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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주시
         |align="center"|[[1471년]]
  • 권람
         한편 [[조선 단종|단종]]의 후궁인 [[숙의 권씨 (단종)|숙의 권씨]]도 권람의 일족이었다. 그러나 권람은 권 숙의의 논밭과 집과 노비를 권람이 다 차지하고 주지 않아서 숙의를 굶주리게 하여, [[이목 (1471년)|이목]](李穆) 등 학자들의 비웃음을 사기도 했다.<ref>[http://www.itkc.or.kr/index.jsp?bizName=MK&url=/MK/MK_NODEVIEW.jsp%3Fdbname=MK%26set_id=2294361%26start=4%26count=10%26disp_cnt=10%26tot_cnt=10%26qry=%26keyword=%26sortsection=BOOKNAME%26order=ASC%26type=CONT%26seojiid=%26gunchaid=%26muncheid=%26stype=%26sectionname=CONT%26nPage=1%26thecount=3 한국고전번역원<!-- 봇이 붙인 제목 -->]</ref> 이는 자신의 5촌 조카딸인 권영금을 일부러 자신의 노비로 분배받아 보호한 것과는 대조적이다.
         세조는 바로 조회를 파하고 3일간 애도하였으며, 바로 익평의 시호를 내렸다. [[충청북도]] [[음성군]] 생극면 방축리(현 충청북도 음성군 생극면 방축리 산 7)의 아버지 [[권제]]의 묘소 아래에 안장되었다. 그의 묘소 주변에는 아버지 권제의 묘소와 할아버지 [[권근]]의 묘소가 있으며, 묘역 일대는 [[1980년]] [[1월 9일]] [[충청북도]] 기념물 제32호로 지정되었다. [[1471년]] 세조 묘(世祖廟)에 배향되었다. 아들 권걸(權傑)도 [[자헌대부]] 행[[동지중추부사]]에 올라 봉군되어 길창군(吉昌君)을 습봉받았다. [[1467년]](세조 13년) [[신도비]]가 세워졌으며 신도비문은 [[신숙주]]가 짓고 글씨는 권반(權攀)이 썼다.
  • 김질 (1422년)
         그 뒤 [[관찰사]], [[공조판서]], [[병조판서]], [[우참찬]], [[경상남도|경상도]][[관찰사]] 등을 지내고, [[1468년]] [[우의정]], [[좌의정]]이 되었다. [[1468년]] [[조선 세조|세조]]의 사망과 [[1469년]] [[조선 예종|예종]]의 사망 당시에는 [[원상]]의 한사람으로 정무를 처결하였다. 그 뒤 [[조선 성종|자을산군 혈]]을 지지하고, [[조선 성종|성종]] 즉위 직후에는 왕족 [[귀성군]]을 숙청하였다. [[1471년]](성종 2) 좌리공신(佐理功臣) 2등으로 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에 봉군되었다.
         [[1471년]]에는 성종의 즉위를 도운 [[좌리공신]]을 서훈할 때 순성명량경제좌리공신 2등(純誠明亮經濟佐理功臣2等)으로 서훈되고 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에 봉해졌다. [[조선 성종|성종]] 때는 《고려사절요》의 증보 편집, 《경국대전》의 편찬에 참여하기도 했다.
  • 신면
         [[1471년]](성종 2년) 윤 9월 [[적개공신]](敵愾功臣) 3등에 추록되었다가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 홍귀달(洪貴達)·사간원 헌납(司諫院獻納) 최한정(崔漢禎)의 반대로 추탈되었다. [[숭록대부]] [[좌찬성]] 겸 [[이조 판서]](崇祿大夫議政府左贊成兼吏曹判書) 행 [[가선대부]] [[관찰사]] 겸 [[함흥]][[부윤]](行嘉善大夫咸吉道觀察使兼咸興府尹)에 [[추증]]되었다가 [[조선 중종|중종]] 때 다시 [[대광보국숭록대부]]에 [[추증]]되었다.
