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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정택
[[1945년]] 12월, 그는 미 군정청에 의해 경성대학의 법문학부 경제학과 농업정책 담당 교수로 임명되었으나 대학과 전문대학의 1대1 통합에 반대하며 반년만에 사직하고 [[조선 사회과학 연구소]]를 설립하여 활동하였는데, 강정택은 [[민주주의민족전선]]의 농업문제연구위원회를 맡아 북한식의 토지개혁을 주장하였다. 이후 강정택은 제2대 농림부 차관으로 임명되어 농지개혁안을 입법하였으나 관철되지 못하자 사임한 후 농사시험장 고문으로 있으면서 [[한국경제연구소]]를 세워 농업정책을 연구하였다.
- 경주시
|align="center"|[[1945년]] [[10월 26일]]
|align="center"|[[1945년]] [[8월 30일]]
- 고건
*** 여동생 : 고혜경 (高惠敬, [[1945년]] ~ )
- 고황경
광복 후 [[1945년]] 경기여고 교장, [[1946년]] [[미군정]]의 보건후생부 부녀국장에 임명되었다. 언니인 [[고봉경]]은 이때 미군정 경무국의 초대 여경과장을 지냈다.<ref>{{뉴스 인용
- 곽상훈 (국회의원)
인천에서는 인천사회사업협회회장과 인천체육회회장을 지냈다.<ref name=autogenerated2 /> 그러나 [[1945년]] [[8월]] 부산 헌병대에 예비구속되었다가 [[8월 15일]] [[8·15 광복]]을 맞이하고 곧 석방되었다.
광복 이후 [[한국민주당]] 창당에 참여하였다. [[1945년]] [[10월]] 하상훈, 이범진, 전두영(全斗榮) 등과 함께 [[10월]]에 결성된 한국민주당 인천지부에 가입하였다.<ref name="신정회1"/>
- 김경애 (1945년)
'''김경애'''(金暻愛, [[1945년]] [[10월 3일]], [[대구광역시|대구직할시]] ~ 현재)는 [[대한민국]]의 배우이다.
[[분류:1945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고려대학교 동문]][[분류:중앙대학교 동문]][[분류:대한민국의 영화인]][[분류:대한민국의 배우]][[분류:대한민국의 영화 배우]][[분류:대한민국의 텔레비전 배우]][[분류:대구광역시 출신]][[분류:대한민국의 연극 배우]][[분류:대한민국의 불교 신자]]
- 김경주 (승려)
| 임기 = 1945년 3월 2일 ~ 1945년 6월 1일
일제가 [[태평양 전쟁]]에 패하기 5개월 전인 [[1945년]] 3월에 대본산 범어사 주지로 총독부의 인가를 받았으며, 이후의 행적은 알려진 바 없다.
- 김규식 (서로군정서)
'''김규식'''(金圭植, [[1880년]] [[8월 27일]] ~ [[1945년]] [[8월 10일]])은 한국의 독립 운동가이다. 경북 출신이다.
[[분류:1880년 태어남]][[분류:1945년 죽음]][[분류:건국훈장 애국장 수훈자]][[분류:육군 장군]][[분류:서로군정서]][[분류:한국독립당 (1930년)]][[분류:경상북도 출신]][[분류:한국독립당의 당원]]
- 김기현(성우)
||<#000000> {{{#ffffff 출생 }}} ||<(> [[1945년]] [[6월 24일]] ([age(1945-06-24)]세), [[일제강점기]] [[충청북도]] [[옥천군]] ||
[[충청북도]] [[옥천군]]에서 태어나 [[대전광역시]][* 당시 기준 [[충청남도]] [[대덕군]].]에서 자랐다. 중앙대학교 철학과 출신. 당시에는 조금 늦은 나이인 32살에 결혼을 했으며,[* 1945년생이니 20대가 되면 1965년, 이때당시만 해도 10대 후반~20대 초반에 결혼하는 일이 많은편이었다. 요즘이야 능력과 형편이 되서야 결혼할 생각을 하므로 30대쯤에 결혼하는게 당연시 되고 50살 정도는 되어야 늦게 결혼한다는 소리를 듣는 시대지만.] 부인은 손영화. 1953년생으로 김기현보다 8세나 어리다. 젊었을 적, 신혼 시절에는 가진 재산과 은행 대출금으로 방 3개짜리 신혼집을 샀지만, 빚을 갚기 위해 방 2칸을 세를 내줘야했을 정도로 가난하게 살았다. ~~자기 집에서 셋방살이~~ 사실 결혼하기 전에는 상당히 많은 돈을 모아두었지만, 연애할 때 데이트 비용으로 돈이 하도 많이 나가서 그만큼 경제적으로 어려워질 수밖에 없었다고(...).[[http://tv.ichannela.com/enter/queen/news/3/02/20150108/68977574/1|#]]
[[분류:한국 남성 성우]][[분류:한국 남배우]][[분류:1945년 출생]][[분류:1965년 데뷔]][[분류:옥천군 출신 인물]]
- 김대우 (1900년)
'''김대우'''(金大羽, [[1900년]] [[7월 10일]] ~ [[1976년]] [[4월 22일]])는 [[일제 강점기]]의 독립운동가, 친일반민족행위자 관료로 출신이며 본적은 [[서울특별시]] [[종로구]] 이다. [[1943년]] [[전라북도지사]], [[1945년]] [[6월]] [[경상북도지사]]에 임명되었다. 그해 [[8월]] 광복 직후 행정, 치안권 교섭에 총독부측 대표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였으며, 해방 직후에도 해방된 한국의 초대 경상북도지사를 지내다가 그해 [[10월 12일]] 물러났다.
|장="나를 손가락질 해다오" - 전 홍익대학교 총장 이항녕}}</ref> 이렇게 승진을 거듭하던 김대우는 [[태평양 전쟁]] 종전 두달 전인 [[1945년]] 6월 [[경상북도]] 지사에 임명되어 광복을 맞았다.
|임기 = [[1943년]] [[8월 18일]] ~ [[1945년]] [[6월 16일]]
|임기 = [[1945년]] [[6월 16일]] ~ [[1945년]] [[8월 15일]]
|임기 = [[1945년]] [[8월 15일]] ~ [[1945년]] [[10월 19일]]
- 김대중
대학 진학을 포기한 김대중은 [[목상고등학교|목포상업학교]](목상고등학교)를 [[1944년]] 봄에 졸업하였다.<ref>[http://news.inews24.com/php/news_view.php?g_serial=436226&g_menu=050220 [김前대통령 서거]민주화의 거목 김대중, 그 파란만장했던 삶] 아이뉴스 2009.08.18</ref> 졸업 후엔 일본의 징집을 피하기 위해 목포상선회사에 경리사원으로 입사하였다.<ref>[http://article.joinsmsn.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3733076&cloc= 가택연금 55회...투옥 6년...망명...사형선고]《중앙일보》</ref>[[1945년]] 해방이 되자 김대중은 종업원 대표로 추대되어 종업원단체가 조직한 회사 경영위원회 위원장에 선출되었다. 정치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이 해 [[여운형]]이 이끄는 건국준비위원회 목포지부에 참여하여 선전부원으로 활동하게 된다. [[건국준비위원회]]의 선전책인 임영춘의 추천으로 건준 목포시 지부에 가입해 선전책에 종사하는 한편 목포청년동맹에 가담하여 활동하였다. 그해 9월 건국준비위원회가 [[조선인민공화국]] 수립으로 발전적 해체라는 이름하에 해체되자 이채현의 추천으로 [[김두봉]]이 [[1946년]] [[2월]]에 [[연안파]] 공산주의자들과 함께 창당한 [[공산주의]] 정당인 [[조선신민당]]에 입당하여 조직부장으로 활동하는 한편, 민주청년동맹 목포시 지부에 가입하여 부위원장으로 활동을 병행하였다.<ref name="안기부 문건">[http://monthly.chosun.com/client/news/viw.asp?nNewsNumb=200210100031&ctcd=&cpage=1 미공개 자료를 中心으로 쓰는 김대중 연구(6) 좌익 행동대원 출신의 대한민국觀] 월간조선 2002년 10월호</ref>
- 김동선 (1905년)
초기에는 [[군 (행정구역)|군]]에서 군속으로 근무하다가 [[1936년]]에 [[경기도]]에 발령받았다. 경기도 학무과 제2계장, 경기도 [[연천군]] 권업과장 등을 거쳐 일제 강점기 말기인 [[1944년]]에는 [[수원읍]]에서 부읍장을 지냈다. [[태평양 전쟁]] 종전 직전인 [[1945년]]에 경기도 [[용인군]] 군수에 임명되었다.
|임기 = [[1945년]] [[4월 20일]] ~ [[1945년]] [[8월 15일]]
|임기 = [[1945년]] [[8월 16일]] ~ [[1947년]] [[12월 31일]]
- 김동조 (1918년)
| 장녀 || [[1945년]] || 모건스탠리 부사장. 최융호([[1943년]]~, 제너럴 마리타임 사장)과 결혼.
- 김동한 (1919년)
[[1945년]] [[12월 15일]] 사제 서품을 받았다. 그 뒤 [[1948년]] [[8월]] [[경상북도]] [[상주시|상주군 함창읍]] 소재 함창동성당에서 본당 사제로 부임하여<ref>[http://www.catholicimage.org/comm/board/view.php?tid=church&division=&cate=&cate1=&schf=&schv=&lskin=list&idxNo=3434&refresh=true Catholic Image - Catholic Image<!-- 봇이 붙인 제목 -->]</ref> 1949년 6월까지 사목하였다.
- 김두환
[[1945년]] 광복과 함께 귀국한 이후에는 예산군에서 김두환회화연구소를 열었으며 예산농업중학교에서 미술 교사로 재직했다. [[1948년]] 3월에는 [[경향신문|경향신문사]]의 후원으로 동화백화점(현재의 [[신세계 (백화점)|신세계백화점]]의 전신) 갤러리에서 개인전을 열었고 [[1949년]]에는 제1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서 《향원정》으로 입선했다.
- 김병일(1945)
'''김병일'''(金炳日, [[1945년]] [[9월 1일]] [[경상북도]] [[상주시]] ~ )은 대한민국의 공무원이다. 본관은 [[김녕 김씨|김녕]]이며, [[경상북도]] [[상주시|상주]] 출신이다.
- 김병현 (독립운동가)
[[1940년]] [[동래중학교]] 재학 중 양중모·남기명·김지훈 등과 함께 [[독서회]]를 조직하였다.<ref name="조선일보" /><ref name="서울신문">[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080701027019 <nowiki>[부고]</nowiki> 독립운동가 김병현 선생 별세], 서울신문. </ref> 졸업후 [[1941년]] 독서회를 강화하고 [[조선독립당]]을 조직하여 항일투쟁을 하였다. 이후 항일결사단체인 자일회(紫一會)와 순국당(殉國黨) 등과 연대하여 광범위한 항일투쟁을 주관하다가 [[1944년]] [[8월]] [[조선독립당]]이 [[일본 제국|일제]]에 발각되자 수감되어 [[1945년]] [[6월]]까지 [[부산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1982년]] [[대통령표창]],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ref name="조선일보" /><ref name="서울신문" /><ref name="한국일보">[http://news.hankooki.com/lpage/people/200806/h2008063003102184840.htm 애국지사 김병현 선생 별세]{{깨진 링크|url=http://news.hankooki.com/lpage/people/200806/h2008063003102184840.htm }}, 한국일보.</ref>
- 김사연 (1896년)
|장=李完用의 後孫들, 8.15 前 그들의 功績은 이렇다!}}</ref> 이 단체는 학병 대상자의 가정을 방문해 참전을 강요하고 간담회를 여는 등의 활동을 했다. 일제가 태평양 전쟁에서 패하기 직전인 [[1945년]] 3월에는 중추원 참의 자격으로 〈반도 참정의 감사와 요망〉이라는 담화를 발표하기도 했다.
- 김상기
* [[김상기 (법조인)|김상기]](金相基, [[1945년]] ~ )는 [[청주지방법원]]과 [[서울행정법원]]에서 법원장을 역임한 법조인이다.
- 김석원
| 복무 기간 = 1915년~1945년(일본제국 육군) <br/> 1948년~1949년(대한민국 육군) <br/> 1950년~1956년(대한민국 육군)
[[1945년]] 광복 당시에는 대좌 계급으로 평양에서 근무하고 있었는데, 광복 후 바로 상경하여 이응준이 위원장을 맡은 [[조선임시군사위원회]]에 참가했다. 이 조직은 일본 육사 출신의 장교 모임인 [[계림회]]가 주도하여 조직한 군사 단체였다. 그는 대한민국 국군 대령으로 임관하여 일본군이나 [[만주국군]] 출신 인사가 국군의 중추를 형성하게 하는데 기여했다.
