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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평대군
         |친인척= 신자수(장인)<br/>[[조선 태종|태종 이방원]](친조부) <br /> [[심온]](외조부) <br /> 심준(외숙부) <br /> [[심회]](외숙부) <br /> [[심결]](외숙부) <br /> [[양녕대군]](큰아버지) <br/> [[효령대군]](큰아버지) <br /> [[성녕대군]](작은아버지) <br/> [[조선 문종|문종]](형) <br/> [[조선 세조|세조]](형) <br /> [[안평대군]](형) <br /> [[임영대군]](형) <br/> [[금성대군]](동생) <br /> [[평원대군]](동생) <br /> [[클라라(배우)]](동생) <br /> [[채시라]](누이동생)
         * [[효령대군]]
  • 김성수 (1891년)
         큰어머니이자 양모였던 [[전주 이씨]]는 [[조선]] [[조선 태종|태종 이방원]]의 차남 [[효령대군]]의 후손인 이경의(李景儀)의 딸이었다.<ref>《인촌김성수의 애족사상과 그 실천》 (동아일보사, 동아일보사, 1982) 21페이지</ref>
  • 서산군 (왕족)
         조선전기의 왕족으로 본관은 전주이씨(全州李氏), 휘는 혜(譿)이다. 태종의 손자이며, 세종, [[효령대군 이보]], [[성녕대군 이종]]의 친 조카이다. 아버지는 [[양녕대군]] 이제(讓寧大君 李褆)이고, 어머니는 광산 김씨(光山金氏)로 [[증직|증]] 좌의정 광산군 [[김한로]](光山君 金漢老)의 딸로 [[수성부부인]](隨城府夫人 金氏)이다. 부인은 안산김씨(安山金氏) 안산군 [[김개]](安山君 金漑)의 딸로 양천군부인 김씨(陽川郡夫人 金氏)이다.
         * [[효령대군]]
  • 양녕대군
         |친인척 = [[효령대군]](동복 아우) <br /> [[조선 세종|세종대왕]](동복 아우) <br /> [[조선 태조|태조 이단]](할아버지) <br /> [[완풍대군|완풍대군 이원계]](큰할아버지) <br />[[진안대군|진안대군 이방우]](큰아버지) <br /> [[조선 정종|정종 이경]](큰아버지) <br /> [[김한로]](장인)
         그는 [[조선]] [[조선 태종|태종]]과 [[원경왕후]] 민씨의 4남으로 출생하였으며 본관은 [[전주 이씨|전주(全州)]], 성은 이(李), 휘는 제(禔), 자 후백(厚伯), 시호는 강정(剛靖)이다. [[조선]] [[조선 세종|세종]], [[효령대군]], [[성녕대군]]의 친형이다.
         [[1404년]] [[왕세자]]에 책봉되고, [[1406년]] [[명나라]] 사신으로 다녀왔다.<ref name="칼럼">[http://www.donga.com/docs/magazine/new_donga/9803/nd98030200.html 풍운아인가-처세의 달인인가] 동아일보 마이다스, 박성수 칼럼</ref> 어려서 학자인 계성군 이래(李來)의 문하에서 [[효령대군]], [[충녕대군]] 등과 함께 수학하였으나 수업은 뒷전이고 참새나 바깥 풍경을 보며 다른 생각을 하였다 한다.
         어느날 밤 부왕 [[조선 태종|태종]]과 모후 [[원경왕후]]의 대화를 비밀리에 엿듣던 중 셋째 아들인 [[충녕대군]]의 재질이 뛰어나나 셋째 아들이라 아쉽다고 대화하는 내용을 엿듣게 되었다. 원경왕후 역시 태종의 주장에 동조하였다. 부왕과 모후의 뜻이 양녕대군에게서 떠나있다는 것을 간파한 [[효령대군]]은 열심히 공부하였다. 하루는 양녕대군이 술을 잔뜩 마시고 효령대군을 찾아갔다. 그는 효령에게 '공부해야 소용이 없다' 고 말했다. 부왕의 뜻이 [[충녕대군]]에게 있으니 다른 마음을 먹지 말라고 하였다는 야사가 전해 온다. 이에 크게 낙심한 효령대군은 매일 북을 치는데, 여느 스님과 달리 팔에 힘이 들어가 북 가죽이 늘어질 정도로 세게 쳤다. 그래서 속담에 늙은이의 늘어진 뱃가죽을 효령 북이라 부르기도 한다. 결국 충격을 견디지 못한 [[효령대군]]은 모든 공부를 중단하고 출가, [[합천군|합천]] [[해인사]]로 들어갔다.
