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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대중
         * 어머니(친모) : 장수금 (張守錦, [[1893년]] [[7월 29일]] ~ [[1972년]] [[6월 20일]])
  • 김석원
         '''김석원'''(金錫源, <small>일본식 이름:</small> 金山錫源('''가네야마 샤쿠겐'''), [[1893년]] [[9월 29일]] ~ [[1978년]] [[8월 6일]])은 [[일본군]] 장교를 지낸 [[대한민국 국군]]의 [[대한민국 육군|육군 군인]]이다.
         [[분류:1893년 태어남]][[분류:1978년 죽음]][[분류:일제 강점기의 군인]][[분류:대한민국의 한국 전쟁 참전 군인]][[분류:대한민국 육군 소장]][[분류:대한민국의 저술가]][[분류:대한민국의 대학 교수]][[분류:대한민국의 교육인]][[분류:친일파 708인 명단 수록자]][[분류:친일인명사전 수록자]][[분류:대한민국 정부 발표 친일반민족행위자]][[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민주당 (대한민국, 1963년) 당원]][[분류:공3급 금치훈장 수훈자]][[분류:일본 육군사관학교 동문]][[분류:육군사관학교 동문]][[분류:경주 김씨]][[분류:호국군사관학교 동문]][[분류:조선경비보병학교 동문]][[분류:통위부 보병학교 동문]][[분류:국방부 보병학교 동문]][[분류:육군보병학교 동문]][[분류:육군포병학교 동문]]
  • 김석원 (1893년 9월)
         '''김석원'''(金錫源, <small>일본식 이름:</small> 金山錫源('''가네야마 샤쿠겐'''), [[1893년]] [[9월 29일]] ~ [[1978년]] [[8월 6일]])은 [[일본군]] 장교를 지낸 [[대한민국 국군]]의 [[대한민국 육군|육군 군인]]이다.
         [[분류:1893년 태어남]][[분류:1978년 죽음]][[분류:일제 강점기의 군인]][[분류:대한민국의 한국 전쟁 참전 군인]][[분류:대한민국 육군 소장]][[분류:대한민국의 저술가]][[분류:대한민국의 대학 교수]][[분류:대한민국의 교육인]][[분류:친일파 708인 명단 수록자]][[분류:친일인명사전 수록자]][[분류:대한민국 정부 발표 친일반민족행위자]][[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분류:민주당 (대한민국, 1963년) 당원]][[분류:공3급 금치훈장 수훈자]][[분류:일본 육군사관학교 동문]]
  • 김온순 (1812년)
         [[1892년]] [[2월]] [[판의금부사]]가 되었다. [[1892년]] [[5월 22일]] [[내금위]][[대호군]]이 되고, 대호군 재직 중 그해 [[11월 5일]] 전직 [[승정원]][[승지]] [[김병억]](金炳億)의 할아버지라는 이유로 특별히 [[숭정대부]](崇政大夫)로 승진, 그날 [[상호군]]에 임명되었다. [[1893년]] [[2월 19일]] 다시 판의금부사가 제수되었다. 최종 관직은 [[보국숭록대부]]에 이르렀다.
  • 김인영 (목회자)
         '''김인영'''(金仁泳, <small>일본식 이름: </small>金村仁泳, [[1893년]] ~ [[1953년]])은 [[한국]]의 [[감리교]] [[목사]]이다.
         [[분류:1893년 태어남]][[분류:1953년 죽음]][[분류:일제 강점기의 목회자]][[분류:일제 강점기의 신학자]][[분류:대한민국의 목회자]][[분류:대한민국의 개신교 신학자]][[분류:대한민국의 자유주의 신학자]][[분류:친일인명사전 수록자]][[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감리교신학대학교 동문]][[분류:감리교신학대학교 교수]]
  • 김태년 (1893년)
         '''김태년'''(金泰年, [[1893년]] [[12월 22일]] ~ ?)은 [[일제 강점기]]의 관료이다.
         [[분류:1893년 태어남]][[분류:몰년 미상]][[분류:일제 강점기의 관료]][[분류:친일인명사전 수록자]][[분류:광주광역시 출신]]
  • 남궁억
         1887년 전권대신 [[조민희]](趙民熙)의 수행서기관으로 [[상하이]]에도 갔다. 영국, 러시아, 독일 순방길을 계획하고 홍콩까지 갔으나, [[청나라]]의 간섭과 방해로 2년간 홍콩에서 머물다가 결국 다시 소환되어 돌아왔다. 이후 1889년 [[궁내부]] 별군직(宮內府別軍職), [[1893년]] 칠곡부사를 역임하고, [[1894년]]에는 [[갑오경장]]으로 [[내무부]] 토목국장에 발탁되어 서울 종로와 정동 일대 및 육조 앞과 남대문 사이의 도로를 정비하고 [[경성부]] [[탑골공원]](파고다 공원) 공사의 감독을 맡아 완공시켰다. 이후 [[흥화학교]](興化學校)에서 교사로 영문법과 국사(國史)를 가르치고 독립협회에 가입했다. [[1895년]]에는 주변 조정 관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한성부]]의 민가를 정비, 허물고 도로를 정비하여 길을 닦았다. 그뒤 [[1896년]] [[2월]] 관직을 사퇴하였다.
