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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범부
         '''김범부'''(金凡父, [[1897년]] [[1월 6일]] ~ [[1966년]] [[3월 23일]])는 [[대한민국]]의 [[동양 철학|동양철학자]]이며 [[한문|한학자]]이다.
         [[분류:1897년 태어남]][[분류:1966년 죽음]][[분류:대한민국의 철학자]][[분류:부산광역시 출신 인물]][[분류:선산 김씨]][[분류:도요 대학 동문]][[분류:도쿄 대학 동문]][[분류:교토 대학 동문]][[분류:대한민국의 감리교도]][[분류:대한민국의 기업인]][[분류:동국대학교 교수]][[분류:한국독립당의 당원]][[분류:대한민국 육군 중령]][[분류:대한민국의 저술가]][[분류:대한민국의 학자]][[분류:대한민국의 한문학자]]
  • 김윤정 (1869년)
         구한말에 관료생활을 하던 중 대한제국의 [[학부 (대한제국)|학부]]가 선발한 유학생으로 뽑혀 [[1897년]]부터 [[미국]]에 유학했다.
  • 김칠성 (1897년)
         '''김칠성'''(金七星, [[1897년]] [[6월 24일]] ~ [[1984년]] [[5월 21일]]<ref>《민족21》 (2004.5.1) [http://www.minjog21.com/news/read.php?idxno=1539 평양룡성구역 '재북인사들의 묘' 를 가다 - 62기 중 안재홍 이광수 김효석 조헌영...등 좌우 인사 39명 묘소 최초 공개] {{웨이백|url=http://www.minjog21.com/news/read.php?idxno=1539# |date=20071006151502 }}</ref><ref>{{웹 인용| |url=http://www.hani.co.kr/section-003000000/2000/003000000200012211624823.html |제목=납북 제헌ㆍ2대 국회의원 현황 |확인날짜=2007-10-03 |저자=연합뉴스 |날짜=2000-12-21 }}</ref>
         [[분류:1897년 태어남]][[분류:1984년 죽음]][[분류:부산광역시 출신 인물]][[분류:니혼 대학 동문]]
  • 남궁억
         그해 별군직으로 임명되었으나 한직이었다. [[1896년]] [[7월 2일]] [[서재필]], [[윤치호]], [[이상재]](李商在) 등과 [[독립협회]]의 창립총회에 참여했으며, 이때 남궁억은 독립협회의 중앙위원 겸 수석 총무로서 또 서기가 되었다가 [[독립협회]] 평의원, 사법 위원을 겸하였다. [[1897년]] 관직을 사퇴하였다. 한편 [[독립협회]] 기관지인 《대조선독립협회회보 (大朝鮮獨立協會會報)》의 발행에도 참가하였다.
  • 대한제국 순종
         순종 이척은 2세 때였던 [[1875년]] [[3월 8일]]을 기하여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1895년]] [[10월 8일]], 모후 [[명성황후]]가 [[건청궁]]에서 시해되는 소식을 접하였다. 이때 그는 부왕 [[대한제국 고종|고종]]과 함께 일본 낭인과 한국인 협력자들에 의해 [[건청궁 (경복궁)]] 장안당에 갇혀 있었다. 이 와중에 그는 자신의 왕세자 작위를 이복 서제 [[의친왕|의화군 이강]]에게 선양하겠다며 왕세자 작위를 사양(을미년 왕세자 작위 선양 파동 사건)하려 하였지만 부왕 [[대한제국 고종|고종]]의 만류로써 왕세자 작위를 유지하는 것을 일단락성 사건으로 겪으며 같은 해(1895년) [[홍범 14조]] 반포와 동시에 [[왕태자]]로 올랐고, [[1897년]] [[10월 12일]]을 기하여 [[대한제국]]이 수립되면서 [[황태자]]로 격상되었다.
         *** 서제 : [[의민태자|영친왕]](英親王, 1897년~1970년) - [[순헌황귀비]] 소생
  • 민영환
         귀국후에 그는 [[의정부시|의정부]]찬정(贊政), [[군부 (대한제국)|군부]] 대신을 지낸 다음, [[1897년]](광무 1년) 또다시 영국·독일·프랑스·러시아·이탈리아·오스트리아-헝가리 6개국에 대한 특명전권공사로 발령을 받고 외유하였다. 잦은 해외여행으로 서양 문물에 일찍 눈을 뜨게된 민영환은 개화 사상을 실천하고자 유럽 열강 세력의 제도를 모방하여 정치제도를 개혁하고, 민권 신장(民權伸張)을 꾀할 것을 고종에 상소를 올린다. 다만 이는 전제왕권을 추구하던 고종의 성향과 반대되는 것이었고 그의 상소는 군사제도 개편만이 채택되어, 고종은 원수부(元帥府)를 설치, 육군을 통할하게 하였다.
