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 ¶
玄濟明
1902.12.8 ~ 1960.10.16
대한민국의 음악가, 성악가(테너), 작곡가. 1902년 12월 8일 경상북도 대구시 남산동(現 대구광역시 중구 남산동) 출신. 본관은 연주(延州)이며 아호는 현석(玄石)이다. 그리고, 친일반민족행위자다.
1902.12.8 ~ 1960.10.16
대구 대남국민학교와 계성학교를 다녔고, 대구에 있는 제일교회에 들어가 교회 성가대에 입대하여 음악단원이 되었다. 이후 숭실전문학교에 입학하여 음악 교육을 받았고 1923년에 졸업한 후 전라북도 전주에서 신흥학교의 음악 교사로 활동했다.
1926년 미국으로 건너가 시카고에 있는 기독계 무디성경학교에서 음악 교육을 이수하고, 귀국한 뒤에는 조선음악가협회를 창설하고 연희전문학교에서 음악을 가르쳤다. 그 후 조선총독부 학무국이 주관한 조선문예회 정회원으로 가입하다가, 독립 계몽단체인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체포되었다. 이 사건 이후 친일 성향 단체인 대동민우회의 정회원으로 가입하면서 친일반민족행위자의 길을 걷게 되었다. 총독부의 내선일체 정책의 일환으로 조선음악가협회를 해체하고 이후에도 시국대응전선보국연맹, 조선음악협회, 경성후생실내악단 등에도 가입하면서 친일 행위를 하였던 전적이 드러나게 되었으며, 특히 친일 찬양적인 성향의 후지산을 바라보며에 작곡자로 개입하면서 친일 논란에 휩싸이게 되었다.
1945년 해방 후에는 한국민주당에 가입해서 극우 보수파로 활동하여 반공, 반북 운동을 전개하였고 1946년에는 경성음악학교(서울대학교 음악대학의 전신)를 설립하여 교장이 되었다. 1953년 한국음악가협회 위원장, 1954년 대한민국 예술원 영구종신회원에 선임되었다가 1960년 10월 16일 간경변으로 생을 마감했다.
그 외 ¶
국내에서는 희망의 나라로를 작곡한 사람으로 잘 알려져 있지만, 그가 친일 행적을 하였다는 사실이 드러나게 되면서 논란에 휩싸였다. 결국 친일인명사전의 인명부에도 현제명이라는 이름이 올려져 있었다. 게다가 창씨개명에도 적극 동참해서 구로야마 즈미아키(玄山濟明)으로 개명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일단 이노래는 1931년에 작곡 되었고, 친일로 변질했을때는 1937년이다.
고향인 대구 중구에는 '현제명 나무'라고, 이 사람의 이름을 딴 이팝나무가 있는데, 대구에서는 친일파인 이 사람의 이름을 딴 나무가 있는 것이 싫어서 없애버리자고 난리다. 관련 보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