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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용식
         '''강용식'''(康容植, [[1939년]] [[5월 8일]] ~ )은 [[대한민국]]의 언론인 출신으로 제12대·14·15대 국회의원과 국회 사무총장을 역임한 정치인이다.
         [[분류:1939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한국방송공사의 아나운서]][[분류:1966년 데뷔]][[분류:대한민국의 텔레비전 기자]][[분류:프리랜서 아나운서]][[분류:대한민국의 수필가]][[분류:대한민국의 시사 평론가]][[분류:숭실대학교 교수]][[분류:대한민국의 언론인]][[분류:대한민국의 문화공보부 차관]][[분류:대한민국의 문화공보부 장관]][[분류:민주정의당]][[분류:대한민국의 공보처 차관]][[분류:민주자유당 당원]][[분류:신한국당 당원]][[분류:한나라당의 정치인]][[분류:대한민국의 국무총리비서실장]][[분류:대한민국의 국회사무총장]][[분류:서울고등학교 동문]][[분류:서울대학교 법과대학 동문]][[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신천 강씨]][[분류:CJ 사람]][[분류:대한민국의 사외이사]]
  • 강용식 (1939년)
         '''강용식'''(康容植, [[1939년]] [[5월 8일]] ~ )은 [[대한민국]]의 언론인 출신으로 제12대·14·15대 국회의원과 국회 사무총장을 역임한 정치인이다.
         [[분류:1939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한국방송공사의 아나운서]][[분류:1966년 데뷔]][[분류:대한민국의 텔레비전 기자]][[분류:프리랜서 아나운서]][[분류:대한민국의 수필가]][[분류:대한민국의 시사 평론가]][[분류:숭실대학교 교수]][[분류:대한민국의 언론인]][[분류:대한민국의 문화공보부 차관]][[분류:대한민국의 문화공보부 장관]][[분류:민주정의당]][[분류:대한민국의 공보처 차관]][[분류:민주자유당 당원]][[분류:신한국당 당원]][[분류:한나라당의 정치인]][[분류:대한민국의 국무총리비서실장]][[분류:대한민국의 국회사무총장]][[분류:서울고등학교 동문]][[분류:서울대학교 법과대학 동문]][[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분류:신천 강씨]][[분류:CJ 사람]][[분류:대한민국의 사외이사]]
  • 강중인
         [[1939년]]에는 경성지방법원 검사대리가 되었고, [[1940년]]에 예비검사를 거쳐 그해부터 [[1943년]]까지 [[조선총독부]] 검사로 근무했다. 강중인은 경제담당 검사로 일하면서 [[태평양 전쟁]] 중 시국 연설과 기고로 사회 활동을 병행했다.
  • 강철민 (바둑기사)
         |출생일 = [[1939년]] [[7월 26일]]
         '''강철민'''(姜哲民<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20&aid=0000165367 <nowiki>[부음]프로바둑기사 강철민8단 별세</nowiki>]</ref>, [[1939년]] [[7월 26일]] ~ [[2002년]] [[12월 2일]]<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7&oid=001&aid=0000282625 프로바둑 강철민 8단 별세]</ref>)은 [[대한민국]]의 바둑 기사이다.
         [[분류:1939년 태어남]][[분류:부산광역시 출신 인물]][[분류:경남고등학교 동문]][[분류:서울대학교 상과대학 동문]][[분류:2002년 죽음]][[분류:대한민국의 바둑 기사]][[분류:1958년 데뷔]]
  • 고순이
         [[1939년]] [[12월 29일]] 고순이는 42세의 나이로 [[서소문]] 밖의 형장에서 여섯 명의 교우와 함께 [[참수]]됨으로써 남편보다 한달 앞서 [[순교]]하였다.
  • 김교성 (작곡가)
         | [[1939년]]
  • 김기섭 (1939년)
         '''김기섭'''(金己燮, [[1939년]] [[12월 7일]] ~ )은 [[신라호텔]]에서 근무한 [[대한민국]]의 기업인이며, [[김영삼]]의 가신 그룹 인사였다. 본관은 [[김녕 김씨|김녕]]. [[대구광역시|대구]] 출신.
         * 부인 : 김인숙(金仁淑, [[1939년]] ~ )
         [[분류:1939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김녕 김씨]][[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분류: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문학부 동문]][[분류:호텔 경영자]][[분류:대한민국의 기업인]][[분류:김영삼]][[분류:김영삼 정부]][[분류:대한민국의 국가안전기획부 차장]][[분류:한나라당의 정치인]]
  • 김대우 (1900년)
         [[1939년]]에는 [[전라남도]] 참여관 겸 내무부장, 금융조합연합회 전남 감리관, 전남 방공위원회 위원, [[광주광역시|광주]] 사상보호관찰심사회 예비위원에 임명되었고, [[1940년]] [[경상남도]] 참여관 및 산업부장을 거쳐 [[1943년]] [[전라북도]] 지사에까지 올랐다. 전북 지사를 지낼 때는 징용을 관장하는 근로동원원호회 지부장을 맡기도 했다.
  • 김대중
         교육열이 남달랐던 어머니가 하의도의 집과 농토를 다 팔면서까지 아들을 목포로 유학시킨 것이다. 부모는 여관을 운영하면서 공부 뒷바라지에 나섰다. 그 후 일본인 학생들의 따돌림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꿋꿋하게 학업에 전념하여 [[1937년]] 수석으로 졸업하여 목포일보 사장상을 받았다. [[1939년]]에는 5년제(중.고등학제) [[목상고등학교|목포상업학교]](목상고등학교)에 입학했다.<ref>[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96510 김대중 前 대통령 지석(誌石) 전문 공개] 프레시안 2009.08.23</ref> 은행에 취직하는 것을 목표로 열심히 공부한 김대중은 학생의 절반가량이 일본인임에도 불구하고 입학해서 3학년 때까지 반장을 할 정도로 뛰어난 통솔력을 보였다. 이때의 죽마고우로 뒷날 [[신민당 (1967년)|신민당]] 국회의원이 되는 [[임종기]]를 만나 평생의 벗으로 지내게 된다.
  • 김문곤 (1939년)
         '''김문곤'''(金文坤, [[1939년]] [[10월 26일]] ~ ,[[울산광역시]])은 [[대한민국]]의 [[정치인]]으로 제7대·제8대 역임하였다.
         [[분류:1939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울산광역시 출신 인물]][[분류:울산대학교 동문]][[분류:대한민국의 기업인]][[분류:민주자유당 당원]][[분류:신한국당 당원]][[분류:한나라당의 정치인]][[분류:대한민국의 지방의회의원]][[분류:대한민국의 지방자치단체장]]
  • 김문집
         [[2002년]]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정리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중 문학 부문에 선정되었다. [[친일 문학인 42인 명단]]에도 수록되어 있으며, 이 명단을 정리한 2002년까지 발견된 친일 저작물 수는 [[1939년]] 발표한 〈축하할 죽음〉 등 3편이다.<ref>{{저널 인용
  • 김병관
         * 아내 : [[안경희]](安慶姬, [[1939년]] - [[2001년]])
  • 김사영(소설가)
         [[1935년]] 3월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했으며, 같은 해 4월부터 1939년까지 경상북도 금호보통학교 훈도, [[1939년]]부터 1942년까지 경상북도 영천군 청통국민학교 훈도로 근무했다. [[1940년]] 1월 《[[매일신보]]》 신춘현상 당선소설 〈춘풍(春風)〉으로 문단에 등단했고, 같은 해 5월 잡지 《[[삼천리 (일제 강점기의 잡지)|삼천리]]》에 소설 〈원천(怨天)〉을 발표했다.