         [[1897년]] 유럽 6개국 특명전권대사, [[탁지부]] 대신, 장례원경, 표훈원 총재등 역임하면서 주요 관료로 겸임한다. 또한 대한제국 반포하기 이전의 여러 공적을 인정받아, 대한제국 선포 후 태극장(太極章)을 수여받았다.
  • 민영환 (1861년)
         귀국후에 그는 [[의정부]]찬정(贊政), [[군부 (대한제국)|군부]] 대신을 지낸 다음, [[1897년]](광무 1년) 또다시 영국·독일·프랑스·러시아·이탈리아·오스트리아-헝가리 6개국에 대한 특명전권공사로 발령을 받고 외유하였다. 잦은 해외여행으로 서양 문물에 일찍 눈을 뜨게된 민영환은 개화 사상을 실천하고자 유럽 열강 세력의 제도를 모방하여 정치제도를 개혁하고, 민권 신장(民權伸張)을 꾀할 것을 고종에 상소를 올린다. 다만 이는 전제왕권을 추구하던 고종의 성향과 반대되는 것이었고 그의 상소는 군사제도 개편만이 채택되어, 고종은 원수부(元帥府)를 설치, 육군을 통할하게 하였다.
         [[1897년]] 유럽 6개국 특명전권대사, [[탁지부]] 대신, 장례원경, 표훈원 총재등 역임하면서 주요 관료로 겸임한다. 또한 대한제국 반포하기 이전의 여러 공적을 인정받아, 대한제국 선포 후 태극장(太極章)을 수여받았다.
  • 민철훈
         [[1897년]] [[충청남도]] [[천안시|천안]]에 사립학교를 설립하고 근대식 교육을 실시한 바 있다. 이 학교는 의 전신이다.<ref>
  • 박관수 (1897년)
         |출생일= [[1897년]]
         '''박관수'''(朴寬洙, <small>일본식 이름: </small>琴川寬, [[1897년]] ~ [[1980년]])는 [[일제 강점기]]의 교육자이자 [[대한민국]]의 교육자, 사회사업가, 보수주의 운동가이다. 박정희의 고등학교 시절 스승으로 잘 알려져 있으며 [[1960년]]대와 [[1970년]]대의 반공 우익 시민단체에서 활동하였다. [[한국반공연맹]] 제1대 이사장과 [[대한노인회]] 제3~4대 회장, [[공산권문제연구소]] 제2대 이사장 등을 지냈다. 본관은 [[밀양 박씨|밀양]](密陽)으로 호는 금계(琴溪). [[울산광역시|울산시]] 출신.
         [[분류:1897년 태어남]][[분류:1980년 죽음]][[분류: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분류:일제 강점기의 교육인]][[분류:대한민국의 철학자]][[분류:대한민국의 중등학교 강사]][[분류:대한민국의 사회 운동가]][[분류:민주당 (대한민국, 1955년) 당원]][[분류:민주공화당 (대한민국)]][[분류:대한민국의 대학 강사]][[분류:대한민국의 대학 교수]][[분류:친일인명사전 수록자]][[분류:대한민국 정부 발표 친일반민족행위자]][[분류:울산광역시 출신 인물]][[분류:국방대학교 동문]][[분류:도쿄 대학 동문]][[분류:경기고등학교 동문]][[분류:경기중학교 동문]][[분류:울산초등학교 동문]][[분류:대한민국의 반공주의자]][[분류:밀양 박씨]]
  • 박서양 (1885년)
         박서양은 3남 3녀를 두었다. 그의 누이 [[박양빈]](또는 박양무)은 단재 [[신채호]]의 일족이자 예관 [[신규식]]의 조카인 의사 [[신필호]]와 결혼하였다.<ref>[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196901 "실패한 인간...아무도 내 제사 지내지 말라" : 독립기지 건설자-임시정부 '창업자'의 최후]</ref> [[신필호]] 역시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출신으로 그의 [[제중원의학교]]([[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로 개명되었다.)의 후배였다. 박서양은 [[1897년]]경 경주 이씨인 [[이성옥]]의 딸과 결혼하여 3남 3녀를 두었다.
