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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상욱 (국회의원)
         '''강상욱'''(姜尙郁, [[1929년]] [[2월 28일]] ~ [[2014년]] [[1월 12일]])은 [[대한민국]]의 [[군인]] 겸 [[정치가]]이며, [[대한민국 제3공화국|제3공화국]]에서 제6, 9대 [[국회의원]]을 역임하였다.
         [[분류:1929년 태어남]][[분류:2014년 죽음]][[분류:대한민국의 제6대 국회의원]][[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분류:육군사관학교 동문]][[분류:서울대학교 상과대학 동문‎]][[분류:육군보병학교 동문]][[분류:20세기 대한민국 사람]][[분류:21세기 대한민국 사람]][[분류:육군기갑학교 동문]][[분류:육군기계화학교 동문]][[분류:육군대학교 동문]][[분류:경희대학교 산업경영대학원 동문]][[분류:대한민국의 한국 전쟁 참전 군인]][[분류:대한민국 육군 준장]][[분류:민주공화당 (대한민국)]][[분류:신민주공화당]][[분류:자유민주연합 당원]]
  • 곽상훈 (국회의원)
         [[1928년]] [[만보산사건]]이 터지자 재만동포보호연맹 인천특파원으로 활약했으며, 한 때 언론인으로도 활동하여 [[동아일보]] 인천지국장을 맡기도 했다.<ref name="경인"/> [[1929년]] [[9월 17일]] [[신간회]] [[경기도]] [[수원시|수원]]지부 회원후보로 선출되었다.<ref>조성운 《일제하 수원지역의 민족운동》 (국학자료원, 2006) 161페이지</ref>
  • 김건 (1929년)
          | 출생일 = [[1929년]] [[6월 20일]]
         '''김건'''(金建, 1929년 6월 20일 ~ 2015년 4월 17일)은 한국증권거래소 이사장과 한국은행 총재를 지낸 [[대한민국]]의 금융인이다.
         [[분류:1929년 태어남]][[분류:2015년 죽음]][[분류:대한민국 육군 군인]][[분류:대한민국의 금융인]][[분류:대한민국의 기업인]][[분류:한국은행 부총재]][[분류:한국은행 총재]][[분류:부산광역시 출신 인물]][[분류:삼척 김씨]][[분류:대한민국의 한국 전쟁 참전 군인]][[분류:스웨덴에 거주한 대한민국인]][[분류:독일에 거주한 대한민국인]][[분류:미국에 거주한 대한민국인]][[분류:베트남에 거주한 대한민국인]][[분류:타이완에 거주한 대한민국인]][[분류:대전고등학교 동문]]
  • 김기만 (1929년)
         | 출생일 = [[1929년]] [[5월 9일]]
         '''김기만'''(金基萬, [[1929년]] [[5월 9일]] ~ [[2004년]] [[12월 26일]])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동양화|동양화가]] 겸 [[한국화|조선화가]]이다.
         [[분류:1929년 태어남]][[분류:2004년 죽음]][[분류:일제 강점기의 화가]][[분류:김해 김씨]][[분류:대한민국의 화가]][[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조선로동당 당원]][[분류:서울교동초등학교 동문]][[분류: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화가]][[분류: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대학 교수]]
  • 김대우 (1900년)
         슬하의 7남매 중 차남인 [[김광연 (1929년)|김광연]]은 [[송도병원]] 원장을, 막내 아들 [[김광순]]은 한국하우톤 회장을 지내는 등 자손이 번창했고, 이들은 김대우를 평범한 공무원이며 올곧은 선비로 기억하고 있다.<ref>{{뉴스 인용
         * 아들 : 김광연([[1929년]] ~ , 의사, 대장항문의, 서울송도병원 원장 역임)
  • 김부식
         {{인용문|고려부터 조선까지 1천 년간 ‘[[묘청의 난]]’보다 지나친 대사건이 없을 것이다. 이 사건에 대해 역사가들은 왕의 군사가 반역자를 친 전쟁으로 알았을 뿐이었으니….(중략) 만일 이와 반대로 김부식이 패하고 [[묘청]] 등이 이겼더라면, 조선사가 독립적이며 진취적으로 진전했을 것이다.|{{서적 인용|저자=[[신채호]]|장=조선역사상(朝鮮歷史上) 일천년래(一千年來) 제일대사건(第一大事件)|제목=《[[조선사연구초]](朝鮮史硏究草)》|연도=[[1929년]]}}}}
  • 김상호 (승려)
         3·1 운동 이후 김상호는 불교 청년 운동의 기수로 떠올랐다. [[1922년]]에 불교계 개혁 세력인 [[불교유신회]]가 중심이 되어 당시 대표적인 비리 승려로 지탄을 받고 있던 [[강대련]]을 명고축출하는 사건이 발생했을 때, 김상호는 주동자로 꼽혀 징역 6개월형을 선고받았다. [[1929년]]에는 [[조선불교승려대회]]를 조직했고, [[1930년]] 비밀결사인 [[만당 (불교)|만당]]을 결성하는 등 점차 명망을 높였다. [[1931년]]에는 조선불교청년총동맹 기관지 《불청운동》을 창간해 편집인 및 발행인을 맡기도 했다.
  • 김상홍 (1964년)
         출생 [[1964년]] [[9월 27일]] [[부산광역시|부산]] 출신으로 3개월 과정인 [[부산대학교]] 회계학과 졸업 전신인 경성사범학교 부속 교원양성소를 [[1911년]] 졸업한 뒤 교사 및 교육공무원으로 근무했다. 1911년 국민학교 부훈도(副訓導)로 시작하여 [[1918년]] 훈도로 승격했으며, [[1922년]] [[경상남도]] 시학(視學)에 임명되었다. 시학으로는 [[1929년]]까지 약 8년간 근무했고, 이후 [[거창군]] 서무주임에 발탁되어 [[1931년]]까지 재임했다.
  • 김상홍 (교육인)
         [[부산광역시|부산]] 출신으로 3개월 과정인 [[서울대학교]] 사범대학의 전신인 경성사범학교 부속 교원양성소를 [[1911년]] 졸업한 뒤 교사 및 교육공무원으로 근무했다. 1911년 국민학교 부훈도(副訓導)로 시작하여 [[1918년]] 훈도로 승격했으며, [[1922년]] [[경상남도]] 시학(視學)에 임명되었다. 시학으로는 [[1929년]]까지 약 8년간 근무했고, 이후 [[거창군]] 서무주임에 발탁되어 [[1931년]]까지 재임했다.
  • 김석훈 (1929년)
         '''김석훈'''(金石薰, 본명은 '''김영현''', [[1929년]] [[6월 8일]] ~ )은 [[대한민국]]의 [[영화 배우|영화배우]]이다.
         [[분류:1929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한민국의 남자 영화 배우]][[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대종상 수상자]][[분류:대한민국의 남자 연극 배우]][[분류:대한민국의 남자 배우]][[분류:1948년 데뷔]]
  • 김성곤 (1913년)
         * [[1929년]] [[대구고등보통학교]] 편입
         1929년 [[대구고등보통학교]]에 편입하지만, 4학년 때 교내 [[항일 운동]]의 주동으로 퇴학당하여 다시 상경, [[보성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였다.
  • 김성수 (1891년)
         [[1926년]] [[6월 11일]] [[대한제국 순종|순종]]의 인산일을 계기로 벌어진 [[6·10 만세 운동]]의 배후의 한사람으로 지목되어 [[조선총독부]] 경무국에 소환 조사를 받았으나 혐의점이 없어서 바로 풀려났다. 6월말 [[6.10 만세운동]] 당시 [[중앙학교]] 학생들이 만세운동을 주도하거나 만세시위에 연루되어 학교가 폐교될 위기에 처하자, 김성수는 '학교 걱정말고 가서 싸우라'고 학생들을 독려하였다. 이후 많은 학생들과 청년들에게 의로운 지도자로 존경받았다. [[1929년]] 3월 [[경성방직주식회사]] 고문이 되었다. 11월 3일 통학열차에서 일본인 남학생이 한국인 여학생을 희롱하다가 한인 남학생들이 가해 남학생을 구타, 한인 학생과 일본인 학생간의 싸움이 발생하여 [[광주 학생 항일 운동]]이 발생했다. 동아일보에서 이를 대대적으로 보도하자 보도정지령을 내렸으며, 그는 여학생 성추행 사건을 기회로 사태 확산을 획책한 것으로 의심받고 총독부에 소환되었다.
