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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류순정
         '''류순정''' (柳順汀, [[1459년]] ~ [[1512년]])은 [[조선]] 전기의 문신, [[성리학자]]이자 [[사림파]] 정치인의 한사람으로 [[1506년]]의 [[중종 반정]]에 참여하였다. [[사림파]] 출신으로 처음 공신에 책록된 정치인이었다.
         과거 급제 후 [[조선 연산군|연산군]] 때 [[홍문관]]과 삼사의 요직을 거쳐 참판, 이조판서 등을 지냈으나 [[1506년]]의 [[중종 반정]]에 가담하여 일등공신이 되었다. 관직은 [[의정부시|의정부]] 에 이르렀고 청천부원군에 이르렀지만 동문 선후배들로부터 외면당하였다. 자는 지옹(智翁), 시호는 무안과 문성, 본관은 [[진주 유씨|진주]]이다. 점필재 [[김종직]]의 문인이다.
         그 뒤 [[연산군]]의 조정에서 [[이조판서]]에 임명되었으나 [[1506년]] [[이조판서]]로 [[박원종]](朴元宗), [[성희안]](成希顔), [[홍경주]] 등과 함께 반정을 모의하기 시작하였다.
         [[1506년]]초 [[박원종]] 등이 [[김종직]]의 문하생인 유순정과 [[성희안]], [[남곤]] 등에게 사람을 보내 [[중종 반정]]을 지지해주고 협력해줄 것을 요청했다. 할머니인 [[인수대비]]를 때려죽이고, 아버지 [[조선 성종|성종]]의 첩 두 명과 이복 동생 두 명을 때려죽인 [[연산군]]을 도덕적 패륜아라고 규정한 유순정은 [[성희안]]과 함께 적극 호응하여, 반정에 가담하였다. 그해의 [[중종 반정]]에 병력을 동원, 반정이 성공하면서 이후 [[이조판서]], [[대사헌]]을 겸임하였다.
         [[1506년]] [[성희안]], [[박원종]]과 함께 [[중종반정]]을 일으켜 성공, 청천군(菁川君)에 봉해지고 숭정대부(崇政大夫)에 올랐다. 이어 [[정국공신]] 1등(靖國功臣一等)에 책록되고 대광보국숭록대부로 특진, 청천 [[부원군]](菁川府院君)에 봉해졌다. 이어 [[병조판서]]로서 영경연사(領經筵事)를 겸임하면서 폐지한 [[경연]]부활에 앞장섰다. 이어서 [[우의정]]이 되고 다시 병조판서에 임명되어 우의정으로 [[병조판서]]를 겸직하고 [[1507년]] 이과(李顆) 등이 [[견성군]](甄城君)을 추대하고 역모를 꾸미는 것을 적발, [[이과]]의 옥사를 다스려 [[정난공신]](定難功臣) 1등관에 책록되었다.
  • 문광공
         * [[홍귀달]](洪貴達, [[1438년]] ~ [[1504년]])<ref>[[1506년]](중종 원년)에 내려졌다.</ref>
  • 박상
         [[1506년]]([[연산군|연산군 12년]])에 전라도(全羅道) 도사(都使-종5품 외직<ref>도사(都使): 팔도(八道) 감영(監營)의 종오품 관직으로 감사(監司: 觀察使, 從二品)의 다음 관직이며 정원은 1원이다. 지방관리(地方官吏)의 불법(不法)을 규찰(糾察)하고 과시(科試)를 맡아보았다.</ref>)에 자원, 연산군을 믿고 전횡을 일삼던 우부리(牛夫里)<ref>우부리(牛夫里): 연산군이 총애를 받던 모 후궁의 아비. 나주 천민임에도 왕의 권세를 믿고 온갖 패악을 부려 지역 민심이 어지럽고 흉흉할 정도였다. 전라도 관찰사(외직의 최고직, 각 도의 군주)조차 후환이 두려워 그 전횡을 두고 볼 수밖에 없었다 한다.</ref> 를 곤장으로 때려죽이고 [[금강산]] 정양사(正陽寺)에 숨었다가 곧 [[중종반정]]으로 서울에 돌아왔다.