  • 박정양
         **** 차남 : 박승철(朴勝喆, [[1897년]] ~ ?)
  • 백성욱
         '''백성욱'''(白性郁, [[1897년]] ~ [[1981년]] [[8월 16일]]<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1091600209211019&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81-09-16&officeId=00020&pageNo=11&printNo=18446&publishType=00020 前內務장관 白性郁박사] [[동아일보]], 1981년 9월 16일 작성</ref>)은 [[대한민국]]의 [[불교]] [[승려]] 겸 [[정치가]] 및 [[시 (문학)|시인]]이자 [[불교|불교학자]] 겸 [[교수|대학 교수]]이며 前 [[대한민국 내무부|내무부 장관]]이었고 [[법명]]은 '''일곤'''(壹壼)이다.
         백성욱 박사는 1897년 [[백윤기]]의 장남으로 서울에서 태어났다. 부모님 두분을 일찍 여의고 1910년 정릉 봉국사에서 최하옹 대선사를 은사로 출가해 경성중앙학림 졸업, 상해에서 독립운동에 동참했다. 파리 보배 고등학교, 남독일 벌쓰부르그 대학에서 공부를 마치고 1925년 <불교순전철학>으로 한국 최초의 독일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 1897년 서울에서 출생
         [[분류:1897년 태어남]][[분류:1981년 죽음]][[분류:일제 강점기의 시인]][[분류:일제 강점기의 불교학자]][[분류:일제 강점기의 승려]][[분류:대한민국의 승려]][[분류:대한민국의 시인]][[분류:대한민국의 불교학자]][[분류:대한민국의 대학 교수]][[분류:대한민국의 대학 총장]][[분류:대한민국의 내무부 장관]][[분류:이승만 정부의 국무위원]][[분류:윤치영]][[분류:나혜석]][[분류:이춘성]][[분류:동국대학교]][[분류:자유당]][[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백씨]][[분류:수원 백씨]]
  • 변영로
         '''변영로'''(卞榮魯, [[1898년]]<ref>일설에는 [[1897년]]생이라는 설도 있고 호적상의 출생년월일은 [[1898년]] [[6월 7일]]이다.</ref> [[6월 27일]]([[음력 5월 9일]]) ~ [[1961년]] [[3월 14일]])는 [[대한민국]]의 [[시 (문학)|시인]], [[영문학|영문학자]], [[대학 교수]], [[수필|수필가]], [[번역|번역문학가]]이다.
  • 송학선(독립운동가)
         '''송학선'''(宋學善, [[1897년]] [[2월 19일]] ~ [[1927년]] [[5월 19일]])은 [[일제 강점기]]에 [[금호문 사건]]을 일으키고 사형 당한 독립 운동가이다.
         [[분류:1897년 태어남]][[분류:1927년 죽음]][[분류:한국의 사형된 사람]][[분류: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
  • 순헌황귀비
         [[명성황후]]에 의해 대궐에서 쫓겨날 당시 엄귀비는 [[상궁]]직을 박탈당하고 서인이 되게 하였으나 당시 대신 [[윤용선]]이 고종에게 간곡하게 말하여 서인만은 면하게 되었다.<ref name="ipsisi"/> 후에 엄귀비는 윤용선의 은혜를 늘 잊지 않고 있다가 [[대한제국 순종|순종]]의 계비를 간택할 때 윤용선의 손녀를 추천하였다. [[1895년]] [[10월 8일]] [[을미사변]] 이후 다시 입궐하여 [[대한제국 고종|고종]]의 총애를 받았다. [[아관파천]] 때는 고종을 모시고 [[러시아]] 공사관에서 같이 생활하였으며, [[1897년]] 황자 은(垠, [[의민태자]])을 낳고 이틀 후 정식으로 귀인에 봉작되었다. 이후 순빈, 순비로 차례로 진봉되었고, 나중에는 황귀비로 봉해졌다.
         **** 아들 : [[의민태자]](懿愍太子, [[1897년]] [[10월 20일]] ~ [[1970년]] [[5월 1일]])
  • 신석린
         [[한성부]] 출신으로 어릴 때는 한문을 수학했다. [[1896년]]에 [[오사카 시]]에서 [[한국어]]를 가르치는 등 일찍부터 [[일본]]을 오가며 개화파로 활동했다. 일본 정치인 [[하야시 곤스케]]와는 친밀한 사이였다. 그뒤 [[1897년]] [[서재필]], [[양기탁]], [[윤치호]], [[안창호]] 등과 함께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 등에 참여하였다.
  • 여흥부대부인
         '''여흥부대부인 민씨'''(驪興府大夫人 閔氏, [[1818년]] [[2월 3일]] ~ [[1898년]] [[1월 8일]]/[[1897년]] [[음력 12월 16일]])는 조선의 왕족이며, 대한제국 고종황제의 어머니이다. [[민치구]]의 딸로, [[흥선대원군|헌의대원왕]]과 혼인하여 2남 2녀를 두었다. 며느리인 [[명성황후]]와는 12촌간이다.
