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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Groovie K
         '''Groovie K'''({{본명|김성수}}, [[1967년]] [[3월 25일]] ~ )는 대한민국의 기타리스트이자 음악 프로듀서이다.
         [[분류:1967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부산광역시 출신 인물]][[분류:한양대학교 동문]][[분류:대한민국의 음악 프로듀서]][[분류:대한민국의 기타 연주자]][[분류:대한민국의 록 기타 연주자]][[분류:대한민국의 록 음악가]]
  • 강수진 (발레무용수)
         '''강수진'''([[1967년]] [[4월 24일]] ~ )은 [[대한민국]] 출신의 [[발레|발레리나]]이다.
         [[분류:1967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한민국의 여자 발레 무용수]][[분류:선화예술중학교 동문]][[분류:대한민국의 수필가]][[분류:대한민국의 무용 평론가]][[분류:대한민국의 연극 평론가]][[분류:1978년 데뷔]][[분류:대한민국의 로마 가톨릭교도]][[분류:선화예술고등학교 동문]][[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분류:독일에 거주한 대한민국인]][[분류:모나코에 거주한 대한민국인]][[분류:터키에 거주한 대한민국인]]
  • 강철민 (바둑기사)
         [[1967년]] 제5기 청소년배 쟁패전(참가 당시 3단) 결승 제2국에서 중원의 대마를 [[옥집삶]] 모양으로 완생시켜서 윤기현 당시 6단을 물리치고 우승했다. 이 기록은 [[대한민국]] 공식 [[바둑 기전]] 최초로 옥집삶 모양으로 대마를 완생시킨 기록이다.
  • 경주시
         |align="center"|[[1967년]] [[11월 26일]]
  • 고건
         **** 3남 : 고위 ([[1967년]] ~ )
  • 공운영
         * [[1967년]] [[대한민국 중앙정보부|중앙정보부]] 9급 공채에 합격하여 [[대한민국 중앙정보부|중앙정보부]] 입사
  • 공필성
         || '''생년월일''' || [[1967년]] [[10월 10일]] ||
         [[분류:대한민국의 야구 선수]][[분류:야구감독]][[분류:진해구 출신 인물]][[분류:1967년 출생]][[분류:타자]][[분류:우투우타]][[분류:내야수]][[분류:롯데 자이언츠 은퇴/이적]]
  • 곽상훈 (국회의원)
         [[1966년]] [[12월 19일]] 매헌 윤봉길 기념사업회 회장에 선출되었고<ref name="기념사1">[http://www.yunbonggil.or.kr/sub02/sub03_01.html Untitled Document<!-- 봇이 따온 제목 -->]</ref>, [[1967년]] [[12월]] 다시 [[윤봉길기념사업회 회장]]에 유임되었다.
  • 금난새
         | 활동시기 = [[1967년]] ~ 현재
         1967년 클래식 음악 편곡가 첫 데뷔한 그는 [[서울예술고등학교]]와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작곡과를 졸업했고 한국에서 지휘를 배울 수 없던 시절 [[베를린 음악대학]]의 Hans-Martin Rabenstein 교수에게 찾아가 지휘를 배우기 시작했다. 1977년, 4년 만에 베를린 음대를 졸업하고 [[카라얀 국제 지휘 콩쿠르]]에서 4위로 입상하며 지휘자로 정식 데뷔했다. 이후 [[KBS교향악단|KBS 교향악단]]을 12년간 이끌었고, 1992년 [[수원시립교향악단]]의 상임 지휘자로 전격 부임했다. 연간 10회의 연주에 머물던 수원시향을 연간 60여회 이상 연주하는 악단으로 발전시켰고, 이후 예술의전당 기획프로그램인《해설이 있는 청소년 음악회》를 기획하여 6년 간 전회 전석 매진을 기록했다. 1998년에는 [[유라시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현, 뉴월드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창단하여 《로비 음악회》, 《도서관 음악회》, 《갤러리 음악회》, 《울릉도 음악회》등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전국 방방 곡곡을 다니며 클래식 대중화에 앞장섰다. 무일푼으로 시작한 오케스트라를 8년만에 연간 135회 공연, 관객 12만명을 동원하는 국민 오케스트라로 발전시켰다.<ref name="무릎팍">무릎팍도사 2010년 5월 19일</ref> 2006-2010 경기필하모닉, 2010-2014 인천 시립교향악단을 거쳐 2015년부터는 성남시립교향악단의 상임지휘자 및 예술 총 감독을 맡고 있다. 2015년 부터는 한국 경제신문사에서 창단한 한경필하모닉의 초대 지휘자 겸 예술감독으로도 위촉되어 기업의 문화예술참여의 새로운 모델을 제시하고 있다.<ref> [http://www.veritas-a.com/news/articleView.html?idxno=54592금난새 서울예고 교장 “소통의 덕목 아는 예술인 키울 터”] 베리타스 알파 2016.01.26 </ref>
         [[분류:1947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한민국의 지휘자]][[분류:대한민국의 대학 교수]][[분류:1967년 데뷔]][[분류:부산광역시 출신 인물]][[분류:서울예술고등학교 동문]][[분류:서울대학교 음악대학 동문]][[분류:새천년민주당 당원]][[분류:김녕 김씨]]
  • 김광규 (배우)
         '''김광규'''(金光奎, [[1967년]] [[12월 8일]] ~ )는 [[대한민국]]의 [[배우]], [[가수]]이다.
         김광규는 [[1967년]] [[12월 8일]], [[서울특별시|서울]] [[강동구]]에서 태어났다. 군장학생으로 1986년에서 1991년까지 [[대한민국 육군|육군]]에서 부사관으로 5년간 복무하였다. 1991년 육군 중사로 예편한 후 집안에 보탬이 되기 위해 [[1992년]]을 전후한 시기에 [[서울특별시|서울]]에서 택시운전기사 등을 하면서 [[1993년]]부터는 틈틈이 [[연극배우]] 활동을 병행하며 연기 분야에 매료되었고 서른 즈음 인생의 깊이에 대해 고민하며 앞날 앞길을 모색하다가, 늦은 나이에 연기에 본격 입문하게 되었으며 연기아카데미 수료 후 [[서울특별시|서울]]로 상경하여 오디션을 보러 다녔으며, 4년제 대학 학위를 바라던 어머니를 위해 [[한국방송통신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 편입학하여 영화 《친구》를 찍은 직후에 학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분류:1967년 태어남]]
  • 김길수 (1948년)
         [[1967년]]에 출가를 하여 이후 [[1971년]] 육군 제7사단에서 육군 하사로 병역을 마쳤다. 이후 [[1988년]] [[필리핀]] [[:en:University of the Philippines Manila|마닐라 콘티넨털 대학교]] 경영학과 학사 학위를 하였다.
  • 김달호(1912)
         4·19 혁명 후 치러진 [[대한민국 제5대 총선]]에서는 [[사회대중당]]을 창당하여 참가하는 등 [[진보주의]] 정당에서 계속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그러나 이듬해인 [[1961년]]에 [[5·16 군사정변]]이 일어나면서 혁신계 정치인을 대량 검거하여 탄압함으로써 김달호도 투옥되었다. [[1967년]]까지도 수감 생활 중이었다.
  • 김대중
         * [[1967년]] [[경희대학교]] 경영대학원 수료
         교육열이 남달랐던 어머니가 하의도의 집과 농토를 다 팔면서까지 아들을 목포로 유학시킨 것이다. 부모는 여관을 운영하면서 공부 뒷바라지에 나섰다. 그 후 일본인 학생들의 따돌림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꿋꿋하게 학업에 전념하여 [[1937년]] 수석으로 졸업하여 목포일보 사장상을 받았다. [[1939년]]에는 5년제(중.고등학제) [[목상고등학교|목포상업학교]](목상고등학교)에 입학했다.<ref>[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96510 김대중 前 대통령 지석(誌石) 전문 공개] 프레시안 2009.08.23</ref> 은행에 취직하는 것을 목표로 열심히 공부한 김대중은 학생의 절반가량이 일본인임에도 불구하고 입학해서 3학년 때까지 반장을 할 정도로 뛰어난 통솔력을 보였다. 이때의 죽마고우로 뒷날 [[신민당 (1967년)|신민당]] 국회의원이 되는 [[임종기]]를 만나 평생의 벗으로 지내게 된다.
         [[1967년]] 2월에 [[신민당 (1967년)|신민당]] 창당에 참여하여 신민당 정무위원 겸 대변인으로 발탁되었다. 이후 [[대한민국 7대 총선|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공화당은 진도 출신의 전 체신부장관 [[김병삼]]의 지역구를 옮기고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목포에서 국무회의를 여는 등 대대적인 '김대중 낙선전략'에도 불구하고 당선된다. 그 뒤 [[1968년]] [[6월 3일]] 당수 [[유진오]]로부터 원내총무 후보자로 지명을 받았으나 의원총회에서 재석 41명 중 찬서 16명, 반대 23명으로 결국 원내총무 자리는 김영삼에게 돌아갔다.<ref name="손세일"/> 그해 신민당 정무위원에 선출되었다.
         1967년에 [[대한민국 국회|국회]]에서 김대중은 [[통일원]]을 만들고 장은 부총리급으로 해야 한다고 발언하였다.<ref name="tongtong">[http://www.donga.com/docs/magazine/new_donga/9803/nd98030210.html "정치권, 개혁 큰틀 깨 유감":작은 정부에서 다시 큰 정부 돼 버렸다]</ref> 1969년에 [[통일원]]이 신설되었지만 그때는 말단 부처였는데 그의 주장 이후 20년 1개월만인 [[노태우]] [[대통령]] 때 부총리급으로 되었다.<ref name="tongtong"/>
         [[신민당 (1967년)|신민당]] 대통령 후보가 된 김대중은 "현 향토예비군은 이중병역의 의무를 강요한 위헌적인 것이며, 경찰의 보조기관으로 전락되고 지휘계통이 국방장관과 내무장관에 이중으로 되어 있어 정치적으로 악용될 우려가 있고 생업에 지장을 초래할 뿐 아니라 민폐를 조성, 부정부패를 가져올 뿐"이라며 향토예비군 폐지를 공약으로 내걸었다.<ref>[http://hr-oreum.net/article.php?id=509 [벼리2] 예비군, 이제 폐지하자] 인권오름 제 61호</ref> 그 밖에 4대국 평화보장, 지방자치제 실시, 남북대화, 노사위원회 구성 등을 공약으로 내걸으며 "10년 세도 썩은 정치, 못 참겠다 갈아치자!"를 슬로건으로 내걸었다.
         [[1971년]] [[5월 6일]], [[신민당 (1967년)|신민당]] 당수 [[유진산]]이 5·25 국회의원 총선 후보등록 마감일인 1971년 5월 6일 갑자기 자신의 출신 지역구인 [[서울 영등포구의 국회의원|서울 영등포 갑구]]를 포기하고 전국구 1번으로 등록하였다. 이에 불만을 품은 당내 소장층과 영등포 갑구 당원 등이 강력하게 반발하여 당수직 사퇴를 요구하는 사태로 벌어졌다.
         * 《분노의 메아리》 (1967년)
         * [[신민당 (1967년)|신민당]]
         |임기 = 1963년 12월 17일 ~ 1967년 6월 30일
         |임기 = 1967년 7월 1일 ~ 1971년 6월 30일
         |소속정당 = [[신민당 (1967년)|신민당]]
  • 김덕현(배우)
         '''김덕현'''(본명은 '''김덕구''', [[1967년]] [[4월 19일]] ~ )은 [[대한민국]]의 [[배우]]이다. [[충청남도]] [[보령시|보령]]에서 태어나 청소년기를 보냈다. [[서울예술대학교|서울예술전문대학]] 방송연예학과를 졸업했다. 1991년 [[한국방송공사|KBS]] 14기 공채 탤런트로 데뷔했다.
         [[분류:대한민국의 남자 텔레비전 배우]][[분류:보령시 출신 인물]][[분류:대한민국의 남자 배우]][[분류:대한민국의 남자 연극 배우]][[분류:대한민국의 남자 영화 배우]][[분류:1967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서울예술대학교 동문]]
  • 김동관(1967)
         '''김동관'''([[1967년]] [[7월 19일]] ~ )은 (주)ADT캡스노동조합 수석 부위원장이다.
         [[분류:1967년 태어남]][[분류:밀양시 출신 인물]][[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무인경비]][[분류:경비지도사]][[분류: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관련자]]
  • 김동조 (1918년)
         1965년 10월 26일, 외무부에 대한 국정감사에서 김동조는 그 후 재일교포들이 그와 같은 진정서를 제출한 것은 교포와 재일교포 사이의 오해에 기인했던 것이고, 그 후 그 오해는 풀렸다고 설명했다. 또 이동원 외무부장관은 김대사가 본부 훈령에 충실치 아니한 점은 없다고 답변했다. 그러나, 같은 날 국회 외무분과위원회는 위원장을 비롯하여 공화당의원, 야당의원은 위 진정서를 검토한 결과, 김대사가 (1) 교포보호에 소흘하고 (2) 본부의 훈령에 충실치 못하며 (3)특정 재벌을 편애하므로 정부가 김대사를 될수록 조속한 시일 안에 해임할 것을 만장일치로 정부에 건의하였다.<ref>{{뉴스 인용 |url = http://dna.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65102600209201011&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65-10-26&officeId=00020&pageNo=1&printNo=13543&publishType=00020 | 제목 = 金大使解任건의 | 날짜 = 1965-10-26 | 출판사 = 동아일보 }}</ref> 1965년 12월 18일 상오 10시반 중앙청 제1회의실에서 열린, 대한민국과 일본 양국의 국교정상화를 최종적으로 매듭짓는 기본조약 및 협정에 의한 비준서 교환에 김동조는 한일회담수석대표로서 참석했다.<ref>{{뉴스 인용 |url = http://dna.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65121800329201001&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65-12-18&officeId=00032&pageNo=1&printNo=6208&publishType=00020| 제목 = 오늘부터 韓日國交正常化 | 날짜 = 1965-12-18 | 출판사 = 경향신문 }}</ref> 1965년 12월 말, 한국 정부가 주일 대사에 김동조를 내정하자, 12월 23일, 민중당의 [[김대중]] 의원은 국회 본회의에서 "국회 외무위가 만장일치로 그 해임을 건의했으며 재일교포단체에서도 소환을 건의한 바 있는 김동조 대사를 재임명할 수 있는가"를 추궁했다.<ref>{{뉴스 인용 |url = http://dna.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65122300329201029&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65-12-23&officeId=00032&pageNo=1&printNo=6212&publishType=00020 | 제목 = 獨島領有權따져 | 날짜 = 1965-12-23 | 출판사 = 경향신문 }}</ref><ref>{{뉴스 인용 |url = http://dna.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65122300209201001&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65-12-23&officeId=00020&pageNo=1&printNo=13593&publishType=00020 | 제목 = 어떻게對處할것인가 | 날짜 = 1965-12-23 | 출판사 = 동아일보 }}</ref> 그러나, 12월 24일 한국정부는 일본정부에 대해 정식으로 김대사에 대한 아그레망을 요청했다.<ref>{{뉴스 인용 |url = http://dna.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65122500329201012&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65-12-25&officeId=00032&pageNo=1&printNo=6214&publishType=00020 | 제목 = 金東祚大使任命 | 날짜 =1965-12-25 | 출판사 = 경향신문 }}</ref> 1966년 1월 14일, 주한 초대 대사 김동조는 일본 일왕에 신임장을 제정하였다.<ref>{{뉴스 인용 |url =http://dna.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66121700329203003&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66-12-17&officeId=00032&pageNo=3&printNo=6517&publishType=00020 | 제목 = 日誌1年| 날짜 =1966-12-17 | 출판사 = 경향신문 }}</ref> 1965년~1967년 주 일본 대사를 지냈다.
