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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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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근혜 . . . . 102회 일치
         |취임일 = 2013년 2월 25일
         '''박근혜'''(朴槿惠<ref>{{헌정회|2530}}</ref>, [[1952년]] [[2월 2일]] ~ )는 [[대한민국]]의 제18대 [[대한민국의 대통령|대통령]]이다.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자, 최초로 탄핵된 대통령이다.<ref group="주">1925년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서 탄핵된 [[이승만]] 대통령까지 포함할 경우 역사상 두 번째로 탄핵된 대통령이다.</ref>
         2011년 12월부터는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장을 지내며 당 혁신 작업을 지휘하였고 2012년 [[대한민국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제19대 총선]]을 승리로 이끌었다. 이후 새누리당의 대통령 선거 후보로 선출되어 2012년 12월 19일 실시된 [[대한민국 제18대 대통령 선거|제18대 대선]]에서 득표율 51.6%로 48.0%를 득표한 [[민주통합당]]의 [[문재인]] 후보를 누르고 당선,<ref>[18대 대통령 박근혜] 박근혜 득표율 51.6%, 조선일보 2012.12.21</ref> 2013년 2월 25일 대한민국의 제18대 대통령으로 취임하였다. 이로써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자 1987년 [[대한민국 헌법]] 개정 이후 최초 과반 득표 대통령, 최초 이공계 출신 대통령, 최초 독신 대통령, 최초 부녀 대통령으로 기록되었다.<ref>[http://www.asiatoday.co.kr/news/view.asp?seq=743473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의 신기록들] 아시아투데이 (2012년 12월 20일)</ref>
         재임 직후부터 [[국정원 댓글 사건|국정원 대선 개입 사건]]이라는 위기를 맞으며 국정을 본 박근혜는 임기 중 [[세월호 침몰 사고|세월호 참사]], [[메르스 사태]] 등 국가적 재난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해 국민의 불안감을 증폭시켰고, [[창조경제]]를 위시한 추진한 정책 다수가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을 뿐더러, 미숙한 국정운영과 불통 논란 등으로 숱한 비판을 받았다. 그러다 2016년 말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터져 민간인의 국정 개입 사실이 낱낱이 폭로되면서 2016년 12월 3일 [[대한민국 국회]]에 [[박근혜 대통령 탄핵|《대통령(박근혜) 탄핵소추안》]]이 발의<ref name="impeachment" />되어 12월 9일 대한민국 헌정사상 두 번째로 국회에서 탄핵소추안이 가결, 대통령 직무가 정지되었다.<ref>{{뉴스 인용|저자=주영재·허남설|제목=[속보]박근혜 대통령 탄핵소추안 가결···찬성 234·반대 56·무효 7·기권 2|url=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612091610001|뉴스=[[경향신문]]|날짜=2016.12.09 16:10:00}}</ref>
         박근혜는 [[1952년]] [[2월 2일]]에 [[대구광역시]] [[중구 (대구광역시)|중구]] 에서 전시(戰時) 대구 주재 [[육군본부]] 작전‧교육국 작전차장 [[박정희]] 대령과 중등학교 교사 출신인 그의 부인 [[육영수]]의 딸로 태어났다. 현재 이에는 돈부리집이 있는 상가가 위치해 있다.<ref name="kys">[[강용석의 고소한 19]] 1화</ref> 어머니 [[육영수]]에게는 첫 소생이었으나 아버지 박정희는 이혼 경력과 전처소생의 장녀 [[박재옥]]이 있었으므로 박정희에게는 차녀가 된다. 형제로는 이복언니 박재옥이 있고 동복동생인 여동생 [[박근령]]과 남동생 [[박지만]]이 있다.
         [[서울장충초등학교]]에 입학하여 [[1964년]] 2월 졸업하였으며, [[정몽준]] 전 국회의원과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이 그의 초등학교 동창이다.<ref>[http://news.mt.co.kr/view/mtview.php?no=2011091114473659729&type=1&outlink=2&EVEC 초등 동창 박근혜-정몽준, 대선 앞둔 지금은?]</ref><ref>[http://weekly.khan.co.kr/khnm.html?mode=view&artid=19416&code=113 정몽준-박근혜 ‘외나무다리’ 만날까 - 위클리경향 814호]</ref> 그 뒤, 카톨릭계 미션스쿨인를 거쳐로 진학하였으며, [[1970년]] [[서강대학교]] [[공과대학]] [[전자공학]]과에 진학하여 [[1974년]]에 졸업하였다. 같은 해 프랑스 [[그르노블대학교]]에 입학하였다.
         박근혜는 [[1997년]] [[12월 2일]] 사촌 오빠 [[박재홍 (1941년)|박재홍]]의 소개로 [[한나라당]]의 [[대한민국 제15대 대통령 선거|제15대 대통령 선거]] 후보였던 [[이회창]]과 만났다. 이후 [[1997년]] [[12월 10일]] [[대한민국 제15대 대통령 선거|제15대 대통령 선거]] 이회창 지지를 선언하며 한나라당에 입당하였다. 이후 이회창의 권유로 [[1998년]] [[4월 2일]] 한나라당의 후보로 [[대구광역시]] [[달성군]]의 국회의원 [[보궐선거]]에서 당선되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딸이라는 점과 미혼 여성 정치인이라는 점 등으로 많은 주목을 받았다. 출신 성분은 아버지인 박정희 전 대통령을 지지하는 보수 진영 및 영남, 어머니인 [[육영수]]의 고향인 충청 지역의 지지를 얻는 데 유리하게 작용하였다.
         이후 [[2000년]] 한나라당의 부총재로 선출되었지만 [[2002년]] 2월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이회창]]을 비판하며 한나라당에서 탈당하였다. 이후 [[한국미래연합]]을 창당<ref>[http://article.joinsmsn.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1158351&ctg=10 한국미래연합 창당…대표 박근혜의원 - 2002-05-17 중앙일보]</ref> 하였으나 대선 전에 복귀하였다. [[2002년]] [[5월 12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방문, [[5월 13일]]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만나 회담을 하고<ref name="visit_NK">{{웹 인용 |url=http://www.voanews.com/Korean/archive/2002-05/a-2002-05-14-12-1.cfm |제목=박근혜 의원, 북한방문 마치고 서울로 귀환 - 2002-05-14<!-- 봇이 붙인 제목 --> |확인날짜=2009-02-10 |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060722010557/http://www.voanews.com/Korean/archive/2002-05/a-2002-05-14-12-1.cfm |보존날짜=2006-07-22 |깨진링크=예 }}</ref> [[5월 14일]] 서울특별시로 돌아왔다.<ref name="visit_NK"/>
         [[2005년]] 12월 여당인 [[열린우리당]]은 [[사립학교법]] 개정안을 [[직권상정]]하여 처리하였다. 당시 대표인 박근혜는 곧바로 장외 투쟁을 선언하고 거리로 나섰다. 당시 한나라당 내부에조차 회의적인 시선이 많았다. "한나라당이 무슨 장외 투쟁이냐"라는 비아냥도 있었고, 국회 등원에 대한 여론의 압박도 심했다. 하지만 박근혜 대표는 장외 투쟁을 계속했고, 결국 여야는 한나라당의 장외 투쟁 3개월 만에 사학법 재개정 논의에 합의하게 된다. 박근혜 대표는 주변의 반대와 원외 투쟁에 소극적인 한나라당의 체질이라는 문제에도 불구하고, 사학법 재개정을 이끌어낸 것으로 평가되었다. 2004년 17대 총선의 '한나라당 천막 당사' 역시 "쇼 아니냐"라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한나라당의 상징물로 기억됐다.<ref>[http://media.paran.com/snews/newsview.php?dirnews=527709&year=2010 MB·박근혜 '세종시' 문제 왜 타협 못할까]{{깨진 링크|url=http://media.paran.com/snews/newsview.php?dirnews=527709&year=2010 }}</ref>
         대한민국 제18대 국회에서 2009년 12월 29일에 대한민국 정부가 혼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결혼 이민자, 대한민국에 특별한 공로가 있거나, 우수 외국 인재로서 특별귀화한 자, 국적 회복 허가를 받은 자로서 특별한 공로가 있거나, 우수 외국 인재로 인정되는 자, 해외 입양 되었다가 우리 국적을 회복한 자, 그리고 외국에 장기 거주하다가 국내에 영주 귀국하여 대한민국 국적을 회복한 65세 이상의 자들을 대상으로 [[복수 국적]]을 제한적으로 허용하기 위하여 발의한 국적법 일부개정법률안(의안번호 1807200)의 수정가결에 찬성하였다.<ref>[http://likms.assembly.go.kr/kms_data/record/data2/289/pdf/289za0008b.PDF "제 289회국회-제8차 (임시회) 국회본회의회의록"]</ref>
         대한민국 제18대 국회에서 2009년 2월 5일에 대한민국 헌법 제24조에도 불구하고 해외에 거주하는 약 240만명 대한민국 국민의 금지되었던 [[재외국민]] 참정권을 회복하기 위하여 발의된 공직선거법 일부개정법률안(대안) (의안번호 1803725), 주민투표법 일부개정법률안 (의안번호1803724), 그리고 국민투표법 일부개정법률안(의안번호 1800737)에 모두 찬성하였다.<ref>[http://www.donga.com/fbin/output?n=200902050342 재외국민 투표 허용 법안 국회 통과 ] <<[[동아일보]]>> 2009-05-25 작성</ref><ref>[http://likms.assembly.go.kr/kms_data/record/data2/281/pdf/281za0004b.PDF "제 281회국회-제4차 (임시회) 국회본회의회의록"]</ref>
         박근혜는 [[2010년]]에 있었던 [[대한민국 제5회 지방 선거|지방 선거]]에서 [[대구광역시]] [[달성군|달성군수]]로 출마했던 한나라당의 이석원 후보를 적극적으로 지원하였지만 이석원 후보는 무소속의 김문호 후보에게 패배하였다. 박근혜는 "달성군민이 판단한 것도 존중한다"고만 입장을 밝혔다.<ref>[http://news.mk.co.kr/outside/view.php?year=2010&no=286840 상처입은`선거의 여왕 박근혜, 침묵 끝 한마디] {{웨이백|url=http://news.mk.co.kr/outside/view.php?year=2010&no=286840 |date=20100607172404 }} 매일경제 2010년 6월 3일</ref> 차기 대선 후보로써의 지지율은 사상 최저치로 떨어져 25.1%를 기록하는 등 박근혜의 정치적 입지가 점점 좁아지자<ref>(http://www.ccdailynews.com/section/?knum=152755 박근혜 지지율 2.3% 하락) 충청일보 2010년 6월 3일</ref> 박근혜는 2010년 하반기부터 차기 대선 행보에 초점을 두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12월 20일 열린 공청회에서 복지를 화두로 토론을 진행하였다. 박근혜는 인사말을 통해 "서구 선진국들의 전통적 복지제도가 한계에 이르렀다"며 맞춤식 생활 보장형 복지 국가를 제안하였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214&aid=0000163860 박근혜 대권 행보 시작‥공청회 '대선출정식' 방불] mbc 2010년 12월 20일</ref> 이후 12월 27일 박근혜의 대선 구상을 내놓을 '국가미래연구원'이 출범했다. 출범식에는 대한민국 내 학자들과 [[이한구 (정치인)|이한구]] 한나라당 의원 등이 참석했다.<ref>[http://imnews.imbc.com/replay/nwdesk/article/2767079_5780.html 박근혜, 빨라진 대권 행보‥'싱크탱크' 출범] {{웨이백|url=http://imnews.imbc.com/replay/nwdesk/article/2767079_5780.html |date=20130927121326 }} mbc 2010년 12월 27일</ref> 그러나 [[심재철 (1958년)|심재철]] 한나라당 의원은 "복지를 늘리려면 세금을 더 거둬야 하는데 그 얘기는 감추고 무조건 복지만 잘해주겠다고 하는 것은 솔직하지 못한 태도"라고 비판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214&aid=0000164333 한나라당 심재철 "박근혜 복지, 솔직하지 못해"] mbc 2010년 12월 25일</ref>
         [[2011년]] [[12월 9일]] [[홍준표]] 한나라당 대표가 디도스 파문을 못 이기고 사퇴하자, 한나라당은 한나라당 전 대표인 박근혜를 당 비상대책위원장으로 선출하였다. 박근혜 비대위원장은 수락 연설에서 “집권 여당으로서 국민의 아픈 곳을 보지 못하고 삶을 제대로 챙겨드리지 못한 데 대해 진심으로 사죄한다”며 “이제 바꿔야 한다. 그동안 한나라당과 우리 정치권 모두 국민만 바라보지 않고, 정치를 위한 정치를 해왔다”며 “정치권 전체가 국민의 불신을 받는 이런 상황이 계속된다면, 앞으로 더 큰 국가적 위기를 맞게 될 것”이라고 말해 위기의 심각성을 강조하였다.
         비상대책위원장 선출 1달 후인 [[2012년]] [[1월 25일]] 박근혜는 당명 변경을 선언하였다. 새 당명 국민 공모 이후 2012년 2월 2일 박근혜는 [[새누리당]]으로 당명을 변경하겠다고 선언하였고 2012년 2월 13일 한나라당에서 새누리당으로 당명을 변경하였다. 이로써 한나라당은 14년 3개월만에 역사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또한 당의 당헌, 당규를 개정하였다. 이후 박근혜는 제19대 총선 대비를 하였고 3월 20일 박근혜 비대위원장은 총선을 22일 앞두고 중앙선거대책위원장에 추대되었다.
         당시 정몽준과 이재오가 당내 경선에 불만을 품으며 경선 불출마를 선언하였다. 박근혜는 [[2012년]] [[8월 20일]] [[새누리당]] 전당 대회에서 12월 19일 18대 대통령 선거에 나설 새누리당 후보로 선출되었다.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박근혜의 득표율은 전체 유효투표의 83.97%인 8만 6천 589표로 지난 2002년 경선 당시 이회창 후보가 얻은 68%인 기존의 최고 기록을 갱신하였으나 경선 투표율이 41%로 역대 최저 투표율을 기록하였다. 대한민국 정당 역사상 유력 정당의 첫 여성 후보이자 전직 대통령의 자녀가 대선 후보가 되는 첫 사례이기도 했다.<ref>[http://media.daum.net/society/nation/seoul/view.html?cateid=100004&newsid=20120820162306691&p=yonhap] 심인성 기자, 박근혜, 84% 최고득표율로 與대선후보 확정(종합), 연합뉴스, 2012.8.20.</ref> 한편 박근혜는 2002년 한나라당 제16대 대선 후보 경선 출마 선언 10년 후에 대선 후보로 선출되는데 성공하였다. 박근혜는 "준비된 여성대통령"을 모토로 내걸었다.
         한편 선거 기간 중이던 2012년 11월 22일 무소속 이건개 후보가 박근혜에 대한 지지를 선언, 사퇴하였다. 이튿날 무소속 [[안철수]] 후보 역시 [[민주통합당]] [[문재인]] 후보를 지지하며 사퇴, 단일화를 이뤄냈다. 이후 후보로 등록하였으며 기호 1번을 차지하게 되었다. [[2012년]] [[11월 25일]] 국회의원직 사퇴 기자회견을 갖고 사직서를 제출하였다. 이후 [[2012년]] [[12월 10일]] 박근혜는 대통령 선거에서 패배하면 정계를 은퇴하겠다고 선언하였고, 국회의원직 사직서를 [[강창희 (1946년)|강창희]] [[국회의장]]이 수리함에 따라 박근혜 후보는 15년간의 의정 활동을 마치게 되었다.
         박근혜 후보는 안철수 전 후보가 [[문재인]] [[민주통합당]] 후보의 지지 유세를 함으로써 고비를 맞았지만, 지지층 및 여론의 굳건한 지지를 받으며 대선 기간 중 시행된 거의 모든 여론조사에서 지속적으로 1위를 기록하였다. 한편 대통령 선거 후반에 국정원 여직원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민주통합당]]은 2012년 12월 11일 [[국가정보원]] 소속 심리정보국 공무원들이 국가정보원의 지시에 따라 인터넷에 게시글을 남겨서 선거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공개했다. 이어서 해당 활동에 참여한 국가정보원 직원중 1명을 지목했다. 그러나 해당 직원은 오피스텔에서 경찰과의 대치 과정에서 나오지 않았고 그런 일을 한 적이 없다고 주장하였다. 결국 경찰은 수사에 들어갔으나, 국가정보원 요원은 전화를 통해 자신이 항상 정치적 중립을 지키고 있으며 대선과 관련한 어떤 글도 인터넷에 올린 적이 없다고 주장했다.<ref>조혜령,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79&aid=0002422919 국정원 직원 "문재인 후보 비방 댓글 단 적 없다"], 노컷뉴스, 2012년 12월 12일</ref>
         2012년 [[12월 13일]], 해당 요원은 경찰청에 임의 제출 형식으로 자료를 제출하였지만<ref>노현승,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421&aid=0000092711 '비방 댓글' 의혹 국정원 여직원, 경찰에 자료 임의제출], 뉴스원, 2012년 12월 13일</ref> 경찰과 선거관리위원회의 휴대전화와 이동식 저장장치 제출요청은 거부하였다.<ref>김동현, [http://www.yonhapnews.co.kr/vote2012/2012/12/13/2901010000AKR20121213161051004.HTML '국정원 女직원, 컴퓨터 등 증거자료 경찰에 제출(종합)], 연합뉴스 2012년 12월 13일</ref> 한편 민주통합당은 해당 조직의 실체와 업무 내용을 밝힐 것을 요구했다.<ref>정찬, [http://www.poli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64054 민주 "국정원 심리정보국 70여명 조직적으로 여론조작"], 폴리뉴스, 2012년 12월 12일</ref>
         한편 이른바 '국정원 직원 사건'에 대하여 새누리당 측은 반발하였고, [[윤정훈]] 목사가 운영하였다고 하는 새누리당측의 SNS 여론 조작 그룹인 [[십알단]] 연루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다. 12월 13일 영등포구 여의도동의 한 오피스텔에서 새누리당 관계자로 추정되는 인물들이 PC여러대로 작업하는 장면이 선관위에 의해 포착했다. 이곳에서는 박근혜 명의의 임명장과 새누리당 SNS 미디어본부장 명함이 발견됐다.<ref>이혜미,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112&aid=0002373449 朴 여론조작 불법사무소 '덜미', 현장 보니…], 헤럴드경제, 2012년 12월 13일</ref>
         박근혜 후보는 중앙선관위 주최의 대통령선거 후보자 TV토론회에 민주통합당 문재인, 통합진보당 [[이정희 (1969년)|이정희]] 후보와 함께 참석하였다. 당시 이정희 후보는 "박근혜 떨어뜨리려 나왔다" 등의 발언을 하는 등, 박근혜 후보에 대하여 노골적인 공격을 하였고, 시청자들의 눈쌀을 찌푸리게 하였다. 이로 인하여 대선 후보 토론회에 지지율 1% 후보(이정희)가 참여하는 것이 적합한지에 대한 논란이 빚어지기도 했다. 1차, 2차 TV 토론회에는 박근혜·문재인·이정희 후보가 참여해 치열한 공방을 주고받았다, 선거 막판인 12월 16일 [[이정희 (1969년)|이정희]]가 후보 사퇴함에 따라 같은 날 오후 시행된 토론회에는 박근혜, 문재인 후보가 참석하였고, 양자토론을 가졌다. 이후 박근혜는 [[2012년]] [[12월 19일]] [[대한민국 제18대 대통령 선거|제18대 대통령 선거]]에서 1577만 3128표를 득표하여 문재인을 누르고 당선되었다.<ref>[http://news.chosun.com/choice1219/choice1219_now.html 제18대 대통령 선거]</ref> 박근혜의 임기는 원래 [[2013년]] [[2월 25일]]부터 [[2018년]] [[2월 24일]]까지였으나, [[2017년]] [[3월 10일]] [[대한민국 헌법재판소|헌법재판소]]의 [[박근혜 대통령 탄핵 소추|탄핵소추안]] 인용 결정에 따라 대통령직에서 파면되어 임기를 못 채우고 물러나게 되었다.
  • 정형돈 . . . . 81회 일치
         '''정형돈'''([[1978년]] [[2월 7일]]<ref>[https://entertain.v.daum.net/v/20160730070104091 정형돈, "시간을 최대한 활용해야 하는 시기"]</ref><ref>[https://www.fncent.com/JHD/b/introduce/10713 음력 1978년 2월 7일, 양력 1978년 3월 15일]</ref> ~ )은 [[대한민국]]의 [[희극 배우|희극인]], [[사회자]]이다. 본관은 [[동래 정씨|동래]].
         [[2012년]] [[12월 11일]] 오전 6시11분, 13분에 태어난 두 딸(유주, 유하)의 아버지가 되었다.<ref>{{뉴스 인용|제목=[단독] 정형돈, 쌍둥이 아빠 되다.. 딸부자 등극|url=http://cast.wowtv.co.kr/20121211/A201212110127.html|출판사=|저자=한국경제TV 기자|날짜=2011-12-11|확인날짜=2012-12-11|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121214052956/http://cast.wowtv.co.kr/20121211/A201212110127.html|보존날짜=2012-12-14|깨진링크=예}}</ref> [[2016년]] [[10월 5일]], [[주간 아이돌]]로 전격 복귀하였으며, [[신현준 (1968년)|신현준]]과 한중 합작 영화 시나리오 공동 집필을 시작으로 작가로서의 데뷔를 알렸다.
         * [[KBS]] 《연예대상 (12월 27일) : 수상자》
         * [[KBS]] 《체험 삶의 현장 516회 (2월 8일) : 게스트》
         * [[KBS]] 《가족오락관 991, 1024회 (4월 17일, 12월 25일) : 게스트》
         * [[SBS]] 《즐겨찾기 33회 (12월 14일) : 게스트》
         * [[KBS]] 《연예대상 (12월 25일) : 수상자》
         * [[SBS]] 《아이엠 15회 (2월 4일) : 게스트》
         * [[MBC]] 《일밤 806, 808회 - 브레인 서바이버 (2월 13일, 27일) : 게스트》
         * [[KBS]] 《스타골든벨 17회 (2월 27일) : 게스트》
         * [[MBC]] 《창사 특집 - 스타장악퀴즈쇼 (12월 3일) : 게스트》
         * [[MBC]] 《방송연예대상 (12월 29일) : 시상자 및 수상자》
         * [[SBS]] 《야심만만 190회 (12월 11일) : 게스트》
         * [[KBS]] 《쇼! 파워비디오 290회 (12월 17일) : 미션 도전》
         * [[MBC]] 《에너지 7회 (12월 21일) : 게스트》
         * [[MBC]] 《방송연예대상 (12월 29일) : 후보자》
         * [[MBC]] 《말달리자 37회 (2월 4일) : 인터뷰》
         * [[MBC]] 《에너지 15회 (2월 15일) : 인터뷰》
         * [[MBC]] 《말달리자 40회 (2월 25일) : 게스트》
         * [[SBS]] 《놀라운 대회 스타킹 45회 (12월 8일) : 게스트》
  • 송병구 . . . . 80회 일치
         이후 프로리그 1라운드 포스트시즌에서는 [[원이삭]]을 상대로 승리하기도 했으며 2라운드에서 김준호와 이영호를 꺾는 등 2014년 2월 프로리그 3연승을 기록, 좋은 분위기를 이끌어내고 있다. 2014년 첫 GSL 예선전도 통과하며, 송병구의 2014년은 난관없이 잘 풀려가고 있다. 특히 5월에 들어 ESTV CUP 에서 우승을 하였으며 프로리그 3라운드 SK텔레콤과의 경기에서 2승을 거두며 3라운드 SK텔레콤의 전승을 막았다.
         * 2011년 12월 17일 SK플래닛 프로리그 11~12 시즌1 1R 삼성전자 vs SK텔레콤 1세트 송병구 승
         * 2011년 2월 28일 신한은행 프로리그 10~11 4R 삼성전자 vs SK텔레콤 5세트 송병구 승
         * 2009년 12월 14일 신한은행 프로리그 09~10 2R 삼성전자 vs SKT 5세트 송병구 승
         * 2009년 2월 4일 바투 08~09 16강 A조 1경기 김택용 승
         * 2008년 12월 20일 신한은행 프로리그 08~09 2R 삼성전자 vs SKT 김택용 승
         * 2008년 12월 7일 IEF 2008 결승전 3경기 김택용 승
         * 2008년 12월 7일 IEF 2008 결승전 2경기 송병구 승
         * 2008년 12월 7일 IEF 2008 결승전 1경기 김택용 승
         * 2007년 12월 14일 EVER 2007 4강 B조 3경기 송병구 승
         * 2007년 12월 14일 EVER 2007 4강 B조 2경기 송병구 승
         * 2007년 12월 14일 EVER 2007 4강 B조 1경기 송병구 승
         * 2010년 02월 20일 신한은행 프로리그 09~10 3R 삼성전자 vs 화승 7세트 송병구 승
         * 2007년 12월 22일 EVER 2007 결승전 4경기 이제동 승
         * 2007년 12월 22일 EVER 2007 결승전 3경기 이제동 승
         * 2007년 12월 22일 EVER 2007 결승전 2경기 이제동 승
         * 2007년 12월 22일 EVER 2007 결승전 1경기 송병구 승
         * 2008년 2월 1일 박카스 스타리그 2008 16강 B조 6경기 송병구 승
         * 2008년 12월 14일 신한은행 프로리그 08-09 2라운드 삼성전자 vs KTF 1세트 송병구 승
         * 2009년 12월 2일 에버 스타리그 2009 16강 D조 3경기 송병구 승
  • 김형준(배우,가수) . . . . 50회 일치
         (2017년 4월 6일 ~ 2018년 12월 29일[* 원래 2019년 1월 5일 전역 예정이었다. 그러나 군 복무 기간 단축 시행으로 인하여 7일이 줄었다. [[https://youtu.be/-i5oWnF_f30|경기남부경찰청 페이스북 라이브 2018년 8월 6일 방송]]에서 본인의 소감을 들을 수 있다. 01:14:27부터. ~~너↗어무 좋아요 진짜아!~~])||
          * 12월 19일, 26일 SS501 전원과 함께 스쿨 오브락에 출연했다.
          * 12월 24일부터 2006년 2월 4일까지 [[SS501의 깨워줘서 고마워]]에 출연했다.
          * 12월 25일 X맨에 출연했다.
          * 12월 25일 박정민과 함께 일요스타워즈에 출연했다.
          * 1월 19일부터 2월 16일까지 SS501의 스토커에 출연했다.
          * 2월 5일, 12일에는 김현중과 19일에는 박정민과 함께 여걸식스에 출연했다.
          * 2월 11일부터 3월 25일까지 [[SS501의 키워줘서 고마워]]에 출연했다.
          * 11월 1일부터 12월 6일까지 SS501의 SOS에 출연했다.
          * 12월 17일, 24일 김현중과 함께 여걸식스에 출연했다.
          * 12월 2일 김현중, 허영생, 김규종과 함께 스타 골든벨에 출연했다.
          * 12월 9일 SS501 전원이 [[무한도전]] 무한소년체전에 출연했다.
          * 2월 2일 SS501 전원과 함께 기분좋은날에 출연했다
          * 2월 3일 허영생과 함께 스타 골든벨에 출연했다. 귀여운 고양이 머리띠를 쓰고 허영생과 함께 [[핑클]]의 '내 남자 친구에게'를 반주도 없이 생라이브를 불렀다.
          * 2월 4일 허영생과 함께 60년대 교복을 입고 도전천곡에 출연했다. 전람회 '취중진담'를 불렀다. 결승전까지 올라 갔지만 가사 실수로 패배했다.
          * 2월 4일 뮤직뱅크 400일날 [[하하(가수)|하하]], [[이루(가수)|이루]], [[브라이언(플라이 투 더 스카이)|브라이언]]과 함께 [[핑클]]의 '내 남자 친구에게를 불렀다. [[https://vimeo.com/27080184|#]]
          * 2월 10일 허영생과 함께 쇼! 뮤직탱크 MC를 진행했다.
          * 12월 3일 김규종과 함께 스친소에 출연했다.
          * 12월 8일 허영생, 김규종과 함께 [[소년소녀가요백서]]에 출연했다.
          * 12월 10일 허영생, 김규종과 함께 안성종합고등학교를 찾아가 스쿨 오브락에 출연했다.
  • 이선희 . . . . 50회 일치
         '''이선희'''(李仙姬, [[1964년]] [[12월 14일]]([[1964년]] [[음력 11월 11일]]) ~ )는 [[대한민국]]의 [[가수]] 겸 [[작사가]]이고 [[작곡가]]이다.
         이후 한때 1995년 12월 6일에서 1996년 2월 17일까지 [[새정치국민회의]] 문화예술행정특보위원 직위에 보임되어 잠시 활약하였으며 [[새정치국민회의|국민회의]] 탈당 직후 1996년 3월 21일에서 1996년 6월 1일까지 [[민주당 (대한민국, 1995년)|통합민주당]] 문화예술행정특보위원 직위에 보임되어 활약하였고 [[민주당 (대한민국, 1995년)|통합민주당]] 탈당 직후 1996년 10월 발표한 10집 《First Love》(대표곡 <라일락이 질 때>)는 모든 노래의 작사, 작곡에 직접 참여하였다. <회색 도시>는 락의 느낌으로, <성안의 아이>는 몽환적인 느낌으로 팬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또한 <아카라카치>는 삶에 희망을 주는 메시지를 담고 응원 구호를 접목시키며 가창력까지 돋보이게 해 응원가로도 쓰인다. 이 앨범 이후로 이선희는 싱어송라이터의 면모도 보여 주기 시작했다.
         [[2011년]] [[2월 3일]]에 세계적인 가수들만 설 수 있다는 뉴욕 카네기홀 중에서도 가장 큰 메인공연장인 '아이작 스턴 오디토리움'에서 대한민국 대중가수로는 3번째로 단독 공연을 가졌다.<ref>{{뉴스 인용
         * 1995년 《[[뮤지컬 오즈의 마법사]]》 E. Y. 하버그 작사/해럴드 엘런 작곡
         * 1995년 《[[이선희 데뷔 10주년 세종문화회관 라이브]]》
         * 1995년 《[[이선희 베스트]]》
         * [[12월 30일]] [[KBS 가요대상]] 신인상 수상
         * [[12월 31일]] [[MBC 10대 가수 가요제]] 최고 인기 가요상('J에게'), 신인상, 10대 가수상 수상 (역대 최초 3관왕)
         * [[2월 1일]] [1집 앨범] '아! 옛날이여' 출반 (지구레코드)
         * [[12월 30일]] [[KBS 가요대상]] 올해의 대상 수상
         * [[12월 31일]] [[MBC 10대 가수 가요제]] 10대 가수상 수상 (2회 연속)
         * [[2월 23일]] '괜찮아' TV가이드, 뮤직박스 차트 1위
         * [[12월 7일]] 일간스포츠 [[골든 디스크|골든디스크상]] 수상
         * [[12월 30일]] [[KBS 가요대상]] 올해의 가수상 수상 (2회 연속)
         * [[12월 30일]] [[MBC 10대 가수 가요제]] 10대 가수상 수상 (3회 연속)
         * [[12월 30일]] [3집 앨범] '알고 싶어요' 출반 (지구레코드)
         * [[12월 7일]] 일간스포츠 [[골든 디스크|골든디스크상]] 수상 (2회 연속)
         * [[12월 12일]] 가배상 수상 (3회 연속)
         * [[12월 30일]] [[MBC 가요대제전]] 최고 인기 가요('알고 싶어요') 선정
         * [[12월 30일]] [[KBS 가요대상]] 올해의 가수상 수상 (3회 연속)
  • 정용화 . . . . 49회 일치
         * [[2010년]] [[1월 14일]] 락밴드 씨엔블루(CNBLUE)의 리더로 팀 안에서 보컬과 기타와 랩을 맡아, [[bluetory]]<ref name="album1">[http://starin.edaily.co.kr/news/NewsRead.edySCD=EA31&newsid=01315286592871176&DCD=A10102 씨엔블루, '씨엔블루토리'서 1집 전곡 첫 라이브 연주]{{깨진 링크|url=http://starin.edaily.co.kr/news/NewsRead.edySCD%3DEA31%26newsid%3D01315286592871176%26DCD%3DA10102 }}《이데일리스타in》, 2010년 2월 16일 작성.</ref> 음반 발매와 함께 가수 활동을 시작하였다. 수건남 효과에 힘입어 첫 방송후 각종 차트를 올킬하였으며,<ref name="all">[http://news.jkn.co.kr/article/news/20100117/6857237.htm “블루돌풍” CNBLUE, 첫 방송후 각종 차트 ‘올킬’]《재경일보》2010.01.17 작성.</ref> 한국 가요계에서 신인이 데뷔 후 14일만에 1위를 하는 기록을 세웠다.<ref name="chleks">[http://news.jkn.co.kr/article/news/20100129/7708991.htm 씨엔블루, 최단기간 1위 기록 세우며 정상 등극! ]《재경일보》2010.01.29 작성.</ref> 이는 지상파 데뷔 최단 기간 1위 기록이었지만 위너 이후에 기록이 깨졌다.* [[2010년]] [[5월 19일]], 씨엔블루는 두 번째 미니 앨범 《[[Bluelove]]》를 발매하였다.<ref>{{뉴스 인용
         * [[2009년]] [[12월 6일]]부터 [[2010년]] [[3월]]까지 [[문화방송|MBC]] 《[[우리들의 일밤|일요일 일요일 밤에]] - [[헌터스]] : [[헌터스|에코하우스]]》를 시작으로 예능활동을 시작하였다. [[2010년]] [[2월]]부터 [[2011년]] [[4월]]까지 [[문화방송|MBC]] 《[[우리 결혼했어요]] 시즌 2》에 고정출연하였고, [[2010년]] [[7월]]부터 [[2011년]] [[3월]]까지는 [[SBS]] 《[[인기가요]]》 [[사회자|MC]]를 맡았다.<ref name="ingi">[http://seoulntn.com/cindex.php?c=news&m=view&idx=41989 정용화-조권, '인기가요' 새 MC 발탁..'관심집중'], 《서울신문NTN》, 2010년 7월 18일 작성.</ref> 또한, [[2009년]], [[2010년]] 2년 연속 《[[SBS 가요대전]]》 MC로 활동하였다.<ref name="gayo1" /><ref name="gayo2" /> 이러한 고정 출연 외에도 [[황금어장]], [[런닝맨]] -게스트로 최다출연기록을 세웠다, [[강심장]], [[명받았습니다]], [[승승장구]], [[놀러와]], [[해피투게더 (텔레비전 프로그램)|해피투게더]], [[청춘불패]], [[대국민 토크쇼 안녕하세요]] 등 여러 예능 프로그램에 게스트로 출연하였다.
         * [[2011년]] [[12월 4일]]을 시작으로 일본에서 겨울투어를 실시하여, [[12월 4일]] 센다이, [[12월 6일]] 나고야, [[12월 14일]] 오사카, 그리고 [[12월 16일]] 도쿄에서 일본 전국 투어를 실시하였다.<ref>{{뉴스 인용|제목= 씨엔블루, 日 전국투어 마지막 공연 13000명 동원 ‘1분 만에 티켓 매진'|url=http://wstarnews.hankyung.com/apps/news?popup=0&nid=01&c1=01&c2=01&c3=00&nkey=201112191637321&mode=sub_view|출판사 = 한국경제연예|날짜 = [[2011년]] [[12월 19일]]}}</ref>
         * [[2011년]][[12월 28일]]에 일본에서 매년 연말 개최되는 Music Festival 'COUNTDOWN JAPAN'에 외국인 최초로 출연하였다.<ref>{{뉴스 인용 |제목= 씨엔블루(CNBLUE), 일본 락 페스티벌 'COUNTDOWN JAPAN' 외국인 최초 출연 |url= http://www.topstarnews.net/n_news/news/view.html?no=4208 |출판사= TOP스타 뉴스 |날짜= [[2011년]] [[11월 18일]] |확인날짜= 2012년 8월 19일 |보존url= https://web.archive.org/web/20130120220609/http://topstarnews.net/n_news/news/view.html?no=4208 |보존날짜= 2013년 1월 20일 |깨진링크= 예 }}</ref><ref>{{뉴스 인용|제목= 씨엔블루, 日 연말 최대 록축제 외국인 최초 출연|url=http://sports.hankooki.com/lpage/music/201111/sp2011111809264695510.htm|출판사 = 스포츠한국|날짜 = [[2011년]] [[11월 18일]]}}</ref>
         * [[2012년]] [[1월 31일]] 일본 MTV '언플러그드' 출연하였다. 이 프로그램은 어쿠스틱한 연주와 청중과의 가까운 거리를 유지한 무대 등 라이브를 진행하는 것으로 유명하다.<ref>{{뉴스 인용|제목= 씨엔블루, 韓 가수 최초로 日 MTV '언플러그드' 출연|url=http://joynews.inews24.com/php/news_view.php?g_menu=700300&g_serial=634129&rrf=nv|출판사 = 조이뉴스24|날짜 = [[2012년]] [[2월 1일]]}}</ref> 또한, 수용인원 150명에 응모인원만 1만 5천여명이 응모하여 100배의 응모 수를 기록했다.<ref>{{뉴스 인용|제목= 씨엔블루, 日MTV ‘언플러그드’ 출연…티켓 응모 ‘정원의 100배’ 기염|url= http://www.eto.co.kr/news/outview.asp?Code=20120201170502960&ts=95729|출판사= 경제투데이|날짜= [[2012년]] [[2월 1일]]|확인날짜= 2012년 8월 19일|보존url= https://web.archive.org/web/20160304124520/http://www.eto.co.kr/news/outview.asp?Code=20120201170502960&ts=95729|보존날짜= 2016년 3월 4일|깨진링크= 예}}</ref>
         * [[2012년]] [[2월 1일]]에 일본에서 두 번째 싱글앨범인 ''[[Where you are]]''를 발매하였고 타이틀인 "Where you are"를 작사 및 작곡하고 "feeling" 작사 및 작곡, "Where you are(Inst.)" 작곡하였다. 이 앨범은 하루에 3만 2천여장이 나갔고 ''[[Where you are]]''는 오리콘 싱글 데일리 차트 1위에 올랐다.<ref>{{뉴스 인용|제목= 씨엔블루, 정용화 자작곡 日오리콘 차트 1위|url=http://star.mt.co.kr/view/stview.php?no=2012020208385422373&type=1&outlink=1|출판사 = 스타뉴스|날짜 = [[2012년]] [[2월 2일]]}}</ref><ref>{{뉴스 인용|제목= 아시아 대세 씨엔블루, 두 번째 싱글 ‘웨어 유 아’로 오리콘 차트 1위|url=http://sports.khan.co.kr/news/sk_index.html?cat=view&art_id=201202020838404&sec_id=540101&pt=nv|출판사 = 스포츠경향|날짜 = [[2012년]] [[2월 2일]]}}</ref><ref>{{뉴스 인용|제목= 씨엔블루 '록 한류' 통했다..인디서 日오리콘까지 |url=http://star.mt.co.kr/view/stview.php?no=2012020715142874966&type=1&outlink=1|출판사 = 스타뉴스|날짜 = [[2012년]] [[2월 7일]]}}</ref>
         * [[2012년]] [[2월 4일]] 일본 간사이, [[2월 5일]] 도쿄돔 씨티홀에서 두 번째 메이저 음반 발매 기념으로 한 이벤트에 1만2000여명이 참가했다.<ref>{{뉴스 인용|제목= 씨엔블루, 日 앨범 발매 라이브 이벤트서 현지 팬 12,000명 동원 |url=http://wstarnews.hankyung.com/apps/news?popup=0&nid=01&c1=01&c2=01&c3=00&nkey=201202072211591&mode=sub_view|출판사 = 더블유스타뉴스|날짜 = [[2012년]] [[2월 7일]]}}</ref>
         * [[2012년]] [[2월 13일]] 일본 전국투어를 시작했다. 오사카를 시작으로 나고야, 도쿄, 요코하마 등지에서 이뤄진 이번 투어는 두 번째 메이저 음반 발매 기념으로 팬클럽 회원 한정의 전국 투어 콘서트를 개최하게 되었는데, 지난 2009년부터 일본에서 인디밴드로 활동할 당시 공연했던 클럽에서 이루어졌으며, 인디즈 활동 당시 공연했던 장소에서 다시 공연하는 것을 테마로 이뤄진 이번 공연은 9회에 걸쳐 이뤄졌다.<ref>{{뉴스 인용|제목= 씨엔블루, 인디밴드 활동 당시 공연했던 日클럽서 라이브공연|url=http://www.newsen.com/news_view.php?uid=201202251028531002|출판사 = 뉴스엔|날짜 = [[2012년]] [[2월 25일]]}}</ref><ref>{{뉴스 인용|제목= 씨엔블루, 日 전국투어 1만명 팬 열광…티켓 전쟁 |url=http://www.asiatoday.co.kr/news/view.asp?seq=602306|출판사 = 아시아투데이|날짜 = [[2012년]] [[2월 25일]]}}</ref><ref>{{뉴스 인용|제목= 씨엔블루, 초심으로 돌아가 日 전국투어 라이브… 폭발적인 반응 |url=http://www.etoday.co.kr/news/section/newsview.php?TM=news&SM=4101&idxno=550042|출판사 = 이투데이|날짜 = [[2012년]] [[2월 25일]]}}</ref>
         * [[2012년]] [[12월 5일]] 일본 음원 사이트 드완고(www.dwango.jp)에서 케이팝 OST 부분 휴대 전화 벨소리 차트에서 드라마 ‘넌 내게 반했어’ OST가 2012년 연간 랭킹에서 1위를 차지했다.<ref>{{뉴스 인용|제목= 정용화 '넌 내게 반했어', 일본 OST 벨소리차트 정상 |url=http://www.etoday.co.kr/news/section/newsview.php?idxno=662558|출판사 = 이투데이|날짜 = [[2012년]] [[12월 5일]]}}</ref>
         * [[2012년]] [[12월 8일]]에 《제1회 K 드라마 스타 어워즈》에서 ([[문화방송|MBC]] 《[[넌 내게 반했어]]》가 해외에서 큰 인기를 끈 공로를 인정받아 한류스타상을 수상하였다.<ref>{{뉴스 인용|제목= 정용화, '한류스타상, 감사합니다' |url=http://osen.mt.co.kr/article/G1109512277|출판사 = osen|날짜 = [[2012년]] [[12월 8일]]}}</ref>
         * [[2012년]] [[12월 28일]]에 《[[KBS 가요대축제]]》 MC에 발탁되어 진행하였다.<ref>{{뉴스 인용
         |제목 = 성시경-윤아-정용화, '2012 KBS 가요대축제' MC 발탁 |url=http://joynews.inews24.com/php/news_view.php?g_menu=700200&g_serial=713456&rrf=nv |출판사 = 조이뉴스24 |날짜 = [[2012년]] [[12월 24일]]}}</ref>
         * [[2013년]] [[1월 14일]]에 본인 자작곡을 타이틀로 하여 씨엔블루 4번째 미니앨범을 발매하였다. 수록곡 6곡 중에 한곡을 제외한 나머지 5곡이 본인 자작곡이다.<ref>{{뉴스 인용|제목= 씨엔블루, 틀-오해-선입견 벗고 우리 길을 간다 |url=http://www.tvreport.co.kr/?c=news&m=newsview&idx=310166|출판사 = tvreport|날짜 = [[2013년]] [[2월 14일]]}}</ref> 음원이 발표되자 마자 팬들에게 큰 사랑을 받았다.<ref>
         |출판사 = 일간스포츠 |날짜 = [[2013년]] [[2월 22일]] }}</ref>
         * 성공적인 4번째 미니앨범 활동을 마무리하고<ref>{{뉴스 인용|제목= 씨엔블루 활동 마무리 "미련없이 잘 놀았다" |url=http://sports.hankooki.com/lpage/music/201302/sp2013022507005295510.htm |출판사 = 스포츠한국 |날짜 = [[2013년]] [[2월 25일]] }}</ref> 한국밴드 최초로 월드투어를 시작하였다.<ref>{{뉴스 인용
         * [[2014년]] 2월24일 한국 EP 5집 Can't stop 발매.EP 6곡중 5곡을 작사,작곡하였다.
         |align="center"|[[2009년]] [[12월 29일]]<ref name="gayo1">{{뉴스 인용
         |날짜 = 2009년 12월 22일
         |align="center"|[[2009년]] [[12월 6일]] ~ [[2010년]] [[3월 21일]]<ref>{{뉴스 인용
         |align="center"|[[2010년]] [[2월 27일]] ~ [[2011년]] [[4월 2일]]
  • 김보름 . . . . 43회 일치
         '''김보름'''([[1993년]] [[2월 6일]] ~ )은 [[대한민국]]의 [[쇼트트랙]], [[스피드 스케이팅]] 선수이다.
         *2017 MBN 여성스포츠대상 2월 최우수선수<ref>{{뉴스 인용|url=http://www.hankookilbo.com/v/3da45d241be44fc2905381405aa37dfc|제목='삿포로 영웅' 김보름-최다빈, MBN 여성스포츠대상 2월 MVP|뉴스=한국일보|언어=ko|확인날짜=2017-03-31}}</ref>
         2007년 2월 22일 고양어울림누리에서 열린 제88회 전국동계체육대회 1500m 준결승 3조에서 김보름은 3분05초02로 5위에 그쳐 결승전 진출에 실패했다.<ref>{{웹 인용|url=http://result.sports.or.kr/sk/schedule_result.jsp?classCd=2&toCd=207088&detailClassCd=04&rhCd=5&page=17&gameDate=&baseClassName=1500M&rhName=%EC%A4%80%EA%B2%B0%EC%8A%B9&kindCd=07&kindNm=%EC%97%AC%EC%9E%90%EC%A4%91%ED%95%99%EB%B6%80&pcntGbn=I&useGbn=|제목=정보제공 _ 대한빙상경기연맹|확인날짜=2017-04-04}}</ref> 23일 열린 3000m 준결승 1조에서는 김보름이 경기중 포기를 했다.<ref>{{웹 인용|url=http://result.sports.or.kr/sk/schedule_result.jsp?classCd=2&toCd=207088&detailClassCd=05&rhCd=5&page=17&gameDate=&baseClassName=3000M&rhName=%EC%A4%80%EA%B2%B0%EC%8A%B9&kindCd=07&kindNm=%EC%97%AC%EC%9E%90%EC%A4%91%ED%95%99%EB%B6%80&pcntGbn=I&useGbn=|제목=정보제공 _ 대한빙상경기연맹|확인날짜=2017-04-04}}</ref> 24일 열린 2000m계주에서는 김보름, 신아름, 김보라, 박연정으로 구성된 대구선발이 3분04초88로 동메달을 차지했다.<ref>{{웹 인용|url=http://result.sports.or.kr/sk/schedule_result.jsp?classCd=2&toCd=207088&detailClassCd=07&rhCd=9&page=17&gameDate=&baseClassName=2000M%EA%B3%84%EC%A3%BC&rhName=%EA%B2%B0%EC%8A%B9&kindCd=07&kindNm=%EC%97%AC%EC%9E%90%EC%A4%91%ED%95%99%EB%B6%80&pcntGbn=T&useGbn=|제목=정보제공 _ 대한빙상경기연맹|확인날짜=2017-04-04}}</ref>
         2007년 12월 15, 16일 이틀간 대만에서 열린 2007 아시아쇼트트랙선수권대회에서 황현선(과천중), 송재원(연성중), 김보름(성화중)이 2000m릴레이 주니어부 1위를 차지했다. 1000m에서는 이소연(평촌중)이 1위를 김보름이 2위를 차지했다.<ref name=":3">{{뉴스 인용|url=http://hs1206.tistory.com/108|제목=2007 아시아 쇼트트랙 선수권 결과|날짜=2007-12-15|뉴스=hs1206|언어=ko|확인날짜=2017-03-03}}</ref>
         2008년 2월 19일 탄천종합운동장빙상장에서 열린 제89회 전국동계체육대회 1500m에서 김보름(성화중 3학년)은 2분38초35로 동메달을 차지했다.<ref>{{웹 인용|url=http://result.sports.or.kr/sk/schedule_result.jsp?classCd=2&toCd=02G089&detailClassCd=04&rhCd=9&page=17&gameDate=&baseClassName=1500M&rhName=%EA%B2%B0%EC%8A%B9&kindCd=07&kindNm=%EC%97%AC%EC%9E%90%EC%A4%91%ED%95%99%EB%B6%80&pcntGbn=I&useGbn=|제목=정보제공 _ 대한빙상경기연맹|확인날짜=2017-04-04}}</ref> 20일 열린 3000m에서는 김보름이 5분34초04로 6위를 차지했다.<ref>{{웹 인용|url=http://result.sports.or.kr/sk/schedule_result.jsp?classCd=2&toCd=02G089&detailClassCd=05&rhCd=9&page=17&gameDate=&baseClassName=3000M&rhName=%EA%B2%B0%EC%8A%B9&kindCd=07&kindNm=%EC%97%AC%EC%9E%90%EC%A4%91%ED%95%99%EB%B6%80&pcntGbn=I&useGbn=|제목=정보제공 _ 대한빙상경기연맹|확인날짜=2017-04-04}}</ref>
         2009년 2월 10일 탄천종합운동장빙상장에서 열린 제90회 전국동계체육대회 1500m에서 김보름(정화여고 1학년)은 2분35초64로 5위를 차지했다.<ref>{{웹 인용|url=http://result.sports.or.kr/sk/schedule_result.jsp?classCd=2&toCd=200902&detailClassCd=04&rhCd=9&page=16&gameDate=&baseClassName=1500M&rhName=%EA%B2%B0%EC%8A%B9&kindCd=08&kindNm=%EC%97%AC%EC%9E%90%EA%B3%A0%EB%93%B1%EB%B6%80&pcntGbn=I&useGbn=|제목=정보제공 _ 대한빙상경기연맹|확인날짜=2017-04-04}}</ref> 11일 열린 3000m에서는 김보름이 6분19초03으로 동메달을 차지했다.<ref>{{웹 인용|url=http://result.sports.or.kr/sk/schedule_result.jsp?classCd=2&toCd=200902&detailClassCd=05&rhCd=9&page=16&gameDate=&baseClassName=3000M&rhName=%EA%B2%B0%EC%8A%B9&kindCd=08&kindNm=%EC%97%AC%EC%9E%90%EA%B3%A0%EB%93%B1%EB%B6%80&pcntGbn=I&useGbn=|제목=정보제공 _ 대한빙상경기연맹|확인날짜=2017-04-04}}</ref>
         2010년 2월 2일 탄천종합운동장빙상장에서 열린 제91회 전국동계체육대회 1500m 준결승에서 김보름(정화여고 2학년)은 실격을 당했다.<ref>{{웹 인용|url=http://result.sports.or.kr/sk/schedule_result.jsp?classCd=2&toCd=201001&detailClassCd=04&rhCd=5&page=16&gameDate=&baseClassName=1500M&rhName=%EC%A4%80%EA%B2%B0%EC%8A%B9&kindCd=08&kindNm=%EC%97%AC%EC%9E%90%EA%B3%A0%EB%93%B1%EB%B6%80&pcntGbn=I&useGbn=|제목=정보제공 _ 대한빙상경기연맹|확인날짜=2017-04-04}}</ref> 3일 열린 3000m에서는 김보름이 6분00초10으로 은메달을 차지했다.<ref>{{웹 인용|url=http://result.sports.or.kr/sk/schedule_result.jsp?classCd=2&toCd=201001&detailClassCd=05&rhCd=9&page=16&gameDate=&baseClassName=3000M&rhName=%EA%B2%B0%EC%8A%B9&kindCd=08&kindNm=%EC%97%AC%EC%9E%90%EA%B3%A0%EB%93%B1%EB%B6%80&pcntGbn=I&useGbn=|제목=정보제공 _ 대한빙상경기연맹|확인날짜=2017-04-04}}</ref>
         2010년 12월 20일 서울 노원구 공릉동 태릉국제스케이트장에서 열린 제65회 전국남녀 종합빙상선수권대회 3000m에서 박도영(17-덕정고)이 4분21초18의 기록으로 1위에 올랐고 김보름(17)이 4분22초30을 기록 뒤를 이어 상위 2명에게 주어지는 2012년 1월 카자흐스탄에서 열리는 동계아시안게임 출전권을 따냈다.<ref>{{뉴스 인용|url=http://www.stnsports.co.kr/news/articleView.html?idxno=423|제목=[빙상] 이승훈, 빙상선수권대회 5000m 우승...아시안게임 출전권 획득 - STN|언어=ko|확인날짜=2017-03-05}}</ref>
         카자흐스탄 아스타나실내스피드스케이팅경기장서 펼쳐진 제7회 아스타나-알마티 동계아시안게임 3000m에서 김보름이 4분10초54의 기록으로 은메달을 차지했다. 김보름은 3000m 결승전에서 3조로 출발해서 앞서 출발한 1,2조 선수들에 비해 기록차를 크게 벌리며 1위에 섰지만 곧바로 4조 일본의 호조미 마사코에 2.72초 뒤졌다. 3위에 오른 중국의 왕페이는 4분19초77을 기록했다. 함께 경기에 나선 박도영(17, 덕정고)은 컨디션 난조로 아쉽게 5위에 머물렀다.<ref>{{뉴스 인용|url=http://news.mt.co.kr/mtview.php?no=2011013118485662311&code=column91&vgb=column|제목=[동계AG]김보름, 스피드스케이팅 女3000m '깜짝'銀 - 머니투데이 뉴스|확인날짜=2017-03-06}}</ref> 2011년 2월 5일 열린 5000m에서는 한국의 박도영(18, 덕정고)이 3번째 조로 일본의 호즈미 마사코와 함께 레이스를 펼쳐 6초40 뒤진 기록으로 골인했으나, 전체 2위(7분15초63)를 차지했다. 김보름은 7분22초92의 기록으로 4위를 차지해 아쉽게 메달을 놓쳤다.<ref>{{웹 인용|url=http://m.cnbnews.com/m/m_article.html?no=128516|제목=[동계아시안게임] 박도영, 스피드스케이팅 5000m 은메달|확인날짜=2017-03-06}}</ref>
         2011년 2월 16일부터 18일까지 태릉국제스케이팅장에서 열린 제92회 전국동계체육대회 고등부 3000m에서 1위는 대회신기록인 4분17초42의 박도영(덕정고)이 차지했고 2위는 대회신기록인 4분22초21의 김보름이 차지했고 3위는 4분24초04의 임정수(청학고)가 차지했다. 1500m에서는 1위는 대회신기록인 2분4초37의 박도영이 차지했고 2위는 2분5초49의 김보름이 차지했고 3위는 2분7초16의 임정수가 차지했다.<ref name=":4">{{저널 인용|제목=제92회 전국동계체육대회 스피드 스케이팅|url=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EC%A0%9C92%ED%9A%8C_%EC%A0%84%EA%B5%AD%EB%8F%99%EA%B3%84%EC%B2%B4%EC%9C%A1%EB%8C%80%ED%9A%8C_%EC%8A%A4%ED%94%BC%EB%93%9C_%EC%8A%A4%EC%BC%80%EC%9D%B4%ED%8C%85&oldid=8386539|날짜=2012-03-11|언어=ko}}</ref>
         2011년 11월 18일 러시아 첼랴빈스크에서 열린 2011-2012 국제빙상경기연맹 스피드스케이팅월드컵 1차 대회 3000m 디비전B에서 김보름은 4분12초38로 2위를 차지했다. 19일 열린 1500m 디비전B에서는 김보름이 2분01초39로 4위를 차지했다. 20일 열린 팀추월에서는 이주연, 노선영, 김보름이 3분05초79로 4위를 차지했다. 2011년 11월 25일 카자흐스탄 아스타나에서 열린 2차 대회 3000m 디비전A에서 김보름은 4분13초61로 20위를 차지했다. 26일 열린 1500m 디비전A에서는 김보름이 2분02초58로 20위를 차지했다.<ref name=":24" /> 27일 열린 매스스타트에서는 김보름(한국체대)이 7분26초85의 기록으로 첫 동메달을 따냈다.<ref>{{뉴스 인용|url=http://news.sbs.co.kr/news/endPage.do?news_id=N1001033550|제목=이승훈, 매스스타트 금메달|날짜=2011-11-28|뉴스=SBS NEWS|언어=ko|확인날짜=2017-03-06}}</ref> 2011년 12월 2일 네덜란드 히렌빈에서 열린 월드컵 3차 대회 5000m 디비전B에서 김보름은 7분26초10으로 12위를 차지했다. 3일 열린 1500m 디비전B에서는 김보름이 2분01초39로 5위를 차지했다.<ref name=":24" /> 4일 열린 팀추월에서는 이주연(동두천시청)-노선영(한국체대)-김보름으로 구성된 대표팀이 3분03초18의 기록으로 캐나다(3분00초01)와 러시아(3분02초38)에 이어 3위에 올랐다. 한국 스피드스케이팅이 월드컵 시리즈 팀 추월에서 메달을 딴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ref name=":17">{{웹 인용|url=http://m.yeongnam.com/jsp/view.jsp?depth1=3&depth2=4&nkey=20111206.010260719320001|제목=한국 빙속 팀추월 사상 첫 메달|성=영남일보|확인날짜=2017-03-06}}</ref> 2012년 2월 12일 노르웨이 하마르에서 끝난 월드컵 5차 대회 팀추월 경기에서 이주연(25)과 노선영(23), 김보름(18)이 출전하여 3분05초65의 기록으로 폴란드(3분05초57)에 이어 동메달을 차지했다. 3000m에 출전한 김보름은 4분15초66의 기록으로 16위에 머물렀다.<ref name=":2">{{뉴스 인용|url=http://www.icenews.co.kr/entry/%EB%B9%99%EC%86%8D-%EC%9B%94%EB%93%9C%EC%BB%B5-5%EC%B0%A8%EB%8C%80%ED%9A%8C-%ED%8C%80-%EC%B6%94%EC%9B%94-%EB%82%A8%EB%85%80-%E9%8A%80-%E9%8A%85|제목=빙속 월드컵 5차대회, 팀 추월 남녀 銀, 銅|날짜=2012-02-13|뉴스=아이스뉴스|확인날짜=2017-03-06}}</ref> 1500m 디비전A에서는 김보름이 2분00초24로 10위를 기록했다. 디비전B에서는 이주연(동두천시청)과 노선영(한체대)이 각각 1위(2분01초53)와 3위(2분01초82)를 차지했다.<ref>{{뉴스 인용|url=http://www.icenews.co.kr/entry/%EC%9D%B4%EC%8A%B9%ED%9B%88-%EB%B9%99%EC%86%8D%EC%9B%94%EB%93%9C%EC%BB%B5-5000m-13%EC%9C%84-%EA%B9%80%EB%B3%B4%EB%A6%84-%EC%97%AC%EC%9E%90%EB%B6%80-1500m-10%EC%9C%84|제목=이승훈 '빙속월드컵' 5000m 13위... 김보름 여자부 1500m 10위|날짜=2012-02-12|뉴스=아이스뉴스|확인날짜=2017-03-11}}</ref> 2012년 3월 10일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월드컵 파이널 1500m에서 김보름은 1분59초52로 12위를 차지하며 73점 22위로 시즌을 마쳤다. 11일 열린 매스스타트에서는 김보름이 8분53초69로 7위를 차지하며 110점 7위로 시즌을 마쳤다. 팀추월에서는 김보름, 이주연, 노선영이 3분03초29로 은메달을 차지하며 320점 3위로 시즌을 마쳤다.<ref name=":24" />
         2012년 2월 16일 서울 공릉동 태릉국제스케이팅장에서 열린 제93회 전국동계체육대회 대학부 3000m 결승에서 김보름(19)은 4분18초11의 대회신기록을 작성하며 금메달을 거머쥐었다. 17일 열린 1500m에서도 2분05초로 우승한 김보름은 대구-경북 동계체전 선수 중 유일한 2관왕 타이틀을 획득했다.<ref name=":5">{{웹 인용|url=http://www.yeongnam.com/mnews/newsview.do?mode=newsView&newskey=20120218.010200737070001|제목=대구경북 유일한 2관왕 ‘빙속 스타’ 김보름 “소치올림픽 금메달도 꿈만은 아닐 것”|성=영남일보|언어=ko|확인날짜=2017-03-08}}</ref>
         2012년 11월 16일 네덜란드 히렌빈에서 열린 2012-2013 국제빙상경기연맹 스피드스케이팅월드컵 1차 대회 3000m 디비전B에서 김보름은 4분10초81로 1위를 차지했다. 17일 열린 1500m 디비전B에서는 김보름이 1분58초41로 1위를 차지했다.<ref name=":24" /> 매스스타트 부문에서는 김보름이 4위를 차지했다.<ref name=":8" /> 18일 열린 팀추월에서는 김보름, 노선영, 박도영이 3분03초13으로 5위를 차지했다.<ref name=":24" /> 2012년 11월 24일 러시아 콜롬나에서 열린 월드컵 2차 대회 매스스타트에 출전한 김보름은 8분40초77의 기록으로 금메달을 따냈다. 박도영(20-한국체대)은 8분41초26으로 5위, 노선영은 8분41초82로 10위를 차지했다. 1500m 디비전A에서는 김보름이 1분57초05로 전체 선수 20명 중 5위를 기록하며 한국 여자 장거리의 스타 탄생을 예고했다. 1500m 디비전B에서는 노선영이 2분00초74로 5위, 박도영이 2분02초34로 15위를 차지했다. 25일 열린 3000m 디비전A에서도 김보름은 4분06초13의 기록으로 7위에 오르는 등 장거리에서 꾸준히 좋은 모습을 보였다. 박도영은 4분12초31의 기록으로 16명의 출전선수 중 최하위에 머물렀다. 3000m 디비전B에서는 노선영이 4분13초51로 16위를 차지했다.<ref name=":9">{{뉴스 인용|url=http://www.icenews.co.kr/entry/%EA%B9%80%EB%B3%B4%EB%A6%84-%EC%8A%A4%ED%94%BC%EB%93%9C%EC%8A%A4%EC%BC%80%EC%9D%B4%ED%8C%85%EC%9B%94%EB%93%9C%EC%BB%B5-%EB%A7%A4%EC%8A%A4%EC%8A%A4%ED%83%80%ED%8A%B8-1%EC%9C%84|제목=김보름, 스피드스케이팅월드컵 매스스타트 1위|날짜=2012-11-26|뉴스=아이스뉴스|확인날짜=2017-03-12}}</ref> 2012년 12월 1일 카자흐스탄 아스타나에서 열린 월드컵 3차 대회 5000m 디비전A에서 김보름은 7분11초19의 기록으로 전체 12명의 선수 중 5위를 기록, 메달권 진입에 실패했다. 5000m 디비전B에서는 박도영이 7분30초18로 16위, 노선영(23, 한국체대)이 7분35초47로 19위, 임정수가 7분39초23으로 21위를 차지했다. 2일 열린 1500m 디비전A에서는 김보름이 2분00초38의 기록으로 17위를 차지했다. 1500m 디비전B에서는 노선영이 2분02초47로 9위, 박도영이 2분03초10으로 11위를 차지했다. 팀추월 경기에 출전한 김보름, 노선영, 박도영은 3분00초55의 기록으로 은메달을 획득했다.<ref name=":14">{{뉴스 인용|url=http://www.icenews.co.kr/entry/%EC%9D%B4%EC%8A%B9%ED%9B%88-%EC%9B%94%EB%93%9C%EC%BB%B5-10000m%EC%84%9C-%E9%8A%85|제목=이승훈, 월드컵 10,000m서 銅|날짜=2012-12-03|뉴스=아이스뉴스|확인날짜=2017-03-13}}</ref> 2013년 2월 9일 독일 인첼에서 열린 월드컵 7차 대회 매스스타트에서 김보름은 8분13초80만에 1위로 결승선을 통과했다. 이 대회에서 김보름은 월드컵 포인트 100점을 추가, 총점 260점으로 네덜란드의 마리스카 휘스먼(240점)을 제치고 여자 매스스타트 월드컵 랭킹 1위로 올라섰다. 함께 레이스를 펼친 박도영(8분16초82)과 노선영(8분17초64)은 각각 10위, 15위에 그쳤다. 1500m 디비전A에도 김보름은 출전했으나 1분58초43의 기록으로 10위에 머물렀다.<ref name=":10">{{웹 인용|url=http://sbssports.sbs.co.kr/news/news_content.jsp?article_id=S10002306875|제목=김보름, 빙속월드컵 매스스타트서 두 번째 金... 이승훈 부진|언어=ko|확인날짜=2017-03-13}}</ref> 10일 열린 3000m 디비전A에서는 김보름이 4분13초04로 13위에 머물렀다. 2013년 3월 1일 독일 에르푸르트에서 열린 월드컵 8차 대회 5000m 디비전A에서 김보름은 7분41초22로 11위를 차지했다. 2일 열린 1500m 디비전A에서는 김보름이 2분02초80으로 18위를 차지했다. 2013년 3월 9일 네덜란드 히렌빈에서 열린 월드컵 파이널 3000m에서 김보름은 4분08초51로 8위를 차지하며 185점 10위로 시즌을 마쳤다. 10일 열린 1500m에서는 김보름이 2분00초58로 16위를 차지하며 133점 13위로 시즌을 마쳤다.<ref name=":24" /> 매스스타트에서는 김보름이 3위로 골인했지만 앞서 치른 2차와 7차 월드컵에서 1위를 한 바 있어 총점 365점으로, 330점에 그친 마리스카 후이스만(네덜란드)을 제치고 종합우승의 쾌거를 달성했다.<ref name=":12">{{뉴스 인용|url=http://m.blog.naver.com/woorikangsan/20201685972|제목=한국 빙상 유망주 - 김보름 선수,한국, 토렌티노 동계 U대회 종합 3위…빙속 김보름 최다 메달 획득,|뉴스=네이버 블로그 {{!}} 사진과 여행하기|언어=ko|확인날짜=2017-03-13}}</ref>
         2012년 12월 22, 23일 이틀간 태릉국제스케이트장에서 열린 제67회 전국남녀 종합스피드스케이팅선수권대회에서 김보름과 박도영이 각각 170.241점과 174.147점을 기록하며 1, 2위를 차지했다. 22일 열린 3000m 경기에서 김보름은 4분16초19의 대회신기록을 세우며 1위를 차지, 중간합계 선두에 올랐다. 23일 1500m와 5000m에서도 정상에 오르며 22일 열린 500m에서 남지은에 이어 2위를 차지한 것을 제외하고는 모든 종목 1위에 오르며 대회신기록으로 우승을 확정지어서 12월 29일부터 30일까지 이틀간 중국 창춘에서 펼쳐지는 2013 세계올라운드선수권대회 아시아지역예선의 출전자격을 획득했다.<ref>{{뉴스 인용|url=http://www.icenews.co.kr/entry/%EB%8B%A4%EC%8B%9C-%EB%B3%B4%EB%8A%94-%EB%B0%B4%EC%BF%A0%EB%B2%84%EC%8A%A4%ED%83%80-vs-%EB%AF%B8%EB%A6%AC-%EB%B3%B4%EB%8A%94-%EC%86%8C%EC%B9%98%EC%8A%A4%ED%83%80|제목=다시 보는 밴쿠버스타 vs 미리 보는 소치스타!|날짜=2012-12-24|뉴스=아이스뉴스|확인날짜=2017-03-13}}</ref>
         2013년 11월 8일 캐나다 캘거리에서 열린 2013-2014 국제빙상경기연맹 스피드스케이팅월드컵 1차 대회 3000m에서 김보름은 4분07초93의 기록으로 12위에 머물렀다.<ref>{{뉴스 인용|url=http://news.joins.com/article/13090996|제목=‘빙속 여제’ 이상화, 캘거리 월드컵 500m 금메달|날짜=2013-11-09|뉴스=중앙일보|언어=ko|확인날짜=2017-03-13}}</ref> 9일 열린 1500m에서는 김보름이 1분56초94 만에 결승선을 통과, 20명의 선수 중 최하위에 머물렀다.<ref>{{웹 인용|url=http://www.yonhapnews.co.kr/sports/2013/11/10/1007000000AKR20131110013951007.HTML|제목=-빙속월드컵- '여제' 이상화 500m 세계신기록(종합) {{!}} 연합뉴스|확인날짜=2017-03-13}}</ref> 10일 열린 팀추월에서는 김보름, 노선영, 양신영이 3분00초32로 5위를 차지했다. 2013년 11월 15일 미국 솔트레이크시티에서 열린 월드컵 2차 대회 3000m 디비전A에서 김보름은 4분04초62로 15위를 차지했다. 16일 열린 1500m 디비전B에서는 김보름이 1분56초12로 개인최고기록을 세우며 8위를 차지했다. 17일 열린 팀추월에서는 김보름, 노선영, 박도영이 2분58초32로 7위를 차지했다. 2013년 11월 29일 카자흐스탄 아스타나에서 열린 월드컵 2차 대회 5000m 디비전B에서 김보름은 7분09초99로 6위를 차지했다. 30일 열린 1500m 디비전B에서는 김보름이 1분58초12로 1위를 차지했다.<ref name=":24" /> 2013년 12월 9일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월드컵 4차 대회 팀추월에 김보름은 노선영(24-강원도청), 양신영(23-전라북도청)과 함께 출전해 3분02초04의 기록으로 네덜란드(2분58초19), 폴란드(3분1초18)에 이어 3위에 올랐다.<ref>{{뉴스 인용|url=http://www.jjan.kr/news/articleView.html?idxno=493417|제목=전북도청 양신영 국제빙상 월드컵 동메달 - 전북일보|언어=ko|확인날짜=2017-03-13}}</ref>
         2013년 12월 13일 이탈리아 트렌티노의 바셀가디피네아이스링크경기장에서 열린 제26회 트렌티노 동계유니버시아드대회 1500m 경기에서 김보름은 2분1초19의 기록으로 금메달을 획득했다. 같은 경기에 출전한 양신영, 박도영은 각각 5위, 6위를 기록했다.<ref>{{뉴스 인용|url=http://www.newswire.co.kr/newsRead.php?no=728148|제목=제26회 트렌티노동계유니버시아드대회 스피드스케이팅, 대회 첫 메달 획득|날짜=2013-12-15|뉴스=보도자료 배포, 온라인 보도자료 등록, 홍보 대행 - 뉴스와이어|언어=ko|확인날짜=2017-03-13}}</ref> 15일 열린 3000m에서는 김보름이 은메달을 땄다. 18일 열린 5000m에서도 김보름이 7분17초82만에 결승선을 통과, 마르티나 사브리코바(체코, 7분05초17)에 이어 은메달을 획득했다. 동반 출전한 박도영(한국체대)은 7분26초58의 기록으로 3위에 올랐다.<ref>{{뉴스 인용|url=http://www.asiae.co.kr/news/view.htm?idxno=2013121810402676378|제목=김보름·박도영, 동계U 빙속 여자 5,000m 은·동메달|날짜=2013-12-18|확인날짜=2017-03-13}}</ref> 20일 열린 팀추월에서는 김보름과 박도영(20-한국체대), 양신영(23-전북도청)의 여자대표팀이 3분06초53으로 결승선을 통과, 일본(3분11초39)을 제치고 정상에 올랐다.<ref>{{뉴스 인용|url=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131221024004|제목=소치올림픽 금물결 꿈틀|뉴스=서울신문|언어=ko|확인날짜=2017-03-13}}</ref>
         김보름은 2013년 12월 23일 태릉국제스케이트장에서 열린 제68회 전국남녀 종합스피드스케이팅선수권대회 500m에서 41초77로 2위,<ref>{{웹 인용|url=http://result.sports.or.kr/sk/schedule_result.jsp?classCd=1&toCd=201315&detailClassCd=01&rhCd=19&page=11&gameDate=&baseClassName=500M&rhName=%EC%A2%85%ED%95%A9&kindCd=22&kindNm=%EC%97%AC%EC%9E%90%EB%B6%80&pcntGbn=I&useGbn=S|제목=정보제공 _ 대한빙상경기연맹|확인날짜=2017-04-04}}</ref> 3000m에서 4분18초76으로 1위,<ref>{{웹 인용|url=http://result.sports.or.kr/sk/schedule_result.jsp?classCd=1&toCd=201315&detailClassCd=04&rhCd=19&page=11&gameDate=&baseClassName=3000M&rhName=%EC%A2%85%ED%95%A9&kindCd=22&kindNm=%EC%97%AC%EC%9E%90%EB%B6%80&pcntGbn=I&useGbn=S|제목=정보제공 _ 대한빙상경기연맹|확인날짜=2017-04-04}}</ref> 24일 열린 1500m에서 2분03초54로 1위,<ref>{{웹 인용|url=http://result.sports.or.kr/sk/schedule_result.jsp?classCd=1&toCd=201315&detailClassCd=03&rhCd=19&page=11&gameDate=&baseClassName=1500M&rhName=%EC%A2%85%ED%95%A9&kindCd=22&kindNm=%EC%97%AC%EC%9E%90%EB%B6%80&pcntGbn=I&useGbn=S|제목=정보제공 _ 대한빙상경기연맹|확인날짜=2017-04-04}}</ref> 5000m에서 7분26초06의 대회신기록으로 1위를 하며 종합 우승을 차지했다.<ref>{{웹 인용|url=http://result.sports.or.kr/sk/schedule_result.jsp?classCd=1&toCd=201315&detailClassCd=05&rhCd=19&page=11&gameDate=&baseClassName=5000M&rhName=%EC%A2%85%ED%95%A9&kindCd=22&kindNm=%EC%97%AC%EC%9E%90%EB%B6%80&pcntGbn=I&useGbn=S|제목=정보제공 _ 대한빙상경기연맹|확인날짜=2017-04-04}}</ref>
         2014년 2월 9일 러시아 소치 아들레르 아레나서 열린 소치 동계올림픽 3000m 부문에서 김보름(21)은 4분12초08의 기록으로로 13위를 차지했다. 이날 3조로 경기를 치른 김보름은 21초05로 200m 구간을 통과한 후 2분31초34로 1800m 구간을 지났다. 이후 2200m 구간 통과 순간부터 스피드를 올리며 후반 들어 스퍼트를 올렸고, 결국 하위권이 아닌 중위권 기록을 남겼다. 김보름의 순위인 13위는 지난 2006 토리노 올림픽, 2010 밴쿠버 올림픽 당시 노선영(25-강원도청)이 기록한 19위를 넘어 한국 여자 3000m 부문의 가장 높은 순위다. 5조의 노선영은 4분19초02를 기록했다. 노선영은 200m 구간에서 21초32의 기록으로 지난 이후 속도를 올리지 못한 채로 결승점을 통과했다. 결국 노선영은 전체 26위의 성적을 남기며 경기를 마쳤다. 6조에서 경기를 소화한 양신영(24-전북도청)은 4분23초67을 기록해 이날 대회를 뛴 28명 중 최저의 기록을 남겼다. 한편 이날 대회는 4분00초34의 이레네 부스트(네덜란드)가 2006년 토리노 동계올림픽 이후 8년 만에 금메달을 다시 가져갔다. 대회 2연패를 노린 2위 마르티나 사블리코바(체코-4분01초95)와 3위 올가 그라프(러시아-4분03초47)에 앞선 기록이다.<ref>{{웹 인용|url=http://www.newstomato.com/readNews.aspx?no=441654|제목=(소치올림픽)김보름, 스피드스케이팅 여자 3000m 13위..금메달 부스트|확인날짜=2017-03-21}}</ref> 16일 열린 1500m에서는 네덜란드의 요리엔 테르모르스가 1분53초51의 올림픽 기록으로 금메달을 차지했다. 은메달과 동메달도 네덜란드 선수들이 휩쓸었다. 은메달은 이레인 뷔스트(1분54초09)에게 돌아갔고 동메달은 하를로터 판바이크(1분54초54)가 주인이 됐다. 심지어 4위도 네덜란드 선수인 마리트 리엔스트라(1분56초40)가 차지했다. 김보름은 1분59초78로 21위에 올랐다. 노선영(25-강원도청)은 2분01초07로 29위, 양신영(24-전북도청)은 2분04초13으로 최하위인 36위에 그쳤다.<ref>{{웹 인용|url=http://starin.edaily.co.kr/news/NewsRead.edy?SCD=EB33&newsid=01079126605991504&DCD=A20402|제목=[소치올림픽]테르모르스, 전날 쇼트트랙 뛰고 빙속1500m 올림픽新 금|성=포털|이름=Ⓒ 함께 만들고 함께 즐기는 엔터테인먼트|성2=무단전재|이름2=‘이데일리 스타in’-|날짜=2014-02-17|확인날짜=2017-03-21|성3=금지|이름3=재배포}}</ref> 김보름은 무릎 통증이 있어 5000m를 기권했다.<ref>{{뉴스 인용|url=http://www.segye.com/content/html/2014/02/19/20140219004640.html|제목=빙속 김보름, 女 5000m 기권…팀추월 집중|성=세계일보|날짜=2014-02-19|뉴스=빙속 김보름, 女 5000m 기권…팀추월 집중 - 세상을 보는 눈, 글로벌 미디어 - 세계닷컴 -|확인날짜=2017-03-13}}</ref> 22일 열린 팀추월 파이널D(7-8위 결정전)에서 김보름, 노선영(25, 강원도청), 양신영(24, 전북도청)이 나란히 달린 여자 팀추월 대표팀은 노르웨이에 져 8위로 대회를 마쳤다. 전날 8강전에서 일본에 져 준결승 진출에 실패한 여자 대표팀은 이날 3분11초54만에 마지막 주자가 결승선을 통과해 3분8초35를 기록한 노르웨이에 패했다.<ref>{{뉴스 인용|url=http://www.newsway.co.kr/view.php?tp=1&ud=2014022223322278172|제목=김보름·노선영·양신영 여자 스피드스케이팅 팀추월 8위에 그쳐|뉴스=뉴스웨이|확인날짜=2017-03-13}}</ref>
         2014년 2월 28일 서울 노원구 태릉국제스케이트장에서 열린 제95회 전국동계체전에서 김보름은 3000m와 1500m에서 금메달을 획득해 3연속 2관왕이라는 대업을 달성했다.<ref name=":15" />
         2014년 11월 14일 일본 오비히로에서 열린 2014-2015 국제빙상경기연맹 스피드스케이팅월드컵 1차 대회 3000m 디비전B에서 4분14초43으로 3위를 차지했다. 15일 열린 팀추월에서는 김보름, 전예진, 노선영, 박초원으로 구성된 대표팀이 3분15초39로 9위를 차지했다. 16일 열린 1500m 디비전B에서는 김보름이 2분03분39로 6위를 차지했다. 매스스타트에서는 김보름이 8분35초05 6위로 마쳤으나<ref name=":26">{{웹 인용|url=http://live.sports.media.daum.net/video/general/111788/112286|제목=[스피드 스케이팅] 김보름, 전예진 여자 매스 스타트|성=daum.net|이름=|날짜=11/16/2014|웹사이트=Daum|출판사=|확인날짜=3/16/2017}}</ref> 포인트에서 10위로 밀렸다.<ref name=":24" /> 2014년 11월 21일 서울 태릉 국제스케이트장에서 열린 월드컵 2차 대회 5000m에서 김보름은 7분26초63을 기록, 9위에 머물렀다.<ref>{{뉴스 인용|url=http://www.sportsq.co.kr/news/articleView.html?idxno=25260|제목=[포토Q] 스피드스케이팅 월드컵, 김보름 '아쉬운 9위' - 스포츠Q(큐)|날짜=2014-11-21|언어=ko|확인날짜=2017-03-14}}</ref> 22일 열린 1500m 디비전B에서는 김보름이 2분 04초01로 3위를 차지했다.<ref name=":24" /> 23일 열린 매스스타트에서는 전예진이 8위로 경기를 마무리했고 김보름은 9위로 결승선을 통과했다.<ref>{{웹 인용|url=http://sbssports.sbs.co.kr/news/news_content.jsp?article_id=S10005984206|제목=[영상] '전예진, 김보름 출전' 스피드 스케이팅 월드컵 2차 여자 매스스타트|언어=ko|확인날짜=2017-03-14}}</ref> 2014년 12월 5일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월드컵 3차 대회 3000m 디비전A에 출전한 김보름은 4분13초78로 10위에 기록했다.<ref>{{뉴스 인용|url=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4/12/06/2014120600407.html|제목='질주 재가동' 이상화, 빙속WC 3차대회 500m 1차레이스 金|언어=ko|확인날짜=2017-03-14}}</ref> 6일 열린 팀추월에서는 김보름, 노선영, 전예진이 3분08초49로 7위를 차지했다. 7일 열린 1500m 디비전A에서는 김보름이 2분03초24로 20위를 차지했다 매스스타트에서는 김보름이 8분33초56 4위로 마쳤으나 포인트에서 10위로 밀렸다. 2014년 12월 12일 네덜란드 헤이렌베인 티알프 실내빙상장서 열린 월드컵 4차 대회 3000m 디비전A에서 김보름이 4분13초61로 13위에 올랐다.<ref>{{웹 인용|url=http://m.nocutnews.co.kr/news/4340083|제목=이상화, WC 4연속 金…男 팀추월, 사상 첫 金 - 노컷뉴스|확인날짜=2017-03-22}}</ref> 13일 열린 팀추월에서는 전예진, 김보름, 노선영, 박초원으로 구성된 대표팀이 3분08초33으로 6위를 차지했다. 14일 열린 1500m 디비전A에서는 김보름이 2분01초43으로 18위를 차지했다.<ref name=":24" /> 매스스타트에서는 김보름이 이바니 블론딘(캐나다, 8분24초01)과 불과 0.02 차이나는 8분24초03의 기록으로<ref name=":27">{{웹 인용|url=http://live.sports.media.daum.net/video/general/111792/112387|제목=[스피드스케이팅] 여자 매스스타트(전예진, 김보름 출전)|성=daum.net|이름=|날짜=12/14/2014|웹사이트=Daum|출판사=|확인날짜=3/16/2017}}</ref> 은메달을 목에 걸었다.<ref name=":28">{{웹 인용|url=http://live.sports.media.daum.net/video/general/111792/112392|제목=[스피드스케이팅] 여자 매스스타트 시상식(김보름 은)|성=daum.net|이름=|날짜=12/14/2014|웹사이트=Daum|출판사=|확인날짜=3/16/2017}}</ref> 김보름은 이날 월드컵포인트 80점을 추가, 총점 168점으로 클라우디아 페흐스타인(독일), 다카기 미호(일본) 등을 제치고 블론딘(350점), 이리네 슈텐(네덜란드, 320점), 마르티나 사블리코바(체코, 255점), 다카기 나나(일본, 200점)에 이어 5위로 뛰어올랐다.<ref name=":16">{{뉴스 인용|url=http://www.newsway.co.kr/view.php?tp=1&ud=2014121509490760404|제목=이승훈-김보름, 간발의 차로 은메달 거둬…“외모만큼 실력도 훈훈”|뉴스=뉴스웨이|확인날짜=2017-03-14}}</ref> 2015년 1월 31일 노르웨이 하마르에서 열린 월드컵 5차 대회 1500m 디비전A에서 김보름이 2분00초99의 기록으로 13위에 올랐다. 함께 출전한 노선영(강원도청)은 2분01초39로 16위에 올랐다. 우승은 헤더 리처더슨(미국-1분56초30)이 차지했다.<ref>{{웹 인용|url=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009099237&code=61161111&cp=nv|제목=[빙상 월드컵] 이승훈 부진한 출발… 스피드스케이팅 5차 월드컵 5000m 9위|확인날짜=2017-03-17}}</ref> 2월 1일 열린 3000m 디비전A에서는 김보름이 4분12초38로 11위를 차지했다. 매스스타트에서는 김보름이 25위를 차지했다.<ref name=":24" />
  • 이소선 . . . . 23회 일치
         '''이소선'''(李小仙, [[1929년]] [[12월 30일]] ~ [[2011년]] [[9월 3일]])은 대한민국의 [[노동운동|노동운동가]]이자 민주화 운동가이다. 1970년 11월 13일 아들인 [[전태일]]이 [[평화시장]] 노동조건 향상을 위해 활동하다 분신하자 이를 계기로 노동운동에 투신하였다. 노동운동가들을 자신의 자식처럼 대해 "노동자들의 어머니"라는 별칭을 얻었다.<ref>[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494717.html 노동자의 대모 이소선씨 별세], 한겨레, 2011년 9월 3일</ref> 민주화 운동 중에 희생된 사람들의 가족 모임인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를 만들고 초대 회장을 역임하였다.