         [[천주교]] 신자인 민씨는 일과문(日課文)을 읽었으며, [[1863년]] 둘째 아들 [[대한제국 고종|재황]]이 임금이 되자 [[운현궁]](雲峴宮)에서 감사 [[미사]]를 올렸다 전해진다. [[1887년]] [[한불조약]]으로 [[천주교]] 신앙이 허용되자, [[1896년]] [[10월]] 불란서의 [[천주교]] 선교회인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인 [[뮈텔]] [[주교]]의 집전으로 [[세례]]를 받았다. [[대한제국 고종|고종]]의 유모이며 자신과 같은 천주교 신자인 박(朴)마르타와 함께 프랑스의 천주교 주교인 [[베르뇌]]를 통해 [[프랑스]] 정부의 도움으로 남진(南進)하려는 [[러시아]] 세력을 꺾으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1898년]] [[1월 8일]]([[1897년]] [[음력 12월 16일]]) 사망하였다.
  • 염상섭
          | 출생일 = [[1897년]] [[8월 30일]]
         '''염상섭'''(廉想涉, [[1897년]] [[8월 30일]] ~ [[1963년]] [[3월 14일]])은 [[대한민국]]의 [[소설가]]이며 [[예비역]] [[대한민국 해군]] [[소령]]이다.
         [[1897년]] [[8월 30일]] 서울에서 태어났다. 대한제국 중추원 참의 염인식(廉仁湜)의 손자이며, 가평 군수 염규환(廉圭桓)의 8남매 중 셋째 아들이다. 어머니는 경주(慶州) 김씨, 부인은 의성(義城) 김씨 문중 출신이던 김영옥(金英玉)이다.<ref> [http://encykorea.aks.ac.kr/Contents/SearchNavi?keyword=%EC%97%BC%EC%83%81%EC%84%AD&ridx=0&tot=18]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ref> 한국 근대 문학의 선구자인 그는 [[일본]] [[게이오기주쿠 대학]] 유학 시절 [[3·1운동]]에 가담한 혐의로 투옥됐다. 귀국한 후 [[1920년]] 《[[폐허]]》동인에 가담해 문학의 길로 들어섰다. [[1921년]] 발표한 단편소설 <표본실의 청개구리> 는 한국의 첫 [[자연주의 (문학)|자연주의]] 소설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김동인]], [[현진건]]과 함께 자연주의와 사실주의 문학을 이 땅에 뿌리내린 작가로서 큰 공적을 남겼다. [[1936년]]에 매일신보의 정치부장, 만선일보의 편집국장을 지냈으며, [[1946년]]에는 경향신문의 창간 편집국장을 지내는 등 신문기자로도 많이 활동하였다. [[1950년]] [[한국전쟁]] 발발 당시 해군 소령으로 임관되어 해군본부 정훈감실에서 편집과장으로 근무했으며, [[1954년]] 서라벌 예술대학 학장으로 취임했다.
         * 1897년 8월 30일, 한성의 [[종로구]]에서 태어났다.
         [[분류:염상섭| ]][[분류:1897년 태어남]][[분류:1963년 죽음]][[분류:대한민국의 참전유공자]][[분류:일제 강점기의 소설가]][[분류:일제 강점기의 시인]][[분류:일제 강점기의 언론인]][[분류:대한민국의 문학 평론가]][[분류:대한민국의 교육 평론가]][[분류:대한민국의 군사 평론가]][[분류:대한민국의 시사 평론가]]
  • 오세창
         [[1896년]](건양 1년) [[일본 문부성]]의 외국어학교 교사 초빙 당시 초빙되어, [[도쿄외국어학교]] [[조선어]] 교사로 부임하였다. [[1897년]]에는 정식으로 [[토쿄외국어학교]]에 조선어과 교사로 파견되어 [[일본]]에서 1년 가량 교사 생활을 하면서 근대 문물을 직접 접했다.
