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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재학 (1856년) . . . . 4회 일치
[[정재학]]의 손자이자 해방 후 처음으로 한국인으로서 2대 조흥은행장에 오른 [[정운용]]은 1921년 결혼, 여아를 뒀지만 1930년 아내가 사망했다. 이듬해인 1931년 그는 대구 남산동 거주 김분조와 재혼했다. 그런데 김분조의 부친 [[김진만]]은 1915년 대구를 떠들썩하게 했던 ‘[[대한광복단]] [[대구권총사건]]'의 핵심인물이었다.<ref>경향신문 1963년 3월 1일 3면 대한광복단 사건</ref><ref>경향신문 1966년 10월 8일 정인택 수기 겨자씨한알 =2</ref><ref>독립기념관 1910년대 국내독립운동의 전개 4. 대한광복회 https://search.i815.or.kr/Degae/DegaeView.jsp?nid=456</ref>
[[1911년]]에 [[경상농공은행]] 감사역을 맡은 것을 시작으로 지역 금융계와 산업계에서 활발히 활동했다. [[1912년]] 선남은행 취체역, [[1913년]] 대구지주조합 설립위원과 대구전업주식회사 감사역 겸 취체역, [[1915년]] [[조선식산은행]] 상담역, [[1919년]] 계림농림주식회사 상담역, [[1921년]] [[대구은행]] 은행장과 대흥전기 감사, [[1929년]] 경상합동은행 이사 및 은행장과 조선미곡 대표이사, [[1929년]] 수성수리조합 조합장 등 경력이 화려하다.
* [[1915년]] 조선식산은행 상담역
*구포은행은 1915년 경남은행으로 행명 변경
- 이갑성 . . . . 3회 일치
[[1910년]] [[경신학교]]를 졸업하고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에 진학, 약학을 전공했다. [[1913년]] 세브란스의전 약학과를 마치고 다시 배우다가 [[1915년]] [[세브란스의학전문]]을 졸업하였다. [[세브란스 연합의학교]] 부속병원에서 사무원으로 근무하였다.
[[1915년]] 세브란스의전 부속병원 사무원이 되고, 그뒤 의전 부속병원 제약부 주임이 되었다. [[미국 대통령]] [[우드로우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감격, 이를 계기로 독립만세운동의 계획이 진행되자, [[1918년]] 말부터 [[박희도 (1889년)|박희도]](朴熙道) 등 [[기독교]]계 인사들과 함께 독립운동을 계획한다.
* 경성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학사(1915년)
- 김석형 (역사학자) . . . . 2회 일치
'''김석형'''(金錫亨 [[1915년]] ~ [[1996년]] [[11월 26일]])은 [[일제강점기]] 대구에서 태어나 [[1946년]] 월북한 [[김일성종합대학]] 교수이다. [[1963년]] 일본의 [[임나일본부]]설에 맞서 [[삼한]]의 주민들이 일본에 이주하여 분국을 세웠다는 학설을 주장한 역사학자이다.
[[분류:1915년 태어남]][[분류:1996년 죽음]][[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분류: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역사가]][[분류: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대학 교수]][[분류: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사람]]
- 배영호 . . . . 2회 일치
'''배영호'''(裵泳鎬, 1915년 ~ 1983년)는 대한민국 제21대 법무부 장관을 지낸 [[법조인]]이다. 본관은 [[성주 배씨|성주]]이며, [[대구광역시|대구]] 출신이다.
[[분류:1915년 태어남]][[분류:1983년 죽음]][[분류:경북고등학교 동문]][[분류:교토 대학 동문]][[분류:성주 배씨]][[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분류:대한민국의 고등검찰청 검사장]][[분류:법원행정처장]][[분류:대한민국의 국회사무총장]][[분류:대한민국의 법무부 장관]]
- 신현준(군인) . . . . 2회 일치
[[1915년]] [[10월 23일]] ~ [[2007년]] [[10월 15일]]
[[분류:일본군/조선인]][[분류:제2차 세계 대전/군인]][[분류:친일반민족행위자]][[분류:한국전쟁/군인]][[분류:대한민국의 군인]][[분류:김천시 출신 인물]][[분류:1915년 출생]][[분류:2007년 사망]]
- 장헌식 . . . . 2회 일치
[[1910년]] [[10월 2일]] 한일 병합 조약 체결 후에는 [[조선총독부]]에서 그를 [[평안남도]] 초대 참여관 고등관 3등(平安南道 參與官 高等官三等)에 임명하였고, 1910년 12월 27일 종5위(從五位)로 승급한 뒤 1912년 8월 1일 일한병합기념장, 1915년 11월 10일 대례기념장(大禮記念章)을 수여받았다. 1916년 3월 31일 정5위(正五位)로 승급하였다. 이후 훈3등(勳三等), [[1917년]] [[6월 12일]]에 [[충청북도]] 장관(도지사) 고등관 2등(忠淸北道 長官 高等官二等)으로 승진한 뒤 도장관이 도지사로 관직 명칭이 바뀌자 그대로 [[충청북도지사]]로 유임되었다. [[1920년]] [[7월 31일]] 훈2등(勳二等)에 올라 서보장(瑞寳章)을 하사받고 [[1920년]] [[9월 27일]] 고등관 1등(高等官一等)에 올랐다. [[1920년]] [[6월 24일]] 청주청년회 발족에 참여하였다.
