팝업레이어 알림

팝업레이어 알림이 없습니다.
E D R , A S I H C RSS

"1447년"에 대한 역링크 찾기

1447년의 역링크


역링크만 찾기
검색 결과 문맥 보기
대소문자 구별
  • 김숙자 (1389년)
         [[1440년]](세종 22) [[선교랑]], 1441년(세종 23) [[1월]] 김해교수관 노호(盧浩)와 보직상환 변경되어 [[김해]]로 내려갔다. 이듬해 2월 남부령(南部令)이 되었다가 특별히 동반직을 받아 승의교위(承義校尉)에 제수되고,중군섭부사직 겸 성균관주부(中軍攝副司直兼成均注簿),남학교수관(南學校授官)이 되었다가 그해 11월 승훈랑(承訓郞)이 되어 고령현감(高靈縣監)으로 나갔다. [[1445년]] [[2월]] 승의랑이 되었다가, 지방의 수령들의 직급을 1계급씩 강하한다는 명에 따라 강임되었다. [[1447년]](세종 29) 10월 다시 승의랑으로 환급되고, 11월에 [[성균관]]주부 겸 남학교수관, [[1448년]] [[7월]] [[교서관]]교리가 되었다가 한달만에 전제경차관(田制敬差官)에 임명되어 [[전라도]] [[남원]], [[옥과]], [[장흥]], [[순천]], [[장흥]] 등을 순시하고 그해 [[10월]]에 봉훈랑으로 승진한 뒤, 12월에 도성으로 되돌아왔다.<ref name="ginyon"/> [[1450년]](문종 즉위) [[8월 13일]] 지풍기군사(知豊基郡事)로 발령, 부임하였다.
  • 김질 (1422년)
         [[음서]]로 무관이 되고, 부사직(副司直)에 이르렀을 때 사가독서(賜暇讀書)를 청원하여, 특별히 허락받았다. 그 뒤 [[1447년]] 에 2등으로 합격했으며 [[1450년]](문종 즉위년) 문과에 급제하여 집현전 수찬, 사간원 우정언, 성균관 사예 등을 거쳐 [[1455년]] [[성삼문]](成三問)·[[박팽년]](朴彭年) 등과 함께 [[단종 복위 운동]]에 가담했다가 여러 번 기회를 놓치고 위험을 느끼게 되자, 뜻을 바꾸어 [[조선 세조|세조]]에게 사육신의 거사를 알렸으며 이 공로로 1456년(세조 2) 6월 25일 판군기감사(判軍器監事)가 되고,<ref>[http://sillok.history.go.kr/inspection/insp_king.jsp?tid=kga&pos=0&mTree=0&inResult=0&indextype=1&keyword=%ED%8C%90%EA%B5%B0%EA%B8%B0%EA%B0%90%EC%82%AC 세조 4권, 2년(1456 병자 / 명 경태(景泰) 7년) 6월 25일(계해) 2번째기사] "윤사로와 정창손에게 품계를 더하고, 박중손·성봉조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ref> 1455년 9월 5일 [[좌익공신]](佐翼功臣) 3등과<ref>[http://sillok.history.go.kr/inspection/insp_king.jsp?tid=kga&pos=0&mTree=0&inResult=0&indextype=1&keyword=%EA%B9%80%EC%A7%88+3%EB%93%B1 세조 2권, 1년(1455 을해 / 명 경태(景泰) 6년) 9월 5일(정축) 1번째기사] "좌익 공신을 정하다"</ref> 1459년(세조 5) 8월 25일 상낙군(上洛君)에 봉해졌고<ref>[http://sillok.history.go.kr/inspection/insp_king.jsp?tid=kga&pos=0&mTree=0&inResult=0&indextype=1&keyword=%EC%83%81%EB%9D%BD%EA%B5%B0 세조 17권, 5년(1459 기묘 / 명 천순(天順) 3년) 8월 25일(갑술) 3번째기사] "윤사흔·조석문·김질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ref> 뒤에 부원군으로 진봉되었다.
         음서제로 관직에 입문하여 [[충의위]](忠義衛) 부사직 등을 지냈다. 그 뒤 부사직으로 재직 중 [[1447년]](세종 29년) [[식년과]]의 생원시에 2등으로 합격하여 [[생원]](生員)이 되었다. [[1450년]] 부사직으로 재직 중 휴가를 얻어 [[성균관]]에 입학, 성균관에서 수학하였다.
  • 변수 (1447년)
         '''변수'''(邊修, [[1447년]] [[경상북도|경북]] [[고령군|고령]] ~ [[1524년]])는 [[조선]]의 무신이다. 본관은 [[원주 변씨|원주]](原川)이다.
         [[분류:1447년 태어남]][[분류:1524년 죽음]][[분류:원주 변씨]][[분류:조선의 무신]][[분류:정국공신]][[분류:수군절도사]][[분류:고령군 출신]][[분류:병마절도사]]
  • 서산군 (왕족)
         [[1447년]](세종 29) 10월 3일 술주정을 하다가 사람을 죽여 종부시(宗簿寺)에서 그 죄를 청하여 세종이 명하길, "직첩을 거두어 고성현(固城縣)에 안치(安置)하고 인하여 그 도 감사에게 일러서 밭과 집을 주게 하고, 또 활과 살을 가지고 나가서 사냥하는 것을 금하고, 또 바깥 사람과 서로 통하지 못하게 하였다. 세종의 붕어 직후 몰래 도망쳐 [[양녕대군]]은 사람을 보내 찾게 하였으나 찾지 못하였다. 이혜는 [[금강산]]에 입산해 오랫동안 은신해있다가 되돌아왔다.