  • 김상홍 (1964년)
         [[1935년]] 부산부 부회의원에 당선, [[1938년]]에는 경상남도 관선 도회의원에 당선되어 지방정계로도 진출했다. 이후 [[1939년]] 부산부 사회계장, [[1942년]] 초량 제1동 회장을 역임했다. 일제로부터 훈8등 훈장을 수여받은 바 있다.
  • 김상홍 (교육인)
         [[1935년]] 부산부 부회의원에 당선, [[1938년]]에는 경상남도 관선 도회의원에 당선되어 지방정계로도 진출했다. 이후 [[1939년]] 부산부 사회계장, [[1942년]] 초량 제1동 회장을 역임했다. 일제로부터 훈8등 훈장을 수여받은 바 있다.
  • 김성곤 (1913년)
         [[1937년]] [[보성전문학교]] 상과를 졸업하고 [[1939년]]에 비누공장인 삼공유지합자회사를 설립하였다. 그 뒤 대두유 비축으로 많은 돈을 벌게 되어 이후 [[1948년]] 금성방직을 인수한다. 그러나 [[1950년]] [[6.25전쟁]]으로 금성방직 안양공장에 화재가 난다. 그 뒤 [[1952년]]에 [[동양통신]]을 창간하였으며, [[1953년]]에는 연합신문을 인수, [[1956년]]에는 태평방직, 아주방직을 인수하는 등 기업가로서 성공을 이어갔다.
  • 김성수 (1891년)
         [[1923년]]부터 [[1935년]] 사이에 [[경성방직]]은 사세가 확장되었고, 그 여세로 그는 [[1939년]] [[만주]]에도 공장을 설립하여 [[경성방직]]을 해외의 투자와 수출을 하는 기업으로도 성장시켰다.<ref name="동아일보"/><ref name="기념"/> 그러나 독립운동과 교육운동에 투신했고, 그 자신이 불령선인으로 분류된 것이 회사에 타격을 줄것이라 판단, 회사를 동생인 [[김연수 (1896년)|김연수]]와 매제인 [[김용완 (1904년)|김용완]]에게 넘겨주었다.
         [[1930년]]대 후반 [[이승만]]이 영향을 발휘하던 [[독립운동]]단체 [[흥업구락부]]에서도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그러나 [[조선총독부]] [[서대문경찰서]]에 감금된 [[윤치영]]의 진술로 [[1938년]] [[5월 18일]]자 [[서대문경찰서]]장의 보고에 의하면 그는 [[흥업구락부]]의 동지회원의 한사람으로 보고되었다.<ref name="dddd1">우남 이승만 연구 (정병준, 역사비평사, 2005) 365페이지</ref> 그러나 그는 [[흥업구락부]]와 관련되어 조사받거나 처벌받지는 않았다.<ref name="dddd1"/> [[1939년]] 9월 경성방직주식회사 고문직을 사퇴하였다.
         [[1939년]] [[12월 18일]] 정동의 [[이화여전]] 강당에서 80여 명의 관계자들이 모인 가운데 후원회 창립총회가 개최되었다. 여기에서 12개조의 후원회 장정을 통과시키고 25명의 위원을 선출했다.<ref name="양현혜1">양현혜, 《빛과 소망의 숨결을 찾아》 (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 2007) 104페이지</ref> 이인도 이화여전 후원회 위원의 한사람으로 선출되었다.<ref name="양현혜1"/>
         * [[1939년]] 9월 [[경방|경성방직주식회사 고문]]직 사퇴
  • 김양 (1953년)
         * 증조모 : 곽낙원 (郭樂園, [[1859년]] [[2월 26일]] ~ [[1939년]] [[4월 26일]])
  • 김정록 (미학자)
         남작 작위를 세습하고 조선귀족 단체인 에서 매달 150원의 생활보조비를 수령한 사실이 있어 광복 후인 [[1949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자수하여 조사를 받았다. [[1939년]] [[동국대학교]]의 전신인 혜화전문학교 교수로 부임했다가 신병으로 사임한 상태였다.
  • 김지원 (배우)
         '''김지원'''([[1939년]] [[10월 19일]] ~ )은 [[대한민국]]의 [[배우]]이다.
  • 김태년 (1893년)
         }}</ref> 이후 [[완도군]]과 [[함평군]] 군수를 차례로 지냈다. 함평군수이던 [[1939년]]을 기준으로 정7위 훈6등에 서위되어 있었다.
  • 김한 (1909년)
         이후 영화 미술, 연극의 무대장치, 간판 가게 설립, 다방 운영 등 다방면에서 활동하였으나, 영화 출연을 주요 직업으로 삼았다. [[1937년]] [[서광제]], [[이규환 (영화 감독)|이규환]], [[문예봉]] 등과 [[성봉영화원]]을 세우고 《군용열차》에 출연했고, [[1939년]] [[신경균]]이 연출한 영화 《처녀도》에서는 목장에 휴양차 내려왔다가 목장 주인의 딸과 사랑에 빠지는 남자 주인공 역을 맡았다.
  • 김호규
         [[1938년]] [[조선실업구락부]] 회원을 역임했고 [[1939년]]부터 [[1942년]]까지 [[조선총독부]] 내무국 지방과 촉탁으로 근무했다. [[1941년]] 3월에 열린 [[대동아공영권]] 확립에 관한 연설에서 도쿄 회의(대동아공영권에 대한 회의)에 대한 지지 의사를 표명하는 등 일본의 침략 전쟁을 적극 지지했다. [[1940년]] 일본 기원 2600년 축전 기념 초대자로 선정되었고 1940년 11월 10일 일본 정부로부터 기원 2600년 축전 기념장을 받았다. [[1942년]] [[12월 28일]] 일본 정부로부터 종4위에 서위되었으며 그해 [[8월]] 광복 이후 칩거하였다.
  • 김화랑
         [[1938년]] [[방한준]]의 《한강》을 각색하고 곧 [[조선일보사]] 주최의 신춘문예 시나리오 부문에도 당선되어 영화계에 데뷔하였다. [[1939년]] [[정비석]] 원작으로 방한준이 영화화한 《성황당》(1939)의 시나리오로 호평을 받으며 전문 시나리오 작가가 되었다.
         [[중일 전쟁]]을 배경으로 [[1939년]]에 [[조선문화영화협회]]가 제작한 《국기 아래서 나는 죽으리》를 연출하여 영화감독으로도 데뷔했다. [[최운봉]]과 [[복혜숙]]이 출연한 《국기 아래서 나는 죽으리》는 전쟁 분위기를 조성하고 근로와 저축으로 국가에 충성을 다할 것을 주제로 삼고 있는 직설적인 어용 영화이다. 주인공은 동네에서 손수 [[일장기]]를 만들고 나누어 주고 [[신사참배 강요]] 정책에서 앞장서 모범을 보이며, 마지막에는 일장기 아래에서 일본 궁성을 향해 죽는 인물이다.
  • 남궁억
         '''남궁억'''(南宮 檍, [[1863년]] [[12월 27일]] ~ [[1939년]] [[4월 5일]])은 대한제국 조선 황조 말기의 교육자, 계몽운동가이며 일제 강점기의 독립운동가이자 교육가, 사회운동가, 시인, 작사가, 작곡가, 언론인이다.