  • 심정 (1471년)
         |출생일 = [[1471년]]
         |출생일= [[1471년]] 양력 [[11월 7일]]/[[음력]] 윤 [[9월 25일]]
         '''심정'''(沈貞, [[1471년]] 양력 [[11월 7일]]([[음력]] 윤 [[9월 25일]]) ~ [[1531년]] [[12월 3일]])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유학자, 공신으로, 자는 정지(貞之), 호는 소요정(逍遙亭), 시호는 문정(文靖)이고, 봉군호(封君號)는 화천군(花川君)에 봉군되었다가 부원군으로 진봉되어 화천부원군(花川府院君)이 되었다. 본관은 [[풍산 심씨|풍산]](豊山)이다.
         심정은 [[1471년]] [[11월 7일]](음력 윤 [[9월 25일]]) [[심응]]과 정경부인 서씨(徐氏)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조선 태종|태종]]의 즉위를 도와 [[좌명공신]](佐命功臣) 4등에 책록되고 풍천군(豊川君)에 봉해진 [[심귀령]](沈龜齡<ref>태종을 도와 1차, 2차 왕자의 난에 출정하였으며 태종 즉위 후 좌명공신(佐命功臣)으로 풍산군(豊山君)에 봉해졌다. 벼슬은 정헌대부(正憲大夫) 판의흥삼군부군자감사(判義興三軍府軍資監事)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정양(靖襄)이다.</ref>)의 증손으로, 할아버지 심치(沈寘)는 가선대부 남원부사를 지냈다.
         [[1495년]](연산군 1년) 생원시에 합격하여 [[생원]]이 되었고, 곧 [[성균관]]에 들어가 성균관유생이 되었다. 성균관유생으로 있을 때 불경한 발언에 연루되어 [[의금부]]의 탄핵을 받았다. [[이목 (1471년)|이목]]이 [[노사신]]이 세조를 우롱하였다는 말을 발설하였고, [[정희량]]이 먼저 세조께서 불교를 숭상하고 믿었으며 역신이 난(亂)을 선동했다는 말을 할 때 다른 성균관유생들과 함께 그 곳에 있었다 하여 수종(隨從)한 것에 해당된다며 1등(等)을 감하여 장(杖) 1백, 도(徒) 3년에 처하게 할 것을 건의했다.
         [[분류:1471년 태어남]][[분류:1531년 죽음]][[분류:조선의 문신]][[분류:조선의 성리학자]][[분류:조선의 정치인]][[분류:조선의 교육인]][[분류:조선의 철학자]][[분류:조선의 작가]][[분류:조선의 시인]][[분류:조선의 번역가]][[분류:과거 급제자]][[분류:장원 급제자]][[분류:조선의 부원군]][[분류:기묘사화 관련자]][[분류:테러 피해자]][[분류:암살 미수 생존자]][[분류:고문 피해자]][[분류:사형된 사람]][[분류:독살된 사람]][[분류:조선의 공신]][[분류:정국공신]][[분류:조선의 저술가]][[분류:정국공신]][[분류:풍산 심씨]][[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조선 연산군]][[분류:조선 중종]][[분류:훈구파]]
  • 이영은
         * '''이영은'''([[1434년]] ~ [[1471년]])은 [[조선]]의 문신이다.
  • 한명회
         그는 평소 자신이 은퇴하여 갈매기를 벗삼겠노라며 [[한성부]] 한복판에 압구정이라는 정자를 지었으나 그 자신은 은퇴할 수 없었다. [[1471년]](성종 2년) 춘추관영사(春秋館嶺事)에 이르렀다. 평소 몸이 쇠약했던 공혜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한명회의 권세도 하락하기 시작하였다. 동년, 그는 대궐의 동, 서쪽에 군영을 설치할 것을 건의하여 성사시키고 자신이 직접 서영대장이 되어 서영(西營) 군사를 거느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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