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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부자
         [[분류:논산시 출신 인물]][[분류:한국 여배우]][[분류:대한민국 국회의원]][[분류:1941년 출생]][[분류:1962년 데뷔]]
         || '''출생''' ||[[1941년]] [[2월 8일]] ([age(1941-02-08)]세), [[충청남도]] [[논산시]]||
  • 경주시
         |align="center"|[[1941년]]
  • 고복수
         이후 [[1936년]] 말에 발표한 "아 으악새 슬피우는 가을인가요"라는 가사의 〈짝사랑〉이 또다시 히트하고 이은파와의 듀엣곡인 신민요 〈풍년송〉 등으로 지속적인 인기를 누렸다. 오케레코드와 전속 공연단인 조선악극단에서 활동하다가 [[1940년]]부터 [[빅타레코드]]의 반도악극좌로 이동하였다. 여기에서 〈알뜰한 당신〉의 인기 가수 황금심과 만나 [[1941년]]에 결혼하였다.
  • 구상 (시인)
         [[1919년]] [[서울특별시|서울]]에서 출생하였으나, 유소년기의 대부분은 [[함경남도]] [[원산시|원산부]]에서 보냈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서 [[1938년]] [[원산]] 덕원 [[성베네딕도 수도원]] 부설 신학교 중등과를 수료하고 [[1941년]] [[니혼 대학|니혼 대학교]] 전문부 종교과를 졸업하였다.
  • 권중환 (1890년)
         경상북도 의성군수와 청송군수 재직 시절에 발발한 [[중일 전쟁]] 당시 군용물자 공출, 군대 후원 및 군인 위문, 국방사상 보급 및 선전, 국방헌금 모금 업무를 수행하여, 일본의 침략 전쟁에 적극 협력했다. [[1940년]] [[3월 27일]] 고등관 4등과 정6위에 서위되었으며, 1940년 3월 28일 경상북도 영천시, [[1941년]] [[3월 31일]] 경상북도 의성군으로 각각 임명되었다.
  • 김광규 (시인)
         '''김광규'''(金光圭, [[1941년]] [[1월 7일]] ~ , [[서울특별시|서울]] 출생)은 [[대한민국]]의 [[시인]]이다.
         [[분류:1941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대한민국의 시인]][[분류:대한민국의 번역가]][[분류:대한민국의 저술가]][[분류:한양대학교 교수]][[분류:대산문학상 수상자]][[분류:이산문학상 수상자]][[분류:20세기 대한민국 사람]][[분류:21세기 대한민국 사람]][[분류: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문학부 동문]][[분류:서울대학교 대학원 동문]][[분류:김수영 문학상 수상자]][[분류:정지용 문학상 수상자]]
  • 김광웅
         '''김광웅'''(金光雄, [[1941년]] [[10월 4일]] ~ , [[서울특별시|서울]])은 [[대한민국 행정부|대한민국 정부]]를 연구하는 학자이고 전직 장관이다.
         [[1941년]] [[경기도]] [[경성부]]에서 출생하였고, 배재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62년]]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법학사)하고, [[1965년]]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에서 행정학석사 학위를, [[1971년]] 미국 하와이 대학교(University of Hawaii) 대학원에서 정치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 김광웅 (공무원)
         '''김광웅'''(金光雄, [[1941년]] [[10월 4일]] ~ , [[서울특별시|서울시]])은 [[대한민국 행정부|대한민국 정부]]를 연구하는 학자이고 전직 장관이다.
         [[1941년]] [[경기도]] [[경성부]]에서 출생하였고, 배재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62년]]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법학사)하고, [[1965년]]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에서 행정학석사 학위를, [[1971년]] 미국 하와이 대학교(University of Hawaii) 대학원에서 정치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 김교성 (작곡가)
         | [[1941년]]
  • 김기수 (국악인)
         [[1941년]] 획기적인 창작 국악곡으로 꼽히는 〈세우영(細雨影)〉을 작곡했으며, 광복 후에는 [[대한민국]] 국악계의 토대를 닦았다. 흔히 창작국악과 국악작곡의 개척자로 불린다.<ref>{{뉴스 인용
  • 김동조 (1918년)
         | 차녀 || [[1947년]] || [[손원일]]의 장남 손명원(孫明源, [[1941년]]~, 현대미포조선·쌍용자동차 사장, 스카이웍스솔루션코리아 고문)과 결혼. 김영숙의 딸은 손정희(孫貞姬)이고 사위는 [[홍정욱]].
  • 김두환
         [[1938년]]에 열린 제1회 재도쿄 미술협회전에서 《풍경》, 《봄의 풍경》을 출품했으며 [[1940년]]에 열린 제3회 재도쿄 미술협회전에서 《여승》, 《향수》, 《자화상》 등을 출품했다. [[1941년]]에 열린 제28회 일본 이과회전(二科會展)에서 《정좌야 부인상(正坐也 婦人像)》으로 입선했고 [[1942년]] 11월 경성부에서 열린 반도 총후 미술 전람회(半島 銃後 美術 展覽會)에서 유화로 입선했다.
  • 김문집
         [[1941년]] 도일한 뒤 돌아오지 않았고, 일본에 귀화했다.
  • 김병현 (독립운동가)
         [[1940년]] [[동래중학교]] 재학 중 양중모·남기명·김지훈 등과 함께 [[독서회]]를 조직하였다.<ref name="조선일보" /><ref name="서울신문">[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080701027019 <nowiki>[부고]</nowiki> 독립운동가 김병현 선생 별세], 서울신문. </ref> 졸업후 [[1941년]] 독서회를 강화하고 [[조선독립당]]을 조직하여 항일투쟁을 하였다. 이후 항일결사단체인 자일회(紫一會)와 순국당(殉國黨) 등과 연대하여 광범위한 항일투쟁을 주관하다가 [[1944년]] [[8월]] [[조선독립당]]이 [[일본 제국|일제]]에 발각되자 수감되어 [[1945년]] [[6월]]까지 [[부산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1982년]] [[대통령표창]],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ref name="조선일보" /><ref name="서울신문" /><ref name="한국일보">[http://news.hankooki.com/lpage/people/200806/h2008063003102184840.htm 애국지사 김병현 선생 별세]{{깨진 링크|url=http://news.hankooki.com/lpage/people/200806/h2008063003102184840.htm }}, 한국일보.</ref>
  • 김사연 (1896년)
          | 임기 = [[1931년]] ~ [[1941년]]
         [[일본어]]로 발행되는 잡지인 《[[조선공론]]》의 사장을 맡았고, 부협의원 등 여러 직책에서 일하며 [[경성부]]의 유지로 활동했다. [[1931년]] 중추원의 주임참의직에 처음 임명되어 [[1941년]]에는 칙임참의에 올랐다. [[최린]]의 [[천도교]] 신파가 [[1934년]] [[조선총독부]]의 후원으로 결성한 [[시중회]]에 발기인으로 가담한 바 있다.
