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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상현
         '''경상현'''(景商鉉, [[1937년]] ~ [[2016년]] [[1월 2일]])은 [[대한민국]]의 초대 [[대한민국 정보통신부|정보통신부]] 장관이다. 본관은 [[태인 경씨|태인]]이며, [[서울특별시|서울]] 출신이다. 부호분할다중접속([[CDMA]]) 기술 이동통신 세계 최초 상용화를 주도했다.<ref>{{뉴스 인용|제목=CDMA 개발 주역, 경상현 초대 정통부 장관 별세|url=http://view.asiae.co.kr/news/view.htm?idxno=2016010219255505086|날짜=2016-01-02|뉴스=아시아경제}}</ref>
         [[분류:1937년 태어남]] [[분류:2016년 죽음]][[분류:태인 경씨]][[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서울대학교 자연과학대학 동문]][[분류:로드아일랜드 대학교 동문]][[분류:매사추세츠 공과대학교 동문]][[분류:대한민국의 과학자]][[분류:대한민국의 체신부 차관]][[분류:대한민국의 정보통신부 장관]][[분류:김영삼 정부의 국무위원]][[분류:고려대학교 교수]][[분류:한국과학기술원 교수]]
  • 고복수
         | [[1937년]]
  • 고설봉
          | 활동기간 = [[1937년]] ~ [[1996년]]
         일제 강점기 경성부(지금의 대한민국 [[서울특별시|서울]]) 출생이며 [[강원도 (남)|일제 강점기 강원도]] [[홍천군|홍천]]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낸 적이 있는 그는 경성 동명고등보통학교(京城 東明高等普通學校)를 졸업 후 [[일제 강점기]] [[경기도]] [[고양시|고양군 승면 면사무소]] 면서기로 [[공무원]]직을 지내다가 사직하고 [[1937년]] [[연극배우]]로 데뷔하였으며 [[1940년]]을 전후하여 [[동양극장]](東洋劇場) 소속의 극단 ‘청춘좌(靑春座)’를 비롯하여, 극단 ‘아랑(阿娘)’, ‘신청년’, ‘민극(民劇)’, ‘신협’ 등을 거쳐 ‘국립극단’에 소속되었다. [[1948년]] [[영화]] 《노다지 창고》로 [[영화 배우|영화배우]] 데뷔하기도 하였으며 그로부터 7년 후 [[1955년]] 영화 《꿈》으로 두번째 영화 출연 이후에는 본격적으로 영화 활동과 [[연극]] 활동을 병행하기도 했다. [[1960년대]]에 접어들어서는 영화보다 연극 활동에 주로 종사하고 또한 [[한국연극협회]] 이사장으로써 후진 양성에도 정열을 쏟았다.<ref name="글로벌">문화·민속/한국의 연극/한국의 신극/신극의 배우/고설봉, 《글로벌 세계 대백과》</ref> 이후 《[[제1공화국 (드라마)|제1공화국]]》, 《[[조선왕조 오백년]]》, 《[[제2공화국 (드라마)|제2공화국]]》, 《울 밑에 선 봉선화》, 《[[제3공화국 (드라마)|제3공화국]]》, 《[[제4공화국 (드라마)|제4공화국]]》 등의 [[텔레비전 드라마]]에도 출연하는 등 [[배우]]로서의 활동 영역을 넓히기도 했다.
         * 1937년 《추월색》
         [[분류:1913년 태어남]][[분류:2001년 죽음]][[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대한민국의 남자 연극 배우]][[분류:1937년 데뷔]][[분류:일제 강점기의 연극 배우]][[분류:대한민국의 남자 영화 배우]][[분류:보성고등학교 (서울) 동문]][[분류:서라벌예술대학교 교수]][[분류:서울예술대학교 교수]][[분류:한양대학교 교수]][[분류:중앙대학교 교수]][[분류:동국대학교 교수]][[분류:대한민국의 남자 텔레비전 배우]][[분류:제주 고씨]][[분류:대한민국의 불교 신자]]
  • 김경주 (승려)
         [[1937년]] [[중일 전쟁]]이 일어난 뒤 전쟁에 협력한 행적이 있다. 중일 전쟁 발발 직후인 [[8월 5일]]에 [[조선불교중앙교무원]]이 서울의 [[개운사 (서울)|개운사]]에서 황군 무운장구 장병안태 기원제라는 행사를 개최하고 시국 강연회를 열었을 때, 김경주는 "나라를 위하여 몸을 돌보지 않는다(為國不為身)"이라는 제목의 강연을 했다. [[1938년]] 신년 초에는 《[[불교시보]]》를 통해 〈시국 인식과 거국 일치의 신념〉이라는 제목으로 시사문을 발표하였는데, [[중국]]의 도발이 전쟁의 원인이라고 명시하고 [[일본군]]은 정의와 사람의 도리를 위하여 싸우고 있으니 곧 동양의 평화가 도래할 것이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 김대우 (1900년)
         [[1936년]] 총독부 학무국의 사회교육과장으로 임명되었는데, 황민화 정책의 첨병인 이 자리는 [[일본 고등문관시험]] 출신들이 앉는 요직이었다. 김대우는 이 직위에 근무하면서 [[1937년]] 학무부 촉탁 [[이각종]]에게 〈[[황국신민의 서사]]〉를 작성하도록 하고, 각급 학교 등에서 이를 암기, 제창하고 출판되는 모든 서적에도 반드시 실을 것을 강요하였다.
  • 김대중
         * [[1937년]] [[목포북교공립심상소학교]] 졸업
         김대중은 [[1933년]] [[4월]] [[하의초등학교|하의보통학교]](하의초등학교)에 입학하여, [[1937년]] [[4월]] [[하의도]]에서 [[목포북교공립심상소학교]](목포북교초등학교)로 전학했다.<ref>[http://www.hankyung.com/news/app/newsview.php?aid=2009081877721 시대별로 본 험란한 정치역정과 인생] 한국경제 2009.08.18</ref><ref>[http://www.enews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410288 여야 지도부, 故 김대중 대통령 6주기 추도식 참석] 이뉴스투데이 2015.08.18</ref>
         교육열이 남달랐던 어머니가 하의도의 집과 농토를 다 팔면서까지 아들을 목포로 유학시킨 것이다. 부모는 여관을 운영하면서 공부 뒷바라지에 나섰다. 그 후 일본인 학생들의 따돌림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꿋꿋하게 학업에 전념하여 [[1937년]] 수석으로 졸업하여 목포일보 사장상을 받았다. [[1939년]]에는 5년제(중.고등학제) [[목상고등학교|목포상업학교]](목상고등학교)에 입학했다.<ref>[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96510 김대중 前 대통령 지석(誌石) 전문 공개] 프레시안 2009.08.23</ref> 은행에 취직하는 것을 목표로 열심히 공부한 김대중은 학생의 절반가량이 일본인임에도 불구하고 입학해서 3학년 때까지 반장을 할 정도로 뛰어난 통솔력을 보였다. 이때의 죽마고우로 뒷날 [[신민당 (1967년)|신민당]] 국회의원이 되는 [[임종기]]를 만나 평생의 벗으로 지내게 된다.
  • 김동삼
         '''김동삼'''(金東三, [[1878년]] [[6월 23일]] ~ [[1937년]] [[4월 13일]])은 [[한국]]의 독립 운동가이다. 본관은 [[의성 김씨|의성]]. [[아명|아명(兒名)]]은 '''김긍식'''(金肯植)이며 아호는 일송(一松)이다.
  • 김석원
         [[한성부]] 출생이다. [[1909년]] [[일본]]에 유학하여 [[1913년]]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했다.일본 육사를 제27기로 졸업하고 [[1917년]]에는 보병 소위로 임관했다. 그는 [[1931년]] [[만주사변]]이 일어났을 때 중대장으로 화려한 전과를 기록했고, [[1937년]] [[중일 전쟁]] 때는 대대장으로 출전했다. 일본군에서 제대할 때까지 별은 달지 못했으며, 최종 계급은 일본군 대좌(대령)였으므로 중장이었던 [[홍사익]]에 이어 일본군에 복무한 조선인 중 최고위급 인물이다.