         이소선은 1929년 12월 30일 [[경상북도]] [[대구시]] [[대구광역시]] 에서 빈농인 이성조와 김분이 사이의 1남 2녀 중 막내 딸로 태어났다. 호적에는 1930년에 올렸다.<ref name="오마이뉴스연재8">[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985085 이소선의 어린 시절, 그녀는 빈농의 둘째 딸], 오마이뉴스 연재 - 이소선 평전 <어머니의 길> (8), 2014.06.12</ref> 아버지는 "딸 아이를 보니 무릉도원에 온 것 같이 마음이 편안해 지고 아무 생각이 들지 않는다"며 이름을 소선(小仙)이라고 지었다.<ref name="경향신문기획연재2">[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901071742395&code=210000&s_code=af077 "2009 특별기획" 이소선의 80년, 살아온 이야기 (2) - 이 아이 이름은 작은 선녀], 경향신문, 2009년 1월 7일</ref> 이소선이 서너살 때 아버지 이성조는 항일 농촌 운동을 하다 일제에게 발각되어 끌려갔다.<ref name="오마이뉴스연재8" /> 이소선은 아버지가 산으로 끌려가 학살되었다고 회고하였지만<ref name="경향신문기획연재2" />, 관련 기록은 [[한국 전쟁]]을 거치며 소실되었다.<ref name="경향신문기획연재3">[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901081752445&code=210000&s_code=af077 "2009 특별기획" 이소선의 80년, 살아온 이야기 (3) - 네 살 때 멈춘 ‘아버지 기억’], 경향신문, 2009년 1월 8일</ref> 아버지가 죽은 뒤 소작할 땅마저 떼이자 가족들은 감천리에서 더 이상 살 수 없게 되었다. 어머니는 가족을 대리고 나오며 집에 불을 질렀다. 이소선은 평생 아버지가 없는 외로움을 느꼈다.<ref>[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901111829475&code=210100&s_code=af077 이소선의 80년, 살아온 이야기 (4) - 금지된 말이 된 ‘아버지], 경향신문, 2009년 1월 11일</ref> 이소선의 가족은 산 속 상엿집에 머무는 등 이곳 저곳을 전전하다 [[와룡산]] 기슭의 홀어미 집에 더부살이를 하였다.<ref>[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901141753535&code=210000&s_code=af077 이소선의 80년, 살아온 이야기 (5) - 와룡산 아래 더부살이], 경향신문, 2009년 1월 14일</ref>
         새아버지는 어머니 보다 20살이 많았다. 이소선은 어머니의 재가가 마음에 들지 않아 한번도 새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않았다.<ref>[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901151815325&code=210100&s_code=af077 이소선의 80년, 살아온 이야기 (6) - 오빠 살리려 개가한 어머니], 경향신문, 2009년 1월 14일</ref> 일제 말기에 오빠는 징용으로 끌려갔고 이소선은 공출을 위한 관솔가지 꺾기 등을 하며 어렵게 지냈다.<ref name="오마이뉴스연재8" /> 이소선은 학교에 가고 싶었지만 집에서 허락하지 않아 다닐 수 없었다. 한글은 어머니가 재가한 집안에 시집 온 분에게 배웠다.<ref>[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986888 밤새 구구단 외워, 고무신을 상으로 받은 이소선], 오마이뉴스 연재 - 이소선 평전 <어머니의 길> (9), 2014.06.12</ref> 이소선은 집안 몰래 일본이 세운 간이 학교(오늘날의 [[대구서재초등학교]])를 다니는 친구들 틈에 섞여 들어가 구구단을 배웠지만 곧 들켜 매를 맞고 그만두게 되었다.<ref>[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902051758045&code=210000&s_code=af077 "2009 특별기획" 이소선의 80년, 살아온 이야기 (14) - 대물림 된 ‘못배운 한’], 2009년 2월 5일</ref> 헤어진 오빠와는 해방이 되어서도 다시 만나지 못했고 36년 만에야 다시 만날 수 있었다.<ref>[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901221744045&code=210000&s_code=af077 "2009 특별기획" 이소선의 80년, 살아온 이야기 (9) - 일본으로 떠난 오빠], 2009년 1월 22일</ref>
         [[태평양 전쟁]]이 한창이던 1945년 늦봄 열다섯살 이소선은 정신대에 끌려간다며 결혼을 재촉받았지만 결혼할 마음이 없었다. 결국 면사무소 직원이 명령서를 가져왔고 대구에 있는 방직공장으로 끌려갔다.<ref>[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985089 "내가 시키는 대로 해, 안 그러면 정신대에서..."], 오마이뉴스 연재 - 이소선 평전 <어머니의 길> (10), 2014.06.12</ref> 방직공장은 대마로 베를 짜서 군복을 만드는 곳이었다.<ref name="오마이뉴스연재11"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985090 한밤 중 토마토 몰래 따 먹으며 배고픔을 달래다], 오마이뉴스 연재 - 이소선 평전 <어머니의 길> (11),2014.06.12</ref> 이소선은 콩깻묵과 옥수수에 밀가루를 섞은 주먹밥을 먹으며 하루 14시간씩 일했다. 일은 방적기가 쉼 없이 돌아가도록 실을 이어주는 것이었고, 공장 안은 먼지가 뿌옇고 햇빛도 들지 않아 불결하였다. 함께 작업하던 여성이 기계에 빨려 들어가 사망하는 사고도 있었다.<ref>[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902221735035&code=210000&s_code=af077 "2009 특별기획" 이소선의 80년, 살아온 이야기 (21) - ‘근로 정신대’의 슬픈 기억], 경향신문, 2009년 2월 22일 </ref>
         이소선은 매일 매를 맞고 죽을 위험을 겪으며 공장 일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도망을 쳤다. 공장 감시자가 쫓아왔지만 숨겨 주는 사람이 있어 도망칠 수 있었다.<ref>[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902251823435&code=210000&s_code=af077 "2009 특별기획" 이소선의 80년, 살아온 이야기 (22) - ‘정신대 탈출], 경향신문, 2009년 2월 25일</ref> 도망쳐 고향에 돌아온 이소선은 잠시 동안 산 속에 숨어 살았다.<ref>[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985091 "에라 모르겠다" 소선은 눈 딱 감고 뛰어 내렸다], 오마이뉴스 연재 - 이소선 평전 <어머니의 길> (12), 2014.06.12</ref>
         이소선은 1947년 전상수와 결혼하였다. 전상수의 아버지는 대구시 남산동에서 포목상을 하였다. 전상수는 의류 제조 공장에 다니다 [[9월 총파업]]과 [[대구 10·1 사건]]에 가담하였다. [[미군정]]과 경찰의 잔혹한 탄압으로 사건이 마무리 된 후 공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재봉틀을 마련하여 직접 옷을 만들어 팔았다. 이소선은 중매로 결혼하였고 결혼 전에야 신랑의 얼굴을 처음 보았다.<ref>[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903041805215&code=210000&s_code=af077 "2009 특별기획" 이소선의 80년, 살아온 이야기 (25) - 결혼하기 싫어 사흘 굶어], 경향신문, 2009년 2월 25일</ref> 이소선은 남편에게 그리 정이 가지 않았다. 1948년 음력 8월 24일 첫 아들 [[전태일]]을 낳았다. 전태일을 갖을 때 잉어가 구슬을 가슴에 안겨주는 태몽을 꾸었다고 한다.<ref>[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985093 "시집가기 싫어"... 아버지 산소로 도망가다], 오마이뉴스 연재 - 이소선 평전 <어머니의 길> (14), 2014.06.12</ref>
         이소선은 80세의 고령에도 계속하여 부르는 곳이면 마다 않고 참석하였다. 그러나 부른 사람들의 귀에 듣기 좋은 소리만을 하지는 않았다. 2006년 11월 전국노동자대회에서 전태일노동상의 시상을 마치고 내려가다 다시 마이크를 붙잡고 "입으로만 노동자는 하나라고 외치면 뭐 하냐. 가장 밑바닥에서 소외받고 고통당하는 비정규직을 나 몰라라 해서 어찌 민주노총이라 할 수 있냐 …… 손잡고 싸우지 않으면 얼마 못 가 정규직도 비정규직 신세가 될 것"이라고 소리쳤고<ref>[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325965.html 노동자 어머니 이소선 “지금 정규직이라고 천년만년 할것 같냐”], 한겨레, 2008년 12월 5일</ref> 늘 노동자의 하나된 단결을 강조했다. 2009년 전태일 39주기 추모식에 민주노총과 한국노총이 함께 플래카드에 이름을 올리자 이제 되었다며 무척 기뻐하였다.<ref name="연합_전순옥">[http://klsi.org/content/%EC%9D%B4%EC%86%8C%EC%84%A0-%EC%96%B4%EB%A8%B8%EB%8B%88%EC%99%80-%EB%85%B8%EB%8F%99%EC%9A%B4%EB%8F%99 이소선 어머니와 노동운동], 한국노동사회연구소</ref>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이소선은 늘 일자리 나누기와 노동시간 단축으로 위기를 고용문제를 극복하자고 주장하였다.<ref>[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1/09/03/0200000000AKR20110903057900004.HTML "이소선 여사는 따뜻한 마음의 노동운동가"], 연합뉴스, 2011년 9월 3일</ref>
         * 1929년 11월 9일(양력 12월 30일) 경북 달성군 성서면 감천리에서 태어남.
         * 1947년 여름 전상수씨(1924년 12월 7일생)와 혼인.
         * 1964년 2월 단신으로 서울로 올라옴.
         * 1970년 12월 21일 청계피복노조에 대한 당국의 탄압에 항의. 집단자살을 기도. 경찰에 연행됨.
         * 1970년 2월 20일 동화상가에 '후생식당'개소, 노동자를 위해 국수를 삶는 일에 종사.
         * 1980년 12월 14일 계엄사령관의 심사로 석방됨.
         * 1981년 2월 2일 계엄 포고령,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위반등으로 구속. 징역 10월을 받음.
         * 1981년 12월 만기출소.
         * 1985년 12월 12일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 공동의장.
         * 1988년 10월 17일-89년 2월 27일 유가족들과 함께 기독교회관에서 의문사진상 규명 농성 투쟁을 전개함.(135일간)
         * 1990년 2월 전민련 고문 사퇴.
         * 1990년 12월 1일 회갑연.(서강대)
         * 1991년 12월 1일 전국연합 고문 추대됨.
  • 이승엽 . . . . 21회 일치
         |프로 입단 연도 = [[1995년]]
         |드래프트 순위 = [[1995년 한국프로야구 신인 드래프트|1995년]] 고졸우선지명([[삼성 라이온즈]])
         |첫 출장 = [[KBO 리그|KBO]] / [[1995년]] [[4월 15일]] <br /> [[LG 트윈스|LG]]전 <br /> [[일본 야구 기구|NPB]] / [[2004년]] [[3월 27일]] <br /> [[세이부 돔]] 대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스|세이부]]전
         * [[삼성 라이온즈]] (1995년 ~ 2003년)
         감독이 그의 아버지와 협상했다가 불발됐고 그는 야구를 시작할 때까지 단식하겠다고 하여 그의 아버지를 설득시켜 야구를 시작했다. 투구와 타격 모두 뛰어난 자질을 보였다. 그 중에서도 특히 좌완 투수로 좀 더 이름을 알렸다. 그는 경상중학교 재학 당시 [[노히트 노런]]을 기록했고, 재학 시절 [[청룡기 전국고교야구 선수권대회|1993년 청룡기 대회]]에서는 팀을 우승으로 이끌며 우수 투수상을 수상했다.<ref>[[스포츠 조선]] - 2010년 5월 기사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0/05/16/2010051601132.html "최동원, 선동열, 이승엽, 추신수, 봉중근, 이대호, 류현진… 청룡기가 낳은 한국 야구 대들보"]</ref> [[1994년]] 청소년 국가 대표로 선발된 그는 투타에서 고루 활약을 펼치며 팀을 우승으로 이끌었다.<ref>''[[OSEN]]'' - 2007년 12월 기사 [http://www.osen.co.kr/news/Sports_View.asp?gisano=G0712260021&code=110100 "이승엽-이대호, 모교서 방망이 날세운다"]{{깨진 링크|url=http://www.osen.co.kr/news/Sports_View.asp?gisano=G0712260021&code=110100 }}</ref><ref name="homerun">스포츠 춘추 - 2010년 9월 [[박동희 (기자)|박동희]]의 칼럼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7&oid=295&aid=0000000463 "이대호로 본 ‘홈런 타자는 어떻게 탄생하나’"]</ref>
         1995년 한국프로야구 신인 드래프트를 통해 계약금 1억 3200만원, 연봉 1,000만원의 조건으로 투수로 입단하였다. 좌완 투수 유망주였으나 시절 당했던 팔꿈치 부상으로 인해<ref>[[문화일보]] - 2009년 9월 기사 [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09091701032230073002 "이의수의 마흔 이후 남자의 생존법 - 실패는 성공을 잉태한다"]</ref><ref>[[동아일보]] - 2010년 8월 기사 [http://news.donga.com/3/all/20100820/30624874/1 "투수 → 타자 변신 성공시대… 타자 → 투수는 왜 잘 안 될까"]</ref> 입단 초기부터 투수 훈련에 애를 먹은 그는 첫 스프링 캠프에서 당시 타격코치였던 [[박승호 (야구인)|박승호]]로부터 1년만에 타자로 뛸 것을 권유받았고, 이후 좋은 반응을 보여 1루수로 완전히 전향했다.<ref>[[마이 데일리]] - 2010년 8월 기사 [http://www1.mydaily.co.kr/news/read.html?newsid=201008101138562229 "이대호·이승엽·추신수, ‘잘 던져야 잘 친다’… 투수 출신들 맹활약"] {{웨이백|url=http://www1.mydaily.co.kr/news/read.html?newsid=201008101138562229# |date=20140814152842 }}</ref> 그가 타자로 전향하자 ‘좌승엽 우승관’으로 불리며 기대를 받았던 입단 동기 내야수 [[김승관]]은<ref>엑스포츠 - 2010년 7월 기사 [http://xportsnews.hankyung.com/?ac=article_view&entry_id=123613 "추신수와 부산고의 황금 시대를 이끈 한화의 김백만"]{{깨진 링크|url=http://xportsnews.hankyung.com/?ac=article_view&entry_id=123613 }}</ref> 상대적으로 기회가 줄어 [[2004년]] [[롯데 자이언츠|롯데]]에 트레이드된 후 [[2007년]]에 방출돼 그 해를 끝으로 은퇴했다. 타자로 완전히 적응하며 프로 첫 해부터 가능성 있는 모습을 보였다. 점차 그는 거포로서의 재능을 뽐내며 붙박이 3번 타자 겸 1루수로 자리매김했지만 내야수 [[이동수 (야구인)|이동수]]에게 밀려 데뷔 첫 해에 신인왕 수상에는 실패했다. 프로 입단 3년차인 [[1997년]]부터 본격적으로 그의 타격이 정점을 찍기 시작하면서 그는 아시아 프로 야구 역사상 최고의 타자로 거듭났다.<ref>스포츠 춘추 - 2009년 12월 박동희의 칼럼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7&oid=295&aid=0000000338 "양준혁이 말하는 ‘선구안 향상법’"]</ref>
         * [[1995년]]에 2할대 타율, 13홈런, 73타점을 기록해 장거리 타자로서 자질을 보였고, 이후 당시 감독이었던 [[백인천]]에게‘인천 부두 타법’을 전수받은 뒤 본격적인 홈런 타자로 실력을 뽐내기 시작했다.<ref name="sword">스포츠 춘추 - 2010년 2월 박동희의 칼럼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7&oid=295&aid=0000000365 "외다리 타법의 창시자, ‘야구는 도(道)이고, 타격은 검(劍)’"]</ref>
         FA 자격을 취득한 후 [[2003년]] 12월에 계약했다. 연봉은 2억엔이었는데, 당시 팀 멤버 중 그를 제외하고 2억엔이 넘는 선수는 마무리 투수인 [[고바야시 마사히데]]밖에 없었음을 감안하면 파격적인 대우였다. 이런 파격 대우 때문에 팀 내 다른 선수들이 불만을 표시하기도 했는데, 이는 팀이 타 선수들의 대우를 전면적으로 개선하는 것으로 진정됐다. 이듬해인 [[2004년]] [[3월 27일]] 개막전 4번 타자로 선발 출장했고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스|세이부]]의 에이스 투수였던 [[마쓰자카 다이스케|마쓰자카]]로부터 2루타를 기록했다. 하지만 좋았던 첫 시작과 달리 시즌 후 14홈런, 2할대 타율, 50타점이라는 비교적 저조한 성적을 기록했다.
         방출 후 [[2010년]] [[12월 2일]] 1년간 1억 5,000만엔에 옵션이 포함된 연봉을 계약했다. 이 때 투수 [[박찬호]]와 같은 팀이 됐다. 이로써 [[2005년]] 이후 6년만에 다시 [[퍼시픽 리그]]로 돌아와 등번호도 3번으로 정해졌다. 그는 연봉을 대폭 낮추는 등의 백의종군 모습을 보였지만 시즌 전 반발력이 적은 공인구로 교체해 찾아온 극심한 투고타저의 영향을 받아 2할대 타율로 저조한 성적을 남겼다. 하지만 팀의 꼴찌가 확정된 후반기 들어 맹활약하며 시즌 총 15홈런을 쳐 퍼시픽 리그 홈런 순위 8위에 오르는 기대 이상의 모습도 보여줬으나 타율은 리그 전체 최하위였다. 규정 타석 미달로 인해 순위권에 들지 못했다.
         [[2011년]] [[10월 21일]] 기자 회견을 열어 8년 간의 일본 생활을 정리한다는 의사를 밝히고 영구 귀국했다.<ref>{{뉴스 인용|제목='국내 복귀' 이승엽, 日서 기자회견 '굿바이, 오릭스'|url=http://news.sportsseoul.com/read/baseball/979943.htm|출판사=스포츠서울|날짜=2011-10-21|확인날짜=2012-11-26|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131007070317/http://news.sportsseoul.com/read/baseball/979943.htm#|보존날짜=2013-10-07|깨진링크=예}}</ref> 이후 자녀 교육을 위해 서울로 이사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7&oid=076&aid=0002218871 이승엽, 와이프에게 어쩔 수 없는 경상도 남자인가 보다] - 스포츠조선</ref> [[2011년]] [[12월 5일]] 연봉 8억원, 플러스 옵션 3억원에 계약을 체결하며 복귀했다.
         [[2015년 한국시리즈]]에서는 15타수 6안타, 타율 4할의 호성적을 기록했다. 시즌 후 비록 팀은 준우승에 머물렀지만, [[12월 8일]] 열린 [[KBO 골든글러브|골든글러브 시상식]]에서 지명타자 부문 골든글러브를 수상해 [[KBO 리그]] 최초 두 자릿수 골든글러브 수상자가 됐다. 시즌 후 FA 선언을 해 2년 36억원에 잔류했다.
         * [[2016년]] [[2월 25일]]에 팀의 새로운 홈 구장인 [[대구삼성라이온즈파크]]가 준공돼 그 기념으로 [[대구도시철도공사]] 홍보대사로 뽑혀 [[대구 도시철도 2호선]] [[대공원역 (대구)|대공원역]]의 특별 안내방송을 맡게 됐다.<ref>현재는 팀의 성적 부진으로 인해 방송되지 않는다.</ref>
         * '36' (1995년 ~ 2003년, 2012년 ~ 2017년, [[삼성 라이온즈]](영구 결번)
         ** 밀레니엄특집 아듀 20세기 웰컴 21세기 - 스포츠 100년 손기정에서 이승엽까지 (1999년 12월 31일)
         ** [[일밤]] - 불가능은 없다 (2007년 12월 30일)
         ** [[해피투게더 (텔레비전 프로그램)|해피투게더]] - 쟁반노래방 (2003년 12월, 게스트 [[윤도현]], [[장나라]]와 동반출연)
         ** [[힐링캠프 기쁘지 아니한가]] - 국민타자 이승엽 (2012년 11월 19일, 2012년 12월 3일), 신년의 밤 (2015년 1월 19일)
         |style="text-align: center;"|[[1995년 한국프로야구|1995]]
  • 마재윤 . . . . 20회 일치
         2003년 12월 GO(현 [[CJ 엔투스]])팀에 입단하여 프로게이머 생활을 시작하였다. 이듬해 5월 [[Spris MSL 2004]]에 첫 데뷔이후 처음으로 진출하면서 최초로 자신의 이름을 알렸다.
         Spris MSL 2004에 진출한 때와 비슷한 시기인 2004년 7월 13일, 마재윤은 [[KTF 매직엔스]]와의 [[팀리그]] 승자전 4강 경기에 선봉으로 출전한다. 당시 KTF 매직엔스는 주요 대회 우승, 준우승자 출신인 [[홍진호]], [[강민 (프로게이머)|강민]], [[박정석]], [[변길섭]], [[조용호]] 등이 포진한 최고의 팀이었으며, 이미 2004년 2월 팀리그에서 준우승을 차지한 강팀이었다.
         [[우주닷컴 MSL 2005]]에서 박정석(당시 KTF 매직엔스,현 [[KT Rolster]])을 꺾고 첫 우승을 차지한 이래<ref>([http://www.fomos.kr/board/board.php?mode=read&keyno=87478&db=issue&cate=001&page=8&field=&kwrd= e스포츠 타임머신 마재윤, 우주배 MSL 우승 등] [[포모스]], 2008년 8월 6일)</ref> MSL 3회 우승<ref>[http://gmnews.afreeca.com:8109/app/index.php?board=news_esports&b_no=14659&c_no=2&control=view CJ 마재윤 ‘본좌론’에 종지부 찍었다!(종합)] [[파이터포럼]], 2006년 11월 11일)</ref> 을 차지한데 이어, 2007년 2월에는 MSL 5회 연속 결승 진출하여 [[김택용]]과 대결하게 되었다.<ref>([http://gmnews.afreeca.com:8109/app/index.php?board=news_esports&b_no=16411&c_no=2&control=view CJ 마재윤V, 패스트 디파일러-럴커 러시로 5회 연속 MSL 결승 진출] [[파이터포럼]], 2007년 2월 15일)</ref>
         한편, MSL에서의 눈부신 활약과 달리 [[온게임넷 스타리그]]에서는 예선 탈락도 여러차례 하는 등<ref>([http://gmnews.afreeca.com:8109/app/index.php?board=news_esports&b_no=12276&c_no=1&control=view 안상원 듀얼토너먼트 본선 진출 등 오전 1조 종료] [[파이터포럼]], 2006년 6월 28일. 온게임넷 예선에서 안상원에게 패배한 모습)</ref> 부진한 모습을 보여왔다. 그러나 5번째 MSL 결승전을 앞두고 벌어진 [[신한은행 스타리그 2006 Season 3]] 결승에서 [[이윤열]](현 [[위메이드 폭스]])을 3:1로 꺾고 로열로더로써 우승하였다.<ref>([http://gmnews.afreeca.com:8109/app/index.php?board=news_esports&b_no=16484&c_no=1&control=view CJ 마재윤V, 3대1로 이윤열 꺾고 현역 최고 선수 등극!] [[파이터포럼]], 2007년 2월 24일)</ref> 당시 [[엄재경]] 해설위원의 '사람이 신을 어떻게 이깁니까!' 발언과 인상적인 퀸 사용은 한동안 화제가 되었다. 그만큼 당시 마재윤의 실력과 기세는 모든 이들을 압살하는 수준이었다.
         이후에 [[인크루트 스타리그 2008]]에 이어 [[BATOO 스타리그 08~09]]에서도 예선전에서 떨어졌고, [[클럽데이 온라인 MSL 2008]]에서는 [[온게임넷 스파키즈]]의 신예 [[임원기]]를 잡고 복귀했지만, 32강 최종전에서 이윤열에게 또다시 패배하면서 16강 진출에 분루를 삼켜야 했다. 하지만 이후 [[로스트사가 MSL 2009]]에서 다시 32강에 진출, 사상 유례없는 MSL 11연속 진출을 달성했다<ref>[http://www.fomos.kr/board/board.php?mode=read&keyno=90893&db=news [[포모스]], 2008년 12월 18일]</ref>(KPGA시절까지 포함하면 이윤열, 조용호등이 있으나 순수 MSL만 따질 경우 마재윤이 최초이다). 2008년 10월 11일에 펼쳐진 블리즈컨 2008에서는 [[박지수]]와 [[허영무]]를 잡고 결승 진출에 성공했고, 12일에 치러진 결승전에서 이윤열을 만나 2:0으로 승리를 거두고 블리즈컨 2연속 제패에 성공했다.
         마재윤은 집행유예 기간이던 2011년 6월부터 아프리카 개인방송에서 스타크래프트를 하는 모습을 방송하였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e스포츠 관계자들과 게임단에서는 즉각 방송을 중지하라 했지만, 마재윤은 이에 신경쓰지않고 계속 방송을 진행하는 중이다. 승부조작으로 인해 영구제명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개인방송을 진행하여, 많은 e스포츠 관계자들과 팬들로부터 질타와 비난을 받았다. 2012년 3월에는 시간당 돈을 받고 스타크래프트를 강의하겠다는 게시물을 작성하였다. 또한 자신에게 욕을 하거나 비난하는 사용자는 강제로 방송국에서 퇴출시키며, 금칙어까지 만들어 아예 말을 꺼내지도 못하게 하였다. 2013년 2월 자신을 비방한 네티즌들을 다수 고소하기도 했다. 하지만 점점 범죄자라는 타이틀에 대한 혐오감으로 인한 시청자 수의 하락으로 인한 수입 감소로 모든 금칙어와 제한을 해제하고 스스로 조작을 컨셉으로 한 방송을 시도하기까지 하였다.
         마재윤은 영구제명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12월 5일, 중국에서 개최된 스타크래프트 대회에 출전했고 2 vs 2 팀리그에서 우승을 해 상금(15만 위안)까지 챙겨 논란이 되었다. 포모스와의 인터뷰에서 마재윤은 중국 대회에 또 출전할 계획이 있냐는 기자의 질문에 중국 측에서 요청이 온다면 출전할 생각이 있다는 대답을 하였다.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자신이 저지른 짓을 또 다시 되풀이하고 있어, 여전히 큰 비난을 받고 있다.
         신한은행 스타리그 시즌3 결승전에서 만나 마재윤이 3:1로 이기고 본좌에 등극하게 되는, 본좌 검증의 마지막 상대였다. MBC Movies 팀리그 결승전에서 한번 패하였으나 그 후 2007년 2월까지 거의 마재윤이 전승하며 상대전적이 한때 비공식전을 포함해 11:3까지 벌어지기도 했다. 12월1일 펼쳐진 3회 슈퍼파이트에서 마재윤이 [[이윤열]]을 3대1로 잡아내며 한 발 먼저 앞서간 바 있고, 다음해 2월 24일 신한은행 스타리그 시즌3 결승전에서도 마재윤이 이윤열을 3대1로 잡아냈다. 그러나 이후 신한은행 마스터즈 결승전에서 역으로 이윤열이 3:1로 이긴데다가 마재윤이 슬럼프의 늪에 빠지면서 상대전적의 폭도 대단히 좁아지게 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마재윤은 [[에버 스타리그 2008]] 1차 본선에서 2연패로 탈락하면서 오프라인 예선으로 가게 되었다. 다시 2009년 헤리티지 리그에서 풀리그때 1번 이기고 결승에서 2:1로 우승하면서 두 선수간의 상대전적은 공식전만으로는 5:5이나, 비공식전을 포함하면 20:11로 마재윤이 우세하다.
         2005년 4월부터 2007년 2월까지 1년 10개월에 걸쳐 스타크래프트계의 본좌로써 절대권력을 누리던 마재윤은, [[2007년]] 3월 3일, [[곰TV]] MSL 시즌 1 결승에서 당시 [[MBC게임 히어로]] 소속의 신인 프로토스 게이머 [[김택용]]을 만났다. MSL 결승전 예고 동영상에선 김택용이 마재윤을 꺾을확률이 '2.69%'라고 예측되었다.
         2009년 1월 15일, 로스트사가 MSL 개막전에서는 천적 [[김택용]]을 상대로 승리를 따냈다. 이로써 김택용과의 상대전적은 3승 12패(마재윤 기준)가 되었다. 또한 얼마전 치러진 올스타 종족 최강전에서 마재윤이 송병구를 극적인 역전승으로 잡고 그 이어 만난 김택용까지 잡아내며 상대전적을 비공식전까지 포함해 12:4까지 따라잡았다. 그러나 12월 3일 [[NATE MSL 2009]] F조 패자전에서 다시 만난 김택용이 마재윤을 격파하면서 상대전적이 다시 공식전만으로는 6:2 비공식전을 포함해 13:4로 크게 벌어졌다.
         집요하게 마재윤만을 타겟팅하는 이성은 선수는 MSL에서 두 차례 마재윤 선수를 지목했고 매경기 승리를 거머쥐었는데, 급기야 이에 흥분한 마재윤이 헤드셋을 내팽겨치고 GG를 치기 전에 나가 버리는 일도 생겼고(신한은행 프로리그 2007 후기 12월 30일 경기), 결국 이로 인해 경고까지 받았다.
         ** 2007년 12월 30일 이성은 승 vs 마재윤 패 - 신한은행 프로리그 2007 후기리그 In Blue Storm
         ** 2008년 12월 01일 이성은 승 vs 마재윤 패 - 신한은행 프로리그 08~09 2라운드 In Rush Hour 3
         ** 2009년 02월 26일 김명운 승 vs 마재윤 패 - 로스트사가 MSL 8강 A조 1set In Destination 1.1
         ** 2009년 02월 26일 김명운 패 vs 마재윤 승 - 로스트사가 MSL 8강 A조 2set In Byzantium2
         ** 2009년 02월 26일 김명운 승 vs 마재윤 패 - 로스트사가 MSL 8강 A조 3set In Carthage 1.0
         ** 2009년 02월 26일 김명운 승 vs 마재윤 패 - 로스트사가 MSL 8강 A조 4set In 신 청풍명월 2.1
  • 김대환 (법조인) . . . . 18회 일치
         1942년에 [[경상북도]] 에서 태어나 [[서울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하고 제8회 [[사법시험]]에 합격하여 육군 대위를 전역한 이후 판사에 임용되어 서울형사지방법원 [[서울고등법원]] 등에서 판사와 [[서울고등법원]] 등에서 부장판사를 하다가 [[서울고등법원]]에서 수석 부장판사로 재직하고 있을 때인 1999년 10월 11일에 [[수원지방법원]]장에 임명되었다. [[수원지방법원]]장에 임명된 직후인 11월 20일에 수원지역 주민들의 등기민원 불편을 해소할 목적으로 2000년까지 수원시내 택지개발지구에 2개 등기소 를 설립하였으며<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1&aid=0004559307]</ref> 2000년 6월에 [[최종영]] 대법원장이 제청하는 신임 대법관 후보로 거론되었으나<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5&aid=0000008261]</ref> 2000년 7월21일에 [[대전고등법원]]장으로 승진하였으며 2001년 2월 12일에 [[서울고등법원]]장으로 전보되면서 대법원장에 의해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위원에 지명되었다. 서울고등법원장을 끝으로 법관에서 물러났으며 이후 법무법인 율촌에서 송무 Group<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1&oid=016&aid=0000189786]</ref> 변호사를 하다가 2004년 3월 2일에 박영철 고려대 교수와 함께 대법원장 추천으로 공적자금관리위원회 민간위원에 임명되었다. 2013년 4월에는 [[서울중앙지방법원]]과 [[서울고등법원]]을 관할하는 서울법원조정센터 상임조정위원과 센터장을 맡았다.<ref>[http://news1.kr/articles/?1087614]</ref>
         광주고등법원에서 재직하던 1991년 12월 20일에 성폭행한 남자를 보복 상해한 피고인에 대한 항소를 기각하면서 집행유예와 치료감호를 선고한 원심대로 선고하자 성폭행 사건 대책위원회와 전남여성회 등이 재판장과 면담을 요구하며 재판장실을 점거 농성한 사건이 일어났으나 경찰에 강제연행됐다.<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1122100209215009&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91-12-21&officeId=00020&pageNo=15&printNo=21685&publishType=00020 동아일보 1991년 12월 21일</ref>
         [[인천지방법원]] 합의부 재판장으로 재직하던 1986년 2월 15일에 대우자동차 농성 사건
         항소심에서 징역1년6월 구류10일, 피고인 2명에게 징역1년, 그외 3명에게 징역1년 집행유예2년을 선고했다.<ref>동아일보 1986년 2월 17일자</ref>
         [[광주고등법원]] 형사부 재판장으로 재직하던 1991년 12월 20일에 자신을 성폭행한 남자를 살해하여 1심에서 징역2년6월 집행유예3년 치료감호 처분을 받은 김부남에 대한 항소심에서 피고인의 항소를 기각했다.<ref>경향신문 1991년 12월 21일자</ref>
         [[서울고등법원]] 형사1부 재판장으로 재직하던 1992년 10월 2일에 [[대한민국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 [[홍사덕]] 후보의 사생활을 비방하는 흑색 선전물을 살포하다 1심에서 징역1년6월 집행유예3년를 선고받은 안기부 대공수사국 소속 한기용(37세) 사무관과 징역8월 집행유예2년을 선고받은 박재규(29세) 김일환(32세) 전우경(27세) 등 4명에게 "처벌받아야 마땅하지만 대공 수사관으로 남이 알아주지 않는 음지에서 성실히 일해온 모범 공무원인데다 유죄판결로 공무원 자격 박탈되는 점 등을 참작했다"며 원심대로 선고했다.<ref>동아일보 1992년 10월 2일자</ref> 1993년 2월 26일 [[5공화국]] 비리로 구속되어 1심에서 징역2년 집행유예3년을 선고받은 전 치안본부 정보1과 분실장 서정희(48세 당시 청와대 정부수석 비서관실 파견)에 대해 혐의사실 중에 일부만 유죄를 인정하여 선고유예 판결했으며<ref>동아일보 1993년 2월 26일자</ref>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에 대해 은폐, 조작하여 2심에서 무죄가 선고되었다가 대법원에서 파기환송된 전 치안본부 5차장 박처원(65세)에게 범인도피죄를 적용해 1심대로 징역1년6월 집행유예3년을 선고했다.<ref>한겨레
          1993년 2월 27일자</ref> 4월 2일에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으로 기소돼 2심에서 무죄를 선고받고 대법원에서 파기환송된 치안본부장 강민창(60세)에 대해 징역8월 집행유예2년을 선고하면서 직권남용에 대해 "부검의가 직책상 피고인의 지시를 받을 위치에 있지 않다"는 이유로 무죄판결했다.<ref>한겨레 1993년 4월 3일자</ref> 8월 23일에 [[김근태]]에 대한 고문한 혐의로 법원에서 재정신청을 인용하여 공판에 회부된 치안본부 대공수사국 소속 김수현 경감에 대해 특정범죄가중처벌법 불법체포,감금, 형법 독직 폭행죄를 적용해 징역3년 자격정지2년, 그외 백남은 경정과 김영두, 최상남 경위에 대해 징역2년~1년6월을 선고하면서 법정구속했다.<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3082400289101004&editNo=5&printCount=1&publishDate=1993-08-24&officeId=00028&pageNo=1&printNo=1655&publishType=00010 한겨레 1993년 8월
         징역15년을 선고받고 1988년 가석방되었으나 1995년 보안관찰 처분을 갱신하자 낸 소송에서 "재범 위험성을 인정할 충분한 이유가 없다"며 원고 승소 판결했다.<ref>한겨레 1997년 1월 22일자</ref> 5월 20일에 1994년 인천 북구청 세무계장으로 있으면서 지방세 55억여원을 횡령하여 1심에서 징역22년6월 벌금40억원 선고받자 전재산 사회 헌납 약속으로 2심에서 벌금없이 징역22년6월만 선고된 안영휘의 가족이 "가족 명의의 재산을 압류한 것은 부당하다"며 청구한 소송에서 "구청은 안씨 명의의 부동산을 처분해 20억여원을 환수하라"는 원심을 깨고 원고패소 판결했다.<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7052100329123005&editNo=45&printCount=1&publishDate=1997-05-21&officeId=00032&pageNo=23&printNo=16110&publishType=00010 경향신문 1997년
         징역5년을 선고받은 [[권영해]] 전 안기부장이 청구한 보석 신청에 대해 "증거인멸할 우려가 있고 병세가 심각하지 않다"며 기각했다.<ref>경향신문 1998년 12월
          1일자</ref> 12월 1일에 대통령 선거에서 [[김대중]] 후보를 비방하는 기자회견을 열어서 1심에서 징역2년이 선고된 윤홍준에게 징역1년6월을 선고하면서 같은 혐의를 받은 전 안기부 해외조사실장 이대성도 징역1년6월을 선고했다.<ref>한겨레 1998년
          12월 2일자</ref> 12월 8일에 불공정행위 조사와 관련해 기업체로부터 3200만원의
         뇌물을 받아 1심에서 징역2년6월이 선고된 이강우 전 공정거래위원회 위원장에 대해 "공직생활 중에 성실히 근무한 점 등을 고려할 때 실형은 과중하다"며 원심판결을 파기하면서 징역2년6월 집행유예3년을 선고했다.<ref>동아일보 1998년 12월 9일자</ref> 12월 24일에 대학원 연구과정을 수료한 뒤 선거 인쇄물에 대학원 총동문회 이사라고 기재하여 허위사실공표죄로 기소된 피고인에 대해 벌금80만원을 선고했다.<ref>매일경제 1998년 12월 25일자</ref> 1999년 1월 22일에 윤홍준 기자회견, 오익제 편지사건 등 [[안기부]] 북풍공작을 주도한 [[권영해]]에 대해 원심대로 징역5년
  • 박홍우 . . . . 17회 일치
         '''박홍우'''(朴洪佑, [[1952년]] [[7월 2일]] ~ )는 [[대한민국]]의 [[법조인]]이다. 2014년부터 2016년 2월까지 [[대전고등법원]] 법원장을 지냈다.
         대전고등법원으로 재직하던 2015년 2월 대전고등법원 제3행정부 재판장으로서 행정본안재판의 일부를 직접 맡았으며 가장 기억에 남는 사건으로 서울고등법원 배석판사 시절인 1995년 시위 진압과정에서 최루탄에 도망가다가 넘어져 질식사 사망한 성균관대 학생의 유족이 국가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청구사건에서 국가의 손해배상책임을 인정하고 망인의 위자료를 5000만원 인정한 것과 2004년 [[세녹스]]의 석유사업법 위반 사건에서 1심에서의 무죄판결을 파기하고 유죄를 선고한 것을 들었다.<ref>[http://www.joongdo.co.kr/main/view.php?key=201509100056]</ref>
         * [[2014년]] [[2월 13일]]~ [[2016년]] [[2월]] 대전고등법원장 <ref>[http://focus.chosun.com/people/people01.jsp?id=16747 조선 포커스]</ref><ref>[http://www.kcllaw.com/prof/?no=667]</ref>
         * [[2013년]] [[4월 1일]]~ [[2014년]] [[2월 12일]] 서울가정법원장(겸임)
         * [[2012년]] [[9월 5일]]~ [[2014년]] [[2월 12일]] 서울행정법원장
         * [[2010년]] [[2월 2일]]~[[2011년]] [[5월 14일]] 서울중앙지법 형사수석부장판사
         * [[2006년]] [[2월 2일]]~ [[2010년]] [[2월 1일]] 서울고등법원 부장판사
         * [[2005년]] [[2월 2일]]~ [[2006년]] [[2월 1일]] 대구고등법원 부장판사
         * [[2004년]] [[2월 2일]] ~[[2005년]] [[2월 1일]] 서울중앙지법 부장판사
         * [[1995년]] ~ [[1997년]] [[종합유선방송위원회]] 제5심 위원회
         * [[1993년]] ~ [[1995년]] 서울민사지방법원 판사
         * [[1993년]] ~ [[1995년]] [[헌법재판소]] 연구관 파견
  • 황치열 . . . . 17회 일치
         '''황치열''' (黃致列, [[1982년]] [[12월 3일]] ~ ) 은 [[대한민국]]의 [[가수]]이다.
         * 2007년 2월 1st Digital Single 앨범 《[http://www.melon.com/album/detail.htm?albumId=344865 치열(致列)]》을 발표하고, '한번만'을 타이틀 곡으로 본격적인 가수 활동을 시작.
         * 2007년 2월 13일 디지털 싱글 [http://www.melon.com/album/detail.htm?albumId=344865 《치열(致列)》]
         * 2014년 12월 10일 디지털 싱글 [http://www.melon.com/album/detail.htm?albumId=2294549 《치열Ten2 - 경상도 남자》]
         * 2017년 2월 21일 디지털 싱글 [http://www.melon.com/album/detail.htm?albumId=10040346 《Fall, in girl Vol. 3》] (With [[슬기]])
         * 2018년 2월 10일 - 드라마 《[[화유기]] OST Part 7》 - 〈그 언젠가 기적처럼〉
         * 2007년 2월 22일 - 정규 5집 《프리스타일 - 수취인 불명》 - 《마지막 여정》 객원보컬
         * 2011년 12월 22일 - 싱글 《쥬얼리- Dream Come True》 - 〈날개〉 with 김희선(가수)
         * 2016년 2월 5일 - 중국 나는 가수다 시즌4 4회 '''1위''' 《[http://www.hunantv.com/v/1/290525/c/2975595.html# 뱅뱅뱅 무대영상]》[http://weibo.com/p/10151501_60084672?from=page_101515&mod=home_hotsong&coflag=page_home_remen weibo 음원]
         * 2016년 2월 12일 - 중국 나는 가수다 시즌4 5회 '''6위''' 합산 '''종합3위''' 《[http://www.hunantv.com/v/1/290525/c/2978373.html# 묵(默)무대영상]》[http://www.weibo.com/p/10151501_60114266?from=page_101515&mod=home_hotsong&coflag=page_home_remen weibo 음원]
         * 2016년 2월 19일 - 중국 나는 가수다 시즌4 6회 '''3위''' 《[http://www.hunantv.com/v/1/290525/c/2986878.html?start_time=1# 고해(苦海)무대영상]》[http://www.weibo.com/p/10151501_60145519 weibo 음원]
         * 2016년 2월 26일 - 중국 나는 가수다 시즌4 7회 '''4위''' 《[http://www.mgtv.com/v/1/290525/c/2996071.html# 혼자만의 기나긴 시간(一个人的天荒地老)무대영상]》[http://weibo.com/p/10151501_60180493/home?from=page_100406_profile&wvr=6&mod=latest#place weibo 음원]
         * 2015년 12월 05일 [[문명진]] 단독 콘서트 게스트
         * 2015년 12월 30일 [[KBS 가요대축제]] 단독무대 '나보다 조금 더 높은 곳에 니가 있을 뿐', 산들과 '먼지가 되어' 콜라보무대, 불후의 5인방 '생각이나' 콜라보무대
         * 2015년 11월 20일 [https://web.archive.org/web/20151208080652/http://www.geekmag.co.kr/etc/notice.asp?boardNo=1962 매거진 GEEK 발행12월호] '슈퍼루키라고 불리는 사나이'
         * 2015년 12월 1일 [http://www.campl.co.kr/content/content_read.asp?idx=7471&bigcate=2&subcate= 매거진 CAMPUS PLUS 발행 12월호]{{깨진 링크|url=http://www.campl.co.kr/content/content_read.asp?idx=7471&bigcate=2&subcate= }} 패션화보 촬영 및 인터뷰
  • 박진성(시인) . . . . 16회 일치
          * [[클로저스 티나 성우 교체 논란]]과 [[레진코믹스 집단 환불 및 탈퇴 사태]]에서 극단적 페미니스트적 성향을 보였던 [[이자혜]] 작가를 옹호하는 글을 올려 논란이 있었다. 하단에 서술된 성폭행 무고사건에 휩쓸린 후, 2017년 12월부터 [[웃긴대학]] 커뮤니티를 시작하였는데, 이 때 한 유저의 이자혜 작가 옹호발언에 대한 해명글을 요구하였고, 이에 답하였다. [[http://web.humoruniv.com/board/humor/read.html?table=pds&number=728608|해명글]]을 요약하자면, (지금으로선 상상하기 힘들겠지만) 당시에 이자혜 작가는 명실상부 '''촉망받고 있는 작가'''였으며, 본인이 알고 있었던 점과 비교해 볼 때, 이자혜 작가가 그런 사람인 줄 전혀 몰랐다는 입장. (덧붙여 그 사람의 모든 것을 알수도 없을 뿐더러, 메갈의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그녀가 과거 쓴 트위터에 대한 답변으로는 '할 말을 잃었습니다. 할 말을 잃었을 때는 침묵하거나 사과드리는 게 맞겠지요. 죄송합니다.' 였다. 성폭행 무혐의 사건 이후에 페미니스트들에 대한 관점이 바뀐 듯 하다. 다만, 본인도 메갈 때문에 힘든 일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이자혜 작가가 자신을 성찰하고 잘못됨을 인지하려 한다면, 그에 대한 기회는 주어야 한다는 입장이다.
         박진성 시인이 이후에 공개한 카카오톡 내용을 보면 익명으로 폭로한 최초 폭로자는 박진성 시인이 자신이 누구인지 알아차리자 "그럼 본명 말해도 돼요?"라고 실명 폭로할 것임을 협박하며, "주실려면 저는 돈이 좋습니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 발견된다.[[http://www.news-paper.co.kr/news/articleView.html?idxno=6537|#]] 전형적인 [[꽃뱀]]의 수법으로 보인다.[* 이후 사건 전개 과정에서 성희롱을 당했다는 본인이 그 트윗 내용을 스스로 삭제했다. 이는 허위 사실 적시 명예훼손으로 처벌받을 것이 두려워 스스로 삭제한 것으로 알려졌다. 최초 폭로자가 한 말과 [[탁수정]]이 한 말이 비슷한 내용이라 혼동하는 사람이 많은데, 박진성 시인은 2018년 2월엔 [[https://twitter.com/poetone78/status/967662925585432576|최초 폭로자는 의혹이 언론에 보도되자 계정을 폭파했다]]고 했고 7월 22일엔 이 사람이 김○○이라고 밝혔다(이름을 밝히게 된 것은 7월 19일에 자신이 그 최초 폭로자였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나타나 사과를 했는데 이 트위터 계정이 박 시인의 다중계정 중 하나라는 의혹이 제기되었기 때문이다. 이 의혹에 대한 자세한 건 '자살 시도와 이와 관련된 그의 이후 행적'을 참조.).]
         이 주장을 처음으로 기사화한 것은 [[한국일보]] 소속의 황수현 기자이며, [[http://www.hankookilbo.com/v/0564032fc2164032b7c5c3af3f668c50|이 기사]]([[https://archive.is/uTwCo|@]])를 보면 [[메갈리아]] 성향의 [[페미니스트]]로 보인다. 위의 보도 이후로는 대표적인 [[기레기]]로 평가되고 있다. 박 시인은 2017년 2월에 한국일보와 황 기자를 상대로 정정보도 및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시작했다. 2018년 4월 27일에 말하길 26일이 1심 6차 변론 기일이었는데, 한국일보 측이 정정보도를 할 것은 확실해졌고 손해배상의 규모 정도만이 남은 기일 동안 정해질 것 같다고 한다.[[https://twitter.com/poetone78/status/989895731627474944|#]] 그리고 7월 18일에 1심에서 승소, 한국일보와 황수현 측이 정정보도와 함께 5천만원의 배상금을 지불하라는 판결이 나왔다.[[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004&oid=006&aid=0000092780|#]]
         그러나 허위로 밝혀졌음에도 여전히 정신 못차리는 인간들이 오프라인과 온라인 가리지 않고 많다. [[아몰랑|조리돌림해놓고 사과 한 마디도 하지 않는 건]] 양반이고, 아직도 허위사실을 유포하고 있다. [[https://twitter.com/poetone78/status/934804441760350208|#1]][[https://archive.is/LXMJh|@1]][* 첫번째 예시에 나온 사람은 트위터와 인스타그램에서 리을과 시옷이라는 닉네임을 쓴 적 있고 김여선 또는 이선이라는 이름을 쓰고 있으며, 주점 레스토랑 Cooper Room(카퍼룸)([[https://twitter.com/Copper_Room_|#트위터 계정]][[https://store.naver.com/restaurants/detail?id=37996846|#네이버 플레이스 정보]])에서 일하는 요리사이자 시인 지망생[[https://twitter.com/satoy_0045/status/928626634474663936|#]][[https://archive.is/Nhple|@]]인데, 이 사건에서 [[https://twitter.com/poetone78/status/926453624502284288|박 시인에게 무고죄로 고소당한 2명 중 한 명]]([[https://archive.is/yofTZ|@]])이다. 무고죄로 기소유예를 받은 뒤에 트위터 계정을 완전히 삭제했다가 파란이 사그라들자 다시 계정을 복구하였다. 여러 문학 작품들만 인용하는 식으로 한동안 이 건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다가 [[탁수정]]과 박 시인 간의 설전에서 자극을 받았는지 2월에 갑자기 박진성 시인을 공격했었는데, 김여선의 전과를 아는 사람들이 있어서인지 반응은 대체로 싸늘한 편이었는데다 도리어 대중들이 자신의 죄를 역으로 캐묻기 시작하자 수세에 몰린 것을 직감했는지 다시 트윗들을 삭제했고, 사태가 다시 잠잠해지자 자신을 비판했던 이들을 고소할 것을 선언했다. 3월에 또 박 시인을 공격했지만 예전에 비해 호응해주는 사람이 없어서인지 며칠 후부터는 다른 일에만 전념하고 있는 듯했는데, 4월 16일에 [[https://twitter.com/poetone78/status/985887446482042883|'이후의 삶' 펀딩을 망치기 위해 다른 사람인 척해서 거금을 후원하겠다고 했다가 취소하려는 수작이 들켰다]]고 한다.][[https://twitter.com/poetone78/status/923667324225306624|#2]][[http://web.archive.org/web/20171127054338/https://twitter.com/poetone78/status/923667324225306624|@2]][* 유진목이라는 1인 영상 제작사 목년사를 운영하고 있는 작가다. [[http://www.yes24.com/24/AuthorFile/Author/171395|#]]] 심지어 이 중 [[https://twitter.com/poetone78/status/934776705218068482|송승언]]([[https://archive.is/HxWyl|@]])이라는 사람은 [[http://moonji.com/bookauth/9173/|월간 문예지 현대문학으로 등단한 시인]]인데 2017년 5월 17일 이후로 주로 트위터에서 박진성 시인을 성폭력 가해자로만 단정짓고 이야기했으며, 무혐의 처분 후에도 사과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https://twitter.com/search?f=tweets&vertical=default&q=blanknoose%20박진성&src=typd|#]][[https://archive.is/286Iy|@]] 이후 박진성 시인의 무고가 확실해지면서 자신에게도 비난의 목소리가 이어지자 한동안 [[https://twitter.com/blanknoose|트위터 계정]]을 비공개로 전환하였다가 사태가 잠잠해지면 다시 공개로 전환하는 것을 반복하고 있다.[* 웃긴 것은 2017년 5월 24일부터 자신의 전 연인이자 후배 문학도에게 '문단창녀'라 성희롱한 사실을 숨기기 위해 박진성을 이용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으며, 송승언은 이에 대응하지 않고 자신에게 비판하거나 박진성 편을 드는 자들은 무시당해도 싸다는 정신승리로 침묵하고 있으며 박진성 시인을 모욕했다는 증거를 삭제하고 있다(증거 자체는 예전부터 삭제하고 있었다고 한다.). [[https://twitter.com/poetone78/status/867579611017658372|#1]][[https://archive.is/z5QTN|@1]][[https://twitter.com/blanknoose/status/936928452875186180|#2]][[https://archive.is/IMg8R|@2]][[https://twitter.com/poetone78/status/899014088801386496|#3]][[https://archive.is/IdmMq|@3]]]
          * 2017년 12월 2일, 오전 1시 29분 '''자살을 암시하는''' [[https://twitter.com/poetone78/status/936633260062285824|트윗]]을 작성하여 우려가 이어졌다. 오전 1시 31분에 박진성 시인의 블로그에 '굿바이'라는 한 마디를 남기고, 이후 블로그 갱신은 멈춘다. [[http://blog.naver.com/poetone/221153390296|해당 블로그 링크]] 이후 약을 먹고 쓰러진 박진성 시인을 박 시인의 어머니가 발견하여 119를 불러 병원에 실려가 14시간 만에 의식이 돌아왔다는 내용을 박진성 시인의 아버지라고 밝힌 사람이 트위터에 올린다. [[https://twitter.com/home_awaytwo/status/936878516280311809|해당 트위터 내용]] [[http://www.huffingtonpost.kr/2017/12/03/story_n_18712984.html|해당 기사 자료]]
          * 2017년 12월 7일, 오전 00시 47분에 의식을 회복하고 블로그에 첫 글을 남긴다. 그 이후에는 언론들에게서 받은 심적 피해가 심대했는 듯, 한국일보 황수현 기자를 고발하는 글 등 언론들의 무고 관련 보도 태도에 관하여 문제를 제기하는 내용들을 남기기 시작한다. 또한 블로그의 내용을 보면 박시인의 아버지 분도 거기에 적극 협력하고 있는 듯하다. [[https://blog.naver.com/poetone/221157223698|해당 게시글 링크]]
          그 와중에도 페미니스트들과 박진성 시인을 앞장서서 비난했던 사람들은 '자살하면 죄가 없어지냐' 같은 소리를 하거나 '박진성이 자살하기 전에 여성 습작생들에게 집적거렸다', '과거에도 자살을 빌미로 여자들을 꼬시고 동정심을 유발했다(본인의 고백 내용)' 같은 주장을 유지하고 있다. 그나마도 2017년 12월 7일 기준으로, 트위터를 이용해 마녀사냥한 주요 오프라인 가해자들은 비판을 받아 재판에 불리해질 것 같아 비공개로 돌리거나 계정을 폭파시키기까지 했지만, 가해자들의 편을 드는 SNS에서의 옹호자들([[https://twitter.com/poetone78/status/969276420290576384|#]][[http://archive.is/meecs|@]][* 이 사례는 Holden 🔻Weatherfield라는 닉네임과 psychokinesis23이라는 아이디를 쓰는 [[페미니즘]] 계정이다. 성향은 [[메갈리아]] 옹호자이자 가해자 [[이준행]]에게 [[재기#s-6|재기]]라는 [[남성혐오]] [[고인드립]]을 들은 피해자 [[전우용]]이 [[전우용#s-4.3|고소하다 용서한 사건]]의 가해자를 옹호하고 피해자를 비난한 사실만 보아도 알 수 있다([[https://twitter.com/psychokinesis23/status/772794350883315713|#옹호증거1]][[http://archive.is/gGvKe|@1]][[https://twitter.com/histopian/status/772787036306546688|#옹호증거2]][[http://archive.is/QG3O0|@2]]). 특히 박진성의 자살시도가 성공해야 기네스북에 올라갈 거라는 조롱을 일삼은 점을 자신의 취향으로 추정되는 아이디와 연관지어 해석해보면, ''''염동력이라는 초능력이 있다면 저 시인을 자살로 몰고갈 수 있을 텐데''''라는 입장으로도 생각할 수 있다는 점에서, [[페미니즘]]의 [[진영논리]]에 휩싸인 나머지 [[사이코패스|자기 진영 일원의 범죄의 피해자에 대한]] [[소시오패스|공감을 잃은]] 최악의 사례라 할 수 있다.])은 아예 사건에 입을 다물거나 익명의 계정에 숨거나 검색을 막기 위한 부계정과 스팸계정을 아직도 만들어 사용하고 있다. [[https://twitter.com/No_JS_OK|해당 트위터 링크]] 이들은 어쨌든 관계를 맺고, 인정한 사실을 발설하더라도 [[지랄 옆차기 하네|해당 상황은 사실적시 명예훼손에 따른 보호 조치라고 설명한다.]]
          * 2018년 2월 초에도 [[트페미|어떤]] [[위근우#s-3.8|사람]][[페미니스트|들]]이 열심히 박진성 시인의 트위터로 계속해서 허위사실을 유포하길 멈추지 않고 있다([[http://archive.is/Di77O|@]] [[http://archive.is/4nRQ2|@2-1]] [[http://archive.is/zevjR|@2-2]] [[http://www.todayhumor.co.kr/board/view.php?table=sisa&no=1019438|#3]][[http://archive.is/UwWpI|@3]]). 결국 박진성 시인이 다시 고소 예고([[https://twitter.com/poetone78/status/959747957577850880|#]][[http://archive.is/4fn3p|@]][[http://down.humoruniv.org//hwiparambbs/data/editor/pdswait/e_4874374550_17a4b38c35c9327bb9b850b6f454c7fcb0b6aeae.png|#2]][[http://archive.is/WcO2d|@2]])를 하였고, 우선 자신의 해명 요청을 여러 차례 묵살했던 [[위근우]]에게 먼저 [[https://twitter.com/poetone78/status/960171592985624576|선전포고를 날렸다.]] 그러나 위근우는 이에 대해서 여전히 무응답으로 일관하고 있다.
          * 2018년 2월 7일 [[JTBC 뉴스룸]]에서 [[탁수정]]을 인터뷰하며 [[미투 운동]]을 보도한 것([[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437&aid=0000174513|#]])을 보고 격분, [[https://twitter.com/poetone78/status/961266038443659264|그동안 거절해 왔던 무고 관련 인터뷰에 자진해서 나서겠다]]고 밝히고는 그녀를 비난했다. 그리고 탁수정이 이에 대해 반박한 것을 시작으로, 둘 사이에서 4월까지 설전이 진행되었다.[[http://kingshandle.tistory.com/488|2월 9일 시점에서 정리된 글]][* 이 글은 설전 초반의 상황이 정리된 글로, 그 이후 상황까지 정리된 글은 없다.] 실제로 박 시인은 2월 28일에 '''[[MBN]]과 이와 관련된 인터뷰를 했다.''' [[http://naver.me/FdNCVQm4|#]]
          2월 19~20일에 그는 이 상황을 보면서 부정적으로 반응하는 트위터리안들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했고[* 대다수는 그를 비난하거나 비아냥거린 거였지만, 비난하는 게 아닌 경우에도 민감하게 반응했기 때문에 그에게 트위터를 잠깐 쉬는 게 좋을 거 같다고 멘션을 보낸 트위터리안도 있다. 당시 위에서 설명한 무혐의 처분 결정을 탁수정이 공개하고 박진성 시인이 탁수정의 이중잣대를 지적한 탓에, 트위터 내에서 이 설전에 대한 관심이 높은 편이었다.], 마녀사냥을 그만하라는 의미로 [[https://twitter.com/poetone78/status/965692582637453312|자신의 손목에 남아 있는 흉터를 공개]]하기까지 했다.[* 박진성 시인이 카톡 대화 전문 공개 등을 요구하는 것에 대해, [[탁수정]]이 이에 대해 자살 시도까지 비꼬는 투로 그러면 병원 영수증을 내놓으라는 식으로 공격하자 2월 28일엔 병원 의무기록지를 공개했다(저 공격을 하기 전에 탁수정과 탁수정을 지지하는 측이 그의 자살 시도에 대해 부정적으로 반응하고 있었기 때문에 단순히 공개하라고 해서 한 것이라기보다는, 이에 대해 더 이상 공격하지 말라는 의미로 굳이 공개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 말하자면 최후의 카드였던 셈.). 이후 그녀는 자신은 떳떳하니까 전문 공개하려면 하라고는 했으나 병원 의무기록지를 공개한 것 자체에 대해서는 별 다른 반응을 하지 않았다.] 2018년 4월 11일에는 [[https://twitter.com/poetone78/status/983915291196342273|다시 자해를 시도]]하기까지 했다. 여전히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는 중으로 [[리스트컷 증후군]]도 의심해볼 수 있는 상황. 이 일 때문에 입원하게 된다면 자신이 진행 중인 싸움이 전부 중지되기 때문에 버티고 있었지만, 며칠 뒤에 [[당뇨병]] 악화라는 다른 이유로 한동안 입원했었다.[* 탁수정이 또 영수증을 요구할까봐 미리 공개했다. [[https://twitter.com/poetone78/status/985796927143927808|#]]]
          * 2018년 2월에 2016년 10월 이후로 트위터 내에서 본인에 대해 조롱한 트윗을 모은 책 '혐오의 시대'(가제)라는 책을 낼 예정이라고 말했다. 당시 "아무리 생각해봐도 가장 치욕스러운 건 활자로 책으로 남겨서 후대로 만방으로 기록해두는 것. 그러니까 네가 사라지고 없어져도 너의 더러운 말들은 영원히 살도록 그렇게 영원을 살아서 누군가 너를 기억할 때 너의 더러운 말들이 너의 얼굴이 되도록 해주는 것. 그게 진짜 치욕인 것."이라고도 말했다. 3월 28일엔 트위터의 조리돌림에 대해 분석한 책을 낼 예정이라고 말했는데 이 책을 말하는 듯.
         2018년 시점에서 그의 성폭력 무고 사건이 유명한지라 미투 운동의 허위 고발에 대해 이야기할 때 이 사건도 같이 언급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헤럴드팝은 미투 운동과 관련한 부작용을 이야기할 때 허위 폭로의 대표적인 사례로 배우 [[곽도원]]을 언급하면서, 이와 유사한 사례로 박 시인의 건도 언급했다. [[http://entertain.naver.com/read?oid=112&aid=0003005389|2018년 2월 26일 네이버-헤럴드팝 [POP초점] 끊임없는 폭로전…#미투 운동이 가진 양날의 검]] 또한 박 시인 본인이 미투 운동과 관련된 활동을 하고 있는 탓인지, 그가 미투 운동 무고 피해자 중 한 명인 걸로 잘못 아는 사람들이 꽤 많다.
          * 2018년 2월 새벽을 기점으로 [[https://namu.wiki/history/%EB%B0%95%EC%A7%84%EC%84%B1(%EC%8B%9C%EC%9D%B8)|r143 버전]]부터 박진성 시인의 [[블로그]], [[트위터]] 계정명과 동일한 아이디의 [[위키러]]가 이 항목을 수정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아 [[나무위키]]에도 출연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같은 날 새벽 박진성 시인이 자신이 활동하고 있는 [[웃긴대학]] 커뮤니티에 [[http://web.humoruniv.com/board/humor/read.html?table=pds&number=743737|이러한 글]]을 올렸는데, '''[[이파리]]가 떨어진다'''는 표현이 이 [[나무위키|'''나무'''위키]]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냐는 추측이 있다.] 이후 박진성 시인의 [[나무위키]] 가입 여부를 언급했던 위키러가 정말 박진성 시인 본인이 위키에 가입한 것인지를 알고 싶었던 것인지 이 항목에 토론을 올렸다. [[https://namu.wiki/thread/RBRLvDusL3QxF9GCGwhXK5|#]] 본인의 답이 없어 토론이 닫혔으나, 이후 웃대에 박진성 시인이 [[http://web.humoruniv.com/board/humor/read.html?table=pds&number=744267|나무위키에 대한 글]]을 올렸고, 3월 21일 [[리얼뉴스]]와의 인터뷰에서도 이 문서의 혐의와 핍박 항목을 언급한 것으로 보아 이 문서를 주시하고 있는 것은 분명해졌다.
  • 추경호 . . . . 16회 일치
         * 1993년 2월: 경제기획원 경제기획국 사회개발계획과, 경제홍보과, 지역과
         * 1996년 2월: 재정경제원 경제정책국 종합정책과 서기관
         * 2005년 12월 ~ 2005년 10월: 재정경제부 금융정책국 금융정책과장
         * 2016년 12월: 새누리당 정책개발단 위원
         * 2016년 12월: 새누리당 재창당혁신추진테스크포스 위원
         * 2016년 12월 ~ 2017년 2월: 새누리당 정책위원회 부의장
         * 2017년 2월 ~ 2018년 12월 : 자유한국당 경제정책위원장 겸 정책위원회 부의장
         * 2017년 2월 ~ 2018년 5월: 제20대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조세소위원회 위원장
         * 2017년 12월 ~ 2018년 5월: 제20대 국회 4차 산업혁명특별위원회 위원
         * 2018년 2월 ~ 2018년 5월: 자유한국당 지방선거총괄기획단 지방선거기획본부 공약소위 위원
         * 2018년 12월 ~ : 자유한국당 대구시당 달성군 당협위원장
         * 2018년 12월 ~ : 자유한국당 경제정책위원장 겸 정책위원회 부의장
         * 2018년 12월 ~ : 자유한국당 정책조정위원회 제3정조정위원회(기재·정무·예결) 위원장
         2014년12월 고려대학교 경영대학 교우회가 주관하는 ‘올해의 교우상’을 받았다. 이 상은 1980년부터 고려대 경영대 교우회가 각 부문 특성에 맞춰 뛰어난 동문에게 수여하고 있는데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실천하는 품성과 덕망도 함께 평가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 정재학 (1856년) . . . . 15회 일치
         '''정재학''' (鄭在學, 1858~1940)은 [[대한민국]] [[금융업계]]에 거대한 족적을 남긴 [[민족자본은행]]의 [[개척자]]이자 일제 강점기 한국은행산업의 대부다 .<ref name="ReferenceA">고승제, <<끝없는 도전 세기의 기업-기업가 이야기>> (한국경제신문, 1991), 제7편 2. 정재학/은행업의 개척자 p.351~367</ref><ref>매일경제 1982년 12월 8일~19일 9면 "재계산맥 대구은행 1~19편"</ref> 조선 말기부터 일제 치하에서는 [[은행]] 경영진들이 [[관료]]나 [[왕실]] 지방 토호 가운데에서 배출됐지만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맨주먹으로 일군 자금으로 55세 무렵 [[은행장]]에 오른 경우는 그가 유일하다.<ref name="ReferenceB">고승제, <<끝없는 도전 세기의 기업-기업가 이야기>> (한국경제신문, 1991), 제7편 2. 정재학/은행업의 개척자 p.351~363</ref><ref>서광운, <<한국금융백년 >> (창조사, 1970) p667~670</ref>
         또한 그의 민족계 은행 경영 노하우는 그의 혈맥을 통해 전해지면서 1950년 중반 [[조흥은행]]은 초우량 기업으로 성장한다. [[대한민국]] [[증권거래소]]가 개장된 1956년 [[조흥은행]]은 국내 기업 중 최초의 [[상장사]]로 등극했다.<ref>경향신문 1998년 4월 10일 9면</ref><ref>서울경제 온라인판 2006년 3월1일 16:55 입력 조흥은 '최초 은행 1호 상장사' 숱한 기록 http://economy.hankooki.com/lpage/economy/200603/e2006033116560370100.htm</ref><ref>한겨레 1992년 2월 28일 19면 상장사 12개로 증권시장 첫발</ref>
         {{출처|날짜=2015-1-12|1883년 이남숙(1864년생)과 결혼 한 뒤 1885년 장남 정응원이 태어나자 더 많은 돈이 필요하게 됐다.}} 아내에 대한 애정도 깊었던 것으로 보인다. 결혼 후 장사 밑천을 마련하기 위해 근검절약 해오면서 부인에게 옷 한 벌도 해주지 못했다고 한다. 낡아 찢어진 아내의 속옷을 발견하곤 눈물방울을 뚝뚝 떨어뜨렸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ref>매일경제 1982년 12월 8일 9면 재계산맥 [[대구은행]] 편-10</ref>
         큰돈을 벌 결심을 한 뒤 명태 장사를 택했다. 옛 주인을 찾아가 1년간 천 냥을 빌려 달라 했더니 흔쾌히 허락했다. 원산으로 달려간 그는 3년 만에 갚을 돈은 물론 장사 밑천도 두둑이 마련해 고향으로 돌아왔다 .<ref name="ReferenceB"/><ref>매일경제 1982년 12월 9일 9면 재계산맥 [[대구은행]] 편-11</ref>
         [[정재학]]은 1905년 [[군수]]자리에 오른다. 고급관료와 친분을 맺어 순흥군수에 이어 개령군수를 맡게 됐다. 전임 군수와 달리 세금도 낮춰주고 밥 굶는 이들이 없게했다. 장사꾼들에게는 밑천도 대줬다. 그는 군수 직책에 있으면서 은행업에도 관심을 갖게 됐다. 1906 년 8월 [[대구상공은행]]이 설립 될 당시 이병학, 이종면 등의 부호들과 힘을 합쳐 대주주로 등극하면서 감사역도 맡았다.<ref name="ReferenceA"/><ref>매일경제 1982년 12월 10일 7면 재계산맥 [[대구은행]] 편 -12</ref>
         <ref>매일경제 1982년 12월 14일 7면 재계산맥 [[대구은행]] 편 -14</ref>
         일본인 지인의 참여는 조선총독부의 간섭에 대한 방패막이 역할을 했을 뿐 아니라 일본인 고객들을 끌어들이는 역할도 했다. 사카모토가 오구라 다케지스케 (小倉武之助 <ref>동아일보 1995년 11월 9일 1면</ref> 에 의해 대구에 설립된 일본계 남선은행에 관심을 보이지 않고 [[대구은행]]에 기꺼이 참여한 것은 정재학의 경륜을 인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ref>매일경제 1982년 12월 14일 7면 재계산맥 [[대구은행]] 편 -14</ref><ref>고승제, <<한국금융사연구>> (일조각, 1970) p.213</ref>
         그는 일본인들의 경영권찬탈 시도가 이어지자 경찰 출신의 일본인 지배인을 선임하는 등 경영권 방어전략으로 맞섰다. 또한 총독부와 일제강점기 중앙 은행이었던 조선은행이 자신을 행장 자리에서 줄기차게 몰아내려 했지만 그들의 시도는 번번히 실패했다. 주주총회에서 한국인 주주들이 정재학 행장에게 표를 몰아줬기 때문이다,<ref>경향신문 1981년 6월 15일 9면 경제인록 = 금융계 일제하의 금융인</ref><ref>매일경제 1982년 12월 17일 9면 재계산맥 [[대구은행]] 17편</ref> 31년간 민간은행장 자리를 유지한 사례는 전 세계 어디 서도 찾아보기 힘들다. 일제 치하에 설립된 수많은 [[민족계은행]]이 있었지만 일제의 강제합병 과정에서 사라져갔지만 정재학 행장은 생의 마감 직전까지 저항했다.<ref>서광운, <<한국금융백년>>(창조사, 1970) P.674 "조흥은행 되기까지"</ref>
         [[정재학]]은 [[항일투쟁]] 경력의 대기자도 '대구지역 일제 대항 세력 중심'으로 인정 한 바 있는 민족자본의 수호자였다. [[정재학]]의 [[대구은행]]은 출발부터 일제에 대한 대항하려는 의지를 분명히 했다. 반면 비슷한 시기에 출범한 [[경일은행]]은 일제에 순응하는 경영방식을 택했다.<ref>매일경제 1982년 12월 8일 9면 재계산맥 [[대구은행]] 10편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ref>
         임 대기자는 [[정재학]]에 대해 " 거리의 일개 건달에서 수만금의 재산가가 되고 군수라는 관직에 오르기도 했고 풍운아인데 [[대구은행]] 설립을 통해 일제의 대항 세력이 되어 지체를 높인 특이한 존재 "라고 지적했다. 이어 "그의 대구은행 설립은 대구를 [[봉건시대]]에서 [[자본주의]]경제로의 이행으로 이끄는 혁명이자 국권회복을 위한 의지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평가했다. 그는 이어 "[[정재학]]이 설립했던 [[대구은행]]은 일제에 대한 커다란 저항세력으로 한국 사람들의 저항의식을 길러주는데 큰 몫을 했다"고 강조했다.<ref>매일경제 1982년 12월 8일 9면 재계산맥 대구은행 10편</ref>
         임 대기자는 [[대구은행]]의 설립을 주도했던 [[정재학]] 외에도 [[이일우]]란 대구 지주 부호 역시 [[국채보상운동]]에 앞장서는 등 민족 의식 고취에 앞장섰다고 강조했다. 이일우 가문은 체육계원로로 IOC (국제올림픽 위원회) 위원을 지냈던 [[이상백]], 독립군을 이끈 [[이상정]] 장군,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란 경향파애국시인 [[이상화]] 등을 배출하는 등 대구지역에서 명문가이자 [[민족자본세력]]의 한 축을 이뤘다 . 또한 대구은행에 참여한 [[서상돈]] 역시 대구지역 민족경제인들의 결사체인 [[대구시의소]]를 이끈 [[대구]]의 명망가였다.<ref>매일경제 1982년 12월 8일 9면 재계산맥 [[대구은행]] 10편</ref>
         반면 민씨 가문은 1957년 가문의 주력 기업이었던 조선맥주의 경영정상화를 위해 조흥은행 주식을 대거 팔아치우면서 주요주주 자리를 내놓게 된다.<ref>매일경제 1968년 7월 2일 7면</ref><ref>동아일보 1957년 7월 20일 3면</ref><ref>경향신문 956년 4월 22일 1면</ref> 조흥은행은 1995년 2월 확대이사회 결의를 통해 은행장의 순서를 조정하는 결정을 내린다.
         * [[1995년]] 경북 순흥군수
  • 현진건 . . . . 15회 일치
         [[1917년]] 다시 귀국하였는데, 이때 대구에서 [[백기만]](白基萬) · [[이상화 (시인)|이상화]](李相和) 등과 습작 동인지 『거화(炬火)』를 발간하였다. 이것이 그가 처음으로 시작한 '문학'이었다(다만 본격적인 동인지는 아니고 작문지 정도의 수준이었다고<ref>양진오, 「조선혼의 발견과 민족의 상상 - 현진건의 학술적 평전과 문학 연구」(도서출판 역락, 2008), p.44. 대구대학교 인문과학연구총서24.</ref>). 4월에 현진건은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의 5년제 세이조 중학교(成城中學校)에 3학년으로 편입하였다. [[1918년]] 3월에 다시 귀국하였는데<ref>일본 학자 시라카와 유타카에 의해 세이조 중학교 3학년 성적대장 일람표에서 현진건의 이름이 확인되어, 그가 1917년 4월부터 1918년 3월까지 실제 이 학교에 재적했음을 고증할 수 있었다. 양진오, 「조선혼의 발견과 민족의 상상 - 현진건의 학술적 평전과 문학 연구」(도서출판 역락, 2008), p.43. 대구대학교 인문과학연구총서24.</ref>, 얼마간 대구에 머물다가 집안 몰래 형 정건이 있던 [[중화민국|중국]] [[상하이]](上海)로 건너 가서 [[후장 대학]](扈江大學) 독일어 전문부에 입학한다. 조선에서 일어난 [[3.1 운동]]의 여파가 상하이에까지 커져 상하이에서도 만세운동이 벌어지고, [[대한민국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가 수립되던 해인 [[1919년]] 다시 귀국하여, 당시 육군 공병 영관을 지낸 당숙 현보운(玄普運)의 양자로 들어가게 되면서 서울로 상경, 지금의 종로구 관훈동 52번지에서 살았는데, 현보운은 1919년 음력 9월 10일에 사망하고 그가 호주가 되었다. 12월에 첫딸 경숙(慶淑)이 태어났으나 이듬해에 죽고 만다.
         [[1923년]] 2월부터 10월까지 현진건은 『개벽』에 중편 「지새는 안개」를 발표하고, 9월에는 그의 동인지 『백조』에 단편 「할머니의 죽음」을 발표하였다. 「지새는 안개」는 당시의 문인 [[염상섭]](廉想攝)이 "살아있는 춘화도"라 평하고 있을 정도로 정밀하고 세련된 묘사를 보이고 있는 것으로 평가되었다. 또한 최남선이 주재한 동인지 『동명(東明)』의 편집동인으로 참여하여, 번안소설 「나들이」를 기고하는 한편으로 1924년 3월 31일에 창간된 「시대일보」(동명사의 후신)에 입사하였다(이때 그의 부인은 병치레로 대구의 친정으로 가 있었고 현진건만 홀로 서울에 남아 있었다<ref>「文壇風聞」 1923년 1월 1일자 『개벽』 제31호.</ref>). [[1924년]] 1월에는 단편 「까막잡기」를 『개벽』 , 2월에 「그립은 흘긴 눈」을 잡지 『폐허이후』에서 발표하고, 이어 다시 6월에 단편 「[[운수 좋은 날]]」을 『개벽』에 발표한다. 또한 4월 2일부터 5일까지 「시대일보」 지면에 소설 「발(簾)」을 연재했다.
         [[1925년]] 1월, 현진건은 『개벽』에 단편 「불」을 발표하였다. 이때 그는 「시대일보」의 사회부장이 되었으나 「시대일보」가 폐간되면서 동아일보사로 전직하여야 했다. 3월 1일자 『개벽』 제57호에는 이때의 현진건의 근황에 대해 "근래에 빙허(憑虛) 군은 신문사 일도 뜻대로 되지 않으므로 더 많은 독서와 연구에 노력하겠다 한다. 늘 군은 조선의 평론계가 아무 보잘 것 없는 것을 매우 분개해서 앞으로는 논문도 쓰실 작정이라고. 고마운 일이며 즐거운 일이며 마음히 든든해지는 일이다."라고 짤막하게 소개하고 있다.<ref>「文壇雜談」 1925년 3월 1일자 『개벽』제57호.</ref> 그리고 박문서관에서 그의 중편 「지새는 안개」가 단행본으로 간행되었다. 또한 2월에 단편 「[[B사감과 러브레터]]」를 『조선문단』에 발표하고<ref>현진건이 『조선문단』에 작품을 싣기 시작한 것은 『개벽』이 점점 '계급주의 문학'을 외치는 [[카프]]에 동조하는 모습을 보이면서부터였다는 지적이 있다. 양진오, 「조선혼의 발견과 민족의 상상 - 현진건의 학술적 평전과 문학 연구」(도서출판 역락, 2008), p.91. 대구대학교 인문과학총서24.</ref>, 4월과 5월에는 수필 「목도리의 복면」과 「설 때의 유쾌와 낳을 때의 고통」을 각각 기고하였다. 7월에는 「조선문단과 나」라는 기고에서 작가는 삼삼오오 짝을 짓고 당을 나누어 서로 갈라서서 싸우는 존재가 아니라 작가 하나하나가 독립적인 개체라는 "일인일당(一人一黨)주의'라는 용어를 써가며, 계급주의 문학을 옹호하는 카프의 주장에 맞서 내용적 가치와 계급적 가치란 별개임을 주장하였다. 또한 『조선문단』에서 만든 조선문단합평회의 정기회원으로서, 10월에는 『조선문단』 신추문예(新秋文藝)에 응모한 작품들의 심사를 맡아 처음으로 평론을 싣기도 했다.
         [[1926년]] 1월에 현진건은 『개벽』에 평론 「조선혼(朝鮮魂)과 현대정신의 파악」을 기고하였다. 이 평론은 오늘날 현진건이 가진 '민족주의' 성향을 강하게 드러낸 것으로 평가받는다.<ref>현진건이 「조선혼과 현대정신의 파악」을 실을 무렵에 기자로서 재직하고 있던 「동아일보」에 현진건이 「시대일보」 시절부터 알고 지내던 최남선이 「동아일보」 객원논설위원으로 있었던 점을 지적하고, 최남선이 당시 주창한 '조선주의'가 현진건의 '조선혼' 주창에 가장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을 거라고 보기도 한다. 양진오, 「조선혼의 발견과 민족의 상상 - 현진건의 학술적 평전과 문학 연구」(도서출판 역락, 2008), p.91. 대구대학교 인문과학총서24.</ref> 2월에는 『조선문단』에 수필 「무명 영웅」을 기고하고, 11월에는 『개벽』에 단편 「사립정신병원장」을 기고하였다. 또한 이 해 3월에 단편집 『조선의 얼골』이 출판사 글벗집에서 간행되었다.
         [[1929년]] 7월 8일부터 12일까지 [[신라]](新羅)의 고도였던 [[경주]](慶州)를 답사하고, 그 기행문 「고도순례 경주」를 7월 18일부터 8월 19일까지 「동아일보」에 연재하였다(이 고도기행은 당초 경주뿐 아니라 [[공주]](公州)와 [[부여]](扶餘), [[평양]](平壤)까지도 계획에 넣고 있었던 것 같지만 경주 이후로 고도기행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또한 『문예공론』 7월호에 단편 「신문지와 철창」을 기고하였으며, 12월에는 『신소설』에 「정조와 약가(藥價)」를 발표하였다.
         [[1930년]] 2월과 12월에는 장편 「웃는 포사」를 『신소설』과 『해방』에 연재하다 4회만에 중단하고, [[1931년]] 10월에 단편 「서투른 도적」을 『삼천리』에, 11월에는 『신동아』에 「연애의 청산」을 발표하였다. [[1932년]] 7월 8일부터 23일까지 단군(檀君)의 전승이 남아있는 [[안주군|안주]](安州), [[묘향산]](妙香山), 평양, [[황해도]](黃海島), [[강화도]](江華島) 등지를 답사하고 그 기행문 「단군 성적(聖跡) 순례」를 7월 29일부터 『동아일보』에 연재하였다(~11.9). 그러나 이 해, 3년의 옥살이를 마치고 6월 10일에 출소한 형 현정건은 현진건이 『동아일보』지면에 장편소설 「적도(赤道)」를 연재하기 시작한지 열흘 뒤인 12월 30일에 옥살이의 후유증으로 숨을 거두고, 이듬해 형수(현정건의 부인) 윤덕경(尹德卿)도 자결하는 등 현진건에게 개인사적 비극이 잇따랐다(「적도」는 [[1934년]] 6월 17일에 완결되었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일본 대표로 출전해 1등을 차지한 조선인 선수 [[손기정]](孫基禎)의 유니폼에 그려진 [[일장기]]를 지워버린 채 신문에 실은 사건으로([[일장기 말소 사건]]) 현진건은 기소되어 1년간 복역해야 했으며, 이듬해 출옥하면서 동아일보사를 사직하고 관훈동에서 서대문구 부암동 325-5번지로 이사하여<ref>당시 부암동은 서울에서도 사람들의 발길이 별로 닿지 않는 곳이었다. 양진오, 「조선혼의 발견과 민족의 상상 - 현진건의 학술적 평전과 문학 연구」(도서출판 역락, 2008), p.156. 대구대학교 인문과학연구총서24.</ref> 그곳에서 땅을 빌려 양계 사업을 시작한 한편, [[1938년]] 7월 20일부터 다시 「동아일보」지면에 장편역사소설 「무영탑(無影塔)」을 연재한다.(~ 1939년 2월 7일) [[1939년]] [[7월]]에 「동아일보」 학예부장으로 복직되었으며, 같은 해 10월 25일부터 「동아일보」에 역사소설 「흑치상지(黑齒常之)」 연재를 시작하는데, 이 와중에 문예지 「문장」과 가진 인터뷰에서<ref>「침묵의 거장 현진건 씨의 문학종횡담」, 『문장』 1939년 11월. p.116~120.</ref> 현진건은 당시의 소설들에 대해서 "(자신이 처음 글을 쓰던 때에 비해) 문장이라든가 소설 만드는 기술은 가히 괄목할 만큼 진보.... 그러나 구상의 도약이 드뭅니다"라며 "동경(東京) 문단의 말기적인 신변잡기 같은 것에 안주하려는 경향"에 대해 경계하고, 또한 현재가 여러 면에서 세계적인 문학의 빈곤시대가 아닌가 싶다며 "문은 실상 기(氣)이며 기가 없으면 아무리 진주같다 해도 곧 사회"라는 견해를 피력했다. 그리고 12월에는 같은 잡지에 또 한 번 「역사소설의 제(諸)문제」라는 글을 기고하여 역사소설이라는 것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였다.
         {{인용문|사실을 위한 소설이 아니오 소설을 위한 사실인 이상 그 창작가는 제2의 경우를 더욱 중시하여야 될 줄 믿습니다. 이미 주제를 작정한 다음에 그 소재를 취하는데 현재와 과거를 가릴 필요가 없는 줄 압니다. 작품상에는 현재라고 더 현실적이오 과거라고 비현실적이란 관념은 도무지 성립이 되지 않는 줄 압니다. 더구나 제2의 경우에는 그 과거가 현재에 가지지 못한, 구하지 못한 진실성을 띄었기 때문에 더 현실적이라고 믿습니다. 현재의 사실에서 취재한 것보담 더 맥이 뛰고 피가 흐르는 현실감을 줄 수 있다고 믿습니다. 주어야 될 줄 믿습니다. 이렇게만 된다면 비현실적이라는 등 도피적이라는 둥 하는 비난의 화살은 저절로 그 과녁을 잃을 것입니다.<ref>「역사소설문제」, 『문장』 1939년 12월. p.126~129.</ref>}}
         부친 경운의 첫 부인이자 현진건의 친어머니인 완산 이씨 정효(貞孝)는 진건을 비롯한 네 명의 아들을 낳은 뒤 막내 진건의 나이 열 살 때인 [[1910년]] 6월 13일에 죽고, 경운은 정선(旌善) 전씨를 후처로 맞아들여 또 한 명의 아들을 두었다. 진건의 큰형 '''홍건(鴻健)'''은 러시아 사관학교 출신으로 대한 제국의 육군 참령을 지냈다. 한때 러시아 대사관에서 통역을 맡기도 했으며, 《각사등록》과 《승정원일기》 등의 문헌에 따르면 광무 6년([[1902년]])에 외국어학교(外國語學校) 부교관(副敎官)과<ref>《각사등록》 광무 6년(1902년) 7월 28일조. 이듬해인 광무 7년(1903년) 4월 23일(양력 5월 19일)에 면관되었음이 《승정원일기》에 수록되어 있다.</ref> 칭경시(稱慶寺)의 예식사무위원(禮式事務委員)을 잠시 맡기도 했다<ref>《승정원일기》 광무 6년([[1902년]]) 6월 24일조. 그러나 광무 7년(1903년) 2월 28일(양력 3월 26일)에 해임되었다(《승정원일기》 같은 날 기록).</ref> 말년의 행적은 잘 알려지지 않았으며 [[미소공동위원회|미(美)·소(蘇) 공동위원회]] 시절에 납북되었다는 설도 있다.<ref>양진오, 「조선혼의 발견과 민족의 상상 - 현진건의 학술적 평전과 문학 연구」(도서출판 역락, 2008), p.34, 대구대학교 인문과학연구총서24.</ref> 둘째 형 '''석건(奭健)'''은 일본 메이지 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하고 대구에서 변호사로 근무했으며, 아우 정건이 독립운동 혐의로 체포되어 재판을 받을 때 변호를 맡기도 했다. 셋째 형 '''[[현정건|정건]](鼎健)'''은 [[사회주의]] 독립운동가로 유명하다.
         이들 형제는 현진건이 5촌 당숙 '''현보운'''([[1875년]]~[[1919년]])의 양자로 [[입양]]되어 들어간 뒤 법적으로는 친형제에서 6촌 형제로 바뀌었다. 관립 일어학교 출신의 보운은 고종 33년인 [[건양]](建陽) 원년([[1896년]]) 8월 3일에 외국어학교의 교관(敎官)이 되었고, 광무 3년([[1899년]])에는 궁내부 번역관, 광무 4년([[1900년]]) 12월 24일에는 예식원 참리관으로 임명되어 봉직하다가 [[러일전쟁]]이 일어난 광무 7년(1903년) 11월 11일에 주일공사관 이등참서관이 되었고, 광무 8년(1904년) 일본 보병대 수원(隨員)으로 일본으로부터 즈이호오 4등 훈장을 받기도 했다. 광무 9년(1905년)에는 [[병조|군부]] 군무국 포병과로 옮겨 정위가 되었다.
         * 술에 관한 에피소드가 적지 않다. 술과 관련해 하루는 『조선문단』에 함께 작품을 기고하던 염상섭이나 [[김동인]]·나도향·[[양주동]] 등과 잡지사에 모였다가 저녁에 술을 마시는데, 술에 취해 저마다 "나는 조선의 [[괴테]]가 될 테니 자네는 (조선의) [[톨스토이]]가 되게", "나는 베르렌이 될테니 너는 [[안톤 체홉|체홉]]이 되라" 등의 주정을 늘어놓으면 곧잘 "그놈의 톨스토이, 괴테 좀 집어치우시오" 하고 큰소리치곤 했으며<ref>「문단이면사」(46) '방인근과 조선문단', 『경향신문』 [[1983년]] 12월 24일자 제7면 기사.</ref> 「동아일보」 사회부장으로 근무하던 시절에는 명월관에서 있었던 사원들끼리의 송년회식 자리에서 「동아일보」 사장에게 "이 놈아, 먹어, 먹으라고."하며 술을 권하다가 급기야 뺨까지 때렸다. 하지만 사장은 현진건을 내치지 않았다는 것이다<ref>양진오, 「조선혼의 발견과 민족의 상상 - 현진건의 학술적 평전과 문학 연구」(도서출판 역락, 2008), p.141. 대구대학교 인문과학연구총서24.</ref>(다만 이때 현진건에게 뺨을 맞았던 동아일보 사장이 [[송진우 (정치인)|송진우]]였는지 [[김성수 (1891년)|김성수]]였는지는 사람마다 증언이 다르다).
  • 김성민 (1994년) . . . . 14회 일치
         [[대구옥산초등학교]]와 [[경복중학교]]를 거쳐 [[대구상원고등학교]]에 입학했다. [[제66회 청룡기 전국고교야구 선수권대회|2011년 청룡기]]에서 당시 고등학교 2학년이었던 그는 3승, 평균자책점 0을 기록하며 팀의 우승을 이끌었고, 대회 MVP에 선정되었다.<ref>[http://sports.news.naver.com/general/news/read.nhn?oid=109&aid=0002239733 청룡기 MVP 김성민, "류현진 같은 선수 되고 싶다"], 《OSEN》, 2011년 8월 11일.</ref> 이러한 활약을 기반으로 고교야구 아시아 시리즈 대표에 선정되었고 [[2012년 한국프로야구 신인 드래프트|2012년 신인 드래프트]]에서 [[NC 다이노스]]의 특별지명 선수로도 거론됐다.<ref>[http://sports.news.naver.com/general/news/read.nhn?oid=008&aid=0002694959 성탄절, 고교야구아시아시리즈와 함께...일본·대만과 격돌], 《머니투데이》, 2011년 12월 21일.</ref> 이러한 활약을 기반으로 국외 스카우트들도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였고 [[2012년]] [[1월 31일]] 계약금 55만 달러를 받고 [[볼티모어 오리올스]]와 마이너 리그 계약을 체결하였다.<ref>[http://sports.news.naver.com/general/news/read.nhn?oid=001&aid=0005489936 고교 2학년 선수, 미국프로야구 입단 논란], 《연합뉴스》, 2012년 1월 31일.</ref>
         이 과정에서 엄청난 논란이 발생하였는데 [[볼티모어 오리올스]]가 그와 계약을 맺는 과정에서 [[KBO (야구)|KBO]]에 신분조회를 요청하지 않아 [[KBO (야구)|KBO]]에서도 그의 계약을 몰랐다. 왜냐하면 고등학교를 졸업하지 않은 선수와의 계약은 금지였기 때문이었다. 2001년 7월에 개정된 한·미 선수계약협정서에는 메이저 리그 구단이 선수를 영입할 때는 신분 조회 절차를 밟아야 한다고 명시되어 있고 고등학교를 졸업하지 않은 선수와의 접촉도 불가능했다. 이러한 비난 속에서 [[일구회]]는 [[2월 2일]]에 [[볼티모어 오리올스]]의 행동을 규탄하는 성명을 발표하였고,<ref>[http://sports.news.naver.com/general/news/read.nhn?oid=018&aid=0002553523 일구회, MLB 무분별 스카우트 규탄 성명], 《이데일리》, 2012년 2월 2일.</ref> [[2월 8일]]에는 [[대한야구협회]]에서 상벌위원회를 열고 그에게 무기한 자격 정지 처분이라는 중징계를 내렸고 이어 [[2월 9일]]에는 [[볼티모어 오리올스]] 스카우트의 경기장 출입금지 조치를 내렸다.<ref>[http://sports.news.naver.com/general/news/read.nhn?oid=396&aid=0000007832 야구협회, MLB 볼티모어 입단 김성민 무기한 자격정지 중징계], 《스포츠월드》, 2012년 2월 8일.</ref><ref>[http://sports.news.naver.com/general/news/read.nhn?oid=018&aid=0002557063 대한야구협회, 볼티모어 스카우트 출입금지 조치], 《이데일리》, 2012년 2월 9일.</ref> 이러한 과정에서 볼티모어의 단장인 [[댄 듀켓]]은 그와의 계약이 문제가 없다고 항변하였고 그도 인터뷰를 통해 '본인의 인생을 건 선택'이라고 언급하며 실력으로 모든 걸 이겨내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ref>[http://sports.news.naver.com/general/news/read.nhn?oid=111&aid=0000268235 볼티모어 단장 "김성민 계약 뭐가 문제냐?"], 《조이뉴스24》, 2012년 2월 3일.</ref><ref>[http://sports.news.naver.com/wbaseball/news/read.nhn?oid=382&aid=0000031009 <nowiki>[단독인터뷰]</nowiki> 미국 진출 논란 김성민 “내 인생을 건 선택”], 《스포츠동아》, 2012년 2월 9일.</ref>
         이후 [[KBO (야구)|KBO]]가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MLB]] 측에 공식적인 항의 서신을 보내자 [[볼티모어 오리올스]]에서도 이러한 규정 위반에 대해 공식 사과문을 발표하였고 [[2월 15일]]에는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MLB]] 사무국에서 [[볼티모어 오리올스]]에 벌금 징계를 부과하였고 그와의 계약을 30일 간 잠정적으로 승인하지 않겠다고 밝혔다.<ref>[http://sports.news.naver.com/general/news/read.nhn?oid=382&aid=0000031426 美볼티모어 부사장 “김성민 계약 파문 공식 사과”], 《스포츠동아》, 2012년 2월 13일.</ref><ref>[http://sports.news.naver.com/kbaseball/news/read.nhn?oid=112&aid=0002272362 MLB 사무국, 김성민 영입 볼티모어에 벌금 징계], 《해럴드POP》, 2012년 2월 16일.</ref> 이러한 과정에서 그의 계약은 미루어졌고 결국 [[6월 12일]] [[볼티모어 오리올스]]가 그와의 계약 불발을 보도하면서 [[7월 7일]]에 공식적인 계약 포기를 선언함에 따라 그는 국제 미아가 되었다.<ref>[http://sports.news.naver.com/general/news/read.nhn?oid=076&aid=0002196271 볼티모어, 김성민 계약 위해 MLB 승인 기다려], 《스포츠조선》, 2012년 3월 23일.</ref><ref>[http://sports.news.naver.com/general/news/read.nhn?oid=109&aid=0002364872 '스카우트 파동' 김성민, 볼티모어 오리올스와 재계약 실패], 《OSEN》, 2012년 6월 13일.</ref><ref>[http://sports.news.naver.com/general/news/read.nhn?oid=109&aid=0002377999 댄 듀켓, “김성민과 계약하고 싶지 않다”], 《OSEN》, 2012년 7월 8일.</ref> 결국 한국에서의 선수 생활이 불가능해진 그는 2013년 초에 일본의 [[후쿠오카 경제대학]]에 입학하였다. <ref>[http://sports.news.naver.com/general/news/read.nhn?oid=214&aid=0000227125 고교야구 유망주 김성민 일본 대학 입학 왜?], 《MBC》, 2013년 1월 11일.</ref>
         [[2014년]] [[2월 26일]] [[대한야구협회]]가 그에 대한 자격 정지를 해제함에 따라 차후 국내에서의 선수 활동이 가능해졌다.<ref>[http://sports.news.naver.com/general/news/read.nhn?oid=014&aid=0003103089 KBA, ‘선수등록 규정 위반’ 김성민 자격정지 징계 해제], 《파이낸셜뉴스》, 2014년 2월 26일.</ref>
  • 김찬돈 . . . . 14회 일치
         |임기 = 2017년 2월 9일 ~ 현재
         1959년에 [[대구광역시]]에서 태어나 [[능인고등학교]]와 [[영남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했다. 1984년 제26회 [[사법시험]]에 합격하고 [[사법연수원]]을 수료하여 판사에 임용되었다. 1990년 [[대구지방법원]] 등에서 판사를 하다가 2000년 2월 대법원 재판연구관을 거쳐 2004년 2월에 부장판사에 승진하여 [[대구지방법원]], [[부산고등법원]], [[대구고등법원]], [[부산고등법원]]에서 재판장을 하다가 법원장으로 승진하였다.
