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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연경(배구선수) . . . . 30회 일치
         남은 것은 [[인천 흥국생명 핑크스파이더스|흥국생명]]이 ~~표면상~~ '대승적인 차원' 에서 배려해주는 것 뿐이지만 그리 쉽지만은 않아보였다. FIVB 월드 그랑프리 이전에 결정짓겠다던 이적 문제가 [[2012 런던 올림픽|올림픽]]을 지나 9월 초가 되도록 해결의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고 김연경의 발목을 잡고 있었다. [[대한배구협회]]의 [[높으신 분]]의 말씀 한마디이면 해결될 문제이긴 하나 사실 진짜 일해야 할 곳은 계약기간과 신분부터 확실히 해줘야 할 [[한국배구연맹]](KOVO)고 [[대한배구협회]]는 이적동의서 쓰는 것이 할 일. 따라서 이 일이 [[대한배구협회]]로 가는 것부터가 [[현실은 시궁창]]. ~~그리고 그 높으신 분은 김연경 이적 파동 발생 때 대통령 해보고 싶으시다고 나대셔서...~~[* [[대한배구협회]] 회장은 이명박 정권 시절 비서실장을 지낸 임태희 의원으로 18대 대선 새누리당 경선후보로 나선 바 있다.]
         2012년 9월 7일 14시에 김연경의 이적 문제에 관련한 기자회견을 연다고 [[대한배구협회]]가 밝혔지만 언제나 그랬듯이 김연경을 위한 결론이 나오진 않을 것이라고 다들 생각하는 분위기였다.
         [[대한배구협회]]에서는 선수와 구단, 리그 어느 한쪽의 의견을 편향되게 들어줄 수 없기 때문에 결국 국제배구연맹(FIVB)의 유권해석으로 넘기게 됐는데 FIVB에서는 당사자인 김연경과 흥국생명과의 재협상을 명령했다. 이는 계약이 끝나 자유의 몸이 된 선수도 소속팀이 계속 붙잡아두기 위해 단년계약으로 갱신하려는 행태와 함께 FA 신청 연한이 지났음에도 임대라는 이름으로 선수등록 권리를 가지려 하는 한국 배구계의 선수계약 방식에 대한 비판을 어느 정도 염두해둔 FIVB의 의중이었다. 다만 FIVB에서는 로컬 룰 존중이 우선이고 당사자 간의 숙고와 대화를 통한 해결을 우선적으로 제시한 입장이라고 볼 수 있다.
         한편 이런 가운데 2012년 [[국정감사]] 때 '김연경 사태' 가 이슈로 떠오르며[* 국정감사가 있기 전부터 김연경의 팬들이 중심이 되어 SNS를 통해 정치권에 구명 활동을 벌여줄 것을 촉구했다. 이에 새누리당과 민주당이 화답을 하면서 불씨를 지폈다.] 정치권이 개입하기 시작했다. 2012년 10월 19일 김연경은 국회 정론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국제이적동의서를 발급해줄 것을 호소했으며([[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7&oid=008&aid=0002931824|기사 1]],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7&oid=076&aid=0002271983|기사 2]]) 이 날 국회 문방위원회가 주재한 국정감사 정책질의에서 민주당 최재천 의원 등이 [[박용성]] 대한체육회장에게[* 이 날 감사는 대한체육회를 포함한 5개 기관을 대상으로 진행되었으며 ~~대통령 하고 싶다고 나대신~~ 대한배구협회장 임태희는 출석하지 않았다.] 국제이적동의서 발급 및 FA 규정 개정을 촉구하였다. [[http://www.wikitree.co.kr/main/news_view.php?id=89937|#]] 사태가 커지자 결국 2012년 10월 22일 [[대한배구협회]]는 김연경에게 1년 기한의 국제이적동의서를 발급할 것을 결정했다.
         선수 신분이 정리가 되지 않은 채 김연경은 일단 [[대한배구협회]]에서 임시로 이적동의서를 발급받고 2012-13 시즌에도 [[페네르바체 여자 배구|페네르바체]]에서 뛰었다. 중요한 문제가 정리가 되지 않아서 어려운 시즌이 될거라 우려도 많았지만, 김연경은 거기에 굴하지 않고 팀의 에이스로서 제몫을 다했다. 그러나 여전히 매듭짓지 않은 문제는 2013년 오프시즌에 다시 불거지기 시작한다.
         다만 국가대표 자리를 담보로 흥정을 벌이고 있다는 점에서 김연경을 비판하는 입장도 좀 있는 편. 사실 흥국은 선수를 쓰고 6년이나 보낼수 있었음에도 대승적 차원에서 임대를 해주었다. [[인천 흥국생명 핑크스파이더스|흥국생명]]을 악마로 몰아가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꼭 그런것만도 아니다. 그래서 사실 국가대표 은퇴란 카드를 꺼내들 필요도 없었다. [[임의탈퇴]] 조항은 '''V-리그에서만''' 적용될 뿐이고 협회가 이적동의서만 써 주면 어디서든 뛸 수 있다. '''문제는 사태가 이 지경까지 가는데 한 몫 했던 협회가 순순히 이적동의서를 써줄 리가 없었다는 것이다.''' 유출하지 않기로 했던 서류까지 이용해 가면서 노골적으로 구단편을 들고 구조적으로도 구단의 눈치를 볼 수 밖에 없는 협회에게서 공정성을 기대하기는 애초에 어려웠다.
         이후 긴급 기자회견이 기자회견이 아닌 김연경 측의 일방적인 발표였고 에이전트가 기자들의 질문을 전면 차단했다는 점에서 논란이 있었다. 여기에 대해 김연경은 7월 24일 [[기독교방송|CBS]] [[김현정의 뉴스쇼]]와의 인터뷰에서 입장을 [[http://www.youtube.com/watch?v=6rryyZA0-GI|자세히 밝혔다.]] 한편, 협회와의 대화를 하러 변호사와 에이전트와 대동했으나, 협회에서는 이 조력자 둘을 빼고 김연경과 직접 대화를 했으며, 협회 관계자가 김연경에게 폭언을 했다는 후문을 김현정의 뉴스쇼와의 인터뷰에서 남기기도 했다.
         더군다나 김연경의 원 소속구단이 되고 싶었던 [[인천 흥국생명 핑크스파이더스|흥국생명]]의 글자를 FIVB가 지워 줌으로써 후에 이적시 발생할 김연경의 이적료는 고스란히 [[대한배구협회]]가 챙겼다. 김연경의 해외 이적을 계속적으로 방해하는데 한몫했던 배구협회는 생각지도 못한 이적료라는 콩고물을 얻게 되었다. ~~하지만 그 돈은 배구회관 관련 대출 상환으로 꼴아박고(...)~~
         추가적으로 김연경 이적 파동과 직접 당사자였던 [[인천 흥국생명 핑크스파이더스|흥국생명]] 구단, [[대한배구협회]], [[한국배구연맹]]의 각자의 이해관계 때문에 얽히고설켜 삽질을 했다는 내용이 밝혀졌다. 박상설 KOVO 前 사무총장이 기금전용 문제로 궁지에 몰려 있었고, 대한배구협회 임태희 회장은 김연경 이적 파동이 생기려고 하던 시점에 공석이었던 KOVO 총재 자리에 눈독을 들이며 물밑 작업을 시도했었다. 여기에 [[인천 흥국생명 핑크스파이더스|흥국생명]]이 국제이적동의서(ITC) 발급주최인 [[대한배구협회]]에 떡밥을 던졌고, [[인천 흥국생명 핑크스파이더스|흥국생명]] 권광영 단장은 당시 KOVO 총재 추대위원회에 속해있어 KOVO 총재에 눈독을 들이던 임태희 회장의 [[대한배구협회]]와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졌다. 또한 [[인천 흥국생명 핑크스파이더스|흥국생명]]은 온갖 비리혐의로 궁지에 몰려 있던 박상설 총장에게도 추파를 던져 박 총장에 대한 연임 지지를 약속하며 김연경의 해외진출건을 KOVO 이사회 차원에서 막아달라는 ‘딜’을 성사시켰다. 이후에 임태희 회장이 새누리당 18대 대선후보 경선 출마를 하고, [[대한배구협회]] 전무이사의 ITC 발급 불가에 대해 SNS 구명활동에 응하는 엉뚱한 짓으로 우왕좌왕하며 망신을 자초했다. [[http://m.mk.co.kr/entertain/home/2014/213724|해당기사]]
         결론은 기업과 협회가 선수개인을 자기들 맘대로 해서 콩고물을 얻어먹으려다가 우리나라를 국제적으로 개망신 시킨 사건이라고 볼수있다.
         결론적으로 김연경의 발언이 무조건 맞다고 하기에는 다소 그렇지만, 배구협회의 행위야말로 변명의 여지 없이 비판받을 여지가 충분하다. '''애초부터, 김연경이 왜 한국 무대에서 계속 뛰지 않고 외국으로 나가게 된 계기도 전부 다 배구협회 때문이다.'''
         그러나 제아무리 강철 체력에 승부욕 강하고 멘탈 강한 김연경이라 할지라도 2012~13년 두 해에 걸친 이적 사태와 국가대표팀에서의 혹사가 겹쳐 앞서 농담처럼 얘기한 '''그 헬게이트 상황이 벌어지고 말았다'''(...) 2013년 9월 아시아선수권대회 3~4위 한중전에서 오른쪽 어깨 탈골 부상을 입은 채로 끝까지 경기를 뛰어 대표팀을 3위에 올려놓고 FIVB 월드그랑프리 출전권을 확보했지만 열흘이 지나고 벌어진 2014 세계선수권대회 대륙별 예선 초반 김연경의 결장과 대표팀의 [[카자흐스탄]]전 패배로 2014년 세계선수권대회 진출에 실패했다.[* 2014년 배구 국제대회 일정 중 [[2014 인천 아시안 게임|아시안게임]]과 세계선수권대회의 일정이 겹쳤다. 아이러니한 것은 국제대회에서 가장 권위 있는 대회인 세계선수권대회 출전권은 놓치고 매년 여름에 열리는 월드그랑프리 출전권은 확보한 상황이었다(…). 이 와중에 [[대한배구협회]]가 2014년 일정에 맞춰 여자대표팀을 A·B팀으로 나누기 힘들다는 얘기를 하며 홈에서 열리는 아시안게임에서 20년 만의 금메달에 집중하겠다는 뉘앙스로 세계선수권대회 예선을 사실상 포기했다는 소문이 팬들 사이에서 돌기도 했다.]
         2017년 아시아선수권 당시 [[http://www.hankookilbo.com/v/df849eed9805420892619f4cf5a57aed|국가대표 차출]]과 관련하여 이른바 [[이재영(배구선수)|이재영]] 거론으로 인하여 논란이 있었다. 김연경의 국가대표팀 운영에 대한 지적은 옳은 부분이 많으며 배구뿐만 아니라 체육계 전반의 적폐에도 맞닿아있는 부분이 많다. 다만 특정선수 이름이 거론되면서 본래 의도가 희석된 측면이 많다. 이제라도 배구협회의 방만하고 무책임한 협회운영이 개선되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
          * [[2014 인천 아시안 게임]]에서 대표팀이 20년만에 중국을 꺾고 금메달을 땄음에도 불구하고 배구협회는 회식 자리를 [[김치찌개]]집으로 잡는 만행을 저지르는 바람에 당시 배구협회의 푸대접에 화가 난 김연경이 사비를 털어 동료 선수단을 고급 레스토랑으로 데려가 한턱 쏘았다고 한다. 아래 사진을 자세히 보면 김연경 앞쪽에 놓여진 밥과 식기는 손조차 대지도 않았을 정도로 깨끗한 것을 알 수 있지만 나중에 인터뷰에서 밝힌 바에 의하면 맛있게 먹었다고 한다(...). 회식 분위기 자체는 금메달도 따고 해서 나쁘지 않았던 듯 싶다. ~~다른 선수들 표정도 하나같이 다 어두운데 혼자 웃고 있는 [[한송이(배구)|한송이]]가 유독 튀는 건 기분 탓~~ ~~분위기상 양효진과 김희진이 쥔 주먹이 매우 무서워 보이기까지 하다. 참고로 김희진은 완력이 엄청나다.~~
  • 봉준호 . . . . 21회 일치
         영화 《[[마더 (2009년 영화)|마더]]》가 한국 영화 최초로 [[미국]] 비평가 협회에서 받은 외국어 영화상만 무려 7개로 보스톤평론가협회, 남동부비평가협회, 샌프란시스코 영화비평가협회 등에서 수상했다. 뿐만 아니라, 여주인공인 [[김혜자]]는 헐리우드 톱배우들을 제치고 LA 평론가협회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며 해외에서 큰 주목을 받았다. 봉준호 감독은 2011년 미국 최고 독립영화제인 [[선댄스영화제]]의 심사위원으로 위촉되기도 했다.
         * [[2017년]] 제37회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국제영화비평가연맹한국본부상
         * [[2013년]] 제14회 [[부산영화평론가협회상]] 각본상
         * [[2013년]] 제33회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최우수작품상, 감독상
         * [[2011년]] 미국 여성영화비평가협회 최우수 외국영화상
         * [[2011년]] 미국 온라인영화비평가협회 최우수 외국영화상
         * [[2011년]] 미국 캔자스시티비평가협회 최우수 외국영화상
         * [[2011년]] 미국 센트럴오하이오비평가협회 최우수 외국영화상
         * [[2011년]] 미국 남동부영화비평가협회 최우수 외국영화상
         * [[2011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영화비평가협회 최우수 외국영화상
         * [[2011년]] 미국 보스톤영화비평가협회 최우수 외국영화상
         * [[2009년]] 제29회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최우수작품상, 각본상
         * [[2009년]] 제10회 [[부산영화평론가협회상]] 최우수 작품상
         * [[2006년]] 제7회 [[부산영화평론가협회상]] 심사위원특별상
         * [[2003년]] 제4회 [[부산영화평론가협회상]] 감독상, 각본상
         {{부산영화평론가협회상 감독}}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감독}}
  • 윤덕주 (농구인) . . . . 14회 일치
         '''윤덕주'''(尹德珠, [[1921년]] [[6월 23일]] - [[2005년]] [[7월 8일]])는 [[일제 강점기]]와 대한민국의 [[농구]] 선수이자, 대한체육협회 부회장, 명예회장을 역임했다. 구한말의 계몽 운동가 [[윤필오]]의 손녀이자, [[남조선과도입법위원회]] 의원 [[윤홍열]]의 딸이다. 4,5대 국회의원과 재무부 차관, [[호남정유]]사장을 지낸 [[서정귀]]의 부인이다.
         시인 [[이상화 (시인)|이상화]], 독립운동가 [[이상정]], 체육인 겸 사학자 [[이상백 (사학자)|이상백]]은 친정어머니 이숙경의 사촌 남동생들이었다. 치과의사 겸 치의학자 [[이열희 (1924년)|이열희]]는 외사촌 동생이었다. 대구 출신.<ref name="dibigos">[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20&aid=0000307032 <nowiki>[</nowiki>부고<nowiki>]</nowiki> 윤덕주 대한농구협회 명예회장] 동아일보 2005.07.09</ref>
         [[1935년]] [[숙명여고]] 시절 선수로 농구와 인연을 맺은 뒤 대한농구협회 대한체육회 대한올림픽위원회 등 각종 체육단체에서 활동하였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9&aid=0000449350 윤덕주 농구협명예회장 별세] 매일경제 2005.07.08</ref> 1935년 숙명여고에서 선수 생활을 시작해 일제강점기 최고의 센터로 이름을 날렸으며 1940년대 초반 결혼 후 세 번째 아이를 임신한 채로 코트에서 뛴 것은 유명한 일화가 되기도 했다.<ref name="dibigos"/>
         [[1945년]] 해방 이후에도 농구 선수로 활약하였고 [[서정귀]]와 결혼, 이후에도 임심 중에도 현역 농구선수로 활동하였다. 1950년대 은퇴 후엔 대한농구협회와 대한체육회에서 이사, 부회장 등을 두루 거치며 행정가로 활약했다.<ref name="dibigos"/>
         빈소는 서울대병원 영안실 3층1호에 마련됐으며 발인은 12일 오전6시에 거행되었다.<ref>[http://news.hankooki.com/lpage/opinion/200507/h2005070818102324180.htm 윤덕주 대한농구협회 명예회장 별세]</ref> 2005. 7. 12(화) 오전 6시 대한농구협회장(장례위원장, 이종걸)으로 거행되었으며 장지는 [[경상남도]] [[통영시]] [[산양면]] 연화리 선영에 안장되었다.<ref>[http://www.jumpball.co.kr/cont/cont_view.php?cont_cd=02&cont_seq=2785 한국농구 대모 윤덕주 명예회장 별세]</ref>
         * [[1952년]] 대한농구협회 이사
         * [[대한농구협회]] 부회장
         * [[대한농구협회]] 명예회장
         * KOC부위원장 겸 대한농구협회 부회장
         * [[1999년]] [[2월 11일]] [[대한농구협회]] 명예회장<ref>[http://sports.news.naver.com/sports/index.nhn?category=kbl&ctg=news&mod=read&office_id=001&article_id=0004425319 대한농구협회, 최희암감독 사면 복권]</ref>
         * [[대한농구협회]]
         *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20&aid=0000307032 <nowiki>[</nowiki>부고<nowiki>]</nowiki> 윤덕주 대한농구협회 명예회장] 동아일보 2005.07.09
  • 홍상수 . . . . 13회 일치
         * 1996년 제16회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신인감독상《[[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 2000년 제1회 [[부산영화평론가협회상]] 최우수 작품상 《[[오!수정]]》
         * 2008년 제9회 [[부산영화평론가협회상]] 최우수 작품상 《[[밤과 낮]]》
         * 2008년 제28회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최우수 작품상, 각본상《[[밤과 낮]]》
         * 2010년 제11회 [[부산영화평론가협회상]] 대상 《[[옥희의 영화]]》
         * 2013년 제14회 [[부산영화평론가협회상]] 심사위원특별상 《[[우리 선희]]》
         * 2014년 제34회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최우수작품상 《[[자유의 언덕]]》
         * 2015년 제35회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10대영화상《[[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
         * 2015년 제16회 [[부산영화평론가협회상]] 대상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
         * 2017년 제37회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10대 영화상《[[밤의 해변에서 혼자]]》
         * 2017년 제18회 [[부산영화평론가협회상]] 대상《[[밤의 해변에서 혼자]]》,《[[그 후 (영화)|그 후]]》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신인감독}}
         {{부산영화평론가협회상 대상}}
  • 정몽규 . . . . 12회 일치
         | 경력 = [[현대자동차]] 회장<br>[[동아시아축구연맹]] 부회장 (2014년 3월 ~ )<br />[[대한축구협회]] 회장(2013년 1월 ~ )<br />[[부산 아이파크]] 구단주 (2000년 ~ )<br />[[아시아축구연맹]] 부회장 (2016년 9월 ~ )
         '''정몽규'''(鄭夢奎, [[1962년]] [[1월 14일]] ~ )는 [[현대산업개발|HDC]] 회장을 맡고 있는 [[대한민국]]의 기업인이다. [[2013년]] 제52대 [[대한축구협회]] 회장으로 선출되었으며, 2017년 [[국제축구연맹]] 평의회 위원에 당선됐다.
         2011년 제9대 한국프로축구연맹 총재로 선출돼 당시 선수들의 승부조작 사건 등을 단호하게 처리한 바 있으며 2013년에는 52대 대한축구협회 회장으로 선출됐고, 2016년 제53대 대한축구협회장으로 연임에 성공했다. FIFA 클럽월드컵조직위원회 위원(2013-2016), AFC 집행위원회 위원(2015-2017), AFC 아시안컵 조직위원회 부위원장(2015~현재), 발전위원회 위원(2015~현재), FIFA 20세월드컵 조직위원회 위원장(2016~현재), [[2016리우올림픽]] 선수단 단장(2016), [[AFC심판위원회]] 위원장(2016~현재), [[AFC]] 부회장(2016~현재), [[대한체육회]] 부회장(2017~현재), [[FIFA 평의회]] 위원(2017~현재), [[동아시아축구연맹]] 회장(2018~현재)로 활동하고 있다. 2017년 [[FIFA평의회]] 위원으로 선출된 후 중국, 일본, 북한과의 ‘2030 월드컵 공동개최’ 프로젝트에 대한 의지를 밝혔다.
         * 2016.07 ~ 현재 : 제53대 [[대한축구협회]] 회장
         * 2013.01 ~ 2016.06 : 제 52대 [[대한축구협회]] 회장
         * 1998.07 : 전국경제인연합회, 한∙영 경제협회 회장
         * 1997.02 ~ 1999.01 : 제5대 [[한국자동차공업협회]] 회장
         *2017.05 : 한국능률협회 한국의 경영자상 수상
         *[http://www.kfa.or.kr/ 대한축구협회]
         |직책 = [[대한축구협회]] 회장
         [[분류:1962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하동 정씨]][[분류:현대가]][[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분류:용산고등학교 동문]][[분류:고려대학교 동문]][[분류:옥스퍼드 대학교 동문]][[분류:대한민국의 기업인]][[분류:HDC그룹]][[분류:대한축구협회 회장]]
  • 이창동 . . . . 11회 일치
         * 1997년 제17회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각본상
         * 1997년 제17회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최우수작품상
         * 2000년 제20회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최우수작품상
         * 2000년 제20회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감독상
         * 2000년 제20회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각본상
         * 2002년 제22회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최우수작품상
         * 2002년 제3회 [[부산영화평론가협회상]] 각본상
         * 2010년 제30회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각본상
         * 2010년 제30회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최우수작품상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감독}}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신인감독}}
  • AFC 회원 랭킹 . . . . 10회 일치
         [[아시아축구연맹]]에 소속된 협회에서 일정기간동안 거둔 업적을 평가하여 산정한 순위자료다. AFC에서는 AFC MA Ranking이라 표기하고 있으며, 한국 언론에선 보통 AFC 랭킹으로 표기하고 있다. AFC 회원 순위는 AFC에서 주관하는 각종 클럽대항전 참가에 영향을 미친다. 여기에서 말하는 회원이란 특정 국가를 대표할 수 있는 축구협회를 가리키며, AFC에서는 특정한 상황이 아닌 한 1국가 1회원이라는 방침을 고수하고 있다.[* 다소 정치적인 문제와 역사 때문에 중국 본토와 마카오, 홍콩에 있는 축구협회는 중국이라는 하나로 보지 않고 별개로 인정하고 있다.]
