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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윤환
         이렇게 막강한 세력을 구축한 김윤환은 1997년 [[제15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대통령 후보 경선에 출마했으나, 이내 자신이 후보가 될 가능성이 없음을 깨닫고 [[이회창]]을 차기 대통령으로 밀면서 다시 '킹 메이커'로서의 위세를 떨쳤다. 당내 민정계와 영남세력을 대거 규합해 이회창을 대선 후보로 옹립한 김윤환은 3회 연속으로 대통령을 좌지우지하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울 뻔했지만, 정작 이회창은 아들들의 병역 문제와 [[이인제]]의 이탈을 막지 못하면서 대선에서 [[김대중]]에게 패했다. 여당에서 야당으로 전락한 이때부터 김윤환의 정치적 생명은 서서히 쇠퇴하기 시작했고,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는 자신이 밀었던 이회창 총재에게조차 구시대 정치인으로 몰리면서 [[토사구팽|팽]]당해 공천을 못받고 한나라당에서 쫓겨난다.[* 이 당시 이회창의 참모가 [[윤여준]]이었는데, 그간 총선의 화두는 공천이었음을 상기시키며, 김윤환을 위시한 민정계, 구시대 인물들을 쳐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고, 이회창은 계속 망설이다가 결국 윤여준의 주장을 받아들인다. 윤여준의 전략대로 중진급 현역 의원과 정계 거물 수십여명을 날리고 정치 신인들을 대거 전면에 내세운 개혁 공천은 새 바람을 불러일으키면서, 예상을 뒤엎고 한나라당의 총선 승리를 이끌어냈다.] 이후 [[조순(1928)|조순]], [[이수성(정치인)|이수성]], [[박찬종]], [[이기택]] 등 3김 정치 + 이회창에게서 팽당한 정계의 옛 거물들을 끌어모아 [[민주국민당(2000년)]]을 차렸다. 재야의 장기표나 심지어 신군부 출신 [[허화평]]도 있었다! 이렇게 거물과 명망가만으로는 상당히 그럴싸했지만, 선거를 앞두고 급조한 정체성이 불문명한 정당으론 명백한 한계가 있었다. 결국 양당 구도에 밀려 지역구에선 [[춘천시]]의 [[한승수]] 前 경제부총리, 전국구에선 후보 1번이던 [[강숙자]] 등 총 2명 당선에 그치는 참패를 당했다. 본인 역시 자기 지역구인 구미시에서 한나라당 [[김성조]] 후보를 상대로 10% 차의 패배를 당했다.(41.7%:32.1%)
  • 박기환(정치인)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통일민주당]] 후보로 경상북도 영일군-[[울릉군]]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민주정의당]] [[이상득]]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90년 [[3당 합당]] 때 [[민주자유당]]에 합류하지 않고 [[민주당(1990년)|꼬마민주당]]에 잔류하였다.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1991년)|민주당]] 후보로 경상북도 포항시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친여 [[무소속]] [[허화평]]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 박세직
         그러나, 1981년 8월 '''박세직 사건'''으로 [[소장(계급)|소장]] 계급으로 예편하였다. 겉으로는 박세직이 육군사관학교 동기의 사업을 도와 준다는 이유로 비리를 저릴렀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전두환과 [[허화평]], [[허삼수]] 등 측근 세력이 '하나회 출신이라 하더라도 자신의 권력을 넘보는 자는 용서하지 않겠다'라는 본보기를 보여 주려고 박세직을 예편하였다는 설이 있다. 이 사건은 1973년 일어난 [[윤필용 사건]]에서처럼 수도경비사령관의 육군사관학교 동기생이 보안사령관인 상태에서 보안사령관이 동기생을 수사하였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당시 박세직은 박준병 국군보안사령관에 의해 조사를 받고 예편하였다. 후에 박준병은 조사 결과 박세직이 여기저기 “차기 대통령은 나”라고 말하고 다녔다고 밝혔다.
  • 박철언
         제8회 [[사법시험]]에 합격한 후 검사로 근무하다가, [[하나회|신군부]]의 등장 이후 1980년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법사위원으로 파견 근무하면서 [[대한민국 제5공화국]] 헌법의 기초작업에 참여했다. 1980년 [[전두환]]이 대통령이 되자 [[대통령비서실]] 소속 정무비서관, 법무비서관으로 활동하면서, 청와대 밖에 있던 [[노태우]]의 청와대 내부 소식통 역할도 했다. 당시 선배 검사 [[김기춘]]이 1977년의 국군 보안사령부 조직 축소에 관여한 것 때문에 하나회 출신 정권 수뇌부들에게 밉보여서 검사에서 짤릴 위기에 처하자 [[허화평]] 대통령비서실 수석보좌관에게 충성 편지를 쓰도록 조언하였다.[* 김기춘은 이후 노태우 정부에서 법무장관으로 재직하였다.]