         1967년 9월 16일, 대한민국 정부는 김동조를 주미 대사에 임명하여,<ref>{{뉴스 인용 |url = http://dna.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67091600209201011&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67-09-16&officeId=00020&pageNo=1&printNo=14129&publishType=00020| 제목 = 12國大使任命의결 | 날짜 = 1967-09-16 | 출판사 = 동아일보 |인용문 = 國務會議는 16일 駐美·駐英·駐日·駐獨大使를 포함해서 12개國駐在大使를 새로 任命키로 議決했다. 이날 議決된 大使級의 大幅移動은 朴大統領의 決裁가 나는대로 月內에 發令케 되었다. … ▲駐美 大使〓金東祚(49·外務次官·駐日大使)}}</ref> 김동조는 1967년 11월 9일, 백악관에서 존슨 대통령에게 신임장을 제정하였다.<ref>{{뉴스 인용 |url = http://dna.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67111000209201016&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67-11-10&officeId=00020&pageNo=1&printNo=14176&publishType=00020| 제목 = 金東祚 駐美大使 존슨에信任狀제정 | 날짜 =1967-11-10 | 출판사 =동아일보 }}</ref> [[1967년]]부터 [[1973년]]까지 주 미국 대사, [[1973년]]부터 [[1975년]]까지 외무부장관, 석유개발공사장을 역임하고 [[1981년]] 변호사를 개업하였다. 외무부장관으로서 김동조는 1975년 3월 초, [[말레이시아]]를 방문하여 [[압둘 라자크 후세인]] 총리와 아마드 리라우덴 외무장관을 만났다.<ref>{{뉴스 인용 |url =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75030400209201014&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75-03-04&officeId=00020&pageNo=1&printNo=16437&publishType=00020|제목= 金外務 말聯에 도착...오늘 라자크와 會談 |출판사 = 동아일보 | 날짜 = 1975-03-04 |인용문=金東祚外務長官이 4일간의 「말레이지아」방문을 위해 3일밤 「쿠알라룸푸르」에 도착했다. 19일간에 걸쳐 「아시아」각국을 순방중인 金長官은 도착후 기자들에게 자기는 4일 「압둘 라자크」「말레이지아」首相 및 「아마드 리라우덴」公報相 겸 外相과 공동관심사를 토의할 것이라고 말했다. }}</ref> [[2004년]] [[12월 9일]], [[숙환]]으로 향년 87세로 별세했다.
         |임기 = [[1965년]] [[12월]] ~ [[1967년]] [[10월]]
         |임기 = [[1967년]] [[10월]] ~ [[1973년]] [[12월]]
  • 김동진 (1938년)
         그는 [[1966년]]부터 [[1967년]]까지 [[베트남 전쟁]]에 1년간 참전하였다.
  • 김민교 (가수)
         '''김민교'''([[1967년]] [[1월 16일]] ~ )는 [[대한민국]]의 [[가수]]이다.
         [[분류:대한민국의 팝 록 가수]][[분류:건국대학교 동문]][[분류:1967년 태어남]][[분류:1989년 데뷔]][[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한민국의 남자 가수]][[분류:20세기 대한민국 사람]][[분류:대한민국의 작사가]][[분류:21세기 대한민국 사람]][[분류:대한민국의 남자 뮤지컬 배우]][[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
  • 김민하(1934)
          | 활동 기간 = [[1967년]] ~ 현재
  • 김상흠
         |임기 = [[1963년]] [[12월 17일]] - [[1967년]] [[6월 30일]]
  • 김선양
         '''김선양'''([[1967년]] [[7월 7일]] ~ )은 [[대한민국]]의 [[가수]]이다.
         [[분류:1967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대한민국의 여자 가수]][[분류:대한민국의 여자 가수]][[분류:대한민국의 트로트 가수]]
  • 김선양 (가수)
         '''김선양'''([[1967년]] [[7월 7일]] ~ )은 [[대한민국]]의 [[가수]]이다.
         [[분류:1967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분류:대한민국의 여자 가수]][[분류:대한민국의 여자 가수]][[분류:대한민국의 트로트 가수]]
  • 김성곤 (1913년)
         [[1958년]]에는 [[자유당 (대한민국)|자유당]]소속으로 달성에서 [[제4대 민의원 선거]]에서 당선되며 정계에 입문하였다. 그러나 [[4.19혁명]]으로 인해 한때 정계 은퇴하였으며 [[5.16 군사정변]]이후 다시 정계에 복귀하였다. 그 이후 [[1959년]] 국민학원(現 [[국민대학교]])를 인수하여 이사장으로 취임하였다. [[1960년]]에 [[대한유도회]] 회장에 피선되었으며 [[1962년]]에 [[쌍용양회]]를 설립한다. 그 이후 [[1963년]]에는 [[대한민국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 당선되었으며 국회 재정경제위원장이 되었다. [[1965년]]에는 [[민주공화당]] 재정위원장, 당무위원이 되었으며 성곡언론문화재단, 성곡학술문화재단을 창립하였다. [[1967년]]에 [[쌍용제지]]를 설립하였으며, 제7대 [[대한민국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당선되었다.
         [[1967년]] 김성곤은 [[길재호]], [[백남억]], [[김진만]]과 함께 [[민주공화당]] 내의 핵심인물이 된다. 그 이후 [[1971년]]에 치러진 [[대한민국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당선되었다. 그리고 [[1971년]] [[10월 2일]]에 야당과 동조하여 [[박정희]] 대통령의 명령을 어기고 [[오치성]] 내무부장관 해임 건의안을 통과시켰는데 이를 [[10.2 항명 파동]]이라 한다. 그 이후 김성곤은 [[10.2 항명 파동]]의 주동인물로 지목받아 경위조사를 받고, 정계를 은퇴하게 된다. 그 뒤 [[1973년]]에는 [[대한상공회의소]] 제8대 회장을 지냈으며, [[1974년]]에는 대한양회 인수, 한국신문연구소 회장 취임을 했다. 그 뒤 [[1975년]] [[2월 25일]] 사망하였으며 가족장으로 [[국민대학교]] 뒷산에 안장되었다가 [[1984년]] 강원도 평창에 이장되었고, 2014년 고향인 [[대구광역시]] [[달성군]] [[구지면]]으로 재이장되었다. [[국민훈장]] 무궁화장이 추서되었다.
  • 김수환(추기경)
          * [[2004년]]에는 사제급 추기경 수석이 되었다. 이 때문에 [[요한 바오로 2세]]의 장례 미사 때는 물론이거니와 [[베네딕토 16세|요제프 라칭어]] 추기경이 교황으로 선출된 후[* 김수환 추기경과는 인연이 있는 사이로, 김 추기경이 독일에서 박사학위를 받으려고 뮌스터 대학원에서 열심히 공부하던 시절, 라칭어 추기경의 강의를 수강하며 신학적인 주제를 가지고 열띤 토론을 벌인 적이 많았다고 한다.] 교황의 좌우에 배석하는 2명씩의 추기경 중 한 사람으로서 [[http://www.americancatholic.org/news/benedictXVI/|즉위 미사를 집전하기도 하였다]]. [[https://youtu.be/3R8h6HdZcyk?t=8650|베네딕토 16세 즉위미사 영상. 2:24:10부터 김 추기경이 나온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김 추기경은 당시 가톨릭 교회의 원로 성직자 가운데 한 명으로, 즉위미사가 거행된 [[2005년]] 기준 사제급 추기경들 가운데서 서임 날짜가 가장 빨랐다. [[바오로 6세]]는 재위 기간 중 6차례에 걸쳐 추기경을 서임했는데, 그 중 2번째였던 [[1967년]] [[요한 바오로 2세|카롤 보이티와]]가 서임되었고 3번째였던 [[1969년]] 김수환이 서임되었으며 4번째인 [[1973년]] [[요한 바오로 1세|알비노 루치아니]]가, 마지막이자 6번째인 [[1977년]] [[베네딕토 16세|요제프 라칭어]]가 서임되었다.
  • 김승준 (성우)
         '''김승준'''([[1967년]] [[10월 17일]] ~ )은 [[대한민국]]의 [[성우]]이다. 대한민국 해병대 사병으로 군복무하였다. 이후 [[1990년]] [[한국방송공사]] 22기 공채 성우로 데뷔하였다. 배우자는 애니메이션 PD 심정희다.
         [[분류:대한민국의 남자 성우]][[분류:1967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1990년 데뷔]]
  • 김영배 (1967년)
         '''김영배'''(金永培, [[1967년]] [[3월 8일]] ~ )는 대한민국의 정치가이다. [[2014년]] 기준으로 서울 [[성북구]]청장이다.
         [[분류:1967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부산광역시 출신 인물]][[분류:대한민국의 지방자치단체장]][[분류:동국대학교 교수]][[분류:20세기 대한민국 사람]][[분류:21세기 대한민국 사람]][[분류:중앙대학교 교수]][[분류:한양대학교 교수]][[분류:대한민국의 저술가]][[분류:고려대학교 동문]][[분류:고려대학교 정책대학원 동문]][[분류:시러큐스 대학교 동문]][[분류:고려대학교 대학원 동문]][[분류:브니엘고등학교 동문]][[분류:새천년민주당 당원]][[분류:열린우리당 당원]][[분류:대통합민주신당 당원]][[분류:민주당 (대한민국, 2008년) 당원]][[분류:민주당 (대한민국, 2011년) 당원]][[분류:더불어민주당 당원]][[분류:친노]][[분류:친문]]
  • 김영수 (1930년)
         * [[1966년]] 공군 제1전투비행전단 예하 대대장 재직 시절 [[1967년]]까지 [[베트남 전쟁]]에 1년간 참전
         * [[1967년]] 공군본부 정훈차감(공군 중령)
         * [[1967년]] 대통령 특별보좌관(공군 중령)
  • 김용만 (1967년)
         '''김용만'''([[1967년]] [[11월 30일]] ~ )은 [[대한민국]] [[사회자|MC]] 겸 [[희극 배우|개그맨]]이다. [[대한민국 해군]] [[사병]]으로 복무하였다.
         |다음명= [[김용만 (1967년)|김용만]]
         |이전명= [[김용만 (1967년)|김용만]]
         [[분류:MBC 방송연예대상 대상 수상자]][[분류:대한민국의 텔레비전 진행자]][[분류:대한민국의 남자 희극인]][[분류:대한민국의 남자 연극 배우]][[분류:20세기 대한민국 사람]][[분류:21세기 대한민국 사람]][[분류:대한민국의 남자 뮤지컬 배우]][[분류:서울예술대학교 동문]][[분류:성균관대학교 동문]][[분류:1967년 태어남]][[분류:1986년 데뷔]][[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한민국의 개신교도]][[분류:비디오 자키]][[분류:포천시 출신]][[분류:FNC 엔터테인먼트 소속]][[분류:광산 김씨]]
  • 김용만(코미디언)
         ||<#FE2E64> {{{#ffffff '''출생'''}}} ||<(> [[1967년]] [[11월 30일]] ([age(1967-11-30)]세), [[경기도]] [[포천시]][* 출생 당시 [[포천시]]. 인천광역시로의 분구는 1988년 이루어졌다] ||
         [[분류:대한민국의 남성 방송인]][[분류:한국 남성 코미디언]][[분류:1991년 데뷔]][[분류:포천시 출신 인물]][[분류:1967년 출생]][[분류:1대 100 역대 1인]][[분류:라디오 스타의 역대 게스트]]
  • 김용준 (1904년)
         '''김용준'''(金瑢俊, [[1904년]] [[2월 3일]] ~ [[1967년]] [[11월 3일]]?)은 [[한국]]의 [[화가]]이며 미술평론가, 미술사학자이다. 수필가로도 알려져 있다. 아호는 근원(近園)이다.
         |issue=제16호}}</ref> [[성혜랑]]과 김용준은 이웃에 살고 있었는데, [[1967년]] 김용준이 [[김일성]]의 사진이 들어 있는 신문을 그대로 밖에 버린 사실이 드러나 큰 처벌을 받을 위기에 놓이자 자결했다는 것이다. [[성혜랑]]의 증언 외에 이 사실을 증명할 수 있는 다른 근거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분류:1904년 태어남]][[분류:1967년 죽음]][[분류:일제 강점기의 화가]][[분류:일제 강점기의 미술 평론가]][[분류:대한민국의 미술 평론가]][[분류:일제 강점기의 교육인]][[분류:대한민국의 화가]][[분류:대한민국의 수필가]][[분류:대한민국의 대학 교수]][[분류: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화가]][[분류: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미술 평론가]][[분류: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대학 교원]][[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
  • 김우중
         *** 장남 : 김선재(金善宰, 1967년 ~ 1990년 11월 21일)
         [[1960년]] 25세에 [[연세대학교]]를 졸업하고 [[1966년]]까지 [[한성실업]]에서 근무하다가, [[1967년]] 32세에 [[서울특별시|서울]] [[충무로]]에서 [[대우실업]]을 설립했다. 자본금은 500만원이었지만, [[동남아시아]], [[미국]] 시장에서 성공하여 [[1970년대]] 초반부터 [[대우건설]], [[대우증권]], [[대우전자]], [[대우조선]] 등을 창설하며 [[1974년]]에 1억불의 수출탑을 달성하는데 성공하며 신흥 재벌이 되었다. [[1981년]]에 스스로 회장의 자리에 올랐다. [[1982년]] [[1월]]에는 (주)[[대우]]를 출범시키며 재계 4위에 올랐다.