         }}</ref> 그러나 당시 복무 기록 등에는 김석원이 함흥에 있었다는 기록이 없다. 또한 북한 측이 일본군 '''74연대'''와 김일성 부대 사이의 "간삼봉 전투"가 있었다고 하는 날짜(1937년 6월 30일) 직후인 1936년 7월 15일자 동아일보는 "'''78연대''' 소속 대대장인 김석원 소좌"가 탑골공원에서 시국강연회를 했음을 보도하고 있다. 일본어 버전 역시 간삼봉에 김석원이 참가했다는 주장에 대해 언급하고 있지 않다. 실제 간삼봉 전투가 일부 일본군 파견대와 김일성 부대 사이의 소소한 총격전 수준이었다는 점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http://gonews.kinds.or.kr/OLD_NEWS_IMG3/MIN/MIN19370703y00_02.pdf 金仁旭少佐 驍勇은 聯隊의 誇이다 : 新乫坡對岸의 討匪壯烈戰과 咸興聯隊當局者談] {{웨이백|url=http://gonews.kinds.or.kr/OLD_NEWS_IMG3/MIN/MIN19370703y00_02.pdf |date=20170406202150 }} 매일신보(每日申報) 1937년 07월 03일 면수:06 단수:15<br>
         (서울, 국토통일원, 1983, 재발간) 재간본 pp.90~91, pp.98~100</ref> 북한 측이 김인욱 아닌 김석원을 자꾸 거론하는 것은 북한 김일성이 [[보천보 습격|보천보 사건]]과 간삼봉 전투 당사자인 [[김일성 가짜설|6사장 김일성이 아니라 가짜]]라는 증거일 뿐이다. 6사장 김일성은 1937년 11월 13일 전사했고, 북한 김일성은 같은 이름을 쓰며 자신이 6사장인양 행동하여 그 공을 가로챘다. 오영진에 의하면 당시 6사장 김일성은 김인욱을 직접 만나 담판을 벌인 적도 있기 때문에 김석원으로 이름을 잘못 알 수가 없다고 했다. 김인욱은 평안남도 용강군(平安南道 龍岡郡) 출신으로 해방 전 예편하고, 고향에서 살다가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에 끌려간 후 소식을 모른다고 한다. 김석원은 해방 전에는 북한 김일성이나 그 처라는 김혜순과 아무런 관계가 없었고, 6.25 때 남침한 그의 군대와 맞서 전투를 벌인게 전부이다.
  • 김석원 (1893년 9월)
         [[서울특별시|서울]] 출생이다. [[1909년]] [[일본]]에 유학하여 [[1913년]]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했다.일본 육사를 제27기로 졸업하고 [[1917년]]에는 보병 소위로 임관했다. 그는 [[1931년]] [[만주사변]]이 일어났을 때 중대장으로 화려한 전과를 기록했고, [[1937년]] [[중일 전쟁]] 때는 대대장으로 출전했다. 일본군에서 제대할 때까지 별은 달지 못했으며, 최종 계급은 일본군 대좌(대령)였으므로 중장이었던 홍사익에 이어 일본군에 복무한 조선인 중 최고위급 인물이다.
         }}</ref> 그러나 당시 복무 기록 등에는 김석원이 함흥에 있었다는 기록이 없다. 또한 북한 측이 일본군 '''74연대'''와 김일성 부대 사이의 "간삼봉 전투"가 있었다고 하는 날짜(1937년 6월 30일) 직후인 1936년 7월 15일자 동아일보는 "'''78연대''' 소속 대대장인 김석원 소좌"가 탑골공원에서 시국강연회를 했음을 보도하고 있다. 일본어 버전 역시 간삼봉에 김석원이 참가했다는 주장에 대해 언급하고 있지 않다. 실제 간삼봉 전투가 일부 일본군 파견대와 김일성 부대 사이의 소소한 총격전 수준이었다는 점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http://gonews.kinds.or.kr/OLD_NEWS_IMG3/MIN/MIN19370703y00_02.pdf 金仁旭少佐 驍勇은 聯隊의 誇이다 : 新乫坡對岸의 討匪壯烈戰과 咸興聯隊當局者談] {{웨이백|url=http://gonews.kinds.or.kr/OLD_NEWS_IMG3/MIN/MIN19370703y00_02.pdf |date=20170406202150 }} 매일신보(每日申報) 1937년 07월 03일 면수:06 단수:15<br>
         (서울, 국토통일원, 1983, 재발간) 재간본 pp.90~91, pp.98~100</ref> 북한 측이 김인욱 아닌 김석원을 자꾸 거론하는 것은 북한 김일성이 [[보천보 습격|보천보 사건]]과 간삼봉 전투 당사자인 [[김일성 가짜설|6사장 김일성이 아니라 가짜]]라는 증거일 뿐이다. 6사장 김일성은 1937년 11월 13일 전사했고, 북한 김일성은 같은 이름을 쓰며 자신이 6사장인양 행동하여 그 공을 가로챘다. 오영진에 의하면 당시 6사장 김일성은 김인욱을 직접 만나 담판을 벌인 적도 있기 때문에 김석원으로 이름을 잘못 알 수가 없다고 했다. 김인욱은 평안남도 용강군(平安南道 龍岡郡) 출신으로 해방 전 예편하고, 고향에서 살다가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에 끌려간 후 소식을 모른다고 한다. 김석원은 해방 전에는 북한 김일성이나 그 처라는 김혜순과 아무런 관계가 없었고, 6.25 때 남침한 그의 군대와 맞서 전투를 벌인게 전부이다.
  • 김성곤 (1913년)
         * [[1937년]] [[보성전문학교]] 상과 졸업
         [[1937년]] [[보성전문학교]] 상과를 졸업하고 [[1939년]]에 비누공장인 삼공유지합자회사를 설립하였다. 그 뒤 대두유 비축으로 많은 돈을 벌게 되어 이후 [[1948년]] 금성방직을 인수한다. 그러나 [[1950년]] [[6.25전쟁]]으로 금성방직 안양공장에 화재가 난다. 그 뒤 [[1952년]]에 [[동양통신]]을 창간하였으며, [[1953년]]에는 연합신문을 인수, [[1956년]]에는 태평방직, 아주방직을 인수하는 등 기업가로서 성공을 이어갔다.
  • 김성수 (1891년)
         일장기 말소사건의 후유증으로 [[동아일보]]는 강제폐간 당했다가 [[1937년]][[6월 3일]] 복간하였다.<!--당시 일장기를 지운 신문은 동아일보 외에도 많습니다. 또한 이 부분은 김성수 관련 부분이 아니라 동아일보 관련 부분으로 봐야 합니다.--> 동아일보는 네 번 강제 폐간 당했고, 김성수는 [[조선총독부]] [[경찰청|경무국]]에 불려가 수차례 협박과 멸시, 폭행을 당하기도 했다.
         [[1937년]] [[5월 26일]] 다시 제12대 [[보성전문학교]]장에 취임하였다. 이후 그는 정치적 활동을 최대한 회피하고 교육과 학교 정비에 치중하려 노력하였다.
         [[1937년]] 안창호가 수감되자 [[이광수 (1892년)|이광수]]는 안창호가 간장이 좋지 않음을 들어 석방을 도움을 호소한다. [[이광수 (1892년)|이광수]]의 호소로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피체된 [[안창호]]의 보석금을 마련하여 지불하기도 했다. [[안창호]]는 석방되었으나 곧 [[경성대학병원]]에 입원했고, 김성수는 그의 치료비까지 부담했지만 그는 차도없이 [[3월 10일]] [[경성제국대학]] 병원에서 생을 마감한다. 그는 [[안창호]]의 장례식에 참석하고 돌아왔다. [[1937년]] [[이화여자대학교|이화여전 재단]] 이사(뒤의 재단법인 [[이화학원]] 이사)에 취임하였고, [[1938년]] [[안창호]]가 작고하자 추모비를 세우는 데 참여하였다. [[숭실전문학교]]의 신사참배 반대를 옹호하다가 총독부 경무국에 연행되었다가 풀려나기도 했다.
