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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순이
         그녀는 [[1801년]] [[신유박해]]로 [[순교]]한 [[고광성]]의 딸이며, [[기해박해]]로 인해 [[1840년]]에 순교한 [[박종원 (종교인)|박종원 아우구스티노]]의 아내이다.
  • 권진이
         |사망일 = [[1840년]] [[1월 31일]]
         '''권진이'''(權珍伊, [[1819년]] ~ [[1840년]] [[1월 31일]])는 [[조선]]의 [[천주교]] [[박해]] 때에 [[순교]]한 [[한국 천주교]]의 [[한국의 로마 가톨릭 성인|103위 성인]] 중에 한 사람이다. [[세례명]]은 '''아가타'''(Agatha)이다.
         관찬 기록(《[[승정원일기]]》)에 따르면, 21세의 권진이는 [[한양]] 근교의 [[당고개역|당고개]]라고 부리우는 곳으로 압송되어 [[1840년]] [[1월 31일]] 다른 다섯 명의 [[천주교]]도들과 함께 [[참수]]되었다고 한다. 그렇게 그녀는 [[순교자]]가 되었다.
         [[분류:1819년 태어남]][[분류:1840년 죽음]][[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참수된 사람]][[분류:한국의 로마 가톨릭 성인]][[분류:19세기 기독교 성인]]
  • 민극가
         |사망일 = [[1840년]] [[1월 30일]]
         '''민극가'''(閔克可, [[1788년]] ~ [[1840년]] [[1월 30일]])는 [[조선]]의 [[천주교]] [[박해]] 때에 [[순교]]한 [[한국 천주교]]의 [[한국의 로마 가톨릭 성인|103위 성인]] 중에 한 사람이다. [[세례명]]은 '''스테파노'''(Stephanus)이다.
         [[교리]] [[교사]] 민극가는 다시 [[법정]]에 세워졌고 [[곤장]] 30여대를 더 맞았다. 몇 일 후 [[1840년]] [[1월 30일]]에 그는 [[한양]]의 [[포도청|포청]] [[감옥]]에서 [[교수형]]을 받아 [[순교]]하였다. 그때 그의 나이 53세였다.
         [[분류:1788년 태어남]][[분류:1840년 죽음]][[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사형된 사람]][[분류:한국의 로마 가톨릭 성인]][[분류:19세기 기독교 성인]][[분류:여흥 민씨]][[분류: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시성한 성인]][[분류:19세기 기독교 순교자]]
  • 박문웅(1890)
         * 할아버지 : 박정호(朴鼎鎬, [[1840년]] ~ [[1892년]] [[9월 22일]])
  • 박종원 (종교인)
         |사망일 = [[1840년]] [[1월 31일]]
         '''박종원'''(朴宗源, [[1793년]] ~ [[1840년]] [[1월 31일]])은 [[조선]]의 [[천주교]] [[박해]] 때에 [[순교]]한 [[한국 천주교]]의 [[한국의 로마 가톨릭 성인|103위 성인]] 중에 한 사람이다. [[세례명]]은 '''아우구스티노'''(Augustinus)이다.
         박종원은 [[한양]] 근교의 [[당고개역|당고개]]로 압송되어 아내 [[고순이]]가 순교한지 약 한달만인 [[1840년]] [[1월 31일]]에 48세의 나이로 다섯 명의 교우와 함께 [[참수]]되어 [[순교]]하였다.
         [[분류:1793년 태어남]][[분류:1840년 죽음]][[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참수된 사람]][[분류:한국의 로마 가톨릭 성인]][[분류:19세기 기독교 성인]]
  • 손소벽
         |사망일 = [[1840년]] [[1월 31일]]
         '''손소벽'''( 孫小碧, [[1801년]] ~ [[1840년]] [[1월 31일]])은 [[조선]]의 [[천주교]] [[박해]] 때에 [[순교]]한 [[한국 천주교]]의 [[한국의 로마 가톨릭 성인|103위 성인]] 중에 사람이다. [[세례명]]은 '''막달레나'''(Magdalena)이다.
         관찬기록(《[[승정원일기]]》)에 따르면, 손소벽은 마침내 [[한양]] 근교의 [[당고개역|당고개]]로 압송되어 [[1840년]] [[1월 31일]]에 39세의 나이로 다섯 명의 교우와 함께 [[참수]]되었다고 한다.
         [[분류:1801년 태어남]][[분류:1840년 죽음]][[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참수된 사람]][[분류:한국의 로마 가톨릭 성인]][[분류:19세기 기독교 성인]]
  • 윤기선
         * 할아버지: [[윤웅렬]](尹雄烈, [[1840년]] [[음력]] [[4월 17일]] - [[1911년]] [[양력]] [[9월 22일]])
  • 윤연선 (1936년)
         * 할아버지: [[윤웅렬]](尹雄烈, [[1840년]] [[4월 17일]] - [[1911년]] [[9월 22일]])
  • 윤영선 (1896년)
         * 할아버지 : [[윤웅렬]](尹雄烈, [[1840년]] [[음력]] [[4월 17일]] - [[1911년]] [[양력]] [[9월 22일]])
  • 윤치영
         * 큰아버지: [[윤웅렬]](尹雄烈, [[1840년]] [[4월 17일]] - [[1911년]] [[9월 22일]])
  • 이 아가타
         |사망일 = [[1840년]] [[1월 9일]]
         '''이 아가타'''(李亞加大, [[1824년]] ~ [[1840년]] [[1월 9일]])는 [[조선]]의 [[천주교]] [[박해]] 때에 [[순교]]한 [[한국 천주교]]의 [[한국의 로마 가톨릭 성인|103위 성인]] 중에 한 사람이다. [[세례명]]은 '''아가타'''(Agatha)이다.
