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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권상하
         [[1694년]]의 [[갑술옥사]]로 [[남인]]이 몰락하였으나 관직을 사퇴하고 낙향, 학문 연구와 후학 양성에 전념했다. 그 뒤 [[1698년]](숙종 24년)에 특별히 호조 참의(戶曹參議)로 승진시켰다가 이조 참의(吏曹參議)가 되어 [[세자시강원]]찬선(贊善)과 [[성균관]]좨주를 겸하였다. [[1701년]] [[희빈 장씨]]의 취선당 저주 사건으로 [[무고의 옥]]이 터져서 [[남인]]이 완전히 몰락하였으나 그는 출사하지 않고 학문 연구에 전념하였다. [[1703년]] [[세자시강원]] 찬선으로 나갔다가 [[1704년]] 특명으로 호조참판으로 승진하였다. 그해 [[이조]][[참판]], 찬선을 거쳐 [[1705년]] 관작을 사퇴하고 물러났는데, 바로 [[대사헌]]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였다. 이때부터 1716년까지 13년간 해마다 대사헌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였다.
  • 김상로
         *** 형님 : [[좌의정]] [[김약로]](金若魯, [[1694년]] ~ [[1753년]])
  • 김상로 (1702년)
         *** 형님 : 좌의정 김약로(金若魯, [[1694년]] ~ [[1753년]])
  • 김춘택
         [[조선 숙종|숙종]] 때 [[기사환국]]으로 종조부 [[김만중]]과 가문의 당파인 [[서인]]이 실각하여 자신도 수차례 위기를 맞았지만 숙종의 첫 정비인 [[인경왕후]] 김씨의 친정 조카인 덕분에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고 여전히 궁 출입도 자유로웠다. 이러한 배경 조건과 재물을 이용해 [[1694년]](숙종 21) 갑술옥사(甲戌獄事) 직전 인현왕후 복위를 은밀히 추진하여 [[갑술환국]]과 폐비 민씨의 복위를 성공시켰다. [[희빈 장씨]]의 오빠 [[장희재]]의 처를 유혹하여 간통한 뒤 그로부터 [[남인]]측의 중요한 정보를 입수했고, [[갑술옥사]] 이후 [[1701년]]의 무고의 옥으로 [[남인]]을 일망타진하는데 성공한다.
  • 박세채
         | 임기 = 1694년 ~ 1695년
         청음 [[김상헌]], [[김집 (1574년)|김집]]의 문인이다. 회니시비(懷尼是非)를 계기로 [[송시열]]과 [[윤증]]이 갈등하자 양자를 화해시키려 노력했으나 실패한다. [[1694년]]부터는 [[대동법]]의 재실시를 주장하여 전국으로 확대시켰다. [[서인]]이었다가 허새(許璽)의 옥사를 계기로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분당되자 [[소론]]을 결성하고 소론의 영수가 되었다.
         [[허영 허새의 옥사]]가 무고, 날조로 밝혀지자 그는 사건을 무고, 확대시킨 [[김익훈]], [[김석주]]의 처벌을 주장했다. [[1683년]] [[김익훈]], [[김석주]]의 처벌문제를 놓고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분당되자 [[윤증]], [[나량좌]], [[최석정]](崔錫鼎), [[박세당]], [[남구만]] 등과 [[소론]]의 지도자가 되었다. 그러나 [[인현왕후]]를 폐위시키려는 [[남인]]에 대한 적개심은 버리지 않았고, [[1694년]] [[노론]]의 [[김춘택]] 등에 협력하여 [[남인]] 축출을 지지한다.<ref>남인에게 화해하자는 윤증과도 이견대립을 하게 되었다.</ref>
         [[1694년]] 그는 [[남구만]], [[윤지완]] 등과 함께 [[이이]], [[성혼]]에 대한 [[성균관]] 문묘종사 문제를 문묘종사 쪽으로 확정시키는 데 크게 기여하였으며, [[김육]]의 [[대동법]]의 재실시를 적극 주장하여 전국 확산에 기여하였다.