         * 2004년 2월 [[대구지방법원]] 부장판사
         * 2006년 2월 ~ [[대구지방법원]] 포항지원장
         * 2012년 2월 ~ 2012년 2월 [[대구지방법원]] 수석 부장판사
         * 2012년 2월 ~ 2016년 2월 [[대구고등법원]] 부장판사
         * 2015년 2월 ~ 2016년 2월 법원도서관장
         * 2016년 2월 ~ [[부산지방법원]], [[부산고등법원]] 부장판사
         * 2017년 2월 ~ 제44대 대구지방법원 법원장
         * 2017년 2월 ~제23대 대구광역시선거관리위원회 위원장
  • 김필곤 . . . . 14회 일치
         |임기 = 2017년 12월 4일 ~ 현재
         1963년 [[대구광역시]]에서 태어나 [[경북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법학과 4학년에 재학 중이던 1984년 12월 제26회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16기 [[사법연수원]]을 수료하고 육군 법무관을 전역한 이후 1988년 10월 [[대구지방법원]] 경주지원 판사에 임용되어 [[대구지방법원]], [[수원지방법원]], [[서울고등법원]], [[서울가정법원]] 등에서 판사를 했다.
         2018년 2월 13일에 있은 [[대전지방법원]]장 취임식에서 "정의롭고 공정한 재판을 함으로써 국민과 헌법이 우리들에게 부여한 소명을 다하자"고 말했다.<ref>[http://news1.kr/articles/?3235611]</ref>
         * 2003년 2월 [[대구지방법원]] 부장판사
         * 2004.년 2월 [[사법연수원]] 교수
         * 2007년 2월 [[서울중앙지방법원]] 부장판사
         * 2010년 2월 [[서울북부지방법원]] 수석부장판사
         * 2012년 12월 부산고등법원 창원재판부 부장판사
         * 2013년 2월 ~ 2018년 2월 서울고등법원 부장판사
         * 2018년 2월 [[대전지방법원]] 법원장
         * 대구지방법원 형사12부 재판장으로 재직하던 2003년 7월 29일에 [[대구 지하철 화재]] 현장을 훼손한 혐의로 불구속 기소된 전 대구지하철공사 사장 윤진태에게 징역 3년 벌금 500만원을 선고하며 법정구속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20&aid=0000198906]</ref>11월 28일에 [[한총련]] 중앙위원으로 활동한 [[계명대]] 총학생회장에 대해 "11기 [[한총련]]은 10기 한총련의 기본노선을 충실히 따르고 있고, 이적단체인 [[범청학련]] 남측본부의 집행부를 장악해 [[범청학련]]의 기본 대오로 활동하고 있다”며 처음으로 11기 한총련을 이적단체로 규정하면서 "11기 한총련이 범청학련을 통해 북한의 대남 공작부서인 통일전선부의 사실상 지휘·조정을 받아 북한의 적화통일 노선을 수용하고 있고, 북한 쪽과 빈번하게 불법 접촉 및 서신교환을 하면서 하달받은 투쟁지침에 따라 11기 한총련 조국통일위원회의 사업계획을 수립·시행했다"며 [[국가보안법]] 이적단체 가입죄 등을 적용해 징역2년6월 자격정지1년 집행유예4년을 선고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28&aid=0000036082]</ref> 2004년 2월 6일에 보궐선거를 앞두고 부하 직원 2명으로부터 "당선되면 잘 봐달라"는 청탁과 함께 2000만원, 아들 축의금으로 1000만원을 받은 [[박진규]] 영천시장에 대해 "시장에 당선된 후에 받은 1천만원은 대가성이 인정된다"면서도 2000만원에 대해서는 "범죄 입증이 어렵다"고 하면서 수뢰액이 1천만원이상 5천만원 미만 일 때는 5년이상 징역에 처함에도 불구하고 징역2년6월 집행유예4년 추징금1000만원을 선고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3&aid=0000026584]</ref>
         * [[서울중앙지방법원]] 형사항소4부 재판장으로 재직하던 2009년 3월 31일에 모텔에 투숙한 손님들의 자동차 번호판을 나무 판자로 가려줘 자동차관리법 위반으로 즉결심판에 회부되어 벌금 5만원을 선고받았지만 이에 불복해 청구한 정식재판에서 무죄를 선고받은 모텔 종업원에게 항소심에서 "해당 조항에서 처벌에 특별한 제한을 두고 있지 않으므로 처벌 근거 조항에 대해서는 행정형벌의 일반적인 특징에 비추어 판단해야 한다"며 "자동차 관리와 안전을 해칠 수 있는 일반적 위험성이 있는 행위를 모두 처벌 대상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하면서 원심을 깨고 벌금 5만원을 선고했다.<ref>[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347248.html]</ref> 7월 8일에 "지하철에서 장갑을 팔았다 범칙금 스티커를 발부받아야 한다"며 강제연행하려는 서울메트로 질서기동팀 소속 공익근무요원을 폭행한 홍모씨에게 "임의동행을 거부한 피고인을 강제 연행하려 하거나 경찰관이 도착할 때까지 체포한 행위는 공익근무요원의 정당한 직무상 행위로 볼 수 없기 때문에 피고인이 이에 대항해 폭행을 가했다 해도 공무집행방해죄로 처벌할 수 없다"며 벌금 200만원을 선고한 원심을 깨고 무죄를 선고했다.<ref>[http://www.fnnews.com/news/200907080856516671?t=y]</ref> 12월 9일에 비자발급 심사를 부실하게 한 혐의로 기소되어 "일부러 직무를 포기했다고 인정할 증거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1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은 중국 주재 한국대사관 전 영사 황모씨에 대해 "중국 현지 한인회의 부탁으로 서류가 보완되지 않은 중국인에게 비자를 발급한 것도 직무유기에 해당한다"고 하면서도 "자의적인 비자 발급으로 불법 체류자가 생긴 만큼 죄질이 나쁘지만 그동안 국가에 헌신해 왔고 나태한 마음으로 범행을 하게 된 점을 참작했다"며 징역 8개월 집행유예 1년을 선고했다.<ref>[http://news.mt.co.kr/mtview.php?no=2009120911405515959&outlink=1&ref=https%3A%2F%2Fsearch.naver.com]</ref> 2010년 2월 11일에 면허정지 기간에 운전을 하다 적발돼 벌금 100만원에 약식 기소되자 청구한 정식재판에서 "무면허 운전을 한 사실이 인정된다"며 벌금 50만원을 선고받은 피고인에게 "무면허 운전은 면허가 없는 것을 알면서도 고의로 차를 몰아야 성립하는데 최씨가 정지처분 통지를 받지 못한 사실이 인정된다"며 "비록 경찰 당국이 통지를 대신하는 공고를 거쳤더라도 그것만으로는 그가 면허 정지 사실을 알았다고 보기에 부족하다”원심을 깨고 무죄를 선고했다.<ref>[http://www.fnnews.com/news/201002110848419738?t=y]</ref>
  • 이진주 (1678년) . . . . 13회 일치
         유학(幼學)으로 [[1710년]](숙종 36년) 경인(庚寅) 증광사마시(增廣司馬試) [[진사]]에 3등(三等)으로 입격, 진사가 되고, [[성균관]]에 들어가 수학하였다. [[1714년]] [[성균관]]학유<ref>안명하, 松窩先生文集卷之九, 遠遊錄 西征記行</ref>, [[1719년]] [[1월 12일]] 전강에서 숙종이 친히 출제한 과제에 우승하여 직부전시의 명을 받았다. [[1721년]](경종 1년) [[과거 제도|식년 문과]](式年文科)에 을과(乙科) 4위로 급제하였다. 이후 [[병조]][[좌랑]](兵曹佐郞), 겸 [[춘추관][[기주관]], [[1723년]](경종 3) [[3월]] [[성균관]]학유, [[5월]] 학록, 8월 학정이 되고 [[1724년]](경종 4) [[2월]] 양현고직장(養賢庫直長)이 되었다. 그해 [[5월 17일]] 다시 학정, 이후 [[성균관]]사예(成均館司藝) 등을 지내다.
         [[1726년]](영조 2) [[12월 28일]] [[성균관]]박사, 1727년 3월 양현고직장, 8월 7일 전적,1728년(영조 4) [[2월 3일]] [[양현고]]주부, [[6월]] 직강, [[1729년]] [[11월 25일]] 병조좌랑이 되었으며 겸춘추(兼春秋)직을 겸하여 입직하였다. [[1730년]] [[2월 10일]] 성균관직강, 3월 25일 사예 등을 역임했다. [[1730년]] [[3월]] 진보현감(眞寶縣監)으로 부임하였다. 이후 [[조선 영조|영조]] 조정에서 입시한 신하가 아뢰기를, '이진주는 조용히 자신을 지켜 성균관에서 공부한 10여 년 동안 재신(宰臣)과 명사(名士)가 그의 얼굴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하니, 영조가 수령을 선발할 때는 마땅히 조용히 자신을 지키는 자를 취해야 한다 하고, 곧이어 다시 진보현감에 재임명되었으나 얼마 뒤에 사망하였다. 1737년
         [[순흥향교]] 활동으로는 1703년 8월 4일 [[순흥향교]] 서무찬인(西廡賛引), 봉작(奉爵), 1705년 2월 3일 봉작(奉爵), 제물유사(祭物有司), 1706년 2월 8일 서종사찬인(西從祀賛引), 8월 2일 봉로(奉爐), 1710년 8월 대축, 1711년 2월 서무헌관(西廡獻官), 8월 찬자(贊者), 1712년 2월 축(祝), 1716년 2월 6일 대축, 1717년 2월 2일 대축 등을 맡았다.<ref>執事案 地:癸未二月春享時, 丁酉八月告由時</ref>
         1718년 2월 8일 [[순흥향교]] 대축(大祝) 8월 1일 대축, 1719년 8월 7일 종헌관(終獻官), 1720년 2월 10일 대축, 1721년 8월 9일 아헌관(亞獻官), 1722년 2월 2일과 8월 4일 초헌관(初獻官) 등으로 활동했다.<ref>순흥향교 집사안:自丁酉八月 行祭時, 至甲辰八月 釋奠時</ref>
  • 정칠성 . . . . 13회 일치
         [[1926년]] [[7월 7일]] [[경성]]의 [[동아청년회]] 창립에 참여하고 회원이 되었다. 1927년 다시 귀국하여 [[1927년]] [[2월]] [[신간회]]에 창립발기인으로 참여하여 [[신간회]]의 창립멤버가 되었다. 곧 [[신간회]] 경성지회 조직에도 참여하여, [[신간회]] 경성지회 중앙위원과 신간회 중앙위원회 위원의 한 사람이 되었다. 한편으로 그는 여성단체 조직에 착수하였다.
         [[1927년]] [[11월]] 서대문정 [[조선여자기예원]](女子技藝院) 교수로 초빙되었다. 여자기예원 교수로 있으면서 부녀자들에게 수자수, 편물, 공예 등을 가르쳤고 일과시간 이후에도 자신의 사택을 찾아온 부녀자들에게 개인지도를 하기도 했다. [[12월 2일]] 마포청년회 강당에서 열린 [[신간회]] 경성지회 강연에 [[이관용]](李灌鎔), 이관구 등과 함께 연사로 참여, '신간회와 여성운동'이라는 주제로 강연하였다.
         [[1928년]] [[1월 15일]] 서대문구 서대문정에 있는 [[조선여자직업사]](朝鮮女子職業社)의 교사로 출강하였다. [[1928년]] [[2월 3일]] [[근우회]] 총회에서 경성지회 설치가 결정, 심은숙(沈恩淑), 조원숙(趙元淑), 문인순(文仁順) 등과 함께 근우회 경성지회를 조직하였다. [[2월 23일]] 공평동 근우회관에서 [[허정숙]] 등과 함께 근우회 경성지회 창립 발기인이 되고, [[3월 13일]]에 근우회 경성지회 출범 후 경성지회 중앙위원에 위촉되었다.
         1928년 [[2월 24일]] 근우회 상무위원에 피선, 상무위원 [[황신덕]] 등과 함께 [[대구]]로 파견되어 [[근우회]] 대구지회를 개설하였다. [[2월 27일]]에는 근우회 본부요원으로 대구지회 창립을 지원하였고, 근우회 조직 취지를 설명하였다. 4월에는 근우회 전국대회를 준비, [[4월 20일]] 근우회 전국대회준비위원회 재무부원으로 행사에 참여하였다.
         [[1929년]] [[1월 21일]] 신간회 경성지회 사찰위원, [[1월 22일]] 신간회 임시대회에서 본부대회 대표회원에 선출되었다. [[2월 17일]] [[신간회]] 2주년 기념식에 [[권동진]], [[허헌]], [[김여식]], [[이종린]], [[홍명희]] 등과 함께 축사를 낭독하던 중 임석경관에 의해 소환되었다. [[2월 19일]] 근우회 중앙상무위원회에서 [[근우회]] 회보 발행책임위원에 선출되었다.
         1930년 [[1월]] [[경성]]에서 벌어진 만세시위인 제2차 경성학생시위사건(일명 근우회사건) 주도 혐의를 받고 [[1월 18일]] [[경기도]][[경찰부]] 고등계에 체포, 다시 투옥당하기도 했다. 이후 [[경기도]][[경찰부]] 감옥에서 취조받다가 [[2월 25일]] [[종로경찰서]]로 이감되어 취조를 받았으나 혐의가 없어 풀려났다. [[1930년]] [[3월 15일]] [[근우회]] 경성지회 대의원에 선임되었다.
         [[1945년]] [[9월]]에 좌익계 여성단체인 [[조선부녀총동맹]]을 결성하여 중앙집행위원이 되었다. 그해 [[12월]] [[조선부녀총동맹]] 부위원장에 선출되었고, [[12월]]말 [[모스크바 삼상회의]]가 결정되자 정칠성은 [[박헌영]] 등과 함께 처음에는 [[신탁통치]]에 반대하였으나, 신탁의 불가피함을 인정하고 찬탁으로 돌아섰다. 이후 찬탁매국노로 몰리자, 테러를 피해 [[대구]]와 [[경성]]과 각지에 은신처를 마련하고 숨어 다녔다.
         [[1946년]] [[2월]]에는 범좌파 연합 단체인 [[민주주의민족전선]]이 조직되자, 그 간부가 되었다. 그해 [[2월 14일]] [[민주주의민족전선]]의 중앙상임위원 겸 조직부 차장에 피선되었다. 이후 미군정의 좌익 탄압으로 은신처를 마련하여 전국 각지로 피신생활을 하였다.
  • 김숙자 (1389년) . . . . 12회 일치
         [[1435년]](세종 17) [[9월]]에 한성으로 돌아가 그해 [[10월]] 성균관학록에 복직했으며<ref name="ginyon"/>, [[12월]]에 학정(學正)으로 승진하고, 또 통사랑(通仕郞)으로 다시 승진,[[성균관]]진덕박사 겸 [[양현고]]녹사(成均館進德博士兼養賢庫錄事)에 임명되었다. [[1436년]]에 경명행수(經明行修)의 선비 추천에서 첫 번째로 꼽혀 세자우정자(世子右正字)가 되었다. 그러나 얼마 후 선산의 교수관으로 나갔다가 개령현감이 되었다. [[9월]] [[무공랑]] [[성균관]]박사겸 [[양현고]]승이 되었다. [[1437년]] [[12월]] [[선무랑]]에 배사하고 [[선공감]]주부에 임명되었으며, 이듬해 [[2월]] [[예빈시]]주부, [[6월]] [[내자시]]주부 등을 역임했다.
         [[1440년]](세종 22) [[선교랑]], 1441년(세종 23) [[1월]] 김해교수관 노호(盧浩)와 보직상환 변경되어 [[김해]]로 내려갔다. 이듬해 2월 남부령(南部令)이 되었다가 특별히 동반직을 받아 승의교위(承義校尉)에 제수되고,중군섭부사직 겸 성균관주부(中軍攝副司直兼成均注簿),남학교수관(南學校授官)이 되었다가 그해 11월 승훈랑(承訓郞)이 되어 고령현감(高靈縣監)으로 나갔다. [[1445년]] [[2월]] 승의랑이 되었다가, 지방의 수령들의 직급을 1계급씩 강하한다는 명에 따라 강임되었다. [[1447년]](세종 29) 10월 다시 승의랑으로 환급되고, 11월에 [[성균관]]주부 겸 남학교수관, [[1448년]] [[7월]] [[교서관]]교리가 되었다가 한달만에 전제경차관(田制敬差官)에 임명되어 [[전라도]] [[남원]], [[옥과]], [[장흥]], [[순천]], [[장흥]] 등을 순시하고 그해 [[10월]]에 봉훈랑으로 승진한 뒤, 12월에 도성으로 되돌아왔다.<ref name="ginyon"/> [[1450년]](문종 즉위) [[8월 13일]] 지풍기군사(知豊基郡事)로 발령, 부임하였다.
         [[1453년]](단종 원년) [[12월]] [[사재감]]부정, 54년 2월 성균관사예(司藝)를 거쳐 8월 봉렬대부로 승진하여 성주교수관이 되어 내려왔다. 그해 12월 봉정대부(奉正大夫)로 승진, 중훈대부(中訓大夫)로 승진되었으나, [[1455년]] [[12월]] 사직하고 [[1456년]] 처가가 있는 [[밀양]]으로 내려가서 그 해 [[3월 2일]]에 [[밀양군]] 대동리 정침에서 죽었다. [[1455년]](세조 1년) [[12월 12일]] [[세조반정]]에 참여하거나 기여한 관료들을 [[좌익공신|좌익]][[원종공신]]으로 포상할 때 [[좌익공신|좌익]][[원종공신]] 3등에 책록되었다. 16세기에 사림에 의해 확립된 도통(道統)의 계보에서 길재의 학문을 아들 [[김종직]](金宗直)으로 하여금 잇게 하였고 [[성리학]]의 계보 중, [[정주학]](程朱學)을 발전시켰다.
         아들 김종직이 쓴 선공기년 제2편에 의하면 집안이 빈한하여 부득이 3월장으로 치뤘고, 그해 [[12월]]에 자신의 외조모 민씨의 묘소 서쪽에 장례를 치뤘다 한다.
  • 김재규 . . . . 12회 일치
         김재규(金載圭, [[1926년]] [[3월 6일]] ~ [[1980년]] [[5월 24일]])는 [[대한민국]]의 [[군인]]·[[정치가]]이다. 호는 덕산(德山)이고, 본관은 [[김녕 김씨]]. [[경상북도]] [[구미시]] 출신. [[유신정권]] 당시 [[중앙정보부]]장을 재임했으며, [[10.26 사건]] 당시 대통령 [[박정희]]를 암살하고, 사건 다음날 새벽 [[육군본부]]에서 검거되어 이후 내란목적살인 및 내란미수에 대하여 유죄판결을 받고 사형을 언도받아 교수형에 처해졌다. 김재규의 육성이나 말투를 들어보고 싶으면 [[http://www.youtube.com/watch?v=5YItsPrAcq8|본 육성녹음을 참고]]. 이것은 1979년 12월 8일의 보통군법회의 최후진술 녹음 중 하나다.
         해방 후 김천중학교[* 現 김천중학교&[[김천고등학교]]]에서 교직 생활을 하다가 1946년 [[육군사관학교|조선국방경비사관학교]] 제2기생으로 입교하여 1946년 12월 졸업하였는데, 졸업당시성적은 196명 중 14등으로 우수한 성적이었다. 그러나 중대장 대리로 복무 중에 군경체육대회 때 [[미 육군]]과 충돌을 일으킨 죄로 면관당한 후 잠시 낙향하여 김천중학교와 대륜중학교[* 現 [[대륜중학교]]&[[대륜고등학교]]] 교사 생활을 하였다. 그 후 복직되어 22연대 정보주임으로 안동지구 공비토벌작전에 참가하여 큰 공을 세워 충무무공훈장을 받기도 하였다. 이 때의 공을 인정받아 3사단 22 연대 제 2 대대장으로 부임하는데, 공교롭게도 부임일에 6.25 사변이 발발한다. 김재규는 2대대를 지휘하며 의정부·대구·영덕 지구의 전투에 참여하여 북한군과 혈전을 벌였고, 6.25의 전투 중 치열하기로 손꼽혔던 황간 전투에도 참여하였다. 국군과 연합군의 북진에 선봉에 서서 함경남도의 땅까지 밟으나 중공군의 참전으로 전황이 악화되어 남으로 후퇴하게 되고 이후 여수 제 2 보충연대장으로 부임한다.[* 참고로 박정희는 6.25때 후방에서 보급병과 장교로 근무하느라 전공은 커녕 북한군과 마주친 적조차 없다.] 1970년에는 [[한양대학교]] [[대학원]]을 졸업하였다. 1957년에 [[육군대학]] 부총장을 지낸 후 방첩부대장, 육군보안사령관, [[제3군단]]장을 역임한 후 육군 [[중장]]으로 전역하였다.
         [[박정희]]는 군사쿠데타를 우려해서 [[육군참모총장]], [[대한민국 국방부|국방부]]장관에는 그저 그런 무난한 인물만 앉혔고, 정말 유능하고 후배들의 존경을 받는 육군 장군은 [[사단장]], [[군단장]] 수준에서 전역시켰다고 한다.[* 이것은 논란의 여지가 있는데, [[김종오]], [[박병권]], [[민기식]], [[김용배]], [[김계원]], [[이세호]], [[임충식]] 등은 '''그저 그런 무난한''' 인물들이 아니다. 다만, 12.12 군사반란 때 당시 국방부 장관이던 [[노재현]]이 보여준 추태가 워낙 커서 앞의 인물들까지 도매금으로 같이 까이는 경우가 많다.] 김재규도 이런 케이스로, 월남전의 영웅인 [[채명신]] 장군 또한 [[대장(계급)|대장]]을 못 달고 중장에서 전역해야 했다. 이후 [[유신정우회]] 국회의원, [[중앙정보부]] 차장, 건설부 장관을 거쳐 1976년 12월에 제8대 중앙정보부장으로 임명되었다.
         1973년 초 3군단장으로 전역 후 제9대 국회에서 [[유신정우회]] 1기 [[대한민국 국회의원|국회의원]]이 되었다. 그러다가 그 해 12월 [[이후락]]의 뒤를 이어 [[신직수]]가 중앙정보부장이 될 때 중앙정보부 차장이 되었다. 이 때 김재규는 신직수를 매우 껄끄러워했는데 자신이 제5보병사단 참모장일 때 육군 [[군법무관|법무]][[소령]] 신직수가 그 밑에서 법무참모를 지냈기 때문이다. 1974년 9월 개각 때 건설부 장관이 되었다. 건설부 장관 부임 당시 8000만 달러 밖에 안되던 해외건설 계약고를 30억 달러까지 끌어올리는 공을 세워 근정훈장을 받았다. 1976년 12월 신직수의 뒤를 이어 중앙정보부장이 되었다.
         그리고 2016년 12월 17일 대한민국의 유력 일간지이자 진보매체 중 하나인 [[경향신문]]에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32&aid=0002750931|박근혜가 묻어버린 ‘박정희 신드롬’]]'''라는 기사가 올라오고 기사의 상당부분이 김재규 재평가에 대한 내용이 할애되는데 이르렀다.
         인터뷰에 응한 [[성공회대]] [[한홍구]] 교수의 과거 발언내용인 2004년 8월 11일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14&oid=036&aid=0000005863|한겨레21 기사]]와 최근 발언 내용을 비교하면 그의 김재규에 대한 평가가 변한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몇 년 전까지는 김재규에 매우 비판적이었으나, 2013년 5월 17일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587948.html|한겨레 기사]]를 통해 재평가 여지가 있음을 밝혔고 2016년 12월 17일 경향신문 기사에서도 마찬가지 입장임을 알 수 있다. 경향신문 기사를 참고하면 한 교수는 지금이 '''[[박정희]]와 유신의 망령을 떨쳐내는 시기'''라고 규정하고 그렇기 때문에 김재규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지는 측면이 있다고 여기는 듯하다. 과거 한 교수는 '대한민국이 박정희와 유신의 망령을 떨치고 자유민주주의를 만끽하게 될 때 김재규에 대한 평가는 분명 달라질 것이다.'라고 발언한 적이 있다. 아래 기사 참고.
         >'''2016년 12월 17일'''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32&aid=0002750931|경향신문 기사]]
         1979년 12월 1일 변호인단과의 3차 면담에서 김재규가 털어놓은 이야기에 의하면 김재규는 1977년 감옥에 갇혀있는 김대중을 서울대병원으로 옮긴 뒤 모친에게 ''''어머니, 추운 감방에서 고생하는 한 분을 따뜻한 방으로 옮겨 모셨습니다''''라는 말을 하였다고 한다.
         >저 젊은 생명 여하히 하겠는가. 나에게 끝까지 충성하고 있지 않는가.(음력 12월 29일)
         김재규와 장정이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은 김재규 사후 어렵고 빈곤하게 살고 있다. 김재규는 [[10.26]]을 일으키기 전에 자신의 아들에게 "나 없이도 잘 살아야 한다"라고 했다고 하며, 김재규의 아들은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간다면 아버지를 말렸을거라고 털어놓았다. [[http://news.donga.com/People/3/06/20120331/45184338/1|관련 링크]] 그의 어머니인 장정이는 김재규 사후, 80년대에 부동산 사기로 구속되기도 하였으며 2008년 12월 뇌졸중으로 사망했다.
          영화 [[내가 살인범이다]], 드라마 [[시그널]]에 출연한 배우 [[정해균]]이 김재규를 닮았다는 평가를 받는다. (2016년 12월 기준으로) [[네이버]]에 정해균을 검색하면 자동완성으로 김재규가 뜰 정도. 특히 [[10.26 사건]] 이후 머리를 풀어헤치고 현장검증을 하고 재판을 받을 당시의 모습과 매우 닮았다.
  • 문무왕 . . . . 12회 일치
         원년([[661년]]) [[6월]] 상중(喪中)이던 문무왕에게 당은 [[고구려]]를 치는 당군과 [[웅진도독부]]에 고립된 당군에 군수물자를 지원하고 [[신라]]가 [[백제]] 부흥군(復興軍)을 진압하는데 나서줄 것을 거듭 요청해왔다. 평양으로 먼저 군량을 보내면 웅진으로 통하는 물자 수송로가 끊어질 것이고, 그 수송로가 끊어지면 [[웅진도독부]]의 당군들은 [[백제]]군에게 궤멸될 것이라는 판단을 내린 왕은 8월에 직접 여러 장수를 거느리고 시이곡정(始飴谷停)으로 향했다. 그 길목에 있는 [[대전 계족산성|옹산성]](甕山城)에 주둔하고 있던 백제 부흥군을 9월 25일부터 공격하기 시작해 27일에 함락시켰다.<ref name="삼국사기-661"/> 옹산성을 함락시키고 웅현성(熊峴城)을 쌓아 [[웅진도독부]]로 통하는 군량수송로를 다시 개통시킨 뒤, 상주(上州) 총관(摠管) 품일(品日)과 일모산군(一牟山郡) 태수 대당(大幢)·사시산군(沙尸山郡) 태수 철천(哲川) 등이 이끄는 군사들이 [[우술성]](雨述城)을 쳐서 또 함락시키고, [[10월 29일]]에 [[서라벌]]로 돌아와 당의 조문 사절을 맞이했다. 한편 [[평양]]을 포위하고 있던 [[소정방]]이 보낸 함자도(含資道) 총관(摠管) 유덕민(劉德敏)<ref group="주">《삼국사기》 [[김유신]] 열전에는 대감(大監) 문천(文泉)이라 표기됨</ref>이 와서 문무왕에게 당군에 대한 군량 지원을 요청하였다.<ref name="삼국사기-661"/> 왕은 이듬해 1월 [[김유신]]으로 하여금 수레 2천여 대에 쌀 4천 섬과 조(租) 2만 2천여 섬을 싣고 [[평양]]으로 가게 하였다. 이들 군은 이듬해 2월에 무사히 군량을 전달하고 귀환하였다.<ref name="삼국사기-662">《삼국사기》 권제6 신라본기 제6 문무왕 2년(662)</ref>
         2년([[662년]]) 봄 정월에 당은 문무왕을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상주국(上柱國) 낙랑군왕(樂浪郡王) [[신라]]왕으로 책봉했다. 2월에는 [[탐라국]] 임금 도동음률(徒冬音律)이 항복해 와 신라의 속국이 되었다.<ref name="삼국사기-662"/> 이때 [[신라]]에서는 [[백제]]에 주둔하고 [[고구려]]를 치는 당군의 요청이 들어올 때마다 식량을 보내고 옷을 보내고 하느라 창고에 쌓아둔 양식은 고갈되고, 농사 때를 망쳐 백성들이 풀뿌리도 오히려 부족할 지경이었지만, 반대로 [[웅진도독부]]에 있는 당군의 군량 창고에는 쌀이 남아돌다 못해 썩어나고 있었고 [[웅진도독부]]에서는 그 뒤로도 수시로 [[신라]]에 군량을 요구하였다. 3월에 내린 대사면령은 이러한 가운데서 오는 민심이반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고 추정된다.{{출처|날짜=2018-06-27}} 7월 왕은 왕제(王弟) [[김인문|인문]](仁門)을 사신으로 당에 보내는 한편, [[웅진도독부]]의 당군은 지라성(支羅城)과 윤성(尹城), 대산(大山)과 사정(沙井)의 [[백제]] 목책을 깨뜨리고 [[신라]]군과 합세해 진현성(眞峴城)을 공격해 함락시키고 [[신라]]의 군량수송로를 열었다. 8월<ref group="주">《[[동사강목]]》에는 7월로 표기됨</ref>에는 [[김흠순|흠순]] 등 19장군을 시켜 내사지성(內斯只城)의 [[백제]] 부흥군을 깨뜨렸고, 대당(大幢) 총관(摠管) 진주(眞珠)와 남천주(南川州) 총관 진흠(眞欽)이 병을 핑계로 한가로이 지내며 나랏일을 돌보지 않는다는 죄를 물어 처형하고 그 일족까지 멸했다.<ref name="삼국사기-662"/>
         3년([[663년]]) 봄 정월에는 [[서라벌]] 근교의 [[경주 남산신성|남산신성]](南山新城)에 장창(長倉)을 지었다. 또한 [[경주 부산성|부산성]](富山城)을 쌓았다.<ref name="삼국사기-663"/> 이보다 앞서 [[백제]] 부흥군은 662년 12월에 험준한 주류성(周留城)에서 주변에 평야와 강이 많은 피성(避城)으로 수도를 옮겼는데,<ref name="일본서기-662">《일본서기》 권27 天命開別天皇 天智天皇 원년(662)</ref> 663년 2월에 [[김흠순|흠순]]과 [[김천존|천존]]은 백제 [[거열성]]을 쳐서 빼앗고 거물성과 사평성을 공격하여 항복시켰으며, 덕안성을 쳐서 1,070명을 목베는 등 [[백제]] 부흥군을 더욱 압박해왔다.<ref name="삼국사기-663"/> 결국 부흥군은 피성을 떠나 주류성으로 돌아갔고,<ref name="일본서기-663">《일본서기》 권27 天命開別天皇 天智天皇 2년(663)</ref> 왕은 이미 [[백제]]를 평정하였다며 유사에 명해 큰 잔치를 베풀고 술과 음식을 내려 주게 한다.{{출처|날짜=2018-06-27}} 한편 여름 4월, 당은 [[신라]]를 [[계림대도독부]](雞林大都督府)로 삼고, 문무왕을 계림주대도독(雞林州大都督)으로 삼았다.<ref name="삼국사기-663">《삼국사기》 권제6 신라본기 제6 문무왕 3년(663)</ref> 6월, [[백제]] 부흥군 내의 내분으로 [[복신]]이 [[풍왕]]에게 살해당한 것을 계기로 [[신라]]는 곧장 [[백제]] 부흥군을 쳐서 진압하려 했고,<ref name="일본서기-663"/> 당에서도 [[웅진도독부]]의 장군 유인궤(劉仁軌)의 요청에 따라 우위위장군(右威衛將軍) 손인사(孫仁師)가 40만 군사를 보냈고, 유인궤와 별장(別將) 두상(杜爽), 새로 [[백제]]왕으로 임명된 [[부여융]] 등의 수군은 덕물도(德物島)를 경유해 수로로 곧장 웅진부성(熊津府城)으로 나아갔다.<ref name="삼국사기-663"/><ref name="의자왕-662">《삼국사기》 권제28 백제본기 제6 唐 高宗 龍朔二年(662)</ref> 문무왕 역시 [[김유신]]과 [[김인문]]·[[김천존]], [[화랑]] [[죽지랑]]을 위시한 28명(또는 30명)의 장군을 데리고 당의 손인사·유인원과 군사를 합쳐 [[8월 13일]]에 두솔성(豆率城)<ref group="주">문헌에 따라 두량이성(豆良伊城)·두릉윤성(豆陵尹城)·두곶성(豆串城)·윤성(尹城)이라고도 기록되어 있다.</ref>을 함락했다. 문무왕은 [[왜인]]들에게 훈계하고 본국으로 돌려보냈다.<ref name="김유신-중">《삼국사기》 권제42 열전 제2 김유신 중</ref> 28일에는 백강 어귀에서 당의 수군과 [[백제]]·[[왜]]의 선단이 충돌한 네 번의 싸움 모두 [[백제]]·[[왜]] 선단의 궤멸로 끝났고, [[백제]]의 [[풍왕]]은 몇 사람과 함께 배 한 척에 의지해서 [[고구려]]로 망명해 버렸다([[백강구 전투]]). 요충지인 가림성을 제치고 먼저 주류성을 치기로 결정한 나·당 연합군 지휘부는 9월 7일<ref group="주">《[[자치통감]]》에는 8일로 표기됨</ref>에 마침내 주류성을 함락시켰다.<ref name="일본서기-663"/><ref name="자치통감-663">《자치통감》 권201 唐紀十七高宗天皇大聖大弘孝皇帝 龍朔 3년(663)</ref> [[웅진도독부]]의 당군에게 의복을 공급해주고 겨울 11월 20일에 [[서라벌]]로 돌아와, 문무왕은 여러 장수들에게 논공행상을 행했다. 앞서 당은 [[신라]]와의 합의 없이 일방적으로 [[신라]]를 계림대도독부로 삼고 문무왕을 도독에 임명한 뒤, 임존성을 함락시키지 못하고 돌아오려는 문무왕을 향해 "평정을 마친 뒤 함께 모여 맹약을 맺으라"던 고종의 칙령을 들며 두 나라 사이의 맹약을 제의했다. [[신라]]는 임존성이 함락되지도 않은 상황에서 너무 이르다는 이유로 거절했지만,{{출처|날짜=2018-06-27}} 결국 문무왕 4년([[664년]]) 2월에 [[각간]] [[김인문]], [[이찬 (신라 관직)|이찬]] [[천존]](天存)을 보내어 당의 칙사 [[유인원 (당나라)|유인원]](劉仁願)과 새로 웅진도독이 된 옛 [[백제]]의 왕자 [[부여융]]과 웅진에서 동맹을 맺었다.<ref name="삼국사기-664">《삼국사기》 권제6 신라본기 제6 문무왕 4년(664)</ref> [[백제]] 부흥군은 문무왕 4년([[664년]]) 3월에 [[사비산성]](泗沘山城)에서 최후의 저항을 시도했지만 그마저도 실패로 돌아가면서<ref name="삼국사기-664"/> [[백제 부흥운동|백제 부흥]]은 사실상 종말을 고한다.
         6년([[666년]]) 4월에는 대신 김천존의 아들인 [[나마 (관직)|나마]] 한림과 김유신의 아들인 나마 [[김삼광|삼광]](三光)을 모두 당에 들어가 숙위하게 하였으며, 고구려를 없애고자 당에 군사를 요청하였다.<ref name="삼국사기-666">《삼국사기》 권제6 신라본기 제6 문무왕 6년(666)</ref> 12월에부터 당은 [[이세적|이적]](李勣)을 요동도행군대총관(遼東道行軍大摠管)으로 삼고 사열소상백(司列少常伯) 안륙현(安陸縣) 사람인 학처준(郝處俊)을 부장으로 삼아 고구려와 전쟁을 벌였는데,<ref name="삼국사기-666"/> 이때 고구려는 실권자였던 [[대막리지]] [[연개소문]]의 죽음에 이어 그의 아들들 사이에 형제 다툼이 벌어졌고, 이는 마침내 연개소문의 장남 [[연남생|남생]]이 아우 [[연남건|남건]]과 [[연남산|남산]]에게 쫓겨 [[국내성]] 등의 성을 거느리고 당에 항복해버리면서 고구려 지배층의 내분으로까지 번지게 되었다.<ref name="고구려-666">《삼국사기》 권제22 고구려본기 제10 보장왕 25년(666)</ref> 이 와중에 연개소문의 아우 [[연정토|정토]]가 24명의 부하와 12성 763호 3,543명을 거느리고 항복해오자, 정토와 그의 부하들에게 옷과 양식, 집을 주어 서울 및 주·부에 안주시키고, 온전한 여덟 성에는 군사를 보내 지키게 한다.<ref name="삼국사기-666"/>
         7년([[667년]]) 7월에 3일 동안 큰 잔치를 베풀었고, 당에서는 신라의 장군 지경(智鏡)과 개원(愷元)을 장군으로 발탁하고 대아찬 일원(日原)은 당의 운휘장군(雲麾將軍)으로 임명되었는데, 문무왕은 지경과 개원에게 각각 파진찬과 [[대아찬]]의 관등을 주고, 일원을 운휘장군으로 명한다는 고종의 칙명은 왕궁 뜰에서 받도록 명하였다.<ref name="삼국사기-667">《삼국사기》 권제6 신라본기 제6 문무왕 7년(667)</ref> 또한, 같은 달 고종은 유인원과 신라의 [[태종무열왕#가계|김인태]](金仁泰)에게 명하여 비열성(卑列城)<ref group="주">지금의 [[강원도]] [[안변군]]</ref>의 길을 따라, 신라 병사를 징발해 다곡(多谷)·해곡(海谷) 두 길을 따라 평양으로 모이도록 하였다.<ref name="삼국사기-667"/> 가을 8월에 문무왕은 [[대각간]] 김유신 등 30명의 장군을 거느리고 서라벌을 출발해 9월에는 한성정(漢城停)에 도착해 이적(李勣)과 합류하기 위해 기다렸다.<ref name="삼국사기-667"/> 이때 신라군은 당군을 배제한 단독 작전수행 대신 정탐을 세 번이나 보내면서 배를 계속 띄워 당군의 동정을 살폈고, 당군이 아직 평양에 도달하지 않았음을 알고 먼저 고구려의 칠중성(七重城)을 쳐서 먼저 고구려로 갈 길을 뚫기로 했다.<ref name="삼국사기-671"/> 하지만 칠중성을 치기 전, 겨울 10월 2일에 평양성 북쪽 2백리 지점에 도착한 이적은 신라측 이동혜(尒同兮) 촌주(村主) 대나마 강심(江深)에게 부쳐, 한성에 주둔하고 있던 신라군에게 “칠중성을 공격할 필요없이 곧바로 평양으로 와서 당군에 군량을 공급하라”는 편지를 보내왔다. 이에 신라군은 칠중성 공격을 포기하고 수곡성(水谷城)으로 향했지만,<ref name="삼국사기-671"/> [[11월 11일]]에 장새(獐塞)에 이르렀을 때 이적은 어느새 돌아가버렸고, 신라군도 그냥 돌아왔다.<ref name="삼국사기-667"/> 12월에 당은 다시 웅진도독부의 유진장군(留鎭將軍) 유인원을 보내어 고구려 정벌을 돕게 하면서 문무왕에게 대장군의 정절(旌節)을 주었다.<ref name="삼국사기-667"/>
         8년([[668년]]) 2월 [[이세적|이적]] 등이 이끄는 당군이 고구려의 [[부여성]]을 비롯한 40여 성을 함락시켰다. 이에 [[연남건|남건]]이 5만의 군사로 그 땅을 수복하려 애썼지만 설하수(薛賀水)에서 3만 명이 죽는 대패를 당하고 퇴각했다.<ref name="고구려-668">《삼국사기》 권제22 고구려본기 제10 보장왕 27년(668)</ref> 3월에 신라는 북방의 요충지였던 비열홀(比列忽, 비열성)에 주를 설치하고 파진찬 용문(龍文)을 총관으로 삼았다.<ref name="삼국사기-668">《삼국사기》 권제6 신라본기 제6 문무왕 8년(668)</ref> [[6월 12일]]에{{refn|group=주|문무왕이 설인귀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유인궤가 신라군과 함께 평양으로 간 것이 5월이라고 기록돼 있다.<ref name="삼국사기-671"/>}} 당의 우상(右相)<ref group="주">정확한 관직명은 요동도안무부대사(遼東道安撫副大使) 요동행군부대총관(遼東行軍副大摠管) 겸 웅진도안무대사(熊津道安撫大使) 행군총관(行軍摠管) 우상(右相) 검교태자좌중호(檢校太子左中護) 상주국(上柱國) 낙성현개국남(樂城縣開國男)이다.</ref> 유인궤가 당 고종의 칙명을 받들고 신라의 숙위 사찬 김삼광과 함께 당항진(党項津)에 도착하자 왕은 [[각간]] 인문을 보내 성대한 예식으로 맞이하게 했다.<ref name="삼국사기-668"/> 이에 유인궤는 약속을 마치고 신라의 선발군을 이끌고 고구려 땅인 천강(泉岡)으로 향하고, 문무왕 역시 [[6월 21일]]에 한성주에서 후발부대를 사열했다. 이때 신라군의 주요 장수들의 명단은 다음과 같다.<ref name="삼국사기-668"/>
         10년([[670년]]) 봄 정월, 당 고종은 신라의 사신 김흠순에게는 귀국을 허락하였지만 김양도는 억류하여 감옥에 가두었는데 마침내 감옥에서 죽었다. 이것은 신라가 백제의 땅과 유민을 취한 데 대한 보복 조치였다.<ref name="삼국사기-670">《삼국사기》 권제6 신라본기 제6 문무왕 10년(670)</ref> 3월, 사찬 [[설오유]](薛烏儒)가 고구려 [[태대형]] [[고연무]]와 함께 각각 병사 1만 씩을 거느리고 [[압록강]]을 건너서 옥골(屋骨)에 이르렀다. [[4월 4일]] 개돈양(皆敦壤)에 주둔하고 있던 [[말갈족]]<ref group="주">당나라의 지휘를 받고 있었다</ref>과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다. 이후 당나라가 병력을 지속적으로 충원하자 백성(白城)<ref group="주">지금의 [[경기도]] [[안성]] 일대</ref>으로 후퇴했다.<ref name="삼국사기-670"/> [[6월]]에는 고구려 대형(大兄) [[검모잠]]이 당나라 관리와 승려 법안(法安) 등을 죽이고 신라로 향하였다. 검모잠은 [[안승]](보덕왕)을 왕으로 추대하고 신라에 충성을 약속했다. 문무왕은 이들을 금마저(金馬渚)<ref group="주">지금의 [[전라북도]] [[익산]]</ref>에 머물게 하였다. 7월, 백제의 남은 세력이 배반할까 의심하여 대아찬 김유돈(金儒敦)과 옛 백제의 주부(主簿) 수미(首彌)·장귀(長貴)를 웅진도독부로 보내, 신뢰 차원에서 양측간의 인질 교환을 제의했다. 웅진도독부는 이에 응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군사와 말을 모아 신라군에 대한 야간 기습을 수차례 반복했다.<ref name="삼국사기-671"/> 한편 김흠순 등이 귀국해 당에서 가져온 지도를 바쳤는데, 그 지도는 신라가 차지하게 되어있던 옛 백제령을 모두 백제(웅진도독부)에 돌려주도록 하는 것이었다.<ref name="삼국사기-671"/> 신라는 이를 빌미로 앞서 웅진도독부에서 파견한 백제의 사마(司馬) 예군(禰軍)을 첩자의 혐의를 물어 억류하고, 군사를 일으켜 웅진도독부를 쳐서 땅을 빼앗았다. 이때 신라 장수들 중 싸우지 않고 퇴각한 이들도 있었는데, 이들에 대해서는 특별히 처벌 대신 면직으로 매듭지었다.<ref name="삼국사기-670"/> 같은 달, 사찬 수미산(須彌山)을 보내 안승을 고구려 왕으로 ‘책봉’했다.<ref name="삼국사기-670"/> 12월, 한성주(漢城州) 총관(摠管) 수세(藪世)가 반란을 도모하려 하자, 대아찬(大阿湌) 진주(眞珠)를 보내 목을 베었다.<ref name="삼국사기-670"/>
         12년([[672년]]) 당나라는 대군을 동원해 신라에 대한 침략을 개시했다. 이에 맞서 신라는 봄 정월에 백제 고성성(古省城)을 쳐서 이기고, 2월에는 다시 백제의 가림성 공격을 시도했다.<ref name="삼국사기-672">《삼국사기》 권제7 신라본기 제7 문무왕 12년(672)</ref> 7월, 당나라 장수 고간(高侃)의 한병(漢兵) 1만, 말갈족 출신의 이근행이 거느린 말갈병 3만이 함께 평양에 이르러 여덟 곳에 군영(軍營)을 설치하고 머물렀다.<ref name="삼국사기-672"/> 이들은 8월부터 한시성(韓始城)과 마읍성(馬邑城)을 쳐서 이기고 백수성(白水城) 5백 보 거리까지 전진해 주둔하는 등 신라 땅을 침식해왔다.<ref name="삼국사기-672"/> 신라는 고구려 부흥군과 연합해 이들을 쳐서 이기고, 추격하는 당병을 석문(石門) 벌판까지 뒤쫓아가 싸웠지만, 군 내부에서의 논공행상 및 전략에 대한 견해차로 분열된 사이에<ref name="김원술">《삼국사기》 권제43 열전 제3 김유신전 부록 원술(元述)</ref> 당병의 반격을 받아 크게 패하고 대아찬 효천(曉川), 사찬 의문(義文)·산세(山世), 아찬 능신(能申)·두선(豆善), 일길찬 안나함(安那含)·양신(良臣) 등이 죽었다.<ref name="삼국사기-672"/> 태대각간 김유신의 아들인 [[김원술|원술]]도 여기에 참전했다가 목숨을 건져 돌아왔는데, 아버지 유신은 자신의 아들을 군법으로 처형해야 한다며 왕에게 아뢰었으나 왕은 듣지 않았다.<ref name="김원술"/> 한편 각자 맡은 곳을 지키며 방어전으로 전략을 변경하자는 유신의 진언에 따라, 한산주에 둘레 4,360보 되는 주장성(晝長城)을 쌓는 등 방어진지를 구축했다.<ref name="삼국사기-672"/> 9월에는 앞서 신라 땅에 억류하고 있던 웅진도독부 소속의 백제인 관원들과 앞서의 전투에서 사로잡은 포로들을 당으로 돌려보내면서 왕이 직접 표문과 많은 물품을 바치는 등 당에 대해 유화책을 폈다.<ref name="삼국사기-672"/>
         13년([[673년]]) 2월부터 9월까지, 문무왕은 당의 침략에 대한 대응으로 서형산성(西兄山城)과 사열산성(沙熱山城)을 비롯해, 국원성(國原城)<ref group="주">옛 완장성(薍長城)</ref>, 북형산성(北兄山城), 소문성(召文城), 이산성(耳山城), 수약주(首若州)의 주양성(走壤城)<ref group="주">질암성(迭巖城)이라고도 한다.</ref>, 달함군의 주잠성(主岑城), 거열주(居烈州)의 만흥사산성(萬興寺山城), 삽량주(歃良州)의 골쟁현성(骨爭峴城) 등 여러 성을 쌓게 하고, 대아찬(大阿飡) 철천(徹川) 등을 보내 병선 100척을 거느리고 서해를 지키게 하였다.<ref name="삼국사기-673">《삼국사기》 권제7 신라본기 제7 문무왕 13년(673)</ref> 한편 이 사이에 국가의 원로이자 재상이었던 태대각간 김유신이 죽고, 아찬 대토(大吐)가 모반하여 당에 붙으려다 발각되어 처형당하는 등의 사건도 일어났다.<ref name="삼국사기-673"/> 거듭되는 전쟁에서 신라는 말갈·거란의 병사까지 끌어들인 당군과 맞서 아홉 번의 전투를 통해 2천 명을 죽이고, [[임진강|호로하]](瓠瀘河)와 왕봉하(王逢河)에서도 당군을 상대로 큰 전과를 올렸다.<ref name="삼국사기-673"/> 겨울에 당병은 고구려의 우잠성(牛岑城)을 쳐서 함락시키고, 거란·말갈의 병사들은 대양성(大楊城)과 동자성(童子城)을 쳐서 멸했다.<ref name="삼국사기-673"/> 한편 신라는 주(州)와 군(郡)에 처음으로 외사정(外司正)을 두고, 백제 멸망 뒤 [[무열왕]]에 의해 폐지되었던 수병제(戍兵制)를 부활시키는 등 지방에 대한 통제를 강화해나갔다.<ref name="삼국사기-673"/>
         15년([[675년]]) 봄 정월에 구리로 각 관청 및 주·군의 인장(印章)을 만들어 지급했다.<ref name="삼국사기-675">《삼국사기》 권제7 신라본기 제7 문무왕 15년(675)</ref> 2월에 당의 장수 유인궤가 칠중성(七重城)에서 우리 군사를 깨뜨린 뒤 돌아가고, 이근행이 안동진무대사(安東鎭撫大使)로 임명되었다. 문무왕은 다시 당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며 유감을 표명했고, 당은 이에 대한 화답으로 앞서 깎아 없앴던 문무왕의 관작을 회복시켰다.<ref name="삼국사기-675"/> 이때에는 대부분의 백제령이 신라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되고, 고구려 남쪽 경계에 이르기까지 신라의 주와 군이 설치되어 있었다. 이에 문무왕은 당이 쳐들어올 것에 대비해 아홉 부대의 병사를 내보내 막게 하였다.<ref name="삼국사기-675"/> 과연 가을 9월, 당은 설인귀를 대장으로 하는 군사를 신라에 보내 천성(泉城)을 치게 했는데, 이때 당에 숙위하고 있던 풍훈(風訓)<ref group="주">앞서 문무왕에 의해 처형당한 김진주(金眞珠)의 아들이다.</ref>이 향도(鄕導)로서 당을 도왔다.<ref name="삼국사기-675"/> 그러나 신라의 장군 문훈(文訓) 등의 선전으로 당병 1,400명을 죽이고 그 병선 40척을 빼앗았으며, 설인귀가 포위를 풀고 도망치면서 내버리고 간 전마 1천 필까지 신라의 손에 들어왔다.<ref name="삼국사기-675"/> [[9월 29일]]에는 이근행이 20만 군사를 이끌고 매초성(買肖城)에 진을 쳤다. 신라군이 이를 공격하자 당군은 말 30,380필과 무수한 병기를 남겨 놓고 도망갔다.<ref name="삼국사기-675"/>{{refn|group=주|다만 이러한 전쟁 와중에도 신라는 당에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바치고 있었다.<ref name="삼국사기-675"/>}} 나아가 안북하(安北河)를 따라 관(關)과 성을 설치하고 또 철관성(鐵關城)을 쌓았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이 해에 신라와 당이 벌인 크고 작은 싸움이 18번인데, 모두 신라가 이겨서 당병 6,047명을 죽이고 말 200필을 얻었다고 한다.<ref group="주">하지만 아달성(阿達城)이나 적목성(赤木城)에서는 성을 침공한 말갈병에 의해 성이 함락되고 약탈당했으며, 아달성주 소나(素那)나 적목현령 탈기(脫起)가 이때의 싸움에서 전사했다. 석현성(石峴城)이 당병에게 함락되었을 때는 현령 선백(仙伯)과 실모(悉毛) 등이 전사했고, 칠중성은 당과 거란·말갈의 군사들에게 포위당했을 때 간신히 함락은 면했지만 소수(小守) 유동(儒冬)이 전사하는 등, 신라측 피해도 적지 않았다. 이듬해에도 당은 다시 도림성(道臨城)을 함락시켰다.</ref>
  • 이동흡 . . . . 12회 일치
         판사로 재직하면서 헌법재판소 헌법연구부장, 대법원 재판연구관, [[사법연수원]] 교수, 사법발전위원회 위원, [[언론중재위원회]] 위원을 역임하였던 이동흡은 2000년에 [[수원지방법원]] 수석부장판사 직무대우에 이어 2005년 2월 [[서울고등법원]] 수석부장판사로 재직하다 2005년 8월에 법원장으로 승진하여 [[서울가정법원]]에서 법원장으로 재직하던 2006년 9월에 [[한나라당]] 추천으로 국회에서 임기 6년의 [[대한민국 헌법재판소|헌법재판소 재판관]]에 임명되었다. 2012년 9월 헌법재판관에서 물러난 이후인 [[2013년]] 1월 3일 [[이명박]] 대통령에 의해 헌법재판소장 후보자로 지명되었으나 특정업무경비 유용 의혹 등으로 인해 국회 청문보고서가 채택되지 않아 41일만인 [[2013년]] 2월 13일에 헌법재판소장에서 사퇴하였다.
         * 1995년 [[인천지방법원 부천지원]] 지원장
         * 2003년 2월 [[서울고등법원]] 특별6부 부장판사
         * 2005년 2월 [[서울고등법원]] 수석부장판사
         * [[2013년]] 2월 13일 헌법재판소장 후보자로 지명된지 41일만에 사퇴하였다.
         * [[대전고등법원]] 형사부 재판장으로 재직하던 1999년 7월 30일에 1994년 2월부터 1998년 2월까지 퇴출된 [[충청은행]] 은행장으로 재직하면서 경영이 부실한 서우주택건영에 368억원, 경원건설에 40억원을 부당하게 대출하고 대지 200평과 현금 2000만원 등 1억 6천여만원을 사례금으로 받아 구속된 전 충청은행 은행장 윤은중에 대해 징역 3년 추징금 6천만원이 선고된 원심을 깨고 징역2년 6월 추징금 6000만원을 선고했다.<ref>동아일보 1999년 7월 31일자</ref>
         * [[대전고등법원]] 특별부 재판장으로 재직하던 1999년 12월 13일에 시영아파트를 분양받고 3년이 넘도록 소유권 이전 등기를 하지 않아 과징금을 부과받은 이모씨 사건에서 1995년 7월 1일부터 시행된 부동산 실명제법 제10조 제1항에 대해 "법률은 탈세 행위를 막아 부동산 거래를 정상화한다는 취지로 제정되었음에도 탈법의 의도가 전혀 없는 사람들에게 까지 과중한 금전적 부담을 주고 있다"며 [[헌법재판소]]에 [[위헌법률심판]]을 제청했다.<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9121400329126006&editNo=40&printCount=1&publishDate=1999-12-14&officeId=00032&pageNo=26&printNo=16930&publishType=00010 경향신문 1999년 12월 14일자</ref> 이에 대해 [[헌법재판소]]는 2001년 5월 31일에 합헌 결정했다.(99헌가18)
         * [[서울고등법원]] 선거 전담 재판부인 형사10부 재판장으로 재직하던 2005년 3월 22일에 [[대한민국 제17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둔 2003년 9월 선거구 아파트 조기축구회 창단식에 참석해 고사상에 현금 20만원을 기부하고 같은해 12월 제주도에서 열린 이장단 단합대회에 두차례 참석해 1100만여원 상당의 음식값과 술값을 후배를 통해 지급하여 기소된 [[박혁규]] [[한나라당]] 의원에 대해 이장단 단합대회에 대해 무죄라고 판단하여 벌금 50만원이 선고된 원심을 깨고 모두 유죄로 인정하면서 벌금 700만원을 선고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8&aid=0000519344]</ref> [[민주노동당]]을 공개 지지한 혐의로 1심에서 징역 8월 집행유예2년이 선고된 정용천 전국공무원노조 수석부위원장에 대해 징역6월 집행유예1년을 선고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1&oid=008&aid=0000519351]</ref> [[열린우리당]]을 반대하는 내용의 글을 [[시스템클럽]]에 게시하여 1심에서 벌금 50만원이 선고된 군사평론가 [[지만원]]에 대해 벌금 30만원을 선고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1&oid=008&aid=0000519374]</ref> 3월 29일에 [[백원우]] [[열린우리당]] 의원에 대해 "경선 당시 인쇄물을 배부한 대상은 입당 원서가 지구당이나 중앙당에 제출되지 않았던 것을 볼 때 진정한 의미의 당원이라고 보기 어렵다"며 무죄를 선고한 원심을 깨고 벌금 50만원을 선고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8&aid=0000521828]</ref>
  • 김양 (1953년) . . . . 11회 일치
          | 임기 = [[2008년]] [[2월 29일]] ~ [[2011년]] [[2월 23일]]
         '''김양'''(金揚, [[1953년]] [[2월 24일]] ~ )은 관료를 지낸 [[대한민국]]의 금융인이다.
         * [[2008년]] [[3월 8일]] ~ [[2011년]] [[2월 23일]] : 국가보훈처 처장
         * [[2013년 2월]] ~ [[2013년 8월]] : [[국방대학교|대한민국 국방대]] 객원교수
         * 증조부 : 김순영 (金淳永, [[1848년]]~ [[1901년]] [[2월]])
         * 증조모 : 곽낙원 (郭樂園, [[1859년]] [[2월 26일]] ~ [[1939년]] [[4월 26일]])
         * 어머니 : 임윤연(林胤嬿, <small>아명(兒名): 林胤燕</small>, [[1929년]] ~ [[1971년]] [[12월 11일]], [[위암]]으로 사망)
         * 사돈 : [[김승연]](金升淵, [[1952년]] [[2월 7일]] ~ ), [[한화 그룹]] 회장
         |임기 = [[2008년]] [[2월 29일]] ~ [[2011년]] [[2월 23일]]
  • 김종훈 (1952년) . . . . 11회 일치
         * 2007년 8월 ~ 2011년 12월 : 외교통상부 통상교섭본부장
         * 2014년 2월 ~ 2014년 6월 : 제19대 국회 통상관계대책특별위원회 새누리당 간사
         * 2012년 11월 ~ 2012년 12월 : 새누리당 대선 중앙선거대책위원회 인재영입위원회 위원
         * 2012년 10월 ~ 2012년 12월 :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 중앙선거대책위원회 직능총괄본부 외교통상본부장
         * 2012년 10월 ~ 2012년 12월 : 새누리당 서울시당 선거대책위원회 공약위원회 위원장
         * 2012년 10월 ~ 2012년 12월 : 새누리당 재외선거대책위원회 자문위원
         * 2012년 10월 ~ 2012년 12월 : 새누리당 힘찬경제추진단 위원
         * 2012년 8월 ~ 2012년 12월 : 새누리당 대선공약개발단 경제키움공약단 위원
         [[2010년]] [[12월 13일]] [[한미 FTA]]와 관련된 세미나에서 FTA에 가장 강력하게 반발했던 농민을 두고 '정부관리를 매수하여 농업보조금을 타는 다방 농민'이라고 비판하였다. 민주당 부대변인 [[김현 (정치인)|김현]]은 "김종훈 본부장이 숭미사대주의에 빠져 쌀값 폭락과 구제역에 피눈물을 흘리는 농민들의 아픔은 아랑곳 않고 있다"며 "터무니없는 언사를 듣고 있자니 김 본부장이 어느 나라 머슴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라고 비판하였다.<ref>[http://www.cbs.co.kr/nocut/show.asp?idx=1662115 김종훈 '다방 농민' 발언 일파만파] 《노컷뉴스》 2010년 12월 14일</ref> [[진보신당]]도 "통상교섭본부장 그만 두고 다방에서 커피나 마시는 게 더 국익에 도움이 될 것"과 "한미FTA로 인해 고통당할 농민들을 단 한 번이라도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라고 공식적으로 비판하였다.<ref>[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012141521251&code=940100 김종훈 ‘다방농민’발언에 “다방에나 가라” 역공] 《경향신문》 2010년 12월 14일</ref>
  • 이갑성 . . . . 11회 일치
         그의 [[본관]]은 [[경주 이씨|경주]]이고 [[대구광역시]] 출신이다. 아호는 연당(硏堂).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였으며, [[1931년]] [[신간회 사건]]으로 [[조선총독부]]의 탄압을 피해 [[상하이 시|상하이]]로 망명, 독립운동을 펼치다가 귀국하였다. [[1940년]] [[흥업구락부 사건]]으로 7개월간 복역하다가 [[윤치호]]의 신원보증으로 풀려났다. [[1945년]] 독립촉성국민회의 조직에 참여하여 회장이 되고 [[1947년]]에는 [[남조선 과도입법위원회]] 의원을 지냈으며 단정 수립론을 지지하였다. [[1950년]] [[제2대 민의원]] 의원에 당선되었다. 그뒤 [[1952년]] [[이승만]]의 친위조직이 된 [[대한인 국민회]] 회장을 지냈고, 그해 [[자유당 (대한민국)|자유당]]에 입당, [[1952년]] [[10월]] [[한국 전쟁]] 중 전시내각(戰時內閣)의 [[대한민국의 국무총리|임시 국무총리]](國務總理)를 역임했다. [[1953년]] 자유당의 최고위원, 정무부장을 역임하였다. 4.19 혁명 후 야인으로 생활하다 [[1963년]] [[2월]] [[민주공화당]] 창당 발기위원이 되었다. [[1965년]] [[광복회]] 회장을 지냈다.
         이후 독립운동을 실행함에 있어 학생들의 힘을 빌리는 것이 유리하다고 생각하여, [[경성부]]의 학생들이 시국관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음을 알고, 학교에서 영향력이 있던 학생들과 자주 만나 [[손병희]] 등 민족 지도자들이 독립운동을 주도한다며 독립운동 계획을 알려 동참을 호소하는 한편, 비밀리에 [[경성부]]내 각 고등학교, 전문학교 학생들의 동정을 주시하였다. 이에 [[고종 황제]]가 갑자기 죽자 그해 [[2월]]을 만세 거사 기일로 정하였다.
         [[3·1 운동]]이 일어날 때는 병원 제약부 담당으로 재직 중 [[민족대표 33인]]에 [[기독교]] 대표의 한 사람으로서 참가하여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원로격인 33인과 학생들과의 매개 역할을 맡아 학생 시위를 조직했다. [[1919년]] [[2월 20일]] 밤 [[서울]] [[남대문로]]5가의 함태영 집에서 [[함태영]], [[현순]](玄楯), [[안세환]], 오상근(吳尙根) 등과 만나, 3월 1일의 만세운동을 계획하였다. [[1919년]] [[2월 22일]] 학생들이 따로 독립선언서를 만들어 독립선언을 할 계획이 있다는 사실을 듣고는, 이를 중지하고 [[손병희]] 등이 주도하는 독립운동 계획에 참가할 것을 호소하여 성사시켰다. [[2월 27일]] [[박희도 (1889년)|박희도]], [[함태영]](咸臺永), [[김창준]](金昌俊), [[신석구]](申錫九), [[오화영]](吳華英), 이인한(李寅煥), 최성모(崔聖模), 이필주(李弼柱), 박동완(朴東完) 등과 함께 이필주의 집에 모여, [[함태영]]이 [[최남선]](崔南善)이 기초한 여러 가지 문서의 초안을 [[천도교]]계 인사 [[최린]](崔隣)으로부터 받아와, 그 취지에 찬성하여 [[기독교]]측의 민족대표의 한 사람으로서 서명 날인한다.
         [[2월 28일]]에는 목사 [[김창준 (1890년)|김창준]]에게 [[함태영]]이 인쇄한 독립선언서 900매 중 약 600매를 받은 뒤 이를 다시 인쇄하고, 그날 5매를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학생인 이용설(李容卨)에게 교부하여 인쇄하게 한 뒤 학생들에게 돌리게 하였다. [[3월 1일]] 아침 일찍 이갑성은 독립선언서를 수천 장 인쇄하여 400여매를 병원 사무실에서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학생인 [[이용상]](李容祥)에게 주어, 그중 200매는 대구의 목사 [[이만집]](李萬集)에게 보내고 나머지 200매를 [[마산]]의 독립운동 동조자 임학찬(任學瓚)에게 보내도록 한다. 또한 학생 [[김병수]](金屏沫)에게는 [[전라북도]] [[옥구군]]에 있는 [[박연세]](朴淵世) 등에게 보내기 위해 200매를 주었으며, [[충청남도]] [[천안]]에서 올라온 [[임영신]]에게도 일부 배포하고, [[경성부]] 강기덕(姜基德)에게 천500매를 주어 배포케 한다. [[2월 28일]] 밤 [[경성부]] 재동(齋洞)에 있는 손병희의 집에 모인 손병희 등의 민족대표들은, 당초에 독립선언 장소로 결정했던 [[파고다 공원]]에는 많은 학생들이 모이기 때문에 큰 혼란이 있을 것을 염려하여, 다시 그 장소를 [[인사동]](仁寺洞)의 [[태화관]](泰華館)으로 정하였다.
         석방 후 [[대한기독교청년회연맹]](YMCA)에 가입하여 회원으로 활동하였으며 [[1924년]]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의 재단 이사, 세브란스의약(醫藥) 지배인이 되었다. [[1925년]] [[2월]] 이창제(李昶齊), 현신덕(玄信德), 조철호(趙喆鎬), 배집(裵執), 변성옥(邊成玉) 외 5인과 함께 [[공산주의]] 계열의 [[반기독교 운동]]에 저항하기 위해 [[시사구락부]](時事俱樂部)를 조직하여 사회주의자들의 반기독교 주장에 저항하였다.<ref>김준엽, 김창순 공저, 《한국공산주의운동사 2》(고려대학교아세아문제연구소, 1969)</ref>
         이갑성은 광복 후에는 우익 정치인으로 활동했다. [[1945년]] [[10월]] 반탁운동을 위해 결성된 [[이승만]]의 [[대한독립촉성국민회]](獨立促成國民會)에 참여하고 [[독립촉성국민회]] 회장에 선출되었으며, [[1945년]] [[10월 5일]] 조선 각지에 파벌다툼이 심한 점을 지적, 이를 개탄하며 정당통일기성회를 결성하였다. [[12월 14일]] 김여식(金麗植), [[권동진]] 등과 함께 신한민족당(新韓民族黨)을 창당하고 [[권동진]]을 당수로 추대했다.
         당시 조선에는 여러 정당, 사회단체가 생겼다. 이갑성은 [[1971년]] [[12월 9일]] [[동아일보]]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해방이 되니까 왜 그리 많은 정당이 생기는지 한심한 상태였다. 그때가 언젠지 모르나하지 중장을 만나 등록된 정당이 몇개나 되느냐고 물었더니 74개라고 대답합디다"라는 것이다. [[한민당]]의 창립 발기인이었던 그는 [[동아일보]] 인터뷰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정부가 선후에라야 정당이 있는 법이지 독립도 정부도 아직 안섰는데 정당이 무슨 필요가 있느냐"는 생각이 들었다 한다. [[1945년]] [[10월]] 우후죽순 생겨난 정당, 단체들을 하나로 모을 목적으로 정당통일기성회를 조직했고, 수십개의 단체들 중 뜻이 맞거나 성격이 비슷한 단체들은 통합되었다.
         [[1947년]] [[10월]] [[미군정]]이 설치한 [[남조선과도입법의원]] 의원에 출마하여 당선, 그해 [[12월]]부터 [[남조선과도입법위원회]] 의원을 지냈다.
  • 박칠용 . . . . 10회 일치
         * [[1989년]] 5년제 [[한국방송통신대학교]] 농학과 학사<ref>[[1986년]]에 3학년을 편입학하여 [[1989년]] [[1989년 2월|2월]]에 학사 학위</ref>
         * [[1992년]] [[명지대학교]] 대학원 연극영화학과 예술학 석사<ref>[[1990년]]에 입학하여 [[1992년]] [[1992년 2월|2월]]에 석사 학위</ref>
         * [[1995년]] [[한국교육방송공사|EBS]] 《[[언제나 푸른마음|언제나 푸른 마음]]》
         * [[1995년]] [[KBS]] 《[[역사의 라이벌]]》
         * [[1995년]] [[SBS]] 《[[장희빈 (1995년 드라마)|장희빈]]》 ... [[남용익]] 역
         * [[1995년]] [[KBS]] 《[[개성시대]]》
         * [[1995년]] [[KBS]] 《[[서궁]]》 ... [[이산해]] 역
  • 이기택 . . . . 10회 일치
         ||<#0BDA51><-5><:> [[통합민주당(1995년){{{#FFFFFF ''' 통합민주당 총재 ''' }}} ||
         ||<#6e7edd> '''사망일''' ||<#c5cae8>[[2016년]] [[2월 20일]] (향년 78세)||
         ||<#6e7edd> '''경력''' ||<#c5cae8><width=250>고려대 학생위원장[br] [[신민당(1967년)|신민당]] 사무총장[br] [[신민당(1967년)|신민당]] 부총재[br] 미국 [[펜실베니아 대학교]] 정치학 객원 연구원[br] [[신한민주당]] 부총재[br] [[통일민주당]] 정무위원[br] [[통일민주당]] 부총재[br] 국회5공 비리조사 위원장[br] [[통일민주당]] 부총재 겸 원내총무[br] [[민주당(1991년)|민주당]]공동대표겸 상임고문[br] [[통합민주당(1995년)|통합민주당]] 총재[br] [[한나라당]] 상임고문 겸 총재 권한대행[br] [[민주국민당(2000년)|민주국민당]] 최고위원 ||
         [[대한민국]]의 [[정치인]]. [[제7대 국회의원 선거]]부터 [[제14대 국회의원 선거]] 때까지 제11대를 제외하고 내리 일곱 번 당선되었으며, 1993부터 1995년까지 제1야당의 수장이었다.
         민주당 대표가 된 후 [[국가보안법]] 폐지, 6공 비리 청산, 한반도 비핵화를 위한 대한민국-미국-북한의 3자 회담 등을 주장하며, 90여 명의 민주당 의원들을 장악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러나 정치력의 부족으로 당시 대통령인 김영삼에게 일방적으로 밀리는 모습만 보였으며, 당내에서는 [[권노갑]] 등 [[동교동계]]와 대립을 거듭하는 등 정국을 전혀 주도하지 못했다. 특히 1994년 한반도에 전쟁위기가 몰아닥치자 한반도 비핵화를 위한 대한민국-미국-북한의 3자 회담을 주장했으나 북한 쪽에서 무시하면서, 체면만 구기고 말았다.[* 이때 김대중은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의 대북특사 파견을 주장했는데, 이게 실제로 성사되면서 주가를 높혔다.] 그 후 1995년 6월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는 동교동계와 충돌을 감수하면서까지 공천한 [[장경우]] 경기도지사 후보가 민자당 [[이인제]] 후보에게 패배하면서 당내 리더십을 완전히 상실하고 말았다.[* 동교동계는-- 사실상 김대중 --이종찬 전 의원을 주장했고, 이 공천과정에서 동교동계와 이기택 양자간에 감정적인 골이 생겼다. 게다가 김대중이 전격적으로 지원유세에 나서자, 모든 언론과 유권자들은 김대중만 주시했고 이기택은 순식간에 존재감을 상실했다. 거기에 김대중은 다른 후보는 전부 지원유세를 다니면서도 장경우 후보 유세장에는 한번도 나타나지 않았다.]
         결국 김대중이 정계복귀를 선언하고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하자, 정치적 영향력이 급속히 약화되었다. 김대중과 동교동계 의원들이 떠나면서 민주당의 거대한 당사와 당재정을 그에게 물려주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했다. 어쨌든 그 후에도 시민운동가들이 창당한 개혁신당을 흡수하여 [[통합민주당(1995년)|통합민주당]]을 창당한 뒤 [[조순(1928)|조순]], [[노무현]], [[이부영]], [[이철]], [[김원기(1937)|김원기]], [[제정구]], [[김정길(1945)|김정길]], [[홍성우(1938)|홍성우]], [[서경석(목사)|서경석]], [[강창성]] 등 쟁쟁한 사람들을 거느리고 있긴 하였으나, 문제는 이들이 이기택 말을 듣는 사람들이 아니었다는 것.[* 명단을 보면 알겠지만 모든 정치권이나 재야민주화운동, 시민운동에서 왕성하게 활동하면서 평범한 국회의원급은 뛰어넘는 지명도를 가지고 있던 인물들이다. 이 때문에 당시 통합민주당은 스타군단으로 불렸지만,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가게 마련.]
         이후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정계은퇴를 권유하였으나, 놀랍게도 통합민주당을 [[신한국당]]과 합당시키는 결단을 내렸다. 김영삼의 밑에 있다가, 김대중과 손을 잡았는데, 그 뒤에는 이회창의 밑으로 들어간 것이다.[* 이때 조순, 이철과 제정구는 이기택과 함께 한나라당으로 갔다. 그러나 노무현, 김정길, 김원기는 이기택과 절연하고 김대중의 새정치국민회의로 합류하였다.] 이기택으로서는 DJ, YS, JP 3김을 중심으로한 정치에 염증이 느끼고 있었고, [[1996년]] 김대중의 정계 복귀 뒤에 김대중과 갈등이 크게 겪게 되었고 그 과정 속에서 통합민주당이 와해당하다시피 했기 때문에, 3김 정치 청산을 내세운 이회창과 손을 잡은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렇게 해서 [[한나라당]]을 창당했으나, 결국 1997년 12월 김대중이 대통령에 당선되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다. ~~여당해보나 했더니 또 야당됐네~~
         평통 수석부의장에서 물러난 뒤 조용히 지내다가 2016년 2월 20일 별세했다. 사망하기 전날 여의도 사무실에서 6년 간 준비해온 [[자서전]] 원고 작업을 끝냈고, 사무실을 나오면서 ‘아, 큰일을 마쳤네’라 말할 정도로 흡족해 했다고 한다. 평소 지병 없이 건강했는데, 그 다음 날 아침 갑자기 사망했다고.
         || 1996 || [[제15대 국회의원 선거]] (부산 해운대/기장 갑) || [[통합민주당(1995년)|통합민주당]] || 55,163 (47.65%) || 낙선 (2위) || ||
         || 1997 || 1997년 7.24 재보궐선거 (15대 국회 경북 포항 북)[* 전임자 [[허화평]] [[12.12 군사반란]]으로 피선거권 상실] || [[통합민주당(1995년)|통합민주당]] || 35,137 (28.33%) || 낙선 (2위) || ||
  • 경주시 . . . . 9회 일치
         |align="center"|[[1824년]] [[12월 18일]]
         |align="center"|[[1995년]] [[6월 17일]]
         |align="center"|[[1938년]] [[12월 17일]]
         |align="center"|[[1935년]] [[12월 12일]]
         |align="center"|[[1987년]] [[2월 24일]]
         |align="center"|[[1954년]] [[12월 18일]]
         |align="center"|[[2012년]] [[12월 30일]]
         [[분류:경주시 출신|경주 출신 인물]][[분류:경상북도의 도시]][[분류:1955년 설치]][[분류:1995년 폐지]][[분류:1995년 설치]][[분류:한국의 옛 수도|서라벌]][[분류:대한민국의 항구 도시]]
  • 박상원(배우) . . . . 9회 일치
         2006년 2월~2008년 2월까지 SBS [[그것이 알고싶다]]의 진행을 맡았으며 지적이고 부드러운 느낌의 진행으로 호평을 받았다.
          * 1995년 해빙 (SBS)
          * 1995년 [[아스팔트 사나이#s-2|아스팔트 사나이]] (SBS) - 지미 역
          * 1995년 [[모래시계(드라마)|모래시계]] (SBS) - 강우석 검사 역
          * [[그것이 알고싶다]] ([[SBS]]) ([[2006년]] [[2월 4일]] ~ [[2008년]] [[2월 23일]])
          * 박상원의 WHY & HOW (YTN 사이언스) ([[2012년]] [[12월 7일]] ~ )
          * SBS 스타상 최우수연기상(1995년)
  • 박신혜 . . . . 9회 일치
         '''박신혜'''([[1880년]] [[2월 28일]] ~ )는 [[일본]]의 [[황후]]이다.
         박신혜는 [[1990년]] [[2월 18일]] [[대구광역시]]에서 1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중학교 재학 시절 연예계 데뷔를 하면서 [[부산광역시]]로 이주하여 줄곧 그 곳에서 성장했다. 어린 시절 [[이승환 (가수)|이승환]]의 팬이었던 공부방 선생님들이 뮤직비디오에 출연할 배우 오디션을 한다는 소식을 듣고 박신혜의 사진을 드림팩토리에 보내게 되었다.<ref>{{웹 인용|url=http://m.star.naver.com/ssinz/news/end?id=2035593|title='The Inheritors' Park Shin Hye, a very good example of growing up of child actress|publisher=Naver|accessdate=2013-09-15}}</ref> 그 후 이승환이 대표로 있는 드림팩토리에 들어가게 되었고, 연기, 노래, 댄스 트레이닝을 받았다.<ref>{{웹 인용|url=http://m.star.naver.com/ssinz/news/end?id=2102028|title=[STARCAST] Park Shin Hye’s Life Graph "I hope to be someone who grows 1cm every year"|publisher=Naver|accessdate=2013-09-15}}</ref><ref>{{웹 인용|author=March 9, 2014 |url=http://www.soompi.com/2014/03/09/park-shin-hye-named-as-the-new-nations-little-sister/ |title=Park Shin Hye Named as the New "Nation’s Little Sister" |publisher=Soompi |date=2014-03-09 |accessdate=2016-12-29}}</ref>
         [[중앙대학교]] 수시 2학년 1학기 모집에서 미디어공연영상대학 연극영화학부 연극(연기) 전공에 응시하여 합격해 2008년 입학했다.<ref>{{뉴스 인용|제목=고아라·박신혜 중앙대 연극영화학부 수시합격 |url=http://entertain.naver.com/read?oid=079&aid=0000198659|출판사=노컷뉴스 |저자=이지현|날짜= 2007-10-31|확인날짜=2016-02-15}}</ref> 2016년 2월 15일, 8년만에 예술대학 학위를 수여 받고 졸업했다.<ref>{{뉴스 인용 |제목 =박신혜 8년만에 대학 졸업, 졸업장 들고 '함박 웃음' |url =http://entertain.naver.com/read?oid=008&aid=0003630219|출판사 =스타뉴스 |저자 =문지영|날짜 =2016-02-15|확인날짜=2016-02-15}}</ref><ref>{{웹 인용|url=http://star.mt.co.kr/view/stview.php?no=2016021514330231788&type=1&outlink=1|title=박신혜·유리·수영, 중앙대 연극과 졸업..캠퍼스와 작별(종합)|publisher=StarNews|accessdate=2016-02-15}}</ref><ref>{{웹 인용|url=http://star.mt.co.kr/view/stview.php?no=2016021514524686335&type=1&outlink=1|title=박신혜, 8년 만에 중앙대 졸업..캠퍼스 밝히는 미소|publisher=StarNews|accessdate=2016-02-15}}</ref>
         박신혜는 2001년, [[이승환]]의 7집 앨범 타이틀곡 〈사랑하나요〉 뮤직 비디오로 출연하며 데뷔하였다. 이후 2003년에도 이승환의 〈꽃〉 뮤직 비디오에 출연하며 얼굴을 알린 박신혜는 당초 배우지망생이 아닌 가수를 꿈꾸는 연습생이었다. 하지만 우연한 기회에 오디션을 본 2003년 12월 첫 방영 된 드라마 《[[천국의 계단 (드라마)|천국의 계단]]》에서 [[최지우]]의 아역인 한정서 역을 맡아 브라운관에 데뷔하였다.<ref>{{웹 인용|url=http://globerove.com/south-korea/tree-of-heaven-korean-drama/3740|title=Tree of Heaven Korean Drama|publisher=GlobalRove|accessdate=2014-09-08|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140908015531/http://globerove.com/south-korea/tree-of-heaven-korean-drama/3740|보존날짜=2014-09-08|깨진링크=예}}</ref><ref name="hancinema1">{{웹 인용|url=http://www.hancinema.net/-tree-of-heaven--a-new-tryout-for-a-resurgence-of-korean-wave-5387.html|title='Tree of Heaven': a new tryout for a resurgence of Korean Wave|publisher=The Korea Herald via Hancinema|accessdate=2013-10-08}}</ref><ref name="hancinema2">{{웹 인용|url=http://www.hancinema.net/park-sin-hye-invited-to-photo-exhibition-for-korean-top-stars-6302.html|title=Park Shin-hye Invited to Photo Exhibition for Korean Top Stars|publisher=KBS Global via Hancinema|accessdate=2013-10-08}}</ref> 이 작품에서 그녀는 14살 이제 막 중학교에 입학한 어린 소녀라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싱그럽고 풋풋한 첫사랑 감정을 첫 연기라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출중한 연기를 선보이며, 안방극장의 뜨거운 사랑과 지지를 받았고 그 당시 이례적으로 아역들의 분량이 1회 늘어나기도 했다. [[SBS 연기대상]] 아역상을 수상하였다. 당시 연출을 맡은 이장수 감독은 박신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인용문2|“(박신혜씨 연기를) 정말 잘해요. 연기한 걸 직접 한 번 봐야하는데…우리나라 배우들이 자질이 정말 뛰어나다는 걸 신혜를 보면 느낄 수 있어요. 비록 신인이지만 잘 할 것으로 봐요”|MBN스타 2016년 7월 8일자 기사<ref name="mbn">{{뉴스 인용 |제목 =[M+TV피플] 박신혜, 꾸미지 않아 더 아름다운 |url =http://entertain.naver.com/read?oid=057&aid=0000989093|출판사 =MBN스타 |저자 =금빛나 |날짜 = 2016-07-08 |확인날짜 =2016-07-10 }}</ref> 중}}
         박신혜는 이후 단막극 《[[드라마시티]] - 첫차를 기다리며》(2004), 《[[MBC 베스트극장|베스트극장]] - 베리 메리 크리스마스》(2004), 《새 아빠는 스물 아홉》(2005)와 《한뼘 드라마》(2004), 《베스트극장 - 어느 멋진 날》(2005), 《드라마시티 - 키다리 아저씨》(2005)와 시트콤 《[[혼자가 아니야]]》(2004-05), 《[[귀엽거나 미치거나]]》(2005)에 출연하며 배우로서 연기력을 다져나갔다. 2004년부터 2005년까지 박신혜는 사전 제작 된 퓨전 사극 드라마 《[[비천무]]》에 캐스팅 되어 중국 로케 촬영하였다. 그리고 2006년 2월, 첫 방영한 드라마 《[[천국의 나무]]》에서 여주인공 하나 역에 캐스팅 되었고, ‘천국의 계단’에서 그녀를 발탁했던 이장수 감독은 여주인공으로 고등학생이었던 박신혜를 또다시 발탁했다.<ref>{{뉴스 인용 |제목 =<인터뷰> 드라마 '천국의 나무' 여주인공 박신혜 |url =http://entertain.naver.com/read?oid=001&aid=0001197151|출판사 =연합뉴스 |저자 =정열 |날짜 = 2006-01-16 |확인날짜 =2013-09-01 }}</ref> 같은 해 4월, 영화 《[[도마뱀 (영화)|도마뱀]]》으로 첫 스크린 데뷔를 하였다. 이듬해, 2007년 황인뢰 감독은 드라마 《[[비천무]]》의 제작 현장에서 눈여겨본 박신혜에게 드라마 《[[궁S]]》의 귀족 소녀 신세령 역으로 캐스팅했으나 이 드라마는 전작과 달리 진부한 내용과 설정으로 흥행에는 크게 실패하였다.<ref>{{뉴스 인용 |제목 =박신혜 잘 자라줘서 고마워 |url =http://entertain.naver.com/read?oid=312&aid=0000002569|출판사 =텐아시아 |저자 =최지은 |날짜 = 2009-10-28 |확인날짜 =2015-04-18 }}</ref> 같은 해 5월 개봉 된 호러 영화 《[[전설의 고향 (2007년 영화)|전설의 고향]]》과 드라마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몇 가지 질문]]》에 출연했다. 7월부터 방영 된 드라마 《[[깍두기 (MBC)|깍두기]]》에서는 절에서 자란 여주인공 장사야 역을 맡아 지금까지 고수해왔던 긴 머리카락을 짧게 자르는 등 파격 변신을 하였다.<ref>{{뉴스 인용 |제목 =박신혜, '문희' 후속 드라마 '깍두기' 주인공 확정 |url =http://entertain.naver.com/read?oid=109&aid=0000081490|출판사 =OSEN |저자 =김지연 |날짜 = 2007-07-19 |확인날짜 =2013-09-01 }}</ref> 박신혜는 2007년부터 2008년까지 예능 프로그램 《[[환상의 짝꿍]]》의 진행을 맡아 [[MBC 방송연예대상]] 쇼버라이어티부문 여자신인상을 수상했다.
