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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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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희근 (1929년) . . . . 6회 일치
         * 1955년 공군 제1전투훈련비행전단 제1훈련비행대대 예하 편대장 재직시에 [[대한민국 공군|공군]] [[소령]] 진급(1955년 6월).
         * 1955년 공군 소령 진급 1개월만에 공군본부 감찰감실 작전장교 보임(1955년 7월).
         * 1955년 공군본부 감찰감실 작전장교 보임 3개월만에 공군 제10전투비행전단 제104훈련비행대대 예하 항공전투기편대장 보임(1955년 10월).
  • 정몽헌 . . . . 6회 일치
         |배우자 = [[현정은 (1955년)|현정은]]
         |날짜=2003-08-04}}</ref><ref>[http://news.naver.com/main/hotissue/read.nhn?mid=hot&sid1=101&cid=389123&iid=157543&oid=001&aid=0002957649&ptype=011 재벌총수만 두 번째…유력인사 왜 자살할까 :: 네이버 뉴스<!-- 봇이 따온 제목 -->]</ref> 재계 인사들은 '부친의 숙원 사업이었던 대북 사업 등 가업을 제대로 잇지 못한 것이 자살을 선택하게 된 동기'로 추측했다.<ref>[http://www.ilyoseoul.co.kr/show.php?idx=88364&table=news_economy&table_name=news_economy&news_sec=003 삼성家 아픈 역사… ‘비운의 황태자’ 만들었나?]</ref> 정몽헌의 사망 후 부인 [[현정은 (1955년)|현정은]]이 현대그룹 회장에 취임하였다.
         *** 배우자 : [[현정은 (1955년)|현정은]] (1955 ~ )
         |후임자 = [[현정은 (1955년)|현정은]]
         |후임자 = [[현정은 (1955년)|현정은]]
         |후임자 = [[현정은 (1955년)|현정은]] (그룹 회장)
  • 현이와 덕이 . . . . 5회 일치
         |구성원 = [[장덕]]<br /> [[장현 (1955년)|장현]]
         1975년 [[미8군부대]]에서 데뷔한 [[장현 (1955년)|장현]](1956~1990)과 [[장덕]](1961~1990)은 이듬해인 1976년 현이와 덕이를 결성하고 한국 가요계에 데뷔한다.<ref>{{뉴스 인용 |제목 = 두엣 현이와 덕이 순진한 아이 취입|url =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78052300329208014&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78-05-23&officeId=00032&pageNo=8&printNo=10044&publishType=00020|출판사 = 경향신문|날짜 = 1978년 5월 23일}}</ref> 이들은 《선생님 안녕》, 《우리들의 고교시대》, 《내마음 나도몰라》, 《꿈초올 둘이서》등과 같은 영화에도 출연하였다.(이들 남매는 10여편의 영화에 주연 또는 조연으로 출연하여 하이틴스타로서 많은 인기를 누렸다.) 특히 [[장덕]]은 작사,작곡 능력이 뛰어나 싱어송라이터로 입지를 굳히게 되었다.
         | 가족 = 오빠 [[장현 (1955년)|장현]], 아버지 장규상, 어머니 이숙희
         === 듀엣 음반 with [[장현 (1955년)|장현]] (현이와 덕이 음반) ===
         * [[장현 (1955년)|장현]]
  • 박준규(1925) . . . . 4회 일치
         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경상북도 [[달성군]]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조재천]]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58년 [[제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1955년)|민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자유당]] [[김성곤]]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자유민주연합|자민련]] 후보로 대구광역시 [[중구(대구)|중구]] 선거구에 출마하여 [[신한국당]] [[유성환]] 후보를 꺾고 당선되었다. [[박철언]]과 함께 자민련 내 대구경북세력을 대표했으며, 1997년 [[제15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DJP 연합을 성사시키는 데 적극적으로 앞장섰는데, 이는 박준규가 1공화국과 2공화국 시절 [[김대중]]과 함께 [[민주당(1955년)|민주당]]에 몸을 담고 친밀한 관계를 맺어온 데 기인한다.~~하지만 김대중은 신파, 박준규는 구파~~ [[대한민국 제3공화국|제3공화국]]이 출범하면서 박준규는 여당으로, 김대중은 야당으로 진로를 달리 했지만 인간관계는 계속 유지되었다. 박준규의 활약은 대구경북에서 [[김대중]]의 득표율이 상승하는 데(8.7%에서 13.1%로 상승) 기여했다. 이러한 공로에다 김대중과의 친밀한 관계 덕분에 15대 국회 후반기 국회의장 선거에서 공동여당인 [[새정치국민회의|국민회의]]와 [[자유민주연합|자민련]]의 국회의장 단일후보로 지명되었고, [[경선]]에서 무려 3차 투표까지 간끝에 당시 [[한나라당]]의 반란표가 쏟아져 나오며 국회의장에 당선될 수 있었다. 박준규는 이로써 의정 사상 최초로 국회의장 3선의 고지에 올랐다. 반면 [[한나라당]]은 [[오세응]]이 후보로 출마하였으나 패배하고 [[조순(1928)|조순]] 총재 이하 지도부 전원이 국회의장 선거 패배의 책임을 지고 총사퇴하는 후유증을 겪어야 했다.
         || 1958 || [[제4대 국회의원 선거]] (경북 10선거구)[* 달성] || [[민주당(1955년)|민주당]] || 8,805 (27.24%) || 낙선 (2위) || ||
         || 1960 || [[제5대 국회의원 선거]] (민의원, 경북 10선거구) || '''[[민주당(1955년)|민주당]]''' || '''20,835 (71.64%)''' || '''당선 (1위)''' || '''초선''' 1960년 탈당[br]신민당 창당[br]1961.5.16 자격정지[br]([[5.16 군사정변]]) ||
  • 정호용 . . . . 4회 일치
         |복무기간 = 1955년~1985년
         [[한국 전쟁]]에 참전하여 자원 입대한 이후 [[대한민국 육군사관학교|육군사관학교]]에 진학했고 1955년에 육군사관학교를 졸업(11기)하였다. [[전두환]], [[노태우]]의 육사 동기로 [[12.12 군사 반란]]과 [[5·17 쿠데타|5.17 비상계엄 확대조치]], [[5.18 광주 민주화 운동]] 진압에 가담했다. 12·12 군사 반란 이후 [[대한민국 육군 특수전사령부|특전사]] 사령관, [[제3야전군]] 사령관, [[대한민국 육군#역대 참모총장|제25대 육군 참모총장]]을 역임하였으며, 육군 대장으로 예편하였다. 예편 이후에는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 상임위원회 위원, [[민주정의당]] 대구경북지구당 위원장, [[대한민국 국방부|국방부]] 장관과 [[대한민국 행정안전부|내무부]] 장관을 역임하였다. [[대한민국 제5공화국|제5공화국]]에서 군부 인맥의 서열 3순위였으나, [[대한민국 제6공화국|제6공화국]] 무렵 노태우와의 경쟁 끝에 몰락하였다.---노태우와 정호용은 경쟁한적이 없습니다. 정호용은 김윤환과 더불어 노태우의 최측근으로 6공의 실세중의 실세였습니다.