* 아버지 : 장성급(張成汲, ? ~ [[1915년]] [[4월]])
- 최석민 . . . . 2회 일치
'''최석민'''(崔錫敏, [[1858년]] [[8월 6일]] ~ [[1915년]] 양력 [[12월 20일]])은 [[조선]] 말기의 관료이며 [[일제 강점기]]에 [[조선귀족]] 작위를 받았다.
[[분류:1858년 태어남]][[분류:1915년 죽음]][[분류:조선의 문신]][[분류:대한제국의 관료]][[분류:조선남작]][[분류:친일파 708인 명단 수록자]][[분류:친일인명사전 수록자]][[분류:대한민국 정부 발표 친일반민족행위자]][[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분류:경주 최씨]]
- 현진건 . . . . 2회 일치
국권 피탈 뒤인 [[1915년]], 16세의 나이로 당시 경주 향리의 부호인 [[진사]] 이길우(李吉宇)의 딸 순득(順得)과 혼인하여 [[대구부]] 수정(竪町) 255번지(지금의 대구광역시 중구 인교동)에 있던 처가에서 신혼생활을 하였다. 그 해 [[11월]]에 [[보성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가 2학년 재학 중인 이듬해 [[7월]]에 자퇴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세이소쿠 영어학교]](正則英語學敎)에 입학하였다.
처음 「희생화」를 발표하던 때부터 현진건은 이미 '빙허'라는 아호를 스스로 지어 쓰고 있었는데, 대체로 그가 혼인을 올리던 1915년에서 학교를 자퇴하고 일본으로 건너간 1916년 사이부터 쓰기 시작한 것으로 자신은 회고하고 있다. 다소 허무주의적 표현이 없지 않지만 '허공(虛空)에 의지한다'는 이 말이 자신의 심경을 가장 적절하게 표현한 말이었고, 고대 중국 [[북송|송]](宋)의 문인 [[소식 (북송)|소식]](蘇軾)의 《적벽부(赤壁賦)》의 구절 가운데 "넓기도 하구나, 허공에 의지하여 바람을 타고서(浩浩乎! 憑虛御風而)..."란 구절에서 느낀 바가 있어 그대로 '빙허'를 자신의 아호로 정하게 되었다고 한다.<ref>「雅號의 由來(2)」 1930년 5월 1일자 『삼천리』제6호.</ref> [[1920년]] 11월에 현진건은 [[조선일보]]사에 입사하였다.
- I Didn't Raise My Boy to Be a Soldier . . . . 1회 일치
미국의 반전(反戰)가. 작사 알프레드 브라이언. 작곡 알 피안타도시. [[제1차 세계대전]]이 진행되고 있지만 미국이 참전하지는 않았던 1915년에 만들어졌다.
- 랄프 알거 배그놀드 . . . . 1회 일치
1915년 가족 전통에 따라 영국 육군 왕립 공병대에 들어갔다. 당시에는 [[제1차 세계 대전]]이 벌어지고 있었기에 전쟁이 끝날 때 까지 [[프랑스]]와 [[벨기에]]에서 복무하였다. 전쟁이 끝난 후에는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공학을 공부하였다.
- 뱌체슬라브 몰로토프 . . . . 1회 일치
1906년 부터 [[볼셰비키]] 당의 당원이자 조직원으로 활동했다. 1909년과 1915년 체포되었다. 지방 당조직에서 활동하다가, 1921년 정치국 후보위원 및 중앙위원회 서기가 되었다.
- 스틸오션/독일 . . . . 1회 일치
>필라우는 러시아 제국의 주문으로 단치히에서 건조중인 경순양함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 이후, 이 순양함을 독일에 의해 몰수되어 독일 해군에 의해 사용되었다. 전시에 필라우는 제2 정찰대에 배속되어 북해와 발트해에서 활동했다. 1915년 리가 만 해전에 참가해 러시아 해군을 상대로 전투를 치뤘다. 1916년 5월, 필라우는 유틀란트 해전에 참가해 대구경탄에 맞아 큰 손상을 입었다. 전투가 끝난 후에는 심각한 피해를 입은 전투순양함 자이들리츠(Seydlitz)가 항구까지 도달하는걸 도왔다. 1917년 헬리골란트 바이트 해전에도 참가했다. 종전후 전쟁보상함으로 이탈리아에 양도, 바리(Bari)로 개명되었다. 바리는 제2차 세계대전 초반에 미군의 공습으로 격침되었다.