         여기에서 각 클럽팀이 얻는 점수는 모두 소속 협회의 점수에 합산된다.
          * 대한민국 축구협회가 지난 4년간 얻은 총 클럽 점수가 190점으로 아시아 팀들 중에 최고 득점을 받으면 한국의 클럽 점수는 70점이 된다.
         [[UEFA 계수]]와는 달리 국가대표팀의 성과를 클럽의 성과와 연결한다는 점에서 AFC의 기본적인 시각이 드러나 있다. 클럽이나 국대나 어차피 종국에는 협회에 소속되어 활동하는 것이므로 이 둘을 분리하지 않겠다는 입장인 것. 말하자면 "협회국의 성과를 종합적으로 측정하여 하나의 지표로 통합"하겠다는 점에서 UEFA 계수와는 차별되는 대표적인 특징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점수와 순위를 통해 아시아에 존재하는 모든 축구협회의 성과를 측정하기 위해 도입했지만 실질적으로는 서아시아 계열과 동아시아 계열간의 우위를 명백히 나타낼 수는 없다.
         UEFA에서는 클럽의 성과를 측정하여 협회의 성과를 측정하고, 또 이로 인해 순위에 변동이 생기면 협회가 획득한 순위에 맞는 티켓을 다음 시즌에 부여함이 명료하게 적시되어 있다. 만약 잉글랜드가 뻘짓을 해서 UEFA 계수가 10위에 떨어지면 차기 시즌은 10위에 해당하는 UCL 티켓과 UL티켓을 받게 된다. 만약 리히텐슈타인이 갑자기 엄청 잘해서 UEFA 계수 1위에 올라오면 UL에만 참가가능한 대우가 UCL 4장, UL 3장이 자동적으로 이루어진다. 여기엔 별도의 의결이 필요없다.
  • 이열희 (1924년) . . . . 10회 일치
          | 서훈 내역 = 대한치과의사협회 학술대상
          | 기타 이력 = [[경북대학교|경북대 의과대학원]] [[의학박사]] 출신 <br /> 치과 의사 · 외과 의사 <br /> 구강성형외과 의사 <br /> 의학 교육자 및 대학 교수 <br /> [[치의학|치의학교육 저술가]] <br /> [[성형외과|구강성형외과학교육 저술]][[저술가|가]] 겸 [[수필|수필가]] <br /> [[경북대학교|경북대학교 의과대학]] 교수 <br /> 대한악안면성형재건외과학회 이사장 <br /> 대한치과의학협회 경상북도 지회장 <br /> 대한악안면성형외과학회 명예회장 <br /> [[경북대학교|경북대학교 치의과대학]] 학장 <br /> [[경북대학교|경북대학교 치과대학]] 명예교수
         [[1977년]] [[5월]] [[대한악안면성형외과학회]] 명예회장에 추대되었고, [[대한치과의사협회]] 회원, 대한치과의학협회 경상북도 지회장, [[경북대학교]] 의과대학 교수, [[경북대학교]] 치과대학 치의학과 교수, [[경북대학교]] 치과대 학장, 경북치과의사회 회장 등을 역임했다. 시인 [[이상화 (시인)|이상화]], 독립운동가 [[이상정]], 역사학자 겸 스포츠인 [[이상백 (사학자)|이상백]]의 5촌 조카였다. 일제 강점기 당시 도지사를 지낸 [[박중양]]은 그의 처조부가 된다. 본관은 [[경주 이씨|경주]](慶州)이고 호는 백산(白山)이다. [[천주교]] 영세명은 '''토마'''이다. [[대구광역시]] 출신.
         [[1963년]] 치과의학회 경상북도지회장에 선출되었다. [[1963년]] [[8월 1일]] [[경북대학교]] 의과대학 조교수로 재직 중, 논문 "인태아(人胎兒) [[소화기]]계의 [[점액]]선에 대한 발생학적 급조직 화확적연구"를 제출하고 [[의학]][[박사]]학위를 받았다. [[1965년]] [[3월 3일]] [[경북대]] 의대 부교수로 승진하였다. [[1967년]] [[10월]] [[대한구강악안면외과협회]] 제9차 정기총회 및 학술대회에서 부회장에 선출되어 [[1969년]] [[10월 17일]]까지 재임했다. [[치과]]전문의가 부족하다는 것을 인식한 그는 경북대 의과대학에 치의학과 재설치를 꾸준히 청원하게 됐다.
         [[1972년]]부터 4년간 [[대한구강안면성형외과학회]] 회장에 선출되었다. [[1974년]] [[3월]] [[경북대학교]] 의과대학 치의학부 교수가 되고 이후 대구시 치과의사회 회원이기도 했다. [[1974년]] [[3월]] 경북대 의대 치의학과장이 되었다. 1977년 5월 대한악안면성형외과학회 명예회장에 추대되었고, [[대한치과의사협회]] 회원, [[대한치과의학회]] 경상북도지회장 등을 역임했다.
         [[1979년]] [[3월]] [[경북대학교]] 의과대학 치과가 단과 대학으로 승격, 치의과대학이 의과대학에서 분리 신설되자, 그는 경북대 치의과대학 초대 학장으로 취임하였다. [[1981년]] [[3월]] [[경북대학교]] 치과대학 제2대 학장이 되었으나 그 해 9월을 기하여 물러났다. 이후 [경북대학교]] 치과대학 치의학과 평교수로 재직하며 경북치과의사회 회장 등을 역임했다. 이후 개인의로 개업하여 이열희 의원 원장을 맡기도 했다. [[1980년]] [[9월]] [[대한군진의학협회]] 명예회원에 위촉되고, [[1981년]] 정년 퇴임과 동시에 [[경북대학교]] 치과대학 명예교수에 선임되었다. 1983년 3월 FICO학위를 취득하였다.
         * 대한치과의사협회 학술대상(1979년 11월)
         *** 고종사촌누나 : [[윤덕주 (농구인)|윤덕주]](尹德珠, [[1921년]] [[6월 23일]] - [[2005년]] [[7월 8일]]<ref>[http://www.hani.co.kr/arti/society/obituary/48641.html 윤덕주 농구협회 명예회장 별세] 한겨레신문 2005.07.08</ref>), 농구선수, [[대한체육회]] 부회장·명예회장 역임
         * [[대한치과의사협회]]
  • 리그컵(K리그) . . . . 9회 일치
         다만, 여기에는 제법 잡음이 있었는데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엉뚱하게도 [[아디다스]]가 해외상표이기 때문에 "아무리 돈이 좋다지만 해외업체의 이름을 단 대회를 한국에서 치뤄야 하느냐?"라는 [[신토불이]]적 마인드가 표출화 된 것.[*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2060400209217001&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92-06-04&officeId=00020&pageNo=17&printNo=21844&publishType=00020|당시 기사]를 보면 시대의 흐름을 알 수 있다. 기사만 보면 재정자립을 위해 해외업체와의 협력도 꼭 필요하다는 협회의 주장이 일견 타당해 보일 수는 있으나 완산 푸마의 7구단 합류 과정에서 [http://sports.news.naver.com/general/news/read.nhn?oid=001&aid=0003646721|외국 스폰서 이름이 붙었다는 이유]로 참가를 못하게 된 사례를 보면 한국축구계가 왜 이렇게 이상하게 굴러가는지 수긍된다.]
         K리그외에도 별도로 운영되는 대회가 태어났기 때문에 팀에서는 이를 위한 별도의 스쿼드를 꾸릴 필요가 생기게 되었으며, 이는 각 구단들이 선수층을 보다 두껍게 만드는 결과로 나타났다. 또한 협회 입장에선 FA컵을 대체하는 대회로 여길 수 있었으며, 좋게 표현하면 구단들은 프로무대에 아직 적응하지 못한 신인들을 테스트해 볼 수 있는 기회의 장이 되어주기도 했다.
         KFA가 구단들과의 의견조율이 실패하여 리그컵과 관련한 협조를 구하지 못했던 것도 리그컵에 크게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구단들은 10만 달러를 전액 상금화를 생각하였는데, KFA는 이걸 일부만 상금으로 쓰고 나머지는 KFA에서 아마추어를 지원할 자금으로 돌릴 생각을 갖고 있어서 1회 아디다스컵은 "상금은 있는데 금액이 확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시작"되었다. 당초에 이는 아디다스컵이 열리게 된 이유가 구단들과 제우교역측과의 논의에서 "[http://sports.news.naver.com/general/news/read.nhn?oid=001&aid=0003650363|스폰금액은 전액 상금으로 쓸 것]"을 전제로 이야기를 풀어갔는데 KFA가 이를 계약서를 찍을때 "협회에 일임함"으로 이야기를 바꿔버려서 협회와 구단사이에 골이 생기게 만들어버렸다. 해당 기사를 보면 알겠지만 아디다스컵의 창설을 주도한 건 협회가 아니라 구단이며, 이는 구단의 수익을 위한 상금배분을 협회가 개입함으로써 제대로 수틀린 것. 제우교역측은 명백히 "프로구단을 위해 사용하길 바람"인데 KFA는 프로리그를 위한 돈을 멋대로 아마추어 사업에 쓰겠다고 나섰으니 구단들이 이 대회를 심정적으로나마 보이콧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어버린다.
         K리그에 끼친 영향이 지대하지만 어쨌거나 현재로써는 공식 기록을 찾기가 가장 어려운 대회가 되었다. 리뉴얼 이전 한국프로축구연맹 홈페이지에서도 이 대회에 대한 정보를 찾는건 상당히 어렵다. 비교적 협회보다 자료정리가 더 잘 되어 있고, 일반에 공개하는 자료양이 훨씬 많은 연맹임에도 그 자료를 찾기란 쉽지 않다.[* 협회쪽은 FA컵의 위상이 상당함에도 경기 관중 수나 카드 이력등을 별도로 공개하고 있지 않다. 협회가 비판받는 대표적인 부분.]
  • 손예진 . . . . 8회 일치
         손예진은 2000년 박기형 감독의 영화 《[[비밀 (2000년 영화)|비밀]]》에서 홍미조 역을 맡아 출연(목소리 출연)한 후, 오디션을 통해 이듬 해 2001년에 방영 된 TV 드라마 《[[맛있는 청혼]]》에서 여주인공 장희애 역을 맡아 본격적으로 연기 경력을 시작했다.<ref>{{웹 인용|url=http://koreajoongangdaily.joins.com/news/article/article.aspx?aid=1885703|title=Young, Charming and Innocent ? What More Could You Want?|date=12 March 2001|work=Korea JoongAng Daily}}</ref><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038&aid=0000100807 '방송'손예진 MBC 최고 루키 선정], 《한국일보》. 2001년 9월 25일 작성.</ref> 첫 드라마 작품부터 주연으로 시작한 손예진은 데뷔와 동시에 큰 인기를 얻었고, 특유의 청순한 모습을 통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첫사랑 이미지로 각인되었다. 같은 해 그녀는 연이어 《[[선희 진희]]》에 출연하며 [[MBC 연기대상]] 신인상을 수상하였다. 2002년, 손예진은 픽션사극 드라마 《[[대망 (2002년 드라마)|대망]]》과 [[임권택]] 감독의 영화 《[[취화선]]》에 출연하였고, 이 영화는 제55회 [[칸국제영화제]] 공식경쟁부문에 초청 되었다. 같은 해 출연한 영화 《[[연애소설]]》(2002)는 233만명의 관객수를 기록,《[[클래식 (영화)|클래식]]》(2003)은 154만명의 관객수를 기록하며 그녀의 초기 경력에서 가장 큰 성공을 안겨주었고, 점차 주목 받기 시작했다. 《클래식》은 현재까지도 아름다운 멜로 영화로 회자되며, 손예진의 맑고 순수한 이미지로 인해 단숨에 청순 아이콘으로 떠올랐다.<ref>{{웹 인용|url=http://kpopherald.koreaherald.com/view.php?ud=201606101410484008937_2|title=Korean stars dubbed ‘Nation’s first love’|website=The Korea Herald|date=10 June 2016}}</ref> 이 작품들을 통해 2002년 제22회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신인여우상과, 2003년 제39회 [[백상예술대상]] 영화부문 여자신인연기상, 제40회 [[대종상 영화제]]에서 신인여우상을 수상하였다.<ref>{{뉴스 인용 |제목 ='살인의 추억' 대종상 4개부문 석권(종합) |url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01&aid=0000396132|출판사 ='살인의 추억' 대종상 4개부문 석권(종합) |저자 =김병규 |날짜 = 2003-06-20 |확인날짜 =2017-09-16 }}</ref> 손예진은 2003년 TV 드라마 《[[여름향기]]》에서 여주인공 심혜원 역을 연기했다. 이 작품은 [[한류 (문화)|한류 문화]]의 주역인 [[윤석호 (연출가)|윤석호]] PD의 ‘[[가을동화]]’, ‘[[겨울연가]]’를 잇는 계절 시리즈 세 번째 작품으로 큰 주목을 받았다.
         2016년에는 손예진이 주연을 맡은 두 편의 영화 《[[비밀은 없다]]》, 《[[덕혜옹주 (영화)|덕혜옹주]]》가 개봉 되었다.<ref>{{뉴스 인용 |제목 =손예진 "'비밀'덕혜'가 2016년의 나..말그대로 다사다난"(직격인터뷰①) |url =http://entertain.naver.com/read?oid=108&aid=0002578621|출판사 =스타뉴스 |저자 =김현록 |날짜 = 2016-12-21 |확인날짜 =2017-09-16 }}</ref> 이경미 감독의 영화 《비밀은 없다》는 비록 25만 관객을 동원하며 흥행에는 실패했지만, 손예진은 평론가의 호평을 받으며 제36회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여우주연상, 제22회 [[춘사영화상]] 여우주연상을 받으며 연기력을 인정받았다.<ref>{{뉴스 인용 |제목 ='비밀은 없다' 손예진 연기, 촬영·미술이 살렸다? |url =http://www.munhwa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75111|출판사 =문화뉴스 |저자 =양미르 |날짜 = 2017-09-02 |확인날짜 =2017-09-16 }}</ref> 대한민국의 마지막 황녀 [[덕혜옹주]]의 삶을 그린 [[허진호]] 감독의 영화 《덕혜옹주》는 560만명의 관객수를 동원하며 여성 원톱 영화로서는 보기 드문 흥행도 일궈냈으며, 손예진의 인생작이라는 호평을 받았다.<ref>{{뉴스 인용 |제목 =[핫 아이콘★②] 손예진 "'덕혜옹주'·'비밀은 없다', 두려움 많았던 작품" |url =http://entertain.naver.com/read?oid=427&aid=0000026414|출판사 =OBS 독특한 연예뉴스 |저자 =조연수 |날짜 = 2017-01-02 |확인날짜 =2017-09-16 }}</ref> 이 작품으로 제37회 [[청룡영화상]] 여우주연상 후보에 올랐으며, 제53회 [[백상예술대상]] 영화부문 여자최우수연기상을 수상하였다.
         {{부산영화평론가협회상 여우주연}}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여우주연}}
         {{한국영화제작가협회상 여우주연}}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신인여우}}
         [[분류:1982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2000년 데뷔]][[분류:김포시 출신]][[분류:대한민국의 여자 영화 배우]][[분류:대한민국의 여자 텔레비전 배우]][[분류:올해의 영화상 수상자]][[분류:부산영화평론가협회상 수상자]][[분류: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수상자]][[분류:춘사영화상 수상자]][[분류:부일영화상 수상자]][[분류:대종상 여우주연상 수상자]][[분류:청룡영화상 여우주연상 수상자]][[분류:대종상 신인여우상 수상자]][[분류:SBS 연기대상 여자 최우수연기상 수상자]][[분류:백상예술대상 수상자]]
  • 오세창 . . . . 8회 일치
         '''오세창'''(吳世昌, [[1864년]] [[8월 6일]] ~ [[1953년]] [[4월 16일]])은 [[조선]] 말기와 [[대한제국]]의 문신, 정치인이자 계몽 운동가이자, [[일제 강점기]] [[한국]]의 언론인, 독립운동가, 서화가, [[대한민국]]의 정치인, 서화가이다. [[조선]] 말기에는 개화파 정치인이었고, [[일제 식민지]] 시대에는 [[3.1 만세 운동]]에 참여하였으며, 서화와 고미술품 감정 등의 활동도 하였다. [[한국]]의 역대 왕조의 서화가 인명사전인 《[[근역서화징]](槿域書畫徵)》(1928년)의 저자이다. [[1918년]] 설립된 [[조선]]인 미술가, 서예가, 조각가 단체인 [[서화협회]] 창립 발기인이기도 하다.
         이후 [[대한협회]](大韓協會)의 부회장으로 추대되었으며 [[1909년]] [[대한협회]]가 창간한 일간지로서 반일 논조를 분명히 한 《[[대한민보]]》 사장도 맡았다. 천도교 내부에서는 [[권동진]]과 함께 개화에는 찬성하되 일본과의 합병에 반대하는 이른바 문명개화파의 대표적인 인물로서, 합병 청원으로 개화할 것을 주장하는 [[일진회]] 계열과는 대립하여 결국 [[이용구]]를 몰아냈다.
         일제강점기 중반 이후 자택에 칩거하며 서예, 서체, 서화가 연구에 전념하였다. 그 밖에도 조선 초기부터 근대에 걸친 서화가, 서예가, 문인학자들의 날인(捺印)된 낙관, 인장 혹은 관련 정보들을 모아 《근역인수 (槿域印藪)》를 편찬하였으며, 여러 서화가들의 다양한 낙관과 아호 연구의 자료가 되었다. 그는 [[1918년]]에 근대적 미술가 단체의 효시인 [[서화협회]]가 결성될 때 13인의 발기인으로 참석하였으며, [[서화협회]]의 창립 회원으로 활동하였다.
         [[10월 16일]] [[이승만]]의 환국 때 [[김포공항]]을 방문하여 영접하였다. 이후 [[이승만]]을 중심으로 [[대한독립촉성국민회]](大韓獨立促成國民會)가 조직되자 회장에 추대되었고, 전국애국단체총연협회 회장으로도 위촉되었다.
         *[[독립협회]]
         [[분류:일제 강점기의 작가]][[분류:일제 강점기의 언론인]][[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건국훈장 대통령장 수훈자]][[분류:독립협회]][[분류:민족대표 33인]][[분류:한국의 군정기]][[분류:한국 전쟁 관련자]][[분류:한국독립당]][[분류:의친왕]][[분류:대한민국의 사회 운동가]][[분류:대한민국의 종교인]][[분류:대한민국의 미술가]][[분류:대한민국의 서예가]][[분류:김규식]][[분류:서재필]][[분류:윤치호]][[분류:이승만]][[분류:이회영]][[분류:해주 오씨]][[분류:서울특별시 출신]]
  • 이인 . . . . 7회 일치
         이인은 [[1896년]] [[10월 26일]] [[경상북도]] [[대구광역시|대구부]] 사일동(射一洞)에서 아버지 이종영(李宗榮)과 어머니 연일 정씨 정복희(鄭福姬)의 아들로 출생하였다. 할아버지 이관준은 영남의 명망가이자 [[성리학]]자였고, 삼촌 [[이시영 (1882년)|이시영]]은 독립운동가로 순국하였다. 아버지 이종영은 [[대한제국]] 당시 애국 계몽운동단체인 [[자강회]](自彊會)와 [[대한협회]]의 회원으로 활동하던 계몽운동가였다.
         [[파일:조선변호사협회 회장 이인.JPG|썸네일|300px|right|조선변호사협회 회장 취임, 앞줄 왼쪽에서 5번째 이인]]
         이후 [[장택상]] 등과 고학생의 상조(相助)기관인 갈돕회를 조직했다. [[1925년]]에는 갈돕회의 총재를 맡고 여자고학생상조회를 조직하는데 도움을 주어 고학생을 돕는 한편, [[조선어연구회]]의 [[조선어사전편찬회]] 발기위원이 되어 사전편찬사업을 적극 지원했다. [[1927년]] [[신간회]]의 창립과 더불어 중앙위원으로 선출되었으며, 이후 [[신간회]]의 해소론이 제기되자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들만의 민족단체를 조직할 것을 주장했다. [[1930년]] 수원고등농림학교 학생들의 흥농사(興農社) 사건을 변호하다 [[재판정|법정]]에서 일본의 학정(虐政)을 비난하여 법정불온변론 혐의로 6개월 동안 [[변호사]] 자격정지 및 정직처분을 받았다. 같은 해 [[조선물산장려회]] 회장이 되었다. 1931년에는 조선변호사협회 회장이 되었고, 1935년에는 [[이우식]](李祐植)·[[김양수]](金良洙) 등과 함께 조선어사전 편찬을 위한 비밀후원회를 조직하여 재정지원을 했다.
         * 조선변호사협회 회장
         * 조선과학협회회장, 물산장려회장, 발명협회 회장, 과학보급회 회장, 어학회 간부
  • 장대환 . . . . 7회 일치
         제37회 한국신문협회 회장이다.
         * 1988년 6월 : 한국신문협회 이사, 국제언론인협회(IPI) 한국위원회 감사, 아시아신문재단(PFA) 감사
         * 1997년 10월 : 한국신문협회 감사
         * 2004년 3월 ~ : 세계신문협회(WAN) 이사
         * 2005년 2월 ~ 2010년 3월: 한국신문협회 회장
         * 2010년 3월 ~ : 한국신문협회 고문
  • 소지섭 . . . . 6회 일치
         | 제28회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 제10회 [[부산영화평론가협회상]]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남우주연}}
         {{부산영화평론가협회상 신인남우}}
         [[분류:1977년 태어남]][[분류:진주 소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청운대학교 동문]][[분류:1995년 데뷔]][[분류:대한민국의 남자 배우]][[분류:대한민국의 남자 텔레비전 배우]][[분류:대한민국의 남자 영화 배우]][[분류:백상예술대상 수상자]][[분류:대종상 수상자]][[분류:부일영화상 수상자]][[분류:부산영화평론가협회상 수상자]][[분류: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수상자]][[분류:KBS 연기대상 남자 우수연기상 수상자]][[분류:군포시 출신]]
  • 최진순 . . . . 6회 일치
         '''최진순'''(崔軫淳, [[1969년]] [[3월 8일]] ~ )은 [[대한민국]]의 [[기자 (직업)|기자]]이다.<ref>김달아·최승영.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004&oid=127&aid=0000024679 중앙, 기어 바꾼 디지털 혁신…구성원 힘 모아 속도 낼까]. 기자협회보. 2017년 4월 5일.</ref>
         [[1969년]] [[대구광역시|대구]]에서 출생했으며, [[1998년]] [[교수신문]]을 거쳐 [[2000년]] [[서울신문]]에서 본격적인 기자생활을 시작했다. (사)한국온라인신문협회 기획분과위원, 뉴스분과위원 및 운영위원 등을 차례로 역임했다. [[2004년]]에는 [[한국언론재단]] [[KINDS]] 태스크포스(TF) 팀장, 운영위원 등을 지냈다. 또 한국언론재단 [[뉴스ML]] 포럼 운영위원으로 활동했다. [[2004년]] 미국언론연구원(API) [[온라인저널리즘]] 디플로마 과정을 수료했다.
