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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규복 (1881년) . . . . 3회 일치
[[1899년]](광무 2년) 관비장학생으로 [[일본]] 유학, [[동경전문학교]]와 [[와세다 대학]] 정경학부에서 수학하다가 [[1903년]] 귀국, 대한제국 관료로 임용되어 [[탁지부]] [[주사]], [[군부]]와 [[탁지부]]의 [[번역관]] 등을 거쳐 탁지부 [[서기관]], [[주임관]]을 역임했다. [[1910년]](융희 4년) [[10월 1일]] [[한일 합방]] 이후에는 [[조선총독부]] [[고등관]]에 임용되어 [[토지조사국]] 감사담당관, [[1913년]] [[진주군|진주]][[군수]], 이후 [[동래군|동래]][[군수]] 등을 역임하였다. [[1921년]] [[충청남도청]] [[참여관]], [[1924년]] [[경상북도청]] [[참여관]], [[1926년]] [[충청북도]][[도지사]], [[황해도]][[도지사]] 등을 역임했다. [[1933년]] [[조선총독부 중추원|중추원]] 참의에 임명되고 이듬해 재선된 뒤 [[중추원]] [[참의]]에 재선되었다.
그는 어려서 한성에서 신학문인 [[일본어]]와 [[중국어|한어]](漢語), [[영어]]를 공부하다가 [[1893년]] [[3월]] [[을미의숙]](乙未義塾) [[일본어]]학과에 입학, [[1897년]] [[3월]] 을미의숙 일어학과를 마치고 [[관립영어학교]]로 진학하였다. 그는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그해 [[11월 6일]] 정3품으로 [[중추원 (대한제국)|중추원]] 2등 의관에 선출되었으나 중추원은 곧 해체되었다. [[1899년]](광무 2년) [[3월]] [[관립영어학교]]를 졸업하였다.
[[1899년]](광무 2년) 초, 그해의 정부 관비유학생으로 뽑혀 [[4월]] [[일본]] [[도쿄]]로 유학, 그해 [[9월]] [[도쿄]] 신전중학교(神田中學校)에 편입학하였다. [[1900년]] [[3월]] [[신전중학교]]를 졸업하고 [[도쿄 전문학교]]에 입학했다. 동경 전문학교를 거쳐 [[1901년]] [[9월 11일]] [[와세다 대학]](早稻田大學) 정치경제학과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1903년]](광무 6년) [[7월 15일]] 3학년 재학 중 [[와세다 대학]] 정치경제과를 수료하고 [[7월]] 정부의 명으로 귀국하여, [[대한제국]]의 관리로 근무를 시작했다.
- 최우석 (화가) . . . . 2회 일치
'''최우석'''(崔禹錫, [[1899년]] ~ [[1965년]])은 한국의 화가로, 호는 정재(鼎齋)이며 서울 출신이다.
[[분류:일제 강점기의 화가]][[분류:대한민국의 화가]][[분류:1899년 태어남]][[분류:1965년 죽음]][[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
- 현동완 . . . . 2회 일치
'''현동완'''(玄東完.[[1899년]] [[6월 12일]] ~ [[1963년]] [[10월 25일]] )은 대한민국의 사회 운동가이다. 아호는 창주(滄柱).
[[분류:1899년 태어남]][[분류:1963년 죽음]][[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
- 흥친왕 . . . . 2회 일치
[[1874년]] [[11월]] 이후 [[흥선대원군]]은 그의 아들 [[이준용 (1870년)|이준용]]을 [[조선 고종|고종]]과 [[민비]]를 몰아내고 추대하려 했고, 4회의 쿠데타를 기도했다가 실패했다. 이후 그는 고종의 냉대를 받았고 [[1899년]](광무 2) [[조선 장조|사도세자]]가 장종으로 추존된 뒤에도, 당시 황제의 친형이었음에도 4대 승습에 따른 작위를 받지 못했다. [[1907년]](융희 1) 완흥군에 책봉되었고, [[1910년]](융희 4) [[8월]] 흥친왕으로 진봉되었다. [[일제 강점기]]에는 [[공작]]으로 강등되어 이희 공이 되었다. 본관은 [[전주 이씨|전주]](全州)이고, 처음 이름은 재록(載錄), 자는 무경(武卿), 호는 우석(又石)이고 나중에 개명하여 이희(李熹)로도 알려져 있다. 첫 작위가 완흥군이었으므로 '''완흥군 이재면'''으로도 부른다.
[[1899년]](광무 3년) [[9월 1일]] [[사도세자]]가 장종대왕으로 추존되면서 [[9월 1일]]부터 [[9월 29일]] 사이에 사도세자의 4대손에 해당되는 자손들은 현주에서 옹주로 격상되거나 생전 품계보다 높은 품계를 받았다. 동시에 군의 작위를 받지 못한 고종의 동항렬 인사들은 군의 작위를 받았지만 그는 제외되었다.
- 규동 . . . . 1회 일치
메이지 시대에 처음으로 나타났으며, 당시는 규메시(牛めし)라고 불렸다. ‘규동’이라는 명칭은 [[요시노야]](吉野家)가 1899년 창업되면서 붙여졌다. 다른 가게에서는 규메시라고 부르기도 한다.