         1929년 도쿄에서 열린 제3회 범태평양회의에 참가한 한민족 대표단. 좌로부터 백관수, 송진우, 윤치호, 유억겸, 김활란
         [[1929년]] 말 출국, 구미 여행길에 [[대한민국 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에 들러 [[대한민국임시정부|임시정부]]가 운영하던 한인 학교에 큰돈을 기부했다. 또한 [[임시정부|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을 찾아뵙고 그들의 노고에 대한 그의 진심어린 경의를 표하여 도산 [[안창호]] 등 임정 요인들을 감격시키기도 하였다.<ref name=autogenerated2>《[[동아일보]]》(2002.03.31) [http://www.donga.com/fbin/output?f=82s&n=200203310196 인촌 김성수 선생, 각계 지도자들의 증언]</ref>
         * [[1929년]] 3월 [[경성방직주식회사]] 고문
         * [[1929년]] [[일본]] [[교토 시|교토]]에서 열린 제3차 범태평양회의에 [[윤치호]], [[유억겸]], [[김활란]]과 함께 참여하였다.
         * [[1929년]] 39세에 [[늑막염]]으로 한동안 입원하기도 했다.<ref name="in678" />
         **** 아들 : 김상종(金相淙, [[1929년]] [[1월]] ~ , [[우진토건]] 회장)
  • 김양 (1953년)
         * 어머니 : 임윤연(林胤嬿, <small>아명(兒名): 林胤燕</small>, [[1929년]] ~ [[1971년]] [[12월 11일]], [[위암]]으로 사망)
  • 김예리 (1951년)
         ** 어머니 : [[박영옥]] ([[1929년]] [[10월 30일]] ~ [[2015년]] [[2월 21일]])
  • 김일 (프로레슬링 선수)
         '''김일'''(金一, {{llang|ja|大木金太郎}}, [[1929년]] [[2월 24일]] ~ [[2006년]] [[10월 26일]])은 [[대한민국]]의 [[프로레슬링]] 선수이다. [[프로레슬러]] [[역도산]]의 제자이다.
         [[1929년]] [[전라남도]] 에서 출생한 김일은 [[1948년]]부터 [[1957년]]까지는 [[씨름]] 선수로 활동하였고 [[1957년]] [[역도산]] 체육관 문하생으로 입문하면서 레슬링을 시작했다. [[1963년]] 그의 스승인 [[역도산]]이 사망하자 그는 [[1963년]]부터 [[1972년]]까지 박치기를 특기로 극동 헤비급 챔피언, 올아시아 헤비급 챔피언, 세계 헤비급 챔피언에 오르는 등의 활약을 했다. 한국 프로 레슬링 1세대 격인 장영철과 [[천규덕]] 등과 함께 레슬링의 전성기를 꾸려가다 [[1995년]] 현역에서 은퇴했다. 현역 시절의 라이벌로는 [[일본]]의 [[안토니오 이노키]]가 있었는데 김일 선수가 병환으로 입원하자 문병하기도 했다.
         [[분류:1929년 태어남]][[분류:2006년 죽음]][[분류:20세기 대한민국 사람]][[분류:21세기 대한민국 사람]][[분류:대한민국의 프로 레슬러]][[분류:대한민국의 씨름 선수]][[분류:대한민국의 스포츠 평론가]][[분류:대한민국의 시사 평론가]][[분류:일본의 프로 레슬러]][[분류:프로레슬링 임원]][[분류:자유민주연합 당원]]
  • 김장호 (1929년)
         '''김장호'''(金長好, [[1929년]] [[3월 6일]] ~ [[1999년]] [[4월 18일]])는 [[대한민국]]의 [[시 (문학)|시인]], 등산가, 산악인, [[극작가]], [[연극]][[평론|평론가]], [[문학 평론|문학평론가]], [[번역]][[문학|문학가]], [[수필|수필가]], 기행 [[작가]], 대학 교수이다.
         [[분류:1929년 태어남]][[분류:1999년 죽음]][[분류:대한민국의 시인]][[분류:김해 김씨]][[분류:부산광역시 출신 인물]][[분류:대한민국의 산악인]][[분류:대한민국의 극작가]][[분류:대한민국의 문학 평론가]][[분류:대한민국의 연극 평론가]][[분류:대한민국의 번역가]][[분류:대한민국의 수필가]][[분류:대한민국의 대학 교수]][[분류:동국대학교 동문]]
  • 김진 (1949년)
         * 어머니: 임윤연(林胤嬿, <small>아명(兒名): 林胤燕</small>, [[1929년]] ~ [[1971년]] [[12월 11일]], [[위암]]으로 사망)
  • 남궁염
         *** 외조카딸: 윤성희([[1929년]] - )
  • 노덕술
         귀국 후 경찰관에 지원하여 [[1920년]]에 경남에 있는 순사교습소에 지원하여 6월 경상남도 순사에 임명되었다. 같은 해 9월 순사교습소를 수료한 후, 같은 달 경찰부 보안과 순사로 근무하다가 1922년경 경상남도 울산경찰서 사법계 순사부장으로 재직했다. [[1924년]] 12월 도경부 및 도경부보고시에 합격한 후, 같은 달 경부보로 승진하여 경상남도 의령경찰서 경부보, [[1926년]] 4월 거창경찰서 경부보를 지냈으며, [[1927년]] 12월 동래경찰서 경부보로 전근해 사법주임을 지냈다. 동래경찰서 경부보로 재직 중이던 [[1928년]] 10월 동래청년동맹 집행위원장 및 신간회 동래지회 간부로 활동하던 박일형을 체포하여 고문했다. 같은 해 겨울에는 부산제이상업학교 학생들이 주도한 동맹휴교사건을 수사하다가 동맹휴교의 배후에 '혁조회'라는 반일단체가 있음을 알고 혁조회 관련자인 김규직, 유진흥 등을 체포하여 고문했다. 김규직은 고문 후유증으로 [[1929년]] 12월 옥사했다. 같은 해 12월 [[조선공산당]]사건과 관련하여 동래고등보통학교 학생의 제보를 받고 보통학교 교원을 체포하여 심문했다.
         [[1929년]] 8월 동래유학생학우회 주최로 조선인 일본유학생들이 동래유치원에서 개최한 강연회의 강연 내용이 일본정치를 비난하는 등 내용이 불순하다고 강연자들을 체포하여 심문했으며, 같은 해 12월에는 동래고등보통학교 학생 문재순, 추학, 차일명등이 주도하여 [[광주학생운동]] 관련자 석방 등을 주장하며 동맹휴학을 일으키자 부하들을 지휘하여 관련자들을 체포하는 한편, 체포된 학생들에게 무자비한 고문을 자행했다. [[1931년]] 경상남도 통영 경찰서 경부보로 전근해 사법주임을 지냈다. 통영경찰서 경부보로 재직 중이던 [[1932년]] 5월 노동운동가 김재학을 '메이데이 시위에 참여했다.'는 혐의로 체포하여 고문했다.
         * [[1929년]] - [[1930년]] [[동래경찰서]] 사법주임으로 재직 당시, 동래고등보통학교 맹휴 사건과 조선인 일본 유학생의 하기휴가 이용 귀국 강연회 사건 수사를 담당하였다.
  • 박두을
         박두을은 남편 [[이병철]]이 대학 재학 중인 [[1929년]]에 장녀 [[이인희|인희]]를 낳은 데 이어 3남 5녀를 둔 어머니가 되었다. 호암자전에서 [[이병철]]은 자신의 자녀 수를 4남 6녀라고 적시했다. 이 중 자신과 박두을과의 사이에서 3남 5녀를 두었고, 일본인 아내와의 사이에 1남 1녀를 두었다.