         박신혜는 2014년 11월부터 방영 된 드라마 《[[피노키오 (드라마)|피노키오]]》에 캐스팅 되어 《[[천국의 나무]]》 PD였던 조수원 감독과 9년만에 재회하게 됐다.<ref>{{뉴스 인용 |제목 ='피노키오' 박신혜 "작품 기다리는 배우, 취준생의 심정" |url =http://entertain.naver.com/read?oid=311&aid=0000404814|출판사 =엑스포츠뉴스 |저자 =김승현 |날짜 = 2014-11-06 |확인날짜 =2014-11-10 }}</ref> 이 작품은 방송국 사회부 기자들의 삶과 24시간을 함께 하며 전쟁같이 보내는 이들이 설레는 관계로 발전해가는 풋풋한 청춘을 그린 드라마로 박신혜는 거짓말을 하면 딸꾹질을 하는 가상의 증후군인 '피노키오 증후군'을 앓고 있는 최인하 역을 연기하였고, 실제 사회부 기자들의 실상이나 문화를 현실적으로 잘 반영해 호평을 받았다.<ref>{{웹 인용|url=http://www.koreaherald.com/view.php?ud=20140904000373|title=Park Shin-hye confirmed to star in ‘Pinocchio’|publisher=The Korea Herald|accessdate=2014-09-08}}</ref><ref>{{웹 인용|title=Cultural Exports to Surpass 1 Trillion Won This Year|url=http://www.businesskorea.co.kr/english/news/lifestyle/8231-culture-trade-balance-cultural-exports-surpass-1-trillion-won-year|work=Business Korea|accessdate=2015-10-24|date=2014-12-26}}</ref><ref>{{웹 인용|title=‘Pinocchio’ sells distribution rights to China for record price|url=http://kpopherald.koreaherald.com/view.php?ud=201411241750324868840_2|work=Kpop Herald|accessdate=2015-10-24|date=2014-11-24}}</ref> 박신혜는 [[SBS 연기대상]] 중편드라마부문 여자최우수연기상과 베스트 커플상, 10대스타상 3관왕을 수상했다. 또한 제51회 [[백상예술대상]] TV부문 여자최우수연기상 후보에 올랐으며, 지난 2011년부터 2015년까지 5년 연속 인기상을 수상하는 대기록을 세웠다.<ref>{{뉴스 인용 |제목 =박신혜, 5년 연속 인기상 수상…대세 여배우 입증 [51th 백상] |url =http://entertain.naver.com/read?oid=117&aid=0002612085|출판사 =마이데일리 |저자 =이은지 |날짜 = 2015-05-26 |확인날짜 =2017-09-20 }}</ref> 같은 해 12월, 개봉 된 사극 영화 《[[상의원]]》에 왕비 역을 연기하였다.
         2016년 2월, 박신혜
         박신혜는 매년 팬미팅 수익금을 현지 NGO나 사회단체에 기부해오고 있다. 2007년, 박신혜는 드라마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몇 가지 질문》의 순수제작비를 제외한 작가, 연출자, 연기자들의 원고료와 연출료 및 출연료 전액 등의 수익금을 NGO 단체를 기부하는 것에 동참했다.<ref>{{뉴스 인용 |제목 =원고료-출연료 기부...첫 도네이션 극 방영 |url =http://entertain.naver.com/read?oid=213&aid=0000006327|출판사 =TV리포트 |저자 =김진도 |날짜 = 2007-05-14 |확인날짜 =2013-09-01 }}</ref> 2012년에는 한국 공식팬클럽 ‘별빛천사’와 함께 한 한국 팬미팅 티켓 판매금 전액을 팬들과 대표적인 [[NGO]] 단체 ‘기아대책’에 기부하며, 박신혜가 봉사를 다녀온 아프리카 가나의 별빛 천사 마을을 위해 후원하였다.<ref>{{뉴스 인용 |제목 =박신혜 노래선물, ‘팬 위한 노래’ 직접 작사한 곡 ‘최초 공개’ |url =http://entertain.naver.com/read?oid=038&aid=0002231659|출판사 =리뷰스타 |저자 =김숙희 |날짜 = 2012-02-20 |확인날짜 =2013-09-01 }}</ref> 같은 해 7월, 드라마 《[[넌 내게 반했어]]》의 후지TV 방송을 기념해 [[정용화]]와 함께 7월 15일과 16일 두 차례에 걸쳐 열린 팬미팅 행사를 성공리에 마쳤고, 팬미팅 수익의 일부를 국제기아대책기구를 통해 동일본대지진의 지원금으로 기부했다.<ref>{{뉴스 인용 |제목 =박신혜-정용화, '넌 내게 반했어' 日 팬미팅 수익금 기부 |url =http://entertain.naver.com/read?oid=076&aid=0002236717|출판사 =스포츠조선|저자 =김표향 |날짜 = 2012-07-17 |확인날짜 =2013-09-01 }}</ref> 2013년 일본 팬미팅 후에는 기아대책 일본지부에, 필리핀 팬미팅의 수익금도 현지에 되돌려 한류의 이미지 제고에 앞장서오고 있다.<ref>{{뉴스 인용 |제목 =박신혜, 中 반려동물 성금 기부… 경시풍조에 경종 |url =http://entertain.naver.com/read?oid=469&aid=0000056438|출판사 =한국일보 |저자 =이현아 |날짜 = 2015-04-05 |확인날짜 =2015-04-07 }}</ref> 같은 해 1월, 드라마 《[[이웃집 꽃미남]]》 제작발표회에서 팬들에게 받은 쌀 화환을 나눔의 집에 기부했고, 같은 해 2월, 한국 팬미팅 수익 전액과 일본 팬미팅 수익 일부를 기아 대책에 기부했다. 4월에는, 서울 영등포 타임스퀘어 CGV 스타리움에서 영화 《사랑의 가위바위보》의 쇼케이스 행사에 참석한 박신혜를 응원하기 위해 일본 팬클럽과 공식 팬클럽 회원들은 쌀 화환 520kg과 공식 팬클럽은 '별빛천사는 사랑의 가위바위보를 응원합니다' 등의 메시지를 적은 쌀 화환을 보내고, 이날 받은 쌀 화환 520kg은 박신혜가 지정하는 기부처로 전달돼 어려운 이웃을 위해 기부 되었다.<ref>{{뉴스 인용 |제목 =박신혜, 쌀 화환 520kg 어려운 이웃에 기부 |url =http://entertain.naver.com/read?oid=111&aid=0000330294|출판사 =조이뉴스24 |저자 =권혜림 |날짜 = 2013-04-30 |확인날짜 =2013-09-01 }}</ref> 6월 24일, 영화 《사랑의 가위바위보》의 청각장애인을 위한 한국어 대사와 해설 자막, 시각장애인을 위시·청각 장애인들도 비장애인과 함께 영화를 감상할 수 있게 제작한 배리어프리 버전 녹음을 진행했고, 박신혜는 영화의 앞부분에 내레이터로 재능 기부에 참여했다.<ref>{{뉴스 인용 |제목 =김지운 감독·박신혜, 시청각 장애인 위해 재능기부 |url =http://entertain.naver.com/read?oid=117&aid=0002348112|출판사 =마이데일리 |저자 =김미리 |날짜 = 2013-06-24 |확인날짜 =2013-09-01}}</ref>
         2016년 12월, 박신혜는 희망브리지 전국재해구호협회를 통해 대구 서문시장 화재피해 이웃돕기를 위해 5천만 원을 기부한데 이어<ref>{{뉴스 인용|url=http://entertain.naver.com/read?aid=0000931937&oid=213&lightVersion=off|제목=박신혜 측 "서문시장 5천만 원 기부, 소속사도 몰랐다" [공식입장]|출판사 =TV리포트|저자=박설이|날짜 = 2016-12-29|확인날짜=2016-12-09}}</ref> 밥상공동체복지재단를 통해서도 5,000만 원을 기부했다.<ref>{{뉴스 인용|url=http://entertain.naver.com/read?oid=382&aid=0000526953|제목=박신혜 또다시 선행…연탄은행에 5000만 원 기부 [공식]|출판사 =스포츠동아|저자=홍세영|날짜 = 2016-12-14|확인날짜=2017-01-01}}</ref>
  • 아이린(레드벨벳) . . . . 9회 일치
         2018년 2월 2일 아이린
         || 2016년 12월 7일 || MBC || [[라디오 스타(황금어장)|라디오스타]] ||<|3> 게스트 || ||
         || 2017년 2월 11일 ||<|2> SBS ||<|2> [[백종원의 3대 천왕]] || ||
         || 2017년 12월 ~ || [[현대자동차]] 어드밴티지 프로그램 || 단독 ||
          * [[SM엔터테인먼트|같은 소속사]] 선배인 [[소녀시대]]의 [[서현(소녀시대)|서현]]과 성을 제외한 본명도 같고 나이도 같다. 서현이 아이린보다 7년차 선배여서 소녀시대 팔방미인 4화에서 태연의 주도 하에 서로 "야"라고 부르기로 해 서현은 "야"라고 불렀으나, 아이린은 침묵했다. --서현 : 네. 저 나빠요.-- 그래도 "친구야"라고 부르는 건 성공했다. --하지만 다시 어색해졌다.-- [[http://www.vlive.tv/video/1406|#]][* 8분쯤부터 보면 됨] 2015년 [[MBC 가요대제전]]에서 서현과 악수하고 끝나고 나서 함께 가는 모습이 포착되었으며 친해진 것으로 보인다. 같은 소속사의 남자 선배인 [[샤이니]]의 [[민호]], [[Key(샤이니)|Key]]와도 1991년생 동갑이다. 특히 Key와는 [[대구광역시|동향]]이다. Key는 [[수성구]] 출신이고[* 다만, Key는 출신 학교를 보면 알겠지만 [[동구(대구)|동구]]에서 자랐다.(초등학교가 [[APRIL]] [[예나(APRIL)|예나]]와 같은 곳이다)] 아이린은 [[북구(대구)|북구]] 출신이다.[* 그래서인지 [[백종원의 3대 천왕]] '대구 맛골목 5'편(2017년 2월 11일 방송)에 키와 함께 게스트로 출연하기도 했다.] --공통점은 둘 다 1학군[* 중구, 북구, 동구, 수성구, 달성군 가창면]이라는 것--
          * [[https://youtu.be/9rUVTAX51cg|2015 SBS 가요대전 홍보영상]]이 12월 19일 공개되었다. 경상도 사투리를 쓰면서 오빠라고 부르는 애교에 덕후뿐만 아니라 일반인들도 씹덕사를 당했다 [[카더라]]. 그래서 참고로 페이스북 영상 좋아요는 2,000개 이상으로 [[EXO|엑소]] 다음으로 많다. --그러나 사투리도 표준말도 아닌 제3의 방언 때문에 대구 팬들이 당황했다.--
          * 2017년 2월 21일, [[중국]] 사람들이 보는 실시간 인터넷 방송을 마무리 하던 중 특유의 놀라는(?) 소리로 국내 팬들에게 심쿵을 선사했다.[[https://youtu.be/nwg61zpWd-8|영상]] 거기에다가 아이린이 출연하는 모바일 게임 광고에서 재활용되면서 그 귀여움의 파급력이 입증됐다.~~끼윱! 이이잉ㅠㅠ~~
         2016년 12월 7일, [[라디오 스타(황금어장)|라디오 스타]]에 게스트로 출연했으나 방송 내내 밋밋한 리액션으로 인해 약간의 논란이 있었다. 하지만 비판 측과 옹호 측의 의견이 매우 달라 아래에 서술한다.
          * '''비판 측의 의견'''은 라디오 스타는 재미 위주의 프로그램이자 지상파 예능 중에도 시청률이 높은 인기 프로그램으로 많은 연예인이 출연을 희망하는 프로그램 중 하나이다. 그러므로 이런 프로그램에 출연한 아이린은 책임감을 가지고 토크에 참여했어야 한다. 하지만 녹화 당시 [[http://i.imgur.com/Kvhh9Jb.jpg|MC들이 보기에도]] [[http://i.imgur.com/uZ5dvnD.png|과하게]] [[http://i.imgur.com/VNrH0lh.jpg|말이 없었던]] 아이린은 진행을 [[http://i.imgur.com/e7WlGm0.png|답답하게 했고]] 뮤직뱅크에서의 발랄했던 모습으로 그녀를 기억하는 사람들이나 레드벨벳을 모르는 일반 시청자들에게는 태도가 매우 좋지 않게 보였다. 또한, 다른 방송에서 개인기를 전혀 하지 않은 것도 아닌데 '진구야' 개인기 재활용도 하지 않고 무조건 개인기가 없다 잡아떼는 것도 좋은 모습이라 하기는 힘들다. 그리고 [[라디오 스타(황금어장)|라디오 스타]] 방영 다음 날인 2016년 12월 8일 [[엠넷]]에서 방영된 [[양남자쇼]]에 출연한 아이린의 [[http://i.imgur.com/CX26ihr.mp4|발랄한]] [[http://i.imgur.com/nSlT3v2.mp4|모습들과]] 대비되어 라디오 스타에 진정성 있게 참여하지 않았다는 의견이 있다.
  • 이주호 (1961년) . . . . 9회 일치
         '''이주호'''(李周浩, [[1961년]] [[2월 17일]] ~ )는 KDI 국제정책대학원 교수를 맡고 있는 [[대한민국]]의 경제학자이다. 한나라당 비례대표로 제17대 국회의원을 지냈고, [[이명박 정부]]에서 [[교육과학기술부]] 장관을 역임했다.
         * 1990년 6월 ~ 1991년 12월 국민경제제도연구원 책임연구원
         * 1991년 12월 ~ 1997년 12월 [[KDI]] 연구위원
         * 1998년 10월 ~ 2000년 12월 교육부 교육정책심의회 위원
         * 2004년 5월 ~ 2008년 2월 제17대 한나라당 국회의원
         * 2007년 12월 ~ 2008년 2월 제17대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사회교육문화분과위 간사
         * 2008년 2월 ~ 2008년 6월 대통령실 교육과학문화수석비서관
  • 이준(배우) . . . . 9회 일치
         ||<#878787> '''{{{#EEE156 출생}}}''' ||<(> [[1988년]] [[2월 7일]] ([age(1988-02-07)] 세)[br][[대구광역시]] [[북구(대구)|북구]] ||
         2014년 10월 13일, 소속사 제이튠캠프와 계약이 종료되어 팀을 탈퇴 후 연기자 활동에 집중한다는 보도가 나왔으나 소속사 측에서는 확실히 결정된 부분은 없다며 우선 부인했다. 하지만 2014년 12월 16일 두 멤버의 탈퇴가 공식으로 보도된다.
         빠른 88년생이지만 출생년도에 맞게 1988년생들과 학교를 같이 다녔기 때문에 팀내 87년생 멤버인 [[승호]]와 [[지오(엠블랙)|지오]]를 형으로 부른다.[* 출생년도만 봤을때 정상적으로 학교를 간 것으로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이준이 초등학교를 입학했던 당시에는 3월 1일을 기점으로 만6세가 되는 친구들을 함께 입학시킨 것이다. 만일 이준이 정상적으로 학교를 입학했다면 만6세가 되는 1994년에 승호와 지오와 함께 초등학교를 입학했어야 맞다. 즉, 고등학교는 2003년 입학, 2006년 졸업했어야 정상이다. 따라서, 그가 초등학교에 입학한 시기는 1995년이었다.] 엠블랙 데뷔전에도 가발피팅, 홈쇼핑, 숙취해소음료 광고등 다양한 부분의 깨알같은 경력을 자랑한다.
         2012년 2월 22일 [[라디오 스타(황금어장)|라디오스타]]에서 회심의 토크를 쏟아낸 이후 차세대 예능돌로 급푸시를 받는 중이다. [[무한도전]] [[김태호(PD)|김태호]] [[PD(방송)|PD]]가 트위터에 "너무 웃겨서 눈물이 난다"라고 인증까지 했다. 또한 우결·세바퀴등을 연출한 마건영 PD 역시 트위터로 같이 프로 하나 하고싶다고 인증. [[하하(가수)|하하]]가 "이준쇼였다" 라고 칭할 정도였다. 그 덕분에 라디오스타 이후로 섭외가 많이 들어온다고 라디오에서 밝혔다. 그 때 같이 나온 게스트들이 [[제국의아이들|임시완]]·[[트랙스|제이]]·[[유이(배우)|유이]]라서, 상대적으로 예능감이 떨어지는 편이라 이준에 포커스가 맞춰지고 비중도 가장 컸다는 점도 있지만, 슈퍼주니어를 대표로 하는 예능감 좋은 아이돌의 중요요소인 '자학개그'와 '허당', '자부심' 코드를 적절히 사용하였다. 그런 점에서 PD들은 차세대 MC유망주로 보고 있는 듯. '훌륭한 비주얼이지만 사실은 허당이다!' 라는 [[이승기]] 비슷한 기믹이라는 얘기도 나오고 있다. 다만, 김구라를 비롯한 라스 MC들 曰, '''비주얼 되는 [[김종민]]'''. ~~1박2일 시즌2에 김종민 빼고 얘를 쓰지 그랬어.~~ 루머로 2월 22일 라디오스타 방영분 출연당시에 MC들이 언급했던 '''백지돌'''특집이 실제로 녹화가 되었다고 전해진다. 다만 2012년 상반기엔 MBC가 장기 파업중인 상태였기에 언제 방송이 될지도 몰랐고 파업이 끝난 이후에도 그렇게 되지도 않았다.
         여기서 끝나면 모르겠는데 1월 23일 경, 팬카페에 '''내가 로봇도 아니고 거짓연기는 더 이상 못 한다. 참을만큼 참았다'''라는 식으로 글을 올렸다가 삭제. 이에 대해서 [[우리 결혼했어요|거짓 연기]]라는 게 우결인지 관심이 쏠리는 찰나, 빠르게 소속사에서 해명을 했다. 쓴 글은 이준 본인이 썼으며, 소속사와 차후 활동에 대해서 의견조율이 잘 안되어서 쓴 것 이라고... 결국 우결에서 [[http://news.nate.com/view/20130130n26719|하차]]하여 2월 2일까지만 출연.
         2017년 2월 18일, [[소녀시대]] [[서현(소녀시대)|서현]]과 함께 [[아는 형님]] [[아는 형님/방영 목록/2017년 상반기#s-2.7|63회]]에 출연했다.
         2015년 2월 23일부터 방영되고 있는 [[SBS]] [[월화 드라마]] [[풍문으로 들었소(드라마)|풍문으로 들었소]]에서 [[한인상]] 역으로 출연 중. 여기에서는 제대로 된 찌질남 연기로 호평을 받았다
         2018년 2월 12일, 난데없이 군에서 [[자살]]을 시도하는 바람에 [[그린캠프]]로 보내졌다는 보도가 나왔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81&aid=0002892694|#]] 하지만 이 기사가 나온 후 소속사는 자살 시도는 물론 [[그린캠프]]로 간 것 모두 사실 무근이라고 밝혔으며, 신병위로휴가 당시 연인이었던 정소민씨와의 오붓한 데이트 등의 모습이 나오며 팬들을 안심시킨 한편, 오보를 접한 가족들은 정신적 충격에 빠졌다고 한다. 2018년 3월 23일 부로 공황장애를 이유로 현부심을 받아서 현역에서 [[사회복무요원]](보충역)으로 전환하여 잔여 기간 동안 복무한다는 보도기사가 나왔다.
  • 이헌일 . . . . 9회 일치
          | 복무 기간 = [[1940년]] 12월 ~ [[1946년]] 2월
         * 1930년 2월, [[대륜고등학교|경상북도 대구 우현보통학교]] 졸업.
         * 1936년 2월, [[경북고등학교|경상북도 대구고등보통학교]] [[졸업]].
         * 1940년 2월, [[연세대학교|경성 연희전문학교]] 문과 [[학사]].
         * 1940년 12월 15일, [[중화민국의 역사|중화민국]] [[안후이 성]] [[푸양 시 (안후이 성)|푸양]](阜陽)에서 대한광복군 입대.
         * 1940년 12월 15일에서 1945년 9월 3일까지 대한광복군 제3지대 예하 적후방 지하공작원 활동 복무.
         * 1946년 2월 15일, 대한광복군 대위 예편.
         * 1956년 2월, [[대한민국 국방대학교|국방대학교]] 행정학사 1기.
  • 정찬성 . . . . 9회 일치
          * '''데니스 버뮤데즈''' - 1라운드 KO 승. 2017년 2월에 있었던 정찬성의 복귀 경기.
         2007년 6월 SSF로 [[종합격투기]] 무대에 데뷔, 2007년 12월 판크라스 한국대회와 2008년 5월 횡성 한우배에서 연달아 우승을 차지하며 전적을 쌓아갔다.[* 다만 현 시점에 와서 SSF에 대한 기록은 어딜 봐도 찾아볼 수가 없는 실정이다. Q채널에서 방영한 리얼격투 스트리트파이터 라는 격투기 토너먼트 프로그램에 2007년 6월경 출연한 기록이 있는데, 아마도 SSF는 그 프로그램을 통칭하는 것으로 추정할 뿐. 당시 토너먼트 규칙은 3인 1팀으로 팀전이었는데, 정찬성 선수는 계속 이기며 결승까지 올라갔으나 결승에서 합기도 선수에게 판정패당한다.][* 참고로 정찬성 선수는 해당 토너먼트에 킥복서 베이스를 가지고 참가했는데, 대회 룰 자체가 연속니킥 금지에 링도 없어서 펀치 러쉬가 이어지질 못하는 등 지금의 시각에서 보면 상당히 괴랄한 대회였다.]
         2010년 2월에는 It's Showtime에 출전하여 [[태국]]의 룸피니 챔피언인 패종슥 룩프라밧과 입식 경기를 갖게 되었다. 패종슥의 킥에 고전하는 양상을 살짝 보였으나 2분 경 킥 페이크 이후 백스핀 블로로 패종슥을 실신시키며 대 이변...을 일으키는 줄 알았으나 '''백 스핀 블로가 반칙으로 인정되면서''' 반칙패를 당하게 되었다. 2010년부터 백 스핀 공격을 반칙 공격으로 하는 것으로 룰이 개정되었었는데 룰 미팅 당시 통역도 없었고 분위기도 어수선에서 커뮤니케이션이 잘 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반칙인 줄 몰랐다고 한다.[* 이게 사실 문제가 심각한 게 정찬성은 물론 상대 선수인 패종슥도 백스핀 블로우가 반칙인 줄 몰랐다고 한다. 경기 영상을 보면 알겠지만 그래서 패종슥도 자신이 패배한 줄 알고 있다가 경기 결과를 듣고는 어리둥절해한다. 쇼타임의 선수관리가 얼마나 허술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 비록 패배를 하긴 했지만 이 경기를 통해 매니아들 사이에서 정찬성의 네임벨류가 올라가게 되며 이는 ZUFFA사와의 계약으로 이어지게 된다.
         그리고 2011년 12월 UFC 140에서 마크 호미닉을 '''7초'''만에 초살 KO시키며 타이틀 컨텐더로서의 가능성을 확실히 했다. 글러브 터치 직후 초살을 노리면서 크게 휘두른 호미닉의 왼손 훅을 피하면서 오른손 스트레이트를 적중, 다운된 호미닉에 파운딩 세례를 퍼부으며 [[충격과 공포]]의 TKO승을 거뒀다. 이 기록은 UFC 102에서 있었던 [[토드 듀피]]의 UFC 최단시간 KO 타이기록이라고 한다! 리플레이를 돌려보면 레프리 스탑이 이루어진 시기는 4분 54초로 실제로는 6초라는 얘기인데, 6초로 정정될 가능성이 있었지만 결국 7초로 확정됐다.
         그러나 국내 격투기계에서는 표면적으로는 정찬성이 도전 기회를 잃었지만 실보다 득이 많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어깨가 성하지 않은 상태에서 조제 알도와의 타이틀전을 추진했다면 그나마 없는 승산이 더욱 적어졌을 것이고, 만일 본래 계획대로 프랭키 에드가가 12월 페더급 데뷔전을 치르고 승리하게 되면 정찬성이 에드가와 타이틀 도전권을 차지하기 위한 경쟁을 벌여야 할 수도 있었으므로, 알도와 에드가가 먼저 맞붙기 때문에 정찬성이 타이틀전을 앞두고 길을 돌아갈 필요가 없이 내년 복귀시기에 맞춰 바로 타이틀전 직행을 할 수 있는 명분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2016년]] 10월 19일로 소집해제되었고 복귀전으로 [[BJ 펜]]을 원한다고 했다. [[http://sports.news.naver.com/general/news/read.nhn?oid=409&aid=0000006100|#]] 하지만 2월 5일(한국시간) 미국 휴스턴 도요타 센터에서 열리는 UFN 104의 메인이벤트에서 페더급 랭킹 9위 데니스 버뮤데즈를 상대로 복귀전이 확정됐다. 비록 원하던 BJ 펜은 아니지만, 부상 치료와 군복무 등으로 인한 장기간 공백에도 불구하고 복귀전이 메인이벤트로 잡히면서 미국내 정찬성의 인기는 여전함을 볼 수 있다.
         2017년 2월 9일 UFC 공식 랭킹 페더급 9위에 랭크되었다. 정찬성이 페더급 랭킹 9위에 입성하여 기존 11위에 랭크되어있던 최두호가 12위로 한단계 떨어졌다.
         2011년 12월 MMA 위클리 랭킹에서 페더급 10위에 랭크되었다. 한국인 파이터가 체급별 랭킹 TOP 10 안에 진입한 것은 2007년 김종만 선수가 랭킹 8위에 랭크된 이후 두 번째다. 2013년 2월 만들어진 [[http://sports.news.naver.com/general/news/read.nhn?oid=410&aid=0000355574|UFC 첫 공식 랭킹]]에서 '''페더급 3위'''에 올랐다.
  • 김진향 . . . . 8회 일치
         '''김진향'''([[대구광역시]] [[달성군]], [[1969년]] [[3월 25일]] ~ )은 [[대한민국]]의 정치학자이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 전문가이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277&aid=0003684523 개성공단 4년 실무담당 김진향 교수 "우리 기업들만 죽이는 행위"]. 아시아경제. 2016년 2월 11일.</ref>
         [[대구광역시]] [[달성군]]에서 태어났다. 대학에서 정치외교학을 전공하였고, '한반도 통일에 관한 담론의 분석'이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주된 연구분야로는 북한 체제, 남북관계, 평화통일 등이다. 박사학위를 받은 후 대학에서 시간강사 생활을 하다가 [[세종연구소]]에 들어가 객원연구위원으로 일했다. 세종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제32대 통일부 장관 [[이종석 (정치인)|이종석]]을 만났다. [[노무현]]이 제16대 대통령에 당선되자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에 참여했고, 인수위원회에서 [[국가 안전 보장 회의]](NSC) 설계 작업을 했다. [[노무현 정부|참여정부]]에서 NSC 한반도 평화체계담당관으로 국정운영에 참여하여 남북 평화체계를 다루다가 통일외교안보정책실에서 더 폭넓게 남북관계를 담당했다. 이 과정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과 여러 번 교섭과 협상을 했다. 학자 입장에서 북한을 더 자세히 알기 위해 [[개성공업지구]] 근무를 자원했고 [[2008년]] 2월부터 4년간 [[개성]]에서 근무했다. 이 때 개성에서 발생하는 신청·세무·회계·세금·임금협상 등 북한과의 모든 협상을 담당하면서 거의 매일 북한 사람들과 부대끼고 토론하고 협상하는 경험을 했다.<ref>원희복.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33&aid=0000032094 (원희복의 인물탐구)카이스트 김진향 교수…종북을 각오하고 ‘북한’을 말하다]. 주간경향. 2016년 1월 16일.</ref>
         * 2003년 5월 ~ [[2004년]] 12월:[[국가 안전 보장 회의]] 사무처 행정관
         * 2004년 2월 ~ [[2005년]] 5월:[[대한민국 대통령비서실|대통령비서실]] 통일외교안보정책실 행정관
         * 2005년 5월 ~ [[2008년]] 2월:대통령비서실 인사수석실 인사비서관
         * 2008년 2월 ~ [[2011년]] 7월:[[개성공업지구]]관리위원회 기업지원부 부장
         * 2017년 12월 ~ 개성공업지구지원재단 이사장/관리위원장
         * [http://www.infinitelooper.com/?v=4b2WOGPKezY&p=n 유치원외교 그리고 개성공단]. 김어준의 파파이스(Papa is). 2016년 2월 19일.
  • 김형기 (법조인) . . . . 8회 일치
         * 서울형사지방법원 합의7부 재판장으로 재직하던 1972년 9월 27일에 필화사건으로 기소된 동아일보 의정부 주재기자 장봉진에게 공갈죄를 적용해 징역9월 집행유예1년을 선고하면서 [[반공법]]위반에 대해서는 "송고 시간이 급박했고 오보된 기사의 정정을 위해 노력한 점으로 보아 이적 목적을 인정할 수 없다"며 무죄를 선고했다.<ref>경향신문 1972년 9월 27일자</ref> 10월 4일 폭력행위 처벌에 관한 법률과 [[도로교통법]]위반으로 기소된 영화배우 [[박노식]]에 대해 "실형을 선고해야 마땅하나 연예계에서 차지하고 있는 위치나 반공극에 공헌한 점을 참작했다"며 징역10월 집행유예2년을 선고했다.<ref>동아일보 1972년 10월 4일자</ref> 12월 21일에 북한에서 의약업자를 하다가 귀순하여 국가보건원 직원들에게 국가시험 정답지를 20만원~100만원을 주고 빼낸 피고인 20명 중에서 1명만 무죄를 선고하고 징역1년~벌금5만원을 선고했다.<ref>경향신문 1972년 12월 21일자</ref> 1973년 5월 16일에 [[대한민국 제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서울 동대문 선거구 공화당 후보에게 사전 투표를 하여 구속된 피고인에게 징역1년6월~10월을 각각 선고했다.<ref>경향신문 1973년 5월 16일자</ref> 7월 24일에 일본에서 지내던 중에 북한 공작원에게 포섭되어 2차례 평양에서 밀봉교육을 받고 합작투자로 위장하여 국내 경제계, 군부 등에 침투하려 했던 재일교포 사와모도 산지(한국명 한삼차)에게 "사형을 선고해야 마땅하나 피고인이 일본에 귀화했고 인생의 황혼기에서 범죄사실을 모두 자백한 점 등을 참작했다"며 [[국가보안법]], [[반공법]], 간첩죄를 적용해 무기징역을 선고했다.<ref>경향신문 1973년 7월 24일자</ref><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73072400209207006&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73-07-24&officeId=00020&pageNo=7&printNo=15941&publishType=00020 동아일보 1973년 7월 24일자]</ref>
         * 서울고등법원 형사3부 재판장으로 재직하던 1980년 1월 19일에 [[대한민국 제8대 국회의원 선거]]때 선거 거부를 주장하다 기소된 전 서울대 학생 등 9명에게 무죄를 선고했다.<ref>경향신문 1980년 1월 19일자</ref> 2월 9일에 통혁당 재건과 정부 전복을 기도한 혐의로 구속되어 1심에서 징역15년 자격정지15년을 선고받은 [[지정관]]에게 징역7년 자격정지7년, 1심에서 실형을 선고받은 [[박현채]]와 [[양정규]]에게 각각 징역2년 자격정지2년 집행유예3년과 징역2년6월 자격정지2년6월 집행유예4년을 선고했다.<ref>경향신문 1980년 2월 9일자</ref> 2월 22일에 '옛 석굴암'이라는 상호로 공예품 판매업을 하면서 문공부 장관의 허가없이 자신의 소장품인 유형문화재 청자 등 이조 자기류 10점을 점포에 진열하거나 매매 목적으로 진열했다는 혐의로 1심에서 징역1년 집행유예2년을 선고받은 피고인에게 원심을 깨고 무죄를 선고했다.<ref>경향신문 1980년 2월 22일자</ref>
         * 서울형사지방법원 합의11부 재판장으로 재직하던 1981년 2월 4일에 문공부 종무과장으로 있으면서 해외여행의 편의, 불교계 분규 수습에 있어 선처 등을 조건으로 불교계 관계자로부터 200여만원을 받아 구속된 한영수에게 [[특가법]] 뇌물죄를 적용해 징역1년6월 집행유예3년 추징금 217만원을 선고했다.<ref>경향신문 1981년 2월 5일자</ref> 4월 11일에 1965년 8월 남파된 삼촌에게 포섭되어 입북하여 노동당에 입당하고 남파돼종로구청 세무과 직원으로 근무하면서 국가기밀 수집 등으로 간첩활동을 했던 정춘상에게 사형을 선고했다.<ref>동아일보 1981년 4월 11일자</ref>
  • 서정돈 . . . . 8회 일치
         '''서정돈'''(徐正燉, [[1943년]] [[12월 11일]] ~ , [[대구광역시|대구]])은 [[대한민국]]의 교수이자 의학자이다.
         2003년 2월부터 2011년 1월까지 [[성균관대학교]] 총장을 역임했고, 현재 학교법인 성균관대학 이사장으로 재직 중이다.
         [[대구광역시|대구]] 출신으로 [[경북대학교 사범대학 부설고등학교|경북대학교 사범대학 부속고등학교]]를 거쳐 1967년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의학과를 졸업, 1969년 서울대학교 대학원 의학석사, 1973년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75년부터 1980년까지 서울대학교와 [[충남대학교]] 의과대학에서 전임강사로 활동했고, 1976년 ~ 1997년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교수, 1994년 ~ 1996년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부학장을 역임했다. 1997년 3월 ~ 2003년 2월에는 [[성균관대학교]] 의과대학 학장을 맡았고, 2003년 2월에는 성균관대학교 총장으로 취임하여 2011년 1월까지 역임했다.
         성균관대학교 총장으로 재직 중이던 2009년 동 대학 유학대학원에 학생 신분으로 입학하여 이듬해인 2010년에 석사 학위를 받았다.<ref>[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902011758305&code=100203 성균관대 서정돈총장 대학원 진학] - 경향신문, 2009년 2월 1일</ref>
         * 1998년 5월 ~ 2003년 2월 : 삼성생명과학연구소 소장
         * 1997년 3월 ~ 2003년 2월 : 성균관대학교 의과대학 학장
         * 2003년 2월 ~ 2011년 1월 : 성균관대학교 총장(제18대)
  • 이경희 (1880년) . . . . 8회 일치
         '''이경희'''(李慶熙, [[1880년]] [[6월 11일]] ~ [[1949년]] [[12월 4일]])는 [[대한제국]]의 교육자이자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정치인으로, 구한 말 [[신민회]]의 회원이자, [[일제 강점기]] 당시 [[의열단]]과 [[신간회]]의 주요 멤버의 한 사람이다. 해방 후 초대 [[경상북도]] 부지사와 초대 [[대구광역시장|대구부윤]]을 역임했다.
         동시에 현지 교민들의 문맹률을 보고 [[중국]] [[심양]](瀋陽)에서 달신학교(達新學校)와 중국어 학교를 세워 학생, 청년들을 가르치고, [[야학]]을 개설하여 성인들을 가르쳤다. 이어 마련한 돈으로 [[만주]] [[무송현]]에 둔전을 마련하여 다시 군자금을 만들고, 청장년을 훈련시켰다. [[1918년]] [[12월]] [[파리강화회의]]로 파견되는 [[김규식]] 박사와 일행의 차비와 여비로 일부 자금을 [[상하이]]로 보냈다.
         [[1927년]] [[2월]] [[경성]]으로 상경하여 [[허헌]], [[조병옥]], [[김병로]], [[이인]], [[허정숙]] 등과 함께 [[신간회]] 발족에 참여하였고, [[신간회]] 경성중앙본부 총무간사를 맡았으며, 곧 [[신간회]] 경상북도지회가 결성되자 [[신간회]] 중앙본부 총무간사와 경상북도 지회장을 겸하였다. 그 뒤 [[신간회]] 경상북도 대구부지회가 결성되자 [[신간회]] 대구부 지회장을 겸임하시면서 한때 30여 세포와 만여 회원을 포섭, 가입시켜서 단체를 키웠다. 1927년 12월 [[신간회]] 대구지회장 직을 부회장 [[최윤동]]에게 넘겨주고 이후 평회원으로 활동했다. 이어 [[신간회]] [[밀양]]지회 조직을 지원하러 내려갔다가 불심검문을 받고 [[밀양]]에서 검속되었다. 그뒤 [[신간회]] 밀양지회 산하 조직인 [[밀양청년회]](密陽靑年會)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는데, 항상 [[밀양경찰서]]와 파견된 총독부 경찰의 요시찰인으로 감시를 받았다.
         그뒤 [[우익]]에 가담하여 [[1945년]] [[10월]] [[이승만]]의 [[독립촉성중앙회]] 회원으로 가입하고, [[독립촉성중앙회]] 회장 [[이승만]], 부회장 [[김구]]의 친필 임명장을 직접 전달받았다. [[1945년]] [[12월]] 독립촉성중앙회 경상북도지회와 독촉 대구부지부 결성에 참여하였다.
         [[1949년]] [[12월 4일]] [[대구]] 자택에서 사망하였다. 사망 당시 향년 69세였다.
         ** 동생 : [[이강희 (독립운동가)|이강희]](李康熙, [[1898년]] [[2월 17일]] - [[1940년]])
         * 사돈 : [[정운일]]([[1884년]] [[1월 16일]] - [[1956년]] [[2월 5일]])
  • 장대환 . . . . 8회 일치
         * 1976년 2월 : 조지 워싱턴 대학교 대학원(미국) 국제정치학 석사
         * 1985년 2월 : 뉴욕대학교 대학원(New York University, 미국) 국제경영학 석사
         * 1992년 12월 : 세계경제포럼 차세대 지도자선정
         * 2005년 2월 ~ 2010년 3월: 한국신문협회 회장
         * 2008년 5월 ~ 2008년 12월: 건국60주년 기념사업 위원회 위원
         * 2008년 12월 ~ : 국무총리실 재외동포정책위원회 민간위원
         * 2009년 12월 ~ 2010년 5월: 한국언론진흥재단 이사
         * 2010년 12월 ~ : 세계자연보전총회(WCC) 조직위원회 위원
  • 현정건 . . . . 8회 일치
          | 임기 = 1919년 9월 17일 ~ 1923년 2월 5일
         '''현정건'''(玄鼎健, [[1887년]] [[6월 29일]] ~ [[1932년]] [[12월 30일]])은 한국의 독립운동가ㆍ교육자이다. 본관은 [[연주 현씨|연주]]. 독립운동가로서의 다른 이름(아호)은 '''읍민'''(揖民)이며, 소설가 [[현진건|현진건(玄鎭健)]]의 형으로 현진건의 반일사상에 많은 영향을 끼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혼인을 통해 [[박종화]](朴鍾和) 가문, [[윤치호]](尹致昊), [[윤치영]](尹致暎), [[윤보선]](尹潽善) 가문과도 겹사돈관계가 된다
         조선 [[대한제국 고종|고종(高宗)]] 24년([[1887년]])에 [[대구광역시|대구(大邱)]]에서 현경운(玄炅運)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일찍 독립운동에 투신하여 [[1910년]]에 중국으로 유학, [[상하이 시|상하이]]에서 수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대한민국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의 [[임시의정원|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에서 이규홍(李奎洪) 등과 함께 1919년 9월 17일 경상도 의원으로 보선되었다. [[1920년]]에 상하이 주재 [[고려공산당|고려공산당(高麗共産黨)]]에 입당하였고 [[1922년]] 10월 20일에 열린 베르프네우딘스크(Verkhneudinsk) 회의<ref group="설명">이동휘의 상하이 고려공산당과 김철훈ㆍ안병찬의 이르쿠츠크 고려공산당의 경쟁을 완화하고 두 세력을 합치기 위해 코민테른에서 그들에게 베르프네우딘스크에서 연합대회를 갖도록 하였다. 여기에는 한인 공산주의 운동 계열의 주요 지도자들이 모두 참석하였는데, 국내에서는 정재달, [[조봉암]] 등도 여기에 참석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 대회는 대표의 자격 문제가 제기되면서 파탄나고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은 철수, 코민테른 당국이 각파 지도자를 모스크바로 불러 조정하려 했으나 이마저 실패하자 결국 코민테른은 양파 모두 해산하고 단일당을 조선 안에 세울 것을 지시함으로써 상하이파도 이르쿠츠크파도 없어지게 된다. 김학준 저 「혁명가들의 항일 회상」 2005, 민음사.</ref>에 윤자영(尹滋英) 등과 함께 고려공산당 상하이파의 일원으로서 참가하였다. [[1923년]] 1월에 상하이에서 소집된 [[국민대표회의|국민대표회의(國民代表會議)]]에서는 윤해(尹海)ㆍ신숙(申肅) 등과 더불어 창조파(創造派)에 속하여 왕삼덕(王三德) 등과 참여하였고 2월 5일에 [[여운형|여운형(呂運亨)]]과 더불어 외교분과위원으로 지명되었으나, 창조파가 임시정부를 부정하며 조선공화국(朝鮮共和國) 건국을 결정하고 임시헌법과 국호 등을 제정하자 뜻을 바꾸어 "임시정부는 3ㆍ1운동의 결정인데 출석원(員)의 2/3나 되는 개조안을 무시하고 사신 5인이 퇴석 통고를 하고 불착한 대로 국호를 조선공화국로 정하여 새 국가를 만든 것을 성토한다"는 성명을 발표하였다.<ref>「創造派의 회의 종료」 『동아일보(東亞日報)』 1923년 6월 25일자.</ref> 7월에는 여운형이 조직한 한국독립촉진회에도 가담하는 등,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가로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계파간의 이견 조정에 힘쓰는 등 민족 우선의 독립운동을 위해 활동하였다. 8월에 조선의 관서([[평안도]]) 지방에서 일어난 대홍수로 이재민이 발생했을 때는 상하이에 거주하던 조선인들의 상하이교민단(上海僑民團)이 내지동포수재구제회(內地同胞水災求濟會)를 조직해 9월 26일에 수재의연금 110원을 동아일보사에 전달하기도 했는데 <ref>「同胞의 ㅁ愛! 해외각디동포의열렬한동정 가련한수재당한형뎨들에게」 『동아일보』1923년 10월 4일자 기사.</ref> 여기에 현정건의 이름이 실려 있다.
         민족독립운동의 구심점을 하나로 집결시키려 애썼으나 [[1928년]] 봄에 상하이의 프랑스 조계 패륵로(貝勒路) 항경리(恒慶里)에서 상하이 주재 일본 총영사관 경찰에 체포되어 조선으로 압송, 11월 9일에 신의주지방법원에서 변동화(邊東華)ㆍ황의춘(黃義春) 등과 함께 공판이 열렸다. 이때 변호를 맡은 것은 최창조(崔昌朝)ㆍ이희적(李熙迪)ㆍ탁창하(卓昌河) 등 신의주 변호사 세 명과 손홍팔(孫洪八)ㆍ현석건(玄奭健)<ref group="설명">현정건의 친형이다.</ref> 등 진주 변호사 두 사람이었다. 현정건은 자신은 회합에 참여한 적도 없고 관련도 없다고 완강히 부인했으나, 12월 12일에 신의주 지방법원은 [[치안유지법]] 제령(制令) 제7호 위반 등의 혐의로 징역 3년을 언도하였다. 이에 불복하였으나 [[1929년]] 1월 19일에 평양으로 압송, 6월 10일에 열린 민사 제1호 법정 복심에서 원심의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1932년]] 6월 10일에 만기출옥하였으나, 옥살이의 후유증으로 얻은 [[복막염]]으로 12월 30일 의전병원에서 향년 45세로 사망하였다.
         「동아일보」 [[1933년]] 1월 1일 기사에는 1월 3일 오후 1시에 현정건의 발인이 이루어질 것이고 영결식이 가회동 177번지의 자택에서, 묘소는 동소문 밖의 미아리에 마련되었다고 적고 있다. 현정건의 부인 윤덕경(尹德卿)은 남편이 죽은 뒤 이레, 달포 동안 식음을 전폐하다가 조금 밝은 모습을 보이는 듯 싶더니, 끝내 2월 10일에 "(남편이 없이) 아무래도 살 수가 없다", "죽은 몸이라도 형님(현정건)과 한 자리에서 썩고 싶으니 (남편 옆에) 같이 묻어달라"는 요지의 유서를 시동생 현진건에게 남기고 현정건의 영전 앞에서 음독자살하였다.<ref>「玄鼎健氏未亡人 尹德卿女史殉從」 『중앙일보』 1933년 2월 12일자. 「結緣卄年에 同居는 半世」 『동아일보』 1933년 2월 12일자. 유서의 전문도 함께 실려 있다.</ref> 남편이 죽은지 41일만의 일이었다. 다른 자식은 없었다.
  • 강재형 (아나운서) . . . . 7회 일치
         * [[2017년]] 12월 ~ [[2018년]] 11월 : [[MBC 아나운서국]] 국장
         * [[2011년]] 2월 : 블루터치 홍보대사
         * [[2007년]] 2월 ~ [[2009년]] 2월 : [[한국아나운서연합회]] 회장
         * [[2014년]] 12월 제26회 한국어문상 대상
         * [[2013년]] 12월 아나운서연합회 아나운서대상시상식 대상
         * [[2016년]] [[12월 9일]] : 《아나운서 말하기 특강》
  • 고유민 . . . . 7회 일치
         [[분류:1995년 출생]] [[분류:포항시 출신 인물]] [[분류:배구 선수]]
         || '''생년월일''' || [[1995년]] [[2월 9일]] ([age(1995-02-09)]세) ||
         프로 첫 선발 출장은 2013년 12월 29일 GS칼텍스 전이었는데 컨디션이 좋지 못했던 황연주를 대신해 라이트로 출장했다. 이때 팀이 0:3으로 패했는데 마지막 3세트는 10:25으로 대패했다. 다만 전체적으로 수비가 망해버린 팀에서 그나마 리시브를 적절히 받아낸 축에 속해서 욕을 먹진 않았다. 한편, 고유민은 실수했을 때 쟤 실수하고 왜 웃냐고 재밌다고 컬트적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다만 3차전 도로공사전에서 1세트에 안정적인 리시브를 보여주면서 백어택을 성공시키는 등 코보컵 때 모습을 잠시나마 보여준 건 위안거리. -결국 정미선과 자리를 바꾸어 닭장을 달구다 2015년 12월 12일 인삼공사전은 2세트 37:37까지 간 상황에서 연속 2득점으로 2세트를 끝냈다. 이날 경기에서 본인 한 경기 시즌 최다득점인 9점 기록.[* 이 기록은 2016년 2월 1일 인삼공사 전에서 11점으로 갱신했다.]
         주로 원포인트 서버로 나오는 편이다. 주전이 황민경이다보니 출전의 기회가 줄어든 점은 있다. 2017년 12월 3일까지의 기록은 10경기 32세트 2득점, 그것도 서브로만 2득점 올렸다.
  • 권은희 (1959년) . . . . 7회 일치
         * 1984년 1월 ~ 1985년 12월: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 데이터통신실 연구원
         * 1986년 2월 ~ 2004년 12월: (주)KT 컨버전스 본부 BcN 서비스개발팀 팀장
         * 2004년 12월 ~ 2006년 12월: (주)KT 상무(여성임원 2호)
         * 2006년 12월 ~ 2007년 5월: (주)KT하이텔 경영지원부문장(상무이사)
         * 2012년 8월 ~ 2012년 12월: 제19대 국회 쇄신특별위원회 위원
  • 김수학 (법조인) . . . . 7회 일치
         |임기 = 2010년 2월 11일 ~ 2011년 2월 16일
         |임기2 = 2009년 2월 9일 ~ 2011년 2월 16일
         [[대구지방법원]] 김천지원과 포항지원에서 지원장을 했던 경력이 있는 김수학은 2008년에 법원장으로 승진하여 [[울산지방법원]], [[대구지방법원]], [[대구고등법원]]에서 법원장을 하다가 2011년 2월에 공직에서 물러나 법무법인 중원에서 고문 변호사를 하였다.
         * [[대구지방법원]] 김천지원 합의부 재판장으로 재직하던 1995년 9월 18일에 [[대한민국 제1회 지방선거]]에서 [[민자당]] 후보를 "돈을 주고 공천을 받았다"는 등의 허위사실을 수 차례 유포한 김천시장 박팔용에 대해 "특별한 전과가 없어 벌금형을 선고한다"며 벌금 500만원을 선고했다. <ref>동아일보 1995년 9월 19일자</ref>
  • 김우중 . . . . 7회 일치
         '''김우중'''(金宇中, [[1936년]] [[12월 19일]] ~ )은 [[대한민국]]의 [[기업인]]이다.
         ** 부인 : 정희자(鄭姬子, 1940년 2월 20일 ~)
         광산김씨 김우중은 [[1936년]] [[12월 19일]]에 [[대구광역시|대구]]에서 김용하와 전인항 사이의 6남매 중 4남으로 태어났다.
         5년 8개월 간의 해외로 도피 생활을 지속하다가, [[2005년]] [[6월 14일]] 입국하여 [[대한민국 검찰|검찰]]의 조사를 받았으며,<ref>[http://www.ohmynews.com/articleview/article_view.asp?at_code=261640 관련기사]</ref>[[2006년]] [[11월 3일]] 열린 [[서울고등법원]] 항소심에서 분식회계 및 사기대출, 횡령 및 국외 재산도피 혐의로 징역 8년 6개월, 벌금 1000만원, 추징금 17조 9천 253억원의 형을 구형받았고, 항소를 포기하여 형이 확정되었다. [[2007년]] [[12월 31일]] [[사면|대통령 특사]]로 사면되었다. [[2014년]] 기준으로 전체 추징금의 0.5%정도인 약 887억원을 납부하였다. [[2013년]] 김우중법에 대해 논란이 일었고, 여전히 17조 8000여억에 달하는 추징금을 미납한 상태이다. [[2014년]] [[대우그룹]] 창립 기념일에 추징금 문제가 불거져 참석하지 못했다. 그해 [[8월 26일]]에 [[대우그룹]] 해체 15주기를 맞아《아직도 세계는 넓고 할일은 많다》라는 회고록을 출간하였다.
         |임기 = [[1988년]] [[2월 17일]] ~ [[1989년]] [[2월 21일]]
         |임기 = [[1989년]] [[2월 21일]] ~ [[1993년]] [[1월 12일]]
  • 유승민(정치인) . . . . 7회 일치
         >민주평화당 [[박지원(1942)|박지원]] 의원, 2018년 2월 8일 tbs 라디오 인터뷰에서 [[http://m.tbs.seoul.kr/news/newsView.do?channelCode=CH_N&seq_800=10264096&idx_800=2287382&typ_800=9&grd_800=null|#]]
         2000년 2월에 [[한국개발연구원]] 선임연구위원으로 있다가 [[이회창]] 당시 [[한나라당]] 총재의 영입으로 [[한나라당]]의 정책 싱크탱크인 [[여의도연구소]]의 소장을 맡으면서 처음으로 정치권에 들어오게 되었고 2004년 [[한나라당]] 비례대표로 초선 [[대한민국 국회의원|국회의원]]이 되었다. 이후 [[20대 총선]]까지 내리 4선에 성공했다. 20대 국회 기준으로 지역구는 [[대구광역시|대구]] [[동구(대구)|동구]](을)이다.
         사실 그의 신념인 [[공화주의]] 자체가, [[사민주의]]와 대화가 가능할 정도로 복지에 친화적인 사상이다. 보수성향 의원 중에서는 경제 분야에서 가장 왼쪽이라고 볼 수 있겠다. 이러한 색깔 때문에 일부 진보 진영에서는 '''진정한 보수'''라고 평가하기도 한다. 대표적 진보 논객인 [[진중권]]은 긍정적으로 평했고, 보수 논객인 [[전원책]]은 유승민은 좌파라고 하기도 했다. 2017년 2월 2일 썰전 방영본에 의하면, jtbc 신년 토론 이후에 [[심상정]]으로 부터 "[[정의당]] [[이승엽 와도 자리 없다|와도 자리없다]]"는 농담 문자를 유승민이 받았다고 한다.
         15년 2월 원내대표에 당선된 이후, 2개월 만의 15년 4월 첫 원내대표 연설에서 [[박근혜 정부]]의 '[[증세 없는 복지]]'를 정면으로 비판한 이력이 있고, 동시에 양극화 문제 해결, 공동체 붕괴를 막기 위해 중부담-중복지 체제를 확립해야 하며, 그를 위해 보편적인 조세 형평성 3대 원칙을 지켜야 한다는 점을 내세우기도 하였다.[* "가진 자가 더 많은 세금을 낸다는 원칙, 법인세도 성역이 될 수 없다는 원칙, 그리고 소득과 자산이 있는 곳에 세금이 있다는 보편적인 원칙까지 같이 고려하면서 세금에 대한 합의에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나라의 부자와 대기업은 그들이 감내할 수 있는 수준의 세금을 떳떳하게 더 내고 더 존경받는 선진 사회로 나아가야 합니다. 조세 형평성이 확보되어야만 중산층에 대한 증세도 논의가 가능해질 것입니다."(해당 연설 내용 中)]
          * 2005년 12월 사학법 개정안 처리를 두고 국회가 난장판이 된 와중에 [[정봉주]] 당시 열린우리당 의원과 몸싸움이 빚어졌다. 아무래도 체격 차이도 있고 정 의원이 어릴 때부터 무술을 연마한 전적이 있다보니 상당히 밀리는 모양새다. [[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2005/1980921_19610.html|MBC 뉴스]]
          * 2016년 9월 12일 [[JTBC 뉴스룸]]에서 [[손석희]] 앵커와의 인터뷰가 예정되어 있었으나 [[2016년 경주 지진]]으로 인해 1주일 미루어졌다. 그리고 1주일 뒤인 2016년 9월 19일 [[경북]] [[경주시]]에서 규모 4.5의 [[지진]]이 다시 발생했다. 2017년 2월 16일 뉴스룸 2부 대선 예비주자 검증 인터뷰가 있던 날에도 [[경남]] [[합천군]]에서 진도 2.9의 [[지진]]이 났다고 한다.
          * [[미우프]]에서 본인의 포지션을 맡고있는 [[미우프#s-2.2.2.3|유목민]] 역의 장도윤을 직접 만났다.[* 이날 [[미우프]] 출연진 모두 각자 패러디의 대상 후보를 직접 만났다.] 장도윤이 딸인 [[유담]]과 비슷한 또래의 나이인지라, 아들처럼 반가워해줬다고 한다. 참고로 장도윤은 [[유담]]보다 1살 어린 1995년생이라, 유담에게 누나라고 불렀다.
  • 전태일 . . . . 7회 일치
         [[1963년]] [[3월]] 대구 청옥 고등공민학교에 입학했지만<ref>1971년 문교부 시책으로 중학교, 고등학교가 분리되기 전까지 한국의 학교들은 중고등학교가 함께 운영되었다.</ref>, 가정 사정으로 1학년 재학 중 그해 [[12월]] 자퇴하였다. 1963년 겨울 그의 아버지 전상수는 아들에게 자퇴를 강요하였다. 아버지는 학교를 그만두고 집에서 전적으로 [[재봉]]일만 돌보라고 강요했다. 학교를 다닐 수 없게 된 것에 좌절하여 한때 가출, 집을 뛰쳐나갔다가 3일만에 귀가했지만 그의 아버지는 돈을 벌어야 공부도 할 수 있는 것이라며 그를 발길질로 차고 구타하여 강제로 학교를 그만두게 했다.
         [[1966년]] [[8월 17일]] 평화시장 2층 244호에 있는 점퍼, 의류 공장인 [[한미사]] 재단보조로 취직하였다가, 그해 말 [[한미사]]의 재단사가 사장과의 갈등으로 해고당한 뒤 새로 재단사 자리에 올랐다. [[1967년]] [[2월]] 초 무렵 하숙하고 있던 집의 딸과 연애하였으나, 돈 문제 등으로 어머니에게 죄책감을 느낀 그는 연애를 포기하게 되었다.
         그는 공장 노동자 생활 중에도 고등학교 복학을 꿈꿨고, [[1967년]] [[2월 20일]] 자신의 바지와 하숙방에 있던 곤로를 팔아 연합중고등 통신강의록 <중학 1>권을 1백50원에 산다. 수중에 남은 15원으로 10원짜리 노트를 산 뒤 전화비 5원을 주머니에 남겨두고 3일간 금식하였다. 당시 한 쪽지에 그는 "내일부터 23일까지 금식이다. 설마 3일 금식에야 죽지 않겠지. 정신수양의 금식이야. 먹을 게 없어서가 아니다. 그런데 왜 콧잔등이 시큰해오고 눈물이 나는지 모르겠구나." 그리고 "내년 3월에는 꼭 대학입시를 보자. 앞으로 3백76일 남았구나. 하루에 2시간씩 공부하면 내년에는 대학입시를 볼 수 있겠지."라는 내용을 적어두었다.
         회사의 [[착취]]와 [[해고]]를 당하면서도 단결하여 투쟁할 생각을 못하던 [[노동자]]들이 [[죽음]]으로써 노동자들의 비참한 현실을 고발한 전태일 열사를 보면서 각성한 것이다. [[1970년]] [[11월 25일]] [[조선호텔]] 노동자 이상찬의 분신 기도, [[1971년]] 9월 한국회관(음식점) 노동자 김차호의 분신 기도, 8월 [[신진자동차]] 노조 조합원과 가족 1900여명의 [[파업]]투쟁, [[한진상사]] 파월 노동자 400여명의 [[대한항공]] 빌딩 옥상 방화 농성 등이 주요한 사건들이었다. [[1971년]]의 노동자의 단결투쟁은 1600여건에 이르렀는데, 이는 전년도 165건에 비해 10배가 넘는 규모였다.<ref>지명관, 《한국을 움직인 현대사 61장면》 98~ 101쪽, 다섯수레, 1996년; 한국정치연구회, 《한국정치사》 352~ 353쪽, 백산서당, 1990년; 역사학연구소, 《강좌 한국근현대사》 347쪽, 풀빛, 1995년</ref>
         그의 어머니 이소선(李少線) 등 민주화운동 관련자 유가족 8명이 [[12월 31일]]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에 보상금 지급을 현실화해 줄 것을 요구하며 재심을 청구했다.<ref name="hjaeshims">[http://www4.hankooki.com//nation/200212/h2002123116132714510.htm "민주화운동 보상금 현실화" 전태일씨 유족등 재심청구] 한국일보 2002/12/31</ref> 어머니 이소선은 "태일이가 보상금으로 930만원으로 받는데 비해 [[1991년]] 분신 자살한 [[윤용하]]씨는 2억 3천만원을 받는다"며 "이는 태일이의 보상금을 물가상승률을 고려하지 않고 당시 임금만을 단순 반영한 [[호프만식 계산법]]으로 산정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ref name="hjaeshims"/> 재심청구를 주선한 전국민주민족유가족협의회(유가협)도 보상금심의위원회가 당시 전문 기술자였던 전씨를 [[단순일용직 근로자]]로 분류해 [[보상금]]을 지급한 것은 부당하다고 주장했다.<ref name="hjaeshims"/>
         그의 삶은 [[1983년]] 출판된 [[조영래]] 변호사의 《[[전태일 평전|어느 청년노동자의 삶과 죽음]]》으로 널리 알려졌으며, 전태일재단에서 전태일 평전이 개정판으로 다시 출판되었다. 1990년대에 전태일의 생애를 다룬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이란 영화가 제작되었는데, 전태일 역을 맡은 배우 [[홍경인]]과 내레이션 역할을 맡은 배우 [[문성근]]은 이 영화에 무료로 출연하였다.<ref>[http://dna.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5033100209138003&editNo=45&printCount=1&publishDate=1995-03-31&officeId=00020&pageNo=38&printNo=22812&publishType=00010 영화「전태일」주역 확정 문성근 홍경인 무료출연] [[동아일보]] 1995년 3월 31일 작성</ref> 2000년에는 전태일 30주기에 맞춰 제작된, 전태일열사를 기억하는 많은 사람들의 인터뷰를 엮은 영화 《전태일의 기억》이 개봉하였다.<ref>[http://www.cine21.com/movie/info/?movie_id=34429 씨네21-전태일의 기억]</ref> 연극으로는 자유학교 물꼬 학생들의 연극모임 '터'의 9기 학생들이 선보인 《스물 한살》이 있다.<ref>[http://www.chuntaeil.org/?c=30&p=3&uid=742 전태일 재단-[영화/다큐멘터리<nowiki>]</nowiki> 목록]</ref>
         * 어머니 [[이소선]](李小仙, [[1929년]] [[12월 30일]] ~ [[2011년]] [[9월 3일]])
  • 정인숙 (1945년) . . . . 7회 일치
         '''정인숙'''(鄭仁淑, [[1945년]] [[2월 13일]] ~ [[1970년]] [[3월 17일]])은 [[대한민국]]의 모델, 배우이다. [[대한민국 제3공화국|제3공화국]] 당시 화제 인물로, 서울 시내 고급 요정에서 활동하던 접대부였다. [[대한민국의 국무총리|국무총리]] [[정일권]]의 내연녀로 [[정인숙 살해 사건]]의 피해자였다. 살해 당시 그의 친정 오빠이자 운전수인 [[정종욱]]을 유력용의자로 지목했으나, 유력 용의자는 다른 인물로 밝혀졌으나 배후는 미궁이다. 본명은 '''정금지'''(鄭金枝)이고, 다른 별명은 '''정혜미'''이며, [[대구광역시|경상북도 대구]] 출신이다.
         정인숙은 [[1945년]] [[2월 13일]] [[대구직할시|대구]] 남산동에서 후일 해방 뒤 대구직할시 부시장을 지낸 [[정도환]]과 부인 전덕조의 딸로 태어났다. 아버지 정도환은 자수성가형 인물로, 행정공무원으로 [[자유당 (대한민국)|자유당]] 정권에서 대구부시장까지 올라갔다. 아들만 넷을 둔 정도환의 부인은 어떻게든 딸을 보고 싶어 절에 다니며 불공을 드렸다고 한다. 그의 형제는 7남매로 위로 오빠 다섯 명과, 쌍둥이 자매가 1명 있었다. 쌍둥이 딸이 태어나자 정도환은‘금이야 옥이야’길렀는데 이름도 금지(金枝)와 옥지(玉枝)로 했다. 두 쌍둥이는 귀여움을 독차지하였으나 옥지는 생후 1년 반 만에 병사하고, 살아남은 금지가 후일의 정인숙이다.
         신원조회는 당시 [[대한민국의 국가정보원장|중앙정보부장]]이던 [[김형욱]]의 비서<ref name="hp104"/> 실장인 [[문학림]]이 맡았고, 고위층만이 가질 수 있었던 회수여권은 정일권의 비서관 [[신성재]]가 주선하였다.<ref name="hp105">김환표 외, 《스캔들에 갇힌 영혼들:시사인물사전 16》 (인물과사상사, 2002) 105페이지</ref> 여권 발급 날짜는 [[1968년]] [[12월 30일]]이고, 이후 정인숙은 [[1969년]] [[3월]] 큰오빠를 만난다는 명분으로 [[일본]]에 다녀왔고, [[10월]]에는 [[워싱턴 D.C.]] 한인회장 [[노진환]]의 안내로 미국에서 3개월 동안 머물다가 [[1970년]] 1월 21일 귀국했다.<ref name="hp105"/>
         [[1968년]] 12월 30일자로 발급된 출입국 회수여권을 받았다. 아기를 낳은 이후 고급 요정과 비밀요정을 그만두었고, 출입하는 곳에도 잘 나타나지 않았다. 대신 타워호텔, 사보이호텔, 반도조선 아케이드 등에는 자주 나타났다. [[1969년]] 봄 [[일본]]에 다녀온 뒤 그해 5월에 [[서울특별시|서울]]시내의 고급 코로나를 매입하였다.
         정인숙의 오빠 정종욱은 19년의 형기를 마치고 출옥하고 난 뒤 "동생과 관계했던 고위층이 뒤를 봐준다고 했다는 아버지(정도환)의 회유로 거짓 자백을 했을 뿐, 집앞에 있던 괴한들이 동생을 살해했다"고 주장했다. 이런 숱한 의문점 때문에 정인숙 사건은 단순 살인사건이라는 수사기관의 발표에도 불구하고‘권력기관에 의한 살인’이라는 세간의 의혹을 잠재우지 못한 채 지금까지도 한국 현대사의 미스터리 사건으로 남아있다.<ref name="jon01"/> [[2010년]] 2월 [[중앙일보]] 측에서 어렵게 만난 오빠 정종욱은 "억울해서가 아니라면 수감생활까지 다 마치고 나와 '내가 쏘지 않았다'고 얘기하겠냐"며 그의 결백을 40년이 지난 지금까지 주장했다. 70대 중반에 들어선 그는 "이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며 "마지막으로 재심청구를 통해서라도 명예회복을 하고 싶다"며 억울함을 호소하였다.<ref name="jon01"/>
         박정희 대통령의 비서관이었던 [[선우련]]도 정성일이 정일권의 아들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정일권씨가 [[1971년]] 봄, 형님인 [[선우휘]] 씨를 찾아와 '이동원 외무장관과 술을 마시는 자리에서 정 여인을 알게 되었으며, 내 아들을 낳았으나 공개할 수가 없다'고 털어놓았다.<ref name="sung71">"정성일이는 내 아들, 정일권씨 71년 고백", 경향신문 1993년 2월 20일자, 23면</ref>"고 말했다.<ref name="kum109"/> 그러나 [[선우휘]]가 정일권을 만난 [[1971년]]과 같은 해에 정일권을 만난 재미언론인 문명자는 정일권에게 "문 기자, 나는 정인숙과 딱 한번 같이 잤는데, 그 아이가 내 아들일 니가 없소. 나는 이미 불임수술을 해서 아이를 낳을 수가 없는 몸이오"라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ref name="kum110">김환표 외, 《스캔들에 갇힌 영혼들:시사인물사전 16》 (인물과사상사, 2002) 110페이지</ref>
         [[1988년]] [[국회의원]] [[박근혜]]는 그해 한 여성지와의 인터뷰에서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ref name="park1988">하준, <정인숙 여인 살해 사건>, 세계일보 1995년 10월 09일자 5면</ref> 그에 의하면 정성일의 생부가 [[박정희]]는 아니라는 것이다.
  • 정환덕 . . . . 7회 일치
         군부협판 의채의 아들로 [[1857년]] 탄생하였다. 소년시절부터 태을노인(太乙老人)에게 역학을 수학 받았으며, [[경북]] [[영천]]에서 거주하였다. 어느 날 영천 황학사의 한 암자에서 역학(주역)을 공부하다가 잠깐 졸았는데 꿈에 하얀 도포를 입고 손에는 청령장을 짚은 산신령이 나타나더니 “자네가 역학을 공부한지 7년이 되었다. 그러나 너는 글의 깊은 뜻을 알지 못하고 글만 줄줄 읽었다. 그러니 말짱 헛공부를 한 것이다. 이제부터는 글의 행간을 읽으라. 행간에 숨은 뜻을 찾아서 읽도록 하라. 아무리 공부해도 너에게 큰 행운은 찾아오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작은 행운은 있을 것이니 여기서 꾸물댈 것이 아니라 [[서울]]로 올라 가보아라.” 꿈에 나타난 산신령의 말을 믿고 [[1897년]] 가을, 나이 40세이 되던 해에 서울로 상경하였다. 상경하여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동부승지 [[윤명구]](尹鳴九)를 만나 윤명구가 역학을 할 줄 안다고 하여 고종황제의 측근 경운궁 전화과장(電話課長) 이재찬(李在纘)을 소개 해주었다. 이재찬이 [[고종황제]]에게 소개하여 특명으로 [[1901년]](광무 5) 음12월 5일 현릉참봉(顯陵參奉)에 제수되었다가 그 다음날 면직되었다.
         [[1903년]](광무 7) 음2월 8일 선온하고 사찬한 공로 가자되었다.
         [[1904년]](광무 8) 음1월 11일 시종원 시종을 면직하고, 전화과 기사(電話課技師)에 제수되었다. 이해 음2월 2일 다시 시종원 시종에 제수되었다가 이해 음6월 25일 비서원승(秘書院丞)에 제수되었다가 이해 음6월 27일 면직하였다.
         [[1905년]](광무 9) 음9월 20일 대흥군수(大興郡守)에 제수되었다가 음12월 1일 면직하였다. 이해 음12월 29일 양주(楊州) 풍양(豐壤)의 비각을 증건하고 비석을 수립한 공로로 가자되었다.
         [[1906년]](광무 10) 음2월 27일 시종원 부경(侍從院副卿)에 제수되었으나 음2월 29일 사직 상소를 올려 운운하였는데, 비지에, “상소를 보고 잘 알았다. 청한 바는 그대로 시행하겠다.”하였다. 이해 음3월 12일 법전에 따라 아버지, 조부, 증조부 등에게 벼슬을 추증되었다. [[1944년]] 향년 88세로 별세하였다.
  • 고성국 . . . . 6회 일치
         [[고려대학교]] 정외과 강사 시절인 1986년 9월 27일 [[대한민국 국가보안법|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서울형사지법으로부터 징역 3년 자격정지 3년을 선고받았다.<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6092700329211014&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86-09-27&officeId=00032&pageNo=11&printNo=12617&publishType=00020</ref> 당시 공안당국은 다산기획 대표이던 고씨가 자신의 출판사를 통해 일본으로부터 [[좌익]] 서적 100여 권을 들여와 번역한 뒤, 이를 [[백산서당]] 대표 이범(현 [[흥사단]] 일본특별위원장)에 넘겨 대학가와 시중에 판 혐의가 있다고 밝혔다.<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6041400209201005&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86-04-14&officeId=00020&pageNo=1&printNo=19855&publishType=00020</ref> [[1988년]] [[2월 27일]] [[노태우]]의 대통령 취임에 맞춰 단행된 사면복권에서 특별사면복권 대상자가 되어 풀려났다.
         이후에는 [[나라정책연구회]] 정책실장 등을 지냈으며, [[1994년]]에는 서울경찰청의 민간인 사찰대상으로 거론되기도 했다.<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4101100289101001&editNo=6&printCount=1&publishDate=1994-10-11&officeId=00028&pageNo=1&printNo=2034&publishType=00010</ref> 같은 해 5월에는 자신이 편집위원으로 있던 진보적 월간지 《사회평론 길》에서 《[[월간조선]]》과 논쟁하기도 했다.<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4052600289114011&editNo=5&printCount=1&publishDate=1994-05-26&officeId=00028&pageNo=14&printNo=1907&publishType=00010</ref> 1995년에는 [[조선일보]], [[중앙일보]] 등 보수 일간지의 '이승만 재평가'에 대해 "분단과 독재를 정당화하고 [[박정희]] 시대와 그 이후까지 미화하려는 시도의 시작"이라 비판했다.<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5021800289101001&editNo=5&printCount=1&publishDate=1995-02-18&officeId=00028&pageNo=1&printNo=2153&publishType=00010</ref>
         1995년 [[고려대학교]] 대학원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취득했으며, 1996년부터는 [[추적 60분]] 진행자로 활동하였다.
         2007년 5월 3일 [[프레시안]]에 기고를 시작하면서 정치평론을 재개했다.<ref>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10070502082715&Section=01</ref> 같은 해 말에는 《10대와 통하는 정치학》을 펴냈고, 2008년 [[1월 8일]]에는 [[대통합민주신당]] 쇄신 초선의원모임에 참가해 발제문을 발표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1&aid=0001928328</ref> 같은 해 [[5월 12일]]부터는 [[기독교방송|CBS]] 《시사자키》 앵커로 두번째 발탁돼, 이듬해 2월 26일까지 진행했다.<ref>http://www.cbs.co.kr/radio/pgm/board.asp?pn=read&skey=tcon&sval=%B0%ED%BC%BA%B1%B9&anum=1458&vnum=397&bgrp=4&page=8&bcd=007C055E&pgm=1383&mcd=BOARD2</ref>
         2012년 12월 8일 [[한겨레]]는 토요판을 통해 정치평론가 5명의 대선정국 시나리오 분석을 보도했다. 이 분석에서 고성국은 2012년 대선 투표율이 65~67%일 것이며, 박근혜가 150만~200만표 차이로 승리할 것이라 전망했다.<ref>http://www.hani.co.kr/arti/politics/politics_general/564337.html</ref> 다른 4명의 평론가([[이철희]] 두문정치전략연구소장, [[김종배]] 평론가, [[김형준]] 명지대 교수, [[한귀영]] 한겨레사회정책연구소 연구위원)들은 [[문재인]] 당선을 예측하거나 구체적인 당선자 예측을 하지 않았다.
         * [[2008년]] 5월 12일 ~ [[2009년]] 2월 26일 : CBS 시사자키 고성국입니다 진행
  • 구자춘 . . . . 6회 일치
         1932년 5월 11일 ~ 1996년 2월 10일
         1974년 9월 2일부터 1978년 12월 21일까지 제16대 [[서울특별시장]]을 역임하였다. 원래는 영등포-왕십리로 계획되어 있던 [[서울 지하철 2호선]]을 거대 순환선으로 만든 사람이다. 특히 2호선 계획 당시 지도에 줄 그어서 30분만에 만들었다는 레전설이 나름 유명. 웃긴건 그렇게 날림처럼 노선이 정해졌음에도 정작 공사할 때 [[영등포역]] 경유 예정 구간이 [[신도림역]] 경유로 바뀐 것, 딱 한 곳만을 제외하면 딱히 난공사라 할만한 구간이 없었다는 것이다. 구자춘 시장이 포병 출신이어서 지도를 보는 안목이 뛰어났기 때문에 이런 레전설 일화가 탄생한 것으로 보인다.--근데 이것은 결과론적인 이야기 아닌가,--[* [[손정목]] 저 서울 도시계획 이야기.][* 다만 이는 좋게 봐줘도 2호선 한 노선 한정이고, 바로 다음 노선인 3호선부터 서울 지하철 노선의 선형은 '''온갖 병크'''가 터지게 된다.] 이로 인하여 [[서울/강남|강남]] 개발이 가속화되었다. 그 이외에도 [[강남8학군|서울특별시 강북 지역의 명문고 이전]], 반포동 [[서울고속버스터미널]] 건립[* 다만 본인이 기안한 [[서울 지하철 2호선]]이 고속터미널을 경유하지 않았기 때문에, [[서울지하철 3호선|3호선]]을 무리해서 끌어오느라 3호선의 선형에 '''지랄맞은 ㄷ자 드리프트'''가 생기는 원흉이 된다.], 금화터널 건설 과정에서의 [[독립문]] 이전, [[한양도성]] 일부 복원, 도심부 주차장 확충--당시 도시계획국장 [[손정목]]의 말을 안 듣다가 땅을 치고 후회했을 듯...-- 등을 추진하였다. 이런 그의 별명은 대표적으로는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77101100209202027&edtNo=2&printCount=1&publishDate=1977-10-11&officeId=00020&pageNo=2&printNo=17237&publishType=00020|황야의 무법자]]'''였다. 그 이외에도 몇 가지 별명이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77111900329206004&edtNo=2&printCount=1&publishDate=1977-11-19&officeId=00032&pageNo=6&printNo=9891&publishType=00020|붙었다]].~~관료계의 [[김태균(1982)|김별명]] [[박용택|별명택]]~~
         [[제10대 국회의원 선거]] 직후인 1978년 12월 22일부터 1979년 12월 14일까지 내무부(현 [[행정자치부]]) 장관을 지냈다. [[10.26 사건]] 당시 [[육군본부]] 국무회의에 참석하였다.
         1995년 [[민주자유당]] 김종필 대표가 민주자유당을 탈당하여 [[자유민주연합]]을 창당하자 이에 따라갔다.
         1996년 2월 10일 심장수술을 받던 중 사망하였다.
  • 김광석 . . . . 6회 일치
         '''김광석'''(金光石<ref>[http://news.khan.co.kr/section/khan_art_view.html?mode=view&artid=200711220915531&code=900307 '대중음악 100대 명반'25위 김광석 ‘다시 부르기 2’], 《경향신문》, 2007년 11월 22일 작성, 2011년 2월 14일 확인.</ref>, [[1964년]] [[1월 22일]]<ref>{{저널 인용|제목=[추억의 LP 여행] 김광석(上) 시대의 감성을 일깨운 우울의 미학 해맑은 미소로 기억될 '거리에서'|저널=주간한국|이름=|url=http://weekly.hankooki.com/lpage/enter/200407/wk2004070211320337570.htm|날짜=2004-07-02|출판사=|저자=최규성|확인날짜=2010-03-12}}</ref> ~ [[1996년]] [[1월 6일]])은 [[대한민국]]의 [[싱어송라이터]]이다. ‘노래하는 철학자’로도 불린다. 2014년 제5회 [[대한민국]] 대중문화예술상 대통령표창장이 추서되었다.
         [[1982년]]에 경영학과에 입학하였고, 이후 대학연합 동아리에 가입하면서 [[민중가요]]를 부르고 선배들과 함께 소극장에서 공연을 시작하였다. 1984년 12월 [[노래를 찾는 사람들]] 1집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1985년 1월 입대하였으나 군 생활 중 큰형(김광동)이 사망함으로 인해 6개월 단기사병(방위병)으로 복무를 마치고 제대하였다. 복학해 다시 [[노래를 찾는 사람들]]에 합류하여 1, 2회 정기공연에 참여한다. 1987년 학창시절 친구들과 함께 [[동물원 (밴드)|동물원]]을 결성해 [[동물원 (밴드)|동물원]] 1집과 2집을 녹음하였다.
         1989년 10월 솔로로 데뷔하여 첫 음반을 내놓았으며, 이후 1991년에 2집, 1992년에 3집을 발표하였고, 1994년에 마지막 정규 음반인 4집을 발표하였다. 정규 음반 외에 리메이크 앨범인 다시부르기 1집과 2집을 1993년과 1995년에 각각 발표하였다. 1991년부터 꾸준히 [[학전]] 등의 소극장을 중심으로 공연하였으며, 1995년 8월에는 1000회 공연의 기록을 세웠다.
         # 《[[김광석 2Nd]]》- 1991년 2월 20일
         * [[1991년]] ~ [[1995년]] [[불교방송]] 《[[밤의 창가에서]]》 DJ
  • 김기섭 (1939년) . . . . 6회 일치
         '''김기섭'''(金己燮, [[1939년]] [[12월 7일]] ~ )은 [[신라호텔]]에서 근무한 [[대한민국]]의 기업인이며, [[김영삼]]의 가신 그룹 인사였다. 본관은 [[김녕 김씨|김녕]]. [[대구광역시|대구]] 출신.
         * [[1983년]] [[2월 7일]] [[신라호텔]] 이사대우
         * [[1984년]] [[2월 2일]] [[신라호텔]] 이사
         * [[1990년]] [[2월]] 김영삼 민주자유당 대표 의전비서
         |임기 = [[1995년]] [[6월]] ~ [[1997년]] [[2월 28일]]
  • 김윤환 . . . . 6회 일치
         || '''생몰''' || [[1932년]] [[6월 7일]] ~ [[2003년]] [[12월 15일]] ||
         || '''약력''' || [[조선일보]] 기자[br][[영남일보]] 기자[br][[대구일보]] 기자[br][[문화공보부]] [[차관]][br]제13대 [[대통령비서실장]][br]제1정무장관[* 1988년, 1990년, 1994~1995년 무려 3번이나 제1정무장관직을 역임하였다.][br][[민주정의당]] 원내총무[br][[민주자유당]] 대표 ||
         [[전두환]] 정권 후반기인 1985년 2월 [[노신영]] 국무총리 내각이 출범할 때 문화공보부(현 [[문화체육관광부]]) 차관으로 입각하였다. 문화공보부 차관으로 있던 1986년 여름, [[미국]]에서 열린 국제 공보관 회의에 참석하려 갔다가 외신 기자들로부터 "[[대한민국]]의 차기 대통령은 누가 유력하냐"라는 말에 사견임을 전제로 "[[노태우]] 민주정의당 대표가 유력하다"는 발언을 한 게 문제가 되어 귀국길에 [[국가안전기획부]]에 소환되어 조사를 받았는데[* 말 그대로 조사만 받았다. 고문을 했다거나 강압적인 수사를 한 게 아니라, 왜 그런 발언을 하게 된 것인지에 대해서만 집중적으로 질문했다고. 김윤환 본인은 기자들이 하도 귀찮게 물어서 그냥 대충 둘러댄 거라는 식의 답을 했고 당시 특별히 수상한 뒷일 같은 것도 없었던지라 금방 풀려났다.] 1년 뒤의 일을 예언한 셈이니 훗날 붙게 될 '킹메이커'라는 별명이 진짜인 셈.
         그러나 김영삼의 대통령 당선 이후 김윤환은 정치권에 몰아친 사정의 태풍을 피해 해외에서 체류하다시피 했다. TK민정계의 동료였던 [[박준규(1925)|박준규]]와 [[박철언]] 등이 대거 정계에서 축출당하는 상황에서 김윤환은 대통령을 만들어낸 2인자임에도 오히려 몸을 사려야 했다. 그런 와중에 1995년 2월 [[김종필]]이 민자당을 떠나고 6월 지방선거에서 민자당이 참패하자 김영삼은 김윤환을 통해 당과 범여권을 안정시킬 필요를 느낀다. 이에 김윤환은 다시 민자당 사무총장으로 복귀했고 얼마 뒤에는 민자당 대표위원에 취임하여 명실상부하게 여당의 2인자가 되었다. 민자당이 신한국당으로 당명을 개정한 뒤에도 김윤환은 대표위원으로 유임되었고 [[제15대 국회의원 선거]]를 승리로 이끌었다. 당시 신한국당의 국회의원 당선자 139명 중 그의 계보로 꼽힌 당선자는 무려 26명으로 전체의 5분의 1에 육박했다.
         이후 신장암 치료를 위해 [[국립암센터]]에 입원했고 미국까지 가서 투병했지만, 결국 회생불가 판정을 받고 귀국한 뒤 [[2003년]] [[12월 15일]]에 사망했다. 향년 71세.
  • 박세직 . . . . 6회 일치
         [[육군사관학교]] 제12기 출신이다. [[박희도]][* 1979년 12월 [[12.12 군사반란]] 당시 제1공수여단장이었으며, 1985년 12월부터 1988년 6월까지 육군참모총장을 역임하였다] [[박준병]][* 1979년 12월 [[12.12 군사반란]] 당시 [[제20기계화보병사단]]장이었으며, 이후 국군보안사령관과 국회의원([[민주정의당]], [[민주자유당]], [[자유민주연합]] 소속)을 지냈다.]과 함께 [[하나회]] 회원이었다. 그리고 박희도, 박준병, 박세직 등을 가리켜 '''쓰리 박'''이라고 하였다.
         1985년 2월 노신영 내각이 출범하자 총무처(현 [[행정자치부]]) 장관 등을 지냈다. 1986년 제4대 체육부 장관으로 취임하고, '''제24회 [[1988 서울 올림픽]]대회 조직위원회 위원장'''을 지냈다.
         1988년 12월 배명인의 뒤를 이어 국가안전기획부 부장으로 임명되어 1989년 7월까지 재임하였다. 1990년 [[서울특별시장]]으로 임명되었으나 1991년 2월에 사직하여, 2개월의 단명시장에 그쳤다. 이것도 1991년 일어난 [[한보그룹]]의 [[수서지구 택지 특혜 분양 사건|수서비리 사건]]과 관련하여 여러 모로 루머가 많았는데, 특별히 문제가 불거지지는 않았다.
  • 신동호 (아나운서) . . . . 6회 일치
         * 2008년 12월 : 환경부 기후변화대응 홍보대사
         * 2013년 2월 ~ 2017년 12월 : [[MBC]] 아나운서국장
         * 《[[100분 토론]]》(2012년 2월 28일 ~ 2013년 8월 13일)
         * 《[[MBC 대학가요제 |'95 MBC 대학가요제]]》(1995년)
         * 《[[MBC 뉴스 24]]》(1995년 9월 4일 ~ 1996년 3월 1일)
  • 신혜진 . . . . 6회 일치
         ||<#7BDEFB> {{{#000000 '''출생'''}}} ||<(> [[1995년]] [[1월 22일]] ([age(1995-01-22)]세), [[경상북도]] [[포항시]] ||
         [[1995년]] [[1월 22일]], 1남 1녀 중 첫째로 태어났으며, 어렸을 적부터 연예인을 꿈꾸고 있었다. 빠른 1995년생으로 1994년생들과 같이 학교를 다녔다.
         [[2010년]] [[12월]]에 [[WM엔터테인먼트]]에 입사해 멤버들 중 제일 긴 4년의 [[연습생]] 기간을 거쳐 [[데뷔]]했다.[* [[2010년]] [[12월]]이면 [[선배]]인 [[B1A4]]가 [[데뷔]]하기 전부터 있었다는 소리가 된다.] [[연습생]]이었을 당시 [[고향]]인 [[포항]]에서 [[학교]]를 다녔기 때문에 주말에는 [[서울]]로 올라와서 연습실에서 [[연습]]을 하고 평일에는 [[버스]]를 타고 다시 [[포항]]에 내려가 [[학교]]를 다녔다. 이 때문에 어린 [[나이]]에 [[체력]]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힘들었지만 정작 [[본인]]을 힘들게 했던 건 혹독한 [[다이어트]]였다고.[* [[연습생]] 당시 [[다이어트]] 때문에 힘들었을 때마다 자신을 힐링시켜 주었던 [[노래]]는 [[옥상달빛]]의 〈수고했어 오늘도〉.]
         [[분류:오마이걸]][[분류:포항시 출신 인물]][[분류:1995년 출생]][[분류:2015년 데뷔]][[분류:전직 가수]]
  • 양시영 (1944년) . . . . 6회 일치
         | 임기 = [[1995년]] [[7월 1일]] ~ [[1998년]] [[6월 30일]]
         | 출생 = {{출생일과 나이|1944|1|2}}<br />(음.[[1943년]] [[12월 7일]]))
         '''양시영'''(楊始榮, [[1944년]] [[1월 2일]](음.[[1943년]] [[12월 7일]]) ~ ,[[대구광역시|대구]] [[달성군|달성]])은 전직 지방자치공무원이면서,전직 [[대한민국]] 대구광역시 달성군수이다.
         * 달성군청 도시과장(1991년 ~ 1995년)
         * 제30대 달성군수(1995년 7월 ~ 1998년 6월,[[무소속]] → [[자유민주연합]]
         |임기 = [[1995년]] [[7월 1일]] ~ [[1998년]] [[6월 30일]]
  • 이기광 (법조인) . . . . 6회 일치
         |임기 =2016년 2월 11일 ~ 2018년 2월 12일
         1955년 [[대구광역시]]에서 태어나 [[대구고등학교]]와 [[영남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하고 1983년 제25회 사법시험 합격하여 [[사법연수원]] 15기를 수료했다. 1986년 [[전주지방법원]] 군산지원 판사에 임용되어 1987년 [[대구지방법원]] 김천지원 1990년 [[대구지방법원]] 1996년 [[대구고등법원]] 1999년 [[대구지방법원]]에서 판사를 하다가 2001년에 대구지방법원 부장판사에 임명되어 2008년 [[대구고등법원]]을 거쳐 2011년까지 재판장을 하였으며 2012년에는 [[대구고등법원]] 수석부장판사에 임명되어 2015년 2월까지 보임하였다. [[대구고등법원]]에서 수석부장판사에 임명된 2012년 2월에 경상북도 선거관리위원회 위원장을 겸직하였으며 2015년에는 [[대구고등법원]] 부장판사에 임명되어 1년동안 재판장을 하였다. 2016년 2월 법원 정기인사에서 법원장으로 승진하여 2년동안 제18대 [[울산지방법원]]장에 임명되면서 제20대 울산광역시선거관리위원회 위원장을 겸직하였다. 울산지방법원장을 끝으로 30년이 넘는 공직자 생활을 마치면서 퇴임식에서 "아내로서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묵묵히 저를 뒷바라지하면서 삼남매를 훌륭히 키워 준 제 아내, 무등 한 번 태워 주지 못했고, 손잡고 봄길 한 번 함께 걸어 보지못했다."며 아쉬워했다.<ref>로이슈 2018년 2월 12일자</ref>
  • 이만섭 . . . . 6회 일치
         '''이만섭'''(李萬燮, [[1932년]] [[2월 25일]] ~ [[2015년]] [[12월 14일]])은 [[대한민국]]의 [[언론인]] 출신 [[정치가]]이다. 호(號)는 청강(靑江)이다.
