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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경희 (1880년) . . . . 5회 일치
그뒤 [[의열단]]에 가입해 활동하였다. [[1923년]] [[조선총독부]] 폭파를 목적으로 [[김시현]](金始顯) 등과 함께 총기와 폭탄, [[신채호]]의 격문과 [[조선총독부]] 관료들에게 보낼 투항권고문 사본 등을 국내로 반입, 격문 수백장을 받아 배포하였고, [[조선총독부]] 건물 폭파미수 직전 [[종로경찰서]]에 체포되었다. [[서대문형무소]]에서 1년간 복역한 후 [[신간회]](新幹會)의 조직에 참여했고, [[신간회]] 경북지부, 대구지부 등을 조직했으며, [[밀양청년회]]에서 활동하였다.
[[1923년]] [[의열단]] 단원으로 비밀거사를 준비하여 5월의거를 계획, 국내에 잠입하였다. [[1923년]] [[김원봉]] 의 지령아래 [[김지섭]], [[김시현]](金時顯), 유시태(柳時泰), 홍종우(洪鍾佑), 황옥(黃鈺) 등과 모의하여 [[중국]]과 [[만주]]로부터 무역 목적으로 [[안둥현]]에서 [[쌀가마]]에 숨겨서 국내로 반입해온 폭탄 36개, 권총 13정, 폭탄장치용시계 6개와 뇌관 여러정, 수류탄 10발, [[신채호]]가 작성한 [[조선혁명선언서]](革命宣言書)의 인쇄 사본 및 [[조선총독부]] 관공리에 대한 투항권고 격문 사본 2,000매 등을 반입, [[1923년]] [[3월 15일]] 이를 국내에 반입시키는데 성공하였다.
무기와 폭탄이 들어오자 그는 [[김시현]], [[유석현]] 등으로부터 〈혁명선언서〉와 투항권고 격문 수백 장을 받아 [[경성부]] 시내 곳곳에 살포하고, 전국 각 도의 도지사와 경찰부(警察部)에 발송하였다. [[김시현]], [[유석현]](劉錫鉉) 등 [[의열단]] 단원들이 [[조선총독부]]와 [[동양척식주식회사]], [[조선은행]], [[매일신보사]] 등을 폭파하할 것을 계획하고 준비에 들어갈 때 이경희는 [[조선총독부]] 폭파를 맡았다. 그러나 [[1923년]] [[5월]] [[조선총독부]] 폭파 일보 직전에 이들의 행동을 수상하게 여긴 누군가의 신고로 밀정이 따라붙어, 동지 12명과 [[조선총독부]] 종로 경찰서에 체포되어 테러 미수 혐의로 재판받았다.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형을 언도받고 [[서대문 형무소]]에 투옥되어 1년 넘게 형을 살고 가석방으로 풀려났다.
