팝업레이어 알림

팝업레이어 알림이 없습니다.
E D R , A S I H C RSS

"홍명희"을(를) 전체 찾아보기

홍명희


역링크만 찾기
검색 결과 문맥 보기
대소문자 구별
  • 홍명희 . . . . 31회 일치
         [[한국]]의 [[소설가]],독립운동가, 민족운동가, 월북 [[북한]] 정치인. 호는 벽초(碧初)[* 뜻은 "[[에스페란토|푸른빛(碧)의 말]]을 처음으로(初) 배운 [[한국인]]". 에스페란토을 상징하는 색이 초록색이라 그렇다.]이다. 춘원 [[이광수(소설가)|이광수]], 육당 [[최남선]]과 더불어 '''일제강점기 [[조선]] 3대 [[천재]]'''로 알려진[* 참고로 말하는데, 이 3대 천재라는 것은 대개 생각하는 것과는 다르다. 홍명회, 이광수, 최남선은 같은 시기에 동경유학을 하였고, 양건식과 신형철들이 이들을 동경삼재라고 불렀다. 동경에서 유학하고 있는 유학생중에서 유능한 인재들이란 이야기였다. 그리고 이들이 귀국하면서, 잡지 소년에 함께 글을 기고하면서 동경삼재라는 이름은 (일제시대하) 조선삼재로 변했다. 이들은 모두 문인으로, 문학계에서 칭찬 삼아서 붙여준 별명이었던 것 같다. 다만 명칭이 이런 식이라서 그럼 왜 세종대왕이나 정약용 대신에 이런 인물들이 있느냐는 비판이 끊이지 않는다.][* [[여담]]으로 이 3대천재 드립은 전부 다 홍명희 관련으로 나왔다. 현대에 이 언급을 한 것도 홍명희 평전이었고, 조선삼재 이야기도 홍명희와 [[현상윤]]이 나눈 1940년대 인터뷰에서 나왔다.] 인물로 실제로 이 셋은 죽마고우였으나 앞의 둘은 반민족행위자로 변절한 데 비해서 홍명희는 변절하지 않지만 월북하여 한동안 우리나라에서 언급하기를 꺼려했다. 이광수의 친일 행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와 친교를 유지했고, 훗날 [[한국전쟁]] 당시 춘원이 납북되자 그의 신변을 보호했으며 그가 폐결핵으로 사경을 헤매자 병원으로 이송까지 할 정도로 막역했다고 한다. 다만 이렇게 친한 만큼 매섭게 이광수를 비판하기도 했다. 야사에서는 이광수가 친일파로 변절하자 홍명희는 이광수의 집 대문 앞에 음식상을 차리곤 곡을 하기 시작했다. 놀란 이광수가 나와서 연유를 묻자 홍명희는 "내 친구 춘원(이광수의 호)이 그만 죽고 말아서 이렇게 곡을 하며 슬퍼하고 있소."라고 대꾸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 비슷한 이야기가 꽤 많다. [[최남선]]과 [[정인보]], 최남선과 정인보의 스승인 승려 석전 박한영 간에도 있다. 최남선이 변절한 뒤 정인보(또는 스승 박한영)를 만나자 "나에게 최남선은 이미 죽고 없는 사람이오."하고 헤어졌다는 야사.]
         [[충청북도]] [[괴산군]] 출생으로, 아버지 홍범식은 대한제국의 관료로 [[경술국치]]에 치욕을 느껴 자결하였다. 설에 따르면 장남 홍명희를 앉혀 놓고 그가 보는 앞에서 자결했다고 한다. 그로 인해 일본에 있는 대성중학을 다니다가 한일합방이란 비보에 학업을 포기하고 귀국했다.
         문제는 할아버지 홍승목으로 이 인간은 [[친일파]][* 사실 홍승목의 시절에 친일파라 함은 이완용과 같은 매국노를 의미한다기 보단 외교적 파트너로써의 친러, 친청, 친일의 의미가 강하다고 보면 된다][* 사실 홍명희도 친일의혹이 없는것은 아니다. 일제 연간에 임전협의회에 가입하여 활동했다는 의혹이 있다. 사실 이건 당시 지도층 인사들의 인칭 도용 때문인데 이런 사례는 조만식,안재홍이나 여운형 같은 사람들도 이같은 일을 당한 바 있다.]