         1937년부터 1945년까지 [[실력양성운동]]을 비롯한 [[민족운동]]은 총독부의 가혹한 [[민족말살정책]]으로 탄압을받아 '합법적 공간'에서의 활동이 어려워지자 1942년 전후로는 김성수는 완전히 친일파로 변절했다.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폐간되었다가 [[1937년]] 6월 복간된 동아일보에는 일본의 침략전쟁을 위한 지원병을 적극 권장하거나 미화하는 기사글이 여러 번 올라왔다.<ref>http://dna.naver.com/search/searchByKeyword.nhn#%7B%22mode%22%3A1%2C%22sort%22%3A0%2C%22trans%22%3A%221%22%2C%22pageSize%22%3A10%2C%22keyword%22%3A%22%EC%A7%80%EC%9B%90%EB%B3%91%22%2C%22startIndex%22%3A0%2C%22page%22%3A1%2C%22status%22%3A%22success%22%2C%22startDate%22%3A%221938-01-01%22%2C%22endDate%22%3A%221938-12-31%22%7D</ref> 5월부터 보성전문학교 교장으로 다시 취임해 있었던 김성수는 [[7월 7일]]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김성수는 전쟁의 의미를 선전하기 위해 마련된 [[경성방송국]]의 라디오 시국강좌 담당 및 연설을 하였고(7월 30일과 8월 2일 이틀 동안), 8월 경성군사후원연맹에 국방헌금 1000원을 헌납했다.<ref>[http://www.sisainlive.com/news/articleView.html?idxno=8097# ‘고려대학’은 2010년판 신명심보감? ]</ref> 9월에는 총독부 학무국이 주최한 '시국강연대'의 일원으로 춘천, 철원 등 강원도 일대에서 연사로서 시국강연에 나섰다.<ref name="malsso1"/>, [[1938년]] 6월에는 친일단체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발기인·이사 및 산하의 비상시생활개선위원회 위원 등을 지냈다. 이밖에 국민총력조선연맹 발기인 및 이사(1940)·국민총력조선연맹 총무위원(1943), 흥아보국단(興亞報國團) 결성 준비위원(1941), 조선임전보국단 감사(1941) 등으로 활동하면서 [[1943년]]~[[1945년]] 기간 동안 [[매일신보]]와 [[경성일보]], 잡지 《춘추》등에 학병제·징병제를 찬양하는 내용의 총 25편의 논설 글 및 사설을 기고했다.<ref>《대한민국 친일진상규명위원회 보고서》, 4-3권. p43~p97</ref>
         반면, 김성수는 [[이광수]]나 [[서정주]]와는 달리 총독부의 [[창씨개명|창씨개명(創氏改名)]] 요구에 대해서는 끝까지 거부했고, 일제로부터 훈장이나 작위를 받은 경력은 없다.<ref name=autogenerated2 /> 김승학의 《친일파 명단》에 김성수는 "警察(경찰)의 迫害(박해)를 면하고 身邊(신변)의 安全(안전) 또는 地位(지위), 事業(사업) 等(등)의 維持(유지)를 위하여 부득이 끌려 다닌 者"로 [[유억겸]]과 함께 분류되었다.<ref>[http://db.history.go.kr/front2010/srchservice/srcFrameSet.jsp?pSearchWord=%EA%B9%80%EC%84%B1%EC%88%98&pSearchWordList=%EA%B9%80%EC%84%B1%EC%88%98&pSetID=-1&pTotalCount=0&pSearchType=1&pMainSearchType=2&pQuery=%28BI%3A%28%EA%B9%80%EC%84%B1%EC%88%98%29%29&pSearchClassName=&oid=&url=&method=&lang=&code=&searchword=&return= 한국사 데이터베이스]{{깨진 링크|url=http://db.history.go.kr/front2010/srchservice/srcFrameSet.jsp?pSearchWord=%EA%B9%80%EC%84%B1%EC%88%98&pSearchWordList=%EA%B9%80%EC%84%B1%EC%88%98&pSetID=-1&pTotalCount=0&pSearchType=1&pMainSearchType=2&pQuery=%28BI%3A%28%EA%B9%80%EC%84%B1%EC%88%98%29%29&pSearchClassName=&oid=&url=&method=&lang=&code=&searchword=&return= }}</ref> [[1937년]] 도산 [[안창호]]가 고문후유증과 지병으로 병원에 입원중일 때 안창호의 가족들이 그를 방문하여 도움을 청했을 때 김성수는 "말도 안 되는 소리 말라"며 거절하였다가 뒤로 몰래 사람을 보내 거액의 자금을 도산 안창호에게 전달했다는 증언이 있다.<ref name=autogenerated2 /> [[유진오]]는 그의 회고록 《양호기》에서 김성수의 이름으로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 실린 '학도병' 기사는 매일신보사 기자 김병규가 유진오와 상의한 뒤에 대필하여 승인을 받은 글이라 주장하였다.<ref name=autogenerated1>이정식, 《대한민국의 기원》(일조각, 2006) 137페이지</ref><ref>《양호기》,[[유진오]] 저. p90~p110 참조.</ref>
         * [[1937년]] [[5월 26일]] 제12대 [[보성전문학교]]장(~[[1946년]])
         * [[1937년]] [[이화여자대학교|이화여전 재단]] 이사(뒤의 재단법인 [[이화학원]] 이사)에 취임
  • 김영옥 (배우)
         '''김영옥'''([[1937년]] [[12월 5일]] ~ )은 [[대한민국]]의 [[배우]], [[성우]]이다.
         [[분류:대한민국의 여자 성우]][[분류:대한민국의 여자 배우]][[분류:대한민국의 여자 텔레비전 배우]][[분류:대한민국의 여자 연극 배우]][[분류:대한민국의 여자 영화 배우]][[분류:1937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1959년 데뷔]][[분류:부산광역시 출신]][[분류:광산 김씨]]
  • 김윤정 (1869년)
         }}</ref> [[1937년]] [[8월]] [[방응모]], [[한상룡]], [[박흥식 (1903년)|박흥식]] 등과 함께 [[애국금차회]]의 조직에 참여하였다.
  • 김정렬 (1917년)
         1935년 경성공립중학교(京城公立中學校)를 졸업한 뒤 다시 편제가 바뀐 에 4학년이 되었다. [[1937년]] 를 졸업하고 일본 육군예과사관학교에 들어갔다.
  • 김한 (1909년)
         이후 영화 미술, 연극의 무대장치, 간판 가게 설립, 다방 운영 등 다방면에서 활동하였으나, 영화 출연을 주요 직업으로 삼았다. [[1937년]] [[서광제]], [[이규환 (영화 감독)|이규환]], [[문예봉]] 등과 [[성봉영화원]]을 세우고 《군용열차》에 출연했고, [[1939년]] [[신경균]]이 연출한 영화 《처녀도》에서는 목장에 휴양차 내려왔다가 목장 주인의 딸과 사랑에 빠지는 남자 주인공 역을 맡았다.
  • 김호규
         [[1937년]] [[8월 25일]] [[동요회]](同耀會) 발기인과 이사로 참여하는 한편 국방헌금 헌납에 적극 참여했다. 1937년 12월 [[중일 전쟁]] 당시 일본군의 [[난징 시|난징]] 함락을 지지하는 글을 기고했으며 1938년 1월 조선에서 실시된 지원병 제도를 적극 지지하는 글을 기고했다. 1938년 다시 [[동요회]] 이사에 선출되었다.