  • 김원만
         * [[신민당 (1967년)|신민당]] 고문
         |[[대한민국 제7대 국회의원 선거|제7대 총선]]||[[서울 용산구의 국회의원|국회의원(서울 용산구)]]||7대||[[신민당 (1967년)|신민당]]||{{막대|녹|6|1|8|2}} 61.82%||59,499표||1위||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ko/thumb/d/dd/%EA%B5%AD%ED%9A%8C%EC%9D%98%EC%9B%90%EB%8B%B9%EC%84%A0.png/25px-%EA%B5%AD%ED%9A%8C%EC%9D%98%EC%9B%90%EB%8B%B9%EC%84%A0.png
         |[[대한민국 제8대 국회의원 선거|제8대 총선]]||[[서울 용산구의 국회의원|국회의원(서울 용산구)]]||8대||[[신민당 (1967년)|신민당]]||{{막대|녹|6|1|1|3}} 61.13%||62,273표||1위||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ko/thumb/d/dd/%EA%B5%AD%ED%9A%8C%EC%9D%98%EC%9B%90%EB%8B%B9%EC%84%A0.png/25px-%EA%B5%AD%ED%9A%8C%EC%9D%98%EC%9B%90%EB%8B%B9%EC%84%A0.png
         |[[대한민국 제9대 국회의원 선거|제9대 총선]]||[[서울 용산구의 국회의원|국회의원(서울 용산구]]·[[서울 마포구의 국회의원|마포구)]]||9대||[[신민당 (1967년)|신민당]]||{{막대|녹|3|1|4|7}} 31.47%||67,140표||1위||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ko/thumb/d/dd/%EA%B5%AD%ED%9A%8C%EC%9D%98%EC%9B%90%EB%8B%B9%EC%84%A0.png/25px-%EA%B5%AD%ED%9A%8C%EC%9D%98%EC%9B%90%EB%8B%B9%EC%84%A0.png
         |[[대한민국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제10대 총선]]||[[서울 용산구의 국회의원|국회의원(서울 용산구]]·[[서울 마포구의 국회의원|마포구)]]||10대||[[신민당 (1967년)|신민당]]||{{막대|녹|2|6|2|1}} 26.21%||84,207표||3위||낙선
         |임기 = [[1967년]] [[7월 1일]] ~ [[1971년]] [[6월 30일]]
         |소속정당 = [[신민당 (1967년)|신민당]]
         |소속정당 = [[신민당 (1967년)|신민당]]
         |소속정당 = [[신민당 (1967년)|신민당]]
  • 김일 (프로레슬링 선수)
         * [[1967년]] 제23대 WWA 세계헤비급챔피언
  • 김장훈
         일반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김장훈의 출생연도는 [[1967년]]이지만, 사실 해당 출생년은 방송용 및 활동을 위함에 불과한 것이다. 실제 김장훈의 출생연도는 [[1963년]]<ref>{{뉴스 인용
  • 김정렬 (1917년)
         [[1940년]] 일본육군사관학교를 [[1941년]] 일본항공사관학교를 졸업하고 [[태평양 전쟁]] 당시에는 조종수로 출전하였다. 해방 후 창군에 참여하고 [[1949년]]에는 [[대한민국 공군]] 창설에 참여하여 초대,3대 공군참모총장을 역임했다. [[1957년]] 중장 예편 이후 국방부 장관을 지냈다. [[1963년]] [[민주공화당]](民主共和黨)의 초대 의장이 되었다가 그 해에 주미대한민국대사로 부임, 1년간 근무했다. 1966년에는 반공연맹 이사장으로 취임하였고, [[1967년]]에는 [[민주공화당]] 공천으로 비례대표 국회의원이 되었다. 1970년대에는 기업인으로 활동하다가 다시 [[대한민국 제5공화국|제5공화국]] 때 총리 서리로 발탁되어 국무총리를 역임하였다.
         [[5·16 군사정변]] 이후 [[박정희]]에 의해 다시 발탁되어 1963년 1월 [[민주공화당 (대한민국)|민주공화당]](民主共和黨) 창당 조직에 참여하였다. 그해 3월부터 [[민주공화당 (대한민국)|민주공화당]] 초대 당 의장이 되었고, 같은 해 [[주미 대한민국 대사]]가 되어 1년간 근무하고 [[1965년]] 귀국했다. 1966년 [[반공연맹]] 이사장, 1967년 [[민주공화당 (대한민국)|민주공화당]] 공천으로 전국구(비례대표) [[국회의원]]을 지냈다. [[5·16 군사정변]]으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가 자신이 [[곽영주]]의 훼방으로 소장 진급이 어려워졌을 때 김정렬이 나서서 [[박정희]]를 소장으로 진급시켜준 은혜를 잊지 못했던 [[박정희]]는 자신이 정권을 잡자 김정렬을 [[민주공화당 (대한민국)|민주공화당]] 초대 당의장을 시켜준 것부터 시작해서 국가의 요직을 두루 경험하게 해줬으며 이것이 [[전두환 정권]]인 5공화국까지 이어지게 했다. 또 [[정일권]]의 후임으로 주미 한국대사를 지냈으며, 이것은 김정렬의 대사 임명에 대한 [[미국 정부]]의 [[아그레망]]이 정식으로 요청된 것이었다.<ref>{{뉴스 인용 |url = http://dna.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63041600329201011&editNo=6&printCount=1&publishDate=1963-04-16&officeId=00032&pageNo=1&printNo=5375&publishType=00020| 제목 = 駐美 大使에 金貞烈씨 任命 | 날짜 = 1963-04-16 | 출판사 = 경향신문 }}</ref>
  • 김정렴
         [[1946년]] [[한국은행]]의 전신인 [[조선은행]]에 입행하였다. 그 후 [[한국은행]] 조사부 차장과 [[대한민국 기획재정부|재무부]] 이재국장을 거쳐 [[1966년]] [[대한민국의 기획재정부 장관|재무부 장관]], [[1967년]] [[대한민국의 지식경제부 장관|상공부 장관]], [[1969년]] [[10월]]부터 [[1978년]] [[12월]]까지 [[대한민국의 대통령비서실장|대통령 비서실장]]을 지냈고 그 후 [[1979년]] [[2월|1월]]부터 [[1980년]] [[9월|89월]]까지 [[일본]] 주재 [[대한민국]] 대사를 역임하였다. 화폐 개혁, [[새마을 운동]], 산림 녹화 등에 직접 관여하기도 하였다.
         |임기 = [[1967년]] [[10월 3일]] ~ [[1969년]] [[10월 20일]]
  • 김정수 (1949년)
          | 활동시기 = [[1967년]] ~ 현재
         [[경상북도]] [[울릉군|울릉]]에서 출생하였고 한때 [[경기도]] [[서울특별시|서울]]에서 잠시 유년기를 보낸 적이 있는 그는 [[1967년]] [[록 음악]] [[음악 그룹|밴드]] '미키스(Mickeys)'의 [[베이스 기타|베이스 기타리스트]] 겸 [[보컬|보컬리스트]]로 가요계에 데뷔하였고, [[1978년]]에 '급행열차'라는 록 음악 밴드에서 보컬리스트 겸 [[기타 연주자|기타리스트]]로 활동하였으며 [[1980년]]에는 '급행열차'의 [[보컬|보컬리스트]]로서 [[기타 연주자]]이자 [[오르가니스트|오르간 연주자]] 겸 [[작곡가]]인 김기표에게 받은 《내 마음 당신 곁으로》를 발표하여 히트하였는데 [[1985년]]에 [[가수]] [[민해경]]도 이 곡을 [[리메이크]]하였다.
         [[분류:대한민국의 남자 가수]][[분류:대한민국의 록 가수]][[분류:대한민국의 트로트 가수]][[분류:울릉군 출신]][[분류:대한민국의 작사가]][[분류:대한민국의 작곡가]][[분류:대한민국의 기업인]][[분류:대한민국의 남자 싱어송라이터]][[분류:1949년 태어남]][[분류:1967년 데뷔]][[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골든디스크 본상 수상 음악가]][[분류:20세기 대한민국 사람]][[분류:미국에 거주한 대한민국인]][[분류:21세기 대한민국 사람]][[분류:대한민국의 침례교도]]
  • 김종욱 (정치인)
         '''김종욱'''(金鐘煜, [[1967년]] [[9월 27일]] ~ )은 [[대한민국]]의 정당인이다.
         [[분류:1967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고려대학교 동문]][[분류:친문]][[분류:박원순]][[분류:새천년민주당 당원]][[분류:열린우리당 당원]][[분류:대통합민주신당 당원]][[분류:민주당 (대한민국, 2008년) 당원]][[분류:민주당 (대한민국, 2011년) 당원]][[분류:더불어민주당 당원]]
  • 김태형 (1967년)
         '''김태형'''(金太亨, [[1967년]] [[9월 12일]] ~ )는 전 [[KBO 리그]] [[두산 베어스]]의 [[포수]]이자, 현재 [[두산 베어스]]의 감독이다.
         [[분류:1967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한민국의 야구 감독]][[분류:KBO 리그 포수]][[분류:OB 베어스 선수]][[분류:두산 베어스 선수]][[분류: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 선수]][[분류:대한민국의 올림픽 야구 참가 선수]][[분류:1988년 하계 올림픽 야구 참가 선수]][[분류:두산 베어스 감독]][[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서울화계초등학교 동문]][[분류:신일중학교 (서울) 동문]][[분류:단국대학교 동문]][[분류:대한민국의 불교 신자]][[분류: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 김현철 (1901년)
          | 경력 = [[대한민국]] [[대한민국의 국무총리|내각수반]] <br/> [[현대그룹]] 고문 <br/> [[국민대학교]] 초빙교수<br/> [[단국대학교]] 전임강사 <br/> [[한국독립당]] 경제외교행정특보위원(1966년) <br/> [[신민당 (1967년)|신민당]] 행정특임고문(1968년)
         |임기 = [[1964년]] [[12월]] ~ [[1967년]] [[10월]]
  • 김현태 (1967년)
         '''김현태'''(金賢泰,[[1967년]] [[9월 20일]] ~ )은 [[한국방송공사|KBS]]의 아나운서이다.
         [[분류:한국방송공사의 아나운서]][[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대한민국의 아나운서]][[분류:1967년 태어남]][[분류:서울고등학교 동문]][[분류:연세대학교 문과대학 동문]]
  • 나광남
         '''나광남'''(羅光男, [[1967년]] [[8월 5일]] ~ )은 전 [[KBO 리그]] [[삼성 라이온즈]]의 외야수이자 현재 [[KBO (야구)|KBO]] 소속의 심판 위원회 1군 팀장이다.
         [[분류:1967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광주광역시 출신]][[분류:KBO 리그 외야수]][[분류:삼성 라이온즈 선수]][[분류:광주진흥고등학교 동문]]
  • 나웅 (야구 선수)
         '''나웅''' (羅雄, [[1967년]] [[1월 11일]] ~)은 전 [[KBO 리그]] [[MBC 청룡]], [[LG 트윈스]]의 내야수이다.
         [[분류:1967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KBO 리그 내야수]][[분류:MBC 청룡 선수]][[분류:한양대학교 동문]]
  • 나웅 (야구선수)
         '''나웅''' (羅雄, [[1967년]] [[1월 11일]] ~)은 전 [[KBO 리그]] [[MBC 청룡]], [[LG 트윈스]]의 내야수이다.
         [[분류:1967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분류:KBO 리그 내야수]][[분류:MBC 청룡 선수]][[분류:선린상업고등학교 동문]]
  • 낙천군
         그뒤 [[1967년]] [[경기도]] [[남양주시|남양주군]] 흥선대원군 묘소 근처로 이장되었으며, [[2001년]] [[연령군]] 후손들의 묘소를 화장하여 납골당에 안장할 때 일괄 화장되어, [[흥선대원군]] 묘소 건너편의 납골묘 [[흥친왕]]과 [[은신군]]의 옆자리에 안장되었다.
  • 남궁연
         '''남궁연'''(南宮演, [[1967년]] [[5월 1일]] ~ )은 대한민국의 드럼 연주가, 방송인이다.
         [[분류:1967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광주광역시 출신]][[분류:함열 남궁씨]][[분류:윤보선]][[분류:윤치영]][[분류:이화여자대학교 사범대학 부속고등학교 동문]][[분류:1987년 데뷔]][[분류:대한민국의 드럼 연주자]][[분류:대한민국의 라디오 진행자]][[분류:대한민국의 팝 음악가]][[분류:대한민국의 남자 가수]][[분류:대한민국의 재즈 음악가]][[분류:대한민국의 작곡가]][[분류:대한민국의 음악 프로듀서]][[분류:대한민국의 개신교도]][[분류:대한민국의 방송인]][[분류:대한민국의 남자 영화 배우]][[분류:대한민국의 남자 뮤지컬 배우]][[분류:대한민국의 영화 음악 작곡가]][[분류:대한민국의 남자 배우]][[분류:대한민국의 대학 교수]][[분류:대한민국의 대학 강사]][[분류:대한민국의 연출가]]
  • 남궁원(배우)
          * [[황혼의 검객]] [[1967년]]작.
  • 남능미
         데뷔 [[1967년]] [[KBS]] 공채 6기 [[탤런트]]
         [[분류:한국 여배우]][[분류:1946년 출생]][[분류:군산시 출신 인물]][[분류:1967년 데뷔]]
  • 남재현 (시인)
         '''님재현'''(南載賢, [[1967년]] [[7월 29일]] ~ )은 [[대한민국]]의 [[문학 평론|평론가]] 겸 [[시 (문학)|시인]]이며 [[기업가]]이다.
         [[분류:1967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경상북도 출신]][[분류:대한민국의 문학 평론가]][[분류:대한민국의 정치 평론가]][[분류:대한민국의 경제 평론가]][[분류:대한민국의 블로거]][[분류:대한민국의 시사 평론가]][[분류:20세기 대한민국 사람]][[분류:21세기 대한민국 사람]][[분류:대한민국의 문화 평론가]][[분류:대한민국의 교육 평론가]][[분류:대한민국의 시인]][[분류:의령 남씨]][[분류:대한민국의 기업인]][[분류:영남대학교 동문]][[분류:유교 신자]]
  • 노라 노
         [[1967년]]에 화제가 된 [[윤복희]]의 미니스커트는 노라 노가 디자인했다고 한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20&aid=0002486172 ‘한국의 코코 샤넬’ 디자이너 노라 노의 패션 발자취 한눈에] - 동아일보</ref>
  • 노영국
         |활동기간 = [[1967년]] ~ 현재
         그는 1967년 연극배우 첫 데뷔하였고 1968년 뮤지컬배우 데뷔하였으며 그 후 [[1975년]] [[문화방송|MBC]] 7기 공채 탤런트 정식 데뷔하였다. [[1988년]] 늦은 나이에 [[서갑숙]]과 초혼을 하였으나, [[1997년]] 이혼하였다. [[2006년]] 패션디자이너 안영순과 재혼하였다.