  • 김성겸(탤런트)
         || '''출생''' ||[[1941년]] [[5월 13일]] (77세)||
         [[분류:김제시 출신 인물]][[분류:1941년 출생]][[분류:1965년 데뷔]][[분류:한국 남배우]]
  • 김성수 (1891년)
         [[1940년]] [[8월 10일]] 일제가 동아일보를 강제폐간시키자, 김성수는 고향으로 돌아가 [[1945년]] [[8.15 광복]]때까지 칩거,은거하였다.<ref name="동아일보"/> [[1941년]] [[태평양 전쟁]] 이후 [[조선총독부|일제]]로부터 [[창씨개명]]을 강요당하였으나 거절하였다. 또한 일제가 제안한 귀족원(상원의원)을 거절하였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47&aid=0002033698 "교학사의 '김성수'서술, 위키백과와 90% 동일"]</ref>
         {{출처|날짜=2013-09-06|한편 그는 [[1941년]]부터 [[이승만]]이 미국의 소리 단파방송에 출연하자, [[송진우 (정치인)|송진우]], [[여운형]], [[안재홍]], [[장택상]], [[윤치영]] 등과 함께 미국의 소리 단파방송을 비밀리에 청취하기도 했다. [[창씨개명]] 권고가 있었으나 그는 창씨를 거절했다. [[1942년]] 이후 그는 요시찰인물 2급으로 분류되어 감시와 내사를 당했다.}}
         *** 사돈 : [[송진우 (정치인)|송진우]](宋鎭禹, [[1890년]] [[5월 8일]] ~ [[1945년]] [[12월 30일]])<ref>김성수의 오랜 친구이자, 그의 양손자 [[송상현 (1941년)|송상현]]은 김성수의 조카 [[김상협]]의 사위이다.</ref>
  • 김양 (1953년)
         *** 사촌누나: 김효자(金孝子, [[1941년]] ~ )
  • 김인영 (목회자)
         [[일제 강점기]] 말기인 [[1941년]] 협성신학교가 폐쇄되고 설치된 감리교신학교 교장에 취임하였고, [[태평양 전쟁]] 기간 중 일제에 협력한 행적이 있다. 일제가 강제로 교파를 통합하여 [[1945년]] 발족시킨 일본기독교 조선교단의 의장을 맡았다.<ref>{{웹 인용
  • 김정렬 (1917년)
          | 복무 기간 = 1941년 ~ 1957년 1월 6일 <br/> {{육군|일본제국}}[[1941년]] ~ [[1945년]] <br />{{육군|대한민국}}[[1946년]] ~ [[1949년]] <br />{{공군|대한민국}}[[1949년]] ~ [[1957년]] [[1월 6일]]
         [[1940년]] 일본육군사관학교를 [[1941년]] 일본항공사관학교를 졸업하고 [[태평양 전쟁]] 당시에는 조종수로 출전하였다. 해방 후 창군에 참여하고 [[1949년]]에는 [[대한민국 공군]] 창설에 참여하여 초대,3대 공군참모총장을 역임했다. [[1957년]] 중장 예편 이후 국방부 장관을 지냈다. [[1963년]] [[민주공화당]](民主共和黨)의 초대 의장이 되었다가 그 해에 주미대한민국대사로 부임, 1년간 근무했다. 1966년에는 반공연맹 이사장으로 취임하였고, [[1967년]]에는 [[민주공화당]] 공천으로 비례대표 국회의원이 되었다. 1970년대에는 기업인으로 활동하다가 다시 [[대한민국 제5공화국|제5공화국]] 때 총리 서리로 발탁되어 국무총리를 역임하였다.
         1940년 일본예과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다시 일본 육군항공사관학교 54기로 편입, [[1941년]] 3월 일본 육군항공사관학교를 졸업했다. [[일본제국 육군]] 항공대 소속 조종사로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였으며 [[1941년]] [[12월]] 항공 중위로 [[필리핀]] 공략 작전에 참여하였다. 일본 육군의 비행중대장 및 비행전대장으로 보임되었다.
  • 김정렴
         *** 사위: 김중웅(金重雄, [[1941년]] [[11월 7일]] ~ )
  • 김종석 (1918년)
         |복무 기간=[[1941년]] ~ [[1949년]]
  • 김종학(1941)
         [[분류:대한민국 국회의원]][[분류:경산시 출신 인물]][[분류:1941년 출생]]
         [[1941년]] [[2월 26일]] ~
         1941년 [[경상북도]] [[경산시|경산군]]에서 태어났다. [[대구광역시|대구]] 계성중학교, [[계성고등학교]], [[연세대학교]] 정법대학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였다.
  • 김종해 (시인)
         '''김종해'''(金鍾海, [[1941년]] [[7월 23일]] [[부산광역시]] ~ )는 [[대한민국]]의 [[시인]]이다. 시인 [[김종철 (시인)|김종철]]의 형이다.<ref>{{뉴스 인용|저자=김여란|제목=‘못의 사제’ 김종철 시인, 하늘나라 순례에 오르다|url=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407062104275&code=100402|날짜=2014-07-06|확인날짜=2016-01-03|뉴스=경향신문}}</ref>
         [[분류:대한민국의 시인]][[분류:1941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부산광역시 출신 인물]][[분류:공초문학상 수상자]][[분류:20세기 시인]][[분류:현대문학상 수상자]]
  • 김주연 (문학평론가)
         '''김주연'''(金柱演, [[1941년]]~ )은 [[대한민국]]의 문학평론가이며 독문학자이다.
         [[분류:1941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한민국의 문학 평론가]][[분류:숙명여자대학교 교수]][[분류:서울대학교 인문대학 동문]][[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팔봉비평문학상 수상자]]
  • 김진 (1949년)
         ** 사촌누나: 김효자(金孝慈, [[1941년]] ~ )
  • 김찬진
         '''김찬진'''(金贊鎭, [[1941년]] [[2월 24일]] [[광주광역시|전남 광주]] - )은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다. 제15대 국회의원을 역임하였다.
         [[분류:1941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민주자유당 당원]][[분류:신한국당의 정치인]][[분류:한나라당의 정치인]][[분류:자유민주연합의 정치인]][[분류:대한민국의 정치인의 배우자]][[분류:20세기 대한민국 사람]][[분류:21세기 대한민국 사람]][[분류:광주광역시 출신]]
  • 김철호(1905)
         * [[1941년]] 10월 삼화정공(주) 사명 변경
  • 김한일(영화감독)
          | 활동기간 = [[1941년]] ~ [[1975년]]
         * 1941년 동양화가 첫 등단.
         [[분류:1921년 태어남]][[분류:1975년 죽음]][[분류:대한민국의 영화 감독]][[분류:함창 김씨]][[분류:상주시 출신 인물]][[분류:대한민국의 화가]][[분류:1941년 데뷔]][[분류:일제 강점기의 화가]][[분류:중국에 거주한 대한민국인]][[분류:일본에 거주한 대한민국인]][[분류:타이완에 거주한 대한민국인]][[분류:일제 강점기의 서예가]][[분류:대한민국의 서예가]][[분류:대한민국의 기업인]][[분류:중앙대학교 교수]][[분류:대한민국의 영화 프로듀서]][[분류:대한민국의 연출가]][[분류:대한민국의 영화 평론가]][[분류:대한민국의 과학 평론가]][[분류:대한민국의 미술 평론가]][[분류:대한민국의 연극 평론가]][[분류:대한민국의 영화 각본가]][[분류:대한민국의 영화 제작자]][[분류:투자가]][[분류:유교 이탈자]][[분류:대한민국의 불교 신자]][[분류:하얼빈 공업대학 동문]][[분류:서라벌예술대학 동문]][[분류:중앙대학교 동문]][[분류:고려대학교 대학원 동문]][[분류:연세대학교 대학원 동문]][[분류:한양대학교 대학원 동문]][[분류:동국대학교 대학원 동문]][[분류:당뇨병으로 죽은 사람]][[분류:폐렴으로 죽은 사람]]
  • 김혜자
         '''김혜자'''(金惠子, [[1941년]] [[10월 25일]] ~ )는 [[대한민국]]의 [[배우]]이다. [[이화여자대학교]] 2학년 시절인 1963년 [[KBS]] 공채 1기 탤런트로 정식 데뷔하며 연기자로 입문하였다. ‘국민 엄마’라는 수식어가 최초로 붙은 배우이자, 여배우들의 존경을 받고 대표적인 롤모델로 꼽히는 정통 연기파배우로 ‘갓혜자’라는 애칭으로 불린다.