         [[1506년]]([[조선 중종|중종 1년]]) [[중종반정]] 후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허락받고 [[사간원]](司諫院) 헌납(獻納-<small>정5품,대간(臺諫)</small>)이 되자마자 반정공신 책정의 난맥상을 줄기차게 지적했다. 중종으로서는 그들의 추대로 즉위한지라 눌재의 간언이 크게 부담스러웠다. 게다가 그는 왕실 종친들의 중용을 극구 반대하는 한편 훈구공신들의 전횡에 대해 끊임없이 탄핵 상소를 올린 끝에 결국 임금과 [[훈구파]] 모두의 공분을 샀다. 곧 그는 한산군수(韓山郡守-종4품)로 발령됐는데 이는 품계만 올린 사실상의 좌천이었다. [[사헌부]]가 [[대간]](臺諫)을 외직으로 돌리다니 말도 안된다고 임금과의 말씨름을 1년이나 끌자, 중종은 할 수없이 [[종묘|종묘서]] 령(宗廟署令-종5품), [[소격서]] 령(昭格署令-종5품)등 한직을 내렸고 마음이 상한 눌재는 모친 봉양을 핑계로 임피(臨陂-<small>전북 군산</small>)현감(縣監-종6품)을 자청해 자신이 품계에 연연하는 것이 아님을 보이고는 궁을 떠나버렸다.
  • 박원종
         승평부부인이 자결하자 [[조선 연산군|연산군]]에게 앙심을 품고 정변을 준비, [[유순정]], [[성희안]] 등을 포섭하여 [[1506년]] [[중종반정]]을 기획한다. 중종반정 직후인 [[1506년]] [[9월]]에서 이듬해 [[1507년]] [[8월]]까지, 그리고 1509년에서 15010년가지 두 차례로 [[조선 중종|중종]] 임금을 보좌하여 [[섭정]]을 맡았다. [[사육신]]의 한 사람인 [[박팽년]]의 일족이기도 하다.
         [[1506년]] [[성희안]], [[유순정]] 등과 함께 중종 반정을 일으켜 [[연산군]]을 폐위시키고 진성대군을 [[조선 중종|중종]]으로 옹립하는데 주동적 역할을 맡아 [[정국공신]] 1등에 책록되었다. 반정의 1등 공신이며 먼 친척의 딸을 수양녀로 거둔 [[경빈 박씨]]가 중종의 총애를 받는 후궁이 되었고, 역시 후궁으로 들어간 외조카딸 [[장경왕후 (조선)|윤씨]]가 폐위된 [[단경왕후]]를 대신하여 중종의 두 번째 계비가 되면서 조정의 실세로 올라서게 된다. [[1507년]] 사은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후 [[우의정]], [[좌의정]]을 역임하였다.
         임기= [[1506년]] [[9월 24일]] ~ [[1507년]] [[12월]]
  • 신사헌
         그는 증조할머니 [[중모현주]] 쪽으로는 [[세종대왕]]의 외5대손이 된다. 그러나 [[1506년]]의 [[중종 반정]]으로 그의 조부 [[신수근]], [[신수영]] 등이 반정 참여를 거부하다가 모두 살해당하고, 그의 집안은 몰락했지만 그의 아버지 신홍조와 그는 [[연좌]]되지 않았다. 그의 외가 역시 외증조부 [[임사홍]]이 [[중종 반정]] 당시 처형당했다.