  • 노영심
         '''노영심'''([[1967년]] [[2월 20일]]([[음력]] [[1월 12일]]) ~ )은 [[대한민국]]의 [[피아노 연주자]], [[싱어송라이터]], [[음악감독]], [[방송인]]이다. 주로 [[이지 리스닝]]과 [[팝 발라드]] 성향의 곡들을 많이 작곡한 그녀는 [[1989년]] 가수 [[변진섭]]의 곡 '〈희망사항〉' 작사,작곡하여 첫 데뷔하였고 이후 가수로도 데뷔하여 〈별 걸 다 기억하는 남자〉가 히트하였으며 대표곡으로는 선배 가수 [[여진 (가수)|여진]]의 원곡을 리메이크한 〈그리움만 쌓이네〉 등이 있다.
         [[분류:대한민국의 텔레비전 진행자]][[분류:대한민국의 영화 음악 작곡가]][[분류:대한민국의 팝 가수]][[분류:대한민국의 여자 가수]][[분류:대한민국의 작사가]][[분류:대한민국의 작곡가]][[분류:대한민국의 피아노 연주자]][[분류:1967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한민국의 로마 가톨릭교도]][[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노씨]]
  • 노영하
         |프로 입단 = [[1967년]]
         * [[1967년]] 프로 입단(전순길)과 입단 동기. (스승 정창현)
  • 문주란 (가수)
         | [[1967년]]
         | [[1967년]]
         [[1949년]] [[대한민국]] [[부산광역시]]에서 태어났다. [[1965년]] 중학교 3학년인 어린 나이로 [[부산MBC]] '''톱 싱거 경연대회'''에서 〈보고싶은 얼굴〉로 1등을 한 뒤 [[1966년]] [[2월]] 〈보슬비 오는 거리〉, 〈동숙의 노래〉, 〈봄이 오는 고갯길〉이 수록된 음반을 내면서 가요계에 정식으로 데뷔했다. 이 음반으로 그해 국제가요대상에서 신인상을 수상하였고, 무궁화상에서 장려상을 수상하였다. 또 1972년까지 TBC 가요상에서 신인상을 수상했다. [[1967년]]에는 군사영화 《장렬 509 대전차대》에도 출연한 바 있으며, [[1967년]]과 [[1968년]]에는 [[MBC]]에서 주최한 [[MBC 가요대제전|MBC 10대 가수 가요제]]의 10대 가수에 선정되기도 하였다.
  • 문호근
         [[1967년]] [[피아노 연주자|피아니스트]] 첫 데뷔를 한 그는 이후 피아니스트 활동을 접고 1970년대 이래 각종 오페라를 연출하였으며, 진보적인 예술인단체인 민예총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 이후 [[1997년]]부터 [[예술의 전당|서울 예술의 전당]] 공연예술감독관으로 재직하던 중, [[2001년]] [[5월 17일]] 56세의 나이에 심장마비로 사망하였다.<ref>{{뉴스 인용|성1=연합뉴스 |제목=오페라 연출가 문호근씨 타계 |url=http://legacy.www.hani.co.kr/section-009000000/2001/05/009000000200105171428773.html |날짜=2001-05-17 |확인날짜=2018-09-05 |뉴스=한겨레신문}}</ref>
         [[분류:1946년 태어남]][[분류:2001년 죽음]][[분류:대한민국의 고전 피아노 연주자]][[분류:1967년 데뷔]][[분류:오페라 연출가]][[분류:대한민국의 수필가]]
  • 박관수 (1897년)
         [[1965년]] 단군정신선양회 회장, 신라오릉보존회 총재, 등을 거쳐 아시아민족반공연맹 이사장, [[1966년]] [[한국반공연맹]] 제1대 이사장 등을 지냈다. [[1967년]] 전국노인단체연합회창립준비위원회 명예총재에 추대되었다.<ref>[http://www.nn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8924 노년시대신문 - 어르신들의 최고의 선택<!-- 봇이 따온 제목 -->]</ref> [[1970년]] 월남인 출신 공산권문제연구소 이사장 한재덕이 사망하자, 제2대 공산권문제연구소 이사장으로 초빙되어 부임하였다.<ref name="ReferenceA"/> 이를 놓고 윤형복은 박정희의 은사라서 한자리 마련해 주지 않았나며 의혹을 제기하였다.<ref>{{서적 인용
  • 박기출 (국회의원)
         [[5·16군사정변]] 뒤 1967년 제7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부산시 동구에서 보수야당인 신민당 공천으로 출마하여 당선됨으로써 마침내 원내진출에 성공하였다. 그런데 국회의원 임기말에 이어진 1971년 제7대 대통령선거에서 원래 국민당을 창당하고 출마하기로 했던 윤보선이 승산이 없음을 자각하고 갑자기 불출마를 선언하자 국민당 관계자들로부터 대신 출마해줄것을 제의받고 대통령 후보로 나섰으나 낙선했다. 그후 잠시 정치활동을 쉬다가 유신선포후인 1973년 9대총선에서 양일동이 창당한 군소야당인 통일당 후보로 서울 동대문에서 출마하였다가 낙선했다. 그 후 다시 정치낭인으로 지내다가 유신정권이 자신을 체포하려한다는 제보를 받고 급히 일본으로 도피했다.
         |[[대한민국 제7대 국회의원 선거|제7대 총선]]||[[부산 동구의 국회의원|국회의원(부산 동구)]]||7대||[[신민당 (1967년)|신민당]]||{{막대|녹|5|5|4|6}} 55.46%||46,188표||1위||
         |임기 = [[1967년]] [[7월 1일]] ~ [[1971년]] [[6월 30일]]
         |소속정당 = [[신민당 (1967년)|신민당]] → [[무소속]] → [[국민당 (대한민국, 1971년)|국민당]]
  • 박녹주
         [[1960년대]]부터는 본인이 보유하고 있었던 바탕소리 녹음을 많이 남겼다. [[1963년]] 기독교방송에서 춘향가를 녹음하고, [[1972년]] 자택에서 기록보존용으로 심청가를 녹음하였다 흥보가는 총 4차례나 전판을 녹음하였는데 이 가운데 [[1967년]] 녹음(고수 : 정권진)과 [[1973년]] 녹음(고수 : 김동준)은 음반화 되었다. 전자는 [[지구레코드]]에서 출반되었으며, 이후 CD로도 복각되었고, 후자의 경우에는 문화재보호협회 소장 녹음으로 여러차례 음반으로 제작되었으나 CD로는 제작되지 않아 지금은 듣기 어렵다. 그 외에 출반되지 않은 녹음으로는 [[1976년]] 문예진흥원 판소리 조사 사업당시에 녹음한 것(고수 미상)과 녹음시기 미상의 기독교 방송 소장의 녹음(고수 : 정철호)이 있다.
  • 박동룡
         | 활동기간 = [[1967년]] ~ 현재
         [[부산광역시]] 태생이며, 청소년기를 보냈다. [[건국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년 정도 외항선을 타고 일본을 오간 후 영화배우가 되기 위해 부산에서 서울로 올라왔다. 그 후로 영화 데뷔시작하였으나, [[1967년]] 신필름에서 배우로 일하던 친구 백영민의 소개로 편기영 감독의 《돌아온 팔도 사나이》에 출연하면서 영화 배우로 입문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후 고영남, 이혁수, 김효천 감독 등 액션 영화 전문 감독들로 알려진 이들이 연출한 [[1970년]]~[[1980년]]대의 거의 모든 액션 영화에 단역 내지는 조연으로 출연한 배우로 거듭났다.
         * 1967년 《맨발의 청춘》
  • 박동묘
         |임기 = [[1966년]] [[2월 23일]] ~ [[1967년]] [[6월 29일]]
  • 박병선 (역사학자)
         박병선은 [[벨기에]] 루뱅에서 동양사학을 전공한 후 파리 제7대학교에서 역사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1967년]]부터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근무하였고 1967년부터 13년 동안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근무하면서 직지심체요절과 [[외규장각 도서]]를 발견했다.<ref name="충청">김헌섭·홍성헌. [http://www.ccdailynews.com/section/?knum=125172 직지대모 박병선 박사 '재조명']. 《충청일보》. 2009년 12월 2일.</ref> 직지심체요절의 존재를 처음 발견하여 1972년에 이 사실을 세상에 알렸고, 1975년에는 [[병인양요]] 때 [[프랑스]]가 약탈해 간 [[외규장각 도서]]를 발견해 대한민국 내 '외규장각 도서 반환 운동'에 불을 지폈다.<ref>박재천.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01&aid=0006709090 고 박병선 박사 소장 '옛 주화' 1천650점 기탁]. 연합뉴스. 2014년 1월 20일.</ref>
  • 박상도
         '''박상도''' ([[1967년]] [[5월 9일]]~) 는 [[대한민국]]의 [[SBS (대한민국의 방송사)|SBS]] 아나운서다.
         [[분류:SBS의 아나운서]][[분류:1993년 데뷔]][[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1967년 태어남]][[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대한민국의 아나운서]]
  • 박상도 (아나운서)
         '''박상도''' ([[1967년]] [[5월 9일]]~) 는 [[대한민국]]의 [[SBS (대한민국의 방송사)|SBS]] 아나운서다.
         [[분류:SBS의 아나운서]][[분류:1993년 데뷔]][[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1967년 태어남]][[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분류:대한민국의 아나운서]]
  • 박순천 (국회의원)
         [[1963년]] [[10월]] [[대통령]] 후보자로 출마한 [[윤보선]]의 예방을 받았다. [[1964년]] 민주당과 민정당이 통합되어 [[민중당 (1964)|민중당]]이 설립되자 민중당 대표최고위원, [[1965년]] 다시 민주당을 재건하고 민주당 총재가 되었다가, [[1967년]] 범야당 통합에 참여하고, 그해 [[신민당 (1967년)|신민당]] 고문 등 야당의 지도자를 역임했다.
         |[[대한민국 제7대 국회의원 선거|제7대 총선]]||[[틀:제7대 비례대표 신민당|국회의원(전국구)]]||7대||[[신민당 (1967년)|신민당]]||{{막대|녹|3|2|7}} 32.7%||3,554,224표||전국구 1번||
         |임기 = [[1963년]] [[12월 17일]] ~ [[1967년]] [[6월 30일]]
         |임기 = [[1965년]] [[5월 30일]] - [[1967년]] [[2월 11일]]
  • 박영균
         '''박영균'''(朴永均, Yong-Kyun Park, [[1967년]] [[8월 16일]] ~ [[전라남도|전남]] [[담양군|담양]])은 [[대한민국]]의 전 권투 선수이다. 전 [[세계복싱협회]](WBA) 페더급 챔피언. 전형적인 인파이터로 별명은 불도저.
         [[분류:1967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한민국의 권투 선수]][[분류:WBA 챔피언]][[분류:담양군 출신]]
  • 박영균 (1967년)
         '''박영균'''(朴永均, Yong-Kyun Park, [[1967년]] [[8월 16일]] ~ )은 [[대한민국]]의 전 권투 선수이다. 전 [[세계복싱협회]](WBA) 페더급 챔피언. 전형적인 인파이터로 별명은 불도저.
         [[분류:1967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한민국의 권투 선수]][[분류:WBA 챔피언]][[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
  • 박종진 (1967년)
         '''박종진'''(朴鍾津, [[1967년]] [[4월 20일]] ~ )은 [[대한민국]]의 前 [[저널리즘|언론인]] 출신인데, 방송인 겸 [[수필|수필가]]이며 前 [[정치인]]이다. 그는 지난날 [[바른미래당]] 인재영입위원회 부위원장 직위를 지냈었다.
         [[분류:1967년 태어남]] [[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대한민국의 언론인]][[분류:대한민국의 방송인]][[분류:대한민국의 기자]][[분류:대한민국의 텔레비전 기자]][[분류:대한민국의 수필가]][[분류:대한민국의 시사 평론가]][[분류:대한민국의 정치 평론가]][[분류:대한민국의 경제 평론가]][[분류:프리랜서 아나운서]][[분류:1993년 데뷔]][[분류:동아방송예술대학교 교수]][[분류:한나라당의 정치인]][[분류:바른정당의 정치인]][[분류:바른미래당의 정치인]][[분류:대한민국의 유튜버]][[분류:밀양 박씨]][[분류:대한민국의 개신교도]][[분류:20세기 대한민국 사람]][[분류:21세기 대한민국 사람]][[분류:서울봉천초등학교 동문]] [[분류:용산중학교 (서울) 동문]][[분류:고려대학교 동문]][[분류:동국대학교 언론정보대학원 동문]]
  • 박종화 (1967년)
         | 출생일 = [[1967년]] [[5월 20일]]
         '''박종화'''(朴鍾和, [[1967년]] [[5월 20일]])는 [[대한민국]]의 [[교수]], 연구자, 사업가이며, [[부산광역시|부산]] 출신이다. 주 연구 분야는 생물학으로, 컴퓨터와 게놈정보를 활용하여 암과 노화 정복에 관한 연구를 진행한다.<ref>송준섭, '[http://bme.unist.ac.kr/%EA%B3%BC%ED%95%99%EB%8F%99%EC%95%84-%EB%B0%95%EC%A2%85%ED%99%94-%EA%B5%90%EC%88%98-%EC%9D%B8%ED%84%B0%EB%B7%B0-%EB%8A%99%EC%A7%80-%EC%95%8A%EB%8A%94-%EC%84%B8%EC%83%81%EC%9D%84-%EA%BF%88%EA%BE%BC/?lang=ko 박종화 교수 인터뷰, 늙지 않는 세상을 꿈꾼다]{{깨진 링크|url=http://bme.unist.ac.kr/%EA%B3%BC%ED%95%99%EB%8F%99%EC%95%84-%EB%B0%95%EC%A2%85%ED%99%94-%EA%B5%90%EC%88%98-%EC%9D%B8%ED%84%B0%EB%B7%B0-%EB%8A%99%EC%A7%80-%EC%95%8A%EB%8A%94-%EC%84%B8%EC%83%81%EC%9D%84-%EA%BF%88%EA%BE%BC/?lang=ko }}', 과학동아</ref>
         [[분류:1967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한민국의 대학 교수]][[분류:부산광역시 출신 인물]][[분류:케임브리지 대학교 동문]][[분류:서울대학교 교수]]
  • 박철민 (배우)
         '''박철민'''([[1967년]] [[1월 18일]] ~ )은 [[대한민국]]의 [[배우]]이다.