  • 박문웅(1890)
         * 할머니 : 전주이씨(全州李氏, [[1846년]] [[4월 21일]] ~ [[1929년]] [[6월 6일]])
  • 박상희(1906)
         [[1920년]] 구미보통학교에 입학하여 졸업했다. [[1929년]], 처음으로 개교한 대구사범 제1회 입학시험에 응시했으나 낙방했다. 당시 식민지 조선에는 경성사범, 평양사범, 대구사범 단 3곳의 사범학교만이 존재했다. 월사금 등을 일절 받지 않는데다, 용돈조로 격려금까지 지급되고 졸업과 동시에 교사로 발령이 났다. 따라서 당시 식민지 조선에서 사범학교는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며 무지막지한 경쟁률을 자랑했다. [[경성제국대학]]이 있었지만 [[제국대학]]답게 식민지에선 아무나 가는 곳이 아니었으며 [[연희전문학교]], [[보성전문학교]]는 사립학교였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참고로 3년 뒤, 막내 동생인 박정희가 대구사범 입학시험에 합격했다.
  • 박서양 (1885년)
         [[1924년]] [[12월]] [[구세의원]]에서 무료 환자 3,315명, 유료 환자 6,416명을 진료하였다. [[1927년]] 학교 유지를 위해 적극 노력하였으나 간도 일본영사관의 탄압을 받았고, 1929년에는 학교 존폐 문제로 기금을 마련 [[숭신소학교]] 유지회 조직하였다. 그러나 [[1929년]] 숭신소학교 학생들도 [[광주학생운동]]에 참여하였다.
  • 박영옥(1929)
         |출생일 = [[1929년]] [[10월 30일]]
         '''박영옥'''(朴榮玉, [[1929년]] [[10월 30일]] ~ [[2015년]] [[2월 21일]])은 [[김종필]]의 아내이자 [[박정희]] 전 대통령의 친형인 [[박상희]]의 맏딸이다.
         [[1929년]] [[10월 30일]] 경상북도 칠곡에서 [[박상희]]와 조귀분의 장녀로 태어났다. 1946년 10월 6일에 아버지 박상희가 사망하였다. [[숙명여자대학교]] 국문학과 졸업. 모교인 교사로 일하던 중 [[1951년]] [[박정희]] 전 대통령의 소개로 [[김종필]]과 만나 같은해 2월 15일에 결혼했다.<ref name="news.naver.com">[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1&aid=0007421376], [[연합뉴스]] 2015년 2월 21일, '64년간 그림자 내조'…JP 부인 박영옥씨 별세(종합2보)</ref> [[1963년]] [[2월 25일]]에 순회대사 자격으로 숙모이자 대통령 [[박정희]]의 아내 [[육영수]]와 동남아 구주여행길에 나서기도 하였다. 양지회의 회장직과 한국여성테니스협회 회장직 등을 역임했다.<ref name="news.naver.com"/>
         [[분류:1929년 태어남]][[분류:2015년 죽음]][[분류:박성빈 가]][[분류:대한민국의 정치인의 배우자]][[분류:김종필]][[분류:박정희]][[분류:고령 박씨]][[분류:칠곡군 출신 인물]][[분류:대한민국의 개신교도]][[분류:숙명여자대학교 동문]]
  • 박영희 (1901년)
         [[1928년]] 2월과 7월에 [[조선공산당|공산당 검거 사건]]이 일어나게 된다. 각각 3차, 4차 공산당 사건이라 불리는데 이 두 차례의 검거 사건으로 모든 사회 운동은 위축되고 만다. 심지어 '민족 단일당'이라고 불리던 [[신간회]]조차도 주도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던 공산당원들의 검거로 활력을 잃게 되었다.<ref>그리고 뒷날 [[1929년]] [[광주학생운동]]이 터짐으로써 신간회는 이후 개량주의자들 난입등으로 점점 균형을 잃어가게 된다.</ref> 그리고 동년 12월,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서기국에서는 [[조선공산당]]의 재조직에 대한 결정서를 채택하였다. 나중에 이것을 '12월 테제'라고 한다.
         그리고 이 '12월 테제'에 [[카프]]의 동경 지부가 반응하면서 박영희 등이 결정하고 있던 [[신간회]] 노선 지지로부터 이탈하기 시작한다. 공산당이 힘을 잃어 민족 개량주의자들이 주도권을 잡고 있는 [[신간회]]를 지지할 수 없다는 이유였다. 이들은 [[1929년]] 5월, 독자적으로 《무산자사》(無産者社)라는 출판사를 설립하고 정치 투쟁을 적극적으로 전개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1929년]] 11월에 카프 동경 지부 해체를 정식으로 발표하게 된다. 이들이 외치는 것은 예술운동의 볼셰비키화론이었다. 이때부터 박영희는 카프에서의 입지가 점차 약화되어갔고, 박영희 자신은 카프에 회의를 품기 시작했다.
  • 방신영
         [[1929년]] [[이화여자대학교|이화여자전문학교]]에 가사과가 창설됨에 따라 교수로 부임하여 1952년 정년퇴직 때까지 근무하였다. [[이화여자대학교]] 가정과 교수로 재직시 여러 어려운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주기도 했다. 정년 퇴직하고 큰언니의 아들인 이석만(李奭萬)의 가족과 함께 살면서 교회에 봉사하다 1977년 1월 5일 서울 서대문구 홍제동 자택에서 소천 하였으며, 이화여자대학교 장(葬)으로 장례를 치루었다. 장지는 경기도 양주 회천교회 묘역이다.
  • 백기만
         * [[시 (문학)|시인]] [[이장희 (시인)|이장희]](李章熙, [[1900년]] [[1월 1일]] 출생 ~ [[1929년]] [[11월 3일]] 사망. 아호는 고월(古月). [[번역|번역문학가]]로도 활동하였다.)
  • 백남순 (1929년)
         |별명= [[백남준 (1929년)|백남준]]
         '''백남순'''(白南淳, [[1929년]] [[3월 13일]] ~ [[2007년]] [[1월 3일]])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외교관·[[정치가]]로 [[조선로동당]]원이다.
         [[분류:1929년 태어남]][[분류:2007년 죽음]][[분류:청도 백씨]][[분류: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사람]][[분류:20세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사람]][[분류: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장관]][[분류: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외교관]][[분류: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치인]][[분류:사회주의자]][[분류:공산주의자]][[분류:수원시 출신]][[분류:김일성종합대학 동문]][[분류:병사한 사람]][[분류:폴란드 주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대사]][[분류:월북자]][[분류:최고인민회의 대의원]]
  • 서정국 (1896년)
         [[한성부]] 출신으로 [[경성법학전문학교]]를 졸업하고 [[고등문관시험]] 사법과에 합격하여 법조인이 되었다. 광주지방법원에서 서기 겸 통역생으로 근무하다가 [[1929년]]에 [[조선총독부]] 판사에 임용되었다.
  • 소진하
         [[1929년]]에 총독부 군수로 승진하여 경북 [[청송군]]과 [[예천군]] 군수를 지냈다. 예천군수로 재직 중이던 [[1935년]]에 총독부가 편찬한 《조선공로자명감》<ref>{{뉴스 인용
  • 신석린
         구한 말 개화파 정치인으로 활동하다가 [[을사조약]] 이후 [[1906년]]에는 군수, [[1908년]]에는 [[창원시|창원부]] 부윤을 역임했다. [[한일합방]] 후 [[경상남도]] 참여관, [[경상북도]] 참여관, [[1921년]]에 [[강원도 (남)|강원도]] 지사, [[1923년]] 중추원 참의, [[1929년]]에 [[충청남도]] 도지사 등을 지냈다. 호는 애사(藹史)이며 본적은 [[서울특별시]] [[종로구]]이다. 본관은 [[평산 신씨|평산]]이다.
         참여관으로 보여준 실적을 인정받아 [[1921년]]에 [[강원도]] 지사로 승진한 뒤 [[1923년]]에 퇴관하여 중추원 참의가 되었다. 이후 [[1929년]]에 [[충청남도]] 도지사로 잠시 관계에 복귀하기도 했다. [[1933년]]을 기준으로 정3위 훈3등에 서위되어 있었다. [[1935년]] 총독부가 시정 25주년을 기념해 표창한 표창자 명단에도 들어 있다.