         [[대구광역시|대구]]에서 출생한 그는 [[경북고등학교]]를 졸업했다. 후일 육사의 동기가 되는 [[노태우]]는 경북고등학교 시절부터 알고 지낸 오랜 친구이자 동창이었다. 1951년에 경북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한국 전쟁]] 중 육군에 병사로 입대하여 참전하였다. 그 뒤 육군사관학교에 입교, 1955년 육군사관학교를 11기로 졸업하고 육군 소위로 임관했다. 전두환, 노태우가 육사 11기 동기생이며 이후 전두환, 노태우 등과 사적 모임인 [[하나회]] 조직에 참여하였다.
         * [[1955년]] [[대한민국 육군사관학교|대한민국 육군사관학교 11기]] 문학 학사 졸업
  • 김기철 . . . . 3회 일치
         [[8.15 광복]] 후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충주군 청년연맹위원장, 대동청년단 충주군단장 등을 역임하였다. 1948년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서 [[대동청년단]] 후보로 충청북도 충주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무소속 [[조대연]]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자유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현역]] [[지역구]] [[대한민국 국회의원|국회의원]]인 무소속 조대연 후보를 꺾고 당선되었다. 그러나 이후 [[이승만]] [[대한민국 대통령|대통령]]의 독재에 반대하여 자유당을 탈당하여 [[민주당(1955년)|민주당]]에 입당하였다. 1958년 [[제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충청북도 충주시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자유당 홍병각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 1958 || [[제4대 국회의원 선거]] (충청북도 충주시) || [[민주당(1955년)|민주당]] || - || 낙선 || ||
         || 1960 || [[제5대 국회의원 선거]] (충청북도 [[충주시]]) || [[민주당(1955년)|민주당]] || - || '''당선''' || ||
  • 김영환(1955) . . . . 3회 일치
         || '''출생일''' ||[[1955년]] [[5월 27일]] (만 [age(1955-05-27)]세) ||
         1955년 [[충청북도]] [[괴산군]]에서 태어났다. [[청주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 그리고 [[연세대학교]] [[치과대학]]에 입학했으나 노동운동에 뛰어들어 총 2번의 제적을 당하고 [[긴급조치]] 제9호 위반 등으로 복역하는 등 고초를 겪었다. 그 사이에 각종 자격증을 취득하여 전기기술자로 일하면서 시인으로 활동하였는데 발간한 시집이 베스트셀러에 오르기도 하였다. 1988년 연세대학교 치과대학을 졸업했다. 이후 [[치과의사]]로 개업하였다.
         [[분류:대한민국 국회의원]][[분류:의사]][[분류:괴산군 출신 인물]][[분류:1955년 출생]]
  • 담철곤 . . . . 3회 일치
         '''담철곤'''(譚哲坤, [[1955년]] [[6월 6일]] ~ )은 [[오리온그룹]] 회장을 맡고 있는 [[대한민국]]의 [[기업인]]이다. <ref>[http://www.businesspost.co.kr/news/articleView.html?idxno=17174 담철곤 오리온그룹 회장]. 비즈니스포스트</ref>
         담철곤의 할아버지가 [[중화민국]]에서 한국으로 이주했고, 담철곤은 1955년 [[대구광역시|대구]]에서 한의원을 운영하던 [[화교]] 집안에서 태어났다.
         [[분류:1955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분류:한국켄트외국인학교 동문]][[분류:조지 워싱턴 대학교 동문]][[분류:오리온그룹]][[분류:대한민국의 기업인]][[분류:중국계 한국인]]
  • 이기광 (법조인) . . . . 3회 일치
         '''이기광'''(李起光, 1955년 ~)는 [[울산지방법원]]장을 역임한 법조인이다.
         1955년 [[대구광역시]]에서 태어나 [[대구고등학교]]와 [[영남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하고 1983년 제25회 사법시험 합격하여 [[사법연수원]] 15기를 수료했다. 1986년 [[전주지방법원]] 군산지원 판사에 임용되어 1987년 [[대구지방법원]] 김천지원 1990년 [[대구지방법원]] 1996년 [[대구고등법원]] 1999년 [[대구지방법원]]에서 판사를 하다가 2001년에 대구지방법원 부장판사에 임명되어 2008년 [[대구고등법원]]을 거쳐 2011년까지 재판장을 하였으며 2012년에는 [[대구고등법원]] 수석부장판사에 임명되어 2015년 2월까지 보임하였다. [[대구고등법원]]에서 수석부장판사에 임명된 2012년 2월에 경상북도 선거관리위원회 위원장을 겸직하였으며 2015년에는 [[대구고등법원]] 부장판사에 임명되어 1년동안 재판장을 하였다. 2016년 2월 법원 정기인사에서 법원장으로 승진하여 2년동안 제18대 [[울산지방법원]]장에 임명되면서 제20대 울산광역시선거관리위원회 위원장을 겸직하였다. 울산지방법원장을 끝으로 30년이 넘는 공직자 생활을 마치면서 퇴임식에서 "아내로서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묵묵히 저를 뒷바라지하면서 삼남매를 훌륭히 키워 준 제 아내, 무등 한 번 태워 주지 못했고, 손잡고 봄길 한 번 함께 걸어 보지못했다."며 아쉬워했다.<ref>로이슈 2018년 2월 12일자</ref>
         [[분류:1955년 태어남]][[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분류:대구고등학교 동문]][[분류:영남대학교 동문]][[분류:대한민국의 판사]][[분류:대한민국의 지방법원장]][[분류:대한민국의 고등법원장]][[분류:대한민국의 변호사]]
  • 이철우(1955) . . . . 3회 일치
         [[분류:대한민국 국회의원]][[분류:김천시 출신 인물]][[분류:1955년 출생]][[분류:대한민국의 자치단체장]]
         ||<height=40><bgcolor=#C9151E> {{{#FFFFFF ''' 출생 ''' }}} ||<(><bgcolor=#FCFEFE> [[1955년]] [[8월 15일]] ([age(1955-08-15)]세)[br][[경상북도]] [[김천시]] ||
         1955년 [[경상북도]] [[김천시]]에서 태어났다. 김천 곡송국민학교, 대구 [[영남중학교(대구)|영남중학교]], [[김천고등학교]], [[경북대학교]] [[사범대학]] 수학교육과를 졸업했다. 이후 상주 화령중학교, 의성 신평중학교와 단밀중학교 수학 [[교사]]를 역임하였다가 1985년 [[국가안전기획부]] 공채에 합격하여 정보공무원으로 근무했다. 이후 2005년 말부터 2008년 초까지 [[이의근]] 도지사와 [[김관용]] 도지사 밑에서 경상북도 정무부지사를 역임했다.