  • 박태한
          | 임기 = [[1694년]] ~ [[1698년]]
         그의 [[본관]]은 [[고령 박씨|고령(高靈)]]이고 자(字)는 교백(喬伯)이며 [[윤증]](尹拯)의 문하에서 수학한 그는 [[조선 숙종|숙종]] 치세 시기였던 [[1694년]]에 별시문과 을과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 관직에 발탁되었지만 병약하여 과거 급제 4년여만에 요절하였다.
  • 오시만
         [[1680년]](숙종 6년) 이조좌랑을 거쳐 [[경신대출척]]으로 파면되었다가 [[1689년]] [[승지]]에 오르고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중용되면서 1690년 대사헌에 올랐으나 부당하다 하여 다시 승지로 전임되었다. 1694년(숙종 20) [[갑술환국]]으로 유배되었다. [[서인]] 인사 일부와도 인척관계였으나 [[허새의 옥사]]를 전후하여 원수가 되었다. 본관은 [[동복 오씨|동복]]이며, 자는 영석(永錫), 호는 춘헌(春軒)이다.
         [[1689년]] [[승지]]에 머물렀다. 그해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복귀하자 [[1691년]] 대사헌에 이르렀으나 부당하다 하여 다시 승지로 전임되었다. [[1692년]] [[좌승지]]가 되었다가 우부승지 이현조가 오정위를 공격하자 피혐으로 사직을 청하였으나 숙종이 반려시켰다. [[1694년]](숙종 20년) [[갑술환국]]으로 [[남인]]이 실각되자, 바로 삭탈관직되고 유배당하였다. 지조가 깨끗하고 겸허 담백하였으나 [[1694년]] 당화(黨禍)(갑술환국)를 입어 [[전라북도]] [[전주시|전주]], [[전라남도]] [[무안군|무안]] 등지로 10여년간 유배살이를 하였다.
  • 윤선도
         [[1694년]](숙종 20년) [[갑술환국]](甲戌換局)으로 [[서인]]이 집권하고 [[남인]]이 거세되면서 관작이 다시 추탈되었다가 [[1697년]] 다시 복권되었다.[[1701년]](숙종 27년) [[무고의 옥]]으로 다시 관작이 추탈되었다가 [[조선 정조|정조]] 때인 [[1795년]](정조 19년) [[10월]] [[조선 정조|정조]](正祖)의 특명으로 다시 복권되었다. 그의 증손 공재 [[윤두서]]의 외손이 [[정약용|다산 정약용]]으로, [[정약용]]은 [[조선 정조|정조]] 때의 [[남인]] 문신이자 500여 권의 저서를 남긴 저명한 학자였다.
  • 윤휴
         사후 [[1689년]](숙종 15년) [[3월]] 신원되어 [[증직|증]]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에 추증되었으나 [[1694년]](숙종 20) [[갑술환국]]으로 서인이 집권하고 남인이 거세되면서 관작이 다시 추탈되었고, 여러 번의 추탈과 복작을 반복하다가 [[1908년]](융희 2년) [[4월]] [[이완용]]의 상주로 최종 복권되고, 죄안에서 삭제되었다. 그의 학문은 [[이서우 (1633년)|이서우]]를 거쳐 [[이익 (1681년)|성호 이익]]과 [[안정복]], [[신후담]], [[정약용]] 등에게로 계승되었다.