- 김석원 (1893년 9월)
| 복무 기간 = 1915년~1945년(일본제국 육군) <br/> 1948년~1949년(대한민국 육군) <br/> 1950년~1956년(대한민국 육군)
[[1945년]] 광복 당시에는 대좌 계급으로 [[평양]]에서 근무하고 있었는데, 광복 후 바로 상경하여 이응준이 위원장을 맡은 [[조선임시군사위원회]]에 참가했다. 이 조직은 일본 육사 출신의 장교 모임인 [[계림회]]가 주도하여 조직한 군사 단체였다. 그는 대한민국 국군 대령으로 임관하여 일본군이나 [[만주국군]] 출신 인사가 국군의 중추를 형성하게 하는데 기여했다.
- 김석원 (기업인)
'''김석원'''(金錫元,[[1945년]] [[4월 22일]] ~ )은 [[대한민국]]의 前 기업인이자, 前 정치인이다. 본관은 [[김해 김씨|김해]].
[[분류:1945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구광역시 출신]][[분류:대한민국의 기업인]][[분류:대한민국의 제15대 국회의원]]
- 김성수 (1891년)
[[1940년]] [[8월 10일]] 일제가 동아일보를 강제폐간시키자, 김성수는 고향으로 돌아가 [[1945년]] [[8.15 광복]]때까지 칩거,은거하였다.<ref name="동아일보"/> [[1941년]] [[태평양 전쟁]] 이후 [[조선총독부|일제]]로부터 [[창씨개명]]을 강요당하였으나 거절하였다. 또한 일제가 제안한 귀족원(상원의원)을 거절하였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47&aid=0002033698 "교학사의 '김성수'서술, 위키백과와 90% 동일"]</ref>
[[1944년]] 4월 [[조선총독부]]의 지시로 '경성척식경제전문학교'로 강제로 격하당하였으나<ref>{{웹 인용|제목=고려대학교 약사|url=http://www.korea.ac.kr/content/K/K2_1_2_01.jsp|웹사이트=고려대학교|확인날짜=2011-06-04}}</ref><ref name="ku1962">{{뉴스 인용|제목=캠퍼스의 봄 (2) 고려대학편(高麗大學篇)|url=http://dna.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62031400329204007&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62-03-14&officeId=00032&pageNo=4&printNo=5013&publishType=00020&doNotReadAnyMore=notClose|출판사=경향신문|날짜=1962-03-14|확인날짜=2011-07-01}}</ref>, [[1945년]] 9월 광복을 맞아 [[보성전문학교]]로 교명을 환원하였다.<ref>{{웹 인용|제목=연표|url=http://www.korea.ac.kr/content/K/K2_1_3_03.jsp|웹사이트=고려대학교|확인날짜=2011-06-06}}</ref>
[[1945년]] 8월, 일제가 패망하여 항복하고 [[조선총독부|총독부 총독]] [[아베 노부유키]]가 치안권 이양을 [[송진우 (정치인)|송진우]]에게 제시하였으나, 송진우는 거부의사를 알려왔고 김성수도 이에 동의하였다고 한다.<ref name="동아일보"/> 그러나, 이에 대해서 훗날 [[1957년]]에 前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으로 지냈던 [[엔도 류사쿠]]는 인터뷰에서 '이 같은 주장은 사실무근'이라고 밝혔다.<ref><한국현대사 인물연구2>, 백산서당 출판사. -고하 송진우의 생애와 활동- 부분. p140.</ref>
1937년부터 1945년까지 [[실력양성운동]]을 비롯한 [[민족운동]]은 총독부의 가혹한 [[민족말살정책]]으로 탄압을받아 '합법적 공간'에서의 활동이 어려워지자 1942년 전후로는 김성수는 완전히 친일파로 변절했다.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폐간되었다가 [[1937년]] 6월 복간된 동아일보에는 일본의 침략전쟁을 위한 지원병을 적극 권장하거나 미화하는 기사글이 여러 번 올라왔다.<ref>http://dna.naver.com/search/searchByKeyword.nhn#%7B%22mode%22%3A1%2C%22sort%22%3A0%2C%22trans%22%3A%221%22%2C%22pageSize%22%3A10%2C%22keyword%22%3A%22%EC%A7%80%EC%9B%90%EB%B3%91%22%2C%22startIndex%22%3A0%2C%22page%22%3A1%2C%22status%22%3A%22success%22%2C%22startDate%22%3A%221938-01-01%22%2C%22endDate%22%3A%221938-12-31%22%7D</ref> 5월부터 보성전문학교 교장으로 다시 취임해 있었던 김성수는 [[7월 7일]]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김성수는 전쟁의 의미를 선전하기 위해 마련된 [[경성방송국]]의 라디오 시국강좌 담당 및 연설을 하였고(7월 30일과 8월 2일 이틀 동안), 8월 경성군사후원연맹에 국방헌금 1000원을 헌납했다.<ref>[http://www.sisainlive.com/news/articleView.html?idxno=8097# ‘고려대학’은 2010년판 신명심보감? ]</ref> 9월에는 총독부 학무국이 주최한 '시국강연대'의 일원으로 춘천, 철원 등 강원도 일대에서 연사로서 시국강연에 나섰다.<ref name="malsso1"/>, [[1938년]] 6월에는 친일단체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발기인·이사 및 산하의 비상시생활개선위원회 위원 등을 지냈다. 이밖에 국민총력조선연맹 발기인 및 이사(1940)·국민총력조선연맹 총무위원(1943), 흥아보국단(興亞報國團) 결성 준비위원(1941), 조선임전보국단 감사(1941) 등으로 활동하면서 [[1943년]]~[[1945년]] 기간 동안 [[매일신보]]와 [[경성일보]], 잡지 《춘추》등에 학병제·징병제를 찬양하는 내용의 총 25편의 논설 글 및 사설을 기고했다.<ref>《대한민국 친일진상규명위원회 보고서》, 4-3권. p43~p97</ref>
[[1945년]] [[8월 16일]] [[여운형]], [[안재홍]] 등으로부터 [[건국준비위원회]]에 참여해달라는 요청을 받았으나 그러나 그는 [[송진우 (정치인)|송진우]], [[김준연]] 등과 상의한 뒤 [[대한민국 임시정부]] 봉대를 이유로 [[건국준비위원회|건준]] 참여를 거절하였다.
[[1945년]] [[9월 8일]] [[조선인민공화국]] (인공)의 내각이 발표되었는데, [[박헌영]] 진영의 추천으로 김성수는 [[조선인민공화국|인공 내각]]의 인민위원<ref name="해공주1"/> 겸 [[문교부|문교부장]]으로 선임되었다.<ref name=autogenerated1 /><ref>[[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 〈1940년대편 1권〉(인물과사상사, 2004년) 60쪽.</ref> 그러나, 김성수는 [[송진우 (정치인)|송진우]]와 함께 [[충칭]] [[대한민국 임시정부|임시정부]]가 정통성이라는 '임정봉대론'을 주장하며 [[건준]]과 [[조선인민공화국]] 내각을 모두 부정하였다.<ref name="동아일보"/> 김성수는 [[송진우 (정치인)|송진우]], [[백관수]], [[장덕수]], [[윤보선]] 등과 창당을 준비하였고, [[8월 16일]] 창당된 [[원세훈 (1887년)|원세훈]], [[김약수]]의 [[고려민주당]]을 통합하여 [[한국민주당]]을 창당, 조직하였다. 10월 [[이승만]]이 귀국하여 [[독립촉성중앙회]]를 세우자, [[송진우 (정치인)|송진우]] 등과 함께 가입하였다.
[[1945년]] [[10월 28일]] [[김창숙]] 등과 함께 [[순국의열사봉영회]] 기금관리위원에 위촉되었다.<ref>서중석, 《이승만의 정치 이데올로기》 (서중석, 역사비평사, 2006) 361페이지</ref> [[1945년]] 11월 [[임시정부]] 귀국 제1진이 환국하자 [[송진우 (정치인)|송진우]], [[허정]], [[장택상]], [[조병옥]], [[김준연]]과 함께 경교장을 방문, 6시간을 기다린 후 그들을 만났다.
1945년 12월 3일. 임시정부요인 귀국기념 사진.
[[1945년]] 12월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대한민국 임시정부|임시정부]] 환영회 참석하였다. 12월 [[김구]](金九)가 [[모스크바]] 3상회담에 반발, 강력한 [[반탁운동]]을 추진하자 김성수도 여기에 참가, [[12월 30일]] 결성된 신탁통치반대 국민총동원위원회 위원이 되었다.<ref>아! 비운의 역사현장 경교장(1993, 백범사상실천운동연합) 255</ref>
** 생부: [[김경중 (1863년)|김경중]]([[1863년]] ~ [[1945년]] [[4월 27일]]) - 통정대부 비서원승 역임
*** 사돈 : [[송진우 (정치인)|송진우]](宋鎭禹, [[1890년]] [[5월 8일]] ~ [[1945년]] [[12월 30일]])<ref>김성수의 오랜 친구이자, 그의 양손자 [[송상현 (1941년)|송상현]]은 김성수의 조카 [[김상협]]의 사위이다.</ref>
*** 매제 : [[김용완 (1904년)|김용완]](金容完, [[1904년]] [[4월 9일]] ~ [[1996년]] [[1월 17일]], 누이 [[김점효]]의 남편<ref>1945년 12월-1946년 6월 삼양상사 사장, 1970년 경방 회장 지냄</ref>), [[경방]] 일가
- 김신용 (시인)
| 출생일 = [[1945년]]
'''김신용'''(金信龍, [[1945년]] ~ )은 [[대한민국]]의 시인이다. [[부산광역시|부산]]에서 태어났다. 14세 때부터 부랑생활, 지게꾼 등 온갖 밑바닥 직업을 전전하였고, [[1988년]] 첫 시집 《버려진 사람들》에 나오는 시인의 당시 직업은 공사장 잡부였다.<ref>{{서적 인용
[[분류:1945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한민국의 시인]][[분류:대한민국의 소설가]][[분류:부산광역시 출신 인물]][[분류:노작문학상 수상자]]
- 김양 (1953년)
** 백부 : [[김인 (1917년)|김인]](金仁, [[1917년]] [[11월 12일]] ~ [[1945년]] [[3월 29일]])
- 김영수 (1923년)
|생애=[[1923년]] [[5월 13일]] ~ [[1945년]] [[4월 16일]]
|복무 기간=[[1944년]] ~ [[1945년]]
'''김영수'''(金泳秀, <small>일본식 이름:</small> 金山秀雄('''가네야마 히데오'''), [[1923년]] [[5월 13일]] ~ [[1945년]] [[4월 16일]])는 [[일제 강점기]]의 군인으로, [[김석원]]의 둘째 아들이며 [[경성부]](현재의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출신이다.
[[1945년]] [[4월 16일]] [[필리핀]] [[레이테 섬]]에서 연합군과 교전을 벌이던 도중에 전사했으며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자 명단]]의 군 부문에 포함되었다.
[[분류:1923년 태어남]][[분류:1945년 죽음]][[분류:태평양 전쟁 참전 중 사망자]][[분류:일제 강점기의 군인]][[분류:친일인명사전 수록자]][[분류:일본 육군예비사관학교 동문]][[분류:서울특별시 출신]]
- 김영환 (1921년)
|복무 기간=[[1945년]] ~ [[1954년]]
[[서울특별시|서울]] 출생으로 [[1938년]] 3월 서울를 졸업하고 [[1944년]] 1월 [[일본]] [[간사이 대학]] 법과에 유학하여 1년을 중퇴로써 마친 후 [[1945년]] 학병 징집되어 일본 육군 예비사관학교를 졸업하였다.
- 김윤정 (1869년)
[[1910년]](융희 4년) [[10월]] [[한일 합방]] 후 관직에서 물러났다가 그해 11월 [[조선총독부]]의 특채로 등용되어 [[전라남도]] 참여관과 [[경기도]] 참여관을 거쳐 [[충청북도]][[도지사]]로 고속승진한 후 [[1926년]] 중추원 참의가 되었다가 [[1945년]] 중추원 고문직에 올랐다. 그의 딸 [[윤고려]]는 개화파 정치인 [[윤치오]]의 두 번째 부인으로 결혼 후 남편의 성을 따라 윤씨로 성을 바꾸기도 했다. 본관은 [[청도 김씨|청도]]이다.
[[1926년]] 도지사 직에서 퇴임한 후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에 처음 임명되었으며, 이후 중추원 참의직을 6차례나 연임하다가 광복 직전인 [[1945년]] 중추원 고문직에 올랐다. [[1935년]] 편찬된 총독부의 《조선공로자명감》에는 조선인 공로자 353명 중 한 명으로 올라와 있다.<ref>{{뉴스 인용
[[1945년]] [[4월]] 중추원 고문직에 올랐다. 다시 [[1945년]] [[6월]]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으로 임명되었지만<ref name="네이트1"/> 2개월 뒤인 [[8월]] 광복을 맞이하였다.