  • 김화랑
         [[경성부]] 출신으로 [[배재고등보통학교]]을 졸업하고 [[일본]] 유학을 다녀왔다. 배재고보 시절부터 연극부에서 활동한 것으로 전해진다. [[1937년]] [[주영섭 (1912년)|주영섭]] 등과 함께 [[조선영화작가협회]]를 결성하며 문화예술계에 첫선을 보였다. 그는 '천부적인 예술 감각의 소유자'로, 천재적인 인물이었던 것으로 전해진다.<ref>{{서적 인용
  • 남궁억
         [[1937년]] [[1월]] 부인 양씨의 장례식을 치룬 뒤 그는 제자들과 친지들에게 "내가 죽거든 무덤을 만들지 말고 과일나무 밑에 묻어 거름이나 되게 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 부인 : 양혜덕(梁惠德, [[1866년]] [[9월 13일]] - [[1937년]] [[1월 20일]]
  • 남궁염
         * 어머니 : 양혜덕(梁惠德, [[1866년]] [[9월 13일]] - [[1937년]] [[1월 20일]]
  • 리종만
         [[1912년]] 일제가 [[토지조사령]]을 공포한 직후에 농림주식회사를 설립했다. [[1937년]] 6월 당시 평안북도 초산군, 자성군, 태천군, 강계군, 함경남도 정평군, 영흥군, 단천군, 회령군, 무산군, 갑산군, 경상북도 의성군, 경상남도 울산군 소재 광산 등 전체 면적 760,000,000평에 달하는 750광구를 소유할 정도로 "광산왕"이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다. 1937년 6월 6일 대동광업(大同鑛業)주식회사를 설립하고 사장으로 취임했으며 같은 날에 대동광산중앙조합(大同鑛山中央組合) 이사장으로 취임했다.
         [[1937년]] [[6월 17일]] [[재단법인]] 대동농촌사(大同農村社), 대동출판사(大同出版社)를 설립하고 이사장으로 취임했으며 대동농촌사 이사장 재직 시절 전체 수확물의 7할을 농민이, 나머지 3할을 재단이 소유하는 제도를 도입했다. 이 제도는 30년 뒤에 농민이 수확물 전체를 갖는 대신 재단이 소유권만을 갖는 제도였다. [[1937년]] [[7월 19일]] [[애국부인회]] 조선본부에 북지황군위문품대의 일원으로 1,000원을 기부했고 1937년 10월 평양 [[숭실전문학교]]를 1,200,000원에 인수했다.
  • 문호월
         | style="width:20%;" | [[1937년]]
  • 민대식
         한편, [[1937년]]에 [[강원도 (남)|강원도]] [[춘천시|춘천부]] 에서는 면민들이 성금을 모아 [[민형식 (1875년)|민형식]]과 민대식, [[민규식]] 형제의 송덕비를 세웠으며, 2008년에 친일 행적 논란으로 비석이 철거되었다.<ref>{{저널 인용
  • 민대식 (1882년)
         한편, [[1937년]]에 [[강원도]] [[춘천부]] 동면에서는 면민들이 성금을 모아 [[민형식 (1875년)|민형식]]과 민대식, [[민규식]] 형제의 송덕비를 세웠으며, 2008년에 친일 행적 논란으로 비석이 철거되었다.<ref>{{저널 인용
  • 민복기
         [[1936년]] [[일본 고등문관시험]] 사법과에 합격하고, [[1937년]] [[3월 31일]] 경성제국대학 법학부를 졸업하였다.<ref>[http://www.history.go.kr/openUrl.jsp?ID=su_011_1937b_03_31_1270 《조선총독부 관보》(1937.4.7.)]{{깨진 링크|url=http://www.history.go.kr/openUrl.jsp?ID=su_011_1937b_03_31_1270 }}</ref>
  • 민복기 (1913년)
         [[1936년]] [[일본 고등문관시험]] 사법과에 합격하고, [[1937년]] [[3월 31일]] 경성제국대학 법학부를 졸업하였다.<ref>[http://www.history.go.kr/openUrl.jsp?ID=su_011_1937b_03_31_1270 《조선총독부 관보》(1937.4.7.)]{{깨진 링크|url=http://www.history.go.kr/openUrl.jsp?ID=su_011_1937b_03_31_1270 }}</ref>
  • 박근혜
         ** 자 박재옥 ([[1937년]] ~ ) - 김호남 소생
  • 박문웅(1890)
         그뒤 [[사무관]]을 거쳐 [[1934년]] [[9월 14일]] [[경상북도]] [[군속]]이 되었다. [[1934년]] [[9월 16일]] [[고등관]] 7등에 [[군수]]로 승진, [[청송]][[군수]](靑松郡守)가 되었다.<ref>동아일보 1934년 09월 16일자, 1면</ref> [[청송]][[군수]]로 재직 중 [[1935년]] 판임관 7등이 되고, [[1937년]] 판임관 6등으로 승진하였다. [[1938년]] [[3월 17일]] [[청도]][[군수]]가 되었다.<ref>동아일보 1938년 03월 27일자, 1면</ref> 그해 [[8월]] [[국민정신총동원연맹]] 청도군지회 이사장을 맡았다. 이후 달성군수, 청송군수 등을 지내고 [[1939년]] [[9월 30일]] 인사에서 [[고등관]] 4등(高等官四等)으로 승진하였다.<ref>동아일보 1939년 10월 01일자 1면</ref>
         군수로 재직하면서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1937년]] [[7월]]부터 [[1940년]]까지 군수품 공출, 강연회와 기원제를 통한 국방사상 보급, 국방헌금 모집 등 전시(戰時) 업무를 적극 수행하여 '지나사변공적조서'에 이름이 올랐다.
         ** 며느리 : 양근함씨(陽根咸氏, [[1937년]] [[11월 11일]] ~ ), [[함승호]](咸升鎬)의 딸
  • 박상희(1906)
         '''[[박정희]]([[1917년]]생)의 친형(11살 차), [[김종필]]([[1926년]]생)의 [[장인]],''' 그리고 [[박준홍]], 박영옥, 박계옥의 아버지이자 김종필과 박영옥의 아들, 딸인 김진과 김예리 남매에게는 [[외할아버지]], [[박재옥]], [[박근혜]], [[박근령]], [[박지만]]의 큰아버지이다.[* 그러나 이들의 경우 박재옥은 박상희가 죽기 전인 9년전인 [[1937년]]에 태어났고, 박상희가 [[대구 10.1 사건|10.1 대구폭동 사건]]에서 경찰의 총탄에 맞아죽었을 당시 초등학생 정도의 어린이였다. 박근혜, 박근령, 박지만은 박상희가 사망한 이후인 [[1950년대]]에 태어났기 때문에 이들 박정희의 자녀 4남매들에게는 큰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별로 없다.] [[박성빈]]에게는 셋째아들이다.
  • 박용만 (1955년)
         *** 형 : [[박용오]] ([[1937년]] ~ [[2009년]])
  • 박인천
         ** 차남 : [[박정구]] (朴定求, [[1937년]] - [[2003년]], 제3대 [[금호아시아나그룹]] 회장)
  • 박정구
         '''박정구''' (朴定求, [[1937년]] [[8월 10일]] ~ [[2002년]] [[7월 13일]], [[광주광역시|광주]])는 대한민국의 기업인이다.