  • 박서양 (1885년)
         [[1893년]](고종 30년) [[9월]] [[올리버 R. 에이비슨|에비슨]] 선교사가 [[장티푸스]]에 걸린 아버지 박성춘을 살렸다. [[1894년]] 아버지 박성춘은 [[새뮤얼 F. 무어]](Samuel F. Moore, 한국이름 '모삼율'(毛三栗, 1846∼1906)) 선교사를 만나 [[기독교]]로 개종하였다.<ref name="gadjong">[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05&aid=0000494140 (43) 기독교와 사회변화 <4>신분타파]</ref> 이후 [[새뮤얼 F. 무어|무어]] 선교사는 백정과 그 자녀를 위한 선교, 교육사업을 시작하였다. 그 결과, 1895년에는 6명의 백정이 복음을 받아들였다고 한다. 박성춘은 1895년에 정식으로 [[기독교]] 세례를 받았고 1911년 12월에는 한국 최초로 백정 출신의 [[장로]]가 되었다. [[1894년]] 박서양은 무어 선교사가 설립, 운영하던 곤당골 교회 부속 예수학당에서 공부하게 되었다. 이로서 신학문을 받아들이게 되었다.<ref name="gadjong"/> 무어 선교사의 배려로 그는 신학문을 배우고 새로운 세계의 존재를 접하게 되었다. 그 역시 어려서 세례를 받고 [[기독교]]([[북장로교]])로 개종하였다.
  • 박승무
         '''박승무'''(朴勝武, [[1893년]] ~ [[1980년]])은 한국의 화가로, 호는 심향(心香, 深香), 소하(小霞), 본관은 반남(潘南)이며 옥천출신이다.
         [[분류:일제 강점기의 화가]][[분류:대한민국의 화가]][[분류:1893년 태어남]][[분류:1980년 죽음]][[분류:반남 박씨]][[분류:서울특별시 출신]]
  • 소진우
         '''소진우'''(蘇鎭禹, {{llang|ja|伊蘇三峰}}, [[1893년]] ~ ?)는 [[일제 강점기]]의 지방행정 관료이다.
         [[분류:1893년 태어남]][[분류:몰년 미상]][[분류:일제 강점기의 관료]][[분류:친일인명사전 수록자]][[분류:칠곡군 출신 인물]][[분류:진주 소씨]]
  • 윤덕주 (농구인)
         독립운동가 겸 언론인 [[윤홍열 (1893년)|윤홍열]]의 딸이자 민족운동가 겸 사학자 [[윤필오]]의 손녀로 태어났다. 어머니 이숙경은 민족운동가 이일우의 딸로, [[이상화 (시인)|이상화]], 독립운동가 [[이상정]], 체육인 겸 사학자 [[이상백 (사학자)|이상백]]의 사촌 누나가 된다.
         * 아버지 : [[윤홍열 (1893년)|윤홍열]](尹洪烈, [[1893년]] ~ [[1947년]] [[2월 19일]])
         * [[윤홍열 (1893년)|윤홍열]]
  • 윤석중 (1893년)
         '''윤석중'''(尹錫中, <small>일본식 이름: </small>平岡永宇, [[1893년]] ~ ?)은 [[일제 강점기]]의 지방행정 관료이다.
         [[분류:1893년 태어남]][[분류:몰년 미상]][[분류:20세기 대한민국 사람]][[분류:삼척시 출신]][[분류:일제 강점기의 관료]][[분류:친일인명사전 수록자]]
  • 의친왕
         [[1891년]] [[12월 28일]] 의화공(義和公)에 책봉되었으며, 불과 한 달 후 [[1892년]] [[1월 28일]] 의화군(義和君)에 개봉되었고, [[1893년]] [[12월 6일]] [[김사준]]의 딸 [[덕인당 김씨|김수덕]](金修德, [[아명]](兒名)은 김숙(金淑), [[1881년]] [[12월 22일]] ~ [[1964년]] [[1월 14일]])을 아내로 맞았다. [[1894년]] [[7월]] [[내의원]]제조 겸 [[사옹원]]제조에 임명됐다. [[1894년]] [[청일전쟁]]에서 승리를 축하하기 위해 보빙대사가 되어 [[일본 제국|일본]]을 방문하였다. 이듬해 6개국 특파대사(特派大使)로 영국,독일,프랑스,러시아,이탈리아,오스트리아 등을 차례로 방문하려다가 취소하고 중도에 되돌아왔다. 그 뒤 을미년 왕세자 작위 선양 파동 사건에 연루되었다가 일단락된 이후 일본 유학을 하여 일본의 [[게이오기주쿠 대학교|게이오 의숙]]을 거쳐 [[1899년]](광무 3년) [[미국]]으로 건너가 [[1900년]] [[미국]] 내 각지를 순행하였다.