         김혜자는 [[1941년]] [[9월 15일]], [[광주광역시|광주]]에서 태어나 자랐다. 대중에게 알려진 나이의 [[10월 25일]]은 호적상의 생일이며 실제 생일은 [[1941년]] [[9월 15일]]이다.<ref>{{뉴스 인용 |제목 ='어르신 계보' 아세요? 신구 vs 이순재 누가 형일까 |url =http://entertain.naver.com/read?oid=108&aid=0001973168|출판사 =스타뉴스 |저자 =김겨울 |날짜 = 2017-10-10 |확인날짜 =2017-09-15 }}</ref> 졸업한 이후에, [[이화여자대학교]] 생활미술학과에 진학했다. 1960년 연극배우로 처음 데뷔했으며 다음 해 1961년 [[KBS]] 서울중앙방송 공채 1기 탤런트로 정식 데뷔하였으나<ref>{{뉴스 인용 |제목 =[시선★피플]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 대한민국 국민 엄마, 배우 ‘김혜자’ |url =http://m.sisun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32716&daum_check=|출판사 =시선뉴스 |저자 =문선아 |날짜 = 2016-02-08 |확인날짜 =2017-09-15 }}</ref>, 연수를 끝내기도 전에 11살 연상의 남편과 결혼하면서 연기 중단을 선언했고 졸업을 하지 못했다. 이와 관련해 김혜자는 “열망만 컸지 연기에 소질이 없다고 생각해 도망친 것”이라고 말했다.<ref name="kyunghyang" />
         [[분류:백상예술대상 수상자]][[분류: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수상자]][[분류:부일영화상 수상자]][[분류:KBS 연기대상 대상 수상자]][[분류:MBC 연기대상 대상 수상자]][[분류:대한민국의 작가]][[분류:대한민국의 여자 연극 배우]][[분류:대한민국의 여자 영화 배우]][[분류:대한민국의 여자 성우]][[분류:대한민국의 수필가]][[분류:20세기 대한민국 사람]][[분류:21세기 대한민국 사람]][[분류:1960년 데뷔]][[분류:1941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불교 이탈자]][[분류:대한민국의 장로교도]][[분류:광주광역시 출신]][[분류:대한민국의 여자 텔레비전 배우]]
  • 김호규
         [[1938년]] [[조선실업구락부]] 회원을 역임했고 [[1939년]]부터 [[1942년]]까지 [[조선총독부]] 내무국 지방과 촉탁으로 근무했다. [[1941년]] 3월에 열린 [[대동아공영권]] 확립에 관한 연설에서 도쿄 회의(대동아공영권에 대한 회의)에 대한 지지 의사를 표명하는 등 일본의 침략 전쟁을 적극 지지했다. [[1940년]] 일본 기원 2600년 축전 기념 초대자로 선정되었고 1940년 11월 10일 일본 정부로부터 기원 2600년 축전 기념장을 받았다. [[1942년]] [[12월 28일]] 일본 정부로부터 종4위에 서위되었으며 그해 [[8월]] 광복 이후 칩거하였다.
  • 남궁염
         [[1928년]]에는 [[허정]], [[이기붕]] 등과 함께 삼일신보사(三一申報社) 창립 발기인으로 참여하였으며 [[1933년]]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의 뉴욕지부 대표후보로 활동하였다. [[1938년]] 일시 귀국하여 [[충청북도]] [[제천시|제천군]] 의 삼화성광산(三火星鑛山)을 운영하다가 다시 [[미국]]으로 출국하였다. [[1941년]] 다시 구미위원부 위원에 재선임되고 [[1942년]] 이후 북미동지회(北美同志會) 총부장, 재미한족연합위원회(在美韓族聯合委員會) 경제위원을 역임하면서 재미 한인사회의 단결을 위해 노력하였다.
  • 노덕술
         [[1932년]] 7월 경부로 승진하여 울산경찰서 경부로 전근했다가 같은 해 8월 다시 [[경기도]] [[경성부]] 본정경찰서(오늘날 서울 명동) 경부로 옮겨 사업주임을 지냈다. [[1933년]] 2월 인천경찰서 경부, [[1934년]] 2월 양주경찰서 경부, [[1938년]] 11월 개성경찰서 경부로 전근해 사법주임을 지냈다. 양주경찰서와 개성경찰서 경부로 재직 당시 [[중일 전쟁]]이 일어나자 군사수송 경계, 여론 환기, 국방사상 보급 선전을 비롯해 조선인의 전쟁협력을 독려하기 위한 각종 시국좌담회에 참석하고 지도하는 등 전시 업무를 적극 수행했다. 이러한 활동은 일제 총독부로부터 공로를 인정받아 [[1941년]] 3월 훈8등 서보장을 받았다. 그해 6월 경성 종로경찰서 경부로 전근해 사법주임으로 근무했다.
  • 리종만
         [[1938년]] 1월 잡지 《농업조선(農業朝鮮)》을 창간했으며 [[1938년]] 6월 사립 [[대동공업전문학교]]를 설립, 경영했다. [[1939년]] 4월 조선산금협의회(朝鮮產金協議會) 위원으로 위촉되었고 1939년 6월 28일 일본군 위문대 대금으로 1,000원을 헌납했다. 1939년 11월 조선유도연합회 평의원을 역임했으며 [[1940년]] 7월 잡지 《[[삼천리 (일제 강점기의 잡지)|삼천리]]》에 〈지원병(志願兵)과 혈(血), 한(汗), 사랑(愛)의 인(人))〉을 기고했다. [[1941년]] 9월 [[임전대책협의회]] 채권가두유격대 명치정대에 참여했고 같은 달에 [[조선임전보국단]] 경성 지역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1941년 10월 조선임전보국단 이사를 역임했으며 이러한 경력으로 인해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자 명단]]의 경제 부문, 친일단체 부문에 수록되었다.
  • 문명대
         [[1940년]][* 출생연도가 [[1941년]]으로 표기된 곳도 있다.] [[경상북도]] [[경산시]]에서 태어났으며 [[경북대학교]] [[경북대학교/학부/사범대학|사범대학]] [[경북대학교/학부/사범대학#s-7|역사교육과]]를 졸업하였으며, [[경북대학교]] 대학원 사학과에서 석사, [[동국대학교]] 대학원 미술사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박사학위 논문은 ‘석굴암 불상조각의 연구’로 석굴암 연구에 관해서 기념비적인 연구로 평가받는다. 박사학위 지도교수는 한국불교미술사의 대가인 황수영 [[동국대]] 불교대학 교수였다.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출처]] 석사를 졸업하고 [[동국대학교]] [[박물관]] 전임연구원을 시작으로 [[1976년]] [[동국대학교]] 불교대학 교수로 임용되었고, [[1983년]]~[[1993년]]까지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한국정신문화연구원]] 교수로 재임하였다가 [[1987년]] 동국대학교 미술학과 교수로 복귀하여 [[2006년]]까지 재직하였다.
  • 바비 킴 (배우)
         '''바비 킴'''(Bobby Kim, {{본명|김웅경}}(金雄經), [[1941년]] [[4월 25일]] ~ )은 [[미국]]에서 [[무예|무술]][[영화 배우|영화배우]]로 활약을 하였고 '[[대한민국|한국]]의 [[찰스 브론슨]]'이라 일컬어진 [[대한민국]]의 [[영화배우]]이다.
         [[분류:1941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한민국의 남자 영화 배우]][[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미국에 거주한 대한민국인]][[분류:대한민국의 무술가]][[분류:1961년 데뷔]][[분류:대한민국의 수필가]][[분류:20세기 대한민국 사람]][[분류:태권도인]][[분류:21세기 대한민국 사람]][[분류:서울우석국민학교 동문]][[분류:동도중학교 (서울) 동문]][[분류:동도공업고등학교 동문]][[분류:서울디자인고등학교 동문]][[분류:우석대학교 (서울) 동문]][[분류:고려대학교 교수]][[분류:한국체육대학교 교수]]
  • 박관수 (1897년)
         [[경기고등여학교]] 교장으로 재직 중이던 [[1941년]]에 [[태평양 전쟁]] 지원을 위해 결성된 [[조선임전보국단]] 발기인을 맡았다.<ref>{{서적 인용
  • 박문웅(1890)
         [[1940년]] [[판임관]] 5등이 되었다. 그해 [[5월]] [[창씨개명]]령이 떨어지자 그해 [[9월]] 박충으로 창씨개명하였다. [[1941년]] 다시 청도군수가 되었다가 [[1942년]] [[판임관]] 4등으로 승진하였다. [[1943년]] [[영천]][[군수]]가 되었다가 그해 [[3월 6일]] [[상주군|상주]][[군수]](尙州郡守)로 부임하였다. [[1943년]] [[8월 2일]] 각 도별로 [[일본적십자사]] 녹사(日本赤十字社錄事)를 선발할 때 [[경상북도]] 지역구 [[일본 적십자사]] 녹사의 한사람으로 선임되었다. [[12월 31일]] [[고등관]] 3급으로 승진하였다.