         [[분류:1937년 태어남]][[분류:2003년 죽음]][[분류:대한민국의 기업인]][[분류:연세대학교 법과대학 동문]][[분류:광주고등학교 (광주) 동문]][[분류:광주서석초등학교 동문]][[분류:광주서중학교 동문]][[분류:광주광역시 출신]][[분류:반남 박씨]]
  • 서월영
         그러나 [[신파극]]의 인기와 함께 동양극장이 지나친 상업주의 경향으로 흘러가자 [[1937년]] [[심영 (1910년)|심영]], [[박제행]], [[남궁선]] 등과 더불어 청춘좌를 탈퇴한 뒤에는 신파극과 신극 사이의 타협점으로 중간극을 표방한 [[중앙무대]]를 창설했다.<ref>{{웹 인용 |url=http://seoul600.visitseoul.net/seoul-history/sidaesa/txt/6-6-11-2.html |제목=신파극(新派劇) |확인날짜=2008-04-22 |웹사이트=서울六百年史 |출판사=서울특별시 |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070928062039/http://seoul600.visitseoul.net/seoul-history/sidaesa/txt/6-6-11-2.html# |보존날짜=2007-09-28 |깨진링크=예 }}</ref> [[1939년]] 조직된 극단 [[고협 (극단)|고협]]에서도 활동했다.<ref>{{서적 인용
  • 손광식
         | 출생일 = [[1937년]]
         '''손광식'''([[1937년]] ~ [[2015년]] [[11월 28일]])는 [[문화일보]] 사장을 지낸 [[대한민국]]의 [[언론인]]이자, 상지경영컨설팅 회장을 지낸 [[기업인]]이다.
         [[분류:1937년 태어남]][[분류:2015년 죽음]][[분류:대한민국의 기자]][[분류:대한민국의 언론인]][[분류:대한민국의 기업인]][[분류:서울고등학교 동문]][[분류:서울대학교 상과대학 동문]][[분류:서울특별시 출신]]
  • 손광식 (1937년)
         | 출생일 = [[1937년]]
         '''손광식'''([[1937년]] ~ [[2015년]] [[11월 28일]])는 [[문화일보]] 사장을 지낸 [[대한민국]]의 [[언론인]]이자, 상지경영컨설팅 회장을 지낸 [[기업인]]이다.
         [[분류:1937년 태어남]][[분류:2015년 죽음]][[분류:대한민국의 기자]][[분류:대한민국의 언론인]][[분류:대한민국의 기업인]][[분류:서울고등학교 동문]][[분류:서울대학교 상과대학 동문]][[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
  • 손진태 (1900년)
         [[1927년]] [[와세다 대학|와세다 대학교 법문학부]]를 나왔으며 [[1930년]]에서 [[1934년]]까지 동양문고 사서로 근무했다. [[1932년]] [[조선민속학회]]를 창설하였고 [[1933년]]에 학회지 《조선민속》을 창간했다. [[1934년]]에는 [[진단학회]]의 발기인 가운데 하나로 참여했으며 같은 해에 [[연세대학교|연희전문학교]]와 [[고려대학교|보성전문학교]] 강사를, [[1937년]]에는 보성전문학교 초대 도서관 관장을 맡았다.
  • 송금선
         [[1937년]] [[조선부인문제연구회]]에 가입하여 순회 강연을 다니면서부터 친일 활동을 시작했다. 그해 [[조선총독부]]의 [[방송선전협의회]]에서 친일 강좌를 맡았고, [[조선귀족]] 부인들과 여성계 친일 인사들이 공동 조직한 [[애국금차회]]에도 가담했다.
  • 송재호(배우)
         [[분류:한국 남배우]][[분류:화천군 출신 인물]][[분류:1937년 출생]][[분류:1959년 데뷔]]
         [[대한민국]]의 연기배우. [[1937년]] [[3월 10일]]생 [[강원도]] [[화천군]] 출신이며 동아대학교 국어국문과를 졸업하였다.
         원래는 배우가 아닌 성우 출신으로 1959년 [[KBS부산방송총국]]에서 성우로 데뷔하였으며 이후 본격적으로 연기배우로 활동하였다. 1937년생인가 보니 일본의 [[시바타 히데카츠]]와 동갑에 연기력도 비슷한편.
  • 신성일
         '''신성일'''(申星一, [[1937년]] [[5월 8일]] ~ [[2018년]] [[11월 4일]])은 [[대한민국]]의 [[배우]]이며, 제16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본명은 '''강신영'''(姜信永)이고 본관은 [[진주 강씨 (강이식)|진주]](晋州), 호(號)는 우석(隅石)이다. 데뷔 당시 소속한 신필름의 뉴 스타 넘버원이라는 뜻을 담고 '''신성일'''(申星一)이란 이름으로 활동했으나, 국회의원에 출마하면서 본명과 예명을 합친 '''강신성일'''(姜申星一)로 개명하였다. 2018년 11월 4일 오전 2시 30분 [[화순전남대학교병원]]에서 폐암으로 인해 81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분류:1937년 태어남]][[분류:2018년 죽음]][[분류:1960년 데뷔]][[분류:20세기 대한민국 사람]][[분류:21세기 대한민국 사람]][[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대한민국의 남자 영화 배우]][[분류:대한민국의 남자 모델]][[분류:대한민국의 불교 신자]][[분류:대한민국의 남자 텔레비전 배우]][[분류:건국대학교 동문]][[분류:대한민국의 기업인]][[분류:한국국민당 (1981년) 당원]][[분류:신한국당 당원]][[분류:한나라당의 정치인]][[분류:진주 강씨]][[분류:동아방송예술대학교 교수]][[분류:폐암으로 죽은 사람]]
  • 심영섭
         '''심영섭'''(沈瑛燮, [[1937년]] [[6월 17일]] ~ , [[서울특별시|서울]])은 환경부 차관을 지낸 정무직 공무원이었다.
         [[분류:1937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한민국의 대학 교수]][[분류:대한민국의 환경부 차관]][[분류:한양대학교 동문]][[분류:서울대학교 보건대학원 동문]][[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청송 심씨]]
  • 안석주 (작사가)
         영화계에는 미술감독으로 참여하다가, [[1937년]] 《심청전》을 연출해 감독으로도 데뷔했다. [[일제 강점기]] 말기인 [[1941년]], 조선인은 지원병으로 갈 수 없는 현실에 좌절하던 조선 청년이 마침내 지원병 제도의 문호 개방에 힘입어 지원병으로 참전한다는 내용의 어용 영화 《지원병》의 [[영화 각본]]을 쓰고 연출했다. 이 영화에는 [[최운봉]]과 [[문예봉]]이 남녀 주인공으로 출연했다.
  • 안형식 (1888년)
         [[1935년]]에는 총독부가 시정 25주년을 기념해 표창한 표창자 명단에도 들어 있다. [[1937년]]까지 전남경찰관교습소 소장으로 재직 중이었고, 정7위 훈6등에 서위되어 있었다.
  • 오두환 (1883년)
         [[1936년]] 9월 남조선방공연습지도부(南朝鮮防空演習指導部) 지도부원으로 위촉되었으며 [[1937년]] [[8월 12일]]부터 [[1939년]] [[3월 30일]]까지 경상남도 김해군수를 역임했다. 김해군수로 재직 중이던 1938년 4월 4일에는 김해군민 대표로 중기관총 7기를 헌납하기도 했다. 1938년 6월 30일 당시에는 고등관 3등, 1938년 7월 1일 당시에는 종5위, 1939년 4월 24일 당시에는 정5위에 각각 서위되어 있었다.
  • 원윤수 (1887년)
         |페이지=328쪽}}</ref> [[1937년]] 이후 백년광산을 매각하고, 금융신탁, 요식업, 제조공업, 상업 등 여러 분야에 분산 투자하였다.
         [[중일 전쟁]]이 발발한 1937년에 "국방열을 보급"한다는 취지로 창립된 [[조선국방협회]] 발기인을 지냈다.<ref>{{서적 인용
  • 유일선
         '''유일선'''(柳一宣, [[1879년]] [[12월 27일]] ~ [[1937년]] [[4월 11일]])은 [[일제 강점기]]의 [[개신교]] [[목사]]이며 [[조선총독부]]에서 촉탁으로 근무했다.