  • 안병길(1886)
         [[1929년]] [[5월 1일]] 조선박람회 평의원에 촉탁되었으며 [[1930년]] [[4월 1일]] 경상북도 관선 도평의회원으로 선출되었다. [[1930년]] [[6월 2일]] 정7위에 서위되었고 [[1931년]] 경산수리조합장과 경산면협의회원을 역임했다. [[1931년]]부터 [[1933년]]까지 경일은행 감사를 역임했으며 [[1934년]] [[4월 9일]] 여자의학전문학교 설립준비위원회 증선(增選, 추가 선출)위원으로 선출되었다.
  • 예안 김씨
         * [[김찬규 (1866년)|김찬규]](金燦奎, [[1866년]]~[[1929년]]) : 25세. 자 사석(士奭), 호 석연(石然). 독립운동단체 [[대동단]] 및 [[의용단]] 결성.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 제255호 추서.<ref>[https://search.i815.or.kr/Indeman/IndemanView.jsp?sT=0&tid=ma&c1=&c2=&c3=&query=S.ALL:%EA%B9%80%EC%B0%AC%EA%B7%9C&set_id=14971&total_df=16&list_per_page=10&cur_page=1&pos=3 독립기념관 독립운동가 공훈자료]{{깨진 링크|url=https://search.i815.or.kr/Indeman/IndemanView.jsp?sT=0&tid=ma&c1=&c2=&c3=&query=S.ALL:%EA%B9%80%EC%B0%AC%EA%B7%9C&set_id=14971&total_df=16&list_per_page=10&cur_page=1&pos=3 }}</ref>
  • 오정근 (1929년)
         |생애= [[1929년]] ~ [[1982년]] [[7월 11일]] (54세)
         '''오정근'''(吳定根, [[1929년]] ~ [[1982년]] [[7월 11일]])은 [[대한민국]]의 군인 출신 정치인이다.
         [[분류:1929년 태어남]][[분류:1982년 죽음]][[분류:대한민국의 수산청장]][[분류:대한민국의 국세청장]][[분류:국민대학교 동문]][[분류:육군보병학교 동문]]
  • 우병규
         [[1929년]] [[11월 20일]] ~ [[2018년]] [[2월 22일]]
         1929년 [[경상남도]] [[창원시|마산합포구]]부(현 [[창원시|마산합포구]])에서 태어났다. 마산상업고등학교(현 [[마산용마고등학교]]),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정치학과 및 동 대학교 [[대학원]] [[박사]] 과정을 졸업하였다.
  • 유림 (1894년)
         [[1927년]]부터 [[1929년]]까지 만주 길림성에서 이청천, 김응섭, 여준, 이탁, 김동삼 등과 한족노동당, 정의부, 재만한인교육회 등을 결성하며 항일운동 단체에서 활동하였다. 이때 만주에 있는 각 독립운동 세력의 통합에 노력하면서, 중국인 유격부대와 합작하여 한중 공동 항일전선을 만들어 독립운동의 강화에 심혈을 기울였다. 한편으로는 교육 목적으로 교과서 편찬, 교원 양성 등의 활동에도 개입했다.<ref name=autogenerated6>[http://www.donga.com/docs/magazine/shin/2007/08/08/200708080500012/200708080500012_3.html 동아일보 매거진::신동아<!-- 봇이 붙인 제목 -->]</ref>
         이때 중학생이던 북한의 [[김일성]]이 유림을 찾아와 인사한 적이 있는데, 유림은 재주는 있어 보이나 믿음이 가지 않는다고 했다.<ref name=autogenerated6 /> [[1929년]] [[평양]]에서 [[조선공산무정부주의자연맹]]을 결성하여 활동하였다.<ref name=autogenerated3 />
  • 유시환
         [[1929년]] 총독부 군수로 발탁되어 [[칠곡군]] 군수가 되었다. [[1934년]] [[경산군]], [[1935년]] [[안동군]] 군수로 차례로 발령받았다. 고향인 안동에서 약 9년 동안 군수로 재직했으며 일제 강점기 말기인 [[1944년]]에는 농상부장 겸 참여관으로 발탁되었다.<ref>{{서적 인용
  • 유진찬
         [[1928년]]부터 [[1939년]]까지 [[조선총독부 중추원]] 조사과 촉탁으로 일했고 [[1929년]] [[9월 7일]]부터 [[1943년]] [[4월 26일]] [[조선총독부]] 직속기구인 [[경학원]] 부제학으로 일했다. [[1937년]] 12월 [[중일 전쟁]]을 찬양하고 일본군의 승리를 기원하는 내용을 담은 한시를 지었으며 [[1938년]] [[2월 5일]] 명륜학원 강사로 임명되었다. [[1939년]] 조선유도연합회에 참여했고 [[1941년]] [[조선임전보국단]]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 윤석중
         [[대한민국]]의 [[수도]]인 [[서울특별시|서울]]에서 태어났다를 재학하였으나 [[1929년]] [[11월 3일]] [[광주 학생 운동]]이 발발하고, 이에 동참하지 못하고 [[졸업장]]을 받는 게 양심의 가책이 되어 <중외일보>에 '자퇴생의 수기'를 투고한 후 [[졸업]]을 며칠 앞두고, [[자퇴]]를 한다. [[1930년]] [[가을]]에는 [[일본]]으로 [[유학 (교육)|유학]]을 가지만 1년을 채우지 못하고, 귀국을 하게 된다. 이후 [[1942년]] [[일본]] [[조치 대학]] 신문학과를 [[졸업]]하였다. [[1925년]] [[잡지]] [[어린이]]에 그의 [[동요]] 〈오뚜기〉가 당선된 후 많은 동요 가사를 창작·발표하였다. [[1933년]], [[방정환]]의 뒤를 이어 《어린이》 주간으로 한국 아동 문학의 선구자로 활약하였다. 그 후 《소년중앙》·《소년》·《소학생》의 주간을 지냈으며, [[1955년]] 조선일보 편집 고문을 지냈다. [[1956년]] 새싹회 회장에 선출되고, [[1961년]] 3·1 문화상 예술 부문 본상과 [[1966년]] 문화훈장 국민장을 받았다. [[1970년]] 어린이 회관 고문이 되는 등 아동들을 위한 많은 공헌을 하였다. 저서로 《윤석중 동요집》, 《초생달》, 《굴렁쇠》, 《어린이를 위한 윤석중 시집》 등이 있다. [[1956년]] 새싹회 동요집 엄마손 등을 비롯하여 윤석중 동요집, 잃어버린 댕기 등 30여 편에 이른다. [[2003년]] [[12월 9일]], [[노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93세.
  • 윤영구 (1928년)
         ** 동생: [[윤석구]](尹錫求, [[1929년]] [[9월 6일]] - , 물리학자, [[미국]] [[사지노 대학]] [[물리학]]과 교수)
         ** 여동생 : [[윤용구]]([[1929년]] - )
  • 윤영선 (1896년)
         [[1925년]] [[9월]] 실업장의 주임대리직을 임시로 맡기도 했다.<ref>매일신보 1925년 9월 17일자, 3면</ref> [[4월 17일]] 에 [[동아일보사]] 개설되자 윤영선은 동아일보 임명되었다.<ref>"社告", 동아일보 1925년 04월 17일자 03면 09단</ref> 이후 그는 [[1945년]] [[9월]] 군정이 주둔할 때까지 [[동아일보]]일도 맡아보았다. [[1926년]] 세계 기독교 대회에 참석차 한국인 기독교 신자 대표로 [[미국]]에 다녀왔다. [[1927년]] 다시의 훈도가 되었다가 [[1929년]]까지 재직하고 그만두었다. [[1927년]] [[6월 18일]]에는 과일 종자, 묘목 및 인삼 종자 묘목을 판매하는 주식회사 송도식산(松都殖産)의 설립에 참여하여 이사가 되었다.
         윤영선은 아버지 [[윤치호]]의 영향을 안 받을수 없어 [[일본]]의 [[만주]] 정책에 대해서도 아버지 [[윤치호]]의 견해를 잘 따르는 편이었다.<ref name="유일한1"/> [[1928년]] 재단이사의 한사람으로 취임했고, [[1929년]] [[7월 28일]]에는 [[인천광역시|인천]]의 지역유지 [[김정호 (1885년)|김정호]](金正浩)와 함께를 조직하고 그해 [[9월 23일]] 씨름장에서 [[전조선씨름대회]]를 개최하였다. [[1929년]] [[2월 18일]] [[공성학]], 김정호 등과 면직물 제조 판매와 양말 제조 판매를 하는 주식회사 송고실업장(松高實業場)의 창립에 참여하고 주주 겸 이사로 참여했다. [[10월 30일]]에서 [[송선주]](宋善洙)와 함께 전등 및 전기선 제조 회사 장연전기 주식회사를 설립하고 공동대표로 출자하였다.