- 현정건 . . . . 4회 일치
| 임기 = 1919년 9월 17일 ~ 1923년 2월 5일
조선 [[대한제국 고종|고종(高宗)]] 24년([[1887년]])에 [[대구광역시|대구(大邱)]]에서 현경운(玄炅運)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일찍 독립운동에 투신하여 [[1910년]]에 중국으로 유학, [[상하이 시|상하이]]에서 수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대한민국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의 [[임시의정원|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에서 이규홍(李奎洪) 등과 함께 1919년 9월 17일 경상도 의원으로 보선되었다. [[1920년]]에 상하이 주재 [[고려공산당|고려공산당(高麗共産黨)]]에 입당하였고 [[1922년]] 10월 20일에 열린 베르프네우딘스크(Verkhneudinsk) 회의<ref group="설명">이동휘의 상하이 고려공산당과 김철훈ㆍ안병찬의 이르쿠츠크 고려공산당의 경쟁을 완화하고 두 세력을 합치기 위해 코민테른에서 그들에게 베르프네우딘스크에서 연합대회를 갖도록 하였다. 여기에는 한인 공산주의 운동 계열의 주요 지도자들이 모두 참석하였는데, 국내에서는 정재달, [[조봉암]] 등도 여기에 참석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 대회는 대표의 자격 문제가 제기되면서 파탄나고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은 철수, 코민테른 당국이 각파 지도자를 모스크바로 불러 조정하려 했으나 이마저 실패하자 결국 코민테른은 양파 모두 해산하고 단일당을 조선 안에 세울 것을 지시함으로써 상하이파도 이르쿠츠크파도 없어지게 된다. 김학준 저 「혁명가들의 항일 회상」 2005, 민음사.</ref>에 윤자영(尹滋英) 등과 함께 고려공산당 상하이파의 일원으로서 참가하였다. [[1923년]] 1월에 상하이에서 소집된 [[국민대표회의|국민대표회의(國民代表會議)]]에서는 윤해(尹海)ㆍ신숙(申肅) 등과 더불어 창조파(創造派)에 속하여 왕삼덕(王三德) 등과 참여하였고 2월 5일에 [[여운형|여운형(呂運亨)]]과 더불어 외교분과위원으로 지명되었으나, 창조파가 임시정부를 부정하며 조선공화국(朝鮮共和國) 건국을 결정하고 임시헌법과 국호 등을 제정하자 뜻을 바꾸어 "임시정부는 3ㆍ1운동의 결정인데 출석원(員)의 2/3나 되는 개조안을 무시하고 사신 5인이 퇴석 통고를 하고 불착한 대로 국호를 조선공화국로 정하여 새 국가를 만든 것을 성토한다"는 성명을 발표하였다.<ref>「創造派의 회의 종료」 『동아일보(東亞日報)』 1923년 6월 25일자.</ref> 7월에는 여운형이 조직한 한국독립촉진회에도 가담하는 등,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가로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계파간의 이견 조정에 힘쓰는 등 민족 우선의 독립운동을 위해 활동하였다. 8월에 조선의 관서([[평안도]]) 지방에서 일어난 대홍수로 이재민이 발생했을 때는 상하이에 거주하던 조선인들의 상하이교민단(上海僑民團)이 내지동포수재구제회(內地同胞水災求濟會)를 조직해 9월 26일에 수재의연금 110원을 동아일보사에 전달하기도 했는데 <ref>「同胞의 ㅁ愛! 해외각디동포의열렬한동정 가련한수재당한형뎨들에게」 『동아일보』1923년 10월 4일자 기사.</ref> 여기에 현정건의 이름이 실려 있다.
- 이종근(1923) . . . . 3회 일치
[[분류:대한민국의 군인]][[분류:대한민국 국회의원]][[분류:충주시 출신 인물]][[분류:1923년 출생]][[분류:2003년 사망]]
1923년 10월 22일 ~ 2003년 10월 22일
1923년 [[충청북도]] [[충주시|충주군]]에서 태어났다. 충주농업고등학교, [[육군사관학교]] 8기를 졸업하고 [[대한민국 육군]] 장교로 복무하였다. 1961년 [[5.16 군사정변]]에 참여하였다. 1963년 육군 [[준장]]으로 예편하였다.
- 정칠성 . . . . 3회 일치
1923년 [[물산장려운동]]에 한때 참여하였다.<ref name="dispose"/> [[1923년]] [[10월 17일]] 조영수, 이춘수(李春壽) 등과 함께 [[대구]] [[명신여학교]] 강당에서 [[기독교]] 등 종교모임의 부녀단체와 여성단체를 본따 [[대구여자청년회]](大邱女子靑年會)를 창립발기하였다. 바로 [[대구여자청년회]] 통과위원에 선출되었다.
