[1월 27일]]~[[1759년]] [[9월 25일]]), 윤득관(尹得觀, [[1759년]] [[11월 24일]]~[[1760년]] [[12월 15일]]), [[홍낙인]](洪樂仁, [[1760년]] [[12월 22일]]~[[1761년]] [[3월 11일]]), 김이안(金履安, [[1761년]] [[5월 12일]]~[[1762년]] [[12월 21일]]), 김재구(金載久, [[1763년]] [[6월 20일]]~[[1763년]] [[9월 7일]]), 한용화(韓用和, [[1763년]] [[12월 20일]]~[[1764년]]) 등이 두 왕손을 교육할 왕손교부로 부임하였다. 이 중 [[홍낙인]]은 이복 형 정조의 외삼촌이었고, 김이안은 청음 [[김상헌]]의 후손으로 김창협의 증손자이며 김원행의 아들이다. 김이안은 학행으로 천거되어 1년간 왕손들의 교육을 담당했다. 김재구는 학행으로 천거되었으나 재물을 탐냈다는 의심을 받고 파직되었다.
         [[1768년]](영조 44) [[1월 1일]] [[승정원]]의 건의로 은언군, [[은신군]], [[은전군]]은 [[종친부]]유사당상(宗親府有司堂上)에 임명되었다. [[1768년]](영조 44) [[2월 3일]] [[오위도총부]] 도총관(都摠官)에 제수되고, 같은 해 [[4월 20일]] 숭헌대부(崇憲大夫)에 가자되었다. [[1769년]](영조 45) [[5월 5일]] 영조로부터 [[용동궁]](龍洞宮<ref>순회세자에게 주어진 집으로 순회세자 사후 왕비 소유였던 집</ref>)을 사저로 하사받았다.
         [[1778년]](정조 2) [[12월]] 은언군 집에서 [[소]]를 밀도살하여 팔았다는 물의를 일으켰다. 이후 양사와 [[홍문관]], [[의금부]] 등로부터 여러 번 탄핵을 당했으나, 그때마다 정조가 무마시켰다. [[1779년]](정조 3) [[5월 7일]] [[수묘관]](守墓官)에 임명된 뒤, 같은 해 [[6월 28일]] 다시 [[서울특별시|서울]]제조(宗簿提調)을 거쳐 [[7월 23일]] 다시 서울시 유사당상을 겸임하고, [[1779년]](정조 3) [[12월]] [[교정청]]제조(校正廳提調)가 되었다.
         [[1790년]](정조 14) [[11월 13일]] 정조는 사람을 강화도로 보내 은언군을 불러들였다. 그러나 [[정순왕후]]의 방해로 만나지 못할 것을 염려하여 정조는 친히 용산(龍山) 별영(別營)에 나와서 하룻밤을 묵으면서 은언군을 기다렸다. 은언군은 비밀리에 강화부 유수의 묵인하에 강화도를 벗어났지만 [[한성부|한성]] [[용산구|용산]] 근처에서 사전에 발각되고, 다시 강화도로 압송되었다. [[1790년]] [[12월 13일]] [[강화군|강화부]] 유수 [[홍수보]](洪秀輔)가 이임하면서 후임자를 차출하여 은언군을 감시할 것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1801년]](순조 1) [[2월]] [[신유박해]]에 체포된 양제궁 나인의 진술로 부인 [[상산군부인 송씨]]와 며느리 [[평산군부인]] 신씨가 [[청나라]]에서 온 [[천주교]] [[선교사]]인 [[주문모]](周文謨)[[신부]]에게 [[세례]]를 받은 [[천주교]] 신자라는 사실이 밝혀지고<ref>당시 조선의 국교는 유교 성리학이었다.</ref>, [[상산군부인 송씨]]이 [[주문모]] 신부를 양제궁에 숨겨둔 것도 밝혀지면서 대간과 사헌부의 탄핵을 무수히 받고 [[1801년]](순조 1년) [[3월 17일]] [[사약]]형을 받게 되었다. 이때 은언군은 삼사로부터 가족이 사교(邪敎)에 물들도록 단속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줄기차게 탄핵을 받았고, 삼사와 정부 관료들은 [[상계군]], [[홍낙임]] 등과 관련해서도 계속 탄핵하였다. 그해 [[6월 13일]] [[사사]]령이 내려지고, [[6월 30일]] [[강화도]] 배소에서 사약을 받고 사사되었다. 이때 그의 향년 48세였다.
         [[1871년]](고종 8) [[2월 21일]] 왕족 은언군과 [[은전군]]의 시호를 의논하게 하고, 전교하기를, "은언군(恩彦君)은 왕실의 가까운 친족이다. 증시(贈諡)의 조치가 없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런데 처음에는 사세 때문에, 중간에는 겨를이 없어서 못하였으니 모두 까닭이 있었으나, 선대왕(先大王)의 성충을 우러러 체득하고 있는 만큼 의당 숭보(崇報)의 은전(恩典)이 있어야 할 것이다. 홍문관(弘文館)으로 하여금 시장(諡狀)을 기다리지 말고 시호(諡號)하고, 은전군(恩全君)에게 증시하는 은전도 시장을 기다리지 말고 일체(一體) 시호를 의정하게 하라." 하였다. 이해 [[2월 25일]] 은언군 등의 시호는 행실과 업적에 따라 짓게 하고, 전교하기를, "시호(諡號)는 행적에 대한 자취이니, 그 이름과 실상이 서로 부합되어야 받은 사람으로도 영광스럽게 되는 것이다. 이번 시호에 대한 의논이 과연 어떻게 되는지 알 수 없으나, 만일 조금이라도 지나치게 찬양한다면 이것이 어찌 옛 법이겠는가? 안면에 구애되지 말고 청탁에 관계없이 전적으로 실제 행실과 업적에 따라 정함으로써 옛날의 규례를 회복하도록 홍문관(弘文館)에 분부하라." 하였다. 이해 [[3월 16일]] 시호를 충정공(忠貞公)으로 추증하였다.
         *** 외손자 한응필(1832년 12월 14일 ~ 1883년 12월 1일)
  • 이갑성
         그의 [[본관]]은 [[경주 이씨|경주]]이고 [[대구광역시]] 출신이다. 아호는 연당(硏堂).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였으며, [[1931년]] [[신간회 사건]]으로 [[조선총독부]]의 탄압을 피해 [[상하이 시|상하이]]로 망명, 독립운동을 펼치다가 귀국하였다. [[1940년]] [[흥업구락부 사건]]으로 7개월간 복역하다가 [[윤치호]]의 신원보증으로 풀려났다. [[1945년]] 독립촉성국민회의 조직에 참여하여 회장이 되고 [[1947년]]에는 [[남조선 과도입법위원회]] 의원을 지냈으며 단정 수립론을 지지하였다. [[1950년]] [[제2대 민의원]] 의원에 당선되었다. 그뒤 [[1952년]] [[이승만]]의 친위조직이 된 [[대한인 국민회]] 회장을 지냈고, 그해 [[자유당 (대한민국)|자유당]]에 입당, [[1952년]] [[10월]] [[한국 전쟁]] 중 전시내각(戰時內閣)의 [[대한민국의 국무총리|임시 국무총리]](國務總理)를 역임했다. [[1953년]] 자유당의 최고위원, 정무부장을 역임하였다. 4.19 혁명 후 야인으로 생활하다 [[1963년]] [[2월]] [[민주공화당]] 창당 발기위원이 되었다. [[1965년]] [[광복회]] 회장을 지냈다.
         이후 독립운동을 실행함에 있어 학생들의 힘을 빌리는 것이 유리하다고 생각하여, [[경성부]]의 학생들이 시국관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음을 알고, 학교에서 영향력이 있던 학생들과 자주 만나 [[손병희]] 등 민족 지도자들이 독립운동을 주도한다며 독립운동 계획을 알려 동참을 호소하는 한편, 비밀리에 [[경성부]]내 각 고등학교, 전문학교 학생들의 동정을 주시하였다. 이에 [[고종 황제]]가 갑자기 죽자 그해 [[2월]]을 만세 거사 기일로 정하였다.
         [[3·1 운동]]이 일어날 때는 병원 제약부 담당으로 재직 중 [[민족대표 33인]]에 [[기독교]] 대표의 한 사람으로서 참가하여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원로격인 33인과 학생들과의 매개 역할을 맡아 학생 시위를 조직했다. [[1919년]] [[2월 20일]] 밤 [[서울]] [[남대문로]]5가의 함태영 집에서 [[함태영]], [[현순]](玄楯), [[안세환]], 오상근(吳尙根) 등과 만나, 3월 1일의 만세운동을 계획하였다. [[1919년]] [[2월 22일]] 학생들이 따로 독립선언서를 만들어 독립선언을 할 계획이 있다는 사실을 듣고는, 이를 중지하고 [[손병희]] 등이 주도하는 독립운동 계획에 참가할 것을 호소하여 성사시켰다. [[2월 27일]] [[박희도 (1889년)|박희도]], [[함태영]](咸臺永), [[김창준]](金昌俊), [[신석구]](申錫九), [[오화영]](吳華英), 이인한(李寅煥), 최성모(崔聖模), 이필주(李弼柱), 박동완(朴東完) 등과 함께 이필주의 집에 모여, [[함태영]]이 [[최남선]](崔南善)이 기초한 여러 가지 문서의 초안을 [[천도교]]계 인사 [[최린]](崔隣)으로부터 받아와, 그 취지에 찬성하여 [[기독교]]측의 민족대표의 한 사람으로서 서명 날인한다.
         [[2월 28일]]에는 목사 [[김창준 (1890년)|김창준]]에게 [[함태영]]이 인쇄한 독립선언서 900매 중 약 600매를 받은 뒤 이를 다시 인쇄하고, 그날 5매를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학생인 이용설(李容卨)에게 교부하여 인쇄하게 한 뒤 학생들에게 돌리게 하였다. [[3월 1일]] 아침 일찍 이갑성은 독립선언서를 수천 장 인쇄하여 400여매를 병원 사무실에서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학생인 [[이용상]](李容祥)에게 주어, 그중 200매는 대구의 목사 [[이만집]](李萬集)에게 보내고 나머지 200매를 [[마산]]의 독립운동 동조자 임학찬(任學瓚)에게 보내도록 한다. 또한 학생 [[김병수]](金屏沫)에게는 [[전라북도]] [[옥구군]]에 있는 [[박연세]](朴淵世) 등에게 보내기 위해 200매를 주었으며, [[충청남도]] [[천안]]에서 올라온 [[임영신]]에게도 일부 배포하고, [[경성부]] 강기덕(姜基德)에게 천500매를 주어 배포케 한다. [[2월 28일]] 밤 [[경성부]] 재동(齋洞)에 있는 손병희의 집에 모인 손병희 등의 민족대표들은, 당초에 독립선언 장소로 결정했던 [[파고다 공원]]에는 많은 학생들이 모이기 때문에 큰 혼란이 있을 것을 염려하여, 다시 그 장소를 [[인사동]](仁寺洞)의 [[태화관]](泰華館)으로 정하였다.
         석방 후 [[대한기독교청년회연맹]](YMCA)에 가입하여 회원으로 활동하였으며 [[1924년]]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의 재단 이사, 세브란스의약(醫藥) 지배인이 되었다. [[1925년]] [[2월]] 이창제(李昶齊), 현신덕(玄信德), 조철호(趙喆鎬), 배집(裵執), 변성옥(邊成玉) 외 5인과 함께 [[공산주의]] 계열의 [[반기독교 운동]]에 저항하기 위해 [[시사구락부]](時事俱樂部)를 조직하여 사회주의자들의 반기독교 주장에 저항하였다.<ref>김준엽, 김창순 공저, 《한국공산주의운동사 2》(고려대학교아세아문제연구소, 1969)</ref>
         이갑성은 광복 후에는 우익 정치인으로 활동했다. [[1945년]] [[10월]] 반탁운동을 위해 결성된 [[이승만]]의 [[대한독립촉성국민회]](獨立促成國民會)에 참여하고 [[독립촉성국민회]] 회장에 선출되었으며, [[1945년]] [[10월 5일]] 조선 각지에 파벌다툼이 심한 점을 지적, 이를 개탄하며 정당통일기성회를 결성하였다. [[12월 14일]] 김여식(金麗植), [[권동진]] 등과 함께 신한민족당(新韓民族黨)을 창당하고 [[권동진]]을 당수로 추대했다.
         당시 조선에는 여러 정당, 사회단체가 생겼다. 이갑성은 [[1971년]] [[12월 9일]] [[동아일보]]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해방이 되니까 왜 그리 많은 정당이 생기는지 한심한 상태였다. 그때가 언젠지 모르나하지 중장을 만나 등록된 정당이 몇개나 되느냐고 물었더니 74개라고 대답합디다"라는 것이다. [[한민당]]의 창립 발기인이었던 그는 [[동아일보]] 인터뷰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정부가 선후에라야 정당이 있는 법이지 독립도 정부도 아직 안섰는데 정당이 무슨 필요가 있느냐"는 생각이 들었다 한다. [[1945년]] [[10월]] 우후죽순 생겨난 정당, 단체들을 하나로 모을 목적으로 정당통일기성회를 조직했고, 수십개의 단체들 중 뜻이 맞거나 성격이 비슷한 단체들은 통합되었다.
         [[1947년]] [[10월]] [[미군정]]이 설치한 [[남조선과도입법의원]] 의원에 출마하여 당선, 그해 [[12월]]부터 [[남조선과도입법위원회]] 의원을 지냈다.
  • 이강우 (1938년)
         * [[1976년]] [[2월]] ~ [[1979년]] [[6월]] : 경제기획원 경제기획국 투자2과{{·}}투자3과 과장(서기관)
         * [[1983년]] [[4월]] ~ [[1986년]] [[12월]] : 주일본대사관 재무관(부이사관)
         * [[1988년]] [[1월]] ~ [[1990년]] [[12월]] : 경제기획원 조사통계국 국장(이사관)
         * [[1990년]] [[12월]] ~ [[1991년]] [[4월]] : 경제기획원 장관비서실장(이사관)
         * [[1994년]] [[2월]] ~ [[1994년]] [[8월]] : 공정거래위원회 부위원장 직대(1급 상당)
         * [[1999년]] [[12월]] : 국제로타리 3640지구 서울한가람로타리클럽 회장
         |임기 = [[1994년]] [[2월 4일]] ~ [[1994년]] [[9월 4일]]
  • 이경희 (1880년)
         '''이경희'''(李慶熙, [[1880년]] [[6월 11일]] ~ [[1949년]] [[12월 4일]])는 [[대한제국]]의 교육자이자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정치인으로, 구한 말 [[신민회]]의 회원이자, [[일제 강점기]] 당시 [[의열단]]과 [[신간회]]의 주요 멤버의 한 사람이다. 해방 후 초대 [[경상북도]] 부지사와 초대 [[대구광역시장|대구부윤]]을 역임했다.
         동시에 현지 교민들의 문맹률을 보고 [[중국]] [[심양]](瀋陽)에서 달신학교(達新學校)와 중국어 학교를 세워 학생, 청년들을 가르치고, [[야학]]을 개설하여 성인들을 가르쳤다. 이어 마련한 돈으로 [[만주]] [[무송현]]에 둔전을 마련하여 다시 군자금을 만들고, 청장년을 훈련시켰다. [[1918년]] [[12월]] [[파리강화회의]]로 파견되는 [[김규식]] 박사와 일행의 차비와 여비로 일부 자금을 [[상하이]]로 보냈다.