  • 하춘화 . . . . 3회 일치
         || 출생 ||[[1955년]] [[6월 28일]] ([age(1955-06-28)]세) [[전라남도]] [[영암군]] [br] 게자리/양띠||
         대한민국의 원로급 가수이다. [[1955년]] [[6월 28일]]생. 하춘화가 대단한 이유는 데뷔년도가 6살 때인 [[1961년]] 인지라, [[2015년]] 기준으로 '''나이는 환갑인데 가수 경력은 55년차'''라는 점이다. 참고로 하춘화가 데뷔한 해는 [[박정희]]가 [[5.16 군사정변]]으로 정권을 잡은 그 해이다. 처음 데뷔했을 때 엄청난 인기를 모으고 있었는데, 엘자 렁히니나 [[다코타 패닝]] 저리가라 급으로 큰 인기를 끌었다. 다만 엘자 렁히니와의 차이점은 어른이 되어서 인기가 죽어버린 엘자 렁히니와는 달리 하춘화는 늙어도 인기가 변함이 없다는 점이다. 대한민국 가요계에서 남자 가수로서 레전드가 [[조용필]]이라면 여자 가수로서 레전드는 하춘화였던 것이다.
         [[분류:영암군 출신 인물]][[분류:1955년 출생]][[분류:1961년 데뷔]]
  • 강진(가수) . . . . 2회 일치
         [[1955년]] [[3월 3일]]생. [[종교]]는 [[불교]]다.
         [[분류:한국 남가수]][[분류:영암군 출신 인물]][[분류:1955년 출생]][[분류:1986년 데뷔]]
  • 김관용 . . . . 2회 일치
         |후임 = [[이철우 (1955년)|이철우]]
         |후임자 = [[이철우 (1955년)|이철우]]
  • 김대진 (야구인) . . . . 2회 일치
         '''김대진'''(金大鎭, [[1955년]] [[12월 22일]] ~ )는 전 [[KBO 리그]] [[삼미 슈퍼스타즈]], [[OB 베어스]]의 외야수이자, 현재 [[SK 와이번스]]의 3군 루키 책임코치이다.
         [[분류:1955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분류:KBO 리그 외야수]][[분류:KBO 리그 1루수]][[분류:KBO 리그 2루수]][[분류:KBO 리그 좌익수]][[분류:KBO 리그 우익수]][[분류:대한민국의 야구 선수]][[분류:삼미 슈퍼스타즈 선수]][[분류:OB 베어스 선수]][[분류:대구삼덕초등학교 동문]][[분류:경복중학교 동문]][[분류:경북고등학교 동문]][[분류:연세대학교 교육과학대학 동문]]
  • 김석형 (역사학자) . . . . 2회 일치
         * 1955년 11월 [[김일성종합대학]] 교수
         * 1955년 11월 사회과학원 역사연구소 소장
  • 서정환 . . . . 2회 일치
         '''서정환'''(徐定煥, [[1955년]] [[7월 5일]] ~ )은 전 [[KBO 리그]] [[삼성 라이온즈]]와 [[해태 타이거즈]]의 [[유격수]]였다. 현재는 [[KBO (야구)|KBO]]의 대구 감독관이다.
         [[분류:KIA 타이거즈 감독]][[분류:삼성 라이온즈 감독]][[분류:해태 타이거즈 선수]][[분류:삼성 라이온즈 선수]][[분류:KBO 도루상 수상자]][[분류:KBO 리그 2루수]][[분류:KBO 리그 유격수]][[분류:대한민국의 야구 해설자]][[분류:대한민국의 야구 감독]][[분류:건국대학교 동문]][[분류:대구신암초등학교 동문]][[분류:대구광역시 출신]][[분류:1955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달성 서씨]]
  • 오준 . . . . 2회 일치
         '''오준'''(吳俊, [[1955년]] [[10월 4일]] ~ )은 [[대한민국]]의 외무공무원이다. 駐 [[유엔]] 대표부 대사이자 [[UN]] 경제사회이사회 의장이다.<ref name="이력서"/>
         [[분류:1955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해주 오씨]][[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서울대학교 인문대학 동문]][[분류:런던 대학교 동문]][[분류:스탠퍼드 대학교 동문]][[분류:경희대학교 교수]][[분류:싱가포르 주재 대한민국 대사]][[분류:유엔 주재 대한민국 대사]][[분류:CJ 사람]][[분류:대한민국의 사외이사]][[분류:20세기 대한민국 사람]][[분류:21세기 대한민국 사람]]
  • 오준영 (1955년) . . . . 2회 일치
         '''오준영'''(吳俊英, [[1955년]] [[7월 13일]] ~ )은 [[대한민국]]의 [[가수]], [[작사가]], [[작곡가]], [[편곡|편곡가]], [[영화 음악]][[영화 감독|감독]]이다.
         [[분류:1955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한민국의 남자 가수]][[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대한민국의 남자 싱어송라이터]][[분류:대한민국의 작사가]][[분류:대한민국의 작곡가]][[분류:대한민국의 음악 프로듀서]][[분류:대한민국의 연출가]][[분류:명지대학교 동문]]
  • 유재한 (1955년) . . . . 2회 일치
         '''유재한'''(柳在韓, [[1955년]] [[3월 15일]] ~ )은 대한민국의 행정공무원과 한국주택금융공사 사장을 지내었고, [[한나라당]] [[대구광역시|대구시]] [[달서구]] 병 지역 당협위원장을 맡기도 했다.
         [[분류:1955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분류:경북고등학교 동문]][[분류:서울대학교 사회과학대학 동문]][[분류:대한민국의 기업인]][[분류:대한민국의 공무원]][[분류:한나라당의 정치인]]
  • 이기열(배우) . . . . 2회 일치
         '''이기열'''(李基列, [[1955년]] [[9월 3일]] ~ )은 [[대한민국]]의 영화 배우이다.