  • 변희재
         * [[허화평]]
  • 서인석(1949)
         극단적인 캐릭터 변화의 예로는 [[제5공화국(드라마)|제5공화국]]에서는 [[노태우]]를 들 수 있다. 이 역할을 맡아 노태우 특유의 미묘한 [[물]]스러운 느낌을 잘 표현했다. 극중 절대로 자신의 의견을 단정적으로 이야기 하지 않는다.[* 작중에서는 박정희 밑에서 총리만 오랜 기간을 맡아온 김종필로부터 2인자의 처세술에 대해 조언을 듣는 장면이 나오기도 한다.] 우선 일반적인 여론을 겸손하거나 비굴하게 얘기한 후 상대방의 반응을 보아서 주변 환경과 전두환의 의견을 계산한 뒤 그에 맞추어서 권력이 흐르는 곳에 힘을 실어준다. 초반에 전두환에게 충성을 다한 것, 대권을 향해가면서 주변 친구들에게 힘을 실어준 것, [[1988 서울 올림픽]] 개최식에 국민들과 국제 여론을 눈치보며 전두환이 나오지 못하게 한것 모두 그의 그런 처신에서 나온 행동이다. 쓰리허 중 [[허화평]], [[허삼수]]가 몰락할 때는 그 둘을 몰아붙였고 그의 상급자가 절대권력을 쥐고 있을 때는 그의 말을 적당한 수준에서 맹신해주는 충성스러운 모습을 잘 연출했다. 마지막 41화의 첫 장면[* 그야말로 꿈인가 생시인가 아직 실감을 못한 2인자의 표정으로 흥분을 감추지 못하며 대통령 자리에 앉는 장면.]과 마지막 장면[* [[니키타 흐루쇼프]]와 [[이오시프 스탈린]]의 편지 야사]도 백미다.
  • 우병규
         1980년 9월 [[전두환]] 정권이 출범하자 [[청와대]] [[대통령비서실]] [[정무수석비서관|정무제1수석비서관]]에 임명되었다. [[박철언]] 전 [[대한민국 국회의원]]의 회고에 따르면 우병규는 정무제1수석비서관 시절 대통령비서실 내에서 실세인 [[허화평]] 대통령비서실 보좌관, [[허삼수]] 사정수석비서관 등의 견제를 받았다. 1981년 말 대한민국 국회 [[국회사무총장|사무총장]]에 임명되어 1984년까지 역임하였다. 1984년 [[조정제]]의 뒤를 이어 [[민주정의당]] 마산시 지구당 위원장에 선출되었다.
  • 이기택
         || 1997 || 1997년 7.24 재보궐선거 (15대 국회 경북 포항 북)[* 전임자 [[허화평]] [[12.12 군사반란]]으로 피선거권 상실] || [[통합민주당(1995년)|통합민주당]] || 35,137 (28.33%) || 낙선 (2위) || ||
  • 이병석(정치인)
         1994년부터 1996년까지 [[청와대]] [[대통령비서실]] 정무비서관을 역임하였다.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한국당]] 후보로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포항)|북구]]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옥중 출마한 [[무소속]] [[허화평]]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97년 허화평의 [[국회의원]]직 상실로 치러진 [[재보궐선거]]에서도 신한국당 후보로 출마하였으나 무소속 [[박태준]]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 이성용 (1956년)
         * 1995년 [[코리아게이트 (드라마)|코리아게이트]] (SBS) - [[허화평]]
  • 이진우 (1969년)
         * [[2005년]] [[MBC]] 《[[제5공화국 (드라마)|제5공화국]]》 ... [[허화평]] 역
  • 이진우(배우)
          * [[제5공화국(드라마)|제5공화국]](2005, [[문화방송|MBC]]) - [[허화평]] 역
  • 장태완
         그리고 2011년에 또 논란이 되었다. 6월에 숨진 '''[[안현태]] 前 청와대 경호실장'''이 [[국립대전현충원]]에 묻혔기 때문이다. 안현태는 [[육군사관학교]] 제17기로, [[하나회]] 회원이었다. 참고로 [[허삼수]], [[허화평]], [[김진영(군인)|김진영]]도 안현태와 육사 동기다. 또한 안현태는 '''전두환에게 충정을 다한 인물이라서, 현충원 안장이 거론될 때부터 말이 많았다.''' 전두환의 비자금을 조성한 죄로 구속되면서 군 형법상 반란수괴 혐의 등으로 먼저 구속된 전두환을 지칭하며 "이제 각하를 옆에서 모시게 되어 너무 기분이 좋다"고까지 말할 정도였다. 이 때문에 그런 인물이 현충원에 들어가는 것이 옳은가 아닌가 논란 자체도 벌어졌고, 5.18 구속부상자회가 서울 여의도 [[국가보훈처]][* 현재는 세종시로 이전하였다.] 앞에서 안현태 전 경호실장의 국립현충원 안장에 항의하는 집회를 열기도 했다.