         [[1927년]] [[2월]] [[경성]]으로 상경하여 [[허헌]], [[조병옥]], [[김병로]], [[이인]], [[허정숙]] 등과 함께 [[신간회]] 발족에 참여하였고, [[신간회]] 경성중앙본부 총무간사를 맡았으며, 곧 [[신간회]] 경상북도지회가 결성되자 [[신간회]] 중앙본부 총무간사와 경상북도 지회장을 겸하였다. 그 뒤 [[신간회]] 경상북도 대구부지회가 결성되자 [[신간회]] 대구부 지회장을 겸임하시면서 한때 30여 세포와 만여 회원을 포섭, 가입시켜서 단체를 키웠다. 1927년 12월 [[신간회]] 대구지회장 직을 부회장 [[최윤동]]에게 넘겨주고 이후 평회원으로 활동했다. 이어 [[신간회]] [[밀양]]지회 조직을 지원하러 내려갔다가 불심검문을 받고 [[밀양]]에서 검속되었다. 그뒤 [[신간회]] 밀양지회 산하 조직인 [[밀양청년회]](密陽靑年會)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는데, 항상 [[밀양경찰서]]와 파견된 총독부 경찰의 요시찰인으로 감시를 받았다.
         그뒤 [[우익]]에 가담하여 [[1945년]] [[10월]] [[이승만]]의 [[독립촉성중앙회]] 회원으로 가입하고, [[독립촉성중앙회]] 회장 [[이승만]], 부회장 [[김구]]의 친필 임명장을 직접 전달받았다. [[1945년]] [[12월]] 독립촉성중앙회 경상북도지회와 독촉 대구부지부 결성에 참여하였다.
         [[1949년]] [[12월 4일]] [[대구]] 자택에서 사망하였다. 사망 당시 향년 69세였다.
         ** 동생 : [[이강희 (독립운동가)|이강희]](李康熙, [[1898년]] [[2월 17일]] - [[1940년]])
         * 사돈 : [[정운일]]([[1884년]] [[1월 16일]] - [[1956년]] [[2월 5일]])
  • 이성미 (희극인)
         '''이성미'''(李聖美, [[1959년]] [[12월 25일]] ~ )는 [[대한민국]]의 [[희극 배우]]이다.
         [[서울예술대학교]] 시절이던 [[1978년]]에 [[연극배우]]로 첫 데뷔하였고 이듬해 [[1979년]]에는 [[뮤지컬배우]]로 데뷔하였으며 1년 후 [[1980년]] 제2회 [[동양방송|TBC]] 개그콘테스트에서 [[김은우]]와 팀을 이뤄 대상을 수상한 후 연예계에 정식 데뷔했다.<ref>조선희.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3052400289107001&edtNo=5&printCount=1&publishDate=1993-05-24&officeId=00028&pageNo=7&printNo=1568&publishType=00010 달라진 여성 달라지는 사회(1)'잃어버린 이름'을 찾고싶다]. 한겨레. [[1993년]] [[5월 24일]].</ref><ref>조은별.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079&aid=0002103493 ‘황금어장’ 이성미 솔직고백 힘입어 시청률 1위]. 노컷뉴스. [[2009년]] [[10월 29일]].</ref> 1980년대엔 가수 김학래의 아이를 가졌으나 아버지의 결혼반대로 인해 헤어진 뒤 홀로 아들을 잃고 미혼모로 살았다. [[1992년]] 잡지사 기자 을 만나[[조대원]]게 되었고 [[조대원]]은 취재차 이성미를 만났으나 이를 계기로 이성미와 가까워졌다. 이들은 [[1993년]] 결혼을 하였고 이후 딸 0명을 낳았다.<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3050500209125004&edtNo=40&printCount=1&publishDate=1993-05-05&officeId=00020&pageNo=25&printNo=22162&publishType=00010 개그우먼李(이)성미결혼 내달 19일 상대는 조대원씨]. 동아일보. [[1993년]] [[5월 5일]].</ref><ref>이준환.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038&aid=0002304558 이성미, 남편과 4개월 만에 결혼 "확 당기니까, 끌려가더라"]. 한국일보. [[2012년]] [[9월 27일]].</ref> 조대원은 기자 생활을 그만둔 후에는 [[이매진아시아]] 대표이자 [[국제대학교 (경기)|국제대학교]] 방송학부 교수로 활동중이다. 연예계 데뷔 이후 왕성한 활동을 벌였고 [[1993년]] 희극 배우 [[박미선]]과 '쌍방울자매'를 결성하여 가수 활동을 하기도 했다. 세 자녀의 유학생활을 위해 [[2002년]] [[캐나다]]로 건너갔다가 아들만 캐나다에 남겨두고 딸 둘을 데리고 [[2009년]] [[대한민국]]으로 돌아와 연예계에 전격복귀했다.<ref>장은성. [http://navercast.naver.com/magazine_contents.nhn?rid=1089&contents_id=21667 이성미, 사춘기 아들과 화해하기까지 - 겪었던 갈등 고백]. 우먼센스. [[2013년]] [[2월]]호.</ref>
  • 이소연 (공학자)
         [[대한민국 과학기술부]]<small>(현 [[대한민국 미래창조과학부|미래창조과학부]])</small>가 [[2000년]] 12월 [[러시아]]와 공동으로 우주비행자 양성 계획을 수립하고, [[2006년]] 4월에 우주비행자 모집공고를 한 이래, 전체 지원자 3만 6206명 중 [[고산 (기업인)|고산]]과 함께 최종 후보 2인으로 선발되었다. 두 사람은 2007년 3월부터 [[모스크바]] 북동쪽 근교의 [[:en:Star City, Russia|스타 시티]]에 위치하는 [[유리 가가린 우주인 훈련센터]](GCTC)에서 우주적응과 우주과학 실험수행을 위한 기초 훈련을 받았다.
         [[2007년]] [[2월]] SBS 명예특파원을 맡기도 했고, [[2011년]] [[1월]]부터는 출신학교인 [[한국과학기술원]](KAIST)의 겸임교수를 맡았다.
         * 2007년 2월 SBS 명예특파원
  • 이시영 (1882년)
         [[백남채]] 외에도 [[김좌진]](金佐鎭), [[김동삼]](金東三) 등과도 많은 일을 했다. [[1918년]] 귀국했고 [[1919년]] [[2월]], [[지청천]](池靑天), [[한용운]](韓龍雲) 등과 함께 [[영남]][[유림]]대표 2백여 명을 [[경성부|경성]]으로 보냈다. 그때 유림측에서 그에게 민족대표로 서명해 달라고 하자 '내 목적은 오직 왜놈과 싸우는 것'이라며 과격한 활동 노선을 밝혔다. 그 후 임시정부에서 재무부장서리를 맡아 달라는 것도 거절하였다.<ref name=autogenerated1 />
  • 이재균 (1974년)
         *[[2002년]] [[2월]] 온게임넷 어워드 “최고의 감독상” 수상 이재균
         *[[2004년]] [[2월]] 네오위즈 피망컵 프로리그 3위
         *[[2005년]] [[2월]] SKY 프로리그 2004 그랜드파이널 Grand Final '''우승'''
         *[[2006년]] [[12월]] SKY 프로리그 2006 후기리그 4위
         *[[2014년]] [[2월]] 2013 대한민국 e-스포츠 대상 스타크래프트 Ⅱ 부문 최우수 프로게임단 (웅진 스타즈)
  • 이재호 (프로게이머)
         [[2005년]]부터 프로게이머 활동을 시작하였으며, [[2006년]]에 상반기 드래프트에서 POS(현 MBC게임 히어로)의 1차 지명으로 입단하여 프로리그와 개인리그에서 활약하였고 [[2011년]] [[2월 28일]]자로 웅진 스타즈로 소속팀을 옮겼다. 소속팀을 웅진으로 옮긴 이후 웅진의 주장 자리를 맡았다. 저그전은 매우 강했으나, 테란전과 프로토스전은 많이 약했다.
         * [[2008년]] [[2월]] 곰TV MSL 시즌4 8강
         * 2008년 [[2월]] 곰TV 스타 인비테이셔널 16강
         * 2010년 [[2월]] 대한항공 스타리그 2010 Season 1 36강
         * 2010년 [[12월]] 피디팝 MSL 2010 32강
         * [[2011년]] [[12월]] 2011 대한민국 e스포츠대상 우정상
  • 이진주 (1678년)
         유학(幼學)으로 [[1710년]](숙종 36년) 경인(庚寅) 증광사마시(增廣司馬試) [[진사]]에 3등(三等)으로 입격, 진사가 되고, [[성균관]]에 들어가 수학하였다. [[1714년]] [[성균관]]학유<ref>안명하, 松窩先生文集卷之九, 遠遊錄 西征記行</ref>, [[1719년]] [[1월 12일]] 전강에서 숙종이 친히 출제한 과제에 우승하여 직부전시의 명을 받았다. [[1721년]](경종 1년) [[과거 제도|식년 문과]](式年文科)에 을과(乙科) 4위로 급제하였다. 이후 [[병조]][[좌랑]](兵曹佐郞), 겸 [[춘추관][[기주관]], [[1723년]](경종 3) [[3월]] [[성균관]]학유, [[5월]] 학록, 8월 학정이 되고 [[1724년]](경종 4) [[2월]] 양현고직장(養賢庫直長)이 되었다. 그해 [[5월 17일]] 다시 학정, 이후 [[성균관]]사예(成均館司藝) 등을 지내다.
         [[1726년]](영조 2) [[12월 28일]] [[성균관]]박사, 1727년 3월 양현고직장, 8월 7일 전적,1728년(영조 4) [[2월 3일]] [[양현고]]주부, [[6월]] 직강, [[1729년]] [[11월 25일]] 병조좌랑이 되었으며 겸춘추(兼春秋)직을 겸하여 입직하였다. [[1730년]] [[2월 10일]] 성균관직강, 3월 25일 사예 등을 역임했다. [[1730년]] [[3월]] 진보현감(眞寶縣監)으로 부임하였다. 이후 [[조선 영조|영조]] 조정에서 입시한 신하가 아뢰기를, '이진주는 조용히 자신을 지켜 성균관에서 공부한 10여 년 동안 재신(宰臣)과 명사(名士)가 그의 얼굴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하니, 영조가 수령을 선발할 때는 마땅히 조용히 자신을 지키는 자를 취해야 한다 하고, 곧이어 다시 진보현감에 재임명되었으나 얼마 뒤에 사망하였다. 1737년
         [[순흥향교]] 활동으로는 1703년 8월 4일 [[순흥향교]] 서무찬인(西廡賛引), 봉작(奉爵), 1705년 2월 3일 봉작(奉爵), 제물유사(祭物有司), 1706년 2월 8일 서종사찬인(西從祀賛引), 8월 2일 봉로(奉爐), 1710년 8월 대축, 1711년 2월 서무헌관(西廡獻官), 8월 찬자(贊者), 1712년 2월 축(祝), 1716년 2월 6일 대축, 1717년 2월 2일 대축 등을 맡았다.<ref>執事案 地:癸未二月春享時, 丁酉八月告由時</ref>
         1718년 2월 8일 [[순흥향교]] 대축(大祝) 8월 1일 대축, 1719년 8월 7일 종헌관(終獻官), 1720년 2월 10일 대축, 1721년 8월 9일 아헌관(亞獻官), 1722년 2월 2일과 8월 4일 초헌관(初獻官) 등으로 활동했다.<ref>순흥향교 집사안:自丁酉八月 行祭時, 至甲辰八月 釋奠時</ref>
  • 이헌승
         * [[2000년]] [[8월]] ~ [[2003년]] [[2월]] : 숭실대학교 전임강사
         * [[2002년]] [[2월]] ~ [[2003년]] [[8월]] : 건국대학교 겸임교수
         * [[2003년]] [[6월]] ~ [[2003년]] [[12월]] : 한나라당 보좌관협의회 부회장
         * 2016년 7월 ~ 2017년 2월 : 새누리당 부산시당 위원장
         * 2016년 12월 : 새누리당 전략기획부총장
         * 2017년 2월 ~ 2018년 8월 : 자유한국당 부산시당 위원장
  • 이호성 (대한제국)
         [[1864년]](고종 1년) 증광과 진사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음서 제도|음서제]]로 관직에 올라 [[군수]]에 이르렀다. [[1872년]] [[12월]] [[동몽교관]], [[1873년]] [[8월]] 사용, [[1875년]] [[7월]] [[예빈시]]주부와 [[호조]][[좌랑]] 등을 역임했다. 그해 [[12월]] [[세자익위사]]사어, [[1878년]] [[6월]] [[의빈부]]도사 등을 역임하였다. [[1879년]] [[1월]] [[토산]][[군수]](兎山郡守)로 부임하였고, [[1880년]] [[8월]] [[양근]][[군수]](楊根郡守)로 발령되었다. 그해 [[8월]] 상을 당하여 사퇴한 뒤 3년후 다시 [[양근]][[군수]]로 복직되었다.
         [[군수]] 재직 중 1888년(고종 25년) [[과거 제도|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그 해의 관록(館錄)과 도당록(都堂錄)에 들었으며, [[1889년]]에는 직각권에 들고 시강원문학, 시강원 사서 등을 역임하였다. 1890년(고종 27년) [[1월 15일]] [[시강원]]사서에서 다시 시강원문학이 되었으며, 그해 시강원필선이 되었고, [[성균관]][[대사성]], 승정원승지(承政院承旨) 등을 역임하였다. [[1893년]] [[이조]][[참의]]를 지냈으며, [[1900년]](광무 3년)에는 [[가선대부]]로 [[봉상사]][[제조]](奉常司提調)를 거쳐 [[태자]][[시강원]]첨사(侍講院詹事), [[1901년]] [[2월]] 부첨사(副詹事), [[9월 21일]] [[궁내부]][[특진관]]을 역임하였다.
         * 사돈 : [[서재창]](徐載昌, [[1865년]] ~ [[1884년]] [[12월 13일]]) - 손녀사위 [[서태원]]의 종조부
  • 이황
          | 사망일 = [[1570년]] [[음력 12월 8일]]<br />양력 [[1571년]] [[1월 3일]] (70세)
         '''이황'''(李滉, [[1502년]] [[1월 3일]]([[1501년]] [[음력 11월 25일]]) ~ [[1571년]] [[1월 3일]]([[1570년]] [[음력 12월 8일]]))은 [[조선]] 중기의 문신, 학자이다. 본관은 [[진보 이씨|진보]](眞寶). 자는 경호(景浩), 호는 퇴계(退溪), 시호는 문순(文純)이다. [[이언적]], [[이이]], [[송시열]], [[박세채]], [[김집]]과 함께 [[문묘]] 종사와 [[종묘]] 배향을 동시에 이룬 6현 중 한 사람이다.
         [[1554년]](명조 9) [[5월]] [[형조]][[참의]]에 임명되어 상경하였고, [[6월]] [[병조]][[참의]]를 거쳐 그해 12월 첨지중추부사로 전임되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1555년]](명종 10) [[2월]] 다시에 임명되어 한성에 왔는데, 상경할 적에 가난하여 의복과 관대(冠帶)가 없으므로 판서 조사수(趙士秀)가 겉옷 1벌을 주었지만 사양하고 옷을 받지 않았다. [[5월]]에 사직하고 고향으로 내려가자 첨지중추부사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였다. [[12월]] 참찬관 박민헌이 말하기를 「경연관으로서 신 같은 무리는 「서경」에 나오는 글들을 잘 모르는 처지이니, 모름지기 유학자 이황과 [[김인후]]를 구하여 아침 저녁으로 더불어 강론한다면 도리를 알게 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1569년]](선조 2) [[이조]][[판서]]가 되어 상경하였으나 여러번 사직 상소를 올린 끝에, 사직소가 수리되어 다시 고향으로 되돌아왔다. 평생 겸손함을 강조하며 청렴하게 살았으며, 생각이나 헤아림을 멈춘 상태에서 마음을 고요하게 간직하는 사색과 '경'(敬)을 중시했다. 만년에 병을 핑계로 낙향, [[1570년]](선조 3) [[음력 12월 8일]] 고향인 안동 토계동에서 의관을 정제하고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그의 나이 향년 70세였다. 그가 죽자 선조는 3일간 정사를 파하고 조회를 하지 않았다.