         그뒤 조선총독부 경무국과 학무국의 회유를 받았으나 모두 거절하고 고문을 당하였다. [[1935년]], 복역 중 병으로 석방되어 [[개성]]의 [[윤치호]] 자택에서 얼마간 요양하다가 고향인 으로 낙향하였다. 저서로는 《동사략(東史略)》, 《조선이야기》, 《가정교육》, 《조선어보충(朝鮮語補充)》, 《신편언문예법》, 《조선어문법(朝鮮語文法)》 등이 있으며 이 중에는 기독교계열 학교의 교과서, 교재로도 활용되었다. 석방된지 4년 만인 [[1939년]] 4월 5일에 고문 후유증 등으로 사망하였다.
         [[분류:1863년 태어남]][[분류:1939년 죽음]][[분류:병사한 사람]][[분류:고문 피해자]][[분류:개화파]][[분류:사상가]][[분류:반일 감정]][[분류:음서]][[분류:일제 강점기의 감리교도]][[분류:조선의 정치인]][[분류:대한제국의 계몽운동가]][[분류:대한제국의 언론인]][[분류:대한제국의 관료]][[분류:대한제국의 작가]][[분류:대한제국의 저술가]][[분류:일제 강점기의 저술가]][[분류:일제 강점기의 작사가]][[분류:일제 강점기의 교육인]][[분류:일제 강점기의 언론인]][[분류:일제 강점기의 시인]][[분류:일제 강점기의 작곡가]][[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건국훈장 독립장 수훈자]][[분류:독립협회]][[분류:신민회]][[분류:함열 남궁씨]][[분류:서울특별시 출신]]
  • 남궁염
         * 아버지 : [[남궁억]](南宮檍, [[1863년]] [[12월 27일]] ~ [[1939년]] [[4월 5일]]), 호는 한서(翰西)
  • 리종만
         [[1938년]] 1월 잡지 《농업조선(農業朝鮮)》을 창간했으며 [[1938년]] 6월 사립 [[대동공업전문학교]]를 설립, 경영했다. [[1939년]] 4월 조선산금협의회(朝鮮產金協議會) 위원으로 위촉되었고 1939년 6월 28일 일본군 위문대 대금으로 1,000원을 헌납했다. 1939년 11월 조선유도연합회 평의원을 역임했으며 [[1940년]] 7월 잡지 《[[삼천리 (일제 강점기의 잡지)|삼천리]]》에 〈지원병(志願兵)과 혈(血), 한(汗), 사랑(愛)의 인(人))〉을 기고했다. [[1941년]] 9월 [[임전대책협의회]] 채권가두유격대 명치정대에 참여했고 같은 달에 [[조선임전보국단]] 경성 지역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1941년 10월 조선임전보국단 이사를 역임했으며 이러한 경력으로 인해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자 명단]]의 경제 부문, 친일단체 부문에 수록되었다.
  • 문정수 (1939년)
         '''문정수'''(文正秀, [[1939년]] [[8월 9일]] ~ [[부산광역시]]<ref>{{뉴스 인용|url=http://m.busan.com/m/News/view.jsp?newsId=20130322000069|제목=[어떻게 지내십니까] 문정수 전 부산시장 - 부산일보|성=기자|이름=노정현|뉴스=부산일보|언어=ko|확인날짜=2017-06-09}}</ref>)는 [[대한민국]]의 [[정치인]]으로, 초대 민선 [[부산광역시장]]을 지냈다.
         [[분류:1939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한민국의 대학 교수]][[분류:영도초등학교 (부산) 동문]][[분류:경남중학교 동문]][[분류:경남고등학교 동문]][[분류:고려대학교 동문]][[분류:연세대학교 대학원 동문]][[분류:연세대학교 행정대학원 동문]][[분류:통일민주당 당원]][[분류:신민당]][[분류:민주자유당 당원]][[분류:한나라당의 정치인]][[분류:민주국민당 (2000년) 당원]][[분류:더불어민주당 당원]][[분류:남평 문씨]][[분류:상도동계]][[분류:부산광역시 출신 인물]][[분류:친문]]
  • 박관수 (1897년)
         귀국한 뒤 교사로 임관되어 [[대구사범학교 (1923년)|대구사범학교]]에서 교육학 교사와 심리학 교사로 일했다. 이때 [[대구사범]]에 재학 중이던 박정희를 가르쳤다. [[수원고등농림학교]] 강사를 거쳐, [[조선총독부]] 소속의 교육 관료인 시학관으로 오래 근무했다. [[1939년]]에 [[경기공립고등여학교]] 교장이 되었다. 이때 그는 궁성요배를 하며 교직원들에게 전시체제에 대한 훈시를 했다 한다.<ref>{{서적 인용
  • 박대석 (1939년)
         '''박대석'''(朴大錫, [[1939년]] [[12월 2일]] ~ [[2013년]] [[2월 3일]])은 [[대한민국]]의 [[정치가]] 겸 [[행정|행정가]]이다. [[호 (이름)|호]](號)는 산남(山南)·영도(影島)이다.
         [[분류:1939년 태어남]][[분류:2013년 죽음]][[분류:대한민국의 기업인]][[분류:대한민국의 사회 운동가]][[분류:대한민국 해병대의 군인]][[분류:부산광역시 출신 인물]][[분류:밀양 박씨]][[분류:대한민국의 베트남 전쟁 참전 군인]][[분류:낙민초등학교 (부산) 동문]][[분류:동래중학교 동문]][[분류:동래고등학교 동문]]
  • 박문웅(1890)
         그뒤 [[사무관]]을 거쳐 [[1934년]] [[9월 14일]] [[경상북도]] [[군속]]이 되었다. [[1934년]] [[9월 16일]] [[고등관]] 7등에 [[군수]]로 승진, [[청송]][[군수]](靑松郡守)가 되었다.<ref>동아일보 1934년 09월 16일자, 1면</ref> [[청송]][[군수]]로 재직 중 [[1935년]] 판임관 7등이 되고, [[1937년]] 판임관 6등으로 승진하였다. [[1938년]] [[3월 17일]] [[청도]][[군수]]가 되었다.<ref>동아일보 1938년 03월 27일자, 1면</ref> 그해 [[8월]] [[국민정신총동원연맹]] 청도군지회 이사장을 맡았다. 이후 달성군수, 청송군수 등을 지내고 [[1939년]] [[9월 30일]] 인사에서 [[고등관]] 4등(高等官四等)으로 승진하였다.<ref>동아일보 1939년 10월 01일자 1면</ref>
         [[1939년]] [[12월 17일]] [[청도군]]의 [[유학자]] 모임인 [[청도유림회]](淸道儒林會) 결성에 참여하고 지부장에 추대되었다.<ref>동아일보 1939년 12월 20일자, 3면 사회면</ref> [[12월]] 훈6등 서보장을 받았다.
  • 박순천 (국회의원)
         이후 시댁인 [[경상북도|경북]] [[고령군]]으로 건너가 농사일을 하면서 마을의 [[조산]]부와 [[대서소]]를 경영하다 [[1939년]] 여성 교육에 뜻을 두고 [[황신덕]]과 함께 경성가정여숙(현 [[중앙여자고등학교]]의 전신)을 설립했다.
  • 박영희 (1901년)
         1939년 4월 8일자 매일신보. 오른쪽부터 박영희,김동인,임학수. 이들은 1939년 4월 자발적으로 황군위문단으로 중국 전선에 파견했다.
