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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상로
         [[1750년]]에 겸지경연 [[세자우빈객]]이 되었으나 [[사도세자]]와 의견이 달라서 마찰을 빚었다. 52년에 [[의정부]][[우의정]]에 발탁되었으나 [[1753년]] 파직되었다. 이후 곧 풀려나 [[1754년]] [[좌의정]]을 거쳐 59년 [[영의정]]에 올랐다. 이때 말과 행동이 맞지 않은 사헌부 관리들은 교체시킬 것을 건의하였다. 또한 [[탕평책]]이 나왔을때 최초에는 찬성하였으나, [[홍계희]]·[[김귀주]]·[[문성국]]·[[홍인한]] 등과 함께 [[사도세자]]를 공격하였고 [[세자]]의 비행을 [[영조]]에게 고하였다.
         [[1759년]] [[5월]] [[영의정]]에 올랐으나 사퇴, 그러나 [[8월]]에 다시 영의정에 올랐으나 1개월만인 [[9월]] 사도세자의 장인 홍봉한(洪鳳漢)에게 자리를 물려주었다. 그러나 뒤에 다시 영의정이 되어 영조의 사도세자 처벌 논의에 가담했다. 이후 [[1762년]] [[홍계희]], [[홍인한]] 등과 함께 [[사도세자]]의 처벌에 적극 참여하여 영조의 동조를 얻었으나, 후에 왕이 이를 후회하자 세자를 보도하는 사부이자 정승으로서 역할을 게을리했다는 탄핵을 받고 [[청주시|청주]]에 부처되었다가 곧 특명으로 풀려났다. 이후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다. 시호는 익헌(翼獻)이다.
         * [[홍인한]]
  • 김종수 (1728년)
         외가쪽으로는 [[홍석보]]의 동생이 [[홍현보]]로, [[홍봉한]]과 [[홍인한]]은 그의 외종조부 [[홍현보]]의 아들들로 그의 외당숙뻘이었다. [[혜경궁 홍씨]]와는 내외종 6촌간이었고, 그와 함께 세손시절의 정조를 보호한 [[홍국영]]은 12촌이 되는 외가 친척이 된다.
         [[1776년]], 유배된 지 4년 만에 영조의 죽음으로 [[행장]]찬집당상(行狀纂輯堂上)이 되었고, [[조선 정조|정조]]가 그를 특별히 요직에 발탁하였다. 조정에 돌아온 그는 [[세손]]의 즉위를 반대한 [[홍인한]], 음모를 꾸민 [[정후겸]], [[김귀주]] 등을 복주할 것을 상소하였다. 그는 [[노론]] 내에서도 [[노론]] [[벽파]] 인사들을 왕의 자리를 택군하려 한 대역죄인들이라 성토하고 이들을 처치할 것을 상주했다. 김종수는 정조의 외할아버지 [[홍봉한]]도 [[홍인한]], [[정후겸]], [[문성국]]과 한패라며 법으로 처단할 것을 건의한다.
         그는 친한 인물이라고 해도 정치적, 인격적, 사상적으로 문제가 있는 인물은 칼같이 잘라야 된다고 공언하였다. 그러는 한편으로 [[홍봉한]], [[홍인한]]의 상사 때나 [[홍국영]]의 사망소식을 듣고는 찾아가서 조상하였다. 그러나 이들의 복권에는 반대했다. 사적인 애통은 애통이고 공적으로는 잘못을 했으니 어찌할 수 없다고 반대했던 것이다.
         김종수가 표방한 핵심 정치 원칙은 외척과 궁중세력을 멀리하여 그들의 정치 간여를 막아야 한다는 것이었다.<ref name="parks191"/> 따라서 [[영조]] 말기에 [[소론]]과 손잡고 [[세손]]의 정통성을 인정하려는 [[홍인한]], [[홍봉한]] 계열을 공격하여 몰락시켰다. 그 뒤 [[조선 정조|정조]] 즉위 초에는 왕권에 위협이 되는 [[김귀주]], [[김관주]] 일파를 탄핵하여 몰락시킨다. 그밖에 정조 암살을 시도한 [[홍계능]] 일파를 맹렬하게 성토하여 몰락시켰다.
         그의 이러한 행동을 정조가 적극 수용했던 것은 '문제가 있는 인물이라면 육친, 친구라고 해도 용서하지 않는다'는 그의 평소 발언과, 사도세자와 세손을 배격한다는 당론을 거부하고 세손을 옹호한 일, [[홍국영]]과 손잡고 세손의 즉위를 방해하던 같은 당의 [[홍봉한]], [[홍인한]] 일파, [[김귀주]], [[김관주]], [[정후겸]] 일파를 제거한 점, 그리고 [[홍국영]]의 권력남용이 심각해지자 홍국영을 탄핵해서 제거한 일 등 그의 소신 때문이었다.