         우리에게는 소설 <[[임꺽정]]>의 저자로 알려져 있다. 단 한편의 소설 《임꺽정》(林巨正)이 1928년부터 13년에 걸쳐 조선일보에 연재된 것을 비롯해 1930년대 그가 쓴 거의 모든 글은 조선일보와 자매지 '조광'에 발표됐다. 여담으로 일제치하에서 수감된 문인들중 유일하게 옥중집필이 허용된 작가가 홍명희 였다. 홍명희가 수감된이후 임꺽정이 연재중단되자 독자들의 항의가 빗발쳤고 총독부 관리들조차 임꺽정에 맛들려서 제정신을 못차렸던 상황. 옥중에서 임꺽정 집필이 완료되면 총독부 관리들이 먼저 읽고 조선일보에 넘겼다고 한다.
         [[1928년]] [[11월 21일]] 연재되기 시작된 <[[임꺽정]]>은 홍명희의 투옥과 개인 사정 등으로 연재가 4차례 중단됐으며, [[1940년]] [[조선일보]]가 폐간된 뒤에는 ‘[[조광]]’에 발표됐다. 이 소설은 토속어 구사가 뛰어나서 ‘살아 있는 최고의 우리말사전’이라 불리기도 했다. 이 소설에 대해 만해 [[한용운]]은 “연재기간의 연장으로는 세계적으로 최고 기록일지도 모른다.”고 말한 바 있다. 훗날 손자 홍석중이 이야기를 마무리지었으므로 대를 이어서 창작한 셈이다. 홍석중 씨가 완결을 발표하기 전에는 미완성 작품이라서, 홍명희가 북한에서 소설을 완성하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이 있었는데, 홍석중의 발언에 따르면 홍명희는 '소설의 결말은 독자들의 생각에 맡겨야 한다'는 생각에 따라 임꺽정을 완성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밖에도 [[신간회]] 운동을 주도했고 [[동아일보]] 편집국장, 시대일보 사장, 오산학교 교장 등을 역임했다. 위당 [[정인보]]와는 사돈 지간으로, 홍명희의 며느리가 정인보의 딸인 정경완 씨이다. 정경완 씨는 해방 뒤 홍명희의 뒤를 따라 북한에 남았고, 평양에 거주하고 있다.
         뒷줄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정인보의 둘째 딸 정경완, 사위 홍기무, 벽초 홍명희, 위당 정인보.
         이후 노동당 군사위원회 위원, 내각 부수상 등으로 주요정치활동을 하였으며, 한국전쟁에 반대한 인물들 중 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1948년 북한 부총리에 선출되었고, 1968년까지 최고인민회의 대의원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을 지냈다. 대부분 월북 인사들이 숙청당한 것에 비해 홍명희는 성공한 삶을 누렸다고 볼 수 있으며, [[김일성]]·[[김정일]] 부자와도 개인적으로 친하였다. 실제로 김일성은 벽초를 극진히 존경하고 예우했다. 홍명희의 계모는 홍명희를 따라가지 않고 괴산의 집을 지키다가 6.25 전쟁 중 월북자 가족이라는 이유로 살해당했는데 북한군이 후퇴하는 급박한 와중에도 그 시신의 수습을 명령했을 정도였다.
         남한에서는 [[김일성]]과 친했던 점, 북한에서 죽을 때까지 잘 대우받은 점 때문에 이름을 거론하는 것조차 금기시되었다. 1990년대 중순부터에서야 서서히 알려졌는데, 그의 이름을 재발굴하려던 국내 학자들도 홍명희와 더불어 [[이태준(소설가)|이태준]]이라든지 여러 월북 작가와 더불어 꽤 여러가지 골치아픈 문제를 겪은 바 있다고 회고했을 정도였다.