         [[1938년]] 전향자 대표로 선출되어 [[도쿄]]에서 열린 시국대응전국위원회라는 행사에 참가한 것을 계기로 친일 활동에 앞장섰다. 귀국한 후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을 결성하였고, [[1939년]] [[조선문인협회]] 간사, [[1940년]] [[국민총력조선연맹]] 문화위원, [[1943년]]에는 [[조선문인보국회]] 간부를 지냈다. [[김동인]], [[임학수 (시인)|임학수]]와 함께 황군위문작가단에 포함되어 [[중국]] 전선에 파견된 뒤 기행문을 쓰기도 했다.
  • 박인천
         ** 자부 : 박영숙 ([[1939년]] ~ [[2013년]])
  • 박종원 (종교인)
         [[1939년]] [[기해박해|기해년에 박해]]가 발발하자, 박종원은 집을 떠나 8 개월 동안 수감된 교우들과 연락하는 한편 흩어진 교우들을 찾아가 돌보기를 계속하던 중, [[10월 26일]]에 [[체포]]되었다. 그는 여러 차례의 격심한 [[심문]]과 [[고문]]을 받아서 [[팔]]과 [[다리 (해부학)|다리]]를 쓸 수 없는 지경이 되었지만, [[고통]]을 표출하지 않았다. 그의 [[살]]가죽이 떨어져 나갔지만, 그는 [[하느님]]을 위해 고통받는 것을 행복해 했다.
  • 박차정 (독립운동가)
         [[동래]] [[동래여자고등학교|일신여학교]]에 입학하여 동맹휴학을 주도하고, [[근우회]] 중앙집행위원, 중앙상무위원으로 활동하였다.<ref name="new22">[http://www.newswire.co.kr/newsRead.php?no=146639 5월의 독립운동가:박차정 전시회 개최]</ref> 1930년 근우회사건을 배후에서 지도하다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1930년]] [[중국]]으로 망명한 후 [[의열단]]에 가입, 의열단원으로 활동하다 [[의열단]]장 [[김원봉]]과 결혼하였으며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여자교관, [[조선민족혁명당|민족혁명당]] 부녀부 주임, 조선의용대 부녀복무단장 등으로 활동하였다.<ref name="new22"/> 1939년 2월 장시성 쿤륜산 전투 중에 부상을 입고 그 후유증<ref name="new22"/>과 성병<ref>김학준, 《혁명가들의 항일 회상》 (도서출판 민음사, 2005) 244</ref> 등으로 1944년 5월 27일 충칭에서 병사하였다. 독립 운동 중 사용한 가명은 임철애(林哲愛), 임철산(林哲山)이다. <ref>[http://www.suwon.com/news/articleView.html?idxno=70943 부산이 낳은 대륙의 들꽃 '박차정'] 수원일보( 2011.12.14) 기사 참조</ref>
         [[조선민족전선연맹]]이 한중 연합 전선 무장 세력인 [[조선의용대]]를 구성하자 여군 격인 부녀복무단을 설치하여 단장을 맡았다. [[1939년]] 2월 [[장시 성]](江西省) 쿤륜산(昆崙山) 전투 중에서 일본군과 전투 중 입은 총상의 후유증과 [[관절염]] 등의 후유증을 앓았다. 또한 [[성병]]도 앓았는데, [[정화암]]에 의하면 박차정은 [[성병]]으로 사망했다 한다.<ref name="hyuk244"/> <ref>[http://miryang.newsk.kr/bbs/bbs.asp?exe=view&group_name=407§ion=9&category=5&idx_num=1831 약산 김원봉 장군(임정 군무부장)]</ref> [[1944년]] [[5월 27일]] [[충칭]]에서 병사했다. 당시 그의 나이 향년 34세였다.
  • 백낙승 (1886년)
         섬유 사업으로 막대한 부를 모은 백낙승은 [[중일 전쟁]] 이후부터 일제에 적극 협력했다. 거액의 국방헌금은 물론 [[1938년]]과 [[1939년]]에 군용 비행기를 '애국기'라는 이름으로 헌납하기도 했다. [[박흥식 (기업인)|박흥식]]이 설립한 군수 기업 [[조선비행기공업주식회사]]에는 대주주로 참여했다.
  • 백낙청
         ** 동생 : [[백낙돈]](白樂曒, [[1939년]] ~ )
  • 백남봉(코미디언)
         ([[1939년]] [[2월 6일]] ~ [[2010년]] [[7월 27일]]).
         [[여담]]으로, 비디오 아티스트로 유명한 예술가 [[백남준]]과 앞글자 두자가 동일하고 연령대도 비슷한데다[* 백남준은 1932년생, 백남봉은 1939년생으로 두 사람은 7살 차이밖에 안 난다.] 두 사람 모두 국내에서는 이름이 잘 알려진 관계로, 80~90년대에는 대중들이 두 사람의 이름을 은근히 헷갈려 하거나 [[백남봉]]이 '''백남준의 [[짝퉁]] 취급'''[* 참고로 백남봉의 경우 [[본명]]은 박두식으로 백남봉이라는 이름은 연예인 활동을 위한 예명인데, 백남준이 국내에 알려지기 십여년 전부터 이 예명을 사용했기 때문에 백남준의 명성을 노린것과는 전혀 관계 없다.]을 받는 [[안습]]한 경우도 많았다. 물론 최근인 2006년 백남준의 작고와 더불어 2010년 백남봉까지 작고하면서 이런 논란은 완전히 사그라든 듯하다.
         [[분류:한국 남성 코미디언]][[분류:1939년 출생]][[분류:2010년 사망]][[분류:진안군 출신 인물]][[분류:1969년 데뷔]]
  • 변해명
         '''변해명'''(邊海明, [[1939년]] ~ [[2012년]] [[5월 8일]])은 [[대한민국]]의 [[수필|수필가]]이다.
         변해명은 1939년 [[서울특별시]] [[종로구]] 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서울대학교 사범대학]]에 입학을 했고, 그 후에는 [[고려대학교]] 교육대학원으로 진학해서 국어학과 국문학 시론을 공부했다. 대학원 공부를 마친 뒤, 변해명은 34년 동안 중학생들과 고등학생들을 가르쳤고 그 중 12년은 인천남자중학교, 부평여자중학교, 그리고 부평서여자중학교에서 교감으로 일하기도 했다. 또한 부일중학교와 부평서여자중학교에서는 교장으로 8년간 일했고 그 후 명예퇴임을 했다.
         [[분류:대한민국의 수필가]][[분류:대한민국의 교사]][[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1939년 태어남]][[분류:2012년 죽음]][[분류:서울대학교 사범대학 동문]][[분류:고려대학교 동문]]
  • 서강일
         '''서강일'''(徐強一, Kang Il Suh, [[1939년]] [[7월 12일]] ~ )은 [[대한민국]]의 전 권투 선수이다. 프로 통산 전적 52전 41승(13KO)11패.
         [[분류:1939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한민국의 권투 선수]][[분류:서울특별시 출신]]
  • 서영희 (1939년)
         '''서영희'''(徐英姬, [[1939년]] [[12월 10일]] ~ )는 [[대한민국]]의 대학 교수이자 정치인이다. [[대한민국 제4공화국|제4공화국]]에서 제9·10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본관은 [[이천 서씨|이천]]이며, [[경성부]] 출신이다. [[종교]]는 [[불교]]다.