         [[분류:1967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대한민국의 불교 신자]][[분류:1988년 데뷔]][[분류:조선대학교 부속고등학교 동문]][[분류:중앙대학교 동문]][[분류:대한민국의 남자 연극 배우]][[분류:대한민국의 남자 뮤지컬 배우]][[분류:대한민국의 남자 영화 배우]][[분류:대한민국의 남자 텔레비전 배우]]
  • 배금택
         '''배금택'''(裵錦澤, [[1949년]] [[8월 11일]] ~ )은 [[대한민국]]의 [[만화가]]이다. [[광주광역시]]에서 태어났으며, [[전남대학교]] 생물학과를 중퇴하였다. 첫 작품은 《미스 도돔바》([[1967년]])이며, 사춘기 소녀의 일상생활을 다룬 《[[영심이]]》([[1990년]])가 히트하여 TV 애니메이션화 되기도 하였다.
         * 미스 도돔바, 뽀뽀양의 일기 ([[1967년]])
  • 백남봉(코미디언)
         [[전라북도]] [[진안]] 출생이며 [[1944년]] [[평안남도]] 진남포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성장하였다. 어릴 적 전쟁과 피난을 경험한 그는 한때 고아원에서 자랐다. 구두닦이와 장돌뱅이 등으로 전국을 떠돌아다니면서 서민의 정을 느낀 그는 [[1962년]] 유랑극단을 거쳐 [[1967년]]에 물랑루즈쇼단으로 희극인 활동을 시작하여 [[1969년]]에 [[동양방송]] 라디오 《장기자랑》이란 프로를 통해 방송에 데뷔했다.
  • 백일섭
         * [[1967년]] 《돌무지》
  • 변주현
         '''변주현'''([[1967년]] [[10월 1일]] ~)은 [[대한민국]]의 [[배우]], [[영화 감독]]이다.<ref>[http://movie.daum.net/movieperson/Biography.do?personId=27821&anchor=filmography 변주현-다음인물정보]</ref>
         [[분류:1967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한민국의 영화 배우]][[분류:대한민국의 영화 감독]][[분류:대한민국의 영화 각본가]][[분류:대한민국의 영화 프로듀서]][[분류:대한민국의 텔레비전 배우]][[분류:대한민국의 연극 배우]][[분류:부산광역시 출신]]
  • 부완혁
         [[대한민국 제3공화국|제3공화국]]에서는 《[[사상계]]》에 기고하며 문필 생활을 하였고, [[1967년]]에는 [[신민당 (1967년)|신민당]]에도 입당하여 [[박정희]]에 반대하는 대표적인 인물로 활동했다. [[장준하]]는 [[사상계]]가 경영난에 빠지자 [[강원용]]을 찾아 인수해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거절당한 뒤 그에게 사상계를 넘겼다.<ref name="군인1">[http://www.donga.com/docs/magazine/shin/2004/03/02/200403020500004/200403020500004_1.html (강원용 목사의 체험 한국 현대사 ④) 12·12 직후 만난 DJ, "군인들은 내게 충성할 것"] {{웨이백|url=http://www.donga.com/docs/magazine/shin/2004/03/02/200403020500004/200403020500004_1.html |date=20070831100249 }} 신동아 2004년 03월호(534호)</ref> 그러나 [[강원용]]에 의하면 전임자인 [[장준하]]와 갈등했다고 한다.<ref name="군인1"/>
  • 서기원 (1930년)
         * [[1967년]] [[동화통신]] 경제부 부장([[1967년]] [[6월]]).
  • 서수길 (기업인)
         '''서수길'''([[1967년]] [[3월 9일]] ~ )은 [[대한민국]]의 기업인이다. 2005년 [[액토즈 소프트]], 2007년 [[위메이드 엔터테인먼트]] 대표를 거쳐 현재 [[아프리카TV (기업)|아프리카TV]]의 대표이사를 맡고 있다.
         [[분류:1967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
  • 서영무
         [[대구광역시|대구]] 출신으로 [[대구상원고등학교|대구상고]]와 [[경북대학교|경북대]]를 졸업했다. 이후 공군 등 실업 야구 팀에서 선수 생활을 하였지만, 선수 시절에는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주 포지션은 [[내야수]]였다. 모교 [[대구상원고등학교|대구상고]]의 감독을 맡았다가 [[일본]]에 야구 연수를 다녀왔고, [[1967년]]부터 [[경북고등학교]] 야구부 감독을 맡아 명성을 쌓았다. [[1971년]]에는 전국 고교 대회를 모두 석권하는 위력을 보여 주며 고교 야구계에서는 '''"우승 제조기"'''로 불렸다.<ref>[http://sports.news.naver.com/sports/index.nhn?category=kbo&ctg=news&mod=read&office_id=022&article_id=0000100831 한국 야구 100주년 ⑬ 우승 제조기 서영무] - 세계일보</ref> 이후 [[한양대학교]], [[서울고등학교]], [[중앙대학교]] 야구부 감독으로 일하다가 [[1982년]] [[KBO 리그]]가 출범하자 연고 팀 [[삼성 라이온즈]]의 초대 감독에 임명되었다.
  • 서월영
         토월회와 청춘좌, 중앙무대, 고협 등에서 꾸준히 함께 했던 심영과는 광복 후 [[좌익]]과 [[우익]] 계열로 갈라졌다. 심영은 [[김두한]]에게 피습을 받고 월북했고, 그는 극단 [[청탑]]을 창설하고 반공 영화 《성벽을 뚫고》(1949)에 출연하는 등 [[남한]]에 남아 1950년대와 1960년대 많은 영화에 출연하며 활발히 활동했다. 마지막 작품은 [[1967년]] [[신상옥]]이 연출한 《다정불심》과 《꿈》이다.
  • 서태화
         '''서태화'''([[1967년]] [[3월 31일]] ~ )는 [[대한민국]]의 [[배우]]이다.
         [[분류:1967년 태어남]][[분류:대한민국의 개신교도]][[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김포시 출신]][[분류:한양대학교 동문]][[분류:맨해튼 음악학교 동문]][[분류:미국에 거주한 대한민국인]][[분류:동아방송예술대학교 교수]][[분류:1988년 데뷔]][[분류:대한민국의 남자 뮤지컬 배우]][[분류:대한민국의 남자 영화 배우]]
  • 성기완
         '''성기완'''(1967년~ )은 [[대한민국]]의 시인이자 뮤지션이다. 1999년 밴드 3호선 버터플라이를 결성하여 2016년 탈퇴할 때까지 17년 동안 이끌었다. [[1967년]] 서울에서 태어나 [[1994년]] 《세계의 문학》 가을호에 시를 발표하며 등단했다. [[서울대학교]] 불어불문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현재 [[계원예술대학]] 융합예술과 사운드 아트 전공 교수로 재직 중이다. 서아프리카 뮤지션 아미두 디아바테 Amidou Diabate(칼레바스, 젬베, 고니, 발라퐁), 한여름(보컬, 키보드), 손경호(드럼, 징) 과 함께 아프로아시안싸운드액트(줄여서 아싸 AfroAsianSsoundAct - Aassa) 를 결성하여 활동 중이다. 아싸는 2017년 첫 앨범을 낼 예정이다.
         [[분류:1967년 태어남]][[분류:대한민국의 남자 가수]][[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대한민국의 시인]][[분류:대한민국의 영화 음악 작곡가]][[분류:대한민국의 기타 연주자]][[분류:대한민국의 라디오 진행자]][[분류:계원예술대학교 교수]][[분류:서울대학교 인문대학 동문]]
  • 송대관
         | 활동시기 = [[1967년]] ~ [[현재]]
         | style="width:20%;" | [[1967년]]
         송대관은 1946년 6월 2일에 [[전라남도]] [[광주시|광주]]에서 아버지 송준석과 어머니 국갑술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할아버지는 [[3·1운동]] 당시 태극기와 독립 선언서를 배포하며 독립운동을 도와 일제의 보안법 위반으로 갖은 고초를 겪은 [[송영근 (1897년)|송영근]]이며 1942년에 사망하였다. 그리고 아버지는 [[한국 전쟁]]으로 인해 실종되어 어머니 밑에서 성장하였다. 송대관은 실종된 아버지의 시신은 아직까지도 찾지 못하였다고 전했다.<ref>[http://www.tvreport.co.kr/?c=news&m=newsview&idx=229863 송대관 "3살 때 돌아가신 아버지 시신도 못찾았다" 고백] 《TV리포트》</ref>1965년에를 졸업한 송대관은 [[부산광역시|부산]]로 상경하여 오아시스 레코드의 사장인 손진석을 만나 그의 일을 도우면서 가수 트레이닝을 받게 되었고 1967년에 정통 트로트 《인정많은 아저씨》(초원 작사/ 김성유 작곡)를 발표하며 가수로 데뷔하였다. 송대관이 데뷔하던 당시에는 [[남진]]과 [[나훈아]]가 대중들의 주목을 받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아무런 호응을 얻지 못하고 무명으로 전락하였다. 1971년 부르스 느낌이 나는 《세월이 약이겠지요》(송대관 작사/ 신대성 작곡)를 발표하였는데 이 곡이 인지도를 얻으며 방송 출연량이 증가하였다. 그러다가 1975년에 《[[해뜰날 (노래)|해뜰날]]》(송대관 작사/ 신대성 작곡)이 크게 히트하면서 본격적으로 송대관이라는 이름을 대중들에게 널리 알리며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특히 이 곡은 반복적이며 희망적이고 긍정적인 가사와 경쾌한 멜로디가 돋보이며 당시 [[남진]], [[나훈아]], [[하춘화]] 등 대세 가수들을 제치며 인기몰이를 하고 1976년 방송국 가요대상 3개를 수상하고 동시에 가수왕에 등극하기에 이르렀다.
         * [[1967년]]《인정많은 아저씨》
         [[분류:1946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광주광역시 출신]][[분류:대한민국의 개신교도]][[분류:대한민국의 남자 가수]][[분류:대한민국의 트로트 가수]][[분류:대한민국의 작사가]][[분류:1967년 데뷔]][[분류:대한민국의 남자 영화 배우]][[분류:대한민국의 남자 배우]][[분류:대한민국의 남자 텔레비전 배우]][[분류:여산 송씨]]
  • 송도순
         | 활동기간 = [[1967년]] ~ [[현재]] ([[동양방송|TBC]] 3기) 또는 ([[한국방송공사|KBS]] 9기)
         [[1967년]] [[동양방송|TBC 동양방송]] 공채 3기 성우로 입사하였으나 이는 [[현재]] [[한국방송공사|KBS 한국방송공사]] 공채 9기로 분류된다. [[한국방송 성우극회]] 소속.
         [[1949년]] [[7월 15일]] 5남매중 막내로 [[서울특별시]](당시 서울특별자유시)에서 태어났다. 부모는 [[황해도]] 출신으로, [[광복절|일제 강점기 해방]] 직후 월남했다. 출생 이듬해인 [[1950년]], [[한국 전쟁]]이 발발하여 [[서울특별시|서울]]으로 피난길에 오른 후 다시 서울로 돌아와를 졸업했다. [[중앙대학교]] 연극영화과를 진학한 후 교수의 추천으로 성우시험에 응시해, [[1967년]] [[동양방송|TBC 동양방송]] 공채 3기 수석으로 입사하며 성우 생활을 시작했다.<ref>{{뉴스 인용|저자=김문|제목=[김문기자가 만난사람] 최근 17년 진행 교통방송 떠난 성우 송도순씨|url=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070416028001|뉴스=[[서울신문]]|출판사= |위치=28면|날짜=2007-04-16}}</ref>
         [[분류:1949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1967년 데뷔]][[분류:대한민국의 여자 성우]][[분류:대한민국의 여자 텔레비전 배우]][[분류:대한민국의 텔레비전 진행자]][[분류:중앙대학교 동문]]
  • 송호창 (1967년)
         '''송호창'''(宋皓彰, [[1967년]] [[2월 14일]] ~ )은 대한민국의 제19대 국회의원이자 인권 변호사이다.<ref>[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20120228110317 민주당, 송호창·이학영·백혜련 전략공천] 프레시안 2012-02-28</ref>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촛불집회 당시 TV토론에 출연해 촛불 정국으로 대변되는 촛불민심을 지지하여, '촛불 변호사' 로 활약했다.<ref>[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720662 '촛불 변호사' 송호창, 안상수 16년 아성 '탈환'] 오마이뉴스 2012.04.12</ref>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사무차장, 그리고 2011년 서울시장 보궐 선거 후보로 나선 [[박원순]]의 대변인으로 활동했다.<ref>[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100165 ‘박원순 대변인’ 송호창, ‘보온병’ 안상수에 도전장] 미디어오늘 2012-02-06</ref> [[대한민국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제19대 총선]]에서 [[민주통합당]] 후보로 의왕·과천에 출마해서 당선되었다.<ref>[http://info.nec.go.kr/main/showDocument.xhtml?electionId=0020120411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선거통계시스템]{{깨진 링크|url=http://info.nec.go.kr/main/showDocument.xhtml?electionId=0020120411 }}</ref>
         [[분류:대한민국의 변호사]][[분류:새천년민주당 당원]][[분류:민주당 (대한민국, 2007년) 당원]][[분류:민주당 (대한민국, 2008년) 당원]][[분류:민주당 (대한민국, 2011년) 당원]][[분류:친문]][[분류:문재인]][[분류:박원순]][[분류:안철수]][[분류:20세기 대한민국 사람]][[분류:21세기 대한민국 사람]][[분류:더불어민주당 당원]][[분류:1967년 태어남]][[분류:대한민국의 시사 평론가]][[분류:대한민국의 정치 평론가]][[분류:대한민국의 법률학 평론가]][[분류:대한민국의 영화 평론가]][[분류:대구고등학교 동문]][[분류:인하대학교 동문]][[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여산 송씨]]
  • 신동일 (언어학자)
         '''신동일'''(申東一, [[1967년]] [[12월 14일]] ~ )은 [[대한민국]]의 [[응용언어학자]]이다.
         [[분류:대한민국의 언어학자]][[분류:대한민국의 대학 교수]][[분류:중앙대학교 동문]][[분류:대구고등학교 동문]][[분류:경상중학교 동문]][[분류:일리노이 대학교 어배너-섐페인 동문]][[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분류:1967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
  • 신성우(가수)
         || '''출생''' ||<(> [[1967년]]/[[1968년]][* 프로필상 1968년 생으로 되어 있지만, [[김광규(배우)|김광규]]랑 동갑 친구라고 밝혀서 1967년 생이 정설일 여지도 있다.] [[음력]] [[4월 19일]][* 포털 사이트 등지에는 [[7월 26일]]로 등재돼 있으나, [[SBS]] [[룸메이트(방송)|룸메이트]]에서 이는 사실과 다르다고 본인이 음력 4월 19일이라고 [[인증]](?)한 바 있다.], [[전라북도]] [[정읍시]] ||
  • 신충식
         [[한국테니스진흥협회]] 회장, [[한국탤런트협회]] 회장을 지낸 그는 [[1960년]] [[뮤지컬 배우]] 첫 데뷔하였고 [[1964년]] [[연극배우]] 데뷔하였으며 이듬해 [[1965년]] [[동양방송|TBC 동양방송]] 특채 성우 데뷔하였고 2년 후 [[1967년]] [[문화방송|MBC문화방송]] 3기 공채 성우 정식 데뷔하였다.