[[1923년]]말부터 [[허정숙]], [[정종명]](鄭鍾鳴), 오수덕(吳壽德) 등과 함께 여자도 사람이라고 주장하며, [[가부장제]]의 억압과 남성들의 억압, 제국주의의 억압에서 벗어날 것을 주장하였다. 이어 [[허정숙]], [[정종명]] 등과 함께 여성사회운동단체를 조직하려고 여학생과 부인 중에서 동지를 규합하기 시작하였다. 이 중 신분과 배경을 보지 않고 사람을 사귀던 [[허정숙]]과는 특별히 친하게 지냈으며, 이후 정칠성은 [[허정숙]]과 함께 [[알렉산드라 콜론타이]]의 사상을 조선에 소개하는데 앞장섰다.
- 현진건 . . . . 3회 일치
[[1921년]] 1월에 현진건은 다시 『개벽』에 단편소설 「빈처」를 발표하였는데, 이것이 문단의 호평을 받아<ref>이때의 문인들의 평가는 성해(星海)의 「憑虛君의 『貧妻』와 牧星君의 『그날밤』을 읽은 印像」(1921년 05월 01일자 『개벽』제11호), 박종화의 「文壇의 一年을 追憶하야 現狀과 作品을 槪評하노라」(1923년 1월 1일자 『개벽』제31호)에 나타나 있다.</ref> 11월에는 다시 『개벽』에 단편 「[[술 권하는 사회]]」를 발표하였고, [[1922년]] [[1월]]부터 [[4월]]까지 『개벽』에 중편소설 「타락자」를 발표하였다. 작품 [[술 권하는 사회]]에서 그는 사회의 부조리함을 알면서도 저항하지 못하는 나약한 지식인상을 풍자하였다.
[[1923년]] 2월부터 10월까지 현진건은 『개벽』에 중편 「지새는 안개」를 발표하고, 9월에는 그의 동인지 『백조』에 단편 「할머니의 죽음」을 발표하였다. 「지새는 안개」는 당시의 문인 [[염상섭]](廉想攝)이 "살아있는 춘화도"라 평하고 있을 정도로 정밀하고 세련된 묘사를 보이고 있는 것으로 평가되었다. 또한 최남선이 주재한 동인지 『동명(東明)』의 편집동인으로 참여하여, 번안소설 「나들이」를 기고하는 한편으로 1924년 3월 31일에 창간된 「시대일보」(동명사의 후신)에 입사하였다(이때 그의 부인은 병치레로 대구의 친정으로 가 있었고 현진건만 홀로 서울에 남아 있었다<ref>「文壇風聞」 1923년 1월 1일자 『개벽』 제31호.</ref>). [[1924년]] 1월에는 단편 「까막잡기」를 『개벽』 , 2월에 「그립은 흘긴 눈」을 잡지 『폐허이후』에서 발표하고, 이어 다시 6월에 단편 「[[운수 좋은 날]]」을 『개벽』에 발표한다. 또한 4월 2일부터 5일까지 「시대일보」 지면에 소설 「발(簾)」을 연재했다.
- 백기만 . . . . 2회 일치
| 활동 기간 = [[1923년]] ~ [[1966년]]
[[대구광역시|경상북도 대구]] 출생으로 [[1923년]] 문예지 〈[[금성 (잡지)|금성]]〉에 《꿈의 예찬》, 《내 살림》, 《기쁨》 등의 시를 발표하여 문단에 등단하였다. [[1926년]] 이후 [[문학 평론|문학평론가]]로도 병행 활동하였다.
- 송남헌 . . . . 2회 일치
[[대구사범학교 (1923년)|대구사범학교]] 졸업하고 교사로 지냈다. 일제강점기 말기 [[경성방송국]]에 근무하던 조선사람이 단파통신을 통해서 [[1943년]]에 있었던 [[얄타회담]]에 관한 소식, 그리고 [[이승만]]박사 등의 외국에서의 한국독립운동에 관한 소식을 듣고 친지들에 전한 것을 들은 죄로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이 사건이 [[단파방송 밀청 사건]]이다.