         [[분류:대한민국의 텔레비전 배우]][[분류:대한민국의 연극 배우]][[분류:대한민국의 배우]][[분류:1955년 태어남]][[분류:1981년 데뷔]][[분류:대한민국의 영화 배우]][[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목포시 출신 인물]]
  • 이설주 . . . . 2회 일치
         * 시집 《수난(受難)의 장(章)》 (1955년)
         * 시집 《애무(愛撫)의 장(章)》 (1955년)
  • 이장영 . . . . 2회 일치
         '''이장영'''(李長榮, [[1955년]] [[1월 15일]] ~ , [[대구]])은 [[대한민국]]의 [[경제학자]]이자, [[금융감독원]] 부원장 등을 역임한 경제부처 공직자이다.
         [[분류:1955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한민국의 공무원]][[분류:대한민국의 경제학자]][[분류:경북고등학교 동문]][[분류:서울대학교 사회과학대학 동문]][[분류:한양대학교 교수]][[분류:뉴욕 대학교 동문]][[분류:새천년민주당 당원]][[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
  • 임혁주 . . . . 2회 일치
         '''임혁주'''(林赫柱, [[1955년]] [[6월 23일]] ~ )는 [[대한민국]]의 [[텔레비전]] [[배우]] 겸 [[연극]][[배우]]이다.
         [[분류:대한민국의 남자 연극 배우]][[분류:대한민국의 남자 배우]][[분류:1955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동국대학교 동문]][[분류:1975년 데뷔]]
  • 정몽원 . . . . 2회 일치
         '''정몽원'''(鄭夢元, [[1955년]] [[8월 4일]] ~ )는 [[대한민국]]의 기업인이다. [[한라그룹]]을 창업한 [[정인영 (기업인)|정인영]]의 아들이다. [[한라그룹]]의 회장으로 한라건설과 [[만도]]의 경영권을 가지고 있다.
         [[분류:1955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한민국의 기업인]][[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분류:하동 정씨]][[분류:현대가]][[분류:서울고등학교 동문]][[분류:고려대학교 동문]][[분류:서던캘리포니아 대학교 동문]]
  • 정칠성 . . . . 2회 일치
         해방 후 조선부녀총동맹을 결성해 부위원장이 되고, [[조선공산당]]과 [[민족주의민주전선]]에서 활동하다 [[1948년]] [[4월]] [[전조선 제정당 사회단체 연석회의|남북협상]]에 참가한 뒤, 그해 [[8월]] 미군정의 좌익 탄압을 피해 해주 남조선인민대표자 대회차 월북했다가 내려오지 않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부 수립에 참여하였다. [[1948년]] [[8월]] 제1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선출되었고, [[1948년]] [[10월]] [[조선민주여성동맹]] 중앙위원, 1955년 민주여맹 부위원장, 1956년 4월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을 역임하였으며, [[1957년]] [[8월]] 제2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재선되었다. [[1958년]] 국내파 [[공산주의]]자 및 사회주의자들을 제거할 때 숙청되었다.
         [[1955년]] 조선평화옹호전국민족위원회 부위원장, [[1956년]] [[조선민주여성동맹|민주여성동맹]] 부위원장에 피선되고, [[4월]]에는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에 선출되었다. [[1957년]] 다시 조선민주여성동맹 부위원장에 재선되고, [[평안북도]] [[인민위원회]] 대의원에 선출되었다. [[1957년]] [[8월]] [[최고인민회의 제2기 대의원 선거]]에 [[평안북도]] 지역구로 입후보, 당선되어 제2대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을 지냈다.
  • 주윤발 . . . . 2회 일치
         '''주윤발'''({{zh|order=t|t=周潤發|s=周润发|p=Zhōu Rùnfā|h=저우룬파}}, Cantonese Yale: Jàu Yeuhn Faat, '''Chow Yun-Fat''', '''Donald Chow''', '''Aman Chow''', [[1955년]] [[5월 18일]] ~ )은 [[홍콩]]의 [[영화 배우|영화배우]], [[영화]] 각색가, [[음반]]을 발표하기도 한 [[가수]]이다.
         [[분류:1955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홍콩의 남자 영화 배우]][[분류:홍콩의 남자 연극 배우]][[분류:홍콩의 남자 텔레비전 배우]][[분류:홍콩의 남자 뮤지컬 배우]][[분류:홍콩의 남자 가수]][[분류:홍콩의 작사가]][[분류:홍콩의 불교 신자]][[분류:중국의 반공주의자]][[분류:싱가포르에 거주한 중국인]][[분류:잉글랜드에 거주한 중국인]][[분류:미국에 거주한 중국인]][[분류:스코틀랜드에 거주한 중국인]][[분류:중국계 영국인]][[분류:하카계 홍콩인]][[분류:1972년 데뷔]][[분류:홍콩의 억만장자]][[분류:대구광역시 출신]]
  • 최희암 . . . . 2회 일치
         '''최희암'''(崔熙岩, [[1955년]] [[12월 24일]] ~ )은 [[대한민국]]의 [[한국 프로 농구|농구 선수]]를 지낸 [[수필|수필가]] 겸 [[기업가]]이며 前 [[한국 프로 농구|KBL 한국 프로 농구]] [[인천 전자랜드 엘리펀츠]] 감독이다.
         [[분류:1955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전주 최씨]][[분류:무주군 출신]][[분류:대한민국의 남자 농구 선수]][[분류:연세대학교 사범대학 동문]][[분류:연세대학교 교육과학대학 동문]][[분류:연세대학교 대학원 동문]][[분류:연세대학교 교육대학원 동문]][[분류:아메리칸 대학교 동문]][[분류:한양대학교 교수]][[분류:연세대학교 교수]][[분류:미국에 거주한 대한민국인]][[분류:중국에 거주한 대한민국인]][[분류:캐나다에 거주한 대한민국인]][[분류:타이완에 거주한 대한민국인]][[분류:20세기 대한민국 사람]][[분류:21세기 대한민국 사람]][[분류:동국대학교 교수]][[분류:대한민국의 농구 해설가]][[분류:대한민국의 농구 감독]][[분류:대한민국의 수필가]][[분류:대한민국의 스포츠 평론가]][[분류:대한민국의 기업인]]
  • 홍양호 (1955년) . . . . 2회 일치
         '''홍양호'''(洪良浩. [[1955년]] [[5월 25일]] ~ , [[대구광역시|대구]])는 대한민국의 공무원이다.