  • 박순천 (국회의원)
         기장에 여학교인 명정의숙 여학당 설립이 논의되자 조언했다 하며{{출처|날짜=2009-10-19}} 경성가정여숙 부교장이자 여성계와 교육계의 저명 인사로서, [[태평양 전쟁]] 시기에 전쟁 지원을 독려하는 친일 활동을 했다. [[1940년]] 친일 단체인 [[황도학회]]에 발기인으로 참가했고, [[1941년]]부터 [[조선임전보국단]] 주최의 강연에 연사로 참여했다. 이러한 경력으로 인해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중 교육/학술과 친일단체 부문에 선정되었다.
  • 박영주 (기업인)
         '''박영주'''([[1941년]] [[1월 29일]] [[부산광역시]] ~ )는 [[이건산업]] 대표이사 회장인 [[대한민국]]의 기업인이다.
         [[분류:1941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한민국의 기업인]][[분류:경기고등학교 동문]][[분류:서울대학교 상과대학 동문]][[분류:부산광역시 출신 인물]]
  • 박용구 (1879년)
         [[1912년]] [[한국병합기념장]], [[1915년]] [[다이쇼대례기념장]], [[1932년]] [[훈3등]] [[서보장]]을 수여받는 등 1933년을 기준으로 [[정4위]] [[훈3등]]에 서위되어 있었다. 일제강점기 말기인 [[1941년]]에 [[조선임전보국단]]이 결성될 때 참가하여 이때까지 생존해 있었던 것이 확인된다.<ref>{{서적 인용
  • 박용섭 (1892년)
         이후 화순군수로 이동하였으며, 화순군수를 맡고 있던 [[1941년]]을 기준으로 종5위 훈5등에 서위되어 있었다.
  • 박인천
         ** 차녀 : 박강자 (朴康子, [[1941년]] - , [[금호미술관]] 관장)
  • 박재란
         [[본관]]은 [[공주 이씨|공주]](公州)이며 [[서울특별시|서울]]에서 출생한 그녀는 아직 일제 강점기 시절이던 [[1941년]](4세 시절) 일가족과 함께에 이주하면서 이후 그곳에서 성장하였다. 10세 시절이던 [[1947년]]에 부친상(父親喪)을 치렀으며 [[1953년]] '''이영숙'''(李英淑) 본명으로 [[제8군 (미국)|주한 미8군 무대]] 언더그라운드 [[라이브 클럽]]에서 [[가수]] 첫 [[데뷔]]를 하였다. 이후 [[오르간|오르가니스트]] 겸 [[작곡가]] [[박태준 (음악가)|박태준]](朴泰俊)에게 발탁되어 [[박태준 (음악가)|박태준]]을 사부(師父)로 모시고 [[바이올린|바이올리니스트]] 겸 [[작곡가]] [[김광수 (음악가)|김광수]]를 사숙(師叔)으로 모시며 [[박태준 (음악가)|박태준]]의 문하에서 [[서양 고전 음악|음악]] 수련을 하며 [[박태준 (음악가)|박태준]]에게서 '''박재란'''(朴載蘭)이라는 [[예명]]을 얻었다. [[1957년]] 정식 [[가수]] 데뷔하였고 이후 《뜰 아래 귀뚜라미》, 《러키 모닝》, 《코스모스 사랑》, 《밀짚모자 목장 아가씨》 등을 비롯한 노래들이 히트하였다. 1년 후 [[1958년]]에는 [[파인 김동환]]의 [[시 (문학)|시]]에 [[기타 연주자|기타리스트]] 겸 [[작곡가]] [[김동현 (1924년)|김동현]]이 [[작곡]]한 《산 너머 남촌에는》을 불러 연이은 히트 기록하였고, 이듬해 [[1959년]] [[대한민국 영화|영화]] 《비 오는 날의 오후 3시》의 단역 출연을 통하여 [[영화 배우|영화배우]] 데뷔하였다. 같은 해 [[1959년]]에는 당시 [[미국]] [[가수]] 겸 [[기타 연주자|기타리스트]] 및 [[작사가]] 겸 [[영화 배우|영화배우]] [[벌 아이브스]](Burl Ives)가 [[미국]] [[시 (문학)|시인]] 겸 [[라디오]] [[사회자|MC]]였던 [[:en:Webley Edwards|웨블리 에드워즈]](Webley Edwards)와 공동으로 [[영어]] [[노랫말|가사]]로 [[작사]]하고 [[작곡]] 한 《Pearly shells》라는 노래 작품을 [[작사가]] [[전우 (시인)|전우]]가 [[한국어]] [[노랫말|가사]]로써 번안 작사하고 [[박춘석]]이 편곡한 《진주 조개잡이》라는 노래를 받아 불렀다. 이 노래 작품은 국내에서 [[1960년대]]와 [[1970년대]] 여름 애창 노래 가운데 인기 애창 번안곡에 손꼽히는 노래가 되었다.
  • 박재홍(1941)
         [[1941년]] [[2월 28일]] ~
         1941년 2월 28일 [[경상북도]] 선산군(현 [[구미시]])에서 [[박정희]] [[대한민국 대통령|대통령]]의 큰형 [[박동희]]의 아들로 태어났다. 대구상업고등학교(현 [[대구상원고등학교]]), [[고려대학교]] [[고려대학교/학부/법과대학|법과대학]] 행정학과를 졸업하였다. 이후 [[백수]]로 있다가 [[박태준]]의 도움으로 [[포스코|포항종합제철]]의 중간간부를 역임하다가, 동양철관(주)의 사장, 회장을 역임하였다.
  • 박홍 (신부)
         |출생일 = [[1941년]] [[2월 27일]]
         '''박홍'''(朴弘, [[1941년]] [[2월 27일]], [[대구광역시]])은 [[대한민국]]의 교육자이며 [[천주교]] [[예수회]] 소속 성직자이다. [[천주교]] 신부로서 정치 관여 발언을 많이 했고, 서강대 총장을 지냈으며 [[극우 반공주의|반공주의]], [[보수주의]] 성향의 언론인이기도 했다. [[1994년]] [[주사파]] 발언으로 화제가 되었다.
         [[분류:1941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분류:대한민국의 교육인]][[분류:대한민국의 대학 교수]][[분류:대한민국의 대학 총장]][[분류:가톨릭대학교 동문]][[분류:반공주의자]][[분류:서강대학교]][[분류:대한민국의 언론인]][[분류:대한민국의 로마 가톨릭 성직자]][[분류:예수회]]
  • 백년설
         [[1938년]]에 시험삼아 녹음한 <유랑극단>이 다음해에 발매되었는데, 반응이 좋아서 가수가 되기로 결심을 했다고 한다. [[1941년]]까지 태평 레코오드사 전속으로 있으면서 <두견화 사랑>, <눈물의 수박등>, <복지 만리>, <대지의 항구>, <일자 일루>, <나그네 설움> 등을 불러 당대 최고의 가수가 되었다.
         백년설은 1941년 [[태평양 전쟁]]에 지원병으로 참여할 것을 독려하는 노래를 불렀다. 그런데 이 위키의 [[친일인명사전]]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문화예술인의 경우 판단의 근거로 사용되는 자발성의 기준이 모호하다는 지적이 있다.