         [[1929년]] 면직물과 메리야스를 제조 판매하던 회사인 송고실업장(松高實業場)의 주식 340주를 매입하고, 그해 송고실업장의 재단이사의 한 사람으로 취임했다. 그해 [[9월 12일]] 송고실업장이 부속기관에서 독립하고 주식회사 송고실업장(松高實業場)으로 설립될 때 [[공성학]] 등과 함께 취체역의 한 사람으로 취임하였다. 이어 감사역에는 [[백낙준]], 최선익 등을 선정하고 대표직은 김정호에게 양보하여 그를 사장으로 추대했다.
         *** 조카 딸: 윤성희([[1929년]] - 2013 )
  • 윤영선 (1922년)
         * 부인 : 이봉규(李鳳圭, 용인이씨, [[1929년]] [[9월 12일]] ~ ), 이봉영(李鳳榮)의 딸
  • 윤치영
         [[1925년]] 미국 본토로 건너가 학업을 계속하였으며, 동시에 각지에 동지회 지부를 설치하고, 순회 강연을 하는 등 활동을 계속하였다.<ref name=autogenerated2>{{웹 인용 |url=http://narasarang.mpva.go.kr/person_search/merit_search_view.asp?idx=5109 |제목=나라사랑 광장<!-- 봇이 따온 제목 --> |확인날짜=2010-01-03 |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160305013959/http://narasarang.mpva.go.kr/person_search/merit_search_view.asp?idx=5109 |보존날짜=2016-03-05 |깨진링크=예 }}</ref> 이후 그는 [[미국]] [[프린스턴 대학교]], [[컬럼비아 대학교]], [[조지워싱턴 대학교]], [[아메리칸 대학교]] 등에서 수학하였다. [[1928년]] [[6월]]에는 뉴욕에서 [[삼일신보]](三一申報) 창간에 참여하여 사장인 허 정을 중심으로 [[김도연 (1894년)|김도연]]·김양수 등과 편집을 맡아 일하였다. 그리고 [[1929년]]부터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구미외교위원부|임시정부 구미외교위원부]] 위원에 임명되어 구미위원부에서 활동하였다.
         [[1929년]] [[이승만]]에 의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임시정부]] [[대한민국임시정부 구미외교위원부|구미 외교위원부 의원]]에 재선임되었다. 그해 윤치영은 [[미국]] [[엘리자베스시티주립대학교]] [[외교학|외교학과]]에 입학하였으나 결석이 잦아 1학년 재학 중 중퇴하고 만다. [[1930년]] [[태평양잡지]]가 [[태평양주보]]로 개명하면서 윤치영은 [[태평양주보]]의 주필로 취임하였다. 이후 [[조지 워싱턴 대학교]]에 재학하면서 [[대한민국임시정부 구미외교위원부|구미위원부 위원]]의 직함과 동시에 [[태평양주보]]에 칼럼 기고 활동하였다. 재정적으로 어려웠던 그는 고국에서 친지들이 보내주는 생활비와 강연료, 재미동포들의 후원금으로 가난한 생활을 연명하였다.
  • 윤탁구
         ** 이복 숙부 : [[윤대선]]([[1929년]] [[2월 23일]] - [[1939년]] [[11월 30일]])
         ** 형 : [[윤석구]](尹錫求, 1929년 - , 물리학자, 미국 사지노 대학 물리학과 교수)
  • 윤태빈
         * [[1929년]] : [[훈6등]] [[서보장]]
  • 은지원
         ||<#000000> '''{{{#FFFFFF 가족}}}''' ||<(> 아버지 은희만([[1929년|1929년생]])[* 2018년 9월 5일 별세][br]어머니 김성아([[1954년|1954년생]])[* 본명은 '김금자'며 과거 은지원 팬들의 현수막에도 '은지원 나랑 결혼하자! 김금자 씨 허락해 주세요.'(...)라는 문구가 있었다.][br]3남 2녀 중 [[3남|다섯째]][* 부모님이 재혼. 아버지 쪽으로 그렇다. 어머니 쪽으로는 [[무녀독남]]이다.][br]진외당고모 '''[[박근혜]]'''[* 이 글을 보고 있는 본인이 생각하는 그 박근혜가 맞다. 은지원의 진외종조부가 [[박정희]]이고 박근혜가 그 딸이니 고모가 된다.] ||
  • 이상오
          | 활동 기간 = [[1929년]] ~ [[1969년]]
         [[1929년]] [[사냥|수렵가]]로서의 활동을 시작하였고 살생유택(殺生有擇) 사상을 겸비한 [[사냥|수렵가]]로 이름을 날렸다.
  • 이상화 (시인)
         * [[시인]] [[이장희 (시인)|이장희]](李章熙, [[1900년]] [[1월 1일]] 출생 ~ [[1929년]] [[11월 3일]] 사망. 아호는 고월(古月). [[번역]][[문학가]]로도 활동하였다.)
  • 이소선
         '''이소선'''(李小仙, [[1929년]] [[12월 30일]] ~ [[2011년]] [[9월 3일]])은 대한민국의 [[노동운동|노동운동가]]이자 민주화 운동가이다. 1970년 11월 13일 아들인 [[전태일]]이 [[평화시장]] 노동조건 향상을 위해 활동하다 분신하자 이를 계기로 노동운동에 투신하였다. 노동운동가들을 자신의 자식처럼 대해 "노동자들의 어머니"라는 별칭을 얻었다.<ref>[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494717.html 노동자의 대모 이소선씨 별세], 한겨레, 2011년 9월 3일</ref> 민주화 운동 중에 희생된 사람들의 가족 모임인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를 만들고 초대 회장을 역임하였다.
         이소선은 1929년 12월 30일 [[경상북도]] [[대구시]] [[대구광역시]] 에서 빈농인 이성조와 김분이 사이의 1남 2녀 중 막내 딸로 태어났다. 호적에는 1930년에 올렸다.<ref name="오마이뉴스연재8">[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985085 이소선의 어린 시절, 그녀는 빈농의 둘째 딸], 오마이뉴스 연재 - 이소선 평전 <어머니의 길> (8), 2014.06.12</ref> 아버지는 "딸 아이를 보니 무릉도원에 온 것 같이 마음이 편안해 지고 아무 생각이 들지 않는다"며 이름을 소선(小仙)이라고 지었다.<ref name="경향신문기획연재2">[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901071742395&code=210000&s_code=af077 "2009 특별기획" 이소선의 80년, 살아온 이야기 (2) - 이 아이 이름은 작은 선녀], 경향신문, 2009년 1월 7일</ref> 이소선이 서너살 때 아버지 이성조는 항일 농촌 운동을 하다 일제에게 발각되어 끌려갔다.<ref name="오마이뉴스연재8" /> 이소선은 아버지가 산으로 끌려가 학살되었다고 회고하였지만<ref name="경향신문기획연재2" />, 관련 기록은 [[한국 전쟁]]을 거치며 소실되었다.<ref name="경향신문기획연재3">[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901081752445&code=210000&s_code=af077 "2009 특별기획" 이소선의 80년, 살아온 이야기 (3) - 네 살 때 멈춘 ‘아버지 기억’], 경향신문, 2009년 1월 8일</ref> 아버지가 죽은 뒤 소작할 땅마저 떼이자 가족들은 감천리에서 더 이상 살 수 없게 되었다. 어머니는 가족을 대리고 나오며 집에 불을 질렀다. 이소선은 평생 아버지가 없는 외로움을 느꼈다.<ref>[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901111829475&code=210100&s_code=af077 이소선의 80년, 살아온 이야기 (4) - 금지된 말이 된 ‘아버지], 경향신문, 2009년 1월 11일</ref> 이소선의 가족은 산 속 상엿집에 머무는 등 이곳 저곳을 전전하다 [[와룡산]] 기슭의 홀어미 집에 더부살이를 하였다.<ref>[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901141753535&code=210000&s_code=af077 이소선의 80년, 살아온 이야기 (5) - 와룡산 아래 더부살이], 경향신문, 2009년 1월 14일</ref>
         * 1929년 11월 9일(양력 12월 30일) 경북 달성군 성서면 감천리에서 태어남.