         [[2005년]] [[한국경제신문]]으로 이직해 [[2016년]] 9월 현재 편집국 기자로 재직 중이며 [[언론중재위원회]] [[언론중재]] 편집위원을 맡고 있다. [[한국신문협회]] 기조협의회 포털팀(TFT) 등 신문업계 기구에서 계속 활동하고 있다. [[2005년]]부터 블로그 [[최진순 기자의 온라인저널리즘의 산실]]을 운영 중이다. [[2013년]] 건국대학교 언론홍보대학원 겸임교수를 맡고 있다. 강의 과목은 온라인저널리즘, 디지털스토리텔링, 블로그저널리즘 등이다.
         * [[한국온라인편집기자협회]]온라인저널리즘 기여 공로상(2013년)
         * [[한국온라인편집기자협회]]온라인저널리즘 데이터저널리즘 부문 최우수상(2015년)
         * [[한국기자협회]] http://www.journalist.or.kr/news/articleView.html?idxno=8220
  • 허근욱 . . . . 6회 일치
         [[1984년]] KBS 방송국 집필담당 전문위원이 되었으며, 그밖에도 한국소설가 협회 회원, 국제 펜클럽 협회 한국본부 회원, [[한국문인협회]] 회원으로도 활동하였다. [[1989년]] KBS 방송국에서 정년퇴임한 뒤에는 [[1992년]] [[4월]] [[남북문학교류위원회]] 위원<ref name="nambb">동아일보 1992년 4월 20일자 13면, 생활문화면</ref> [[1993년]] 민족통일중앙협의회 이사,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위원, [[이화여자대학교]] 동창문인회 임원, 한국여성문학인회 이사, 한국여성문학인회 자문위원 등을 역임했다. [[1993년]] [[서정범]] 등과 함께 펜문학상을 수상하였다.
         * [[한국소설가 협회]] 회원
         * [[국제 펜클럽 협회]] 한국본부 회원
         * [[한국문인협회]] 회원
  • 황희두 . . . . 6회 일치
         수필가 [[황태영]], 효암학원 이사장 [[채현국]] 을 필두로 문화운동가 [[황희두]], 서양화가 [[송미영]], 캘리그라퍼 [[진성영]], 기업인 [[국도형]] 등을 모아 단체 [[대한북레터협회]]를 만들어 '북레터 365 운동'을 활성화 시키는 중이다. 책에 편지쓰기 캠페인을 진행하여 독서 장려, 따뜻한 사회 만들기 등을 목적으로 다양한 활동중이다. 2015년 11월 [[대한북레터협회]] 상임 부회장으로 선임되었다.<ref>[http://www.weeklypeople.co.kr/detail.php?number=1954 황희두 대한북레터협회 상임부회장 겸 H&P GLOBAL COMPANY 마케팅이사 2015.12.10 | 주간인물]</ref> <ref>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601061951018&code=910100 황희두 부회장, “시민문화운동 ‘북레터 365 운동’으로 대한민국 소통문화를 혁신하겠다.” 2016.01.06 | 경향신문 </ref>
          * [[채현국]] 효암학원 이사장<ref>http://www.viva100.com/main/view.php?key=20160211001659379|[황희두의 북레터 인터뷰 2편] 대한북레터협회와 효암학원 이사장, 건달할배 채현국</ref>
         * [[2016년]] 대한북레터협회 상임부회장
         [[분류:1992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한민국의 e스포츠 선수]][[분류:창원 황씨]][[분류:MBC게임 히어로의 선수]][[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분류:H&P Global Company]][[분류:희여골]][[분류:대한북레터협회 상임부회장]][[분류:청년문화포럼 회장]][[분류:스타크래프트 프로게이머]][[분류:스타크래프트 II 프로게이머]][[분류:테란 선수]][[분류:Team SCV Life의 선수]]
  • 박근혜 . . . . 5회 일치
         국회의원 재직 중 대선 경선을 맞이하게 된 박근혜는 대선 경선 캠프 선대위원장으로 [[대한민국 헌법 제119조]] 2항 '경제 민주화'의 입안자인 전 [[민주정의당]] 헌법개정위원 [[김종인]]을 임명하는 등 [[사회양극화]] 문제 해소에 적극적 의지를 보였다.<ref>[http://media.daum.net/politics/assembly/newsview?newsid=20120628031405843] 김봉기 기자, '경제 민주화' 원조 김종인… 내달 출범 박근혜 캠프 맡는다, 조선일보, 2012.6.28.</ref> 박근혜는 재벌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였으나 재벌의 [[지배구조]] 개선보다는 경제력 남용을 바로잡는 데 방점을 뒀다. 재벌이 우리 경제에서 차지하는 긍정적 역할은 인정하자는 쪽이었다.<ref>[http://media.daum.net/politics/others/newsview?newsid=20120820160408085] 이제훈, 재벌이 싫어하는 헌법 조항, 한겨레21,2012.8.20.</ref> [[사회양극화]] 해소가 목적인 경제민주화를 위해서는 세수확보가 중요한데 박근혜 의원은 2012년 7월 16일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초청 토론회에서 "법인세는 가능한 한 낮춰야 한다"고 주장해 논란을 야기했다. 우리나라 법인세 최고세율은 22%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인 25.6%(지방세 포함)보다 낮은 편이다. 일본과 미국의 법인세 최고세율은 각각 39.5%, 39.2%에 이른다.<ref name="hani.co.kr">[http://www.hani.co.kr/arti/economy/economy_general/542826.html] 류이근, 성연철 기자, 박근혜 "법인세 인하"…친박서도 "경제민주화와 모순", 한겨레신문, 2012.7.17.</ref> 현재 법인세는 내국세 총액 가운데 부가가치세(33.0%) 다음으로 높은 비중(28.6%)을 차지한다.<ref name="hani.co.kr"/> 강병구 인하대 교수(경제학)는 “법인세를 낮추겠다면 소득세나 부가가치세 등에서 ‘박근혜식 복지’에 필요한 재원을 어떻게 마련하겠다는 것인지 대안을 내놔야 하는데 그게 안 보인다”고 지적했다.<ref name="hani.co.kr"/> '법인세 인하와 경제민주화 간의 모순성' 및 '법인세 감소분에 따른 대체 세수 확보' 등의 논란은 대통령 선거일까지 지속될 것으로 보였다.
         박근혜는 2012년 7월 16일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초청 토론회에서 [[5·16 군사 정변]]에 대하여 "돌아가신 아버지로서는 불가피하게 최선의 선택을 한 게 아닌가라고 생각한다"는 발언을 하였다.<ref>[http://news.donga.com/3/all/20120716/47794426/1 박근혜 "5·16 아버지의 불가피한 최선의 선택" 《동아닷컴》, 2012년 7월 16일 작성]</ref> 이후 일부 여론조사에서 응답자의 49.9%가 박근혜의 발언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결과가 나오는 등 많은 논란을 낳았다.<ref>[http://www.hani.co.kr/arti/politics/politics_general/544734.html 5·16 옹호 박근혜 발언 국민 절반이 "동의 못한다"《한겨레》, 2012년 7월 29일 작성]</ref> 논란이 심해지자 8월 7일 한 토론회에서 '5·16이 정상적인 것은 아니다'라는 취지의 발언을 하였고,<ref>[http://www.hankyung.com/news/app/newsview.php?aid=2012080736231&sid=0106&nid=009<ype=1 한 발 뺀 박근혜 "5·16이 정상적인 것은 아니다" 《한국경제》, 2012년 8월 7일 작성]</ref> 역시 이를 두고 정치권의 다양한 해석이 분분하였다.<ref>[http://www.asiae.co.kr/news/view.htm?idxno=2012080722081464158 박근혜, "5·16 정상적인건 아니지않나" 해석분분 《아시아경제》, 2012년 8월 7일 작성]</ref> [[5·16 군사 정변]]에 대한 박근혜의 발언에 대하여 5·16을 두고 박근혜를 공격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해석<ref>[http://www.newdaily.co.kr/news/article.html?no=119933 연좌제 피해자들이 연좌제를 써먹는대서야 《뉴데일리》, 2012년 8월 19일 작성]</ref> 도 있지만, 대체로 민주주의 국가에서 쿠데타를 옹호하는 듯한 발언은 부적절했다는 평이 지배적이다.{{출처|날짜=2008-06-16}}
         2012년 7월 새누리당 대선후보 경선 과정에서 박근혜의 5·16의 역사관에 대한 논란이 또다시 불거졌다.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초청 토론회에서 박근혜는 "5.16은 당시 상황에서 불가피한 최선의 선택이었다"고 말하여 과거 '구국(救國)의 혁명' 발언 당시의 생각과 변함이 없음을 밝혔고 이후 새누리당 대선 후보 경선 합동 토론회에서 오마이뉴스의 여론조사를 인용<ref>[http://media.daum.net/politics/others/newsview?newsid=20120719103711982] 장윤선 기자, "박근혜 5·16 발언에 공감" 52.5%, 오마이뉴스, 2012.7.19.</ref> 해 "제 발언에 찬성하는 분이 50%를 넘었다"고 말하면서 사회적으로도 5·16 찬반 논쟁을 일게 했다. 그러나 박근혜를 칠푼이라 비하했던 김영삼 전 대통령은 이 상황을 빗대 "박근혜, 대통령 되기엔 결격 사유 있다"며 혹평<ref>[http://media.daum.net/politics/others/newsview?newsid=20120717083406324] 김현 기자, YS "박근혜, 대통령 되기엔 결격사유 있다", 데일리안, 2012.7.17.</ref> 하였으며, 박근혜가 언급한 것과 반대의 여론조사들이 나오기 시작했고<ref>[http://www.dailiang.co.kr/news/articleView.html?idxno=41357]</ref><ref>[http://newslink.media.daum.net/news/20120725150611661]</ref><ref>[http://newslink.media.daum.net/news/20120725161212075]</ref> 박근혜의 지지율은 다소 하락하면서<ref>[http://www.viewsnnews.com/article/view.jsp?seq=89218] 박정엽 기자, 안철수 48.4%, 박근혜 46.4%, 뷰스앤뷰스, 2012.7.29.</ref> 박근혜는 "5·16은 정상적인 게 아니다"며 다소 입장을 바꾸는 듯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이후 새누리당 대선후보 경선 토론회에서 임태희 후보의 5·16 관련 질문에 "과거에 묻혀 사시네요"라며 반박하는 등<ref name="경향신문 디지털뉴스팀">[http://newslink.media.daum.net/news/20120808161916193] 디지털뉴스팀, 박근혜, 5·16 질문 받자 "과거에 묻혀 사시네…", 경향신문, 2012.8.8.</ref> 역사관 논란을 피하려 하였다.
         ** 종형 [[박준홍 (정치인)|박준홍]] - 3백부 [[박상희]]의 장남, 前 대한축구협회장, 前 국회의원
         * 2012년 7월 16일 "[[5·16]]은 아버지로서는 불가피한 최선의 선택을 한 게 아닌가 생각한다. 다른 생각, 반대 의견을 가진 분도 있기 때문에 옳으니 그르니 하기보다는 국민과 역사의 판단에 맡겨야 한다." <small>(신문방송편집인협회 토론회에서)</small><ref name="서울신문 김효섭기자">[http://media.daum.net/politics/others/newsview?newsid=20120821030139392] 김효섭 기자, 박근혜 후보의 말말말, 서울신문, 2012.8.21.</ref>
  • 황정민(남자배우) . . . . 5회 일치
         ||<|5> 2002년 || 제3회 부산영화평론가협회상 || 신인남우상 || 로드 무비 ||
         || 제22회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 신인남우상 || 로드 무비 ||
         || 제7회 부산영화평론가협회상 || '''남우주연상''' || [[사생결단]] ||
         || 한국영화배우협회 송년의 밤 || 영화 톱스타상 ||
         || 제2회 한국영화제작가협회상 || '''남우주연상''' ||
  • 김성민 (1994년) . . . . 4회 일치
         이 과정에서 엄청난 논란이 발생하였는데 [[볼티모어 오리올스]]가 그와 계약을 맺는 과정에서 [[KBO (야구)|KBO]]에 신분조회를 요청하지 않아 [[KBO (야구)|KBO]]에서도 그의 계약을 몰랐다. 왜냐하면 고등학교를 졸업하지 않은 선수와의 계약은 금지였기 때문이었다. 2001년 7월에 개정된 한·미 선수계약협정서에는 메이저 리그 구단이 선수를 영입할 때는 신분 조회 절차를 밟아야 한다고 명시되어 있고 고등학교를 졸업하지 않은 선수와의 접촉도 불가능했다. 이러한 비난 속에서 [[일구회]]는 [[2월 2일]]에 [[볼티모어 오리올스]]의 행동을 규탄하는 성명을 발표하였고,<ref>[http://sports.news.naver.com/general/news/read.nhn?oid=018&aid=0002553523 일구회, MLB 무분별 스카우트 규탄 성명], 《이데일리》, 2012년 2월 2일.</ref> [[2월 8일]]에는 [[대한야구협회]]에서 상벌위원회를 열고 그에게 무기한 자격 정지 처분이라는 중징계를 내렸고 이어 [[2월 9일]]에는 [[볼티모어 오리올스]] 스카우트의 경기장 출입금지 조치를 내렸다.<ref>[http://sports.news.naver.com/general/news/read.nhn?oid=396&aid=0000007832 야구협회, MLB 볼티모어 입단 김성민 무기한 자격정지 중징계], 《스포츠월드》, 2012년 2월 8일.</ref><ref>[http://sports.news.naver.com/general/news/read.nhn?oid=018&aid=0002557063 대한야구협회, 볼티모어 스카우트 출입금지 조치], 《이데일리》, 2012년 2월 9일.</ref> 이러한 과정에서 볼티모어의 단장인 [[댄 듀켓]]은 그와의 계약이 문제가 없다고 항변하였고 그도 인터뷰를 통해 '본인의 인생을 건 선택'이라고 언급하며 실력으로 모든 걸 이겨내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ref>[http://sports.news.naver.com/general/news/read.nhn?oid=111&aid=0000268235 볼티모어 단장 "김성민 계약 뭐가 문제냐?"], 《조이뉴스24》, 2012년 2월 3일.</ref><ref>[http://sports.news.naver.com/wbaseball/news/read.nhn?oid=382&aid=0000031009 <nowiki>[단독인터뷰]</nowiki> 미국 진출 논란 김성민 “내 인생을 건 선택”], 《스포츠동아》, 2012년 2월 9일.</ref>
         [[2014년]] [[2월 26일]] [[대한야구협회]]가 그에 대한 자격 정지를 해제함에 따라 차후 국내에서의 선수 활동이 가능해졌다.<ref>[http://sports.news.naver.com/general/news/read.nhn?oid=014&aid=0003103089 KBA, ‘선수등록 규정 위반’ 김성민 자격정지 징계 해제], 《파이낸셜뉴스》, 2014년 2월 26일.</ref>
  • 김우중 . . . . 4회 일치
         [[1989년]]에 펴낸 자서전인《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는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1992년]] 제14대 대한민국 대통령에 출마하려 했으나 [[김영삼]]의 압박으로 불발되었다. [[1993년]] [[대우그룹]]은 세계경영을 선포하였고 또한 김우중은 [[1987년]]부터 [[1993년]]까지 [[대한축구협회]]의 회장을 맡았다. 하지만 [[1990년]] 장남 선재를 잃고, [[1996년]]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의 비자금 사건에 연루되었으나 위기를 잘 넘기며 [[대우그룹]]을 [[1998년]]에 재계 2위로 이끌며 성장시켰다.
         |직책 = [[대한축구협회]] 회장
         |직책 = [[대한축구협회]] 회장
         [[분류:1936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광산 김씨]][[분류:대한민국의 기업인]][[분류:연세대학교 상경대학 동문]][[분류:대구광역시 출신]][[분류:대한축구협회 회장]][[분류:대우그룹]][[분류:레지옹 도뇌르 코망되르 훈장 수훈자]]
  • 대한민국 FA컵 . . . . 4회 일치
         대한민국 FA컵은 [[대한축구협회]]에서 주관하는 [[컵 대회]]이다. 프로, 아마추어 구분없이 KFA에 등록되어 있고 규정을 충족한 모든 팀이 겨루는 대회이기도 하다. 기본적으로 모든 경기는 단판승부가 원칙이나 흥행을 유도한다는 이유로 대회진행방식이 끊임없이 바뀌고 있어 NTX위키에 일일이 적기가 어려울 정도.
         정식 명칭은 FA CUP이며, 이는 대한축구협회에서 정한 공식 명칭이다. 그러나 세계적으로 FA컵이라는 명칭이 곳곳에 쓰이고 있기 때문에 보통 각 국가의 이름을 앞에 붙이는 방식으로 구분하고 있거나 프랑스, 이탈리아처럼 각 국가의 이름에서 유래한 명칭을 부여하고 있기에 언론에서는 스폰서의 이름을 붙이거나 대한민국 FA컵으로 보통 부르고 있다.
         그러던 것이 1996년도부터 FA컵이 탄생하면서 현대적인 의미의 협회 차원의 통합 챔피언을 가리는 개념이 정립하게 되며, FA컵의 우승팀은 모두 이 1996년의 우승팀부터 기록된다.
         [[대한축구협회]]
  • 유해진(배우) . . . . 4회 일치
          * 2014 한국영화배우협회 스타의 밤 대한민국 톱조연상
          * 2014 제1회 한국영화제작가협회상 남우조연상
          * 2015 제16회 부산영화평론가협회상 남우주연상
          * 2017 제37회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남우조연상
  • 이정재(영화배우) . . . . 4회 일치
         1999년 제19회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남우주연상, 1999년 [[청룡영화상]] 남우주연상, 2006년 제29회 황금촬영상 연기대상, 2013년 제34회 청룡영화상 남우조연상, 2014년 제5회 올해의 영화상 남우조연상 등 다수의 영화제에서 수상하였으며,[* 자세한 것은 수상 경력 항목 참고.] 2007년 3월 [[국가정보원]] 명예요원, 2012년 [[국립현대미술관]] 홍보대사 등을 역임하였다. [[장동건]]과 더불어 유이하게 '''청룡영화상에서 신인상, 조연상, 주연상을 모두 석권한 배우이기도 하다.'''
         ||2013||제33회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CJ CGV 스타상||신세계,관상||
         ||1999||제19회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남우주연상||태양은 없다||
         ||1995||제15회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신인연기상||젊은남자||
  • 장후영 . . . . 4회 일치
         이후 [[변호사]]로 일하면서 [[대한변호사협회]] 회장을 지냈고, 고등고시 법전편찬위원, 군법무관전형시험위원, 군법제편찬위원회 고문 등도 지냈다. 출판사인 법정사 사장을 맡아 월간 법률연구지인 《[[법정 (잡지)|법정]]》을 발행하기도 했다.<ref>{{웹 인용
         * [[대한변호사협회]]
         |직책=[[대한변호사협회]] 회장 <small>(보선)</small>
         |직책=[[대한변호사협회]] 회장 <small>(보선)</small>
  • 전민제 . . . . 4회 일치
         * 1974년 석유화학협회 부회장(1979년 퇴임)
         * 1976년 대한해외건설협회 이사장(1982년 퇴임)
         * 1977년 대한기술용역협회 회장(1984년 퇴임)
         * 1984년 한국기술용역협회 고문(1992년 퇴임)
  • 정명훈 (지휘자) . . . . 4회 일치
         줄리어드 재학 중이던 [[1976년]]에 뉴욕 청소년 교향악단을 [[지휘]]해 [[지휘자]]로 공식 데뷔했고, [[카를로 마리아 줄리니]]의 부지휘자로 프로 관현악단 지휘의 [[경험]]을 쌓았다. [[1980년]]에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닉]]의 부지휘자가 되어 상임 지휘자인 줄리니를 보좌하는 역할을 했고, [[1983년]] 가족들과 함께 [[유럽]]으로 거처를 옮겼다. [[1984년]]에는 자르브뤼켄 방송 교향악단의 음악 감독 겸 상임 지휘자로 발탁되었고, 재임 기간 동안 [[윤이상]]의 교향곡 제3번 세계 초연과 음반 녹음 등의 [[활동]]으로 주목을 받았다. [[1986년]]에는 [[파리 국립 오페라]]에서 [[프로코피에프]]의 '불의 천사' 를 [[지휘]]했고, 같은 해 [[미국]]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에서도 [[베르디]]의 '시몬 보카네그라' 를 [[지휘]]해 오페라 지휘자로도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이듬해에는 [[이탈리아]] [[토스카나주]] [[피렌체]]에서 [[무소륵스키]]와 [[베르디]], [[모차르트]]의 [[오페라]]를 [[지휘]]해 절찬을 받았고, [[1988년]] 아르투로 토스카니니 상을 [[상 (표창)|수상]]했다. [[1989년]]에는 [[프랑스]] [[파리 (프랑스)|파리]] [[바스티유 감옥]] 부지에 새로 건립한 [[오페라극장]]의 전속 오페라단인 파리 바스티유 오페라(현.[[파리 국립 오페라]])의 음악 감독으로 부임했고, 신축된 [[오페라극장]]의 개관 공연에서 [[베를리오즈]]의 대작 오페라 '트로이인' 을 상연해 호평을 받았다. [[1990년 10월]]에는 [[도이치 그라모폰]]과 전속 계약을 맺고 음반 제작도 시작했으며, [[조르주 비제|비제]]의 관현악 작품들을 시작으로 [[생상]], [[메시앙]], [[베를리오즈]], [[앙리 뒤티외|뒤티외]] 등의 작품들과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쇼스타코비치]]의 '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 생상의 '삼손과 데릴라(EMI)', 베르디의 '오텔로' 등 오페라 전곡을 [[녹음]]했다. 특히 [[메시앙]]과는 생전에 각별한 친교를 맺고 있었고, 녹음들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1994년]]에 새로 부임한 프랑스 문화부 장관과 정치적 갈등을 겪으면서 음악 감독직에서 해임되었고, 이는 [[프랑스]] 뿐 아니라 [[한국]]에서도 사회적 이슈로 부각되기도 했다. [[1995년]] 유네스코 서울 협회 올해의 인물에 선정되었으며 같은 해에 [[대한민국의 훈장|금관문화훈장]]을 받았다. [[1997년]]에는 [[이탈리아]]의 [[산타 체칠리아 국립음악원 관현악단]]의 음악 감독으로 부임했고, [[도이체 그라모폰]]의 전속 계약을 유지하면서 녹음 활동도 병행했다. [[1998년]]에는 [[한국]]에서 첫 직책으로 [[KBS교향악단]]의 상임 지휘자를 맡기도 했지만, 악단원들과 [[갈등]]을 빚어 불과 수 개월 후 사임하기도 했다. [[2000년]]에는 [[프랑스]] [[라디오 프랑스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음악 감독에 취임했고, 이듬해에는 신성 일본 교향악단을 흡수해 재구성된 [[일본]] [[도쿄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특별 예술 고문으로 초청되었다. [[2005년]]에는 [[대한민국]] [[서울 시립 교향악단]]의 상임 지휘자로 임명되었다. [[2012년]]부터는 [[독일]] [[드레스덴 국립 관현악단]]의 역사상 첫 번째 수석 객원지휘자로 임명되어 [[활동]]을 시작한다. 이외에도 [[독일]]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네덜란드]] [[콘세르트헤바우 관현악단|로열 콘세르트허바우 오케스트라]](RCO)나 [[영국]]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 [[미국]] [[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 [[영국]]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 [[오스트리아]]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독일]] [[드레스덴 국립 관현악단]], [[뮌헨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등등 국제적으로 저명한 세계 각국의 주요 [[오케스트라]]와 오페라 극장들을 객원 [[지휘]]하고 있으며, 다수의 영상물과 음반들을 남기고 있다. [[아시아인]] 혹은 아시아계 연주자들을 중심으로 구성되는 비상설 관현악단인 [[아시아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음악 감독도 맡고 있으며, [[대한민국]] [[인천]]과 [[서울]]에서 매년 정기적으로 공연하고 있다.