  • 부완혁
         [[경성부]]에서 출생했다. [[1941년]]에 [[경성제국대학]] 법과를 졸업하고를 지내는 등 일제 강점기 말기에 [[조선총독부]] 관리로 일했다. 이때의 경력으로 인해 [[2008년]] 공개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중 관료 부문에 포함되었다.
  • 소진우
         이후 일제 강점기 말기에는 [[경산군]] 군수를 지냈다. [[1941년]]을 기준으로 종6위 훈6등에 서위되어 있었다.
  • 손석우(작곡가)
         | 활동시기 = [[1941년]] ~ 현재
         손석우는 1920년 [[전라남도]] [[장흥군|장흥]]에서 태어났다. [[목상고등학교|전라남도 목포고등상업학교]]를 졸업하고, 목포 호남은행에서 근무하다가, 1941년에 작곡가 [[김해송]](金海松)의 소개로 조선연예주식회사에 입사해 [[기타 연주자]]로 활동했다. 이후 1957년에는 영화 《청실홍실》로 [[영화 음악]]감독 데뷔하였다.
         [[분류:대한민국의 작사가]][[분류:1920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장흥군 출신 인물]][[분류:1941년 데뷔]][[분류:대한민국의 작곡가]][[분류:대한민국의 기타 연주자]][[분류:20세기 대한민국 사람]][[분류:대한민국의 영화 음악 작곡가]][[분류:21세기 대한민국 사람]][[분류:목포상업고등학교 동문]][[분류:대한민국의 기업인]]
  • 송문화
         [[1924년]] [[조선총독부]] 군수로 승진 발령을 받았다. 경기도 지역에서 [[강화군]], [[광주시 (경기도)|광주군]], [[양주시|양주군]] 군수를 차례로 지냈다. [[1931년]] 훈6등 서보장을 받는 등 [[1935년]]을 기준으로 훈6등 종6위에 서위되어 있었다. 이후 참여관을 거쳐 [[1941년]]에는 중추원 참의에까지 올랐다.
  • 송상현 (1941년)
         '''송상현'''(宋相現, [[1941년]] [[12월 21일]] ~ )은 [[대한민국]]의 법조인, 법학교육자 겸 국제사회운동 지도자이다.
         [[분류:1941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한민국의 법조인]][[분류:연세대학교 교수]][[분류:서울대학교 교수]][[분류:고려대학교 교수]][[분류:한양대학교 교수]][[분류:국민대학교 교수]][[분류:아주대학교 교수]][[분류:송진우]][[분류:김성수 (1891년)]][[분류:숭실대학교 교수]][[분류:대한민국의 법학자]][[분류:대한민국의 사회 운동가]][[분류:대한민국의 공무원]][[분류:대한민국의 저술가]][[분류:민사소송법학자]][[분류:20세기 대한민국 사람]][[분류:21세기 대한민국 사람]][[분류:서울대학교 법과대학 동문]][[분류:서울대학교 사법대학원 동문]][[분류:툴레인 대학교 동문]][[분류:케임브리지 대학교 동문]][[분류:코넬 대학교 동문]][[분류:대한민국 육군 대위]][[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신평 송씨]][[분류:케임브리지 대학교 울프슨 칼리지 동문]][[분류:대한민국의 변호사]]
  • 송종익
         [[1936년]] 북미 대한인국민회 총회관 건축 위원으로 임명되었다. [[1941년]] [[하와이 주|하와이]]에서 열린 해외한족대회 때 북미 대한인국민회 대표로 참석하여 재미한족연합위원회를 설립했고 집행부 위원 겸 재무를 맡았다. 1941년 12월에 열린 대한인국민회 총회에서 [[로스앤젤레스]] 대표로 참가하여 대한인국민회 부의장으로 선출되었고 [[1944년]]에는 주미외무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된다. [[1945년]] 11월 재미한족연합위원회 대표단의 일원으로 귀국했지만 몇 달 뒤에 다시 미국으로 건너간다. [[1956년]] [[1월 7일]] 사망했으며 [[1995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 신귀식
         '''신귀식'''([[1941년]] [[2월]] ~ )은 [[대한민국]]의 [[배우|연기자]]이다.
         [[분류:1941년 태어남]][[분류:대한민국의 영화 배우]][[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한민국의 텔레비전 배우]][[분류:1961년 데뷔]][[분류:대한민국의 연극 배우]][[분류:고령 신씨]][[분류:구리시 출신]]
  • 신윤희
         '''신윤희'''(申允熙, [[1941년]]<ref>{{웹 인용|제목=12.12,5.18 등 관련 李熺性씨 등 2명 구속집행|url=http://media.daum.net/breakingnews/view.html?cateid=100000&newsid=19970428103800616&p=yonhap|출판사=연합뉴스|저자=|쪽=|날짜=1997-04-28|확인날짜=2011-08-06|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131104001417/http://media.daum.net/breakingnews/view.html?cateid=100000&newsid=19970428103800616&p=yonhap|보존날짜=2013-11-04|깨진링크=예}}</ref><ref>{{웹 인용|제목=<李熺性 申允熙씨 구속집행 이모저모>|url=http://media.daum.net/breakingnews/view.html?cateid=100000&newsid=19970428103800616&p=yonhap|출판사=연합뉴스|저자=|쪽=|날짜=1997-04-28|확인날짜=2011-08-06|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131104001417/http://media.daum.net/breakingnews/view.html?cateid=100000&newsid=19970428103800616&p=yonhap|보존날짜=2013-11-04|깨진링크=예}}</ref> ~ )는 [[대한민국]]의 [[군인]]으로, [[대한민국]] [[대한민국 육군|육군]] [[2성 장군|소장]] 및 육군본부 헌병참모부장을 끝으로 예편하였다.
         [[분류:1941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육군사관학교 동문]][[분류:평산 신씨]][[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육군기갑학교 동문]][[분류:육군기계화학교 동문]][[분류:육군포병학교 동문]][[분류:육군보병학교 동문]][[분류:육군대학교 동문]][[분류:대한민국 육군 소장]][[분류:대한민국의 베트남 전쟁 참전 군인]][[분류:대한민국의 반란자]][[분류:대한민국 제5공화국]][[분류:하나회]][[분류:자유민주연합 당원]][[분류:대한민국의 반역죄 기결수]]
  • 심훈 (1941년)
         '''심훈'''(沈勳, [[1941년]] [[9월 23일]] ~ )은 [[한국은행 부총재]],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회]] 위원, [[부산은행]] 은행장 등을 지낸 [[대한민국]]의 금융인이다.
         [[분류:1941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부산광역시 출신 인물]][[분류:부산고등학교 동문]][[분류:대한민국의 별정직공무원]][[분류:서울대학교 상과대학 동문]][[분류:예일 대학교 동문]][[분류:미국에 거주한 대한민국인]][[분류:타이완에 거주한 대한민국인]][[분류:대한민국의 금융인]][[분류:청송 심씨]]
  • 안병영
         }}'''안병영'''(安秉永, [[1941년]] [[9월 7일]] ~ , [[서울특별시|서울]])은 대한민국의 교육인이다. [[종교]]는 [[천주교]]이며, [[세례명]]은 베네딕토이다.
         [[분류:1941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한국외국어대학교 교수]][[분류:연세대학교 교수]][[분류:대한민국의 부총리]][[분류:대한민국의 교육부 장관]][[분류:대한민국의 교육인적자원부 장관]][[분류:김영삼 정부의 국무위원]][[분류:노무현 정부의 국무위원]][[분류:연세대학교 사회과학대학 동문]][[분류: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 동문]][[분류:빈 대학교 동문]][[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대한민국의 로마 가톨릭교도]]
  • 안상덕
         일제 강점기 말기에는 일제에 협력한 행적이 있다. [[중일 전쟁]] 발발 후 강압적인 전시체제가 구축되면서 천도교단은 [[1939년]]에 효율적인 전쟁 지원과 국방헌금 모금을 위해 국민정신총동원천도교연맹이라는 단체를 결성했다. 안상덕은 이 단체의 이사를 지냈고, 이듬해 조직이 개편되어 국민총력천도교연맹이 출범했을 때는 평의원을 맡았다. [[1941년]] 발족한 [[조선임전보국단]]에도 발기인으로 참가했다.