         [[분류:1955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한민국의 통일부 차관]][[분류:경북고등학교 동문]][[분류:경북대학교 동문]][[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
  • 홍진기 . . . . 2회 일치
         |임기 = [[1954년]] [[2월 17일]] ~ [[1955년]] [[10월 5일]]
         |임기 = [[1955년]] [[10월 5일]] ~ [[1958년]] [[2월 20일]]
  • Darkest Hour: A Hearts of Iron Game/기술 . . . . 1회 일치
          그냥 병력수송선부터 1955년 병력수송선까지의 수송선에 대한 연구. 처음부터 연구할 수 있다.
  • 경산시 . . . . 1회 일치
         * [[최경환 (1955년)|최경환]] - 현 경산시 국회의원(4선,[[새누리당]]), 전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 경주시 . . . . 1회 일치
         [[분류:경주시 출신|경주 출신 인물]][[분류:경상북도의 도시]][[분류:1955년 설치]][[분류:1995년 폐지]][[분류:1995년 설치]][[분류:한국의 옛 수도|서라벌]][[분류:대한민국의 항구 도시]]
  • 길용우 . . . . 1회 일치
         ||출생||<(> [[1955년]] [[11월 4일]] [[전라남도]] [[영암군]] ||
  • 김승목 . . . . 1회 일치
         1959년 [[민주당(1955년)|민주당]] [[박순천]] [[대한민국 국회의원|국회의원]]의 비서관으로 일하면서 정계에 입문하였다. 1971년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박기출]]의 뒤를 이어 [[부산광역시|부산직할시]] [[동구(부산)|동구]]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 김양 (1953년) . . . . 1회 일치
         ** 남동생: 김휘(金揮, [[1955년]] ~ , 나라기획 이사장 역임)
  • 김형기 (법조인) . . . . 1회 일치
         1927년 [[대구광역시]]에서 태어난 김형기는 [[경복고등학교]]와 [[서울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하고 1955년 제7회 [[고등고시]] 사법과에 합격해 1960년 대구지방법원 판사에 임용되었다. 문학과 고서화에 높은 안목을 가지고 있던 김형기는 서울형사지방법원, 서울민사지방법원, 서울고등법원 등에서 부장판사를 하다가 1981년에 임명된 서울형사지방법원장에 임명되었다. 법원장으로 재직하다가 [[김중서]]의 정년 퇴임으로 공적이 된 대법원 판사에 1984년 7월 20일 [[전두환]] 대통령에 의해 임명되었다.<ref>매일경제 1984년 7월 17일자 동아일보 1984년 7월 18일자</ref>
  • 대구광역시 . . . . 1회 일치
         미국의 대한군사원조(AFAK)를 통한 자재 원조로 지어진 대구시청사 감사식(1955년)
  • 도예종 . . . . 1회 일치
         박정희 정권 당시 중앙정보부가 조작한 [[인민혁명당 사건]]으로 사형이 집행된 여덟 명 중 한 명이다. [[1960년]] 당시 지방자치제도가 부활하여 [[영주군]][[교육감]] 선거에 당선되었지만 [[민주당 (1955년)|민주당]] 정권은 발령을 거부하여 교육감(후에 교육장으로 개정)에 부임하지 못했다.
  • 독고성 . . . . 1회 일치
         데뷔 1955년 영화 '격퇴'
  • 매카시즘은 이제 매카시워즘이다 . . . . 1회 일치
         아이젠하워는 1955년 7월에 있었던 공화당 지도부 모임에서는 "매카시즘은 더 이상 없다."(“It’s no longer McCarthyism,”), "매카시워즘일 뿐이다."(“It’s McCarthywasm.”)라고 발언하기도 했다.
  • 박경석(1933) . . . . 1회 일치
         1972년 10월, 육군본부 인사운영감실 대령과장으로 있던 박경석 대령에게 당시 실세 중에 실세 육군 수경사령관 [[윤필용]] 사령관의 참모장 [[손영길]] 대령이 찾아왔다. 육사 12, 13기 출신의 신참 대령들의 연대장 가용 청탁 쪽지였는데, 박경석 대령은 이 쪽지의 명단의 인물들을 대차게 거절했다. 그에 대한 대가는 참혹했다. 한달 뒤, 박경석 대령은 거의 확실시 되던 준장 진급에서, 진급에 한참 밀리던 윤필용 사령관의 직속인 김성배 대령 준장 진급자 명단이 바뀌었다. 그후 2번이나 연거푸 준장 진급 누락끝에 진급이 된 박경석 준장의 첫 보직은 [[6사단]] [[부사단장]] 겸 [[DMZ]] 내에서 발견된 땅꿀 특수개척팀장이었다.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3092300209105001&editNo=45&printCount=1&publishDate=1993-09-23&officeId=00020&pageNo=5&printNo=22296&publishType=00010|박경석 장군의 준장 진급 비화]][* 여기에서 잠깐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다면 창군 및 초창기 한국군의 고질적인 병폐 중 하나였던 진급문제에 관해서다. 물론 후자에 기술하겠지만, 이 고질적인 진급문제가 [[5.16]]과 [[12.12]] 일어났던 원인이기도 했다. 창군과 한국전쟁으로 군은 양적 성장에 힘입어 장교들의 진급이 빠른편이었다. 소위 달고 몇개월 후에 대위, 소령 더구나 전쟁으로 인해 단숨에 영관급에서 장성으로 진급하는 일이 많았는데, 전쟁이 끝나자 이러한 초고속 진급은 멈춰졌으며, 특히나 [[군사영어학교]] 출신 70여명 대부분이 장성으로 진급했고, 육군참모총장, 합참의장 자리를 계속하여 번갈아 앉는 사태가 생겼다.--대표적인 인간들이 [[정일권]]과 [[백선엽]]이다. 이들은 대장 진급 후에 육군 참모총장과 합참의장 자리를 번갈아 2번씩 그 자리에 앉았다. 이러니 아래 후배 장교들의 불만과 원성이 쌓여갔으며, 특히나, [[육사 5기]]의 대령급과 [[육사 8기]]의 중령급에서 그 불만이 많았다.--특히나 이런 경향은 1970년대 이후 정규 육사 출신들과 단기 육사 및 비육사 출신간의 진급문제가 두드러졌다. 박경석 장군 같은 경우에도 1950넌에 소위 임관후 전쟁이 끝나자 대위로 있었는데. 1955년 갓 소위 임관한 정규 육사 11기생들이 1970년 후반 영관급 대 장성급으로 진급이 역전되었다. 이 같은 내용은 이등병에서 장군까지 지낸 [[최갑석]] 장군의 증언과 그의 회고록에도 잘 나타나고 있다.]