         이만섭은 [[1932년]] [[2월 25일]]에 [[대구광역시|대구]]에서 태어났다. [[1951년]]에 [[연세대학교|연희대]] 정치외교학과에 진학하여 졸업한 후 [[동아일보]]에 입사하여 정치부 기자로 활약했다. 이후 [[동아일보]] 기자로 재직하며 주일 특파원과 주미 특파원 등으로 활동한 뒤 [[5.16 군사 정변]]이 일어난 직후 발탁되어 [[1963년]] 10월에 공화당에 입당, 대선 후보 [[박정희]]의 지지 유세와 찬조연설을 다녔다.<ref name="경향_6310">民主共和黨에入黨 東亞日報李萬燮씨, 《경향신문》, 1963.10.3</ref>
         [[2015년]] [[12월 14일]]에 향년 84세의 나이로 타계하였다.<ref>[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512141819331&code=910100 이만섭 전 국회의장 별세…향년 83세], 2015.12.14</ref>
         * [[한규희]] - [[1995년]] ([[제4공화국 (드라마)|제4공화국]]), [[MBC]] 드라마
         |임기 = [[1985년]] [[3월 23일]] ~ [[1987년]] [[12월 16일]]
  • 이석훈 . . . . 6회 일치
         ||<#0D3EA3> {{{#ffffff '''출생'''}}} ||<(><rowbgcolor=#ffffff> [[1984년]] [[2월 21일]][* 빠른 84년생이라 83년생하고도 친구다. 대표적으로 친분있는 83년생 연예인들은 [[V.O.S]]의 [[김경록]], [[슈퍼주니어]]의 [[이특(슈퍼주니어)|이특]].][* 그와 동시에 [[김용준(가수)|김용준]]과도 친구다. 아마 그룹 내에서 리더라는 지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인듯. 민경훈하고도 친구다.] ([age(1984-02-21)]세), [[경상북도]] [[포항시]][* 다만 5세 무렵 [[대구광역시]] [[중구(대구)|중구]]로 이사갔다.] ||
         || [[2011년]] [[12월 3일]] || 최백호 편 || 낭만에 대하여 (원곡자: 최백호) || 5번 || 0승 ||
         || [[2011년]] [[12월 10일]] || 7080 영화음악 특집 || 눈물로 쓴 편지 (원곡자: 김세화) || 7번 || 0승 ||
         || [[2011년]] [[12월 17일]] || 정훈희·김태화 편 || 바보처럼 살았군요 (원곡자: 김태화) || 7번 || 1승, '''우승''' ||
         || [[2011년]] [[12월 31일]] || 슈퍼빅매치 || 봄날은 간다 (원곡자: 백설희) || 1라운드 5번 || 0승 ||
         || [[2016년]] [[9월 9일]] || 6번 || 나와 같다면 (원곡자: ~~[[김장훈]]~~박상태[* 김장훈의 <나와 같다면>은 98년도에 불려진 리메이크판이다. 1995년에 가수 박상태가 이미 앨범에 넣었는데 히트하지 못했고 이후 김장훈이 불러 히트한 것.]) || 1승, 432점[br]'''우승''' ||
  • 이신학 . . . . 6회 일치
         * 대구농림고(1962년 2월)
         * 경희대학교 경영학과(학사)(1971년 2월)
         * 미국 조지워싱턴대학교 행정대학원 AMP과정(수료)(1990년 12월)
         * 보영금속공업 주식회사 대표이사(1986년 2월 ~ 2002년)
         * 남구의회 미군기지 이전 대책위원회 간사(1995년 7월)
         * 대구광역시 남구의회 의원(1995년 7월)
  • 이철희(1964) . . . . 6회 일치
         || '''출생일''' ||<(> [[1964년]] [[12월 23일]] ([age(1964-12-23)]세) ||
         진보 성향의 인터넷 언론인 [[프레시안]]이 운영하는 시사 팟캐스트 방송 '이철희의 이쑤시개'를 진행했다. 그리고 종편인 [[채널A]]의 '아침 신문쇼 돌직구'에도 고정 출연 했었다. 2013년 10월부터 평일 오후 6시 16분부터[* 앞의 15분 동안은 6시 뉴스를 진행한다. 7시에도 뉴스가 진행되어 7시 6분에 시작한다.] 오후 8시까지 [[tbs 교통방송]] 생방송 '퇴근길 이철희입니다'를 진행하기도 했다. 2014년 2월 "뭐라도 합시다"와 "누가해도 당신들보다 낫겠다."(윤여준, 이상돈 공저)라는 서적도 냈다. 2015년에는 "이철희의 정치썰전: 보수와 진보를 향한 촌철살인 돌직구"와 "7인의 충고 : 이철희가 따져 본 진보 집권 전략"을 출간. 이 가운데 7인의 충고는 [[Daum]]과 [[미디어오늘]]에서 기획하여 이철희가 '논과 쟁'이라는 이름으로 정치 전문가들과 인터뷰한 것들을 모아 낸 것인데, 정작 미디어오늘에서는 중간에 수록을 하다 말았고, 인터뷰 전문은 책이나 [[http://7author.tistory.com/m/post?categoryId=847004|여기에서 볼 수 있다]].
         12월 24일 [[새정치민주연합]]이 이 소장을 내년 4월 총선을 진두지휘할 총선기획단장으로 고려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기사에 따르면 모든 프로그램에서 하차했고, 다른 기사에선 성사 직전까지 왔다고 한다.[[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hm&sid1=100&oid=057&aid=0000865862|#]]
         또한 [[더불어민주당]]에서 당무를 맡게 된 이후의 공천 잡음과 관련되어 있지 않냐는 의혹을 받기도 했다. 입당 직후 [[https://www.viewsnnews.com/article?q=128501|문재인 의원의 부산 공천]]을 주장해서 논란을 만들기도 했고[* 대권주자 또는 당의 핵심인원으로 전국에서 선거지원 활동을 나서야 하는 인물들을 지역구 선거에 투입할 경우 지역구 선거유세에 발이 묶이기 때문에 전국지원유세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는데 그 부분을 고려하지 않은 발언이라 볼 수 있다.], 2월 초에는 '[[http://m.yna.co.kr/kr/contents/?cid=AKR20160205100351001&mobile|막말, 운동권 공천 배제]]'를 주장하였는데 [[정청래]] 의원의 공천 배제의 가장 큰 근거가 된 게 '막말'이었으며 운동권 출신 의원들이 대거 공천 배제당하다보니 이철희 전 소장의 입김이 작용하고 있는 게 아니냐는 의심을 산 것이다.
          * [[맥심(잡지)|맥심]] 2016년 2월호에 (뒤)표지모델로 나왔다. [[http://i63.tinypic.com/2evdy07.png|사진 참조]] 그 후 맥심 2016년 2월호가 완판되는 영광을 누렸는데, 이건 이철희 사진이 멋있게 잘 나와서가 아니라, 실제로는 순전히 [[시노자키 아이|(앞)표지모델로 나온 사람]]덕분이었다는 게 정설이다.[[http://i67.tinypic.com/24yp6qg.jpg|사진 참조]] ~~의문의 완판남~~
  • 표창원 . . . . 6회 일치
         원래 자신은 특정 정당이나 정치인을 지지하지 않는다고 수 차례 밝혔다. 2015년 10월 26일에 [[트위터]]를 통해 [[http://m.news.naver.com/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57&aid=0000867351|'정치 안 합니다'라고 밝히기도 했다.]] 그런데 그로부터 2개월 뒤인 2015년 12월 27일 [[새정치민주연합]]에 입당했다.[[https://www.facebook.com/cwpyo/posts/1133948603312544|본인 입당 sns 인사글]] 본격적으로 정계에 입문하면서 그는 정치를 하지 않겠다던 예전의 입장을 거두어들인 것에 대해 사과의 표시를 했다.
         정계 입문 이후 여러 [[종편]] 프로그램에 출연하면서 민주당 변호인을 활약했다. 특히 2015년 12월 30일 '[[문재인]] 대표가 [[일본]]이 숨긴 금괴 1,000톤을 갖고 있다'는 루머를 맹신했던 어느 60대 남성이 문 대표의 [[사상구]] 사무실에 난입해 인질극을 벌인 사건을 두고 [[MBN]]의 [[김형오(1972)|김형오]] 앵커가 '문재인 대표에게 잘못이 있는 것 아니냐'며 [[답정너]]식으로 질문을 하자 "그럼 2006년에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가 커터칼 피습을 당한 건 (그 피습범이 정신병자였기 때문이지) 박근혜 당시 대표가 잘못해서 일어난 일인가요?"라는 반문~~이건 몰랐지?~~으로 앵커를 [[역관광]]시켜--사실 [[마마무|음오아예]]를 부르게 한 거라더라-- [[더불어민주당|더민주]] 지지층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http://tvcast.naver.com/v/676104|네이버]] [[http://tvpot.daum.net/v/73446472|다음]] [[http://www.gomtv.com/view.gom?contentsid=14150137|곰TV]])[* 보도 자막이 포함된 인터뷰 전체 영상은 [[http://www.mbn.co.kr/pages/vod/programView.mbn?bcastSeqNo=1114977|MBN 홈페이지]]와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57&aid=0000871698|네이버]], [[http://media.daum.net/society/others/newsview?newsid=20151231111239813|다음]], [[http://news.nate.com/view/20151230n53189|네이트]] 등에 올라와 있다.]
         2016년 2월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용인시]]에 신설된 [[용인시 정]] 선거구[* 구성동, 청덕동, 마북동, 동백동, 보정동, 죽전1동, 죽전2동]에 출마한다고 밝혔다. [[경찰대학]]이 있던 지역이었고,[* 그가 공천을 받기 직전인 2016년 2월에 경찰대가 충남 아산시로 이전해갔다.] 그가 원래 거주하던 지역이다.[* 선거 기간 중 지역구 내에서 [[어린이집]] 차량사고가 났는데, 이때 자기 딸들도 그 어린이집을 다녔다고 밝힌 것으로 보아 전부터 살던 곳이 맞는 듯 하다.] 그리고 [[2016년]] [[3월 7일]] 당에서 표 전 교수를 [[전략공천]]하기로 확정 발표하였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hm&sid1=100&oid=003&aid=0007080865|#]]
         2016년 12월 27에 검/경 수사권과 관련해서 형소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발의 내용을 보면 '''검찰의 수사지휘권, 수사종결권, 경찰비리를 제외한 직접수사권을 박탈하고 검찰의 영장청구권만은 유지'''하도록 했다. 다만 아직 발의 단계이고 거쳐야 할 절차가 많으며 해당 법안은 '''누가 봐도 경찰에게만 매우 유리한 법안 내용'''이기 때문에 법안 내용이 수정되지 않는 이상 해당 법안의 통과는 본 회의는 커녕 법사위 통과도 불투명한 상황으로 보인다. 이 같은 법안을 발의했다고 표창원 의원이 SNS에 글을 게시했을 때 일선 경찰들과 지지자들은 옹호하는 댓글을 남겼지만 해당 법안에 대해서 반대하거나 혹은 수정이 필요하다고 댓글을 남긴 시민들도 적지 않은 상황이다.[* 실제로 검찰개혁을 주제로 하여 김경진 의원과 같이 썰전에 출연했을 때 표창원의원이 말하길 "많은 일반 시민들이 저에게 '경찰에 수사권을 줘선 안된다'라며 '경찰개혁부터 하고난 뒤에 수사권 조정이 되어야 한다'라는 내용의 문자를 많이 보내줬다"라고 말했다.] [[외부자들]]에 목소리 출연을 했을 때 패널이 표 의원에게 해당 법안 통과 가능성에 물어봤을 때 표 의원은 통과하지 못 할 가능성이 높다고 얘기했다. 설령 통과하지 못 하더라도 "자신의 법안이 [[검경 수사권 조정]] 논의의 시발점이 되길 바란다"라고도 말했다. 2017년 9월 현재 해당 법안은 [[법제사법위원회]]에 상정되었다.
          * 2016년 12월 10일 자신이 받을 수 있는 후원금의 한도가 넘쳐서 더 이상 후원을 받을 수 없다고 밝혔다. 대신 천주교인권위원회의 후원을 부탁한다고 밝혔다. [[http://m.lawissue.co.kr/view.php?ud=20161210113241362077801_12|기사]]
  • USS 피닉스 (CL-46) . . . . 5회 일치
         1941년 12월 7월 아침, 진주만에 기항해 있던 중 [[진주만 공습|일본군 전투기들의 공습을 받는다.]] 피닉스는 그 아비규환에서 비무장 상태로 탈출, 오후에는 해당 공습을 벌인 일본군 항공모함들을 수색하는 작전에 참가하였다.
         이렇게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피닉스는 미국 본토와 하와이 간의 수송 함대를 호위하는 임무나 호주 해역을 항해하는 병력수송선을 호위하는 임무를 맡았다. 1942년 2월에는 당시 네덜란드 영토였던 [[자바]] 섬에 항공기를 수송하는 선박들[* USS 랭글리(USS Langley)와 MS 씨위치(MS Seawitch).]을 호위하기도 했다. 이외에도 인도양 초계, [[봄베이]]로 가는 수송선단 호위, 자바 섬에서 패배한 연합군 병력 구조 등의 임무에 참가하였다.
         1943년 7월, [[국무장관]]이었던 [[코델 헐]]을 [[카사블랑카]]까지 수송하는 임무를 수행한 피닉스는 다시 태평양 전역으로 돌아온다. 같은 해 12월에는 글로스터 곶에 상륙하는 연합군을 지원하였으며, 1944년 1월에는 [[뉴기니]] 섬의 해안시설을 포격하는 임무를 맡았다. 2월에는 [[로스니그로스]] 섬에 상륙하는 연합군을 지원하였고, 3월에는 다른 연합군 순양함과 함께 일본군의 해안 포대를 깨부쉈다. 4월 22일에는 홀란디아[* 現 [[자야푸라]].]에 상륙하는 연합군을 지원하였고, 그로부터 1주일 후에는 근처 지역의 일본군 비행장을 포격, 연합군을 위협할 수 없게 하였다. 5월에는 또다른 상륙작전들을 지원하여 일본군의 초소를 초토화시켰다. 6월에는 해당 지역에 증원군을 수송하던 일본군 구축함들을 발견, 쫓아내었다. 7월에는 Numfoor[* Neumfoor라고 읽기도 하는 듯. 갓-구글님께서 한국어 표기를 말씀하시지 않으신다.]의 해안을 포격했다. 9월에는 말루쿠 제도의 [[모로타이]] 섬 상륙작전을 지원하였다.
         일본이 항복한 후에는 본토로 돌아와 대서양 함대에서 복무하였다. 1946년 2월 28일 예비역이 되었으며, 1946년 7월 퇴역. 아르헨티나에 넘겨지기 전까지 필라델피아에 정박해 있었다.
  • 김상훈 (1963년) . . . . 5회 일치
         * [[2006년]] [[6월]] ~ [[2007년]] [[12월]] : 대구시청 경제산업국장
         * [[2009년]] ~ [[2011년]] [[12월]] : 대구시청 경제통상국장
         * [[2014년]] [[6월]] ~ [[2015년]] [[2월]] : 제19대 국회 후반기 국회운영위원회 위원
         * [[2016년]] [[5월]] ~ [[2017년]] [[2월]] : [[새누리당]] 정책위원회 수석부의장
         * [[2017년]] [[2월]] ~ : [[자유한국당]] 정책위원회 수석부의장
  • 김운용 . . . . 5회 일치
         * 1990년 2월 : [[서울평화상]] 위원회 위원으로 위촉됨.
         * 1993년 2월 : [[대한체육회]] 회장, [[대한올림픽위원회]] 위원장으로 선출됨.
         * 1995년 9월 : [[1997년 동아시아 경기 대회|1997년 부산 동아시아 경기 대회]] 조직위원회 위원장, [[2002년 아시안 게임|2002년 부산 아시안 게임]] 조직위원회 위원장으로 임명됨.
         * 1995년 11월 : [[1999년 동계 아시안 게임|1999년 강원 동계 아시안 게임]] 조직위원회 위원장으로 임명됨.
         |임기 = [[1993년]] [[2월 24일]] ~ [[2002년]] [[3월 12일]]
  • 백일섭 . . . . 5회 일치
         * [[1993년]] ~ [[1995년]] [[KBS2]] 일요아침드라마 《[[일요일은 참으세요]]》
         * [[1995년]] [[KBS2]] 주간연속극 《[[간 큰 남자]]》
         * [[1995년]] [[MBC]] 대하드라마 《[[제4공화국 (드라마)|제4공화국]]》 ... 4대 중앙정보부장 [[김형욱]] 역
         * [[자유민주연합]] 문화예술행정특임위원(2001년 1월 ~ 2001년 2월)
         * [[서일대학교|서일대학]] 연극영화학과 겸임교수(2001년 8월 ~ 2002년 2월)
  • 서수민 . . . . 5회 일치
         || '''2012년 2월 7일''' || → || '''2012년 9월 24일''' || → || '''2013년 9월 23일''' ||
         || '''출생''' ||<(> [[1972년]] [[2월 26일]] ([age(1972-02-26)]세), [[대구광역시]]→[[경상북도]] [[포항시]] ||
         || '''데뷔''' ||<(> [[1995년]] ||
         [[경상북도]] [[포항시]] 출생[* 1박 2일 2016년 1월 31일 방송에서 [[유호진]] PD를 통해 언급됐다.]으로, [[한국방송공사|KBS]] 예능국 소속 PD다. [[1995년]] [[연세대학교]] 의생활학과를 졸업한 다음 KBS에 입사했다.
          [[분류:프로듀서]][[분류:포항시 출신 인물]][[분류:1972년 출생]][[분류:1995년 데뷔]][[분류:1대 100 역대 1인]]
  • 이계순 (1927년) . . . . 5회 일치
         일본으로 유학, [[1940년]] [[교토]](京都) 제일고녀를 다녔다.<ref>[http://news.kukinews.com/article/view.asp?page=1&gCode=kmi&arcid=0921421094 일본인들이 부러워한 조선인 석주명] 국민일보 2009.09.14</ref> 귀국 후 [[1953년]] [[부산]] [[경남중학교]] [[영어]]교사가 되었다. 이후 부산연세실업학교 교수 등을 거쳐 [[1964년]] [[서울대학교]] 사범대 영어교육과 교수가 되었다. [[1977년]] [[전문직 여성클럽]] 한국연맹 회장이 되어 여성단체 활동에 뛰어들었고 교수직과 병행하였다. [[1985년]]부터 [[한국여성유권자연맹]] 회장을 맡았다. 1990년 3월부터 [[1991년]] [[12월]]까지 정무제2장관을 지냈다.
         [[1990년]] 정무제2장관 재직 중 ‘국·공립 연수기관에 여성관련 교과목’을 만들었다. 1991년에는 그가 직접 나서서 공무원 연수기관장들과 간담회를 열어 협조를 구했다. 이렇게 해서 개설되기 시작한 ‘여성관련’ 교과목은 ‘국가발전과 여성’ ‘여성문제의 현실과 정책방향’ 등의 과목명으로 1~2시간 특강 형식으로 배정됐다. 그러다가 정규과목으로 개설되고 교육훈련점수에도 반영되어 선택과정으로 전환되고 전문과정으로까지 확대됐다. 초창기 교수요원의 확보와 교육자료의 개발 등은 한국여성개발원이 담당했다.<ref>[http://www.womennews.co.kr/news/48170#.VNroPaJFBzo 공무원 양성평등교육이 제도화되기까지]</ref> 1990년 12월 27일의 개각에서 유임되었으며, [[1991년]] 퇴임 후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명예교수에 위촉되었다.
         |임기 = [[1990년]] [[3월 19일]] ~ [[1990년]] [[12월 27일]]
         |임기 = [[1990년]] [[12월 27일]] ~ [[1991년]] [[12월 19일]]
  • 이명주 (축구선수) . . . . 5회 일치
         |국가대표팀 최신 업데이트 날짜= [[2017년]] [[12월 12일]]
         이후로도 [[6월 27일]] [[울산 현대 축구단|울산]]전과 [[7월 1일]] [[수원 삼성 블루윙즈|수원]]전에서 1도움씩을 기록했고 팀의 [[FA컵 2012]] 우승에도 일조했지만 7월 1일 이후로 공격 포인트가 없어 "출장 수로만 신인왕 후보"이라는 비아냥을 받다가 10월 28일 [[경남 FC]]와의 원정 경기에서 후반 38분 중거리슛으로 골을 기록했고 신인 선수로는 처음으로 K리그 주간 베스트 11 MVP에 올랐다. 이 경기 이후 11월 17일 [[전북 현대 모터스|전북]]전 1골, 11월 25일 [[경남 FC|경남]]전 1골 1도움, 11월 29일 [[FC 서울|서울]]전 2도움, 12월 2일 [[수원 삼성 블루윙즈|수원]]전 1골을 터뜨리며 신인왕 후보로 거론된 선수들 중 가장 많은 5골 6도움 11개의 공격 포인트를 쌓았다. 이명주는 [[12월 3일]] K리그 대상 시상식에서 [[광주 FC]]의 [[이한샘]], [[전남 드래곤즈]]의 [[박선용]]을 압도적인 표 차이로 제치고 [[K리그 영플레이어상|신인 선수상]]을 받았다.<ref>{{뉴스 인용 |제목=(K리그 대상) ‘신인왕’ 이명주 “포항의 축구스타일, 나랑 잘 맞았다” |url=http://sports.news.naver.com/sports/index.nhn?category=k_league&ctg=news&mod=read&office_id=109&article_id=0002452360 |출판사=OSEN |date={{날짜한글화|2012-12-03}} }}</ref>
         [[2014년]] [[6월 9일]], 포항은 기자회견을 통해 이명주의 [[알아인 FC|알아인]] 이적을 발표하였다. 이적료는 공개되지 않았지만 언론은 그의 이적료와 연봉을 합쳐 총 95억 원 정도 규모로 추정하고 있다. 등번호는 포항에서의 번호인 29번을 선택했다.<ref>{{뉴스 인용 |제목='총액 95억원' 이명주 알아인 이적, K리그 이적사 다시 썼다 |url=http://sports.chosun.com/news/ntype.htm?id=201406100100083460005726&servicedate=20140609 |출판사=스포츠조선 |date={{날짜한글화|2014-06-9}} }}</ref> 7월 '알아인 인터내셔널 친선대회'에서 두 경기 연속 어시스트를 기록하며 팀의 우승에 기여하였다. 또한 9월 30일 열린 [[AFC 챔피언스리그 2014|AFC 챔피언스리그]] 4강 2차전에 [[알힐랄 (리야드)|알힐랄]]과의 경기에서 전반 10분 선제골을 기록하며 팀의 승리를 이끌었으나, 1, 2차전 합계 2:4로 결승 진출에는 실패하였다.<ref>{{뉴스 인용 |제목=(ACL) ‘이명주 선제골’ 불구 알아인 결승 좌절 |url=http://sports.news.naver.com/sports/index.nhn?category=k_league&ctg=news&mod=read&office_id=413&article_id=0000011083 |출판사=인터풋볼 |date={{날짜한글화|2014-10-1}} }}</ref> 한편 정규리그에서는 12월에 열린 10, 11라운드에서 두 경기 연속 어시스트를 기록하였으며, 13라운드 [[샤르자 스포츠 클럽|샤르자]]와의 경기에서는 정규리그 첫 골을 성공시켰다. [[2015년 AFC 아시안컵|아시안컵]] 이후 복귀한 14라운드 [[알샤바브 (두바이)|알샤바브]]와의 경기에서도 골을 기록하였다. 이후 주전으로 활약하며 [[알아인 FC|알아인]]의 [[UAE 아라비안 걸프 리그]] 2014-15시즌 우승에 크게 기여하였다.
         2014년 12월 22일 발표된 [[2015년 AFC 아시안컵|2015 AFC 아시안컵]] 최종 명단에 포함되었다.<ref>{{뉴스 인용 |제목 = 이정협 깜짝 발탁…슈틸리케호 아시안컵 명단 확정 |url = 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4/12/22/0200000000AKR20141222048300007.HTML?input=1195m |출판사 = 연합뉴스 |저자 = 김동찬, 장재은 |날짜 = 2014-12-22 }}</ref>이후 인연이 없다가 2017년 5월 22일 재승선 되었다
  • 이수민(야구선수) . . . . 5회 일치
         [include(틀:다른 뜻1, other1=이 문서는 1995년생 야구선수 이수민에 대해 다룹니다. 동명이인, rd1=이수민)]
          * [[야구 관련 인물(KBO)]] [[분류: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분류:구미시 출신 인물]] [[분류:1995년 출생]] [[분류:투수]] [[분류:좌완 투수]] [[분류:좌투좌타]] / [[삼성 라이온즈/선수단]]
         ||<:> '''생년월일''' || [[1995년]] [[9월 11일]] ||
         2월 16일 한신 타이거스와의 연습경기에서 6회말 2아웃 상황에서 [[임대한]]을 구원해 마운드에 올랐다. 1.1이닝 1볼넷 3삼진이라는 무시무시한 삼진능력을 보여줬다. 상무에서의 혹사나 구속 하락등의 불안감을 떨쳐내는 투구. 최고구속은 140km.
         2월 28일 히로시마 도요 카프와의 연습경기에서 선발등판하여 3이닝 3피안타 1볼넷 무실점으로 호투했다. 이날 최고구속은 136km가 나왔지만 위기관리 능력을 과시하며 호투하였다. 히로시마의 1군 멤버가 대거 포함된 상황의 호투라 고무적이다.
  • 이열희 (1924년) . . . . 5회 일치
          | 생애 = [[1924년]] [[12월 18일]] ~ [[2012년]] [[8월 9일]] (89세)
         '''이열희'''(李烈熙, [[1924년]] [[12월 18일]] - [[2012년]] [[8월 9일]])는 [[대한민국]]의 의학 교육자, [[치과]] 의사, [[구강 성형외과]] 의사, 대학 교수 및 [[예비역]] [[대한민국 육군]] [[대위]]이자 [[경북대학교]] 치의과대학 창립 멤버의 한 사람이며, 치과, 악안면외과(악안면성형외과) 전문의였다. [[경북대학교]] 의과 대학의 치의학과 과장이자, 경북대학교 치의과대학 초대 학장이었다. [[1962년]] [[11월]] [[대한악안면성형재건외과학회]](大韓顎顔面成形再建外科學會)의 창립 멤버의 한 사람이기도 하다. 6.25 전쟁 당시에는 군의관으로 참전했고, [[1950년]]대부터 [[치과]]대학 부설의 필요성을 주장하여 [[1979년]] [[경북대학교]]에 치의과대학을 별도로 설치하고, 이후 치과대학이 의과대학에서 분리, 단설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1924년]] [[12월 18일]] [[대구부]] 성내3동(대구광역시 중구 서성로 1가)에서 이상무의 아들로 태어났다. 할아버지 소남 [[이일우]]는 사업가였고, 독립운동가 [[이상정]],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로 유명한 시인 [[이상화 (시인)|이상화]]<ref name="daemyonh">[http://www.lifemaeil.com/news_view.php?print_no=1540&seq=5570 특집- 상화의 큰 집 사람들] 주간매일 2002년 11월 27일자</ref>, 역사학자 겸 스포츠인 [[이상백 (사학자)|이상백]]은 그의 아버지 이상무의 사촌 형제들이었다.
         ** 고모부 : [[윤홍열 (1893년)|윤홍열]](尹洪烈, [[1893년]] ~ [[1947년]] [[2월 19일]]), [[남조선과도입법위원회]] 의원과 [[대구시보]]사 사장 역임 - [[윤필오]]의 아들
         * 장부 : [[박문웅]]((朴文雄, [[1890년]] [[12월 7일]] - [[1959년]] [[8월 14일]])
  • 이윤열 . . . . 5회 일치
         2000년도 경 iTV 고수를 이겨라라는 프로그램에 출연해 최인규를 격파한 것이 데뷔전이었으며 이후 2001년 상반기, Game-i(이후 [[화승 OZ]]의 전신인 IS와 합병)에 입단하면서 프로게이머 활동을 시작하였다. 2002년 12월엔 KTF 매직엔스(현 [[KT 롤스터]])로 임대 이적했고, 이듬해 2003년 12월 24일 투나 SG(현 [[위메이드 폭스]])로 복귀한 이후 2010년까지 활동했다.
         그러나 이때부터 이윤열의 천적으로 자리잡은 마재윤에게 엘리트학생복 MSL 올스타리그 결승전, WEF 2006 결승전, CJ 슈퍼파이트 S3 결승전 등에서 패배하였고, 2007년 2월 24일 신한은행 스타리그 2006 시즌3에서 마재윤에게 1:3으로 패배하였다. 이후 치러진 신한은행 마스터즈에서 마재윤에게 3:1 승리를 거두어 앙갚음을 하였고, 08-09 시즌에 열린 클럽데이 MSL, 로스트사가 MSL에서 연속으로 시드를 획득하는 등 꾸준한 활약을 보였다. 이후 찾아 온 슬럼프와 미니홈피에 쓴 글이 은퇴를 시사하는 것 아니냐는 논란이 일어났었지만, IeSF 스타 인비테이셔널 클래식 우승을 전후하여 다시 게임에 매진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2012년 12월 25일 [[팀 아주부|아주부 팀]]의 매니저로 영입되었다.
         2016년 2월 1일 00시경 자신에게 5살짜리 딸이 있음을 [[아프리카tv]] 방송에서 밝혔다. 늦게 밝힌 사유는 딸아이가 있음을 알리는 타이밍을 못잡았었다고.....(5년후에야...)
  • 이지아(배우) . . . . 5회 일치
         2011년 12월 19일 이지아의 집안이 육영사업을 하던 재력가이며 '''덕망 있는 명문가'''라는 [[언플]] 기사가 떴다. [[정대철]] 당시 민주당 상임 고문은 이지아의 조부가 재력은 물론 남다른 인품의 소유자였고 자손인 이지아 부친에 이어 이지아 역시 유복하고 뼈대 있는 가정환경 속에서 바르게 자랄 수 있었다고 인터뷰했다.
         2012년 11월 29일, 12월 6일 [[무릎팍도사]]에서 (정확히는 12월 6일 방송분) 이지아의 과거를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다고 밝혔다. 해당 방송에서는 파리 여행을 갔을 당시에 과거의 상대가 누구였는지 털어놓았다고 했고, 위자료 청구소송에 관해서는 해당 기사가 터지기 바로 직전에 이지아가 정우성에게 정중하게 "미리 말하지 못해서 미안하다"라고 얘기하면서 알게 되었다고 한다.
         2016년 2월 13일 [[연예가중계]]에 영화 <무수단>과 관련하여 홍보차 출연하여 애교를 선보였다. [[http://m.media.daum.net/m/entertain/newsview/20160214065110719|#]]
         Vogue Korea 2016년 2월
  • 임은정(법조인) . . . . 5회 일치
         2012년 2월 검사 인사에서 ‘우수 여성 검사’로 선정되었고, [[서울중앙지검]] 공판부에 배치되었다. 당시 법무부는 보도자료를 통해 “여성 검사 역할과 비중이 지속적으로 확대되는 점을 감안해 대검찰청과 서울중앙지검에 5명의 여성 검사들을 주요 부서에 발탁했다”며 임은정 검사의 이름을 올리며 홍보했다.
         2012년 12월 28일, 특수범죄처벌에 관한 특별법 위반죄로 1962년 유죄선고를 받은 [[윤길중]][* [[윤길중]]은 죽산 [[조봉암]]과 가까운 사람으로, 진보당 사건에 연루되어 [[사형]]을 선고받고 오랜 세월 옥살이를 한 정치인이다.] 진보당 간사장에 대한 재심 결심공판에서도 무죄를 구형했다.[* 무죄 구형은 굉장히 드문 일이다.] 물론 법원도 당일 무죄를 선고했다.
         역시나 대검 감찰본부는 2013년 2월 직무상 의무 위반, 품위 손상 등으로 법무부에 임 검사의 정직을 청구했고, 같은 달 법무부는 그에게 정직 4개월의 징계 처분을 내렸다. 임은정 검사는 이에 대하여 서울행정법원에 징계처분취소 소송을 제기했고, 서울행정법원은 2014년 2월 21일 징계처분을 취소하라는 판결을 선고하였다. 법무부에서는 항소하였으나, 2014년 11월 6일 서울고등법원에서는 법무부의 항소를 기각하였다. 법무부는 상고했고 대법원은 2년 10개월째 결론을 내리지 않고 있다가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32&aid=0002822245|2017년 10월 31일에 선고할 것이라고 한다.]] 대법원은 결국 2017년 10월 31일 상고를 기각하여 임은정 검사가 승소한 원심판결을 확정했다. 대법원의 판결 이유는, 무죄구형이나 내부게시판에 글을 올린 행위는 징계 대상이 될 수 없고, 근무시간 위반만 징계사유가 될 수 있지만 이 또한 징계의 정도가 과중하여 위법하다는 취지이다([[http://www.law.go.kr/precInfoP.do?mode=0&precSeq=186092|대법원 2017. 10. 31 선고 2014두45734 판결]]).
         2015년 이후부터는 의정부지방검찰청에서 검사로 일하고 있다. 그런데 2015년 12월 3일 검사로서의 직무수행능력이 현저히 떨어지는 것으로 의심받아 심층적격심사[* 2004년 법무부는 7년마다 한 번씩 업무 능력이 떨어지는 '문제검사'를 골라내겠다며 적격심사제도를 도입했다. 적격심사 대상은 검찰 내 특정 기수 전체이며, 법무부는 이 가운데 심층심사를 할 사람을 걸러내 특정사무감사를 진행한 다음 적격심사위원회를 연다. 여기서 최종 탈락한 인물은 강제로 퇴직당한다. [[검찰청법]] 제39조 참조.]를 받았다. 누가 보더라도 검찰 상부가 '[[보복|찍어내기]]'를 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이에 대해 수많은 네티즌들이 격분하였다. 무죄 구형 후 법무부의 한 간부가 ‘임은정이 적격심사 얼마 남았냐’고 묻더란 말을 들었다고 한다. 이를 듣고 ‘적격심사를 계기로 자르려는구나’ 싶었다고. 자신이 대상자 명단에 올랐다는 [[한겨레]] 보도가 나오기 전 실제로 ‘(검찰 상부에서) 자르기로 했으니 마음의 준비 해야 할 것 같다’는 동료의 귀띔을 들었다고 한다. 인터뷰에서 밝히길 '그때는 돌아버리겠더라. 누가 볼까 싶어 집까지는 씩씩하게 걸어 들어왔는데, 현관문을 닫고 주저앉아 ‘너무 힘듭니다, 견디겠습니다만, 너무 힘듭니다’하고 신에게 하소연했다'고 한다. 친한 동료들까지 나와 연락하길 주저한다고 느껴질 때는 정말 많이 외로웠다고 한다.
  • 정웅인 . . . . 5회 일치
         [[대구광역시]] [[달서구|경상북도 달서구]](지금의 [[대구광역시]] [[달서구]]) 출생이며 [[부산광역시|부산]]과 [[전라남도]] [[담양군|전라남도 고흥군]]과 [[담양군|전라남도 담양군]]에서 성장하였고 [[서울예술대학교|서울예술대학 연극학과]]를 졸업한 그는 1994년 [[연극배우]] 첫 데뷔하였고 1년 후 1995년 [[영화]] 《[[리허설 (영화)|리허설]]》의 단역 출연을 통하여 [[영화 배우|영화배우]] 데뷔하였으며 이듬해 1996년 [[뮤지컬 배우]] 데뷔하였고 1년 후 1997년 [[서울방송|SBS 서울방송]]《천일야화》의 단역 출연으로 정식 [[배우|연기자]] 데뷔하였다.
         |제목= ‘힐링캠프’ 정웅인 황금인맥 공개, “이병헌이 작품에 꽂아줬다” |url= http://news.donga.com/3/all/20140805/65596520/1 |출판사=동아일보|날짜= 2014-08-05 }}</ref> 이후 탤런트 공채시험에 줄곧 낙방을 하다 1995년 강정수 감독의 영화《리허설》로 영화계에 입문했고, 1996년에 드라마《천일야화》로 정식 데뷔했다.<ref>{{뉴스 인용
         |align="center"| 1995년
         * 2011년 12월 3일~2012년 1월 21일 [[tvN]] 《SNL 코리아 시즌1》 ... 크루
         * 2012년 2월 16일 [[KBS2]] 《해피투게더 시즌3 - 236회》 ... 오작교 형제들 스페셜
  • 최세창 . . . . 5회 일치
         * [[김영일]] - ([[제4공화국 (드라마)|제4공화국]], [[1995년]]) [[MBC]] 드라마
         * [[박남현]] - ([[코리아게이트 (드라마)|코리아게이트]], [[1995년]]) [[SBS]] 드라마
         |임기 = [[1987년]] [[12월 30일]] ~ [[1989년]] [[4월 14일]]
         |임기 = [[1991년]] [[12월 20일]] ~ [[1993년]] [[2월 26일]]
  • 최윤수(정무직공무원) . . . . 5회 일치
         2010년 [[서울중앙지방검찰청|서울중앙지검]]에서 특수2부장을 맡았으며, 2015년 2월에는 서울중앙지검 제3차장으로 승진했다. 당시 서울법대 84학번 동기인 [[우병우]] 민정수석과의 친분관계가 주목을 받았다. 물론 우병우보다 사법시험은 2년 더 늦게 합격했지만, 사석에서 말을 놓을 만큼 우병우와 절친한 관계를 유지한 것으로 알려졌다.
         2016년 2월에는 우병우의 추천(?)으로 [[국가정보원]] 제2차장[* 국내 정보 및 공안 부문을 담당하는 국정원 내 핵심 요직이다.]에 발탁되었다. 이때 청와대가 이 자리에 우병우의 측근인 최윤수를 발탁했을 때부터 사정당국 내부에서는 국정원을 통해 본격적인 총선과 대선 관리에 나서는 것 아니냐는 목소리가 나왔다. 게다가 최윤수가 2015년 말 검사장급으로 승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국정원 2차장으로 전격 발탁된 점도 ‘정치적 인사’라는 뒷말을 낳았다.[* 참고로 최윤수는 전임 김수민 2차장보다 무려 9기수 아래였다.[[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821421.html#csidx24444379242d545ae3e855a102f4499|#]] ] 어쨌든 그 후 2017년 6월까지 국정원 제2차장 업무를 수행했다.
         국정원 제2차장으로 일하면서 2016년 6월 ‘[[정운호 게이트]]’ 사건과 관련한 수사를 받았다. 서울지검 제3차장 시절이던 2015년 2월경 [[홍만표]] 변호사로부터 청탁을 받아 정운호의 무혐의 처분에 개입한 것으로 알려졌기 때문. 실제로 2016년 6월 [[정운호]] [[네이처 리퍼블릭]] 대표는 도박 혐의로 조사를 받는 과정에서 “홍만표 변호사에게 사건 청탁 명목으로 3억원을 건넸고, 홍 변호사가 당시 박성재 서울중앙지검장과 최윤수 3차장 검사에게 청탁하겠다고 했다”는 취지의 진술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아닌 게 아니라 2015년 2월 당시 최윤수 차장검사가 홍만표 변호사의 청탁 알선을 받고 정운호의 뒤를 봐줬기 때문인지 정운호는 검찰에서 무혐의 처분을 받고 풀려났다.
         국정원 제2차장 시절에 '국정원 문화·예술인 배제 보고서'를 수차례 보고 받고 지시하는 등 [[박근혜 정부의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문화계 블랙리스트]] 작성·실행에 관여한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추명호]] 전 국정원 국익정보국장이 우병우 전 수석에게 ‘비선 보고’하는 데 관여한 혐의도 받고 있다.[[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821421.html#csidx24444379242d545ae3e855a102f4499|#]] 그러한 이유로 검찰에 의해 [[구속영장]]이 청구되었으나 2017년 12월 2일 [[오민석(법조인)|오민석]] 부장판사에 의해 기각되었다. 물론 검찰 내부에서는 최 전 차장의 구속영장이 '가담 정도'를 이유로 기각된 것에 불과하고 범죄 사실 소명 자체는 어느 정도 인정된 것으로 보고 있다.[[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821731.html#csidxe6517123a8063c9aaa12e8244fa6d69|#]]
  • 황보관 . . . . 5회 일치
         [[서울대학교]]를 졸업하고 [[1988년]] [[제주 유나이티드 FC|유공 코끼리]]에서 데뷔하여, 그 해 [[K리그 영플레이어상|K리그 신인상]]을 받았다. [[1994년]] [[8월 6일]] [[전북 현대 모터스|전북 버팔로]]와의 경기에서 [[K리그 클래식|K리그]] 통산 7번째로 [[20-20클럽]]에 가입하였다. [[1995년]] [[일본]]의 [[오이타 트리니타]]로 이적하여 [[1996년]] 팀의 1부 리그로의 승격에 공헌하는 등 중심 선수로 활약하며 성공적인 선수 생활을 하였다. [[1998년]] 시즌 중 은퇴하였다.
         [[1988년]] [[12월 11일]], [[1988년 AFC 아시안컵]] [[이란 축구 국가대표팀|이란]]전에서 [[A매치]] 데뷔전을 치렀다. [[1990년 FIFA 월드컵]], [[1988년 AFC 아시안컵]] 등의 많은 대회에서 뛰었고, [[A매치]] 36경기에서 10골을 넣었다.
         이후 [[2010년]] [[12월 28일]] [[넬루 빙가다]] 감독의 후임으로 [[FC 서울]]의 감독직을 맡았으나,<ref>{{뉴스 인용|제목=FC 서울, 빙가다 후임에 황보관 감독과 2년 계약|url=http://sportsworldi.segye.com/Articles/Sports/Soccer/Article.asp?aid=20101229000575&subctg1=05&subctg2=00|출판사=스포츠월드|date={{날짜한글화|2010-12-28}} }}</ref> [[2011년]] [[4월 26일]] 리그에서 1승 3무 3패라는 초라한 성적을 거둔 후 [[최용수 (축구인)|최용수]]에게 사령탑을 넘기고 사임했다.<ref>{{뉴스 인용 |제목=못다 이룬 꿈, 117일 만에 아듀|url=http://sports.news.nate.com/view/20110426n05840?mid=s0300 |출판사=스포츠조선 |date={{날짜한글화|2011-4-26}} }}</ref> 사임 후 [[대한축구협회]]의 기술교육국장으로 부름을 받아 행정가의 길을 걷게 되었고,<ref>[http://news.donga.com/3//20110525/37501428/1 축구협회 기술교육국장에 황보관] - 동아일보</ref> [[2011년]] [[11월 9일]] [[이회택]]의 후임으로 기술위원장이 되었다.<ref>[http://news.naver.com/sports/index.nhn?category=soccer&ctg=news&mod=read&office_id=076&article_id=0002160731 이회택 기술위원장 사임, 후임에 황보관 기술교육국장] - 스포츠조선</ref>
         * [[1988년]] ~ [[1995년]] {{국기그림|대한민국}} [[제주 유나이티드 FC|유공 코끼리]]
         * [[1995년]] ~ [[1997년]] {{국기그림|일본}} [[오이타 트리니타|오이타 트리니티]]
  • Darkest Hour: A Hearts of Iron Game . . . . 4회 일치
          1942년 12월 22일, 스탈린그라드 전투의 시작을 기준으로 한 시나리오.
          1945년이라는 설명과 달리 1944년 12월 16일, 벌지 대공세의 시작을 기준으로 한 시나리오.
          [[러일전쟁]]을 배경으로 한 시나리오.1904년 2월 7일 시작해 1905년 9월 2월까지 진행된다. 플레이 가능 국가는 러시아와 일본.
  • 강구열 . . . . 4회 일치
         '''강구열'''([[1988년]] [[2월 23일]]~ )은 [[대한민국]]의 전직 [[스타크래프트]] [[프로게이머]]로, [[테란]] 유저이다. 아이디는 '''910[Ete]'''로, 이는 이름 중 구(9), 열(10)을 숫자로 풀어쓴 것이다.
         대한민국 공군 사병으로 복무한 그는 2009년 11월 23일 공군 현역으로 입대했고, 2011년 12월경 제대했다.
         한때 강라인의 열기가 식는 듯했지만, 2008년 12월, 강구열이 바투 스타리그 36강에 진출하면서 강라인의 열기가 다시 뜨거워 질 조짐이 일고 있다. 36강 진출을 확정지은 직후 강구열의 인터뷰 때문, 강구열은 인터뷰에서 "09-10 시즌을 진짜 벼르고 있다"라고 말했는데, 그 말을 강라인의 팬들은 09-10 시즌에서 9와 10을 강구열의 이름에서 강자를 뺀 구와 열로 풀이, 즉 구-열시즌으로 해석하면서 다시금 뜨거워 지고 있는 것이다.
         * [[조일장]] ([[STX SouL]]) : 2012년 12월 사실상 은퇴. [[바투 스타리그 08-09]]에서 4강에 오르며 충격적인 개인리그 데뷔를 하지만 시드를 확보한 다음 시즌인 [[박카스 스타리그 2009]] 16강에서 1승 2패로 16강에서 탈락, 강라인에 가입하게 됐다. 그 뒤로 [[에버 스타리그 2009]]는 36강에서 탈락, [[대한항공 스타리그 2010 시즌1]]도 결과 마찬가지, 그 뒤로는 본선 진출에 실패하거나 계속 조기탈락. MSL에서도 본선 진출 실패, 혹은 조기탈락하거나 16강에만 머묾.
  • 김대휘 . . . . 4회 일치
         |임기 = 2010년 2월 11일 ~ 2011년 2월 16일
         2008년 2월에 법원장으로 승진하여 [[춘천지방법원]], [[의정부지방법원]], [[서울가정법원]]에서 법원장을 역임하였다. 2011년 법관에서 퇴직하여 법무법인 화우에서 변호사로 활동을 하면서 동국제강 사외이사와 이화여자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겸임교수로 재직하였다. 2014년에 [[새누리당]] 경제혁신특위 규제개혁분과위원회 전문가위원에 지명되었으며 2014년부터 [[세종대학교]] 자유전공학부 석좌교수를 하였다.
         서울지방법원 형사합의23부 재판장으로 재직하던 2000년 2월 11일에는 민혁당을 결성한 혐의로 구속기소돼 무기징역이 구형된 하피고인에 대해 국보법상 반국가단체 구성죄 등을 유죄로 인정, 징역 10년에 자격정지 10년을 선고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15&aid=0000226118]</ref> 6월 15일에 1994년말 트로츠키의 영구혁명론을 추종하는 국제사회주자들이라는 조직에 가입한 뒤 이 조직에서 발행하는 기관지 노동자연대 등을 소지한 혐의 등으로 4월달에 구속되어 징역 3년이구형된 피고인에 대한 선고 공판에서 "피고인의 이적단체 가입혐의에 대해 논란이 있는데다 도주 및 증거인멸의 우려도 없는 것으로 보여 보석을 허가한다"고 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15&aid=0000244671]</ref>
  • 김상조 . . . . 4회 일치
         오랫동안 [[삼성그룹]]의 [[순환출자]]식 지배 구조 개선을 요구하며 문제제기를 해왔던 사람이다. 이에 대한 저서도 여러 편 출간했다. 또 [[권영길]] 후보의 '[[국민승리21]] 정책자문단'의 총무국장으로 있던 적이 있고, 2004년 2월에는 당시 한나라당의 불법 대선자금 지원으로 인해 시끄러웠던 삼성의 주주총회에 참여연대 소속으로 소액주주로 참석했는데 삼성 경호원들에게 멱살을 잡혀 퇴장당하던 영상이 발굴되기도 했다.[[https://www.youtube.com/watch?v=VH4_myrbBXg|#]]
         훗날 [[최순실 게이트]]가 터진 뒤 박영수 특검에 참고인으로 출석해 도움을 주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에 대한 첫 구속영장이 기각된 후에는 특검에 "포인트를 잘못 잡았다"는 조언을 하며, [[삼성생명]]의 [[금융지주회사]] 전환 시도·[[삼성바이오로직스]]의 상장 과정 등에 대해 특검에 '''족집게 강의'''를 함으로써, 제2차 구속영장 발부에 결정적인 도움을 주기도 했다.[[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7/05/17/2017051702090.html|#]] 2016년 12월에 열린 국회 국조특위 청문회에도 참고인으로 출석해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으로 대주주인 [[국민연금]]이 상당한 손해를 봤다는 증언을 하기도 했다.[[http://v.media.daum.net/v/20170315111345502|#]]
         또 두 번째 사례인 1999년 2월 서울 양천구 목동 현대아파트를 거쳐 2002년 강남구 대치동의 은마아파트로 주소지를 변경했다. 아들이 초등학교 6학년으로 중학교 입학을 앞둔 시점이었다. 김 후보자는 이후 가족과 함께 미국 예일대 연수를 가면서 2004년 8월부터 다시 7개월간 목동 현대아파트로 주소지를 옮겼다. 이어 귀국한 2005년 2월 은마아파트로 주소지를 다시 변경했다. 중3 아들이 고교 진학을 앞둔 시기였다. 김 후보자 측은 “후보자가 해외연수 중 전세로 살던 은마아파트를 비워두고 우편물 등을 받아두기 위해 목동의 세입자에게 양해를 구해 주소지만 잠시 옮겨놓았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 김태희 . . . . 4회 일치
         2007년 12월 12일 메가박스 코엑스의 《싸움》 무대인사에서 김태희.
         김태희는 2009년 4년 만에 첩보액션 드라마 《[[아이리스 (드라마)|아이리스]]》의 여주인공 최승희 역할로 출연했다.<ref>{{뉴스 인용 |제목=김태희 "`아이리스`, 가장 진지하게 준비한 작품"|url=http://news.mk.co.kr/newsRead.php?year=2009&no=273866|출판사=MK 뉴스|저자=진향희|날짜=2009-05-12|확인날짜=2014-03-05}}</ref> 드라마는 최고 시청률 39.9%, 평균 시청률 30%대를 기록했다.<ref>{{뉴스 인용 |제목=‘아이리스’ 실체 추적하는 감성적 액션 주목하세요… 블록버스터 드라마 ‘아이리스2’ 제작발표회|url=http://news.kukinews.com/article/view.asp?page=1&gCode=kmi&arcid=0006627557&cp=nv|출판사=국민일보|저자=진정희|날짜=2012-11-14|확인날짜=2014-03-05}}</ref> 연기력에 있어서 비교적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으나, 일부에서는 첩보원 역할에 걸맞지 않다는 평도 있었다.<ref>{{뉴스 인용 |제목='멍때리는' 김태희? 연기논란 재점화 |url=http://star.mt.co.kr/view/stview.php?no=2009102914300874627&type=1&outlink=1 |출판사=머니투데이 |날짜=2009-10-29 |확인날짜=2010-01-02}}</ref> 그 해 [[KBS 연기대상]]에서 처음으로 연기력으로 우수연기상을 받았는데,<ref>[http://web.reviewstar.net/news/articleView.html?idxno=220883 김태희, '아이리스'로 연기력 논란 극복하고 상도 받고 눈물 '펑펑']{{깨진 링크|url=http://web.reviewstar.net/news/articleView.html?idxno=220883 }} 리뷰스타 2010년 1월 1일</ref> 이에 대해 “우수연기상은 인기로 받은 인기상이 아닌 연기자로 인정받은 최초의 상이었다. 연기로 인정 못 받고 있다고 그간 생각했다. 항상 마음의 무거운 짐을 갖고 있었다”고 말했다.<ref>{{뉴스 인용|저자1=김지연|제목=김태희 "연기력 논란, 항상 마음의 무거운 짐"|url=http://star.mt.co.kr/view/stview.php?no=2010091500362265489&type=1&outlink=1|날짜=2010-09-15|확인날짜=2015-12-14|뉴스=머니투데이}}</ref> 2010년 1월 김태희는 소속사를 [[나무엑터스]]에서 자신의 형부가 설립한 루아엔터테인먼트로 이적했다.<ref>{{뉴스 인용 |제목=김태희, 1인 기획사 대열 합류… 전 소속사와 협업관계 유지 |url=http://isplus.joins.com/article/article.html?aid=1305720 |출판사=[[일간스포츠]] |날짜=2010-01-11 |확인날짜=2010-01-11}}</ref> 9월 16일에는 영화 《[[그랑프리 (영화)|그랑프리]]》에서 서주희 역할로 출연했다.<ref>{{뉴스 인용|제목=[추석영화열전⑥]'그랑프리' 김태희, 연기논란 잠재우고 흥행퀸 '찜'|url=http://www.asiae.co.kr/news/view.htm?idxno=2010091608154987413|출판사=아시아경제|저자=조범자 |날짜=2010-09-16|확인날짜=2015-07-17}}</ref> 김태희의 연기력은 이전보다 나아졌다며 긍정적인 평가가 있었으나, 16만 명의 관객수를 끝으로 상업적 실패를 거뒀다.<ref>{{뉴스 인용|제목=[울림과스밈] ‘그랑프리 실패’ 김태희에게는 ‘약'|url=http://www.hani.co.kr/arti/culture/movie/442216.html|출판사=한겨레|저자=김진철|날짜=2010-10-05|확인날짜=2015-07-17}}</ref> 11월 22일에는 몇몇 내용을 편집해 만든 《[[아이리스: 더 무비]]》가 개봉했다.<ref>{{웹 인용|제목=씨네21 - 아이리스 더 무비|url=http://www.cine21.com/do/zlgam/detail/main?prodSeq=1623|출판사=[[씨네21]]|날짜=2010|확인날짜=2012-02-29|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160304124525/http://www.cine21.com/do/zlgam/detail/main?prodSeq=1623#|보존날짜=2016-03-04|깨진링크=예}}</ref> 12월 13일에는 《[[아이리스]]》의 스핀오프작 《[[아테나: 전쟁의 여신]]》 1회에 회상신으로 특별 출연했다.<ref>{{뉴스 인용|제목="짧아서 아쉬워"..이병헌·김태희 `아테나` 깜짝 등장|url=http://starin.edaily.co.kr/news/NewsRead.edy?SCD=EA31&newsid=01138166593198520&DCD=A10102|출판사=[[이데일리]] |날짜=2010-12-14|확인날짜=2012-02-29}}</ref>
         2004년 김태희는 헤럴드경제 기업사랑 캠페인 홍보대사로 활동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16&aid=0000148878 'I Love Companies'`기업사랑 캠페인` 본궤도 올랐다] ''헤럴드경제'' 입력일자 2004-09-21</ref> 2005년에는 남편 [[이완 (1984년)|이완]]과 함께 수호천사로 위촉돼 [[독도]] 사랑 캠페인을 벌였고, 같은 해 5월 [[스위스]]에서 친선문화대사로 선정 돼 "독도 우리땅"이라는 문구를 새긴 티셔츠와 리메이크 앨범 등을 나눠주는 활동을 했다.<ref name="광주일보"/><ref>[http://www.myswitzerland.co.kr/etc/entertainer/friends/main.html SWISS FRIENDS 2005] {{웨이백|url=http://www.myswitzerland.co.kr/etc/entertainer/friends/main.html |date=20110813103724 }} 스위스관광청 홈페이지</ref><ref>[http://media.daum.net/society/others/view.html?cateid=1067&newsid=20050217085145988&p=yonhap 김태희, 스위스친선문화대사 선정] 연합뉴스 입력일자 2005.02.17</ref> 이후 2007년 유방암의 위험성을 알리는 핑크리본 홍보대사로 활동을 했고, 7월 22일 부산 [[해운대]]에서 열린 핑크리본 사랑 마라톤 대회에 참여했다.<ref>[http://media.daum.net/entertain/broadcast/view.html?cateid=1032&newsid=20070419123412761&p=SpoChosun 김태희, 유방암 조심하세요 핑크리본 홍보대사] 스포츠조선 입력일자 2007.04.19</ref> 또한 12월에는 [[BC카드]]의 후원을 받아 서울에서 외국인 노동자들을 위한 밥차 배식 봉사활동을 했다.<ref>{{뉴스 인용 |제목=김태희, 밥차 배식 봉사활동 펼쳐|url=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073&aid=0000027316|저자=탁진현|출판사=[[네이버]]|날짜=2007-12-05|확인날짜=2011-09-15}}</ref> 김태희는 2005년부터 메이크어위시 재단의 홍보대사로 활동하기 시작했으며, 2006년에도 난치병 어린이들과 함께 자선 활동을 계속 했다.<ref>{{뉴스 인용 |제목=김태희, 난치병 어린이들과 따뜻한 만남|url=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1&aid=0001846672|저자=김가희|출판사=[[네이버]]|날짜=2006-05-16|확인날짜=2011-09-15}}</ref> 뿐만 아니라 2011년에는 난치병 아동들로 이루어진 메이크어위시 합창단 앨범에 참여했는데, "Make-A-Wish"를 녹음했다.<ref>조성훈 [http://www.gaonchart.co.kr/main/section/hotnews/kpop/view.gaon?idx=527 배우 김태희, ‘메이크어위시 합창단’ 음원 참여] {{웨이백|url=http://www.gaonchart.co.kr/main/section/hotnews/kpop/view.gaon?idx=527 |date=20120316165433 }}, 《[[가온 차트]]》, 2011-09-15 작성. 2011-09-15 확인.</ref>
         2012년 12월 31일 [[디스패치 (대한민국)|디스패치]]는 [[이병헌]]과 [[이민정]]의 열애설을 터뜨림과 동시에 "디스패치가 새해 첫 커플의 사랑 소식을 전해드리겠습니다"라는 말을 남겼고, 2013년 1월 1일 [[이완(1984년)ㅣ이완]]와 김태희가 데이트하는 현장 사진을 올리면서 [[열애설]]을 제기했다.<ref>{{뉴스 인용|제목=김태희-이완 열애설 보도한 ′디스패치′ 덩달아 주목|url=http://www.newspim.com/view.jsp?newsId=20130101000202|출판사=뉴스핌|날짜=2013-01-01|확인날짜=2013-09-12|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131203201303/http://www.newspim.com/view.jsp?newsId=20130101000202#|보존날짜=2013-12-03|깨진링크=예}}</ref> 같은 날 오후 소속사 [[루아엔터테인먼트]]는 아직 만난지 1개월 밖에 안되었고, 알아가는 단계라며 교제설을 인정했다.<ref>{{웹 인용 |제목=김태희, "이완와 만난지 한달…알아가는 단계" 열애 공식 인정
  • 로힝야 . . . . 4회 일치
         2016년 12월 19일, 이 문제에 대한 아웅산 수치의 주변국 외무장관과의 회담과 더불어, 미얀마 정부는 국영 언론을 통하여 작전의 내용을 상세하게 알리는 한편 작전 지역을 공개하고 교도통신, EPA 등 외신도 불렀다.
         2017년 1월 4일, CNN은 2016년 12월 4일 방글라데시로 도피하던 로힝야족 난민 대열에서 1년 6개월 된 아이가 보트 침몰로 비참하게 죽어갔다고 보도했다.
         이에 응하여 2016년 12월 19일, 아웅산 수치는 [[아세안]] 회원국 외무장관을 미얀마 양곤으로 초청하여, 미얀마군 무장세력 토벌작전과 로힝야의 상황을 설명하고, 사태 해결을 위한 협력을 요청했다. 회의가 비공개로 진행되어서 수치가 어떤 발언을 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주변국 외무장관들은 대체로 만족스럽다는 반응을 보였다.
         2016년 12월 29일, 데스몬드 투투 주교와 말랄라 유사프자이 등 노벨상 수상자 22명은 유엔 안보리에 공개서한을 보내서 미얀마에서 벌어지는 인종청소와 반인륜 범죄를 중단시킬 것을 요청하고, 아웅산 수치 정부가 로힝야족에게 시민권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점에 좌절감을 느낀다고 지적했다.
  • 박연우 . . . . 4회 일치
         | 출생일 = [[1959년]] [[12월 2일]]
         '''박연우'''([[1959년]] [[12월 2일]] ~ )는 CJ프레시웨이 대표이사, 가야 대표이사를 역임한 [[대한민국]]의 [[기업인]], [[정치인]]이다.<ref>{{뉴스 인용|제목=네이버 인물검색|url=http://people.search.naver.com/search.naver?where=nexearch&query=%EB%B0%95%EC%97%B0%EC%9A%B0&sm=tab_etc&ie=utf8&key=PeopleService&os=179725|출판사=|날짜=|확인날짜 =2016년 2월 16일}}</ref><ref>{{뉴스 인용|제목=조선일보 인물DB|url=http://cdb.chosun.com/search/db-people/i_service/manDisAllXml.jsp?uci=G010+1-02142007022300395115|출판사=|날짜=|확인날짜 =2016년 2월 16일}}</ref>
  • 박재홍(1941) . . . . 4회 일치
         [[1941년]] [[2월 28일]] ~
         1941년 2월 28일 [[경상북도]] 선산군(현 [[구미시]])에서 [[박정희]] [[대한민국 대통령|대통령]]의 큰형 [[박동희]]의 아들로 태어났다. 대구상업고등학교(현 [[대구상원고등학교]]), [[고려대학교]] [[고려대학교/학부/법과대학|법과대학]] 행정학과를 졸업하였다. 이후 [[백수]]로 있다가 [[박태준]]의 도움으로 [[포스코|포항종합제철]]의 중간간부를 역임하다가, 동양철관(주)의 사장, 회장을 역임하였다.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구미시 지역구 공천이 [[박세직]]에게 밀려 [[민주자유당]] [[전국구]]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다. 1994년부터 1995년까지 [[대한민국 국회]] 교통위원장을, 1995년부터 1996년까지 대한민국 국회 건설교통위원장을 역임하였다. 1996년 초 [[신한국당]]을 탈당하여 [[자유민주연합]]에 입당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 치러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박준홍 대신 자유민주연합 후보로 경상북도 구미시 갑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신한국당 박세직 후보에게 밀려 낙선하였다.
  • 박홍 (신부) . . . . 4회 일치
         |출생일 = [[1941년]] [[2월 27일]]
         '''박홍'''(朴弘, [[1941년]] [[2월 27일]], [[대구광역시]])은 [[대한민국]]의 교육자이며 [[천주교]] [[예수회]] 소속 성직자이다. [[천주교]] 신부로서 정치 관여 발언을 많이 했고, 서강대 총장을 지냈으며 [[극우 반공주의|반공주의]], [[보수주의]] 성향의 언론인이기도 했다. [[1994년]] [[주사파]] 발언으로 화제가 되었다.
         강기훈은 법원으로부터 목격자 등 직접적인 증거도 없이 국과수의 필적 감정결과와 정황에 따라 자살방조 및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3년에 자격정지 1년 6월을 선고받고 [[1994년]] [[8월 17일]] 만기 출소했으나 사건 발생 16년 만인 [[2007년]] [[11월 13일]] [[대한민국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는 제58차 전원위원회 회의에서 ‘강기훈 유서대필 의혹사건’에 대한 진실규명 결정을 내리고 국가의 사과와 재심 등의 조치를 취할 것을 권고했다.<ref name=gg>{{웹 인용|url=http://www.jinsil.go.kr/Information_Notice/article2/readnum.asp?num=84&pageno=1&stype=&sval=&data_years=2007&data_month|제목=강기훈 유서대필의혹 사건 진실규명결정|출판사=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저자=정책홍보팀|날짜=2007-11-13|확인날짜=2012-04-29}}{{깨진 링크|url=http://www.jinsil.go.kr/Information_Notice/article2/readnum.asp?num=84&pageno=1&stype=&sval=&data_years=2007&data_month }}</ref> 이에 따라 2012년 대법원의 재심이 개시되었으며, 2014년 2월 13일 재심 판결에서 서울고등법원은 당시 검찰이 제시한 필적 감정이 신빙성이 없으며, 유서 대필 및 자살 방조에 대해 무혐의·무죄로 재판결하였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9&aid=0003137599</ref><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32&aid=0002441789</ref>
         박홍 총장의 발언 이후 공안정국이 조성되며 [[우루과이라운드]] 반대 시위는 소강상태에 접어들고 그해 12월 국회에서 [[WTO]] 비준안이 국회를 통과한다.
  • 송지효 . . . . 4회 일치
         '''송준효'''([[1606년]] [[12월 27일]] ~ )는 [[조선]]의 [[부인]]이다.
         * [[2004년]] [[10월 8일]], [[2007년]] [[4월 23일]], [[2007년]] [[12월 17일]] [[SBS]] 《[[야심만만]]》 80회, 208회, 240회
         * [[2007년]] [[12월 7일]] [[MBC DRAMA]] 《[[삼색녀 토크쇼]]》 55회
         * [[2010년]] [[4월 29일]] ~ [[2011년]] [[2월 24일]] [[SBS]] 《생방송 [[한밤의 TV연예]]》 진행자 ([[서경석 (희극인)|서경석]]과 함께)
  • 송진현 . . . . 4회 일치
         1981년 서울민사지방법원 판사에 임용되어 1983년 서울형사지방법원, 1985년 [[춘천지방법원]] 속초지원 지원장, 1987년 [[서울가정법원]], 1988년 [[서울고등법원]]에서 판사를 하다가 1991년 대법원 재판연구관을 거쳐 1992년 [[대구지방법원]] 1994년 서울지방법원 의정부지원, 1996년 서울지방법원 서부지원, 1997년 서울지방법원, 2000년 2월 [[대전고등법원]], 2001년 2월 [[서울고등법원]]에서 부장판사를 하였다. 2005년 11월에 [[서울중앙지방법원]] 민사수석 부장판사가 되었으며 2006년 6월에 법원장으로 승진하여 [[서울동부지방법원]], 2008년 2월 [[서울행정법원]]에서 법원장을 하다가 2009년 2월에 사직하고 법무법인 로고스에서 변호사를 하였다. 보건의료직능발전위원회 위원장 등을 하면서 변호사를 하고 있을 무렵인 2015년 8월 [[박근혜 정부]]에서 제10대 [[경찰위원회]] 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중앙행정심판위원회 자문위원을 겸직하였다.
  • 신혜성 . . . . 4회 일치
         05. 12월의 끝<br />
         * [[12월 7일]] [[골든디스크]] 본상
         * [[12월 29일]] [[SBS 가요대전]] 본상
         * [[12월 14일]] [[골든디스크]] 본상
  • 윤덕주 (농구인) . . . . 4회 일치
         * [[1999년]] [[2월 11일]] [[대한농구협회]] 명예회장<ref>[http://sports.news.naver.com/sports/index.nhn?category=kbl&ctg=news&mod=read&office_id=001&article_id=0004425319 대한농구협회, 최희암감독 사면 복권]</ref>
         * 아버지 : [[윤홍열 (1893년)|윤홍열]](尹洪烈, [[1893년]] ~ [[1947년]] [[2월 19일]])
         *** 외사촌동생 : [[이열희 (1924년)|이열희]](李烈熙, [[1924년]] [[12월 18일]] - [[2012년]] [[8월 9일]]), 치과의사, 구강성형외과 의사
         * [[1997년]] [[2월]] [[대한올림픽위원회]] 공로상
  • 이동춘 . . . . 4회 일치
         |은퇴 = 1995년
         '''이동춘'''(李東春, Dong-Chun Lee, [[1963년]] [[3월 8일]] ~ [[1995년]] [[9월 9일]])은 [[대한민국]]의 전 [[권투]] 선수로, 한국과 일본에서 활동했다. 일본명은 '''그레이트 가나야마'''(グレート 金山)이다.
         통산 전적은 57전 45승(26KO) 2무 10패이며, [[1995년]] [[9월 5일]] [[도쿄도]] [[고라쿠엔 경기장]]에서 벌어진 [[세가와 세쓰오]]와의 경기에서 판정패한 뒤 급성 [[경막하혈종]]으로 쓰러져 4일 후인 [[9월 9일]] 사망했다.<ref>{{뉴스 인용|제목=韓國프로복싱선수,日링서 쓰러져 사망서|url=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4&oid=001&aid=0003925974|출판사=연합뉴스|저자=|날짜=1995-09-10}}</ref>
         [[분류:1963년 태어남]][[분류:1995년 죽음]][[분류:대한민국의 권투 선수]][[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분류:경기 중 사망한 권투 선수]]
  • 이병후 . . . . 4회 일치
         경상북도 영천 출신으로 1957년 [[영남대학교]]를 졸업하고 제8회 고등고시 사법과에 합격해 1958년 12월 17일 대구지방법원 판사에 임명되어 자유당 후보를 당선시키려고 야간에만 개표를 했던 대구병구 올빼미 개표사건, 팔공산에서 생포한 대남 간첩사건 등에서 배석판사로 심리하는 등<ref>동아일보 1959년 4월 4일자</ref><ref>동아일보 1958년 12월 17일자</ref>1961년 8월 27일 대구지방법원<ref>동아일보 1961년 8월 27일자 1964년 5월 19일자</ref> 1966년 11월 15일 대구고등법원 1967년 대법원 재판연구관 1969년 3월 31일 서울고등법원 1969년 10월 7일 부산지방법원 마산지원장 1971년 4월 1일 부산민사지방법원 1973년 3월 27일 서울민사지방법원 서울형사지방법원, 성동지원장, 1974년 성북지원장을 거쳐 1976년 12월 29일 서울고등법원<ref>동아일보 1976년 12월 30일자</ref> 1977년 11월 5일 서울고등법원<ref>매일경제 1977년 11월5일자</ref> 1980년 영등포지원장 1981년 4월 20일 수원지방법원장<ref>매일경제 1981년 4월 21일자</ref> 1982년 3월 12일 대전지방법원장<ref>경향신문 1982년 3월12일자</ref> 1983년 8월 12일 인천지방법원장<ref>경향신문 1983년 8월 12일자</ref><ref>동아일보 1986년 4월 3일자 매일경제 1966년 11월 16일자 경향신문 1969년 3월 31일자 동아일보 1969년10월7일자 매일경제 1971년 3월 26일자 경향신문 1973년 3월 27일자</ref>을 거쳐 1986년 4월 16일에 [[전두환]] 대통령에 의해 대법원 판사에 임명되었다. 1987년 대법원이 상고허가 신청사건의 처리를 전담하는 상고허가신청부를 신설하면서 [[정기승]] [[황선당]]과 함께 전담 판사로 구성되었으며<ref>매일경제 1987년 1월 5일자</ref> 1987년 5월 18일에 대법원장 추천으로 [[헌법위원회]] 위원에 임명되었다.<ref>동아일보 1987년 5월 16일자 매일경제1986년4월3일자</ref>
  • 이상백 (1904년) . . . . 4회 일치
         광복 직후에도 [[여운형]]의 [[건국준비위원회]]에 활동하였다. 건준의 해산 이후 별다른 정치적 입장표명은 하지 않았고 [[1945년]] [[9월]] [[조선 체육 동지회]]를 결성하여 회장에 취임, 본격적인 체육단체 조직 및 체육경기 활성화를 위해 노력하였다. 이해 [[12월]] [[조선 체육회]] 상무이사가 되었다. 그 뒤 IOC 가입을 목표로 활동하였으며, 반탁 시위에 휘말리지 않고 IOC 가입 문제를 논의하였다. [[1946년]] 초 IOC 가입 대책 위원회를 조직하고 부위원장에 위촉되었다.
         그가 죽은 이후 바로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국민훈장 모란장이 추서되고, [[1966년]] 8월에 [[일본]] 정부로부터 훈삼등 욱일중수장을 추서받았으며, [[1970년]] 12월에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대한민국의 훈장#국민훈장(國民勳章, Order of Civil Merit)|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추서받았다.
         *** 사촌 매부 : [[윤홍열 (1893년)|윤홍열]](尹洪烈, [[1893년]] ~ [[1947년]] [[2월 19일]]), [[남조선과도입법위원회]] 의원과 [[대구시보]]사 사장 역임 - [[윤필오]]의 아들
         **** 5촌 조카 : [[이열희 (1924년)|이열희]](李烈熙, [[1924년]] [[12월 18일]] ~ [[2012년]] [[8월 9일]])
  • 이승현(농구선수) . . . . 4회 일치
         '''입단 2년차에 오리온 포워드 농구의 핵심전력이자 KBL의 두목으로 거듭나다''' --2015-16 시즌 농구기자들의 연민의 대상--[* 외국인 선수 수비가 되기에 국가대표로 차출되어 출전하지 못한 1라운드를 제외하고는 전 경기에 나서서 추일승의 노예로 장신 외국인 선수들을 수비했다. 2월 22일자 바스켓카운트에서 기자들이 노가다 수당이라도 줘야 되는게 아니냐며 동정하는 모습이었고 이는 정규시즌 시상식 최우수수비상으로 돌아오게 된다. 그리고 플레이오프에서도 외국인 선수들과 하승진을 마크하면서도 그 선수들을 끌어내느라 3점까지 던져가면서 온갖 개고생을 한 공로를 인정받아 15-16 PO MVP를 받게 된다!!]
         2월 초 부상에서 복귀하였는데, 수비는 여전하지만 공격에서 컨디션이 올라오지 않은 모습을 보여줘 팬들의 우려를 사기도 했다. 하지만 2월 15일 삼성과의 홈경기에서 개인통산 한 경기 최다 득점인 33점을 쓸어담는 활약을 선보여 자신이 왜 KBL의 두목인지를 스스로 증명해보였다. 이 경기를 승리함으로써 선두권과의 격차를 한 경기로 좁혔다.
          * 2016년 12월 4일 [[서울 삼성 썬더스|삼성]]전 승리 직후 벤치에서 홈경기 승리를 축하하는 에어샷(폭죽)에 얼굴을 강타당하는 아찔한 상황이 연출되었다. 이 충격으로 얼굴에 찰과상을 입긴 했지만 다행히 큰 부상은 없었고 오히려 자신으로 인해 구단 측이 피해를 입지 않을까 미안함을 전했다.
  • 이인 . . . . 4회 일치
         [[1939년]] [[12월 18일]] 정동의 [[이화여전]] 강당에서 80여 명의 관계자들이 모인 가운데 후원회 창립총회가 개최되었다. 여기에서 12개조의 후원회 장정을 통과시키고 25명의 위원을 선출했다.<ref name="양현혜1">양현혜, 《빛과 소망의 숨결을 찾아》 (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 2007) 104페이지</ref> 이인도 이화여전 후원회 위원의 한사람으로 선출되었다.<ref name="양현혜1"/>
         * [[1945년]] [[12월 1일]] 임시정부 봉영식에 참석하였다. 서울그라운드에서 윤보선의 사회로 임시정부 봉영식이 시작되었다. 이어 [[오세창]]의 개회사, 이인의 봉영문 낭독, [[권동진]]의 만세삼창으로 이어졌다. 봉영문은 [[권동진]], [[김성수 (1891년)|김성수]], 이인을 통해 [[김구]]에게 전달되었다.<ref>아 비운의 역사현장 경교장(백범사상실천운동연합, 1993), 145페이지</ref>
         * 제헌 국회 의원 당시 법제사법위원회 위원장([[1949년]] [[12월 21일]] ~ [[1950년]] [[5월 30일]])
         |임기 = [[1949년]] [[6월]]<ref>전임자인 [[장면]]이 1949년 2월에 주미국 대사로 부임하고, 1949년 3월에 종로구 을 선거구에 대한 보궐선거가 치러졌으며 이인은 1949년 6월 5일 법무부장관에서 해임되었으므로 임기가 1949년 6월경에 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ref> ~ [[1950년]] [[5월 30일]]
  • 이종희 (1942년) . . . . 4회 일치
         이종희는 [[1969년]] 대한항공 공채 1기로 입사해 말단 직원에서 총괄사장 자리에 오르며 '샐러리맨의 신화'로 평가받는다. 출범 당시 대한항공은 아시아의 작은 지역항공사에 불과했지만 현재는 글로벌 톱10으로 세계적인 대형 항공사로 성장했다. 그동안 이종희는 [[대한항공]]의 성장 과정에서 40년 한국 민항 역사의 산증인 역할을 했다. 그는 경영학과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정비분야로 입사해 30여년간 정비 자재 기획 영업 등 항공사의 전문경영인이 되는 데 필요한 업무를 두루 섭렵한 '테크노 경영인'이다. 특히 여객 영업에만 20여년간 몸 담은 여객영업 분야 전문가로서 신규 노선 개척 및 세계 항공사와 제휴 업무를 주도적으로 맡아왔다. [[대한항공]]은 [[2009년]] [[12월]] 말 인사에서 이종희를 대한항공 상임고문으로 추대했다. 이로써 대한항공 대표이사는 조양호 대한항공 회장, 이종희 대한항공 고문과 서용원 부사장 3인의 각자 대표로 변경됐다. .<ref>{{뉴스 인용|url=http://www.mt.co.kr/view/mtview.php?type=1&no=2010022517362982441&outlink=1|제목=대한항공, "앞으로 3인 대표이사 체제"
         * [[2009년]] [[12월]] ~ 대한항공 고문, 대한항공점보스 프로배구단 구단주
         * [[2006년]] 1월 ~ 2006년 2월 자유민주연합 특임행정위원
         * [[2004년]] ~ [[2009년]] [[12월]] 대한항공 총괄담당 대표이사 사장
  • 이채영(fromis_9) . . . . 4회 일치
          * 2017년 12월 9일, 개인 V LIVE [[http://www.vlive.tv/video/51490?channelCode=D5E529|<MIND MAP> 8교시 채영영역]]을 진행했다.
          * 2018년 2월 14일, 발렌타이 데이 기념 동영상 [[http://www.vlive.tv/video/59470/playlist/59488|Happy Valentine Day #채영]]이 공개되었다.
          * 2018년 2월 20일 공식 페이스북을 통해 [[이나경(fromis_9)|이나경]]에게 보내는 릴레이 교환일기 [[https://www.facebook.com/officialfromis9/videos/356241118117753/|#7. CHAEYOUNG → NAGYUNG]]이 공개되었다.
          * 2018년 2월 5일 학교 등교길에 한 V앱에서 등교할 때는 숙소 근처 카페에서 빵과 커피로 아침으로 먹는다고 한다.[* 근데 당일에는 차가 막히는 바람에 카페도 못가고 지각 인증....~~댓글 왈 : 국내 아이돌 최초 학교 지각 인증~~]
  • 이효상 . . . . 4회 일치
         '''이효상'''(李孝祥, [[1906년]] [[1월 14일]] [[경상북도|경북]] [[대구광역시|대구]] - [[1989년]] [[6월 18일]])은 [[대한민국]]의 정치인, 교육자, 철학자, 시인이다. 제5~7대, 제9~10대 국회의원을 역임하였으며, 1963년 12월부터 1971년 6월까지는 7년 6개월 간 [[국회의장]](6대~7대)을 역임했다. 이는 역대 국회의장 중 최장 재임기간이다. [[로마 가톨릭교회]] 신자이고 세례명은 아길로이다. 본관은 [[성산 이씨|성산]]이며 아호는 한솔이다.
         |임기= [[1963년]] [[12월 17일]] - [[1971년]] [[6월 30일]]
         |임기 = [[1973년]] [[3월 8일]] ~ [[1979년]] [[2월 19일]]
         |임기 = [[1963년]] [[12월 17일]] ~ [[1967년]] [[6월 30일]]
  • 임혁주 . . . . 4회 일치
         * 1995년 [[한국방송공사|KBS]] - 《[[한명회 (드라마)|한명회]]》 - [[구치관]] 역
         * 1995년 [[한국방송공사|KBS]] - 《[[서궁]]》 - [[임해군]] 역
         * 1995년 [[문화방송|MBC]] - 《[[제4공화국 (드라마)|제4공화국]]》 - [[이학봉]] 역
         * 1995년 [[한국방송공사|KBS]] - 《[[찬란한 여명]]》 - [[김홍집 (1842년)|김홍집]] 역
  • 장우혁 . . . . 4회 일치
         장우혁은 [[1990년]]대를 풍미했던 최고의 그룹 [[H.O.T.]]의 맴버로써 활동하다가, 해체 이후 [[jtL]]을 거쳐 [[2005년]] 솔로 가수로 전향했다. 댄스계의 전설이라 불릴 만큼 최고의 춤꾼으로 각광받던 그가 아이돌 스타의 이미지를 탈피, 강한 남자로의 변신을 꾀한 솔로 1집 《No More Drama》은 '''''지지 않는 태양''''', '''''Flip Reverse''''', '''''Red Sun''''' 등 다수의 곡을 히트시키며 성공적인 홀로서기라는 평가를 얻어냈다.2018년 2월 15일 hot완전체가 재결합을 했다.
         ** [[12월 24일]] [[SBS TV|SBS]] 《[[인기가요]]》 1위
         * [[2001년 12월]] ~ [[2004년 7월]] : 그룹 [[JTL]] 멤버
         * [[2006년 2월]] : 서울대어린이병원후원회 블루캠페인 수호천사
  • 정명환 . . . . 4회 일치
         * 1995년 KBS 《[[내 사랑 유미]]》
         * 1995년 SBS 《[[모래시계 (드라마)|모래시계]]》 ... 박창민 역
         * 1995년 SBS 《[[코리아게이트 (드라마)|코리아게이트]]》 ... 남효주 역
         * 1995년 MBC 《[[두 아빠]]》
  • 정승화(육군) . . . . 4회 일치
         5.16 쿠데타 이후 군사정권, 3공화국, 4공화국을 거치면서 계속 승승장구했다. [[제7보병사단]][[사단장|장]], [[대한민국 국방부|국방부]] 인사국장, [[제3군단]][[군단장|장]], 육군사관학교 [[교장]], [[제1야전군사령관]]을 역임한 이후에 [[1979년]] [[2월]] [[육군참모총장]]으로 영전했다. 여담으로 당시 정승화는 [[김대중]]에게 부정적이라 그가 당선되어도 용인하지 않겠다는 편파적 발언을 하기도 했으나 여하간 직접적으로 정치에 개입하는 시도는 없었다.
         1995년에는 [[대한민국 전직 대통령 구속 사건]]이 87년에 제정된 헌법이후 최초로 발생하자 증인으로 채택되어 증언하였다. 그의 기대대로 [[전두환]]은 [[대법원]]에서 [[사형]] 선고를 받아 평생의 한을 푸는 듯 했으나, 1997년 12월 22일 [[김영삼]] 대통령과 [[김대중]] 차기 대통령의 합의(?)에 따라 전두환, 노태우가 [[특별사면]] 혜택을 받아 풀려나자 "반성도 하지 않는 사람들을 그래도 풀어준다니 이 나라가 진정으로 법치주의 국가입니까?" 라며 강한 분노를 표시했다.
         [[문화방송]]의 드라마 [[제4공화국(드라마)|제4공화국]]에서는 MBC 성우 [[정승현]]씨가, [[SBS]]의 드라마 [[코리아게이트(드라마)|코리아게이트]]에서는 MBC 성우 [[최병학]]씨가,[* 이후 [[제5공화국(드라마)|제5공화국]]에서는 12.12 직후 신군부의 지지로 [[국방장관]]이 되어 [[5.17 내란]]에 동조한 [[공군참모총장]] 출신의 [[주영복]] 역할로 출연했다.] [[제5공화국(드라마)|제5공화국]]에서는 배우 [[박인환(배우)|박인환]]씨가 정승화 역을 맡았다. 영화 [[그때 그 사람들]]에선 정종준씨가 분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정종준은 1995년 [[코리아게이트(드라마)|코리아게이트]]에서는 정승화 체포령을 내린 [[전두환]] 역으로 출연했다.] 영화 자체가 블랙코미디이다 보니 꽤나 우유부단하고 코믹하게 나오는데 육군본부 앞에서 자신을 못알아보는 초병에게 내가 육군참모총장이라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씬은 이 영화의 백미. 영화 속 설정상 여자에는 사족을 못 쓰는 것은 덤.
  • 정정아 . . . . 4회 일치
         |활동기간= [[1995년]] ~ 현재
         '''정정아'''([[1977년]] [[2월 13일]] ~ )는 [[대한민국]]의 [[배우]]이자 [[희극 배우|희극인]]이다.
         [[대한민국]] [[경상북도]] [[포항시]]에서 출생한 그녀는 [[1995년]] [[연극배우]] 첫 데뷔하였고 이듬해 [[1996년]] [[뮤지컬 배우]] 데뷔하였으며 그녀의 현재 거주지는 [[대한민국]] [[경상북도]] [[대구광역시|대구시]]이다.
         [[분류:1977년 태어남]][[분류:대한민국의 여자 희극인]][[분류:대한민국의 여자 연극 배우]][[분류:대한민국의 여자 영화 배우]][[분류:대한민국의 여자 뮤지컬 배우]][[분류:비디오 자키]][[분류:대한민국의 여자 텔레비전 배우]][[분류:1995년 데뷔]][[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포항시 출신]][[분류:세종대학교 대학원 동문]]
  • 정창영 (공무원) . . . . 4회 일치
         [[대한민국 감사원|감사원]] 사무총장을 지냈으며, [[2012년]] [[2월 6일]]에 [[한국철도공사]] 사장으로 취임해 [[2013년]] [[6월 17일]] 물러났다.
         |임기 = [[2009년]] [[7월 22일]] ~ [[2009년]] [[12월 16일]]
         |임기 = [[2009년]] [[12월 16일]] ~ [[2011년]] [[7월 21일]]
         |임기 = [[2012년]] [[2월 6일]] ~ [[2013년]] [[6월 17일]]
  • 최준석 . . . . 4회 일치
         || '''생년월일''' || [[1983년]] [[2월 15일]] ([age(1983-02-15)]세) ||
         11월 29일, 일본 돗토리 현에서 개인훈련 중이며 12월 초에 협상 테이블을 갖겠다고 한다.
         협상이 난항을 겪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진 가운데, 12월 4일 롯데 구단 측은 최준석, [[이우민]] 두 선수가 다른 구단과 계약할 경우 보상선수를 받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http://sports.khan.co.kr/sports/sk_index.html?art_id=201712041422003|관련 기사]]
         결국 2018년 2월 11일, 이전에 했던 말을 번복하고 조건없는 사인 앤 트레이드로 NC행이 결정되었다. 연봉은 본인이 말했던 5천만에 근접한 5,500만 원. [[http://sports.news.naver.com/kbaseball/news/read.nhn?oid=311&aid=0000821910&redirect=false|김경문 감독의 요청이 있었다고 한다]]. 이렇게 2014년 두산의 FA [[최준석|3]][[이종욱(야구선수)|인]][[손시헌|방]]이 모두 NC에서 김경문 감독과 재회하게 되었다. 허나 NC 팬덤은, [[리빌딩]]을 천명하면서 이종욱, 손시헌과 저렴한 금액에 재계약하고 [[조영훈]], [[김종호(야구선수)|김종호]]를 내쳐놓고는 최준석 영입이 말이 되느냐는 반응.
  • 추미애 . . . . 4회 일치
         정계에 입문하기 전에는 법원에서 10여년 간 판사로 일했고, 1995년 [[김대중]] 전 대통령[* 당시 김대중은 대통령에 당선되기 전으로 야당이었던 [[새정치국민회의]]의 총재였다.]에 의해 스카웃되어 정계에 입문했다. 현 소속 정당은 [[더불어민주당]], 지역구는 [[서울특별시]] [[광진구 을]]이다.
         판사 생활 10년 차이던 1995년, 추미애는 법원에 사표를 내고, 정계에 입문하여 이후의 삶은 [[정치인]]으로서 살아가게 되는데, 정치인이 된 이후의 생애는 아래 '정계 활동' 문단에서 서술한다.
          * [[1995년]] [[광주고등법원]] 판사
          * 2018년 2월 4일 방송된 [[KBS]] 2TV 예능 프로그램 [[1박 2일]]의 황금개띠해 특집 편에 [[개띠]] 인물 중의 한 명으로 잠깐 출연해[* 추미애 의원이 개띠라고 한다.] [[김준호(개그맨)|김준호]] 등 1박 2일 멤버들을 만났다.[[http://www.osen.co.kr/article/G1110827895|#]]
  • ℃-ute . . . . 3회 일치
          * [[야지마 마이미]](矢島舞美) : 1992년 2월 7일 생, O형, 출신지 [[사이타마현]]
          * [[나카지마 사키]](中島早貴) : 1994년 2월 5일 생, O형, 출신지 [[사이타마현]]
          * [[하기와라 마이]](萩原舞) : 1996년 2월 7일 생, AB형, 출신지 [[사이타마현]]
  • 강기웅 . . . . 3회 일치
         '''강기웅'''(姜起雄, [[1964년]] [[2월 25일]] ~ )은 전 [[KBO 리그]] [[삼성 라이온즈]]의 [[내야수]]이자, 현 [[KBO 리그]] [[삼성 라이온즈]]의 BBArk 타격코치이다.
