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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불상대부 예불하서인

목차

1. 소개
2. 의미
3. 기원
4. 역사
5. 사례
6. 여담
7. 참조
8. 분류

1. 소개

刑不上大夫 禮不下庶人
-禮記 曲禮上第一

유교의 경구 가운데 하나. 고대에서 중세에 걸쳐, 유교 사회에서 일종의 윤리적 원칙, 사회 통념으로 여겨졌다.

2. 의미

형불상대부는 형벌은 대부(大夫)[1]에 이르지 않는다는 의미이며, 예불하서인은 예(禮)가 서인[2]에게 이르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이는 지배계층인 사대부 계급은 '예의범절'로서 스스로 윤리적 강령과 사회 질서를 지켜야 하며, 피지배계층인 서인 계급은 '형벌'로서 그 행동을 제약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국가 정치에 대한 유교의 윤리적 요구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다.

형불상대부라는 원칙이 사대부 계급을 면책특권이나 치외법권의 존재로 만드는 것은 아니다. 고대의 예(禮)는 엄격한 의식으로서, 이에 어긋난 행동을 하면 사대부로서 대우를 받을 수 없고 같은 사대부 계급으로부터 비난을 받게 되거나, 신분을 박탈 당하고 서인으로 전락할 수 있었다. 또한 사대부로서 법을 어겨 형벌을 받을 상황에 놓이게 되면, 형벌을 받기 전에 스스로 목숨을 끊어서 치욕을 피해야 한다는 의미도 들어 있었다.

형벌을 면할 수 있다는 것은 일종의 '불평등'이며, 지배 계층의 '명예'와 '위신', 어떤 의미에서는 인권을 보장해주는 수단이기도 하였다. 예기가 쓰여진 춘추전국시대의 형벌은 신체 부위를 절단하거나 훼손시키는 잔인한 형벌이 대부분이었으며, 이러한 형벌은 당연히 인간에게 커다란 치욕과 고통을 안겨다 주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3. 기원

『예기(禮記)』 곡례상제일(曲禮上第一)에서 공자의 발언으로 나온다.

4. 역사

물론 실제 현실에서는 이러한 가혹한 형벌도 사대부 계층에게 까지 미쳤는데, 공자의 제자 자로가 살해당하고 육젖이 되버린 것에서 알 수 있다. 이 개념은 법가에서는 비판의 대상이었는데 유가를 비판하고 법가를 내세운 진나라에서는 상앙, 이사 같은 재상들 역시 요참 같은 혹형에 처해졌다.

전한 중기에 유교가 국학화 되면서 이 같은 원칙이 정권에 받아들여진 것으로 보이며, 이후 오랫동안 유교 국가에서 하나의 원칙으로 쓰이게 되었다.

5. 사례

예외적으로 형벌에 처해지는 경우가 있는데, 진나라이사, 한경제 시기의 조조 등이 저자거리에서 처해지는 혹형에 처해진 것, 한무제 시기에 사마천궁형에 처해진 것이 그 사례이다. 이사와 조조의 경우는 의도적으로 치욕을 주려는 뜻에서 형벌이 가해진 것으로 보이며, 사마천은 본래 이 같은 상황에서는 자결을 해야 하지만 사기를 써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궁형을 받아들였다.

조선왕조에서 널리 쓰인 사약은 형식상으로는 '자결'로서, 형불상대부의 원칙에 따른 것이었다.

일본사무라이들이 하는 할복 역시 형불상대부의 원칙에 의거한 것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6.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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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王)이나 제후 귀족 휘하의 고위직 신하들.
  • [2] 귀족 계급이 아니며, 관직이 없는 일반인.


7. 참조


8. 분류


분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