         [[1418년]](태종 18년) [[유정현 (1355년)|유정현]] 등이 세자 양녕을 탄핵하였다. 이때 이미 사람들에게 신망을 잃은 양녕을 비호한 이는 [[황희]] 등 소수였다. 양녕대군이 세자에서 폐위될 것을 예상하자 그의 동생 [[효령대군]]은 독서와 학문에 전념하였다. 그러나 그는 동생을 찾아가 세자 자리는 충녕에게 넘길것 같으니 헛된 꿈을 꾸지 말라고 충고하였다는 야사가 있다. 부왕 [[조선 태종|태종]]이나 모후 [[원경왕후]]의 뜻이 모두 충녕에게 있음을 안 [[효령대군]]은 이후 불교에 전념하게 된다.
         충녕대군이 왕이 되고 나서 어느날 양녕대군이 효령대군이 있는 절에 가서 고기를 구워먹은적이 있었다. 효령과 중들이 그걸 말리려했지만 양녕의 말 한마디로 모두 잠잠해졌다.
         [[서울특별시]] [[동작구]] 지덕사부묘소(至德祠附墓所)가 있는데 지덕(至德)이란 [[중국]] 주(周)나라 때 태왕(太王)이 맏아들 태백과 둘째아들 우중을 건너뛰어 셋째아들 계력에게 왕위를 물려할 때 태백과 우중 두 형제는 부왕의 뜻을 헤아려 삭발하고 은거하며 왕위를 사양했다. 훗날 [[공자]](孔子)가 태백은 지덕, 우중은 청권이라고 칭송하였다. 이러한 고사를 바탕으로 양녕대군을 모시는 사당을 지덕사부묘소, [[효령대군]]을 모시는 사당을 청권사부묘소라 하였다.<ref>{{뉴스 인용|url=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281153|제목=세종대왕의 '형님'으로 세상 살아가기|저자=이정근|날짜=2005-09-18|출판사=오마이뉴스|언어=한국어|확인날짜=2012-11-30}}</ref>
         * [[효령대군]]
         * [[효령대군]]
  • 원천군 (1433년)
          | 아버지 = [[성녕대군|성녕대군 이종]](양부) <br /> [[효령대군|효령대군 이보]](생부)
         그의 [[본관|본관(관향)]]은 [[전주 이씨|전주(全州)]]이고 생부는 [[효령대군|효령대군 이보]]이며 [[효령대군|효령대군 이보]]의 적6남(嫡六男)으로 출생한 그는 6세 시절이던 [[1438년]]에 숙부 [[조선 세종|세종대왕]]으로부터 '''원천부윤'''(原川副尹)에 책봉되었으며 9년 후 [[1447년]] 숙부 [[조선 세종|세종대왕]]으로부터 15세의 나이로 '''원천윤'''(原川尹)에 진봉되었고 12년 후 [[1459년]] [[1월]]에는 숙부 [[성녕대군|성녕대군 이종]]의 양차자(養次子)로 출계하였으며 이듬해 [[1460년]] 사촌 형 [[조선 세조|세조]] 임금으로부터 '''원천경'''(原川卿)이라는 [[작위]] 개봉을 제수받았다가 [[1466년]] [[1월]]에는 '''원천군'''(原川君)이라는 [[작위]]에 다시 개봉되었지만 그 해 [[1466년]]에 과음 주독으로 인한 [[신부전증|음수증]]으로 10년간 투병하다가 재종손자 [[조선 성종|성종]] 임금이 치세하던 시기인 [[1476년]] [[3월]]에 향년 44세로 병사하였다.