  • 신수근
         '''신수근'''(愼守勤, [[1450년]] ~ [[1506년]])은 [[조선]] 전기의 문신이자 외척이다. [[신승선]]과 [[중모현주]]의 아들로, [[조선 세종|세종대왕 이도]]의 4남인 [[임영대군|임영대군 이구]]의 외손이자 [[조선 연산군|연산군]]의 처남이며, [[조선 중종|중종]]의 장인이다. 따라서 왕실과는 이중 인척관계를 형성하였으며, 그 외에도 그의 부인은 [[권람|권남]]의 여섯째 딸로 [[남이]]의 처제가 된다. 또한 두번째 부인은 [[인수대비]]의 친정 사촌 형제였던 한충인의 딸이다. [[1506년]] [[중종반정]] 직전 반정 참여를 권유받았으나, 도의상 반정에 참여하기를 거절했다가 살해되었다. 본관은 [[거창 신씨|거창]](居昌), 자는 근중(勤仲), 호는 소한당(所閒堂)이며, 시호는 신도(信度)이다.
         [[박원종]], [[성희안]] 등은 그에게 꾸준히 사람을 보내 [[조선 연산군|연산군]]을 폐위시키고 [[조선 중종|진성대군]]을 추대할 것을 권고했으나 신수근은 자신의 사위를 위해 누이를 배신할 수 없다며 거절했다. [[1506년]] [[음력 9월 2일]] [[성희안]], [[박원종]] 등이 일으킨 [[중종반정]] 때 박원종 일파가 보낸 이심, [[신윤무]] 등에게 수각교에서 격살(擊殺)되었다.
         [[분류:1450년 태어남]][[분류:1506년 죽음]][[분류:거창 신씨]][[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음서]][[분류:조선의 문신]][[분류:유교 신자]][[분류:조선의 정치인]][[분류:살해된 사람]][[분류:화기에 죽은 사람]][[분류:암살된 사람]][[분류:조선의 부원군]]
  • 심정 (1471년)
         [[1502년]]([[연산군]] 8년) 알성시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은 병충분의[[정국공신]](秉忠舊義靖國功臣)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시|의정부]] [[좌의정]] 행 [[형조판서]]에 이르렀다. [[1506년]](연산군 12년) [[중종 반정]]에 동조, 가담하여 [[정국공신]] 3등관에 녹선되고 화천군에 봉군되었다. 1507년 중추부지사로 사은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온 뒤, 1518년 한성부판윤, 형조판서 등을 거쳐 [[조광조]] 일파의 탄핵으로 파직, [[정국공신]] 훈호도 삭탈되자 원한을 품고 [[홍경주]] 등과 [[기묘사화]]를 일으켜 조광조를 비롯한 사림파 인사를 모조리 숙청하였다. 이때 사림파 중에서도 [[조광조]] 일파를 부정적으로 보는 [[남곤]], [[김전]] 등을 끌어들이게 된다.
         [[1506년]](중종 1년) [[박원종]], [[유순정]] 등의 반정 거사에 동조, 중종반정에 참여하였다. 중종 즉위 후 응교에 임명되었고, 그해에 중종을 추대한 공로로 당상의 품계에 올랐으며 병충분의[[정국공신]](秉忠舊義靖國功臣) 3등관에 책록되고, 화천군(花川君)에 봉군되었다. 이후 경연관으로 경연에 입시하며 사서 육경의 구절을 해석하여 왕에게 강독하였다.
  • 이인 (동음이의)
         * '''[[양평군 (왕족)|이인]]'''(李仁, [[1498년]] ~ [[1506년]])은 조선 중기의 왕족으로, [[조선 연산군|연산군]]의 아들 '''양평군'''(陽平君)이다.
  • 폐비 윤씨
         [[1506년]](연산군 12년) [[중종 반정]]으로 [[조선 연산군|연산군]]이 폐위되어 [[조선 연산군|연산군]]이 그의 어머니 윤씨에게 올린 관작과 존호는 모두 삭탈되었고, 회릉 역시 회묘로 격하되었다.
  • 한명회
         [[1506년]](연산군 12년) [[중종 반정]] 이후 신원되어 복관되고, [[1507년]](중종 1년) [[10월]] 예관을 보내 재장사한 뒤 [[조선 세조|세조]]의 묘정에 다시 배향하였다. [[충청남도]] [[천안군]]의 충성사(忠誠祠) 등에 [[제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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