         * [[1967년]] [[경북대학교]] 수의과대학 졸업
         * [[1967년]] 수의사
  • 심보경
         '''심보경'''([[1967년]] [[4월 18일]] ~ )은 [[대한민국]]의 영화제작자이자 영화기획자, 영화마케터로, 영화제작사 보경사의 대표이사로 활동하고 있다.
         [[분류:1967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성균관대학교 동문]][[분류:대한민국의 영화 제작자]][[분류:대한민국의 영화인]][[분류:청송 심씨]]
  • 예춘호
         이 후 [[대한민국 제10대 총선|10대 총선]]에서 무소속으로 당선된 뒤 [[신민당 (1967년)|신민당]]에 입당하면서 야당 정치인으로 변신했고, [[1980년]] [[서울의 봄]] 당시 신군부에 의하여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의 주모자로 지목되어 옥고를 치뤘다. 이후 재야를 대표하여 민추협 부의장을 맡아 동교동계와 상도동계 사이의 통합적인 민주화투쟁을 위해 전력을 다한다. 하지만 [[대한민국 제13대 대통령 선거|13대 대선]]을 앞두고 김대중이 불출마 약속을 뒤엎고 독자적으로 출마하자 [[조순형]], [[유인태]]와 함께 [[한겨레민주당]]을 창당해 자신이 3선을 쌓았던 [[부산 영도구의 국회의원|부산 영도]]에 출마했다가 낙선했다.
         |임기 = [[1963년]] [[12월 17일]] ~ [[1967년]] [[6월 30일]]
         |임기 = [[1967년]] [[12월 17일]] ~ [[1971년]] [[6월 30일]]
  • 오경수
         '''오경수'''([[1967년]] [[5월 27일]] ~ )는 [[대한민국]]의 [[배우]]이다.
         [[분류:1967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1986년 데뷔]][[분류:대한민국의 남자 영화 배우]][[분류:부산광역시 출신]][[분류:대한민국의 남자 배우]][[분류:대한민국의 배우]][[분류:대한민국의 남자 텔레비전 배우]]
  • 오영식
         '''오영식'''(吳泳食, [[1967년]] [[2월 28일]] [[서울특별시|서울]] ~ )은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다.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 제2기 의장을 지내고, 제16·17·19대 국회의원과 제8대 [[한국철도공사]] 사장을 역임하였다.
         [[분류:1967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나주 오씨]][[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서울휘경초등학교 동문]][[분류:양정고등학교 (서울) 동문]][[분류:고려대학교 동문]][[분류: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 관련자]][[분류:고려대학교 경영대학원 동문]][[분류:대한민국의 로마 가톨릭교도]][[분류:새천년민주당 당원]][[분류:열린우리당 당원]][[분류:대통합민주신당 당원]][[분류:민주당 (대한민국, 2008년) 당원]][[분류:민주당 (대한민국, 2011년) 당원]][[분류:더불어민주당 당원]]
  • 오영식 (1967년)
         '''오영식'''(吳泳食, [[1967년]] [[2월 28일]] [[서울특별시|서울]] ~ )은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다. [[전대협]] 제2기 의장을 지낸 학생운동가 출신이다.
         [[분류:1967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분류:고려대학교 동문]][[분류:고려대학교 경영대학원 동문]][[분류:서울전곡초등학교 동문]][[분류:휘경중학교 동문]][[분류:양정고등학교 (서울) 동문]][[분류:나주 오씨]][[분류:대한민국의 로마 가톨릭교도]][[분류:새천년민주당 당원]][[분류:열린우리당 당원]][[분류:대통합민주신당 당원]][[분류:민주당 (대한민국, 2008년) 당원]][[분류:민주당 (대한민국, 2011년) 당원]][[분류:더불어민주당 당원]]
  • 오중기
         || '''출생일''' || [[1967년]] [[7월 23일]] ([age(1967-07-23)]세) ||
         [[경상북도]] [[포항시]] 출신으로 [[대동고등학교(경북)|대동고등학교]], [[영남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했다. 1967년생으로 [age(1967-07-23)]세의 젊은 나이가 강점으로 꼽힌다. [[문재인]] [[대한민국 대통령|대통령]]의 두 번의 대선 동안 경북선대위 상임선대위원장을 맡으면서 신뢰를 쌓아 2017년에는 대구경북 당직자 중에서 유일하게 청와대에 입성했다.
  • 오지명
         * [[1967년]] [[KBS]] 사극드라마 《수양대군》
         *[[1978년|197]][[1967년|7]]년 [[MBC]] 일일연속사극《[[타국 (드라마)|타국》]]
  • 원준희
         '''원준희'''(본명 '''안도희''', [[1967년]] [[1월 19일]] ~ )는 [[대한민국]]의 여성 [[가수]]이다.
         [[분류:대한민국의 팝 가수]][[분류:대한민국의 여자 가수]][[분류:대한민국의 작사가]][[분류:대한민국의 여자 영화 배우]][[분류:대한민국의 여자 배우]][[분류:1985년 데뷔]][[분류:1967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한민국의 개신교도]][[분류:서울특별시 출신]]
  • 유명희 (1967년)
         '''유명희'''(兪明希, [[1967년]] [[6월 5일]] [[울산광역시|울산]] ~ )는 [[대한민국]]의 [[통상교섭본부장]]을 맡고 있는 공무원이다.
         [[분류:1967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기계 유씨]][[분류:울산광역시 출신 인물]][[분류:서울대학교 인문대학 동문]][[분류:5급 국가공무원 공개경쟁채용시험 출신]][[분류:통상교섭본부장]]
  • 유영민 (기업인)
         * ~ [[1967년]] [[동래중학교]]
  • 유정아 (1967년)
         '''유정아'''(兪靜雅, [[1967년]] [[1월 4일]] ~ )는 [[대한민국]]의 [[언론인]], [[방송인]]으로 한국IPTV방송협회 회장이다.
         [[분류:1967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대한민국의 여자 연극 배우]][[분류:대한민국의 여자 영화 배우]][[분류:한국방송공사의 아나운서]][[분류:프리랜서 아나운서]][[분류:1989년 데뷔]][[분류:대한민국의 여자 정치인]][[분류:새천년민주당 당원]][[분류:친노]][[분류:열린우리당 당원]][[분류:민주당 (대한민국, 2007년) 당원]][[분류:대통합민주신당 당원]][[분류:민주당 (대한민국, 2008년) 당원]][[분류:시민통합당 당원]][[분류:민주당 (대한민국, 2011년) 당원]][[분류:민주당 (대한민국, 2014년) 당원]][[분류:옛 더불어민주당의 정치인]][[분류:친문]][[분류:경희대학교 교수]][[분류:대한민국의 여성 기업인]][[분류:대한민국의 최고경영자]][[분류:기계 유씨]][[분류:20세기 대한민국 사람]][[분류:21세기 대한민국 사람]][[분류:서울대학교 사회과학대학 동문]][[분류:연세대학교 대학원 동문]][[분류:연세대학교 언론홍보대학원 동문]][[분류: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 동문]]
  • 유정현 (정치인)
         '''유정현'''(柳政鉉, [[1967년]] [[10월 24일]] ~ )은 [[대한민국]]의 [[아나운서]]였고, [[대한민국 제18대 국회의원 목록|제18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호(號)는 낭산(浪山)이다.
         [[분류:1967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문화 류씨]][[분류:서울반포초등학교 동문]][[분류:반포중학교 (서울) 동문]][[분류:연세대학교 음악대학 동문]][[분류:연세대학교 언론홍보대학원 동문]][[분류:1992년 데뷔]][[분류:SBS의 아나운서]][[분류:대한민국의 텔레비전 기자]][[분류:프리랜서 아나운서]][[분류:옛 새누리당의 정치인]][[분류:대한민국의 방송인]][[분류:더 지니어스 참가자]]
  • 유홍준
         [[서울특별시]]에서 태어나를 졸업하고, [[1967년]] [[서울대학교]] 미학과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학부시절 학생운동에 참여하여 무기정학을 당하고, [[군대]]에 다녀온 후에는 교도소에 수감되기도 하였다.<ref>{{뉴스 인용
         * ~ [[1967년]] ~ [[1980년]] [[서울대학교]] 미학과 학사
  • 육지수
         |사망일 = [[1967년]]
         '''육지수'''(陸芝修, [[1907년]] ~ [[1967년]])는 [[대한민국]]의 경제[[지리학]]자이자 [[서울대학교]] 지리학과 교수를 지낸 교육인이다.
         [[분류:1907년 태어남]][[분류:1967년 죽음]][[분류:옥천 육씨]][[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도쿄 대학 동문]][[분류:서울대학교 교수]][[분류:대한민국의 학자]][[분류:대한민국의 저술가]]
  • 윤재호
         '''윤재호'''(尹載皓, [[1967년]] [[3월 6일]] ~ )는 전 [[KBO 리그]] [[해태 타이거즈]], [[쌍방울 레이더스]]의 선수이다.
         [[분류:1967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KBO 리그 내야수]][[분류:KBO 리그 유격수]][[분류:해태 타이거즈 선수]][[분류:쌍방울 레이더스 선수]][[분류:동대문상업고등학교 동문]][[분류:동국대학교 동문]]
  • 윤정희(1944)
         ||<:><#237065>'''{{{#white 활동}}}'''||<#ffffff>[[1967년]] – [[현재]]||
         1967년, 영화 "[[청춘극장(1967)]]"의 오유경 역할로 화려하게 데뷔했다.[* 지금 이 영화는 원본이 소실되었으나 중국어 더빙이 남아 있다.] 이후 [[남정임]]·[[문희]]와 함께 [[1960년대]]와 [[1970년대]] 대한민국 여자 영화배우 트로이카로 큰 인기를 얻었다. 청춘극장은 1967년 팔도극장 다음의 관객을 동원했다. [[1968년]]에는 [[내시]], [[천하장사 임꺽정]], [[일본인]] 등으로, 1969년에는 [[독짓는 늙은이]], [[팔도 사나이]]로 큰 인기를 끌었다. 물론 이는 일부분일 뿐 흥행한 영화는 이보다 많다.
  • 윤찬 (1967년)
         '''윤찬'''(尹燦, [[1967년]] [[10월 17일]] ~ )은 전 [[KBO 리그]] [[LG 트윈스]]의 내야수이다.
         [[분류:1967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KBO 리그 내야수]][[분류:LG 트윈스 선수]]
  • 윤치영
         [[1964년]] [[5월 23일]] [[대한웅변협회]] 제15대 회장에 선출되었다.<ref>{{웹 인용 |url=http://daihan1949.com/new/sub_01_03.php |제목=대한웅변협회 역대 회장단 |확인날짜=2010-08-10 |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080828110706/http://daihan1949.com/new/sub_01_03.php |보존날짜=2008-08-28 |깨진링크=예 }}</ref> [[1965년]] [[5월 23일]] 다시 [[대한웅변협회]] 16대 회장으로 재선했고, [[1967년]] [[10월 21일]] 대한웅변협회장직을 사직하였다.
         서울 시장 재직 중 그는 구로, 숭인, 은평, 뚝섬 등 4개지구 4천만평에 대한 도시계획을 직접 수립하였으나 서울시의 팽창에 부정적으로 보고 있었다. 또한 경제개발 5개년 계획과 국토종합개발계획 5개년 계획을 본따 서울시 최초의 장기계획인 '시정 10개년 계획'을 수립하였으나 이는 그가 물러난 뒤 백지화된다. [[1967년]] 제7대 [[대한민국의 국회의원|국회의원]](전국구)에 당선되었고, 그해의 [[제6대 대통령 선거]]에서도 [[민주공화당 (대한민국)|민주공화당]]의 선거대책본부에서 활동하며 전국 순회유세를 다녔다.
         [[1970년]] [[12월]]과 [[1971년]] [[6월]] [[국무총리]]의 물망에 올랐으나 [[신민당 (1967년)|신민당]]의 집단 반발로 무산되었다. [[1971년]] [[미국]]을 방문, [[고든대학교]]로부터 명예[[문학]][[박사]](Doctor of Letters)학위를 받았다. [[7월 1일]] [[대통령 특별보좌관]]에 임명되었다. [[1972년]] [[10월]] [[박정희]]의 [[10월 유신]]이 발표된 후, 학생 운동권으로부터 그가 [[10월 유신]]의 원흉이라는 성토가 쏟아져나왔으나 곧 긴급조치 발표로 묻혀졌다. 이후 그는 각종 반공 척사대회와 [[이승복]] 추모행사 등에 참여하며 야당이 학생들을 선동하여 정권을 차지하는데 혈안이 되어 있다는 점과 야당은 국익보다 권력욕에 눈먼 집단이라며 야당, 학생 운동가들을 성토했다. 또한 일부 야당은 [[미국]]을 등에 업고 외세에 의존하려 든다며 질타하였다.
  • 윤치일
         ** 이복 누나: [[윤활란]](尹活蘭, [[1884년]] [[3월 9일]] - [[1967년]] [[12월 6일]], 5남 3녀를 둠)
  • 이달형(연극배우)
         '''이달형(李達炯)'''([[1967년]] [[5월 9일]] ~ )은 [[대한민국]]의 [[배우]]이다.
         [[분류:대한민국의 텔레비전 배우]][[분류:대한민국의 영화 배우]][[분류:대한민국의 배우]][[분류:1967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1997년 데뷔]]
  • 이만섭
         |임기 = [[1967년]] [[7월 1일]] ~ [[1971년]] [[6월 30일]]
  • 이문식(배우)
         || '''출생''' ||<(> [[1967년]] [[11월 13일]] ([age(1967-11-13)]세)||
  • 이백순 (1909년)
         * [[1967년]] [[12월 2일]] ~ [[1970년]] [[8월 18일]] [[강원도]] 양구군수
  • 이상백 (1904년)
         장례식은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한국사회학회, 진단학회, 대한체육회, 대한올림픽위원회 등 5개 단체가 주관한 연합장으로 주관되어 [[경상북도]] [[달성군]] 화원면(현 [[대구광역시]] 남구 화원동) 가족 묘역에 안장되었다. 묘비는 사후 1년 뒤인 [[1967년]] 그의 1주기에 세워졌는데, 묘비문은 국문학자 [[이희승]](李熙昇)이 짓고, 글씨는 이기우(李基雨)가 썼다.