         '''[[김정일]]이 직찍[* [[김정일]]은 [[사진]]이나 [[영화]]에 관심이 많았으며, 관련 이론에 대한 책을 직접 쓰기도 했다.]한''' [[김일성]]과 홍명희. 1958년 국제노동자절 행사가 끝난 후 함께 뱃놀이를 하다가 찍은 사진이라고 한다. 북한의 공식 설명에 따르면 '홍명희 선생과 민족의 화해와 대단합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누시는 민족의 태양 김일성 동지'라고 하는데 56년 [[8월 종파사건]] 직후 이기에 벽초의 모습이 왠지 어색하다. ~~ 나 떨고 있니? ~~ 그런데 홍기문이 김덕홍에게[* 북한의 군 출신 정치가로 [[황장엽]]과 같이 망명한 탈북인사.]귀띔한 바로는 꽤 추악한 이면이 있다 한다. 1956년 김성애의 비서로 일하던 홍명희의 딸인 홍귀원이 김일성과 간통을 하다가 덜컥 임신을 했는데 아버지를 볼 낯이 없다고 죄책감에 시름시름 앓으며 아버지를 끝내 찾아보지 못하다가 아이를 낳던 중 그만 죽고 말았다는 것이다. 이에 홍명희가 딸을 잃은 충격으로 맛이 가자 김일성이 홍명희를 위로해주겠다고 석암호수[* [[평안남도]] [[평원군]]에 있는 저수지, 지금은 견룡저수지라고 불린다고 한다.]로 데리고 나가서 찍은 사진이라는 것이다. 죽은 김일성이나 홍명희에게 물을 수도 없고 진실은 홍기문에게 전해들었다는 김덕홍이 알고 있다.
         [[한용운]]과도 사이가 돈독하여 이광수, 최린, 최남선 등의 창씨개명 소식을 듣자 한용운을 찾아가 "여보게, 만해. 이런 개같은 놈들을 봤는가?"하고 울분을 토했다. 이에 한용운은 "이보게, 벽초. 그놈들은 개같은 놈들이 아닐세."라고 대답했고 무슨 소리냐고 따져묻는 홍명희에게 "개는 절대 주인을 배신하지 않으니 '''저놈들은 개만도 못한 놈들이 아닌가? 개가 자네 말을 들었으면 무척이나 섭섭해했을 걸세."'''라고 했다. 이에 벽초도 수긍하고 '''개에게''' 사과를 읊조렸다고.
         한용운이 홍명희보다 9살이나 많음에도 저렇게 서로 격의없는 것이 좀 의아할 수도 있을텐데, 지금은 1, 2년 차이로도 형동생이 나뉘지만 당시에는 위아래로 10년 정도는 그냥 친구로 지냈다고 한다. [* 年長以倍(연장이배) 則父事之(즉부사지) - 나이가 배나 더 많은 사람에게는 아버지 섬기듯 하고, 十年以長(십년이장) 則兄事之(즉형사지) - 십년이 더 많으면 형님 섬기듯 하며, 五年以長(오년이장) 則肩隨之(즉견수지) - 오년이 더 많으면 어깨를 나란히 하되 조금 뒤서서 따라간다. 群居五人(군거오인) 則長者必異席(즉장자필이석) - 다섯 사람이 한데 모여 있을 때는 가장 나이 많은 사람이 반드시 자리를 따로 하는 것이다. - 예기]그런데 홍명희의 장남 홍기문은 아버지와 열다섯 살 차이가 났기 때문에 자기 친구가 알고보니 아버지의 친구였다는 일도 종종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집안 행사 때 아버지 친구이자 자기 친구인 사람이 오면 대하기가 꽤 곤란했다고.
         참고로 국민시인으로 추앙받는 시인 김소월이 사위이다.당시 홍명희와 김소월의 아버지는 친구였고 둘이 의견이 맞아 홍명희가 딸을 김소월네로 시집을 보냈다고 한다.
  • 최남선 . . . . 3회 일치
         [[1957년]] [[10월 10일]] [[뇌일혈]]로 별세한 그는 일제 강점기 시대 동안에 [[이광수]], [[홍명희]]와 더불어 '''조선의 3대 천재'''로 대표되었던 인물이다.