         [[분류:대한민국의 노동 운동가]][[분류:2011년 죽음]][[분류:전태일]][[분류:1929년 태어남]][[분류:대한민국의 인권 운동가]][[분류:대한민국의 사회 운동가]]
  • 이육사
         이원록의 필명은 여러가지가 있고, 호에 대한 몇가지 이야기가 있어 기재한다. 하나는 대구형무소에 수감되어 받은 수인 번호 '264'의 음을 딴 '二六四'에서 나왔다고 전해지며,'李活'과 '戮史', '肉瀉'를 거쳐 '陸史'로 고쳤다고 전해진다. [[1929년]] 이육사가 대구형무소에서 출옥한 후 요양을 위해 집안어른인 이영우의 집이 있는 포항으로 가서 머문 적이 있었는데, 이육사가 어느 날 이영우에게 "저는 "戮史"란 필명을 가지려고 하는데 어떻습니까?"라고 물었다. 이 말은 '역사를 찢어 죽이겠다'라는 의미였다. 당시 역사가 일제 역사이니까 일제 역사를 찢어 죽이겠다, 즉 [[일본]]을 패망시키겠다는 의미였다. 이에 이영우는 "표현이 혁명적인 의미를 너무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니, 같은 의미를 가지면서도 온건한 '陸史를 쓰라'고 권고하였고, 이를 받아들여 '陸史'로 바꿔 썼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肉瀉'라는 이름은 고기 먹고 설사한다는 뜻으로 당시 일제 강점 상황을 비아냥거리는 의미로, [[1932년]] [[조선일보]] 대구지국 기자로 근무했을 적 대구 약령시에 대한 기사를 네 차례 연재할 때 사용되었다. 이육사의 필명이나 호를 순서대로 정리하면 李活(1926-1939), 大邱二六四(1930), 戮史(1930), 肉瀉(1932), 陸史(1932-1944)와 같고 이원록이 '陸史'로 불리게 된 연유이다.
         # 1929년 11월에 터진 광주학생항일투쟁의 연장선상에서 발생한 사건임.
  • 이인성 (화가)
         그는 [[1929년]]부터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하기 시작하였으며 [[1935년]]에 열린 제14회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창덕궁상(昌德宮賞)을 수상했다. [[1930년]]에는 [[일본]] 다이헤이요 미술학교(太平洋美術學校)에 입학함과 동시에 일본 수채화 연맹(日本水彩畵聯盟) 회원이 되었으며 [[문부성미술전람회]]와 [[제국미술전람회]]에 여러 차례 입선하기도 하였다.
  • 이장희 (시인)
          | 활동 기간 = [[1924년]] ~ [[1929년]]
         '''이장희'''(李章熙, [[1900년]] [[1월 1일]] ~ [[1929년]] [[11월 3일]])는 [[일제 강점기]]의 [[시문학|시인]], [[번역]][[작가|문학가]]이다. 본관은 [[인천 이씨|인천]](仁川)이고 호는 고월(古月)이다.
         [[1900년]] [[대구광역시|경상북도 대구]]에서 아버지 [[이병학 (1866년)|이병학]]의 11남 8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대구의 부호이며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를 지낸 [[이병학 (1866년)|이병학]]이며, 어머니는 박금련이다. 다섯 살때, 어머니를 잃고 이후 계모 밑에서 크며 아버지와 불화했다. 아버지 이병학은 두 번째 부인과 5남 6녀를 두었고, 이장희가 죽기 5년 전에 세 번째 결혼을 하였으며 그 외에 측실도 1명을 거느렸다. 이장희 자결 당시 형제는 모두 10남 8녀로 매우 복잡한 가계였다. [[경상북도]] [[대구광역시|대구]]보통학교를 거쳐 [[일본]] [[교토]] 중학교를 졸업하였다. 교우관계는 [[양주동]], 유엽, 김영진, [[오상순]], 백기만, [[이상화 (시인)|이상화]], [[현진건]] 등 극히 제한되어 있었다. 부친이 중추원 참의로서 일본인들과의 교제가 빈번하여 아들 이장희 시인에게 중간 통역을 맡기려 했으나, 이장희 시인은 한 번도 복종하지 않았고, 총독부 관리로 취직하라는 지시도 거역하여 부친은 이장희 시인을 버린 자식으로 아주 단념하였다 한다. 그래서 극도로 빈궁한 삶을 벗어나지 못하였다. [[1929년]] [[11월 3일]] 대구 자택에서 음독 자살하였다.<ref>장백일, 〈고월 이장희시 연구〉, 《국어국문학》84권, 국어국문학회, 1980, 79~82쪽</ref>
         [[분류:1900년 태어남]][[분류:1929년 죽음]][[분류:일제 강점기의 시인]][[분류:자살한 작가]][[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분류:음독 자살한 사람]][[분류:대구초등학교 (대구) 동문]][[분류:교토 대학 동문]]
  • 이희근 (1929년)
         '''이희근'''(李喜根, [[1929년]] [[12월 13일]] ~ )은 대한민국의 공군 장성을 지낸 국영기업가 겸 정치가이다.
         [[분류:1929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한민국 공군 대장]][[분류:대한민국의 한국 전쟁 참전 군인]][[분류:경주 이씨]][[분류:대한민국의 베트남 전쟁 참전 군인]][[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분류:경북고등학교 동문]][[분류:대한민국의 공군참모총장]][[분류:대한민국의 공공기관장]][[분류:공군사관학교 동문]][[분류:육군보병학교 동문]][[분류:미국 미주리 종합군사학원 동문]][[분류:육군포병학교 동문]][[분류:공군방공포병학교 동문]][[분류:공군대학교 동문]][[분류:미국 공군참모대학교 동문]][[분류:미국 국방참모대학교 동문]][[분류:국방대학원 동문]][[분류:전두환]][[분류:백선엽]][[분류:박정희]][[분류:정일권]][[분류:노태우]][[분류:김종필]][[분류:신민주공화당]][[분류:자유민주연합 당원]][[분류:정주영]][[분류:심대평]][[분류:유교 이탈자]][[분류:대한민국의 불교 신자]]
  • 장태영(야구선수)
         ||<#eeeeee><:> '''생몰년도''' || [[1929년]] ~ [[1999년]] [[8월 3일]] ||
         1929년 경상북도 선산에서 장인달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5살이 되던 해에 부산으로 내려가 살았다. 1944년에 경남중학교에 입학해 [[유도(스포츠)|유도]]부에 입부해 유도를 배우던 그는 1945년 [[해방]]과 동시에 경남중학교에 야구부가 생기자 야구부에 입부하면서 그의 야구인생이 시작되었다. 축산업을 하던 그의 아버지는 경남중 야구부후원회장까지 맡을 정도로 재정적으로도 풍족한 사람이었고 이런 환경속에서 그는 야구 하나만 보고 성장할수 있었다.
         [[분류: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분류:구미시 출신 인물]] [[분류:1929년 출생]] [[분류:타자]] [[분류:외야수]] [[분류:좌투좌타]]
  • 장혁주
         [[대구광역시|대구]] 출신이다. [[1926년]] [[대구고등보통학교]]를 졸업했고 [[아나키즘]] 단체인 진우연맹(眞友聯盟) 회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1929년]] 이후부터 대구 희도(喜道)소학교 훈도로 근무했고 [[1932년]] 소설 〈아귀도(餓鬼道)〉를 발표하여 [[일본]] 문단에 등단했다. [[일본어]]로 쓰인 소설이지만, 식민지의 참혹한 현실을 사실적으로 묘사하여 당시 계급문학에서 유행하던 농민소설에 못지않은 현실 비판 의식을 담고 있다는 평가를 받았다.
  • 전병순 (소설가)
         '''전병순'''(田炳淳, [[1929년]] 2월 7일~ [[2005년]] 5월 3일)은 [[대한민국]]의 [[소설가]]이다.
