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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성수 (1891년)
         * 할머니 : [[증직|증]] 정부인 연일정씨(延日鄭氏, [[1831년]] ~ [[1911년]])
  • 성원묵
         본관은 창녕(昌寧)이다. [[1829년]] 감시에 장원으로 합격하여 바로 과거에 응시할 자격이 부여되어, [[1831년]](순조 31년)의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대사간, 대사헌 등을 거쳐 1851년 동지부사로 [[청나라]]에 다녀온 뒤 호조참판, 공조판서, 부호군, 의정부우참찬, 한성부 판윤, 예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본관은 [[창녕 성씨|창녕]]으로 자는 계연(季淵) 또는 중연(仲淵)이고, 시호는 효정(孝靖)이다.
         [[음서 제도|음보]]로 관직에 올라 [[동궁]]에서 근무하던 중 [[1829년]](순조 29)에 [[조선 문조|효명세자]]가 [[성균관]]에서 친히 주관한 감시(柑試)에서 장원으로 급제하여 바로 전시(殿試)에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을 얻었다. 소과와 대과를 거치지 않고 바로 1831년의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모사도감도청(模寫都監都廳)이 되고 이후 [[조선 헌종|헌종]] 초에 [[홍문관]]과 [[사간원]], [[사헌부]] 등 삼사의 요직을 두루 역임하고 [[1843년]]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승진, 행안변도호부사(行安邊都護府使)로 부임하였다. [[1846년]](헌종 12년) [[사간원]]대사간에 임명되었다. 이듬해에 [[성균관]][[대사성]]을 거쳐 [[1849년]](철종 즉위년)에 [[사헌부]][[대사헌]]에 임명되었으나 동반직인 절충장군(折衝將軍)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로 강등되었다.
  • 여흥부대부인
         **** 시어머니: 군부인 여흥민씨(驪興閔氏, ?년 - [[1831년]])
  • 오경석
         '''오경석'''(吳慶錫, [[1831년]]([[순조]] 31년) [[3월 5일]]([[음력 1월 21일]]) ~ [[1879년]]([[조선 고종|고종]] 16년) [[10월 7일]]([[음력 8월 22일]]))은 [[조선]] 후기의 역관, 외교관이자 정치인, 사상가이다. 작가이자 시인이며 서예가, 서화가였고, 고미술품 감정에도 식견을 갖추었다. 그는 조선왕조 19세기 중엽의 [[개화사상]]의 비조로서, 한국 최초의 개화사상가이다.<ref name="한국최초">{{서적 인용
         [[1831년]]([[순조]] 31년) [[3월 5일]]([[음력 1월 21일]]) 한성부에서 한어 역관인 오응현(吳膺賢)과 지중추부사 이의무(李義懋)의 딸 전주이씨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오응현은 [[중국어]]인 [[한학]][[역관]]으로 출사하여 관직이 지중추부사에 이르렀다. 할아버지 오계순(吳繼淳)과 증조부 오도원(吳道源)은 역관이었고, 고조할아버지 오필검(吳弼儉)은 [[혜민서]] 참봉이었다. 역관이었던 할아버지 오계순은 생전에 [[황해도]]와 [[충청남도]] 일대에 잠입해서 [[개신교]]를 전도하던 선교사 [[귀츨라프]]를 발견하여 그를 조사, 심문하였다. 할아버지 오계순에게 내려진 [[증직|증]] [[호조판서]] 벼슬은 아버지 오응현의 출세로 사후 증직된 벼슬이었다.
         [[분류:1831년 태어남]][[분류:1879년 죽음]][[분류:혁명가]][[분류:조선의 역관]][[분류:조선의 외교관]][[분류:조선의 철학자]][[분류:조선의 서예가]][[분류:조선의 화가]][[분류:조선의 시인]][[분류:조선의 작가]][[분류:과거 급제자]][[분류:서재필]][[분류:윤치호]][[분류:유길준]][[분류:사상가]][[분류:통역사]]<!-- 역관 -->[[분류:금석학자]][[분류:조선의 상인]][[분류:한국의 혁명가]][[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해주 오씨]][[분류:개화파]][[분류:통상 개화론자]]
  • 유진길
         유진길과 그의 동료들의 호소문으로 인하여 [[1831년]] [[9월 9일]]에 [[교황]] [[그레고리오 16세]]는 조선에 [[베이징]]에서 분리된 하나의 [[대교구|대목구]]를 설정했고 [[파리 외방전교회]]의 [[바르톨로메오 브뤼기에르]] [[사제|신부]]를 그곳의 초대 [[주교]]로 임명했다. 그 시작은 [[1826년]]의 그 서신이 교황의 마음을 움직인 데에서 비롯된 것이다.