         * [[효령대군]](생부)
         [[분류:1433년 태어남]][[분류:1476년 죽음]][[분류:조선의 왕족]][[분류:양자]][[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전주 이씨]][[분류:효령대군파]][[분류:조선 세종]][[분류:조선 문종]][[분류:조선 단종]][[분류:조선 세조]][[분류:조선 예종]][[분류:조선 성종]][[분류:조선의 불교 신자]][[분류:신부전으로 죽은 사람]]
  • 윤흥인
         윤흥인(尹興仁, [[1516년]] ~ [[1545년]] [[9월]])은 [[조선]] 중기의 무신이자 군인, 외척이다. 자(字)는 영중(榮仲), 본관은 [[파평 윤씨|파평]](坡平)이다. [[중종]]의 제2계비 [[장경왕후]]의 친정 조카이고, 증조모를 통해 [[효령대군]]의 외6대손이 된다. 소윤 [[윤원형]]은 아버지쪽으로 10촌이었고, 그의 형 윤원개 역시 10촌 형인데 윤원개는 동시에 외가로는 친이모부가 된다.
         [[1543년]] 좌랑으로 재직 중 [[과거 제도|무과]]에 급제하여, 1545년 내승, 공조좌랑, 형조정랑, 첨정 등을 역임했다. [[1545년]] 대윤과 소윤의 싸움에서 아버지 [[윤임]]이 패하면서 [[을사사화]] 때 연좌되어 유배되었다가, 중도에 [[충청남도|충남도]] 여산에서 교형당했다. 이때 그의 두 친동생도 함께 사형되었고, 어린 이복 동생들과 서출 이복 동생들은 노비가 되었다. 그의 아들 중 한명인 윤호는 [[중종]]의 서녀 [[혜정옹주]]의 딸 홍옥환과 결혼하여 화를 면하였다. [[중종]]과 [[인종]], [[월산대군]] 가문의 외척이었고, 어머니 여주이씨를 통해 [[효령대군]]의 딸 [[재령옹주]]의 5대 외손이 된다. [[중종]]의 서녀 [[혜정옹주]]와도 사돈이 된다.
  • 율원군
         '''율원군 이종'''(栗元君 李倧, [[1433년]] ~ [[1476년]] [[1월 17일]])은 [[조선]] 중기의 왕족, 문신으로 [[효령대군]]의 손자이자 [[보성군 (왕족)|보성군]](효령대군의 3남)의 다섯째 아들이다. 이름은 종(倧)이요 자는 유안(幼安), 시호는 양경(襄頃), 양환(襄桓)이다. [[1467년]](세조 13) 특명으로 부원수(副元帥)에 책봉되고, 적개공신으로 군에 승작되고 정의대부(正義)가 되었다.
         [[1433년]](세종 15)에 태어났으나 생일은 미상이다. 할아버지는 [[효령대군]] 보(孝寧大君 補)이고, 아버지는 [[보성군 (1416년)|보성군 합]](寶城君 㝓)이고, 어머니는 청풍군부인 [[합천 이씨]](淸風郡夫人 陜川李氏)로 [[광록시]]소경(光祿寺少卿)을 지낸 이무창(李茂昌)의 딸이다.
         * [[효령대군]]
  • 의친왕
         대한제국 [http://cafe.daum.net/daehan815/ 의친왕 숭모회](大韓帝國 義親王 崇慕會)는 의친왕의 행장과 독립운동사를 재조명하고, 숭고한 뜻을 기르기 위해 [[2006년]] 설립된 단체로 의친왕의 제향을 주관하는 공식 단체이다. 초대 대표위원장으로 [[효령대군]] 19대손 [[이재용]](李宰容)을 선임하고, 현재 의친왕 제향은 매년 양력 [[8월 15일]]에 [[경기도]] [[남양주시]]내 의친왕묘에서 의친왕의 후손 및 종현, 일반인들이 참반한 가운데 제향을 받들고있다. [[2013년 4월]]에 공식적으로 의친왕숭모회는 해체되고, 봉행하던 의친왕 제향은 2013년부터 후손들이 지내고 있다.