         * [[성재기 (1967년)|성재기]]
  • 이상화 (시인)
         * [[시인]] [[백기만]](白基萬, [[1902년]] [[5월 12일]] 출생 ~ [[1967년]] [[8월 7일]] 사망. 아호는 목우(牧牛). [[문학]][[평론가]]로도 활동하였다.)
         * [[성재기 (1967년)|성재기]]
  • 이성부
         [[광주광역시|광주]]에서 출생하였고,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였다. [[1962년]] 《현대문학》 추천 완료로 등단하였으며, [[1967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우리들의 양식〉이 당선되었다. [[현대문학상]], 한국문학 작가상, 제18회 공초문학상을 비롯해 2011년에는 제9회 영랑시문학상과 제24회 경희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2012년 2월 28일 지병으로 별세했다.<ref>{{뉴스 인용
  • 이성희(배구감독)
         || '''생년월일''' || [[1967년]] [[9월 26일]] ||
         [[분류:1967년 출생]] [[분류:충주시 출신 인물]] [[분류:배구 선수]] [[분류:배구감독]] [[분류:1986년 데뷔]]
  • 이수자 (교육인)
         [[1967년]] 발생한 [[동백림 사건]]에 남편인 윤이상과 함께 연루되어 [[대한민국]]으로 연행되었다가 40여일 후 독일로 돌아갔다. 2007년에 대한민국으로 와서 '2007 윤이상 페스티벌' 행사에 참석했다.
  • 이안 (시인)
         | 출생일 = [[1967년]] [[5월 1일]]
         '''이안'''([[1967년]] ~ )은 대한민국의 시인이다.
         1967년 충청북도 제천에서 태어나 건국대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다. 2010년 5월 격월간 동시 전문지 『동시마중』을 창간하여 현재까지 편집위원으로 있으며, 동시 전문 팟캐스트, 이안의 동시 이야기, 다 같이 돌자 동시 한 바퀴<ref>http://www.podbbang.com/ch/8204</ref>를 진행하고 있다.
         [[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1967년 태어남]][[분류:충청북도 출신 인물]][[분류:대한민국의 시인]]
  • 이연수(배우)
         [[여담]]으로, 나이에 비해 상당히 [[동안]]이다. 2019년 만 '''49세'''다.[* 같이 불타는 청춘에 출연한 [[강수지]]([[1967년]]생)도 상당한 동안인데, 비교적 꿀리지 않는다.]
  • 이열희 (1924년)
         [[1963년]] 치과의학회 경상북도지회장에 선출되었다. [[1963년]] [[8월 1일]] [[경북대학교]] 의과대학 조교수로 재직 중, 논문 "인태아(人胎兒) [[소화기]]계의 [[점액]]선에 대한 발생학적 급조직 화확적연구"를 제출하고 [[의학]][[박사]]학위를 받았다. [[1965년]] [[3월 3일]] [[경북대]] 의대 부교수로 승진하였다. [[1967년]] [[10월]] [[대한구강악안면외과협회]] 제9차 정기총회 및 학술대회에서 부회장에 선출되어 [[1969년]] [[10월 17일]]까지 재임했다. [[치과]]전문의가 부족하다는 것을 인식한 그는 경북대 의과대학에 치의학과 재설치를 꾸준히 청원하게 됐다.
  • 이인
         * 민족반역자 색출에 있어 악질적인 괴수에 그 처벌을 국한시키는것이 필요하다는 이유로 새로운 절충안을 작성하였다.<ref>1967년 8월 16일자 [[조선일보]] 기사 발췌</ref>}}
         * [[1967년]] 제헌동지회회장
  • 이장희 (시인)
         * [[시 (문학)|시인]] [[백기만]](白基萬, [[1902년]] [[5월 12일]] 출생 ~ [[1967년]] [[8월 7일]] 사망. 아호는 목우(牧牛). [[문학]][[평론가]]로도 활동하였다.)
  • 이종구 (성우)
         |활동기간 = [[1967년]] ~ 현재
         | 활동기간 = [[1967년]] ~ [[1977년]] ([[연극배우]]) <br /> [[1977년]] ~ ([[KBS]] 15기)
         [[1967년]] [[연극배우]] 첫 데뷔하였고 [[1977년]] [[한국방송공사|KBS]] 15기 공채 성우로 정식 데뷔하였다.
         [[분류:대한민국의 남자 성우]][[분류:1950년 태어남]][[분류:대한민국의 남자 배우]][[분류:대한민국의 남자 연극 배우]][[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1967년 데뷔]][[분류:부산광역시 출신 인물]][[분류:대한민국의 남자 영화 배우]][[분류:대한민국의 남자 텔레비전 배우]]
  • 이종순 (1906년)
         |임기 = [[1963년]] [[12월 17일]] ~ [[1967년]] [[6월 30일]]
  • 이혜리 (1967년)
         '''이혜리'''([[1967년]] ~ )는 [[대한민국]]의 가수이다. 1985년 《들꽃처럼》으로 트로트계에 데뷔하여 《당신은 바보야》, 《혼자사는 여자》 등의 히트곡을 냈다.
         [[분류:1967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한민국의 여자 가수]][[분류:대한민국의 트로트 가수]][[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대한민국의 개신교도]][[분류:1985년 데뷔]]
  • 이효상
         |임기 = [[1963년]] [[12월 17일]] ~ [[1967년]] [[6월 30일]]
         |임기 = [[1967년]] [[7월 1일]] ~ [[1971년]] [[6월 30일]]
  • 장가용
          | 복무 기간 = [[1960년]] ~ [[1967년]]
  • 장익 (1933년)
         [[1963년]] 3월에 사제서품을 받은 그는 신부가 되어 사람들을 만나는 사목보다는 학자로서 많은 공부를 하였다. 그래서 많은 성직자들을 양성하는데 힘을 쏟았다. [[1967년]]에 서울대교구장 비서로써 교구장을 보좌했으며 [[1968년]]에는 [[김수환]] [[대주교]]가 서울교구장으로 부임하여 그의 비서신부가 되었다.<ref name="회화1">[http://www.kwnews.co.kr/view.asp?aid=209021900127&s=601 장익·지학순 주교 일화·사북 탄광체험 등 소개] 《강원일보》</ref> [[1968년]] 김수환 대주교가 [[추기경]]에 선출되자 당시 비서였던 장익 신부에게 소식을 처음 전하였다 한다.<ref name="회화1"/> [[1970년]]에 서울대교구 정릉성당 주임신부로 활동하였다.
  • 장인한
         * [[1967년]]
         * 1967년 《[[산불 (영화)|산불]]》, 《[[고발]]》
         * 1968년 《[[감자 (1967년 영화)|감자]]》
  • 장정은 (국회의원)
         '''장정은'''(張廷銀, [[1967년]] [[6월 21일]] ~ )은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며, 제19대 [[새누리당]] [[비례대표]] 국회의원이다. [[김현숙(1966)|김현숙]] 의원이 청와대 고용복지수석에 지명되면서 의원직을 사퇴함에 따라 비례대표 의원직을 승계했다.
         [[분류:1967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가천대학교 대학원 동문]][[분류:옛 자유한국당의 정치인]][[분류:성결대학교 교수]][[분류:홍준표]][[분류:경원대학교 동문]][[분류:부산광역시 출신 인물]][[분류:대한민국의 여자 국회의원]][[분류:인동 장씨]]
  • 장철 (1967년)
         '''장철'''([[1967년]])은 [[하이투자증권]] 수석연구위원, [[한맥투자증권]] 이사다.
         [[분류:1967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분류:대한민국의 기업인]][[분류:대한민국의 방송인]][[분류:중앙대학교 동문]]
  • 전예용
         |쪽=550~567쪽}}</ref> 이후 문교부 총무과장, 서울대학교 상과대학 강사 등을 역임했다. [[1960년]] 부흥부 장관을 거쳐 [[한국은행]] 총재가 되었다. [[1967년]] [[건설부]]장관이 되었다.
         * 1967년 : 민주공화당 총재 상의역
  • 전재용
         * 조부: [[전상우]](全相禹, [[1893년]] ~ [[1967년]])
         *** 사촌동생: 전유정([[1967년]] ~)
  • 전태일
         [[1966년]] [[8월 17일]] 평화시장 2층 244호에 있는 점퍼, 의류 공장인 [[한미사]] 재단보조로 취직하였다가, 그해 말 [[한미사]]의 재단사가 사장과의 갈등으로 해고당한 뒤 새로 재단사 자리에 올랐다. [[1967년]] [[2월]] 초 무렵 하숙하고 있던 집의 딸과 연애하였으나, 돈 문제 등으로 어머니에게 죄책감을 느낀 그는 연애를 포기하게 되었다.
         그는 공장 노동자 생활 중에도 고등학교 복학을 꿈꿨고, [[1967년]] [[2월 20일]] 자신의 바지와 하숙방에 있던 곤로를 팔아 연합중고등 통신강의록 <중학 1>권을 1백50원에 산다. 수중에 남은 15원으로 10원짜리 노트를 산 뒤 전화비 5원을 주머니에 남겨두고 3일간 금식하였다. 당시 한 쪽지에 그는 "내일부터 23일까지 금식이다. 설마 3일 금식에야 죽지 않겠지. 정신수양의 금식이야. 먹을 게 없어서가 아니다. 그런데 왜 콧잔등이 시큰해오고 눈물이 나는지 모르겠구나." 그리고 "내년 3월에는 꼭 대학입시를 보자. 앞으로 3백76일 남았구나. 하루에 2시간씩 공부하면 내년에는 대학입시를 볼 수 있겠지."라는 내용을 적어두었다.
         당시 [[신민당 (1967년)|신민당]] 대통령 후보였던 [[김대중]]은 [[1971년]] [[1월 23일]] 연두 기자회견에서 '전태일 정신의 구현'을 공약으로 발표하기도 했다.<ref>조영래, 《전태일 평전》 (돌베개, 1998) 27쪽</ref> 이후 [[신민당 (1967년)|신민당]]은 노동 운동에 호의적인 정책을 펼쳤고, 노동자 시위는 경찰과 정부의 탄압을 피해 [[신민당 (1967년)|신민당]]의 당사로 피신하는 일도 종종 발생하였다.
  • 정성태
         |임기 = [[1967년]] 7월 1일 - [[1971년]] 6월 30일
         |소속정당 = [[신민당 (1967년)|신민당]]
         |소속정당 = [[신민당 (1967년)|신민당]]
  • 정인숙 (1945년)
         [[1991년]] 소송 당시 정성일은 "어릴 때부터 외할머니와 외삼촌으로부터 [[정일권]] 씨가 [[1967년]] 어머니와 교제해 다음해 나를 낳았다는 얘기를 들었다"며 친자확인 소송을 제기했다.<ref name="hp107"/>
         [[1991년]] [[6월 5일]] 정성일은 [[서울가정법원]]에 [[정일권]]을 상대로 친자 확인소송을 제기하였다.<ref name="hp107"/> 정성일은 "어릴 때부터 외할머니와 외삼촌으로부터 [[정일권]] 씨가 [[1967년]] 어머니와 교제해 다음해 나를 낳았다는 얘기를 들었다"며 친자확인 소송을 제기했다. 그러나 [[6월 27일]] 외삼촌 정종구의 권유로 소송을 취하하고 다음날 다시 [[미국]]으로 출국했다.<ref name="hp107"/>
  • 정재안
         '''정재안'''(鄭宰安, [[1967년]] [[01월 15일]] ~ )는 [[대한민국]]의
         [[분류:1967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분류:성공회대학교 동문]]
  • 정종권 (정치인)
         |출생일 = [[1967년]]
         '''정종권''' ([[1967년]] ~)는 [[부산광역시]] 출생으로 전 [[민주노동당 (대한민국)|민주노동당]] 서울시당 위원장을 역임하였고, [[진보신당]] 입당 이후에는 집행위원장을 역임하였다. 현재 진보신당 부대표를 맡고 있다.
         [[분류:1967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부산광역시 출신 인물]][[분류:서울대학교 인문대학 동문]][[분류:대한민국의 정치인]][[분류:진보신당 당원]][[분류:건설국민승리21]][[분류:민주노동당 (대한민국) 당원]]
  • 정진(1941)
         그는 [[동국대학교]] 연극영화학과를 중퇴하였으나 연극연출가 [[이해랑]](李海浪)에게 픽업되어 [[1962년]] [[연극배우]]로 첫 데뷔를 하였고 5년 후 [[1967년]] [[동양방송|TBC 동양방송]] 특채로 [[텔레비전 드라마]]에 첫 출연하였으며 [[영화배우]] 데뷔는 [[1973년]] [[영화|사극 영화]] 《오타 줄리아와 도꾸가와 이에야스》로 데뷔하였다. 이후 [[1984년]] [[문화방송|MBC 문화방송]] 사극 [[텔레비전 드라마|드라마]] 《[[설중매 (드라마)|설중매]]》에서 [[한명회]](韓明澮) 역을 배역하여 [[1985년]] 제23회 [[백상예술대상]]에서 TV부문 연기상을 수상하였다.
  • 정호용
         하나회가 다시 전두환 파벌과 [[윤필용]] 파벌로 나뉠 때 그는 [[전두환]] 파벌에 가담하였다. 그 뒤 군 복무 중 [[서울대학교]] 대학원에 진학하여 1963년에 [[공학]][[석사]] 학위를 받았다. 그 뒤 육군본부 인사장교를 거쳐 중령으로 재직 중 1965년 [[대한민국 육군대학|육군대학]]에 입교하여 1967년에 수료하였다. 같은 해 1967년에는 육군본부 진급계장을 거쳐 수직이동하여 육본 진급과장으로 승진했다.