         [[1694년]](숙종 20) [[갑술환국]]으로 [[서인]]이 집권하고 [[남인]]이 거세되면서 관작이 다시 추탈되었다가 [[1697년]] 다시 복권되었다. 그러나 [[1701년]](숙종 27년) [[무고의 옥]]으로 다시 관작이 추탈되었다. [[조선 정조|정조]] 때인 [[1795년]](정조 19년) 다시 복권되었다. 그의 후손들 역시 금고령이 내려져 관작에 제한을 받다가 [[1790년]](정조 14년) 윤휴의 5대손 [[윤지범]](尹持範)이 다시 해금되어 출사하게 되었다.<ref>[http://history.catb.kr/new_sabo/edu_view.asp?h_id=230 조선 후기 星湖學派의 形成과 分岐에 대한 연구:부산천주교회사보 13]{{깨진 링크|url=http://history.catb.kr/new_sabo/edu_view.asp?h_id=230 }}</ref> 그러나 [[1801년]](순조 1년) [[남인]]이 거세당하면서 다시 추탈되고, 자손들의 관직 역시 박탈되고 금고당하였다.
  • 이의립
         '''이의립'''(李義立, [[1621년]] [[울산광역시]] ~ [[1694년]])은 조선시대 인물로 유황 제조법을 발견하였다. 유황과 무쇠가 모두 한국에서 생산되지 않자 이를 찾는 데 일생을 바친 인물이다. 38세 되던 [[1657년]] 1월에 달천의 달산에서 무쇠를 발견하였고, 2년 뒤 토철을 용해하는 제련법을 터득하였다. 이듬해는 궁각 280통, 함석 100근, 새철 1000근, 세면포 100필, 주철환 73만 개, 부정 440좌 등을 만들어 훈련도감에 바쳤다. 이에 조선 현종은 그에게 동지중추부사의 벼슬을 하사했다. 또한 그는 유황을 발견하고 유황 제조법을 알아 약용으로 쓰게 하였다. 이렇게 이의립이 나라에 바친 공이 컸으므로 조선 숙종은 그의 3대에 가선대부의 벼슬을 증직하는 한편 달천광산을 하사하였다. 달천광산을 소유하게 된 이의립은 종손이 이를 대를 이어 관리개발하게 하였고 13세손 이은건이 [[1910년]] [[한일 병합 조약|한일 국치조약]] 때까지 광산을 경영하였다. '문집 12권'을 남겼다.
         [[분류:조선의 기술자]][[분류:울산광역시 출신 인물]][[분류:1621년 태어남]][[분류:1694년 죽음]]
  • 희빈 장씨
         |재위 = [[1686년]] ~ [[1688년]](후궁:숙원)<br />[[1688년]] ~ [[1689년]](후궁:소의)<br />[[1689년]](후궁:빈)<br />[[1694년]] ~ [[1701년]](후궁:빈)
         |재위2 = [[1689년]] ~ [[1694년]]
         1693년 2월, 중전 장씨의 머리 부위<ref group="주">승정원일기 본문에는 뇌후(䐉後)로 기록되어 있다.</ref> 의 절환(癤患: 부스럼증)과 창증(瘡症: 종기)이 감소하였다는 기록과 의녀의 시침 기록이 승정원일기 중에 다수 존재하며, 숙환(=오랜 병, 고질병)으로 담화(痰火)<ref group="주">효종의 비(妃) [[인선왕후]]가 담화로 사망했다.</ref> 가 있어(宿患痰火之症) 1694년, 후궁으로 강봉되기 직전까지 치료법에 대한 논의와 뜸을 받은 기록이 존재한다.<ref group="주">왕후와 세자빈의 중병은 국사(國事)로 간주되어 조정에서 논의되기에 기록으로 남지만 후궁의 병은 논의되지 않는다. 따라서 장씨의 병이 후궁으로 강봉된 후에도 지속되었는지의 여부는 알 수 없다. 다만 1701년 무고의 옥으로 궁녀들이 국문을 받을 당시에 장씨의 건강이 좋지 않다는 언급이 있다.</ref>
         [[1694년]](숙종 20)에 서인의 [[김춘택]](金春澤)·[[한중혁]](韓重爀) 등이 폐비의 복위 운동을 꾀하다가 고발되었다. 이때에 남인의 영수이자 당시 우상(右相)으로 있던 [[민암]](閔黯) 등이 이 기회에 반대당 서인을 완전히 제거하려고 김춘택 등 수십 명을 하옥하고 범위를 넓히어 일대 옥사를 일으켰다.
