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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명순 (1759년)
         ****** 삼남 : [[김흥근]](金興根, [[1796년]] - [[1870년]])
  • 김홍집 (1842년)
         [[1868년]](고종 5년) [[조선의 과거 제도|정시문과]]에 급제한 뒤 1873년에는 권지[[승문원]][[부정자]]를 거쳐 승문원부정자, 승문원박사를 겸직하고, [[승정원]]가주서가 되었으나 아버지의 상으로 사퇴했다. [[1870년]] 다시 어머니 창녕성씨의 상을 당하여 다시 3년상을 더 치뤘다.
         **** 생모 : 창녕 성씨(? - [[1870년]])
         후임자=[[이준용 (1870년)|이준용]]|
  • 박문웅(1890)
         * 어머니 : 이주열(李主悅, 본관은 전주(全州), [[1870년]] [[3월 4일]] ~ [[1961년]] [[5월 20일]])
  • 박부남 (1931년)
         * 할머니 : 이주열(李主悅, 본관은 전주(全州), [[1870년]] [[3월 4일]] - [[1961년]] [[5월 20일]])
  • 박서양 (1885년)
         어머니 조씨의 친정 부모에 대해서는 알려지지 않았다. 뒤에 어머니 조씨가 사망하자 아버지 박성춘은 이한갑(李漢甲)과 강씨(姜氏)의 딸인 이신심(李信心, 1870년생)과 재혼하였다. 계모에게서는 이복 형제가 존재하는가 여부는 알려지지 않았다.
         * 계모 : 이신심(李信心, [[1870년]] - ?)
  • 서태후
         임기=[[1870년]] [[12월 15일]] ~ [[1873년]] [[3월 3일]]
  • 성재기 (조선)
         [[1863년]](철종 14년) [[7월]] [[충청남도]] [[신창면|신창]][[현감]](新昌縣監) 겸 [[홍성군|홍주]][[진관]][[병마절제사]](洪州鎭管兵馬節制使)로 부임했다가 [[1865년]](고종 2년) [[3월]] 친상을 당하여 사직하였다. [[1870년]](고종 8년) [[2월]] 별천(別薦)에 올랐다.
  • 안흥군
         *** 서손자 이병수(李秉洙, [[1784년]] [[12월 2일]] ~ [[1870년]] [[3월 6일]])
  • 이관용 (황족)
         *** 사촌 : [[이준용]]([[1870년]] - [[1917년]])
         ** 의붓 매부 : 신형균(申珩均, [[1870년]] ?월 ?일- [[1940년]] ?월 ?일, 평산인 사어)
  • 이열희 (1924년)
         * 처조모 : 이주열(李主悅, 본관은 전주(全州), [[1870년]] [[3월 4일]] - [[1961년]] [[5월 20일]])
  • 이한응 (1849년)
         [[1870년]](고종 7년) 봄 무과(武科)에 급제, 영의정 [[김병학]](金炳學)의 건의로 특별히 가설 내승(內乘)에 임명되었다.<ref name="dager1">고종실록 7권, 1870년(고종 7년, 개국 479년) 5월 20일 을유 1번째기사, 조선 개국(開國) 479년 문희묘, 의소묘, 육상궁, 연호궁, 선희궁에 전배하다</ref> [[김병학]]은 '(故) 충장공(忠壯公) 이복남(李福男)이 나라를 위해서 목숨을 바친 절개와 의리에 대해서는 열성조(列聖朝)로부터 여러 번에 걸쳐 보답하는 은전(恩典)을 받았습니다. 이번에 그의 봉사손(奉祀孫)이 과거에 합격하였으니, 마땅히 조정에서 뜻을 보여주는 거조(擧措)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종전에는 이러한 사람들에 대하여 선전관(宣傳官)과 내승(內乘) 중에 가설(加設)하여 단부(單付)한 전례(前例)가 이미 많았다'며 그에게도 선전관이나 내승을 가설하여 임명해줄 것을 청하였다.<ref name="dager1"/>
  • 흥인군
         **** 손자: [[이지용]](李址鎔, [[1870년]] ~ [[1928년]])
  • 흥친왕
         |후임자3 = [[이준용 (1870년)|이준용]]
         |자녀 = [[이준용 (1870년)|이준용]], [[이문용 (왕족)|이문용]]
         [[1874년]] [[11월]] 이후 [[흥선대원군]]은 그의 아들 [[이준용 (1870년)|이준용]]을 [[조선 고종|고종]]과 [[민비]]를 몰아내고 추대하려 했고, 4회의 쿠데타를 기도했다가 실패했다. 이후 그는 고종의 냉대를 받았고 [[1899년]](광무 2) [[조선 장조|사도세자]]가 장종으로 추존된 뒤에도, 당시 황제의 친형이었음에도 4대 승습에 따른 작위를 받지 못했다. [[1907년]](융희 1) 완흥군에 책봉되었고, [[1910년]](융희 4) [[8월]] 흥친왕으로 진봉되었다. [[일제 강점기]]에는 [[공작]]으로 강등되어 이희 공이 되었다. 본관은 [[전주 이씨|전주]](全州)이고, 처음 이름은 재록(載錄), 자는 무경(武卿), 호는 우석(又石)이고 나중에 개명하여 이희(李熹)로도 알려져 있다. 첫 작위가 완흥군이었으므로 '''완흥군 이재면'''으로도 부른다.
         한편 그의 아들 [[이준용 (1870년)|영선군 이준용]]은 아버지 흥친왕 이재면이 사망한 뒤에도 그는 빈소에서 눈물을 흘리지 않았고 이 때문에 아저씨뻘 되는 [[이재완]] 등에게 호된 질책을 당하기도 했다. 이는 [[국왕]]의 친형인 아버지가 자기 아들의 신원을 요청하지 못하고 자객들의 [[일본]]행도 막지 못한 점, [[일본]] 망명 중에 아버지이 충분한 경제적 지원을 해주지 못했고 집안을 제대로 경영하지 못한 데 대한 실망감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이었다.<ref name="p342">오영섭 《한국 근현대사를 수놓은 인물들(1)》(오영섭 저, 한영희 발행, 2007.4, 경인문화사) 342쪽.</ref>
         ** 장남 : [[영선군]] [[이준용]](永宣君 李埈鎔, [[1870년]] ~ [[1917년]])
         |후임자 = [[이준용 (1870년)|이준용]]<br />(영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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