  • 이정재(영화배우)
         ||<:><#4C4C4C>'''{{{#FFFFFF 본관}}}'''||[[전주 이씨]] [[효령대군]]파[* 전주 이씨 [[효령대군]] 20세손, 시조 43세손 宰자 항렬이다. 동일 항렬 유명인으로는 [[이휘재|이영재]], [[이혁재]], [[이학재]] 등이 있으며, [[이경규]]와 [[써니(소녀시대)|이순규]]는 손자, 손녀 뻘이 된다.] ||
          *[[전주 이씨]] [[효령대군]]파의 19대손인데 시조 43세손 宰자 항렬을 쓰고 있다. --이래서 [[수양대군|조상님의 조카]] 역할이 제일 잘 어울린 듯--
  • 이혁재
         본관은 [[전주 이씨|전주]](全州)이며 [[조선 태종|태종 이방원]]의 차남이었던 [[효령대군|효령대군 이보]]의 19대손이다.
  • 이혁재(1973년 7월)
         ||<#878787> '''{{{#EEE156 본관}}}''' ||<(> [[전주 이씨]] [[효령대군]]파[* 전주 이씨 [[효령대군]] 19세손, 시조 43세손 宰자 항렬이다. 바로 전 항렬은 康자 항렬, 부친 성함은 이강희 씨. 같은 항렬으로는 MC [[이휘재]](본명은 이영재), 정치인 [[이학재]] 등이 있다.] ||
  • 장성원 (배우)
         | rowspan=3 | [[효령대군]]
  • 장평도정
         * [[효령대군]]
  • 전성군 (1488년)
         '''전성군'''(全城君) 이대(李對, [[1488년]] [[7월 21일]] ∼ [[1543년]] [[10월 29일]])는 [[조선]]시대 중기의 왕족으로 본관은 [[전주 이씨|전주]], 자(字)는 성중(盛仲)이다. [[효령대군]] 이보의 고손으로 아버지는 여양군(呂陽君), 조부는 율원군(栗元君), 증조부는 보성군(寶城君). [[인순왕후|인순왕후 심씨]], [[심의겸]], [[심충겸]] 등의 외할아버지가 된다. 다른 이름은 이대(李薱)이다.
         [[1488년]](성종 19) [[7월 21일]] 사후 [[여양군]]에 추증된 여양정 이자겸(呂陽正 李子謙)과 훈도(訓導) 김기(金耆)의 딸 광산김씨<ref>정사룡, 호음잡고 제7권, "李龍岡墓碣銘 幷序"</ref> 의 아들로 태어났다. [[효령대군]] 보의 차남 [[보성군]] 이합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율원군]] 이종(栗元君 李終)이다. 그의 생일은 오랫동안 실전되었다가 [[정사룡]](鄭士龍)이 쓴 그의 묘비문에 그의 생일이 [[7월 21일]]이라고 언급되면서 알려졌다.<ref name="heomyong">정사룡, 호음잡고 제7권, "李龍岡墓碣銘 幷序"</ref> 조부 [[율원군]]은 적개공신이었다.
         * 고조부 : [[효령대군]](孝寧大君)
         * [[효령대군]]
  • 정명환
         * 《세종대왕》 ... [[효령대군|효령대군 이보]] 역(주연)
  • 조선 세종
         [[한성부|한성]] 준수방(지금의 [[서울특별시]] [[종로구]]) 고을에서 아버지 [[조선 태종|정안군 이방원]]과 어머니 [[원경왕후|민씨 부인]]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태종 8년(1408년) 충녕군(忠寧君)에 봉해졌다가, 태종 12년(1412년), 둘째 형 [[효령대군|효령군 이보]]와 함께 [[대군]]으로 진봉된다. 1418년 첫째 형 양녕대군이 [[왕세자]]에서 폐위되면서 세자로 책봉되었고 얼마 후 부왕의 [[선위]]로 즉위하였다. 즉위 초반 4년간 부왕 [[조선 태종|태종]]이 [[대리청정]]을 하며 국정과 정무를 주관하였고 이때 장인 [[심온]]과 그의 측근들이 [[사형]]에 처해졌다. 이후 주변의 [[소헌왕후]] 폐출 주장을 일축했고, 건강이 좋지 않았던 그는 [[김종서 (1383년)|김종서]], [[맹사성]] 등을 등용하여 정무를 주관하였는데 이 통치체제는 일종의 [[의원 내각제|내각 중심 정치제도]]인 [[의정부서사제]]의 효시가 되었다.