         * [[1967년]] [[대한민국 육군대학|대한민국 육군대학교]] 졸업
  • 정훈희 (가수)
         |활동시기 = [[1967년]] ~ 현재
         |데뷔일 = [[1967년]] <ref name="daum">{{웹 인용|url=http://music.daum.net/artist/main?artistDetailId=1424|title=다음 프로필}}</ref>
         정훈희는 피아니스트였던 아버지 정근수와 밴드 마스터였던 작은 아버지, 기타리스트인 큰 오빠 정희택 등 음악과 인연이 깊은 집안에서 태어났다. 가수 [[김태화]]의 부인이고 가수 [[J (가수)|J]]의 고모다. 이후 당대 최고 작곡가 [[이봉조]]와 인연으로 그로부터 곡 〈안개〉를 받아 1967년 가수로 데뷔하였다.<ref name="star" /> 그녀는 1970년 제1회 도쿄국제가요제에서 가수상을 받았고 이듬해 아테네국제가요제에서는 곡 〈너〉로써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수상했다. 1975년 칠레가요제에서는 곡 〈무인도〉로서 3위 상과 최고가수상을 동시에 받았다. 1975년, 대마초 파동에 연루되어 방송 출현을 정지당했다. 81년 규제가 풀렸지만 재기 무대도 순탄하지 못했으나 곡 〈꽃밭에서〉로 말미암아 제2 전성기를 맞이하였다.<ref name="kukinews">{{웹 인용|url=http://missionlife.kukinews.com/article/read.asp?gCode=all&arcid=0005493307&code=23111411|title=가수 정훈희의 노래 그리고 신앙… “다시 태어난다고 해도 나는 가수”|publisher=missionlife.kukinews.com|accessdate=2012-03-14}}{{깨진 링크|url=http://missionlife.kukinews.com/article/read.asp?gCode=all&arcid=0005493307&code=23111411 }}</ref> 한창 대한민국 대표급 가수로서 거듭나던 가수 [[김태화]]와 혼인하고서 임신한 상태로 앨범 《우리는 하나》를 남편과 녹음하기도 했고 약 30여 년만인 [[2008년]]에 독집 앨범 《40th Anniversary Celebrations》을 발매하였다.
  • 조갑경
         '''조갑경'''(趙甲卿, [[1967년]] [[8월 12일]] ~ )은 [[대한민국]]의 [[가수]]이다.
         [[분류:대한민국의 여자 뮤지컬 배우]][[분류:비디오 자키]][[분류:대한민국의 라디오 진행자]][[분류:1967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1986년 데뷔]][[분류:안동시 출신]][[분류:서울예술대학교 동문]][[분류:골든디스크 신인상 수상 음악가]]
  • 주호성
         | 활동기간 = 1967년 ~ 현재
         [[1967년]] [[연극배우]]로 첫 데뷔를 한 그는 [[1969년]] [[한국방송 성우극회|KBS]] 공채 11기 [[성우]] 정식 데뷔 이후 [[1984년]]부터는 본격 배우로도 활동을 재개하고 있다.
         [[분류:1950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한민국의 남자 영화 배우]][[분류:대한민국의 남자 연극 배우]][[분류:대한민국의 연극인]][[분류:창극 배우]][[분류:1967년 데뷔]][[분류:대한민국의 남자 뮤지컬 배우]][[분류:대한민국의 남자 성우]][[분류:중앙대학교 동문]][[분류:대한민국의 개신교도]][[분류:고창군 출신]]
  • 지수원
         출생 [[1967년]] [[6월 18일]] ([age(1967-06-18)]세) [[전라북도]] [[부안군]][* 프로필상 69년으로 되어있으나 실제 나이는 67년생.]
         [[분류:한국 여배우]][[분류:1967년 출생]][[분류:1988년 데뷔]][[분류:부안군 출신 인물]]
  • 최덕종(1917)
         '''최덕종'''(崔德鍾, [[1917년]] [[5월 20일]] ~ [[1967년]] [[5월 29일]])은 [[한국의 독립 운동|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이다. 본관은 [[해주 최씨|해주]](海州). 호(號)는 산남(山南).
         [[분류:건국훈장 애족장 수훈자]][[분류:1917년 태어남]][[분류:1967년 죽음]][[분류:경산시 출신 인물]][[분류:해주 최씨]][[분류:대한민국의 반일 감정]][[분류:대한민국의 반공주의자]][[분류:경산초등학교 (경북) 동문]][[분류:대한민국의 장로교도]][[분류:대한민국의 별정직공무원]][[분류:한국독립당]]
  • 최만린
         [[1961년]] 27세에 국전 추천작가, [[1967년]]부터 서울대에 출강, [[1972년]]부터 국전 심사위원, 운영위원을 거쳤다.
         * 미국 뉴욕 [[프랫 대학교|프랫 인스티튜트(Pratt Institute)]] 미술학과 학사(1967년)
         * [[1967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조소과 교수.
  • 최불암
         || '''데뷔''' ||<(> [[1967년]] [[KBS]] [[드라마]] '수양대군' ||
         연극배우 시절에는 별로 유명세를 못 탔다. 당시는 외모가 연극배우의 척도 중 하나였는데, 거기에서 마이너스 요인이 되었던 것이다. 그때문에 한때 죽음을 생각하기도 했다고...[* 그래서 괜히 자살한 연예인들을 질타하는게 아니다. 다 경험에서 우러나오고 그걸 극복한 연륜이 있어서이다.] 1967년 27살의 나이에 KBS 2기 탤런트로 데뷔하여 처음 맡은 역할이 [[김종서]] 장군, 그것도 계유정난 당시의 노년 역할이었다(;;). 이후로 줄곧 노역으로 승부수를 던지게 되었다고... MBC에서 방영된 [[제1공화국(드라마)|제1공화국]], [[제2공화국(드라마)|제2공화국]]에서는 아예 [[이승만]] 역할을 맡아 화제에 오르기도 했다.(제2공화국은 그렇다 치고, 제1공화국 당시에는 40세의 나이에 80대였던 이승만 역을 맡았다...--그래도 20대 중반의 나이에 [[요시다 시게루]] 역을 맡은 이계인이나, [[최동열|50대 중반에 가쿠란을 입고 대학생 역할을 한]] 정동환만 하겠냐만--) [* 이 이승만 역이 굉장했던 것이, 이후에 어느 배우가 이승만을 연기해도 이승만 자신이 아닌, 최불암의 이승만 연기를 따라하게 되었다... 그나마 최불암의 이승만 연기 아성에 근접한 분은 [[권성덕]].]
         [[분류:논산시 출신 인물]][[분류:한국 남배우]][[분류:1940년 출생]][[분류:1967년 데뷔]][[분류:1대 100 역대 1인]][[분류:대한민국 국회의원]]
  • 최서일
         |임기 = [[1963년]] [[12월 17일]] ~ [[1967년]] [[6월 30일]]
  • 최성 (1928년)
         * [[1967년]] 《[[수라문의 혈투]]》
         * [[1967년]] 《[[팔도강산]]》
         * [[1967년]] 《[[강명화]]》
         * [[1967년]] 《[[장렬 509 대전차대]]》
  • 최성(배우)
         * [[1967년]] 《[[수라문의 혈투]]》
         * [[1967년]] 《[[팔도강산]]》
         * [[1967년]] 《[[강명화]]》
         * [[1967년]] 《[[장렬 509 대전차대]]》
  • 최수원 (야구인)
         '''최수원'''(崔秀原, [[1967년]] [[8월 3일]] ~ )은 전 [[KBO 리그]] 심판 위원이다. 야구선수 (故) [[최동원]]의 친동생이다.
         [[분류:1967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부산광역시 출신 인물]][[분류:경남고등학교 동문]][[분류:동아대학교 동문]][[분류:대한민국의 야구 심판]]
  • 최윤수(정무직공무원)
         [[분류:대한민국의 법조인]][[분류:김천시 출신 인물]][[분류:1967년 출생]]
         1967년
         [[1967년]]에 [[경상북도]] 금릉에서 태어났다. 1984년 부산 [[내성고등학교]]를 졸업했고, 1989년 [[서울대학교]] [[서울대학교/학부/법과대학|법학과]]를 졸업하였다(서울법대 84학번). 1996년에는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법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 최은숙 (배우)
         | 활동기간 = [[1967년]] ~ 현재
         * [[1967년]] 연극 배우 데뷔
         [[분류:1948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한민국의 여자 연극 배우]][[분류:진주시 출신]][[분류:대한민국의 여자 배우]][[분류:1967년 데뷔]][[분류:대한민국의 여자 텔레비전 배우]][[분류:대한민국의 여자 영화 배우]][[분류:대한민국의 불교 신자]]
  • 최훈재
         '''최훈재'''(崔勳載, [[1967년]] [[1월 21일]] ~ )은 전 [[KBO 리그]] [[두산 베어스]]의 [[내야수]], [[외야수]], [[지명타자]]이자, 현재 [[KBO 리그]] [[kt 위즈]]의 2군 야수코치이다.
         [[분류:1967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분류:KBO 리그 내야수]][[분류:KBO 리그 1루수]][[분류:KBO 리그 외야수]][[분류:KBO 리그 우익수]][[분류:KBO 리그 지명 타자]][[분류:MBC 청룡 선수]][[분류:LG 트윈스 선수]][[분류:해태 타이거즈 선수]][[분류:두산 베어스 선수]][[분류:서울영일초등학교 동문]][[분류:20세기 대한민국 사람]][[분류:21세기 대한민국 사람]][[분류:중앙중학교 (서울) 동문]][[분류:중앙고등학교 동문]][[분류:단국대학교 동문]][[분류:강릉 최씨]][[분류:1988년 하계 올림픽 야구 참가 선수]][[분류:대한민국의 올림픽 야구 참가 선수]]
  • 키시베 이토쿠
         | 활동기간 = [[1967년]] ~
  • 피수영
         | 복무 기간 = [[1967년]] ~ [[1975년]]
         * 1967년 3월 ~ 1972년 2월 : [[서울대학교병원]] 소아과 전공의
  • 하성란
         | 출생일 = [[1967년]]
         '''하성란'''(河成蘭, [[1967년]] [[서울]] ~)은 대한민국의 소설가이다.
         [[분류:1967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한민국의 소설가]][[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분류:동인문학상 수상자]][[분류:한국일보문학상 수상자]][[분류:현대문학상 수상자]][[분류:오영수문학상 수상자]]
  • 한규복 (1881년)
         '''한규복'''(韓圭復, <small>일본식 이름:</small> 井垣圭復, [[1885년|1881년]] [[7월 7일]] ~ [[1967년]] [[9월 13일]])은 [[대한제국]]의 관료, 통역관, 화가, 서예가이자 [[일제 강점기]]의 관료, 화가, 서예가로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도 지냈다. [[일제 강점기]]의 신념형 친일파의 한 사람이었다.
         [[1950년]]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대구로 갔다. 한동안 한국곡자 운영과 종친회 일 이외에는 사양하며 칩거하였다. [[1960년]] [[7월 2일]]에는 주간종합잡지 [[주간대중]](週刊大衆) 지의 동인이자 필진으로 참여하였다.<ref>"週刊大衆" 創刊, 동아일보 1960년07월 02일자 4면, 생활/문화면</ref> [[1967년]] [[9월 13일]] [[서울]]에서 사망했다.
         [[분류:1881년 태어남]][[분류:1967년 죽음]][[분류:조선의 화가]][[분류:대한제국의 관료]][[분류:대한제국의 통역관]][[분류:조선의 번역가]][[분류:일제 강점기의 관료]][[분류:일제 강점기의 화가]][[분류:일제 강점기의 기업인]][[분류:일제 강점기의 정치인]][[분류:일제 강점기의 사회 운동가]][[분류:일제 강점기의 철학자]][[분류:조선총독부 중추원 간부]][[분류:사상가]][[분류:대한민국의 기업인]][[분류:대한민국의 화가]][[분류:대한민국의 언론인]][[분류:대한민국의 철학자]][[분류:친일파 708인 명단 수록자]][[분류:친일인명사전 수록자]][[분류:대한민국 정부 발표 친일반민족행위자]][[분류:청주 한씨]][[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분류:와세다 대학 동문]][[분류:대한민국의 번역가‎]]
  • 한덕수 (1907년)
         [[경상북도]]에서 태어나 [[1927년]] 성악가가 되려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니혼 대학]] 중퇴후 노동운동에 참가했다. [[1934년]] 조선인 노동자의 파업을 이끌었다가 체포됐다. [[1945년]] [[10월 15일]]에 결성된 재일본조선인련맹(조련)에 참가해 총무부 담당 위원에 선출됐다. [[1955년]] [[5월 25일]] [[재일본조선인총련합회]] 결성후 의장단 6명에 포함됐다. [[1958년]] 5월 제4회 전체대회에서 의장단이 해체되고 단일 의장, 부의장제가 도입되자 의장에 선출됐다. 2001년 사망할 때까지 중앙위원회 의장으로 있었다. [[1967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됐다. [[1972년]]에는 [[노력영웅]] 칭호를 받았다. [[1994년]] [[김일성]]이 죽었을 당시 기준으로 서열 4위였다.
  • 허근욱
         1965년 한국부인회 중앙위원회 위원이 되고, 1967년 [[황애덕]] 등 [[3.1 만세 운동]] 관련자 및 투옥,수감된 독립운동가 및 그 유가족들이 중심으로 조직된 3.1여성동지회 중앙위원회 위원으로도 위촉되었다. 1968년 한국여성유권자연맹 이사, 1969년 국제직업여성연맹 한국측 이사, 1980년 한국여성단체협의회 중앙위원회 위원 겸 편집위원 등으로도 활동하였다.
         * [[1967년]] [[3.1여성동지회]] 중앙위원회 위원
  • 허원제 (1951년 9월)
         * [[1967년]] [[부산중학교]] 졸업
  • 홍병선
         '''홍병선'''(洪秉璇, [[1888년]] [[11월 6일]] ~ [[1967년]] [[7월 19일]])은 [[한국]]의 [[감리교]] [[목사]]이다. 호는 목양(牧羊). 사학자 [[홍이섭]]의 아버지이다.
         [[분류:1888년 태어남]][[분류:1967년 죽음]][[분류:일제 강점기의 목회자]][[분류:일제 강점기의 교육인]][[분류:대한민국의 목회자]][[분류:대한민국의 대학 강사]][[분류:친일인명사전 수록자]][[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분류:도시샤 대학 동문]][[분류:남양 홍씨 (당홍)]]
  • 홍세화
         그러나 [[1967년]] [[10월]] 자퇴하였다. 그 뒤, 다시 재수하여 [[1969년]]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외교학과에 입학하였고, 이후 문리대에서 연극반 활동을 하였다. [[1972년]]에 '민주수호선언문' 사건으로 제적되었다가, 다시 복학하였으며, [[1977년]]에 [[서울대학교]] 사회과학대학<ref>동숭동에서 관악캠퍼스로 이전하면서 사회과학대학 소속으로 변경</ref> 외교학과를 졸업하였다.
  • 홍창선
         * [[1967년]] [[연세대학교]] 기계공학 학사 및 석사.
  • 황종률 (정치인)
         * 1966년 ~ 1967년 : 무임소 장관
         * 1967년 : 체신부 장관
         |임기 = [[1966년]] [[12월 27일]] ~ [[1967년]] [[10월 3일]]
         |임기 = [[1967년]] [[10월 3일]] ~ [[1968년]] [[5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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