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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장생
         또한 예학을 깊이 연구하여 아들 [[김집 (1574년)|김집]](金集)에게 계승시켜 조선 예학의 주류를 형성하여, [[동방 18현]]의 한 사람이 되었다. 인조는 여러 번 그를 불렀으나 출사하지 않자, 1629년(인조 7) 윤 4월에 왕이 마차를 보내 '마차를 타고 오라'고 하교 하였으나 상소하여 사양하니, 왕이 비답을 내려 '경은 이 나라의 대로요 덕행이 뛰어나니..... 바야흐로 자리를 비워놓고 기다리노니 경은 다시 사양하지 말라'하였으나 글을 올려 정중히 사양했다. [[1630년]](인조 8) [[가의대부]]로 승차하였다. 그해 조정에서 다시 [[형조]][[참판]]에 제수하여 불렀으나 고사하였다.
  • 능창대군
         그가 자결한 것을 알지 못한 [[광해군]]은 [[11월 19일]] 의원을 보내 그의 병구완을 하라는 지시를 내렸다가, 그의 자결 소식을 접하게 된다. 광해군은 [[현감]]과 [[별장]] 등을 처벌하였다. [[술]]을 좋아하던 [[정원군]]은 이 일로 [[홧병]]을 얻어 [[술]]을 더 마시다가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1623년]](광해군 15) [[3월]] [[인조 반정]] 이후 [[3월 15일]] [[김제시|김제남]], [[영창대군]], [[진릉군]] 이태경 등과 함께 복권되었고, 처음 [[증직|증]] [[가덕대부]](贈嘉德大夫)에 [[추증]]되었다가 [[1629년]](인조 7년) [[10월 15일]] 인조의 특명으로 다시 [[증직|증]] [[현록대부]](贈顯祿大夫)로 가증(加贈)되었으며, [[1630년]] 정원대원군이 논란 끝에 원종으로 추존되면서 1632년(인조 10년) [[5월 4일]] 능창대군으로 추봉되었다. 따라서 그의 묘비는 증 능창대군 묘라 이름하게 되었다.
  • 문충공
         * [[이항복]](李恒福, [[1556년]] ~ [[1618년]])<ref>[[1630년]](인조 8)에 내려졌다.</ref>
  • 문희공
         * [[송규렴]](宋奎濂, [[1630년]] ~ [[1709년]])<ref>[[1726년]](영조 2)에 내려졌다.</ref>
  • 유평 (1577년)
          | 임기 = [[1624년]] ~ [[1630년]]
  • 윤선도
         [[1629년]] 왕자사부로 [[공조]][[좌랑]](工曹佐郞)을 겸하고, [[형조]][[정랑]](刑曹正郞)이 되었다. [[1630년]](인조 8년)초 병으로 공조좌랑을 사직했다. 그러나 그해에 [[공조]][[정랑]], [[한성부]][[서윤]](漢城府庶尹)을 거쳐 [[1630년]] [[8월 1일]] [[어모장군]](禦侮將軍) 행[[용양위]][[부사과]](行龍驤衛副司果)로 전임되었다. [[1630년]] [[10월]] 별시(別試) 초시(初試)에 합격한 뒤 12월 특명으로 공조정랑(工曹正郞)을 제수받고 사부(師傅)도 겸직하였다.
         ** 둘째 아들 : 일직 요절(? - [[1630년]] 이전 사망)
  • 윤흔
         [[1630년]](인조 8년) 행[[용양위]][[부호군]]으로 전직되었다가 그해의 임오년(1582년) 사마시 합격자들의 모임에 참여하고, 임오년사마방회도에 기록되었다. [[공조]][[참판]]이 되었다가 [[1632년]] [[예조]][[참판]]이 되고, 1632년에는 예조참판으로 인목대비(仁穆大妃)의 [[국장]] 업무를 주관하였고, 다시 공조참판이 되었다가 다시 예조참판이 되어 1635년에도 예조참판으로 재직하며 [[조선 인조|인조]]의 정비 [[인열왕후]](仁烈王后)의 국장업무를 주관하였다.
  • 이득윤
         '''이득윤'''(李得胤, [[1553년]] ~ [[1630년]])은 [[조선]] 중기(선조-광해군)의 정치가·학자·음악 이론가이다. 자는 극흠(克欽), 호는 서계(西溪), 본관은 [[경주 이씨|경주]]이다. 고려 말 문신 [[이제현]](李齊賢)의 후손이다. [[1588년]](선조 21년) 진사가 된 뒤, 참봉, 형조좌랑, 괴산(槐山)군수를 지냈다. 서기(徐起)의 문하에서 공부하여 [[역학 (철학)|역학]](易學)에 뛰어났다. [[음악]]에도 조예가 깊어 [[1620년]](광해군 12년) 〈현금동문유기(玄琴東文類記)〉를 엮어서 세상에 내놓아 [[거문고]]의 법도(法道)를 바로 전하게 하였다. 음악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특히 여러 금보 및 그 저자와 [[거문고]] 대가에 대하여 다룬 것을 보면, 그가 음악에 조예가 깊고 상당히 박학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저서로 〈서계집(西溪集)〉이 남아 있다. 묘소는 [[충청북도]] [[청원군]] 미원면(米院面) 가양리(佳陽里) 인경산(引頸山) 아래에 있다. [[청주]] [[신항서원]](莘巷書院)과 [[청안군|청안]](淸安)의 [[구계서원]](龜溪書院)에 제향되어 있다.
         [[분류:1553년 태어남]][[분류:1630년 죽음]][[분류:충청북도 출신 인물]][[분류:조선의 음악가]][[분류:조선의 학자]][[분류:경주 이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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