  • 윤기선
         ** 이복 형: 윤봉성(尹鳳成, [[1897년]] - 요절)
  • 윤덕주 (농구인)
         *** 외당숙 : [[이상정]](李相定, [[1897년]] [[6월 10일]] ~ [[1947년]] [[10월 27일]], 독립운동가. 아호(雅號)는 청남(晴南), 산은(汕隱). [[대한독립군]] [[3성 장군|중장]])
  • 윤상구 (1949년)
         * 아버지 : [[윤보선]](尹潽善, [[1897년]] [[8월 26일]] ~ [[1990년]] [[7월 18일]], 호는 해위(海葦), 독립운동가 겸 정치인, 제2대 [[서울특별시장|서울시장]], [[상공부|상공장관]], [[대한민국의 대통령|제4대 대통령]])
  • 윤영선 (1896년)
         ** 동생 : 윤봉성(尹鳳成, [[1897년]] - 요절)
  • 윤치영
         이때 함께 투옥당한 인물은 [[김준연]], [[구자옥]](具滋玉), [[이만규]], [[박승철 (1897년)|박승철]](朴勝喆), [[정춘수]], [[오화영]], [[최두선]]<ref>최남선의 동생이다.</ref>, [[안재홍]], [[이철원]] 등이었다. 옥중에서 그는 사촌형 [[윤치호]]와 그의 [[중앙학교]] 시절 은사 [[김성수]], [[송진우 (정치인)|송진우]] 등이 사적으로 보내주는 사식과 영치금으로 겨우 체력을 회복할 수 있었다.
         *** 조카: [[대통령]] 해위 [[윤보선]](海葦尹潽善, [[1897년]] [[8월 26일]] ~ [[1990년]] [[7월 18일]]) [[대한민국]] [[대통령]]
  • 윤치일
         *** 조카 : 前 대통령 [[해위 윤보선]](海葦 尹潽善, [[1897년]] [[8월 26일]] ~ [[1990년]] [[7월 18일]])
  • 윤탁구
         * 할머니 : 현송자(玄松子, [[1897년]] [[7월 7일]] ~ [[1934년]] [[2월 16일]])
  • 의친왕
         [[1891년]] [[12월 28일]] 의화공(義和公)에 책봉되었으며, 불과 한 달 후 [[1892년]] [[1월 28일]] 의화군(義和君)에 개봉된 그는 1894년에 대사로 일본에 다녀오고, 이듬해 6개국 특파 대사로 영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 이탈리아, 오스트리아를 방문했다. [[1897년]] [[대한제국]]이 창건되면서 의왕에 책봉되었으며, [[1899년]] [[미국]]에 유학하고, 이듬해 의친왕에 봉해졌다. 1905년 귀국하여 육군 부장, 적십자사 총재, 순종 황제 대리청정 등을 지냈다. [[한국 강제 병합|한국 병탄]] 이후 [[일본 제국|일제]]에 비타협하고 독립운동가들과 가까이하며, [[1919년]] [[대동단]]의 최익환 등과 연락, [[대한민국 임시 정부]]로 탈출하기 위하여 상복(喪服) 차림으로 변장하고 [[만주|만저우]] [[단둥 시|안둥 현]]에까지 갔으나, [[일본군]]에 발각되어 강제 송환되었다. 1919년 11월 상하이 망명을 도모하면서 임시정부에 밀서를 보냈다는 내용이 《독립신문》에 기록으로 남아있다.
         [[로노크 대학교]]를 마치고 [[오하이오주]] 델라웨어의 [[오하이오 웨슬리언 대학교]] 및 [[하와이 주|하와이]]와 [[샌프란시스코]] 등지를 돌아다니며 학업을 계속하였으며 1897년 10월, '''의화군'''에서 '''의왕'''에 책봉된 그는 [[1900년]] 8월 대한제국 전례가 개편됨에 따라 '''의왕'''에서 '''의친왕'''에 진책되었다.
         ** '''대한제국 건국, 광무 원년(光武 元年, [[1897년|고종 34년]], 1897)''' [[10월 12일]]
  • 이관용 (황족)
         *** 사촌 동생 : [[영친왕]]([[1897년]] - [[1970년]])
  • 이근택(1865)
         본관이 [[전주 이씨]]다. [[성종(조선)|성종]]의 아들인 경명군의 아주 먼 후손으로, 1865년 [[충청북도]] [[충주시|충주]] 출신이며 초명은 근용(根湧)이다. 무신 집안이었지만 출사의 계기는 [[임오군란]] 때 충주로 피신한 [[명성황후 민씨]]에게 싱싱한 [[생선]]을 진상함으로써 눈에 들어 발탁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명성 황후가 환궁하면서 벼슬길에 들어섰다. [[1884년]] [[무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입문하였고 병조 참판 등을 역임 한 뒤 [[1897년]] [[대한제국]] 수립 당시 친위 연대 제3대대장으로 정부 전복을 꾀하려다가 발각되어 [[제주도]]에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풀려났다.