         * 1988년 제8회 이탈리아 음악평론가협회 선정 올해의 지휘자 상 "Premio Abbiati"
         * 1991년 프랑스 올해의 음악상, 프랑스 비평가협회 ‘올해의 아티스트’
         * 2015년 제34회 이탈리아 음악평론가협회 "Premio Franco Abbiati" 올해의 지휘자 상(2014시즌) [[클라우디오 아바도|아바도]], [[리카르도 무티|무티]], [[유리 테미르카노프|테미르카노프]] 등과 더불어 1988년에 이어 역사상 네 번째로 2회 수상.<ref>역대 수상자 - [[레너드 번스타인]], [[세르주 첼리비다케]], [[카를로스 클라이버]], [[피에르 불레즈]], [[주세페 시노폴리]], [[리카르도 샤이]], [[주빈 메타]], [[카를로 마리아 줄리니]], [[로린 마젤]], [[다니엘 바렌보임]] 등</ref>
  • 채현국 . . . . 4회 일치
         |소속 = [[효암학원]] 이사장<br/> [[대한북레터협회]] 이사장
         '''채현국'''([[1935년]] ~ )은 [[대한민국]]의 전 [[기업인]] 이자 [[문화운동가]]이다. [[서울대학교]] 철학 학사를 마쳤으며, 과거 [[흥국기업]]의 총수이자 현재 [[대한북레터협회]]와 [[효암학원]]의 [[이사장]]이다.
         현재는 아버지 채기엽의 호를 딴 [[효암학원]] 이사장과 [[대한북레터협회]]의 이사장으로 재임하고 있으며 2014년 새해에 한겨레와의 인터뷰로 인해 대중들에게 크게 알려지고 호응을 얻게 되어
         * [[대한북레터협회]] 이사장
  • 최희서 . . . . 4회 일치
         | 제37회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 제18회 [[부산영화평론가협회상]]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신인여우}}
         {{부산영화평론가협회상 신인여우}}
  • 하정우(영화감독) . . . . 4회 일치
         || 제14회 부산영화평론가협회상 || '''남우주연상''' || 더 테러 라이브 ||
         ||<|3> 2011 || 제31회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 '''남우주연상''' ||<|3> 황해 ||
         || 제10회 부산영화평론가협회상 || '''남우주연상''' ||<|2> 멋진하루 ||
         || 제25회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 신인남우상 ||
  • 헌터X헌터/369화 . . . . 4회 일치
          * 13왕자 마라얌 측에선 헌터 협회 소속 "베레리인테", 세반치 왕비 소속 "바리겐"이 파견. 바리겐 측은 절호의 기회라고 여기고 있다.
          * 벤자민이 보낸 "휴리코프"는 도착해 보니 의외로 헌터 협회 출신이나 넨능력이 있으면서 숨기고 있는 자들이 있는 걸 간파하고 언제든 싸울 수 있게 준비한다.
          13왕자 마라얌 측에선 "베레리인터"라는 헌터 협회 출신 경호병과 세반치 왕비 소속 "바리겐"을 보냈다. 베레리인터는큰 키에 코가 큰 남자. 당연히 넨능력자였지만 "제대로 가르치는지 확인"을 위해서 파견됐다. 베레리인터는 개인적으로 세반치 왕비를 좋아하는지 "꼼꼼히 확인해라"고 당부하던 그녀의 모습을 떠올리며 "귀엽다"고 히죽거리고 있다. 바리겐은 땅딸한 키에 몸집이 옆으로 불어난 남자다. 넨능력 습득을 명령 받았고 그걸 큰 기회로 여기고 있다. "웰게"라는 경호병을 라이벌시하는 듯 한데, 그를 재치고 선발된게 꽤 자랑스러운 모양이다.
          * 첫 정찰의 성과는 놀라웠다. 헌터 협회 소속 경호원은 당연히 넨능력이 있겠지만, 그를 제외해도 네 명이나 더 있었다. 못 쓰는 척을 하고 있다. 그들이 그저 잠복이나 하자고 와있는 거라면 상관없지만, 만일 자신과 "같은 임무"를 받아온 거라면 얘기는 달라진다. 그들이 먼저 능력을 발동한다면 자신도 적극적으로 "방어권"을 발휘할 거라고 다짐했다. 그는 녀석들이 어떤 면상을 숨기고 있을지도 뻔히 알았다.
  • 현제명 . . . . 4회 일치
         1926년 [[미국]]으로 건너가 [[시카고]]에 있는 기독계 무디성경학교에서 음악 교육을 이수하고, 귀국한 뒤에는 조선음악가협회를 창설하고 연희전문학교에서 음악을 가르쳤다. 그 후 [[조선총독부]] 학무국이 주관한 조선문예회 정회원으로 가입하다가, 독립 계몽단체인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체포되었다. 이 사건 이후 친일 성향 단체인 대동민우회의 정회원으로 가입하면서 [[친일반민족행위자]]의 길을 걷게 되었다. 총독부의 내선일체 정책의 일환으로 조선음악가협회를 해체하고 이후에도 시국대응전선보국연맹, 조선음악협회, 경성후생실내악단 등에도 가입하면서 친일 행위를 하였던 전적이 드러나게 되었으며, 특히 친일 찬양적인 성향의 '''[[후지산]]을 바라보며'''에 작곡자로 개입하면서 친일 논란에 휩싸이게 되었다.
         1945년 해방 후에는 [[한국민주당]]에 가입해서 극우 보수파로 활동하여 반공, 반북 운동을 전개하였고 1946년에는 경성음악학교([[서울대학교]] [[음악대학]]의 전신)를 설립하여 교장이 되었다. 1953년 한국음악가협회 위원장, 1954년 대한민국 예술원 영구종신회원에 선임되었다가 1960년 10월 16일 [[간경변]]으로 생을 마감했다.
  • 홍성유 . . . . 4회 일치
         이후 《[[신사조]]》 주간, 《[[신사조]]》 집필위원 겸 편찬위원, [[한국문인협회]] 이사,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이사,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이사, [[한국저작권협회]] 부회장,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한국소설가협회]] 회장, [[문화예술진흥위원회]] 위원, [[대한민국예술원]] 문학분과 회장, [[한국가톨릭문인회]] 회장, [[한국공연예술진흥협의회]] 위원 등을 지냈다.
         * 1984년 한국문학평론가협회
  • 황보관 . . . . 4회 일치
         '''황보 관''' (皇甫 官, [[1965년]] [[3월 1일]] ~ )은 [[대한민국]]의 전 [[축구]] 선수, 감독, 축구 클럽 경영자이자 전 [[대한축구협회]] 소속의 행정가였다. [[일본]] [[J리그]] 팀 [[오이타 트리니타]]의 코치, 감독을 거쳐 오이타 구단의 부사장 및 이사를 맡았고 [[2010년]]부터 오이타의 감독직을 다시 맡게 되었다. [[2011년]] [[대한민국]] [[K리그 클래식|K리그]] 팀 [[FC 서울]]의 감독을 맡아 [[대한민국]] 무대에 복귀했으나 성적 부진으로 117일 만에 사임하고 [[최용수 (축구인)|최용수]]에게 감독직을 넘겼다. 사임한 후 [[대한축구협회]]로 옮겨 기술교육국장을 맡았고 [[이회택]]의 후임으로 기술위원장이 되었다. 본관은 [[영천 황보씨]]이다.
         이후 [[2010년]] [[12월 28일]] [[넬루 빙가다]] 감독의 후임으로 [[FC 서울]]의 감독직을 맡았으나,<ref>{{뉴스 인용|제목=FC 서울, 빙가다 후임에 황보관 감독과 2년 계약|url=http://sportsworldi.segye.com/Articles/Sports/Soccer/Article.asp?aid=20101229000575&subctg1=05&subctg2=00|출판사=스포츠월드|date={{날짜한글화|2010-12-28}} }}</ref> [[2011년]] [[4월 26일]] 리그에서 1승 3무 3패라는 초라한 성적을 거둔 후 [[최용수 (축구인)|최용수]]에게 사령탑을 넘기고 사임했다.<ref>{{뉴스 인용 |제목=못다 이룬 꿈, 117일 만에 아듀|url=http://sports.news.nate.com/view/20110426n05840?mid=s0300 |출판사=스포츠조선 |date={{날짜한글화|2011-4-26}} }}</ref> 사임 후 [[대한축구협회]]의 기술교육국장으로 부름을 받아 행정가의 길을 걷게 되었고,<ref>[http://news.donga.com/3//20110525/37501428/1 축구협회 기술교육국장에 황보관] - 동아일보</ref> [[2011년]] [[11월 9일]] [[이회택]]의 후임으로 기술위원장이 되었다.<ref>[http://news.naver.com/sports/index.nhn?category=soccer&ctg=news&mod=read&office_id=076&article_id=0002160731 이회택 기술위원장 사임, 후임에 황보관 기술교육국장] - 스포츠조선</ref>
  • 마재윤 . . . . 3회 일치
         2010년 4월 몇몇 팬들로부터 [[2010년 스타크래프트 불법 베팅과 승부 조작 사건|승부 조작]]에 마재윤이 가담한 것이 아니냐는 이야기가 제기되면서 '마재윤 vs 이신형'전의 배팅 사건 등등이 제기되었지만, e스포츠 팬들의 반응은 마재윤이 맞다고 주장하는 쪽과 확실하진 않으니 검찰 조사를 기다리자는 쪽으로 나뉘면서 서로 논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이에 검찰은 마 모 프로게이머가 연루되었다고 발표하였는데, 실제 케스파에 등록된 마 씨 성을 가진 프로게이머는 마재윤이 유일한 것으로 밝혀져 사실상 마재윤이 승부조작에 연루되었음이 밝혀졌다. CJ 엔투스는 검찰 수사 공식 확인 하루 전 마재윤을 팀 선수 명단에서 제명하였고, 한국 e스포츠 협회는 그를 다른 승부조작을 꾸민 [[진영수]], [[원종서]], [[최가람]], [[김창희 (프로게이머)|김창희]], [[신희승]], [[김성기 (프로게이머)|김성기]], [[문성진]], [[박찬수]], [[박명수 (프로게이머)|박명수]], [[정진현]]을 모두 영구제명 조치하였다. 검찰 수사 발표 이후 MBC게임 해설진은 경기 중계 도중 과거 경기를 언급하며 마재윤을 우회적으로 비난하기도 했다. 이후 마재윤은 승부 조작 혐의로 인하여 벌어진 재판 당시 재판장이 당신의 직업은 무엇이냐고 물어보자, 마재윤은 프로게이머라고 답하여 무직이라고 대답했던 [[원종서]]와 대조를 보였다. 마재윤은 e스포츠 팬들의 예상과는 달리, 자신이 직접 승부조작에 개입하여 고의적으로 경기를 패배한 혐의에 대해서는 무죄 판결을 받았다.
         마재윤의 주요 기록은 승부조작 사건 이후, [[한국e스포츠협회]]로부터 영구 제명되어 공식 기록에서 전부 삭제되었다.
         === 협회 수상 ===
  • 박경호 (1949년) . . . . 3회 일치
         * 대한곡물협회 경북지회장
         * 아시아정구협회 부회장
         * 대한체육협회 이사(현)
  • 박신혜 . . . . 3회 일치
         박신혜는 또한 2011년부터 기아대책 홍보대사로 활동, 서부 아프리카 가나에 있는 결연아동 아반네를 결연후원 해오고 있으며 팬들과 해외 빈곤국에 센터 세우는 일에 동참했다.<ref>{{뉴스 인용 |제목 =팬과 함께 봉사활동 나선 별들 |url =http://entertain.naver.com/read?oid=382&aid=0000196660|출판사 =스포츠동아 |저자 =김원겸 |날짜 = 2014-04-08 |확인날짜 =2014-04-09}}</ref> 국내외 팬들과 전 세계 빈곤국가 아이들의 교육적, 정서적 지원을 위한 ‘별빛천사마을’ 만들기 프로젝트를 진행해왔다. 1호 센터로 서부 아프리카 가나 ‘신혜센터(Shin Hye Center)’가 2013년 11월 완공되어 5백여 명의 학생들이 이용하고 있다.<ref>{{뉴스 인용 |제목 =기아대책 홍보대사 박신혜, ‘러브백’ 특별행사 참여 |url =http://www.newsen.com/news_view.php?uid=201405291628173210|출판사 =뉴스엔 |저자 =김찬미 |날짜 = 2014-05-29 |확인날짜 =2014-05-30}}</ref> 2014년에는 세월호 희생자 가족을 위해 희망브리지 전국재해구호협회를 통해 5,000만원을 기부했다.<ref>{{뉴스 인용 |제목 =박신혜 이어 소속사도 1000만원 기부 "작게나마 위로가 됐으면" |url =http://entertain.naver.com/read?oid=009&aid=0003189349|출판사 =매일경제 |저자 =이슈팀 |날짜 = 2014-04-23 |확인날짜 =2014-04-24}}</ref><ref>{{뉴스 인용 |제목 =박신혜 이어 소속사도 1000만원 기부 "작게나마 위로가 됐으면" |url =http://stoo.asiae.co.kr/news/view.htm?idxno=2014042515493577725|출판사 =스포츠투데이 |저자 =김은애 |날짜 = 2014-04-25 |확인날짜 =2014-04-26 }}</ref> 또한 자신의 SNS 트위터 프로필 사진을 노란리본 사진으로 변경, 노란리본 캠페인에도 동참했다.<ref>{{뉴스 인용 |제목 =박신혜, 기부 이어 노란리본 캠페인 동참 |url =http://entertain.naver.com/read?oid=144&aid=0000242446|출판사 =스포츠경향 |저자 =온라인뉴스팀 |날짜 = 2014-04-23 |확인날짜 =2014-04-24 }}</ref> 2015년, 박신혜는 ‘2015 Dream of Angel’ 타이틀로 아시아투어에 나섰고, 상해 팬미팅 수익을 [[NGO]] 단체 ’기아대책’의 별빛천사마을 만들기와 중국의 유기동물 보호단체 ‘타소원’에 기부했다.<ref>{{뉴스 인용 |제목 =박신혜, 상해 팬미팅 수익금 전액 기부.."한류스타 이례적 행보" |url =http://entertain.naver.com/read?oid=018&aid=0003217288|출판사 =이데일리 |저자 =강민정 |날짜 = 2015-03-30 |확인날짜 =2013-09-01 }}</ref> 4월, 박신혜는 큰 피해를 입은 [[네팔]] 국민들을 위해 국제구호단체 기아대책를 통해 3,000만원을 기부했다.<ref>{{뉴스 인용 |제목 =네팔 지진 희생자 위해 3천만원 후원 |url =http://entertain.naver.com/read?oid=109&aid=0003054697|출판사 =OSEN |저자 =정유진 |날짜 = 2015-04-30 |확인날짜 =2013-09-01 }}</ref> 2016년 7월, 박신혜는 아프리카 가나의 신혜센터에 이어 필리핀 마닐라에 신혜센터의 건립을 진행했다. 이에 박신혜와 소속사 솔트 엔터테인먼트 직원들은 센터건립에 앞서 필리핀 쌈빨록 지역의 아이들과 1:1 결연을 맺었고, 지난 3월 박신혜는 필리핀의 결연아동의 집을 직접 방문하고 아동결연센터 아이들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가지며 센터 건립에 앞서 건축기념식을 가졌다.<ref>{{뉴스 인용|url=http://entertain.naver.com/read?oid=382&aid=0000489585|제목=박신혜가 또… 필리핀에 아동복지시설 ‘신혜센터’ 건립|출판사 =스포츠동아 |저자=홍세영|날짜 = 2016-07-22|확인날짜=2016-12-09}}</ref>
         2016년 12월, 박신혜는 희망브리지 전국재해구호협회를 통해 대구 서문시장 화재피해 이웃돕기를 위해 5천만 원을 기부한데 이어<ref>{{뉴스 인용|url=http://entertain.naver.com/read?aid=0000931937&oid=213&lightVersion=off|제목=박신혜 측 "서문시장 5천만 원 기부, 소속사도 몰랐다" [공식입장]|출판사 =TV리포트|저자=박설이|날짜 = 2016-12-29|확인날짜=2016-12-09}}</ref> 밥상공동체복지재단를 통해서도 5,000만 원을 기부했다.<ref>{{뉴스 인용|url=http://entertain.naver.com/read?oid=382&aid=0000526953|제목=박신혜 또다시 선행…연탄은행에 5000만 원 기부 [공식]|출판사 =스포츠동아|저자=홍세영|날짜 = 2016-12-14|확인날짜=2017-01-01}}</ref>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여우조연}}
  • 수애 . . . . 3회 일치
         | 제28회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 제1회 한국시나리오작가협회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여우주연}}
  • 안석환 . . . . 3회 일치
         * 1997년 [[한국연극협회]] 최우수남자연기자상
         * 1997년 [[한국연극협회]] 97상반기 최고인기배우
         * 1998년 [[한국연극협회]] 우수공연상 연기상
  • 오지훈 (1973년) . . . . 3회 일치
         그는 제대 후에 [[1997년]]에는 투투 출신 [[유현재]], 여성 멤버 이삭과 함께 얍(YAB, Young & Alternative Beaux)으로 활동하였다. <ref> [http://music.naver.com/album/index.nhn?albumId=65189 개성시대:네이버 뮤직]</ref> YAB의 1집 음반을 프로듀싱하였으며, 전곡을 작곡하였다. <ref> [https://www.komca.or.kr/srch2/srch_01.jsp 한국음악저작권협회 - 저작자명 W0190100, 가수명 얍 참조]</ref>
         * [https://www.youtube.com/watch?v=Fd8qVe4gSZs 한국종합유선방송협회 30개의 채널 케이블 TV](1994)
         * [https://www.komca.or.kr/srch2/srch_01.jsp 한국음악저작권협회]
  • 유지태 . . . . 3회 일치
         | 사진가협회
         | 제1회 [[부산평론가협회상]]
         {{부산영화평론가협회상 신인남우}}
  • 이미연 (배우) . . . . 3회 일치
         * 1990년 제10회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신인여우상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신인여우}}
         [[분류: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수상자]][[분류:청룡영화상 수상자]][[분류:대종상 수상자]][[분류:춘사영화상 수상자]][[분류:1971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구광역시 출신]][[분류:대한민국의 여자 배우]][[분류:대한민국의 여자 연극 배우]][[분류:대한민국의 여자 영화 배우]][[분류:대한민국의 여자 텔레비전 배우]][[분류:동국대학교 동문]][[분류:광주 이씨]]
  • 이상백 (1904년) . . . . 3회 일치
         이후 [[1930년]]에 [[일본농구협회]]를 창설하여 창립회원으로 활동했으며, 그해 일본농구협회 상무이사에 선임되었다. [[1931년]]에 일본체육회 상무이사를, [[1935년]]에 일본체육회 전무이사를 맡았다. 그는 일찍부터 유명한 농구선수로 활약하였으며, 일제 강점기 당시의 체육계 경력이 인정되어 만년에는 체육 이론가와 행정가로서 활동하였다.