         [[분류:1939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이천 서씨]][[분류:대한민국의 대학 교수]][[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이화여자대학교 동문]][[분류:이화여자고등학교 동문]][[분류:대한민국의 불교 신자]][[분류:대한민국의 여자 국회의원]]
  • 서월영
         그러나 [[신파극]]의 인기와 함께 동양극장이 지나친 상업주의 경향으로 흘러가자 [[1937년]] [[심영 (1910년)|심영]], [[박제행]], [[남궁선]] 등과 더불어 청춘좌를 탈퇴한 뒤에는 신파극과 신극 사이의 타협점으로 중간극을 표방한 [[중앙무대]]를 창설했다.<ref>{{웹 인용 |url=http://seoul600.visitseoul.net/seoul-history/sidaesa/txt/6-6-11-2.html |제목=신파극(新派劇) |확인날짜=2008-04-22 |웹사이트=서울六百年史 |출판사=서울특별시 |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070928062039/http://seoul600.visitseoul.net/seoul-history/sidaesa/txt/6-6-11-2.html# |보존날짜=2007-09-28 |깨진링크=예 }}</ref> [[1939년]] 조직된 극단 [[고협 (극단)|고협]]에서도 활동했다.<ref>{{서적 인용
  • 손정규
         [[1939년]] 교사직에서 물러난 후에는 그때까지 여러 궁에 흩어져 살고 있던 황족과 상궁 등을 통해 궁중 요리 등을 전수 받았다. 손정규는 유년기에 아버지를 따라 궁에 드나들면서부터 궁중의 풍습과 의전 등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 손지환 (언론인)
         1936년 [[만주국협화회]] 간도성본부에서 근무한 기록과, [[1939년]] 《[[만선일보]]》에 전 간도협조회 회장 [[김동한 (1892년)|김동한]]의 동상 및 기념비 제막 기사에 [[중국]] 한구(漢口)에 배치되어 활동 중이라는 근황이 알려진 이래 행적을 알 수 없다. 김동한의 사망 2주기를 기념한 동상/기념비 제막식에서는 좌담회도 열렸는데, 손지환은 좌담회 사회를 맡아 일제에 대한 김동한의 충실한 협력 행위를 추억하는 내용으로 행사를 진행한 바 있다.
  • 신구 (배우)
         * [[1939년]] 제7회 [[교토의정상]] 아역연기상(남)
  • 안상덕
         일제 강점기 말기에는 일제에 협력한 행적이 있다. [[중일 전쟁]] 발발 후 강압적인 전시체제가 구축되면서 천도교단은 [[1939년]]에 효율적인 전쟁 지원과 국방헌금 모금을 위해 국민정신총동원천도교연맹이라는 단체를 결성했다. 안상덕은 이 단체의 이사를 지냈고, 이듬해 조직이 개편되어 국민총력천도교연맹이 출범했을 때는 평의원을 맡았다. [[1941년]] 발족한 [[조선임전보국단]]에도 발기인으로 참가했다.
  • 양승택 (1939년)
         '''양승택'''(梁承澤, [[1939년]] [[10월 24일]] [[부산광역시]] ~ )은 대한민국의 제7대 [[대한민국 정보통신부|정보통신부]] 장관이다. 본관은 [[남원 양씨 (梁)|남원]].
         [[분류:1939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한양대학교 교수]][[분류:경기대학교 교수]][[분류:서울가톨릭대학교 교수]][[분류:미국에 거주한 대한민국인]][[분류:광운대학교 교수]][[분류:대한민국의 정보통신부 장관]][[분류:김대중 정부의 국무위원]][[분류:동아고등학교 동문]][[분류:서울대학교 공과대학 동문]][[분류:서울대학교 대학원 동문]][[분류:부산광역시 출신 인물]][[분류:남원 양씨 (梁)]]
  • 오두환 (1883년)
         [[1936년]] 9월 남조선방공연습지도부(南朝鮮防空演習指導部) 지도부원으로 위촉되었으며 [[1937년]] [[8월 12일]]부터 [[1939년]] [[3월 30일]]까지 경상남도 김해군수를 역임했다. 김해군수로 재직 중이던 1938년 4월 4일에는 김해군민 대표로 중기관총 7기를 헌납하기도 했다. 1938년 6월 30일 당시에는 고등관 3등, 1938년 7월 1일 당시에는 종5위, 1939년 4월 24일 당시에는 정5위에 각각 서위되어 있었다.
  • 오지명
         '''오지명'''(<small>본명:</small> '''오진홍''', [[1939년]] [[3월 5일]] ~ )은 [[대한민국]]의 [[텔레비전 연기자]]이자 [[영화배우]]이다.
         [[분류:1939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1960년 데뷔]][[분류:대한민국의 영화 배우]][[분류:대한민국의 영화 감독]][[분류:대한민국의 영화 각본가]][[분류:대한민국의 연극 배우]][[분류:대한민국의 텔레비전 배우]][[분류:하남시 출신]][[분류:해주 오씨]]
  • 유소사
         [[1939년|1839년]] [[7월 19일]]에 유소사는 79세의 나이로 [[체포]]되었다. 그녀는 고령에도 불구하고, [[천주교]] 신앙으로 인해 여러 명이 [[사형]]되거나 [[유배]]되어 죽은 그녀 가문의 명성 때문에 중범죄자 취급을 받았다. 그녀는 배교하고 교우들이 있는 곳을 대라는 포장의 요구를 끝까지 거절하였으므로, 다섯 차례의 [[심문]] 동안에, 230여대의 [[태형]]을 맞았다.
  • 유진찬
         [[1928년]]부터 [[1939년]]까지 [[조선총독부 중추원]] 조사과 촉탁으로 일했고 [[1929년]] [[9월 7일]]부터 [[1943년]] [[4월 26일]] [[조선총독부]] 직속기구인 [[경학원]] 부제학으로 일했다. [[1937년]] 12월 [[중일 전쟁]]을 찬양하고 일본군의 승리를 기원하는 내용을 담은 한시를 지었으며 [[1938년]] [[2월 5일]] 명륜학원 강사로 임명되었다. [[1939년]] 조선유도연합회에 참여했고 [[1941년]] [[조선임전보국단]]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 윤상구 (1949년)
         * 증조부 : [[윤영렬]](尹英烈, [[1854년]] [[4월 15일]] ~ [[1939년]] [[11월 8일]], 호는 경재(敬齋))
  • 윤연선 (1936년)
         ** 종조부 : [[윤영렬]](尹英烈, [[1854년]] - [[1939년]])
  • 윤영구 (1928년)
         * 증조부 : [[윤영렬]](尹英烈, [[1854년]] [[4월 15일]] ~ [[1939년]] [[11월 4일]])
  • 윤영선 (1896년)
         [[1939년]] [[유일한]] 등이 설립한 [[유한양행]]의 주주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였다. [[1940년]] [[조선 총독부]]에 의해 [[창씨개명]]령이 떨어지자 그의 문중은 성을 '이토'(伊東)로 개명하였다. 그도 문중을 따라 이토 나가젠(伊東永善)으로 창씨개명하였다. 그러나 별도의 정치적 활동에는 참여하지 않고 농장과 목장, 양잠업에 종사하였다. [[1940년]] [[7월]] 주식회사 [[경인기업]](京仁企業)의 상무이사에 취임했다. 그 밖에 목장과 농장을 경영하기도 했다.