[[1945년]] 광복 이후 [[11월]] 환국한 [[김구]]를 찾아 자신이 경무관으로 김구를 심문하던 옛 인연을 대화하기도 했다. [[돈암장]]의 [[이승만]]도 찾아갔으나 [[이승만]]은 [[미국]]에 밀사 파견당시 외면한 일을 기억하여 꼴도 보기 싫다며 냉대한 후 내쫓았다.
- 김인영 (목회자)
[[일제 강점기]] 말기인 [[1941년]] 협성신학교가 폐쇄되고 설치된 감리교신학교 교장에 취임하였고, [[태평양 전쟁]] 기간 중 일제에 협력한 행적이 있다. 일제가 강제로 교파를 통합하여 [[1945년]] 발족시킨 일본기독교 조선교단의 의장을 맡았다.<ref>{{웹 인용
- 김재섭 (1945년)
'''김재섭'''(金在燮, [[1945년]] [[12월 9일]] ~[[2016년]], [[부산광역시|부산]])은 [[대한민국]]의 외무공무원이다.
[[분류:1945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한민국의 외교통상부 차관]][[분류:체코 주재 대한민국 대사]][[분류:인도네시아 주재 대한민국 대사]][[분류:러시아 주재 대한민국 대사]][[분류: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문학부 동문]][[분류:부산광역시 출신 인물]]
- 김정렬 (1917년)
| 복무 기간 = 1941년 ~ 1957년 1월 6일 <br/> {{육군|일본제국}}[[1941년]] ~ [[1945년]] <br />{{육군|대한민국}}[[1946년]] ~ [[1949년]] <br />{{공군|대한민국}}[[1949년]] ~ [[1957년]] [[1월 6일]]
| 최종 계급= 일본 육군 대위(1945년) <br /> 대한민국 육군 대령(1949년) <br /> {{대한민국 국군 계급장|중장|공군}} 전역(대한민국 공군 예편) - [[1957년]] [[1월 6일]]
- 김준원 (1888년)
|복무 기간={{육군|일본제국}}[[1914년]] ~ [[1945년]]<br />{{육군|대한민국}} [[1946년]] ~ [[1954년]]
- 김진 (1949년)
* 큰아버지: [[김인 (1917년)|김인]](金仁, [[1917년]] [[11월 12일]] ~ [[1945년]] [[3월 29일]])
- 김홍집 (1842년)
그는 [[개화파]]가 몰락하면서 역적으로 단죄되었고, [[1910년]] [[한일 합방|한일 병합]]후에는 [[친일파]]의 득세를 불러온 역적으로 단죄되어 재평가받지 못하였다. [[1945년]] 해방 후 사위 [[이시영]]에 의해서 복권 여론이 조성되었고, [[1960년]]대 가서야 개혁 노력에 대한 연구와 평가가 시작되었다.
- 남궁염
남궁염은 이승만의 독립운동 뒷바라지와 함께 뉴욕동지회를 꾸려나가기도 하였다. [[1945년]] [[8월]] 해방이 되고 그해 [[10월]] 이승만이 귀국하자 동지회 뉴욕지부를 지도하였으며, 이승만이 대통령에 당선되었을 때도 남들처럼 귀국하지 않고 뉴욕 한인회를 지도하였다. 정부 수립 직후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특별히 뉴욕총영사가 되어 활동했다.<ref>"정부인사발령", 동아일보 1949년 02월 23일자 1면, 정치면</ref> 한편 그의 부인 우복자는 [[하와이]] 호놀룰루의 한인 동지회의 지부장이 되었다. 정부 수립 이후에도 매년 하순 혹은 가을에 개최되는 미국내 한인대회에 반드시 참석하였다.
- 남성훈
'''남성훈'''(南星薰<ref>[http://dna.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7011600329212001&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87-01-16&officeId=00032&pageNo=12&printNo=12709&publishType=00020 《경향신문》1987년 1월 16일]</ref>, {{본명|권성준}}, [[1945년]] [[2월 13일]] ~ [[2002년]] [[10월 18일]])는 [[대한민국]]의 [[배우]]이다.
[[분류:1945년 태어남]][[분류:2002년 죽음]][[분류:대한민국의 남자 연극 배우]][[분류:1966년 데뷔]][[분류:오산시 출신]][[분류:대한민국의 남자 성우]][[분류:창극 배우]][[분류:대한민국의 남자 뮤지컬 배우]][[분류:20세기 대한민국 사람]][[분류:21세기 대한민국 사람]][[분류:대한민국의 남자 텔레비전 배우]][[분류:대한민국의 남자 영화 배우]][[분류:서라벌예술대학 동문]][[분류:불교 이탈자]][[분류:대한민국의 로마 가톨릭교도]]
- 남진(가수)
|| '''출생''' ||<(> [[1945년]][*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25&aid=0002874381|프로필상 46년이라 되어 있으나 완벽히 잘못된 정보이다. 본인이 운전면허증을 제시하면서 45년생이라고 직접 밝혔다.]]] [[9월 27일]] ([age(1945-09-27)]세), [[충청남도]] [[부여군]] ||
[[분류:부여군 출신 인물]][[분류:한국 남가수]][[분류:1945년 출생]][[분류:1965년 데뷔]][[분류:히든 싱어 역대 출연자]]
- 노덕술
광복 후, [[1945년]] 8월부터 [[평안남도]] 평양경찰서 서장을 맡고 있다가 소련군이 진주하자, 이내 곧 [[공산주의]] 세력에게 체포되어 몇 달간 구금되었다가 풀려났다. 그는 신변의 위협을 느껴 [[1945년]] 말에 월남을 하게 된다. 다음해 [[1946년]]에 장택상에 의해 수도경찰청 수사과장에 기용되어 경찰 내부의 '반이승만 세력' 숙청, '좌익분자' 검거 등을 주도하였다. [[1946년]] 1월 경기도 경찰부 수사과장에, 9월 제1경무총감부 관방장 겸 수도관구 경찰청 수사과장에 임명되었다. 그해 4월, 당시의 [[동아일보]] 사장을 암살한 한현우 등을 검거함으로써 장택상을 비롯한 경찰 수뇌부들의 인정을 받았다.
- 류영수
'''류영수'''(柳永洙, [[1945년]] [[5월 25일]] ~ )은 현재 [[넥센 히어로즈]]의 육성군 재활코치이다.
[[분류:1945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분류:KBO 리그 투수]][[분류:대한민국의 야구 선수]][[분류:대구상업고등학교 동문]][[분류:경상중학교 동문]][[분류:대구칠성초등학교 동문]][[분류:고흥 류씨]]
- 문인수(시인)
| 출생일 = [[1945년]]
'''문인수'''(文仁洙, [[1945년]] ~ )는 [[대한민국]]의 시인이다. [[경상북도]] [[성주군|성주]] 출신이다.
[[분류:1945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한민국의 시인]][[분류:성주군 출신 인물]][[분류:노작문학상 수상자]][[분류:미당문학상 수상자]][[분류:김달진문학상 수상자]]
- 문제안
[[1920년]] [[서울특별시|서울]]에서 태어났다. [[1943년]] [[경성방송국]]에 입사했다. [[경성방송국]]에 근무하던 도중 해방을 맞이했다. [[1945년]] [[9월 9일]] 제1방송을 [[한국어]] 방송 채널로 바꾸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광복 이후 국내 최초의 방송 취재 기자가 되었으며, [[미군정]]과의 의견대립으로 방송사를 그만둔 다음에도 언론계에 투신, [[조선통신]], [[경향신문]], [[자유신문]], [[서울신문]], [[조선일보]]등 기자로 지내며 활동하였다.
- 박관수 (1897년)
[[1945년]] [[8월]] 광복 후 잠시 은거하다가 다시 교육계에 투신하였으며 [[1952년]]에 [[경북대학교]] 교수로 임용되고, 이후 [[경북대학교]] 법정대학 학장 겸 교학처장 등을 지냈고, 52~57년 경북대학교 교수와 대전고등학교 교장, [[울산농업고등학교]]와 [[대전고등학교]], [[옥천여자고등학교]] 교장 등을 거쳐 [[1961년]] [[한양대학교]] 교수 등을 역임하였다.
- 박기채
광복 직후 결성된 [[조선문화건설중앙협의회]] 영화 부문과 [[조선영화건설본부]]에 참여했으며, [[1945년]] 말에 [[조선프롤레타리아영화동맹]]과의 통합으로 발족한 [[조선영화동맹]]의 중앙집행위원도 맡았다. 그러나 조선영화동맹의 좌경화로 안석영을 비롯한 [[우익]] 영화인들은 이듬해 3월 조선영화동맹을 탈퇴하고 [[영화감독구락부]]를 결성하였다. 박기채도 영화감독구락부에 동인으로 참가하여 대표적인 우익 영화인으로 분류되었다.
- 박문웅(1890)
[[1944년]] [[12월 22일]] [[상주군|상주]][[군수]]에서 [[의원면직]]하였다. 이후 [[12월]]말 [[밀양]][[군수]]를 거쳐 [[1945년]] 해방 후 관직에서 물러난 뒤 [[대구]] 침산 근처로 낙향하였다. [[1945년]] [[9월 2일]] 미군정청 경상북도 자문관에 임명되었으나 12월 26일 사퇴하였다. [[미군정]]하에서 그의 능력을 인정하여 계속 채용하려 하였으나 사양하고 대구 침산 근처에서 아버지 [[박중양]]과 일본인 계모와 생활하였다.
[[1945년]] [[9월 12일]]부터 [[1946년]]까지 [[달성군|달성]][[군수]]를 역임하였다.
- 박삼구
'''박삼구'''(朴三求, [[1945년]] [[3월 19일]]~ )는 [[금호아시아나그룹]] 6대 회장이며 [[금호아시아나그룹]] 창업주 [[박인천]]회장의 셋째 아들이다. 갑작스럽게 악화된 [[아시아나항공]]의 재무구조 문제에 대해 책임지고 물러나겠다고 하여 현재 [[금호아시아나그룹]] 회장직은 공석중이며 [[금호아시아나그룹]]은 당분간 이원태부회장 중심으로 비상경영체제에 돌입할 것으로 보이며 박삼구회장의 복귀는 없을 것이라는게 그룹 내부의 의견이다.
- 박순천 (국회의원)
[[1945년]] 광복 직후 [[건국부녀동맹]]에 참가하면서 정치 활동을 시작, 우익 여성 단체인 [[독립촉성애국부인회]] 회장(1947), 《[[부인신문]]》 사장 등을 지냈다. [[1948년]] [[5월 10일]] 제헌국회의원(종로 갑구) 총선에서 낙선하였다. 같은 해 [[8월 15일]]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되자 감찰위원회 위원으로 임명되었고, 49년 [[대한부인회]] 회장, [[대한여자청년단]] 단장 등을 지냈다.
- 박인천
** 3남 : [[박삼구]] (朴三求, [[1945년]] - , 전 [[금호아시아나그룹]] 회장)
- 박인환 (배우)
'''박인환'''(朴仁煥<ref>[http://focus.chosun.com/people/people01.jsp?id=1207 포커스 인물], 《조선닷컴》, 2011년 5월 30일 확인.</ref>, [[1945년]] [[1월 6일]] ~ )은 [[대한민국]]의 [[배우]]이다. [[1965년]] TV 드라마 《긴 귀항 항로》로 데뷔하였다.
[[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1945년 태어남]][[분류:1965년 데뷔]][[분류:광주광역시 출신]][[분류:중앙대학교 동문]][[분류:대한민국의 로마 가톨릭교도]][[분류:대한민국의 남자 텔레비전 배우]][[분류:대한민국의 남자 영화 배우]][[분류:대한민국의 남자 뮤지컬 배우]][[분류:대한민국의 남자 연극 배우]]
- 박차정 (독립운동가)
유해는 해방 직후 [[1945년]] [[12월]] 송환, 김원봉의 고향인 [[밀양시|밀양]]의 송산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작품으로는 시 〈개구리 소래〉와 소설 〈철야〉, [[일본어]]로 쓴 수필 〈가을 아침〉 등이 있다.
- 방용석
'''방용석'''(方鏞錫, [[1945년]] 11월 6일 ~ )은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다. [[대한민국 제15대 국회의원 목록|제15대 국회의원]], 제19대 [[대한민국 노동부|노동부]] 장관, [[한국가스안전공사]] 사장, [[근로복지공단]] 이사장을 역임했다. [[충청북도]] [[진천군]] 출신이며, 본관은 [[온양 방씨|온양]]이다.