         **** 5촌 조카딸 : [[윤덕주 (농구인)|윤덕주]](尹德珠, [[1921년]] [[6월 23일]] - [[2005년]] [[7월 8일]]<ref>[http://www.hani.co.kr/arti/society/obituary/48641.html 윤덕주 농구협회 명예회장 별세] 한겨레신문 2005.07.08</ref>), 농구선수, [[대한체육회]] 부회장·명예회장 역임
  • 이태현(씨름) . . . . 3회 일치
         그러나 2006년 한국씨름연맹[* 흔히 (프로)씨름을 관장하는 단체가 대한씨름협회로 알려져 있지만 이는 잘못됐다. 쉽게 말하자면, 야구로 치면 대한씨름협회는 [[대한야구소프트볼협회]], 한국씨름연맹은 [[한국야구위원회]]와 같은 위치의 단체들이다.]의 막장 행정, 세력간 정치다툼으로 흑화가 되고 [[최홍만]]이 [[K-1]]에서 성공하는 모습을 보자, 이태현은 소속팀 현대삼호중공업과 2012년까지 맺었던 계약을 파기하며 [[종합격투기]]에 뛰어든다.[* 이 때 소속 팀인 현대삼호중공업이 이태현에게 계약파기에 대한 소송을 걸었다가 취하했을 정도로 이태현은 종합격투기 진출 선언으로 엄청난 비난을 받았었다.] 이태현은 국내 복귀 후 인터뷰에서 "그저 관중이 있는 곳에서 시합만 할 수 있으면 좋겠다 하는 마음이었는데, 종합격투기의 화려한 조명과 관중들의 환호, 매스컴의 관심 등을 보면서 엄청난 유혹에 시달렸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 전락원 . . . . 3회 일치
         *1962년 1월 - 1964년 1월 한국관광협회 서울시협회 이사
         *1978년 9월 - 1983년 3월 대한스키협회 회장
  • 정종원 . . . . 3회 일치
         '''정종원''' (1896년 5월 22일 ~ 1977년 3월12일)은 [[조흥은행]] 5대 행장이다. 동아일보 창간발기인으로 참여했고 대한아이스하키협회 4대 회장도 역임했다. 1960년 불교단체인 [[법시사]]를 창립한뒤 1990년까지 발행된 불교 전문 잡지 [[법시]]의 초대 발행인이었다. 일제 강점기에는 경상남북도에서 공직생활을 거쳐 평안남도에서 군수를 역임했다. 그의 부친은 [[정재학]] 대구은행 - 경상합동은행 행장으로 일제하 27년간 행장 직을 유지했다. 또한 그의 조카인 [[정운용]]은 해방 후 첫 조흥은행 행장으로 선임된 바 있다.
         정종원 전 조흥은행장은 재임시절 국내 아이스하키의 발전을 위해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1959년부터 1962년까지 제4대 대한아이스하키협회장을 역임하며 국내 동계스포츠 발전의 기틀을 마련했다.
         막내 정운익은 하와이 오하나 퍼시픽 은행 초대 이사장을 역임했고 한국 여자 아이스하키 팀을 처음으로 직접 구성했다. 그는 대한아이스하키협회 부회장을 역임했고 국제아이스하키연맹 집행위원을 겸직했다.<ref>경향신문, 1998년 2월 25일 26면</ref> 정종원 행장 내외가 생전에 장충동 본가에서 키우며 마지막으로 안아 본 손녀가 정운익의 3녀인 뉴욕퀸이다.
  • 진창현(음악인) . . . . 3회 일치
         1976년 12월에는 [[미국]]의 [[필라델피아]]에서 개최된 미국 현악기 제작자 협회(The Violin Society of America) 주최의 제2회 국제 현악기 제작자 경연대회에 참가해 여섯 개 부문 중 바이올린 세공 부문, 비올라 세공/음향 부문, 첼로 세공/음향 부문에서 [[http://www.vsaweb.org/Previous-Conventions|금메달을 수상]]하면서 세계구급 제작자로 명성을 확고하게 만들었고,[* Chang Heyern Jin이라고 표기된 수상자가 바로 진창현이다.] 1984년에는 미국 현악기 제작자 협회에서 무감사 현악기 제작자(Hors Concours)[* 다른 악기 제작자나 감정가의 감사 없이 자신의 이름을 내걸고 악기를 제작/판매할 수 있는 장인이라는 뜻.] 자격과 마스터 메이커(Master Maker) 칭호를 받았다.
          * 미국 현악기 제작자 협회 무감사 제작자 자격과 마스터 메이커 칭호 (1984)
  • 차승재 . . . . 3회 일치
         '''차승재'''([[1960년]] [[3월 26일]] ~ )는 [[대한민국]]의 [[영화 프로듀서|영화 제작자]]이다. 2012년 현재 동국대학교 영상대학원 원장과, 한국영화제작가협회 회장을 맡고 있다.
         *2007년 1월~ 한국영화제작가협회 회장
         *2003년 《[[부산영화평론가협회상]]》 최우수작품상 - [[지구를 지켜라!]]
  • 최공웅 . . . . 3회 일치
         * 2000년 ~ 2007년: 한국국제사법학회 회장, [[대한상사중재원]] 이사·중재인, [[엠네스티]] 법률가위원회 부위원장, 한국가족보건복지협회 이사, 무역중재인포럼 대표, 아시아변리사회(APPA) 한국협회 고문, 대한변리사회 회장단 자문위원, 인터넷주소 분쟁위원회 고문
         * 2007년 ~ 현재: 대한상사중재원 중재 CEO아카데미 원장, [[중앙대학교]] 법과대학 초빙교수 (국제사법,지적재산권), 한국중재학회 고문,한국국제사법학회 명예회장, 국산업재산권법학회 명예회장, 대한중재인협회 고문
  • 프로 스포츠 . . . . 3회 일치
         프로 스포츠 종사자들은 상업적 이득을 얻는 것을 목적으로 대회를 유치하려 한다. 그리고 이 대회에 참가 가능한 인원들을 "거르는 작업"이 필연적이다. 이렇게 거르는 행위를 통과한 인원들만 모아 대회를 열 준비를 하며, 이 대회에 참가하는 팀에 소속될 자격이 있는 "최상급 선수"의 자격을 갖춘 자들을 프로라 보는게 바람직이다. 축구를 제외한 대한민국 4대구기종목은 드래프트(=최상급 선수라는 판단을 협회와 구단이 동시에 판단)를 통해 이루어지고, 바둑같은 경우는 단위제(=최상급 선수라는 판단을 전적으로 협회를 통해 판단)를 통해, 축구의 경우는 구단이 영입과 이적이라는 행위를 통해(=최상급 선수라는 판단을 법과 협회의 규정 안에서 구단이 자체적으로 판단) 프로냐 아니냐가 결정된다.
  • 한규복 (1881년) . . . . 3회 일치
         그는 어려서 한성에서 신학문인 [[일본어]]와 [[중국어|한어]](漢語), [[영어]]를 공부하다가 [[1893년]] [[3월]] [[을미의숙]](乙未義塾) [[일본어]]학과에 입학, [[1897년]] [[3월]] 을미의숙 일어학과를 마치고 [[관립영어학교]]로 진학하였다. 그는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그해 [[11월 6일]] 정3품으로 [[중추원 (대한제국)|중추원]] 2등 의관에 선출되었으나 중추원은 곧 해체되었다. [[1899년]](광무 2년) [[3월]] [[관립영어학교]]를 졸업하였다.
         [[1917년]] [[경상남도지방토지조사위원회]] 조사위원이 되고, [[1917년]] 진주군수 재직 중 [[고등관]] 5등(高等官5等)으로 승진했다. [[1918년]] [[7월 1일]] [[동래군|동래]][[군수]] 고등관 5등(東萊郡守 高等官5等)으로 발령받았다. [[1921년]] [[2월 12일]]에는 [[충청남도]] 참여관(慶尙北道參與官) 고등관 4등(高等官4等)으로 승진하였다. [[7월 22일]] 다시 [[충청남도]] [[참여관]]으로 임명되었다. [[1922년]] [[5월 30일]]에는 [[만주]]로 출장갔다가 [[10월]]에는 [[동양협회]] 시찰단의 한 사람이 되어 [[일본]]을 시찰하고 [[1923년]]초 되돌아왔다. [[1923년]] [[11월]] [[충청남도]] [[참여관]]으로 재직 중 [[충청남도음악협회]]회장에 선출되었다. [[1924년]] [[2월 11일]]에 [[경상북도]] 참여관으로 옮겼다. [[12월]] [[경상북도]] 참여관 재직 중 [[고등관]] 3등(高等官3等)으로 승진하였다.
  • 현소환 . . . . 3회 일치
         [[1995년 6월]]에서 같은 해 [[1995년 12월]]까지 [[자유민주연합]] 특임촉탁위원 직위를 지낸 그는 [[1996년]] [[국제언론인협회]](IPI) 종신회원이 됐고, [[2005년 5월]]에는 본부이사가 됐다.
         [[2011년]] 현재 방송콘텐츠진흥재단 이사장, 뉴라이트 계열의 뉴스앤뉴스 대표이사, [[국제언론인협회]](IPI) 종신위원<ref>[http://www.freemedia.at/about-us/ipi-executive-board/ 각주 자료 리스트]</ref> 이다.
         * [http://www.freemedia.at/about-us/ipi-executive-board/ 국제언론인협회]
  • 현이와 덕이 . . . . 3회 일치
         '''장덕'''(張德, Chang Deok, [[1961년]] [[4월 21일]] ~ [[1990년]] [[2월 4일]])은 [[대한민국]]의 여성 [[싱어송라이터]]다. 그녀는 싱어송라이터로서 [[진미령]] · [[이은하]] · 양하영 · [[임병수]] · [[김범룡]] · 국보자매 등 많은 다른 가수들의 음반에 참여하며 [[작사가]] · [[작곡가]]로 활동하였고, [[음반 프로듀서]]로도 활동을 하였다. 그녀는 친오빠 [[장현]]과 함께 현이와 덕이를 결성, 만 14세의 최연소 [[싱어송라이터]]로 가요계에 데뷔하여 화제를 모은 바 있으며, 만 15세([[고등학교]] 1학년) 때 [[MBC 서울국제가요제|서울국제가요제]]에서 최연소 [[작사]] · [[작곡가]]로 출전하여 입상하는 등 [[천재]]소녀라는 별칭을 얻기도 하였다. 또한 그녀는 예쁘장한 외모로 [[배우]]로도 활동, 10여 편의 [[영화]]에 [[주연]] 또는 [[조연]]으로 출연하며 하이틴 [[스타]]로도 거듭났다. 그리고 솔로로 독립해 성인이 된 후에도 더욱 많은 연예활동을 하여 [[스타]]의 자리를 지켰다. [[한국음악저작권협회]]에 등록된 장덕 [[작사]] · [[작곡]]의 [[작품]] 개수는 총 129개(2015년 6월 기준: 신탁자코드 W0138300)이며, 생전 남긴 창작작품은 [[록]] · [[포크]] · [[리듬 앤 블루스]](R&B) · [[컨트리]] · [[댄스]] · [[펑키]] · [[트로트]] · [[발라드]] · [[융합]](복합) 등 다양한 [[장르]]의 300여개 정도이다.<ref>이은정. [http://entertain.naver.com/read?oid=001&aid=0007623003 요절가수 장덕·장현 남매 25주기…음원 등으로 재조명]. 연합뉴스. 2015년 5월 28일.</ref>
         1978년 4월 장덕은 1970년대 하이틴 [[영화]]의 붐을 주도했던 세 명의 명[[감독]] [[김응천]] · [[석래명]] · [[문여송]]이 모여 [[옴니버스]] 형식으로 만든 [[영화]] <[[우리들의 고교시대]]> 제1화에서 다시 [[주연]]으로 출연, 음악을 전공하는 청순한 여고생 역을 맡아 열연하며 하이틴 [[스타]]로 거듭난다. 당시 그녀는 자신을 짝사랑한 팬들에게 다섯 번씩이나 납치를 당했을 정도로 대단한 큰 인기를 누렸다. 가는 곳마다 밀려든 팬들의 사인 요청이 이어졌다(10여 편의 [[영화]]에 [[주연]] 또는 [[조연]]으로 출연). 그 해 7월 장덕은 제1회 [[MBC]] [[MBC 서울국제가요제|서울국제가요제]]에서 오빠 [[장현]]이 부른 <더욱 큰 사랑>의 [[작사]]/[[작곡가]]로서 출전, 2년 연속 [[MBC]] [[MBC 서울국제가요제|서울국제가요제]]에서 입상하게 된다. 이 시기 오빠 장현은 오라오라에 출연했을 때 부터 알게 된 부산연예협회지부장이자 왕년의 작사가였던 천봉의 딸 천인실과 극도로 가까워지면서 결혼까지 하게 되고 아이까지 갖게 된다. 그리고 장덕은 결혼한 오빠의 집에서 같이 살게 된다. (1978년 [[현이와덕이]] 정규1집 <[[순진한 아이]]>가 발표 되었다. <[[순진한 아이]]>, <꼬마인형>, <일기장>, <[[소녀와 가로등]]>, <정말>, <작은소녀의 사랑 이야기> 등 11곡+경음악1곡 수록, 같은 해 <크리스마스 캐롤집> 발표)
         1981년 장덕은 비싼 등록금으로 인해 벨몬트 칼리지 음악과에서 한 학기를 마친 뒤 [[테네시 주립대학교]] 실용음악과로 옮기게 되며 그 곳에서 음악의 기초 · 이론 · 감상 · 작곡 · 작곡기법 등을 전문적으로 배우게 된다. 또한 [[내쉬빌]] [[작곡가]] [[협회]]에 회원으로 가입도 하고, 한인 기독교 방송 프로그램 한국의 샘터에서 MC로도 활동하게 된다. 그리고 어느 날 장덕은 리 패밀리의 일원이었던 이승언과 결혼을 하겠다고 어머니에게 허락해 달라고 한다. 당시 어머니는 결혼은 감옥 같은 것 이라며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나며 대학 졸업 후 결혼하라고 충고했지만 10월 17일 미국에 온지 1년만에 장덕은 자신을 아껴주는 이승언과 [[내쉬빌]]에서 결혼을 한다. 그리고 리 패밀리의 일원으로서(밴드에서 장덕은 음악적 리더 역할을 하였고 퍼스트 기타와 보컬을 담당했다.) [[한인회]]의 각종 행사에 참여하게 된다. 하지만 점점 그녀는 서울에서의 화려했던 가수 생활의 추억을 점점 그리워 하게 된다.
  • 현재현 . . . . 3회 일치
         * 1988년 한국양회공업협회 회장
         * 1993년 한국금융선물협회 회장
         * 2011년 한일경제협회 부회장
  • 홍정욱 . . . . 3회 일치
         * 現 [[국립중앙박물관회]] 이사, 한미협회 이사, [[서울대학교미술관]] 운영위원
         * 前 [[한국신문협회]] 이사, 국제언론인협회 한국위원회 이사, 한국신문윤리위원회 감사, 글로리아오페라단 이사
  • 홍준표 (마술사) . . . . 3회 일치
         * 2006년 미국마술협회 국제마술대회 Mystic Crag Award for Professional Promise
         * 2006년 미국마술협회 국제마술대회 피플초이스
         * 2006년 미국마술협회 국제마술대회 3위
  • 황두진 . . . . 3회 일치
         2007-2009 
'메가시티 네트워크: 한국현대건축', 프랑크푸르트 독일건축박물관, 베를린 독일건축센터, 에스토니아 건축박물관, 스페인 바르셀로나카탈로니아건축사협회 에스파이피카소, 한국 국립현대미술관 순회<ref>{{서적 인용|url=https://www.jovis.de/en/books/product/megacity-network.html|제목=Contemporary Korean Architecture Megacity Network, ISBN 978-3-939633-37-2|성=Sung Hong Kim / Peter Cachola Schmal (eds.) in cooperation with KAI (Korea) / DAM (Germany)|이름=|날짜=|출판사=jovis|확인날짜=}}</ref>
         2018-현재 한국건축가협회 남북교류위원장
         2007 한국건축가협회 아천상(가회헌, 2007)
  • 2016 K리그 다득점 우선적용 논란 . . . . 2회 일치
         K리그가 성립할 수 있었던 배경은 전두환 시절의 3S정책과 맞닿아 있던 것은 결코 부인할 수 없으나, 박정희 시절부터 내려온 스포츠 지원정책의 기치는 '''"(저 북괴놈들에게 절대 꿇리지 않는) 국제적인 스포츠 업적을 거두어 세계만방에 걸친 명성을 쌓아 올리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즉, 국제 스포츠계에서 업적을 쌓는다는 명분이 대한축구협회 시절에 세운 기치이며 이는 한국프로축구연맹이 설립된 지금도 그 흔적이 남아 있다.[* 한국프로축구협회 정관: 제1조 목적, 이 법인은 한국프로축구의 수준향상과 저변확대는 물론 국제교류 등 축구를 통해 국민의 건 전한 여가 선용을 도모하고, 스포츠 활성화와 지역사회를 비롯한 '''국가 발전 및 국제친선에 기여함을 목적'''으로 한다.]
  • K리그 . . . . 2회 일치
         역사적으로 K리그는 1983년 탄생한 [[수퍼리그]]를 전신으로 한다. 이 당시에는 아직 한국프로축구연맹이 없었기 때문에 대한축구협회(이하 KFA)의 주도로 대회가 탄생하였으며 완전한 프로리그는 아니었다. 총 5개 팀이 참가하였고, 이 중에서 완전한 프로팀은 유공(現 제주 유나이티드), 할렐루야 두 팀 뿐이었고, 나머지 세 팀은 실업팀이었던 국민은행, 포항제철(現 포항 스틸러스), 대우(現 부산 아이파크). 물론 이 세미프로팀들도 당시에는 프로전환을 고려하고 있었다고는 하지만 실업팀(=세미프로)이 더 많았던 리그임은 사실이다. 또한 참가팀 자체가 적었기 때문에 승강제는 애초에 구성하기도 불가능했다.
          * [[http://www.kfa.or.kr/record/history.asp|대한축구협회 연혁]]
  • 강연재 . . . . 2회 일치
         * [[2010년 1월]] ~ [[2012년]] : 대한변호사협회 사무처장
         * [[2012년]] 대한변호사협회장 표창
  • 강원 FC . . . . 2회 일치
         실제 창단의 시발점은 2008년 4월 28일에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15&oid=001&aid=0002064010|"강원도민프로축구단 창단추진"]을 발표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정몽준 前 축협회장이 참가하여 "창단을 축하한다"는 발언을 생각하면 이 시기를 구단 역사의 첫 페이지로 봐도 무방할 것 같다.[* [[http://www.viewsnnews.com/article?q=33646|참고기사]]] 당시 도지사였던 김진선 이외에도 18대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던 이광재(태백, 영월, 평창, 정선), 최욱철(강릉)도 여기에 대해서는 당선공약으로 내세웠을 정도로 여야를 막론한 창단의 동의는 사실상 이루어졌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허나 이 과정에서 이 과정에서 도의회와의 협조는 특별히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예산에 관해서는 다소 논란이 일 수 밖에 없었다. 또한 강원도축구협회와의 협의는 아예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깜짝 쇼는 시민들에게는 이벤트였을지는 모르나 축구 및 도의회 관계자들에게는 뜬금포로 느껴질 수 밖에 없었던 것. 하지만, 강원도청측은 당초 발표한 대로 일정에 맞춰 절차를 밟아 창단이 이루어지게 된다.
  • 강재형 (아나운서) . . . . 2회 일치
         * [[2004년]] : 한국어문교열기자협회 간사
         * [[2004년]] :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보도용어통일심의위원회 위원
  • 김갑수(배우) . . . . 2회 일치
         ||<|2> 2003년 || 일본영화비평가협회 || 아시아친선상 || ||
         || 부산영화평론가협회상 || 남우조연상 || [[장화, 홍련]] ||
  • 김기창 (법학자) . . . . 2회 일치
         * 법조인의 전문화 및 국제경쟁력 강화, 건국 60주년 기념 한국법률가대회: 선진국 조건으로서 법치주의, 한국법학원, 대법원, 헌법재판소, 법무부, 대한변호사협회, 한국법학교수회, 2008.8.26
         * 로스쿨 변호사 실무수습방안, 대한변호사협회 주최 '로스쿨 도입에 따른 변호사 업무의 선진화 방안' 심포지엄, 2008.12.15
  • 김덕현 (변호사) . . . . 2회 일치
         김덕현은 판사 출신으로 [[1986년]] 변호사로 개업한 뒤 여성변호사회 회장, 대한변호사협회 여성문제연구실무위원장, 한국에이즈퇴치연맹 이사, 국가인권위원회 위원 등을 거쳤다.<ref>김효섭.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81&aid=0000011071 전원위원회 구성 어떻게]. 서울신문. 2004년 8월 25일.</ref> <ref>강충식.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81&aid=0000033227 (‘로스쿨’로 뛰는 대학들) (1)한양대]. 서울신문. 2005년 2월 28일.</ref> <ref>심규석.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1&aid=0001323957 <헌법재판관 5인 교체 앞두고 하마평 무성>(종합)]. 연합뉴스. 2006년 6월 11일.</ref> <ref>이하나. [http://www.womennews.co.kr/news/54417 네 번째 여성 대법관 탄생하나]. 여성신문. 2012년 8월 17일.</ref>
         *2011 대한변호사협회 부회장
  • 김문오 . . . . 2회 일치
         * 한국기자협회 대구·경북지회장
         * 대구축구협회 이사
  • 김민기(가수) . . . . 2회 일치
         ||<#9FC93C> {{{#white '''수상 경력'''}}} ||<#FFFFFF> [[백상예술대상]] 음악상 '개똥이' [br] 한국평론가 협회 음악극 부문 연극상 [br] 서울연극제 극본상, 특별상 《[[지하철 1호선]]》 [br] 한국연극협회 '98 우수공연 5' 단체상, 번안상 《의형제》 [br] 제35회 동아 연극상 작품상 《의형제》 [br] 제6회 한국 뮤지컬 대상 특별상 [br] 제37회 [[백상예술대상]] 연극부분 대상 및 연출상 《의형제》 [br] 파라다이스상 문화예술부문 [br] [[괴테 메달]] [br] 제5회 [[더 뮤지컬 어워즈]] 공로상 [br] 제10회 [[한국대중음악상]] 공로상 [br] 2018년 대중문화예술상 [[문화훈장]] 은관 ||
  • 김민희(1982) . . . . 2회 일치
         || 2015년 || 제16회 부산영화평론가협회상 || '''여우주연상''' ||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 ||
         ||<|3> 2008년 || 제9회 부산영화평론가협회상 || '''여우주연상''' ||<|3> 뜨거운 것이 좋아 ||
  • 김석원 (금융인) . . . . 2회 일치
         '''김석원'''(1947년 ~ [[충청북도]])은 대한민국의 금융인, (前) 행정 [[공무원]]이다. 2009년 10월, 사단법인 [[신용정보협회]]의 초대 회장으로 선임되었다.