  • 윤치영
         그에 의하면 이것도 밤이 깊어 자정이 지난 시각에 지하실 으슥한 곳에서 행하여지는데, 우선 두 팔을 묶은 뒤 목총을 묶인 팔과 등 사이에 찔러넣고 양 끝을 밧줄에 매서 천장에 끌어올린다. 공중에 거꾸로 매달려 얼마 안가서 어깨, 팔다리가 끊어지는 듯한 통증이 오는 것이다. 기절하면 머리에 물을 쏟아붓기도 하고 몽둥이로 쿡쿡 쑤시기도 하며 호령 호령 죄를 자백하라고 다그치는 것이다. 끝내 자백을 받아낼 수 없게 되니까 이들은 점점 초조한 기색을 드러내면서 나중에는 손가락을 비틀고, 침질을 하여 고문하였다.<ref name="동산회고록:윤치영의 20세기 p.130"/> 그 뒤 [[1939년]] [[3월]] 초 중부경찰서로 이송되었다.
         * 아버지: [[윤영렬]](尹英烈, [[1854년]] [[4월 15일]] - [[1939년]] [[11월 4일]])
         ** 넷째 형: 간송[[윤치병]](澗松尹致昞, [[1880년]] [[음력]] [[6월 4일]] - [[1939년]] [[양력]] [[1월 24일]])
         * 사돈 : [[남궁억]](南宮檍, [[1863년]] [[12월 27일]] ~ [[1939년]] [[4월 5일]]) - 5촌 조카 윤광선의 장인
  • 윤치일
         * 아버지 : [[윤영렬]](尹英烈, [[1854년]] [[4월 15일]] - [[1939년]] [[11월 4일]])
  • 윤탁구
         ** 이복 숙부 : [[윤대선]]([[1929년]] [[2월 23일]] - [[1939년]] [[11월 30일]])
  • 윤태빈
         서울도 참여관으로 재직하던 [[1936년]], 《[[매일신보]]》에 신년사를 실어 총독부의 시정방침을 선전하고 일본 황실의 번영과 만수무강을 기원하였다. 서울도 참여관과 산업부장을 겸하고 있던 [[1938년]]에는 매일신보의 대담기사에서 [[중일 전쟁]]과 관련하여 조선의 병참기지로서의 사명을 강조하고, 서울도의 역할에 특히 기대되는 바가 크다는 발언을 했다. [[1939년]]에 또다시 [[매일신보]]에 기고하여 “[[내선일체]]의 제일선에 활약하는 황군장병의 노고를 격려”하면서 후방에서도 국책수행에 매진할 것을 주문했다. 충청북도 지사로 재임 중이던 [[1941년]]에도 《[[조광 (잡지)|조광]]》과 매일신보에 전쟁 지원을 역설하는 친일 기고문을 실었다.
         지방관을 지내는 동안 [[군국주의]] 성격이 강한 관제 외곽단체 조선국방의회연합회와 [[반공주의]]를 주창하는 [[조선방공협회]], 치안 유지를 내세우며 반일 움직임을 감시하기 위해 조직된 지역 단체인 [[조선경방협회]]에도 꾸준히 가담했다. [[1939년]] 조선경방협회 강원도 연합지부장 자격으로 "지금 항일정권은 변방에 숨어서 겨우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면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독립 운동을 비하한 일이 있다. 관직에서 퇴임한 후인 [[1943년]]에는 식량 수탈을 위한 조선중요물자영단 감사, [[1944년]]에는 [[국민총력조선연맹]] 평의원을 지내면서 광복 직전까지도 활발한 활동을 했다. [[한국 전쟁]] 중 [[조선인민군]]에 의해 납북되었으며 이후의 행적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 [[1939년]] : 경기도 도농회장
         * 1939년 : [[강원도 (남)|강원도]] 지사
         * [[1939년]] : [[훈4등]] 서보장
         |임기 = [[1939년]] [[5월 17일]] ~ [[1940년]] [[9월 2일]]
  • 이경자 (1939년)
         '''이경자'''(李敬子, [[1939년]] [[9월 20일]] [[서울특별시|서울]] ~ 현재)는 [[대한민국]]의 [[편집]] 제작자이다.
         [[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대한민국의 영화 편집자]][[분류:대한민국의 영화인]][[분류:무학여자고등학교 동문]][[분류:1939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
  • 이경희 (1880년)
         그는 만해 [[한용운]] 등과 가깝게 지냈고 [[1939년]] [[7월 12일]] [[한용운]]의 회갑연에 참여했다. 한용운 회갑연 참석자 방명록에는 [[오세창]], [[홍명희]], 이경희 등 16명의 이름이 적혀 있다. 그는 한용운의 환갑을 축하하는 친필 휘호 불택세류(不擇細流)라는 자를 지어 주었다.
         [[대종교]] 신자들의 독립운동 참여로 신자들은 조선총독부의 감시를 당했으나 그는 개종을 거부하였다. [[1939년]]부터 [[창씨개명]]령이 나오고 [[1940년]]부터 전국적으로 시행되었다. 그러나 이경희는 끝내 [[창씨개명]]을 거부하고, [[1942년]] 여름 [[경성부]] [[돈암동]]을 떠나 대구로 내려가 야산에 숨어 밭을 갈고 농부로 생활하였으며, [[항일 단파 방송]]인 [[미국의 소리]] 방송을 비밀리에 밀청하고 해방을 예상하였다. 이때 그 몰래 그의 부인 조씨가 [[청도군]]에서 교사 생활을 하는 둘째 사위에게 [[보리쌀]]을 얻어 생계를 유지하였다.
  • 이규승(1920)
          | 복무 기간 = [[1939년]] ~ [[1959년]]
  • 이백순 (1909년)
         * [[1938년]]~[[1939년]] [[경상남도]] [[의령군청]] 지방교화주사(地方敎化主事)
  • 이상백 (1904년)
         그후 제11회 도쿄 올림픽 대회 유치위원과 준비위원으로 미국, 영국, 독일, 스위스, 프랑스, 스웨덴, 핀란드, 폴란드 등을 방문하여 대회 유치와 준비에 협조를 구하는 등의 활동으로 일본 체육계의 공로자로 칭송받았다. [[1939년]]부터 [[1941년]]에는 모교인 [[와세다 대학]] 재외특별연구원으로 중국에 파견되어 동양학을 연구했으며, [[1940년]]에는 [[창씨개명]]을 끝까지 거부하였으나 도쿄 올림픽 유치와 추진의 공로로 [[조선총독부]]에서 그를 함부로 다루지 못했다. [[1944년]]에는 [[여운형]]이 결성한 지하독립운동 단체인 [[건국동맹]]에 참여하여 활동했다.
  • 이수빈(기업인)
         ||<bgcolor=#DDDDDD> {{{#000000 '''출생'''}}} ||<(> [[1939년]] [[1월 16일]] ([age(1939-01-16)]세) ||
         [[분류:대한민국의 기업인]] [[분류:삼성그룹]] [[분류:1939년 출생]][[분류:성주군 출신 인물]][[분류:가톨릭 신자]]
  • 이인
         [[1939년]] [[12월 18일]] 정동의 [[이화여전]] 강당에서 80여 명의 관계자들이 모인 가운데 후원회 창립총회가 개최되었다. 여기에서 12개조의 후원회 장정을 통과시키고 25명의 위원을 선출했다.<ref name="양현혜1">양현혜, 《빛과 소망의 숨결을 찾아》 (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 2007) 104페이지</ref> 이인도 이화여전 후원회 위원의 한사람으로 선출되었다.<ref name="양현혜1"/>
  • 이지민 (레이싱모델)
         '''이지민'''([[1939년]] [[12월 19일]] ~ )은 [[대한민국]]의 [[레이싱모델]]이다.