[[분류:1945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진천군 출신]][[분류:온양 방씨]][[분류:대한민국의 노동 운동가]][[분류:대한민국의 노동부 장관]][[분류:김대중 정부의 국무위원]]
- 배한성
'''배한성'''(裵漢星, [[1945년]] [[10월 3일]] ~ )은 [[대한민국]]의 [[성우]]이다. [[1966년]] [[동양방송]] 2기 공채 성우로 데뷔하였다.<ref>[http://news.donga.com/3/all/20120127/43606847/1 <nowiki>[O2/내 인생을 바꾼 사람]</nowiki> 대입 포기하려는데 등록금 들고온 벗이여!], 동아일보</ref>
- 백낙청
** 동생 : [[백낙서]](白樂曙, [[1945년]] ~ ), 인제대 석좌교수
- 부완혁
[[태평양 전쟁]] 종전 후에는 [[1945년]] [[8월 15일]] 8.15 해방 이후 [[미군정]] 하에서 [[고려대학교]] 법과 교수로 임용되어 학계에서 잠시 활동하였다. [[1948년]] 국무총리 [[이범석 (1900년)|이범석]]의 비서관이 되면서 다시 관계로 돌아갔다. [[1952년]]에는 기획처 물동국장 및 한미합동경제위원회 사무국장을 맡았다.
- 서상일
보성전문학교를 졸업하였다. 1909년 [[안희제]]·[[김동삼]]·[[윤병호]] 등과 함께 항일무장투쟁 단체인 [[대동청년당]](大東靑年黨)을 조직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그 후 한때 만주에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계속했으며, [[1945년]] 8·15광복 후에는 [[송진우 (정치인)|송진우]]·[[장덕수]] 등과 함께 [[한국민주당]](韓國民主黨)을 창설하고, 사실상 집단지도체제하의 정당의 최고위원이라 할 수있는 8총무단의 일원으로 선임되었다.
- 서유석
'''서유석'''([[1945년]] [[1월 8일]] ~ )은 [[대한민국]]의 [[싱어송라이터]]이자 방송인 겸 [[기업가]]이며 [[번역|번역문학가]] 겸 [[평론|교통문화평론가]]이다.
[[분류:1945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한민국의 남자 가수]][[분류:대한민국의 작사가]][[분류:1968년 데뷔]][[분류:대한민국의 작곡가]][[분류:대한민국의 남자 싱어송라이터]][[분류:대한민국의 포크 록 음악가]][[분류:대한민국의 라디오 진행자]][[분류:대한민국의 방송인]][[분류:서울창천초등학교 동문]][[분류:서울고등학교 동문]][[분류:성균관대학교 동문]][[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대한민국의 음악 프로듀서]][[분류:대한민국의 개신교도]][[분류:대한민국의 번역가]][[분류:대한민국의 수필가]][[분류:대한민국의 음악 평론가]][[분류:대한민국의 교통 평론가]][[분류:대한민국의 문화 평론가]][[분류:대한민국의 기업인]]
- 서유석 (가수)
'''서유석'''([[1945년]] [[1월 8일]] ~ )은 [[대한민국]]의 [[싱어송라이터]]이자 방송인 겸 [[기업가]]이며 [[번역|번역문학가]] 겸 [[평론|교통문화평론가]]이다.
[[분류:1945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한민국의 남자 가수]][[분류:대한민국의 작사가]][[분류:1968년 데뷔]][[분류:대한민국의 작곡가]][[분류:대한민국의 남자 싱어송라이터]][[분류:대한민국의 포크 록 음악가]][[분류:대한민국의 라디오 진행자]][[분류:대한민국의 방송인]][[분류:서울창천초등학교 동문]][[분류:서울고등학교 동문]][[분류:성균관대학교 동문]][[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분류:대한민국의 음악 프로듀서]][[분류:대한민국의 개신교도]][[분류:대한민국의 번역가]][[분류:대한민국의 수필가]][[분류:대한민국의 음악 평론가]][[분류:대한민국의 교통 평론가]][[분류:대한민국의 문화 평론가]][[분류:대한민국의 기업인]]
- 석호문
| 복무 기간 = [[1942년]] [[3월 30일]] ~ [[1945년]] [[12월 19일]]
경상북도 성주 출생인 그는 1942년 일본군 강제 징집된 이후 2년이 지난 1944년 6월 중화민국 [[허난 성]](河南省)에서 일본군을 탈출하여 대한광복군 진영에 도착하였고 이후 대한광복군 제2지대 예하 제3구대 제1분대에 정식 입대를 하였으며, 이후 1945년 5월, 한미합작군사훈련에 본격 참가하여 대한광복군 세계 작전 정보파괴반에서 교육 과정을 수료한 후, 대한광복군 예하 국내정진군대 황해도반에 편성되어 대기하던 중 1945년 8월 15일, 황해도 해주에서 조선 광복을 목도하였다.
이후 [[1945년]] [[12월 19일]]을 기하여 대한광복군 상사 예편한 그는 이듬해 [[1946년]] 1월에서 13년 후 [[1959년]] 3월까지 [[한국독립당]] 초급행정특보위원을 지냈고 [[1959년]] 3월에서 [[1966년]] 6월까지 [[한국독립당]] 대표행정자치위원을 지냈으며 이후 [[1966년]] [[한국독립당]]을 탈당하였다.
- 손석도
[[1945년]] 8월 [[태평양 전쟁]] 종전 시점에 경시 계급에 있던 조선인 8명 중 한 명이었다.<ref>{{서적 인용
- 송상현 (1941년)
* 조부 : [[송진우 (정치인)|송진우]](宋鎭禹 [[1890년]] ~ [[1945년]])
- 송종익
[[1936년]] 북미 대한인국민회 총회관 건축 위원으로 임명되었다. [[1941년]] [[하와이 주|하와이]]에서 열린 해외한족대회 때 북미 대한인국민회 대표로 참석하여 재미한족연합위원회를 설립했고 집행부 위원 겸 재무를 맡았다. 1941년 12월에 열린 대한인국민회 총회에서 [[로스앤젤레스]] 대표로 참가하여 대한인국민회 부의장으로 선출되었고 [[1944년]]에는 주미외무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된다. [[1945년]] 11월 재미한족연합위원회 대표단의 일원으로 귀국했지만 몇 달 뒤에 다시 미국으로 건너간다. [[1956년]] [[1월 7일]] 사망했으며 [[1995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 신석린
[[1945년]]에 태평양 전쟁이 종전되고 [[미군정]]에 의해 중추원이 해체되었을 때까지 중추원 참의로 재직 중이었으며, 80대의 고령으로 생존해 있었다.
- 심호섭
* [[1935년]] ~ [[1945년]] [[10월]] 서울 [[관철동]]에서 내과의원을 개설하고 진료사업
* [[1945년]] [[9월]] ~ [[대한신경정신의학회]] 설립 · 초대 회장<ref>[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543105&cid=46638&categoryId=46638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대한신경정신의학회]</ref>
* [[1945년]] [[10월 7일]] ~ [[1946년]] [[8월 21일]] [[경성의학전문학교]] 교장<ref>[http://medicine.snu.ac.kr/ko/node/37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의 역사]</ref>
* [[1945년]] [[12월 23일]] [[대한내과학회]] 초대 회장<ref>[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535452&cid=46638&categoryId=46638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대한내과학회]</ref>
- 안종화
광복 후에는 [[1945년]] 말 결성된 [[조선영화동맹]] 중앙집행위원장을 맡았다가<ref>{{서적 인용 |저자=편집부|제목=한국영화사연구|날짜=2003-02-03|출판사=새미|출판위치=서울 |id={{ISBN|8956280614}}|페이지=243쪽}}</ref>, 영화동맹의 주도권을 [[좌익]] 계열 영화인들이 잡게 되면서 이탈한 영화인들의 모임 [[영화감독구락부]]에 참가<ref>{{서적 인용 |저자=편집부|제목=한국현대 예술사대계 1 (해방과 분단 고착 시기)|날짜=1999-12-22|출판사=시공사|출판위치=서울 |id={{ISBN|895270522X}}|페이지=98쪽}}</ref> 하는 등 [[우익]] 계열에서 활동했다. [[한국영화인협회]]의 전신인 대한영화협의회가 조직될 때도 이를 주도했다. 이후 [[서라벌예술대학]] 학장을 지냈고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이 되었으며 [[문화훈장]]도 수여받았다.
- 여정남
* [[1945년]] [[5월 7일]] [[대구 중구]] 전동(현 [[남일동]]) 출생.
[[분류:1945년 태어남]][[분류:1975년 죽음]][[분류:대한민국의 사형된 사람]][[분류:사형 집행 후 무죄가 밝혀진 사람]][[분류:교수형된 사람]][[분류:인혁당 사건]][[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분류:경북대학교 동문]][[분류:경북고등학교 동문]]
- 연규진
[[분류:한국 남배우]][[분류:1945년 출생]][[분류:평창군 출신 인물]][[분류:1969년 데뷔]]
|| '''출생''' ||[[1945년]] [[12월 8일]]([age(1945-12-08)]살), [[강원도]] [[평창군]]||
- 오명 (1946년 영화)
《'''오명'''》 (Notorious) 은 [[1946년]] 제작된 [[앨프리드 히치콕]] 감독, [[캐리 그랜트]], [[잉그리드 버그먼]] 주연의 첩보 영화이다. [[RKO 라디오 픽처스]]에서 배급하였으며 촬영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던 [[1945년]]에서 [[1946년]]에 제작되었다.
- 오세창
[[1945년]] 광복 이후에도 [[독립촉성중앙회]], [[민주의원]] 등에 참여하였다. [[서예]]가로도 전서, 예서, 초서에 능하고 조각도 하였으며, 둥그스름한 형태의 독특한 서체를 창안하여 위창체, 오세창체라 부른다. 본관은 [[해주 오씨|해주]], 자는 중명(仲銘), 아호는 위창(葦滄), [[천도교]] 도호는 한암(閒菴)이다.
[[1945년]] [[8월]] 광복 직후 [[9월]] 창당된 우익 계열의 보수 정당 [[한국민주당]]도 창당때 그를 공동 당수로 영입하려 시도했다. 그러나 그는 한민당 영수직을 거절하였다.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위원에도 추대되었으나 거절했다. 이어 매일신보(每日申報)의 명예사장과 서울신문 명예사장으로 추대되자 이를 수락하였다.
- 완친왕
사후 [[서울특별시]]동에 안장되었다가, [[1945년]] 광복 이후 도시계획에 의해 [[경기도]] [[고양시|고양군]](현재의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근처에 이장되었다.
- 원덕상
}}</ref> [[1935년]] 무렵에는 산림회(山林會) 및 도시연구회(都市硏究會) 상임간사, 조선생명보험주식회사(朝鮮生命保險株式會社)의 전무이사, 종로금융조합 조합장 등을 겸했다. 이후 [[태평양 전쟁]]이 종전된 [[1945년]]까지 약 18년 동안 중추원 참의로 재직했다.
- 원용덕
| 복무 기간=[[1932년]] ~ [[1945년]] (만주국 육군) <br/> [[1946년]] ~ [[1961년]] (대한민국 육군)
[[8.15 광복]] 후 월[[대한민국|남]]하여 [[1945년]] [[12월 5일]] [[미군정]]이 [[군사영어학교]]를 만들 당시 [[이응준 (군인)|이응준]], [[조병옥]]과 함께 [[미군정]]으로부터 [[생도]] 모집을 위탁받게 되어 자신은 부교장에 취임했다. [[1946년]] [[남조선국방경비대]] 초대 [[사령관]]과 [[조선경비사관학교]] 교장을 거쳐 육군 제8연대장을 지냈고 [[1947년]] 육군 제2여단장, [[1949년]] 육군 제5여단장을 거쳐 육군본부 행정참모부장을 지냈으며 [[1950년]] 육군본부 호국군사령부 부사령관, [[1952년]] 육군 제2군단 부군단장과 국방부 장관 특별보좌관을 거쳐 육군 영남지구 계엄사령관을 지냈으며 [[1953년]] 초대 [[대한민국 육군본부|육군본부 헌병 총사령부 총사령관]]을 거쳐 이듬해 [[1954년]] 초대 [[대한민국 합동참모본부|연합참모본부 헌병 총사령부 총사령관]] 등으로 [[대한민국 국군|국군의 창군]] 및 초기 형성 과정에 깊이 관여했다. [[박정희]], [[정일권]], [[이주일 (1918년)|이주일]] 등이 속한 [[만주군]] 인맥에서 가장 연장자이며 상급자였다.
|임기= [[1945년]] [[12월 5일]] ~ [[1946년]] [[9월 5일]]
- 유익서
'''유익서'''([[1945년]] ~ )는 [[대한민국]]의 [[소설가]]이다.
[[분류:대한민국의 소설가]][[분류:1945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부산광역시 출신 인물]]
- 육지수
광복 이후 [[1945년]] [[대한지리학회]]의 창설회원으로 부회장을 역임하였고, [[1946년]]부터 [[서울대학교]] 상과대와 [[고려대학교]] 교수를 역임한 후 1955년에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교수로 임명되었다. [[1958년]]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에 지리학과를 신설하여 교수로 재직하였다.