         1927년 계명구락부의 기관지 《[[계명]]》 제18호에 [[일연]]의 《[[삼국유사]]》 전체를 게재하게 하였다.<ref>《도쿠가와가 사랑한 책》(스토리텔링 삼국유사 1) (현암사, 2009) 24~25쪽. {{ISBN|978-89-323-1536-2}} “1927년, 계명구락부의 기관지 『계명』에다 일연(一然)의『삼국유사(三國遺事)』 를 실은 것이었다.” </ref> 같은 해 총독부가 집과 연구 비용을 지원한다고 회유하자 그해 조선사편찬위원회 촉탁을 거쳐 조선사편수회 위원이 되었다. 1932년 중앙불교전문학교 강사가 되었다. 총독부의 조선사 편수회에 가담한 일로 [[이광수]]와 절교하고, [[한용운]]과 [[홍명희]] 등도 연이어 그와 결별 선언을 했다. [[한용운]]은 그의 나무 위패를 새기고 장례식을 거행하여 그를 조롱하려고 시도했다.
         * [[홍명희]]
  • 홍석형 . . . . 3회 일치
         2010년 9월에 열린 [[조선로동당 대표회의]]에서 당중앙위원회 정치국 위원에 선임되었다. 그러나 2011년 6월에 북한 노동당 중앙위 비서직을 포함한 모든 보직에서 해임된 것으로 알려졌다.<ref name="ab">장진복,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4&oid=003&aid=0004117309 홍명희 손자 홍석형 北경제비서 숙청], 뉴시스 2011년 10월 6일</ref> 홍의 이후 행적은 [[2013년]] 현재까지 알려지지 않고 있다.
         ** 조부 : [[홍명희]](洪命熹, [[1888년]] [[5월 23일]] ~ [[1968년]] [[3월 5일]])
         [[분류:1936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치인]][[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분류:풍산 홍씨]][[분류:홍명희]]
  • 홍승목 . . . . 3회 일치
         아들은 경술국치 때 자결한 [[홍범식]]이며, 손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부수상을 지낸 소설가 [[홍명희]]이다.
         **** 손자 : [[홍명희]](洪命熹, [[1888년]] [[5월 23일]] ~ [[1968년]] [[3월 5일]])
         * [[홍명희]]
  • 서림 . . . . 1회 일치
          * 벽초 홍명희의 장편소설 임꺽정에서, 서림은 평안감영의 아전으로서, 진상품을 빼돌리다가 들켜서 청석골 화적패에 가담하여 모사꾼이 된다. 그러나 나중에는 서울에서 체포되어 관군에 협력하게 되며, 임꺽정 패거리의 몰락을 암시하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
  • 이경희 (1880년) . . . . 1회 일치
         그는 만해 [[한용운]] 등과 가깝게 지냈고 [[1939년]] [[7월 12일]] [[한용운]]의 회갑연에 참여했다. 한용운 회갑연 참석자 방명록에는 [[오세창]], [[홍명희]], 이경희 등 16명의 이름이 적혀 있다. 그는 한용운의 환갑을 축하하는 친필 휘호 불택세류(不擇細流)라는 자를 지어 주었다.
  • 정칠성 . . . . 1회 일치
         [[1929년]] [[1월 21일]] 신간회 경성지회 사찰위원, [[1월 22일]] 신간회 임시대회에서 본부대회 대표회원에 선출되었다. [[2월 17일]] [[신간회]] 2주년 기념식에 [[권동진]], [[허헌]], [[김여식]], [[이종린]], [[홍명희]] 등과 함께 축사를 낭독하던 중 임석경관에 의해 소환되었다. [[2월 19일]] 근우회 중앙상무위원회에서 [[근우회]] 회보 발행책임위원에 선출되었다.
11531의 페이지중에 7개가 발견되었습니다 (0개의 페이지가 검색됨)

여기을 눌러 제목 찾기를 할 수 있습니다.

Valid XHTML 1.0! Valid CSS! powered by MoniWiki
last modified 2018-10-30 22:11:09
Processing time 0.0074 se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