  • 허삼수
         '''허삼수'''(許三守, [[1936년]] [[9월 18일]] ~ )는 [[대한민국]]의 [[군인]]이자 [[정치가]]이다. [[최규하 정부]]와 [[대한민국 제5공화국|제5공화국]] 시기 [[전두환]]의 최측근 인사의 한 사람으로 [[허화평]], [[허문도]]와 함께 '삼허'(3許)로 불렸으며 본관은 김해이다.
         [[부산고등학교]]와 [[대한민국 육군사관학교|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1961년]] [[대한민국 육군|육군]] [[소위]]로 임관, [[1965년]] [[육군 방첩부대]]로 전속되어 그 후 15년간 방첩, 정보, 대공수사 업무를 담당하였고, [[대한민국 육군대학|육군대학교]]를 졸업하였다. 그뒤 [[연세대학교]] 경영대학원에 진학하여 [[경영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군생활 중 그는 [[허화평]], [[안현태]] 등 육사 17기 동기들 중 일부와 함께 [[하나회]]에 가담하였으며 [[하나회]] 내 육사 17기 멤버들의 리더였다.
         [[1980년]] [[5월 27일]] 구성된 [[국가보위입법회의]] 사회정화분과위원회 간사 등을 지내면서 [[삼청교육대|삼청교육]] 등을 주도하였다. 이때 그는 한꺼번에 보안사령부 인사처장, 중앙정보부장 특별보좌관,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사회정화분과위원회의 세자리를 겸임하였다. 그러나 그에 의하면 '겸직을 하고 있어도 보안사령부 인사처장 일이 바빠 다른 일은 거의 하지 못했다<ref name="bobo140"/>' 한다. 그해 [[9월 9일]] 대통령비서실 사정수석비서관에 발탁되었다. [[11월 5일]] [[대한민국 육군|육군]] [[1성 장군|준장]] 진급과 동시에 예편하였다.<ref name="bobo140"/> [[1982년]] [[12월 20일]] [[허화평]] 등과 함께 [[비서관]]에서 의원면직하였다.
         [[대한민국 제5공화국|제5공화국]] 초기 [[허문도]] · [[허화평]]과 함께 3허(Three 許)로 불리면서 [[전두환]]의 핵심 측근 그룹을 형성하였으나, [[1982년]] 전두환의 신임을 잃고 물러나 [[미국]]으로 건너가 동서문화연구소 연구위원으로 재직했고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니혼 대학교]] 교수, [[교토 대학교]] 교수로 활동하였다. 그뒤 [[미국]]으로 건너갔다가 [[1988년]] 귀국하였고, 같은 해 [[민주정의당]] 소속으로 제13대 국회의원 총선거에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다.
         * [[허화평]]
  • 허화평
         '''5공정권의 브레인, [[허화평|쓰]][[허삼수|리]] [[허문도|허]] 중 한명'''
         1980년 9월 [[전두환]] 취임 후 [[대통령비서실]] 비서실보좌관으로 임명되었다.[* 당시 [[대통령비서실]] 직제에 비서실보좌관이라는 직함은 없었다. 말하자면 [[전두환]]이 자기 사람을 심기 위해 비서실보좌관이라는 없던 직제를 일부러 만들어서 허화평을 임명한 셈이다.] 이를 통해 실질적인 청와대 핵심 기획자 역할을 했고 차관급 관료임에도 유일하게 대통령과 함께 청와대 본관에서 근무했다. 명칭만 비서실 보좌관이었지 실질적으로 부총리급의 권력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보안사 시절부터 비서실장이었으니~~ [[허삼수]], [[허문도]] 등과 쓰리 허로 불리며 실세로 활동했다.
         대통령비서실 비서실보좌관실은 구 [[청와대]] 본관에 속해 있어서 전두환 대통령과의 관계가 매우 가깝다는 것을 방증하였다. 그러나 허화평의 권력이 너무 강하다는 지적에 1981년 12월 대통령비서실 산하 정무제1[[수석비서관]]으로 좌천되었다.[* 이후로 청와대 비서실장은 1982년 1월부터 [[이범석(1925)|이범석]]이 새로 도맡기도 하였다.]