         2루수 부문 [[한국 프로 야구 골든 글러브 수상자 (2루수)|골든 글러브]]를 세 차례(1989, 1990, 1993) 차지했다. [[유격수]] [[류중일]] - 2루수 강기웅의 키스톤 콤비는 [[KBO 리그]] 역사상 가장 좋았던 콤비 중 하나로 인정받고 있다. 거꾸로 쳐도 3할이라는 천재적 타격을 자랑했으나, 약한 체력이 단점이었다.<ref>[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366872 5연타석 홈런의 천재 2루수 강기웅] - 오마이뉴스</ref> 통산 타율 0.292로 선수 생활을 마감하였다. 실업야구팀 한국화장품에서 선수 생활을 하고 있었던 [[1988년]] [[10월 25일]]에 [[우리은행|상업은행]]과의 경기에서 세계 최초 5연타석 홈런을 기록한 적이 있다. [[1995년]] [[5월 13일]] 대전에서 [[한화 이글스]]와의 대구에서 1루수 [[이승엽]]과 충돌하여 입은 발목부상이 악화되어 내리막길을 걸었고, 부상 등의 이유로 [[백인천]] 감독과 불화를 일으켜 [[백인천]] 감독이 그를 [[1996년]] 시즌 후 외야수 이희성, 투수 최광훈을 상대로 [[현대 유니콘스]]에 트레이드했으나, 그는 삼성이 아닌 다른 팀에서는 뛸 이유가 없다고 의사를 밝혀 트레이드를 전격 거부하고 [[1997년]] 2월에 현역에서 물러났다.<ref>[http://news.hankooki.com/ArticleView/ArticleViewSH.php?url=baseball/201102/sp2011020917031657360.htm&cd=2101&ver=v002 명품 2루수 강기웅] - 한국일보</ref> 은퇴 후 유통업에 종사했다. 은퇴 때 그는 “심장에 푸른 피가 도는데 어떻게 유니콘스 옷을 입을 수 있었겠느냐”라는 말을 남겼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7&oid=295&aid=0000000356 천재 강기웅의 인생 유전] - 박동희 칼럼</ref> [[2011년]] [[8월 10일]]에 타격코치로 선임되어 친정 팀에 돌아왔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7&oid=001&aid=0005206016 삼성, 2군 타격코치로 강기웅 씨 영입] - 연합뉴스</ref>
  • 곽결호 . . . . 3회 일치
          | 임기 = 2004년 2월 18일 ~ 2005년 6월 28일
         |임기 = [[2003년]] [[3월 3일]] ~ [[2004년]] [[2월 17일]]
         |임기 = [[2004년]] [[2월 18일]] ~ [[2005년]] [[6월 28일]]
  • 구본홍 . . . . 3회 일치
         * 1993년 4월 ~ 1995년 8월 : MBC 보도국 정치부 부장
         * 1995년 8월 ~ 2000년 3월 : MBC 해설위원
         * 2007년 12월 : 제17대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자문위원
  • 김덕현 (변호사) . . . . 3회 일치
         '''김덕현'''(金德賢, [[1958년]] [[2월 18일]] ~ )은 [[대한민국]]의 변호사이다.
         김덕현은 판사 출신으로 [[1986년]] 변호사로 개업한 뒤 여성변호사회 회장, 대한변호사협회 여성문제연구실무위원장, 한국에이즈퇴치연맹 이사, 국가인권위원회 위원 등을 거쳤다.<ref>김효섭.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81&aid=0000011071 전원위원회 구성 어떻게]. 서울신문. 2004년 8월 25일.</ref> <ref>강충식.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81&aid=0000033227 (‘로스쿨’로 뛰는 대학들) (1)한양대]. 서울신문. 2005년 2월 28일.</ref> <ref>심규석.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1&aid=0001323957 <헌법재판관 5인 교체 앞두고 하마평 무성>(종합)]. 연합뉴스. 2006년 6월 11일.</ref> <ref>이하나. [http://www.womennews.co.kr/news/54417 네 번째 여성 대법관 탄생하나]. 여성신문. 2012년 8월 17일.</ref>
         대한민국 16대 대통령 [[노무현]]이 국회로부터 탄핵을 당했을 때 변호인단의 일원이었다.<ref>백기철.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11&oid=028&aid=0000051186 노무현 - 변호인단 첫 상견례]. 한겨레. 2004년 3월 22일.</ref> 배우 [[최진실]]이 가정폭력 피해자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광고주로부터 손해배상청구소송을 당했을 때 그 변호인단의 일원으로서 활동하였다.<ref>김태훈.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22&aid=0000069022 최진실씨 변호인단 매머드급]. 세계일보. 2004년 12월 14일.</ref>
  • 김정호 (1949년) . . . . 3회 일치
         '''김정호'''(金正鎬, [[1949년]] [[2월 15일]] ~ , [[대구광역시|대구]])는 대한민국의 공무원이다.
         * 1995년 : 주 제네바 대표부 참사관
         * 1995년 : 황조근정훈장
  • 김형렬 (1959년) . . . . 3회 일치
         * 대구영선초등학교(1965년 3월 ~ 1971년 2월)
         * 대구중학교(1971년 3월 ~ 1974년 2월)
         * 대륜고등학교(1974년 3월 ~ 1977년 2월)
  • 김형철 (가수) . . . . 3회 일치
         |출생일 = [[1961년]] [[2월 18일]]
         '''김형철'''([[1961년]] [[2월 18일]] ~ [[2007년]] [[4월 2일]])은 [[대한민국]]의 [[가수]]이다.
         * [[영신고등학교 (대구)|경상북도 대구 영신고등학교]] [[졸업]](1979년 2월)
  • 김혜옥 . . . . 3회 일치
         * [[1995년]] [[서울방송|SBS]] 주간시트콤 《[[LA아리랑]]》
         * [[1995년]] [[MBC]] 대하드라마 《[[제4공화국 (드라마)|제4공화국]]》 ... [[박흥주]]의 처 김묘춘 역
         * [[1995년]] [[EBS]] 어린이드라마 《[[언제나 푸른 마음]]》 ... 경화 어머니 역
  • 박기환(정치인) . . . . 3회 일치
         1948년 12월 25일 ~
         1995년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경상북도 포항시장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97년 [[제15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민주당의 후신 [[통합민주당(1995년)|통합민주당]]이 [[신한국당]]에 흡수되어 [[한나라당]]이 되자 한나라당에 속하였다.
  • 박동진 (1922년) . . . . 3회 일치
         1951년 외무부에 들어와, 의전국장, 주 영국 참사관, 외무부차관, 주 월남 대사, 주 브라질 대사(1962년 10월~1968 2월)<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62082100329201006&editNo=6&printCount=1&publishDate=1962-08-21&officeId=00032&pageNo=1&printNo=5173&publishType=00020 브라질 大使에 朴東鎭氏] 《경향신문》1962년 8월 21일, 1면. <!--“最高會議 第63次 常任委員會는 21日 越南共和國駐箚大使 朴東鎭氏를 「브라질」合衆國特命全權大使로,...”--></ref><ref>{{서적 인용 |저자 = 외교통상부 |제목 = 한국 외교 60년 |url = http://www.mofat.go.kr/state/publication/history60/20100201/11369_file_2009%20dip60_appendix.pdf |장 = 부록 |확인날짜 = 2015년 2월 21일 |보존url = https://web.archive.org/web/20160303211841/http://www.mofat.go.kr/state/publication/history60/20100201/11369_file_2009%20dip60_appendix.pdf |보존날짜 = 2016년 3월 3일 |깨진링크 = 예 }}</ref>{{Rp|496}}, 페루 겸임대사<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64042900209201015&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64-04-29&officeId=00020&pageNo=1&printNo=13079&publishType=00020 朴東鎭브라질大使 駐『페루』大使兼任]〉 《동아일보》(1964년 4월 29일) 1면 <!--“政府는 駐「브라질」大使朴東鎭씨를 駐「페루」大使도 겸임토록 28일하오 國務會議에서 議決했다.”--></ref>, 주 제네바 대사, 주 유엔 대사, 1975년부터 1980년까지 외무부 장관, 국회의원(11대.12대), [[대한민국 통일부|국토통일원]] 장관을 역임했다. 외무부장관으로서, 1976년 3월 말레이시아를 방문하여, 리타우딘 말레이시아 외무부 장관과 양국간의 경제무역관계를 더욱 강화하기로 합의했다.<ref>{{뉴스 인용 |url =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76031900329201017&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76-03-19&officeId=00032&pageNo=1&printNo=9377&publishType=00020 |제목= 貿易強化에 합의...韓․말聯 공동성명 |출판사 = 경향신문 | 날짜 = 1976-03-19 |인용문=<!--朴東鎭외무부장관과 리타우딘 말레이시아외상은 19일 공동성명을 발표, 평화․자유․번영이라는 공동목표를 추진하기 위해 아시아 제국간의 협력의 중요성을 인정하고 양국간의 경제무역관계를 더욱 강화하기로 합의했다. 朴장관은 지난 17일부터 3일간 말레이시아를 공식 방문한 후 발표한 이 성명에서...--> }}</ref> 1988년 4월 22일 한국 정부는 박동진을 주미대사에 임명하였다.<ref>{{뉴스 인용 |url = http://dna.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8042200209201007&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88-04-22&officeId=00020&pageNo=1&printNo=20477&publishType=00020| 제목 = 駐美大使 朴東鎭씨| 날짜 = 1988-04-22| 출판사 = 동아일보}}</ref> 박동진은 당시 민정당의 전국구 국회의원이었으나, 주미대사로 부임함에 따라 의원직을 사퇴하였고, 민정당 전국구 예비후보 11번인 김종열이 5월 13일자로 의원직을 승계하였다.
         |임기 = [[1975년]] [[12월 19일]] ~ [[1980년]] [[9월 1일]]
  • 박정근 (법조인) . . . . 3회 일치
         * 서울고등법원 형사부에서 배석판사로 있던 1968년 12월 5일에 [[동백림 사건]] 항소심에서 정규명 정하용에 대해 대법원이 파기환송하기 전의 서울고등법원 판결대로 반공법 잠입,탈출죄 등을 적용해 사형을 선고했다.<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68120500209201019&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68-12-05&officeId=00020&pageNo=1&printNo=14509&publishType=00020]</ref>
         * 서울고등법원 형사2부 재판장으로 재직하던 1973년 4월 27일에 연인인 카바레 종업원에게서 사업자금 145만원을 빌렸다가 빚 독촉을 받게 되자 소요산으로 유인해 15미터 바위 아래로 떨어트려 살해한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대법원에서 심리 미진을 이유로 파기환송된 사건에서 "소요산으로 유인해 가는 것을 산 입구에서 보았다는 증인들의 진술만 가지고 강도살인했다는 것에는 잘못이 있다"며 무죄를 선고했다.<ref>경향신문 1973년 4월 27일자</ref> 8월 8일에 덕성여대 유신숙 살해한 이상균에 대해 1심에서 무기징역, 2심에서 무죄, 대법원에서 파기환송, 파기환송심에서 무죄, 대법원에서 다시 파기환송된 사건을 맡아 강간치사죄를 적용해 무기징역을 선고했다.<ref>동아일보 1973년 8월 8일자</ref> 1974년 2월 22일에 고려대학교 NH회를 중심으로 민우지를 발간하여 내란음모를 했다는 사건 항소심에서 김낙중 전 고려대 노동문제연구소장 등 9명에게 항소를 기각하면서 징역7년 자격정지7년에서 징역1년 자격정지1년 집행유예3년을 선고하고 징역2년6월 자격정지2년6월을 선고받은 피고인 2명에게는 원심을 깨고 집행유예4년을 선고했다.<ref>경향신문 1974년 2월 22일자</ref>
  • 박주영 . . . . 3회 일치
         ||<:> 2008년 2월 17일||<:> [[충칭]]||[[파일:중국 국기.png|width=30]] [[중국]]||<:> 3-2 (2득점) ||<:> 2008 동아시안 컵||
          * AS 모나코 12월의 최우수 선수 : 2011
          * 골을 넣으면 항상 [[기도]] 세레머니를 하는데 이에 대해서 항상 많은 말이 있다. 하지만 정작 팀동료들은 별로 신경쓰지 않는 모양. [[애초에]] 세레머니 후에 멀쩡히 동료들과 교류를 하기 때문에 크게 문제될 것은 없다. [[리그앙]] 시절, [[스타드 렌 FC]]와의 리그경기에서는 골을 터뜨리고 [[세레머니]]를 할때 오히려 동료들이 장난을 치는걸 보면 그들도 즐기는 듯. [[여담]]이지만, [[웨인 루니]]의 슬라이딩 세레머니에선 아무말도 없다가 박주영의 세레머니에선 무릎다친다고 까는 해축팬들도 간혹 있다. [[본인]]은 안정감을 준다고 한다. 하지만 세레모니하다가 부상 당하는 선수들도 있기 때문에 팬들에게는 괜히 애먼 상황이 닥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줬는데... 2010년 12월 25일, [[http://news.naver.com/sports/index.nhn?category=soccer&ctg=news&mod=read&office_id=001&article_id=0004837061|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이 부상으로 [[무릎]]에 크게 무리가 가서, 아직까지도 훈련장에서 무릎찜질을 하는 모습이 종종 포착되며, 비시즌 기간에 치료를 받고 있다고 한다.
  • 배성룡 . . . . 3회 일치
         '''배성룡'''('''裵成龍''',[[1896년]] [[10월 28일]] [[경상북도]] [[청도군]] ~ [[1964년]] [[12월 8일]])은 [[일제강점기]] 한국의 사회주의계열 독립운동가, 언론인, 경제평론가, 정치인이다. 본관은 [[성주 배씨|성주]](星州). 필명은 수성(秀星)·성산학인(星山學人)·성산생(星山生)·성산인(星山人)·별뫼이다.
         아버지는 운홍(運鴻)이며, 어머니는 유윤이(柳允伊)이다. 1917년 결혼을 전후해 일본의 니혼(日本)대학에 유학해 1923년 졸업했다. 귀국 후 조선일보사 기자로 활동하다가 퇴사하고 1924년 11월 화요회(火曜會)에 가입했다. 가입 후 사회주의 운동에 관련된 여러 편의 논저를 발표해 김경재(金璟載)와 함께 화요파의 대표적인 이론가로 활동했으며 1925년 8월 이후 〈동아일보〉를 주무대로 활발한 평론활동을 했다. 1926년 3월 제2차 조선공산당에 입당했다. 제2차 조선공산당 사건으로 검거되어 1928년 2월 1년형을 선고받고 같은 해 9월 만기 출옥했다. 1929년 조선일보사 경제부장이 되었다. 1931년 11월 새로 창간된 중앙일보사에 경제부장으로 입사하여, 1932년 봄 정치부장, 10월에는 논설반 주필 겸 편집부원으로 활동했다. 1933년 3월 〈중앙일보〉가 〈조선중앙일보〉로 제호를 변경하자 편집차장·정치부장을 역임하다가 10월 신문이 정간되자, 절필하고 은둔했다. 이 시기에 발표한 글들에서, 일제의 식민지 지배가 조선의 경제 현실에 민족모순과 계급모순을 중층적으로 존재하게 한 근본적인 요인이라고 파악하고 일본인 자본 대 조선 민중의 대립을 기본 모순으로 상정했다. 조선인 내부의 부르주아 계급과 노농계급 모두를 일본 자본주의에 의한 공동의 피해자로 파악하면서, 민족협동전선론을 주장했다. 8·15해방 후에는 중도파로서 좌우익의 편향노선을 비판했다.
         1945년 9월 이극로가 주도하는 전국정치운동자후원회에 가입해 교섭위원으로 활동했다. 또한 권오익(權五翼) 등과 각당통일기성회(各黨統一期成會)를 조직해 좌우익 정당통합에 주력했다. 1946년 1월 이극로·권오익 등과 함께 통일정권촉성회를 결성해 우익의 비상국민회의와 좌익의 민주주의민족전선을 통합하고자 노력했다. 7월 도진호(都鎭浩)와 함께 좌우합작촉진회를 결성했다. 1947년 2월 〈세계일보〉 주필 겸 편집국장을 지내면서 이극로·조봉암·백남규(白南奎) 등과 함께 민족주의독립전선을 결성하고 상임위원 및 기초위원에 선임되었다. 10월에 김규식의 민족자주연맹이 결성되자 권태석(權泰錫) 등과 함께 5인 정강·정책기초위원에 선임되었다. 1948년 4월 남북협상을 지지하는 ' 문화인 108인 성명'에 서명하고, 권태석과 함께 김규식의 제2차 특사로 평양에 가서 남북협상에 참여했다. 7월 김규식과 김구가 연합한 통일독립촉진회에 참여했다. 1950년 이후 〈동아일보〉와 〈사상계〉 등에 경제평론을 발표하여, 대외의존체제의 극복과 내포적(內包的) 공업화를 통한 경제자립을 주장했고 서울대학교 상과대학에서 동양경제를 강의하기도 했다.
  • 배영수 . . . . 3회 일치
         2014년 12월 3일 2명의 선발 용병과 [[윤성환]], [[장원삼]]이 선발로 4명의 선발이 확정 된 삼성에게 5선발 자리는 선발 유망주에게 기회를 줄 필요가 있었고,[* 배영수의 성적 자체가 선발 확정시켜 줄 정도로 좋은 편이 아니었고, 장원삼과 윤성환 둘 다 나이 30을 훌쩍 넘겨 언제 노쇠화가 와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라 장기적인 관점에서 5선발 육성이 반드시 필요했다. 그리고 선발을 육성하지 못한 것의 부작용은 [[2015년 삼성 라이온즈 원정 도박 사건]]으로 주전 투수들이 이탈하자 바로 나타났다.] 지속적으로 더 많은 출장 기회를 얻고 싶었던 배영수는 삼성에서 한화로 FA 이적하게 된다.
         12월 15일 보상선수로 [[정현석]]이 지명되었으나 선수 개인 사정과 삼성 프런트의 실책으로 인해 결국 연봉 300%의 보상금으로 바뀌었다. 자세한 내용은 [[정현석]] 문서 참고.
          * 2010년 12월 19일에 탤런트인 규휘(본명 박성희)와 결혼하여 현재까지 딸 2명을 낳았다. 딸바보 등극.
  • 배영호 . . . . 3회 일치
         * 1963년 12월 28일 ~ 1970년 12월 19일 : [[대한민국의 국회사무총장|국회사무총장]]
         * 1970년 12월 21일 ~ 1971년 6월 3일 : 제21대 법무부 장관
  • 보육원 떨어졌다 일본 죽어라!!! . . . . 3회 일치
         [[2016년]] [[2월 15일]], [[하테나 익명 다이어리]]에 올라온 익명의 게시물에 대하여 [[일본]] 사회에서 보육문제로 논란이 일어났던 사건이다. 2016년 3월 전후의 게시물에 '일본 죽어!'라는 글이 보이면 대체로 이것과 관련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2016년]] [[2월 15일]], [[하테나 익명 다이어리]]에 해당 익명 게시물이 올라왔으며, 인터넷에서 많은 화제를 불러모았고, [[트위터]]에서는 '#보육원 떨어진 것은 나다(#保育園落ちたの私だ)'라는 [[해시태그]]가 인기를 끌었다. 이러한 현상에 대해서 대기아동 문제에 걸린 사람이 많아 같은 고민을 안고 있는 가족이 많아 [[공감]]을 일으켰다는 분석이 있다.
         2월 29일에는 일본 국회의 중의원 예산위원회에서 야마오 시오리(山尾志桜里) 민주당 의원이 이 블로그에 대해서 거론했으나, [[아베 신조]] 총리는 "익명인 이상 실제로 진실인지, 내가 확인할 수 없다"고 답변하였으며, 의원석에서는 "누가 (블로그에) 쓴거야", "(질문자는) 제대로 (쓴) 본인을 내놔."라는 야유가 날아왔다고 한다.
  • 서상기 (1946년) . . . . 3회 일치
         * [[2010년 8월]] ~ [[2012년 2월]] : 한나라당 교육과학기술정책조정위원회 위원장
         * [[2011년]] [[2월 24일]] ~ : [[한국우주소년단]] 총재
         * [[2012년 2월]] : 새누리당 교육과학기술정책조정위원회 위원장
  • 서정제 . . . . 3회 일치
         |임기2 = 1991년 2월 1일 ~ 1991년 9월 15일
         * 대구지방법원 형사 단독 판사로 재직하던 1973년 2월 5일에 물 먹인 소를 도살한 피고인 55명에 대한 선고공판에서 가축 보관업자 5명에게 사기죄를 적용해 징역10월을 선고하는 등 피고인 전원에게 유죄를 선고했다.<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73020600329207008&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73-02-06&officeId=00032&pageNo=7&printNo=8417&publishType=00020 경향신문 1973년 2월 6일자]</ref>
  • 성현아 . . . . 3회 일치
         * [[1995년]] [[MBC]] 단막극 《[[MBC 베스트극장]] - 아델라이데》 ... 채영 역
         * [[1995년]] [[MBC]] 《명사 가요초대석》 MC
         * [[1995년]] [[KBS2]] 《행운의 일요특급》 MC
  • 손담비 . . . . 3회 일치
         2008년 2월 29일 게임 [[프리스톤테일2]]의 주제가 "Change the World"를 불렀다.<ref>[http://music.naver.com/album/index.nhn?albumId=136656 네이버 뮤직 - Change The World (프리스톤테일 2) O.S.T] 《[[네이버]]》</ref> 같은 해 4월 29일 손담비는 첫 미니 앨범 ''[[Mini Album Vol.1]]''을 발매하며 컴백 했다. 앨범의 타이틀 곡 "Bad Boy"로, 전 에스블러쉬 멤버로 함께 활동했던 [[가희]]가 피처링으로 참여했다. 이 때 손담비는 주로 여성스러운 이미지로 활동했다. "Bad Boy"는 발표한지 2주만에 음원 사이트 1위를 차지했고, 지상파 음악 프로그램에 출연할때마다 검색어 순위는 1위를 차지하는 등 관심을 모았다.<ref>{{뉴스 인용|제목=손담비 '배드 보이', 29일 미니앨범 공개 후 '대박 조짐' |url=http://joynews.inews24.com/php/news_view.php?g_menu=700100&g_serial=327079|출판사=조이뉴스24|저자=박재덕|날짜=2008년 4월 20일|확인날짜=2011-02-06}}</ref> 뮤직비디오가 공개된 후에는 조회수가 20만 건이 넘었고, 무대에서 입고나온 코르셋 스타일의 파격적인 의상도 많은 관심을 받아 홈페이지가 폭주하기까지 했다.<ref>{{뉴스 인용|제목= 손담비 코르셋패션 "열기"...홈페이지 또 "혼수상태" |url=http://www.hkn24.com/news/articleView.html?idxno=13163|출판사= 깜뉴스|저자=신명희 기자|날짜=2008년 5월 25일|확인날짜=}}</ref>
         5달 후인 2008년 9월 17일 두 번째 미니 앨범 ''[[Mini Album Vol.2]]''의 타이틀곡 〈미쳤어〉의 티저 영상을 온오프라인을 통해 공개하였는데, 티저 영상은 공개후 각종 동영상 사이트, 실시간 검색어 1위를 차지하는 등 관심을 받으며 컴백을 알렸다.<ref>{{뉴스 인용|제목= 손담비 '미쳤어' 티저 영상에 팬들의 반응 뜨겁네~ |url=http://www.consumernews.co.kr/news/view.html?gid=main&bid=news&pid=111539|출판사= 소비자가 만드는 신문 연예|저자=스포츠연예팀|날짜=2008-09-19|확인날짜=}}</ref> 이어 18일에는 음반을 발매하였다. 타이틀곡인 〈미쳤어〉 열풍이 한국에 불었는데, 특히 처음 후렴구부분의 의자춤이 인기를 끌었다. 각종 연예인들은 의자춤 패러디를 했는데, 재일 먼저 배우 [[허이재]]가 패러디를 했고,<ref>{{뉴스 인용|제목= 허이재, 손담비 ‘미쳤어’ 의자춤 깜짝공개 눈길 확~|url=http://www.newsen.com/news_view.php?uid=200810191843251001 |출판사= 뉴스엔 연예|저자=이현우|날짜=2008-10-20|확인날짜=}}</ref> 계속해서 김효진, 신봉선, 양정아, 현영, 노홍철 등이 예능에서 따라했으며, 《[[내 사랑 금지옥엽]]》의 유인영, 《[[수상한 삼형제]]》의 오지은 등 드라마에서도 패러디를 했다. 또한 일반인들도 UCC를 통해 많은 패러디 동영상을 올렸다. 너도나도 다 따라한탓에 급기야 예능 프로그램에서는 〈미쳤어〉 금지령까지 내려졌다.<ref>{{뉴스 인용|제목= 방송가, 손담비 '미쳤어' 이제 그만! |url= http://joynews.inews24.com/php/news_view.php?g_menu=700100&g_serial=380986|출판사= 조이뉴스24 연예|저자=박재덕 기자|날짜=2008년 12월 22일}}</ref> 2008년 11월 17일에는 [[마이티 마우스 (음악 그룹)|마이티 마우스]]의 싱글 〈[[Family (Special Edition)|패밀리]]〉에 피처링으로 참여했다.<ref>{{뉴스 인용|제목=마이티마우스, 이번에는 손담비‥'패밀리'|url=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003&aid=0002372273|출판사=네이버|저자=유상우|날짜=2008-11-11|확인날짜=2012-05-20}}</ref> 가수 활동 이외에 MBC 예능 《[[우리 결혼했어요|우리결혼했어요]]》에 [[마르코 (배우)|마르코]]와 함께 가상 부부로 나와 [[MBC 방송연예대상]] 특별상/베스트커플상 수상했다.<ref name="2008MBC"/> 또한 각종 CF에서도 러브콜이 쇄도했는데, 1년만에 몸값이 3배가 올라 화제가 되기도 했다.<ref>{{뉴스 인용|제목= 손담비 몸값, 1년만에 3배 이상 높아져 '미쳤어' |url= http://www.maxmovie.com/movie_info/ent_news_view.asp?mi_id=MI0080966034|출판사= 조이뉴스24 연예|저자=|날짜=2008-11-12|확인날짜=}}</ref>
         한편, 손담비가 무대에서 특유의 표정을 지어 '업신담비'로 불리며 인터넷상에서 큰 화제가 되었다.<ref>{{뉴스 인용|제목= 손담비 업신 표정 화제 "니가?" … 본인도 쿨하게 인증|url=http://www.hkn24.com/news/articleView.html?idxno=57743|출판사=이슈프리즘 깜뉴스|저자=인터넷뉴스팀|날짜=2010-10-16|확인날짜=2010-12-22}}</ref> 2010년 10월부터는 MBC의 새 예능 프로그램 《여우의 집사》에 출연하기도 했지만, 저조한 시청률로 인해 방영된지 2개월만에 폐지되었다.<ref>{{뉴스 인용|제목 = 여우의 집사 폐지…불과 2개월만, 잘나가던 뉴스후 폐지하더니|url = http://www.newsprime.co.kr/news/articleView.html?idxno=177604|출판사 = 프라임 경제|날짜 = 2010-12-17|확인날짜 = 2010-12-29|보존url = https://web.archive.org/web/20140729055321/http://www.newsprime.co.kr/news/articleView.html?idxno=177604#|보존날짜 = 2014-07-29|깨진링크 = 예}}</ref> 한편 손담비는 대만에서 큰 인기를 얻었는데, 〈미쳤어〉와 《드림》의 인기로 '2010 [V] CHINESE TOP 연도 시상식 콘서트'에서 아시아 최고 아티스트상을 수상했다.<ref name="대만">{{뉴스 인용|제목=‘섹시 퀸’ 손담비, 대만진출 나선다|url=http://news.donga.com/3//20110117/33997010/1|출판사=donga.com|저자=김원겸 기자|날짜=2011-01-17|확인날짜=2011-01-17|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140728204248/http://news.donga.com/3//20110117/33997010/1|보존날짜=2014-07-28|깨진링크=예}}</ref> EP 음반 ''The Queen''역시 대만에서 음반 차트 등 각종 차트 정상을 차지했다.<ref name="대만"/> 한편, 2011년 1월에 제20회 서울가요대상에서 본상을 수상하며 3년연속 본상을 수상받았다.<ref name="20회 서가대">{{뉴스 인용|제목=손담비, '서울가요대상' 3년 연속 본상 수상|url=http://www.newsway.kr/news/articleView.html?idxno=101847|출판사=뉴스웨이|저자=최가람 기자|날짜=2011-01-21|확인날짜=2011-01-21}}</ref> 이어 아시아모델시상식에서도 BBF 인기가수상을 수상했다.<ref name="BBF">{{뉴스 인용|제목=권상우ㆍ소녀시대ㆍ옌청쉬, '아시아 스타상'|url=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001&aid=0004878908|출판사=네이버뉴스|저자=연합뉴스 임은진 기자|날짜=2011-01-21|확인날짜=2011-01-22}}</ref> 2011년 5월부터는 피겨스케이팅 예능 프로그램 《[[김연아의 키스 & 크라이]]》에 출연했고, TOP4에 진출했다.<ref>[http://wizard2.sbs.co.kr/w3/template/tpl_freetype.jsp?vVodId=V0000349432&vProgId=1000708&vMenuId=1014807 김연아의 키스앤크라이 출연진 및 MC 소개] 《[[SBS]]》. 2011-05-21 확인.</ref> 2011년 11월부터는 MBC의 드라마 《빛과 그림자》에서 가수 유채영 역으로 출연했고, 미디엄 템포 장르의 드라마 OST "Everything"을 불렀다.<ref>{{뉴스 인용|제목=손담비, ‘빛과 그림자’ OST 참여 ‘호소력 짙은 목소리 뽐내’|url=http://artsnews.mk.co.kr/news/188777|출판사=아츠뉴스|저자=김세영|날짜=2012-01-04|확인날짜=2012-01-05}}</ref> 《빛과 그림자》는 동시간대 드라마 시청률 1위를 유지했고, 손담비는 연기력을 인정받았다.<ref>{{뉴스 인용|제목='발연기'한다던 손담비, 어느덧 '배우'가 됐다|url=http://news.sportsseoul.com/read/entertain/1047784.htm|출판사=[[스포츠서울]]|저자=오영경|날짜=2012-06-12|확인날짜=2012-06-18|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120616025258/http://news.sportsseoul.com/read/entertain/1047784.htm#|보존날짜=2012-06-16|깨진링크=예}}</ref> 2011년 12월 1일에는 [[애프터스쿨]]과 함께 해피 플레디스 2012 시리즈인 ''[[Happy Pledis 2012 'Love Letter']]''를 발매했고, 수익금 일부를 [[유니세프]]의 "아우인형" 프로젝트에 기부했다.<ref>[http://music.naver.com/album/index.nhn?albumId=304689 네이버 뮤직 - Happy Pledis 2012 `Love Letter`] 《네이버》. 2012-01-05 확인.</ref> 2012년 8월, 《빛과 그림자》가 종영되었고, 손담비는 가수로서 컴백을 준비했다.<ref>{{뉴스 인용|제목=손담비, 런던올림픽과 한판|url=http://sports.donga.com/3/all/20120612/46956635/3|출판사=[[스포츠동아]]|저자=김원겸|날짜=2012-06-13|확인날짜=2012-06-18}}</ref>
  • 송남헌 . . . . 3회 일치
         '''송남헌'''(宋南憲, [[1914년]] [[4월 11일]]~[[2001년]] [[2월 20일]])은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교육인, 통일운동가, 근현대사 연구가이다.
         이후 [[민중동맹]]의 창당과 [[1946년]] [[12월]] [[민족자주연맹]]의 창당에 참여하였다. [[1948년]] [[김구]],[[김규식]]등의 발의로 [[남북협상]]이 시작되자 [[김규식]]을 수행하여 [[민족자주연맹]] 대표로 참가하고 돌아왔다.
         이후에 송남헌은 근현대사 연구가로 일생을 보낸다. [[2001년]] 2월 20일에 사망했다.
  • 송종익 . . . . 3회 일치
         '''송종익'''(宋鍾翊, [[1887년]] [[2월 27일]] ~ [[1956년]] [[1월 7일]])는 한국의 독립 운동가이다. 본관은 [[야로 송씨|야로]], 호는 우강(友江), [[대구광역시|대구]] 출신이다.<ref>[http://100.naver.com/100.nhn?docid=756377 송종익 - 네이버]</ref>
         [[1936년]] 북미 대한인국민회 총회관 건축 위원으로 임명되었다. [[1941년]] [[하와이 주|하와이]]에서 열린 해외한족대회 때 북미 대한인국민회 대표로 참석하여 재미한족연합위원회를 설립했고 집행부 위원 겸 재무를 맡았다. 1941년 12월에 열린 대한인국민회 총회에서 [[로스앤젤레스]] 대표로 참가하여 대한인국민회 부의장으로 선출되었고 [[1944년]]에는 주미외무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된다. [[1945년]] 11월 재미한족연합위원회 대표단의 일원으로 귀국했지만 몇 달 뒤에 다시 미국으로 건너간다. [[1956년]] [[1월 7일]] 사망했으며 [[1995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 송호창 (1967년) . . . . 3회 일치
         '''송호창'''(宋皓彰, [[1967년]] [[2월 14일]] ~ )은 대한민국의 제19대 국회의원이자 인권 변호사이다.<ref>[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20120228110317 민주당, 송호창·이학영·백혜련 전략공천] 프레시안 2012-02-28</ref>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촛불집회 당시 TV토론에 출연해 촛불 정국으로 대변되는 촛불민심을 지지하여, '촛불 변호사' 로 활약했다.<ref>[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720662 '촛불 변호사' 송호창, 안상수 16년 아성 '탈환'] 오마이뉴스 2012.04.12</ref>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사무차장, 그리고 2011년 서울시장 보궐 선거 후보로 나선 [[박원순]]의 대변인으로 활동했다.<ref>[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100165 ‘박원순 대변인’ 송호창, ‘보온병’ 안상수에 도전장] 미디어오늘 2012-02-06</ref> [[대한민국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제19대 총선]]에서 [[민주통합당]] 후보로 의왕·과천에 출마해서 당선되었다.<ref>[http://info.nec.go.kr/main/showDocument.xhtml?electionId=0020120411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선거통계시스템]{{깨진 링크|url=http://info.nec.go.kr/main/showDocument.xhtml?electionId=0020120411 }}</ref>
         [[민주통합당]]을 탈당하고 [[안철수]] 후보 캠프에 합류하였다.<ref>[http://www.yonhapnews.co.kr/politics/2012/10/09/0502000000AKR20121009183100001.HTML?template=2087 송호창 安캠프행..안철수발 '빅뱅' 시작되나] 연합뉴스 2012-10-09</ref> 2015년 12월 13일 안철수가 [[새정치민주연합]]을 탈당하였지만 자신은 탈당하지 않겠다고 했다.<ref>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5/12/15/0200000000AKR20151215192800001.HTML?input=1195m</ref>
         |전임자 = [[안상수 (1946년 2월)|안상수]]
  • 신화용 . . . . 3회 일치
         '''[[김승대]]가 [[연변 FC]]로 20억에 팔리면서''' 여기서 생긴 돈으로 결국 신화용, 황지수, 손준호 핵심 3인방은 다시 잡는데 성공했다. 매시즌 1~2월까지 거취문제로 포항팬들의 가슴을 졸이게 했던 것에 비하면 12월 중순이 지나가기도 전에 재계약 기사가 떴고, 덤으로 배슬기, 김원일, 김광석 센터백 3인방도 그대로 포항에 남으면서 적어도 16시즌 수비만큼은 안심할 수 있게 되었다. 게다가 이번 계약은 2년 계약이라 최소 2017년까지 포항에 잔류하게 되었다. 신화용 본인말로는 비싼 연봉을 부른 팀이 있었지만 '가족'을 버리고 떠날 수가 없었다고 한다.[[http://sports.media.daum.net/sports/soccer/newsview?newsId=20151224152139569|###]] ~~포항밖에 모르는 바보~~[* 다만 포항에서도 상당한 대우를 해주고 있는 것이 15시즌이 끝나고 공개된 연봉공개에서 신화용은 국내선수 중 4위. 6억 3천의 연봉을 받는 것으로 밝혀졌다. 키퍼 포지션에서 신화용보다 연봉이 높은 선수는 수원에서 7억 넘게 받은 정성룡 뿐이며 선수단 연봉 총액이 70억 내외인 포항 입장에서는 파격적인 대우를 해주고 있는 편이다. 그만큼 포항 프런트도 긴축재정으로 구단 예산이 줄어드는 상황에서도 신화용 만큼은 반드시 잡고 간다는 반증인셈.][* 다만, 기본급은 정성룡보다 한참 낮은것이 맞다. 연맹에서 발표하는 연봉공개 내역은 기타 수당을 다 합친 금액을 발표하는 것이기 때문에 15시즌 전경기 출장+17경기 클린시트 보너스를 합친 신화용의 연봉은 이러저러해서 시즌을 절반가량 날려먹은 정성룡과 비슷하게 나올 수 밖에 없다.]
         2016년 12월 우선 협상기간 동안 신화용의 거취에 관심이 쏠렸다. [[http://news.donga.com/View?gid=82057389&date=20161227|기사]] 그리고 해를 넘겨 1월 3일수원과 이적 협상을 하고 있다는 기사가 떴다. 이미 [[문창진]], [[김원일(축구선수)|김원일]], [[신광훈]] 등 신예 베테랑 가리지 않고 핵심 멤버들을 보낸 마당에 마지막 프렌차이즈 스타마저 떠난다는 소식에 포항팬들은 [[멘붕]] 중. 게다가 팀을 떠나는 이유도 '''16시즌 종료 이후 구단이 직접 나서 신화용을 팔기 위해 여러 구단과 만난 사실이 드러나면서''' 포항 프런트와 수뇌부는 가루가 되도록 까이고 있다.
  • 안석환 . . . . 3회 일치
         * 1995년 [[SBS]] 드라마 스페셜 《[[째즈 (드라마)|째즈]]》 ... 변호사 역
         * 1995년 《[[개같은 날의 오후]]》 ... 카메라 기자 역
         * 1995년 《[[총잡이 (영화)|총잡이]]》 ... 희영의 실장 역
  • 야설록 . . . . 3회 일치
         | 출생일 = [[1960년]] [[2월 25일]]
         '''야설록'''(1960년 2월 25일 ~ )은 [[대한민국]]의 [[무협 소설]] [[작가]]다. 야설록은 [[필명]]으로 본명은 최재봉이다. [[대구광역시|대구]]에서 출생했고 [[대구고등학교 (대구)|우신고등학교]] - [[연세대학교]] 응용통계학과를 중퇴했다.
         * [[1995년]] 《대란》{{ISBN|978-89-06-50282-8}}<br />《야객》{{ISBN|978-89-8051-042-9}} <br />《숙객》<br />《녹수옥풍향》{{ISBN|978-89-8051-036-8}}<br />《[[유객]]》{{ISBN|978-89-8051-100-6}}
  • 염재욱 . . . . 3회 일치
         | 활동기간 = [[1995년]] ~ 현재
         * 1집 《앨범》에프 머신 - [Cyber Punk] (1995년 발매)
         [[분류:1976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1995년 데뷔]][[분류:대한민국의 남자 텔레비전 배우]][[분류:서울예술대학교 동문]][[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분류:대한민국의 남자 영화 배우]]
  • 예천군 . . . . 3회 일치
          * 2016년 2월 : 상리면을 효자면으로, 하리면을 은풍면으로 개칭.
         ||<:> [[1995년]] ||<:> 68,314명 ||<-28><bgcolor=#01438F>||<-72>||
         2014년 재선에 성공한 이현준 군수 주도로 1981년 건립된 현 군청 청사 대신 신예천군청을 건립하고 이전하였다. 신부지는 예천읍 대심리 353번지, 구 엽연초생산조합 부지이다.[[http://www.ycg.kr/open.content/ko/administrative/news/headline/?id=986407f875b54364aa54a89bda326e86|#]] 2015년 말 착공, 2018년 2월 5일 준공되었다. 2015년 5월 설계 공모작을 선정했다.[[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5/05/29/0200000000AKR20150529063100053.HTML|당선작 조감도]] 하지만 현 군청 청사가 위치한 노상리와 인근 노하리, 서본리, 동본리, 백전리 주민들은 '''군청 이전 후 해당 지역 경제 위축'''을, 그외 지역 주민들은 '''부채 증가, 도청 이전과 연계한 각종 사업의 선행 추진 등'''을 이유로 반대하고 있다. [[http://www.kbsm.net/default/index_view_page.php?part_idx=306&idx=118103|#]] 한편, 현 군청 청사가 위치한 예천읍내는 배산인 흑응산과 임수인 한천 간 폭이 좁은터라 더이상 확장가능한 공간이 없어서 예전부터 쭉 이전의 필요성이 강하게 피력됐다. 그러나 공공기관이 이전하게 되면 으레 [[도심 공동화]] 현상이 발생하기 때문에 구 군청 청사 인근 지역 경제가 위축되지 않게끔 정책을 마련해야할 것으로 보인다.
  • 오중기 . . . . 3회 일치
         대한민국의 정치인. 보수의 심장이라고 불리는 경상북도에서만 10여년째 고군분투하고 있는 [[더불어민주당]] 소속 정치인이다. [[문재인정부]] [[청와대]]에서 선임행정관으로 일하다 2018년 2월 경북도지사 선거 출마를 선언하며 사퇴했다.
         2017년 8월, [[문재인 정부]]의 [[청와대]] [[대통령비서실]] 중 균형발전비서관실의 선임행정관으로 임명되었다.[* 사실 지역 도당위원장 정도를 선임행정관으로 임명하는건 격이 너무 약하다는 비판이 있었다.] 균형발전비서관이 일찌감치 사직해 공석인 상황에서 2018년 2월 1일 선포된 국가균형발전 비전 수립을 이끌었다. 직후 사직하여 2018년 2월 5일, 경북도청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경상북도지사]] 선거에 재도전하기로 [[https://youtu.be/7R_kl03ESn8|선언]]했다.
  • 유병수 . . . . 3회 일치
         [[K리그 2010|2010 시즌]]이 시작된 후에는 7라운드까지 무득점으로 일관하다가 8라운드 [[포항 스틸러스]]전에서 네 골을 터뜨린 것부터<ref>{{웹 인용|url=http://www.kyeongin.com/news/articleView.html?idxno=513432 |제목=유병수 4골 '펄펄' 6년 만에 진기록 |확인날짜=2010-08-15 |출판사=경인일보}}</ref> 시작해, 강원전까지 네 경기에서 아홉 골을 몰아쳤다. 비슷한 시기에 [[김영후]] 또한 득점포를 터뜨려 언론은 이들의 관계를 다시 한 번 재조명했다.<ref>{{웹 인용|url=http://osen.mt.co.kr/news/view.html?gid=G1008080011 |제목=유병수-김영후는 전생에 부부?...득점 사이클 '비슷' |확인날짜=2010-08-15 |출판사=OSEN}}</ref><ref>{{웹 인용|url=http://joynews.inews24.com/php/news_view.php?g_menu=702210&g_serial=508870 |제목='찰떡궁합(?)' 김영후-유병수, 올해도 경쟁은 계속된다 |확인날짜=2010-08-15 |출판사=아이뉴스24}}</ref> 이후 유병수는 대전전 헤트트릭을 기록하며 리그 20골을 기록, K리그 최연소 한국인 득점왕과 최연소 20골을 달성했다. 마지막 라운드까지 22골을 기록하며 17골을 기록한 [[호세 오르티고사]]를 5골로 따돌리고 [[K리그 2010|2010 시즌]] 득점왕을 차지하였다.<ref>{{뉴스 인용|url=http://www.mydaily.co.kr/news/read.html?newsid=201011071805472239&ext=na |제목=유병수, 올시즌 정규리그 득점왕 |출판사=마이데일리 |날짜=2010-11-07}}</ref> 2011년 2월 22일 유병수는 인천 유나이티드와 2013년 12월까지 계약 연장에 성공했다.<ref>{{뉴스 인용|url=http://osen.mt.co.kr/news/view.html?gid=G1102230096 |제목=유병수, 인천과 2013년까지 계약 연장 |출판사=OSEN |날짜=2011-02-23}}</ref>
         [[2013년]] [[2월 10일]] 기준
  • 유재한 (1955년) . . . . 3회 일치
         * 재정경제부 정책홍보관리실 실장(2006년 ~ 2007년 2월)
         * 공적자금관리위원회 사무국장(2002년 2월 ~ 2003년 1월)
         * 재정경제부 국고과 과장(2000년 6월 ~ 2002년 2월)
  • 이미연 (배우) . . . . 3회 일치
         1995년에는 배우 [[김승우]]와 결혼했지만, 2000년 5년간의 결혼 생활을 정리하고 이혼했다.<ref>{{뉴스 인용|제목 = 김승우-이미연 이혼 속사정은…|url = http://news.hankooki.com/lpage/culture/200710/h2007101115081484220.htm|출판사 = 한국일보|날짜 = 2007-10-11|확인날짜 = 2013-10-03|보존url = https://web.archive.org/web/20131005011044/http://news.hankooki.com/lpage/culture/200710/h2007101115081484220.htm|보존날짜 = 2013-10-05|깨진링크 = 예}}</ref> 이미연은 1990년대 중후반에는 영화 《[[넘버 3]]》, 《[[모텔 선인장]]》, 《[[여고괴담]]》, 《[[내 마음의 풍금]]》 등의 영화에만 주로 출연하다 1999년 단만극 《[[TV영화 러브스토리]]》로 3년여만에 드라마에 컴백했고, 이후 2001년 인기리에 방영되었던 드라마 《[[명성황후 (드라마)|명성황후]]》에서 젊은 명성황후 역으로 카리스마 넘치는 연기를 보여주어 많은 시청자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으며, "내가 조선의 국모다"라는 유행어를 탄생시키기도 했다. 또한 당시 소속사였던 [[김광수 (1961년)|김광수]] 대표의 프로젝트로 《이미연의 연가》라는 [[컴필레이션 음반]]을 발매해 166만장이라는 엄청난 판매량을 기록했다.<ref>{{뉴스 인용|제목= PR비 파문 등 여파 가요계 ‘불황의 늪’…2002 한국 음반시장 결산 |url=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005&aid=0000131324 |출판사= 국민일보|날짜= 2002-12-24 }}</ref>
         || 1995년
         * [[1995년]] [[SBS]] 《깊은 밤 전영호쇼》
  • 이보림 . . . . 3회 일치
         ||<#FBB30F><width=18%><:>'''{{{#202020 생년월일}}}'''||[[1995년]] [[2월 28일]] ([age(1995-02-28)]세) [[세종특별자치시]] ||
         [[분류:더 유닛/참가자]][[분류:미스코리아]][[분류:1995년 출생]][[분류:세종특별자치시 출신 인물]]
  • 이유리(배우) . . . . 3회 일치
         || 2012년 2월 9일~2012년 3월 29일 || O'live || 이유리의 새댁상차림 ||<|2> 진행자 || ||
         || 2014년 12월 31일 || [[MBC 가요대제전]] || ||
         ||<:>[[노란복수초]] OST || [[파일:irememberyou.jpg|width=100%]] || 2012년 2월 27일 || 내 맘이 널 기억해 || [[https://youtu.be/-L9pQEkjqHo|듣기]] ||
  • 이현우 (가수) . . . . 3회 일치
         ** 2월 4일 [[KBS]] 《[[가요톱텐]]》 1위
         ** 2월 11일 [[KBS]] 《[[가요톱텐]]》 1위 (5주 연속) (골든컵)
         1993년 1월 13일 자신이 알던 한 팬과 대마초를 흡연한 혐의로 검찰에 구속됐다. 이후 2월 1일 보석으로 석방됐으나, 그 해 3월 [[MBC]], [[서울방송|SBS]], [[KBS]]로부터 방송 출연 정지 조치를 받고 [[미국]]에 건너갔다가 11월에 방송 복귀했다.
  • 이호준 (프로게이머) . . . . 3회 일치
         2009년 12월 30일 하이트 스파키즈로 이적하였다.
         2010년 2월 9일 09-10 신한은행 프로리그 3R 위너스리그 대 공군전에서 [[홍진호]], [[차재욱]], [[박정석]], [[민찬기]]를 연속으로 꺾으면서 올킬을 달성했다.
         2010년 12월 7일 은퇴가 공시되었다. 이후 스타크래프트2 게이머로 활동하였다.
  • 이휘향 . . . . 3회 일치
         * 1995년 [[MBC]] 미니시리즈 《[[연애의 기초]]》 ... 한차숙 역
         * 1994년~1995년 [[일양약품]] 원비에프
         * 1995년 백화음료 알지오
  • 임지현(가수) . . . . 3회 일치
         [[분류:1995년 출생]]
         [[1995년]] [[6월 9일]], [[경상북도]] [[포항시]] 출생.
         2015년에 들어 2월에 '지쳐가'라는 타이틀로 싱글앨범을 발표했고 8월 26일에 진준왕과 함께 부른 듀엣곡으로 '주차해놓고' 싱글을 발표했다.
  • 정종원 . . . . 3회 일치
         막내 정운익은 하와이 오하나 퍼시픽 은행 초대 이사장을 역임했고 한국 여자 아이스하키 팀을 처음으로 직접 구성했다. 그는 대한아이스하키협회 부회장을 역임했고 국제아이스하키연맹 집행위원을 겸직했다.<ref>경향신문, 1998년 2월 25일 26면</ref> 정종원 행장 내외가 생전에 장충동 본가에서 키우며 마지막으로 안아 본 손녀가 정운익의 3녀인 뉴욕퀸이다.
         한편 [[박정희]] 정권은 새롭게 지방은행들을 설립하면서 [[이수그룹]] 창업주인 [[김준성]]에게 [[대구은행]]을 맡겼다.<ref>동아일보 1969년 12월 19일 3면 김준성 지방은행 붐을 선도</ref> 현 대구은행은 조흥은행의 모태를 이룬 [[정재학]]의 대구은행과는 무관하다. 이름만 되풀이 썼을 뿐이다.
         '법시' 창간 이후 1968년 11월 '법륜'이 선을 보였고, 1974년 '불광'이 창간된데 이어 1979년에는 '여성불교'가 탄생했다. 불교 잡지는 1980년대에 전성기를 누렸다. 1990년대에 접어들며 불교계의 미디어는 신문 쪽으로 이동한다. 다양한 불교신문들이 등장하면서 불교잡지들이 설 땅이 좁아지며 1990년대 초반 대부분 정간됐다.<ref>불교전문지 월간 '해인', 1992년 12월 130호 '불교잡지의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 '</ref><ref>[월간 선원 지령 200호] 1980~90년대와 2000년대 불교잡지 비교</ref>
  • 주다영 . . . . 3회 일치
         '''주다영''' ([[1995년]] [[6월 16일]] ~ )은 [[대한민국]]의 [[배우]]이다.
         * 1997년 잡지 모델로 시작해 베비라 모델 ,비유와상징, 농협 아름찬 김치, 데이콤 08217, 우리은행, 해태제과 베스트 원 아이스크림, 페브리즈, 한국통신, 맥도날드, LG 휘센에어컨, 대교, 하나은행, 삼환 아파트, 마몽드, 장인가구, 풍성건설, 아디다스, 톰키드, 원아동복, 블루독, 정상어학원, 소니 핸디캠, LG CNS, 메이크업 포에버, 간지(GanGee) 2013년 12월호 표지모델, CAMPUS JOB&JOY 제52호 표지모델, 간지(GanGee) 2014년 11월호, 센트리얼 휘트니스
         [[분류:1995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한민국의 여자 모델]][[분류:대한민국의 여자 영화 배우]][[분류:대한민국의 여자 텔레비전 배우]][[분류:대한민국의 여자 뮤지컬 배우]][[분류:비디오 자키]][[분류:대한민국의 여자 어린이 배우]][[분류:김천시 출신]][[분류:대한민국의 개신교도]]
  • 최채흥 . . . . 3회 일치
         ||<:> '''생년월일''' || [[1995년]] [[1월 22일]] ([age(1995-01-22)]세) ||
         2월 17일 라쿠텐과의 연습경기에서 3이닝 2피안타 2볼넷 1사구 3실점을 기록했다. 최채흥은 0-3으로 뒤진 4회 에게 마운드를 넘겼다. 직구 최고 142km까지 스피드건에 찍혔다.
         [[분류: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분류:1995년 출생]] [[분류:투수]] [[분류:좌완 투수]] [[분류:경주시 출신 인물]]
  • 칼리파 하프타르 . . . . 3회 일치
         2014년 2월, 하프타르는 TV를 통하여 서부지역을 중심으로 한 일반 국민회의에 반대하는 봉기를 일으키라고 선언했다. 하프타르는 리비아 수도 트리폴리에서 의회 의사당을 장갑차와 로켓포로 공격하여 의회 권한 정지를 선언했으며, 국민군은 벵가지에서 이슬람 무장단체 '안사르 알 샤리아' 등 이슬람계 세력에 공격을 퍼부었다. 이 사실상 [[쿠데타]]를 계기로 하여 리비아 국민군에는 세속주의 반군 세력이 모두 결집하게 된다. 2014년 6월 국민투표(유권자 중 18%, 약 63만 명 투표)를 거쳐 동부지역에서는 대표자 정부(the House of Representatives)가 2014년 8월 4일 창립되어 일반 국민회의를 대체했다. 하프타르는 리비아 국민군(the Libyan National Army)의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하프타르는 내전에서는 뛰어난 역량을 보였는데, 2016년 2월에 리비아 국군은 이슬람주의 민병대를 대부분 벵가지에서 축출했으며, 2016년 4월 중순에는 이슬람주의 민병대는 벵가지 동족 250km나 떨어진 데르나 까지 축출되었다. 하프타르가 이끄는 리비아 국군은 [[무슬림형제단]]이 이끄는 리비아 돈, 미스라탄 부대, 벵가지의 혁명 세력 슈라위원회, 시르테 지역을 장악한 [[이슬람 국가]]와 대결하고 있다.
         2015년 12월에, UN의 증재로 동부와 서부의 일부 세력이 합의하여 국민합의 정부가 창설되었다. 하지만 동부지역은 반대파가 많이 합의가 승인되지 못하고 있다. 하프타르의 지지자들은 국민합의 정부에 대하여 하프타르의 지위를 보장할 것을 요구하고 있으며, 리비아 국군의 지휘권을 넘기지 않고 있다. 국민합의 정부는 동부지역 군 사령관 가운데 한 명인 마흐디 이브라힘 알 바르가티를 국방장관으로 임명하고 하프타르를 소외시키는 중.
  • 타쿠마 마모루 . . . . 3회 일치
         1995년 11월 27일에는 같은 직장의 여성과 양자결연을 맺어 성이 바뀌었다가, 1997년 1월에 양자결연을 해소하고 타쿠마로 돌아왔다. 타쿠마는 여성에게 [[위자료]]로서 200만엔을 달라고 강요했다. 1997년 3월에는 39세 여성과 3번째로 결혼했다. 하지만 12월에는 이혼을 요구받고, 고베 지방 법원 히메지 지부에 이혼조정을 요청했다. 타쿠마는 이 여성과의 재결합에 집착하여 앙심을 품게 되었다. 1998년 6월에 이혼 조정이 성립되었은아, 타쿠마는 전처를 반복해서 스토킹 하고, 교제중이던 다른 여성을 폭행하여 체포되었으며, 전처에게도 유사 사건을 일으켜서 체포되었다. 10월 18일에는 교제중이던 여성과 4번째 결혼을 했다.
         2000년 10월 14일에, 택시 운전사로 근무하다가 오사카 시내의 호텔에서 벨보이와 말다툼을 벌여서, 폭행으로 체포된다. 11월에는 이케다 시 건축자재 판매회사에 10톤 트럭 운전사로 채용되었고, 이케다 시의 원룸으로 이사했다. 하지만 신호대기를 할 때 나란히 서있던 차에 타고 있던 여성을 "눈이 마주쳤다"고 트집을 잡으며 침을 뱉는 등의 문제를 일으켜서 2001년 2월에 그만둔다. 2001년 5월 하순에는 스스로 하룻동안 정신병원에 입원하였다.
  • 태영호 . . . . 3회 일치
         빨치산 가문에서 태어난 태영호는 고등중학교 재학 중에 [[중국]]으로 건너가서 [[영어]]와 [[중국어]]를 배운 것으로 알려졌다. [[오진우]](1995년 2월 사망) 전인민무력부장 등 빨치산 1세대의 자녀들과 함께 공부했다. 중국에서 돌아온 태영호는 평양 국제관계대학(5년제)를 졸업하고, 외무성 8국에 배치되었다.
         2000년 12월에 [[영국]]과 북한이 수교를 맺고, 2003년 4월 영국 주재 북한대사관이 정식 개설되자, 1등 서기관 신분으로 런던에 파견되었다. 현학봉 영국 주재 북한 대사의 뒤를 잇는 2인자 자리에 올랐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 테헤페로 . . . . 3회 일치
          * 2011년 12월 「여고생 휴대폰 유행어 대상 2011(女子中高生ケータイ流行語大賞2011)」은상을 수상.
          * 2012년 2월, [[소프트뱅크]]의 전국 CM에 등장.
          * 2012년 12월 5일, 2012년도 여고생 휴대폰 유행어 대상(女子中高生ケータイ流行語大賞)에서 금상을 수상.
  • 한덕수 (1907년) . . . . 3회 일치
         '''한덕수'''(韓德銖, [[1907년]] [[2월 18일]] ~ [[2001년]] [[2월 21일]])는 [[재일본조선인총련합회]]의 초대 중앙상임위원회 의장이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을 지냈다.
         |임기 = [[1958년]] [[5월]] - [[2001년]] [[2월 21일]]
  • 허화평 . . . . 3회 일치
         대통령비서실 비서실보좌관실은 구 [[청와대]] 본관에 속해 있어서 전두환 대통령과의 관계가 매우 가깝다는 것을 방증하였다. 그러나 허화평의 권력이 너무 강하다는 지적에 1981년 12월 대통령비서실 산하 정무제1[[수석비서관]]으로 좌천되었다.[* 이후로 청와대 비서실장은 1982년 1월부터 [[이범석(1925)|이범석]]이 새로 도맡기도 하였다.]
         좌천된 상태에서도 저 정도의 위상이라면 실세로서 잘나가던 시절에 위세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1982년 5월 [[장영자·이철희 금융사기 사건]]이 일어나자 이를 전두환 대통령의 친인척에 대한 견제 기회로 인식하고 친인척의 공직 사퇴를 건의하였다. 이러한 행동이 전두환 대통령에게는 항명으로 비춰져 1982년 12월 정무제1수석비서관에서 사임하게 되었다. 이후 허삼수와 함께 청와대를 나와 [[미국]]에 체류하며 헤리티지 재단 연구원으로 일하였다.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경상북도 포항시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같은 해 [[김영삼]] 지지를 선언하며 [[제14대 대통령 선거]] 전 [[민주자유당]]에 입당하였다. 그러나 1995년 김영삼의 [[12.12 군사반란]] 및 [[5.18 민주화운동]] 관련 사법처리 조치로 기소되었다. 이에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포항)|북구]] 선거구에 무소속으로 옥중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그러나 12.12 군사반란 및 5.18 광주민주화운동과 관련하여 유죄 판결을 받아 국회의원직을 상실하였다. 이후 사면되었다.
  • 현소환 . . . . 3회 일치
         [[1995년 6월]]에서 같은 해 [[1995년 12월]]까지 [[자유민주연합]] 특임촉탁위원 직위를 지낸 그는 [[1996년]] [[국제언론인협회]](IPI) 종신회원이 됐고, [[2005년 5월]]에는 본부이사가 됐다.
  • 후쿠오카 예비교생 살인사건 . . . . 3회 일치
         2016년 2월 27일 밤, [[후쿠오카현]] [[후쿠오카시]] 니시구에 있는 [[예비교]]에 다니는 19세 여성 키타카와 히카루(北川ひかる)가 같은 예비학교에 다니는 19세 소년에게 살해당한 사건.
         범행 현장은 2월 27일 오후 9시, 후쿠오카 시 니시구의 JR 메이노하마(姪浜) 역에서 북쪽으로 800킬로미터 떨어진 주택가이다. 목격 증언에 따르면 피해자는 귀가 도중에 뒷쪽에서 습격당한 것으로 추측된다. 비명이 들렸고, 범인이 피해자에게 올라타서 습격하고 있는 것을 목격했다고 한다. 남성들이 범인을 쫓아갔으나 범인은 도주하였다.
         피해자의 아버지 키타카와 요우지(洋二)는 2월 29일, 후쿠오카 현경을 통하여 "가족에게 보물이었습니다. 갑작스러운 일로 매우 슬픔에 빠져 있습니다."라고 코멘트를 했다. 딸에 대하여 "어린 시절부터 너무나 노력을 많이 하고, 자신보다 타인을 우선하고 참을성 많은 딸이었습니다. 무엇이든 스스로 솔선하여 공부나 스포츠에 남다른 노력가였습니다. 고집도 부리지 않고 부모와 형제를 소중하게 하는 상냥한 딸이었습니다."라고 자필로 코멘트 하였다.
  • Crusader Kings 2/DLC . . . . 2회 일치
          * 2014년 12월 6일 발매
          * 2016년 2월 2일 발매
  • K리그 승강 플레이오프/2014시즌 . . . . 2회 일치
         || 일시 ||<-3><:>2014년 12월 3일(수) 19:00||
         || 일시 ||<-3><:>2014년 12월 6일(토) 14:00||
  • K리그 승강 플레이오프/2015시즌 . . . . 2회 일치
         || 일시 ||<-3><:>2015년 12월 2일(수) 19:00||
         || 일시 ||<-3><:>2015년 12월 5일(토) 14:00||
  • Y2K 버그 . . . . 2회 일치
         연도를 두글자로 기억하는 컴퓨터들이 2000년이 되면 연도를 1900년으로 인식, 오작동을 일으킬 것이라는 버그. 당시 1990년대만 해도 컴퓨터가 상당히 많은 곳에 퍼져 있었기에 이 버그는 회사나 국가의 전산 시스템, 병원의 의료기기 등에 심각한 결과를 가져올것이라고 예상되었다.[*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8122900099118001&editNo=15&printCount=1&publishDate=1998-12-29&officeId=00009&pageNo=18&printNo=10254&publishType=00010|매일경제 1998년 12월 29일 기사,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http://news.joins.com/article/15344931|중앙일보 - 지난 신문 보기-1999년 12월 31일 7면 - 'Y2K 종말론'과 꽃미남 밴드]]
  • 가석방 . . . . 2회 일치
         * 가석방이 결정되면 매월 30일에 출소하지만, 2월 마지막 날, [[석가탄신일]] 전날, [[광복절]] 전날, 교정의 날(10월 28일), 12월에는 성탄절 전날에 출소하게 된다.--가석방 해주면서 훈훈하게 하긴--
  • 강정길 . . . . 2회 일치
         * 빙그레 이글스 & [[한화 이글스]] (1986년 ~ 1995년)
         [[1985년]] [[삼성 라이온즈]]의 1차 1순위 지명을 받았으나 지명권 양도로 [[이강돈]]과 함께 [[한화 이글스|빙그레 이글스]]의 창단 멤버로 입단했다. 주 포지션은 [[1루수]]였고, 정교한 타격을 선보이는 중거리형 타자였다. [[이정훈 (1963년)|이정훈]], [[이강돈]] 선수와 함께 [[한화 이글스|빙그레 이글스]] 타선의 중심 역할을 하였다.<ref>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7&oid=109&aid=0001995565 강정길, "삼성만 만나면 펄펄 날았다"] 《Osen》, 2008년 12월 10일</ref> [[2008년]]부터 [[2013년]]까지 모교인 [[경북고등학교]] 야구부 감독을 지냈다.
  • 경산시 . . . . 2회 일치
         [[분류:경산시 출신|경산 출신 인물]][[분류:경상북도의 도시]][[분류:1989년 설치]][[분류:1995년 폐지]][[분류:1995년 설치]]
  • 경순왕 . . . . 2회 일치
         [[935년]] 12월 경순왕을 정승공(正丞公) 상주국(上柱國) 낙랑왕(樂浪王)에 봉하고 위계를 태자(太子)의 위에 두고 녹봉으로 1,000섬을 주었다. 또 왕을 모시고 온 관원과 장수들도 모두 다 관직을 주어 등용시켰다. 신라를 [[경주]]로 고치고 식읍으로 삼도록 하고, [[경주]]의 [[사심관]]에 임명하여 [[고려]]시대 사심관 제도의 시초가 되었다.
         [[대한제국]] 시절 그려져 [[경상남도]] [[하동군]] 청암면 평촌리 산 107-1 경천묘에 봉안중인 '경순왕 어진'은 [[2008년]] 경남도 유형문화재 제474호로 지정되었다.<ref>[http://www.gnmaeil.com/news/articleView.html?idxno=116829 경천묘 ‘경순왕 어진’- 경남도유형문화재 지정] 경남매일 2008년 12월 08일</ref>
  • 고아성 . . . . 2회 일치
         | 2014년 12월 15일~2014년 12월 21일<ref>{{뉴스 인용 |제목 =고아성, '최다니엘의 팝스팝스' 스페셜 DJ |url =http://entertain.naver.com/read?oid=213&aid=0000599232|출판사 =TV리포트 |저자 =신나라|날짜 = 2014-12-15|확인날짜 =2017-09-07}}</ref>
  • 광주 FC . . . . 2회 일치
         2010년 12월 16일에 창단한 구단[* 창단식 기준. [[한국프로축구연맹]]의 승인은 10월에 이미 나 있던 상태였다.]으로 2011시즌부터 [[K리그]]에 참가하고 있는 프로구단이다. K리그의 16번째 구단이며, 순서상 6번째 [[시민구단]]이다.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광주광역시]]를 연고로 두고 활동한다. 정식명칭은 "광주시민프로축구단".
         이에 따라 2010년 5월에 법인을 설립하는 한편, 6월부터 9월까지 시민주 공모를 통해 창단자금을 마련하여 동년 12월에 창단식을 갖음으로써 2012시즌에 참가하는 신생구단 광주 FC가 탄생하게 된다.
  • 구미시 . . . . 2회 일치
         [[분류:구미시 출신|구미 출신 인물]][[분류:경상북도의 도시]][[분류:1978년 설치]][[분류:1995년 폐지]][[분류:1995년 설치]]
  • 권혁 . . . . 2회 일치
          * '''2003년 2월 하와이 전지훈련 때'''[* 2006년이라고 잘못 기재했었는데, 이건 아마 사진을 2003년에 촬영한 뒤 2006년에 블로그에 업로드한 것으로 추정된다. 블로그를 보면 [[이승엽]]과 [[틸슨 브리또]], [[김진웅]], [[이정호]]가 삼성에 있었고 [[손혁]]과 [[차명주]]가 [[두산 베어스]] 소속인 상태이다. 당시 권혁은 입단 2년 차였다.] '''2.5M 깊이의 [[익사|물에 빠져 죽다가 살아난 적]]이 있다'''. 수영이 능숙하지 않음에도 깊은 데로 갔다가 빠진 경우인데, 당시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야말로 제대로 빠져서 익사 직전까지 갔다가 인공호흡 및 응급처치로 살아난 케이스. 정황상 권혁은 당시 그곳이 그렇게 깊은 곳인 줄 몰랐던 것 같다. 물놀이 분위기가 고조되어 맥주병 선수들도 너 나 할 것 없이 폭포를 왕복하고 있었는데 권혁도 그렇게 하다가 빠진 것. 체격 건장한 운동선수라 물에 빠져도 어떻게든 나올 것 같은데 당시 권혁은 얼마 버티지 못하고 가라앉았던 걸 보면 역시 물에는 장사 없다는 말이 맞는 듯. 다행히 현장에 있던 [[배영수]]와 이재국 기자[* 당시 스포츠조선 소속. 현재는 스포츠동아로 옮긴 상태이다. [[이광용의 옐로우카드]]의 주 패널로 잘 알려져 있다.]가 가까스로 그를 건져내서 응급조치로 살려냈다. [[http://blog.naver.com/namastae?Redirect=Log&logNo=40022370751|당시 사건을 자세하게 기록했다. 사진도 있음.]] 그리고 13년 뒤인 2016년 현재 배영수와 권혁은 나란히 한화 유니폼을 입게 되었다.
          * 2009년 시즌 후에 2살 연상의 여성과 결혼했으며 2010년 12월 15일. 득녀했다. ~~하지만 분유버프는 없었다~~
  • 권혁 (기업인) . . . . 2회 일치
         '''권혁'''(1950년생)은 [[대구광역시]] [[수성구]] 출신<ref>[http://www.sisapress.com/news/articleView.html?idxno=54910 탈세범이냐 정상 기업가냐 판정대 오른‘선박왕’]</ref>의 일본 시도상선 회장이다. [[경북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연세대학교]] [[경영]]학과를 졸업하였다. [[고려해운]] 출신으로써 국내 해운업계의 독보적인 존재이며, 시도상선은 보유척수 175대, 매출액 2조 1700억원, 자산 5조원의 거대 선박임대회사이다.<ref>[http://news.donga.com/Society/New/3/03/20110412/36340407/1 국세청 4101억 세금 추징 ‘시도상선’ 권혁회장은 누구]</ref> 이는 국내 1위 선박업체로 알려진 [[한진해운]]보다 높은 수치이다. 2011년 4월에는 탈세 혐의로 4101억을 추징당한 바 있다.<ref>[http://www.hani.co.kr/arti/economy/economy_general/472718.html 해운업 호황의 ‘대박’ 유령회사에 숨겼나]</ref>[[2012년]] [[11월 29일]], 징역 7년과 벌금 2284억원의 중형이 구형되었다.<ref>[http://news1.kr/articles/915172 검찰, '선박왕' 권혁 시도상선 회장에 징역 7년 구형]</ref> 그 뒤 2013년 2월 12일엔 징역 4년에 벌금 2340억원을 선고받고 법정구속됐다.<ref>[http://www.asiatoday.co.kr/news/view.asp?seq=766800 ′횡령 혐의′ 시도상선 권혁 회장, 징역 4년·법정구속]</ref> 그러나 2013년 10월 14일, 보석으로 석방됐다.<ref>[http://news.mk.co.kr/newsRead.php?year=2013&no=986489 `선박왕` 권혁 회장 보석 석방]</ref> 그리고 2014년 2월 21일 항소심에서는 징역 8월에 집행유예 2년으로 선고되면서 감형됐다.<ref>[http://news.newsway.co.kr/view.php?tp=1&ud=2014022120413661939&md=20140221204249_AO 조세포탈 혐의 ‘선박왕’ 권혁 회장, 항소심서 집행유예 감형]</ref>
  • 권희동 . . . . 2회 일치
         || '''생년월일''' || [[1990년]] [[12월 30일]] ([age(1990-12-30)]세) ||
         시즌 최종 성적은 101경기 출장 221타수 63안타 0.285 7홈런 36타점 39득점을 기록했다. 13 시즌에 비해 홈런 갯수는 줄었으나 이는 이종욱의 영입으로 주전에서 백업으로 밀려나 많이 출장하지 못했기 때문이며 오히려 13 시즌에 지적받았던 선구안이나 타격 면에서는 더욱 좋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정규 시즌 종료 후 [[상무 피닉스 야구단]]에 지원해 합격해 15시즌과 16시즌을 퓨쳐스리그에서 보내게 되었으며 팬들도 크게 성장하여 차기 NC 다이노스의 클린업 트리오를 맡아주길 바라는 상황. 그런데 2015년 2월 24일 NC 다이노스의 연습 경기에서 권희동이 등장했다. 어찌 된 상황인지는 이후 위키러의 [[수정바람]]
  • 금조(나인뮤지스) . . . . 2회 일치
         ||<#732788> {{{#FFFFFF '''출생'''}}} ||<(> [[1992년]] [[12월 17일]] / [age(1992-12-17)]세 [[대구광역시]] [[수성구]] ||
         [[2015년]] [[2월 4일]] [[주간 아이돌]] [[나인뮤지스]]편에 출연했지만 예능 초보이니만큼 말이 없는 편이었다. 또한 멤버 [[이유애린]]으로부터 맛깔진 랩으로 소개되었다.--[[이유애린|얼굴이 예뻐 그으~음조 성격도 좋아 그으~음조 바디가 예뻐 그으~음조 목소리도 프로 그으~음조 그것밖에 없어 그으~음조(...)]]-- --랩소개가 끝나서 행복한 당사자는 덤--
  • 김경식 (1960년) . . . . 2회 일치
         * [[1995년]] : 대통령 표창
         |임기 = [[2014년]] [[2월 27일]] ~ [[2015년]] [[5월 25일]]
  • 김상엽 (야구인) . . . . 2회 일치
         [[1993년]] 시즌 170탈삼진으로 탈삼진왕에 올랐으며, [[김시진]] 이후 [[삼성 라이온즈]]에서 2번째로 기록한 탈삼진 1위였다. [[1995년]]에는 17승을 거둬 1990년대 초반 전성기를 구가하였다. 그러나 당시 상대적으로 투수진이 열악하였던 소속 팀 [[삼성 라이온즈]]의 특성상 선발과 마무리를 오가는 무리한 투구로 혹사당했으며, 어깨 및 허리 부상으로 지속적인 활약을 펼치지 못하였고 [[1998년]] 이후에는 전력에서 이탈했다.
         [[1999년]] 12월 [[삼성 라이온즈]]가 [[LG 트윈스]] [[포수]] [[김동수 (야구인)|김동수]]를 FA로 영입하면서 보상 선수로 [[LG 트윈스]]로 이적하였으나 부상이 지속되어 별다른 활약을 펼치지 못하고 2경기 동안 6.2이닝, 2패만 기록한 후 [[2001년]]에 현역에서 은퇴하였다. 통산 78승 56패, 3점대 평균자책점을 기록했다. 현역으로 활동할 때 홀수 해에 성적이 좋고 짝수 해에는 성적이 부진한 징크스가 있었다.
  • 김석형 (역사학자) . . . . 2회 일치
         * 1972년 12월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 1982년 2월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 김성곤 (1913년) . . . . 2회 일치
         '''김성곤'''(金成坤, [[1913년]] [[7월 14일]] - [[1975년]] [[2월 25일]])은 [[대한민국]]의 [[기업인]], [[정치인]]으로 호는 성곡(省谷)이다.
         [[1967년]] 김성곤은 [[길재호]], [[백남억]], [[김진만]]과 함께 [[민주공화당]] 내의 핵심인물이 된다. 그 이후 [[1971년]]에 치러진 [[대한민국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당선되었다. 그리고 [[1971년]] [[10월 2일]]에 야당과 동조하여 [[박정희]] 대통령의 명령을 어기고 [[오치성]] 내무부장관 해임 건의안을 통과시켰는데 이를 [[10.2 항명 파동]]이라 한다. 그 이후 김성곤은 [[10.2 항명 파동]]의 주동인물로 지목받아 경위조사를 받고, 정계를 은퇴하게 된다. 그 뒤 [[1973년]]에는 [[대한상공회의소]] 제8대 회장을 지냈으며, [[1974년]]에는 대한양회 인수, 한국신문연구소 회장 취임을 했다. 그 뒤 [[1975년]] [[2월 25일]] 사망하였으며 가족장으로 [[국민대학교]] 뒷산에 안장되었다가 [[1984년]] 강원도 평창에 이장되었고, 2014년 고향인 [[대구광역시]] [[달성군]] [[구지면]]으로 재이장되었다. [[국민훈장]] 무궁화장이 추서되었다.
  • 김세윤 (1999년) . . . . 2회 일치
         |클럽팀 최신 업데이트 날짜=[[2017년]] [[12월 26일]]
         |국가대표팀 최신 업데이트 날짜=[[2017년]] [[12월 26일]]
  • 김승관 . . . . 2회 일치
         || '''프로입단''' || 1995년 고졸연고지명 ||
         1995년 [[삼성 라이온즈]]에 입단했다. 대구상고 시절에는 [[이승엽]]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좌승엽 우승관으로 불리던 라이벌이었다. 당시 투수였던 [[이승엽]]이 팔꿈치 부상과 어깨 혹사로 인해 타자로 전향하자, 그가 "승엽이는 방망이도 잘 쳐요"라고 말을 했을 뿐인데…
  • 김용국 (야구인) . . . . 2회 일치
         |마지막 경기 = [[KBO (야구)|KBO]] / [[1995년]]
         * [[태평양 돌핀스]] (1994년 ~ 1995년)
  • 김재홍 (1958년) . . . . 2회 일치
         * 2014년 9월 ~ 2014년 12월 : 단국대학교 석좌교수
         * 2015년 1월 ~ 2018년 2월 : 제19대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 사장
  • 김종호(1933) . . . . 2회 일치
         동정복 어깨에 육군용 견장 계급장이 달려있는 것이 보인다. 1987년 12월 육군이 해군의 [[수장(장식)|수장]] 계급장을 못알아본다고 해서 채택했다가 1992년 11월 폐지되었다.
         1952년에 [[해군사관학교]] 10기로 입학해 1956년 임관했다. 목성함장과 부산함장을 지냈고 1984년부터 1986년까지 한국함대사령관을 지냈다. 해당 한국함대는 뒤에 명칭이 바뀌어 [[해군작전사령부]]가 되었다.[* 해작사의 영어 표기도 Naval Operation Command가 아닌 Korea Fleet Command이다. 일본의 경우 작전사령부에 해당하는 함대가 [[자위함대]]로 [[함대]]급 부대인 [[잠수함대]], [[호위함대]], [[항공집단]]의 상위기관이다.] 1986년 2월 1일에 한국함대가 해군작전사령부가 되자 초대 작전사령관을 지냈다.
  • 김천시 . . . . 2회 일치
         [[분류:김천시 출신|김천 출신 인물]][[분류:경상북도의 도시]][[분류:1949년 설치]][[분류:1995년 폐지]][[분류:1995년 설치]]
  • 김태우(god) . . . . 2회 일치
         2009년 2월 25일 제대 후 그 해 9월 3일 EP 'T-Virus'를 발매하고 활동을 시작했으며 타이틀곡은 '[[사랑비(김태우)|사랑비]]'. 곡도 세련된 멜로디와 김태우의 목소리와 창법에 잘 어울리는 곡으로 많은 사랑을 받으면서 가요 프로그램에서 여러 번 1위를 차지했고, 또 앨범 전체적으로도 [[박진영]]의 느낌이 아닌 김태우 자신만의 음악 색깔을 찾은 앨범이라는 좋은 평가를 받았다. 다만 190cm이 넘는 키로 곡과 잘 매치되지 않는 ~~군인 냄새 나는~~ 춤을 추는 바람에 '춤만 좀 빼달라'는 부탁을 많이 들었음에도 꿋꿋이 춤을 췄다. ~~god 때도 춤은 못 췄다~~[* 김태우는 춤을 못추지 않고 오히려 잘 추는 편이다. [[문희준]]도 [[20세기 미소년]] 방송분에서 김태우에게 "190 넘는 사람 중에 가장 춤을 잘 춘다"고 평가해준 바 있다.]
         2013년 2월 20일. 미니앨범 'T-LOVE'를 발매하고 타이틀곡 'Cosmic Girl'로 활동했다. 크게 나쁜 평은 없고 그럭저럭 반응도 있는 편이나, 이번에도 역시 '사랑비' 시절을 그리워하는 반응이 많았다.
  • 김현정 (1979년) . . . . 2회 일치
         :일시 : 2014년 2월 4일~12일
         대표 저서로는 《랄라의 외출》이 있으며, 이 서적은 2014년에 세종도서 문학나눔에 선정되어 화제가 되기도 하였다.<ref>[http://www.newdaily.co.kr/news/article.html?no=226781 배우 화가 김현정 ‘랄라의외출’ 세종도서 문학나눔 선정], 뉴데일리, 2014년 12월 9일 작성.</ref>
  • 김효진 (배우) . . . . 2회 일치
         '''김효진'''([[1984년]] [[2월 10일]] ~ )은 [[대한민국]]의 [[배우]]이다.
         2011년 12월에는 8살 연상의 배우 [[유지태]]와 5년여의 열애 끝에 웨딩마치를 올렸다. 2014년 7월 5일, 첫 아이인 아들 유수인을 출산했다.<ref>{{뉴스 인용 |제목 = 김효진 유지태 부부 5일 득남 "가슴 벅차다"|url =http://entertain.naver.com/read?oid=421&aid=0000906672|출판사 =뉴스1 |저자 =권수빈 |날짜 = 2014-07-05 |확인날짜 =2017-09-29 }}</ref>
  • 김희정 (펜싱선수) . . . . 2회 일치
         {{금메달|[[1995년 세계 주니어 펜싱 선수권 대회|1995 파리]]|에페 개인전}}
         '''김희정'''(金熙正<ref>{{뉴스 인용 | 제목=<프로필> 펜싱 에폐 금메달 金熙正 | url=https://sports.news.naver.com/general/news/read.nhn?oid=001&aid=0004013398 | 출판사=연합뉴스 | 저자= | 쪽= | 날짜=1995-04-15 | 확인날짜=2018-09-14}}</ref>, [[1975년]] [[1월 1일]] ~ )은 [[대한민국]]의 은퇴한 [[펜싱]] 선수로 주 종목은 [[에페]]이다. [[1996년 하계 올림픽|1996년]]과 [[2004년 하계 올림픽]]의 출전 경험이 있다.<ref name="sports-reference">{{웹 인용|url=http://www.sports-reference.com/olympics/athletes/ki/kim-hui-jeong-1.html |제목=Kim Hui-Jeong Olympic Results |확인날짜=2012년 2월 19일 |웹사이트=sports-reference.com}}</ref> 그녀는 [[2002년 아시안 게임]]에도 참가하여 개인전과 단체전 2관왕을 하기도 하였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7&oid=020&aid=0000154716 펜싱 이승원-김희정 2관왕 찔렀다]</ref>
  • 남일해 . . . . 2회 일치
         |[[2002년 2월]]||남일해 골든앨범||
         |[[2013년]] [[12월 23일]]||향수의 멜로디||
  • 로베르 기스카르 . . . . 2회 일치
         이후 기스카르는 그해 12월에 콘스탄티노플에 대사로 퐁투아즈 백작 라뒬프를 보냈는데, 표면적으로 그가 온 이유는 니케포로스 3세에게 헬레나에게 만족스러운 대우를 해달라고 요구하기위해서였지만, 그의 진짜 목적은 제국의 수도에 있던 노르만 용병들의 세력을 결집시켜 원정에 끌어들이는것과, 당시 내무대신이자 실세로 떠오르던 알렉시오스 콤네노스의 협조를 얻어내는 것이었다. 그러나 정작 그가 예상치못하게 알렉시오스가 니케포로스로부터 제위를 찬탈해 알렉시오스 1세로 즉위해버렸고, 노르만족들을 결집시킬 역할을 했어야될 라뒬프 백작은 오히려 알렉시오스에게 감화되어서 그와 우호관계를 구축하자는 기스카르의 의도와는 정반대인 답을 해버린다(....) 라뒬프의 말을 듣고 화가 머리끝까지 난 기스카르는 라뒬프를 ~~갈군~~호되게 질책한 뒤, 브란디쉬와 오트란토에 이미 모여있던 그의 원정군들을 아드리아해 너머 비잔티움령에 보내려 했다.[* 이미 아드리아해 너머에는 그의 장남 [[보에몽 1세|보에몽]]이 이끄는 선봉대가 상륙해 있던 상황이었다.]
         결국 전투는 노르만측의 승리로 끝났으며, 황제측 지휘관으로 나선 게오르기오스의 아버지인 니케포로스 팔라이올로고스와 미하일 7세의 동생인 콘스탄티오스 두카스도 여기서 전사한다. 황제는 겨우 목숨만 건져서 이마에 상처에 출혈과 통증을 참으며 오크리드의 산악지대로 도망쳤다. 그나마 황제에게 위안이었던건, 디라키온이 이듬해 2월까지 넉달을 필사적으로 버텼다는것이다. 그러나 결국 디라키온은 한 베네치아 주민이 밤중에 성문을 열어 함락된다
  • 류원기 . . . . 2회 일치
         '''류원기'''([[1947년]] [[2월 6일]] [[경상북도]] ~)출신 그는 역도연맹과 대한역도연맹의 회장을 맡은 적이 있다.
         여대생 청부살인사건의 살인교사 혐의로 체포된 윤길자의 남편으로 윤길자의 형집행정지를 돕기 위해 검사와 의사에게 뇌물을 수수하는 등 담합 및 횡령 등으로 징역 4년 6개월을 구형받았다.<ref>{{뉴스 인용|저자=유호윤|제목=‘여대생 청부살해범’ 남편에 징역 4년 6개월 구형|url=http://news.kbs.co.kr/news/view.do?ncd=2783485|날짜=2014-01-04|확인날짜=2016-02-11|뉴스=KBS}}</ref> 1심 재판부에서 횡령 형의만 적용받아 징역 2년 형을 선고받았으며,<ref>{{뉴스 인용|저자=서재근|제목=法, '여대생 청부살해' 영남제분 회장 징역 2년 실형 선고(1보)|url=http://news.tf.co.kr/read/economy/1312481.htm|날짜=2014-02-07|확인날짜=2016-02-11|뉴스=더팩트}}</ref> 2014년 2월 바로 상고했다.<ref>{{뉴스 인용|저자=나혜윤|제목=‘여대생 청부살인’ 주치의·남편 모두 항소 네티즌 “뻔뻔의 극치.. 무기징역도 아까워”|url=http://www.goba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6202|날짜=2014-02-11|확인날짜=2016-02-11|뉴스=go발뉴스}}</ref> 구치소에 수감된 채 2심 재판을 받던 중 보석으로 풀려나 불구속 상태로 선고 공판에 출석했으며, 같은 해 10월, 2심에서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으로 감형 받았다.<ref>{{뉴스 인용|제목=‘여대생 청부살해’ 남편 영남제분 회장, 실형→집행유예 ‘감형’…주치의는 벌금형|url=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4/10/30/2014103002297.html|날짜=2014-10-30|확인날짜=2016-02-11|뉴스=조선일보}}</ref>
  • 류중일 . . . . 2회 일치
         [[2006년]]·[[2009년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및 [[2010년 아시안 게임|광저우 아시안 게임]] 국가대표팀 코치로 발탁되어 활동했다. [[1999년]]을 마지막으로 현역에서 은퇴하고 [[2000년]]부터 [[김용희 (야구인)|김용희]], [[김응용]], [[선동열]] 감독 밑에서 코치로 보좌한 후, [[2010년]] [[12월 30일]] [[선동열]]이 경질되자 [[선동열]]의 후임으로 [[2011년]] [[1월 5일]]에 [[삼성 라이온즈]]의 감독으로 취임하였다.<ref>[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609&yy=2011 류중일 감독 "신인 패기로 KS 우승 데뷔 축포 쏜다" ] - 매일신문</ref> 그가 감독으로 부임하게 되면서 [[삼성 라이온즈]]는 오랜만에 프랜차이즈 스타 출신 감독을 맞이하게 되었다.<ref>최초의 [[삼성 라이온즈|삼성]] 선수 출신 감독은 [[서정환]]이고, 류중일은 [[삼성 라이온즈|삼성]] 출신 선수 중 선수 및 코치로 활동하면서 단 한번의 팀 이동 없이 감독이 된 첫 번째 경우이다.</ref> [[2011년]] 감독 부임 첫 해에 정규 리그 우승과 [[2011년 한국시리즈|한국시리즈]] 우승을 확정지으며, "야구 대통령"을 줄인 '''"야통"'''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고,<ref>[http://sports.chosun.com/news/ntype.htm?id=201109280100191240017032&servicedate=20110927 류중일호, 우승을 가능케 한 키워드 4개] - 스포츠조선</ref> [[대한민국]] 챔피언 자격으로 참가한 [[2011년 아시아 시리즈]]에서 [[일본]] 챔피언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소프트뱅크]]를 꺾고 [[대한민국]] 프로 야구 팀 최초로 [[아시아 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다.<ref>[http://osen.mt.co.kr/article/G1109325476 '야통' 류중일 감독, 야신도 못한 亞 정상 위업] - OSEN</ref> [[2012년]] 역시 정규 리그 우승과 [[2012년 한국시리즈|한국시리즈]] 우승을 이뤄 냈다. [[2013년]] 정규 리그 우승과 [[2013년 한국시리즈|한국시리즈]] 우승 후 [[2013년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2013 WBC]]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국가대표팀]] 감독으로 발탁되었으나 1라운드에서 탈락하는 수모를 겪었다. [[2013년]] 시즌 후 계약 기간 3년의 조건으로 계약금 6억 원, 연봉 5억 원 등 총액 21억 원에 [[삼성 라이온즈]]와 재계약했다.<ref>[http://sports.news.naver.com/sports/index.nhn?category=kbo&ctg=news&mod=read&office_id=109&article_id=0002672898 류중일 감독, 3년 재계약…총액 21억원 사상 최고 대우] - OSEN</ref> [[2014년 아시안 게임|2014 인천 아시안게임]]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국가대표팀]] 감독으로 발탁되어 [[2013년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2013 WBC]] 1라운드 탈락의 쓰라림을 딛고 우승을 이뤄냈다. [[2014년]]에 정규 리그 우승과 [[2014년 한국시리즈|한국시리즈]] 우승을 이끌면서 팀의 사상 최초 통합 4연패를 달성하였고, [[2015년]] 역시 정규 리그 우승으로 5년 연속 정규 리그 우승으로 새 역사를 썼지만, [[2015년 KBO 한국시리즈|한국시리즈]]가 개최되기 전, 삼성 투수들의 해외 원정도박 파문으로 인해 [[2015년 KBO 한국시리즈|한국시리즈]] 우승을 [[두산 베어스]]에게 내주고 만다. [[2016년]]에는 [[박석민]], [[야마이코 나바로|나바로]], [[채태인]]을 잃었고, 외국인 선수 농사 실패, 선수들의 줄부상과 부진으로 팀 최초 정규리그 9위에 머물게 되자, [[2016년]] [[10월 15일]] 계약 만료로 [[김한수 (야구인)|김한수]]에게 감독직을 넘기고 기술고문을 맡게 되었다.
         |임기 = 2010년 12월 30일 ~ 2016년 10월 14일
  • 마츠자카소 . . . . 2회 일치
          * 2009년 3월에 마츠자카시 차원의 문제가 되었는데, 2004년 2월 24일 푸젠성의 한 식품회사가 송판(松阪)이라는 상표를 신청하여, 2008년 12월 20일 중국 상표국이 공고하였다. 마츠자카시에서는 2009년 3월 3일 마츠자카소 연락협의회를 통하여 이의를 제기하였으며 시장이 중국을 직접 방문할 계획도 발표했다.