  • 이상백 (1904년)
         | 친척 = 이동진(할아버지) <br /> 이일우(큰아버지) <br /> [[이상정 (1897년)|이상정]](형) <br /> 한문이(형수) <br /> [[권기옥]](형수) <br /> [[이상화 (시인)|이상화]](형) <br /> [[이상오]](아우) <br /> [[박창암]](조카사위) <br/> [[이열희 (1924년)|이열희]](5촌 조카) <br /> [[최남선]](사돈) <br /> [[박중양]](사돈)
         ** 형: [[이상정]](李相定, [[1897년]] [[6월 10일]] ~ [[1947년]] [[10월 27일]], 독립운동가. 아호(雅號)는 청남(晴南), 산은(汕隱). [[대한독립군]] [[3성 장군|중장]])
  • 이상정 (1897년)
         '''이상정'''(李相定, [[1897년]] [[6월 10일]] ~ [[1947년]] [[10월 27일]])은 [[일제 강점기|일제 강점기 조선]]의 [[한국의 독립 운동|독립운동가]] 겸 [[군인]]이다. 본관은 [[경주 이씨|경주]](慶州)이고 아호(雅號)는 청남(晴南), 산은(汕隱)이며 일명(一名)은 '''이연호'''(李然晧)이다. [[대구광역시|대구]] 출생이다.
         [[분류:1897년 태어남]][[분류:1947년 죽음]][[분류: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분류:경주 이씨]][[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일제 강점기의 시인]][[분류:일제 강점기의 장교]][[분류:한국의 장군]][[분류:반일 감정]][[분류:김구]][[분류:염상섭]][[분류:이범석 (1900년)]][[분류:박헌영]][[분류:육군 장군]][[분류:한국독립당]][[분류:일제 강점기의 화가]][[분류:자유 연애]][[분류:일제 강점기의 서예가]][[분류:일제 강점기의 저술가]][[분류:일제 강점기의 조각가]][[분류:대륜고등학교 동문]][[분류:도쿄 공업대학 동문]][[분류:도쿄 예술대학 동문]][[분류:히토쓰바시 대학 동문]][[분류:고쿠가쿠인 대학 동문]][[분류:유교 신자]][[분류:대한민국의 정치인의 배우자]]
  • 이상화 (시인)
          | 친척 = 이일우(백부) <br /> [[이상정 (1897년)|이상정]](형) <br /> 한문이(형수) <br /> [[권기옥]](형수) <br /> [[이상백 (사학자)|이상백]](아우) <br /> [[이상오]](아우) <br /> [[박창암]](조카사위) <br /> [[이열희 (1924년)|이열희]](5촌 조카) <br /> [[최남선]](사돈) <br /> [[박중양]](사돈)
         독립운동가인 [[이상정 (1897년)|이상정]]은 그의 형이고, 사학자 겸 스포츠인 [[이상백 (사학자)|이상백]]과 수렵가 겸 문필가 [[이상오]]는 그의 동생이었다. 치과의사 겸 성형외과 의사이며 [[경북대학교]] 치대 학장을 지낸 [[이열희 (1924년)|이열희]]는 5촌 조카였다.
         ** 형: [[이상정]](李相定, [[1897년]] [[6월 10일]] ~ [[1947년]] [[10월 27일]], 독립운동가. 아호(雅號)는 청남(晴南), 산은(汕隱). [[대한독립군]] [[3성 장군|중장]])
         ** 형수: [[한문이(韓文伊)]] [[1897년]] [[5월 7일]] ~ [[?]], '''이상정'''(李相定)의 부인
  • 이열희 (1924년)
          | 친척 = 이동진(증조할아버지) <br /> 이일우(할아버지) <br /> 이시우(작은할아버지) <br /> 이상악(큰아버지) <br /> 서법경(큰어머니) <br /> 이명득(큰어머니) <br /> [[이상정 (1897년)|이상정]](5촌 숙부)<br /> [[한문이]](5촌 숙모) <br /> [[권기옥]](5촌 숙모) <br /> [[이상화 (시인)|이상화]](5촌 숙부) <br /> [[이상백 (사학자)|이상백]](5촌 숙부) <br /> [[이상오]](5촌 숙부) <br /> 이겸희(6촌 누이동생) <br /> [[박창암]](6촌 매제) <br /> 이용희(6촌 남동생) <br /> [[박문웅 (1890년)|박문웅]](장인) <br /> [[박중양]](장조부)
         *** 당숙모: [[한문이]](韓文伊, [[1897년]] [[5월 7일]] ~ [[1941년]], '''이상정'''(李相定)의 부인.
  • 장영근 (국회의원)
         '''장영근'''(張英根, [[1897년]] [[5월 2일]] [[부산광역시]] ~ [[1983년]] [[6월 23일]])은 [[일제 강점기]]의 [[대한민국]]의 기업인이다. 무소속으로 제3대 국회의원도 역임했다.