         [[분류:1879년 태어남]][[분류:1937년 죽음]][[분류:일제 강점기의 교육인]][[분류:일제 강점기의 목회자]][[분류:일제 강점기의 공작원]][[분류:친일인명사전 수록자]][[분류:대한민국 정부 발표 친일반민족행위자]][[분류:서울특별시 출신]]
  • 유재건 (1937년)
         '''유재건'''(柳在乾, [[1937년]] [[9월 19일]] ~ )은 [[대한민국]]의 [[정치가]]이다. 호(號)는 혜천(惠泉)이다.
         [[분류:1937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서울돈암초등학교 동문]][[분류:연세대학교 교수]][[분류:고려대학교 교수]][[분류:서울대학교 교수]][[분류:대한민국의 시사 평론가]][[분류:대한민국의 정치 평론가]][[분류:대한민국의 교육 평론가]][[분류:미국의 법조인]][[분류:연세대학교 사회과학대학 동문]][[분류:연세대학교 대학원 동문]][[분류:미국에 거주한 대한민국인]][[분류:브리검영 대학교 동문]][[분류:워싱턴 주립 대학교 동문]][[분류:캘리포니아 대학교 데이비스 동문]][[분류:새정치국민회의]][[분류:새천년민주당 당원]][[분류:열린우리당 당원]][[분류:대통합민주신당 당원]][[분류:선진통일당 당원]][[분류:문화 류씨]]
  • 유진찬
         [[1928년]]부터 [[1939년]]까지 [[조선총독부 중추원]] 조사과 촉탁으로 일했고 [[1929년]] [[9월 7일]]부터 [[1943년]] [[4월 26일]] [[조선총독부]] 직속기구인 [[경학원]] 부제학으로 일했다. [[1937년]] 12월 [[중일 전쟁]]을 찬양하고 일본군의 승리를 기원하는 내용을 담은 한시를 지었으며 [[1938년]] [[2월 5일]] 명륜학원 강사로 임명되었다. [[1939년]] 조선유도연합회에 참여했고 [[1941년]] [[조선임전보국단]]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 윤덕진 (1937년)
         '''윤덕진'''(尹德辰, [[1937년]] [[8월 14일]] ~ ,[[부산광역시|부산]])은 전직 지방자치공무원이자, 전직 부산광역시 사상구청장이다. [[종교]]는 [[불교]]다.
         [[분류:1937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부산광역시 출신 인물]][[분류:부산고등학교 동문]][[분류:사상초등학교 동문]][[분류:부산중학교 동문]][[분류:부산대학교 동문]][[분류:대한민국의 공무원]][[분류:한나라당의 정치인]][[분류:대한민국의 지방자치단체장]][[분류:대한민국의 불교 신자]]
  • 윤삼륙
         '''윤삼륙'''(尹三六, 윤삼육, [[아명|아명(兒名)]]은 '''윤태영'''(尹泰榮), [[1937년]] [[5월 25일]] ~ )은 [[대한민국]]의 [[영화 각본|영화 시나리오 각본 작가]] 겸 [[영화 감독|영화감독]]이다.
         [[분류:1937년 태어남]][[분류:파평 윤씨]][[분류:부산광역시 출신]][[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개신교도 이탈자]][[분류:연세대학교 문과대학 동문]][[분류:대한민국의 기업인]][[분류:대한민국의 대학 강사]][[분류:대한민국의 대학 교수]][[분류:1959년 데뷔]][[분류:대한민국의 남자 연극 배우]][[분류:대한민국의 남자 배우]][[분류:대한민국의 영화 감독]][[분류:대한민국의 영화 각본가]][[분류:대한민국의 소설가]][[분류:대한민국의 기타 연주자]][[분류:대한민국의 팝 기타 연주자]][[분류:대한민국의 피아노 연주자]][[분류:대한민국의 팝 피아노 연주자]][[분류:대한민국의 클래식 피아노 연주자]][[분류:대한민국의 색소폰 연주자]][[분류:대한민국의 영화 음악 작곡가]][[분류:대종상 수상자]][[분류: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수상자]][[분류:청룡영화상 수상자]]
  • 윤상구 (1949년)
         * 어머니 : 여흥민씨(驪興 閔氏, [[1894년]] ~ [[1937년]]), 아버지 윤보선의 첫 부인
  • 윤영구 (1928년)
         ** 동생: [[윤용구]](尹鏞求, [[1937년]] - )
  • 윤치영
         [[1923년]]부터 그는 [[미국]] [[하와이대학교]] 국제법학과에 입학하여 수학했다. [[1924년]] 다시 하와이에 도착했을 때 [[7월 10일]] [[이승만]]이 그를 만나 자신의 독립운동을 도와줄 것을 호소하였다. 이승만의 설득으로 윤치영은 [[대한인동지회]]에서 활동하며 [[대한인동지회|동지회]] 기관지인 월간 태평양 잡지의 집필과 인쇄 과정을 맡아 봤고,발간, 발송, 광고, 수금 등의 일도 직접 맡아 보았다. [[1924년]] [[7월]]부터 [[1937년]]까지 [[대한인동지회]] 총본부 사무총장을 역임했다.
         이후 계속 [[카네기 평화재단]]에서 5년 계약직 연구원이 되어 국제법을 연구하였다. [[1935년]] [[5월 11일]] 일시 귀국했다가 [[1936년]]초 출국했으며, [[1937년]] [[5월]]에 [[미국]]을 출발, 영구 귀국하였다.
         [[1937년]] [[5월]]에 귀국했다. 윤치영은 이승만을 '아버지' 혹은 '한국의 아버지(Father of Korea)'라 불렀다.<ref name="우남 이승만 연구">정병준, 《우남 이승만 연구》(역사비평사, 2005), 381-383페이지</ref> 귀국 후에는 중앙기독교청년회 부총무 겸 [[흥업구락부]] 간사, 중앙기독교청년회 총무 등이 되어 활동하였다. 이때 그는 주말마다 병원에 입원한 [[안창호]]를 자주 위문하였다.
  • 이관용 (황족)
         ** 의붓 누이 : 이창화(李昌和, [[1867년]] ?월 ?일 - [[1937년]] ?월 ?일)
  • 이규환 (영화감독)
         [[1932년]]에 귀국하여 제작한 작품이 《임자 없는 나룻배》이다. [[나운규]]와 [[문예봉]]이 출연한 이 영화는 좋은 평가를 받고 문예봉을 스타의 자리에 올려놓았다. 그러나 이후 제작비 문제 등으로 순탄치 않은 영화 작업을 계속했다. [[1937년]]에는 [[성봉영화원]]을 설립하고 로컬리즘 색채가 강한 《나그네》를 내놓아 주목을 받았다. 성봉영화원이 [[조선영화주식회사]]로 통합된 뒤 이 회사에 들어가지 않고 [[만주]]로 떠나, 일제 강점기 말기의 [[군국주의]] 영화 제작에는 거의 참여하지 않았다.
  • 이기택
         ||<#6e7edd> '''출생일''' ||<#c5cae8>[[1937년]] [[7월 25일]] ||
         1937년 [[경상북도]] [[포항시|영일군]] 지행면(현 포항시 [[남구(포항)|남구]] 장기면)에서 태어났다.