  • 장익 (1933년)
         ** 동생 : 장흥 (張興, [[1939년]] [[9월 20일]] ~ , 벨기에 루벵 대학 철학박사, 파리은행 은행원, [[프랑스]] 거주)
  • 전원주
         '''전원주'''(全元珠, [[1939년]] [[8월 8일]] ~ )는 [[대한민국]]의 [[성우]] 출신 [[배우]]이다. [[1963년]] 연극배우 첫 데뷔하였으며 이어 같은 해 [[1963년]] [[동아방송|DBS 동아방송]] 1기(현재는 [[한국방송공사|KBS 한국방송공사]] 6기로 간주) 공채 성우로 데뷔하였다.
         [[분류:1939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인천광역시 출신]][[분류:대한민국의 여자 연극 배우]][[분류:대한민국의 여자 성우]][[분류:대한민국의 여자 텔레비전 배우]][[분류:대한민국의 여자 영화 배우]][[분류:대한민국의 여자 뮤지컬 배우]][[분류:1963년 데뷔]][[분류:대한민국의 여자 정치인]][[분류:옛 새누리당의 정치인]][[분류:친박]][[분류:한일장신대학교 교수]][[분류:대한민국의 여성 기업인]][[분류:대한민국의 불교 신자]][[분류:숙명여자대학교 동문]][[분류:자유 연애]]
  • 전재용
         ** 모: [[이순자]](李順子, [[1939년]] ~)
  • 정광조 (1883년)
         천도교 신파가 대세론이라는 타협적인 노선을 내세워 설립한 [[시중회]]에 가입하면서 [[태평양 전쟁]] 시기까지 일제에 적극 협조한 행적이 있다. [[1939년]]에는 [[이용구]]의 장남 [[이석규]]가 '일한합병 공로자 감사 위령제'라는 행사를 열었을 때 참석하기도 했다.<ref>{{서적 인용
  • 정근모
         '''정근모'''(鄭根謨, [[1939년]] [[12월 30일]] ~ , [[서울특별시|서울]])는 대한민국의 물리학자이자 원자력 전문가이며 과학기술 행정가이다. [[유효정|유호정]] 박사가 2018년에 기록을 경신하기 전까지 대한민국 최연소 박사 학위 취득 기록을 갖고 있었다.<ref>[https://news.joins.com/article/22899529 22세 국내 최연소 박사 탄생 "학원 싫어 대학까지 독학"]</ref> (만 23년 5개월) [[대한민국 과학기술부|과학기술처]] 장관을 2번 지냈고, [[한국과학원]](현 [[한국과학기술원]]) 설립을 주도하고 2대 부원장도 맡았다.
         [[분류:1939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한민국의 물리학자]][[분류:대한민국 제17대 대통령 선거]][[분류:대한민국의 과학기술처 장관]][[분류:한국과학기술원]][[분류:노태우 정부의 국무위원]][[분류:김영삼 정부의 국무위원]][[분류:미래희망연대]][[분류:친박]][[분류:옛 새누리당의 정치인]][[분류:명지대학교]][[분류: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이학부 동문]][[분류:미시간 주립 대학교 동문]][[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동래 정씨]][[분류:대한민국의 검정고시 통과자]]
  • 정복수
         보인상업전수학교에 재학 중 권투를 시작하여 [[1937년]] 전조선종합경기대회에서 밴텀급 우승을 하였다. [[1939년]] 9월 전국아마추어권투선수권대회에서 라이트급 우승을 한 데 이어 10월 조선체육협회 주최 제15회 조선신궁경기대회에서 페더급 우승을 하였고, 11월 제6회 전조선권투선수권대회에서 페더급 우승하였다.
  • 채종기(범죄자)
         '''채종기'''(蔡宗基, [[1939년]] ~ )는 [[대한민국]]의 [[방화]] 범죄자이다. [[2006년]] [[4월 26일]] 일어난 [[2006년 창경궁 문정전 방화 사건]]과 [[2008년]] [[2월 10일]]부터 [[2월 11일]]까지 일어난 [[2008년 숭례문 방화 사건|숭례문 방화 사건]]의 범인이다.
         [[분류:1939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한민국의 범죄인]][[분류:칠곡군 출신 인물]]
  • 최성관 (1925년)
         * [[1939년]] 극단 성군 단원
  • 최수병
         '''최수병'''(崔洙秉, [[1939년]] [[9월 2일]] ~ [[2008년]] [[4월 23일]], [[광주광역시|광주]])은 [[대한민국]]의 경제관료이다.
         [[분류:1939년 태어남]][[분류:2008년 죽음]][[분류:대한민국의 보건사회부 차관]][[분류:대한민국의 공정거래위원회 위원장]][[분류:광주고등학교 (광주) 동문]][[분류:서울대학교 상과대학 동문]][[분류:광주광역시 출신]][[분류:서울특별시 부시장]]
  • 한규복 (1881년)
         [[1939년]] [[2월 2일]] [[국민정신총동원연맹]] 각 정(동)지역 연맹 애국반 창설에 참여하였으나 [[윤치호]] 등의 불참으로 [[김명준]], [[이승우]], 조병상 등 참여자들 일부와 함께 조직 착수에 나섰다.
         [[1939년]] [[6월 4일]] [[중추원]] 참의로 재선되었다. [[8월 5일]]에는 [[국민정신총동원연맹]] 주최로 전국 순회강연을 할 때, 순회강사가 되어 국민 저축 장려를 목적으로 '백억 저축 생활 쇄신'이라는 주제로 전국 순회강연을 다녔다. [[9월 26일]]에는 각지의 노무자와 빈민을 구제하기 위해 만든 [[사회조사위원회]] 위원에 피임되었다.<ref>"勞務者와 細窮民을 來月中에 綜合調査", 동아일보 1939년 09월 26일자 2면, 사회면</ref> 그해 [[9월 30일]] [[경성]]에서 자본금 백만원을 투자하여 [[조선공영회사]](朝鮮工營會社)를 창립하고 대표이사 사장에 선출되었다. 그러나 그해 [[11월 5일]] [[조선중앙임금위원회]] 임시위원으로 선임되면서 사퇴했다. [[12월 22일]] [[세제조사위원회]] 위원에 선임되었다. [[1939년]]부터 그는 [[경성부]], [[충주군]], [[함양군]], [[수원군]], [[용인군]], [[양주군]] 등을 다니며 저축을 할 것을 주장하였다.
         [[1939년]] [[조선금융조합연합회]] 참여에 선임되었다. [[1940년]] [[5월 30일]]에는 [[동아일보]]에 "저축과 국민생활"이라는 주제의 칼럼을 발표하였다.<ref>"貯蓄과 國民生活", 동아일보 1940년 05월 30일자 5면, 생활/문화면</ref> [[5월 30일]]과 [[5월 31일]], [[6월 1일]]에는 경성중앙방송국에 출연하여 저축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5월 31일]] 오후 7시 30분에는 경성제2방송국에 출연하여 저축의 필요성에 대하여 강연하였다.
  • 한복 (1914년)
         [[1939년]] [[12월 4일]] 부산지방법원 예비판사, [[1940년]] [[5월 31일]] 부산지방법원 판사로 각각 임명되었으며 [[1942년]] [[3월 25일]] 경성지방법원 판사로 임명되었다. [[1944년]] [[8월 17일]]부터 [[1945년]] [[8월 15일]] 광복 때까지 평안남도 이사관 겸 평안남도 산업부 산업과장을 역임하면서 고등관 5등에 서위되었고 이러한 경력 때문에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자 명단]]의 사법 부문, 관료 부문에 포함되었다.