         군사정권의 인사답게 민주화운동에 시종일관 부정적인 논조여서 많은 비판을 받았다. 《월간조선》은 2012년 3월호와 4월호에 걸쳐 허화평 전 대통령 정무수석과 심층 인터뷰를 했는데, 허 전 수석은 "[[5.18]]에 [[보이지 않는 손]]이 작용했을 것이라는 의혹을 지울 수 없다”며 “당시 정보당국의 감청에서 풀 수 없는 암호지령이 급증했다”고 회고했다.
         2016년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정국이 요동치는 판에 허화평은 TV조선의 단독인터뷰에 응했다. 이 자리에서 허화평은 박근혜 대통령이 최태민의 정신적 포로라고 증언하면서, 이 같은 사건으로 한국의 정치적 후진성이 나타나고 있다고 비판하였다. [[http://m.news.naver.com/hotissue/read.nhn?sid1=100&cid=1051768&iid=1139394&oid=448&aid=0000186191|#]]
         '''그렇다면 왜 최태민을 잡아넣거나 재산을 몰수하지 않았느냐'''는 사회자의 반문에, 허화평은 [[박정희]] 대통령과 [[10월 유신]]의 결과물인 산업화를 지키기 위해서였다고 발언했다. 제5공화국의 첫 번째 과업이 박근혜와 최태민을 청산하는 일이었다는 말이다.[[http://news.naver.com/main/hotissue/read.nhn?mid=hot&sid1=100&cid=1051768&iid=1140067&oid=449&aid=0000114843&ptype=052|#]] 파장이 커지는 것을 막기 위해 [[박근혜]]와 [[최태민]]의 부적절한 관계를 제대로 수사해서 청산하지 않고 놔둔 것이다. 이것이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의 단초를 제공했다고 볼 수 있다. 박근혜와 최태민의 관계와 비리의 온상이 [[새마음봉사단]]이라고 보았으며, 그 결과 최태민과 박근혜의 관계를 제대로 드러내서 수습하지 못하고, 정치적 혼란기를 틈타 개인적인 관계를 끊어 달라는 수준에서 처리하고 묻어버린 것.
         2005년 방영된 [[제5공화국(드라마)|제5공화국 드라마]]에서는 [[이진우]]가 허화평을 연기했는데, '''허화평 본인이 실제 자신보다 더 멋지게 나왔다면서 극찬했다고 한다.''' 단 이것과는 별개로 드라마 내용에 대해서는 불만이 많았다고 한다.
         작중에서 허화평이 [[금융실명제]]에 반대하자, [[이학봉]]이 [[김재익]]에게 "우습네요. 그렇게 개혁 개혁 노래 부르더니."라며 뒷담화하는 내용이 나오기도 한다.
         5공시절의 정치인들은 대부분 매체에 노출되는 빈도가 매우 적은 데 반해 허화평은 방송 등 언론 노출 빈도가 높은 편이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 당시에도 [[쾌도난마(채널A)|쾌도난마]]에 출연해서 [[박근혜 정부]]와 [[새누리당]]을 강도높게 비판한 바 있다.[* 당시 정무수석이던 [[조윤선]]이 11개월 동안 대통령을 독대하지 못했다는 어처구니 없는 말을 내뱉자 "정무수석쯤 되면 대통령이 안 만나 주더라도 집무실 문을 박차고 들어가야 된다."고 일갈했고 [[새누리당]]에 대해서도 "본인들이 앞장서서 이 정국을 헤쳐나갈 생각을 해야지 친박이니 비박이니 싸우기만 하면 안 된다."며 비판했다.] 또한 대한민국은 [[문고리 3인방|권력의 문고리만 잡으면]] 출세할 수 있는 나라라며 ~~문고리 잡아본 사람으로서~~ 제왕적 대통령제는 반드시 사라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5공 정치인답지 않게 나름의 정치철학과 논리를 가지고 있는 듯하다. 1996년 역사 바로세우기의 일환으로 구속기소되었을 때 이 면모가 잘 드러나는데, 법정에서 다른 피고인들이 모르쇠로 일관하는 와중에도 허화평만은 적극적으로 항변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는 96년 총선에서 무려 '''옥중 당선'''되는 결과를 낳게 된다. 물론 당선 여부와는 별개로 대법원에서 실형을 선고받으면서 의원직을 상실했다.] 이후에도 보수성향 논객으로 활동하면서 종편채널에 종종 모습을 드러내는데 말빨이 기가 막혀서 진보성향 PD들이 애를 먹는다는 후문도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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