  • 성승
         [[1446년]] [[중추원]] 부사가 되었다. [[1447년]](세종 30) 중국에 파견되는 성절사(聖節使)에 임명되어 [[명나라]]의 연경에 다녀왔다. [[1451년]](문종 1년) [[명나라]]에 파견되는 정조사(正朝使)의 부사(副使)로 임명되어 정조부사(正朝副使)로 다시 [[연경]]에 다녀왔다. 1453년(단종 1년) [[도진무]]로 부임하였고, 1455년 동지[[중추원]]사를 거쳐 [[오위도총부]][[도총관]]이 되었다. 그러나 그해 수양대군(首陽大君)이 단종의 왕위를 강압으로 양위받자 말을 달려 집으로 돌아와 통곡하고 방에서 나오지 않으며, 조정에도 나가지 않았다.
  • 원천군 (1433년)
         그의 [[본관|본관(관향)]]은 [[전주 이씨|전주(全州)]]이고 생부는 [[효령대군|효령대군 이보]]이며 [[효령대군|효령대군 이보]]의 적6남(嫡六男)으로 출생한 그는 6세 시절이던 [[1438년]]에 숙부 [[조선 세종|세종대왕]]으로부터 '''원천부윤'''(原川副尹)에 책봉되었으며 9년 후 [[1447년]] 숙부 [[조선 세종|세종대왕]]으로부터 15세의 나이로 '''원천윤'''(原川尹)에 진봉되었고 12년 후 [[1459년]] [[1월]]에는 숙부 [[성녕대군|성녕대군 이종]]의 양차자(養次子)로 출계하였으며 이듬해 [[1460년]] 사촌 형 [[조선 세조|세조]] 임금으로부터 '''원천경'''(原川卿)이라는 [[작위]] 개봉을 제수받았다가 [[1466년]] [[1월]]에는 '''원천군'''(原川君)이라는 [[작위]]에 다시 개봉되었지만 그 해 [[1466년]]에 과음 주독으로 인한 [[신부전증|음수증]]으로 10년간 투병하다가 재종손자 [[조선 성종|성종]] 임금이 치세하던 시기인 [[1476년]] [[3월]]에 향년 44세로 병사하였다.
  • 윤호 (1424년)
         1447년(세종 29년) 식년사마시 생원에 합격하여 생원이 되고 [[음서]]로 관직에 올라 군기시주부, 의금부도사 등을 지냈다. 행[[종부시]]승(行宗簿寺丞)으로 재직 중에는 세조반정에 참여한 공로로 [[1455년]](세조 1년) [[좌익공신|좌익]][[원종공신]](左翼原從功臣) 3등관에 책록되었다. [[과거 제도|춘장문과]] 급제 후 딸이 성종의 계비가 되면서 고속승진하여 병조참지, 참판 등을 지내고 영원부원군에 봉군되었다. 이후 의정부우의정을 거쳐 영돈령부사에 이르렀고 [[1495년]](성종 26) [[궤장]]을 하사받고 [[기로소]]에 들어갔다.
         [[1447년]](세종 29년) 식년시(式年試) [[생원시]]에 응시하여 3등으로 입격하여 생원(生員)되었다. 그 뒤 [[음서 제도|음서]]로 관직에 올라 [[군기시]][[주부]], [[도사]] 등을 지내고 [[신창]][[현감]]으로 발령되었다가 [[밀양시|밀양]][[부사]], [[양주시|양주]][[목사]] 등을 지냈다.
  • 율원군
         그는 어려서부터 글읽기를 좋아하고 말타고 활쏘기를 즐겨하여 종실의 촉망을 받았다. 이후로도 그는 글 읽기를 좋아했고 또 활쏘기를 잘하였다. [[1447년]](세종 39) 처음 광성대부 율원령(光成大夫 栗元令)에 책봉되고 뒤에 율원정으로 승작되었다.
  • 한명회
         ** 장남: [[한보 (1447년)|낭성군 한보]](琅城君 韓堡, [[1447년]] ~ [[1522년]])
         * [[한보 (1447년)|한보]]
  • 한확
         [[1443년]] 동지중추원사가 되었다. 그해 동지중추원사로 [[의금부]]제조(義禁府提調)를 겸하였고, 그해 다시 [[판병조사]] 겸 지중추원사를 거쳐 다시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가 되었다. [[1444년]] [[경상도]], [[전라도]]의 진상품을 받을 것을 청하였으나 [[세종]]이 이를 듣지 않았다. 그 해 [[판이조사]]가 되었는데, 이때 인사에 공정을 기하여 자못 명망이 있었다. [[1445년]] 중추원지사 겸 [[판병조사]](병조판서)를 겸하다가, 다시 판이조사(이조판서)가 되었다. [[1446년]] [[판중추원사]]로 승진되었다가 [[1447년]] 이조 판서가 되고, 행[[평안도]] 관찰사로 나아갔다. 그해 행[[평안도]][[관찰사]]로 평양판윤과 [[평안도]] 병마도절제사까지 겸임하였다. [[1448년]] [[평안도]]병마절도사 겸하였다. [[1450년]](세종 32년) 판중추원사가 되었다. 그 후 판이조사·[[좌찬성]] 등을 거쳐 [[조선 세조|세조]] 때 서성 부원군에 봉해졌다.
11830의 페이지중에 10개가 발견되었습니다

여기을 눌러 제목 찾기를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