  • 안석주 (작사가)
         영화계에는 미술감독으로 참여하다가, [[1937년]] 《심청전》을 연출해 감독으로도 데뷔했다. [[일제 강점기]] 말기인 [[1941년]], 조선인은 지원병으로 갈 수 없는 현실에 좌절하던 조선 청년이 마침내 지원병 제도의 문호 개방에 힘입어 지원병으로 참전한다는 내용의 어용 영화 《지원병》의 [[영화 각본]]을 쓰고 연출했다. 이 영화에는 [[최운봉]]과 [[문예봉]]이 남녀 주인공으로 출연했다.
  • 안정효
         | 출생일 = [[1941년]]
         '''안정효'''([[1941년]] [[12월 2일]] ~ )는 [[대한민국]]의 [[소설가]]이자 [[번역가]]이다.
         [[분류:1941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한민국의 소설가]][[분류:대한민국의 번역가]][[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서강대학교 동문]][[분류:영어-한국어 번역가]][[분류:베트남에 거주한 대한민국인]][[분류:타이완에 거주한 대한민국인]][[분류:미국에 거주한 대한민국인]]
  • 양주남
         * [[1941년]] [[영화]] 《집 없는 천사》로 [[영화]] [[음향]][[영화 감독|감독]] 겸 [[영화]] [[동시녹음]][[연출가]] 데뷔.
         * [[1941년]] 《집없는 천사》
         * [[1941년]] 《집 없는 천사》
  • 유안진
         '''유안진'''(柳岸津, [[1941년]] [[10월 1일]] ~ )은 [[대한민국]]의 시인이자 [[서울대학교]] 명예교수이다.<ref>[http://people.search.naver.com/search.naver?where=nexearch&sm=tab_ppn&query=%EC%9C%A0%EC%95%88%EC%A7%84&os=102619&ie=utf8&key=PeopleService 네이버 인물정보]</ref> 본관은 [[전주 류씨|전주]]이며,<ref>{{웹 인용 |제목=유안진 인물정보 |url=http://focus.chosun.com/people/people01.jsp?id=23479 |웹사이트=조선일보}}</ref> 경상북도 안동 출생이다.
         1941년 10월 1일 경상북도 [[안동시|안동]]에서 출생했다. 1961~1965년 서울대학교 교육학과에서 재학하였다.<ref>{{뉴스 인용 |제목 =가슴 뛰는 이름(개교 70주년 축시) |출판사 =서울대 총동창신문 |저자 = |날짜 =2016-10-15 |확인날짜 =2016-12-07 }}</ref> 교사로 재직하다가 1970년 [[서울대학교]] 교육대학원 교육심리학과를 졸업, 1976년 미국 플로리다주립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ref>{{뉴스 인용 |제목 =유안진 명예교수는… 수필 ‘지란지교를 꿈꾸며’ 80년대 청소년에 큰 인기 |url =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11090201033630065006 |출판사 =문화일보 |저자 = |날짜 =2011-09-02 |확인날짜 =2014-04-29 }}</ref> 2016년 현재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이다.<ref>{{뉴스 인용 |제목 =가슴 뛰는 이름(개교 70주년 축시) |출판사 =서울대 총동창신문 |저자 = |날짜 =2016-10-15 |확인날짜 =2016-12-07 }}</ref>
         [[분류:1941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전주 류씨]][[분류:안동시 출신]][[분류: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문학부 동문]][[분류:서울대학교 교육대학원 동문]][[분류:서울대학교 교수]][[분류:대한민국의 시인]][[분류:20세기 작가|시인]][[분류:세기별 시인|20]][[분류:대한민국의 로마 가톨릭교도]][[분류:정지용 문학상 수상자]][[분류:공초문학상 수상자]][[분류:김달진문학상 수상자]]
  • 유진찬
         [[1928년]]부터 [[1939년]]까지 [[조선총독부 중추원]] 조사과 촉탁으로 일했고 [[1929년]] [[9월 7일]]부터 [[1943년]] [[4월 26일]] [[조선총독부]] 직속기구인 [[경학원]] 부제학으로 일했다. [[1937년]] 12월 [[중일 전쟁]]을 찬양하고 일본군의 승리를 기원하는 내용을 담은 한시를 지었으며 [[1938년]] [[2월 5일]] 명륜학원 강사로 임명되었다. [[1939년]] 조선유도연합회에 참여했고 [[1941년]] [[조선임전보국단]]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 윤강로
         [[경성부]]에서 태어나 [[1941년]]에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한 의사였다.<ref>{{서적 인용 |성= |이름= |저자링크= |저자= |편집자=연세대학교 |기타= |제목= 동연록|연도=2004 |초판연도= |초판발행월= |url= |형식= |확인날짜= |판= |날짜= |출판사= |출판위치= |언어= |id= |doi = |페이지=82쪽 |장= |인용문=1941년 졸업 > 의과대학 > 의학과 > 윤강노 }}</ref> 종조부 [[윤덕영]]의 아들이 일찍 사망하여 대가 끊어지자 이 집안에 양자로 들어갔다. [[1940년]] 양조부 윤덕영이 사망하자 이듬해 그의 [[자작]]위를 물려받았다.
  • 윤석중 (1893년)
         서무주임이던 1935년에 총독부가 시정 25주년을 기념하여 표창한 표창자 명단에 들어 있다. 양양군수로 재직하던 [[1941년]]을 기준으로 정7위 훈7등에 서위되어 있었다.
  • 윤영선 (1896년)
         [[태평양 전쟁]]의 추이를 관망하던 중 [[윤치영]]으로부터 [[일본]]이 반드시 패망하리라는 소식을 접하였으나, 아버지 [[윤치호]]로부터 일본이 패망할 수 있지만 일본이 승리할 수도 있다는 말을 듣고 사태를 관망하였다. [[1941년]] [[윤치영]] 등으로부터 [[이승만]]이 출연한 미국 방송 '미국의 소리' 단파 방송을 입수하여 시청하였다.
  • 윤치영
         [[1941년]] [[태평양 전쟁]] 직후 [[조선총독부]] 당국에서는 국내에 있는 문사, 지식인들을 동원하여 전쟁의 승전을 찬양하는 말과 글을 여기저기 내걸도록 강요하고 나섰다.<ref name="동산회고록:윤치영의 20세기 p.139">윤치영, 《동산회고록:윤치영의 20세기》 (삼성출판사, 1991) 139페이지</ref> 그는 [[일본 제국주의]]가 점점 미쳐간다며 분개하다가 주변으로부터 따돌림을 당하기도 했다. 이때 [[민족 대표 33인|민족대표]] 33인 중의 한사람으로 [[기미독립만세 사건]]에 가담하였던 [[박희도 (1889년)|박희도]](朴熙道)가 그를 만나자고 하였다. 윤치영에 의하면 "그는 어떤 연유에서였는지 그 당시 [[조선총독부|총독부]]에서 지원하는 것으로 알려진 경무부 잡지 〈[[동양지광]] (東洋之光)〉의 사장이라는 직함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는 〈동양지광〉에서 이번 호에 대동아전쟁 승전특집을 냈는데 다른 저명인사들의 것과 함께 나의 글이 실려 있다고 말하였다.<ref name="동산회고록:윤치영의 20세기 p.139"/> 윤치영은 자신의 허락 없이 명의를 도용했느냐며 항변하였다.