- 스틸오션/영국 . . . . 1회 일치
>넵튠의 성능에 실망한 왕립해군은 오리온급 전함의 주포탑 전부를 중심선에 배치했다. 독일 전함을 상대하기 위해 더 큰 343mm 주포를 장비하였다. 훗날 이 특징은 슈퍼 드레드노트급 전함의 특성이 되었다. 오리온급 전함 네척 모두 1915년에 현대화 개수를 받았다. 유틀란트 해전 당시 제2전함전대에 배치되었다. 퇴역 후, 모나크(Monarch)는 표적함이 되어 리벤지(Revenge)에게 격침되었다. 썬더러(Thunderer)는 원양항해 훈련함으로 사용되다 1926년 매각, 해체되었다.
- 이상백 (1904년) . . . . 1회 일치
그는 [[1915년]] [[경북고등학교|대구고등보통학교]]를 졸업했으며, [[1919년]] [[3·1 만세 운동]]의 여파로 대구에서 벌어진 만세 운동에 참여하려다가 실패하고 잠시 은신하였다. 그 뒤 [[부산항]]에서 배편으로 [[일본]]으로 유학, 일본 와세다제일고등학원(早稻田第一高等學院)을 거쳐, [[1923년]] 와세다대학 문학부 사회철학과에 입학했다.
- 전예용 . . . . 1회 일치
** 동생 : 전지용(全智鎔, [[1915년]] ~ ?)
- 정운용 . . . . 1회 일치
[[정재학]]의 손자이자 해방 후 처음으로 한국인으로서 2대 조흥은행장에 오른 정운용은 첫 아내와 사별한 뒤 김분조와 재혼했다. 김분조의 부친 [[김진만]]은 1915년 대구를 떠들썩하게 했던 ‘[[대한광복단]] [[대구권총사건]]'의 핵심인물이었다.<ref>경향신문 1963년 3월 1일 3면 대한광복단 사건</ref><ref>대구사회비평 2003년 7~8월 통권 10호 문예미학사 http://hrznnzrh.blog.me/60033398980 근대 100년 대구 거부실록 정재학가</ref><ref>경향신문 1966년 10월 8일 7면</ref><ref>독립기념관 1910년대 국내독립운동의 전개 4. 대한광복회 https://search.i815.or.kr/Degae/DegaeView.jsp?nid=456</ref> 김진만은 대한광복회 단원으로 대구의 부호들을 대상으로 독립운동 자금을 확보하기 위한 활동을 펼치는 가운데 대구 지역 부호였던 장인 [[서우순]]의 집을 찾아가 설득했다. 그러나 실패한 뒤 도피하다 반항하는 하인 우도길에 총상을 입혔다. 결국 일본 경찰에 체포돼 13년간의 옥고를 치렀다.<ref>민족문화대박과사전 독립운동가 김진만 http://encykorea.aks.ac.kr/Contents/Contents?contents_id=E0010638</ref><ref>독립기념관 29 김진만 독립운동가 서한집 http://www.i815.or.kr/media_data/data_chong/32.pdf</ref>
- 최우석 (화가) . . . . 1회 일치
1915년 [[조선서화미술회]] 강습소에 입학하면서 [[안중식]]과 [[조석진]]의 문하생이 되었고 1921년부터 1926년까지 [[서화협회]] 전람회 정회원을 역임했다. 1925년부터 1934년까지 [[조선미술전람회]]에서 근대적인 채색화 수법을 응용한 풍경화와 한국의 역사 인물을 주제로 한 초상화 연작을 출품하여 입선과 특선을 연달아 수상했지만 그가 작품 활동 초기에 그린 풍경화와 인물화는 일본 화풍의 채색화라는 비판을 받게 되었고 점차 한국의 전통적인 수묵 담채화의 관념적 작품으로 회귀하게 된다. 주로 산수화와 신선도 등을 그렸다고 전해진다.
- 한규복 (1881년) . . . . 1회 일치
[[1910년]] [[10월 6일]] [[한일 합병 조약]] 체결 이후 다시 조선총독부 [[고등관]] 7등에 임용, [[조선총독부]] 임시토지조사국(1臨時土地調査局) 감사관(監査官)에 임명되었다. 이후 임시토지조사국 측량과장과 정리과장을 거쳐 [[조선총독부]] 토지조사국에서 감사담당관이 되었다. [[1913년]] [[1월]] 총독부 군수가 되어 [[경상남도]] [[진주군|진주]][[군수]] [[고등관]]6등(晉州郡守 高等官6等)이 되고, [[경상남도]][[참여관]]을 겸직하였다. [[1914년]]부터 [[1915년]]까지 [[경상남도지방토지조사위원회]] 조사위원을 역임했다. 그밖에 [[농업]] 단체인 [[조선농회]] 경상남도지회에 상의원으로 가입하였다. [[1916년]]과 [[1917년]] [[경상남도지방토지조사위원회]] 조사위원에 재위촉되었다.
- 한석명 . . . . 1회 일치
지방 행정에서 세운 공로를 인정받아 [[1931년]]에 훈6등 서보장을 수여받는 등 1935년을 기준으로 종6위 훈6등에 서위되어 있었다. 경찰로 근무하던 [[1915년]]과 1928년에 각각 다이쇼대례기념장과 쇼와대례기념장도 받은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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