         이황은 <전습록변>(傳習錄辨)에서 [[양명학]]을 '사문(斯文·주자학)의 화'라고 비판했다. 그가 [[양명학]]을 '사문의 화'라고 비판한 다음부터 금기시되기 시작했다.<ref name="samun1">[http://legacy.www.hani.co.kr/section-021147000/2006/12/021147000200612140639041.html 어느 양명학자의 커밍아웃] 한겨레 21 2006년12월14일 제639호</ref> 그러나 이황의 비판에는 양명학의 핵심인 '치양지설'(致良知說)에 관한 내용이 빠져 있으니 <전습록> 전체를 보지 못하고 비판한 셈이 된다.<ref name="samun1"/>
         [[1548년]](명종 3) [[2월]] 이황의 둘째 아들이 일찍 요절하였다. 그는 둘째 며느리가 정혼한지 1년도 안되어 남편이 죽고 청상과부가 되자, 며느리의 개가를 허용하고 남의 눈을 피해 친정으로 몰래 돌려보낸다. 그가 [[조선 선조|선조]] 즉위 초 [[한성부]]로 가던 길에 한 주막에 들렀을 때, 그의 입맛에 딱 맞는 음식을 해온 이가 있었는데 그때 그가 개가를 허용한 둘째 며느리였다 한다.
  • 이희범
         |임기 = [[2001년]] [[4월 2일]] ~ [[2002년]] [[2월 4일]]
         |임기 = [[2003년]] [[4월 21일]] ~ [[2003년]] [[12월 17일]]
         |임기 = [[2003년]] [[12월 17일]] ~ [[2006년]] [[2월 10일]]
         |임기 = [[2006년]] [[2월]] ~ [[2009년]] [[2월]]
         |임기 = [[2010년]] [[9월]] ~ [[2014년]] [[2월]]
  • 임창정
         * 2009년 :《[[빨래 (뮤지컬)|빨래]]》 - 솔롱고 역 / 대구 공연 대구 [[수성아트피아]] (2009년 12월 05일 ~ 12월 06일)
         * 2009년 :《[[빨래 (뮤지컬)|빨래]]》 - 솔롱고 역 / 대전 공연 [[CMB엑스포아트홀]] (2009년 12월 19일 ~ 12월 20일)
         * 2009년 :《[[빨래 (뮤지컬)|빨래]]》 - 솔롱고 역 / 군포 공연 군포시문화예술회관 수리홀(2009년 12월 25일 ~ 12월 26일)
         * 발매일: [[2000년]] [[2월 10일]]
         * 발매일: [[2010년]] [[2월 11일]]
         * [[1998년]] [[12월]] : 임창정,예민,이지의 겨울의 약속
         * [[2002년]] [[2월]] : 공명선거 캠페인 송 - 내가 선택한 세상<ref>{{뉴스 인용|제목=가수 임창정 등 공명선거 캠페인송 불러|url=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001&aid=0000161398}}</ref>
         * [[2012년]] [[2월]] : [[김진표 (가수)|김진표]] [JP6] - 돌아갈 수 있다면<ref>{{뉴스 인용|제목=김진표 정규 6집 발매, 화려한 피처링 군단 자랑|url=http://sports.khan.co.kr/news/sk_index.html?cat=view&art_id=201206290949473&sec_id=540301&pt=nv}}</ref>
         * [[2013년]] [[12월]] : [[용감한형제]] 데뷔10주년 앨범 - 그렇게 당해놓고(Feat. Maboos)<ref>{{뉴스 인용|제목=임창정 ‘그렇게 당해놓고’, 용감한형제 데뷔 10주년 콜라보…차트 올킬|url=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3/12/31/2013123102166.html}}</ref>
         * [[2014년]] [[2월]] : 드라마 <[[쓰리 데이즈 (드라마)|쓰리데이즈]]> OST - Goodbye<ref>{{뉴스 인용|제목=정은지-거미-신용재-임창정, SBS ‘쓰리데이즈’ OST 참여|url=http://sports.khan.co.kr/news/sk_index.html?cat=view&art_id=201403101857173&sec_id=540201&pt=nv}}</ref>
         * [[2015년]] [[12월]] : 드라마 <[[달콤살벌 패밀리]]> OST - 괜찮아질텐데
         * [[2013년]] [[2월]] : 혼성그룹 WE <Party><ref>{{뉴스 인용|제목=‘김창렬 그룹’ WE, 음원공개…임창정 등 ★ 뮤비 지원|url=http://www.segye.com/Articles/SPN/ENTERTAINMENTS/Article.asp?aid=20120221002462&subctg1=&subctg2=}}</ref> <small>[https://www.youtube.com/watch?v=p52uXgPiLmoA MV]</small>
  • 장발 (화가)
         * 어머니 : 황루시아 ([[1878년]] [[11월]] ~ [[1954년]] [[2월]])
         ** 조카 : [[장진]](張震, [[1927년]] [[2월 10일]] ~ [[2011년]] [[9월 30일]], [[서강대학교]] 부총장 역임)
  • 장성수 (금융인)
         * [[1980년]] [[3월]] ~ [[1981년]] [[2월]] : [[중앙대학교]] 총학생회 회장
         * [[2008년 12월]] ~ [[2009년 11월]] : 한나라당 서울특별시당 홍보위원회 부위원장
         * [[2009년 2월]] ~ [[2010년 3월]] : [[신한은행|신한은행]] 영업추진본부 본부장
         * [[2010년 7월]] ~ [[2012년 2월]] : 한나라당 중앙위원회 재정금융분과위원회 부위원장
         * [[2011년 2월]] ~ [[2014년 1월]] : [[주식회사|(주)용창]] 대표이사 회장
         * [[2012년 2월]] ~ [[2012년 12월]] : 새누리당 중앙위원회 재정금융분과위원회 부위원장
         * [[2012년 3월]] ~ [[2014년 2월]] : [[한국자유총연맹]] 동작구지회 회장
         * [[2013년 3월]] ~ [[2015년 2월]] : 새누리당 중앙위원회 지도위원
  • 장세주 (기업인)
         |기타 이력 = [[동국제강]] [[회장]] <br/> [[1978년]] [[7월]] [[동국제강]] [[입사]]<br />[[1980년]] [[8월]] [[동국제강|동국제강 인천공장]] 제강과 [[대리]]<br />[[1981년]] [[7월]] [[동국제강|동국제강 본사]] 회계과 과장<br />[[1983년]] [[3월]] [[동국제강|동국제강 일본지사]] 차장<br />[[1986년]] [[9월]] [[한국철강|한국철강(주)]] [[상무]]<br />[[1988년]] [[4월]] 천양항운(주) [[사장]]<br />[[1991년]] [[6월]] [[동국제강]] [[상무]](인천제강소장)<br />[[1993년]] [[1월]] [[동국제강]] 전무(기획조정실장)<br />[[1998년]] [[1월]] [[동국제강]] [[대표이사]] 전무(경영기획실장)<br />[[1998년]] [[3월]] [[동국제강]] [[대표이사]] [[사장|부사장]]([[본부장|영업본부장]])<br />[[1999년]] [[12월]] [[동국제강]] [[대표이사]] [[사장]]<br />[[2001년]] [[동국제강|동국제강그룹]] [[대표이사]] [[회장]]([[현재]])<br />[[2004년]]~[[2011년]] 유니온스틸(주) [[대표이사]] [[회장]]<br />[[2012년]] 한국철강협회 [[회장|부회장]]([[현재]])<br />[[2013년]]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부회장]]([[현재]])<br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부회장]] <br/>금탑산업훈장, 제12회 상공대상(노사협조 부문) 등을 수상 <br /> 보통적 봉급은 급여 1,236,000,000원을 비롯하여 기타근로소득 331,000,000원과 퇴직소득 2,510,000,000원과 월 급여액 87,000,000원과 이사퇴직금지급규정상 산출 퇴직소득 2,840,000,000원([[동국제강]] [[2015년 6월]] 반기보고서 기준) <br /> 보통적 순자산은 1,990,000,000원([[2013년]] [[주택]] [[재산]] 기준)<ref>[http://www.inews24.com/php/news_view.php?g_serial=720457&g_menu=022100&rrf=nv 회장님 집은 얼마짜리? - 아이뉴스24 박영례 기자 2013-01-28]</ref>
         |복무 기간 = [[1976년]] [[2월]] ~ [[1978년]] [[6월]]
         *[[1972년]] [[2월]] [[서울중앙고등학교]] [[졸업]]
         *[[1976년]] [[2월]] [[연세대학교]] 이공대학(현 이과대학, 공과대학) [[학사]]
         *[[1999년]] [[12월]] [[동국제강]] [[대표이사]] [[사장]]
  • 장익 (1933년)
         | 주교서품 = [[1994년]] [[12월 14일]]
         [[1993년]] 춘천교구 Thomas Stewart(박 토마스)주교가 건강상의 이유로 교구장 직에서 사임하자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장익 신부를 제 6대 천주교 춘천교구장으로 임명하면서 [[주교]]로 서품하였다. [[12월 29일]] 주교로 서품받았다.
         [[1995년]] 한국천주교주교회의 문화위원회 위원장을 맡게 되었고, [[1995년]] [[12월]]부터 [[2000년]]까지 [[교황청]] 종교간대화평의회 위원으로 활동하였다.
         * 할머니 : 황 루시아 (루시아, [[1878년]] [[11월]] ∼ [[1954년]] [[2월]])
         ** 숙부 : [[장극]] (張剋, [[1913년]] [[4월 8일]] ~ [[2008년]] [[2월 29일]], 교수)
         ** 형 : [[장진 (1927년)|장진]] (張震, 요셉, [[1927년]] [[2월 10일]] ~ [[2011년]] [[9월 30일]], [[서강대학교]] 생물학과 명예교수)
         ** 형 : 장건 (張建, [[1932년]] [[2월 26일]] ~ , 미국 거주)
         ** 누나 : 장의숙 (張義淑, 베네딕타, [[1930년]] [[2월 21일]] ~ 로마 가톨릭 수녀, [[미국]] 거주)
  • 장하진
         |임기 = [[2005년]] [[1월 5일]] ~ [[2008년]] [[2월 29일]]
         '''장하진'''(張夏眞, [[1951년]] [[12월 20일]] ~ , [[광주광역시]])은 [[광주대학교]] 교수를 지낸 [[대한민국]]의 사회학자이며, [[노무현 정부]]의 [[대한민국의 여성가족부 장관|여성가족부 장관]]을 역임하였다.<ref>{{뉴스 인용 |제목=<프로필> 장하진 한국여성개발원장 |url=https://entertain.naver.com/read?oid=001&aid=0000063007 |날짜=2001-03-29 |뉴스=연합뉴스}}</ref>
         [[노무현 정부]] 시절 [[2005년]] [[1월]]부터 [[2008년]] [[2월]]까지 제3대 여성부 장관, 초대 여성가족부 장관을 역임하며 참여정부 최장수 장관을 지냈다.
         2009년 6월부터 2010년 12월까지 참여정부의 국정철학과 비전을 연구·발전시키는 싱크탱크 한국미래발전연구원 원장을 역임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32&aid=0002016055 이재정 이사장·장하진 원장 한국미래발전연구원 선출 (경향신문, 2009.06.19)]</ref>
         |임기 = [[2005년]] [[6월 23일]] ~ [[2008년]] [[2월 29일]]
  • 장헌식
         1896년 7월 25일 게이오의숙 보통과를 졸업하고, [[게이오 의숙]] 고등과에 들어갔다. 당시 게이오의숙은 조선인 유학생이 급증함에 따라 조선인 특별 고등과를 설치하였다. 1897년 4월 25일 게이오의숙 고등과를 졸업하였다. [[1897년]] [[5월]]부터 [[12월]]까지 그는 [[일본 사법성]] 행정사무급재판소 병설 검사국 견습사무원이 되었다. 그는 [[게의오의숙]]을 졸업하고 사법 부문의 근대 문물을 배우기 위해 일본 사법성의 재판소 검사부에서 견습 사무원으로 일했고, [[1898년]] [[1월]]부터 [[10월]]까지는 일본 [[교토부]] [[가나가와현]] 요코하마항 지방재판소(神奈川縣 橫濱港地方裁判所) 검사국의 견습사무원으로 재직했다.
         [[1905년]]에는 [[관립한성외국어학교]]의 교장, [[1905년]] [[10월 18일]] 귀국과 동시에 6품으로 승륙하고, [[12월 20일]] 학부참서관 주임관 4등 7급(學部參書官敍奏任官四等七級)에 임명되고, [[12월 27일]]부터는관립외국어학교장(外國語學校長)을 겸직하였다. [[1906년]] [[10월 24일]] [[학부]] 편집국 사무임시대변(學部編輯局長事務臨時代辦), [[1907년]] [[3월]] 학부 편집국장(編輯局長)을 거쳐 [[1907년]] [[5월]]부터는 관립 [[한성사범학교]](漢城師範學校) 교장을 겸임하였다.
         [[1910년]] [[10월 2일]] 한일 병합 조약 체결 후에는 [[조선총독부]]에서 그를 [[평안남도]] 초대 참여관 고등관 3등(平安南道 參與官 高等官三等)에 임명하였고, 1910년 12월 27일 종5위(從五位)로 승급한 뒤 1912년 8월 1일 일한병합기념장, 1915년 11월 10일 대례기념장(大禮記念章)을 수여받았다. 1916년 3월 31일 정5위(正五位)로 승급하였다. 이후 훈3등(勳三等), [[1917년]] [[6월 12일]]에 [[충청북도]] 장관(도지사) 고등관 2등(忠淸北道 長官 高等官二等)으로 승진한 뒤 도장관이 도지사로 관직 명칭이 바뀌자 그대로 [[충청북도지사]]로 유임되었다. [[1920년]] [[7월 31일]] 훈2등(勳二等)에 올라 서보장(瑞寳章)을 하사받고 [[1920년]] [[9월 27일]] 고등관 1등(高等官一等)에 올랐다. [[1920년]] [[6월 24일]] 청주청년회 발족에 참여하였다.
         [[1921년]] [[2월 12일]] [[조선총독부]] 사무관(朝鮮總督府 事務官)이 되고, 3월 10일 종4위(從四位)로 승급하였다. [[1921년]] [[3월 18일]] 조선총독부 총독관방실(總督官房室) 행정관이 되었다. 1921년 3월 20일 칙임사무관(勅任事務官) 민정시찰관에 임명되어 4월 7일부터 6월 19일 [[평안남도]], [[평안북도]] 일대를 민정시찰하였고, [[10월 16일]]부터 [[12월 27일]]까지는 민정시찰관으로 [[함경남도]]와 [[함경북도]]를 민정시찰을 다녀왔다. 이때 그는 관용 차량이 주어졌지만 거부하고 열차와 대중교통으로 시찰을 다녔다. [[1922년]] [[2월 15일]]에는 [[전라남도]]를 [[3월 5일]]부터는 [[전라북도]]를, [[7월]]에는 [[강원도]]를 시찰다닌 뒤 [[7월 22일]] 귀환하였다. [[9월 4일]]에는 [[황해도]] 수해현장을 시찰하고 돌아왔다.