- 윤기선
1945년 이화여자전문학교 음악과에서 재직하다가 그해 [[5월]] [[미국]]으로 건너갔다. 1948년 [[6월]] 하와이 연주에 갔다가 바로 [[미국]] [[줄리어드 음악학교|줄리어드 음악대학원]]에 입학하면서 눌러앉게 된다. [[1949년]] [[12월]]에는 뉴욕에서 성공적인 연주회를 하기도 했다.
* [[1945년]] 아버지 [[윤치호]] 사망. 윤치호는 친일파로 몰려 규탄받던 중 사망하였으나 그는 연좌되지 않았다.
* 아버지: [[윤치호]](尹致昊, [[1865년]] [[1월 16일]] - [[1945년]] [[12월 9일]])
** 딸: 윤경숙(<ref name="kiki">[http://www.hani.co.kr/arti/society/obituary/597576.html 7월 30일 궂긴 소식] 한겨레신문 2013.07.29</ref>, [[1945년]] ~ , 음악가)
- 윤덕주 (농구인)
[[1945년]] 해방 이후에도 농구 선수로 활약하였고 [[서정귀]]와 결혼, 이후에도 임심 중에도 현역 농구선수로 활동하였다. 1950년대 은퇴 후엔 대한농구협회와 대한체육회에서 이사, 부회장 등을 두루 거치며 행정가로 활약했다.<ref name="dibigos"/>
* [[1945년]] 해방 후에도 농구 선수로 활동
- 윤연선 (1936년)
** 이복 백부: [[윤치호]](尹致昊, <small>일본식 이름: </small>{{lang|ja|이토 지코(伊東致昊)}}, [[1864년]] [[음력]] [[12월 26일]] ~ [[1945년]] [[12월 9일]])
- 윤영구 (1928년)
[[1942년]] 에 입학하여 [[1945년]] 졸업하였다. 이후 [[서울대학교]] 음악학과에 입학, [[1950년]] [[2월]] [[서울대학교]] 음대를 졸업하였다. 바로 [[미국]]으로 건너가 미국 항공사에 취직했다가 [[1950년]] [[6월]] [[6.25 전쟁]]이 발생하고 미군이 한국에 파견되자 그는 미국 공군 군종장교 군목의 통역관으로 [[한국]]으로 들어와 [[1950년]]부터 [[1952년]] 휴전까지 활동했으며, 미공군 군목의 한국 전쟁 고아 구호사업을 지원하였다.
- 윤영선 (1896년)
'''윤영선'''(尹永善, [[1896년]] [[12월 25일]] ~ [[1988년]] [[2월 6일]])은 [[일제 강점기]]의 [[기업인]]이자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다. [[일제 강점기]] 미국 유학 후 귀국하여 농업과 양잠업을 하였고 해방 후 제3대 [[농림부|농림부장관]]과 무임소 장관을 지냈다. [[1925년]]부터 [[1945년]]까지는 [[동아일보사]] 맡기도 했다. [[일제 강점기]]의 [[친일지식인]]인 [[윤치호]]와 중국인 [[마애방]]의 아들이다. [[대한민국]]의 제4대 대통령 [[윤보선]], 경기도지사 [[윤원선]] 등과는 재종간이며, [[조선일보]] 사주를 역임한 [[방상훈]]의 처조부가 된다. 본관은 해평으로 호는 오당(梧堂), 초명은 용성(龍成), 자는 용성(龍成)이다.
[[1925년]] [[9월]] 실업장의 주임대리직을 임시로 맡기도 했다.<ref>매일신보 1925년 9월 17일자, 3면</ref> [[4월 17일]] 에 [[동아일보사]] 개설되자 윤영선은 동아일보 임명되었다.<ref>"社告", 동아일보 1925년 04월 17일자 03면 09단</ref> 이후 그는 [[1945년]] [[9월]] 군정이 주둔할 때까지 [[동아일보]]일도 맡아보았다. [[1926년]] 세계 기독교 대회에 참석차 한국인 기독교 신자 대표로 [[미국]]에 다녀왔다. [[1927년]] 다시의 훈도가 되었다가 [[1929년]]까지 재직하고 그만두었다. [[1927년]] [[6월 18일]]에는 과일 종자, 묘목 및 인삼 종자 묘목을 판매하는 주식회사 송도식산(松都殖産)의 설립에 참여하여 이사가 되었다.
[[1945년]] [[8월]] 광복 이후 아버지 [[윤치호]]가 [[친일파]]로 지목되었다. 그러나 [[윤치호]]는 곧 사망했고,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그는 불이익이나 제한을 당하지 않았다. 그러나 해방 정국에서 그는 정치적인 발언이나 행동은 자제하였다.
[[1945년]] 주식회사 고려제약(高麗製藥)을 창립하는데 참여했고, [[1946년]] [[3월 29일]] 고려제약회사 부사장에 취임했다.<ref>"人事", 자유신문 1946년 03월 29일자 01면 11단</ref> 그는 [[송도소학교]]의 업무와 고려제약 경영, [[인천광역시|인천]] 과 [[아산시|아산]] 을 목장과 돼지 농장을 경영하였다. 그밖에 [[고려청년회]]와 고려청년회 주최에 전념하였다.
* 아버지: [[윤치호]](尹致昊, [[1865년]] [[1월 16일]] - [[1945년]] [[12월 9일]])
- 윤치영
[[1945년]] 해방 이후, 이승만의 비서, [[민주의원]] 사무총장, [[1948년]] 정부 수립 이후에는 [[대한민국 내무부|내무부장관]], 국회 부의장 등을 역임하며 이승만 정권 초기 집권세력의 실세로 통했다.<ref name="윤치호 일기 p.617">윤치호, 《윤치호 일기(1916-1943)》 (김상태 편 번역, 역사비평사, 2001) 617-640페이지</ref> 이후 이승만의 외교특사로 활동하다 [[1948년]] 친이승만 성향인 [[대한국민당 (1948년)|대한국민당]]을 창당하여 최고위원을 역임했다. [[1956년]]과 [[1960년]] [[대한민국의 부통령|부통령]] 선거에 출마하였으나 낙선했다. [[대한민국 제2공화국|제2공화국]] 기간 중에는 야당 정치인으로 활동하다 [[5·16 군사 정변]] 이후 군정에 참여, [[1963년]]에는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최고희의]] 의장을 [[민주공화당 (대한민국)|공화당]] 대통령후보로 지명, 민정에 참여하였으며, [[대한민국 제3공화국|제3공화국]] 출범 이후 [[민주공화당 (대한민국)|민주공화당]] 당의장, [[서울특별시]]장, [[민주공화당 (대한민국)|민주공화당]] 당의장서리 등을 지냈다. [[1968년]] 이후 경제발전을 위해서 강력한 지도자가 필요함을 역설하여 박정희의 3선개헌을 적극 지지하였다. 종교는 [[개신교]]로 교회의 장로를 지냈다.<ref>{{웹 인용 |url=http://ducksoo.net/wp/greeting/history/ |제목=덕수교회 약력 |확인날짜=2016-09-10 |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160917154055/http://ducksoo.net/wp/greeting/history/ |보존날짜=2016-09-17 |깨진링크=예 }}</ref> [[1980년]] 정계에서 은퇴, 사회 원로로 활동하였다.
[[미국의 소리]] 단파 방송과 [[이승만]]의 일본 내막기 등을 애청하였지만 [[충칭]]행은 무모한 행위라는 것이었다. 윤치영은 "안재홍 형은 가끔 싱거운 소리를 잘 하는 친구이지만 그때는 무슨 압력을 받았기에 그런 소리를 했는지 나는 가끔 그때 생각을 해본다<ref name="동산회고록:윤치영의 20세기 p.137"/>"고 회고하였다. [[1945년]] 초 [[일본]]에서 [[불령선인]]으로 지목된 사람들을 야산으로 끌고가 처형할 것이라는 정보를 입수한 뒤 도망치려다가 [[양주군]]에서 다시 되돌아왔다. 이후 충격을 받고 공황상태에 빠졌다.
[[1945년]] 초 광복 직전, 윤치영은 일체의 대외활동을 자제하였다. 기업, [[광산]]사업이 실패한 뒤 별다른 뚜렷한 직업이 없던 그는 아내가 가정 부양을 맡았다. 그의 일과는 [[도서관]]에 가서 책을 읽거나 [[임영신]]의 집에 가서 그가 삶아주는 닭고기를 먹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그리고 비밀리에 [[미국의 소리]] [[단파 방송]]을 밀청했다.
[[1945년]] [[2월 4일]], 단파방송은 연합국들의 수뇌들이 얄타에 모여 전후 처리문제를 논하고 [[얄타 협정]]을 체결하였다는 보도가 있어서 일본 패망의 날이 가까웠다는 것을 피부로 느끼게 하였다. 그해 [[5월 7일]]에는 독일이 먼저 연합군에 무조건 항복하고 [[히틀러]]는 베를린 요새의 지하실에서 여비서 [[에바 브라운]]과 자살했다는 소식을 접하였다.<ref name="동산회고록:윤치영의 20세기 p.142">윤치영, 《동산회고록:윤치영의 20세기》 (삼성출판사, 1991) 142-147페이지</ref>
[[1945년]] [[8월 15일]] 광복이 되자, [[여운형]], [[안재홍]] 등으로부터 [[건국준비위원회]](건준)에 참여해달라는 부탁을 받았으나 사양하였다. 그는 [[장덕수]], [[임영신]] 등과 함께 별도의 국민정당 조직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한민당]]이 창당된다는 소식을 듣고 활동을 중단하고 한민당에 가담하였다.
[[1945년]] [[9월 2일]] 38도선 이남에 [[미군정]]이 주둔하자 [[미군정청]] [[재무부]] 재산처분국장에 임명되었다.
[[1945년]] [[10월 12일]] [[이승만]]이 귀국하자 공항장으로 나가 그를 영접했다. 이후 [[이승만]]의 비서로 활동하면서 [[한민당]] 활동은 소원해졌고, 자연스럽게 [[한민당]]과 멀어져갔다. 이승만이 귀국하자 그는 [[10월 12일]] 저녁 [[중앙방송]]에 출연, "대표적인 [[친일파]] 한두 명을 제외하고는 일체 문책하지 않겠다.<ref name="경향19720408"/>"라고 방송을 하여 민심을 수습시켰다. 이어 [[미군정]] 재산처분국장 직을 사퇴하고 [[이승만]]의 비서로 활동했다.
1945년 10월 16일 중앙청에서 귀국인사를 하는 이승만을 수행중인 윤치영
[[1945년]] [[10월 12일]] [[이승만]]의 귀국 이후, [[돈암장]]의 [[이승만]](李承晩)의 공보비서로 활동하였고 비서실장에 선출되었다. 이승만 귀국 직후 기자회견 당시부터 윤치영은 이승만의 비서 역할을 하고 있었다.
1945년 10월 이승만의 귀국 환영회
[[1945년]] [[12월]] 사촌형인 [[윤치호]]가 사망하였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 당시의 활동에 관련되어 그는 비판받지 않았고, [[윤치호]]의 사촌이라는 이유로 연좌되지는 않았다. 이후 [[12월 27일]] [[경교장]]에서 열린 소집회의에 참석하였고, [[12월 30일]]부터 [[신탁통치 반대 운동]]에 참여하였다.
[[1963년]]초 [[박정희]]가 대통령 후보로 출마할 의사를 보이자 그는 적극 환영하였다. 63년 [[제5대 대통령 선거]]에서 윤치영은 [[박정희]]의 선거 사무장으로 활약했다. [[광주시 (경기도)|광주]]에서 그는 "반만년래의 위대한 지도자이신 [[박정희]] 씨를 [[대통령]]으로!"라며 [[박정희]]의 지원 유세를 하였다.<ref>한상범, 《박정희와 친일파의 유령들》 (삼인, 2006) 94페이지</ref> 그는 [[박정희]] 후보의 선거사무장 겸 선거대책본부 본부장으로 전국 순회강연, 유세를 다녔다. 그는 [[박정희]]라는 청년 정치인의 참신성과 함께 상대방이 [[한민당]]에서부터 내려온 구태 정치집단임을 강조했다.<ref>그러나 윤치영도 [[1945년]] [[8월]]부터 [[10월]]까지 [[한민당]]의 당원이자 중앙집행위원으로 참여하였다.</ref> [[6월 26일]] [[서울특별시|서울]] [[효창공원]]에서 열린 백범 [[김구]] 14주기 추도식에 참석하였다.
* 1945년 9월 7일 [[국민대회준비위원회]] 조사부장 겸 외교부 차장
결국 이러한 행동으로 그는 [[조선총독부]]의 눈밖에 나게 된다. [[1945년]] 여름 총독부 경무국에 출입하는 어느 지인이 윤치영을 찾아와 하는 말이 "오는 [[10월 17일]] 밤 1시를 기하여 [[안양]] 근교의 어느 산록에서 과거 독립운동과 관련되었던 조선인 유지들을 끌어다가 전부 사형시킨다."는 것이었다. 윤치영은 그의 정보가 막연한 것이 아니고 6하원칙에 들어맞는 것이므로 반드시 근거가 있는 것으로 느껴졌다.<ref name="동산회고록:윤치영의 20세기 p.142"/> 공포감에 사로잡힌 윤치영은 도주를 시도한다.
