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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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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우식 (1886년) . . . . 2회 일치
         '''김우식'''(金禹埴, [[1886년]] ~ ?)은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다.
         [[분류:1886년 태어남]][[분류:몰년 미상]][[분류:20세기 대한민국 사람]][[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분류:서흥 김씨]]
  • 한병주 . . . . 2회 일치
         [[한성부]] 출생이며 1884년에서 1886년까지 [[충청도]] [[청원군|청원]]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낸 적이 있고 1886년에서 1892년까지 [[청주시|충청도 청주]]에서 잠시 유년기를 보낸 적이 있는 그는 이후 1892년 [[한성부]]로 귀향하였고 줄곧 [[한성부]]에서 성장한 한병주는 1898년에서 1911년까지 경기도 시흥 양천향교에서 유교 성리학 훈도를 지냈으며 1919년 [[경성부]]에서 3.1 독립 만세 운동에 동참하였고 1920년 2월 3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경성지부 교통국 국장 대리(大韓民國 臨時政府 京城支部 交通局 局長 代理)으로 활동하였다. 이어 같은 해 1920년 2월 25일 자택에서 김태규(金泰奎)로부터 김창의(金昌義)가 보내온 인쇄물 100여 장을 받았다. 김창의는 당시 임시정부 산하 평북 독판부(督辦府)의 내무참사(內務參事)로 국내 [[연통제]] 조직 예하에서 일하고 있었다. 인쇄물은 군무부 포고 제1호라는 제목 아래에 '서로 함께 분기하여 일본 제국의 기반을 벗어나 독립하지 않으면 안 된다'라는 내용이 담겨 있었는데 한병주는 이것을 받고서 1920년 2월 29일, 김순원(金純元), 오정주(吳政柱) 등에게 각 5매씩을 교부하고, 독립 시위 운동을 전개할 것을 권유하는 등 항일 투쟁을 전개하였다. 이 때 이로 인하여 체포된 한병주는 1920년 4월 29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8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으며 1921년 만기출감하였다. 이후 1922년 3월, 한국독립당 입당하여 이후 조선 광복(1945년)이 지난지가 3년 후인 1948년 3월까지 한국독립당에 당원 직위하였고 1948년 3월, 한국독립당을 탈당하고 낙향을 하였다.
  • 한징 . . . . 2회 일치
         '''한징'''(韓澄, [[1886년]] - [[1944년]])은 [[한글]]학자이다. 호는 효창이며 [[서울]]에서 출생하였다. [[1922년]]부터 10년간 <[[시대일보 (1924년)|시대일보]]> <[[중외일보]]> <[[조선일보]]> 등의 기자를 지냈다. [[1930년]] [[이윤재]]와 함께 [[조선어학회]] 사전을 편찬하는 데 힘썼으며 이어 [[표준말]] 사정위원이 되었다.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에 관련되어 옥살이를 하던 중 [[1944년]] 함흥 감옥에서 죽었다. [[1962년]] [[건국훈장|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단장이 수여되었다.
         [[분류:1886년 태어남]][[분류:1944년 죽음]][[분류:한국의 옥사한 사람]][[분류:일제 강점기의 언어학자]][[분류:조선어학회 사건]][[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
  • 마니교 . . . . 1회 일치
         예를 들어, 4세기 마드리드 서부의 아비라 프리시리안이 시작한 프리시리안 주의는 마니교의 마지막 불꽃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금욕주의와 이원론을 내세우던 프리시리안은 마니교와 그노시즘에 오염된 이단으로 여겨져 386년 처형되고, 프리시리안 주의는 6세기까지 근절된다. 이단자가 된 프리시리안의 저작이 보존되지 않은 탓에 가르침은 확실하지 않았는데 그러다가 1886년 바이에른 왕국의 부르트부르크 대학 서고에서 우연히 프리시리안과 제자들의 논고가 발견되었다. 하지만 연구 결과 마니교의 영향을 받은 것은 아니며 우연히 독자적으로 금욕과 이원론을 내세웠을 뿐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 뱌체슬라브 몰로토프 . . . . 1회 일치
         [[소련]]의 정치가, 외교관. --[[바텐더]].-- 1890년 3월 9일 생, [[러시아]] 쿠카르카(지금의 소베츠크) 출생. 1886년 11월 8일 [[모스크바]]에서 사망.