         [[1923년]] [[11월 25일]]에는 [[대성중학교]]에 장학금으로 써 달라고 금 40원을 기탁하였다. [[12월 27일]]에는 [[경성도서관]]에 도서구입비 1백 원을 기부하였다.
         [[1924년]] [[12월 1일]]에는 [[전라남도]] 지사로 부임하였다. 그는 퇴근 후에는 보통의 농군들과 같이 식수(植樹)와 분재 가꾸기 자신의 토지에서 논농사와 밭농사를 하였다.
         }}</ref> [[1921년]] [[2월]] [[조선총독부]] [[사무관]](朝鮮總督府 事務官)으로 전임되고, [[고등관]] 1등(高等官一等)에 서임었다. [[1921년]] [[3월 18일]] 총독부 총독 관방실에 발령되었다.
         [[1923년]] [[간토 대지진]] 이후 [[사회주의]] 사상이 널리 퍼지고 노동 운동이 활발해지자 이를 탄압하기 위해 설립된 친일 자본가 단체인 [[동민회]]에 가담했으며, 일제 말기 총독부 학무국과 밀착하여 또다른 친일 단체 [[대화동맹]] 결성을 조종했다는 증언이 있다.<ref>일제 말기 총독부 학무국과 밀착하여~ : 반민특위 조병상 공판조서 (제1회) 중 조병상의 수기 (1949).</ref> [[1924년]] [[12월 1일]] [[전라남도지사]]로 부임하였다. 전남 지사직에서 물러난 1926년부터 1945년까지 중추원 칙임참의를 7회에 걸쳐 중임하였다.<ref name="실록친일파" />
         1927년부터 여성의 취직과 직업훈련을 목적으로 조선여자직업사(朝鮮女子職業社) 설립이 추진되자 창립준비위원으로 참여하고, [[1928년]] [[1월 15일]] 조선여자직업사가 출범하자 창립발기인으로 참여하고, 조선여자직업사 고문에 위촉되었다. 1928년 조선수산회(朝鮮水產會) 평의원에 선출되었다. [[1928년]] [[6월 16일]] 조선임시교육심의위원회 창립에 참여하고 임시교육심의위원회 위원에 위촉되었다. [[1931년]] [[2월 14일]] [[경성부]]의 도시개발계획 자문위원회인 경성도시계획연구회 위원이 되고, 곧 도시계획연구회 간사에 피선되었다. [[1933년]] [[8월 14일]] 중추원 참의 임기만료가 되자 [[8월 15일]] [[칙임관]]대우인 중추원 칙임참의에 선임되었다.
         [[1930년]]대 [[청주]]에 개교 예정인 청주상업고등학교(淸州商業高等學校)의 건립과 개교에 관련하여 건립, 시설비용이 부족하여 개교가 지연되었다. 그는 학교 개교비용을 부담하고 자신의 토지를 기증하였다. 1935년 청주상고는 사립 학교로 개교가 확정되고, [[청주]]시민 대표 방인혁(龎寅赫), 민영은(閔泳殷) 등은 2월 20일 그를 찾아가 교장에 취임해줄 것을 부탁하여 승낙했다. [[1935년]] [[3월 1일]] 청주상업고등학교(淸州商業高等學校) 교장에 취임하고 그해 [[5월 7일]] 개교식과 입학식을 거행하였다. 1935년 9월 27일 경성도시계획연구회 총회에서 집행위원으로 피선되었다.
         [[1949년]] [[1월]]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체포령이 떨어지자 자수하였으며, [[반민특위]] 조사관들이 오자 담담하게 대가를 치르는 것이라며, 손자며느리에게 뒷일을 부탁한다 하고 출두하였다. 이후 조사에 순순히 응하여 구속 수사를 받았으며 [[치질]](痔疾)로 고생하였으나 병보석은 거절하였다. 이후 그는 별다른 처벌을 받지 않고 [[1949년]] [[2월 22일]] [[치질]]로 인해 석방된 뒤 불구속 문초를 받아 반민특위에 다녀가며 방문조사를 받았다. [[3월 9일]] 반민특위로부터 보석이 가능하다는 통지를 받았지만 보석을 거절했다. 같은 날 반민특위로부터 불구속 기소 처분을 받았다.
         |임기 = 1924년 12월 1일 ~ 1926년 8월 14일
  • 전상욱 (프로게이머)
         | 출생 = [[1987년]] [[2월 21일]] ({{만나이|1987|2|21}}세)
         '''전상욱''' (全相昱, [[1987년]] [[2월 21일]]~ )은 [[대한민국]]의 전직 [[스타크래프트]] [[프로게이머]]이다. '''midas[gm]'''이라는 아이디를 사용하며, 종족은 [[테란]]이다.
         [[2003년]] 중반부터 [[2004년]] [[2월]]까지 열린 [[스타크래프트 프로리그#2003 네오위즈 피망|온게임넷 네오위즈 피망 프로리그]]에서는, "어나더데이"라는 맵의 전담으로 나서 8승 무패를 거두며 소속팀(당시 [[슈마GO]])의 우승을 이끌었다.
         2010 MSL 서바이버 토너먼트 시즌1에서 [[조일장]], [[신상문]]을 꺾고 8시즌 만에 MSL에 복귀하였고, 2010년 2월 21일 한상봉과 김명운을 선봉으로 나서서 2킬을 하는 등 서서히 전성기시절의 탄탄한 운영능력을 되찾아가고 있다.
         군제대후 2013년 12월 부터 아프리카 방송을 시작하였다. 9차 소닉스타리그에 참여하였으나 32강에서 임진묵 선수에게 1승 2패하고 하늘선수에게 안타깝게 패해 16강 진출은 좌절되었다. 하지만 경기내용으로 봤을 때 결코 꿀리는 모습을 보이지 않아 비록 화려한 복귀에는 실패하였지만 예전 기량을 어느정도 회복한 모습을 보였다.
         * [[2005년 2월]] IOPS 스타리그 8강
         * [[2008년 12월]] BATOO 스타리그 08~09 36강
         * [[2010년 12월]] 피디팝 MSL 2010 16강
  • 전초아
         *[[2005년]] [[12월]] '란 - 널 사랑해' (Remade 0506 (Remake Compilation Album #2005-2006 앨범 참여)
         * [[2006년]] [[2월]] '후 - I Need' 피쳐링 참여
         * [[2006년]] [[2월]] '노블레스 - 음악이 싫어졌어' 피쳐링 참여
         * [[2008년]] [[2월]] 저 달이 지기 전에(Single)
         * [[2009년]] [[12월]] 사랑하면 안돼요(Single)
         * [[2010년]] [[12월]] 나의 이름 조차 (Single)
         * [[2011년]] [[2월]] 좀 더 잘해볼 것을 하죠(single)
         * [[2017년]] [[12월]] 너와 함께 걸을래(single)
         * [[2017년]] [[12월]] Everyday Christmas(single)
         * [[2018년]] [[12월]] 약속(single)
         * [[2018년]] [[12월]] You Are Home(single)
         * [[2011년]] [[2월]] 'PD블루 - 안되겠니 (내가 참 밉다)' 피쳐링 참여
         * [[2011년]] [[2월]] 'PD블루 - 잔소리 (New Ver.)' 피쳐링 참여
  • 전태일
         [[1963년]] [[3월]] 대구 청옥 고등공민학교에 입학했지만<ref>1971년 문교부 시책으로 중학교, 고등학교가 분리되기 전까지 한국의 학교들은 중고등학교가 함께 운영되었다.</ref>, 가정 사정으로 1학년 재학 중 그해 [[12월]] 자퇴하였다. 1963년 겨울 그의 아버지 전상수는 아들에게 자퇴를 강요하였다. 아버지는 학교를 그만두고 집에서 전적으로 [[재봉]]일만 돌보라고 강요했다. 학교를 다닐 수 없게 된 것에 좌절하여 한때 가출, 집을 뛰쳐나갔다가 3일만에 귀가했지만 그의 아버지는 돈을 벌어야 공부도 할 수 있는 것이라며 그를 발길질로 차고 구타하여 강제로 학교를 그만두게 했다.
         [[1966년]] [[8월 17일]] 평화시장 2층 244호에 있는 점퍼, 의류 공장인 [[한미사]] 재단보조로 취직하였다가, 그해 말 [[한미사]]의 재단사가 사장과의 갈등으로 해고당한 뒤 새로 재단사 자리에 올랐다. [[1967년]] [[2월]] 초 무렵 하숙하고 있던 집의 딸과 연애하였으나, 돈 문제 등으로 어머니에게 죄책감을 느낀 그는 연애를 포기하게 되었다.
         그는 공장 노동자 생활 중에도 고등학교 복학을 꿈꿨고, [[1967년]] [[2월 20일]] 자신의 바지와 하숙방에 있던 곤로를 팔아 연합중고등 통신강의록 <중학 1>권을 1백50원에 산다. 수중에 남은 15원으로 10원짜리 노트를 산 뒤 전화비 5원을 주머니에 남겨두고 3일간 금식하였다. 당시 한 쪽지에 그는 "내일부터 23일까지 금식이다. 설마 3일 금식에야 죽지 않겠지. 정신수양의 금식이야. 먹을 게 없어서가 아니다. 그런데 왜 콧잔등이 시큰해오고 눈물이 나는지 모르겠구나." 그리고 "내년 3월에는 꼭 대학입시를 보자. 앞으로 3백76일 남았구나. 하루에 2시간씩 공부하면 내년에는 대학입시를 볼 수 있겠지."라는 내용을 적어두었다.
         그의 어머니 이소선(李少線) 등 민주화운동 관련자 유가족 8명이 [[12월 31일]]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에 보상금 지급을 현실화해 줄 것을 요구하며 재심을 청구했다.<ref name="hjaeshims">[http://www4.hankooki.com//nation/200212/h2002123116132714510.htm "민주화운동 보상금 현실화" 전태일씨 유족등 재심청구] 한국일보 2002/12/31</ref> 어머니 이소선은 "태일이가 보상금으로 930만원으로 받는데 비해 [[1991년]] 분신 자살한 [[윤용하]]씨는 2억 3천만원을 받는다"며 "이는 태일이의 보상금을 물가상승률을 고려하지 않고 당시 임금만을 단순 반영한 [[호프만식 계산법]]으로 산정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ref name="hjaeshims"/> 재심청구를 주선한 전국민주민족유가족협의회(유가협)도 보상금심의위원회가 당시 전문 기술자였던 전씨를 [[단순일용직 근로자]]로 분류해 [[보상금]]을 지급한 것은 부당하다고 주장했다.<ref name="hjaeshims"/>
         * 어머니 [[이소선]](李小仙, [[1929년]] [[12월 30일]] ~ [[2011년]] [[9월 3일]])
  • 정승화(육군)
         5.16 쿠데타 이후 군사정권, 3공화국, 4공화국을 거치면서 계속 승승장구했다. [[제7보병사단]][[사단장|장]], [[대한민국 국방부|국방부]] 인사국장, [[제3군단]][[군단장|장]], 육군사관학교 [[교장]], [[제1야전군사령관]]을 역임한 이후에 [[1979년]] [[2월]] [[육군참모총장]]으로 영전했다. 여담으로 당시 정승화는 [[김대중]]에게 부정적이라 그가 당선되어도 용인하지 않겠다는 편파적 발언을 하기도 했으나 여하간 직접적으로 정치에 개입하는 시도는 없었다.
         1995년에는 [[대한민국 전직 대통령 구속 사건]]이 87년에 제정된 헌법이후 최초로 발생하자 증인으로 채택되어 증언하였다. 그의 기대대로 [[전두환]]은 [[대법원]]에서 [[사형]] 선고를 받아 평생의 한을 푸는 듯 했으나, 1997년 12월 22일 [[김영삼]] 대통령과 [[김대중]] 차기 대통령의 합의(?)에 따라 전두환, 노태우가 [[특별사면]] 혜택을 받아 풀려나자 "반성도 하지 않는 사람들을 그래도 풀어준다니 이 나라가 진정으로 법치주의 국가입니까?" 라며 강한 분노를 표시했다.
  • 정용화
         * [[2010년]] [[1월 14일]] 락밴드 씨엔블루(CNBLUE)의 리더로 팀 안에서 보컬과 기타와 랩을 맡아, [[bluetory]]<ref name="album1">[http://starin.edaily.co.kr/news/NewsRead.edySCD=EA31&newsid=01315286592871176&DCD=A10102 씨엔블루, '씨엔블루토리'서 1집 전곡 첫 라이브 연주]{{깨진 링크|url=http://starin.edaily.co.kr/news/NewsRead.edySCD%3DEA31%26newsid%3D01315286592871176%26DCD%3DA10102 }}《이데일리스타in》, 2010년 2월 16일 작성.</ref> 음반 발매와 함께 가수 활동을 시작하였다. 수건남 효과에 힘입어 첫 방송후 각종 차트를 올킬하였으며,<ref name="all">[http://news.jkn.co.kr/article/news/20100117/6857237.htm “블루돌풍” CNBLUE, 첫 방송후 각종 차트 ‘올킬’]《재경일보》2010.01.17 작성.</ref> 한국 가요계에서 신인이 데뷔 후 14일만에 1위를 하는 기록을 세웠다.<ref name="chleks">[http://news.jkn.co.kr/article/news/20100129/7708991.htm 씨엔블루, 최단기간 1위 기록 세우며 정상 등극! ]《재경일보》2010.01.29 작성.</ref> 이는 지상파 데뷔 최단 기간 1위 기록이었지만 위너 이후에 기록이 깨졌다.* [[2010년]] [[5월 19일]], 씨엔블루는 두 번째 미니 앨범 《[[Bluelove]]》를 발매하였다.<ref>{{뉴스 인용
         * [[2009년]] [[12월 6일]]부터 [[2010년]] [[3월]]까지 [[문화방송|MBC]] 《[[우리들의 일밤|일요일 일요일 밤에]] - [[헌터스]] : [[헌터스|에코하우스]]》를 시작으로 예능활동을 시작하였다. [[2010년]] [[2월]]부터 [[2011년]] [[4월]]까지 [[문화방송|MBC]] 《[[우리 결혼했어요]] 시즌 2》에 고정출연하였고, [[2010년]] [[7월]]부터 [[2011년]] [[3월]]까지는 [[SBS]] 《[[인기가요]]》 [[사회자|MC]]를 맡았다.<ref name="ingi">[http://seoulntn.com/cindex.php?c=news&m=view&idx=41989 정용화-조권, '인기가요' 새 MC 발탁..'관심집중'], 《서울신문NTN》, 2010년 7월 18일 작성.</ref> 또한, [[2009년]], [[2010년]] 2년 연속 《[[SBS 가요대전]]》 MC로 활동하였다.<ref name="gayo1" /><ref name="gayo2" /> 이러한 고정 출연 외에도 [[황금어장]], [[런닝맨]] -게스트로 최다출연기록을 세웠다, [[강심장]], [[명받았습니다]], [[승승장구]], [[놀러와]], [[해피투게더 (텔레비전 프로그램)|해피투게더]], [[청춘불패]], [[대국민 토크쇼 안녕하세요]] 등 여러 예능 프로그램에 게스트로 출연하였다.