뒤에 알려진 일이지만 패전에 대비하여 총독부 당국은 불온한 인사들에 의한 후환을 없애려고 그들이 요시찰 인물로 지목했던 한국의 지도급 인사들을 모조리 잡아들여 그것도 총탄이 아까워 목을 졸라 죽이려고 하였다는 사실이 밝혀졌다.<ref name="동산회고록:윤치영의 20세기 p.142"/> [[미군정|미 군정기]] 무렵 [[조선총독부]]가 남기고 간 서류들을 살펴보던 윤치영은 [[조선총독부|총독부]]가 [[1945년]] 초, 그해 [[10월 17일]]과 [[8월]] 패전 직전에 [[조선인]] 독립운동가와 불령선인, 요시찰 인사들을 안양군 골짜기로 끌어모은 뒤 모조리 살해할 계획을 세웠고, 그 중에 자신의 이름이 들어있는 것을 보고 놀란다. 윤치영은 이를 간단하게 메모해두었다가 자신의 회고록을 낼 때 기술하였다.
** 사촌 형: 좌옹[[윤치호]](佐翁尹致昊, [[1864년]] [[12월 26일]] - [[1945년]] [[12월 9일]])
- 윤태동
이후 [[만주]]로 건너가 간도성(間島省) 교육청 학무과장, [[만주국]] 민생부 교육사 독학관, 대신관방 이사관 겸 교학관, 자료과장 등을 역임하였다. [[협화회]]의 분회(수도계림분회)에서 참여(參與)로 활동하였으며 협화회 주최 행사에서 '일본국민과 협화정신'이란 제목으로 강연하였다. 간도성 차장을 거쳐 [[1945년]] 4월에 간도성장(間島省長)에 취임했는데 조선인이 성장(省長)에 발탁된 것은 [[이범익]] 이래 두번째이다.
- 이가원
[[1969년]]부터는 [[국립중앙도서관]]에서 구성한 고서위원회에 참여하였으며,<ref>古書委員會구성, 《동아일보》, 1969.12.4</ref> [[1945년]] 구입한 《규원사화》 고서에 대하여 [[1972년]] [[11월 3일]], 당시 국립중앙도서관 고서심의의원이었던 [[손보기]](孫寶基), [[임창순]](任昌淳)과 함께 [[조선]] 중기에 씌여진 진본임을 확인하고 인증서를 작성하여 국립중앙도서관의 직인으로 인증하였다.<ref> 고평석, 《한배달》 6호, 1989 </ref>
- 이갑성
그의 [[본관]]은 [[경주 이씨|경주]]이고 [[대구광역시]] 출신이다. 아호는 연당(硏堂).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였으며, [[1931년]] [[신간회 사건]]으로 [[조선총독부]]의 탄압을 피해 [[상하이 시|상하이]]로 망명, 독립운동을 펼치다가 귀국하였다. [[1940년]] [[흥업구락부 사건]]으로 7개월간 복역하다가 [[윤치호]]의 신원보증으로 풀려났다. [[1945년]] 독립촉성국민회의 조직에 참여하여 회장이 되고 [[1947년]]에는 [[남조선 과도입법위원회]] 의원을 지냈으며 단정 수립론을 지지하였다. [[1950년]] [[제2대 민의원]] 의원에 당선되었다. 그뒤 [[1952년]] [[이승만]]의 친위조직이 된 [[대한인 국민회]] 회장을 지냈고, 그해 [[자유당 (대한민국)|자유당]]에 입당, [[1952년]] [[10월]] [[한국 전쟁]] 중 전시내각(戰時內閣)의 [[대한민국의 국무총리|임시 국무총리]](國務總理)를 역임했다. [[1953년]] 자유당의 최고위원, 정무부장을 역임하였다. 4.19 혁명 후 야인으로 생활하다 [[1963년]] [[2월]] [[민주공화당]] 창당 발기위원이 되었다. [[1965년]] [[광복회]] 회장을 지냈다.
이갑성은 광복 후에는 우익 정치인으로 활동했다. [[1945년]] [[10월]] 반탁운동을 위해 결성된 [[이승만]]의 [[대한독립촉성국민회]](獨立促成國民會)에 참여하고 [[독립촉성국민회]] 회장에 선출되었으며, [[1945년]] [[10월 5일]] 조선 각지에 파벌다툼이 심한 점을 지적, 이를 개탄하며 정당통일기성회를 결성하였다. [[12월 14일]] 김여식(金麗植), [[권동진]] 등과 함께 신한민족당(新韓民族黨)을 창당하고 [[권동진]]을 당수로 추대했다.
당시 조선에는 여러 정당, 사회단체가 생겼다. 이갑성은 [[1971년]] [[12월 9일]] [[동아일보]]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해방이 되니까 왜 그리 많은 정당이 생기는지 한심한 상태였다. 그때가 언젠지 모르나하지 중장을 만나 등록된 정당이 몇개나 되느냐고 물었더니 74개라고 대답합디다"라는 것이다. [[한민당]]의 창립 발기인이었던 그는 [[동아일보]] 인터뷰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정부가 선후에라야 정당이 있는 법이지 독립도 정부도 아직 안섰는데 정당이 무슨 필요가 있느냐"는 생각이 들었다 한다. [[1945년]] [[10월]] 우후죽순 생겨난 정당, 단체들을 하나로 모을 목적으로 정당통일기성회를 조직했고, 수십개의 단체들 중 뜻이 맞거나 성격이 비슷한 단체들은 통합되었다.
- 이건 (대한제국 황족)
|복무기간 = [[1932년]] ~ [[1945년]]
- 이겸제
사망 시기는 불명이나, [[1945년]] [[8월 15일]]에 일본이 [[태평양 전쟁]]에서 패망하는 시점에 70대 후반의 나이로 중추원 참의직로 재직 중이었다.
- 이경희 (1880년)
일제의 패망을 예상하여 일제 패망론을 주장하며, 해방을 준비하였다.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이하고 [[일본인]] 도지사와 부지사 등이 업무를 내려놓고 사퇴를 선언하자 행정공백을 피하기 위해 [[8월 16일]] 위촉장을 받고 초대 [[경상북도]] [[부지사]]가 되고, 그날 [[대구광역시장|대구부윤]]을 겸직하였다.<ref>당시 경상북도청은 대구시내에 있었으므로 그는 경상북도 부지사와 대구부윤 업무를 보느라 양쪽을 오고 갔다.</ref> 그는 대구부윤 上野彦八에게서 행정권과 치안권 일체를 인수하였다. 그밖에 그는 [[대종교]] 본부 경의원의 참의로도 임명되었다. [[9월 2일]] 미군정이 주둔하자 레이몬드 재노스키(Raymond A.Zanowski) 미육군 대령의 천거로 경상북도 미군정 사령부 민정관으로 위촉되었다.
그뒤 [[우익]]에 가담하여 [[1945년]] [[10월]] [[이승만]]의 [[독립촉성중앙회]] 회원으로 가입하고, [[독립촉성중앙회]] 회장 [[이승만]], 부회장 [[김구]]의 친필 임명장을 직접 전달받았다. [[1945년]] [[12월]] 독립촉성중앙회 경상북도지회와 독촉 대구부지부 결성에 참여하였다.
* [[1945년]] [[경상북도]][[부지사]] 겸 임시 [[대구광역시장|대구부윤]]
* [[1945년]] 미군정청 경상북도 사령부 민정관
|임기 = [[1945년]] [[8월 16일]] ~ [[1945년]] [[9월 2일]]
|임기 = [[1945년]] [[9월 2일]] ~ [[1946년]] [[9월 4일]]
|임기 = [[1945년]] [[8월 16일]] ~ [[1945년]] [[10월 9일]]
- 이광민
'''이광민'''(李光民 [[1895년]] ~ [[1945년]] [[10월 18일]])은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가이다. 재무담당 및 대표로 만주 무장항일조직의 중심인물. 본관은 고성(固城). 안동 출신. 백부는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 [[이상룡 (1858년)|이상룡(李相龍)]]이며 부친은 독립운동가인 [[이봉희]](李鳳羲)이다. 이명은 '''이문형'''(李文衡), '''이영형'''(李永衡), '''이영'''(李暎(英))이다. 자는 사익(士翼), 호는 자화(子華). 1990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됐다.
1945년 광복 후 환국을 준비하던 중 10월 18일 병사했다.
[[분류:1895년 태어남]][[분류:1945년 죽음]][[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분류:대한민국 임시 정부 시대 육군 장교]][[분류:이상룡]][[분류:고성 이씨]][[분류:안동시 출신]]
- 이상백 (1904년)
광복 직후에도 [[여운형]]의 [[건국준비위원회]]에 활동하였다. 건준의 해산 이후 별다른 정치적 입장표명은 하지 않았고 [[1945년]] [[9월]] [[조선 체육 동지회]]를 결성하여 회장에 취임, 본격적인 체육단체 조직 및 체육경기 활성화를 위해 노력하였다. 이해 [[12월]] [[조선 체육회]] 상무이사가 되었다. 그 뒤 IOC 가입을 목표로 활동하였으며, 반탁 시위에 휘말리지 않고 IOC 가입 문제를 논의하였다. [[1946년]] 초 IOC 가입 대책 위원회를 조직하고 부위원장에 위촉되었다.
- 이상정 (1897년)
| 복무 기간 = [[1926년]] ~ [[1945년]]
- 이설주
대구수창국민학교(현재의 [[대구수창초등학교]])와 대구고등보통학교(현재의 [[경북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일본]]으로 유학하면서 [[니혼 대학]] 경제학과에 재학했지만 사상범으로 체포되고 만다. [[1932년]] 대학을 중퇴하고 일본의 문학 잡지 《신일본민요(新日本民謠)》에 시 〈고소(古巢)〉를 발표하면서 문단에 등단했다. 그 뒤 [[만주]]와 [[중국]] 등지를 방랑했고 [[1945년]] 광복과 함께 귀국했다.
- 이열희 (1924년)
그의 증조부 [[이동진]]과 할아버지 소남 [[이일우]]는 구한말~일제시대의 사업가로 [[우현서루]]를 건립하여 학생들을 가르쳤다. 고모부 윤홍열은 미군정기 때 남조선과도입법위원회 의원을 역임했으며, [[5.16 군사 정변]]에 참여한 군인 출신 사학자 [[박창암]]의 처 이겸희는 그와 6촌간이었다. 고모 이숙경의 며느리는 [[1945년]] [[8.15 광복]] 후 초대 [[대구광역시장|경북 대구시장]]을 지낸 [[허억]]의 딸이었다.
- 이인
[[1945년]] 광복이후 [[백관수]],[[김병로]]등과 함께 [[건국준비위원회]] 부위원장이던 [[안재홍]]과 협상을 적극적으로 벌으나, 건준위원장 [[여운형]]이 [[안재홍]]과 이인의 협상결과를 허락하지 않았다. 이후 1945년 9월 [[한국민주당]]이 창당되자 창당에 참여, 당무부장이 되었다가 10월 미군의 한반도 주둔 이후 [[미군정]] 특별범죄심사위원회 수석대법관(首席大法官) 겸 심사위원장이 되었다. 군정청 특별범죄심사회 수석대법관이 되면서 그는 [[한민당]]을 탈당하였다.
* [[1945년]] [[12월 1일]] 임시정부 봉영식에 참석하였다. 서울그라운드에서 윤보선의 사회로 임시정부 봉영식이 시작되었다. 이어 [[오세창]]의 개회사, 이인의 봉영문 낭독, [[권동진]]의 만세삼창으로 이어졌다. 봉영문은 [[권동진]], [[김성수 (1891년)|김성수]], 이인을 통해 [[김구]]에게 전달되었다.<ref>아 비운의 역사현장 경교장(백범사상실천운동연합, 1993), 145페이지</ref>
- 이인성 (화가)
[[1945년]]에는 이화여자고등학교 교사를, [[1946년]]에는 [[이화여자대학교]] 강사를 지냈으며 [[1949년]]에 열린 제1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서 심사위원을 맡았으나 [[한국 전쟁|6.25 전쟁]] 중이던 [[1950년]] 불의의 사고로 사망했다.