         둘째 형 효령대군
         '''이도'''(李祹)는 [[1397년]] [[음력 4월 10일]](양력 5월 15일) 당시 정안군이던 [[조선 태종|태종]]과 [[민제]]의 딸 [[원경왕후|원경왕후 민씨]]의 육남으로태어났다. 위로는 형 [[양녕대군]] 이제, [[효령대군]] 이보 및 세명의 요절한 친형이 있었고, [[정순공주]], [[경정공주]], [[경안공주]] 등 동복 친누나 세 명이 있었다. 뒤에 친 여동생 [[정선공주]]와 남동생 [[성녕대군]] 종이 태어난다. 처음 그의 이름은 막동으로 지었다가 뒤에 이름을 도(祹)로 고쳤다.
         [[1412년]] 16살에 둘째 형 [[효령대군|효령군]]과 함께 [[대군]]으로 진봉되어 대광보국 충녕대군(大匡輔國 忠寧大君)이 되었다. 그는 형제간에 우애가 깊은 인물이고, 부모에게 지극한 효자로 각인되었다. 특히 동생이며 부왕 태종의 넷째 아들인 병약한 [[성녕대군]]에게는 동기간 중 자신이 병간호를 할만큼 그 우애가 유난히 각별했으나 [[홍역]]을 앓던 성녕군은 끝끝내 병을 털어내지 못한 채 [[1418년]] [[음력 2월 4일]] 14세로 일찍 죽고 만다.
         [[1418년]]에 [[조선 태종|태종]]이 신하들과의 회의<ref>[http://sillok.history.go.kr/inspection/inspection.jsp?mState=2&mTree=0&clsName=&searchType=a&query_ime=%ED%9B%88%EB%AF%BC%EC%A0%95%EC%9D%8C&keyword=%ED%9B%88%EB%AF%BC%EC%A0%95%EC%9D%8C "훈민정음" 검색 결과, 조선왕조실록 홈페이지]</ref> 에서 “세자의 행동이 지극히 무도(無道)하여 종사(宗社)를 이어 받을 수 없다고 대소 신료(大小臣僚)가 청(請)하였기 때문에 이미 폐(廢)하였다.”라고 하며 김한로와 연관되는 등의 심각한 비행으로 인해<ref>한쪽에서는 이제가 일부러 비행을 해서 세종에게 왕위가 가게 했다고 주장하나, 다른 한쪽에서는 세종대왕이 즉위한 뒤에도 여전히 비행을 저질렀다는 점에서 이는 사실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우리 역사의 수수께끼》/이덕일외 공저/김영사.</ref> 왕세자에서 폐위되고 충녕대군의 학문과 자질이 높이 평가되어 [[황희]] 등 일부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태종은 이 해 6월 22살의 그를 새로운 [[왕세자]]로 책봉하고, 이제를 [[양녕대군]](讓寧大君)으로 강봉(降封)하였다.<ref name="aks" /> 부왕이 왕세자를 폐위할 것을 예감한 [[효령대군]]은 세자 자리를 기대하였으나, 이제는 충녕대군에게 세자 자리가 갈 것이니 포기하라고 하였다.
         **** 형 : [[효령대군]](孝寧大君, 1396~1486)
  • 클라라(배우)
         || '''가족''' ||<(> 어머니[[채시라]] , 오빠 [[광평대군]], 배우자[[효령대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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