         * [[2011년]] [[12월 4일]]을 시작으로 일본에서 겨울투어를 실시하여, [[12월 4일]] 센다이, [[12월 6일]] 나고야, [[12월 14일]] 오사카, 그리고 [[12월 16일]] 도쿄에서 일본 전국 투어를 실시하였다.<ref>{{뉴스 인용|제목= 씨엔블루, 日 전국투어 마지막 공연 13000명 동원 ‘1분 만에 티켓 매진'|url=http://wstarnews.hankyung.com/apps/news?popup=0&nid=01&c1=01&c2=01&c3=00&nkey=201112191637321&mode=sub_view|출판사 = 한국경제연예|날짜 = [[2011년]] [[12월 19일]]}}</ref>
         * [[2011년]][[12월 28일]]에 일본에서 매년 연말 개최되는 Music Festival 'COUNTDOWN JAPAN'에 외국인 최초로 출연하였다.<ref>{{뉴스 인용 |제목= 씨엔블루(CNBLUE), 일본 락 페스티벌 'COUNTDOWN JAPAN' 외국인 최초 출연 |url= http://www.topstarnews.net/n_news/news/view.html?no=4208 |출판사= TOP스타 뉴스 |날짜= [[2011년]] [[11월 18일]] |확인날짜= 2012년 8월 19일 |보존url= https://web.archive.org/web/20130120220609/http://topstarnews.net/n_news/news/view.html?no=4208 |보존날짜= 2013년 1월 20일 |깨진링크= 예 }}</ref><ref>{{뉴스 인용|제목= 씨엔블루, 日 연말 최대 록축제 외국인 최초 출연|url=http://sports.hankooki.com/lpage/music/201111/sp2011111809264695510.htm|출판사 = 스포츠한국|날짜 = [[2011년]] [[11월 18일]]}}</ref>
         * [[2012년]] [[1월 31일]] 일본 MTV '언플러그드' 출연하였다. 이 프로그램은 어쿠스틱한 연주와 청중과의 가까운 거리를 유지한 무대 등 라이브를 진행하는 것으로 유명하다.<ref>{{뉴스 인용|제목= 씨엔블루, 韓 가수 최초로 日 MTV '언플러그드' 출연|url=http://joynews.inews24.com/php/news_view.php?g_menu=700300&g_serial=634129&rrf=nv|출판사 = 조이뉴스24|날짜 = [[2012년]] [[2월 1일]]}}</ref> 또한, 수용인원 150명에 응모인원만 1만 5천여명이 응모하여 100배의 응모 수를 기록했다.<ref>{{뉴스 인용|제목= 씨엔블루, 日MTV ‘언플러그드’ 출연…티켓 응모 ‘정원의 100배’ 기염|url= http://www.eto.co.kr/news/outview.asp?Code=20120201170502960&ts=95729|출판사= 경제투데이|날짜= [[2012년]] [[2월 1일]]|확인날짜= 2012년 8월 19일|보존url= https://web.archive.org/web/20160304124520/http://www.eto.co.kr/news/outview.asp?Code=20120201170502960&ts=95729|보존날짜= 2016년 3월 4일|깨진링크= 예}}</ref>
         * [[2012년]] [[2월 1일]]에 일본에서 두 번째 싱글앨범인 ''[[Where you are]]''를 발매하였고 타이틀인 "Where you are"를 작사 및 작곡하고 "feeling" 작사 및 작곡, "Where you are(Inst.)" 작곡하였다. 이 앨범은 하루에 3만 2천여장이 나갔고 ''[[Where you are]]''는 오리콘 싱글 데일리 차트 1위에 올랐다.<ref>{{뉴스 인용|제목= 씨엔블루, 정용화 자작곡 日오리콘 차트 1위|url=http://star.mt.co.kr/view/stview.php?no=2012020208385422373&type=1&outlink=1|출판사 = 스타뉴스|날짜 = [[2012년]] [[2월 2일]]}}</ref><ref>{{뉴스 인용|제목= 아시아 대세 씨엔블루, 두 번째 싱글 ‘웨어 유 아’로 오리콘 차트 1위|url=http://sports.khan.co.kr/news/sk_index.html?cat=view&art_id=201202020838404&sec_id=540101&pt=nv|출판사 = 스포츠경향|날짜 = [[2012년]] [[2월 2일]]}}</ref><ref>{{뉴스 인용|제목= 씨엔블루 '록 한류' 통했다..인디서 日오리콘까지 |url=http://star.mt.co.kr/view/stview.php?no=2012020715142874966&type=1&outlink=1|출판사 = 스타뉴스|날짜 = [[2012년]] [[2월 7일]]}}</ref>
         * [[2012년]] [[2월 4일]] 일본 간사이, [[2월 5일]] 도쿄돔 씨티홀에서 두 번째 메이저 음반 발매 기념으로 한 이벤트에 1만2000여명이 참가했다.<ref>{{뉴스 인용|제목= 씨엔블루, 日 앨범 발매 라이브 이벤트서 현지 팬 12,000명 동원 |url=http://wstarnews.hankyung.com/apps/news?popup=0&nid=01&c1=01&c2=01&c3=00&nkey=201202072211591&mode=sub_view|출판사 = 더블유스타뉴스|날짜 = [[2012년]] [[2월 7일]]}}</ref>
         * [[2012년]] [[2월 13일]] 일본 전국투어를 시작했다. 오사카를 시작으로 나고야, 도쿄, 요코하마 등지에서 이뤄진 이번 투어는 두 번째 메이저 음반 발매 기념으로 팬클럽 회원 한정의 전국 투어 콘서트를 개최하게 되었는데, 지난 2009년부터 일본에서 인디밴드로 활동할 당시 공연했던 클럽에서 이루어졌으며, 인디즈 활동 당시 공연했던 장소에서 다시 공연하는 것을 테마로 이뤄진 이번 공연은 9회에 걸쳐 이뤄졌다.<ref>{{뉴스 인용|제목= 씨엔블루, 인디밴드 활동 당시 공연했던 日클럽서 라이브공연|url=http://www.newsen.com/news_view.php?uid=201202251028531002|출판사 = 뉴스엔|날짜 = [[2012년]] [[2월 25일]]}}</ref><ref>{{뉴스 인용|제목= 씨엔블루, 日 전국투어 1만명 팬 열광…티켓 전쟁 |url=http://www.asiatoday.co.kr/news/view.asp?seq=602306|출판사 = 아시아투데이|날짜 = [[2012년]] [[2월 25일]]}}</ref><ref>{{뉴스 인용|제목= 씨엔블루, 초심으로 돌아가 日 전국투어 라이브… 폭발적인 반응 |url=http://www.etoday.co.kr/news/section/newsview.php?TM=news&SM=4101&idxno=550042|출판사 = 이투데이|날짜 = [[2012년]] [[2월 25일]]}}</ref>
         * [[2012년]] [[12월 5일]] 일본 음원 사이트 드완고(www.dwango.jp)에서 케이팝 OST 부분 휴대 전화 벨소리 차트에서 드라마 ‘넌 내게 반했어’ OST가 2012년 연간 랭킹에서 1위를 차지했다.<ref>{{뉴스 인용|제목= 정용화 '넌 내게 반했어', 일본 OST 벨소리차트 정상 |url=http://www.etoday.co.kr/news/section/newsview.php?idxno=662558|출판사 = 이투데이|날짜 = [[2012년]] [[12월 5일]]}}</ref>
         * [[2012년]] [[12월 8일]]에 《제1회 K 드라마 스타 어워즈》에서 ([[문화방송|MBC]] 《[[넌 내게 반했어]]》가 해외에서 큰 인기를 끈 공로를 인정받아 한류스타상을 수상하였다.<ref>{{뉴스 인용|제목= 정용화, '한류스타상, 감사합니다' |url=http://osen.mt.co.kr/article/G1109512277|출판사 = osen|날짜 = [[2012년]] [[12월 8일]]}}</ref>
         * [[2012년]] [[12월 28일]]에 《[[KBS 가요대축제]]》 MC에 발탁되어 진행하였다.<ref>{{뉴스 인용
         |제목 = 성시경-윤아-정용화, '2012 KBS 가요대축제' MC 발탁 |url=http://joynews.inews24.com/php/news_view.php?g_menu=700200&g_serial=713456&rrf=nv |출판사 = 조이뉴스24 |날짜 = [[2012년]] [[12월 24일]]}}</ref>
         * [[2013년]] [[1월 14일]]에 본인 자작곡을 타이틀로 하여 씨엔블루 4번째 미니앨범을 발매하였다. 수록곡 6곡 중에 한곡을 제외한 나머지 5곡이 본인 자작곡이다.<ref>{{뉴스 인용|제목= 씨엔블루, 틀-오해-선입견 벗고 우리 길을 간다 |url=http://www.tvreport.co.kr/?c=news&m=newsview&idx=310166|출판사 = tvreport|날짜 = [[2013년]] [[2월 14일]]}}</ref> 음원이 발표되자 마자 팬들에게 큰 사랑을 받았다.<ref>
         |출판사 = 일간스포츠 |날짜 = [[2013년]] [[2월 22일]] }}</ref>
         * 성공적인 4번째 미니앨범 활동을 마무리하고<ref>{{뉴스 인용|제목= 씨엔블루 활동 마무리 "미련없이 잘 놀았다" |url=http://sports.hankooki.com/lpage/music/201302/sp2013022507005295510.htm |출판사 = 스포츠한국 |날짜 = [[2013년]] [[2월 25일]] }}</ref> 한국밴드 최초로 월드투어를 시작하였다.<ref>{{뉴스 인용
         * [[2014년]] 2월24일 한국 EP 5집 Can't stop 발매.EP 6곡중 5곡을 작사,작곡하였다.
         |align="center"|[[2009년]] [[12월 29일]]<ref name="gayo1">{{뉴스 인용
         |날짜 = 2009년 12월 22일
         |align="center"|[[2009년]] [[12월 6일]] ~ [[2010년]] [[3월 21일]]<ref>{{뉴스 인용
         |align="center"|[[2010년]] [[2월 27일]] ~ [[2011년]] [[4월 2일]]
  • 정칠성
         [[1926년]] [[7월 7일]] [[경성]]의 [[동아청년회]] 창립에 참여하고 회원이 되었다. 1927년 다시 귀국하여 [[1927년]] [[2월]] [[신간회]]에 창립발기인으로 참여하여 [[신간회]]의 창립멤버가 되었다. 곧 [[신간회]] 경성지회 조직에도 참여하여, [[신간회]] 경성지회 중앙위원과 신간회 중앙위원회 위원의 한 사람이 되었다. 한편으로 그는 여성단체 조직에 착수하였다.
         [[1927년]] [[11월]] 서대문정 [[조선여자기예원]](女子技藝院) 교수로 초빙되었다. 여자기예원 교수로 있으면서 부녀자들에게 수자수, 편물, 공예 등을 가르쳤고 일과시간 이후에도 자신의 사택을 찾아온 부녀자들에게 개인지도를 하기도 했다. [[12월 2일]] 마포청년회 강당에서 열린 [[신간회]] 경성지회 강연에 [[이관용]](李灌鎔), 이관구 등과 함께 연사로 참여, '신간회와 여성운동'이라는 주제로 강연하였다.
         [[1928년]] [[1월 15일]] 서대문구 서대문정에 있는 [[조선여자직업사]](朝鮮女子職業社)의 교사로 출강하였다. [[1928년]] [[2월 3일]] [[근우회]] 총회에서 경성지회 설치가 결정, 심은숙(沈恩淑), 조원숙(趙元淑), 문인순(文仁順) 등과 함께 근우회 경성지회를 조직하였다. [[2월 23일]] 공평동 근우회관에서 [[허정숙]] 등과 함께 근우회 경성지회 창립 발기인이 되고, [[3월 13일]]에 근우회 경성지회 출범 후 경성지회 중앙위원에 위촉되었다.
         1928년 [[2월 24일]] 근우회 상무위원에 피선, 상무위원 [[황신덕]] 등과 함께 [[대구]]로 파견되어 [[근우회]] 대구지회를 개설하였다. [[2월 27일]]에는 근우회 본부요원으로 대구지회 창립을 지원하였고, 근우회 조직 취지를 설명하였다. 4월에는 근우회 전국대회를 준비, [[4월 20일]] 근우회 전국대회준비위원회 재무부원으로 행사에 참여하였다.
         [[1929년]] [[1월 21일]] 신간회 경성지회 사찰위원, [[1월 22일]] 신간회 임시대회에서 본부대회 대표회원에 선출되었다. [[2월 17일]] [[신간회]] 2주년 기념식에 [[권동진]], [[허헌]], [[김여식]], [[이종린]], [[홍명희]] 등과 함께 축사를 낭독하던 중 임석경관에 의해 소환되었다. [[2월 19일]] 근우회 중앙상무위원회에서 [[근우회]] 회보 발행책임위원에 선출되었다.
         1930년 [[1월]] [[경성]]에서 벌어진 만세시위인 제2차 경성학생시위사건(일명 근우회사건) 주도 혐의를 받고 [[1월 18일]] [[경기도]][[경찰부]] 고등계에 체포, 다시 투옥당하기도 했다. 이후 [[경기도]][[경찰부]] 감옥에서 취조받다가 [[2월 25일]] [[종로경찰서]]로 이감되어 취조를 받았으나 혐의가 없어 풀려났다. [[1930년]] [[3월 15일]] [[근우회]] 경성지회 대의원에 선임되었다.
         [[1945년]] [[9월]]에 좌익계 여성단체인 [[조선부녀총동맹]]을 결성하여 중앙집행위원이 되었다. 그해 [[12월]] [[조선부녀총동맹]] 부위원장에 선출되었고, [[12월]]말 [[모스크바 삼상회의]]가 결정되자 정칠성은 [[박헌영]] 등과 함께 처음에는 [[신탁통치]]에 반대하였으나, 신탁의 불가피함을 인정하고 찬탁으로 돌아섰다. 이후 찬탁매국노로 몰리자, 테러를 피해 [[대구]]와 [[경성]]과 각지에 은신처를 마련하고 숨어 다녔다.
         [[1946년]] [[2월]]에는 범좌파 연합 단체인 [[민주주의민족전선]]이 조직되자, 그 간부가 되었다. 그해 [[2월 14일]] [[민주주의민족전선]]의 중앙상임위원 겸 조직부 차장에 피선되었다. 이후 미군정의 좌익 탄압으로 은신처를 마련하여 전국 각지로 피신생활을 하였다.
  • 조승수 (국회의원)
         이에 민주노동당 내에서는 궐위한 직위를 채우고자 새 지도부 선거가 실시됐다. 새 지도부 선거에는 [[민중 민주|평등파]]에게 지지받고 출마한 조승수와 [[민족 해방|자주파]]에게 지지받는 문성현 그리고 무당파를 자임한 주대환이 출마해 3파전 양상을 띠었으나 사실상 당내 양대 정파에 지지받은 조승수와 문성현의 양자 구도로 압축되고 있었다. [[2006년]] [[1월 20일]]부터 [[1월 24일]]까지 나흘 간 실시된 지도부 선출 투표 결과 조승수는 44.8%를 얻어, 1위인 문성현(47.6%)와 결선 투표를 치르게 되었다. [[2월 6일]]부터 [[2월 10일]]까지 나흘 간 실시된 결선 투표에서도 조승수는 46.38%를 획득해 53.62%를 얻은 문성현에게 패배한다. 이 과정에서 조승수와 문성현을 지지하는 당원들 사이에 당원게시판을 이용해 육두문자가 오가거나 조승수을 음해하는 성질을 띤 글이 난립하는 등 혼탁한 양상을 보였고 이것은 [[민중 민주|평등파]]와 [[민족 해방|자주파]] 간의 감정의 골이 더욱 깊어지는 계기가 됐다.<ref>{{뉴스 인용
         한편, 대선 직후 패배의 원인을 두고 정파 간 책임 공방이 심화하는 동안 여기저기서 평등파 성향 당원들의 탈당 행렬이 이어졌다. [[2008년]] [[1월 8일]], [[경기도]] [[구리시|구리]]의 지역위원회 전원의 탈당을 시작으로 11일에는 [[부산광역시|부산]] 지역 당원 52명이, 21일에는 조현연을 위시한 11명이 추가로 탈당했고 이어 광주·여수 등서도 당원들의 집단 탈당이 이어졌다. [[2008년]] [[1월 27일]]에는 조승수를 중심으로 민주노동당의 전 대변인이었던 김형탁과 함께 선도 탈당한 조현연 등이 참가한 '새 진보정당 운동'이 닻을 올리게 된다. [[2월 1일]]에는 결국 조승수와 김형탁도 탈당했다.