[[분류:조병옥]][[분류:장건상]][[분류:경상북도 출신 인물]][[분류:대구사범학교 (1923년) 동문]]
- 윤덕주 (농구인) . . . . 2회 일치
** 올케언니 : 허귀진([[1923년]] ~ ) - [[대구광역시장|대구시장]] [[허억]]의 딸
**** 외6촌제부 : [[박창암]](朴蒼巖, [[1923년]] [[5월 15일]] ~ [[2003년]] [[11월 10일]], 군인, 정치가. 이상오의 사위. 아호(雅號)는 만주(滿洲), 허주(虛舟), 농부(農夫). [[군사영어학교|대한민국 군사영어학교]] 1기 출신. [[대한민국 육군|육군]] [[1성 장군|준장]] 전역.)
- 이상백 (1904년) . . . . 2회 일치
그는 [[1915년]] [[경북고등학교|대구고등보통학교]]를 졸업했으며, [[1919년]] [[3·1 만세 운동]]의 여파로 대구에서 벌어진 만세 운동에 참여하려다가 실패하고 잠시 은신하였다. 그 뒤 [[부산항]]에서 배편으로 [[일본]]으로 유학, 일본 와세다제일고등학원(早稻田第一高等學院)을 거쳐, [[1923년]] 와세다대학 문학부 사회철학과에 입학했다.
*** 조카사위: [[박창암]](朴蒼巖, [[1923년]] [[5월 15일]] ~ [[2003년]] [[11월 10일]], 군인, 정치가. '''이상오'''(李相旿)의 사위. 아호(雅號)는 만주(滿洲), 허주(虛舟), 농부(農夫). [[군사영어학교|대한민국 군사영어학교]] 1기 출신. [[대한민국 육군]] [[1성 장군|준장]] 전역.)
- 이열희 (1924년) . . . . 2회 일치
**** 6촌 매부: [[박창암]](朴蒼巖, [[1923년]] [[5월 15일]] ~ [[2003년]] [[11월 10일]], 군인, 정치가. 이상오의 사위. 아호(雅號)는 만주(滿洲), 허주(虛舟), 농부(農夫). [[군사영어학교|대한민국 군사영어학교]] 1기 출신. [[대한민국 육군|육군]] [[1성 장군|준장]] 전역.)
*** 고종사촌형수 : 허귀진([[1923년]] - ) - [[대구광역시장|대구시장]] [[허억]](許億)의 딸
- 이인 . . . . 2회 일치
'''이인'''(李仁, [[1896년]] [[10월 26일]] ~ [[1979년]] [[4월 5일]])은 [[한국]]의 독립운동가이며 법률가, 정치인이다. 자(字)는 자옥(子玉), 호(號)는 애산(愛山). [[일본]] 유학 후, [[1923년]] 변호사시험에 합격, 변호사를 개업하고 이후 [[일제 강점기]] 당시 [[김병로]], [[허헌]]과 함께 독립운동가 및 애국자, 사회저명인사들을 상대로 무료변호를 하여 등과 함께 '''3대 민족 인권 변호사'''로서 명망을 날렸다. 일제 강점기 말기에는 창씨개명을 거절하였고, 해방 후 우익 정치인으로 활동하다가 [[이승만]]의 단독정부 수립론에 가담하였다. [[1948년]] [[5월]] [[제헌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고, 정부수립 이후 국회의원과 법무부장관을 역임하였다. [[1949년]] 7월에 [[반민특위]] 위원장에 임명되어 반민특위를 와해, 해체시켰다.<ref>{{서적 인용
[[1917년]] 귀국했다가 [[1919년]]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1922년]] 일본변호사시험에 합격했다. [[1923년]] 5월 [[경성부]]에서 [[변호사]]·[[변리사]] 개업을 하여 7월 첫 변론으로 [[의열단]] 사건 피고인들의 변호를 맡았다. 이후 계속 민족운동사건의 변론을 맡아 [[6·10 만세 운동]]·[[고려혁명당 사건]]·[[의열단]] 사건·[[원산총파업]]·[[통의부사건]]·[[정의부사건]]·[[신간회]]민중대회사건·[[수양동우회 사건]] 등과 각종 소작쟁의, 필화(筆禍)·설화(舌禍) 사건과 [[친일파]]나 일본관리의 암살사건 등의 변론을 맡았고, 자청하여 [[안창호]](安昌浩)의 변호를 맡기도 했다. 그가 맡은 변호만도 약 1천 5백여건에 달한다.