- 김륵 . . . . 1회 일치
[[1584년]](선조 17) [[사헌부]]지평을 거쳐 그해 [[8월 2일]] [[영월군|영월]] [[군수]](寧越郡守)로 부임하였다. 영월군수로 재직 중 치적을 쌓아 [[선정비]]가 세워졌다.<ref>영월군읍지 (1899년)</ref>
- 김용준 (1904년) . . . . 1회 일치
[[경상북도|경북]] [[구미시|선산]]에서 태어나 [[경성부]]의 [[중앙고등보통학교]]를 졸업했다. 화가 [[이종우 (1899년)|이종우]]에게 수학한 뒤 [[1924년]] [[조선미술전람회]]에서 〈건설이냐? 파괴냐?〉로 입선하면서 화단에 데뷔했다. [[1926년]] [[일본]]에 유학하여 [[도쿄 미술학교]]에 입학해 서양화를 공부했다. 이때 같은 도쿄 유학생이던 동갑의 [[이태준]]을 만나 평생 동안 교유했다.
- 장도 (1876년) . . . . 1회 일치
[[1899년]] 도쿄법학원을 졸업하고, 일본의 법원을 순회하면서 견습까지 마친 뒤 귀국했다. [[1900년]]부터 사립 광흥학교 교사로 법학과 일본어 등을 가르쳤고, 이후 [[한성법학교]] 강사와 [[보성전문학교]] 강사로 일하면서 [[형법]] 전문가로 활동했다.
- 장발 (화가) . . . . 1회 일치
** 형 : [[장면]](張勉, [[1899년]] [[8월 28일]]~ [[1966년]] [[6월 4일]], [[부통령]], [[국무총리]] 역임)
- 장익 (1933년) . . . . 1회 일치
* 부친 : [[장면]] (張勉, [[1899년]] [[8월 28일]] ~ [[1966년]] [[6월 4일]], 초대 주미대사, 제헌 [[국회의원]], 제4대 [[부통령]], 제2대, 제7대 [[국무총리]])
- 장후영 . . . . 1회 일치
|후임자=[[정구영 (1899년)|정구영]]
- 헌경왕후 . . . . 1회 일치
[[1854년]](철종 5년) 유정(裕靖)의 존호가 추가되었다. [[1899년]](광무 3년) [[8월 3일]]에 경연특진관 서상조(徐相祖)의 상소로 장헌세자를 왕으로 추존할 것을 청하여 [[조선 고종|고종]]이 승인하여 장헌세자가 장종대왕으로 [[추존]]되자, 함께 헌경왕후로 [[추존]]되었고, 대한제국 성립 이후인 [[1903년]](광무 7년) 장조가 '장조의황제(莊祖懿皇帝)'로 격상되자 그녀 역시 '헌경의황후(獻敬懿皇后)'로 격상되었다.
- 현진건 . . . . 1회 일치
이들 형제는 현진건이 5촌 당숙 '''현보운'''([[1875년]]~[[1919년]])의 양자로 [[입양]]되어 들어간 뒤 법적으로는 친형제에서 6촌 형제로 바뀌었다. 관립 일어학교 출신의 보운은 고종 33년인 [[건양]](建陽) 원년([[1896년]]) 8월 3일에 외국어학교의 교관(敎官)이 되었고, 광무 3년([[1899년]])에는 궁내부 번역관, 광무 4년([[1900년]]) 12월 24일에는 예식원 참리관으로 임명되어 봉직하다가 [[러일전쟁]]이 일어난 광무 7년(1903년) 11월 11일에 주일공사관 이등참서관이 되었고, 광무 8년(1904년) 일본 보병대 수원(隨員)으로 일본으로부터 즈이호오 4등 훈장을 받기도 했다. 광무 9년(1905년)에는 [[병조|군부]] 군무국 포병과로 옮겨 정위가 되었다.
- 홍순언 (1530년) . . . . 1회 일치
그의 가계는 남양 홍씨 첨사(詹事) 홍호(洪灝)의 동생인 예사 홍복(洪澓, 일명 홍복(洪復))의 12대손이다. [[가선대부]]에 추증된 [[홍겸]](洪謙)의 서자였다. 출신지는 한성부라는 설과 [[경기도]] [[광주군]]이라는 설이 있다. 1899년에 편찬된 [[경기도]] [[광주군]]의 향토지인 광주군지 인물편에 그에 대한 소개가 간략하게 실려 있다. 할아버지 홍경창(洪慶昌)은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 안동부사(安東府使)등을 역임했고, 큰아버지 홍신(洪愼)은 [[평양부]]서윤(平壤府庶尹), 양주목사(楊州牧使), 형조참의(刑曹參議), 공조참의(工曹參議) 등을 역임하고 [[1539년]](중종 34년)에는 [[명나라]]에 진하사(進賀使)로 다녀오기도 했다. 아버지 홍겸은 [[1531년]] 역과에 급제하여 [[명나라]]에 두 번 역관으로 다녀오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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