         [[분류:대한민국의 정치인]][[분류:포항시 출신 인물]][[분류:1937년 출생]][[분류:2016년 사망]]
  • 이백순 (1909년)
         * [[1937년]] [[경상남도]] [[의령군청]] 지방삼림주사(地方森林主事)
  • 이봉희
         '''이봉희'''(李鳳羲 [[1868년]] [[10월 15일]] ~ [[1937년]] [[1월 28일]])는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가이다. [[신흥무관학교|신흥학교]] 교장을 역임하며 독립운동 지도자를 양성했다. 본관은 고성(固城). 안동 출신.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 [[이상룡 (1858년)|이상룡(李相龍)]]의 동생이며, [[정의부]] 재무위원인 [[이광민]]의 아버지다. '''이계동'''(李啓東), '''이상훈'''(李相勳), '''이상희'''(李相熙), '''이경식'''(李京植), '''이기동'''(李基東) 등 여러 이름을 썼다. 자는 덕초(德初), 호는 척서(尺西). 1990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1927년 2월부터 [[흑룡강성]] 탕원현(湯源縣) 오동하서(梧桐河西)에서 농토개척사업에 힘썼다.<ref name="대백과" /> 1932년 [[이상룡 (1858년)|이상룡]]의 병이 깊다는 소식을 듣고 [[하얼빈]]에서 와서 환국할 것을 설득했으나 거부당했다.<ref name="허은2">{{서적 인용 |저자1=허은 |저자2=변창애 |날짜=2010 |제목=아직도 내 귀엔 서간도 바람소리가 |쪽=167}}</ref> [[이상룡 (1858년)|이상룡]] 사후 [[이준형 (1875년)|이준형]] 일가가 환국할 때 중국 내 구간을 동행하는 등 직접적인 도움을 주었다.<ref name="허은3">{{서적 인용 |저자1=허은 |저자2=변창애 |날짜=2010 |제목=아직도 내 귀엔 서간도 바람소리가 |쪽=182}}</ref> 1937년 1월 28일 [[하얼빈]](哈爾濱) 취원창(聚源昶)에서 70세의 일기로 사망했다. 1990년 [[국가보훈처]]에 의해 [[이상룡 (1858년)|이상룡(李相龍)]], 이승화(李承和), [[이광민|이광민(李光民)]] 등 재만독립운동가들의 유해와 함께 국내로 봉환되어 [[국립대전현충원]] 안장됐다.<ref name="대백과" /> 1990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됐다.<ref name="보훈처" />
  • 이상화 (시인)
         [[1937년]] [[3월]] [[만주]]에 있던 큰형 [[이상정]]을 만나러 중국에 3개월간 다녀왔다. 그가 형을 만난 사실이 확인되면서 일본관헌에게 구금되었으나 특별한 혐의점이 없어 그해 [[11월]] 말경 가석방되었다. 다시 [[대구]]로 내려와 [[대륜고등학교|교남학교]]에 조선어, 영어, 작문담당 교사로 복직하여 [[교가]]를 작사했다. 또한 교남학교 권투부를 창설하여 지도하기도 했다. 그는 약소 민족은 주먹이라도 잘 써야 된다며 학교 체육대회 종목에도 권투를 넣었는데, 교남학교 권투부 출신들은, 졸업후 훗날 [[대구 권투 클럽]]을 결성하였다.
  • 이승화 (1876년)
         '''이승화'''(李承和 [[1876년]] [[8월 2일]] ~ [[1937년]])는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가]]이다. 서로군정서에서 활동했다. 본관은 고성(固城). 안동 출신. 자는 여중(汝中), 호는 담옹(淡翁)이다. 1990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 [[이상룡 (1858년)|이상룡(李相龍)]]의 당숙이다.
         1919년 [[서로군정서]]가 출범하면서 사무집행위원을 맡는 등<ref name="이종서2" /> 만주에서 항일투쟁을 계속하다가 1937년 향년 62세로 사망했다. 형 이승희(李承熙)와 함께 만주 감옥에서 옥사했다고 한다.<ref name="허은1">{{서적 인용 |저자1=허은 |저자2=변창애 |날짜=2010 |제목=아직도 내 귀엔 서간도 바람소리가 |쪽=201}}</ref> 하얼빈에 묻혔던 유해는 1990년 고국으로 돌아와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됐다.<ref name="기념관" /> 1990년에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됐다.<ref name="보훈처" />
         [[분류:1876년 태어남]][[분류:1937년 죽음]][[분류: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분류:안동시 출신]][[분류:고성 이씨]][[분류:일제 강점기의 사회 운동가]][[분류:이상룡]]
  • 이형국
         '''이형국'''(李衡國 [[1883년]] [[12월 12일]] ~ [[1937년]] [[3월 27일]])은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가이다. 본관은 고성(固城). 안동 출신. 백부는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 [[이상룡 (1858년)|이상룡(李相龍)]]이며 부친은 안동에서 3.1운동을 했던 [[이상동]](李相東)이다. 자는 시윤(時尹), 호는 창해(滄海). 1990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 임복진
         '''임복진'''(林福鎭, [[1937년]] [[9월 20일]] ~ )은 대한민국의 군인, 정치인이다. 제14·15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본관은 [[조양 임씨|조양]]이며, [[광주광역시|광주]] 출신이다.
         [[분류:1937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광주광역시 출신]][[분류:조양 임씨]][[분류:광주제일고등학교 동문]][[분류:광주대성초등학교 동문]][[분류:광주서중학교 동문]][[분류:육군사관학교 동문]][[분류:육군보병학교 동문]][[분류:육군기계화학교 동문]][[분류:국방대학교 동문]][[분류:국방대학원 동문]][[분류:대한민국의 베트남 전쟁 참전 군인]][[분류:대한민국의 대학 교수]][[분류:대한민국 육군 중장]][[분류:새정치국민회의]][[분류:열린우리당 당원]][[분류:대한민국의 제14대 국회의원]][[분류:대한민국의 제15대 국회의원]]
  • 장헌식
         장헌식은 관직에서 퇴임한 뒤로도 일본의 전쟁을 지원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1937년에는 각지에 시국강연을 다녔다. [[만주 사변]] 이후 일본군을 후원한 활동을 인정받아 [[1937년]] 일본 육군대신 명의의 표창을 받은 바 있고,<ref name="실록친일파" /> 37년 8월 21일에는 애국금차회원으로 참여하였다. [[중일 전쟁]] 발발 이후로는 시국강연반에 가담하여 전쟁 지원 연설을 하기도 했다. [[1938년]] 친일 단체인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에 발기인으로 참가한 뒤 [[1941년]] [[국민총력 조선연맹]]과 [[조선 임전 보국단]]에도 가담했다. 이때는 이미 70대의 노구였으나, 학병 지원을 독려한다며 전국에서 강연 활동을 벌이기도 했다. 1938년 8월 16일 조선총독부 칙임관대우 참의에 임명되었다.
  • 전예용
         }}</ref> [[1934년]] [[조선총독부]] 세무부 경성세무감독국 서무과속, [[1936년]] [[경기도]][[개성세무서]]속을 거쳐 [[1937년]] [[경기도]][[광주군|광주]][[군수]]로 부임하여 1939년까지 재직하였다.
         * 1937년 : [[경기도]] [[광주시 (경기도)|광주군]] 군수
  • 정복수
         보인상업전수학교에 재학 중 권투를 시작하여 [[1937년]] 전조선종합경기대회에서 밴텀급 우승을 하였다. [[1939년]] 9월 전국아마추어권투선수권대회에서 라이트급 우승을 한 데 이어 10월 조선체육협회 주최 제15회 조선신궁경기대회에서 페더급 우승을 하였고, 11월 제6회 전조선권투선수권대회에서 페더급 우승하였다.
  • 정진
         * '''[[정진 (1937년)|정진]]'''([[1937년]] ~ )은 [[재일본대한민국민단]]의 중앙단장이다.
  • 정진 (1937년)
         '''정진'''(鄭進, [[1937년]] - [[서울특별시|서울]])은 [[재일본대한민국민단]](민단) 전 중앙 단장이다.
         [[분류:재일 한국인]][[분류:1937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재일본대한민국민단]][[분류:니혼 대학 동문]][[분류:서울특별시 출신]]
  • 정충원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를 역임한 [[정재학 (1856년)|정재학]]의 셋째 아들이며 [[경상북도]] [[대구부]](현재의 [[대구광역시]]) 출신이다. [[1918년]] [[일본]] [[니혼 대학]] 법학과를 졸업했다. 경상북도 경무과 경시(1922년), 경상북도 경무과 경부(1923년 ~ 1928년), 경상북도 고등경찰과 경부(1928년), 경상북도 위생과 경부(1929년), 경상북도 포항경찰서 경부(1930년 ~ 1936년), 경상남도 순사교습소 경시(1937년)를 역임했으며 [[1937년]] [[8월 6일]]부터 [[1941년]] [[3월 31일]]까지 평안남도 보안과 경시로 근무했다.