- 장소팔 . . . . 2회 일치
'''장소팔'''(본명 '''장세건'''(張世建), [[1923년]] ~ [[2002년]] [[4월 22일]])은 [[대한민국]]의 [[만담]]가이다. '장소팔-[[고춘자]]의 만담'으로 널리 알려졌다.
[[분류:1923년 태어남]][[분류:2002년 죽음]][[분류:대한민국의 남자 연극 배우]][[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분류:1942년 데뷔]][[분류:대한민국의 남자 배우]][[분류:대한민국의 남자 희극인]][[분류:대한민국의 남자 영화 배우]]
- 장헌식 . . . . 2회 일치
[[1923년]] [[11월 25일]]에는 [[대성중학교]]에 장학금으로 써 달라고 금 40원을 기탁하였다. [[12월 27일]]에는 [[경성도서관]]에 도서구입비 1백 원을 기부하였다.
[[1923년]] [[간토 대지진]] 이후 [[사회주의]] 사상이 널리 퍼지고 노동 운동이 활발해지자 이를 탄압하기 위해 설립된 친일 자본가 단체인 [[동민회]]에 가담했으며, 일제 말기 총독부 학무국과 밀착하여 또다른 친일 단체 [[대화동맹]] 결성을 조종했다는 증언이 있다.<ref>일제 말기 총독부 학무국과 밀착하여~ : 반민특위 조병상 공판조서 (제1회) 중 조병상의 수기 (1949).</ref> [[1924년]] [[12월 1일]] [[전라남도지사]]로 부임하였다. 전남 지사직에서 물러난 1926년부터 1945년까지 중추원 칙임참의를 7회에 걸쳐 중임하였다.<ref name="실록친일파" />
- 한규복 (1881년) . . . . 2회 일치
[[1917년]] [[경상남도지방토지조사위원회]] 조사위원이 되고, [[1917년]] 진주군수 재직 중 [[고등관]] 5등(高等官5等)으로 승진했다. [[1918년]] [[7월 1일]] [[동래군|동래]][[군수]] 고등관 5등(東萊郡守 高等官5等)으로 발령받았다. [[1921년]] [[2월 12일]]에는 [[충청남도]] 참여관(慶尙北道參與官) 고등관 4등(高等官4等)으로 승진하였다. [[7월 22일]] 다시 [[충청남도]] [[참여관]]으로 임명되었다. [[1922년]] [[5월 30일]]에는 [[만주]]로 출장갔다가 [[10월]]에는 [[동양협회]] 시찰단의 한 사람이 되어 [[일본]]을 시찰하고 [[1923년]]초 되돌아왔다. [[1923년]] [[11월]] [[충청남도]] [[참여관]]으로 재직 중 [[충청남도음악협회]]회장에 선출되었다. [[1924년]] [[2월 11일]]에 [[경상북도]] 참여관으로 옮겼다. [[12월]] [[경상북도]] 참여관 재직 중 [[고등관]] 3등(高等官3等)으로 승진하였다.
- 한운사 . . . . 2회 일치
[[1923년]] [[1월 15일]] ~ [[2009년]] [[8월 11일]]
[[분류:각본가]][[분류:1923년 출생]][[분류:2009년 사망]][[분류:괴산군 출신 인물]]
- 황옥 (1885년) . . . . 2회 일치
1923년 [[김상옥 (1890년)|김상옥]]이 일으킨 [[종로경찰서 투폭사건]] 이후에 사건 관련자를 색출한다는 구실로 중국으로 출장을 가서 [[톈진]]에서 의열단 단장 [[김원봉]]과 만났고, 폭탄 36개와 권총 5정을 수령, 김시현, 김재진, [[권동산]] 등과 함께 물건을 [[단둥]], [[신의주]]를 거쳐 [[경성]]까지 밀수했다.