         갑술환국이 발발 후 12일 째가 된 1694년 4월 11일, [[조선 숙종|숙종]]은 돌연 [[장희재 (조선)|장희재]]를 긴급구속하고, 훗날 길일을 잡아 서궁([[덕수궁]])으로 입처할 폐비 민씨([[인현왕후]])의 서궁 입처를 길일과 상관없이 당장 다음날로 할 것을 명하며 민씨의 사가에 수직(호위)를 붙였다. 그리고 다음날 폐비 민씨가 서궁으로 입처했다는 소식이 전달되자 "민씨가 스스로 죄를 간절히 뉘우치고 있으며, 두 자전(慈殿: [[장렬왕후]]와 [[명성왕후]])의 삼년상을 함께 보낸 아내이니 쫓아냈던 것은 지나친 처사<ref group="주">삼불거를 뜻한다. 칠거지악을 범한 아내일 지라도 삼불거에 해당되면 소박할 수 없으며, 이미 소박하여 새로이 혼인을 하였더라도 전처가 국가에 소송하면 이혼이 취소되어 새로운 아내는 첩으로 강등되거나 친정으로 돌아가야 한다.</ref> 였다."며 민씨를 중전으로 복위하고 "백성에게 두 임금이 없는 것은 고금을 통하는 의리이다"며 중전 장씨의 왕후새수(王后璽綬)를 거둬 희빈(禧嬪)의 옛 작호를 돌리고 거처를 옛처소인 창경궁 취선당으로 옮기라는 비망기를 내린다. 이에 대해 환국을 위해 투합했던 [[노론]]과 [[소론]]이 강경히 대립하게 되는데, 이는 [[노론]]은 [[인현왕후]]의 복위를 목적했고, [[소론]]은 희빈 장씨를 왕비로 둔 채 [[인현왕후]]를 폐서인인 상태로 별궁에 모셔 편안한 여생을 맞기만을 목적했던 탓이다.
         기록의 진실성은 차치하더라도 조선 시대의 신분법 상 희빈 장씨를 얼녀 출신 천민으로 계산하기에는 오차가 있다. 희빈 장씨의 생모인 윤씨는 첩이 아닌 엄연한 정실 부인인 계실이었으며, 남의 집 여종을 첩도 아닌 정처로 삼기엔 [[장형 (조선)|장형]]의 사회적 위치 및 조건이 결코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ref group="주">남의 집 여종을 아내로 삼은 자를 비부(婢夫)라 하는데, 비부는 아내의 주인 집에 종속되어 그 집안의 대소사에 노동력을 제공해야 할 의무가 있으며 자식은 탄생한 즉시 주인집의 사유재산이 된다. 이러한 한계때문에 자신의 남종이 남의 집 여종과 혼인하는 것을 엄격히 금지하여 노인이 되도록 혼인을 못하는 경우가 많아 사회적 문제가 되었으며, 지극히 가난하여 나이를 먹도록 혼인을 하지 못한 양인 남성이 생계를 유지하고 대를 이을 목적으로 비부를 자청한 것이 당시의 현실이었다. 실록 등에 기록된 강력 범죄 사건에 비부가 자주 등장하는 것은 비부가 법적으로는 그 가문의 종이 아니기에 사례를 조건으로 주인의 범죄를 대리시켰거나 덮어씌운 결과인데 이는 비부의 사회적 위치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ref> 첩을 처로 만들 수 없는 조선의 국법<ref group="주">[[윤원형]]이 첩 [[정난정]]을 처로 만든 전례가 있어 첩을 처로 만드는 것이 흔한 일인 양 오해되고 있지만 [[윤원형]]이 [[문정왕후 (조선)|문정왕후]]의 사후에 관직을 잃고 유배되었던 공식적인 이유는 국법을 어기고 첩을 처로 만들었다는 죄목때문이었다. 조선 사회에서 첩실을 정실로 격상할 수 있는건 왕과 왕세자 뿐으로, 이 또한 1701년 이후로 금지되었다.