- 이준석(선장)
|| '''출생''' ||[[1945년]] [[11월 12일]]||
[[1945년]] [[11월 12일]] 생.[* [[http://www.bobaedream.co.kr/view?code=freeb&No=935784|생존자 명단 160번이다.]]][* 공교롭게도 그의 생일에 최종선고를 받았다. '''뭐 그날에 그가 왜 태어났냐는 말이 더 맞겠지만.'''] [[경상북도]] [[칠곡군]] 출신으로 세월호 사고 이후 과거 인터넷 신문과의 인터뷰 및 방송출연 그리고 기자의 취재 결과 드러난 바에 따르면 20대에 선원 생활을 시작해 32세였던 1977년에 외항선 선원이 됐고, 17년간 외항선을 탄 뒤 연안 여객선 선장으로 다시 20년간 근무했다. 2004년 제주투데이와의 인터뷰에 따르면, 선원이 되어 처음으로 탔던 원목선이 [[오키나와]] 부근에서 전복되어 [[일본]] [[항공자위대]] [[헬기]]에 구조되었다고 한다. 그때 구조되지 않았다면 지금의 자신은 없었을 것이라고. 경력 30년의 베테랑 선장으로서 알려져 2010년에 [[OBS]]에서 출연한 방송분에서[* 해당 방송 당시 운항하던 배는 오하마나호였다고 한다.] 말했다.
[[분류:칠곡군 출신 인물]][[분류:대한민국의 범죄자]][[분류:청해진해운 세월호 침몰 사고]][[분류:1945년 출생]]
- 이해인(1994)
||<#FCB4BD> '''{{{#white 이름}}}''' ||<#FFFFFF><(> 이해인 (Lee Hae-In, 李海印)[* 원래는 어질 인(仁)이 었으나 도장 인(印)으로 변경. [[경상남도]] [[창원시|마산회원구]]의 [[해인사|해인사(海印寺)]]와 한자가 똑같다.][* [[1945년]]생 [[수녀]]이자 [[시인(문학)|시인]]인 [[이해인(수녀)|이해인]]과 [[1986년]]생 배우 [[이지(배우)|이해인]]과는 달리 본명이다.] ||
- 이효상
[[1945년]] [[경상북도]] 학무국장에 취임, 1952년 경북대학 문리대 교수, 문리대학장 등을 역임하였다. [[1960년]] 참의원에 당선되면서 정계에 투신하였으나 [[1961년]] [[5.16 군사 정변]]으로 사퇴하였다. 그 뒤 [[영남학원]](嶺南學園) 이사장에 취임하였다.
- 임내규
'''임내규'''(林來圭, [[1945년]] [[3월 6일]] ~ , [[광주광역시|광주]])는 [[대한민국]]의 공무원이다.
[[분류:1945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한민국의 특허청장]][[분류:대한민국의 산업자원부 차관]][[분류:전남대학교 사회과학대학 동문]][[분류:예일 대학교 동문]][[분류:광주광역시 출신]]
- 임현식(배우)
||<#878787> '''{{{#EEE156 생년월일}}}''' ||<(> [[1945년]] [[12월 31일]][* 하루 차이로 해방둥이가 되었다! --날때부터 예사롭지 않다.--][* [[싸이]]와는 정확하게 32년 차이, 생일이 같은 날이다.] ([age(1945-12-31)]세) ||
[[분류:한국 남배우]][[분류:1대 100 역대 1인]][[분류:1945년 출생]][[분류:순창군 출신 인물]]
- 장민호 (배우)
[[부산광역시]] [[연제구|연제]] 출신으로, 명신(明新)중학교(부산광역시 [[연제구|연제]])를 졸업하였다.<ref>[http://100.nate.com/dicsearch/pentry.html?s=B&i=183024&v=44 장민호]{{깨진 링크|url=http://100.nate.com/dicsearch/pentry.html?s=B&i=183024&v=44 }}, 《브리태니커백과》</ref> [[1945년]] [[8.15 해방|해방]] 후 월남하여를 연수하고, 1953년 [[국립극단]]의 전신인 극단 신협에 들어가 연기활동을 시작했다. ‘예술무대’의 첫 공연인 《모세》에 참여하였고, [[드라마센터]] 첫 공연 《해믈리트》에서 햄릿의 삼촌 왕, 장충동 [[국립극장]] 첫 공연 《성웅 이순신》에서 이순신, [[세종문화회관]] 첫 공연 《북벌》에서는 효종 역을 연기하였다.<ref name="동아_1">演劇에 산다 〈15〉 국립극단團長 張民虎, 《동아일보》, 1979.7.26</ref> 성우로서는 1947년에 중앙방송국 전속 성우로 입사, 1958년에는 제1회 방송문화연기상을 수상하였다.<ref name="글로벌">문화·민속/한국의 연극/한국의 신극/신극의 배우/장민호, 《글로벌 세계 대백과》</ref>
- 장헌식
[[1923년]] [[간토 대지진]] 이후 [[사회주의]] 사상이 널리 퍼지고 노동 운동이 활발해지자 이를 탄압하기 위해 설립된 친일 자본가 단체인 [[동민회]]에 가담했으며, 일제 말기 총독부 학무국과 밀착하여 또다른 친일 단체 [[대화동맹]] 결성을 조종했다는 증언이 있다.<ref>일제 말기 총독부 학무국과 밀착하여~ : 반민특위 조병상 공판조서 (제1회) 중 조병상의 수기 (1949).</ref> [[1924년]] [[12월 1일]] [[전라남도지사]]로 부임하였다. 전남 지사직에서 물러난 1926년부터 1945년까지 중추원 칙임참의를 7회에 걸쳐 중임하였다.<ref name="실록친일파" />
[[1926년]]부터 [[1945년]] 광복 시점까지 19년 동안 [[조선총독부 중추원]]의 참의를 지냈으며, [[1945년]] [[5월]] [[이왕직]] 장관으로 관직에 복귀해 있었다. 광복 당시 그는 이왕직 장관이었고, 11월 8일 구황실사무청이 설치될 때까지 계속 재직하였다.
[[1945년]] [[9월 2일]] [[미군정]] 주둔과 동시에 미군정 자문위원의 한 사람이 되었다. 당시 그는 이왕직 장관이었다. 이왕직장관직은 11월 8일 사퇴하였다.
- 장현 (1945년)
|출생일 = [[1945년]] [[3월 5일]]
'''장현'''(본명: '''장준기''', 미국 거주 시절 영어 이름: '''트레버 존스'''({{llang|en|Trevor Jones}}), [[1945년]] [[3월 5일]] ~ [[2008년]] [[11월 30일]])은 [[대한민국]]의 [[가수]]이다.
[[1945년]] [[부산광역시]]에서 태어났다. [[명지대학교]]에서 무역학을 전공했다.<ref name="프로필1">{{웹 인용
[[분류:대한민국의 남자 가수]][[분류:1945년 태어남]][[분류:대한민국의 작사가]][[분류:2008년 죽음]][[분류:명지대학교 동문]][[분류:부산광역시 출신 인물]]
- 장호 (1920년)
10년간 여러 곳을 떠돌다가 [[1945년]]에 집으로 돌아왔고 그 직후에 [[태평양 전쟁]]이 끝났다. 그러나 [[군정기]]가 시작되자 미군정을 반대하여 곧바로 [[삼팔선]] 이북으로 월북했다. 특수 교육받고 [[강원도]] 지역으로 들어왔으며, [[남조선로동당]]이 불법화하자 입산하여 [[조선인민유격대]]에 입대하였다. [[한국 전쟁]]을 거치면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다시 돌아가서 [[평양]]에 정착하고 《[[로동신문]]》에 입사하여 문화부 기자로 근무하였다.
- 전숙희
[[1938년]] [[단편소설]] 《시골로 가는 노파》를 《[[여성 (잡지)|여성]]》에 발표하여 창작활동을 시작했으며, [[1945년]] 광복 이후 [[10월]] [[미군정]]이 주둔하자 통역관으로 활동했다. [[1948년]] 미군정이 물러난 뒤 다시 작가, 수필가로 돌아와 [[한국 전쟁]]을 거친 뒤 [[1954년]] 수필집 《탕자의 변》을 출간하면서 본격적인 수필활동에 전념했다. 그의 수필의 특징은 다정다한(多情多恨)한 여성심리를 조촐한 필치로 표현하는 데 있었다.
- 전예용
[[1944년]] [[조선총독부]] 학무국 사회과장이 되고 [[1945년]] [[조선총독부]] 재무부장으로 재직 중 [[8.15 광복]]을 맞이하였다. [[1945년]] [[9월 2일]] [[미 군정]]이 설치되자 학무국장 보좌관에 임명되었고, [[조선주택영단]] 이사를 겸임하였다. [[1946년]] [[조선주택영단]] 이사장에 선출되었다. [[1946년]] [[미군정]] 영림국 총무과장에 임명되었다.
* 1945년 : 조선총독부 재무부장
* 1945년 : 미군정 학무부 고문(해방 후)
* 1945년 : [[조선주택영단]] 이사(해방 후)
- 전형필
[[1934년]]에 서울 성북동에 북단장(北壇莊)을 매입하여 터를 잡고 본격적으로 [[문화재]]를 수집했으며, 33세가 되던 [[1938년]]에는 자신의 소장품으로 북단장 안에 한국 최초의 사립 [[박물관]]인 [[보화각]](葆華閣)을 세웠다. [[1940년]] 보성고보를 인수하였으며, [[1945년]]에는 1년 동안 보성중학교 교장을 맡았다. [[1960년]]에는 이전부터 그를 돕던 김상기, 김원룡, 최순우, 진홍섭 등과 함께 '고고미술 동인회'를 만들고 《고고미술(考古美術)》이란 동인지를 발간하기도 했다. 현재 한국미술사학회의 전신인 고고미술동인회는 한국 최초의 미술사학회이다.
* 1945년 보성중학교장 겸임
- 정성태
[[보성전문학교]]를 졸업했고, [[1945년]] [[보성전문학교]] 당시 교사였던 [[장덕수]]의 권고와 추천으로 [[한국민주당]](한민당)에 입당하였다. 그러나 곧 탈당, 청년운동과 노동운동에 관심을 갖고 전남 화순탄광에 처음으로 노조를 결성하기도 했다. 이때 안면을 익힌 전진한씨가 초대 사회부장관으로 취임함에 따라 사회부 감사과장에 발탁됐고, 49년 내무부 인사과장으로 전보되었다가 [[한국 전쟁]] 중 납치되어 평양까지 끌려갔지만 지인의 주선으로 풀려나 되돌아왔다.
- 정옥숙
[[분류:1945년 출생]][[분류:상주시 출신 인물]][[분류:개신교 신자]]
|| '''출생''' ||<(> [[1945년]] [[3월 30일]]([age(1945-03-30)]세) ||
해방둥이로 1945년, 1남 3녀 중 [[차녀]]로 태어났다. 고향은 [[경상북도]] [[상주시]]다.
- 정인숙 (1945년)
'''정인숙'''(鄭仁淑, [[1945년]] [[2월 13일]] ~ [[1970년]] [[3월 17일]])은 [[대한민국]]의 모델, 배우이다. [[대한민국 제3공화국|제3공화국]] 당시 화제 인물로, 서울 시내 고급 요정에서 활동하던 접대부였다. [[대한민국의 국무총리|국무총리]] [[정일권]]의 내연녀로 [[정인숙 살해 사건]]의 피해자였다. 살해 당시 그의 친정 오빠이자 운전수인 [[정종욱]]을 유력용의자로 지목했으나, 유력 용의자는 다른 인물로 밝혀졌으나 배후는 미궁이다. 본명은 '''정금지'''(鄭金枝)이고, 다른 별명은 '''정혜미'''이며, [[대구광역시|경상북도 대구]] 출신이다.
정인숙은 [[1945년]] [[2월 13일]] [[대구직할시|대구]] 남산동에서 후일 해방 뒤 대구직할시 부시장을 지낸 [[정도환]]과 부인 전덕조의 딸로 태어났다. 아버지 정도환은 자수성가형 인물로, 행정공무원으로 [[자유당 (대한민국)|자유당]] 정권에서 대구부시장까지 올라갔다. 아들만 넷을 둔 정도환의 부인은 어떻게든 딸을 보고 싶어 절에 다니며 불공을 드렸다고 한다. 그의 형제는 7남매로 위로 오빠 다섯 명과, 쌍둥이 자매가 1명 있었다. 쌍둥이 딸이 태어나자 정도환은‘금이야 옥이야’길렀는데 이름도 금지(金枝)와 옥지(玉枝)로 했다. 두 쌍둥이는 귀여움을 독차지하였으나 옥지는 생후 1년 반 만에 병사하고, 살아남은 금지가 후일의 정인숙이다.