  • 서상일 . . . . 1회 일치
         '''서상일'''(徐相日, [[1886년]] [[7월 9일]] - [[1962년]] [[4월 18일]], [[대구]] 출생)은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정치가이다. [[대한민국 제1공화국|제1공화국]] 기간 중에는 [[야당]] 정치인으로 활동했다. 호 동암(東菴). 본관은 [[달성 서씨|대구]].
  • 오세창 . . . . 1회 일치
         [[1879년]] [[과거 제도|역과]]에 합격하여 관직에 나아갔는데, [[1885년]] [[박문국]]에 발령받아 [[박문국]][[주사]]시보로 주간 관보인 《[[한성주보]]》 기자가 되면서 언론인으로 입문했다. [[1886년]](고종 23년)에는 [[박문국]][[주사]]가 되어 《[[한성순보]]》 기자를 겸했다. 이후 [[군국기무처]], [[농상공부]], [[우정국]] 등을 거쳤고, [[1894년]](고종 31년) [[군국기무처]] 낭청총재 비서관(軍國機務處郎廳總栽秘書官)이 되었다가 관제 개정 이후 [[농상공부]] [[참의]](農商工部參議), [[우정국]] 통신국장(郵政國通信局長) 등을 역임했다.
  • 이경희 (1880년) . . . . 1회 일치
         * 처남 : [[조훈]]([[1886년]] [[10월 29일]] - [[1938년]] [[1월 22일]])
  • 이열희 (1924년) . . . . 1회 일치
         ** 백부 : 이상악(李相岳, 호는 긍남(肯南), [[1886년]] [[9월 24일]] - [[1941년]] [[1월 8일]])
  • 인종개량 . . . . 1회 일치
         정치가 카토 히로유키(加藤弘之)는 1886년 「인종개량의 변(人種改良ノ弁)」이라는 주장으로 타카하시 요시오의 인종개량론에 반박하였다. 그것을 위해서는 [[의식주]] 등의 환경을 개량하는 방법을 써야 한다고 주장했다. 혼종 생산을 통한 인종개량의 비현실성도 지적하였다. (1) 어떤 조합으로 인종을 개량해 나가야 할지, 그에 대한 연구가 불충분하다. (2) 많은 세월이 걸려서 비현실적이다. (3) 몇대나 잡종을 반복하다보면 일본인의 피가 멸종해버린다.
  • 정재학 (1856년) . . . . 1회 일치
         [[정재학]]은 [[낙동강]] 뱃길을 이용한 [[어염무역]]에 진출한다. 1886년 여름 콜레라가 전국을 휩쓸었는데 이 괴질에 소금물이 좋다는 소문이 확 퍼졌다. 소금은 불티나게 팔렸고 값도 폭등했다. 정재학은 이를 바탕으로 대구 3대 부호로 급부상하며 1892년 대구 중심가인 남일동에 99칸 기와집을 세웠다. 1921년 간행 된 '대구일반'에는 그의 재산규모에 대해 "100만 원 이상의 재산을 보유하고 있으며 현미 8000~3000석 규모의 연 수입을 거두고 있다. 하녀하남은 각각 30~40명에서 50~60명에 이른다."고 기술하고 있다.<ref name="ReferenceB"/><ref>고승제, <<한국금융사연구>> (일조각, 1970) p.211</ref>
  • 한규복 (1881년) . . . . 1회 일치
         ** 동생 : 한규정(韓圭政, [[1886년]] [[11월 25일]] - [[1938년]] [[11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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