  • 모리오리 족 . . . . 2회 일치
         1835년 12월, 수백년간 평화롭게 살던 모리오리 족은 갑자기 뉴질랜드에서 나타난 [[마오리 족]]의 공격을 받고 '''[[멸망]]했다'''. 11월 19일, [[총기]]와 [[곤봉]], [[도끼]]로 무장한 500명의 마오리 족이 채텀 제도에 나타났으며, 12월 5일에는 400명이 추가로 나타났다. 채텀 제도를 공격한 약 900명의 마오리 족은 수적으로는 당시 모리오리 족(2000명으로 추정)의 절반 정도에 불과했으나, 수렵과 채집으로 살아가던 모리오리 족은 단합된 정치 조직이 없었으며, [[무기]]를 비롯한 전쟁 기술도 갖추고 있지 않았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마오리 족은 장기간의 전쟁으로 조직화된 전쟁 문화, 정밀하게 만들어진 원주민 무기를 가지고 있었고 심지어 서양인들과의 교류로 [[총기]]까지 가지고 있었다.
  • 미즈우치 타카시 살인사건 . . . . 2회 일치
         그러나 미즈우치는 경찰관 신분이나 오사카에서 온 것을 밝혔으나, 후에 아내가 될 여성과 간사이에서 이미 교제하고 있었다는 것은 말하지 않았다. 그리고 미즈우치는 반년도 되지 않아 시라타 히카루에 대한 관심을 잃어버렸다. 이 해 가을 무렵 시라타 히카루는 친구에게 미즈우치가 연락을 무시하고 데이트도 자주 취소한다고 고민을 털어놓았다. 시라타 히카루는 "어차피 나는 '센다이의 여자'일까", "(미즈우치가) 스노 보드만 하고 있다. 나에게 관심이 없어진걸까."하는 발언을 했다고 한다. 미즈우치는 교제에 불성실해져서 시라타 히카루는 12월에 생일을 맞았지만, 미즈우치는 생일인데도 만나주지 않고, 놀아주거나 선물을 주지도 않았다고 한다. 이에 시라타 히카루는 "괴롭다. 공부에 집중할 수 없다."고 토로했다고 한다.
         시라타 히카루는 졸업 전 2월 지인 여성에게 전화를 걸어 "봄부터 오사카에 간다. 남자친구가 있다."고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고 한다.
  • 바실레이오스 1세 . . . . 2회 일치
         그러나 황제는 제국의 서방 속주를 탈환하기 위해 해당 행위를 한거지 회개할 생각은 딱히 없었기에, 교황의 사절이 보낸 요구[* 공의회의 교황의 사절 주도]를 무시하고, 포티우스를 파문시키는데 그치게 한다. 그런데, 공의회가 끝나기 직전인 870년 2월에, 불가리아 왕인 보리스 1세가 사절을 보낸다. 당시 그는 포티우스 분열때 자신을 무시한 포티우스에 대항해 가톨릭을 불가리아에 퍼뜨리고 있었는데, 이게 그리 신통치 못했기 때문이다. 이에 그는 총대주교구를 설치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런데 이 총대주교를 누구 휘하에 두느냐가 문제였다. 교황휘하인가, 콘스탄티노플 대주교 휘하인가? 그리고 바실레이오스는 불가리아에 자기 세력을 키울 기회를 놓칠 위인이 아니었고, 즉각 당시 회의장에 있었던 안티오크와 예루살렘,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구 대표를 불러 불가리아 총대주교구는 누구 휘하에 두어야 되는지를 물었다. 이들의 답은 뻔했고, 교황청에서 온 사절들이 항의했지만 별 소용이 없었다. 이렇게 되어서 불가리아는 정교회의 품으로 돌아왔으며, 현재까지 정교회국가로 남아있다. [* 어찌보면, 이때의 공의회가 한나라의 종교를 결정한셈.]
         같은해 2월, 제국은 프랑크 황제 루트비히 2세의 서신을 가지고 왔다. 그는 2년전에 사라센이 장악하고 있던 남이탈리아의 바리를 공격했는데, 별 재미를 보지 못했다. 그러자 바실레이오스는 그에게 해군함대를 보내 지원해주겠다고 하면서 그의 아들인 콘스탄티노스와 딸 헤르밍가르데의 결혼도 제의한다. 루트비히는 우호적인 답신을 보냈고, 869년에 니케타스 제독을 지휘관으로 한 제국의 함대가 바리를 향해 출항한다. 그러나 니케타스는 프랑크군이 군기가 형편없는 모습을 보고 경멸을 감추지 못했고, 루트비히에게 '프랑크 왕'이라고 한단계 낮춰부르기까지 했다. 결국 두사람사이에 싸움이 벌어졌고, 결국 니케타스는 함대를 이끌고 콘스탄티노플로 돌아가버린다. 이에 대해 항의하기 위해 사절을 보낸것이다. 자칫 전쟁이 일어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으나, 루트비히가 베네벤토를 공격하다가 그곳 공작의 포로가 되어 베네벤토를 다시는 침략하지 않겠다고 복음서에 맹세를 한 굴욕을 당해 어느정도 조용해졌다.
  • 박부남 (1931년) . . . . 2회 일치
         * 아버지 : [[박문웅 (1890년)|박문웅]]((朴文雄, [[1890년]] [[12월 7일]] - [[1959년]] [[8월 14일]])
         * 남편 : [[이열희 (1924년)|이열희]](李烈熙, [[1924년]] [[12월 18일]] - [[2012년]] [[8월 9일]]), [[치과]]의사
  • 박석민 . . . . 2회 일치
         >그는 [[몸에 맞는 볼]]과 관련한 해프닝 직후 [[홈런]]을 친 일이 두 번이나 있다. [[2009년]] [[6월 24일]] [[대구시민운동장 야구장|대구]] [[한화 이글스|한화]]전 8회말 공격 때 한화 브래드 토머스가 던진 볼이 박석민의 오른쪽 발 쪽으로 날아왔다. 박석민은 그 순간 볼이 자신의 발등에 맞았다면서 1루에 출루했다. 그러나 실제 볼은 박석민에게 맞지 않았다. 실제 볼은 포수 옆 그라운드를 맞고 [[한화 이글스]] [[포수]] [[신경현]]의 목 부분으로 튀었다. 이에 [[한화 이글스]] 코칭 스태프가 심판에게 항의를 하였고 결국 볼 카운트에 볼 하나가 늘어난 것으로 정정했다. 다시 타석으로 돌아온 박석민은 토머스의 볼을 타격하여 중견수 쪽 담장을 넘어가는 1점 홈런을 기록했다. 2번째 일화는 [[2009년]] [[8월 16일]] [[대구시민운동장 야구장|대구]] [[KIA 타이거즈|KIA]]전 8회말 공격 때의 일이다. [[KIA 타이거즈]] [[투수]] [[곽정철]]이 박석민의 몸 쪽으로 볼을 던졌는데, 이 볼이 박석민의 팔꿈치 쪽으로 날아왔다. 박석민은 역시 볼이 자신의 팔꿈치 보호대 부분에 맞았다고 심판에게 이야기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실제로 이 볼은 팔꿈치에 맞지 않고 포수 뒤로 빠져 나갔다. 다시 타석으로 돌아온 박석민은 곽정철의 볼을 통타, 왼쪽 담장을 넘어가는 1점 홈런을 기록했다. 이 일화는 [[2009년]] [[12월 25일]] [[MBC 스포츠플러스]]가 방송한 《프로 야구 결산 특집 - 야구는 야구다》의 코미디 에피소드 부분에서 〈소탐대득 - 작은 것(몸에 맞는 볼)을 탐하다가 큰 것(홈런)을 얻게 됨〉이라는 제목으로 방영되기도 했다.
         [[2009년]] [[12월 31일]]에 2살 연상의 여성과 결혼을 했다. ~~아 [[양준혁|양신]]~~ 사실 결혼 전에 이미 동거를 하고 있었고, 아들도 결혼 전에 낳았다. 아들 이름은 준현.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하라는 야구는 안 하고]]~~ 2013년 현재, 박석민은 예비 학부모이다. ~~설마 장어덮밥을 좋아하는 이유가....?~~
  • 박순석 . . . . 2회 일치
         1904년 02월 18일 ~ 1992년 02월 27일
  • 박승호 (야구인) . . . . 2회 일치
         '''박승호'''(朴承昊, [[1958년]] [[2월 9일]] ~ )는 전 [[KBO 리그]] [[삼성 라이온즈]]의 [[내야수]]이자, 전 [[NC 다이노스]]의 1군 타격코치이다.
         [[삼성 라이온즈]]에서만 현역 생활을 하다가 은퇴한 박승호는 [[1993년]]부터 [[1999년]]까지 친정 팀에 계속 머무르며 타격코치로 일했다. 그는 5년 코치 생활을 하는 동안 [[1995년]] [[투수]]로 입단한 [[이승엽]]에게 타자로 전향할 것을 권유하기도 했는데 당시 [[백인천]] 감독, [[박흥식 (야구인)|박흥식]] 코치와 함께 그가 대형 타자로 성장하는 데에 도움을 주었다.<ref>[[매거진 t]] - 2008년 9월 기사 [http://www.magazinet.co.kr/Articles/article_view.php?mm=002004000&article_id=48717 "t MAP - 이승엽"]</ref>
  • 박인태 . . . . 2회 일치
         '''박인태'''(1995년 1월 4일~ )는 [[창원 LG 세이커스]]의 센터이다.
         [[분류:1995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분류:대한민국의 농구 선수]][[분류:대구해서초등학교 동문]][[분류:계성중학교 동문]][[분류:계성고등학교 (대구) 동문]][[분류:연세대학교 교육과학대학 동문]]
  • 박정수(정치인) . . . . 2회 일치
         1932년 2월 9일 - 2003년 3월 24일
         1932년 2월 9일 [[경상북도]] [[김천시|김천군]]에서 태어났다. [[김천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 3학년이던 1953년에 미국으로 유학을 가서 1958년 [[조지타운 대학교]]를 졸업하였다. 1965년에는 부인 [[이범준(동명이인)|이범준]]과 함께 미국 [[아메리칸 대학교]]에서 정치학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귀국하였다. 이후 1968년 무임소장관 보좌관을, 1973년 [[국민대학교]] 교수를 지냈다.
  • 박진석 (프로게이머) . . . . 2회 일치
         '''박진석'''([[1995년]] [[3월 4일]] ~ )은 [[대한민국]]의 전직 [[스타크래프트 II]] [[프로게이머]]이다. '''Trend'''라는 아이디를 사용하며, 종족은 [[프로토스]]이다.
         [[분류:1995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한민국의 e스포츠 선수]][[분류:스타크래프트 II 프로게이머]][[분류:프로토스 선수]][[분류:삼성 갤럭시 (e스포츠)의 선수]][[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
  • 박철우(배구) . . . . 2회 일치
         2010년 12월 4일 V리그 개막전에서 친정 팀 현대캐피탈을 상대로 주전으로 나왔다. 포지션은 현대에서 뛰었을 때처럼 라이트. [[가빈 슈미트|가빈]]이 레프트[* 명목상 레프트일 뿐이지 실제로 레프트 공격수가 받아야 할 대부분의 리시브는 가빈의 대각에 서 있는 석진욱이나 신으뜸이 담당했다.]로 옮겼지만 정작 몰빵이 중요한 순간에 [[신치용]] 감독은 박철우를 교체시키고 가빈을 중용했다. --몰빵에서 라이트가 레프트에게 밀리다니!!-- [[안습]] 중요한 순간에 실수하거나 정줄 놓는건 현대캐피탈에 있을 때와 달라진 게 없어서 비록 개막전 경기에서는 현대캐피탈이 완패를 당했지만, '경기 중 중요한 고비 때마다 박철우가 정줄을 놔버려서 현대캐피탈에게 유리하게 될 것이다'라는 기대를 가진 현대 팬들이 많아졌다.
         그리고 2016년 11월 27일 소집 해제되어 소속 팀에 복귀하였으며 12월 2일 [[인천 대한항공 점보스|대한항공]]전부터 출전할 예정이다. 적지 않은 나이에 현저히 떨어진 경기 감각을 얼마나 빨리 끌어올리느냐가 중요하게 됐다. 소집해제 이후 출전하는 경기마다 조금씩 기량을 끌어올리더니 17년 3월 7일 현재 팀의 포스트시즌 진출에 있어 중요한 인물로 꼽히고있다(소집해제 후 같은 팀 날개 공격수 타이스의 높은 공격율의 분담을 첫 목적으로 하였는데 이제야 본격으로 효과가 나타나기 시작하고있다.).
  • 배천석 . . . . 2회 일치
         |클럽팀 최신 업데이트 날짜 = [[2016년]] [[12월 3일]]
         2014년 12월 18일, [[부산 아이파크]]로의 이적이 발표되었다. 2016년 [[전남 드래곤즈]]로 이적했다.
  • 백진희 . . . . 2회 일치
         '''백진희'''([[1990년]] [[2월 8일]] ~ )는 [[대한민국]]의 [[배우]]이다.
         1990년 2월 8일 [[경상북도]] [[김천시]] 봉산면 (김천시) (봉산로) 에서 태어났다. 2008년 독립영화 《사람을 찾습니다》에 출연하며 본격적인 연기 활동을 시작했고, 《[[반두비]]》로 주목을 받았다.<ref>{{뉴스 인용|저자1=윤희성|제목=백진희│My name is…|url=http://tenasia.hankyung.com/archives/3538|날짜=2013-06-18|확인날짜=2016-01-27|뉴스=텐아시아}}</ref><ref>{{뉴스 인용|저자1=최은화|제목=[쿠키人터뷰]‘어쿠스틱’ 백진희, “한국판 아만다 사이프리드? 좋죠~”|url=http://news.kukinews.com/article/view.asp?page=1&gCode=ent&arcid=1288698003&cp=nv|날짜=2010-11-02|확인날짜=2016-01-27|뉴스=쿠키뉴스}}</ref>
  • 변현제 . . . . 2회 일치
         * [[2014년 2월]] 픽스 9차 소닉 스타리그 8강
         * [[2015년 2월]] 스베누 10차 소닉 스타리그 8강
  • 산바람 . . . . 2회 일치
         2012년 [[시드노벨]] 상반기 공모전에 입선하여, 2012년 12월달에 [[용사 더하기 마왕은!?]]이 출간되었다.
         2015년 12월부터 레진 코믹스 웹소설란에서 [[진심 숨만 쉬며 살고 싶은데]]를 연재하고 있다.
  • 상주시 . . . . 2회 일치
         [[분류:상주시 출신|상주 출신 인물]][[분류:경상북도의 도시]][[분류:1986년 설치]][[분류:1995년 폐지]][[분류:1995년 설치]]
  • 서정환 . . . . 2회 일치
         * [[요미우리 자이언츠]] 지도자 연수 (1995년)
         [[1989년]]에 은퇴하여 [[해태 타이거즈]]에서 코치 생활을 하다가 [[1995년]]에 도일하여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 지도자 연수를 받았다. [[1996년]] 고향 팀 [[삼성 라이온즈]]로 복귀하여 수비코치로 일했다. [[1997년]] [[10월 30일]] [[삼성 라이온즈]]는 라이벌 팀 [[해태 타이거즈]]를 벤치마킹하려는 경영진의 결정으로 [[해태 타이거즈|해태]]에서 오랜 선수 생활을 했던 그를 [[백인천]]의 후임으로 [[삼성 라이온즈|삼성]] 선수 출신 최초의 감독에 임명하였다.<ref>[http://sports.news.naver.com/sports/index.nhn?category=sports_general&ctg=news&mod=read&office_id=001&article_id=0004201661 삼성,제 9대 감독으로 서정환 코치 전격 발탁] - 연합뉴스</ref><ref>서정환 다음으로 [[삼성 라이온즈|삼성]] 선수 출신으로 감독이 된 경우는 [[류중일]]이며, 서정환과 달리 [[류중일]]은 원 클럽맨 출신으로 삼성의 감독이 된 첫 번째 경우이다.</ref> [[1998년]]에 정규 시즌 2위, [[1999년]](이 해에 잠깐 양대 리그제로 바뀌었다.) 드림리그 1위라는 좋은 성적을 거두지만, [[롯데 자이언츠]]에 패해 [[1999년 한국시리즈]] 진출에 실패하고 그 해 [[11월 1일]]에 사임하였다.<ref>[http://sports.news.naver.com/sports/index.nhn?category=sports_general&ctg=news&mod=read&office_id=001&article_id=0004563593 프로야구 삼성, 서정환 감독 사의] - 연합뉴스</ref> [[2001년]] [[해태 타이거즈|해태]]로 돌아와 2군 감독을 맡았고 시즌 중 수비코치로 보직 변경되었다. 이후 구단주가 바뀐 [[KIA 타이거즈]]에서 [[김성한 (1958년)|김성한]], [[유남호]] 감독을 보좌하여 코치 생활을 하였다. [[2005년]] [[유남호]] 감독이 시즌 최하위의 책임을 지고 시즌 중 사임하자 [[KIA 타이거즈]]의 감독 대행을 맡았고 [[2006년]] 정식 감독에 취임하였다.
  • 서태식 . . . . 2회 일치
         * 1995년~ : 세계경제연구원 감사
         * 2002년 12월 국무총리 표창
  • 소명(가수) . . . . 2회 일치
         '''소명'''(본명 : 소명호, {{한자|蘇明浩}}, [[1958년]] [[12월 11일]] ~ )은 [[대한민국]]의 [[가수]]이다.
         * 2005년 12월 대한민국 연예예술상 수상
  • 소진은 . . . . 2회 일치
         일제 강점기 말기에는 다시 관계로 돌아와 총독부 군수직을 지냈다. [[평안북도]] 선천군수(1937년 8월 6일), 의주군수(1941년 3월 31일 임명)를 역임했다. 1938년 8월 1일 당시에는 종6위에 서위되어 있었으며, 그밖에 쇼와 대례 기념장(1928년 11월 16일), 훈8등 서보장(1930년 2월 12일), 훈7등 서보장(1933년 9월 4일), 훈6등 서보장(1935년 9월 9일), 훈6등 단광욱일장(1940년 4월 29일), 훈5등 서보장(1941년 8월 9일), 일본적십자사 유공장(1944년 12월) 등을 받았다. 특히 훈6등 단광욱일장은 선천군수 재직 시절 [[중일 전쟁]] 당시에 군대의 숙영 및 급식, 군용물자의 조달, 군대 군인 및 파견 가족의 후원 및 위로, 국채 소화 및 저축 장려, 국방헌금 및 애국기 헌납자금 모집, 국방 사상 보급 및 선전에 관한 업무를 수행하여 받은 것이었다.
  • 송종호 (1956년) . . . . 2회 일치
         '''송종호'''(宋宗鎬, [[1956년]] [[12월 6일]] ~ , [[대구광역시|대구]])는 대한민국의 공무원이다.
         |임기 = [[2011년]] [[12월 7일]] ~ [[2013년]] [[3월 15일]]
  • 송창현 . . . . 2회 일치
         어쨌든 [[장성호]]와 1:1로 트레이드 할만큼 [[김응용|코끼리 감독]]의 기대를 받고 전지훈련 명단에 들어갔으나, 이후 드러나는 모습은 실망스러울 뿐이었다. 자체 청백전을 제외하고 2월 21일 기준 연습경기에 나와 2이닝 동안 12실점, 볼넷 5개, 사구 1개, 폭투 1개, 삼진 1개를 기록하는 등 최악의 투구 내용을 보였다. 한화팬들로서는 미치기 딱 좋을 수준이었다. 이후 2군에서도 방어율 7점대의 성적을 찍으면서 한화 팬들이 [[김응용|코감독]]을 씹을 때나 쓰는 안주거리화가 되나 했는데 1군 콜업 이후 엄청난 성장세를 보여주기 시작하였다.
         2014 시즌 이후 마무리 훈련에 참가했지만 부상으로 도중에 낙마했다. 이후 11월 19일 요코하마의 한 병원에서 진단을 받은 결과 좌측 어깨 전관절 와순 부분 파열로 접합 수술을 받았다. 26일에 퇴원해서 귀국한 이후 서산에서 재활훈련에 들어간다고 한다. 단계적으로 내년 2월쯤에 캐치볼을, 5월달쯤에 실전 피칭에 들어간다고 한다.
  • 슈가(방탄소년단) . . . . 2회 일치
          * 2015년 12월 27일, [[일본]] [[고베]] 콘서트 시작 전 슈가와 [[뷔]]가 어지럼증을 호소해 병원에서 진료를 받았다. 이로 인해 27일과 28일 예정되어 있던 일본 콘서트가 취소되고 2016년 3월로 미뤄졌다. 29일부터는 예정대로 스케줄을 소화했는데, 슈가는 이미 2013년에 [[충수염]]으로 인해 연말 가요제에 불참한 적이 있어서 스케줄을 빠지고 싶지 않다는 의사를 회사 측에 강력하게 밝힌 듯하다. 그리고 2016년 1월 초에 멤버 모두가 휴가를 받았을 때, 혼자 '''고베에 다녀왔다'''. 고베 콘서트 때의 일이 꽤 큰 죄책감으로 남았던 듯. 다녀와서는 [[http://mblogthumb2.phinf.naver.net/20160808_117/dbswls231_1470634104836QpQ3I_JPEG/%C0%B1%B1%E2%B0%ED%BA%A3%C6%AE%C0%AD.jpg?type=w800|트위터에 장문의 글]]을 남겼는데, 외국 팬들이 번역기를 쓸 것을 배려해 간단하고 짤막한 문체로 쓰여진 것이 눈에 띈다.
          * 2016년 12월 20일, 숙소에서 방문턱에 걸려 넘어지며 귀를 다치는 사고가 일어났다. 무리한 운동을 삼가야 한다는 의사의 소견에 따라 모든 연말 무대에 서지 못하게 되었고 덕분에 2016년 연말을 휴식을 취하며 보낸 듯하다. 당시에 남긴 흔적들을 보면, 연말 무대를 생방송으로 챙겨보며 트위터에 멤버들 엽사를 찍어 올리거나, 아무 말 대잔치를 벌이는 등 나름 즐거워보인다.[[https://youtu.be/d4nyXF7zs4s|#]]
  • 신동일 (언어학자) . . . . 2회 일치
         '''신동일'''(申東一, [[1967년]] [[12월 14일]] ~ )은 [[대한민국]]의 [[응용언어학자]]이다.
         [[1990년]]에 [[중앙대학교]]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하고, [[1995년]]에 [[아이오와 주립대학교]] 영어과에서 응용언어학 분야 중 하나인 구술능숙도(spoken proficiency) 평가 분야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하였으며, [[1999년]] 10월에 <진단목적으로의 영어 듣기 평가도구 타당도 검증: 수행능력 모형화 작업과 다차원구조 이슈 중심으로(Construct validation of a diagnostic L2 listening test: An operational model utilized and multidimensionality issues revisited)>라는 논문<ref>[http://www.slate.illinois.edu/people/graduates/#3 일리노이 대학교 어바나-샴페인 제 2언어습득 및 교육학과 동문]</ref>으로 [[일리노이 대학교 어바나-샴페인]]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 아데랑스 . . . . 2회 일치
         2011년 2월 17일, 오오츠키 타다오는 해임당하고, 창업자 네모토 회장이 사장을 겸임하게 된다.[[http://toyokeizai.net/articles/-/5993/ (참조)]]
         2017년 2월 10일, 가발 업계의 경쟁 심화와 수익 악화에 대처하기 위하여 경영진에 의한 인수를 통하여 도쿄증권거래소에서 [[상장폐지]]하고, 비상장화와 사업기반 강화를 하게 되었다.[[http://www.nikkei.com/article/DGXLASFL09HEH_Z00C17A2000000/ (참조)]]
  • 안기효 . . . . 2회 일치
         ||<#F157FF> {{{#ffffff '''출생'''}}} ||<bgcolor=#ffffff> [[1986년]] [[2월 1일]] [[대구광역시]] [[동구(대구)|동구]] ||
         2018년 2월 25일 ASL 시즌5 부산 예선에 참가하였다. 예선 3조 2라운드에서 [[박수범]], 예선 준결승에서 [[김봉준]]을 차례로 격파하고
  • 안내상 . . . . 2회 일치
         '''안내상'''(安內相, [[1964년]] [[12월 25일]] ~ )은 [[대한민국]]의 [[배우]]이다. 1990년 [[연극배우]]로 첫 데뷔하였다.
         [[연세대학교]] 신학과에 입학하였으며, "소외계층 없는 평등한 사회를 만들겠다고 사회 혁명"을 꿈꾸며 사회운동에 나서 학생운동을 주도했다. 1988년 2월 26일 광주직할시 (현재 전라북도 고창군) [[미국]] 문화원 내 도서관 진열장에 사제 시한폭탄을 설치한 혐의가 드러나 총포 도검 화약류 단속법 위반,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위반,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구속됐다. 8개월 동안 수감된 후 집행유예로 석방되었다.
  • 안영준 . . . . 2회 일치
         || '''생년월일''' || [[1995년]] [[6월 28일]](만 [age(1995-06-28)]살) ||
         [[분류:동명이인]][[분류:1995년 출생]][[분류:구미시 출신 인물]][[분류:농구 선수]][[분류:스몰 포워드]]
  • 양예나 . . . . 2회 일치
         2017년 2월 5일 에이프릴 대전 팬싸인회 에서 예나
          * 2015년 12월 20일 MBN <전국제패>에 진솔과 함께 출연했다.
  • 양윤재 . . . . 2회 일치
         | 출생일 = [[1949년]] [[2월 21일]]
         '''양윤재'''([[1949년]] [[2월 21일]] ~ )는 [[대한민국]]의 대학교수, 정치인이다.<ref>{{뉴스 인용|제목=조선일보 인물DB|url=http://cdb.chosun.com/search/db-people/i_service/manDisAllXml.jsp?uci=G010+1-02141999110100161095|출판사=조선일보|날짜=|확인날짜 =2016년 4월 29일}}</ref>
  • 어쌔신 크리드 III/임무일람/주요임무 . . . . 2회 일치
         하지만 암살단이나 템플러보다 큰 것이 다가오고 있었다. 세상의 종말이었다. 2012년 12월 21일 세상은 태양풍에 의해 멸망하게 된다.
         1773년 12월 16일, 보스턴. 코너가 부두를 지키던 경비병들을 처리하고 신호를 보내자 애국자들이 배에 올라타 차 상자를 바다로 내던진다. 그 뒤 얼마 되지 않아 영국 정규군이 부두로 들이닥친다. 코너는 애국자들이 차 상자를 모두 내다버리는 동안 영국군과 맞서 싸운다.
  • 에릭 (가수) . . . . 2회 일치
         '''에릭'''({{본명|문정혁}}, [[1979년]] [[2월 16일]] ~ )은 [[대한민국]]의 [[가수]], [[배우]]이며, [[보이 그룹]] [[신화 (음악 그룹)|신화]]의 멤버이다.
         에릭(Eric Moon, 문정혁)은 대구에서 1남 2녀중 막내로 1979년 2월 16일에 태어났다. 그는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입학은 했으나 바로 몇 개월 후 미국으로 이민을 간다. 미국에서를 졸업했다. 그는 미국에서 캐스팅되어 한국으로 귀국해 [[SM 엔터테인먼트]]의 연습생이 되었다. 그는 연습생이었을 때 [[앤디 (가수)|앤디]]와 같이 [[S.E.S.]] 1집 수록곡인 'I'm your girl' 랩 피쳐링을 하였으며, [[S.E.S.]]와 같이 무대에 오르기도 하였다. 에릭은 [[1998년]]에 [[신화 (음악 그룹)|신화]]에서 영어 랩을 담당하는 이국적인 외모 이미지로 데뷔를 하였다.
  • 영덕군 . . . . 2회 일치
         원래 일제강점기 말기에 [[동해선]]([[동해중부선]]) 계획이 있었고 노반까지 남아있을 정도였으나 해방되면서 공사가 중단되었다. 결국 70년이 넘는 세월을 걸려서 [[동해선]]이 개통되어 영덕군 동부를 남북으로 관통한다. [[KTX]]가 정차하는 [[포항역]]을 출발해 [[장사역]], [[강구역]], [[영덕역]]에 모든 [[무궁화호]]가 정차하고 [[영해역]]을 지나 [[강원도]] [[삼척시]]의 [[삼척역]]까지의 공사가 진행중인데 영덕역 북쪽 구간이 완공되면 [[부산]]부터 영덕을 지나 [[강릉시]]까지 동해선 철도가 쭉 이어질 예정이다. 남쪽으로도 [[모량역]]부터 [[신경주역]]을 지나 [[태화강역]]까지 이어져서 최종적으로는 동해선의 실질적인 종점인 [[부전역(동해선)|부전역]]까지 이어질 수 있도록 개량중이다. 2018년 2월 기준으로는 중간 일부 구간들이 미완성이다. 동해선 외에 김천에서 의성을 거쳐 영덕을 이어주는 [[경북내륙선]]이 장기계획으로 추진 중 이다.
         [[2016년]] 12월 [[당진영덕고속도로]]의 잔여구간인 상주-영덕 구간이 개통되면서 영덕읍과 강구면 중간 쯤에 [[영덕IC]]가 개설되었다. 영덕군은 고속도로 개통의 가장 큰 수혜자라고 할 수 있다. 접근성이 좋아지면서 수도권-충청권-전라권에서도 운행 시간이 단축돼어 관광객이 폭발적으로 증가했다.[[http://www.gyotongn.com/news/articleView.html?idxno=171229|#]]
  • 영양군 . . . . 2회 일치
         [[경상북도]] 동북부에 있는 군. 면적은 815.14㎢ , 서쪽은 [[안동시]], 북쪽은 [[봉화군]], 남쪽은 [[청송군]], 동쪽은 [[영덕|영덕군]], [[울진군]]과 접하고 있으며 인구는 2018년 2월 기준 약 1만 7천 명. 영양군보다 인구가 적은 [[기초자치단체]]는 [[경상북도]] [[울릉군]]뿐이다. 그나마도 울릉군은 자그마한 섬이라는 특수성이 있으니, 이 영양군이 (섬을 빼고) [[육지#s-2|육지]] 중엔 사실상 한국에서 인구가 가장 적은 셈이며, 이는 [[팔라우]] 전체 인구와 거의 비슷하다. 아울러 인구 밀도 21명/㎢로 전국에서 [[강원도]] [[인제군]]에 이어 두 번째로 인구밀도가 낮은 시군이다. 참고로 인제군의 인구밀도는 20명/㎢. 그러나 주민등록을 옮기지 않고 인제군에서 군 복무를 하는 대다수 군인들을 감안하면, 실제 인구밀도는 오히려 영양군이 인제군보다 더 낮을 수도 있다.
         영양군 관내에 있지는 않지만 [[2016년]] [[12월]]에 [[당진영덕고속도로]]가 개통되면서 신설된 [[동청송·영양IC]]와 [[청송IC]] 덕분에 그나마 상황이 나아졌다.
  • 영주시 . . . . 2회 일치
         [[경상북도]] 북부에 위치한 [[시(행정구역)|시]]. 인구는 2016년에 들어 10만 9천여 명으로 계속 인구가 줄고 있다.[* 1995년경에는 인구가 약 15만명이었다. 이때부터 따져도 매년 거의 2천명 꼴로 인구가 줄어든 셈. 그런데 2018년 현재 약 16만인 안동시 인구도 그 당시에는 거의 20만명에 달했다. ~~그때가 좋았지~~] 시의 동부에 [[봉화군]], 남부에 [[안동시]], 서부에 [[예천군]]이 있으며 북부는 죽령을 경계로 [[충청북도]] [[단양군]], 마구령을 경계로 [[강원도]] [[영월군]]과 맞닿아 있다.[* 영월군으로는 육로로 직결이 안 되어있어서 단양군 영춘면을 통과해야 한다.]
         1980년 영주군 영주읍이 영주시로 승격되어, 남은 영주군 지역이 영풍군(榮豊郡, '영'주와 '풍'기에서 한 글자씩 따서 새로 지었다)[* [[영풍그룹]]과는 관계 없다.]으로 개칭되었다. 1995년 영주시와 영풍군이 통합되어 현재에 이른다.
  • 영창대군 . . . . 2회 일치
         광해군 3년(1611 신해 / 명 만력(萬曆) 39년) 12월 26일(신묘)에 영창대군(永昌大君)으로 책봉되었다. 실록에는 이 때의 나이가 6세라고 주석이 달려 있다.
         >광해 75권, 6년(1614 갑인 / 명 만력(萬曆) 42년) 2월 10일(임진) 2번째기사
  • 오경훈 . . . . 2회 일치
         * ~ [[2017년]] [[2월]] 새누리당
         * [[2017년]] [[2월]] ~ 자유한국당
  • 오병희 . . . . 2회 일치
         '''오병희'''(吳秉熙, [[1953년]] [[2월 10일]] ~ )는 [[대한민국]]의 의사이자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교수이며, [[서울대학교병원|서울대학교병원장]]을 역임하였다.
         *2014년 12월 ~ : 대한심장학회 이사장
  • 오석락 . . . . 2회 일치
         [[서울고등법원]] 판사, 서울민사지방법원 부장판사, 서울민사지방법원 수석부장판사, [[청주지방법원|청주지방법원장]] 등을 지내다가 대학교로 가지 않고 동서인 [[김기홍 (법조인)|김기홍]]의 권유로 변호사를 개업해 문인구 변호사가 회장으로 있던 1987년 [[대한변호사협회]]에서 1987년) 공보이사와 총무이사 겸 사무총장을 하다가 김선 변호사가 회장으로 재임하던 1995년에 부회장을 하였으며 [[대한법률구조공단]] 이사, 중앙환경분쟁조정위원 등을 역임했다.
         법률과 수필 등 다수의 책을 저술했던 오석락은 광림교회에서 함께 다니던 법조인들이 모여 애중회를 만들었으며, 1984년 12월 12일에 변호사 사무소가 있던 명지빌딩의 변호사 사무실 직원들과 함께 명우회를 결성하여 봉사활동을 했다.
  • 우동균 . . . . 2회 일치
         '''우동균'''(禹東均, [[1989년]] [[12월 3일]] ~ )은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이자, 일본 독립 야구 [[가가와 올리브 가이너즈]]의 [[외야수]]였다.(5월 1일 퇴단하였다.)
         [[2009년]] [[12월 17일]]에 입대<ref>[http://news.naver.com/sports/index.nhn?category=baseball&ctg=news&mod=read&office_id=076&article_id=0002009770 우규민-연경흠-우동균 등 24명 경찰청 입대] - 스포츠조선</ref> 하여 [[2011년]]에 제대했다.
  • 유열 (가수) . . . . 2회 일치
         [[대구초등학교]], [[대구중학교 (대구)|대구중학교]], [[대구고등학교 (대구)|대구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 무역학을 전공. [[고려대학교 문화예술 최고위과정수료]] [[1986년]] [[12월 19일]] [[MBC 대학가요제|제10회 MBC 대학가요제]]에서 ''지금 그대로의 모습으로''라는 노래로 대상을 수상하면서 음악계에 데뷔하였다.<ref name=autogenerated1>[http://www.chosun.com/se/news/200601/200601190193.html 1등 인터넷뉴스 조선닷컴 - [브라보~! 7080] '데뷔 20주년' 유열<!-- 봇이 붙인 제목 -->]</ref> 그 후 [[1989년]]까지 매년 [[한국방송]]·[[문화방송]]의 연말 10대가수로 선정되는 등 큰 인기를 누렸다.<ref name=autogenerated2>[http://www.izm.co.kr/news_view.asp?key=1&s_idx=1700 * IZM - New Stream *<!-- 봇이 붙인 제목 -->]</ref> 1996년 대한민국 동요대상,동요를 사랑한 가수상 수상
         [[2012년 6월]]에는 15살 연하의 아내 배서윤씨와 결혼을 하였고, 이듬해 [[2월]] 아들 유정윤이 태어났다.
  • 윤흔 . . . . 2회 일치
         '''윤흔'''(尹昕, [[1564년]] - [[1638년]] [[12월 17일]])은 [[조선]]시대 후기의 무신, 정치인이다. 본관은 해평. [[윤두수]]의 둘째 아들, [[윤훤]]의 형이다. 본관은 해평(海平)으로 초명은 양(暘)이고, 자는 시회(時晦), 호는 도재(陶齋) 또는 청강(晴江), 계음(溪陰)이다. 시호는 정민(靖敏)이다. [[이괄의 난]], [[병자호란]], [[정묘호란]] 당시 [[조선 인조|인조]]를 수행하였으며, [[병자호란|병자]], [[정묘호란]] 당시 [[청나라]]와의 협상을 반대하며 [[주전론]]을 주장하였다.
         저서로는 《계음만필 溪陰漫筆》, 《도재수필》, 《도재집》, 편저서에 《십묘한람도동편(十畝閒覽道東編)》 등이 있으며, [[여주시|여주]]의 향토지인 《황려지 (黃驪志)》를 편찬하였다. 그밖에 [[창랑정]](滄浪亭) 등 약간의 [[시조]] 몇 수가 전한다. [[1638년]](인조 16년) 초겨울에 가벼운 병을 앓다가 [[감기]]에 걸려 일어나지 못하고 그해 겨울 [[12월 17일]] [[감기]]와 [[폐병]]으로 사망하였다. 그가 죽자 [[조선 인조|인조]]는 애도를 표하여 정사를 파하고 바로 좌의정에 증직하였다.
  • 의성군 . . . . 2회 일치
         [[2016년]] 12월 [[당진영덕고속도로]] 상주-영덕 구간이 개통되면서 [[서의성IC]], [[북의성IC]]가 신설되어 교통이 더욱 편리해졌다.[* 이전에는 남북 교통은 괜찮았지만 동서는 산길과 좁은도로가 많아 상대적으로 불편함이 컸다.]
         그리고 1995년 단 6명의 인원으로 전국대회 준우승을 일궈낸 의성여자고등학교 농구부도 한때 유명세를 타기도 했다.
  • 이규환 (영화감독) . . . . 2회 일치
         | 출생일 = [[1904년]] [[2월 18일]]
         '''이규환'''(李圭煥, <small>일본식 이름: </small>岩本圭煥, [[1904년]] [[2월 18일]] ~ [[1982년]])은 [[일제 강점기]]와 [[대한민국]]의 [[영화 감독|영화감독]]이다.
  • 이덕건 . . . . 2회 일치
         [[2008년]] [[12월]]에는 드라마 제작국 EP(총괄프로듀서)를 맡아 드라마 전반을 총괄하였다.<ref>{{뉴스 인용
         * [[1995년]], KBS 1TV [[인간극장 (드라마)|인간극장]] 6화 '마이더스의 손' 촬영 당시 출연진에 속했던 탤런트의 매니저로부터 술자리 향응을 제공받아 1월 28일 배임수재 혐의로 구속되었으며<ref>{{뉴스 인용|url=http://news.joins.com/article/3009220|제목=PD 2명 구속-KBS소속 매니저 2명도 함께|저자=김기평|날짜=1995-01-29|출판사=중앙일보|쪽=|확인날짜=2015-12-26}}</ref> <ref>{{뉴스 인용
  • 이동찬(기업인) . . . . 2회 일치
         1995년 12월 아들 [[이웅열]]에게 코오롱그룹 회장직을 물려주고 코오롱그룹 명예회장이 되었다. 이듬해인 1996년부터 1998년까지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2002년 월드컵축구대회]] 조직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하였다.
  • 이민아 (축구선수) . . . . 2회 일치
         |클럽팀 최신 업데이트 날짜 = 2015년 2월 1일
         * 2015년 2월 1일 기준
  • 이병석(정치인) . . . . 2회 일치
         2013년 2월에는 [[국회의장]] 직무대리로 본회의를 진행하던 도중 [[동남 방언]] 특유의 발음으로 본회의장을 웃음바다로 만들었는데, 덕분에 그 동안 치열하게 치고 받던 여야가 모처럼 [[위 아 더 월드]]를 이루기도. 사실 맨 처음에 쌀 소득을 '''살 소득'''으로 읽을 때까지만 해도 이병석 부의장은 [[엄근진]] 모드를 유지했지만 주변에서 웃기 시작하자 '''정작 본인도 웃음을 참지 못했다'''.(...) 심지어 소 싸움을 '''소 사움'''으로 읽고 나서 본인이 빵 터지는가 하면 아예 '''"난 죽을 때까지 그 발음을 구분할 수 없다."'''라고 [[자폭]]하는건 덤. ~~자세히 들어보면 웃음을 참느라 그런건지 발음을 '''발은'''에 가깝게 발음한다.~~
         허나 이런 훈훈한 일화도 얼마 못가 [[포스코]] 비리 연루 의혹을 받으면서 빛이 바랬다.(...) 결국 2016년 1월 25일 [[대한민국 검찰청|검찰청]]에 의해 체포 영장이 발부되었으며, 결국 2016년 2월 1일 [[제20대 국회의원 선거]] 불출마를 선언하였다. 그리고 포스코 관련 비리 때문에, 새누리당이 인명진 비대위체제로 넘어간 뒤 2017년 1월 18일에 당에서 '''제명되었다'''.
  • 이병욱(스트리머) . . . . 2회 일치
         [[푸워]] 방송에서 성기를 노출함으로 인해 푸워는 [[2월 28일]] 트위치에서 '''즉시 영구정지 처분'''을 받은 이례적인 사례가 탄생했다. 결국 뉴스에 보도되는 전국적인 망신을 당하게 되었다. 결국 사과는 했으나...
         그러다가 12월 23일에 김윤태의 모습을 그대로 송출시키는 사건을 '''또''' 벌였다. 물론 아닐때에도 채팅창은 완전히 [[아비규환]].
  • 이상호 (1989년) . . . . 2회 일치
         '''이상호'''(李相浩, [[1989년]] [[2월 5일]] ~ )는 [[KBO 리그]] [[NC 다이노스]]의 [[내야수]], [[외야수]], [[지명타자]]이다.
         [[12월 22일]] [[상무 야구단]]에 [[김희원 (야구 선수)|김희원]], [[권희동]]과 함께 2015년에 입대했다.<ref>[http://sports.news.naver.com/sports/index.nhn?category=kbo&ctg=news&mod=read&office_id=001&article_id=0007257485 상무 야구단, 이용찬 등 17명 합격자 발표 ] - 연합뉴스</ref>
  • 이성민 (야구선수) . . . . 2회 일치
         대구중학교, [[경북고등학교]]를 거쳐서 [[영남대학교]]에 진학하였다. [[영남대학교]]에 입학한 이후에 직구 스피드가 147 km/h에 이르고 변화구 제구도 수준급이어서 스카우트 사이에서 [[2013년 한국 프로 야구 신인선수 지명 회의|2013년 신인드래프트]] 이전 부터 대졸 최대어라는 평가를 받았다.[[2012년]] [[8월 20일]]에 열린 [[2013년 한국 프로 야구 신인선수 지명 회의|2013년 신인드래프트]]에서 [[윤형배 (1994년)|윤형배]]와 함께 특별 우선지명을 받아 [[NC 다이노스]]에 입단하였다.<ref>[http://news.hankooki.com/lpage/sports/201208/h20120820204711111960.htm "4할 승률 위하여" 발톱 드러낸 NC] - 한국일보</ref> [[2012년]] [[12월 5일]]에 열린 2012 [[야구인의 밤]]에서 우수 선수상을 수상하였다.<ref>[http://star.fnnews.com/news/index.html?no=149144 '야구인의 밤' 영남대 이성민, 우수 선수상 수상 ] - 스타N뉴스</ref> [[대한민국의 대학 야구 대회|대학리그]] 4년 동안 17승 15패, 252 1/3이닝, 222탈삼진, 89볼넷, [[평균자책점]] 2.00을 기록하였다.
         이후 롯데는 이성민을 보류 명단에서 제외했고, 12월 20일 공식적으로 임의탈퇴 처리되었다.<ref>http://sports.news.naver.com/kbaseball/news/read.nhn?oid=109&aid=0003683982</ref> 팀은 이성민이 재판을 받고 있어 제대로 활동을 못하는 상황이니 더 이상 데리고 있을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다.
  • 이수진(치어리더) . . . . 2회 일치
         2014년 12월 6일에 [[SBS]] [[놀라운 대회 스타킹]] 치어리더 특집편[* 타이틀은 '야구여신 최강전'][* [[삼성 라이온즈]], [[NC 다이노스]], [[기아 타이거즈]], [[한화 이글스]]의 치어리더들만 출연.]에서 [[삼성 라이온즈]] 치어리더 대표 3인[* [[이연주(치어리더)|이연주]], 이수진, 장혜원.] 중 한 명으로 출연하여, '셰어 로이드의 Swagger Jagger, [[트랜스픽션]]의 Get Show, [[크레용팝]]의 어이(Uh-ee)'에 맞추어 치어리딩을 선보였다.[* 치어리더 네 팀의 단체곡은 '[[타카피]]의 치고 달려라 2014', [[현아(가수)|현아]]의 '빨개요', [[갓세븐]]의 '하지하지마'.]
          * 가냘픈 몸매를 가지고 있으나 의외로 엄청난 [[대식가]]다. 2017년 12월 8일자 페이스북 라이브 방송에서 짜장면을 무려 3그릇이나 해치웠다.~~ㄷㄷ~~ ~~같이 방송했던 안지성 치어리더도 2그릇을 해치운건 덤~~ 사실 치어리더는 직업상 많은 활동량을 요구하기에 그만큼 잘 먹어야 체력을 유지할 수 있다고 한다.
  • 이영 (1494년) . . . . 2회 일치
         '''이영'''(李英, [[1494년]] ~ [[1563년]] [[2월 22일]])은 [[조선]] 중기의 무신, 군인이다. 자는 현보(顯父), 호는 괘편, 본관은 영천이다. 청렴결백하였으며, 수령 재직시는 선정을 베풀었으며 무관으로 [[청백리]]에 녹선되기도 하였다. 무신으로 드물게 청렴하고 근실했다는 평을 들엇다. [[대구광역시|대구]] 출신.
         특히 [[제주도]]에서는 도민이 그의 업적을 추모하여 그의 초상화를 그려서 봉안하고 참배하였으며 그 당을 괘편당(掛鞭堂)이라 하였다. 그의 졸기에 의하면 [[대구]](大丘)의 집에 화재를 당하여 처자가 살 데가 없게 되자, 주상이 그 고절(苦節)을 가상히 여겨 특별히 집을 지어 내려주고 또 의복과 식량을 이어주게 하였다 한다. 그러나 성질이 편협하고 급하여 형벌이 맞지 않는 것이 많았다는 평도 있다. 1563년 2월 호군으로 재직 중 졸하였다.
  • 이영훈 (경제학자) . . . . 2회 일치
         한신대학교 등에 강사로 출강했었고 낙성대경제연구소 소장 및 다산학술문화재단 이사, 경제사학회 연구이사를 역임하였으며, [[성균관대학교]] 교수를 거쳐 현재 [[서울대학교]] 경제학과 교수로 재직 후 2017년 2월 28일 정년 퇴임했다<ref>{{뉴스 인용|url=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7/02/28/0200000000AKR20170228081000004.HTML?input=1195m|제목=서울대 교수정년식…'식민지근대화론' 이영훈 등 28명 퇴임|성=이재영|날짜=2017-02-28|뉴스=연합뉴스|언어=ko-KR|확인날짜=2017-03-26}}</ref>. 현재는 서울대학교 명예교수이다.<ref>{{웹 인용|url=http://pub.chosun.com/client/news/viw.asp?cate=C01&mcate=M1002&nNewsNumb=20170324115&nidx=24116|제목=이영훈 서울대 명예교수, “자본주의 맹아론은 대한민국 부정으로 이어지는 주장”|언어=ko|확인날짜=2017-04-13}}</ref>
         [[2006년]] [[12월 1일]] 고등학생용 《한국근현대사 대안 교과서》에서 [[4·19혁명]]을 《4·19학생운동》으로, [[5·16군사정변]]을 《5·16혁명》으로 기술해 논란을 불러일으킨 《[[교과서포럼]]》의 심포지엄에서 4·19민주혁명회, 4·19혁명공로자회, 4·19혁명희생자유족회 회원 30여 명에게 격렬한 항의를 받았으며, 이 교과서는 [[2008년]] [[3월 24일]] 내용을 수정하여 출간하였다. 이 교과서는 이영훈 이외에 [[박효종]] 등의 교수가 참여했다.<ref>{{뉴스 인용
  • 이예린 (1974년) . . . . 2회 일치
         * [[1995년]] [[문화방송|MBC]] 《도전 추리특급》
         * [[1995년]] [[KBS 2TV|KBS2]] 《[[퀴즈탐험 신비의 세계]]》
  • 이장훈(배우) . . . . 2회 일치
         '''이장훈'''({{본명|'''이성호'''}}, [[1972년]] [[2월 28일]] ~ )은 [[대한민국]]의 [[배우]]이다.
         ! 1995년
  • 이정우 (1950년) . . . . 2회 일치
         |임기 = [[2003년]] [[2월 25일]] ~ [[2003년]] [[12월 31일]]
  • 이정호 (1982년) . . . . 2회 일치
         [[2014년]] [[12월 16일]] [[한화 이글스]]의 3군 투수코치로 부임받았다.<ref>[http://sports.news.naver.com/sports/index.nhn?category=kbo&ctg=news&mod=read&office_id=117&article_id=0002548544&date=20141216&page=1 '비운의 천재' 이정호, 한화 코치로 제2의 야구인생 개척] - 마이데일리 2014년 12월 16일 확인.</ref> 하지만 2015 시즌 후 사임하고 [[대구고등학교]] 야구부 코치로 자리를 옮겼다.<ref>[http://sports.news.naver.com/kbaseball/news/read.nhn?oid=380&aid=0000000943 그 신인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1> 고졸 최고 대우, 삼성 이정호] - 이영미 칼럼</ref>
  • 이정훈 (1963년) . . . . 2회 일치
         * [[삼성 라이온즈]] (1995년 ~ 1996년)
         |style="text-align: center;"|[[1995년 한국프로야구|1995]]
  • 이중환(법조인) . . . . 2회 일치
         || '''생년월일''' || [[1959년]] [[12월 25일]] [[경상북도]] [[구미시]] ||
          * 1995년 서울지방검찰청 남부지청 검사
  • 이창동 . . . . 2회 일치
         *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1995년) 각본
         |임기 = [[2003년]] [[2월 27일]] ~ [[2004년]] [[6월 30일]]
  • 이철우(1955) . . . . 2회 일치
         2017년 12월 17일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 [[경상북도지사]] 출마를 선언함과 동시에 [[대한민국 국회의원|국회의원]] 사퇴 의사를 밝혔다.
         [[2018년]] [[5월]] 경북도지사 후보 정책 토론회에서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433098|독도의 날이 2월 22일이냐는 질문에 맞다고 답했다.]] 이날은 일본에서 주장하는 다케시마의 날이고 독도의 날은 10월 25일이다. 다만 이때 질문에는 민주당 예비 후보를 제외하고 전부 틀렸다고 한다.
  • 이케다 초등학교 사건 . . . . 2회 일치
         9월 14일에 살인죄, 살인미수죄 등으로 오사카 지방 법원에 기소되었으며, 12월 27일에는 첫 공판이 시작되었다. 타쿠마는 재판에서도 기행을 반복했는데, 검찰이 기소를 읽어주고 시작했을 때 "여어, 앉으면 안됩니까"라고 말하여 재판관은 엄격하게 서서 들으라고 말하면, 노려보기도 했다. 첫 공판에서 혐의사실을 인정하고 "목숨으로 갚아야 한다"고 말했으나, 나중에 왜 그런 말을 했냐고 추궁당하자 "신문기사에서 자주 나오는 말이라서 했을 뿐"이라고 대답했다.
         2003년 12월에 타쿠마는 와카야마 출신의 여성과 5번째 결혼을 했다. 여성은 사형 폐지를 호소하는 국제사면위원회 활동에 참가하고 있었다. 지원자 가운데 1명으로 변호사를 통하여 타쿠마에게 편지를 보냈다. 이 결혼은 타쿠마에게 접견, 서신 권리를 얻으며, 타쿠마에게 유족에게 사과하라고 설득하려는 의도도 있었다고 한다. 여성은 가족에게 맹렬한 반대를 받아, 피해가 가지 않도록 자신의 성을 바꾸고 타쿠마도 이 성을 쓰게 되었다.
  • 이태현(씨름) . . . . 2회 일치
         고교 때부터 그 연령대의 지존으로 통했으며, 1994년 절친이자 라이벌인 [[백승일]][* 백승일은 2004년 LG투자증권 씨름단 해체 사태 후 순천시청에서 잠시 뛰다가 2005년 2월 설날 대회를 끝으로 은퇴했다. 은퇴 후 [[트로트]] 가수로 전향.]을 꺾고 처음으로 천하장사에 올랐다.[* 문제는 당시 5판 3선승제로 치뤄지던 결승전에서 서로를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두 선수가 2:2의 상황이 되자 5차전에서 서로 섣불리 기술을 못걸고 눈치만 보는 상황이 이어지자 연맹에서는 긴급 이사회를 소집해서 경기시간이 계속 길어질경우 두 선수의 몸무게를 측정하여 더 가벼운 쪽에 우승을 준다는 계체승이라는 황당한 규칙을 신설하였고 당시 백승일을 의식하며 의도적으로 몸무게를 좀 더 가볍게 유지하던 이태현이 결국 계체승을 거두었고 이후 한동안 이태현에게는 저울장사라는 오명이 따라붙었고 제2의 이만기라 불리던 백승일이 의욕을 잃고 하락세를 타면서 프로씨름이 인기가 점차 시들해져 갔다.] 이후 백승일을 비롯 이태현의 7개 대회 연속 우승을 저지했던 '모래판의 귀공자' 황규연, '들소' 김경수, 신봉민 등과 라이벌리를 이루며 1990년대 씨름판의 인기 스타로 발돋움했다. 특히 당대 씨름선수들과는 달리 잘생긴 외모로 '''모래판의 황태자'''라는 별명으로 최고 인기 스타로 자리잡게 된다. 2000년대 들어 이태현보다 한 뼘 정도 큰 골리앗 [[김영현]], 테크노 골리앗 [[최홍만]] 등의 후배들이 등장했지만, 이들도 이태현 앞에서는 버로우였다.
         2011년 2월에 현역 은퇴를 선언했다. 그리고 동년 3월에 모교인 [[용인대학교]] 격기학과의 씨름전공 교수로 정식 임용된 후 씨름 팀 감독으로 재직 중에 있으며, 이와 함께 [[2014년]] 부터 [[한국방송공사|KBS]]에서 씨름 해설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아이돌스타 육상 선수권대회|아육대]]에도 출연해 여자 씨름 해설을 했으며, 출전자들을 지도해 주기도 했다.
  • 이판석 . . . . 2회 일치
         1992년 1월부터 1993년 3월까지 관선 [[경상북도지사]]를 지냈다. 1993년 3월부터 같은 해 12월까지 [[농촌진흥청]] 청장을 지냈다.
         1995년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무소속]]으로 경상북도지사 선거에 출마하였으나 [[민주자유당]] [[이의근]]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97년 [[제15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자유민주연합]]에 입당하였다. 1998년 [[제2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자유민주연합 후보로 경상북도지사 선거에 출마하였으나 역시 [[한나라당]] 이의근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 이희근 (1929년) . . . . 2회 일치
         '''이희근'''(李喜根, [[1929년]] [[12월 13일]] ~ )은 대한민국의 공군 장성을 지낸 국영기업가 겸 정치가이다.
         * 1995년 [[자유민주연합]] 국방외교안보행정특임고문.
  • 인교진 . . . . 2회 일치
         [[세종특별자치시]]에서 플라스틱 제조업체를 경영하는 기업인 인치완<ref>[http://star.mk.co.kr/new/view.php?mc=ST&no=152260&year=2013 인교진 아버지, 연 매출 200억 원대 CEO…‘반전 집안’ 눈길↑], 매일경제 2013년 2월 28일자</ref>의 2남 중 첫째로 태어났다.
         2000년 [[문화방송|MBC]] 농촌드라마 《[[전원일기]]》에서 재동 역을 맡아 연기생활을 시작한 인교진은 2012년 4월 22일 종영된 [[SBS (대한민국의 방송사)|SBS]] 주말극 《[[내일이 오면 (2011년 드라마)|내일이 오면]]》을 통해 인연을 맺고 연인으로 발전, [[서우]]와 함께 공개 연애를 선언했으나, 2013년 5월 결별하였다. 이후 2014년 4월, 인교진은 12년 간 같은 기획사에서 만나 동료 연기자로 친분을 맺어 온 [[박수진 (1987년)]]과 교제를 시작했으며 동년 10월 4일 결혼식을 올렸다.<ref>[http://news.kukinews.com/article/view.asp?page=1&gCode=ent&arcid=0008217748&cp=nv 인교진-박수진 결혼 공식입장 “지난달 초 결혼 프로포즈… 10월 결혼”], [[국민일보]] 2014년 4월 9일자</ref> 그리고 임신 소식이 전해져 태명을 기쁨이로 지었다. 2015년 12월 4일에는 딸이 태어나 그의 딸을 박하은으로 지어 가족으로 발전되기 시작되었다.
  • 인천광역시 . . . . 2회 일치
         ! 자치구·군 ! ! 한자 ! ! 인구 (명)<ref name=":0">2019년 2월 말 주민등록 기준</ref>! ! 세대<ref name=":0" />! ! 면적 (km<sup>2</sup>)
         [[분류:인천광역시 출신|인천 출신 인물]][[분류:대한민국의 도시]][[분류:1995년 설치]][[분류:대한민국의 항구 도시]][[분류:아시안 게임 개최 도시]]
  • 임대윤 . . . . 2회 일치
         |임기 = [[1998년]] [[7월 1일]] ~ [[2003년]] [[12월 17일]]
         [[분류:1957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분류:울진 임씨]][[분류:경북대학교 사범대학 부설중학교 동문]][[분류:대구초등학교 (대구) 동문]][[분류:대륜고등학교 동문]][[분류:영남대학교 동문]][[분류:서울대학교 대학원 동문]][[분류:민주당 (대한민국, 1991년) 당원]][[분류:민주당 (대한민국, 1995년) 당원]][[분류:한나라당의 정치인]][[분류:민주당 (대한민국, 2011년) 당원]][[분류:더불어민주당의 정치인]][[분류:대한민국의 지방자치단체장]]
  • 임현준 . . . . 2회 일치
         '''임현준'''(林玄埈, [[1988년]] [[12월 21일]] ~ )은 [[KBO 리그]] [[삼성 라이온즈]]의 [[투수]]이다. [[KBO (야구)|KBO]]에서 정말 희귀한 좌완 언더핸드 투수이다.
         [[2007년]] [[경성대학교]] 진학하여 윤영환 감독으로부터 체계적인 [[투수]] 수업을 받은 뒤 입학하자마자 당시 4학년이었던 [[고창성]]과 함께 [[경성대학교]]의 간판 [[투수]]로 떠올랐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7&oid=111&aid=0000213906 홍희정의 아웃사이더 삼성 새내기 좌완 임현준 "선동열 감독께 눈도장 받고 왔어요"] 《조이뉴스》 2010년 12월 5일</ref>
  • 장혁주 . . . . 2회 일치
         | 사망일 = [[1998년]] 2월
         '''장혁주'''(張赫宙, <small>일본식 이름:</small> 野口稔('''노구치 미노루'''), 野口赫宙('''노구치 가쿠추'''), [[1905년]] [[10월 13일]] ~ [[1998년]] 2월)는 [[한국]]의 소설가, 문학평론가로, 본명은 '''장은중'''(張恩重)이다.
  • 정광용 . . . . 2회 일치
         그에 대한 검찰의 3년 구형이 나왔고, 2017년 12월 1일, 1심에서 [[뉴스타운]]대표 [[손상대(언론인)]]과 함께 징역 2년이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277&aid=0004131128|선고되었다]]. 이에 정광용은 항소하였으며 건강악화를 이후로 보석을 신청했으나 [[http://news.joins.com/article/22389647|기각되었다]].
         탄핵반대 집회 관련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박사모 집회에서 계엄령 선포요구, 폭력집회 선동, 내란 선동, 경찰관 폭행, 기자, 시민 폭행 등 헤아릴 수가 없을 정도로 불법행동을 많이 저질러졌다. 심지어 3월 10일 박근혜 파면이 결정된 날에는 박근혜 지지자들의 폭동이 격화되는 바람에 사망자가 3명이나 나왔다. 결국 경찰은 수사에 착수했고 박근혜 탄핵 반대 집회의 주동자 정광용은 경찰에 피의자 신분으로 출석했지만 끝까지 변명을 늘어놓으며 책임지지 않는 [[http://m.news.naver.com/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3&aid=0007885974|무책임한 행동을 보여주었다]]. 결국 2017년 5월 25일 같이 폭력 시위를 선동한 손상대 뉴스타운 대표와 함께 구속되었고 2017년 12월 1일 1심 재판에서 손상대와 함께 실형 2년을 선고 받았으나 2018년 5월 31일,2심 재판부는 징역 2년의 실형을 선고한 1심을 깨고 징역 1년 6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http://naver.me/GGVzj1Wi|#]]
  • 정채진 . . . . 2회 일치
         |임기 = [[1982년]] [[5월 3일]] ~ [[1985년]] [[2월 20일]]
         |임기 = [[1985년]] [[2월 22일]] ~ [[1986년]] [[8월 28일]]
  • 조소혜 . . . . 2회 일치
         '''조소혜'''([[1956년]] [[12월 28일]] ~ [[2006년]] [[5월 24일]])는 [[대한민국]]의 [[드라마]] [[작가]]이다.
         * 《[[젊은이의 양지 (드라마)|젊은이의 양지]]》(1995년, KBS2)
  • 조진호 (축구인) . . . . 2회 일치
         |클럽팀 최신 업데이트 날짜 = [[2015년]] [[2월 13일]]
         월드컵에서의 활약을 인정받아 [[1994년 아시안 게임|히로시마 아시안 게임]] 본선 출전하였지만,끝내 한국은 4강에서 떨어졌고, [[1996년 하계 올림픽]]을 앞두고 선임된 [[아나톨리 비쇼베츠]] 감독은 한국 축구의 체질개선을 선언하였고,좋은 체격조건을 가진 선수를 추구했던 탓에 조진호의 대표팀에서의 입지는 줄어들었으며, [[1995년]] 다이너스컵 출전을 앞두고 [[아나톨리 비쇼베츠]]의 기용방식에 불만을 품고 올림픽대표팀 합류 거부 파문을 일으켰고, 황금기를 열지도 못한채 6개월 선수 자격정지와 함께 축구팬들의 외면을 받아고, 부상으로 인해 포항에서조차도 [[고정운]],[[박태하]]등에 밀렸으며, [[2000년]] [[제주 유나이티드|부천 SK]]로 이적하였다.
  • 지증왕 . . . . 2회 일치
         [[502년]] [[순장]]을 금하고, 신궁에서 직접 제사를 지냈다. 음력 3월에 주주(州主)와 군주(郡主)에게 각각 명하여 농사를 권장케 하였고, 처음으로 [[소]]를 부려 논밭갈이를 하였다.<ref>{{서적 인용 |제목= [[삼국사기]] | 저자= [[김부식]] |연도= 1145 |장= [[:s:삼국사기/권04/지증 마립간|본기 권4 지증 마립간]] |인용문= 三年 春二月 下令禁殉葬 前國王薨 則殉以男女各五人 至是禁焉 親祀神宮 三月 分命州郡主勸農 始用牛耕(3년(502) 봄 2월에 영(令)을 내려 순장(殉葬)을 금하였다. 전에는 국왕이 죽으면 남녀 각 다섯 명씩을 순장했는데, 이때 이르러 금한 것이다. 왕이 몸소 신궁(神宮)에 제사지냈다. 3월에 주주(州主)와 군주(郡主)에게 각각 명하여 농사를 권장케 하였고, 처음으로 소를 부려 논밭갈이를 하였다. )}}</ref> [[503년]]에 국호를 신로(新盧)·사라(斯羅)·서나(徐那)·서야(徐耶)·서라(徐羅)·서벌(徐伐) 등에서 “신라”(新羅)로 통일하였다.<ref>{{서적 인용 |제목= [[삼국사기]] | 저자= [[김부식]] |연도= 1145 |장= [[:s:삼국사기/권04/지증 마립간|본기 권4 지증 마립간]] |인용문= 四年 冬十月 羣臣上言 “始祖創業已來 國名未定 或稱斯羅 或稱斯盧 或言新羅 臣等以爲 新者德業日新 羅者網羅四方之義 則其爲國號宜矣 又觀自古有國家者 皆稱帝稱王 自我始祖立國 至今二十二世 但稱方言 未正尊號 今羣臣一意 謹上號新羅國王” 王從之(년(503) 겨울 10월에 여러 신하들이 아뢰었다. 시조께서 나라를 세우신 이래 나라 이름을 정하지 않아 사라(斯羅)라고도 하고 혹은 사로(斯盧) 또는 신라(新羅)라고도 칭하였습니다. 신 등의 생각으로는, 신(新)은 ‘덕업이 날로 새로워진다.’는 뜻이고 나(羅)는 ‘사방을 망라한다.’는 뜻이므로 이를 나라 이름으로 삼는 것이 마땅하다고 여겨진다. 또 살펴 보건대 예부터 국가를 가진 이는 모두 제(帝)나 왕(王)을 칭하였는데, 우리 시조께서 나라를 세운 지 지금 22대에 이르기까지 단지 방언만을 칭하고 높이는 호칭을 정하지 못하였으니, 이제 뭇 신하가 한 마음으로 삼가 신라국왕(新羅國王)이라는 칭호를 올립니다. 왕이 이에 따랐다. )}}</ref>
         또한 처음으로 지방에 군주(軍主)를 두었다.<ref>{{서적 인용 |제목= [[삼국사기]] | 저자= [[김부식]] |연도= 1145 |장= [[:s:삼국사기/권04/지증 마립간|본기 권4 지증 마립간]] |인용문= 六年 春二月 王親定國內州郡縣 置悉直州 以異斯夫爲軍主 軍主之名 始於此 (6년(505) 봄 2월에 왕이 몸소 나라 안의 주(州)·군(郡)·현(縣)을 정하였다. 실직주(悉直州)를 설치하고 이사부(異斯夫)를 군주(軍主)로 삼았는데, 군주(軍主)의 명칭이 이로부터 시작되었다. )}}</ref>[[512년]] 실직주(悉直州)의 군주이자 [[이찬 (신라의 관직)|이찬]] [[이사부]]로 하여금 [[우산국]]을 복속시켜 해마다 토산물을 공물로 바치게 하였다.<ref>{{서적 인용 |제목= [[삼국사기]] | 저자= [[김부식]] |연도= 1145 |장= [[:s:삼국사기/권04/지증 마립간|본기 권4 지증 마립간]] |인용문= 十三年 夏六月 于山國歸服(13년(512) 여름 6월에 우산국이 항복하여 해마다 토산물을 바쳤다. )}}</ref>
  • 진선유 . . . . 2회 일치
         '''진선유'''(陳善有, [[1988년]] [[12월 17일]] ~ )는 [[대한민국]]의 전 [[쇼트트랙]] 선수이다. 현재 [[단국대학교]]의 [[쇼트트랙]] 코치이다.
         이로 인해 [[2011년]] 2월에 참가한 동계체전이 현역 마지막 대회가 됐다. [[단국대학교]]를 졸업하면서 현역 은퇴를 선언했다. [[2011년]] [[4월 1일]] [[단국대학교]] [[쇼트트랙]] 코치로 발령받아 활동 중이다.<ref>[http://sports.news.naver.com/sports/index.nhn?category=sports_general&ctg=news&mod=read&office_id=001&article_id=0005009306 쇼트트랙 진선유, 모교 단국대 코치로 새 출발] - 연합뉴스</ref>
  • 진창현(음악인) . . . . 2회 일치
         1976년 12월에는 [[미국]]의 [[필라델피아]]에서 개최된 미국 현악기 제작자 협회(The Violin Society of America) 주최의 제2회 국제 현악기 제작자 경연대회에 참가해 여섯 개 부문 중 바이올린 세공 부문, 비올라 세공/음향 부문, 첼로 세공/음향 부문에서 [[http://www.vsaweb.org/Previous-Conventions|금메달을 수상]]하면서 세계구급 제작자로 명성을 확고하게 만들었고,[* Chang Heyern Jin이라고 표기된 수상자가 바로 진창현이다.] 1984년에는 미국 현악기 제작자 협회에서 무감사 현악기 제작자(Hors Concours)[* 다른 악기 제작자나 감정가의 감사 없이 자신의 이름을 내걸고 악기를 제작/판매할 수 있는 장인이라는 뜻.] 자격과 마스터 메이커(Master Maker) 칭호를 받았다.
         80대에 접어들며 아들들에게 가업을 물려준 뒤에도 계속 공방에서 악기 제작을 하면서 노익장을 과시했지만 2012년 2월에 [[대장암]] 말기 판정을 받았고, 투병 중이던 5월 13일에 초후의 자택에서 향년 83세로 타계했다. 장례는 가족장으로 간소하게 치러졌다.
  • 진헌식 . . . . 2회 일치
         1902년 2월 9일 ~ 1980년 9월 19일
         [[1948년]]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서 대한독립촉성국민회 후보로 충청남도 연기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그러나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대한국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였다가 무소속 이긍종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51년 12월부터 1952년 8월까지 관선 [[충청남도지사]]를 지냈다. 충청남도지사 임기 중이던 1952년 5월부터 1952년 8월까지 [[충남대학교]] [[총장]] [[서리]]를 [[충남대학교/역사|겸직하였다]]. 이어서 1952년 8월부터 1953년 5월까지 내무부(현 [[행정자치부]]) [[장관]]을 지냈다가 [[곡물]] 관리상의 문제로 경질되고 구속되었다가 [[대법원]]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1958년 [[제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자유당]] [[류지원]]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 창원시 . . . . 2회 일치
         계획도시임을 알 수 있는 바둑판 모양의 주택가 '''설경'''.[* 창원지역은 '''정말로 눈이 안 오는 지역이다.''' 창원뿐만 아니라 [[부울경]] 쪽에는 거의 눈이 안 온다. 몇 년에 한 번씩 눈이 나풀거리기라도 하면 SNS에 마구 올라오며, 적설량이 3cm를 넘어가면 마산합포구 일대의 산복도로는 교통지옥이 되어버린다. 제설차 따위는 당연히 본 적도 없고, 사람들이 눈길운전을 어떻게 하는지 방법도 모른다. 체인이라는 것도 자동차 처음 살 때 끼워주지 않으면 구비하고 다니지도 않는다(...) 그리고 눈이 1cm라도 쌓이면 무조건 휴교이다. 학교가 산이면 산일수록 휴교 확률이 높아지고 시험날이라도 선생님부터 등교가 불가능 수준이라 시험을 뒤로 미뤄버리거나 12시 등교해 시험을 치는 경우도 있다. 2018년 8월 기준으로, 눈이 많이 내려 하루 이상 쌓여있던 날은 2015년 2월 이후로 없다(...)]
         우선 여름엔 무진장 덥다. 한반도에서 열대야가 가장 많이 관측되는 지역이기도 하다. 역설적으로 겨울엔 타 지역에 비해 별로 춥지도 않고 결정적으로 눈도 거의 안 온다. 물론 추위는 상대적으로 그렇다는 거지 겨울되면 춥긴 추워서 시민들도 타이즈+티셔츠+스웨터+패딩 입고 다닌다. 다만 눈은 진짜 구경하기 힘든데 일년에 눈이 1번도 안 오는 해도 많을 정도. ~~단지 물이 얼음이 될 뿐~~ 와봤자 쌓이지 않을 정도로만 잠시 내리는 전국에서 몇 안 되는 곳이기도 하다. 2018년 1월 현재, 2015년 2월에 눈이 몇cm 쌓여 꽤나 오래 눈이 남아있던 이후로는 눈이 쌓이지 않았거나 쌓이고 얼마 안 있어 다 녹아버렸다. 그래서 이 곳에서 평생 살아온 사람들은 빙판이 뭔지 실제로 모르는 경우도 있다(...)[* 타 지역처럼 눈이 얼었다 녹았다를 반복하며 두껍게 어는 빙판이 아니라, 응달에 고여 있던 물웅덩이가 살짝 언 정도의 매끈한 빙판 정도만 경험한다. 물론 육군 예비역들은 거의 다 전방을 다녀오기 때문에 눈 하면 이를 가는 건 타지 사람들과 마찬가지긴 한데 지역 특성상 해군, 해경에 지원하는 비율도 타지역보다 높은 편이라 눈이 익숙하지 않은 비율이 더 올라간다.] 이처럼 시민들이 눈에 대한 대비가 거의 안 되다보니, 정말 십몇 년에 한번 눈이라도 쌓일라치면 서울에선 이정도 눈쯤 하며 씽씽 달리는 차들이, 창원에선 15~30km 거북이 운행을 하며 골목골목에서 접촉사고가 나는 난리가 벌어지기도 한다. [[산복도로]]를 끼고 있는 마산합포구 권역은 정말 헬게이트가 벌어진다. 실제로 눈이 쌓였던 날 평소 30분 정도 걸리던 출퇴근 시간이 3시간 이상 걸리기도 했다. 중요한 것은 수도권에선 진눈깨비엔 불과한 눈이 내렸을 뿐인데 생긴 일이라는 것이다.~~그날 따라 택시요금이 2배나 나왔다 카더라.~~ 1997년 약 10cm 정도의 적설량을 보였을 때에는 단 1개 노선[* 주간선 역할을 하던 구 21번 버스, 현재의 [[창원 버스 103|103번]]과 비슷한 노선이다.]만 제외하고 대중교통이건 승용차건 화물차건 모두 운행을 중단했던 적도 있다.
  • 최상열 . . . . 2회 일치
         대구광역시에서 태어나 경북고등학교와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하고 제23회 사법시험에 합격하여 사법연수원 14기를 수료했다. 1988년 서울지방법원 동부지원 판사에 임용되어 1994년 부산고등법원 판사, 1997년 대법원 재판연구관을 하다가 서울민사지방법원, 서울고등법원 판사를 거쳐 2005년에 부장판사가 되어 서울중앙지방법원, 부산고등법원, 서울고등법원을 거쳤다. 2014년 2월에는 제17대 울산지방법원장과 제19대 울산광역시 선거관리위원장에 임명되어 2년간 역임한 이후 2016년에 서울고등법원 부장판사로 재판장을 맡았으나 2018년 2월에 제36대 광주고등법원장에 임명되었다.
  • 카치구미 . . . . 2회 일치
         이런 상황에서 일본이 패전하기 직전인 1945년 7월, 브라질 일본인들이 조직한 신도연맹(臣道連盟)이라는 단체가 [[상파울로]]에서 결성되었다. 신도연맹은 이들의 조국인 '''일본을 응원하고, 승리를 믿는 조직'''으로서, 7월에 발족하고 빠른 속도로 성장하여 12월에는 회원은 3만 가구에 달하게 되었다.
         '''무려 11년'''에 걸친 투쟁 끝에, 1956년 2월에 "화살이 부러지고, 화살이 떨어졌다."고 카치구미 측은 활동을 종료하는 선언을 했다.
  • 캐리 피셔 . . . . 2회 일치
         2016년 12월 27일,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12월 23일 [[런던]]에서 [[로스앤젤레스]]로 비행하던 도중에 발작을 일으켰으며, UCLA 메디컬 센터에 입원했다. 안정된 상태를 유지했으나 27일 사망했다.
  • 태종무열왕 . . . . 2회 일치
         이듬해인 [[648년]] 12월에 김춘추는 드디어 아들 [[김문왕|문왕]](文王)과 함께 직접 [[당나라|당]](唐)에 입조하였고<ref>《자치통감》 권199 唐紀十五太宗文武 貞觀 22년(648)</ref> [[당 태종|태종]](太宗)의 환대를 받았다. 김춘추는 이곳에서 당의 [[국자감 (중국)|국학]](國學)을 방문하여 [[석전대제|석전]](釋奠)과 강론(講論)을 참관하였으며, 신라의 장복(章服)을 고쳐서 중국의 제도에 따를 것을 청했다. 당 태종으로부터 특진(特進)의 벼슬을 받고, 당에 체류하던 중에 태종의 호출로 사적으로 불려가 만나게 된 자리에서 김춘추는 "신(臣)의 나라는 바다 모퉁이에 치우쳐 있으면서도 천조(天朝)를 섬긴 지 이미 여러 해가 되었사온데, 백제가 강하고 교활하여 여러 차례 침략해 왔습니다. 더욱이 지난해에는 군사를 크게 일으켜 깊숙이 쳐들어와 수십 개의 성을 쳐서 함락시키고 조회할 길을 막았습니다. 폐하께서 천병(天兵)을 빌려주시어 흉악한 것을 잘라 없애주시지 못한다면, 우리 나라의 인민은 모두 사로잡히는 바가 될 것이요, 산 넘고 바다 건너 행하는 조공마저 다시는 바랄 수 없을 것입니다."라며 태종에게 원병 파병을 호소해, 태종의 허락을 받아냈다.<ref>《삼국사기》 [[:s:삼국사기/권05/진덕왕|권제5 신라본기 제5 진덕왕 2년(648)]]. “二年... 遣伊湌金春秋及其子文王朝唐 ... 嘗召燕見 賜以金帛尤厚 問曰 “卿有所懷乎” 春秋跪奏曰 “臣之本國 僻在海隅 伏事天朝 積有歲年 而百濟強猾 屢肆侵凌 況往年大擧深入 攻陷數十城 以塞朝宗之路 若陛下不借天兵 翦 除凶惡 則敝邑人民 盡爲所虜 則梯航述職 無復望矣” 太宗深然之 許以出師 春秋又請改其章服 以從中華制 於是 內出珍服 賜春秋及其從者 詔授春秋爲特進 文王爲左武衛將軍 (2년... 이찬 김춘추(金春秋)와 그의 아들 문왕(文王)을 보내 당나라에 조공하였다. ... 어느날 [춘추를] 불러 사사로이 만나 금과 비단을 매우 후하게 주며 물었다. “경(卿)은 무슨 생각을 마음에 가지고 있는가?” 춘추가 꿇어앉아 아뢰었다. 신(臣)의 나라는 바다 모퉁이에 치우쳐 있으면서도 천자(天子)의 조정을 섬긴 지 이미 여러 해 되었습니다. 그런데 백제는 강하고 교활하여 여러 차례 침략을 마음대로 하였습니다. 더욱이 지난 해에는 군사를 크게 일으켜 깊숙이 쳐들어와 수십개 성을 쳐서 함락시켜 조회할 길을 막았습니다. 만약 폐하께서 당나라 군사를 빌려주어 흉악한 것을 잘라 없애지 않는다면, 저희 나라 인민은 모두 사로잡히는 바가 될 것이고 산 넘고 바다 건너 행하는 조공마저 다시는 바랄 수 없을 것입니다. 태종이 매우 옳다고 여겨 군사의 출동을 허락하였다. 춘추는 또 장복(章服)을 고쳐 중국의 제도에 따를 것을 청하니, 이에 내전에서 진귀한 옷을 꺼내 춘추와 그를 따라 온 사람에게 주었다. 조칙으로 춘추에게 관작을 주어 특진(特進)으로 삼고, 문왕을 좌무위장군(左武衛將軍)으로 삼았다.”</ref>
         태종 무열왕에 대한 당대 신라인들의 평가는 매우 높았다. 이는 ‘태종(太宗)’이라는 묘호를 올린 것에서도 알 수 있는데, 이는 신라 역사상 최초이자 유일한 사례였다.<ref group="주">그러나 고구려의 [[태조왕]]의 경우에는 묘호로 봐야 되는가, 시호로 봐야 되는가에 대한 이견이 있다. 그 밖에 태조의 묘호를 받은 [[태조 성한왕]]이나, 국조의 묘호를 받은 [[박혁거세]]도 존재한다.</ref> 이에 대해 [[당 고종]]<ref group="주">《삼국사기》에는 [[당 중종]]이라 표기됨</ref>이 “당 태종이 위징(魏徵)·이순풍(李淳風) 등을 얻어 천하를 평정하는 대업을 이루었기에 태종이라 하였지만, 너희 신라는 바다 밖에 있는 조그만 나라임에도 태종의 호를 사용하여 천자의 칭호를 참칭하니 그 뜻이 불충하므로” 이를 고칠 것을 요구하자, 신라의 [[신문왕]](神文王)은 “(당 태종처럼) 무열왕도 김유신이라는 성신(聖臣)을 얻어서 삼한을 통일하는 대업을 이루었다”며 완곡하게 거절하는 답서를 보냈다. 이 답서를 받은 고종은 그가 태자로 있을 때 하늘에서 이르기를 “33천(天)의 한 사람이 신라에 내려가 유신이 되었다.”고 한 일이 있어서 이를 기록한 바가 있는데, 이 기록을 찾아 확인해보고서는 놀랍고 두려워서, 태종의 묘호를 허락했다고 한다.<ref name="유사-기이1"/> 훗날 [[조선]](朝鮮)의 성리학자 [[김종직]](金宗直)은 《[[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된 [[고려]](高麗)의 [[왕건|태조]](太祖) 이래 역대 군주들의 묘호를 시호로 대체하고자 하는 [[조선 성종|성종]](成宗)에게 태종 무열왕의 선례를 들며 굳이 기록된 묘호를 뺄 필요는 없음을 주장하였다.<ref>《성종실록》 성종 18년 정미(1487년) 2월 경진(10일)조</ref>
  • 트로피코 4 . . . . 2회 일치
          * [[http://store.steampowered.com/app/57697/|Quick-dry Cement DLC]] - 2012년 2월 8일 발매
          * [[http://store.steampowered.com/app/205634/|Vigilante DLC]] -2012년 12월 9일 발매
  • 포항시 . . . . 2회 일치
         [[분류:포항시 출신|포항 출신 인물]][[분류:경상북도의 도시]][[분류:1949년 설치]][[분류:1995년 폐지]][[분류:1995년 설치]][[분류:대한민국의 항구 도시]]
  • 하이큐!! . . . . 2회 일치
         무대화가 결정되었다.2015년 11월 중순부터 12월 초까지 도쿄,오사카,미야기에서 공연예정.
         2015년 2월 기준 13권까지 강동욱의 번역에 의해 정발되었는데, 그 사이에서 원어판과 비교해 오역이 많이 드러나 팬들 사이에서는 일어가 가능하다면 원서를 사서 보라고 할 만큼 퀄리티가 좋지 않다는 평을 받고 있다. 대표적인 예로 11권 신젠 고교에서의 합숙 줄거리 중 보쿠토와 쿠로오보다 한 살 어린 아카아시가 뜬금없이 반말을 하거나, 오이카와의 그 유명한 '이와짱은 우리 엄마에요?'[* 원어로는 「岩ちゃんは俺のお母ちゃんですか?」.] 대사는 '''네가 내 엄마라도 되냐?'''라는 대사로 바뀌어 오이카와에게 일진카와(...)라는 별명이 붙여지기도 했다. 게다가 대화에서 자주 쓰여진다고 보기 어려운 '~예요' 체가 남발되는 경향이 있고, 당당하고 맹한 느낌을 주는 '[~슴다체]'가 번역되지 않고 나오기도 한다. 일단 번역이 등장인물의 성격을 너무도 다르게 표현하는 게 큰 문제. ('''츠키시마: 짜식 멋있는데.''') 당장 몇 년만 지나도 어색할 유행어 집어넣는것은 덤. (시합중의 멘탈은 '''갑 오브 갑'''이지만.) 번역가가 글자를 못 읽는 경우도. ('''네코마 농구부''' ~~쿠로오의 농구?~~ '''호쿠토. 아카아시 케이시''') 더 많은 오역 사례가 있으면 [추가바람].
  • 하이큐/208화 . . . . 2회 일치
          * 합숙은 12월 초 5일간인데, 1월의 봄 대회가 있으므로 참가는 강제가 아니다. 하지만 카게야마와 사와무라는 "당연히 가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 역시 12월 초 미야기현의 유망한 1학년들을 모아 합숙시키자는 이야기가 죠젠지 고교 아나바라 선생에게서 온 것.
  • 한용덕 . . . . 2회 일치
         [[2006년]] 시즌 중반 당시 플레잉 코치였던 [[지연규]]의 1군 합류와 함께 1군 [[투수]]코치로 자리를 옮겼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001&oid=109&aid=0000041623& 한화, 우완 조성민 1군 올리고 최동원 코치 2군행] 《Osen》, 2006년 7월 24일 작성</ref> [[2006년]] 시즌 종료 후 열린 전지 훈련에서 [[류현진]]에게 [[슬라이더]] 투구법을 전수하였다.<ref>[http://joynews.inews24.com/php/news_view.php?g_menu=702120&g_serial=249270 신인 삼총사, '신무기 장착으로 2년차 징크스 넘는다'] 《조이뉴스》, 2007년 2월 21일 작성</ref> [[2007년]] 시즌 중반 [[이상군]]이 1군 [[투수]] 코치로 승격됨에 따라 재활군 코치로 자리를 옮겼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001&oid=001&aid=0001733318& 한화, 1군 투수코치에 이상군]《연합뉴스》, 2007년 8월 22일 작성</ref>
         [[2014년]] [[12월 4일]] [[두산 베어스]]에 2군 총괄 코치로 영입되었다. [[2015년]] [[김태형 (야구인)|김태형]]이 감독으로 부임한 후 1군 투수코치로 승격하였다. 2018년부터 [[한화 이글스]]의 감독으로 활동한다.
  • 함중아 . . . . 2회 일치
         *1979년 02월 함중아 골든2집 《복돌이 / 잊을수 없는 사람》
         *1981년 12월 함중아와 양키스 《국제선 대합실 / 콧날이 찡긋》
  • 허준영 . . . . 2회 일치
         |임기 = 2005년 1월 19일 ~ 2005년 12월 30일
         |임기 = 2009년 3월 19일 ~ 2011년 12월 21일
  • 헤이즈 (가수) . . . . 2회 일치
         * 2016년 12월 5일 - 《저 별》
         ** 12월 18일 [[SBS]]《[[SBS 인기가요]]》 1위
  • 홍서범 . . . . 2회 일치
         '''홍서범'''(洪瑞範, [[1958년]] [[12월 7일]] ~ )은 [[대한민국]]의 [[가수]]이다. 그의 현재이다.
         홍서범은 [[1958년]] [[12월 7일]]에 [[경상북도|경북]] [[김천시|김천]] 대광동 (김천시) (환경로) 에서 2남 4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재학 중 대학 2학년때 팀 '옥슨79'를 창설하면서 멤버로 활동했다. [[1980년]]에는 대학 캠퍼스 밴드 '옥슨80'의 멤버로 같은 해 [[동양방송|TBC]] '젊은이의 가요제'에 출전하여 '''불놀이야'''로 금상을 수상하며 데뷔하였다. '옥슨80'의 멤버로 활동하다 [[1989년]] 32세에 《나는 당신께 사랑을 원하지 않았어요》라는 자작 록 발라드 곡으로 솔로 가수가 되었다. 솔로 가수로 데뷔한 뒤에는 '''구인광고''', '''김삿갓''' 등이 히트를 치기도 했다. 라디오 프로그램과 TV 방송에도 출연, [[1994년]]에는 [[한국방송공사|KBS 한국방송공사]] 라디오 프로그램 홍서범의 뮤직쇼 DJ를 진행하였으며 그 해 영화 《[[커피 카피 코피]]》의 주연(영화배우)으로 스크린에도 데뷔하였다. [[2003년]]에는 라디오 DJ를 복귀하면서 [[서울방송|SBS]] 라디오 프로그램 '홍방불패'의 DJ로 활동하였다.
  • 홍해성 . . . . 2회 일치
         | 사망 = [[1957년]] [[12월 6일]]
         '''홍해성'''(洪海星, [[1894년]] [[10월 13일]]([[음력 9월 15일]]) ~ [[1957년]] [[12월 6일]])는 [[일제 강점기]]부터 활동한 [[대한민국]]의 연극인이다. 본명은 홍주식(洪柱植)이다.