  • 유홍기 (1831년)
         '''유홍기'''(劉鴻基, [[1831년]] ~ [[1884년]]?)는 [[조선 말기]]의 [[개화사상가]]이자 [[학자]]이자 [[정치인]]이였다. [[오경석]]과 동갑으로 [[한의사]]이다. 초기 개화사상가의 한 사람이며, 오경석(吳慶錫), [[박규수]](朴珪壽) 등과 함께 개화파 형성에 큰 영향을 끼쳤다.백의정승(白衣政丞), 산림정승이라는 별호로도 불렸다. 호는 대치(大致)로 따라서 '''유대치'''(劉大致)로도 불린다. 본관은 [[한양 유씨|한양]](漢陽)으로, 자는 성규(聖逵), 호는 대치(大致) 또는 대치(大癡), 여여(如如) 등이다.
         유홍기는 [[1831년]](순조 31년) [[한성(漢城)]]의 무관의 집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무과(武科)의 유익소(劉益召)이고, 할아버지는 경희궁 오위장을 지낸 가선대부(嘉善大夫) 유흥오(劉興五)이다. 또한 그의 형 유한기(劉翰基)는 대호군(大護軍)이었다. 그의 집안에서는 역관들이 다수 배출되었고, 의업에도 종사하였다. 그의 출신은 중인이었다고 한다. 본명은 홍기(鴻基)이고 호가 대치(大致)인데 흔히 유대치로 많이 알려졌다. 그의 가문에서는 역관 46명, 의관10명, 음양과(16명), 율과20명을 배출했다. 모두 합하면 잡과 합격자를 92명을 배출한 집안이다. 그의 집안을 [[역관]]의 집안으로 불리는데 손색이 없을것이다.
         [[1831년]] [[10월 14일]]에 태어난 한양유씨(漢陽劉氏) 유홍기(劉鴻基)는 한양유씨(漢陽劉氏)12세, 강릉유씨(江陵劉氏)20세이다.
         유홍기는 [[1831년]](순조 31년) [[10월 14일]]에 아버지 유익소(劉益昭)와 어머니 김해 김씨와의 사이에서 6남매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역관인 최영원(崔榮遠)의 딸 강릉 최씨와 결혼하여 외동아들 운두(運斗)와 두 딸을 두었다.<ref> 신봉승, 《신봉승의 조선사 나들이》 (출판사 답게, 1996) 261페이지. </ref>
         [[분류:1831년 태어남]][[분류:1884년 죽음]][[분류:조선의 문신]][[분류:조선의 정치인]][[분류:조선의 학자]][[분류:조선의 사상가]][[분류:조선의 철학자]][[분류:조선의 교육인]][[분류:조선의 한의사]][[분류:조선의 외교관]][[분류:조선의 역관]][[분류:한국의 혁명가]][[분류:암살된 사람]][[분류:의문사한 사람]]
  • 흥인군
         사망 1개월 뒤 일단 [[한성부]] [[용산방]]에 가매장 후 난이 진압되길 기다렸다가 [[충청남도]] [[대흥면|대흥군]](현 예산군 대흥면) 우정리 신좌원에 안치됐다. 그 후 [[예산군]] [[덕산면 (예산군)|덕산면]] 상가리의 아버지 [[남연군]] 묘소 아래로 이장됐는데 신도비문은 [[영의정]] [[홍순목]]이 짓고 글씨는 흥인군의 조카인 판종정경부사 [[이재원 (1831년)|이재원]]이 썼다. 현재는 후손들이 다른 곳으로 이장한 상태다.
         ** 어머니: 군부인 여흥민씨(驪興閔氏, [[1788년]] [[6월 26일]] ~ [[1831년]])
         ** 부인 : 군부인 증정경부인 연일정씨(延日鄭氏, [[1831년]] [[3월 29일]] - [[1852년]] [[3월 9일]]), [[현감]] 정명원(鄭明源)의 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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