  • 이상백 (1904년)
         *** 사촌 매부 : [[윤홍열 (1893년)|윤홍열]](尹洪烈, [[1893년]] ~ [[1947년]] [[2월 19일]]), [[남조선과도입법위원회]] 의원과 [[대구시보]]사 사장 역임 - [[윤필오]]의 아들
  • 이열희 (1924년)
         ** 고모부 : [[윤홍열 (1893년)|윤홍열]](尹洪烈, [[1893년]] ~ [[1947년]] [[2월 19일]]), [[남조선과도입법위원회]] 의원과 [[대구시보]]사 사장 역임 - [[윤필오]]의 아들
  • 이호성 (대한제국)
         [[군수]] 재직 중 1888년(고종 25년) [[과거 제도|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그 해의 관록(館錄)과 도당록(都堂錄)에 들었으며, [[1889년]]에는 직각권에 들고 시강원문학, 시강원 사서 등을 역임하였다. 1890년(고종 27년) [[1월 15일]] [[시강원]]사서에서 다시 시강원문학이 되었으며, 그해 시강원필선이 되었고, [[성균관]][[대사성]], 승정원승지(承政院承旨) 등을 역임하였다. [[1893년]] [[이조]][[참의]]를 지냈으며, [[1900년]](광무 3년)에는 [[가선대부]]로 [[봉상사]][[제조]](奉常司提調)를 거쳐 [[태자]][[시강원]]첨사(侍講院詹事), [[1901년]] [[2월]] 부첨사(副詹事), [[9월 21일]] [[궁내부]][[특진관]]을 역임하였다.
  • 전재용
         * 조부: [[전상우]](全相禹, [[1893년]] ~ [[1967년]])
  • 정충원
         '''정충원'''(鄭忠源, <small>일본식 이름:</small> 烏川忠源, [[1896년]] [[5월 22일]] ~ [[1977년]] [[3월 12일]]<ref>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간한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에는 정충원의 출생일이 [[1893년]] [[5월 22일]]로 표기되어 있으며 사망일은 미상으로 표기되어 있다.</ref>)은 [[일제 강점기]]의 [[경찰]] 겸 [[관료]]이자 [[대한민국]]의 금융인으로 본관은 연일이며 다른 이름으로 '''정종원'''(鄭宗源, 1949년 10월 개명한 이후부터 사용한 이름)이 있다.
  • 한규복 (1881년)
         그는 어려서 한성에서 신학문인 [[일본어]]와 [[중국어|한어]](漢語), [[영어]]를 공부하다가 [[1893년]] [[3월]] [[을미의숙]](乙未義塾) [[일본어]]학과에 입학, [[1897년]] [[3월]] 을미의숙 일어학과를 마치고 [[관립영어학교]]로 진학하였다. 그는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그해 [[11월 6일]] 정3품으로 [[중추원 (대한제국)|중추원]] 2등 의관에 선출되었으나 중추원은 곧 해체되었다. [[1899년]](광무 2년) [[3월]] [[관립영어학교]]를 졸업하였다.
  • 현경련
         [[1893년]] [[기해박해|기해년의 박해]] 초기에, [[교리]] [[선생]]이 된 현경련은 박해를 피해 숨었지만, [[6월|6]] [[7월]] 경에 [[체포]]되었다. 관리들은 현경련이 [[선교사]]들을 위해 중요한 역할을 하던 [[현석문]]의 누나인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그가 숨은 위치를 알아내기 위해 더 가혹하게 그녀를 고문했다. 그녀는 여덟 차례 [[심문]]과 두 차례의 [[주뢰형]] 그리고 300 여대의 [[장형 (형벌)|장형]]을 받았다. 형리들은 선교사들을 체포해서 포상을 받고 싶어했기 때문에, 선교사들에 대한 정보를 캐내기 위해 더 혹독하게 그녀를 고문했다. 그러나 현경련의 강한 의지로 인해서, 그들의 탐욕적인 노력은 허사로 돌아갔다. 그녀는 [[형조]]로 압송된 후에, 다리를 거의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격심하게 매질을 당했다. 그녀의 온몸에 상처가 깊어서 피와 [[고름]]이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또한 그녀는 [[감옥]]에서 [[콜레라]]에 걸려 앓았다.
  • 흥친왕
         [[1893년]] 그는 동학 농민군이 상경하여 [[경복궁]] 앞에서 복합상소운동을 벌이는 기회를 이용하여 [[이준용]]을 왕으로 추대하려 하였다. [[정교]]는 1893년 [[2월 11일]]부터 [[2월 13일]]까지 3일간 박광호를 소두로 하는 약 50명의 동학교도들이 상경하여 궁궐 앞에서 교조 신원을 탄원하며 연좌시위를 벌인 사건을 대원군이 시킨 일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때 [[정교]]는 대원군이 은밀히 동학당 수만 명을 서울로 불러 모임을 갖고 장차 불궤를 도모하여 그의 손자 이준용을 (왕으로) 추대하려 했으나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고 하였다.<ref name="p316">오영섭 《한국 근현대사를 수놓은 인물들(1)》(오영섭 저, 2007.4, 경인문화사) 315~316쪽.</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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