  • 박정근 (법조인) . . . . 1회 일치
         1942년에 경상북도 에서 태어나 1950년 서울대학교 농과대학을 졸업하고 1955년 제7회 고등고시 사법과에 합격했다. 1959년에 임용된 대구지방법원 등에서 판사를 하다가 1979년 법원장으로 승진하여 춘천지방법원, 1980년 전주지방법원 1980년 대구지방법원 1981년 광주고등법원 1982년 9월 1일대구고등법원, 1984년 서울고등법원에서 법원장을 역임했다.<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4072100099211002&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84-07-21&officeId=00009&pageNo=11&printNo=5656&publishType=00020 매일경제
  • 백낙청 . . . . 1회 일치
         친가는 [[평안남도]] [[정주군]]에 있었지만, 외가가 있는 [[대구]]에서 태어나서 성장하였다. 변호사였던 아버지 [[백붕제|'''백붕제''']]는 친일관료로 6.25 때 납북되었다. 1955년 [[경기고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미국]] 유학을 떠나, [[브라운 대학교]]를 졸업하고 일시 귀국하여 군복무를 마친 후, 다시 유학을 떠나 1972년 [[하버드 대학교]]에서 영문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 백남억 . . . . 1회 일치
         그러다가 [[4.19]] 이후 치러진 1960년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1955년)|민주당]] 후보로 [[참의원]](경상북도)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 빌리 블랭크스 . . . . 1회 일치
         1955년 미국 펜실베니아에서 출생.
  • 서상일 . . . . 1회 일치
         56년 대통령 선거 과정에서 여론에 떠밀려 제일야당 민주당과 진보당은 후보단일화협상을 갖게 되었는데 협상장에서 진보당 대통령후보 [[조봉암]]은 민주당 [[대통령]] [[신익희]]에게 양보의사를 밝히는대신 [[부통령]] 후보는 중요하지 않으니 민주당측이 양보해달라는 의사를 전했다.<ref name="서158">서중석, 이승만과 제1공화국 (역사비평사, 2007) 158 페이지</ref> 일단 [[신익희]]는 이 제의에 대해 매우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으나 [[민주당 (1955년)|민주당]] 으로서는 이것도 받아들이기 어려운 요구였다. 왜냐하면 당시 신구파연합체였던 민주당은 당내경선에서 구파의 영수 신익희와 신파의 영수 장면을 나란히 정부통령 후보로 선출하였던 것인데 신익희가 신파를 설득하는것도 쉬운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신익희ᆞ조봉암 회동이 이루어진지 6일만에 호남유세에 나섰던 신익희가 호남선 열차안에서 뇌출혈로 급사함으로써 사실상 후보단일화는 엉뚱하게 조봉암으로 되어버렸지만 민주당은 당차원에서 조봉암을 밀 생각은 전혀 없었고 오히려 민주당 최고위원 김준연은 조봉암의 사상적 문제점을 들어 이승만 지지를 공개선언하기까지 했다.
  • 송종호 (1956년) . . . . 1회 일치
         |전임자 = [[김동선 (1955년)|김동선]]
  • 신경림(대학교수) . . . . 1회 일치
         1936년 4월 6일, [[충청북도]] 중원군(現 [[충주시]])에서 태어났으며 1960년 [[동국대학교]] 영문과를 졸업하였고 1955년에 문단에 데뷔하여 '낮달', '갈대', '석상' 등의 시를 발표하였다.
  • 이근직 . . . . 1회 일치
         [[8.15 광복]] 이후에도 1949년까지 강원도청 공무원으로 근무하였다. 1950년 [[서울특별시청]] 산업국장, 1952년 심계원(현 감사원) 심계 제2국장, 1952년 [[함태영]] [[대한민국 부통령|부통령]] 비서실 [[수석비서관]]을 역임했다. 1955년 2월부터 1957년 9월까지 [[경상북도지사]]를 지냈다. 경상북도지사 재임 중이던 1957년 8월 [[가짜 이강석 사건]]이 일어났다. 1957년 9월부터 내무부(현 [[행정안전부]]) [[행정안전부 장관|장관]]을 지내다가 1958년 6월 [[제4대 국회의원 선거]] 결과에 따른 책임을 지고 물러났다. 이후 [[자유당]] 당무위원으로 있다가 1959년 3월부터 1960년 5월까지 농림부(현 [[농림축산식품부]]) [[농림축산식품부 장관|장관]]을 지냈다. 농림부 장관 재임 중 [[3.15 부정선거]]에 관여하였다. 이로 인하여 구속 기소되었다.
  • 이만섭 . . . . 1회 일치
         * [[1955년]] [[연희대학교]] 정치외교학 학사
  • 이명규(국회의원) . . . . 1회 일치
         1956년 1월 10일(음력 1955년 11월 28일)
  • 이상백 (1904년) . . . . 1회 일치
         [[1946년]]에 [[서울대학교|경성대학]](京城大學, [[서울대학교]]의 전신) 문리과대학 교수가 되었다. [[1947년]]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사회학과를 창설, 이후 사회학과 주임교수에 임명되어 사망 직전까지 재임하였다. 이후 [[서울대학교]] 부속 박물관장과 [[서울대학교]] 동아문화연구소 소장을 겸임하였다. [[1955년]] 서울대학교로부터 문학박사 학위를 수여받았다.