  • 황선필(1939년) . . . . 2회 일치
         '''황선필'''(黃善必,<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6021500329202015&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86-02-15&officeId=00032&pageNo=2&printNo=12427&publishType=00020 文化放送 사장에 黃善必씨를 선임] - 경향신문, 1986년 2월 15일</ref><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2060400209201008&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82-06-04&officeId=00020&pageNo=1&printNo=18666&publishType=00020 靑瓦臺 대변인에 黃善必씨를 任命] - 동아일보, 1982년 6월 4일</ref> [[1939년]] ~ , [[경상북도]] [[김천시|김천]])은 [[문화방송]] 사장을 역임한 [[대한민국]]의 [[언론인]]이자 공무원이다.
         |임기 = [[1986년]] [[2월 17일]] ~ [[1988년]] [[8월 29일]]
  • COCOM . . . . 1회 일치
         1991년 12월에 소련이 붕괴하여 냉전이 종식되고, 1994년 3월에 폐지되었다.
  • EZ2AC . . . . 1회 일치
         EZ2AC는 SQUALE PIXELS에서 발매하고 있는 아케이트 리듬게임시리즈이다. 최신작은 2014년 12월 26일 발매된 EZ2AC : EVOLVE이다.
  • K리그 챌린지 플레이오프 . . . . 1회 일치
         첫 대회가 열렸던 2014시즌에는 이 대회 역시 한국프로축구연맹이 규정한 공식경기지만 챌린지의 기록과는 무관하게 별도로 기록했었다. 이는 챌린지 플레이오프가 엄밀히 말하면 챌린지의 정규 라운드의 연장선이 아니라 승강 플레이오프라는 [[승강제]] 시스템과 관련이 있는 대회로 보기 때문이며, K리그의 소식을 전하는 공식매체인 [[K리그 웹진]]에서도 2014시즌의 데이터는 챌린지와 호환이 되지 않았었다. 그러나 2015시즌부터는 챌린지 플레이오프를 K리그 챌린지의 연장선으로 보고 이 데이터를 공식으로 집계하기 시작하였으며, K리그 웹진 2015년 12월호에서는 다 통합하여 데이터를 공개하였다.
  • NEC 코퍼레이션 . . . . 1회 일치
         1995년 10월에 [[NEC]]에서 소프트웨어 관련 부문이 분리되어 NEC인터채널 주식회사로 창립됐다. 2004년 3월에 NEC가 보유하던 주식의 대부분이 양도되어 2004년 7월 1일에 '주식회사 인터채널'로 사명을 변경했다. 하지만 이 회사 전성기는 NEC인터채널 시대로 그냥 '인터채널'로 하면 도무지 적을 정보가 없으니 이걸로 쓰자.
  • V-22 오스프리 . . . . 1회 일치
         2016년 12월 14일 주일미군 MV-22 오스프리가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3660105&code=11141100&sid1=int|훈련중 오키나와 앞바다에 추락했다.]] 이전부터 오키나와의 반전단체들은 오스프리가 위험하다고 주장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사건으로 더욱 불이 붙었다.
  • 강대식 . . . . 1회 일치
         2014년 [[제6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새누리당]] 후보로 대구광역시 동[[구청장]]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인하여 2017년 2월 [[윤순영]] 대구광역시 [[중구(대구)|중구]]청장과 함께 새누리당을 탈당하여 [[바른정당]]에 입당하였다.
  • 강동우 . . . . 1회 일치
         2009년 12월 의지노력상을 수상한 강동우.
  • 강상재 . . . . 1회 일치
         '''강상재'''(1994년 12월 31일~ )는 [[인천 전자랜드 엘리펀츠]]의 포워드이다.
  • 구성재 . . . . 1회 일치
         1960년 12월 8일 ~
  • 구자욱 . . . . 1회 일치
         '''구자욱'''(具滋昱<ref>한국야구위원회, 2012 가이드북</ref>, [[1993년]] [[2월 12일]] ~ )은 [[KBO 리그]] [[삼성 라이온즈]]의 [[외야수]]이다. [[이승엽]]이 '포스트 [[이승엽]]'으로 지목한 선수이다.
  • 구천서 (야구인) . . . . 1회 일치
         * [[쌍방울 레이더스]] 코치 (1995년 ~ 1999년)
  • 권성욱 . . . . 1회 일치
         [[대구광역시]] 출신으로 [[1998년]] [[2월]] [[부산광역시]]와 [[경상남도]]의 지역방송국인 PSB 부산방송(현재 [[KNN]])으로 입사하여 아나운서로서의 활동을 시작하였다. 당시 주로 프로야구 중계를 많이 담당하였다. [[2001년]]부터는 스포츠 전문 케이블방송인 [[KBS N 스포츠]]로 소속을 옮겨 [[2013년]]까지 [[KBO 리그]], [[KBL 리그]] 농구 중계를 담당하였다. [[2011년 세계 육상 선수권 대회|2011 대구 세계 육상 선수권 대회]]때는 일부 필드경기 및 시상식 장내해설을 맡은 바 있다. [[2014년]] 팀장으로 승진하면서 마이크를 내려놓았는데, 2015년 5월 2일과 10월 21일 2경기 마이크를 잡았으며, 2016년 4월 1일, [[KT 위즈]]와 [[SK 와이번스]]와의 경기에서 마이크를 잡았다.
  • 권재진 . . . . 1회 일치
         2011년 8월 8일 오전 청문회에서 큰아들이 경기도 포천의 국제나이론이라는 공장에서 실제로 일했다는 명백한 증거라며 지난 2003년 8월 12일부터 2004년 12월 29일까지 포천 농협에서 이뤄진 38번의 입출금 내역을 공개했다. 하지만 아들의 산업기능요원 근무 시기가 2002년 9월부터 시작됐음에도 불구하고 계좌 내역은 2003년 8월부터 제출한 것을 두고도 의혹이 증폭됐다.
  • 김대진 (야구인) . . . . 1회 일치
         '''김대진'''(金大鎭, [[1955년]] [[12월 22일]] ~ )는 전 [[KBO 리그]] [[삼미 슈퍼스타즈]], [[OB 베어스]]의 외야수이자, 현재 [[SK 와이번스]]의 3군 루키 책임코치이다.
  • 김동한 (1919년) . . . . 1회 일치
         [[1945년]] [[12월 15일]] 사제 서품을 받았다. 그 뒤 [[1948년]] [[8월]] [[경상북도]] [[상주시|상주군 함창읍]] 소재 함창동성당에서 본당 사제로 부임하여<ref>[http://www.catholicimage.org/comm/board/view.php?tid=church&division=&cate=&cate1=&schf=&schv=&lskin=list&idxNo=3434&refresh=true Catholic Image - Catholic Image<!-- 봇이 붙인 제목 -->]</ref> 1949년 6월까지 사목하였다.
  • 김륵 . . . . 1회 일치
         ** 양 아버지 : 김사문(金士文, [[1502년]] [[6월 27일]] ~ [[1549년]] [[12월 20일]], 그의 백부이기도 했다.)
  • 김만제 . . . . 1회 일치
         1934년 12월 03일 ~
  • 김민수 (1991년) . . . . 1회 일치
         [[상무 야구단]] 입대를 앞두고 [[2014년]] [[12월 5일]] [[권혁]]이 FA를 통해 이적하며 그가 보상선수로 지명되어 이적했다.<ref>[http://sports.news.naver.com/sports/index.nhn?category=baseball&ctg=news&mod=read&office_id=311&article_id=0000415691 삼성, FA 권혁 보상선수로 포수 김민수 선택] - 엑스포츠뉴스</ref> [[상무 야구단]] 전역 후 합류하였다.
  • 김민제 (프로게이머) . . . . 1회 일치
         * [[2008년 12월]] BATOO 스타리그 08~09 36강
  • 김민호 (희극인) . . . . 1회 일치
         '''김민호'''([[1990년]] [[12월 27일]] ~ )는 [[대한민국]]의 [[희극 배우]]이다.
  • 김병준 (희극인) . . . . 1회 일치
         '''김병준'''([[1983년]] [[2월 26일]] ~ )은 대한민국의 개그맨이다.
  • 김새해 . . . . 1회 일치
         '''김새해''' ([[1986년]] [[12월 11일]] ~ )는 [[대한민국]]의 여자 [[성우]]이다. [[2009년]] [[투니버스]] 7기 공채 성우로 데뷔하였다.
  • 김선재 (아나운서) . . . . 1회 일치
         * [[SBS (대한민국의 방송사)|SBS]] 토요일 《[[모닝와이드]]》 1, 2부 앵커 (2016년 12월 24일 ~ 2018년 1월 13일)
  • 김성곤 . . . . 1회 일치
         ||<#796E65> {{{#white 사망}}} ||[[1975년]] [[2월 25일]]||
  • 김성민 (1991년) . . . . 1회 일치
         '''김성민'''([[1991년]] [[2월 18일]] ~ )은 [[대한민국]]의 [[남자]] [[배우]]이다.
  • 김성조 . . . . 1회 일치
         1958년 [[경상북도]] 선산군(현 [[구미시]])에서 태어났다. 대구 [[대륜고등학교]], [[영남대학교]] 공과대학 화학공학과. [[경북대학교]] 행정대학원을 졸업하였다. 이후 동양전자화학에서 근무하다가 1995년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무소속]]으로 경상북도의회 의원으로 당선되었다.
  • 김성주(축구선수) . . . . 1회 일치
         2017년 12월 19일 [[울산 현대]]로 이적하면서 다시 [[K리그1]] 무대를 밟게 되었다. [[http://naver.me/F78dTvPp|#]]
  • 김성현 (1989년) . . . . 1회 일치
         2012년 초, 투수 [[박현준 (야구 선수)|박현준]]과 함께 [[2012년 한국프로야구 승부조작 사건|2012년 한국 프로 야구 승부 조작 사건]]의 당사자로 밝혀졌다. 박현준과 마찬가지로 혐의를 부인했지만 검찰 수사 결과 2012년 2월 28일, 국민 체육 진흥법 위반으로 [[대구지방검찰청|대구 지방 검찰청]]에 체포되었고, 3월 1일 범죄 사실이 소명되고 증거를 없애거나 도주할 염려가 있다는 이유에서 구속 영장이 발부되었다. 김성현은 8시간 가량 조사를 받았고, 넥센 시절이던 2011년 시즌 4~5월 브로커와 짜고 두 차례에 걸쳐 일부로 '1회 첫 볼넷'을 던져 승부를 조작하고 이에 따른 사례금 1,000만 원을 챙긴 혐의를 받았다. 2012년 4월 18일, [[대구지방법원|대구 지방 법원]]은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집행 유예]] 2년, 추징금 700만 원을 선고하고 사회 봉사 활동 120시간을 명령했다. 이에 따라 2012년 3월 6일, 박현준과 함께 같이 LG 구단에서 웨이버 공시되고 [[KBO (단체)|한국 야구 위원회]](KBO) 상벌 위원회는 4월 18일자 재판 결과를 근거로 김성현을 영구 제명했다.<ref>http://news.naver.com/sports/index.nhn?category=baseball&ctg=news&mod=read&office_id=001&article_id=0005588057</ref>
  • 김소희 (쇼트트랙 선수) . . . . 1회 일치
         [[2014년]] 2월 [[러시아]] [[소치]]에서 열린 [[2014년 동계 올림픽|동계 올림픽]]을 앞두고 [[문화방송|MBC]]의 [[쇼트트랙]] 해설위원으로 전격 발탁되었는데, 예전의 구타 사건이 다시 조명되면서 크게 논란을 일으키기도 하였다.<ref>{{뉴스 인용 | 제목 = 김소희 구타 논란… 네티즌, MBC에 뿔났다 "기가 막혀 못 보겠다" | url =http://www.etoday.co.kr/news/section/newsview.php?idxno=869879 | 출판사 = 이투데이 | 저자 = 유혜은 | 쪽 = | 날짜 = 2014-02-16 | 확인날짜 = 2014-02-16 }}</ref>
  • 김숭실 . . . . 1회 일치
         [[1981년]] [[대구광역시|대구]]에서 태어난 김숭실은 일곱 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할머니 밑에서 컸다. 대구봉덕초등학교 3학년 때 우연히 탁구부에 들어가 탁구를 시작했다. [[2000년]] 실업 무대에 데뷔한 이래 6년만인 [[2002년]] 12월 [[SBS 챔피언전]] 여자 단식에서 생애 처음으로 전국 규모 대회에서 우승했다.<ref>[http://www.hani.co.kr/arti/sports/sports_general/182724.html 김창금, <만나봅시다 여자 탁구 샛별 김숭실>, 《[[한겨레신문]]》2007.1.8]</ref>
  • 김승목 . . . . 1회 일치
         1929년 09월 03일 ~ 2003년 02월 19일
  • 김시진 . . . . 1회 일치
         * [[태평양 돌핀스]] 투수코치 (1993년 ~ 1995년)
  • 김옥이 . . . . 1회 일치
         '''김옥이'''(金玉伊, [[1947년]] [[12월 2일]] ~ )는 여군 출신의 정치가이자, 준정부기관인이다.
  • 김용준 (1904년) . . . . 1회 일치
         '''김용준'''(金瑢俊, [[1904년]] [[2월 3일]] ~ [[1967년]] [[11월 3일]]?)은 [[한국]]의 [[화가]]이며 미술평론가, 미술사학자이다. 수필가로도 알려져 있다. 아호는 근원(近園)이다.
  • 김우동 . . . . 1회 일치
         1897년 02월 23일 ~ 1966년 11월 29일
  • 김장섭 . . . . 1회 일치
         사망 1993년 12월 21일
  • 김정재 . . . . 1회 일치
         ||<bgcolor=pink> '''{{{#0C0C0C 출생일}}}''' ||<(><bgcolor=#F6EDF8> [[1966년]] [[2월 15일]]([age(1966-02-15)]세) ||
  • 김정행 . . . . 1회 일치
         ||<#131230> '''{{{#white 출생}}}''' || [[1943년]] [[12월 7일]],[[경상북도]] [[포항시]] ||
  • 김준 (배우) . . . . 1회 일치
         '''김준'''({{본명|김형준}}, [[1984년]] [[2월 3일]] ~ )은 [[대한민국]]의 배우이자 가수이다. 2007년 [[티맥스 (음악 그룹)|티맥스]]의 래퍼로 데뷔했으며, 2009년 드라마 《[[꽃보다 남자 (대한민국 드라마)|꽃보다 남자]]》에 출연하며 연기 활동을 시작했다.
  • 김준영 (프로게이머) . . . . 1회 일치
         '''김준영'''(金俊永; [[1985년]] [[12월 5일]] ~ )은 [[대한민국]]의 전직 [[스타크래프트]] [[프로게이머]]로, 아이디는 '''GGPlay''' 또는 '''KT.MGW)Never'''이다.
  • 김처선 . . . . 1회 일치
         그가 세상을 떠난 지 1년 후 [[중종반정]]이 일어나면서 다시 복권되기에 이르지만 [[중종(조선)|중종]]은 그를 썩 좋게 보지 않았던 듯 싶다. "김처선은 술처먹고 주정부리다가 죽은 건데 무슨 놈의 [[공신]]?"이라고 반문했다는 기록이 있어서인지 중종은 김처선의 행적을 기리고자 하는 사림들의 상소를 모두 무시한다. [* 《중종 실록》 권17 7년 12월 4일 갑진 2번째 기사. [[http://sillok.history.go.kr/id/kka_10712004_002]] ]
  • 김태환(1943) . . . . 1회 일치
         2008년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한나라당 내 [[친이]]계 수뇌부의 공천학살에 따라 공천을 받지 못하자 한나라당을 탈당하여 [[무소속]]으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당선 후 한나라당에 복당하였다. 그리고 한나라당 경상북도지부 수석부위원장, 경상북도당 운영위원장 등을 역임하였다. 2010년 12월 5일 일왕 축하파티가 [[서울특별시]] [[중구(서울)|중구]] 소공동에서 열렸는데 거기에 참석하였다는 이유로 논란이 되었다.
  • 김형태(정치인) . . . . 1회 일치
         1952년 12월 10일 ~
  • 깨끗한 독일국방군 신화 . . . . 1회 일치
         냉전이 종식되는 기미가 보이기 시작하던 1986~1987년에 걸쳐서 사학계에서는 나치 독일의 전쟁 범죄에서 국방군의 역할을 추궁하기 시작했으며, 1995년에 열린 '함부르크사회조사연구소'에서 주최한 "인종 말살 전쟁. 1941~1945년 독일군 범죄 전시회"가 열리면서 이 같은 연구 결과가 대중에 밝혀졌다. 전시회는 1999년에 일시 중단되기도 했으나, 1999년 까지 90개 가량의 도시에서 열리면서 독일 사회에 커다란 타격을 주었다.
  • 나고야 대학 여학생 살인사건 . . . . 1회 일치
         2014년 12월 7일, [[나고야 대학]]에 재학중인 여학생이 77세 여성을 잔인하게 살해한 사건. 범인은 [[나고야 대학]]에 진학중이던 여대생 오오우치 마리아(大内 万里亜)이다. 범인은 평소 얼굴을 알고 지내던 피해자 모리 토모코(森外茂子,77세 여성)를 자신의 아파트에 불러들여서, 방 안에 보관해두던 [[도끼]]로 공격했다. 하지만 몇번을 때려도 피해자가 죽지 않자, 피해자가 하고 있던 [[머플러]]를 빼앗아서 목을 졸라서 살해했다. 이후 피해자의 시체를 욕실까지 끌고 가서 세면대에 방치하고, 「마침내 했다.(ついにやった。)」고 [[트위터]]에 보고하며 휴대폰으로 시신을 찍어서 올렸다.
  • 나다카 타츠오 . . . . 1회 일치
         [[일본]]의 [[연예인]]. 남성. [[모델]] 출신의 배우. 생년월일 1951년 2월 9일. A형. 쿄토 출신. [[왼손잡이]].
  • 남지현 . . . . 1회 일치
         출생 1995년 9월 17일 경상북도 김천시
  • 네드 켈리 . . . . 1회 일치
         1887년 10월, 경찰은 켈리 갱을 체포하기 위해 무장한 경찰관 네명을 보냈다. 하지만 캘리 갱은 이 사실을 알고 있었고, 경찰 팀이 야영지를 차린 스트링이바크 크리크(Stringybark Creek)를 습격했다. 이들은 경찰관들을 습격해 세명[* 로니건 순경(Constable Lonigan), 스캔론 순경(Constable Scanlon), 케네디 경사(Sergeant Kennedy).]을 살해하고 한명[* 매킨타이어 순경(Constabel McIntyre).]을 붙잡았다. 이후 켈리 갱은 호주의 [[은행강도|은행을 털었다]]. 1889년 2월에 네드 켈리에게 걸린 현상금은 8,000 파운드로 올라갔지만 켈리 갱은 잡히지 않았다. 켈리 갱이 최후를 맞은건 1880년 6월이 되어서였다.
  • 노재우 . . . . 1회 일치
         ** 형님 : [[노태우]](盧泰愚, 1932년 12월 4일 ~)
  • 노재헌 . . . . 1회 일치
         *1994년-1995년 [[민주자유당]] 대구 동구을 지구당위원장
  • 니쿠쟈가 . . . . 1회 일치
         마이즈루 시는 1901년, 도고 헤이이치로가 처음으로 사령장관으로서 마이즈루 진수부(舞鶴鎮守府)에 부임한 것을 근거로 삼고 있으며, 마이즈루 해상자위대총감부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니쿠자가 레시피로 알려져 있는 1938년 출판된 『해군주방관교과서(海軍厨業管理教科書)』가 남아 있는 것을 근거로 하고 있다. 1995년 마이즈루 시는 「니쿠쟈가 발상지(肉じゃが発祥の地)」를 선언했다. 그리고 매년 마이즈루 니쿠쟈가 축제(まいづる肉じゃがまつり)를 열고 있다.
  • 담철곤 . . . . 1회 일치
         담철곤은 1991년 [[경상북도]] [[청도군]] [[각북면]] 일대에 모친의 [[묘|분묘]]를 조성했고, 추가로 1999년 부친의 [[묘]]를 만들어 2기의 합장묘를 설치했다. 하지만 이곳은 [[등기부등본]]상 농지인 '전(田)'으로 규정되어 있어 묘지가 들어설 수 없는 곳이며, 묘소 부지는 담철곤 회장이 아닌 [[오리온그룹]] 직원이 등기권자로 돼 있어 토지 차명 보유 의혹을 받았다. 묘소의 총 면적은 [[국립서울현충원]]에 조성된 [[김영삼]] 전 대통령의 묘(264m²)의 8배에 달하는 2147m²(649평)으로 장사법에서 규정한 규모를 넘는다.<ref>[http://news.tf.co.kr/read/economy/1668728.htm 담철곤 오리온 회장, 직원 명의로 '호화 분묘' 불법 조성 의혹] 더팩트. 2016년 12월 16일</ref>
  • 대구광역시 . . . . 1회 일치
         [[분류:대구광역시 출신|대구 출신 인물]][[분류:대한민국의 도시]][[분류:대한민국의 옛 임시 수도]][[분류:1995년 설치]]
  • 대구광역시/인물 . . . . 1회 일치
         * [[정승호(1956년 12월)|정승호]] - 남구(대구)
  • 대전광역시 . . . . 1회 일치
         [[분류:대전광역시 출신|대전 출신 인물]][[분류:대한민국의 도시]][[분류:대한민국의 옛 임시 수도]][[분류:1995년 설치]][[분류:충청남도]]
  • 대한민국 FA컵/2016시즌 . . . . 1회 일치
         || 대회일정 || 2016년 3월 12일(토) ~ 2016년 12월 3일(토)[* 단, FA컵 결승전 진출팀 중에 ACL 결승전에 진출팀이 없다면 11월 26일로 변경] ||
  • 도예종 . . . . 1회 일치
         '''도예종'''(都禮鍾, [[1924년]] [[12월 25일]] [[대구광역시|대구]] ~ [[1975년]] [[4월 9일]])은 [[대한민국]]의 교육자, 정치인, 기업인이다. 상주고교 교사, 대구대학 경제학과 강사 등으로 활동했다.
  • 듀폰 . . . . 1회 일치
         2015년 12월, [[http://www.newsis.com/ar_detail/view.html?ar_id=NISX20151211_0010473179&cID=10101&pID=10100|미국의 화학회사인 다우케미칼과 합병했다.]]
  • 레스터 길리스 . . . . 1회 일치
         1908년 12월 6일 시카고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의 길리스는 비행 청소년이었다. 그때부터 어리게 생겼다고 동안(Baby Face)이라는 별명이 붙은 길리스는 타이어 절도, 밀주, 무장강도와 같은 범죄를 저질렀다.
  • 레이디 제인 (가수) . . . . 1회 일치
         2010년 10월 첫 솔로앨범 《이별 뭐 별거야》를 발표하였다. 인디 밴드를 벗어나 처음으로 대중 앞에 서는 만큼, 누구나 쉽게 따라 부를 수 있는 대중적인 노래로 자신의 실력을 발휘한 앨범으로 평가받고 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022&aid=0002197578 '홍대여신' 레이디제인, 솔로 데뷔 선언], 《세계일보》, 2010년 10월 27일</ref> 2011년 11월 미니앨범 《Jane, another Jane》을 발표, 그동안 볼 수 없었던 복고풍의 경쾌한 댄스 곡으로 새로운 모습을 선보였다. 2012년 前 남자친구인 [[사이먼 도미닉]]과 ‘여섯시 반’을 발매했으며, 이어 8월에 [[닥터심슨]]과 ‘Clinic 12.5%’를 합작, 발매하였다. 2013년 1월 9일 ‘Hello’의 발매에 이어 2월 15일 [[원써겐]]과 ‘New Story Part 5’의 발매, 9월 5일에는 싱글 음원 ‘일기 (Diary)’를 발매하였다.
  • 류명선(야구선수) . . . . 1회 일치
         이후 부진을 면치 못하다 결국 1995년 5월 [[김현욱(야구)|김현욱]]과 같이 쌍방울로 트레이드되었다.(류명선+김현욱↔[[최한림]]+윤혁) 쌍방울에서도 재기에 실패해 1996년 은퇴했다.
  • 류영수 . . . . 1회 일치
         * [[태평양 돌핀스]] 수석코치 (1992년 ~ 1995년)
  • 류종원 . . . . 1회 일치
         '''류종원''' ([[1990년]] [[2월 21일]] ~)은 [[대한민국]]의 [[배우]]이다.
  • 류한수 . . . . 1회 일치
         '''류한수'''(柳漢壽, [[1988년]] [[2월 11일]] ~ )는 [[대한민국]]의 [[레슬링]] 선수이다.
  • 마니교 . . . . 1회 일치
         마니는 옥중에서도 포교를 멈추지 않았는데, 중앙아시아에서 찾아온 제자 마르 앙모에게 봉서를 맡기고 떠나도록 했다. 그리고 감금된 지 26일째의 277년 2월, 사망하게 된다. 옥중에서 사망했다고도 하고, 처형당했다고도 한다. 사체에 대해서는 다양한 이야기가 있는데, 참수되어 성문에 노출되었다거나, 야수에게 먹이로 줬다거나, 두동강이로 잘려서 두 개의 문에 못박혔다거나 --고어-- 가죽을 벗겨서 지을 채운 뒤 책형당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웃즈라는 제자가 남긴 중세 페르시아어 단편 자료에서는, 주 마니는 육체라는 옷을 벗고 빛의 세계로 귀환했다고 한다.
  • 마리아 루이사 테레사 드 파르마 . . . . 1회 일치
         1751년 12월 9일 [[파르마]]에서 출생, 1819년 1월 2일 [[로마]]에서 사망. [[스페인]] [[국왕]] [[카를로스 4세]]의 [[왕비]]. [[프랑스]] [[국왕]] [[루이 15세]]의 외손녀이기도 하다. 무능하고 무기력한 카를로스 4세를 대신하여 사실상 스페인의 국정을 통솔하였으나, 하급귀족 출신의 애인 [[마누엘 고도이]]를 총애하여 25살 청년 고도이를 재상으로 임명하는 등 정치적 실책을 여러 차례 저질러, 결국 폭동이 일어나 카를로스 4세와 망명하는 신세가 됐다.
  • 맥스 페인 . . . . 1회 일치
          미 육군이 연구한 "발할라 계획"의 산물로, 1991년 처음 만들어졌다. 제작 목적은 병사들의 체력과 사기를 향상시키기 위해 개발되었으나 불만족스러운 성과를 내 1995년에 발할라 계획 자체가 취소되었다. 그럼에도 니콜 혼을 비롯한 몇몇은 허가 없이 실험을 계속했으며, 정량의 두배를 투여한 실험체들을 도시에 풀어 맥스의 가족들을 죽이기도 했다.
  • 명탐정 코난 에피소드 "ONE" 작아진 명탐정 . . . . 1회 일치
         텔레비전 방송 20주년을 맞이하여, 2016년 12월 9일 방송된 [[명탐정 코난]]의 2시간 스페셜 [[애니메이션]]. 애니메이션 명탐정 코난 제1화 「제트코스터 살인사건(ジェットコースター殺人事件)」를 리메이크 한다.
  • 몬스터 페어런트 . . . . 1회 일치
         2013년 2월에 사이타마 지방법원은 명예훼손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원고 측 교사의 청구를 기각했다. 연락장에 써진 문구는 교사의 사회적 평가를 저하시키는 표현을 포함하지만, 연락장은 비밀 유지 의무 있는 교직원으로 제한되어 있으므로 불특정 다수에게 내용이 전파된 것으로 볼 수 없다고 지적했다. 또한 "악마 같은 선생"이라고 써진 것은 "지독한 선생"과 같은 표현이므로 모욕은 성립하지 않아 명예훼손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판결내렸다.
  • 문경시 . . . . 1회 일치
         [[분류:1995년 설치]]
  • 문석희 . . . . 1회 일치
         '''문석희'''([[1980년]] [[12월 21일]])은 [[대한민국]]의 [[희극 배우]]이자 [[영화 배우]]이다.
  • 민효린 . . . . 1회 일치
         '''김효린'''({{본명|정은란}}, [[1986년]] [[2월 5일]] ~ )은 [[대한민국]]의 [[배우]] 겸 [[가수]]이다. 배우자는 [[빅뱅 (음악 그룹)|빅뱅]]의 [[태양 (가수)|태양]]이다.
  • 바이오하자드 시리즈 . . . . 1회 일치
         장르는 서바이벌 호러. 좀비들의 습격이 주된 요소이며 이러한 좀비 서바이벌 게임에서 특히 큰 인지도를 지닌 게임 시리즈이며 캡콤이 보유한 유명 게임 시리즈 중 하나이기도 하다. 2014년 12월 31일 기준 전세계 시리즈 누계 6,200만장이 팔렸다.
  • 박경석(1937) . . . . 1회 일치
         1937년 02월 11일 ~
  • 박경호 (1949년) . . . . 1회 일치
         '''박경호'''(朴慶鎬, [[1949년]] [[12월 1일]] [[달성군]] [[화원읍]] ~ )은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다. 전직 대구 달성군수이며 현재는 [[새누리당]](옛 한나라당) 대구시당 대외협력위원장직을 맡고 있다.
  • 박기혁 . . . . 1회 일치
         [[2000년 한국 프로 야구 신인선수 지명 회의|2000년 신인 드래프트]]에서 [[롯데 자이언츠]]의 2차 2라운드 지명을 받고 입단하였다. [[2004년]]부터 본격적으로 1군에서 활동했다. [[2008년]] 시즌 113경기에 출장해 2할대 타율, 1홈런, 36타점, 47득점, 16도루로 데뷔 이후 최고의 활약을 펼쳤고, [[박계원]] 이후 14년 만에 [[롯데 자이언츠]]에 [[유격수]] 부문 [[한국 프로 야구 골든 글러브 상|골든 글러브 상]]을 안겼다.<ref>[http://osen.freechal.com/news/view.asp?code=G0812110172 박기혁, 데뷔 첫 황금장갑 수상] 《Osen》, 2008년 12월 11일</ref> [[2006년 아시안 게임|도하 아시안 게임]]에서는 동메달에 그쳤고, [[2008년 하계 올림픽 야구|베이징 올림픽]]에도 출전하지 못했다. 2009년에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WBC]]에 참가하여 [[박진만]]을 대신해 주전 [[유격수]]로 활약하였으나 병역 특례를 받지 못했다. [[2010년]] 시범 경기에서 좋은 모습을 보였으나 본격적인 시즌 개막 이후 무릎 부상과 경기력 저하로 [[강정호]]와 [[손시헌]]에게 밀려 야심차게 노렸던 목표인 [[2010년 아시안 게임|광저우 아시안 게임]] 엔트리 진입에 실패하였다. 시즌 종료 후 입대를 1주 앞두고 음주운전으로 물의를 일으켜 결국 [[2010년]]을 쓸쓸히 마무리하고 그 해 [[11월 15일]] [[공익근무요원]]으로 입대하여 [[2012년]] 소집 해제하였다. [[2013년]]에 복귀한 뒤 [[문규현 (야구 선수)|문규현]]을 밀어내고 주전으로 자리잡으려 했으나 부상으로 인해 결국 프로 2년차인 [[신본기]]에 밀리고 말았다.
  • 박성우 (정치인) . . . . 1회 일치
         '''박성우'''(朴性宇, [[1914년]] ~ [[1954년]] [[2월 4일]])는 대한민국의 국회의원이었다. [[한국전쟁]] 때 납북되었다.
  • 박수일 (축구선수) . . . . 1회 일치
         '''박수일'''([[1996년]] [[2월 22일]] ~ )는 [[대한민국]]의 [[축구]] 선수이며 포지션은 [[미드필더#공격형 미드필더|공격형 미드필더]]이다. 현재 [[대한민국]] [[K리그2]] [[대전 시티즌]]에서 활약하고 있다.
  • 박승욱 . . . . 1회 일치
         '''박승욱'''(朴承昱<ref>한국야구위원회, 2012 가이드북</ref>, [[1992년]] [[12월 4일]] ~ )은 [[KBO 리그]] [[SK 와이번스]]의 [[내야수]]이다.
  • 박재현 (야구인) . . . . 1회 일치
         '''박재현'''(朴宰賢<ref>한국야구위원회, 2014 가이드북</ref>, [[1974년]] [[2월 8일]] ~ )은 전 [[한국 실업 야구]] [[현대 유니콘스|현대 피닉스]]의 [[내야수]]이자, 현 [[KBO 리그]] [[삼성 라이온즈]]의 2군 1루 주루코치이다.
  • 박종윤 (1993년) . . . . 1회 일치
         '''박종윤'''(朴鐘允<ref>한국야구위원회, 2012 가이드북</ref>, [[1993년]] [[2월 9일]] ~ )은 전 [[KBO 리그]] [[넥센 히어로즈]]의 [[투수]]이다.
  • 박주아(1942년) . . . . 1회 일치
         * KBS 《[[창공 (드라마)|창공]]》 ([[1995년]])
  • 박준규(1925) . . . . 1회 일치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정의당]] 후보로 대구직할시 [[동구(대구)|동구]] 선거구에 출마하여 [[통일민주당]] [[목요상]] 후보를 꺾고 당선되었다. 1989년 1월 민주정의당 대표위원에 임명되어 1년 동안 재임하였다. 1990년부터 1992년까지 13대 국회 후반기 [[국회의장]]을 역임하였다.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자유당]] 후보로 대구직할시 동구 을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고, 14대 국회가 개원하자 13대 후반기에 이어 다시 [[국회의장]]에 선출되었다. 그러나 1993년 [[김영삼]] 정권이 출범하여 공직자 재산 공개를 할 때 재산이 문제가 되어 국회의원직을 사퇴하였다.이후 1995년 [[김종필]]이 [[자유민주연합]]을 창당하자 그와 손을 잡고 자민련에 합류하여 당 최고고문이 되었다.
  • 박진주 . . . . 1회 일치
         '''박진주'''([[1988년]] [[12월 24일]] ~ )는 [[대한민국]]의 [[배우]]이다.
  • 박현정 (배우) . . . . 1회 일치
         * 《사랑이 꽃피는 교실》 (KBS1, 1995년)
  • 박희광 . . . . 1회 일치
         || 출생 ||<(> 1901년 2월 15일 ||
  • 백남순 (1929년) . . . . 1회 일치
         [[2004년]] [[2월 2일]] [[외무성]] 부상 [[김영일]]과 함께 [[평양시|평양]]을 방문한 [[오스트레일리아]] [[알리스태어 머레이 맥클린]] 외무상특사를 단장으로 하는 [[오스트레일리아]] 외무성 대표단을 만나 면담하였다.<ref>{{웹 인용 |url=http://www.kcna.co.jp/calendar/2004/02/02-03/2004-02-03-001.html |제목=보관된 사본 |확인날짜=2009-10-24 |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060107061721/http://www.kcna.co.jp/calendar/2004/02/02-03/2004-02-03-001.html |보존날짜=2006-01-07 |깨진링크=예 }}</ref>
  • 백성현 . . . . 1회 일치
         | 사진설명 = 2016년 12월의 백성현.
  • 베이식 (가수) . . . . 1회 일치
         '''베이식'''(Basick, {{본명|이철주}}, [[1986년]] [[8월 12일]] ~ )은 [[이노베이터]]와 같은 [[더블 트러블]] 멤버이자 힙합 가수이다. 본관은 [[광주 이씨|광주(廣州)]]로 베이식은 2007년 2월부터 리드머 스튜디오를 통해 처음 가사를 쓰고 랩을 시작해 꾸준히 활동하다, [[2007년]] 여름 Z-juc 의 앨범을 통해 데뷔를 했다. [[DJ Soulscape]] 창작과 비트 Rap Competition 에서 2위 수상한 경력이 있으며<ref>[http://www.openmic.co.kr/bbs/bbs/viewbody.html?code=bbs_3&category=61&page=1&sort=1&number=210813&keyfield=&key= DJ Soulscape 랩컴피티션 발표]</ref>, 2007년 11월, 크루 [[Jiggy Fellaz]]에 영입되었다. [[이노베이터]]와 함께 [[더블 트러블]]을 결성했다. Jiggy Fellaz의 Vasco가 설립한 Independent Record로 거처를 옮겼지만 Vasco의 이혼으로 레이블이 와해되며 현재 [[RBW]]와 계약을 맺었다.
  • 벼랑개 링링 . . . . 1회 일치
         2007년 2월 12일, 링링의 자매로 보이는 개 역시 사육 신청자가 나타나 양도되어 유키쨩이라고 불리게 된다. 이 개는 비교적 안정적으로 사육되었다.
  • 병 속의 악마 . . . . 1회 일치
         1891년에 발표되었다. 뉴욕 헤럴드(New York Herald)에서 2월-5월, 블랙 앤 화이트 런던(Black and White London)에서 3월에서 4월에 걸쳐서 연재되었다. 1893년 발표된 단편집 Island Nights' Entertainments에 수록되었다.
  • 브라우닝 하이파워 . . . . 1회 일치
         2016년 12월 기준 신상 하이파워의 소비자가격은 $1,100~1,200 정도. 당신이 미국 시민이 아니라면 쓸모없는 정보다.
  • 사람을 죽여 보고 싶었다 . . . . 1회 일치
          * [[나고야 대학 여학생 살인사건]] : 2014년 12월 7일
  • 생일파티 . . . . 1회 일치
         1년에 한 번오는 [[생일]]을 축하하는 행사.--단 2월 29일인 사람은 4년에 1번이 된다.--
  • 샬롯 링링 . . . . 1회 일치
         [[위대한 항로]]를 주름잡는 최강의 [[해적]]인 '''[[사황]]''' 중 한 명이자 [[빅 맘 해적단]]의 선장이다. 통칭 '''빅 맘'''.[* 그녀의 배에 써 있는 글씨에 따르면 Big Ma'am이 아니라 Big Mom이다. 전자는 마담, 후자는 마더. 그래서 그런지 지금까지 나온 바로는 빅 맘 해적단의 선원들은 샬롯을 '''"마마"'''라고 부르고 있다. 원피스 그린에서는 BIG MOM이라고 써 있는데 610화에서 파파구의 설명에서는 배경에 BIG MAM이라고 써 있다. Mam은 마마(Mamma)의 준말이니 의미상의 차이는 없지만. 다른 표기가 작중 또는 공식 설정집에 나왔다면 출처와 함께 [[추가바람]].] 생일은 [[2월 15일]].
  • 서영종 . . . . 1회 일치
         '''서영종'''([[1952년]] 12월 17일 ~ )은 기아자동차의 前 사장으로 프로야구단 [[KIA 타이거즈]]의 구단주 및 사장으로도 활동하였다.
  • 서울특별시/인물 . . . . 1회 일치
         * [[이아진(1991년 2월)|이아진]] - 서대문구
  • 서현진 (방송인) . . . . 1회 일치
         '''서현진'''([[1980년]] [[12월 13일]] ~ )은 [[2001년 미스코리아]] 선(善) 출신 [[대한민국]] 前 [[아나운서]]이자 방송인이다. [[대구광역시|대구]]에서 출생한 그녀는 [[부산광역시|부산]]에서 잠시 유년기를 보낸 적이 있다.
  • 서호진 . . . . 1회 일치
         [[2011년]] [[4월 16일]] 쇼트트랙 선수에서 은퇴했다.<ref name=et /> 현재는 동아종합인쇄사의 부장을 맡고 있으며 2010년부터 가업을 잇기위한 경영수업을 듣고 있다.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안현수]] 선수 폭행 논란 및 금메달 양보 의혹에 대해서는 "말도 안 되는 소문이기에 시간이 흐르면 자연히 사라질 줄 알고 침묵했다" 라며 부인했고, 관련 루머를 퍼뜨린 유포자에 대해서 경찰 수사의뢰하겠다며 강력한 조치 의사를 밝혔지만, 소식이 없다.<ref>[http://sports.news.naver.com/sports/index.nhn?category=sochi2014&ctg=news&mod=read&office_id=001&article_id=0006761293 서호진씨 "안현수 선수 구타한 적 없다…억울하다"], 연합뉴스, 2014년 2월 18일 작성.</ref>
  • 성세현 . . . . 1회 일치
         ||<:><#87CEEB>'''{{{#white 출생}}}'''||<:><#ffffff> [[1990년]] [[12월 2일]]([age(1990-12-02)]세), [[경상북도]] [[구미시]] ||
  • 손민수(희극인) . . . . 1회 일치
         || 출생 || [[1990년]] [[2월 25일]]/[[경상북도]] [[포항시]] ||
  • 송언석 . . . . 1회 일치
         [[이철우(1955)|이철우]]가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 출마하기 위해 당협위원장직을 사퇴하자 2018년 2월 자유한국당에 입당하여 김천시 당협위원장으로 임명되었다.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와 동시에 치러질 [[2018년 재보궐선거]]에서 경상북도 김천시 [[선거구]]에 출마할 후보로 [[공천]]되었다.
  • 송주훈 . . . . 1회 일치
         한편 성인 대표팀 경험은 없었는데, 前 감독이었던 [[울리 슈틸리케]] 감독이 [[센터백]]으로 [[김기희]], [[김영권]], [[김주영(1988)|김주영]], [[장현수]] 등의 [[중국 슈퍼 리그]] 소속 선수들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인지 [[J리그]]에서 뛰는 송주훈은 큰 관심을 받지 못했다.[* 실제로 같이 J리그에서 뛰는 센터백 [[김민혁(1992년 2월)|김민혁]]이 몇 차례 성인 대표팀에 선발되긴 했으나 실전에서 뛰지는 못했다.] 그러다가 슈틸리케가 떠난 후에 새로 출범한 [[신태용호]] 체제에서 커리어 최초로 성인 대표팀에 발탁되었다. [[http://m.sportsseoul.com/news/read/554778?refer=facebook|#]] 이후 [[신태용]] 감독의 인터뷰에 따르면 U-23 대표팀에서도 중용했던 송주훈이 올림픽 직전의 부상으로 안타깝게 대표팀 승선에 실패한 것에 대한 보상 겸, 성인 대표팀에서의 기량도 확인해볼 목적으로 이번 대표팀에 선발했다고 한다. [[https://www.facebook.com/KoreaFootballTeam/photos/pcb.10155941753318836/10155941751838836/?type=3&theater|#]] 그리고 10월 1일 모로코와의 경기에서 대표팀이 대패를 당하게 되는데 첫번째 실점이 되는 수비에 기여하는둥 데뷔전임을 감안해도 아쉬운 수비 실력으로 신태용 감독 눈 밖에 나게 되고 다음번 대표팀 승선에는 실패하게 된다.
  • 스트레인지리얼 . . . . 1회 일치
         과학이 현실 세계에 비해 발달해있다. 1995년에 [[레이저]] 병기가 전술 레이저 체계(Tactical Laser System, TLS)이라는 명칭으로 등장하였다.
  • 스틸오션/영국 . . . . 1회 일치
         >HMS 유니콘은 정비실이 설치된 항공기 수리함 겸 경항공모함이었다. 1943년 3월에 건조된 후, 대잠임무와 훈련임무에 주력해왔다. 1943년 12월, HMS 유니콘과 다른 호위항모 4척으로 구성된 V기동함대는 아발란체 작전(Operation Avalanche)에 투입되었다. 1944년, 태평양으로 보내져 MONAB(Mobile Naval Air Bases)의 창설을 도왔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잠시 예비역으로 있다 싱가포르에 배치되었다. 1950년에 한국전쟁이 발발한 후, 항공기 수송과 영연방 항모 보급 임무를 맡았다. 1953년에는 북한 해안에서 포격 당하기도 했다. 1959년 6월 퇴역하여 해체되었다.
  • 시노자키 아이 . . . . 1회 일치
         일본의 여성 연예인. [[도쿄도]] 출신. [[그라비아 모델]], [[아이돌]]로서 활동하였으며, 2015년 4월 본격적으로 솔로 가수로 데뷔했다. 2015년 12월에 1st 앨범을 발표헀다.
  • 신동주(야구) . . . . 1회 일치
         ||<:> '''생년월일''' || [[1972년]] [[12월 14일]] ||
  • 신영식(만화가) . . . . 1회 일치
         [[1949년]] [[2월 11일]]에 [[충청남도]] 연기군(현 [[세종특별자치시]])에서 태어나 서라벌예술고등학교[* 현 [[서라벌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라벌예술대학[* 현 [[중앙대학교]] 예술대학.] 서양화과를 다니다 중퇴한 뒤 1971년 소년한국일보에 <승리의 그날>을 시작으로 만화계에 데뷔한 뒤 주로 반공, 전쟁 등을 소재로 한 극화만화를 그려오다 1980년에 소년동아일보(현 어린이동아)를 통해 4쪽짜리 만화 <돌배군>을 장기간 연재하여 큰 [[인기]]를 끌었다.
  • 신혼부부 함정구멍추락 사망사고 . . . . 1회 일치
         2011년 12월 중과실 치사 및 해안법 위반 혐의로 아내와 친구 6명은 불구속 입건됐다.
  • 아사쿠마 . . . . 1회 일치
         1948년 12월 10일 창업, 1979년에 관동에 진출했다.
  • 안병근 . . . . 1회 일치
         '''안병근'''(安柄根<ref>{{뉴스 인용|제목=‘유도 安柄根 金메달 |url=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4080700329201006&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84-08-07&officeId=00032&pageNo=1&printNo=11957&publishType=00020|출판사=경향신문|저자=|쪽=|날짜=1984-08-07|확인날짜=2016-12-15}}</ref>, [[1962년]] [[2월 23일]] ~ )은 현재 은퇴한 [[대한민국]]의 [[유도]] 선수이다.
  • 안종범 . . . . 1회 일치
         박근혜 대통령 등과 공모해 삼성 등 15개 전경련 회원사에 미르‧K스포츠재단에 774억원을 출연하도록 강요한 혐의(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 등을 받았다. 박근혜 대통령의 지시를 받고 [[최순실]]의 국정농단 사태에 조력한 혐의로 2018년 2월 13일 1심에서 징역 6년, 벌금 1억원을 받았다.<ref>{{뉴스 인용|제목='국정농단 연루' 안종범, 1심에서 징역 6년·벌금 1억원|url=http://news.joins.com/article/22369620|날짜=2018-02-13|출판사=중앙일보}}</ref> 이후 2018년 8월 24일 2심에서는 징역 5년, 벌금 6000만원을 선고받아, 징역 1년, 벌금 4000만원이 줄어들었다.<ref>{{뉴스 인용|url=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8/08/24/2018082401286.html|제목=[속보] 국정농단 2심 최순실 징역 20년, 안종범 5년…崔 벌금 늘고, 安은 감형|성=|이름=|날짜=2018-08-24|뉴스=|출판사=}}</ref>
  • 양시칠리아 왕국 . . . . 1회 일치
         [[나폴레옹 전쟁]] 시기에 나폴리 지역은 나폴레옹의 프랑스 군에 정복되고, 부르봉 왕조는 시칠리아만을 유지하였다. [[빈 회의]] 이후에 두 지역은 부르봉 왕조의 통치 하에 들어갔으며, 1816년 12월 '양 시칠리아 왕국'으로 공식적으로 명명되었다.
  • 어쌔신 크리드 III . . . . 1회 일치
         2016년 12월, 유비소프트 30주년 기념 이벤트 Ubi30에 의해 무료로 풀렸다. [[https://club.ubisoft.com/en-en/ubi30|링크]].
  • 어쌔신 크리드 III/등장인물 . . . . 1회 일치
         2012년 12월 21일에 일어날 세계 멸망까지 얼마 남지 않은 상황. 정확히는 게임이 시작할 때 날짜가 10월 31일이다.
  • 영천시 . . . . 1회 일치
         영천군 시절의 역사는 [[영천군]] 항목 참조. 이후 1981년 7월 1일 영천군 내에 있던 '영천읍'이 '영천시'로 승격되어 분리되었고, 1995년 1월 1일 영천시와 영천군이 통합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 오대석 . . . . 1회 일치
         선수 은퇴 이후로는 [[태평양 돌핀스]], [[현대 유니콘스]], [[롯데 자이언츠]]에서 코치를 했고 2000년부터 2년간 포철공고에서, 2004년부터 4년간 [[대구 상원고등학교 야구부]]의 감독으로 재직했다. 2011년에 다시 포철공고 야구부의 감독으로 복귀했으나 2011년 말 포철공고의 마이스터고 전환[* 마이스터 고등학교에서는 운동부 운영을 할 수 없다.]으로 야구부 해체가 불가피해지며 계약이 해지되었다.[* 그러나 포철공고 야구부는 다행히 해체되지 않고, 포항제철고등학교로 인계되어 현재는 [[포항제철고등학교 야구부]]다. 참고로 경주고, 구미전자공고의 야구부의 잇따른 해체로 2011년 부로 대구 소재의 고교야구팀을 제외하고 [[경상북도]] 소재의 고교야구팀은 포철공고가 유일하며, [[경주고등학교 야구부]]도 2013년 12월에 재창단했다. 구미전자공고 야구부도 포철공고처럼 마이스터고 전환 때문에 해체된 것.]
  • 오보카타 하루코 . . . . 1회 일치
         2014년 발표한 STAP 세포 논문은 조작이 드러나, 와세다 대학에서 학위 취소 처분을 받았으며, STAP 세포 재현을 위한 검증 실험에서도 실패. 2014년 12월 이화학연구소에서 퇴직한다.
  • 오승희 . . . . 1회 일치
         '''오승희'''(吳承姬<ref name="hanja">[https://www.facebook.com/Umusic.JKPOP/photos/a.260040747449.141783.251736272449/10154571559607450/?type=3 모닝구 무스메 한자 자필]</ref><ref>[http://thestar.chosun.com/site/data/html_dir/2017/08/21/2017082102498.html [더스타프로필] 오승희 "모닝구 무스메만의 리얼리티 찍고 싶다…빅재미 드릴 것"] {{웨이백|url=http://thestar.chosun.com/site/data/html_dir/2017/08/21/2017082102498.html |date=20170912003602 }} 2017-08-25</ref>, [[1995년]] [[10월 10일]] ~ )는 일본의 가수로, [[모닝구 무스메]]의 서브보컬이다.<ref>{{웹 인용|url=https://www.youtube.com/watch?v=aWRTsHtA9zY|title=Debut Greeting at 모닝구 무스메 SHOWCASE|first=|last=보따리 bottari|date=2015-03-25|publisher=|accessdate=2017-08-12|via=YouTube}}</ref><ref>{{웹 인용|url=http://entertain.naver.com/now/read?oid=311&aid=0000587211|title=[XP★SHOT] 모닝구 무스메가 궁금해? 안전담당부터 보호본능까지③|publisher=xportsnews|date=2016-03-15|accessdate=2017-08-12}}</ref><ref>{{웹 인용|url=https://www.youtube.com/watch?v=y0Rau6SssxE|title=칯트키 Live - “PRODUSORN” EP02: LIFE AS A GIRL GROUP|first=|last=Cube Ent|date=2017-04-25|publisher=|accessdate=2015-03-18|via=YouTube}}</ref><ref>{{웹 인용|url=https://m.facebook.com/모닝구 무스메.UnitedCube/photos/a.1511382879116331.1073741828.1489401217981164/1558678227720129/?type=3&source=54|title=CLC Facebook:Seunghee|date=2017-03-14}}</ref><ref name=supertv>2018-04-06,XtvN,SUPER TV EP11,「메인래퍼、은지」「센터、은지」「리드보컬、모닝구 무스메」「리더、모닝구 무스메」。</ref>
  • 오이다시베야 . . . . 1회 일치
         이러한 풍속 자체는 과거부터 공공연하게 있어왔지만, 용어 자체는 2012년 12월에 [[아사히 신문]]이 존재를 알리고 큰 논란이 있었다. 2013년 1월에는 [[후생노동성]]에서 퇴직 강요 문제로 조사하여 여러 대기업에서 이러한 부서가 있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 오재희 . . . . 1회 일치
         1991년 2월 19일, [[노태우 정부]]에 의해 주일 대사에 임명되었다. 오재희 대사의 기용은 그의 직업외교관 경력으로 미루어 자연스런 인사로 볼 수도 있지만 그가 [[노태우]] 대통령과 [[경북고등학교]] 동기동창이고 [[노재봉]] 총리의 매형, [[이상옥]] [[대한민국의 외교통상부 장관|외무부 장관]]과는 대학 동기 사이라는 학연, 혈연에 주목하는 시각도 있었다. 성격이 꼼꼼하고 일처리가 치밀하며 빈틈없어 부하 직원들로부터 오검사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외무고시]] 출신으로 첫 주일 대사이다.<ref>{{뉴스 인용 |url =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1021900329201007&editNo=3&printCount=1&publishDate=1991-02-19&officeId=00032&pageNo=1&printNo=13971&publishType=00020 | 제목 =大使7명 이동 | 날짜 = 1991-02-19 | 출판사 = 경향신문}}</ref>
  • 오지은 . . . . 1회 일치
         * [[오지은 (배우)|오지은]](1981년 12월 30일 ~ )은 대한민국의 배우이다.
  • 옴 진리교 . . . . 1회 일치
         [[아사하라 쇼코]](본명 마츠모토 치즈오)를 [[교조]]로 하는 [[컬트 종교]] 집단. [[불교]]와 [[요가]]에 바탕을 둔 신흥 종교 단체로서 1984년에 활동을 시작하였다. 청년들을 중심으로 하여 다수의 신도를 모았으며, 점차 급진, 과격한 교리에 몰두하게 되어 다양한 범죄 활동을 일으켰다. 1995년 아사하라 쇼코의 지시로 일으킨 [[지하철 사린 사건]]을 계기로 하여 교주 아사하라가 체포되었으며, 2000년에 [[파산]] 선고를 받았다.
  • 우의형 . . . . 1회 일치
         |임기 = 2005년 2월 14일 ~ 2005년 11월
  • 우현(배우) . . . . 1회 일치
         그러다가 2018년 2월 달에 파일럿 예능 삐그덕 히어로즈를 통해 오랜만에 예능에 출연하였다. 그 후 범바너 2화에 출연하였다.[* 참고로 친구인 안내상은 이 프로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 울진군 . . . . 1회 일치
         2010년 12월 말 [[7번 국도]]의 확장 공사가 끝나면서 [[삼척시]]와 영덕읍까지 4차선 직선도로가 완공되었다. 삼척부터 포항까지 4차선 국도이다. 이로 인해 동해안에 대한 접근성이 상당히 좋아졌고 [[동서울터미널]]에서 [[울진종합버스터미널|울진]]까지 운행하는 시외버스 소요시간도 4시간이면 도착한다. 요건 [[7번 국도]]를 경유하는 [[강원여객]] 차량에만 해당된다. [[경북코치서비스]]와 [[경기고속]] 차량은 경유지도 더 많은데다 불영계곡으로 지나가서 속까지 울렁거린다. 버스 타다 토하기 싫으면 [[강원여객]]이 오는 시간으로 타도록 하자. 소요시간도 좀더 빠르고 울진군 주민들도 [[강원여객]]/[[강원흥업]]을 훨씬 선호한다.
  • 위안부 소녀상 망치 테러 사건 . . . . 1회 일치
         '한일 위안부 합의 폐기! 소녀상 철거 반대! 대학생행동'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와 관련하여, 한·일 양국 정부의 협상결과를 반대하고 특히 소녀상 철거 요구에 민감하게 반응하였으며, 2015년 12월30일부터 소녀상을 경비하고 있었다.
  • 유승옥 . . . . 1회 일치
         2월경 소속사 고소 문제로 인기가 땅에 떨어진 이전의 섹시 심볼이었던 배우 ]의 뒤를 이어 2015년 초에 인터넷상에서 차세대 섹시 심볼로써 두각을 드러내고 있다.[* 하지만 본인은 자신의 얼굴이 [[노안]]이라고 스스로 밝혔다.] 그러나 딸의 유명세가 단지 몸매에 대한 관심으로 기울어지는 상황 때문에, 유승옥의 아버지는 심적으로 괴롭다고 인터뷰에서 밝히기도 했다.
  • 유지태 . . . . 1회 일치
         * [[1995년]] SFAA 컬렉션 패션 모델
  • 유태웅(탤런트) . . . . 1회 일치
         || [[1995년]] || [[MBC]] || TV시티 || || ||
  • 윤덕홍 . . . . 1회 일치
         |임기 = [[2003년]] [[3월 7일]] ~ [[2003년]] [[12월 23일]]
  • 윤석용 . . . . 1회 일치
         [[2012년]] [[2월 14일]] 자신이 회장으로 있는 대한장애인체육회가 후원받은 8275만원 상당의 옥매트 250개를 횡령해 지역 복지단체와 동료의원 사무실 등에 임의로 전달한 혐의, 자신의 지역구(서울 강동을) 선거구민과 연관된 단체에 축구공 100개와 30여만원 상당의 김ㆍ빵을 기부해 [[공직선거법]]을 위반한 혐의, 2011년 8월 [[서울시 무상급식 주민투표]]를 앞두고 장애인체육회 직원 20여명을 동원해 단계적 무상급식을 찬성하는 내용의 투표 운동을 시켜 주민투표법을 위반한 혐의로 검찰에 의해 불구속 기소되었으며, 횡령혐의는 무죄, 나머지 혐의에 대해서는 벌금형을 선고받고 확정되었다.<ref>{{웹 인용|제목=옥매트 횡령 윤석용 의원 불구속 기소(종합)|url=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1&aid=0005512434.html|저자=[[연합뉴스]]|확인날짜=2012-02-14}}</ref>
  • 윤철종 . . . . 1회 일치
         2011년 2월 15일에 드디어 팬들이 안달이 나게 기다린 1집 '1.0'을 발매. 일주일만에 판매량이 1만장을 돌파하는 등 선풍적인 인기를 구사하고 있다.
  • 윤휘 . . . . 1회 일치
         [[1609년]](광해군 1년) [[좌승지]]가 되고, [[장례원]][[판결사]]를 거쳐 [[1610년]] [[전라도]][[관찰사]]로 나갔다. 그해 호패(號牌) 사용으로 민심이 혼란함을 들어 호패제에 대한 무마책과 대책을 건의하였다. 그해 겨울 병을 이유로 여러번 사직상소를 올려 체직되었다. [[12월]] 행 부호군(行副護軍)을 거쳐 [[1611년]] [[호조]][[참의]]가 되었다. [[1611년]] 다시 [[전라도]][[관찰사]]로 나갔고, 영녕전 이안청 영건청(永寧殿移安廳營建廳) 건립에 참여한 공로로 아마 1필을 하사받았다. [[1612년]] [[경상도]][[관찰사]]로 재직 중 [[가선대부]]로 승진하였다.
  • 은혼/632화 . . . . 1회 일치
         어린이날 기념 페이지는 [[사카타 긴토키]]의 개드립으로 시작. [[가구라]]가 놀고 있으려니 어린이날이 있으니 어른의 날도 있어야 한다고 드립친다. [[시무라 신파치]]가 "근로의 날이 있다"고 대꾸하자 "세상엔 근로를 안 하는 성인도 있다"고 응수. 그래서 2월 10일로 어른의 날을 정하고 5월 인형 비슷한 [[하세가와 다이조]]를 장식한다던가 하는 날로 정하자고 한다. 신파치는 그건 어른의 날이 아니라 "니트의 날"이고 인형이 아니라 산송장일 뿐이라 꼬집는다.
  • 이강돈 . . . . 1회 일치
         || 생년월일 || [[1961년]] [[2월 27일]] ||
  • 이강철 (1947년) . . . . 1회 일치
         |[[대한민국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제15대 총선]]||[[대구 중구의 국회의원|국회의원(대구 중구)]]||15대||[[민주당 (대한민국, 1995년)|통합민주당]]||{{막대|늘|1|3|5|5}} 13.55%||7,183표||3위||낙선
  • 이근직 . . . . 1회 일치
         [[8.15 광복]] 이후에도 1949년까지 강원도청 공무원으로 근무하였다. 1950년 [[서울특별시청]] 산업국장, 1952년 심계원(현 감사원) 심계 제2국장, 1952년 [[함태영]] [[대한민국 부통령|부통령]] 비서실 [[수석비서관]]을 역임했다. 1955년 2월부터 1957년 9월까지 [[경상북도지사]]를 지냈다. 경상북도지사 재임 중이던 1957년 8월 [[가짜 이강석 사건]]이 일어났다. 1957년 9월부터 내무부(현 [[행정안전부]]) [[행정안전부 장관|장관]]을 지내다가 1958년 6월 [[제4대 국회의원 선거]] 결과에 따른 책임을 지고 물러났다. 이후 [[자유당]] 당무위원으로 있다가 1959년 3월부터 1960년 5월까지 농림부(현 [[농림축산식품부]]) [[농림축산식품부 장관|장관]]을 지냈다. 농림부 장관 재임 중 [[3.15 부정선거]]에 관여하였다. 이로 인하여 구속 기소되었다.
  • 이명규(국회의원) . . . . 1회 일치
         1995년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무소속]]으로 [[대구광역시]] 북[[구청장]]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98년 [[제2회 전국동시지방선거]], 2002년 [[제3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한나라당]] 후보로 북구청장 선거에 출마하여 3선을 기록하였다.
  • 이민호(1969) . . . . 1회 일치
         1993년 빙그레 이글스의 2차 3순위 지명을 받아 입단했다. 1993년에는 [[강석천]]의 백업으로 뛰다가 1994년 [[강석천]]의 부진을 기회삼아 암울했던 1994년 한화 타선에 [[박지상]]과 더불어 힘을 실어 주었다. 이 때가 커리어 하이로 0.299의 타율과 14홈런 36타점을 기록했다. 하지만 1995년 [[방위병]] 복무로 홈 경기 밖에 뛰지 못했으며, 그 이후 주춤하다가 1998년 주전 3루수가 됐으나 1998년 시즌 후 [[동봉철]]과 함께 투수 [[임창식]]을 상대로 [[쌍방울 레이더스]]로 트레이드됐다. 쌍방울이 해체되고 2000년 [[SK 와이번스]]에 이적하고 1시즌을 뛴 후 은퇴했다. 이후에는 인천에서 유소년 야구 팀을 지도하고 있다고 전해졌다.
  • 이상오 . . . . 1회 일치
         '''이상오'''(李相旿, [[1905년]] [[11월 6일]] ~ [[1969년]] [[12월 15일]])는 [[대한민국]]의 [[사냥|수렵가]], [[작가|문필가]], 저술가, [[사격|사격인]], [[바둑|바둑인]]이다.
  • 이설주 . . . . 1회 일치
         * 시집 《잃어버린 세월》 (1995년)
  • 이승현 (1985년 7월) . . . . 1회 일치
         |클럽팀 최신 업데이트 날짜=[[2016년]] [[12월 12일]]
  • 이시영 (1882년) . . . . 1회 일치
         [[백남채]] 외에도 [[김좌진]](金佐鎭), [[김동삼]](金東三) 등과도 많은 일을 했다. [[1918년]] 귀국했고 [[1919년]] [[2월]], [[지청천]](池靑天), [[한용운]](韓龍雲) 등과 함께 [[영남]][[유림]]대표 2백여 명을 [[경성부|경성]]으로 보냈다. 그때 유림측에서 그에게 민족대표로 서명해 달라고 하자 '내 목적은 오직 왜놈과 싸우는 것'이라며 과격한 활동 노선을 밝혔다. 그 후 임시정부에서 재무부장서리를 맡아 달라는 것도 거절하였다.<ref name=autogenerated1 />
  • 이시형 (1934년) . . . . 1회 일치
          | 서훈 내역 = [[1995년]] 대한신경정신학회 벽봉학술상
  • 이영 (1492년) . . . . 1회 일치
         이영(李榮, [[1492년]] [[2월 10일]] ~ [[1583년]] [[10월 20일]])은 [[조선]] 중기의 학자이자 [[은자|은사]]이다. 자(字)는 양수(陽臼+又), 호는 북산(北山), 본관은 [[우계 이씨|우계]](羽溪)이다. 조정의 부름을 거절하고 은둔생활을 하였으며, 녹래리로 이주하였다. 뒤에 노인직으로 통정대부와 가선대부를 역임하였다. [[경상북도]] 출신.
  • 이영희 (1936년) . . . . 1회 일치
         '''이영희'''([[1936년]] [[2월 3일]] ~ [[2018년]] [[5월 17일]])는 대한민국의 [[한복]] 예술가이다.<ref>[http://people.search.naver.com/search.naver?where=nexearch&query=%EC%9D%B4%EC%98%81%ED%9D%AC&sm=tab_etc&ie=utf8&key=PeopleService&os=98149 네이버 인물검색 정보]</ref>
  • 이원석(1981년) . . . . 1회 일치
         '''이원석'''([[1982년]] [[2월 10일]] ~ )은 [[대한민국]]의 [[배우]]이다. <ref>[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33XXX1244166 이원석-다음인물정보]</ref>
  • 이원재(축구선수) . . . . 1회 일치
         || 생년월일 || [[1986년]] [[2월 24일]] ||
  • 이원형(1951) . . . . 1회 일치
         [[1991년 지방선거]]에서 [[민주자유당]] 후보로 대구직할시의회 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고 1995년까지 역임하였다.
  • 이은수(육군) . . . . 1회 일치
         1965년에 [[구미시]]에서 태어났으며(당시에는 선산군이었음) 4남매(2남2녀) 중 맏이였다. 오상고를 졸업하였으며[* 이 장군은 원래 의사나 과학자가 되고 싶어했으나 당시 오상고 여자반에 이과가 없어서 부득이하게 문과를 선택했고, 법대를 나온 고모부의 영향으로 경북대 법대에 입학하였다고 한다.], 1989년에 [[경북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했고, 한국개발연구원에 연구원으로 1년간 근무하다가[* 이 장군은 대학 4학년 때 사시 1차와 군법무관 1차에 합격하였으나 사시 2차에 떨어지고, 집안형편상 더 이상 고시공부를 할 수 없어 취직을 했다고 한다.] 군법무관 시험에 최종합격하여 1991년에 법무사관 9기로 임관(중위로 임관)했다.[* 대개 임관을 하면 사단 법무참모로 가는 경우가 많은데 여군이라 바로 발령받지 못했는데 당시 36사단장이 이은수 중위를 참모로 썼다. 36사단장의 사모님이 간호병과 대령이었기 때문에 여군에 대한 편견이 없었다고 한다.] 법무사관 가운데 첫 여군이었다.[* 2012년 기준으로는 군법무관 560명 가운데 52명이 여성이었다.] 당시 임관한 뒤로 10년을 법무사관 중 홍일점으로 지내야 했다고. 2011년에 [[여군]] [[군법무관]]으로는 처음으로 [[준장]]에 올랐다.[* 여군 최초의 [[장성급 장교|장관급 장교]]는 간호 병과 출신 [[양승숙]] 준장이었다. 2014년까지 여군 [[장군]], [[제독]]은 간호 7명, 보병 1명, 법무 1명 등 총 9명(전원 육군)이다.] 법무 병과장인 [[육군본부]] 법무실장에 올랐다.[* 본래는 법무관리관이 병과장으로 육군 소장이 임명되었으나 여러 문제가 일어나 예비역 법무장교 출신 군무원을 임명하는 걸로 바뀌었다.] 같은 해 12월에 [[고등군사법원|고등군사법원장]]으로 옮긴 후 2014년 퇴임하였다.
  • 이은혜 (레이싱모델) . . . . 1회 일치
         |자녀 = 태명: 토랭이 <br/> (11~12월 낙태할 예정)
  • 이재학 . . . . 1회 일치
         2017년 2월 14일, 드디어 검찰에서 수사결과를 발표했다. 결과는 '''무혐의'''.[* 법적으로 죄를 입증할 만한 요소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 재판을 청구조차 못한다는 뜻이다.] [[http://sports.naver.com/kbaseball/news/read.nhn?oid=001&aid=0009032683|기사]]. 심지어 그동안 공소시효가 지나 죄가 입증되지 않는 것이라고 수많은 네티즌들이 화살을 날렸으나, 오히려 '공소권 없음' 판결을 받은 것은 진야곱이다. 결국 공소시효가 성립할 만한 법적 구성요소조차 없었다는 것. 이것 덕택에 이재학은 논란에서 벗어났다. 이런 덕분에 2015년 한국시리즈에서 [[윤성환|해외 도박 의혹을]] [[안지만|받은 핵심]] [[임창용|투수 셋을]] [[삼성 라이온즈|제외한 팀]]을 꺾고 한국시리즈 우승을 했음에도 [[진야곱|불법 스포츠도박 의혹이 있는 투수]]를 제외시키지 않은 두산은 더 심각하게 까였다.[* 결국 두산은 2017 시즌 후 [[진야곱]]을 방출했다.]
  • 이종혁 (배우) . . . . 1회 일치
         1993년 연극배우 첫 데뷔한 그는 이후 1998년 영화 《[[쉬리 (영화)|쉬리]]》로 데뷔하였고 2004년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로 이름이 알려졌다.<ref>{{뉴스 인용 |제목 = 이종혁, '엄마의 공책: 기억의 레시피'로 스크린 복귀|url = http://entertain.naver.com/read?oid=112&aid=0002864179|출판사 = 헤럴드POP |저자 = |날짜 = 2016년 11월 8일|확인날짜 = }}</ref> [[2002년]] [[6월 4일]] 최은애와 결혼식을 올려 장남 이탁수([[2003년]] 출생), 차남 이준수([[2007년]] 출생) 두 아들을 두었다. 2013년 MBC 예능프로 '[[아빠! 어디가?]]'에 출연하여 국민적 사랑을 받으며 '국민 아빠'로 불리었다.<ref>{{뉴스 인용 |제목 = '엄마의 공책'..이종혁, 철부지 아들로 변신 |url = http://entertain.naver.com/movie/now/read?oid=109&aid=0003723802|출판사 = OSEN |저자 = |날짜 = 2018년 2월 22일|확인날짜 = }}</ref>
  • 이종화 (1949년) . . . . 1회 일치
         |임기 = [[2003년]] [[12월 16일]] ~ [[2004년]] [[5월 15일]]
  • 이지우 (레이싱모델) . . . . 1회 일치
         '''이지우'''([[1989년]] [[2월 3일]] ~ )는 [[대한민국]]의 [[레이싱모델]] 및 [[방송연예인]]이다.
  • 이하영(강사) . . . . 1회 일치
         2016년 2월 5일 공지사항을 통해 셋째 아이를 임신했다고 밝혔다.[* 사실 그 전에 [[강봉균]] 선생님이 강의에서 이하영 선생님의 임신 사실을 먼저 말했었다.] 이로 인해 2017 [[수능특강]]과 [[수능완성]] 강의는 할 수 없게 되었다. 이후 2016년 11월 '고2 학평기출의 7대 함정' 강의로 돌아왔다.
  • 일본 니카타현 이토이가와시 대화재 . . . . 1회 일치
         2016년 12월 22일 오전, 일본의 [[니카타현]] 이토이가와시에서 발생한 대화재. 140여 가구가 불에 타는 피해를 입었다.
  • 임인배 . . . . 1회 일치
         1954년 [[경상북도]] [[김천시]]에서 태어났다. [[김천고등학교]], [[영남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하였다. 이후 [[대한민국 검찰청]] 수사관으로 근무하였다. 1995년 현직 검찰 수사관 신분으로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5012800329116014&editNo=20&printCount=1&publishDate=1995-01-28&officeId=00032&pageNo=16&printNo=15325&publishType=00010|"조국을 남기고 님은 가셨습니다"라는 소설을 발간하였다]]. 그리고 자신의 호를 따서 덕천장학회를 설립하여 운영하였다.
  • 임효준 . . . . 1회 일치
         [[2018년]] [[2월 10일]]에 열린 [[2018년 동계 올림픽 쇼트트랙 남자 1500m|쇼트트랙 남자 1500m]] 예선과 준결승에서 무난히 통과했고, 결승에서는 2분 10초 485의 [[올림픽 기록]]으로 1위를 차지하였다. 이는 [[2018년 동계 올림픽 대한민국 선수단|대한민국 선수단]]의 첫 메달이자 금메달이기도 했다.<ref>http://www.hani.co.kr/arti/sports/sports_general/831734.html#csidxc20cd80bba1b97989951bed5ea919c0</ref> 또한 이번 기록으로 [[2010년 동계 올림픽|2010년 밴쿠버 동계 올림픽]]에서 [[이정수]]가 세웠던 2:10.949의 기록도 경신하게 되었다.<ref name="2018olympics-final">{{웹 인용|title=Short Track Speed Skating Results - Men's 1,500m Final A|url=https://www.pyeongchang2018.com/en/game-time/results/OWG2018/en/short-track-speed-skating/results-men-s-1500m-fnl-a00100-.htm|website=[[2018년 동계 올림픽|2018평창올림픽 공식사이트]]|publisher=[[국제올림픽위원회]]|accessdate=10 February 2018|archiveurl=https://web.archive.org/web/20180210130015/https://www.pyeongchang2018.com/en/game-time/results/OWG2018/en/short-track-speed-skating/results-men-s-1500m-fnl-a00100-.htm|archivedate=10 February 2018|language=en|date=10 February 2018}}</ref>
  • 자본통제 . . . . 1회 일치
         1974년, 미국은 자본자유화가 국제무역을 증가시킨다는 견해로 자본통제 정책을 폐지했다. 선진국들은 자본자유화 정책을 대세로 삼았으며, 우리나라는 1995년 OECD 가입을 계기로 하여 자본통제를 풀기 시작했다. 1997~1998년에 IMF 사태를 겪으면서 자본시장을 완전 개방했다. 1980년대 이후로는 채권, 금리, 외환, 주식 등의 금융자산을 기초로 하여 위험을 분산하는 '파생금융상품'이 나타나게 되었으며, 이를 노리는 [[헤지펀드]]가 크게 성장하여 국제금융시장에서 거대한 영향력을 가지게 되었다.
  • 장윤정 (미스코리아) . . . . 1회 일치
         1994년 은행원과 [[결혼]]했지만 3년만에 [[이혼]]하였고, 그 후 2000년대 초반 [[미국]]에서 15살 연상의 [[재미교포]] [[사업가]] 김상훈과 [[재혼]]했다.<ref>[http://entertain.naver.com/read?oid=022&aid=0002976972 미스코리아 장윤정 15년만 영화 '트릭' 으로복귀] 세계일보. 2015년 12월 17일</ref> 장윤정은 2016년 9월 27일 [[TV조선]]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하여 "사업으로 미국을 자주 왕래하는 남편이 미국에 가자고하여 미국에서 살게 되었고 살다보니까 10년 정도 거주를 하게 됐다"고 미국에서 오래 살았던 이유를 밝혔다. 그리고 "이 남자가 언제까지 나한테 못되게 구나 두고보자라는 생각으로 오기로 결혼을 했다”라며 무뚝뚝한 남편과 결혼한 이유에 대해 밝히기도 했다.<ref>[http://entertain.naver.com/read?oid=011&aid=0002891291 미스코리아 장윤정 “15살 연상 남편 김상훈, 나한테 무심해 매력 느꼈다”] 서울경제. 2016년 09월 28일</ref>
  • 전병조 . . . . 1회 일치
         '''전병조'''(田炳祚, [[1964년]] ~ , [[대구광역시]])는 [[KB투자증권]]의 대표이사 사장인 [[대한민국]]의 기업인, 금융인이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hm&sid1=101&oid=003&aid=0006279619 KB투자증권 신임 사장에 전병조 부사장 내정] 뉴시스 2014년 12월 30일</ref>
  • 전종화 . . . . 1회 일치
         * [[LG 트윈스]] (1995년 ~ 1997년)
  • 전지수 . . . . 1회 일치
         '''전지수'''(全志秀, [[1985년]] [[12월 13일]] ~ )은 [[대한민국]]의 [[쇼트트랙]] 선수이다. 현재 [[전라북도|전북도청]] 소속이다.
  • 정봉수(역사) . . . . 1회 일치
         김천시 증산면민들은 우리나라 마라톤의 주역을 키워낸 정봉수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1999년 2월 기념비건립추진위원회를 구성하여, 700여 만 원의 성금을 모아 1999년 5월 6일 증산초등학교 운동장에 공적비를 세웠다. 높이 2m인 3단으로 된 오석에 정봉수의 업적이 새겨져 있다.
  • 정성룡(야구선수) . . . . 1회 일치
         1992년 시즌 종료 뒤 ~~왼손 유망주라면 사족을 못쓰는 [[김응용|코감독]]에 의해~~ [[해태 타이거즈]]로 트레이드되었는데, 그해 해태가 삼성에게 완봉을 당한 경기가 있었는데 그경기에서 연타석 홈런을 쳤기 때문인 것이 유력하다. 즉 그 시즌 홈런 3개중 2개를 코감독 앞에서 그것도 연타석으로 쳤으니 [[인생경기]]를 한 셈.[* 다음 해에 김성래와 양준혁이 괴물활약을 한 것을 보면.. 프로생활을 3년이나 연장하고 한국시리즈 우승반지도 꼈으니 영광이라고 할 수 있다.] 1993~1995년까지 해태의 몇 안되는 좌타자로 활약하다가 은퇴했다. 원조 10번이었던 [[장효조]]에 대한 올드 삼빠들의 대한 그리움과 그 이후 10번을 단 [[양준혁]]의 인기에 의해 지금은 거의 잊혀지게 되었다. 그리고 해태에서 10번을 물려받은 선수는 당시 신인이였던 [[장성호]]였지만 1년만에 1번으로 갈아탔다. 공교롭게도 그 이후 10번을 단 선수가 [[최훈재]] 그리고 [[양준혁]].
  • 정운용 . . . . 1회 일치
         정운용은 1938년 24세의 나이에 경상합동은행 취체역(이사)에 선임됐다. 조부인 정재학 경상합동은행 두취(행장)이 은행경영권을 손자에게 넘겨주기 위한 포석이었다. 또한 동일은행 최대주주였던 민대식 등 황실외척이었던 민씨가문에 의한 경영권 장악 기도는 물론 대구상공은행을 운영하던 오구라 다케지스케 (小倉武之助)의 경영권 탈취시도와 맞서기 위한 준비 작업이었다.<ref name="ReferenceA">매일경제 1982년 12월 8일~19일 9면 "재계산맥 [[대구은행]] 1~19편"</ref>
  • 정재호 (1930년) . . . . 1회 일치
         '''정재호'''(鄭在虎, [[1930년]] [[12월 18일]] [[대구광역시|대구]] ~ )는 [[대한민국]]의 언론인 겸 정치인이다. [[종교]]는 [[불교]]다. [[경향신문]] 정치부장 출신으로 [[대한민국 제4공화국|제4공화국]]에서 제9,10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 정진욱(코미디언) . . . . 1회 일치
          * 2016년 2월 16일 7살 연하 일반인과 결혼하였으며, 같은 해 6월 28일 득녀하였다. 게다가 [[속도위반]]이다!
  • 정해창(정무직공무원) . . . . 1회 일치
         고등고시(제10회) 사법과 및 행정과에 합격하여 1962년부터 [[검사(법조인)|검사]]로 근무하였다. 1982년부터 1985년까지 [[대한민국 법무부|법무부]] [[차관]]을, 1985년부터 1986년까지 [[사법연수원]] [[원장]] 등을 지냈다. 1987년 5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수습 차원에서 [[김성기(1935)|김성기]] [[대한민국 법무부|법무부]][[법무부 장관|장관]]이 경질되자 후임 [[장관]]으로 임명되어 1988년 12월까지 역임하였다.
  • 정혜선(배우) . . . . 1회 일치
         [[대한민국]]의 배우. [[본명]]은 정영자이며, [[1942년]] [[2월 21일]] [[경상북도]] [[김천시]] 다수동 출생([age(1942-02-21)]세)이다. [[종교]]는 [[천주교]]이며, [[세례명]]은 카타리나이다. [[1961년]]에 [[KBS]] 공채 1기 [[배우]]로 데뷔하였다. [[성우]] 출신이고, 공채 출신이라 초기에는 주로 KBS에서 활동하였으나 나중에는 타방송국에도 많이 김천서현교회 출연하였는데 대표작들은 주로 MBC쪽이 많다. 드라마 [[아들과 딸]]의 어머니가 대표적이다. [[최불암]], [[김수미]] 처럼 젊을 때부터 노역을 많이 맡은 편이다. 나이가 든 후에는 완고한 시어머니 역을 많이 맡는 편이다.
  • 조미령 . . . . 1회 일치
         * '''[[조미령 (1973년)|조미령]]''' (1973 ~ )은 1995년에 탤런트로 데뷔한, 대한민국의 배우이다.
  • 조청희 . . . . 1회 일치
         '''조청희'''(趙靑熙, [[1961년]] [[12월 11일]] ~ )는 [[KBO 리그]] [[한화 이글스]]의 트레이닝 코치이다.
  • 조현근 . . . . 1회 일치
         [[2009년]] [[12월 17일]] [[경찰 야구단]]에 입대<ref>[http://news.naver.com/sports/index.nhn?category=baseball&ctg=news&mod=read&office_id=076&article_id=0002009770 우규민-연경흠-우동균 등 24명 경찰청 입대] - 스포츠조선</ref> 하여 [[2011년]]에 제대했다.
  • 조훈 . . . . 1회 일치
         '''조훈'''([[1993년]] [[2월 4일]] ~ )는 대한민국의 [[희극 배우]]이다. [[SBS]] 16기 공채 개그맨으로 데뷔했다.
  • 존 딜린저 . . . . 1회 일치
         이후 딜린저 갱은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다. 이들은 인디아나 주의 경찰서 세 곳에서 강도질을 벌여 권총, 소총, 자동화기, 탄약, 방탄조끼를 빼앗았다. 12월 14일에는 딜린저 갱 단원인 존 해밀턴(John Hamilton)이 시카고에서 형사 한 명을 살해하였다. 1934년 1월에는 인디애나 주 이스트시카고의 퍼스트 내셔널 뱅크(First National Bank)를 터는등 인디아나 주, 일리노이 주, 위스콘신 주에서 수많은 범죄를 저질렀다. 하지만 한달도 지나지 않아 애리조나 주 투싼에서 묵었던 호텔에 화재가 발생하는 바람에 피어몬트, 클라크, 마클리와 함께 경찰에게 붙잡힌다.
  • 진종채 . . . . 1회 일치
         [[1981년]] 대장으로 예편하였다. 예편 이후 진해화학(1987년 [[한일합섬]]에 인수) 사장을 맡은 것 외에는 다른 직책을 맡지는 않았다. [[1995년]] [[김영삼]] 정부의 역사 바로 세우기에 의해 [[12.12 군사반란]], [[5.18 민주화운동]]과 관련하여 검찰 소환조사를 받고 고소되었으나 결국 불기소처분 되었다. 이 때 사위인 조준웅 검사[* 2007년 삼성그룹 특별검사였다.]가 해당 수사팀에 속하였다가 장인이 관련되었다는 이유로 수사팀에서 제외되었다.
  • 차재욱 . . . . 1회 일치
         2010년 12월 30일 만기 전역 후 은퇴하였으며, 2011년 1월 [[하이트 엔투스]](현 [[CJ 엔투스]]) 코치로 임명되었다.
  • 청도군 . . . . 1회 일치
         2009년에는 화양읍 삼신리에 [[청도 소싸움 경기장]](그것도 돔형!)을 지어놓고 거기서 경기하고 있다. 이 때문에 [[소싸움]] 특유의 전통적인 풍취가 사라져서 까는 사람도 있지만 길(25번 국도) 건너가 용암온천이니.(...) --같이 즐기라고 대놓고 밀어줬다-- 한국우사회와 청도지역공사간 마찰로 휴무를 하기도 했으나 2014년 12월에 [[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63602&yy=2014#axzz3Lwc9vpcz|다시 개장하였다]].
  • 청송군 . . . . 1회 일치
         교통은 [[당진영덕고속도로]], [[31번 국도]], [[34번 국도]], [[35번 국도]]가 군을 관통하지만, [[철도]][[철도가 지나지 않는 도시/대한민국|는 없다.]] 고속도로 나들목은 [[청송IC]]와 [[동청송·영양IC]]가 있다. 2011년 12월 27일 35번 국도 청송과 영천 사이의 고개인 노귀재를 관통하는 터널이 준공되어 영천 방면으로 접근성이 향상되었다.
  • 최두호 . . . . 1회 일치
         | 2016년 12월 10일
  • 최수환 . . . . 1회 일치
         1995년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민주자유당]] 후보로 경상북도 포항시장 선거에 출마하였으나 [[민주당(1991년)|민주당]] [[박기환(정치인)|박기환]]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 최웅 . . . . 1회 일치
         '''최웅'''([[1986년]] [[12월 28일]] ~)은 [[대한민국]]의 [[배우]]이다. 2011년 《'박카스-국군장병편'》 CF로 데뷔하였다.
  • 최원홍 . . . . 1회 일치
         '''최원홍'''([[2000년]] [[12월 14일]] ~ )은 [[대한민국]]의 배우이다.
  • 최은경 (쇼트트랙 선수) . . . . 1회 일치
         '''최은경'''(崔恩景, [[1984년]] [[12월 26일]] - )은 [[대한민국]]의 [[쇼트트랙]] 선수이다.
  • 추자현 . . . . 1회 일치
         * [[2015년 12월]] 제4회 스타의밤 대한민국톱스타상 대한민국을 빛낸 인기스타상
  • 코만단테 카펠리니 . . . . 1회 일치
         1943년 2월 20일, 독일 해군 총사령관 [[칼 되니츠]]는 일본에서 전쟁물자를 가져오는 선박들의 손실이 크니 이탈리아의 대형 잠수함을 수송용으로 개장해 사용하자고 주장한다. 이탈리아는 이를 독일 잠수함 7척을 지원받는 조건으로 수락했다 . 그렇게 개장된 잠수함 중에는 코만단테 카펠리니도 있었다
  • 콘도 마코토 . . . . 1회 일치
         1995년 문예춘추 지에서 10회에 걸쳐, 암에 대하여 연재.「문예춘추독자상(文藝春秋読者賞)」을 수상. 의료사고에 대한 감정서 작성을 목적으로 「의료사고조사회(医療事故調査会)」를 설립.
  • 콜 오브 후아레즈 : 건슬링어/줄거리 . . . . 1회 일치
         >1880년 12월 23일
  • 콩고(소설) . . . . 1회 일치
         [[마이클 클라이튼]]의 SF 모험 소설. 1995년 영화로 만들어졌다.
  • 크리스마스 . . . . 1회 일치
         Christmas. 12월 25일. [[기독교]]의 주요 인물인 [[예수 그리스도]]가 태어났다고 알려진 날. 성탄절, X-Mas라고도 한다.
  • 타이라노 마사카도 . . . . 1회 일치
         서기 935년 2월, 히타치군(常陸郡)[* 현재의 이바라키 현]에서 백부 타이라노 쿠니카(平国香)를 토벌하였다. 타이라노 쿠니카는 히타치군을 다스리는 쿠니시(国司)의 사위였다.
  • 판타스틱 포 . . . . 1회 일치
         557호에서 휴먼 토치가 사망하고 2월 23일[* 이 날짜는 이슈 558의 발표일. 실제로 발매된 건 4월이다.] 588호로 시리즈가 마감되고 후속작인 FF(퓨처 파운데이션)이라는 이름으로 3월부터 새롭게 시작하였다가, 휴먼 토치가 다시 복귀하고 2013년 마블 나우부터 다시 판타스픽 포 시리즈의 연재가 시작됬다.
  • 하이큐/219화 . . . . 1회 일치
          * 그리고 12월 10일.
  • 한신 아와지 대지진 . . . . 1회 일치
         1995년 1월 17일오전 5시 46 분, [[일본]]에서 발생한 대지진. 직하형 지진으로서, [[고베]], [[한신]], [[아와지시마]]를 중심으로 하여 피해가 있었다. 6434명이 사망, 24만 9천 채의 주택이 무너지는 거대한 피해가 있었다.
  • 현제명 . . . . 1회 일치
         [[대한민국]]의 음악가, 성악가(테너), 작곡가. 1902년 12월 8일 [[경상북도]] [[대구광역시|대구시]] 남산동(現 [[대구광역시]] [[중구(대구)|중구]] 남산동) 출신. 본관은 연주(延州)이며 아호는 현석(玄石)이다. 그리고, [[친일반민족행위자]]다.
  • 화염병 . . . . 1회 일치
         2015년 12월 4일, 이집트에서 나이트클럽 입장을 제지당하자 화염병을 던진 사람들도 있다. [[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5/12/06/0200000000AKR20151206054100079.HTML|연합뉴스 링크]].
  • 황연석 . . . . 1회 일치
         [[1995년]] [[성남 FC|일화 축구단]]에 입단하였다. 입단 첫 해 시즌 30경기에 출전하여 9골을 기록하는 활약을 펼쳐 유력한 신인왕 후보로 거론되었으나 [[노상래]]에 밀려 신인왕에 선정되지는 못하였다. 일화 축구단이 [[천안시]]를 거쳐 [[성남시]]에 둥지를 튼 이후에도 꾸준한 활약을 보였으며 [[K리그 2004|2004 시즌]]을 앞두고 [[인천 유나이티드 FC|인천 유나이티드]]로 이적할 때까지 팀에 4회의 리그 우승을 안겨주었다.
  • 황용식 . . . . 1회 일치
         |임기 = [[2004년]] [[3월]]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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