         이 아가타는 300 여대의 [[장형]]과 90여대의 [[태형]]을 받았다. 배고픔과 목마름 그리고 질병 등의 고통도 그녀의 용기를 꺾을 수 없었다. 그녀는 고통 받는 내내 [[1839년]] [[5월 24일]]과 [[9월 3일]]에 각각 [[참수]]되어 [[순교]]한 그녀의 부모를 생각했다. 이 아가타는 6개월 간의 수감 생활 끝에, [[1840년]] [[1월 9일]] 17세의 나이로 [[한양]]에서 [[김 테레사]]와 함께 [[교수형]]을 받아 순교하였다.
         [[분류:1824년 태어남]][[분류:1840년 죽음]][[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사형된 사람]][[분류:한국의 로마 가톨릭 성인]][[분류:19세기 기독교 성인]]
  • 최영이 (종교인)
         |사망일 = [[1840년]] [[2월 1일]]
         '''최영이'''(崔榮伊, [[1818년]] ~ [[1840년]] [[2월 1일]])는 [[조선]]의 [[천주교]] [[박해]] 때에 [[순교]]한 [[한국 천주교]]의 [[한국의 로마 가톨릭 성인|103위 성인]] 중에 한 사람이다. [[세례명]]은 '''바르바라'''(Barbara)이다.
         [[1840년]] [[2월 1일]], 최영이는 [[한양]] 근교의 [[당고개역|당고개]]로 압송되어 [[이문우 요한]]과 [[홍영주 바오로]]와 함께 [[참수형]]을 받았다. 그렇게 그녀가 [[순교]]하던 때의 나이는 23세였다. 그 전날에는 최영이의 어머니가 처형 받아 순교하였는데, 모녀가 같이 순교하지 못한 까닭은 당시 [[조선]]의 [[형법]]에 따르면 친족을 같은 날에 처형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분류:1818년 태어남]][[분류:1840년 죽음]][[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분류:참수된 사람]][[분류:한국의 로마 가톨릭 성인]][[분류:19세기 기독교 성인]]
  • 최창흡
         그는 [[1801년]] [[신유박해]] 때 [[순교]]한 [[복자]] [[최창현 요한]]의 이복 동생이며 [[1839년]]의 [[기해박해]]로 인해 [[1840년]]에 순교한 [[성녀]] [[손소벽 막달레나]]의 남편이며, 같은 해에 순교한 [[성녀]] [[최영이 바르바라]]의 아버지이다.
  • 허협
         |사망일 = [[1840년]] [[1월 31일]]
         '''허협'''(許-, [[1796년]] ~ [[1840년]] [[1월 31일]])은 [[조선]]의 [[천주교]] [[박해]] 때에 [[순교]]한 [[한국 천주교]]의 [[한국의 로마 가톨릭 성인|103위 성인]] 중에 한 사람이다. [[세례명]]은 '''바오로'''(Paulus)이다.
         그는 [[1840년]] [[1월 31일]] 또는 [[2월 1일]]에 [[형벌]]의 후유증으로 숨을 거두었는데, 관찬 기록에는 그의 이름이 수록되어 있지 않다. 그는 [[곤장]] 130 여대를 맞았던 것으로 전해지며, 옥사로써 [[순교]]하던 때의 나이는 45세였다.
         [[분류:1796년 태어남]][[분류:1840년 죽음]][[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분류:한국의 로마 가톨릭 성인]][[분류:19세기 기독교 성인]]
  • 홍병주
         |사망일 = [[1840년]] [[1월 31일]]
         '''홍병주'''(洪秉周, [[1798년]] ~ [[1840년]] [[1월 31일]])는 [[조선]]의 [[천주교]] [[박해]] 때에 [[순교]]한 [[한국 천주교]]의 [[한국의 로마 가톨릭 성인|103위 성인]] 중에 한 사람이다. [[세례명]]은 '''베드로'''(Petrus)이다.
         홍병주와 [[홍영주]]는 [[당고개역|당고개]]에 있는 사형장으로 압송되어 [[참수]]되었다. 홍병주는 [[1840년]] [[1월 31일]]에 다섯 명의 교우와 함께 참수되었고, 홍영주는 다음날인 [[2월 1일]]에 두 명의 교우와 함께 [[참수]]되었다. 그렇게 홍병주가 [[순교]]하던 때의 나이는 43세였고, 홍영주가 순교하던 때의 나이는 40세였다.
         [[분류:1798년 태어남]][[분류:1840년 죽음]][[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분류:참수된 사람]][[분류:한국의 로마 가톨릭 성인]][[분류:19세기 기독교 성인]]
  • 홍영주
         |사망일 = [[1840년]] [[2월 1일]]
         '''홍영주'''(洪永周, [[1801년]] ~ [[1840년]] [[1월 31일]])는 [[조선]]의 [[천주교]] [[박해]] 때에 [[순교]]한 [[한국 천주교]]의 [[한국의 로마 가톨릭 성인|103위 성인]] 중에 한 명이다. [[세례명]]은 '''바오로'''(Paulus)이다.
         [[홍병주]]와 홍영주는 [[당고개역|당고개]]에 있는 사형장으로 압송되어 [[참수]]되었다. 홍병주는 [[1840년]] [[1월 31일]]에 다섯 명의 교우와 함께 참수되었고, 홍영주는 다음날인 [[2월 1일]]에 두 명의 교우와 함께 [[참수]]되었다. 그렇게 홍병주가 [[순교]]하던 때의 나이는 43세였고, 홍영주가 순교하던 때의 나이는 40세였다.
         [[분류:1801년 태어남]][[분류:1840년 죽음]][[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분류:참수된 사람]][[분류:한국의 로마 가톨릭 성인]][[분류:19세기 기독교 성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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