  • 이열희 (1924년) . . . . 1회 일치
          | 복무 기간 = [[1949년]] [[3월]] ~ [[1955년]] [[3월]]
  • 이희승(1913) . . . . 1회 일치
         [[8.15 광복]] 후 충북자동차주식회사 취체역, 주한미군 제7사단통역관, 경기도청 및 내무부(현 행정자치부) 통역관 등으로 활동하였다. 1948년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충청북도 충주군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대동청년단]] [[김기철]]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무소속으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무소속 [[조대연]]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6.25 전쟁]]이 일어나자 UNKRA 및 KCAC 정치고문, 문교부(현 [[대한민국 교육부]]) 기술교육원부원장서리, [[미군]] 작전과 포로심사관 등으로 활동하였다. 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무소속으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자유당]] 김기철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58년 [[제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1955년)|민주당]]에 충청북도 충주시 선거구로 [[공천]]을 신청하였으나 [[현역]] [[지역구]] [[대한민국 국회의원|국회의원]]인 김기철에 밀려 탈락하였다. 1960년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충청북도 중원군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현역 지역구 국회의원인 무소속 [[정상희]]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 장발 (화가) . . . . 1회 일치
         [[분류:서울대학교 교수]][[분류:연세대학교 교수]][[분류:대한민국의 작가]][[분류:대한민국의 저술가]][[분류:대한민국예술원 회원]][[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분류:장면]][[분류:윤보선]][[분류:대한민국 제2공화국]][[분류:인동 장씨]][[분류:병사한 사람]][[분류:보스턴 대학교 교수]][[분류:한국계 미국인]][[분류:대한민국의 로마 가톨릭교도]][[분류:일제 강점기의 미술 평론가]][[분류:대한민국의 미술 평론가]][[분류:20세기 대한민국 사람]][[분류:민주당 (대한민국, 1955년) 당원]][[분류:민주당 (대한민국, 1963년) 당원]][[분류:21세기 대한민국 사람]][[분류:대한민국의 시사 평론가]][[분류:대한민국의 정치 평론가]][[분류:인천박문초등학교 동문]][[분류:보성고등학교 (서울) 동문]][[분류:컬럼비아 대학교 동문]][[분류:서울대학교 대학원 동문]][[분류:평화민주당 (1987년)]][[분류:대한민국의 백세인]][[분류:유교 이탈자]][[분류:이탈리아 주재 대한민국 대사]][[분류:미국의 로마 가톨릭교도]]
  • 장성환 . . . . 1회 일치
         *1955년 제5혼성비행단장
  • 전상우 (1953년) . . . . 1회 일치
         |후임자 = [[고정식 (1955년)|고정식]]
  • 전여옥 . . . . 1회 일치
         |후임자 = [[김영주 (1955년)|김영주]](영등포구 갑)<br />[[신경민]](영등포구 을)
  • 전인범 . . . . 1회 일치
         2014년 9월 특전사 13공수여단에서 포로체험 훈련 도중 부사관 2명이 숨진 사건이 발생하자 해당 훈련의 도입을 지시한 사람이 그였던 것을 두고 정치권에서 공방이 일었다. 2017년 2월 [[국민의당]] [[김영환 (1955년)|김영환]] 최고위원은 문재인 캠프에 합류한 그에 대해 “이분은 취임 후인 2014년 9월 공수여단에 포로처럼 고문훈련을 시켜 두 명의 군인을 사망시킨 전력이 있다”며 “문재인 전 대표는 왜 ‘특전사 코스프레’를 포기하지 않고 집착하고 있느냐”고 비판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3&aid=0007752597 김영환 "文캠프 전인범, 고문훈련으로 군인 두 명 죽었는데…"], 《뉴시스》, 2017년 2월 6일</ref> 이 사건에 대해서는 그가 전역 직후인 2016년 9월 신동아와의 인터뷰에서 “(포로체험 훈련 중 사망한) 조용준·이유성 하사. 나는 당시 부대 지휘관으로 절대적인 책임이 있다. 과정이야 어찌 됐든 나는 두 사람의 이름을 죽을 때까지 새기고 가야 한다는 벌을 받았다”며 지휘관으로서 도덕적 책임이 있음을 인정한 바 있다.<ref name="a"/> 문재인 지지 선언 직후인 2017년 2월 오마이뉴스와의 인터뷰에선 당시 사고의 핵심 원인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냐는 기자의 물음에 “무지와 부주의, 그리고 감독 부실이다. 그리고 당시 매뉴얼이 없어서 문제라고 보도됐는데, 군 생활 당시 매뉴얼이란 표현을 쓰던가. 에프엠([[FM]], filed manual, 야전교범)이란 표현을 쓴다. 사고 직후 장교가 기자에게 ‘매뉴얼이 있었나’라는 질문을 받고 ‘못 봤다’라고 답했다. 그런데 만약 ‘에프엠이 있었나’라고 물어봤으면 그렇게 답하지 않았을 거다. 우리가 책 만들 때 초고가 있잖나. 그때 (엄지와 검지를 4cm 정도 떨어뜨린 손을 내보이며) 이렇게 두꺼운 초고가 있었다. 나름대로 연구를 많이 했다”고 답했다. 이어 “이런 사고가 나선 절대로 안 되지만, 어처구니 없이 사고가 날 수도 있다는 점을 이해해주셨으면 한다. 그리고 책임만큼의 처벌만 받도록 이해해줬으면 한다. 2017년 1월에 제가 특전동지회 총재로 취임했는데, 취임식 때 희생된 두 부하의 아버지가 축하해주러 오셨더라. 그러면서 ‘사령관님이 무슨 죄가 있겠나. (일반순직이 아닌 특수직무순직으로 처리된 것에 대해) 잘 처리해주셔서 감사하다’고 그러더라. 제 마음이 어땠겠나”라고 덧붙였다.<ref name="b"/> 이에 대하여 특전사 관계자는 “그들은 아들들이 비록 희생됐지만 포로체험 훈련의 취지에는 공감했기 때문에 사고 당시 사령관이었던 전인범 전 중장의 특전동지회 총재 취임식에 참석이 가능했다”고 밝혔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32&aid=0002763911 [단독] “포로체험훈련은 끝나지 않았다” 특전사 비밀리에 계속 실시], 《경향신문》, 2017년 2월 12일</ref>
  • 전재용 . . . . 1회 일치
         *** 사촌누나: 전용희([[1955년]] ~)
  • 정재학 (1856년) . . . . 1회 일치
         [[조흥은행]]은 1943년 10월 1일 민족자본에 기반을 둔 9개은행( [[한성은행]] [[대구은행]] [[한일은행]] [[호서은행]] [[호남은행]] [[동래은행]] [[주일은행]] [[구포은행]] [[해동은행]])의 다단계 합병에 의해 탄생했다.<ref>서광운 <<한국금융백년>> (창조사, 1972) p684쪽 조흥은행계보도</ref> 해방직후 [[조흥은행]]의 지분구성을 보면 일본인 5.1%, 한국인 53.7% 그리고 은행상호보유주 41.0%로 나타났다.<ref><< 조흥은행90년사 >> (조흥은행, 1987) p113~114</ref> 한국인지분 가운데 [[대구은행]]을 설립한 [[정재학]] 가문과 [[한일은행]]의 경영권을 장악한 [[민대식]] 가문 등 두 가문의 비중이 가장 컸다.<ref>경향신문 1955년 10월22일 3면</ref>
  • 제주시 . . . . 1회 일치
         [[분류:제주시 출신|제주시 출신 인물]][[분류:제주특별자치도의 도시]][[분류:1955년 설치]][[분류:2006년 폐지]][[분류:2006년 설치]][[분류:대한민국의 항구 도시]]
  • 조긍하 . . . . 1회 일치
         * [[1955년]] [[음악]][[평론|평론가]] 등단.