         * {{언어링크|ko}} [http://www.cica.or.kr/01_orginfo/hello.jsp 신용정보협회 김석원 회장 소개]
  • 김성주(축구선수) . . . . 2회 일치
         4월 11일 [[선문대학교]]와의 [[대한축구협회 FA컵/2015년|FA컵]] 3라운드 홈 경기에서 선발 출전해서 전반 30분 오창현의 드로인을 머리로 받은후 오른발로 접어 상대 수비와 골키퍼를 속인 뒤 왼발슛으로 첫골을 기록했다. 팀은 2:0으로 승리하여 32강전에 진출했다.
         4월 29일 [[울산 현대]]와의 [[대한축구협회 FA컵/2015년|FA컵]] 32강전 원정경기에서 83분 김창욱선수와 교체되며 투입되지만 타라바이가 퇴장을 당하며
  • 김운용 . . . . 2회 일치
         [[1971년]]부터 [[1991년]]까지 [[대한태권도협회]] 회장을 역임했으며 [[1973년]]부터 [[2004년]]까지 [[세계 태권도 연맹]]을 역임했다. [[태권도]]의 세계화를 추진했으며 태권도가 올림픽 정식 종목으로 채택되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86년]]부터 [[국제 올림픽 위원회]](IOC) 위원으로 활동했으며, [[1992년]]에는 부위원장에 당선되기도 하였다. 2001년 IOC위원장 선거에 출마했으나 낙선하였다. 2005년 공금 횡령 등의 혐의로 구속된 후에 IOC 위원직을 사퇴했다. 2017년 10월 3일 서울특별시 서대문구의 [[연세대학교 의료원|세브란스병원]]에서 8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ref name="yonhapnews_2017-10-03_death">{{뉴스 인용 | 저자=배진남 | 위치=서울 | 뉴스=연합뉴스 | 제목='한국스포츠 거목' 김운용 전 IOC 부위원장 3일 오전 타계(종합3보) | url=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7/10/03/0200000000AKR20171003024154007.HTML | 날짜=2017-10-03 | 확인날짜=2017-10-03 | 보존url=https://archive.today/20171003133204/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7/10/03/0200000000AKR20171003024154007.HTML | 보존날짜=2017-10-03 | 깨진링크=아니오 }}</ref><ref name="news1_2017-10-03_death">{{뉴스 인용 | 저자=정명의 | 위치=서울 | 뉴스=뉴스1 | 제목=거목이 쓰러지다…김운용 전 IOC 부위원장이 걸어온 길 | url=http://news1.kr/articles/?3116999 | 날짜=2017-10-03 | 확인날짜=2017-10-03 | 보존url=https://archive.today/20171003133158/http://news1.kr/articles/?3116999 | 보존날짜=2017-10-03 | 깨진링크=아니오 }}</ref>
         * 1971년 ~ 1991년 : [[대한태권도협회]] 회장을 역임함.
  • 대한민국 FA컵/2016시즌 . . . . 2회 일치
          * 라운드 배정은 기본적으로 [[대한축구협회]](이하 KFA)에서 고려하는 리그의 등급과 성적에 따라 차등 부여된다. 즉, KFA가 바라보는 시각에서 높은 수준의 리그일수록 본선에 가는 길이 빨라진다.
          * 국민생활체육협회 추천 연합회팀: 10개팀
  • 로힝야 . . . . 2회 일치
         버마무슬림협회와 유엔의 보고에 따르면, 이 폭동은 우발적인 것이 아니라, 조직적으로 동원된 것이라는 의혹이 있다. 미얀마 정부가 밝힌 공식 사망자는 43명, 모스크 37곳과 건물 1300여채가 불탔고, 1만 3천여명의 이재민이 발생했다. 버마무슬림협회는 사망자가 70~100여명은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 박주영 . . . . 2회 일치
         어쨌든 박주영은 한국 축구에서 비교적 현대적이고, 또 축구적으로 멘탈, 피지컬, 스킬을 통틀어 대단히 독특한 캐릭터를 지닌 선수라는 것은 확실하다. '''그리고 [[이동국]]과 달리 [[FIFA 월드컵]]이나 [[올림픽/축구|올림픽 축구]]처럼 큰 경기에서 결정적 한 방을 잘 터뜨려 주었기에''' 박주영이 비난을 받더라도 어느 정도 쉴드치는 사람들도 있고 그들의 논거도 충분히 합리적이긴 하다. 더군다나 박주영은 월드컵, 올림픽, 아시안게임 등 3대[* [[AFC 아시안컵]]은 대한축구협회에서 그렇게 높은 비중을 두는 대회가 아니다.] 메이저 축구대회에서 모두 골을 넣어본 단 3명[* 나머지 2명은 [[구자철]]과 [[손흥민]]으로 이 2명의 경우는 아시안컵 골도 있다.]뿐인 대한민국 축구선수.
          * 2000년대 중반 박주영을 주인공으로한 [[육성 시뮬레이션]] [[플래시 게임]]인 '축구왕 박주영'이 있었다. 박주영을 키워 프로선수로 만드는 게 목적이고 중간 중간 '[[불멸의 이순신]]' 플래시 게임이 들어가있었지만 축구협회측에서 합의한 초상권 협의 종료로 결국 사라졌다. [[http://upload.inven.co.kr/upload/2014/06/26/bbs/i2943558749.jpg|관련 사진]]
  • 박준홍 . . . . 2회 일치
         |||||||||||| '''[[대한축구협회]] 회장''' ||
         [[박정희]]가 대통령이 되면서 작은아버지 박정희의 지원으로 유학까지 다녀오고 공직 생활을 했다. [[대한축구협회]] 회장까지 지냈다.
  • 박홍우 . . . . 2회 일치
         * 미국 연방의 양형기준제도, 각국의 양형제도, 법조협회 (2002)
         * 싱가포르의 사법제도, 법조 56권 11호, 법조협회 (2007. 11.)
  • 소명(가수) . . . . 2회 일치
         * 2006년 모범가수상 《한국연예협회
         * 2013년 제3회 한국대중가요발전협회 인기스타상
  • 신화용 . . . . 2회 일치
         ||<-5><bgcolor=#0c1534><table bordercolor=#edbe26><table width=100%><table align=center><:> [[대한축구협회 FA컵|{{{#edbe26 '''KEB 하나은행 FA컵'''}}}]] [[대한축구협회 FA컵#s-9|{{{#edbe26 '''MVP'''}}}]] ||
  • 안숙선 . . . . 2회 일치
         * [[1994년]] [[국제문화친선협회]] 선정 '올해의 국제문화인상' 수상
         * [[1996년]] [[한국문인협회]] 선정 '가장 문학적인 국악인상' 수상
  • 오병희 . . . . 2회 일치
         |경력 = [[대한심장학회]] 이사장<br>[[대한병원협회]] 부회장
         *2013년 6월 ~ : 대한병원협회 부회장
  • 유다인 . . . . 2회 일치
         이후 아침드라마와 조연, 광고 쪽을 돌며 주로 활동을 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자신의 배우로서의 주가를 높여준 작품을 만나게 되는데, 바로 2011년 여주인공 혜화 역으로 출연한 [[독립영화]] '혜화, 동'이다. 이 영화를 통해 각종 영화제 신인여우상에 노미네이트되었고, 2011년 제31회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신인여우상을 수상하면서 배우로서의 존재감을 인식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 [[2011년]] || 제31회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 신인여우상 || 혜화, 동 ||
  • 은혼/594화 . . . . 2회 일치
          * 천도중은 각인을 가지고 별의 아르타나를 자유자재로 다루는 조직. 여러 별의 아르타나를 독점적으로 관리하는 "아르타나 관리협회"였다.
          * 천도중은 아르타나의 관리를 독점하고 있는 "아르타나 보전협회". 여러 별의 아르타나를 독점적으로 관리하고 있다.
  • 이동찬(기업인) . . . . 2회 일치
         스포츠에도 관심이 있었던지 1971년부터 1980년까지 한국실업농구연맹 회장, 1980년부터 1983년까지 [[대한농구협회]] 회장, 1985년부터 1996년까지 대한골프협회 회장을 지내기도 했다.
  • 이영희 (1936년) . . . . 2회 일치
         * 올해의 초대 디자이너(한국패션협회, 1996)
         * 자랑스런 한국인대상(언론인협회, 2008)
  • 이중환(법조인) . . . . 2회 일치
         || 재단 · 협회 ||<#ddd> [[전경련]] || [[이승철(기업인)|이승철]] ||<#ddd> [[미르재단]] · [br][[K스포츠재단]] || [[정현식]] · [[정동춘]] · ''[[이성한(미르재단)|이성한]]'' [br] ''[[노승일]]'' · [[박헌영(K스포츠)|박헌영]] ||
         ||<#ddd><-2> [[국민연금공단|국민연금]] · [[삼성그룹/경영승계 문제|삼성그룹]] · 승마협회 관련 || __[[문형표]]__ · [[홍완선]][br]__[[이재용]]__ · [[김재열]][br][[최지성]] · [[장충기]] · [[박상진(기업인)|박상진]] ||<#ddd>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의료 관련 논란|의료 논란]] || __[[김영재]]__ · [[김상만(의사)|김상만]] · [[주사 아줌마]][br] [[이선우(군인)|이선우]] · [[조여옥]] · [[신보라(군인)|신보라]] · [[이슬비(군인)|이슬비]][br][[이임순]] · [[서창석]] · [[박채윤]] ||
  • 임수정(탤런트) . . . . 2회 일치
         || 제23회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 신인배우상 ||
         || 제4회 부산영화평론가협회상 || 신인배우상 ||
  • 장발 (화가) . . . . 2회 일치
         장발은 [[일제 강점기]]에 친일단체로 분류되는 [[조선미술가협회]] 서양화부 평의원으로 활동한 적이 있었으며, 이 사실은 [[전남대학교]] 교수 이태호가 [[1992년]] 발표한〈[[1940년대]] 초반 친일 미술의 군국주의적 경향〉이라는 논문에서 알려졌다. 서울대 미대 교수인 [[김민수 (1961년)|김민수]]가 [[1996년]] 개교 50주년 기념 심포지움에서 발표한 〈서울대 미술대학 디자인 - 공예 50년사〉라는 논문의 각주에서 이 논문을 인용한 바 있다. [[2005년]] 서울대학교 교내 단체가 발표한 '서울대학교 출신 친일인물 1차 12인 명단'에 포함되어 있기도 하다.<ref>{{뉴스 인용|출판사=오마이뉴스|날짜=2005-04-07|확인날짜=2008-03-05|제목=서울대 일제청산위, 1차 친일인물 12명 발표|저자=조호진|url=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247516}}</ref> 그러나 다른 친일 화가들에 비하여, 장발이 적극적으로 일제를 미화하는 작품을 남겼거나 열성적으로 친일하였다는 증거는 없다.<ref>{{뉴스 인용| url =| 제목 = 서울대미대 장발 교수 흉상에 일장기 부착| 저자 = 서울대 인터넷신문 S&U| 날짜 = 2001년 3월 3일| 출판사 = 오마이뉴스}}</ref>
         * [[조선미술가협회]]
  • 장은숙 (가수) . . . . 2회 일치
         | 관련활동 = 산청군 홍보대사<br />한일문화교류대사<br />대한가수협회 상임이사
         * [[2015년]] [[대한가수협회]] 상임이사
  • 전덕기 . . . . 2회 일치
         '''전덕기'''(全德基, [[1875년]] ~ [[1914년]])는 대한제국시절 독립협회, 을사늑약 반대시위, 헤이그 밀사 파견, 신민회를 이끈 인물로 2014년 3월 '''3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되었다.
         [[한성부]] 출생이다. 상동감리교회의 전도사가 되었으며, [[독립협회]]의 서무부에 속하여 일하였다. [[이동녕]], 이승만, [[박용만 (1881년)|박용만]] 등과 함께 함께 독립을 위하여 투쟁하였다.
  • 전명운 . . . . 2회 일치
         이곳에서 [[안창호]] 등이 조직한 [[공립협회]] 회원으로 활동하던 중, [[1908년]] [[친일파]] [[미국인]]으로 [[대한제국]]의 외부 고문을 맡고 있던 [[더럼 스티븐스|더럼 화이트 스티븐스]]가 귀국하여 [[일본]]의 보호가 한국에게 유익하며 [[한국인]]들도 환영하고 있다는 망언을 늘어놓자, 이 사실에 매우 격분하였다. 스티븐스의 망언은 [[샌프란시스코]] 지역 언론에 보도되었고, 공립협회는 [[대동보국회]]와 공동으로 항의를 위한 4인 대표단을 구성했으나, 스티븐스는 대표들의 항의에도 극언을 계속하다가 구타를 당하는 사건이 있었다.
  • 정몽원 . . . . 2회 일치
         [[안양 한라]] 아이스하키단의 구단주와 [[대한아이스하키협회]]의 회장을 맡고 있다.
         |직책 = [[대한아이스하키협회]] 회장
  • 정형돈 . . . . 2회 일치
         | 농협 / 대한양돈협회
         | 농협 / 대한양돈협회
  • 조원진 . . . . 2회 일치
         초기 정치 경력은 잘 알려져 있지는 않은데, [[이인제]]가 이끌던 [[국민신당(대한민국)|국민신당]]에도 가담해서 대구 수성 갑 지구당위원장을 역임한 적도 있었지만, 1998년 7월 재보궐선거를 앞두고 국민신당을 탈당하고 북구 갑 지역에 무소속으로 출마하면서 처음 선거 경력을 시작했다. 이때는 4등으로 보기 좋게 낙선했고, 16대 총선에서도 다시 무소속으로 북구 갑에 출마했지만, 역시나 4등으로 낙선했다. 이때까지는 [[극우]] 성향은 아니었다. 그리고 중국에서 사업을 했는데, 이때 몽골까지 진출하고 (몽골 현지 법인의 대표 역임) 세계한인무역협회의 상임이사 겸 베이징회장을 지냈다.
         16대 총선에서 낙선한 후인 2001년엔 중국에서 무역 컨설팅 사업을 하기도 하였다. 이때 세계해외한인무역협회의 베이징 지회장을 역임하기도 하는 등, 사업 수완은 있는 인물로 사료된다. [[김우중]] 회장과의 인연이 있다. ~~그냥 사업이나 하지 왜 정치를 했을까~~
  • 천해성 . . . . 2회 일치
         2016년 7월 행시 후배인 김형석 차관이 부임하자 퇴임한 뒤 통일부 산하 공공기관인 [[남북교류협력지원협회]] 회장에 선임됐다.
         * 제5대 [[남북교류협력지원협회]] 회장
  • 청년 튀르크 당 . . . . 2회 일치
         한편, [[마케도니아]]에 주둔하던 제3군단 내의 살로니카 수비 군단 그룹(지금의 [[테살로니카]])의 청년 장교들은 1906년 [[비밀결사]]로서 오스만 제국 자유협회를 결성했다. 파리의 CUP조직과 오스만 제국 자유협회이 협력하였고, CUP는 제3군단의 지휘권을 얻게 되었다.
  • 최수범 . . . . 2회 일치
         [[2005년 3월]] 자신의 원래 이름이었던 최우범으로 개명하였다. 하지만 협회에 등록된 이름이 최수범으로 돼 있고, 이름을 변경한 후에도 협회 행정절차를 거쳐 프로게이머 등록 명을 최우범으로 바꾸지 않았기 때문에 활동명을 최수범으로 통일키로 하였다.
  • 최영미 (시인) . . . . 2회 일치
         구겐하임상(Guggenheim fellowship) 수상자인 시인 제임스 킴브렐(James Kimbrell)과 유정열이 공동 번역한 3인 시집 《현대한국의 세 시인:이상, 함동선, 최영미》(''Three Poets of Modern Korea: Yi Sang, Hahm Dong-seon and Choi Young-mi> (2002,Sarabande books'')는 2004년 미국번역문학가협회상(ALTA Awards:American Literary Translators Association)의 최종 후보로 지명되었다.
         최영미는 2011년 [[국회도서관]] 홍보 대사로 위촉되었고, 2012년부터 2013년까지 대한축구협회 축구사랑나눔재단 이사로 활동했다. 열렬한 축구팬인 그녀는 2006년 ''Die Tageszeitung''에서 발행한 독일월드컵 특집호 ''Taz journal Mai 2006''에 한국 축구에 대한 글을 기고했고, 2011년 축구 에세이 《공은 사람을 기다리지 않는다》를 출간했다.
  • 최재우 . . . . 2회 일치
         '''최재우'''(崔載遇<ref>{{웹 인용|url=http://docsplayer.org/20586236-2014%EC%86%8C%EC%B9%98%EB%8F%99%EA%B3%84%EC%98%AC%EB%A6%BC%ED%94%BD_%EA%B2%B0%EA%B3%BC%EB%B3%B4%EA%B3%A0%EC%84%9C-hwp.html|제목= 2014 소치 동계 올림픽 결과 보고서|출판사=[[대한체육회]]|확인날짜=2017-08-17}}</ref>, [[1994년]] [[2월 27일]] ~ )은 [[대한민국]]의 [[프리스타일 스키]] 선수로 주 종목은 모굴이다. 2009년부터 제명될 때 까지인 2018년까지 국가대표로 활동했으며 [[카자흐스탄]]에서 열린 [[2011년 동계 아시안 게임]]에서 모굴, 듀얼 모굴 모두 4위를 기록했으며, 2012 세계 주니어 선수권 대회에서 동메달을 획득하고 2013년 세계 선수권 대회에서 5위를 기록하였다. 이후 올림픽에 두 번 참가하였으며(2014, 2018), 2017년 아시안 게임에서는 은메달을 획득했다. 평창 올림픽 이후 대회 도중 음주 및 추행, 폭행을 저질러 [[대한스키협회]]에서 영구제명되었다.
         2018년 3월 12일 [[일본]] [[아키타현]] [[센보쿠시]]의 [[다자와호]]에서 열린 FIS 월드컵 참가 도중 동료 선수 [[김지헌 (스키 선수)|김지헌]]과 함께 음주를 하고 동료 여자 선수들에게 음주 강요를 하였고, 이 과정에서 추행 및 폭행을 한 것이 발각되어 [[대한스키협회]]로부터 영구제명 되었다.<ref>{{뉴스 인용 | 제목=모굴 스키 국가대표 최재우·김지헌, 동료 여선수들 성추행 ‘영구제명’ | url=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32&aid=0002857671 | 출판사=경향신문 | 저자=윤승민 | 쪽= | 날짜=12018-03-14 | 확인날짜=2018-09-17}}</ref>
  • 최재웅 (배우) . . . . 2회 일치
         * [[2009년]] 제29회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신인남우상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신인남우}}
  • 최태원 (야구인) . . . . 2회 일치
         우여곡절 끝에 [[쌍방울 레이더스]] 선수단은 해체 후 [[SK그룹]]에 인계되어 [[SK 와이번스]]라는 이름으로 새로 창단했고 [[인천광역시|인천]]으로 연고지를 옮겼다. [[2000년]] [[SK 와이번스]]의 초대 주장을 맡았다.<ref>[http://www.donga.com/fbin/output?n=200910160242 “반갑다 인천…이겨라 광주!”최태원 코치의 특별한 가을] - 동아일보</ref> 그러나 이미 30대 초반에 접어든 그는 빈볼의 후유증으로 인해 [[2001년]]에는 규정 타석을 채우지 못한 채 시즌을 마감했고, 프로야구판 [[노동조합]]이라고 할 수 있는 [[한국프로야구선수협회|선수협회]]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탓에 [[SK 와이번스|SK]] 프런트의 안 좋은 시선을 받았다.
  • 최홍만 . . . . 2회 일치
         하여간 씨름판에서는 올라갈 수 있는 곳까지 올라간 듯 했으나... 차츰 씨름판이 [[막장]]이 되자[* 최홍만의 K-1 진출, 씨름팀들의 잇단 해체 등으로 씨름판 자체가 존속 자체에 대해 위기가 팽배했고, 그 과정에서 씨름협회 내부에서 파벌 싸움이 일어나며 극한 막장 상태로 접어들게 됐다. 이 과정에서 혁신세력이었던 [[이만기]]가 연맹으로부터 [[영구제명]]을 당하기도 할 정도로 씨름판은 막장 그 자체였다.] 다른 업계로 전향을 심각하게 고민한 듯 하다. 때마침 [[K-1]]도 한국 시장 진출을 염두에 두고 있던 터라 고민않고 K-1으로 전향.
         최홍만이 K-1 진출을 선언하자 씨름연맹은 최홍만을 영구제명을 때림과 동시에 그간의 타이틀 획득 경력도 모두 [[삭제]]하는 극단의 조치를 취한다. [[이만기]] 건 때도 그랬지만, 결과적으로 한국의 수많은 [[만악의 근원|병신 협회]] 중 하나.
  • 최효진 (축구선수) . . . . 2회 일치
         [[2007년]] [[포항 스틸러스]]로 이적하여, [[K리그 2007|2007 K리그]] 우승과 [[FA컵 2007|2007 FA컵]] 준우승, [[FA컵 2008|2008 FA컵]] 우승에 큰 공헌을 하였다. 특히, 2008년 FA컵 우승 당시 대회 MVP를 받았고, [[K리그 베스트 11]]에 선정되었으며 [[대한축구협회]] 주관 최우수선수 부문을 수상, 2008년, 2009년 [[K리그]] 올스타에 선정되었다. 또한 [[AFC 챔피언스리그 2009|2009년 AFC 챔피언스리그]]에 전 경기 출장하며 팀의 우승에 공헌하였고, 특히 16강전 [[뉴캐슬 유나이티드 제츠 FC|뉴캐슬 제츠]]와의 경기에서는 공격형 미드필더로 나서 [[해트트릭]]을 기록하며 팀의 6-0 대승을 이끌기도 하였다.<ref>{{뉴스 인용|url=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44&oid=139&aid=0001950957 |제목=(ACL 리뷰) '최효진 해트트릭' 포항, 뉴캐슬 6-0대파하고 8강행 |날짜=2009-06-24 |출판사=스포탈코리아 }}</ref>
         * [http://www.kfa.or.kr/record/playeramatch.asp?Page=1&Query=Gender%3DM%26Name%3D%EC%B5%9C%ED%9A%A8%EC%A7%84 최효진 국가대표팀 기록 - 대한축구협회]
  • 추자현 . . . . 2회 일치
         * [[2006년]] 제7회 [[부산영화평론가협회상]] 여우조연상
         {{부산영화평론가협회상 여우조연}}
  • 한복 (1914년) . . . . 2회 일치
         광복 이후인 [[1946년]] [[서울특별시]]에서 변호사를 개업했으며 [[1962년]] [[증권거래소]] 자문위원, [[1964년]] [[대한법률구조공단]] 단장, [[1966년]] 대한엽도협회 회장, [[1973년]] [[국제라이온스협회]] 한국지부 회장 등을 역임했다.
