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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권상하
         일찍이 [[유계]]의 문하에서 배우다가 송시열과 송준길의 문하에서 배웠고 특회 송시열의 총애를 받았다. [[1660년]](현종 1년) [[진사]](進士)가 되고 [[성균관]] 유생으로 수학하였으나 관직을 단념하고 학문 연구와 후학 양성에 힘을 쏟았다. [[1672년]] 스승 [[송준길]]의 임종을 지켰고, [[1689년]] [[송시열]]이 국문을 받으러 가다가 사사당할 때는 스승 [[송시열]]의 임종을 지켰다. 두 스승이 죽은 뒤에는 3년상을 마쳤다. 대과에 급제하지 않고도 [[의정부]][[좌의정]]까지 역임하였다. [[송시열]]의 유언을 받들어 화양동(華陽洞)에 [[만력제]]와 [[숭정제]]를 모신 사당인 [[만동묘]](萬東廟)와 대보단(大報壇)을 세워 두 황제를 추모하였다.
         [[1672년]] 스승 [[송준길]]의 임종을 지켰다. 그 뒤 스승 [[송준길]]의 3년상을 마쳤다. [[1674년]] 예송 논쟁으로 [[서인]]이 실각하고 [[송시열]]의 죄를 묻는 [[남인]]유생들의 상소가 계속되자, 권상하는 스승 [[송시열]]을 변호하는 상소를 올린 뒤 낙향, 제자들을 모아 산속에 들어가서 유학을 가르쳤다.
  • 김만기 (1633년)
         [[1671년]] [[예조]][[참판]]으로 승진한 뒤 [[승문원]] 제조, [[오위도총부]] 부총관, [[관상감]] 제조, [[병조]][[참판]] 등을 거쳐 1672년 [[성균관]][[대사성]]과 부제학으로 전보되었다가 [[홍문관]]과 [[예문관]] 양관의 [[대제학]]을 겸직하고, 지성균관사, 동지경연사에 동지의금부사를 겸직했다. [[1673년]] [[병조]][[판서]], [[춘추관]]지사, [[예조판서]]로 옮겨 [[정헌대부]]로 승진하고, [[1674년]] 보국, [[돈령부]]영사가 되었으며 2차 예송 논쟁 때에는 3년복설을 주장하였다. [[오위도총부]] 도총관, [[호위대장]], [[전생서]] 제조를 역임했다. [[1680년]] [[김석주]], [[김익훈]] 등과 함께 [[남인]] 타도에 앞장섰다. [[1680년]] [[허영]], [[허새]]의 옥사를 다스린 공로로 분충효의병기협모[[보사공신]] 1등관에 책록되고 [[풍정도감]] 도제조를 역임했다. 사후 [[불천지위|부조지전]]을 받고 [[1719년]](숙종 45) 현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1671년(현종 13) 딸이 세자빈이 되었고, 이후 가선대부 예조참판으로 승진, 승문원 제조, [[도총부]] 부총관, 관상감 제조를 겸했다가 병조참판으로 옮겼다. [[1672년]] 성균관 [[대사성]]이 되고 곧 [[부제학]]으로 전보되었다가 [[홍문관]]과 [[예문관]] 양관의 [[대제학]], 지성균관사, 동지[[경연]]사에 동지[[의금부]]사를 겸임했다. 1673년 영릉(寧陵)을 옮길 때 산릉도감(山陵都監)의 당상관이 되었으며<ref name="다음"/>, 다시 복상문제가 발생하자 1674년 7월에 병조판서(兵曹判書)로서 다시 자의대비의 복제에 대하여 상소(上疏)를 올려 3년상을 주장하였다. 그 해 [[병조]][[판서]]에 지[[춘추관]]사를 겸했다.
  • 송준길
         '''송준길'''(宋浚吉, [[1606년]] [[12월 28일]] ~ [[1672년]] [[12월 2일]])은 [[조선]]시대 후기의 문신·성리학자·정치가로서 유교 주자학의 대가였다. [[문묘]]에 종사된 [[동방 18현|해동 18현]] 중의 한 사람이다.
         송준길이 말년인 1672년 쓴 기몽 친필. (대전광역시 유형문화재 제50호)
         [[1670년]] 세자의 관례식에 참석한 뒤 낙향하였으며, 이후 회덕 향리에 은거하다가 [[1672년]]에 병으로 사망하였다. 저서로는 《어록해 語錄解》·《동춘당집》이 있으며, 글씨로는 부산의 충렬사비문(忠烈祠碑文), 남양의 윤계순절비문(尹啓殉節碑文) 등이 있다. 사망 당시 그의 향년 66세였다.
         [[분류:1606년 태어남]][[분류:1672년 죽음]][[분류:사상가]][[분류:조선의 문신]][[분류:조선의 성리학자]][[분류:조선의 철학자]][[분류:조선의 정치인]][[분류:조선의 교육인]][[분류:과거 급제자]][[분류:송시열]][[분류:허목]][[분류:예송 논쟁 관련자]][[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조선의 작가]][[분류:조선의 저술가]][[분류:서예가]][[분류:조선 효종]][[분류:은진 송씨]][[분류:서인]][[분류:노론]][[분류:17세기 한국 사람]]
  • 어진익
         [[1670년]] 모친상을 당해 사직, 3년상을 마쳤다. [[1672년]] [[사헌부]]장령(掌令)이 되고 [[종부시]]정이 되었다가, 그해 다시 [[사헌부]]장령에 재임명되었다. [[1672년]](현종 13) [[7월 8일]] 지평 정유악(鄭維岳)과 함께 이민적을 [[인동]][[부사]]에 제수한 명령을 잘못되었다며 철회해 달라고 요청했다가 외직으로 보내라는 명을 받았다. 그러나 다시 이의를 제기하여 파직당하고, 추고받았다.
         ** 아들 : [[어유봉]](魚有鳳, 1672년 ~ 1744년)
  • 윤선도
         [[1672년]] [[12월]] [[조선 현종|현종]]은 특명을 내려 선왕과 자신의 스승이던 그의 직위와 작첩을 되돌려주라 명하였다.
  • 윤휴
         * 사돈 : [[권시]](權諰, 호는 탄옹, [[1604년]] - [[1672년]])
  • 허목
         허목에게는 또 30년 이상 나이차이가 나는 서제(庶弟)가 몇명 더 있었는데, 아버지의 첩에게서는 [[허달]](許達)과 또다른 서모에게서는 [[허순]](許順)이라는 이복 동생들이 태어났다. 이복 동생 허순(許順)은 [[조선 현종|현종]] 때인 [[1672년]] [[무과]]에 급제하였다.<ref>[http://people.aks.ac.kr/front/tabCon/exm/exmView.aks?exmId=EXM_MU_6JOb_1672_009959&isEQ=true&kristalSearchArea=B 허순-무과 합격 기록]</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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