의열단은 황옥, 김시현 등이 밀반입시킨 무기류를 통해 [[조선총독부]], [[동양척식주식회사]], [[매일신보]] 등을 동시에 테러하는 제2차 국내 거사를 준비했지만 김재진이 밀고하여 실패했다. 김재진은 재판 이후 흔적이 증발하는데, [[유석현 (1900년)|유석현]]은 1983년 [[중앙일보]]에 기고한 회고록에서 김재진은 가명이고 [[권태일]]이 본명이라고 주장했다. 이 과정에서 김원봉, [[김지섭]] 등 소수만 탈출했고 황옥, 김시현, [[김진기]], [[조동근]], [[홍종우]], [[홍종무]], 유석현 등은 1923년 3월 15일에 체포당한다.
- 배성룡 . . . . 1회 일치
아버지는 운홍(運鴻)이며, 어머니는 유윤이(柳允伊)이다. 1917년 결혼을 전후해 일본의 니혼(日本)대학에 유학해 1923년 졸업했다. 귀국 후 조선일보사 기자로 활동하다가 퇴사하고 1924년 11월 화요회(火曜會)에 가입했다. 가입 후 사회주의 운동에 관련된 여러 편의 논저를 발표해 김경재(金璟載)와 함께 화요파의 대표적인 이론가로 활동했으며 1925년 8월 이후 〈동아일보〉를 주무대로 활발한 평론활동을 했다. 1926년 3월 제2차 조선공산당에 입당했다. 제2차 조선공산당 사건으로 검거되어 1928년 2월 1년형을 선고받고 같은 해 9월 만기 출옥했다. 1929년 조선일보사 경제부장이 되었다. 1931년 11월 새로 창간된 중앙일보사에 경제부장으로 입사하여, 1932년 봄 정치부장, 10월에는 논설반 주필 겸 편집부원으로 활동했다. 1933년 3월 〈중앙일보〉가 〈조선중앙일보〉로 제호를 변경하자 편집차장·정치부장을 역임하다가 10월 신문이 정간되자, 절필하고 은둔했다. 이 시기에 발표한 글들에서, 일제의 식민지 지배가 조선의 경제 현실에 민족모순과 계급모순을 중층적으로 존재하게 한 근본적인 요인이라고 파악하고 일본인 자본 대 조선 민중의 대립을 기본 모순으로 상정했다. 조선인 내부의 부르주아 계급과 노농계급 모두를 일본 자본주의에 의한 공동의 피해자로 파악하면서, 민족협동전선론을 주장했다. 8·15해방 후에는 중도파로서 좌우익의 편향노선을 비판했다.
- 소진은 . . . . 1회 일치
[[1921년]] 조선총독부 경상북도 경부에 임명되었으며, 왜관경찰서 경부로 발령받은 뒤부터 경찰 간부로 이동했다. 상주경찰서(1922년 ~ 1923년), 포항경찰서(1925년 ~ 1929년)를 거쳐 경상북도 경찰부 보안과 경부(1930년 ~ 1931년)로 근무하면서 정치범에 관한 업무를 담당했다. [[1932년]]부터 1933년까지 경상북도 경찰관교습소 교관으로 활동했고, [[1933년]] [[5월 12일]]에는 도경시로 승진하면서 전라북도 경무과에서 근무하게 된다. 이 때부터 전라북도 순사교습소장, 순사징계위원회 위원에 임명되었다.
- 아돌프 히틀러 . . . . 1회 일치
1923년, 히틀러는 [[뮌헨]]에서 정권 장악을 위해 [[맥주 홀 폭동]]을 일으킨다. 하지만 그 시도는 실패하였고, 그 결과 히틀러는 감옥에 수감되는 신세가 된다. 감옥에 있는 동안에는 자서전(?)인 [[나의 투쟁]]을 집필했다.