         [[1940년]]대 초반 윤치영은 "일사보국(一死報國)의 성(誠)을 맹세하여 임전국책에 전력을 다하겠다"는 결의문을 발표하였다. 또한 전쟁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발행한 채권을 팔기 위해 채권 가두유격대에 참여하였다. 1941년 "임전대책 협의회"에 참가하였다.<ref name=autogenerated3>청산하지 못한 역사 1 - 1(반민족문제연구소청년사, 1994)</ref> 임전대책 협의회는 전쟁비용 조달을 위해 채권 가두유격대를 조직하여 [[9월 7일]] [[서울]]에서는 76명이 1원짜리 채권을 가두판매 하였는데 윤치영은 여기에 동대문지구 대원으로 참가했다.<ref name=autogenerated3 />
         [[1941년]] [[태평양 전쟁]] 무렵에는 임전대책협의회 채권가두유격대에 참가하였다. 또한 같은 해 12월 동양지광사 주최의 미영타도(美英打倒) 대좌담회 연사로 참가하여 황민(皇民)의 사명에 대해 연설하였으며, {매일신보} 사설에 대동아공영권 건설에 미칠 회담의 영향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1941년]] [[12월 20일]] "미영 타도 대좌담회"에서 연설한 내용이다.
         그는 창씨개명을 한 후에도 창씨 성을 사용하지 않고 윤치영이라는 [[한국]]식 성명을 고집했다. 이는 [[1941년]]의 [[동양지광]] 주최 [[미영타도 좌담회]]에서도 나타났다. 다른 참석자들은 [[창씨개명]]한 성명을 썼지만 윤치영은 홀로 윤치영이라는 조선식 성명을 썼다. [[1941년]] [[10월]] [[조선임전보국단]] 개최식 때도 항상 그는 창씨명을 쓰지 않고 윤치영이라는 본명을 고집했다.<ref>매일신보, 1941년 10월 23일자, 2면</ref> 이후 임전보국단 행사에 불참했지만 그는 명단을 올리려거든 윤치영으로 올리라며 자신의 본명을 고집했다.
  • 윤태빈
         서울도 참여관으로 재직하던 [[1936년]], 《[[매일신보]]》에 신년사를 실어 총독부의 시정방침을 선전하고 일본 황실의 번영과 만수무강을 기원하였다. 서울도 참여관과 산업부장을 겸하고 있던 [[1938년]]에는 매일신보의 대담기사에서 [[중일 전쟁]]과 관련하여 조선의 병참기지로서의 사명을 강조하고, 서울도의 역할에 특히 기대되는 바가 크다는 발언을 했다. [[1939년]]에 또다시 [[매일신보]]에 기고하여 “[[내선일체]]의 제일선에 활약하는 황군장병의 노고를 격려”하면서 후방에서도 국책수행에 매진할 것을 주문했다. 충청북도 지사로 재임 중이던 [[1941년]]에도 《[[조광 (잡지)|조광]]》과 매일신보에 전쟁 지원을 역설하는 친일 기고문을 실었다.
  • 이가원
         [[본관]]은 [[진보 이씨|진보]]이고 본명은 '''이참연'''(李慙淵)이며, [[호 (이름)|호(號)]]는 가원(家源)· 연민(淵民)· 설관(雪館)으로 사용하였다. [[퇴계 이황]]의 14대손으로 어려서부터 내려오는 가학으로 한학을 공부하였다. [[1941년]]에서 [[1943년]]까지 명륜전문학원 연구과와 명륜전문학교 경학연구과를 마쳤다. 천착(穿鑿)하였다는 말처럼 젊어서부터 끊임없이 실학자 [[박지원 (1737년)|박지원]]의 문학세계를 조명하였으며, 『금오신화』, 『구운몽』, 『춘향전』, 『열하일기』 등 수많은 작품의 역주를 하여 한국 고전문학의 기반을 다졌으며, 위당 [[정인보]](鄭寅普), 육당 [[최남선]](崔南善), 벽초 [[홍명희]](洪命熹) 등과 교유하며 청년 문장가로 이름을 알렸다.
  • 이상백 (1904년)
         그후 제11회 도쿄 올림픽 대회 유치위원과 준비위원으로 미국, 영국, 독일, 스위스, 프랑스, 스웨덴, 핀란드, 폴란드 등을 방문하여 대회 유치와 준비에 협조를 구하는 등의 활동으로 일본 체육계의 공로자로 칭송받았다. [[1939년]]부터 [[1941년]]에는 모교인 [[와세다 대학]] 재외특별연구원으로 중국에 파견되어 동양학을 연구했으며, [[1940년]]에는 [[창씨개명]]을 끝까지 거부하였으나 도쿄 올림픽 유치와 추진의 공로로 [[조선총독부]]에서 그를 함부로 다루지 못했다. [[1944년]]에는 [[여운형]]이 결성한 지하독립운동 단체인 [[건국동맹]]에 참여하여 활동했다.
         ** 형수: 한문이(韓文伊, [[1895년]] ~ [[1941년]])
  • 이열희 (1924년)
         *** 당숙모: [[한문이]](韓文伊, [[1897년]] [[5월 7일]] ~ [[1941년]], '''이상정'''(李相定)의 부인.
         ** 백부 : 이상악(李相岳, 호는 긍남(肯南), [[1886년]] [[9월 24일]] - [[1941년]] [[1월 8일]])
  • 이인
         [[1941년]] 창씨개명 강요가 들어왔으나 거절하였다. 1942년 11월 [[조선어학회 사건]]에 연루되어 구속되어 이듬해 1월 징역 2년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받고 수감되었다가 뒤에 풀려났다.
  • 이쾌대
         [[1932년]] 제11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입선하면서 화단에 데뷔하였고, 그 해 가을에 제3회 전조선남녀학생작품전람회 회화부 2등상을 수상했다. 1934년 [[일본]]으로 유학, 도쿄 [[제국미술학교]]에 입학하여 [[1938년]] 졸업했다. [[1941년]] 도쿄에서 [[조선신미술가협회]]를 조직하였는데 이때 협회 구성원들은 [[이중섭]], [[최재덕 (화가)|최재덕]], [[문학수]], [[김종찬 (화가)|김종찬]], [[김학준 (화가)|김학준]], [[진환]]이었다.<ref name=sinsae>{{서적 인용
  • 이호재(연극배우)
         [[한국]]의 [[배우]]로, [[1941년]] [[5월 2일]], [[서울특별시]] [[종로구]]에서 태어났다. [[서울예술대학교]]를 [[졸업]]하였으며, [[1963년]]에 [[연극]]으로 데뷔하였다. 2018년 대한민국 예술원 연극분과 회원으로 선출되었다.
         [[분류:한국 남배우]][[분류:1941년 출생]][[분류:장흥군 출신 인물]][[분류:1963년 데뷔]]
  • 장익 (1933년)
         ** 여동생 : 장명자 (張明子, 데레사, [[1941년]] [[10월 3일]] ~ [[1987년]], [[미국]] [[펜실베이니아]] [[빌라노바대학교]] 도서관학 석사)
  • 장헌식
         장헌식은 관직에서 퇴임한 뒤로도 일본의 전쟁을 지원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1937년에는 각지에 시국강연을 다녔다. [[만주 사변]] 이후 일본군을 후원한 활동을 인정받아 [[1937년]] 일본 육군대신 명의의 표창을 받은 바 있고,<ref name="실록친일파" /> 37년 8월 21일에는 애국금차회원으로 참여하였다. [[중일 전쟁]] 발발 이후로는 시국강연반에 가담하여 전쟁 지원 연설을 하기도 했다. [[1938년]] 친일 단체인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에 발기인으로 참가한 뒤 [[1941년]] [[국민총력 조선연맹]]과 [[조선 임전 보국단]]에도 가담했다. 이때는 이미 70대의 노구였으나, 학병 지원을 독려한다며 전국에서 강연 활동을 벌이기도 했다. 1938년 8월 16일 조선총독부 칙임관대우 참의에 임명되었다.
         1941년 국민총력조선연맹(國民總力朝鮮聯盟) 평의원이 되고, 조선임전보국단(朝鮮臨戰報國團)이 출범할 때 창립발기인이자 회원으로 참여하였다. [[1940년]] [[1월 25일]] [[유도회]](儒道會) [[경성부]]지부 부회장에 선출되었다.