[[분류:1945년 태어남]][[분류:1970년 죽음]][[분류:의문사한 사람]][[분류:화기에 죽은 사람]][[분류:테러 피해자]][[분류:범죄 피해자]][[분류:대한민국 사람]]
- 정칠성
[[1945년]] [[8월]] [[태평양 전쟁]]이 종전되고 [[조선공산당]]이 재건되자 [[경성]]으로 올라가 [[박헌영]]의 재건파 [[조선공산당]]에 참여하였다. [[8월 16일]]부터는 [[건국준비위원회]]에도 참여하였다. [[미군정]]이 시작되자 [[서울]]에서 [[좌익]] 운동에 참여하였다. [[1945년]] [[9월]] [[대구]]의 [[조선공산당]] [[경상북도]]지구당 부녀부장이 되고, [[조선공산당]] 중앙위원에도 선출되었다. 그러나 정칠성은 시중의 조롱과 멸시를 당했다. 당시 [[조선공산당]]은 "봉건유제 타파하여 여남평등 이룩하자!"고 부르짖던 진보적 정당이었고, 그는 공산당의 간부였지만 여전히 기생을 팔반천인의 하나로 여기던 시절이었고, 정칠성은 기생 출신이 정치를 한다고 야유를 보냈다.
[[1945년]] [[9월]]에 좌익계 여성단체인 [[조선부녀총동맹]]을 결성하여 중앙집행위원이 되었다. 그해 [[12월]] [[조선부녀총동맹]] 부위원장에 선출되었고, [[12월]]말 [[모스크바 삼상회의]]가 결정되자 정칠성은 [[박헌영]] 등과 함께 처음에는 [[신탁통치]]에 반대하였으나, 신탁의 불가피함을 인정하고 찬탁으로 돌아섰다. 이후 찬탁매국노로 몰리자, 테러를 피해 [[대구]]와 [[경성]]과 각지에 은신처를 마련하고 숨어 다녔다.
- 차상명 (1895년)
'''차상명'''(車相明, [[1895년]] [[8월 2일]] [[부산광역시]] ~ [[1945년]] [[4월 7일]])은 [[일제 강점기]]의 [[승려]]이다. 법명은 운호(雲湖).
[[분류:1895년 태어남]][[분류:1945년 죽음]][[분류:일제 강점기의 승려]][[분류: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분류:친일인명사전 수록자]][[분류:부산광역시 출신 인물]]
- 최동
[[일제 강점기]] 말기인 [[1938년]]에 [[조선기독교연합회]] 평의원을 지냈고 [[1941년]]에는 [[조선임전보국단]]의 발기인을 맡았다. 1941년에 [[동양지광]]이 주최한 '[[미영타도좌담회]]'에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교수 자격으로 참석해 [[황인종]]의 시각에서 [[미국]]과 [[영국]]을 비난하는 내용의 강연을 한 일도 있다. [[1945년]] 광복 직후 제4대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교장에 취임하였으며,1947년 12월 4일 Severance 의과대학으로 승격시켜 6년제를 만들었고, [[1955년]]까지 교수로 재직했다.
|임기 = [[1945년]] 8월 - [[1948년]] 12월
- 최신해
* [[1945년]] 경성제국대학교 부속 병원 수련의.
*** 첫째사위: 이상우(李尙雨, [[1945년]] ~ )
- 최영욱
[[1945년]] [[9월 2일]] [[미군정]] 주둔 후 최초의 [[전라남도]] [[부지사]]였으며, [[1946년]]에는 [[전라남도지사]]를 역임하였다. [[1950년]] [[6.25 전쟁]] 중 [[조선인민군]]에 체포되어 [[광주형무소]]에 투옥됐다가 학살당했다.
[[1945년]] 광복 후에 [[미군정]]이 주둔하자 미군정에 반감을 품은 주민들을 잘 설득하여 유혈사태가 번지는 것을 막았다. [[9월 2일]] 그는 [[미군정]]의 신임을 얻어 초대 [[전라남도]][[부지사]]에 임명되었다. 당시 [[전라남도청]] 내에서 [[영어]]에 유창한 몇 안되는 사람이었던 그는 미군과 한국인, 일본인 사이의 통역을 담당하였다. 그는 즉시 지방의 지인들 중 일꾼이 될 만한 이들을 전라남도 미군정에 추천하였다.
[[1945년]] [[9월 2일]]부로 도지사직을 사퇴했던 전임 도지사 야기 노부오(八木信雄<ref>12월 4일까지 광주에 체류하고 있었다.</ref>)와 일본 패전 직전 [[전남도청]] 재무국장인 임문석(林文碩)의 강력 추천으로 그는 도지사 대리에 임명되었다. [[10월 27일]] 그는 제주도를 포함한 도내 일원에 군정실시를 선포하고 전라남도 경찰협회에서 운영하던 소록도와 애양원의 운영권을 인수하고 후에 윌슨 의사(형 [[최흥종]]에게 기독교를 전파했던 광주지역 선교사)에게 모든 업무를 위임하는 것을 적극 후원하였다.
|임기 = [[1945년]] [[8월 16일]] ~ [[1945년]] [[10월 26일]]
|임기 = [[1945년]] [[12월 3일]] ~ [[1946년]] [[1월 19일]]
- 최주봉
최주봉은 [[한국]]의 [[배우]]로, [[1945년]] [[9월 21일]]에 [[충청남도|충남]] [[예산군]] 에서 출생하였다. [[홍성중학교|홍성중학교]], 예산농업고등학교(現 [[공주대학교 예산캠퍼스]])를 거쳐 중앙대학교 문리대 연극영화과를 [[졸업]]하였다. [[1969년]]에 '퇴비탑의 기적'으로 연극배우로 데뷔하였다. 이후 극작가 김상열, 배우 박인환, 오길주 등과 극단 가교를 창단하였다. 서울시립극단 배우 겸 지도위원으로 활동하였고, [[2003년]], 서울시립뮤지컬단 단장을 역임하였다. 현재 한국연극배우협회 이사, 가톨릭연극협회 회장이다. [[종교]]는 원래는 [[개신교]]였으나, [[2011년]]에 [[천주교]]로 [[개종]]하여서 천주교이며, [[세례명]]은 요셉이다. 둘째 [[아들]] [[최규환]] 역시 배우로 활동 중이다. [[중앙대학교]] 연극영화과 입학 동기로는 [[윤문식]]과 [[박인환(배우)|박인환]] 등이 있다. [[http://www.newsen.com/news_view.php?uid=201010221009051001|#]]
[[분류:한국 남배우]][[분류:1945년 출생]][[분류:1969년 데뷔]][[분류:예산군 출신 인물]]
- 최창홍
[[1945년]] [[5월 11일]] [[충청북도]] 참여관 겸 광공부장으로 임명되었으며 1945년 8월 광복 때까지 고등관 3등과 정6위에 서위되었다. [[친일파 708인 명단]]의 경시 부문, 도 참여관 부문, 조선총독부 사무관 부문,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자 명단]]의 경찰 부문, 관료 부문,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 포함되었다.
|임기 = [[1945년]] [[8월 16일]] ~ [[1945년]] [[9월 2일]]
- 한갑수(1913)
[[1957년]]부터 [[1960년]]까지 [[국회의장]] [[이기붕]]의 [[비서실장]]을 지냈다. 이후 한글기계화연구소 이사장, 한글학회 회장, 한글재단 초대 이사장 등을 역임하였다. [[1945년]]부터 37년 동안 [[KBS 1라디오]] 프로그램 ‘바른 말 고운 말’에 출연하여 한글의 올바른 사용법을 알렸다.
- 한규복 (1881년)
광복 직후 일체의 공직을 사퇴하고 칩거하였다. [[1945년]] [[9월 2일]] [[미군정청]] 고문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였다. [[8월 16일]] [[한국곡자주식회사]](韓國穀子株式會社)를 설립하고 대표이사 사장이 되었다. [[대한민국]] 건국 후인 [[1949년]]에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자수해 왔으나, 반민특위 활동이 방해를 받으면서 불기소처분을 받았다.<ref name="neftkin">{{웹 인용
* 어머니 : 평산 백씨(平山白氏, ? [[8월 12일]] - [[1945년]] [[6월 12일]])
* 부인 : 평양 조씨, 조인옥(平壤趙氏 趙仁玉, [[1881년]] [[2월 24일]] - [[1945년]] [[9월 10일]]). 조재연(趙載淵)의 딸
|임기 = [[1945년]] [[9월 2일]] ~ [[1946년]] [[1월]]
- 한덕수 (1907년)
[[경상북도]]에서 태어나 [[1927년]] 성악가가 되려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니혼 대학]] 중퇴후 노동운동에 참가했다. [[1934년]] 조선인 노동자의 파업을 이끌었다가 체포됐다. [[1945년]] [[10월 15일]]에 결성된 재일본조선인련맹(조련)에 참가해 총무부 담당 위원에 선출됐다. [[1955년]] [[5월 25일]] [[재일본조선인총련합회]] 결성후 의장단 6명에 포함됐다. [[1958년]] 5월 제4회 전체대회에서 의장단이 해체되고 단일 의장, 부의장제가 도입되자 의장에 선출됐다. 2001년 사망할 때까지 중앙위원회 의장으로 있었다. [[1967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됐다. [[1972년]]에는 [[노력영웅]] 칭호를 받았다. [[1994년]] [[김일성]]이 죽었을 당시 기준으로 서열 4위였다.
- 한복 (1914년)
[[1939년]] [[12월 4일]] 부산지방법원 예비판사, [[1940년]] [[5월 31일]] 부산지방법원 판사로 각각 임명되었으며 [[1942년]] [[3월 25일]] 경성지방법원 판사로 임명되었다. [[1944년]] [[8월 17일]]부터 [[1945년]] [[8월 15일]] 광복 때까지 평안남도 이사관 겸 평안남도 산업부 산업과장을 역임하면서 고등관 5등에 서위되었고 이러한 경력 때문에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자 명단]]의 사법 부문, 관료 부문에 포함되었다.
- 함인섭
해방 직후인 [[1945년]] [[9월 2일]] 주한미군이 주둔하고 [[미 군정]]청이 설치되자 함인섭은 미군정청 [[농산국]] 직원이 되었다. [[1946년]] 미 군정청 [[농림부]] 고문이 되었다가 [[1946년]] [[춘천공립농업중학교]] 교장으로 부임하였다. 이때 그는 [[강원도]] 도내에 대학이 없는 것일 보고, 강원도내에 대학 설립 추진을 계획하게 되었다. [[1946년]] [[10월 1일]] 춘천농업대학 창립 발기회를 결성하고 주도적으로 활동했다.
* [[1945년]] [[9월]]] [[미 군정]]청 설립, 미군정청 [[농산국]] 직원
- 허영호 (정치인)
| 경력 = 前 [[한국민주당]] 공보특보위원(1945년)<br/>前 [[동국대학교]] 총장(1946년)<br/>前 [[무소속]] 국회의원(1949년)
[[1938년]] 1월부터 [[1945년]] [[8월 15일]]까지 재단법인 조선불교중앙교무원 평의원, 재무국장, 상무이사, 이사장, 재단법인 조계학원 이사장 직위를 역임했으며 1938년 10월 2일 조선불교청년총동맹 경성연합 중앙집행위원, [[1941년]] 5월 [[국민총력조선연맹]] 평의원으로 위촉되었다. 1941년 9월 9일부터 1945년 8월 15일까지 조선불교조계종 종정 사서(司書)를 역임했고 1941년 전후에 대본산 범어사 불교신체제운동 특별위원을 역임했다. 1942년 9월 2일부터 9월 12일까지 조선불교협회가 주최한 불교순회강연회에서 평안도 일대를 순회하면서 '대동아 전쟁(大東亞戰爭)과 일본(日本)의 사명(使命)'을 주제로 한 강연을 열었다. 1943년 4월 7일 불교문화보급회 발기인으로 위촉되었으며 1943년 11월 16일부터 11월 17일까지 육군특별지원병 사기양양 대강연회 강연을 열었다.
광복 이후인 [[1945년]] 9월부터 1946년 9월까지 서울 혜화전문학교(惠化專門學校) 교장을 역임했으며 [[1946년]] 9월부터 [[1948년]] 11월까지 동국대학 학장(현재의 [[동국대학교]] 총장)을 역임했다. [[1949년]] [[1월 13일]]에 실시된 제헌 국회의원 경상남도 부산부 갑 선거구 [[1949년 대한민국 재보궐선거|재보궐선거]]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당선되었지만 [[한국 전쟁]] 중이던 [[1950년]] [[7월 13일]]에 납북되었다.
- 허진(법조인)
[[1945년]] 광복과 함께 다시 판사로 임용되었고, 대구지방법원장(1948), 부산지방법원장(1951), 서울고등법원장(1952)을 역임하였다. [[1954년]] 9월 대법관에 임명되어 [[1959년]] 9월까지 5년간 재임했다.
- 홍석조 (1953년)
** 누님 [[홍라희]](洪羅喜, [[1945년]] [[7월 15일]] ~ ) - 전 삼성미술관 리움 관장
- 홍진기
| 장녀 || [[홍라희]] || [[1945년]] [[7월 15일]] || || [[리움]] 관장
- 황태성(1906)
* [[1945년]] 조선공산당 활동
- 흥친왕
*** 양손자 : [[이우]]([[1912년]] ~ [[1945년]]), 조카 [[의친왕]]의 차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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