  • 한비야 . . . . 2회 일치
         ** 한국도서관사서협회 추천도서
         ** 학교도서관사서협회 추천도서
  • 한용희 . . . . 2회 일치
         [[1931년]] [[서울특별시]] 출생으로 경찰 출신인 그는 [[1954년]] [[한국방송공사]]에 프로듀서로 입사했다. 동요 프로그램 '[[누가누가 잘하나]]'를 연출하는 등 동요 보급에 불씨를 지핀 장본인으로 평가 받는다. '한국동요 반세기' 등 동요사 저작도 펴냈다. 한국음악협회 이사, 한국동요음악협회 회장 등을 지냈다. 옥관문화훈장 등을 받았다.
  • Darkest Hour: A Hearts of Iron Game/연구진 . . . . 1회 일치
          * American Medical Assn(미국 의학 협회)
  • 강우영 . . . . 1회 일치
         제1회 고등고시 사법과에 합격한 1950년 부산지방검찰청 검사를 시작으로 대구지검, 서울지검 검사를 거쳐 1961년 법무부 검찰과 과장을 하다가 1961년 서울고검 검사, 1962년 부산지검 부장검사, 1966년 전주지검 차장검사 1968년 서울지검 부장검사 1970년 부산지검 차장검사를 하였으며 1971년에 서울지검 영등포지청장이 되었다. 지청장 임기를 마친 이듬해 서울고검 차장검사를 하다가 대검찰청 특별수사부 부장, 대검찰청 공안부장, 전주지검 검사장, 법무부 기획관리실장, 대구지검 검사장, 법무부 법무실장을 하는 등 박정희 정부에서 법무부와 검찰 주요 요직을 거쳤다. [[전두환]] 등 신군부 집단에 의해 권력이 장악된 1980년 7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 22대 서울지검장을 하고 1981년에 중앙선거관리위원으로 재직중인 1981년 4월 전두환 대통령에 의해 임기 5년의 대법원 판사에 임명되었다. 대법관에 재직중이던 1984년 7월 제6대 중앙선거관리위원장을 겸직하였으며 대법관 퇴임이후인 1987년에는 대한공증협회 부회장에 선출되었다.
  • 고아성 . . . . 1회 일치
         | 제33회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 고인범 . . . . 1회 일치
         || '''경력''' ||<(> 충주배우협의회 회장, 부산연극협회 부회장 ||
  • 고현정(미스코리아) . . . . 1회 일치
         || 2006년 || 부산영화평론가협회상 || 신인여우상 || [[해변의 여인(영화)|해변의 여인]] ||
  • 권은희 (1959년) . . . . 1회 일치
         * 2013년: 한국여성과학기술단체총연협회 공로패
  • 금조(나인뮤지스) . . . . 1회 일치
         통상적으로 [[코러스]]라고 불리는 작업에 참여한 경력이 있다.[* 실제 앨범에는 "백그라운드 보컬"이라고 표기된다.] 실제로 [[http://www.fkmp.kr/|한국실연자협회]]에 금조가 참여한 곡을 검색하면 실연정보에 '''<부실연 : 금조 [BACKGROUND VOCAL]>''' 이라고 나오는걸 볼 수 있다. 데뷔 전부터 참여해온 활동인데 데뷔한 이후에도 여전히 진행중. --참여한 곡들만 모아도 이미 정규앨범 수준을 훌쩍 뛰어넘는다--
  • 김국진(MC) . . . . 1회 일치
         [[1993년]] [[2월]] 감자골은 당시 최고의 예능 프로그램이였던 [[일요일 일요일 밤에]]에서 고별인사를 하고 [[미국]]행을 하기로 했는데, 녹화가 시작되기 직전 "[[내가 무릎을 꿇었던 건 추진력을 얻기 위함이었다|프로그램을 열 개씩 하던 감자골이 갑자기 그만 둔 것은 MBC로 이적하기 위함이였다!]]" 라면서 임하룡을 제외한 '''방송 3사 코미디언들 모두'''가 MBC로 쳐들어와서 녹화를 방해하기에 이르렀다. 이들이 난동을 피우는 통에 김국진은 스태프들을 따라서 개구멍으로 피신을 갔다고 한다(…). 참고로 이때 김국진을 숨겨준 사람이 [[최진실]]의 동생 최진영이라고 라디오스타에서 밝혔다. 1980년대 말 ~ 90년대 초에 활발하게 활동했던 코미디언들을 하나하나 떠올려보면 씁쓸해지는 대목. 감자골은 ~~[[이경규]]가 선처를 호소해서 선배들에게 줄빳다만 맞고~~ 자신들이 다른 곳으로 이적하는 것이 아니라 코미디언으로서 은퇴하고 이민가는 것이다. ~~니들 밥줄 끊을 염려 없으니 놔줘라~~ 라고 설득해서 겨우 시청자들에게 고별 방송을 할 수 있었다. 그렇게 감자골은 '''방송 3사 코미디언 협회에서 제명당한다.''' 이들의 KBS 선배 개그맨 [[이봉원]]은 후일 방송에서 감자골 사태에 대한 질문을 받자, '당시 나는 SBS로 이적한 상태라 아무 관련이 없다'는 파렴치한 변명을 했다. 피해자는 있는데, 가해자는 없는 이상한 사건.
  • 김남조 . . . . 1회 일치
         * 자유문인협회상(1958년)
  • 김문순 (언론인) . . . . 1회 일치
         * 2007년 한국신문협회 부회장 수상
  • 김문집 . . . . 1회 일치
         중학교 때부터 일본에서 수학한 김문집은 일본 문학이론을 수입해 와 한국문학의 전통을 부정하는 친일적인 성향을 초기부터 보였다. [[중일 전쟁]] 발발 후에는 [[조선문인협회]] 발기인과 간사,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의 촉탁을 맡는 등 친일 단체에도 가담했다.
  • 김선길(국회의원) . . . . 1회 일치
         이후 [[웨슬리안 대학교]], [[켄터키 대학교]]에서 정치학과 [[교수]]를 역임하다가 1969년 귀국하여 과학기술처(현 [[미래창조과학부]]) 연구조정관으로 임명되어 공무원 경력을 시작하였다. 과학기술처, 상공부(현 [[산업통상자원부]]) 등에서 근무하면서 상공부 [[차관]], 중소[[기업은행]]장, 대한증권협회 [[회장]] 등을 역임하였다.
  • 김성곤 (1913년) . . . . 1회 일치
         [[분류:1913년 태어남]][[분류:1975년 죽음]][[분류:김해 김씨]][[분류:대한민국의 기업인]][[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분류:대구달성초등학교 동문]][[분류:휘문고등학교 동문]][[분류:대한축구협회 회장]][[분류:대한민국의 제6대 국회의원]][[분류:대한민국의 제7대 국회의원]][[분류:대한민국의 제8대 국회의원]]
  • 김세윤 (1999년) . . . . 1회 일치
         * [http://www.kfa.or.kr/record/playeramatch.asp?Page=1&Query=Gender%3DM%26Name%3D%EA%B9%80%EC%84%B8%EC%9C%A4 김세윤 국가대표팀 기록 - 대한축구협회]
  • 김승대 . . . . 1회 일치
         상위 스플릿 시작과 동시에 황진성의 이탈로 포항팬들은 "우리 리그 망함"하고 좌절했지만, 황진성의 공백을 완벽하게 매꾸면서 [[대한축구협회 FA컵]] 2013 결승에선 전북을 상대로 선취골을 넣고 팀을 대회 우승으로 이끄는 맹활약을 펼쳤다. 그리고 남은 리그 경기에서도 맹활약하며 2013 K리그 클래식 우승에도 크게 일조했다.
  • 김시진 . . . . 1회 일치
         1980년대 [[한국프로야구선수협회|선수협]] 사건으로 인해 [[1988년 한국 프로 야구|1988년]] [[11월 23일]] [[전용권]], [[오대석]], [[허규옥]]과 함께 [[최동원]], [[김성현 (1963년)|김성현]], [[오명록]]을 상대로 [[롯데 자이언츠]]에 트레이드되었다. 그리고 한 달 뒤 두 팀은 [[장효조]]와 [[김용철 (야구인)|김용철]] 등의 트레이드를 성사했다. 이후 4년 간 [[롯데 자이언츠]]에서 13승 24패를 추가하는 데 그쳤고, [[1992년]]에 현역에서 은퇴하였다. 정규 리그 통산 124승을 올렸지만, [[한국시리즈]]에서는 승리없이 7패로 좋은 기록을 내지 못했다.
  • 김영철(배우) . . . . 1회 일치
         [[2013년]]부터 [[2016년]]까지 탤런트 [[이효정(남배우)|이효정]]에 이어 한국방송연기자[[협회]] '''[[이사장]]'''을 역임한 바 있다. 후임은 [[유동근]]. [* 참고로 [[이효정(남배우)|이효정]]은 [[야인시대]]에서 [[김두한]]의 정치적 후견인 같은 [[유진산]] 前 국회의원으로 나왔다. [[공주의 남자]]에서도 세조의 심복인 신숙주로 나온다. 세조도 김영철이 떠안은 배역이다.]
  • 김정호 (1949년) . . . . 1회 일치
         * 2005년 : 한국사료협회 회장
  • 김지수(배우) . . . . 1회 일치
         || 제6회 부산영화평론가협회상 || 신인여우상 ||
  • 남일해 . . . . 1회 일치
         | - ||연예인협회 가수분과위원회 위원장
  • 담철곤 . . . . 1회 일치
         * [[한국광고주협회]] 이사
  • 랄프 알거 배그놀드 . . . . 1회 일치
         [[https://www.egu.eu/awards-medals/portrait-ralph-alger-bagnold/|(영문)유럽 지구과학 협회의 랄프 배그놀드 설명]]
  • 마츠자카소 . . . . 1회 일치
         본래 [[에도 시대]]까지 일본에서 소는 [[농업]]용으로만 길러졌으나, [[메이지 유신]] 이후 서양 문명을 받아들이면서 소고기를 먹게 되었고, 이때부터 마츠자카 지방은 육우의 산지로 유명해졌다. 1958년에 마츠자카 육우협회가 창설되었으며, 1974년 부터 소 한마리를 개체 단위로 관리하기 시작했다.
  • 무라하치부 . . . . 1회 일치
          * 신동진 한국 아나운서 협회장이 [[팔푼이]]라는 말이 무라하치부가 어원이 된게 아닌가 추측하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http://www.announcer.or.kr/?p=8870&ckattempt=1 (참조)]]
  • 문연주 . . . . 1회 일치
         * [[2014년]] 한국대중가요발전협회 인기가수상 수상
  • 민효린 . . . . 1회 일치
         * 2007년 한국애견협회 애견 홍보대사
  • 박녹주 . . . . 1회 일치
         [[1960년대]]부터는 본인이 보유하고 있었던 바탕소리 녹음을 많이 남겼다. [[1963년]] 기독교방송에서 춘향가를 녹음하고, [[1972년]] 자택에서 기록보존용으로 심청가를 녹음하였다 흥보가는 총 4차례나 전판을 녹음하였는데 이 가운데 [[1967년]] 녹음(고수 : 정권진)과 [[1973년]] 녹음(고수 : 김동준)은 음반화 되었다. 전자는 [[지구레코드]]에서 출반되었으며, 이후 CD로도 복각되었고, 후자의 경우에는 문화재보호협회 소장 녹음으로 여러차례 음반으로 제작되었으나 CD로는 제작되지 않아 지금은 듣기 어렵다. 그 외에 출반되지 않은 녹음으로는 [[1976년]] 문예진흥원 판소리 조사 사업당시에 녹음한 것(고수 미상)과 녹음시기 미상의 기독교 방송 소장의 녹음(고수 : 정철호)이 있다.
  • 박동진 (1922년) . . . . 1회 일치
         <ref>{{뉴스 인용 |url = http://dna.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8051100329202010&editNo=3&printCount=1&publishDate=1988-05-11&officeId=00032&pageNo=2&printNo=13112&publishType=00020| 제목 = 金鍾烈씨 議員職승계 朴東鎭 駐美대사 사퇴 | 날짜 = 1988-05-11| 출판사 = 경향신문 }}</ref> 1988년부터 1991년까지 주 미국 대사, 한국전력공사 이사장, 1996년부터 한국외교협회 회장을 역임하였다.
  • 박세웅(1996) . . . . 1회 일치
         한 해 선배인 [[황영국]]과 동기인 [[주권(야구선수)|주권]]과 함께 2013년 [[청주고등학교 야구부|청주고]]의 돌풍을 주도하면서 맹활약했다. 비록 창단 40년만에 처음으로 전국 대회 결승에 오른 청주고의 돌풍은 협회장기와 전국체전 준우승으로 끝나며 아쉽게 우승과 인연을 맺지 못했지만, 당시 2학년이던 주권과 박세웅이 원투펀치를 이룰 청주고는 2014년 강력한 고교야구의 패권자로 꼽혔다. 그런데 주권은 기대대로 잘 했지만, 정작 박세웅이 썩 빼어낸 모습을 보이지는 못하면서 청주고의 돌풍은 아쉽게 2013년 한 해의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 박수영(연극배우) . . . . 1회 일치
         * [[2006년]] 연극협회 2006남자연기상
  • 배영수 . . . . 1회 일치
         ||||||||||||<:> '''2004년 [[한국프로야구선수협회]] 올해의 선수''' ||
  • 배영호 . . . . 1회 일치
         * 대한변호사협회 회장
  • 서강준 . . . . 1회 일치
         | 제37회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 서상돈 . . . . 1회 일치
         1898년 서상돈은 [[독립협회]]의 [[만민공동회]]의 재무 부장으로 활동하며 [[러시아]]의 내정 간섭을 규탄하였다.
  • 손정혜 . . . . 1회 일치
         [[1982년]], [[충청북도]] [[충주시]] 출생. 30대의 젊은 여성 변호사로 현재 [[이혼]], [[가정]][[법률]]전문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다. 소속은 비엔아이 법률사무소.[* 임방글, 백성문 변호사도 이 소속이다.] [[경희대학교]]를 졸업해 47회 사법고시를 1차와 2차를 한꺼번에 합격할 정도로 수재이다.(2차는 재수를 했다는 얘기가 있다. [* http://yurajun.tistory.com/3740 ] 근거 링크 혹은 확인 요망). 37회 사법연수원 출신이며, <청년변호사협회>부회장을 맡기도 했다.
  • 송병구 . . . . 1회 일치
         === 협회 수상 ===
  • 송재호(배우) . . . . 1회 일치
         현재 야생생물관리협회 회장을 맡고있다.
  • 송종익 . . . . 1회 일치
         [[1905년]] 일본으로 유학을 갔으며 [[1906년]] 4월 [[미국]]으로 건너가 [[재미 한국인]]의 애국 계몽 운동 단체인 [[공립협회]]에 가입했다. [[1908년]] [[전명운]]과 [[장인환]]이 미국 외교관 [[더럼 스티븐스|D. W. 스티븐스]]를 암살한 사건이 일어난 이후부터 재판후원회 재무로 활동하였다. [[1913년]] [[흥사단]] 창단 때 경상도 대표를 지냈으며 [[1919년]]에는 흥사단 이사장과 [[대한인국민회]] 재무를 지냈다.
  • 송호창 (1967년) . . . . 1회 일치
         * 대한 변호사협회 인권위원
  • 스카이 김 . . . . 1회 일치
         [[대구광역시|대구]]에서 태어남. 2004년까지 대구중구청 양궁팀에서 활약. 2년여에 걸친 호주양궁협회의 설득 끝에 2005년 1월 호주로 건너갔고, 2006년 6월 호주 국적을 취득함. 그는 국적을 바꾼 이유에 대해 "올림픽 출전이 소원이지만 국내에선 전망이 없었다"고 설명함.<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7&oid=001&aid=0002220964 연합뉴스, <올림픽> 호주양궁 김하늘, "2012년엔 내가 금메달"]</ref> 2007년 8월 프레올림픽에서 양궁 개인전 금메달.
  • 실업팀 . . . . 1회 일치
         실업팀의 운영 실태는 모 회사나 운영단체의 성향에 따라서 다양하게 변화할 수 있다. 일반 종업원과 똑같이 업무를 하고, 잔업 시간이나 여가 시간에만 연습과 시합을 하며 어디까지나 부가 활동으로서 하는 경우도 있으나, 사실상 실업팀 활동이 주가 되며 활동이 거의 프로 스포츠 [[클럽팀]]과 같은 수준으로, 형식만 실업팀일 뿐이지 종업원으로서의 활동은 거의 하지 않고 스포츠 활동에만 노력하는 경우도 있다. 이 경우에는 해당 종목을 관할하는 협회의 기준에 따라 준프로 내지는 세미프로로 규정되기도 하며, 그에 걸맞는 대우를 받는다.[* 축구의 경우, KFA에서는 세미프로로 규정된 실업팀들은 대학팀 같은 완전한 아마추어 팀들보다 더 높은 수준의 팀으로 규정된다. 이에 따라 [[대한민국 FA컵]]에서 1라운드 예선을 면제받고 2라운드부터 참가할 수 있는 등의 혜택을 받는다.]
  • 안영준 . . . . 1회 일치
         드래프티 동기인 허훈과 양홍석도 소속팀 kt에서 활약 중이고 안영준은 팀 성적에서, 허훈은 개인 성적에서 상대방보다 앞서 있었기에 신인왕에 어느 선수가 적합한지 여러 의견이 오가는 중 뜬금없이 3월 9일 [[유재학]] 감독이 기자들의 신인왕 관련 질문에“자질만 놓고 보면 양홍석이 안영준보다 훨씬 낫다”, “양홍석은 국가대표가 될 수 있지만, 안영준은 지금처럼 하면 국가대표에 뽑히기 힘들다. 가지고 있는 기본 자질이 다르다”라고 평가한 보도가 나왔다. [[http://www.basketkorea.com/news/articleView.html?idxno=178063|기사]] 유재학 감독이 국가대표 선발 주무 부처라고 할 수 있는 농구협회 경기력향상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기 때문에 선수에 대한 평가를 내릴 순 있겠지만 동시에 4강 플레이오프 직행을 두고 경쟁하던 팀의 감독이니만큼 언론에 대고 한 본 발언이 적절한지에 대해선 설왕설래가 있었다.
  • 야설록 . . . . 1회 일치
         * 한국 만화 스토리 작가 협회 회장
  • 어쌔신 크리드 III/부가요소 . . . . 1회 일치
         === 사냥 협회 ===
  • 오국영 . . . . 1회 일치
         [[태평양 전쟁]] 종전 후에도 경상북도자동차협회 이사를 지내고 [[남선전기주식회사]] 감사역으로 재직했다. [[1954년]]까지 남선전기 감사로 현직에 있었다.
  • 오석락 . . . . 1회 일치
         [[서울고등법원]] 판사, 서울민사지방법원 부장판사, 서울민사지방법원 수석부장판사, [[청주지방법원|청주지방법원장]] 등을 지내다가 대학교로 가지 않고 동서인 [[김기홍 (법조인)|김기홍]]의 권유로 변호사를 개업해 문인구 변호사가 회장으로 있던 1987년 [[대한변호사협회]]에서 1987년) 공보이사와 총무이사 겸 사무총장을 하다가 김선 변호사가 회장으로 재임하던 1995년에 부회장을 하였으며 [[대한법률구조공단]] 이사, 중앙환경분쟁조정위원 등을 역임했다.
  • 오지철 . . . . 1회 일치
         * 2006.03 ~ 2007.11 : 한국케이블TV방송협회
  • 오태영 (1948년) . . . . 1회 일치
         [[1974년]] [[서울예술대학]] 연극과를 졸업하고, 같은 해 《보행연습》이라는 작품이 중앙일보 문예희곡부문에 당선된다. [[1979년]] 한국 희곡 작가 협회상을 수상하고, [[1980년대]]는 극단 76에서 활동하였다. 1987년 희곡집 《바람앞에 등을 들고》, 《전쟁》을 출판하였다. 《전쟁》은 제 32회 현대 문학 희곡 부문상을 받았다.
  • 원빈(배우) . . . . 1회 일치
          * 2011년 제2회 한국영화기자협회 올해의 영화상 남우주연상 《아저씨》
  • 유열 (가수) . . . . 1회 일치
         [[대한가수협회]] 부회장 /
  • 의성군 . . . . 1회 일치
         컬링 이전에는 [[씨름]] 스타의 산실 역할을 한 곳이 의성이다. 의성초등학교-의성중학교-의성고등학교로 이어지는 지역 씨름의 계보가 탄탄하며 의성군청에서도 씨름단을 운영하고 있다. 의성에 연고가 있는 유명 씨름인으로는 5대, 8대, 13대 [[씨름/체급|천하장사]]를 거머쥐었던 1980년대 씨름스타 [[이준희]] 대한씨름협회 경기위원장과 32대, 38대, 40대 [[씨름/체급|천하장사]] 출신이자 1990년대 씨름스타 [[이태현]] 용인대 교수 등이 있다. 이들의 출생지는 모두 의성이 아니지만 의성에서 학창시절을 보내면서 씨름을 배웠다.
