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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굉필
         그러나 이때의 일로 김굉필은 김종직과 틈이 갈라져 끝내 사제 간의 정을 회복하지 못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김굉필의 나이 39세가 되는 1492년 스승 김종직과 절친한 지기 남효온이 모두 세상을 떠났는데 연보(年譜)에는 남효온의 집을 방문한 기록은 나오지만 김종직의 죽음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되지 않는다.<ref name=""hahao"/> 그러나 사림의 학통과 인맥은 김종직이 세상을 떠난 이후 오히려 김굉필을 김종직의 뒤를 이를 사림의 영수로 만들었다.<ref>한정주, 《호, 조선 선비의 자존심 : 조선 500년 명문가 탄생의 비밀》 (다산초당, 2015) 194페이지</ref>
         오랫동안 [[김종직]]의 문하에서 수학하던 그는 [[1492년]] 스승이 죽자 이후 관직에 나가지 않고 고향에서 서실을 열고 [[성리학]]을 연구하며 제자를 길러냈다. 그는 [[정몽주]]-[[길재]]-[[김숙자 (1389년)|김숙자]]-[[김종직]]으로 이어지는 [[성리학]]을 널리 확산시켰다.
  • 김성동 (조선)
         [[음서 제도|음보]]로 관직에 올라 적성현감(積城縣監)를 지냈으며, [[1492년]](성종 23) 4월 식년문과에 갑과(甲科) 3등으로 급제했다.<ref name=a/><ref name=b/>
  • 박원종
         박원종의 큰누이 [[승평부부인]]은 [[조선 성종|성종]]의 친형인 월산대군에게 시집갔고, 또다른 누이인 [[순천부부인]]은 [[윤여필]]에게 시집가 윤임과 [[장경왕후 (조선)|장경왕후]] 등을 낳았다. 또다른 누이는 [[조선 예종|예종]]의 차남 제안대군의 계부인이 되는 등 박원종의 가문은 일찌감치 왕실과 인연을 맺었다. 특히 자식이 없었던 월산대군은 손아래처남인 박원종을 친동생처럼 사랑했는데 성종이 이로 인해 월산대군 사후 그의 죽음을 애도해 박원종을 동부승지로 삼게 되었다.<ref>《조선왕조실록》 성종 268권, 23년(1492년) 8월 7일 2번째기사</ref>
         무술이 뛰어나 [[음서 제도|음보]]로 무관직에 기용되었고 [[1486년]] [[선전관]]으로 있을 때 [[과거 제도|무과]]에 급제하여 선전내승으로 승진했으며, 오랫동안 [[조선 성종|성종]]의 측근으로 있었다. [[1492년]] 성종의 특지로 동부승지에 발탁되고 공조와 병조의 참의를 거쳐 [[조선 연산군|연산군]] 때 중추부지사 겸 경기도관찰사, 함경도병마절도사를 지내고 평성군에 봉해졌다. 그리고 [[승정원]][[동부승지]], [[우부승지]], [[우승지]], [[좌승지]] 등을 지냈다.
  • 방산수
         관련자들이 어우동과의 혐의를 부인하는 가운데 그는 혐의를 부인하지 않고, 도리어 그간 [[어우동]]과 만났던 남성들의 이름을 실명으로 언급했다. [[1482년]](성종 23년) [[8월]] 석방되었으나,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 [[이감]](李堪) 등으로부터 불가하다는 탄핵이 빗발쳤고, [[1492년]] [[7월]] 복작되었으나 역시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 최세걸(崔世傑) 등의 반대가 빗발쳤으나 [[조선 성종|성종]]이 이를 모두 무마시켰다. 이후의 행적은 미상이다.
  • 이영 (1492년)
         이영(李榮, [[1492년]] [[2월 10일]] ~ [[1583년]] [[10월 20일]])은 [[조선]] 중기의 학자이자 [[은자|은사]]이다. 자(字)는 양수(陽臼+又), 호는 북산(北山), 본관은 [[우계 이씨|우계]](羽溪)이다. 조정의 부름을 거절하고 은둔생활을 하였으며, 녹래리로 이주하였다. 뒤에 노인직으로 통정대부와 가선대부를 역임하였다. [[경상북도]] 출신.
         [[분류:1492년 태어남]][[분류:1593년 죽음]][[분류:조선의 유학자]][[분류:은자]][[분류:경상북도 출신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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