  • 정광조 (1883년)
         정광조는 [[1942년]]에 천도교 교령으로 뽑히는 등 교단 원로로 활동하고 있었는데, 전시체제 하에서 천도교를 대표해 여러 친일단체에 가담했다. [[1941년]] 발족한 [[조선임전보국단]]에 발기인으로 참여한 것이 대표적인 예이다. 국민정신총동원천도교연맹, 국민총력천도교연맹 등 어용 단체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맡아 태평양 전쟁 전몰 장병을 위한 위령제를 개최하기도 했고, [[1943년]]에는 [[이종린 (1883년)|이종린]]과 함께 [[조선종교단체전시보국회]]에 천도교 대표로 참가해 학병제를 선전하는 강연회를 열었다.
  • 정진
         * '''[[정진 (1941년)|정진]]'''([[1941년]] ~ [[2016년]])은 [[대한민국]]의 배우이다.
  • 정진(1941)
         '''정진'''(鄭珍, [[1941년]] [[11월 22일]] ~ [[2016년]] [[6월 2일]])은 [[대한민국]]의 [[연극 배우]], [[배우|텔레비전 연기자]], [[영화 배우]]이다.
         [[분류:1941년 태어남]][[분류:2016년 죽음]][[분류:대한민국의 남자 연극 배우]][[분류:안성시 출신 인물]][[분류:1962년 데뷔]][[분류:대한민국의 남자 배우]][[분류:대한민국의 남자 텔레비전 배우]][[분류:대한민국의 남자 영화 배우]]
  • 정충원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를 역임한 [[정재학 (1856년)|정재학]]의 셋째 아들이며 [[경상북도]] [[대구부]](현재의 [[대구광역시]]) 출신이다. [[1918년]] [[일본]] [[니혼 대학]] 법학과를 졸업했다. 경상북도 경무과 경시(1922년), 경상북도 경무과 경부(1923년 ~ 1928년), 경상북도 고등경찰과 경부(1928년), 경상북도 위생과 경부(1929년), 경상북도 포항경찰서 경부(1930년 ~ 1936년), 경상남도 순사교습소 경시(1937년)를 역임했으며 [[1937년]] [[8월 6일]]부터 [[1941년]] [[3월 31일]]까지 평안남도 보안과 경시로 근무했다.
         [[1940년]] [[4월 29일]] 중일 전쟁에 적극 협력한 공로를 인정받아 일본 정부로부터 공로 을(功勞 乙)과 훈6등 서보장을 받았다. 1941년 3월 31일 평안남도 성천군수, [[1943년]] [[3월 29일]] 평안남도 순천군수로 각각 임명되었고 [[1942년]] [[4월 8일]] 일본 정부로부터 훈6등 서보장을 받았다. 광복 이후인 [[1947년]] [[조흥은행]] 취체역을 역임했으며 [[1956년]] 10월부터 [[1961년]] 4월까지 조흥은행 은행장, [[1958년]] [[금융통화위원회]] 정위원을 역임했다. [[친일파 708인 명단]]의 경시‎ 부문,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자 명단]]의 경찰 부문과 관료 부문,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 포함되었다.
  • 최동
         [[일제 강점기]] 말기인 [[1938년]]에 [[조선기독교연합회]] 평의원을 지냈고 [[1941년]]에는 [[조선임전보국단]]의 발기인을 맡았다. 1941년에 [[동양지광]]이 주최한 '[[미영타도좌담회]]'에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교수 자격으로 참석해 [[황인종]]의 시각에서 [[미국]]과 [[영국]]을 비난하는 내용의 강연을 한 일도 있다. [[1945년]] 광복 직후 제4대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교장에 취임하였으며,1947년 12월 4일 Severance 의과대학으로 승격시켜 6년제를 만들었고, [[1955년]]까지 교수로 재직했다.
  • 최창홍
         [[1941년]] [[1월 24일]] [[경상남도]] 이사관 겸 [[경상남도청]] [[내무부]] 학무과장으로 임명된 뒤부터 [[경상남도]] 내무부 전무과장(1941년 8월 18일 임명), 도청 전매국 제조과장(1943년 9월 30일 임명)을 역임했고 [[1943년]] [[12월 1일]] [[조선총독부]] 서기관 겸 재무국 전매사업과장, [[1944년]] [[11월 22일]] 재무국 연초과장으로 임명되었다. [[1944년]] [[조선중앙정보위원회]] 간사, [[조선총독부]] 학도동원본부 참사, 조선총독부 근로동원본부 참사, 조선총독부 농업계획위원회 간사, [[조선철도간선긴급증강위원회]] 간사를 역임하는 동안 [[일본]]의 전쟁 수행에 적극 협력했다.
  • 하길종
         '''하길종'''(河吉鍾, [[1941년]] [[4월 13일]] [[부산광역시]] ~ [[1979년]] [[2월 28일]])은 [[대한민국]]의 영화감독이다.
         [[분류:1941년 태어남]][[분류:1979년 죽음]][[분류:대한민국의 영화 감독]][[분류:20세기 대한민국 사람]][[분류: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문학부 동문]][[분류:캘리포니아 대학교 로스앤젤레스 동문]][[분류:서울예술대학교 교수]][[분류:부산광역시 출신 인물]][[분류:진주 하씨]]
  • 한규복 (1881년)
         [[1941년]] [[12월]] [[중선주조조합연합회]] 회장에서 해임되었다. [[1942년]] [[4월]] [[조선맥자주식회사]](朝鮮麯子株式會社) 취체역 회장에 선임되었다. 그해 [[5월]]에는 [[재무간담회]] 회장직을 사퇴했다.
         ** 자부 : 밀양박씨 박정자(朴政子, [[1941년]] [[8월 12일]] - ), 박정현(朴貞鉉)의 딸
         ** 삼남 : 한용주(韓鏞柱, [[1941년]] [[8월 11일]] - )
  • 한무숙
         ** 장녀: 김영기(金榮起, [[1941년]] [[2월 24일]] ~ )
  • 허영호 (정치인)
         [[1938년]] 1월부터 [[1945년]] [[8월 15일]]까지 재단법인 조선불교중앙교무원 평의원, 재무국장, 상무이사, 이사장, 재단법인 조계학원 이사장 직위를 역임했으며 1938년 10월 2일 조선불교청년총동맹 경성연합 중앙집행위원, [[1941년]] 5월 [[국민총력조선연맹]] 평의원으로 위촉되었다. 1941년 9월 9일부터 1945년 8월 15일까지 조선불교조계종 종정 사서(司書)를 역임했고 1941년 전후에 대본산 범어사 불교신체제운동 특별위원을 역임했다. 1942년 9월 2일부터 9월 12일까지 조선불교협회가 주최한 불교순회강연회에서 평안도 일대를 순회하면서 '대동아 전쟁(大東亞戰爭)과 일본(日本)의 사명(使命)'을 주제로 한 강연을 열었다. 1943년 4월 7일 불교문화보급회 발기인으로 위촉되었으며 1943년 11월 16일부터 11월 17일까지 육군특별지원병 사기양양 대강연회 강연을 열었다.
  • 황연대
         3세 시절이던 [[1941년]]에 [[소아마비]] 증세로 인해 한쪽 다리를 쓰지 못하게 되었다. [[1957년]]에는 [[진명여자고등학교]]를 졸업했으며 [[1963년]]에는 [[이화여자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했다. 1963년부터 [[1964년]]까지 이화여자대학교 부속 병원 인턴으로 근무했고 [[1965년]]부터 1966년까지 [[연세대학교]] 세브란스병원 소아재활원 당직의사로 근무했다.<ref>{{웹 인용|url=http://whangaward.org/ko/dr-whang-youn-dai/biography|제목=연혁 - 황연대|언어=ko|확인날짜=2018-06-08}}</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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