  • 이강철 (1947년) . . . . 1회 일치
         * 한-[[동티모르]] 우호협회 회장
  • 이관섭 (1961년) . . . . 1회 일치
         * 2017년 1월 ~ : 세계원자력발전사업자협회 회장
  • 이명주 (축구선수) . . . . 1회 일치
         * [http://www.kfa.or.kr/record/playeramatch.asp?Page=1&Query=Gender%3DM%26Name%3D%EC%9D%B4%EB%AA%85%EC%A3%BC 이명주 국가대표팀 기록 - 대한축구협회]
  • 이민아 (축구선수) . . . . 1회 일치
         {{대한축구협회 올해의 여자 선수상}}
  • 이병석(정치인) . . . . 1회 일치
         ||<-5><:> '''[[대한야구협회]] 역대 총재''' ||
  • 이선미 (소설가) . . . . 1회 일치
         경성스캔들의 원작소설 경성애사가 [[조정래]]의 소설 [[태백산맥]]을 표절한 것으로 밝혀졌다. 경성애사의 이선미는 한국 로맨스 소설 작가협회 사이트 게시판에서 사과글을 게재하였다.<ref>[http://news.heraldcorp.com/view.php?ud=200712270005&md=20100404183309_AN ‘경성스캔들’ 원작자의 표절, 인터넷 퍼오기 문화의 폐해] 헤럴드경제 10-04-04</ref>
  • 이설주 . . . . 1회 일치
         광복 이후인 [[1947년]]부터 [[1951년]]까지 대구여자상업학교(현재의 [[대구제일중학교]]), [[경북여자고등학교]]에서 국어 교사로 근무했으며 문고판형 전집 《설주문학(雪舟文學)》을 비롯한 여러 시집을 출간했다. [[2011년]] [[3월 24일]] [[한국문인협회]]는 그의 문학 정신을 기리고 한국 현대 시문학과 시조문학의 발전을 도모하기 위한 차원에서 이설주문학상을 제정했다.
  • 이승엽 . . . . 1회 일치
         * 한국프로야구 은퇴선수협회 2017 최고의 레전드 특별상 (2017년)
  • 이승현(농구선수) . . . . 1회 일치
         자신이 소속했던 초(대구 칠곡초), 중(서울 용산중), 고(서울 용산고), 대(고려대), 프로(고양 오리온)팀 모두를 우승시켰다. 초등학교 6학년 당시 KBL총재배 초등부 농구대잔치 우승을 시작으로 중학교에선 춘계연맹전, 협회장기, 전국체전에서 모두 우승하는 기염을 토했고, 고등학교 시절엔 오랜시간 무관에 그치던 용산고를 우승시켰다.[* 이승현은 꽤 어린 나이부터 용산고 OB모임에 참여할 수 있었는데, 용산고 출신인 양동근이 "넌 여기 와도 돼. 우승시켰으니까" 라고 이승현에게 이야기 해줬다고 한다.] 대학에서는 연세대와의 정기전에서 재학 중 단 한번도 지지않았으며, 김종규/두경민/김민구가 버티던 경희대를 꺾고 MBC배와 대학농구리그를 모두 제패해버렸다. 특히 4학년에 재학중이던 2014년 가을 MBC배 대학농구 결승전에선 종료 1분도 남기지 않은 상황에서 동점 3점슛을 작렬시키고, 종료 1초를 남기고 역전 2점슛을 성공시키는 원맨쇼까지 보여줬다.
  • 이시영(배우) . . . . 1회 일치
         2010년 11월 28일 2010 KBI(한국권투인협회) 전국생활체육복싱대회 '여자부 -50kg급'에서 '''우승'''을 차지했다는 기사가 났다. 예선전에서는 KO승, 결승에서는 판정승을 거뒀다는 듯.
  • 이시종 . . . . 1회 일치
         * 한국상하수도협회 수질관리과장(선출직)
  • 이영세 (1947년) . . . . 1회 일치
         * 2010.04~ 한국무역협회 정보화추진위원회 위원장
  • 이자연(가수) . . . . 1회 일치
         한국가수협회 부회장을 지냈다
  • 이카르부스 . . . . 1회 일치
         이후 유고슬라비아 공군에 의해 군용기를 만들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인정되어 [[제문]]에 군용기 공장을 세우고 본사도 거기로 옮긴다던가, 군대와의 계약으로 항공기 엔진을 세운다던가 하며 성장한다. 이 와중에 스포츠 협회를 만들고 유고슬라비아 최초의 보트 제조 회사도 되어보기도 했다.
  • 이현우 (가수) . . . . 1회 일치
         *[[한국인삼협회]] ([[2018년]])
  • 이효정(남배우) . . . . 1회 일치
         2006년부터는 연기 외에도 드라마 제작 사업에도 뛰어들며 SBS 드라마 내겐 너무 완벽한 그녀, [[식객(드라마)|식객]] 등의 작품들을 기획하였으며, 2010년에는 한국방송연기자협회 이사장을 역임한 바 있고, 2011년부터는 대전문화산업진흥원장을 역임 중이지만, 본업인 연기자로서도 각종 드라마에 출연하며 왕성하게 활동한다.
  • 이휘향 . . . . 1회 일치
         * 1988년 대한방직협회 코튼마크
  • 장강명 . . . . 1회 일치
         * 제158회 이달의 기자상<ref>2003.12/한국기자협회</ref>
  • 장도 (1876년) . . . . 1회 일치
         1908년 문관전고소(文官銓考所) 위원<ref> {{웹 인용 |url= http://db.history.go.kr/url.jsp?ID=jw_1908 |제목= 대한제국 직원록 1908년 (02. 내각 > 문관전고소) |확인날짜=2008-11-18 |형식= |웹사이트=한국사데이터베이스 }} </ref>을 역임하였고, 같은 해 [[변호사]]로 등록했다. 이미 이전부터 한국인과 일본인 사이의 분쟁에서 소송을 대리한 일이 있어, 실질적인 의미에서 한국 최초의 변호사로 볼 수 있다. [[조선변호사협회]] 호장을 지냈다.
  • 장선이 . . . . 1회 일치
         * [[코리아타임스]] 주니어기자협회 사건기자
  • 장태영(야구선수) . . . . 1회 일치
         1960년 소령으로 예편해 군복을 벗은 그는 [[김성근]]과 함께 교통부 창단 멤버로 활약하기도 했으며 1964년 상업은행 야구단이 창단되자 초대 감독으로 부임 했고 이후 [[대한야구협회]] 이사직을 맡는등 야구계에 몸을 담다가 1998년 자서전을 퍼낸후 이듬해인 1999년 8월, 파란만장한 인생을 뒤로하고 세상을 떠났다.
  • 전정희 (배우) . . . . 1회 일치
         *2009~ 한국 방송 실연자협회 자문위원
  • 정무식(정치인) . . . . 1회 일치
         1978년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공화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친여 무소속 권오태 후보와 [[신민당(1967년)|신민당]] 조규창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79년 6월 권오태가 민주공화당에 입당하자 해당 지구당위원장직에서 사임하였다. 그리고 원양어업협회 [[회장]]이 되었다.
  • 정병오 . . . . 1회 일치
         '''정병오'''(鄭炳五, [[1950년]] ~ )은 [[대한민국]]의 시인이다. [[서울]]에서 태어나 한국방송통신대학 경제학과 졸업, 한국순수문학인협회 부회장을 역임하고 있다.
  • 정복수 . . . . 1회 일치
         보인상업전수학교에 재학 중 권투를 시작하여 [[1937년]] 전조선종합경기대회에서 밴텀급 우승을 하였다. [[1939년]] 9월 전국아마추어권투선수권대회에서 라이트급 우승을 한 데 이어 10월 조선체육협회 주최 제15회 조선신궁경기대회에서 페더급 우승을 하였고, 11월 제6회 전조선권투선수권대회에서 페더급 우승하였다.
  • 정상희(정치인) . . . . 1회 일치
         [[일제강점기]] 말기인 1939년부터 협신산업상사 대표이사, 삼호방직 부사장, 대한방직협회 이사, 삼호무역 부사장, 동화통신사 부사장, 제일화재해상보험주식회사 사장, 삼호방직무역주식회사 회장, [[삼성그룹]]에서 [[삼성전자]] 사장, [[삼성물산]] 사장, [[삼성생명|동방생명보험]] 대표이사 등을 지냈다.
  • 정용화 . . . . 1회 일치
         * 오리콘 싱글 위클리 차트에 일주일 만에 7만 1200장을 팔아 치우고 일본 메이저 데뷔를 했다.<ref>{{뉴스 인용|제목= 씨엔블루, 日 데뷔싱글 일주일 만에 7만장 판매|url=http://sports.chosun.com/news/utype.htm?id=201110270100197960017298&ServiceDate=20111026|출판사 = 스포츠조선|날짜 = [[2011년]] [[10월 26일]]}}</ref><ref>{{뉴스 인용 |제목= 씨엔블루 '인 마이 헤드', 日 오리콘 주간 차트 4위 랭크 |url= http://tvdaily.mk.co.kr/read.php3?aid=1319589921221164011 |출판사= 티브이데일리 |날짜= [[2011년]] [[10월 26일]] |확인날짜= 2012년 8월 19일 |보존url= https://archive.today/20120715225340/http://tvdaily.mk.co.kr/read.php3?aid=1319589921221164011 |보존날짜= 2012년 7월 15일 |깨진링크= 예 }}</ref> 《[[In My Head]]》는 [[2011년]][[11월 10일]]에 일본 레코드 협회에서 선정하는 골드 레코드가 되었다.<ref>{{뉴스 인용|제목= 씨엔블루 일본 데뷔싱글 10만장 넘겨, 日 '골드 레코드' 선정|url= http://tvdaily.mk.co.kr/read.php3?aid=1321064770229443011|출판사= 티브이데일리|날짜= [[2011년]] [[11월 12일]]|확인날짜= 2012년 8월 19일|보존url= https://archive.today/20130112003527/http://tvdaily.mk.co.kr/read.php3?aid=1321064770229443011|보존날짜= 2013년 1월 12일|깨진링크= 예}}</ref>
  • 정주관백 . . . . 1회 일치
         전국정주관백협회(全国亭主関白協会)라는 단체가 있다. 남편이 폭군이 되야 한다고 주장하는 단체는 아니며, 정주관백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하자는 단체이다.(http://www.zenteikyou.com/zwhat.html)
  • 조성모(가수) . . . . 1회 일치
          * 한국 음반 산업 협회 공식 누적 앨범 판매량 역대 1위 가수 (1600만장)
  • 조청희 . . . . 1회 일치
         *2011.6 ~ 2011.8 :몽골야구협회 유소년 야구팀 수석 코치 / [[한화 이글스]] 트레이닝 코치
  • 진격의 거인/88화 . . . . 1회 일치
          기억 속의 크루거는 모든 거인과 유미르의 백성이 그 좌표로 이어져 있다고 설명한다. 이것은 마레 당국의 "거인화학 연구협회"의 최신 연구결과다. 마레는 이미 상당한 수준의 연구를 쌓아놓고 엘디아인 이상으로 거인의 힘을 잘 알고 있다.
  • 최란(배우) . . . . 1회 일치
         ||<#878787> '''{{{#EEE156 소속}}}''' ||<(> 대한민국 서울문화예술협회 이사장 ||
  • 최성원(가수) . . . . 1회 일치
         || '''가족''' || 아버지 최영섭[* [[그리운 금강산]]을 작곡한 작곡가 겸 지휘자, 한국가곡작곡가협회 부회장 겸 Seoul Green Orchestra 상임지휘자.], 아들 최지훈[* 싱어송라이터 겸 기타리스트.], 딸 최선영[* 스케이팅 코치, 전 스케이트선수.] ||
  • 최세창 . . . . 1회 일치
         |기타 이력 = [[대한태권도협회]] 회장 <br/> [[신민주공화당]] 국방안보특임행정위원(1990년)
  • 최우석 (화가) . . . . 1회 일치
         1915년 [[조선서화미술회]] 강습소에 입학하면서 [[안중식]]과 [[조석진]]의 문하생이 되었고 1921년부터 1926년까지 [[서화협회]] 전람회 정회원을 역임했다. 1925년부터 1934년까지 [[조선미술전람회]]에서 근대적인 채색화 수법을 응용한 풍경화와 한국의 역사 인물을 주제로 한 초상화 연작을 출품하여 입선과 특선을 연달아 수상했지만 그가 작품 활동 초기에 그린 풍경화와 인물화는 일본 화풍의 채색화라는 비판을 받게 되었고 점차 한국의 전통적인 수묵 담채화의 관념적 작품으로 회귀하게 된다. 주로 산수화와 신선도 등을 그렸다고 전해진다.
  • 최정호 (성우) . . . . 1회 일치
         {{한국성우협회}}
  • 최지우(영화배우) . . . . 1회 일치
         ||<|3> 2009년 || 한국연예제작자협회 || 국제문화 산업교류 재단상 || ||
  • 최호중 . . . . 1회 일치
         [[서울대학교]]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고등고시 행정과에 합격한 뒤 [[1956년]] 외무부에 들어갔다. 국제경제국장, 통상국장, 주유엔 유럽사무소 및 [[주제네바 대한민국 대표부|제네바대표부]] 공사, 말레이시아·[[주 벨기에 대한민국 대사관|벨기에 대사]] 등을 역임했다. [[1984년]] 상공부 차관을 지낸 뒤 [[주사우디아라비아 대한민국 대사관|사우디아라비아 대사]] 등을 거쳐 [[1988년]] 12월부터 [[1990년]] 12월까지 외무부 장관으로 재직했다. [[1989년]] 2월 [[헝가리]]와의 수교 합의 의정서에 서명, 북방외교의 첫 성과를 대외에 알렸다. [[1990년]] 9월 30일 유엔에서 [[에두아르트 셰바르드나제]] 당시 소련 외무부 장관과 '한·소 수교 공동성명서'에 서명했다. 재임 중 동구권 국가를 비롯해 18개국과 수교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hm&sid1=102&oid=469&aid=0000048101], [[한국일보]] 2015년 2월 20일, [부고]‘북방 장관’ 최호중 전 부총리 별세</ref> 1990년 12월부터 1992년 6월까지 부총리 겸 통일원 장관을 지냈다. 당시 남북은 1991년 9월에 유엔에 동시 가입했고, 잇단 고위급 회담을 통해 ‘남북 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남북기본합의서)’에 합의했다. 이후 통일원 통일고문, 한국자유총연맹 총재, 한국외교협회 회장 등을 지냈다.
  • 최휘영 . . . . 1회 일치
         *[[2008년]] 전국재해구호협회 이사
  • 추미애 . . . . 1회 일치
          * [[현재]] 국회 의원외교협의회 부회장(미국), 의원외교친선협회 회장(체코), 부회장(터키)
  • 탈북자 망명정부 . . . . 1회 일치
         한명섭 대한변호사협회 통일문제연구위원회 부위원장은 "북한이 유엔에 가입돼 있는 이상, 미국 등 다른 국가들도 망명정부의 법적 지위를 인정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그 대신 망명정부활동을 묵인할 수 있다는 가능성은 제기했다.[[http://news.donga.com/MainTop/3/all/20161006/80664378/1#csidx6390859011994e7a8d6c822b9a35888 (참조)]]
  • 트로피코 4/건물 . . . . 1회 일치
          * 보석 협회 - $5,000. 노동자의 기술 숙련도가 50% 만큼 빨라집니다.
  • 하리수 . . . . 1회 일치
         * [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113022 ‘하리수’가 축구선수 하겠다면 협회는 어떻게 할 건가] 미디어오늘 2013.11.11
  • 한국영 . . . . 1회 일치
         * [http://www.kfa.or.kr/record/playeramatch.asp?Page=1&Query=Gender%3DM%26Name%3D%ED%95%9C%EA%B5%AD%EC%98%81 한국영 국가대표팀 기록 - 대한축구협회]
  • 한말숙 . . . . 1회 일치
         |소속 = 前 [[한국여성문학인협회]] 회장
  • 한상권 (방송인) . . . . 1회 일치
         * 2011년 1월 ~ 2012년 12월 제 16대 KBS 아나운서협회 회장
  • 한석명 . . . . 1회 일치
         [[한성부]] 출신이다. [[관립한성법어학교]]와 독일협회중학교를 졸업하여 신학문을 익힌 뒤 [[대한제국]] 말기에 내부 소속 통역관으로 임용되었다.
  • 한성호 . . . . 1회 일치
         * [[2011년]] [[한국연예제작자협회]](KEPA) [[한국콘텐츠진흥원]]장 공로패
  • 한용덕 (시인) . . . . 1회 일치
         [[2005년]] 《계간 문학세상》에서 열린 신인문학상 공모에서 <빈집> 외 4편의 시를 발표하면서, 당시 고등학교 3학년 (19세) 의 나이로 등단했다. 월간 문예사조 문인협회 동인이다.
  • 한운사 . . . . 1회 일치
         [[http://www2.ktrwa.or.kr/new/?doc=bbs/gnuboard.php&bo_table=han_story|구름의 역사]]와 [[http://www2.ktrwa.or.kr/new/?doc=bbs/gnuboard.php&bo_table=hans_life|인생만유기]]는 한국방송작가협회 공식 사이트에서 읽을 수 있다.
  • 한진희(1949) . . . . 1회 일치
         || 경력 ||1990 TV방송연기자협회 회장||
  • 함인섭 . . . . 1회 일치
         [[1948년]] [[8월]] [[강원대학교|춘천농업대학]](現 강원대학교) 설립, [[강원대학교|춘천농업대학]] 학장서리가 되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그는 [[문교부]] 국가고등고시 전형위원의 한 사람으로 위촉되었다. [[1949년]] [[8월 30일]] [[강원대학교|춘천농업대학]] 초대 학장이 되었다. 건국 이후 그의 할아버지 [[함태영]]이 조선 말 [[독립협회]]사건과 [[만민공동회]] 사건으로 수감된 [[이승만]]에게 관대한 한결을 내려 그 인연으로, 내각 법무장관의 물망에 오르기도 했다. 그러나 성사되지 않고 할아버지 [[함태영]]은 [[심계원]]장과 제3대 [[부통령]]을 지냈다. 전쟁이 발생하자 그의 동생 함의섭이 일가족을 이끌고 [[부산광역시|부산]]으로 피신하였다.
  • 함화진 . . . . 1회 일치
         일제 강점기 말기에 국악계의 대표 격으로 [[조선문예회]], [[조선음악협회]] 등 친일성이 강한 음악인 단체에서 활동한 일이 있어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선정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음악인 부문에 포함되었다. 이 명단에 수록된 국악인은 함화진과 [[김기수 (국악인)|김기수]] 두 사람이다.
  • 호준석 . . . . 1회 일치
         * [[2008년]] ~ [[2009년]] : [[한국기자협회]] [[YTN]] 지회장
  • 혼활 . . . . 1회 일치
         (2) 중매 : 주로 성혼에 중점을 두고 있으며, 성혼시에 성과 보수로 성혼료를 수령받는다. 일본 중매 협회와 전국 중매 연합회가 유명하다.
  • 홍정호 (핸드볼선수) . . . . 1회 일치
         * [http://www.handballkorea.com/teaminfo/player_view.asp?p=200402019093 대한핸드볼협회 경기 기록]
  • 홍진기 . . . . 1회 일치
         | 외손녀 || [[이서현 (1973년)|이서현]] || [[1973년]] [[9월 20일]] || || [[제일모직]], [[제일기획]] 부사장, 미국패션디자이너협회 위원
  • 홍해성 . . . . 1회 일치
         [[경상북도]] [[대구광역시|대구]]에서 태어났다. [[계성고등학교]] 전신인 계성중학교를 졸업하고 [[1917년]]에 일본으로 건너가 [[주오 대학]] 법학과에 입학했다. [[도쿄]]에서 극예술협회를 결성하고 연극 운동에 뛰어들었다. [[마해송]], [[홍난파]], [[최승일 (1901년)|최승일]] 등이 회원이었다.
  • 황문수 (장기 기사) . . . . 1회 일치
         |소속 = [[대한장기협회]] 서울 본부
  • 황병기 . . . . 1회 일치
         * [[2001년]] 예술평론가 협회
  • 황승민 . . . . 1회 일치
         동국대학교 법정대학 졸업 후 주식회사 진양의 [[회장]]을 지냈다. [[플라스틱]]공업협회 [[이사장]], 중소기협중앙회 [[회장]], 밝은사회중앙클럽 회장 등을 겸직하였다.
  • 황연대 . . . . 1회 일치
         [[1966년]]에는 사단법인 한국소아마비아동특수보육협회를 설립하여 상임이사로 취임했으며 [[1974년]]에는 [[미국]] [[뉴욕 대학교]] 재활의확과 연수 과정을 이수했다. [[1975년]]에는 소아마비 장애인을 위한 재활 시설인 정립회관(正立會館)을 건립하여 관장으로 취임하면서부터 장애인의 권익 향상 활동에 참여했다. [[1987년]]부터 [[1990년]]까지 한국여의사회 홍보부장 겸 잡지 《여의사회보》 편집인을 맡았다.
  • 황재규 . . . . 1회 일치
         [[청원고등학교 (서울)|서울청원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성균관대학교]]에 입학했다. 입학 동기인 [[허유강]] 선수와 함께 팀의 주축 선발 [[투수]]로 활약하였다. 제 4회 세계 대학야구 선수권 대회에 국가 대표팀으로 참가하여,<ref>[http://isplus.joins.com/sports/kbo/200806/12/200806122017013276010700000107020001070201.html 세계 대학야구 선수권 대표팀 명단 발표] 《일간스포츠》, 2008년 6월 12일 작성</ref> [[일본]]전에서 좋은 투구를 보여 주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001&oid=295&aid=0000000067& 세계 대학야구 결산 - 협회의 외면 속에서도 유망주는 큰다] 《박동희칼럼》, 2008년 7월 29일 작성</ref> 제 1회 KBO 총재기 대학 야구 결승전에서 선발 [[투수]]였던 [[정태승]]에 이어 팀의 2번째 [[투수]]로 등판하여 8.1 이닝 3안타 6탈삼진 1실점의 호투로 [[성균관대학교]]의 우승에 기여하였고, 대회 최우수 선수에 올랐다.<ref>[http://joynews.inews24.com/php/news_view.php?g_menu=702120&g_serial=348816 성균관대, 연세대 꺾고 제 1회 KBO 총재기 우승] 《조이뉴스》, 2008년 8월 8일 작성</ref><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001&oid=295&aid=0000000075& 대학야구 취재기, 아직 끝난 게 아니다] 《박동희칼럼》, 2008년 8월 9일 작성</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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