         그는 외척의 정치 간여를 배제해야 한다는 상소를 정조에게 올려 정조의 신임을 얻었다. 영조 후반과 정조 즉위 초 김종수는 [[홍국영]] 등과 손잡고 정조의 집권을 위협하는 [[홍봉한]]·[[홍인한]] 계열과 [[정후겸]] 계열, [[김귀주]] 계열 등의 외척 세력을 견제, 공격하였으며 외척 세력이 몰락한 뒤에는 [[홍국영]]의 권력남용과 월권행위를 집중 공격하였다. [[1780년]] 이조판서가 되어 [[홍국영]](洪國榮) 등의 제거에 앞장섰으며, 홍국영이 왕실 후사문제에 개입하자 그를 역적이라 성토, 사형에 처할 것을 상소하였다. [[홍국영]]의 정적이된 [[소론]] [[서명선]] 등과 손잡고 [[홍국영]]을 조정에서 몰아냈고, 그 뒤에는 다시 [[소론]]과 [[시파]], [[남인]]을 공격하였다.
         ** 외종조부 : [[홍현보]]([[홍봉한]], [[홍인한]]의 아버지, [[혜경궁 홍씨]]의 할아버지)
         * [[홍인한]]
  • 박필균
         [[1748년]] [[예조]][[참판]], [[1750년]] [[공조]][[참판]]을 역임했다. 그뒤 호조·병조참판을 역임한 뒤 [[1754년]] [[대사간]]으로 재직시 [[사도세자]]의 서연(書筵)을 중지한 잘못과 조정의 언로폐쇄, 과거제의 문란 및 백관들의 기강의 해이함을 진계(陳戒)하는 소를 올려 인정을 받았다. 한편 [[노론]]에서 당론으로 [[사도세자]]를 공격하기로 결정했을 때, 그는 세자의 사부였으므로 [[홍인한]], [[홍계희]]와는 달리 한발 물러서서 세자의 비행 지적을 회피하였다.
         * [[홍인한]]
  • 어유구
         ******* 외손자 : 심능필(沈能弼, 정주목사) - 좌의정 [[홍인한]](洪麟漢, 1722년 ~ 1776년)의 사위
         * 그의 형 [[어유봉]]의 문하생이자 사위가 [[홍상한]]이다. 홍상한의 삼촌 홍현보의 아들이 [[홍봉한]], [[홍인한]], 홍용한, 홍준한 4형제이다. 조카사위 [[홍상한]]을 통해 [[혜경궁 홍씨]]와도 인척간이 된다.
         * [[어유구]]의 외손자 심능필은 [[어유구]]의 사위 심이지의 아들이고, 심능필은 [[홍인한]]의 사위이다.
  • 어진익
         사위 [[이유]], 도곡 [[이의현]] 모두 [[의정부시|의정부]]을 지냈다. 그러나 [[이의현]]의 첫 부인이 된 둘째 딸은 일찍 죽어 자녀가 없다. 아들 어유봉의 딸은 [[홍상한]]에게 시집가, 사도세자빈 [[혜경궁 홍씨]]와 [[홍봉한]], [[홍인한]] 가문과도 사돈이 된다.
         *** 손녀사위 : [[홍상한]](洪象漢, 1701년 - 1769년), [[홍봉한]], [[홍인한]], 홍용한, 홍준한의 사촌 형
  • 은전군
         정조 즉위 직후 [[홍인한]](洪麟漢)·[[정후겸]](鄭厚謙) 등에 의해 왕으로 추대할 계획을 세워 [[1777년]](정조 1) [[7월]] [[홍술해]](洪述海)의 아들 [[홍상범]](洪相範 ), [[홍계희]]의 8촌 진선 [[홍계능]] 등이 밤낮으로 정조의 즉위를 못마땅히 여겨 나라를 원망하면서 [[전라북도|전북도]] [[전주시|전주]]에서 서울로 올라와 [[강용휘]](姜龍輝) 등과 공모하여 [[조선 정조|정조]]를 시해하고, 은전군을 왕으로 세우려 했다. 그러나 은전군이 이들과 적극적으로 모의하거나 만나거나, 내통했다는 근거는 없다. 한편 은전군을 추대하려던 이들 중에는 [[조선 정조|정조]]의 친외삼촌인 [[승정원]]승지 [[홍낙임]](洪樂任)도 있었다. 홍낙임은 대장(大將)의 역할을 맡게 된다.
         * [[홍인한]]
  • 의소세자
         * [[홍인한]]
  • 최덕문
         * 2015년 《[[사도 (영화)|사도]]》 ... [[홍인한]] 역
  • 헌경왕후
         [[1775년]](영조 51년) 영조가 세손에게 대리청정을 명하자 홍인한은 극력 반대하였고, 이 문제로 정조의 미움을 사서 정조 즉위 후 사사된다.
         홍봉한은 [[1770년]](영조 46년)경 반대파 김귀주, 정후겸의 공격으로 정계에서 영원히 은퇴하고 봉조하의 직함으로 교외에 거주했으며 이후에도 이복동생이던 홍인한과 사이가 좋지 않았고 형을 배신했다고 정조가 말한적이 있다. 사도세자 생전부터 있었던 정순왕후 외척가문과의 정쟁으로 관직에서 물러났고 이후에도 김귀주 정파의 홍봉한 탄핵이 여러번 있었으며 정조 즉위초에도, 정조 사후에도 이들이 홍봉한에 대한 공격을 주도했다. 사도세자의 추숭에 대해 당시 세손이던 정조와 사석에서 홍봉한이 나눈 이야기를 김귀주가 영조에게 고자질해서 홍봉한을 역적으로 몰기도 했었다.
         ***** 숙부 : [[홍인한]](洪麟漢, 1722~17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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