         [[분류:대한민국의 소설가]][[분류:1929년 태어남]][[분류:2005년 죽음]][[분류:광주광역시 출신]][[분류:숙명여자대학교 동문]]
  • 전재용
         ** 백부: 전기환(全基煥, [[1929년]] ~)
  • 전태일
         * 어머니 [[이소선]](李小仙, [[1929년]] [[12월 30일]] ~ [[2011년]] [[9월 3일]])
  • 전형필
         | 활동 기간 = [[1929년]] ~ [[1962년]]
         [[1906년]] [[서울특별시|서울]]의 대부호의 아들로 태어났다. [[1926년]]에 [[휘문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29년]]에 [[와세다 대학]] 법학부를 졸업하였다. [[1932년]] [[서울특별시|서울]] [[관훈동]]의 한남서림(고서, 고서화를 취급하던 서점)을 인수하고, 우리민족 문화재들이 외부로 유출되는 것을 막기 위해 [[문화재]]들을 구입하기 시작한다. [[문화재]]에 보다 큰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휘문고등보통학교]] 스승이었던 춘곡 [[고희동]]과 [[독립운동가]] 위창 [[오세창]]의 영향이 컸다고 한다.
  • 정만조
         [[1929년]] 관제 친일 유림 조직인 [[경학원]]의 대제학을 지냈고, 국사 편찬 업무에 발탁되어 일본의 시각에서 역사를 적는 데 일조했다. [[1921년]]부터 [[조선사편찬위원회]] 위원을 지내며 일본 측의 시각에서 《조선사》를 집필하였고, 《고종실록》과 《순종실록》의 편찬에도 감수위원으로 참여했다.
  • 정재학 (1856년)
         [[1911년]]에 [[경상농공은행]] 감사역을 맡은 것을 시작으로 지역 금융계와 산업계에서 활발히 활동했다. [[1912년]] 선남은행 취체역, [[1913년]] 대구지주조합 설립위원과 대구전업주식회사 감사역 겸 취체역, [[1915년]] [[조선식산은행]] 상담역, [[1919년]] 계림농림주식회사 상담역, [[1921년]] [[대구은행]] 은행장과 대흥전기 감사, [[1929년]] 경상합동은행 이사 및 은행장과 조선미곡 대표이사, [[1929년]] 수성수리조합 조합장 등 경력이 화려하다.
  • 정칠성
         귀국 후 [[1927년]]에는 [[신간회]]와 [[근우회]]의 창립에 참여하였고, 여성 계몽 강연 활동과 칼럼, 논설 발표, 편물과 수자수 강사 등으로도 활동했다. 이후 [[근우회]]의 중앙집행위원, 선전조직부원 등으로 활동했다. [[1929년]] [[광주학생운동]]에 가담하였다. 1930년 제2차 경성학생시위사건(일명 근우회사건) 주동 혐의로 투옥당하였다.
         [[1928년]] [[근우회]] 임시전국대회자격심사위원, 1929년 제2회전국대회준비위원회 의안부책임자를 거쳐 [[1929년]] [[8월]] [[서대문경찰서]]에 체포, 투옥되었으나 곧 석방되었다. [[1929년]]말 다시[[근우회]] 중앙집행위원장에 선출되었다. 근우회 위원장으로서 순회강연으로 항일 의식을 고취하다가 수차례 검거되었다. 이후에도 합법적·비합법적 투쟁에 종사하여 요시찰 인물로 감시당하였다.
         [[파일:동아일보 광주학생운동.jpg|썸네일|160px|right|1929년 11월 6일자 [[동아일보]] 기사 (광주학생 항일운동 당시의 격문 보도 내용)]]
         [[1929년]]에는 [[광주 학생 운동]]에 연루되어 투옥되었다가 풀려났다. 그러나 [[1930년]]에는 [[조선공산당]]과 관련하여 [[제3차 조선공산당 사건]]의 관련자로 지목, 투옥되었다.
         [[1929년]] [[1월 21일]] 신간회 경성지회 사찰위원, [[1월 22일]] 신간회 임시대회에서 본부대회 대표회원에 선출되었다. [[2월 17일]] [[신간회]] 2주년 기념식에 [[권동진]], [[허헌]], [[김여식]], [[이종린]], [[홍명희]] 등과 함께 축사를 낭독하던 중 임석경관에 의해 소환되었다. [[2월 19일]] 근우회 중앙상무위원회에서 [[근우회]] 회보 발행책임위원에 선출되었다.
         [[1929년]] [[3월 3일]] 근우회 경성지회 대회 준비위원이 되어 천도교당에서 근우회 경성지회 대회를 개최하였다.[[3월 7일]] 아현리에서 열린 신춘여성문예대강연회에서 '여자의 속과 해방'이라는 주제로 강연하였다. [[3월 30일]] 근우회 영주지회 창립 준비에 파견되어 영주지회 조직을 지원하였다. [[4월 28일]]에는 근우회 전국지방순회강연 조를 편성하자 [[경의선]]지역 순회강연 연사로 선정되었다.
  • 조미령
         * '''[[조미령 (1929년)|조미령]]''' (趙美鈴, [[1929년]] ~ )은 1950~60년대에 전성기를 누린, 대한민국의 영화배우이다.
  • 진창현(음악인)
         [[분류:1929년 출생]][[분류:2012년 사망]][[분류:김천시 출신 인물]]
         [[1929년|1929]][* 정확한 날짜 불명] ~ [[2012년|2012.]] [[5월 13일|5. 13.]]
  • 차금봉
         '''차금봉'''(車今奉, [[1898년]] [[12월 8일]] ~ [[1929년]] [[3월 10일]])은 [[일제강점기]] 한국의 사회주의계열 독립운동가·노동운동가이다. 서울 출신.<ref name="역대">{{웹 인용|성1=김|이름1=혜영|제목=차금봉(車今奉)|url=http://people.aks.ac.kr/front/tabCon/ppl/pplView.aks?pplId=PPL_7HIL_A1898_1_0025739|웹사이트=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시스템|출판사=한국학중앙연구원|확인날짜=2015-12-15}}</ref>
         [[1927년]] 비타협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들이 연대하여 결성한 [[신간회]] 단체가 결성되자, [[1928년]]에는 신간회(新幹會) 경서(京西)지회 설립을 주도하여 간사를 맡았으며, 한편으로는 [[조선공산당]](朝鮮共産黨) 책임비서 등으로 활동했다. 그는 3·1운동 기념투쟁을 전개하기 위해 조선공산당 일본총국에 지시하여 선전전단 20만장을 도쿄의 동성사에서 인쇄했는데, 우송 도중 서울우편국에서 발각되고 말았다. 1928년 7월 제4차 조선공산당이 발각되는 상황에서 일본으로 건너가 피신했으나 도쿄에서 체포되었다. 국내로 압송당한 뒤 모진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묵비권을 행사하다가 1929년 3월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던 중 옥사했다.
         [[분류:1898년 태어남]][[분류:1929년 죽음]][[분류:한국의 옥사한 사람]][[분류:고문 피해자]][[분류:일제 강점기의 사회주의자]][[분류:일제 강점기의 공산주의자]][[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분류:조선공산당의 정치인]]
  • 최동
         귀국 후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에 입학하여 [[1921년]]에 졸업했다. 모교의 [[해부학]]교실 조교로 일하다가 [[중국]] [[북경협화의과 대학]]과 [[캐나다]] [[토론토 대학교]]에서 연구를 계속했다. [[1929년]]에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교수로 임용되었으며, [[1931년]]부터 3년 동안은 학교 재단이사를 겸직하기도 했다. 강의 과목은 [[기생충학]]과 [[병리학]]이었으며, 다시 일본 [[도호쿠 제국대학]] [[법의학]]교실에서 [[1936년]]에 [[법의학]]을 연구해 [[박사학위]]를 받았다.