- 예천군 . . . . 1회 일치
* 1923년 : 영주군에서 상리면과 하리면을 편입.(12면)
- 오세창 . . . . 1회 일치
[[1920년]] [[경성복심법원]]에서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 혐의로 징역 3년형을 최종 선고받고, [[서대문 형무소]]로 이감되어 투옥하였다. [[1923년]]에 석방되었다.
- 육홍균 . . . . 1회 일치
1922년 [[무정부주의]]를 표방한 비밀결사 흑우회에 가입해, 회지 흑우, 소작농의 발간을 주도하였다. 1923년에는 [[박열]], [[김중한]] 등과 함께 불령사를 조직했다가 투옥되기도 했다. 출옥 후인 1926년 10월 흑우회가 흑색청년연맹으로 이름을 바꾸고 활동할 때에도 계속 참여하였다. 1927년 고향 선산군으로 돌아와 [[협동조합]] 우리살림사를 조직하였고, 옥성농우회를 통해 지역 농민운동을 이끌었다. 1939년 4월 검거되어 투옥되었다가, 출옥 후 [[중국]]으로 떠났다.
- 이상정 (1897년) . . . . 1회 일치
그는 [[서예]]와 [[전각]]에도 능하였고 [[1923년]]에는 [[시 (문학)|시인]]으로 문단 등단하기도 하였다.
- 이카르부스 . . . . 1회 일치
1923년 11월 20일 [[유고슬라비아 왕국]]의 도시 [[노비사드]]에서 코뇨비치 형제[* 디미트리예 코뇨비치(Dimitrije Konjović)와 두산 코뇨비치(Dusan Konjović).]와 밀리보이 코바체비치(Milivoj Kovacevic), 조코 라둘로비치(Djoko Radulovic), 요시프 미클(Josif Mikl)에 의해 항공기 및 자동차 회사로 설립된다. 이때는 이카루스(Ikarus)라는 이름이었다. 최초의 세르비아계 항공기 회사였다고. 설립된지 다음해에 최초의 항공기인 "브란덴부르크"를 만들어낸다.
- 장성환 . . . . 1회 일치
|후임자 = [[박원석 (1923년)|박원석]]
- 정운용 . . . . 1회 일치
정운용은 1921년 여름 서귀조와 결혼하여 1923년에 장녀 연수(蓮洙)를 낳고 행복한 결혼생활을 보냈다. 그러나 1930년 그의 아내는 7세의 여야를 두고 사망했다. 정운용은 다음 해인 1931년 김분조와 결혼했다.<ref><<대구사회비평 2003년 7~8월 통권 10호>> 문예미학사 http://hrznnzrh.blog.me/60033398980
- 정충원 . . . . 1회 일치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를 역임한 [[정재학 (1856년)|정재학]]의 셋째 아들이며 [[경상북도]] [[대구부]](현재의 [[대구광역시]]) 출신이다. [[1918년]] [[일본]] [[니혼 대학]] 법학과를 졸업했다. 경상북도 경무과 경시(1922년), 경상북도 경무과 경부(1923년 ~ 1928년), 경상북도 고등경찰과 경부(1928년), 경상북도 위생과 경부(1929년), 경상북도 포항경찰서 경부(1930년 ~ 1936년), 경상남도 순사교습소 경시(1937년)를 역임했으며 [[1937년]] [[8월 6일]]부터 [[1941년]] [[3월 31일]]까지 평안남도 보안과 경시로 근무했다.
- 존 딜린저 . . . . 1회 일치
1923년, 딜린저는 미 해군에 입대한다. 그는 전함 USS 유타에서 복무하게 되었지만 1년도 넘기지 못하고 유타가 보스턴에 정박했을 당시 탈영해버린다. 무어스빌로 돌아온 딜린저는 1924년 베릴 호비어스(Beryl Hovius)라는 3살 연하의 여자와 결혼한다.