         진보신당 대표를 역임한 조승수는 민주노동당과 진보대통합을 추진했으나 2011년 9월 4일 진보신당 당대회에서 진보통합안이 부결됨으로써 좌절됨. 이에 조승수는 노회찬, 심상정과 함께 탈당 '새진보통합연대'를 결성하고 민주노동당, 국민참여당과 함께 '통합진보당 건설'에 참가. 2011년 12월 통합진보당 창당 후 2012년 3월 통합진보당으로 울산 남구갑 총선 후보로 출마. 울산 남구갑에서 심규명 민주당 후보와 야권단일화를 시도했으나 경선에서 패배하고 사퇴함.
         조승수는 [[2012년]] [[11월]] 노회찬, 심상정, 유시민 등과 함께 [[통합진보당]]에서 탈당, 정의당 건설에 참여. [[2014년]][[2월]] 정의당 울산시당 창당 후 울산시당 위원장으로 선출됐다. 이후 [[대한민국 제6회 지방 선거|2014년 6.4 지방 선거]]에서 정의당 울산시장 후보로 출마하였으나 2위로 첫 낙선을 경험했다.
         * 동국대학교 사회과학대학원 겸임교수 (2013 3월 ~ 12월)
         * 정의당 경제민주화를 위한 민생본부 공동본부장 (2014년 2월~ )
         * 정의당 울산광역시당 위원장 (2014년 2월~ )
         * 집회및시위에관한법률위반: 징역 1년 - 1983년 4월 26일 선고, 1984년 8월 14일 특별복권<ref name="criminal">{{보고서 인용|저자=북구선거관리위원회|url=http://info.nec.go.kr/electioninfo/precandidate_detail_info.xhtml?electionId=0020180613&huboId=100121096|제목=예비후보자 정보공개: 전과기록증명에 관한 제출서|출판사=중앙선거관리위원회|날짜=2018년 2월 13일}}</ref>
         * 국가보안법위반(기타): 징역 1년, 자격정지 1년 - 1987년 7월 30일 선고, 1988년 2월 27일 특별사면복권<ref name="criminal" />
         * 도로교통법위반(무면허운전): 벌금 100만원 - 2003년 12월 12일 선고<ref name="criminal" />
         * 공직선거및선거부정방지법위반: 벌금 150만원 - 2004년 12월 30일 선고, 2008년 8월 15일 특별복권<ref name="criminal" />
         * [http://www.voiceofpeople.org/A00000195439.html 진보정치 1번지, 울산북구는 지금...], 《민중의 소리》, 2008년 2월 12일.
  • 지호(1997년 4월)
          * [[2월 4일]] 졸업을 축하하러 온 [[효정]], [[유아(오마이걸)|유아]], [[아린(오마이걸)|아린]]과 함께 [[서울공연예술고등학교]] 졸업식에 참석해 공로상을 받으며 졸업했다.[* 참고로 [[진이]], [[미미(오마이걸)|미미]], [[승희(오마이걸)|승희]]는 같은 날에 열린 [[비니(오마이걸)|비니]]의 [[한국예술고등학교]] 졸업식에 졸업을 축하하러 갔다.] [[http://mimgnews1.naver.net/image/312/2016/02/04/2016020413113611626-540x809_99_20160204131402.jpg|졸업사진]]
          * [[2월 8일]], [[SBS]] 설특집 먹스타 총출동에 출연, 잦은 카메라 원샷과 짜장면 스피드먹방 1등으로 아주 큰 분량을 차지했다. 게다가 짜장면 타임어택 상대 중에는 '''[[김민경(개그우먼)|김민경]]'''이 있었다. 기록은 39초 56(...) --[[김정민(1968)|???]]: '''[[나의 아스카는 그러지 않아|걸그룹의 이런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았거든요.]]''' 실망입니다-- --[[김민경(개그우먼)|???]]: 가장 큰 실수가 있었던 거 같아요. '''비볐어요'''-- 이게 방송 관계자들에게 강렬한 임팩트를 남겨서였는지 몰라도 [[2016년]] [[6월 15일]] 녹화를 개시한 [[JTBC]] 프로그램 '잘먹는 소녀들'에 고정 멤버로 뽑혔다. --하지만 조기종영 크리--
          * [[2017년]] [[12월 26일]] 안무 연습 도중 발목을 다쳐 27일 행사에서 반깁스한 상태로 무대 인사만 했다.[* 이 부상 때문에 지호는 [[아이돌스타 육상 선수권대회/2018년|2018 설날 아육대]] 경기에 나설 수 없었다. 지호 대신 양궁에는 [[승희(오마이걸)|승희]]가 나섰고, 400mR에는 [[미미(오마이걸)|미미]]가 출전했다. 하지만 [[오마이걸]]은 [[펠레의 저주|윤여춘의 저주]](...)에 걸리는 바람에 [[드림캐쳐(아이돌)|드림캐쳐]]와 [[라붐(아이돌)|라붐]]에게 패해 400mR 3연패에 실패하며 동메달에 그치고 말았다.]
          * [[비밀정원]] 활동 때 의자에서 음악 방송을 하다 다시 안무에 참여했지만 완전히 낫지 않고 활동했는지 미니콘서트가 끝난 [[2월]] 말부터 [[4월]] 중순까지 행사에 불참하였다. 다시 반깁스를 했다. [[바나나 알러지 원숭이]] 첫 주 음악 방송 지원사격에도 참여하지 못했다.
         || [[2016년]] [[12월 15일]]~[[2016년]] [[12월 22일]] || ||
         || [[2016년]] [[12월 22일]] || [[엠넷]] || [[양남자쇼]] || 특별출연 || ||
         || [[2017년]] [[2월 2일]] || ||
         || [[2018년]] [[2월 18일]] || [[미스터리 음악쇼 복면가왕]] || [[연예인]] 판정단 || ||
         || [[2018년]] [[2월 21일]] || [[tvN]] || [[수요미식회]] || [[게스트]] || ||
  • 최광수 (공무원)
         | 임기 = [[1973년]] [[10월 19일]] ~ [[1974년]] [[12월 17일]]
         '''최광수'''(崔侊洙, [[1935년]] [[2월 24일]] ~ )는 [[대한민국]] 제21대 외무부 장관이다.
         제7회 고등고시 행정과에 합격하여 [[1956년]] [[2월]]을 기하여 외무부에 입부되었다. 그는 [[경기고등학교|서울 경기고등학교]]를 거쳐 [[1957년]]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행정학]]과를 졸업하고 [[1959년]] [[미국]] [[조지타운 대학교]] 대학원 외교학과의 [[외교학]] [[석사]] 과정을 마쳤다. 주미 3등서기관, 주일 2등서기관, 동북아주과장, 주미 참사관, 통상진흥관, 아주국장, 국방부 차관, 대통령비서실장, 제1무임소장관, 체신부장관, [[주사우디아라비아 대한민국 대사관|주사우디아라비아 대사]], 주유엔 대사, 외무부장관, [[하버드 대학]] 아시아문제연구소 초빙연구원([[1992년]]-[[1993년]])을 역임하였다.
         |임기 = [[1973년]] [[10월 19일]] ~ [[1974년]] [[12월 17일]]
         |임기 = [[1979년]] [[11월 7일]] ~ [[1979년]] [[12월 10일]]
         |임기 = [[1979년]] [[12월 10일]] ~ [[1980년]] [[8월 27일]]
         |임기 = [[1986년]] [[8월 26일]] ~ [[1988년]] [[12월 4일]]
  • 최리(배우)
         [[2016년]] [[2월]], 영화 [[귀향(한국 영화)|귀향]]에서 신기가 들려 과거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고통받는 모습을 보게 된 소녀 은경 역으로 데뷔했다.
  • 최문식
         |임기 = [[2015년]] [[2월]]
  • 태진아
         || 가버린사랑[* 원곡자는 남미웅이며 그 뒤 조경수와 임주리가 리메이크했다. 참고로 1995년 12월부터 1996년 7월까지 [[가요톱텐]] 순위권에 있었다.], 그대곁에 |||| [[1994년]] [[12월]] ||
         || 잘살거야 |||| [[2005년]] [[2월]] ||
         || [[https://www.youtube.com/watch?v=APhoNKEdndo|아줌마]] |||| [[2006년]] [[2월]] ||
         || 일나겠네, 사랑했나요 |||| [[2011년]] [[2월 18일]] ||
         || 사랑은 눈물이라 말하지 |||| [[2012년]] [[2월 27일]] ||
         || LA SONG |||| [[2014년]] [[2월 10일]] ||
  • 표양문
         |임기 = [[1947년]] [[2월]] ~ [[1949년]] [[8월 14일]]
         |임기 = [[1952년]] [[5월]] ~ [[1954년]] [[2월]]
  • 하리수
         '''하리수'''(<sup>'''예명 한자 음역 표기'''</sup>河莉秀)라는 예명으로 알려진 '''이경은'''(<sub><sup>'''본명 한자 표기'''</sup></sub>: 李慶恩, [[1975년]] [[2월 17일]] ~ )은 [[대한민국]]의 가수, 탤런트 겸 영화 배우, 방송인으로, [[대한민국]]의 [[트랜스여성|성전환여성]] [[연예인]]이다. CF 광고 모델로 알려지면서 영화배우, 탤런트, 모델, 가수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다. 예명인 하리수는 [[영어]] 단어 핫 이슈(Hot Issue)에서 따온 것이다.
         고등학교 졸업 후 군 신체검사에서 부적격 판정(6급면제)을 받고<ref>[http://star.mt.co.kr/view/stview.php?no=2007022119411158417 하리수, 성전환에서 결혼까지] 머니투데이 2007.02.21</ref>, 면제되었다. [[성전환 수술]] 후 [[1994년]] [[12월]] [[일본]]에 건너가 [[1998년]]까지 [[무용수]]로 활동하다가 [[2001년 4월]] [[대한민국]]의 광고 모델이 되고 바로 가수가 되었다.
         한 때 ‘하리수’란 예명을 놓고 전 소속사인 TTM과 갈등을 겪기도 했다. TTM 측은 두 번째 하리수로 [[제니퍼 영 위스너]]를 내세우기도 했지만, 합의를 통해 하리수란 이름을 계속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본명은 이경엽(李慶曄)이었다가, 성전환 후 [[2002년 12월]] 이경은(李慶恩)으로 개명하였다.<ref>[http://article.joins.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1284346 하리수 性 · 이름 女子로 호적 변경 허가] 중앙일보 2002.12.13</ref>
         하리수는 [[1975년]] [[2월 17일]] 대한민국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에서 태어났으며 다섯 남매들 가운데 한 명이다.<ref name="Eve from Adam">Li Ee Kee, "Eve from Adam", ''The Star Online'', September 19, 2005. A copy of this article can be read at [http://groups.yahoo.com/group/TNUKdigest/message/17335 TNUKdigest]. Retrieved on April 27, 2007.</ref> 본명은 이경엽으로 후에 [[2002년]] [[12월]] [[성별정정]] 후에 경은으로 개명하였다.
         그는 "중학교 3학년 때 첫사랑을 경험했다"고 한다.<ref>[http://www.kyeongin.com/news/articleView.html?idxno=652832 하리수 첫사랑 고백 자살시도에 성전환 수술 결심은 고 2때… '기구한 인생'] 경인일보 2012.05.15</ref> 그는 "첫사랑 상대는 탤런트 [[이창훈 (배우)|이창훈]]을 닮은 외모로 학생회장을 맡고 있었던 남학생이었다"며 "첫사랑 이후 [[우울증]]이 있었다.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또 하리수는 "고등학교 2학년때 교제했던 남자친구로 인해 [[성전환 수술]]을 결심하게 됐다"고 하였다.<ref>[http://www.mydaily.co.kr/new_yk/html/read.php?newsid=201205151446181110 하리수 "중학교 시절, 첫사랑때문에 자살시도"] 마이데일리 2012.05.15</ref> 이후 남자로 살아보기 위해 평소 그녀를 동경하던 부근 학교 여학생을 사귀기도 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117&aid=0000053478 하리수, “남자로 살기위해 여학생과 사귄적 있다”] 마이데일리 2006.07.11</ref> 하리수는 또 “두번째 사랑을 사귀던 남자친구로부터 "[[미스젠더링|넌 어차피 남자잖아]]"라며 결별을 통보받고 성전환수술을 결심하게 됐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108&aid=0000059418 하리수, 성전환에서 결혼까지] 스타뉴스 2007년 02월 21일자</ref> 그는 고등학교 2학년 때 성전환 수술을 결심했다 한다.<ref name="heimagge"/>
         [[낙생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94년]] [[12월]] 연예인 비자로 [[일본]] [[히메지]]로 갔다.<ref name="heimagge"/> 그에 의하면 "수술도 하고 돈도 벌 심산이었다.<ref name="heimagge"/>" 한다. 히메지는 지진으로 유명한 고베와 약 1시간 거리로 [[1995년]] [[2월]] 그는 고베 지진을 직접 목격했다. 고등학교 졸업 이후 그는 [[일본]] [[히메지]]에서 한국무용을 하며 생활하였다. 이어 [[1995년]] 말부터 [[1998년]] 말까지 [[도쿄]]로 무대를 옮겼다.<ref name="heimagge"/>
         [[2002년]]에는 성별 정정 및 개명을 신청하였다. [[2002년]] [[12월]], [[인천지방법원]]이 하리수가 신청한 호적정정 및 개명신청에 대해 호적상 '남(男)'에서 '여(女)'로 정정하고, 이름도 '이경엽'에서 '이경은'으로 개명하는 것을 허가하면서 법적으로도 완전히 여자가 됐다. 당시 [[인천지방법원]]은 하리수가 [[성염색체]]상으로는 남자지만, 군 입대를 위해 받은 신체검사에서 부적격 판정(6급 병역면제)을 받는 등 신체적으로 여성으로 보는 게 타당하며, 이미 여자로 연예활동을 해온만큼 그를 남자로 살아가게 하는 것은 너무 가혹하다고 사유를 밝혔다.
         [[2011년]] [[4월]] 《파주 Fantastic Show》<ref name="fanfan1">[http://www.newsen.com/news_view.php?uid=201104011540171001 최한빛 ‘이것이 슈퍼모델 각선미’(하리수 판타스틱쇼)] 뉴스엔 2011.04.01</ref> 를 기획하였다. 판타스틱쇼(Fantastic Show)는 하리수와 [[2009년]] 슈퍼모델출신의 [[최한빛]] 그리고 전국에서 끼와 재능으로 똘똘 뭉친 대한민국 최고의 트렌스젠더들이 모여 다년간 하루 10시간의 트레이닝을 통해 만들어낸 공연이었다.<ref name="fanfan1"/> 당시 하리수는 “태국의 대표적인 알카자쇼와 같은 공연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국가적 지원 속에 문화 관광 상품을 넘어서 세계적인 쇼로 자리잡았다. 트렌스젠더들이 꿈의 무대를 이루어낸 것처럼 한국의 후배 동료들에게도 공연예술인으로서의 자긍심을 심어줄 수 있는 무대를 만들어 세상에 당당한 모습으로 나설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 주고 싶었다”고 소감을 밝혔다.<ref name="fanfan1"/> [[2012년]] [[12월 11일]] 서울 종로구 동숭동 컬처스페이스 엔유에서 열린 연극 키사라기 미키짱 VIP데이 포토타임 행사에 참여했다.<ref>[http://www.newspim.com/view.jsp?newsId=20121212000972 하리수 달라진 얼굴…또 성형 의혹?] {{웨이백|url=http://www.newspim.com/view.jsp?newsId=20121212000972# |date=20160305005647 }} 뉴스핌 2012.12.12</ref> [[2013년]] [[10월]]에는 제8회 [[서울국제문화축제]] 홍보대사로 위촉되었다.