         평안남도 보안과 경시로 재직 중이던 1937년에 발발한 [[중일 전쟁]] 당시 공습에 대비한 방공 사무를 수행하는 한편 군용 자동차를 징발하고 운전수를 징집하여 [[관동군]]의 군사 작전에 협조했다. 또한 시국 범죄 위반 단속 차원에서 무고한 민간인들을 검거하여 일본의 침략 전쟁에 적극 협력했다.
  • 조비오
         '''조비오'''(본명 : 조철현, 曺喆鉉, [[1937년]] [[4월 1일]] ~ [[2016년]] [[9월 21일]])는 [[대한민국]]의 [[천주교]] [[성직자]]이다. [[전라남도]] [[광주광역시|광산군]] (현 [[광주광역시]] [[광산구]])에서 태어나 [[광주가톨릭대학교]]를 졸업하고 [[1969년]] 사제로 서품되었다.<ref>안관옥, [http://www.hani.co.kr/arti/society/area/885390.html 전두환 광주재판 이끈 고 조비오 신부는 누구?], [[한겨레]], 2019년 3월 11일</ref> [[1980년]] [[5·18 광주 민주화 운동]] 시기에 광주시민들이 총탄에 쓰러지는 모습을 목격한 뒤 시민수습위원을 자청했고 [[하나회|신군부]]에 의해 체포돼 [[김대중]]과 함께 감옥 생활을 하였다. 이후에도 내란 음모 핵심 동조자로 규정되어 감시받는 생활을 하였지만 시국 미사를 집전하는 등 독재 정권에 정면으로 맞섰다.<ref>정회성.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1&aid=0008702660 민주화 증인 조비오 신부 '영면으로']. 연합뉴스. 2016년 9월 23일.</ref><ref>류형근.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3&aid=0007482682 '5·18의 역사' 고 조비오 신부 마지막 노래 '임 행진곡']. 뉴시스. 2016년 9월 23일.</ref><ref>정대하.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28&aid=0002334548 ‘오월 사제’ 조비오 신부 뜻 잇는 아름다운 기부]. 한겨레. 2016년 9월 23일.</ref>
         [[분류:1937년 태어남]][[분류:2016년 죽음]][[분류:대한민국의 로마 가톨릭 성직자]][[분류:대한민국의 사회 운동가]][[분류:창녕 조씨]][[분류:광주광역시 출신]]
  • 최창홍
         [[1937년]] [[2월 20일]] [[평안북도]] 경찰부 보안과 경시로 임명된 뒤부터 군용 자동차 징발 및 운전수 징집, 지하자원 개발 및 공출, 시국 범죄 위반 단속 및 검거, 국내 물자 조사에 관한 업무를 수행했으며 [[1938년]] [[3월]] [[평안북도]] 방공위원회 간사를 역임했다. [[1940년]] [[4월 29일]] [[중일 전쟁]]에 협력한 공로를 인정받아 일본 정부로부터 훈6등 서보장을 받았다.
  • 최하원
         '''최하원'''(崔夏園, 본명(本名)은 '''최승용'''(崔承容), [[1937년]] [[8월 18일]] ~ )은 [[대한민국]]의 [[영화감독]] 겸 [[시나리오]] [[영화 각본|작가]]이다. [[본관]]은 [[해주 최씨|해주]](海州)이고 호(號)는 산남(山南)이다.
         [[분류:1937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한민국의 영화 각본가]][[분류:해주 최씨]][[분류:광양시 출신]][[분류:대한민국의 남자 연극 배우]][[분류:1954년 데뷔]][[분류:대한민국의 남자 뮤지컬 배우]][[분류:대한민국의 연출가]][[분류:미국에 거주한 대한민국인]][[분류:타이완에 거주한 대한민국인]][[분류:대한민국의 영화 평론가]][[분류:대한민국의 음악 평론가]][[분류:대한민국의 문학 평론가]][[분류:대한민국의 연극 평론가]][[분류:대한민국의 영화 감독]][[분류:연세대학교 문과대학 동문]][[분류:동국대학교 교수]][[분류:20세기 대한민국 사람]][[분류:단국대학교 교수]][[분류:21세기 대한민국 사람]][[분류:대한민국의 소설가]][[분류:대한민국의 극작가]][[분류:대한민국의 장로교도]][[분류:대한민국의 기업인]]
  • 한규복 (1881년)
         [[지원병제]]는 [[1930년]]대 중반부터 일부 친일 유지층 사이에서 자발적으로 제기되었다. 먼저 [[박춘금]](朴春琴)이 [[대의사]](代議士)가 된 후 일본국회에서 이 문제를 들고 나왔고, 그후 친일인사들에 의해 여러 번 건의되었다. [[1936년]] [[11월 24일]] 경성부회의원 조병상(曺秉相), 중추원참의인 한규복 등이 중심이 되어 30여 명의 간담회를 열어 구체적으로 이 문제를 추진키 위해 위원 8명으로 기성회를 구성하고 [[1937년]] 발회식(發會式)을 가질 예정이었다.<ref name="jiji"/> 그러나 [[일본]] 당국은 이 문제가 [[참정권]]하고도 관계가 있다 하여 일단 중지시켰다.<ref name="jiji"/> 이후에도 그는 [[조선총독부]]에 참정권 허용을 요청하였지만 거절당한다.
         [[1937년]] [[1월]] [[방송선전협의회]](放送宣傳協議會) 위원으로 위촉되어 수양강좌·부인강좌·상식강좌의 강사로 출연하였고, [[7월]] [[중추원]] 주최 행사에 참여하였다. 동년 [[조선총독부]]에서 조선인들의 소득을 조사할 목적으로 국민소득조사위원회를 구성하자, 한규복은 국민소득조사위원회 경성지역 관내 위원으로 선임되었다. [[8월 3일]]부터는 [[10월]]까지 총독부 학무국에서 지나사변 이후 흉흉한 민심을 수습하고자 순회시국강연위원회를 조직할 때 연사가 되어 [[서울]]과 각지에 시국강연을 다녔다. [[8월 16일]]에는 [[경상남도]] [[함양군]]에서 시국강연을 하였다. [[9월 10일]]에는 용인공보교 대강당에서 [[용인군]] 지역 시국강연회를 주최하였다.
         ** 차남 : 한용관(韓鏞官, [[1937년]] [[4월 1일]] - ), [[부이사관]] 퇴직, [[근정포장]] 수상
  • 한복 (1914년)
         [[1932년]] 4월 입학할 때부터 1935년 3월 졸업할 때까지 [[일본]] 다케구라(武藏) 고등학교 고등과에 재학했으며 [[1935년]] 4월 입학할 때부터 1938년 3월 졸업할 때까지 [[도쿄 대학|도쿄 제국대학]]에서 법학부 법률학과를 전공했다. [[1937년]] 11월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했고 [[1938년]] [[3월 30일]] 부산지방법원 및 부산지방법원 검사국 사법관시보로 임명되었다.
  • 현소환
         '''현소환'''(玄昭煥, [[1937년]] [[8월 1일]] ~ [[2018년]] [[7월 28일]])은 [[연합뉴스|연합통신]] 사장을 역임한 언론인이다. 현재는 방송콘텐츠진흥재단 이사장이다. 본관은 [[연주 현씨|연주]]이며, [[대구광역시|대구]] 출신이다.
         [[분류:1937년 태어남]][[분류:2018년 죽음]][[분류:연주 현씨]][[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분류: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문학부 동문]][[분류:대한민국 해병 중위]][[분류:대한민국의 언론인]][[분류:대한민국의 기업인]][[분류:김종필]][[분류:신민주공화당]][[분류:자유민주연합 당원]][[분류:정주영]][[분류:백선엽]][[분류:심대평]][[분류:대한민국의 저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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