</ref> 과 윤씨 소생 아들인 [[장희재 (조선)|장희재]]가 무과(武科)로 등용<ref>옥산부원군신도비 기록</ref> 되어 [[1680년]]에 내금위에 재직<ref>숙종실록 27년(1701 신사 / 청 강희(康熙) 40년) 10월 22일(을해) 3번째기사 中 동평군 이항의 공초내용</ref> 하였고 [[1683년]]에 좌포도청 부장에 재직<ref>숙종실록 12년(1686 병인 / 청 강희(康熙) 25년) 12월 10일(경신) 4번째기사</ref> 하였던 점<ref group="주">선조16년 병조판서였던 [[이율곡|이이]]의 주청으로 납속을 낸 서얼을 허통하여 무과에 입시하는 것이 허락되었으나 숙종시대에 이르러서도 여전히 청요직은 허락되지 않았으며 무과에 합격한 서얼은 관직은 받지 못한채 무기 발령대기 상태로 남거나 지방 군졸로 발령, 혹은 외적의 침입이 잦은 국경으로 발령되는 한계가 있었다. 이러한 시대에 중인 역관의 얼자가 [[내금위]]에 재직하고 경내 좌포도청에 부장으로 재직한다는 것은 무리한 일이다. 희빈 장씨가 숙종의 후궁이 된 건 1686년 12월이니 누이의 후광을 입었다고 볼 수 없다.</ref>, [[1689년]] 11월 13일 윤씨를 당하관인 역관의 처로 언급한 윤덕준(尹德駿)의 상소내용<ref group="주">조선시대에는 처와 첩, 적서의 구분을 명확히 구분하여 언급하거나 기록하였다.</ref>, [[1698년]]에 사망한 윤씨가 남편 [[장형 (조선)|장형]]과 전처 제주 고씨의 옆에 나란히 매장된 것<ref group="주">첩은 가문의 묘산에 매장되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며 특별히 매장되더라도 남편 부부의 무덤에서 떨어진 음지나 발치 아래에 묻어 정처와 확고한 차별을 두었다. 희빈 장씨는 1694년에 강봉되었으며 오빠 장희재가 [[노론]]의 공격으로 목숨이 위태로웠던데다가 왕세자인 아들 [[조선 경종|경종]]은 [[인현왕후]]에게 입적되어 [[노론]]이 이미 모자의 연이 끊겼다고 주장했던 만큼 만약 윤씨가 첩으로서 처와 동등하게 매장되었다면 당시 탄핵이 되지 않았을 리 없으며 희빈 장씨의 사후나 경종의 사후에도 반드시 탄핵이 있었어야 정상이다.</ref> 은 희빈 장씨가 낳은 아들이 원자가 되어서나 그녀가 왕비가 되어 [[조선 숙종|숙종]]이 특별히 장씨의 생모를 첩에서 처로 승격해주었을 가능성조차 극히 희박함을 증명한다. 이는 윤씨가 설사 여종 출신이었더라도 이미 면천한 후에 [[장형 (조선)|장형]]의 계실이 되어 장씨 남매를 낳았음을 뜻하는데, 그렇다면 장씨 남매에게는 노비 종모법이 적용되지 않아 이들의 신분은 아비를 따라 중인이 된다. 물론 윤씨가 애초에 종 출신이 아니었을 가능성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ref group="주">종(奴婢)의 정의에는 '남에게 얽매이어 그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라는 뜻도 있다. 조사석의 처인 권씨는 권문세가의 딸이고 윤씨는 역관의 딸이었던 만큼 두 사람이 교류하였던 것을 신분의 위계 상 윤씨를 종으로 비유했을 가능성도 존재한다. 이런 식의 말장난은 [[민진원]]의 특기이기도 했다는 점이 유의사항이다.</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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