  • 조대연(1888) . . . . 1회 일치
         1960년 7월부터 같은 해 12월까지 관선 [[충청북도지사]]를 지냈다. 같은 해 12월 치러진 [[1960년 지방선거]]에서 [[민주당(1955년)|민주당]] 후보로 충청북도지사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그러나 1961년 [[5.16 군사정변]]으로 경질되었다.
  • 최남선 . . . . 1회 일치
         *그의 동생 [[최두선]]이 [[민주당 (1955년)|민주당]]에서 활동하였으므로 [[자유당 (대한민국)|자유당]]에서는 최남선이 친일파라고 공격했다.
  • 최동 . . . . 1회 일치
         [[일제 강점기]] 말기인 [[1938년]]에 [[조선기독교연합회]] 평의원을 지냈고 [[1941년]]에는 [[조선임전보국단]]의 발기인을 맡았다. 1941년에 [[동양지광]]이 주최한 '[[미영타도좌담회]]'에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교수 자격으로 참석해 [[황인종]]의 시각에서 [[미국]]과 [[영국]]을 비난하는 내용의 강연을 한 일도 있다. [[1945년]] 광복 직후 제4대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교장에 취임하였으며,1947년 12월 4일 Severance 의과대학으로 승격시켜 6년제를 만들었고, [[1955년]]까지 교수로 재직했다.
  • 최두선 . . . . 1회 일치
         [[1955년]] [[김성수 (1891년)|김성수]]가 사망하자 [[신익희]], [[함태영]] 등과 함께 그의 국민장 장의위원으로 활동했다. 김성수의 사망 직후 [[인촌 김성수 기념사업회]]의 창립 발기인의 한 사람이 되었다. [[1960년]] [[김포공항|인천비행장]]으로 환국하는 [[조병옥]]의 시신을 맞이하기도 했다.
  • 최성관 (1925년) . . . . 1회 일치
         * [[1955년]] 신협 단원
  • 최순달 . . . . 1회 일치
         * [[1955년]]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 학사
  • 최태영 . . . . 1회 일치
         [[1949년]]부터 [[1962년]]까지 [[중앙대학교]] 법정대학 교수 겸 학장으로 부임하였으며, [[1958년]]에는 동대학에서 명예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54년]]부터 [[1955년]]까지는 [[경희대학교]] 법과대학 학장 겸 대학원장을 지냈고, [[1957년]]부터 [[1968년]]까지는 청주대학 교수 겸 학장 겸 대학원장을 지내는 등 활발한 교육활동을 전개하였다.
  • 최희준 (가수) . . . . 1회 일치
         * 1955년 [[경복고등학교]] 졸업
  • 트로피코 4/건물 . . . . 1회 일치
          * 1955년에 해금
  • 하태환 . . . . 1회 일치
         1960년 5월 초 자유당에서 [[조경규(1904)|조경규]] 원내총무 체제가 출범하자 부총무에 임명되었으나, 같은 달 말 사퇴하였다. 이후 자유당을 탈당하였고, 같은 해 치러진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민주당(1955년)|민주당]] 이상면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게다가 1961년 [[3.15 부정선거]] 가담을 이유로 반민주행위자공민권제한법에 의해 공민권이 제한되었다. [[5.16 군사정변]] 이후 정치정화법에 묶여 정치활동이 금지되었다가 1963년 말 [[제6대 국회의원 선거]] 이후에야 해금되었다.
  • 한덕수 (1907년) . . . . 1회 일치
         [[경상북도]]에서 태어나 [[1927년]] 성악가가 되려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니혼 대학]] 중퇴후 노동운동에 참가했다. [[1934년]] 조선인 노동자의 파업을 이끌었다가 체포됐다. [[1945년]] [[10월 15일]]에 결성된 재일본조선인련맹(조련)에 참가해 총무부 담당 위원에 선출됐다. [[1955년]] [[5월 25일]] [[재일본조선인총련합회]] 결성후 의장단 6명에 포함됐다. [[1958년]] 5월 제4회 전체대회에서 의장단이 해체되고 단일 의장, 부의장제가 도입되자 의장에 선출됐다. 2001년 사망할 때까지 중앙위원회 의장으로 있었다. [[1967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됐다. [[1972년]]에는 [[노력영웅]] 칭호를 받았다. [[1994년]] [[김일성]]이 죽었을 당시 기준으로 서열 4위였다.
  • 함인섭 . . . . 1회 일치
         * 1955년 12월 ~ 1956년 2월 [[자유당 (대한민국)|자유당]] 농과학행정특임촉탁위원
  • 현진건 . . . . 1회 일치
         * [[이무영 (소설가)|이무영]] - [[1955년]] 8월 30일자 「[[경향신문]]」에 발표된 이무영의 회고에 따르면, 그가 [[1932년]] 처음 중편소설 「지축을 돌리는 사람들」을 「동아일보」에 연재하였을 때 별다른 반응이 없이 문단에서도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하는 와중에 "오직 빙허(현진건) 선생이 꾸준히 읽어주시고 용기를 북돋아 주었"으며, 「먼동이 틀 때」를 연재할 수 있도록 서항석과 더불어 힘을 써준 것도 현진건이었다고 술회하고 있다. 다만 이무영이 친일로 돌아선 것을 현진건이 어떻게 생각했는지, 이후 이무영과 현진건이 어떠한 관계에 있었는지는 확실히 밝혀진 것이 없다.
  • 홍성유 . . . . 1회 일치
         [[1928년]] [[10월 4일]] [[경성부]]에서 태어나 [[경동고등학교]]를 거쳐 [[1951년]] [[서울대학교]] 행정학과를 학사 학위하였다. 이어 같은 해 1951년 9월 [[갑종장교|육군 갑종사관]] 제10기로 육군 소위 임관하여 [[1951년]] [[대한민국 육군본부|육군본부 헌병사령부]] [[기관지]] 《[[사정보]]》(司正報) 기자·편집장을 지낸 이후, 1952년 [[대한민국 육군 보병학교|육군보병학교]]를 [[졸업]]한 이듬해 [[1953년]] 국방부 군사잡지 《[[명랑]]》(明朗) [[편집장]]을 거쳐 [[1955년]] [[2월]]에 대한민국 육군 중위 예편하였으며 [[1957년]] 《[[한국일보]]》에 장편소설 《[[비극은 없다]]》가 당선되어 등단하였다.
  • 흥친왕 . . . . 1회 일치
         ** 며느리 : 광산김씨([[1878년]] ~ [[1955년]]), 광산인(光山人) [[김재정]](金在鼎)의 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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