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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권대운
         1642년, [[진사]]가 되고 1649년,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정언]]이 되었다. 이후 [[지평]], [[헌납]], [[장령]], [[감찰]], [[이조정랑]], [[응교]], [[사간]] 등의 청요직을 거쳐 [[승지]]가 되었다. 이후 [[형조참의]], [[병조참의]], [[예조참의]]와 [[좌승지]]를 거쳐 [[한성부우윤]], [[형조참판]], [[개성유수]] 등을 거쳐 1666년, [[평안도 관찰사]]가 되고 이어 [[대사간]], [[함경도 관찰사]]까지 되었다. 1670년, [[호조판서]]로 발탁되고 그 뒤 [[형조판서]], [[도승지]]를 거쳐 [[우참찬]]이 되고 [[판의금부사]], [[한성부판윤]]을 겸임하고 1674년 [[제2차 예송 논쟁]]으로 [[갑인환국]]이 단행되자 중앙으로 복귀하였다. 숙종이 즉위하자 [[예조판서]]를 거쳐 [[병조판서]]가 되었다. 그러나 [[송시열]]을 처형할 것을 주장한 [[허목]], [[윤휴]]에 반대하여 [[허적]]과 함께 탁남의 지도자가 되었다. 이어 [[우의정]]으로 승진했다가 [[1680년]](숙종 6년) [[조선의 공신|보사]][[원종공신]] 1등(保社原從功臣一等)에 책록되었다.
         * [[허목]]
         [[분류:1612년 태어남]][[분류:1699년 죽음]][[분류:조선의 문신]][[분류:조선의 정치인]][[분류:과거 급제자]][[분류:윤휴]][[분류:허목]][[분류:영의정]][[분류:예송 논쟁 관련자]][[분류:안동 권씨]][[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탁남]]
  • 권상하
         당시 그는 당쟁에 초연한 태도로 학문과 교육에만 전념하였다. 한편으로 스승인 [[송시열]]의 논적인 [[허목]]과 [[윤휴]]에 대한 상당한 적개심과 공격성을 드러내기도 했다. 그는 주로 정치 현실에 관심을 갖기보다는 선배 [[유학]]자들인 [[서경덕]](徐敬德), [[이황]](李滉), [[기대승]](奇大升), [[이이]](李珥), [[성혼]](成渾) 등으로부터 제기되던 조선시대 성리학적 기본 문제에 대하여 연구, 규명하려는데 힘을 기울였다. 한편으로 [[남인]]과 [[소론]]의 학문을 이단이라고 공격하여 논란을 불러오기도 했다.
         그 뒤 [[송시열]]의 비문을 찬하면서 [[송시열]]이 화를 당한 것은 "[[윤증]]이 (사사로운 마음으로) [[윤휴]](尹鑴), [[허목]]의 무리와 함께 조작한 것”이라는 내용을 비문에 기록하여 [[소론]]계 유생 [[유규]](柳奎) 등 8백 여명의 [[성균관]] 소론계 유생들에게 비판을 받고 [[사간원]][[대사간]] [[이관명]](李觀命), [[홍문관]][[수찬]] [[어유구]](魚有龜<ref>경종의 장인이다.</ref>) 등 [[소론]]측으로부터 비문을 수정하라는 항의를 당하였으나 그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송시열의 죽음을 순교로 해석했다. 그는 번번히 송시열은 윤증, 윤휴, 허목의 무리에 의해서 희생당한 것이라고 말했다. [[송시열]] 자신은 자신의 사약을 순교로 해석했고, 유배생활을 정도를 걷는 자에 대한 사도의 탄압으로 여겼다. [[송시열]]의 사후 그의 제자였던 권상하 역시 [[송시열]]의 죽음을 순교로 해석하였다.
         그는 "[[윤증]]이 (사사로운 마음으로) [[윤휴]], [[허목]]의 무리와 함께 조작한 것"이라며 [[윤증]]과 [[허목]], [[윤휴]]가 술수를 꾸며 [[송시열]]을 죽게 했다고 굳게 확신하였다. 그는 이를 자신이 지은 [[송시열]]의 묘비명에도 기록하였다.
         예송 이후 [[송시열]]은 [[윤휴]]를 적휴(賊鑴), 참적(斬賊), 허목을 독물(毒物), 독극물, 흉목(凶穆)이라고 불렀다. 이는 [[송시열]]의 수제자인 권상하에게도 계승되어, 권상하는 [[윤휴]]를 지칭할 때마다 항상 적휴, 참적, [[허목]]을 지칭할 때는 독물, 독극물, 흉목이라 불렀다. 권상하는 공문서와 다른사람의 묘지명, 묘갈명, 신도비문 등에서도 [[윤휴]]를 항상 적휴, 참적, [[허목]]을 독물, 독극물, 흉목이라 불렀다.