         [[분류:1897년 태어남]][[분류:1983년 죽음]][[분류:일제 강점기의 기업인]][[분류:대한민국의 기업인]][[분류:부산광역시 출신 인물]]
  • 장지연(언론인)
         1895년 10월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을미의병]]의 궐기를 호소하는 격문을 지어 각지에 발송했다. [[1897년]] 1월 [[아관파천|아관 파천]]으로 러시아 공사관에 머물던 고종의 환궁을 요청하는 만인소의 제소를 맡았고 같은 해 2월 [[경운궁]]으로 환궁한 고종에게 황제 즉위를 청하는 상소문 초안을 짓고 독소를 맡았다.
  • 장헌식
         1896년 7월 25일 게이오의숙 보통과를 졸업하고, [[게이오 의숙]] 고등과에 들어갔다. 당시 게이오의숙은 조선인 유학생이 급증함에 따라 조선인 특별 고등과를 설치하였다. 1897년 4월 25일 게이오의숙 고등과를 졸업하였다. [[1897년]] [[5월]]부터 [[12월]]까지 그는 [[일본 사법성]] 행정사무급재판소 병설 검사국 견습사무원이 되었다. 그는 [[게의오의숙]]을 졸업하고 사법 부문의 근대 문물을 배우기 위해 일본 사법성의 재판소 검사부에서 견습 사무원으로 일했고, [[1898년]] [[1월]]부터 [[10월]]까지는 일본 [[교토부]] [[가나가와현]] 요코하마항 지방재판소(神奈川縣 橫濱港地方裁判所) 검사국의 견습사무원으로 재직했다.
  • 정재학 (1856년)
         이전에는 1943년 [[취체역]] 회장 (이사회장) [[민규식]](閔奎植)을 1대 행장으로 대우했으나 1897년 한성은행장 [[김종한]] (金宗漢 )을 1대 조흥은행장으로 결정했다. [[민영휘]] 가문은 주요주주였음에도 조흥은행장을 배출하지 못한 격이 된 것이다. 반면 [[정재학]]의 3남인 [[정종원]]은 제5대 조흥은행장, 손자인 [[정운용]]은 제2대 조흥은행장에 이름을 올렸다.<ref>국가문화유산포털 조흥은행 http://www.heritage.go.kr/culture_2008/kor/search/pop_search_view.jsp?pk=PS01004029001422024000DC</ref>
         부친 아들 손자 등 3대에 걸쳐 은행장을 배출한 사례는 한국근대 금융사에서 유일한 사례다. 대한민국의 본격적인 근대적 은행업은 구한말인 1897년부터 시작됐다. 또한 일제강점기에도 은행업은 유지되면서 비록 일제 금융당국에 의해 통폐합되면서 조흥은행으로 통합됐지만 민족자본은행들의 한국인 지분은 [[조흥은행]]의 지분구성에서 절반을 웃돌았다. 해방 이후 조흥은행을 제외한 주요 시중은행들은 대부분 일본인 지본이 절대 우위였으며 이 지분들은 미군정청에 귀속된 뒤 이승만 정권 당시 재계에 불하됐다. 조흥은행 100년사에 따르면 [[조흥은행]]만이 당시 시중은행 가운데 유일한게 한국인 지분이 50% 이상이었다. 해방 직후 조흥은행의 총 주식수는 18만5000주로 이 가운데 [[경상합동은행]]은 4만5000주, [[한성은행]]( 경상합동은행 합병전 기준) 6만주, [[동일은행]] 8만주 등으로 구성됐다. 해방이후 민족자본은행의 대표격으로 부상한 조흥은행의 지분 가운데 [[정재학]] 가문이 설립한 경상합동은행의 지분율은 24%에 달했다.
         [[1897년]] [[탁지부]] 참서관을 지내고 [[1905년]]과 [[1908년]]에는 경북 [[순흥군]]과 [[개령군]] 군수에 임명되는 등 [[대한제국]]에서 관리를 맡기도 했으나, 이후 [[대구광역시|대구]]와 [[경상북도]]를 대표하는 대자본가로서의 활동이 더욱 두드러진다.