         * [[2007년]] 《이재용 임예진의 좋은 아침》 (02월28일) MBC
         [[2007년]] [[2월 28일]] 오전 9시 30분부터 MBC TV를 통해 방송된 ‘이재용, 임예진의 기분좋은 날’에 출연해 “사람들이 둘이 만나는 것을 몰랐을때 미키정이 자신의 미니홈피에 함께 찍은 사진을 올려놓았더니 사람들이 ‘리수형이네’, ‘이 사람하고 놀지마’ 같은 댓글을 남겨 가슴이 아팠다”며 네티즌들의 악플로 인해 겪었던 마음 고생을 방송에 털어놓기도 했다.<ref name="akples">[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117&aid=0000080557 하리수, "'리수형, '아저씨' 악플에 전화해 항의"] 마이데일리 2007.02.28</ref> 그러나 악플에 대해 그는 당사자에게 직접 항의하는 등 의연하게 대처하였다.
  • 한규복 (1881년)
         [[1917년]] [[경상남도지방토지조사위원회]] 조사위원이 되고, [[1917년]] 진주군수 재직 중 [[고등관]] 5등(高等官5等)으로 승진했다. [[1918년]] [[7월 1일]] [[동래군|동래]][[군수]] 고등관 5등(東萊郡守 高等官5等)으로 발령받았다. [[1921년]] [[2월 12일]]에는 [[충청남도]] 참여관(慶尙北道參與官) 고등관 4등(高等官4等)으로 승진하였다. [[7월 22일]] 다시 [[충청남도]] [[참여관]]으로 임명되었다. [[1922년]] [[5월 30일]]에는 [[만주]]로 출장갔다가 [[10월]]에는 [[동양협회]] 시찰단의 한 사람이 되어 [[일본]]을 시찰하고 [[1923년]]초 되돌아왔다. [[1923년]] [[11월]] [[충청남도]] [[참여관]]으로 재직 중 [[충청남도음악협회]]회장에 선출되었다. [[1924년]] [[2월 11일]]에 [[경상북도]] 참여관으로 옮겼다. [[12월]] [[경상북도]] 참여관 재직 중 [[고등관]] 3등(高等官3等)으로 승진하였다.
         [[1926년]] [[8월]]에 다시 도지사로 승진, [[8월 14일]] [[충청북도]]도지사가 되고 [[1929년]] [[4월]] [[고등관]]1등(高等官1等)으로 승급되었다. [[1929년]] [[11월 28일]] [[황해도]][[도지사]]로 부임하였다. [[1930년]] [[1월 24일]] [[황해도농민회]] 회장에 임명되었다.<ref>조선총독부 관보 1930년 01월 24일자</ref> [[1930년]] [[2월]] [[황해도]] 도지사에 재임명된 뒤 [[1933년]] [[4월 7일]]에 사직서를 내고 퇴직했으나 그해 [[6월 4일]] [[조선총독부 중추원|중추원]] [[칙임관]]대우 [[참의]](中樞院勅任官待遇參議)에 임명되었다. 중추원 참의로 재직하면서도 그는 수당에만 의존하지 않고 기업인으로 활동하면서 경성부 교화단체연합회 서부교화구위원장을 지내기도 했다. [[1934년]] 중추원 참의에 재선되었다. 특히 [[태평양 전쟁]] 기간 중 [[흥아보국단]], [[임전대책협의회]], [[조선임전보국단]], [[국민동원총진회]] 등 여러 전쟁 지원 단체에 적극 가담했다. 서예에도 일가견이 있던 그는 [[1926년]]부터 [[1930년]]의 선전(鮮展)에서 4회 걸쳐 수상하였다.
         [[1935년]] [[2월 6일]]에는 [[경성부]]에서 [[윤치호]] 등이 조직한 [[계명구락부]][[재단]](啓明俱樂部財團) 위원의 한 사람에 위촉되었다.<ref>"啓明俱樂部財團組織 十萬圓으로 會館新築", 동아일보 1935년 02월 06일자 2면, 사회면</ref> [[1930년]]대 중반 이후 그는 각종 계몽, 강연회를 다니면서 근검 절약의 필요성, 불필요한 사치품과 물건 강매, 사재기 등을 하지 말 것, 저축을 하여 가사 경제에 보탬이 되게 할 것, 도박과 노름, 사행성 복권 등 헛된 일확천금을 꿈꾸지 말고 성실하게 일하여 대가를 취할 것을 강조하였다.
         [[1939년]] [[2월 2일]] [[국민정신총동원연맹]] 각 정(동)지역 연맹 애국반 창설에 참여하였으나 [[윤치호]] 등의 불참으로 [[김명준]], [[이승우]], 조병상 등 참여자들 일부와 함께 조직 착수에 나섰다.
         [[1939년]] [[6월 4일]] [[중추원]] 참의로 재선되었다. [[8월 5일]]에는 [[국민정신총동원연맹]] 주최로 전국 순회강연을 할 때, 순회강사가 되어 국민 저축 장려를 목적으로 '백억 저축 생활 쇄신'이라는 주제로 전국 순회강연을 다녔다. [[9월 26일]]에는 각지의 노무자와 빈민을 구제하기 위해 만든 [[사회조사위원회]] 위원에 피임되었다.<ref>"勞務者와 細窮民을 來月中에 綜合調査", 동아일보 1939년 09월 26일자 2면, 사회면</ref> 그해 [[9월 30일]] [[경성]]에서 자본금 백만원을 투자하여 [[조선공영회사]](朝鮮工營會社)를 창립하고 대표이사 사장에 선출되었다. 그러나 그해 [[11월 5일]] [[조선중앙임금위원회]] 임시위원으로 선임되면서 사퇴했다. [[12월 22일]] [[세제조사위원회]] 위원에 선임되었다. [[1939년]]부터 그는 [[경성부]], [[충주군]], [[함양군]], [[수원군]], [[용인군]], [[양주군]] 등을 다니며 저축을 할 것을 주장하였다.
         [[1941년]] [[12월]] [[중선주조조합연합회]] 회장에서 해임되었다. [[1942년]] [[4월]] [[조선맥자주식회사]](朝鮮麯子株式會社) 취체역 회장에 선임되었다. 그해 [[5월]]에는 [[재무간담회]] 회장직을 사퇴했다.
         * 부인 : 평양 조씨, 조인옥(平壤趙氏 趙仁玉, [[1881년]] [[2월 24일]] - [[1945년]] [[9월 10일]]). 조재연(趙載淵)의 딸
         ** 자부 : 경주김씨 김학인(金學仁, [[1924년]] [[12월 5일]] - [[1954년]] [[8월 30일]])
  • 한명회
         [[1456년]](세조 2) [[2월]] [[성삼문]]과 [[집현전]] 학사들이 [[조선 세조|세조]] 3부자를 연회장에서 암살할 계획을 세운다는 정보를 입수한다. 이후 [[사육신]]의 [[단종 복위 운동]]을 좌절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미 [[조선 세종|세종대왕]]으로부터 [[집현전]] 학사들이 [[조선 단종|단종]]을 부탁한다는 유지를 들었다는 것을 알게 된 한명회는, 연회장에 별운검으로 임명된 [[성승]], [[유응부]], [[하위지]] 등을 의심하고 이들의 출입을 차단한다.
         [[2000년]] 그의 묘소가 도굴되어 지석(誌石) 등이 유출되었으나 [[2009년]] 6월 도굴범들은 검거되었다.<ref>[http://cheonan.grandculture.net/Contents/Index?contents_id=GC04503015&local=cheonan 한명회 지석] "디지털천안문화대전"</ref> <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3&aid=0003008038 청주한씨 종친회, '한명회 지석' 천안 박물관에 기탁] "뉴시스 2009년 12월 21일자 기사내용"</ref>
         [[1456년]] [[6월]] 단종복위사건이 일어나자, [[정보 (조선)|정보]]는 서매제인 한명회를 찾아가 사육신의 무죄를 주장하였으나 한명회가 이를 들어주지 않자 [[정보 (조선)|정보]]는 천추의 악인이라며 규탄하였다. 그해 12월 한명회가 그를 난언죄(亂言罪)로 고발하여 죽음을 받게 하였다.<ref name="정보1">[http://www.sugmo-jeon.co.kr/haenglog/haenglog-jeongbo.htm 정보(鄭保)<!-- 봇이 붙인 제목 -->]</ref>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309781 한명회, 그는 지략가인가? 모리배인가? - 오마이뉴스] 2006년 2월 9일자 기사
  • 한승주 (공무원)
         [[1993년]] 2월부터 [[1994년]] 12월까지 외무부 장관이었다.
         [[2002년 6월]]부터 [[2003년 2월]] 그리고 [[2007년 3월]]부터 [[2008년 1월]]까지 [[고려대학교 총장]]서리를 맡았다.
         청와대는 2003년 4월 한승주를 주미대사로 서둘러 내정하였다. 여기에는 북한 핵 문제 해결을 위한 진용을 가급적 빨리 구축하려는 의미가 담겨 있다. 당시, 북핵 문제가 주요 현안으로 대두됐으나 양성철 당시 주미대사는 3년의 임기를 거의 마쳐가고 있는 상태였고 가능한 한 빨리 교체해야 한다는 의견이 설득력을 얻었다. 이런 상태에서 한승주가 국내 인사로는 드물게 미국내에 두터운 인맥을 갖고 있으며,1993년 북핵 위기 때는 외무부 장관으로서 평화적 해결을 위해 외교적 노력을 기울인 점도 고려돼 발탁된 것으로 알려졌다.<ref>{{뉴스 인용 |제목 =북핵해결 위한 美지명도·인맥 고려…한승주 주미대사 내정 배경 |url = http://news.kukinews.com/article/view.asp?page=1&gCode=kmi&arcid=0918951804&code=11121200 |뉴스 = 국민일보 |날짜 = 2003-03-27 }}</ref> 이리하여 [[2003년]] 4월부터 [[2005년]] 2월까지 제19대 주미대사를 지냈다.
         |임기 = [[1993년]] [[2월 26일]] ~ [[1994년]] [[12월 24일]]
         |임기 = [[2002년]] [[6월]] ~ [[2003년]] [[2월]]
         |임기 = [[2003년]] [[4월]] ~ [[2005년]] [[2월]]
  • 한현규
         * 1980년 2월 1일 공인회계사 합격<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0020100209202022&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80-02-01&officeId=00020&pageNo=2&printNo=17945&publishType=00020 ]</ref><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0020100099202015&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80-02-01&officeId=00009&pageNo=2&printNo=4278&publishType=00020 ]</ref>
         * 2002년 6월 28일 ~ 2004년 2월 6일<ref>[http://v.media.daum.net/v/20040206061217739 "2만불, 3만불 시대는 경기도가 만들 것" - 한현규 정무부지사 이임]</ref> 경기도 정무부지사
         * 2004년 2월 ~ 4월 4.15 국회의원 총선거 수원 영통에 [[한나라당]] 후보자로 출마하였으나, 낙선
         * 1995년 12월 25일 홍조[[근정훈장]] 수상
         * 1995년 12월 26일 올해의 공무원 선정<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5122600329119013&editNo=40&printCount=1&publishDate=1995-12-26&officeId=00032&pageNo=19&printNo=15635&publishType=00010 ]</ref>
         * [[1973년]] [[2월]] [[경기고등학교]] 졸업
         * [[1973년]] [[3월]] ~ [[1977년]] [[2월]] [[연세대학교]] 경영학과 졸업(경영학 학사)
         * [[1977년]] [[3월]] ~ [[1980년]] [[2월]][[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 [[행정학]] [[석사]]
  • 허미영
         '''허미영'''(許美英, [[1982년]] [[2월 6일]] ~ )은 [[대한민국]]의 [[개그우먼]]이다. [[2015년]] [[2월]] 남편 국회의원 보좌관 박모씨와 결혼했다.