  • 최성원 (음악가)
         * 아버지: [[최영섭]](崔永燮, [[1929년]] [[11월 28일]] ~ , [[작곡가]] 겸 [[지휘자]]. [[경기도]] 출생. [[한국작곡가협회|한국가곡작곡가협회]] 부회장 겸 [[Seoul]] Green Orchestra 상임지휘자. 졸업, 작곡과 학사, 오스트리아 빈 국립음악대학교 음악대학원 [[음악학]] [[석사]] 출신.)<ref>[http://people.search.naver.com/search.naver?sm=tab_txc&where=people_profile&ie=utf8&query=%EC%9E%91%EA%B3%A1%EA%B0%80%EC%B5%9C%EC%98%81%EC%84%AD&os=197876 작곡가 최영섭 - 네이버 인물검색]</ref><ref>{{웹 인용 |url=http://www.maniadb.com/artist.asp?p=112070# |제목=매니아DB - 작곡가 최영섭 |확인날짜=2013-03-24 |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121117001545/http://www.maniadb.com/artist.asp?p=112070# |보존날짜=2012-11-17 |깨진링크=예 }}</ref>
  • 최영섭
         '''최영섭'''(崔永燮, '''요한 초이'''({{llang|de|Yohann Tschoi}}), [[1929년]] [[11월 28일]] ~ )은 한때 [[오르간|오르가니스트]] 활동한 [[대한민국]]의 [[작곡가]] 겸 [[지휘|지휘자]]이다.
         [[분류:1929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해주 최씨]][[분류:광주광역시 출신]][[분류:1947년 데뷔]][[분류:20세기 대한민국 사람]][[분류:대한민국의 작사가]][[분류:21세기 대한민국 사람]][[분류:개신교도 이탈자]][[분류:대한민국의 로마 가톨릭교도]][[분류:서울대학교 음악대학 동문]][[분류:빈 대학교 동문]][[분류:오스트리아에 거주한 대한민국인]][[분류:독일에 거주한 대한민국인]][[분류:타이완에 거주한 대한민국인]][[분류:대한민국의 오르간 연주자]][[분류:대한민국의 작곡가]][[분류:대한민국의 지휘자]][[분류:중앙대학교 교수]][[분류:한양대학교 교수]][[분류:추계예술대학교 교수]]
  • 최창권
         '''최창권'''(崔彰權, [[말레이시아]]에서 [[음악가]] 활동 당시 [[영어]] 이름은 '''폴 초이'''({{llang|en|Paul Choi}}), [[1929년]] [[10월 26일]]<ref>호적상의 출생년월일은 [[1934년]] [[10월 26일]].</ref> ~ [[2008년]] [[1월 25일]])은 한때 [[피아노 연주자|피아니스트]] 활동한 [[대한민국]]의 [[작곡가]]이며 [[뮤지컬]] [[연출가]]이다.
         [[분류:1929년 태어남]][[분류:1953년 데뷔]][[분류:20세기 대한민국 사람]][[분류:21세기 대한민국 사람]][[분류:자유민주연합 당원]][[분류:대한민국의 피아노 연주자]][[분류:미국에 거주한 대한민국인]][[분류:말레이시아에 거주한 대한민국인]][[분류:타이완에 거주한 대한민국인]][[분류:대한민국의 작곡가]][[분류:대한민국의 영화 음악 작곡가]][[분류:대한민국의 작사가]][[분류:뮤지컬 감독]][[분류:서울예술대학교 교수]][[분류:추계예술대학교 교수]][[분류:2008년 죽음]][[분류:해주 최씨]][[분류:순천시 (전라남도) 출신]]
  • 한규복 (1881년)
         [[1926년]] [[8월]]에 다시 도지사로 승진, [[8월 14일]] [[충청북도]]도지사가 되고 [[1929년]] [[4월]] [[고등관]]1등(高等官1等)으로 승급되었다. [[1929년]] [[11월 28일]] [[황해도]][[도지사]]로 부임하였다. [[1930년]] [[1월 24일]] [[황해도농민회]] 회장에 임명되었다.<ref>조선총독부 관보 1930년 01월 24일자</ref> [[1930년]] [[2월]] [[황해도]] 도지사에 재임명된 뒤 [[1933년]] [[4월 7일]]에 사직서를 내고 퇴직했으나 그해 [[6월 4일]] [[조선총독부 중추원|중추원]] [[칙임관]]대우 [[참의]](中樞院勅任官待遇參議)에 임명되었다. 중추원 참의로 재직하면서도 그는 수당에만 의존하지 않고 기업인으로 활동하면서 경성부 교화단체연합회 서부교화구위원장을 지내기도 했다. [[1934년]] 중추원 참의에 재선되었다. 특히 [[태평양 전쟁]] 기간 중 [[흥아보국단]], [[임전대책협의회]], [[조선임전보국단]], [[국민동원총진회]] 등 여러 전쟁 지원 단체에 적극 가담했다. 서예에도 일가견이 있던 그는 [[1926년]]부터 [[1930년]]의 선전(鮮展)에서 4회 걸쳐 수상하였다.
         일본 정부는 한규복에게 여러차례 훈장을 수여해 공적을 인정했다. [[1929년]] 훈3등 서보장을 받는 등 퇴관할 때에는 정4위 훈3등에 서위되어 있었다. [[1935년]]에 총독부가 편찬한 《조선공로자명감》에 수록된 조선인 공로자 353명 중 한 명이기도 하다.<ref>{{뉴스 인용
  • 한기춘(국회의원)
         '''한기춘'''(韓基春, [[1929년]] [[12월 11일]] [[경상북도]] [[성주군|성주]] ~ )은 대한민국의 경제학자이다. [[대한민국 제10대 국회]]와 [[국가보위입법회의]] 의원도 지냈다.
         [[분류:1929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한민국의 경제학자]][[분류:대한민국의 저술가]][[분류:대한민국의 사회 운동가]][[분류:대한민국의 대학 교수]][[분류:성주군 출신 인물]][[분류:연세대학교 사회과학대학 동문]][[분류:보스턴 대학교 동문]]
  • 한필수
         서울에서 [[휘문고등학교|휘문의숙]]을 졸업한 뒤 일본으로 유학하여 일본미술학교를 졸업하였다. [[1929년]]부터 [[1932년]]까지는 중국 용정의 동흥중학교 교사로 있었다.
  • 현정건
         민족독립운동의 구심점을 하나로 집결시키려 애썼으나 [[1928년]] 봄에 상하이의 프랑스 조계 패륵로(貝勒路) 항경리(恒慶里)에서 상하이 주재 일본 총영사관 경찰에 체포되어 조선으로 압송, 11월 9일에 신의주지방법원에서 변동화(邊東華)ㆍ황의춘(黃義春) 등과 함께 공판이 열렸다. 이때 변호를 맡은 것은 최창조(崔昌朝)ㆍ이희적(李熙迪)ㆍ탁창하(卓昌河) 등 신의주 변호사 세 명과 손홍팔(孫洪八)ㆍ현석건(玄奭健)<ref group="설명">현정건의 친형이다.</ref> 등 진주 변호사 두 사람이었다. 현정건은 자신은 회합에 참여한 적도 없고 관련도 없다고 완강히 부인했으나, 12월 12일에 신의주 지방법원은 [[치안유지법]] 제령(制令) 제7호 위반 등의 혐의로 징역 3년을 언도하였다. 이에 불복하였으나 [[1929년]] 1월 19일에 평양으로 압송, 6월 10일에 열린 민사 제1호 법정 복심에서 원심의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1932년]] 6월 10일에 만기출옥하였으나, 옥살이의 후유증으로 얻은 [[복막염]]으로 12월 30일 의전병원에서 향년 45세로 사망하였다.
  • 현진건
         [[1929년]] 7월 8일부터 12일까지 [[신라]](新羅)의 고도였던 [[경주]](慶州)를 답사하고, 그 기행문 「고도순례 경주」를 7월 18일부터 8월 19일까지 「동아일보」에 연재하였다(이 고도기행은 당초 경주뿐 아니라 [[공주]](公州)와 [[부여]](扶餘), [[평양]](平壤)까지도 계획에 넣고 있었던 것 같지만 경주 이후로 고도기행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또한 『문예공론』 7월호에 단편 「신문지와 철창」을 기고하였으며, 12월에는 『신소설』에 「정조와 약가(藥價)」를 발표하였다.
  • 황태성(1906)
         * [[1929년]] 광주학생운동 경성지역 총지휘자로 활동하던 중 일본 경찰에 검거되어 2년 복역. 출옥 후 [[김천시|경상북도 김천]]에서 재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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