         * [[1897년]] 탁지부참서관
  • 정칠성
         '''정칠성'''(丁七星, [[1897년]] ~ [[1958년]]?)은 [[대한제국]]의 기녀 출신으로, [[일제 강점기]]에 [[사회주의]] 계열에서 활동한 항일 독립 운동가, [[페미니스트]], 언론인이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치인, [[페미니스트]]이다. 별칭은 '''금죽'''(錦竹 또는 琴竹)이다.
         정칠성은 [[1897년]] [[대구부 (1895년)|대구부]] 출신으로 초년에는 [[기녀]]였다. 어린 시절에 대해 알려진 바가 적으나, 빈한한 가정에서 출생했을 것으로 추정된다.<ref name="propp">{{뉴스 인용
         }}</ref> 정확한 생년은 전하지 않아 [[1897년]]생 설 외에도 [[1902년]]생 설, [[1905년]]생 설, [[1908년]]생 설 등이 전한다. 정확한 생일 역시 미상이다.
         [[분류:1897년 태어남]][[분류:1958년 죽음]][[분류:기녀]][[분류:여성 해방 운동가]][[분류:노예제 폐지론자]][[분류:한국의 자유주의자]][[분류:한국의 사회주의자]][[분류:한국의 혁명가]][[분류:일제 강점기의 작가]][[분류:일제 강점기의 무용가]][[분류:일제 강점기의 언론인]][[분류:일제 강점기의 여성주의자]][[분류:일제 강점기의 음악가]][[분류:일제 강점기의 철학자]][[분류: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공산주의자]][[분류: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여성주의자]][[분류: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치인]][[분류: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철학자]][[분류: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무용가]][[분류:알렉산드라 콜론타이]][[분류:한국의 군정기]][[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여성 해방 운동]][[분류:조선공산당의 정치인]][[분류:남조선로동당]][[분류:월북자]][[분류:조선여성동우회의 인물]][[분류:근우회의 인물]][[분류:신간회의 인물]][[분류:허정숙]][[분류:박헌영]][[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
  • 정환덕
         군부협판 의채의 아들로 [[1857년]] 탄생하였다. 소년시절부터 태을노인(太乙老人)에게 역학을 수학 받았으며, [[경북]] [[영천]]에서 거주하였다. 어느 날 영천 황학사의 한 암자에서 역학(주역)을 공부하다가 잠깐 졸았는데 꿈에 하얀 도포를 입고 손에는 청령장을 짚은 산신령이 나타나더니 “자네가 역학을 공부한지 7년이 되었다. 그러나 너는 글의 깊은 뜻을 알지 못하고 글만 줄줄 읽었다. 그러니 말짱 헛공부를 한 것이다. 이제부터는 글의 행간을 읽으라. 행간에 숨은 뜻을 찾아서 읽도록 하라. 아무리 공부해도 너에게 큰 행운은 찾아오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작은 행운은 있을 것이니 여기서 꾸물댈 것이 아니라 [[서울]]로 올라 가보아라.” 꿈에 나타난 산신령의 말을 믿고 [[1897년]] 가을, 나이 40세이 되던 해에 서울로 상경하였다. 상경하여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동부승지 [[윤명구]](尹鳴九)를 만나 윤명구가 역학을 할 줄 안다고 하여 고종황제의 측근 경운궁 전화과장(電話課長) 이재찬(李在纘)을 소개 해주었다. 이재찬이 [[고종황제]]에게 소개하여 특명으로 [[1901년]](광무 5) 음12월 5일 현릉참봉(顯陵參奉)에 제수되었다가 그 다음날 면직되었다.
  • 최윤동
         '''최윤동'''(崔允東, [[1897년]] [[7월 3일]] [[대구광역시|대구]] - [[1968년]] [[5월]])은 대한민국의 국회의원이다.
         [[분류:1897년 태어남]][[분류:1968년 죽음]][[분류:일제 강점기의 군인]][[분류:일제 강점기의 기업인]][[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
  • 한규복 (1881년)
         그는 어려서 한성에서 신학문인 [[일본어]]와 [[중국어|한어]](漢語), [[영어]]를 공부하다가 [[1893년]] [[3월]] [[을미의숙]](乙未義塾) [[일본어]]학과에 입학, [[1897년]] [[3월]] 을미의숙 일어학과를 마치고 [[관립영어학교]]로 진학하였다. 그는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그해 [[11월 6일]] 정3품으로 [[중추원 (대한제국)|중추원]] 2등 의관에 선출되었으나 중추원은 곧 해체되었다. [[1899년]](광무 2년) [[3월]] [[관립영어학교]]를 졸업하였다.
  • 함인섭
         ** 숙모 : 양천 허씨([[1897년]] [[2월 20일]] ~ ?), 허정정(許鼎丁)의 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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