  • 현빈
         현빈은 [[2003년]] 드라마 《[[보디가드 (드라마)|보디가드]]》에서 연기자로 첫발을 내딛게 되었고, 데뷔작에서 맡은 역할은 일류 모델을 따라다니는 스토커로 단역이었다. 이후 청춘 시트콤 《[[논스톱 4]]》에서 몇 개의 에피소드에 단역으로 출연하다가 [[2004년]] [[2월]]부터 고정 출연하게 되었으며, 태권도가 특기이며 진지한 성격의 바른 생활 사나이 "현빈" 역으로 인기를 끌며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2004년초에 촬영이 끝난 영화 《[[돌려차기]]》가 [[7월]]에 개봉하며 영화로도 데뷔했으며, 태권도부 주장 "이민규" 역을 맡았다. 또한 [[9월]] 드라마 《[[아일랜드 (드라마)|아일랜드]]》에서 경호원이며 힘없고 불쌍한 사람을 좋아하는 착한 "강국" 역을 맡았는데, 인정옥 작가는 "시트콤을 봤는데 현빈이 너무나 예쁘게 생겼고, 어투도 좋아서 김진만 감독에게 추천했다."고 밝혔다.<ref>{{뉴스 인용|제목=인정옥 작가 "섹시했던 양동근, 예뻤던 현빈"
         [[2006년]] [[2월]] 영화 《[[백만장자의 첫사랑]]》에서 유산상속받는 날만 기다리는 철없는 고등학생 "강재경" 역을 맡았으며, [[11월]]에는 영화 홍보차 일본을 첫 방문하였다.<ref>{{뉴스 인용
         |저자=윤현진 (2010년 12월호)
         [[2011년]] 《시크릿 가든》이 끝나고 두 편의 영화가 차례대로 개봉되었다. 그 첫 번째는 지난 2010년초 시애틀에서 촬영을 마친 [[김태용 (1969년)|김태용]] 감독의 영화 《[[만추 (2010년 영화)|만추]]》다. 여기서 그는 미국에 온 지 2년, 겨우 입에 붙기 시작한 서툰 영어로는 사랑 밖에 팔 것이 없는 남자 "훈" 역을 맡았다. 이 작품은 같은 해 [[2월 10일]] 개막한 제61회 [[베를린국제영화제]] 포럼섹션부문에 공식 초청되었으며,<ref>{{뉴스 인용|제목=현빈-탕웨이 '만추', 제61회 베를린국제영화제 공식 초청
         현빈은 [[2012년]] [[11월 14일]] 전역을 한달여간 앞두고 서울 여의도 [[KBS홀]]에서 열린 해병대 사령부에서 주최하는 군악회인 제23회 해병대 군악회 정기연주회에서 2년 연속 진행을 맡았다.<ref>{{뉴스 인용|제목=현빈 군복입고 팬들 만난다, 2년연속 해병대 연주회MC|url=http://www.newsen.com/news_view.php?uid=201211141231300910|출판사=뉴스엔|저자=전원|날짜= 2011-11-14|확인날짜 = 2017-09-08}}</ref> 그리고 [[2012년]] [[12월 6일]] 21개월간의 군생활을 마치고 만기 제대하였다. 그는 전역 신고를 하며 "21개월 전에 단단해지고 든든해져서 인사를 드리겠다고 약속을 했는데 그 약속은 지킨 것 같다. 조금 더 단단해진 것 같고 당당하게 인사를 할 수 있게 된 것 같다."며 그동안 연기가 너무 하고 싶었다고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다. 또한 모범적인 군복무를 인정받아 국방부장관 표창과 해병대사령관 표창을 받았다.<ref>{{뉴스 인용|제목='해병 현빈' 전역하던 날… 큰절로, 눈물로 … '뜨거운 귀환'|url=http://sports.khan.co.kr/news/sk_index.html?cat=view&art_id=201212062314046&sec_id=540101&pt=nv|출판사=스포츠경향|저자=하경헌|날짜= 2012-12-06|확인날짜 = 2017-09-08}}</ref><ref>{{뉴스 인용|제목=현빈, 입대부터 전역까지 ‘진짜 남자’ 였다|url=http://entertain.naver.com/read?oid=038&aid=0002328888|출판사=한국일보|저자=최인경|날짜= 2012-12-06|확인날짜 = 2017-09-08}}</ref> 그리고 당시 [[에스엠컬처앤콘텐츠]]에 인수합병된 소속사 에이엠엔터테인먼트와 계약 완료로 에이엠엔터테인먼트의 이사와 매니저 등이 설립한 신생회사인 [[오앤엔터테인먼트]]와 계약하였다.<ref>{{뉴스 인용|제목=현빈·신민아, 장동건 떠나 독립..신생회사 설립|url=http://star.mt.co.kr/view/stview.php?no=2012110808191173456&type=1&outlink=1|출판사=스타뉴스|저자=전형화|날짜= 2012-11-08|확인날짜 = 2017-09-08}}</ref>
         [[2016년]] [[2월]] 현빈은 연기 스승인 강건택(대표)과 함께 ‘[[VAST엔터테인먼트]]’를 설립하였다.<ref>{{뉴스 인용|제목=현빈 1인기획사 VAST엔터 본격 행보 “연기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 만들 것”
         현빈은 [[2005년]] [[2월]] 가수 [[김범수 (가수)|김범수]]의 뮤직비디오에 출연하고 받은 출연료 전액을 모교인에 발전기금으로 기부하였다. 또한 연극반 후배들에게 TV와 게임기 등을 선물한 바 있다.<ref>{{뉴스 인용|제목='의리의 사나이' 현빈 마음씀씀이도 '짱'|url=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108&aid=0000006477|출판사=스타뉴스|저자=김은구|날짜= 2005-02-05|확인날짜 = 2017-09-08}}</ref> [[2005년]] [[8월]]에는 재일조선인마을돕기 캠페인 "우토로 살리기 캠페인"에 애장품을 기증하기로 하였다.<ref>{{뉴스 인용|제목=在日조선인 마을 돕자|url=http://economy.hankooki.com/lpage/industry/200508/e2005080117095270260.htm|출판사=한국경제|저자=최광|날짜=2005-08-01|확인날짜=2017-09-08|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160304201443/http://economy.hankooki.com/lpage/industry/200508/e2005080117095270260.htm#|보존날짜=2016-03-04|깨진링크=예}}</ref> [[2005년]] [[12월 22일]] 굿네이버스 주최로 열린 자선 바자회에 참여한 [[김선아]], [[다니엘 헤니]]와 함께 동참하여 훈훈함을 전달했다.<ref>{{뉴스 인용|제목=김선아 다니엘 헤니, '자선바자회' 통해 사랑실천|url=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117&aid=0000032916|출판사=마이데일리|저자=강승훈|날짜= 2005-12-22|확인날짜 = 2017-09-08}}</ref> [[2005년]] [[12월 27일]] 근섬유종증(안구가 흘러내리는 병)을 앓고 있는 청소년에게 [[김선아]]와 함께 치료비를 기부하였다.<ref>{{뉴스 인용|제목=김선아 현빈, 희귀병 소년에게 2000만원 전달|url=http://entertain.naver.com/read?oid=117&aid=0000033578|출판사=마이데일리|저자=안지선|날짜= 2005-12-29|확인날짜 = 2017-09-08}}</ref> [[2006년]] [[1월 27일]] 부산 해운대 인근의 한 장애우단체를 찾아 성금기부 및 활동을 하였다.<ref>{{뉴스 인용|제목=김선아-현빈, 다운증후군 환아들에게 남몰래 선행
         |확인날짜 = 2017-09-08}}</ref> [[2007년]] [[12월]]에는 소외계층 및 농어촌 학생들에게 영어공부 기회를 확대하는 EBS '사랑의 안테나' 캠페인에 장동건, 김승우, 황정민, 주진모, 지진희, 공형진 등과 함께 동참하였다.<ref>{{뉴스 인용|제목= 연예인 야구단 ‘플레이보이즈’ 배우들 소외계층 영어 공부 지원 캠페인 동참
  • 홍성유
         [[1928년]] [[10월 4일]] [[경성부]]에서 태어나 [[경동고등학교]]를 거쳐 [[1951년]] [[서울대학교]] 행정학과를 학사 학위하였다. 이어 같은 해 1951년 9월 [[갑종장교|육군 갑종사관]] 제10기로 육군 소위 임관하여 [[1951년]] [[대한민국 육군본부|육군본부 헌병사령부]] [[기관지]] 《[[사정보]]》(司正報) 기자·편집장을 지낸 이후, 1952년 [[대한민국 육군 보병학교|육군보병학교]]를 [[졸업]]한 이듬해 [[1953년]] 국방부 군사잡지 《[[명랑]]》(明朗) [[편집장]]을 거쳐 [[1955년]] [[2월]]에 대한민국 육군 중위 예편하였으며 [[1957년]] 《[[한국일보]]》에 장편소설 《[[비극은 없다]]》가 당선되어 등단하였다.
  • 황병기
         가야금은 중학교 3학년 때인 1951년 부산 피난시절부터 배우기 시작하여 경기고등학교 시절에 국립국악원에서 가야금 명인인 김영윤, 김윤덕, 심상건을 사사하였다. 당시 서울대 법대 학생이며 남학생으로는 특별하게 대학 2학년 때 KBS 주최 전국 국악 콩쿠르에서 1등을 하면서 음악계의 주목을 받았다. 1959년 서울대학교 법대를 졸업한 후 1963년까지 서울대학교 음대 국악과에서 가야금을 가르쳤다. 2000년 2월에는 [[단국대학교]]에서 명예 음악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 [[2000년]] [[2월]] [[단국대학교]] 명예 [[음악학]] [[박사]] <ref>명예학위도 동문으로 인정한다는 단국대학교의 규정에 따라 동문으로 분류</ref>
         * [[2006년]] [[2월]] ~ 국립국악관현악단 예술감독
         * [[2009년]] [[12월]] ~ 대한민국예술원 부회장
  • 황용식
         |임기 = [[2004년]] [[3월]] ~ [[2006년]] [[2월]]
  • 흥인군
         '''이최응'''(李最應, [[1815년]] [[2월 17일]] ~ [[1882년]] [[6월 10일]])은 [[조선]] 후기의 왕족, 정치인으로, 자는 양백(良伯), 호는 산향(山響), 군호는 흥인군(興寅君)이다. [[남연군]] 이구와 여흥군부인 여흥 민씨의 셋째 아들이자 [[흥선대원군]]의 바로 윗 형이었다. 자는 양백(良伯)이고 호는 산향(山響), 시호는 효헌(孝憲) 또는 충익(忠翼), 문충(文忠)이었다. 본관은 [[전주 이씨|전주]]이다.
         [[1815년]] [[2월 17일]] [[한성부]]에서 숙종 때의 정승 [[남연군]] 이구와 [[민정중]]의 4대손 [[선공감]]가[[감역]] 민경혁의 딸 군부인 여흥민씨의 4남 1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성품은 신도비명에 의하면 말수 적고, 좋고 싫음을 내색하지 않는 성품이라 한다. [[홍순목]]이 쓴 신도비문에 의하면 그의 성격은 '사람의 허물을 보면 반드시 덮어주고 또한 사랑하고 미워함을 말하지 않'는 성격이라 한다. 그는 [[흥녕군]]과 [[흥완군]]의 동생이자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친형이었으나, 그는 일찍부터 바로 아랫 동생 이하응에게 번번히 무시당했고, 그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어머니 여흥민씨와 아버지 남연군, 두 형이 일찍 사망했지만 동생 [[흥선대원군]]과의 관계는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매천 [[황현]]에 의하면 그가 무식하면서 욕심이 많아서 그랬다 한다.
         [[1829년]](순조 29년) [[1월 1일]] 흥인부정(興寅副正)이 되고 [[1830년]] [[5월 6일]] [[명선대부]]로 승진한 뒤 흥인도정(興寅都正)으로 진봉되고, 다시 군으로 진봉된 뒤 [[돈녕부]]도정에 임명되었다. 이어 [[현록대부]]로 승진하자 형인 [[흥녕군]]보다 작위가 높다는 이유로 스스로 사양하고 받지 않다가, 형 흥녕군이 현록대부로 승진하자 그해 [[10월 20일]] 소의대부로 승진하고, 군의 품계를 받았다. [[1834년]](순조 34년) [[11월]] [[순조]]가 죽자 그의 능침 조성 때 [[수릉관]](守陵官)으로 참여하였다. 헌종 즉위 후 [[1835년]] 연주 도감(練主都監) 수릉관에 임명되었으며, 남연군의 3년 상을 마친 후 헌종 연간에 동지정사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고종 즉위 후, [[1863년]] [[12월]] 판[[종정경]]부사에 임명되고, [[조선 철종|철종]]의 빈전에 종척집사(宗戚執事)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였다.
         [[1864년]](고종 1) [[1월]] [[영희전]] 제조가 되고 3일 뒤 [[사도시]] 제조를 겸임하였으며, [[2월]] [[종묘서]] 제조, [[3월]] [[상의원]] 제조에 임명되었다. [[1865년]](고종 2) [[4월]] [[경복궁]] 중건 때 [[영건도감]]제조(營建都監提調)를 맡아보았으나, [[흥선대원군]]의 통상수교거부정책에 반대하여 반목했다. 그해 [[9월]] [[의금부]][[판사]](義禁府判事), [[호위대장]] 등을 역임했다. [[1866년]]에는 익총의 옥책문 옥보 전문 제술관(玉寶篆文書寫官)이 되고, 같은 해 고종과 명성황후의 가례 때 [[가례도감]] 당상이 되었다. 그해 [[의금부]]판사가 되었다.
         [[1873년]](고종 10년) [[흥선대원군]] 실각 직전 민씨 일파에 의해 호위 대장(扈衛大將)에 임명되었다. 이어 [[판종정경]]과 행판부사를 지냈다. 그해 [[11월 30일]]부터 [[12월 4일]]까지 중궁전의 임시 승후관(承候官)으로 특별 채용되었다. 1874년에는 교정 유사 당상(校正有司堂上)으로 [[선원보략]] 수정에 참여하였다. 그 뒤 판의금부사, 호위대장을 거쳐 [[1874년]] [[11월]] [[흥선대원군]] 실각 직후인 [[1874년]] [[12월]] [[의정부]][[좌의정]]에 올랐다. 이후 [[판종정경]]을 거쳐 [[1875년]] 영종정경이 되고, 같은 해 [[세자부]](世子傅)에 임명되었다가 1878년 세자사가 되었다가 그해 겨울 [[의정부]][[영의정]]이 되었다. 동시에 그는 문관이 아닌데도 특별히 문무과의 주시관이 되어, [[과거 시험]]을 주관하기도 했다.
         [[1880년]] [[12월]]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이 신설되자 영의정이 총리대신으로 관직이 바뀌자 초대 총리대신에 올랐다. 이때 그는 개항 정책을 추진했으나 영남 유림(儒林)의 탄핵을 당했다. 또한 그는 [[미국]]과의 조약체결 때에도 적극 참여하였다. 한편 [[1875년]](고종 12) [[11월]] 그의 집에 의문의 방화사건이 발생하였다. 사람들은 [[흥선대원군]]을 의심하였다.
  • 흥친왕
         [[1863년]] [[12월]] 동생 [[대한제국 고종|재황]]이 후사없이 죽은 [[조선 철종|철종]]의 뒤를 이어 [[조선]] 왕으로 즉위했다. 그는 바로 승후관부사용(承候官付司勇)에 제수되었다. [[1864년]](고종 1년) [[5월]] [[문과]]에 급제하여 그날로 규장각 대교(待敎)에 임명되었고, 여러 고위 관직을 거쳤다. 그해 [[8월]] 아버지 흥선대원군은 다시 그를 아들 없이 죽은 형 [[흥완군]]의 양자로 보냈다. 그러나 대왕대비 조씨의 특명으로 다른 종친의 자제를 [[흥완군]]의 양자로 하도록 하고, 이재면의 양자 입양은 취소되었다.
         대원군의 구조 요청을 비밀리에 접한 흥친왕은 배편으로 [[1884년]] [[6월]]부터 [[텐진]]의 보정부로 왕래한다. 그해 [[12월]] 그는 [[인천항]]을 출국, [[청나라]]에 유폐중이던 아버지 [[흥선대원군]]을 방문하여 위로하고, [[1883년]] [[3월]]에 일시 귀국하였다. 다시 그해 [[5월]]에 다시 [[청나라]]에 가서 [[흥선대원군]]을 봉양하다 귀국하였다.
         [[1887년]] [[12월]] 첫 부인 풍산홍씨와 사별하였다. 상처한 그는 57세에 20세인 여주이씨 이인구의 딸과 결혼하였다. 여주이씨는 그의 아들 [[이준용]]보다 13살 연하였고, 며느리인 [[광산 김씨]]보다도 5년 연하였다. 결국 [[운현궁]]의 살림은 며느리 광산 김씨의 몫이 되었다.<ref>며느리 광산 김씨 역시 아들 이준용의 재취였다.</ref>
         [[1893년]] 그는 동학 농민군이 상경하여 [[경복궁]] 앞에서 복합상소운동을 벌이는 기회를 이용하여 [[이준용]]을 왕으로 추대하려 하였다. [[정교]]는 1893년 [[2월 11일]]부터 [[2월 13일]]까지 3일간 박광호를 소두로 하는 약 50명의 동학교도들이 상경하여 궁궐 앞에서 교조 신원을 탄원하며 연좌시위를 벌인 사건을 대원군이 시킨 일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때 [[정교]]는 대원군이 은밀히 동학당 수만 명을 서울로 불러 모임을 갖고 장차 불궤를 도모하여 그의 손자 이준용을 (왕으로) 추대하려 했으나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고 하였다.<ref name="p316">오영섭 《한국 근현대사를 수놓은 인물들(1)》(오영섭 저, 2007.4, 경인문화사) 315~316쪽.</ref>
         [[명성황후]]의 국장 때 그는 종척 집사(宗戚執事)로 임명되었고, 빈전에서 왕과 왕자들이 곡을 할때 왕의 가까운 친척으로써 상복을 입고 곡하는 반열에 참여하였다. 이듬해 [[2월]] 초 궁내부 대신(宮內府大臣)을 사퇴한 뒤, 총호사(總護使)에 임명됐다가 2월 중순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퇴거, [[아관파천]]이 일어나자 파면되었다.
         * 아버지 : [[흥선대원군|흥선대원왕]](興善大院王, [[1820년]] ~ [[1898년]] [[2월]])
         * 첫째 부인 : 풍산 홍씨(豊山 洪氏, [[1844년]] [[4월 8일]] ~ [[1887년]] [[12월 19일]]), [[통덕랑]](通德郞) 풍산인(豊山人) [[홍병주]](洪秉周)의 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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