- 차금봉 . . . . 1회 일치
서울 미동보통학교(渼洞普通學校)를 졸업한 뒤 [[1917년]] 용산(龍山) 기관차 화부 견습공으로 일하던 중,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자 노동자들의 독립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그는 식민지 현실의 노동문제에 깊은 관심을 보이면서 1920년 2월 조선노동문제연구회 발기인으로 참가했고, 같은해 3월 [[김명식 (1890년)|김명식]]·[[오상근]] 등과 함께 조선노동공제회(朝鮮勞動共濟會)를 조직하여 교양부 간사를 맡았다. [[1922년]]에는 최상덕 등과 함께 지식인들이 주도하는 조선노동공제회의 쇄신운동을 폈으며, 동년 9월 조선노동공제회 중앙집행위원장이 되었다. 조선금물직공조합·경성신문배달조합 창립을 지도했으며, 1923년 9월에는 조선노농대회 발기인으로 활약했다. 1924년 5월 [[조선노농총동맹]] 결성에 주도적 역할을 수행하여 중앙집행위원이 되었으며, 각지의 공장 노동자를 조직하기 위해 활동했다. 1926년 조선공산당에 입당하여 노동운동 단체와 농민운동 단체를 분리하는 정책을 실행시키기 위해 힘썼다.<ref name="역대"/>
- 최남선 . . . . 1회 일치
가출옥 후 1922년 '동명사'(東明社)를 창립했다. 같은 해 9월 주간지 '동명'을 창간해 [[1923년]] 6월까지 발행했다. [[1925년]] 조선의 문화와 역사를 연구하는 '계명구락부'활동에 참여했고, 동시에 《[[동아일보]]》에 사설을 쓰는 한편, 1926년 옛 백제 영토 방문기 '심춘순례'를 근대 최초의 창작 시조집 '백팔번뇌'를 출간했다. 이어 〈[[단군론]]〉(1926년), 〈[[불함문화론]]〉(1928년)을 발표하였는데, 특히 〈불함문화론〉에서 그는 동방 문화의 근원지를 단군 신화의 무대인 백두산이라고 주장하였다.
- 특이한 세금 . . . . 1회 일치
* 중국인 인두세 : 1885년 캐나다에서 만들어졌다. 캐나다에 들어오는 중국인 이민자들에게 매겨진 세금이다. 1923년 까지 유지되었다. 그리고 이 때 캐나다에서는 대신 '''중국인 입국 금지법'''(…)이 생겨났다.--더 심해졌어.--
- 함인섭 . . . . 1회 일치
천안 출신인 그는 경성으로 올라와 [[1923년]] [[경성]] [[중앙고등학교|중동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는데, 중동고보 재학 중인 1924년 3월 26일 유기환(柳基桓)의 딸 유순희(柳順嬉)와 결혼하였으며, 슬하에 6남매를 두고 [[1949년]] 사별하였다. [[1927년]] [[경성]] [[중앙고등학교|중동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27년]] [[일본]]으로 유학, [[동경농업학교]]에 입학하였다. [[1930년]] [[3월]] [[동경농업대학]] 예과를 수료하고 동경농대 본과 농학부에 입학, [[1933년]] [[3월 24일]] [[동경농업대학]] 농학부를 졸업하였다.
- 현제명 . . . . 1회 일치
대구 대남국민학교와 [[계성고등학교|계성학교]]를 다녔고, 대구에 있는 제일교회에 들어가 교회 성가대에 입대하여 음악단원이 되었다. 이후 숭실전문학교에 입학하여 음악 교육을 받았고 1923년에 졸업한 후 [[전라북도]] [[전주시|전주]]에서 신흥학교의 음악 교사로 활동했다.
- 황종률 (정치인) . . . . 1회 일치
|전임자 = [[박경원 (1923년)|박경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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