  • 함화진
         함화진은 [[이왕직 아악부]]의 수장인 제2세 아악사장을 역임한 함재운의 장자로 태어나 이병문에게서 거문고를, [[명완벽]]에게서는 [[가야금]]을 전수받았다. 전공은 거문고였으나 국악이론 부문에서도 일인자가 되었다. 10대 시절인 [[1900년]]에 가전악(假典樂)이 된 뒤 [[1901년]] 전악(典樂), [[1913년]] 아악수장, 그 뒤 아악사를 차례로 지냈다. [[1932년]]에는 아버지가 맡았던 자리인 제5세 아악사장에까지 올랐고, [[1939년]]에 은퇴했다.
  • 허종 (1939년)
         '''허종'''(許鐘, [[1939년]] [[4월 29일]] ~ )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외교관, 공무원, 정치인이다. 본명은 허종욱(許鐘旭)이다. 독립운동가 겸 변호사, 정치인 [[허헌]]의 아들이며, 독립운동가 겸 여성 해방 운동가 [[허정숙]]의 이복 동생이고, 소설가 겸 작가 [[허근욱]]의 남동생, 소설가 [[박노문]]의 처남이다.
         [[1939년]] [[4월 29일]] [[경성부]]에서 [[허헌]]과 그의 계비 [[유덕희]]의 아들로 태어났다. [[1948년]] [[4월]] 아버지 [[허헌]]이 [[전조선 제정당 사회단체 연석회의]] 참석차 온 가족을 이끌고 [[평양]]으로 갈 때, 허헌, 유덕희내외, [[허정숙]], [[허근욱]] 등과 함께 월북하였다.
         [[분류:1939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치인]][[분류: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외교관]][[분류:허정숙]][[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
  • 현진건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일본 대표로 출전해 1등을 차지한 조선인 선수 [[손기정]](孫基禎)의 유니폼에 그려진 [[일장기]]를 지워버린 채 신문에 실은 사건으로([[일장기 말소 사건]]) 현진건은 기소되어 1년간 복역해야 했으며, 이듬해 출옥하면서 동아일보사를 사직하고 관훈동에서 서대문구 부암동 325-5번지로 이사하여<ref>당시 부암동은 서울에서도 사람들의 발길이 별로 닿지 않는 곳이었다. 양진오, 「조선혼의 발견과 민족의 상상 - 현진건의 학술적 평전과 문학 연구」(도서출판 역락, 2008), p.156. 대구대학교 인문과학연구총서24.</ref> 그곳에서 땅을 빌려 양계 사업을 시작한 한편, [[1938년]] 7월 20일부터 다시 「동아일보」지면에 장편역사소설 「무영탑(無影塔)」을 연재한다.(~ 1939년 2월 7일) [[1939년]] [[7월]]에 「동아일보」 학예부장으로 복직되었으며, 같은 해 10월 25일부터 「동아일보」에 역사소설 「흑치상지(黑齒常之)」 연재를 시작하는데, 이 와중에 문예지 「문장」과 가진 인터뷰에서<ref>「침묵의 거장 현진건 씨의 문학종횡담」, 『문장』 1939년 11월. p.116~120.</ref> 현진건은 당시의 소설들에 대해서 "(자신이 처음 글을 쓰던 때에 비해) 문장이라든가 소설 만드는 기술은 가히 괄목할 만큼 진보.... 그러나 구상의 도약이 드뭅니다"라며 "동경(東京) 문단의 말기적인 신변잡기 같은 것에 안주하려는 경향"에 대해 경계하고, 또한 현재가 여러 면에서 세계적인 문학의 빈곤시대가 아닌가 싶다며 "문은 실상 기(氣)이며 기가 없으면 아무리 진주같다 해도 곧 사회"라는 견해를 피력했다. 그리고 12월에는 같은 잡지에 또 한 번 「역사소설의 제(諸)문제」라는 글을 기고하여 역사소설이라는 것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였다.
         {{인용문|사실을 위한 소설이 아니오 소설을 위한 사실인 이상 그 창작가는 제2의 경우를 더욱 중시하여야 될 줄 믿습니다. 이미 주제를 작정한 다음에 그 소재를 취하는데 현재와 과거를 가릴 필요가 없는 줄 압니다. 작품상에는 현재라고 더 현실적이오 과거라고 비현실적이란 관념은 도무지 성립이 되지 않는 줄 압니다. 더구나 제2의 경우에는 그 과거가 현재에 가지지 못한, 구하지 못한 진실성을 띄었기 때문에 더 현실적이라고 믿습니다. 현재의 사실에서 취재한 것보담 더 맥이 뛰고 피가 흐르는 현실감을 줄 수 있다고 믿습니다. 주어야 될 줄 믿습니다. 이렇게만 된다면 비현실적이라는 등 도피적이라는 둥 하는 비난의 화살은 저절로 그 과녁을 잃을 것입니다.<ref>「역사소설문제」, 『문장』 1939년 12월. p.126~129.</ref>}}
         * 《적도》(장편소설,[[1939년]])
         * 《[[흑치상지(소설)|흑치상지]]》(黑齒常之,연재소설,1939년)
  • 황선필(1939년)
         | 출생일 = [[1939년]]
         '''황선필'''(黃善必,<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6021500329202015&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86-02-15&officeId=00032&pageNo=2&printNo=12427&publishType=00020 文化放送 사장에 黃善必씨를 선임] - 경향신문, 1986년 2월 15일</ref><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2060400209201008&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82-06-04&officeId=00020&pageNo=1&printNo=18666&publishType=00020 靑瓦臺 대변인에 黃善必씨를 任命] - 동아일보, 1982년 6월 4일</ref> [[1939년]] ~ , [[경상북도]] [[김천시|김천]])은 [[문화방송]] 사장을 역임한 [[대한민국]]의 [[언론인]]이자 공무원이다.
         [[분류:1939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한민국의 기자]][[분류:대한민국의 대통령비서실 수석비서관]][[분류:경북고등학교 동문]][[분류: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문학부 동문]][[분류:김천시 출신 인물]][[분류:대한민국 제5공화국]]
  • 황해 (배우)
         |활동기간 = [[1939년]] ~ [[1990년]]
         [[경상남도]] [[부산광역시|부산시]]에서 출생하였다. [[1939년]] [[성보악극단]]에서 [[연극]][[배우]]와 [[가수]]로 데뷔하였다. 그 후 [[영화 배우|영화배우]]로 데뷔하였고 222편의 영화에 출연했으며, 부인인 가수 [[보람]]와의 사이에서 슬하 4남 1녀를 두었다. 둘째아들은 [[싱어송라이터]] 겸 [[영화 배우|영화배우]] [[전영록]], 넷째아들은 [[가수]] 겸 [[작사가]] [[전진영]], 손녀 가운데서는 [[가수]] 겸 [[연기자]] [[백설희]], [[가수]] [[디유닛|전우람]]이 있다. [[2005년]] [[2월 9일]] 지병인 [[당뇨]]로 별세했다.
         [[분류:1922년 태어남]][[분류:2005년 죽음]][[분류:부산광역시 출신]][[분류:대한민국의 남자 연극 배우]][[분류:대한민국의 남자 뮤지컬 배우]][[분류:대한민국의 남자 텔레비전 배우]][[분류:대한민국의 남자 영화 배우]][[분류:일제 강점기의 연극 배우]][[분류:1939년 데뷔]][[분류:일제 강점기의 가수]][[분류:대한민국의 남자 가수]][[분류:당뇨병으로 죽은 사람]][[분류:대한민국의 불교 신자]][[분류:청룡영화상 남우조연상 수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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