         * [[허목]]
         [[분류:1641년 태어남]][[분류:1721년 죽음]][[분류:조선의 문신]][[분류:조선의 정치인]][[분류:사상가]][[분류:조선의 작가]][[분류:조선의 성리학자]][[분류:조선의 교육인]][[분류:조선의 시인]][[분류:송시열]][[분류:이이]][[분류:성혼]][[분류:허목]][[분류:조선의 철학자]][[분류:조선의 저술가]][[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안동 권씨]][[분류:병사한 사람]][[분류:노론]][[분류:17세기 한국 사람]]
  • 김수홍
         * [[허목]]
  • 김장생
         * [[허목]]
  • 김종수 (1728년)
         김종수는 [[정조]]가 왕세손일 때부터 정조에게 커다란 영향을 준 스승이었다. 그는 정조에게 2년 정도 원시유학과 정통 [[주자]][[성리학]]의 본질을 가르쳤다.<ref name="parks191">박광용, 《영조와 정조의 나라》 (푸른역사, 2001) 191페이지</ref> 김종수는 군주가 학문을 이끌어 요순시대의 이상을 실현한 것처럼, 군주는 실력을 닦아야 한다며 군주 스스로 학문과 군사 다방면에서 뛰어난 존재가 되어야 함을 역설했다. 또한 세손에게 만인을 포용하는 어버이가 되어야 하며, 항상 높고 숭고한 뜻을 지니고 이것을 이룩하는데 게을리해서는 안된다고 강조했다. 김종수는 세손에게 임금이면서 스승이면서 아버지가 되어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강조했다. 그는 또 [[성리학]]만이 진리라는 견해는 잘못이고, 학자의 해석에 따라 뜻과 의미가 달라질 수 있음을 지적했다. 그는 [[허목]]과 [[윤휴]]를 비난하면서도, 원시유학의 가치를 설명하였다. 정조 역시 원시유학과 정통 주자성리학을 동시에 바른 학문인 정학으로 받아들였다.
  • 김집 (1574년)
         * [[허목]]
  • 김효원
         [[안악군수]], [[영흥부사]]로 승진하여 재직 중 사망하였다.<ref name=autogenerated1 /> 주을천 옆 묘소 입구에 신도비가 세워졌으며 이준(李埈)이 짓고 [[김세렴]](金世濂)이 글씨를, [[허목]](許穆)이 전액하여 [[1743년]]에 설립하였다.<ref name=autogenerated2 /> [[안악군수]], [[영흥부사]]로 승진하여 재직 중 사망하여<ref name=autogenerated1 /> 묘갈명은 갈암 [[이현일]]이 썼으며 '(조정에 있을 때 정색(正色)과 직언(直言)으로 조금도 거리낌이 없었다. 그래서 일시의 권간들이 모두 다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였다'고 하였다.<ref name=autogenerated2 /> 저서로는 《성암집》 등이 있다.
         사후 [[증직|증]] [[가선대부]] [[이조참판]]에 [[추증]]되었다가 뒤에 다시 [[증직|증]] [[이조판서]]에 가증(加贈)되고 [[삼척]]의 [[경행서원]](景行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묘갈은 미수 [[허목]]이 찬하였으나 후에 [[1803년]](순조 3) 다시 세워졌다.
         * [[허목]]
  • 능창대군
         그는 적실 [[능성 구씨]] 부인과 결혼(1615년 음력 3월 결혼)한지 불과 1년도 채 아니 되어 사망하였지만 여자 노비에게서 딸 이영온을 두었고, 서녀 이영온은 인조가 [[남인]] 당수 미수 [[허목]]의 동생 [[허서]]에게 시집보냈다.
         그의 서녀 이영온의 존재는 알려지지 않다가 택당 [[이식 (1584년)|이식]]의 택당집, 미수 [[허목]]의 [[미수기언]]에 능창군이 여종을 첩으로 삼고 딸 하나를 두었다는 내용이 실려있어 후대에 알려지게 되었다.
         [[허목]]은 자신의 부인, 제수, 며느리에게도 일일이 묘비문을 짓고 직접 써주었다. 그러나 셋째 동생인 [[허서]]의 부인인 능창대군의 서녀 이영온에 대해서는 비문도, 추도하는 글도 남기지 않았다.
  • 류형원
         당색으로는 [[북인]]계열로, [[북인]] 당원이던 아버지 [[류흠]]이 [[인조 반정]]으로 장살된 이후, 과거에 여러 번 응시하였으나 낙방하였다. 그 뒤 [[1654년]](효종 5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이후 [[조선 효종|효종]] 때 [[북인]]계 인사들을 발탁, 등용하던 [[허목]], [[윤휴]]의 천거 등 관직에 나갈수 있는 주변의 배경이 있었으나 관직을 단념하고 학문 연구와 후학 양성에 전념하였다. [[남인]] 실학자의 첫 세대 인사 중의 한사람이다.
         초기 [[실학]]자의 한사람으로 그의 학문은 후에 중농학파인 [[이하진 (1628년)|이하진]], [[이서우 (1633년)|이서우]], [[오상렴]], [[이익 (학자)|이익]] 등에게로 이어진다. [[남인]] 실학자 [[이익 (학자)|성호 이익]]의 내재종형이나 생전에 한번도 만나본 적은 없다. 저서로는 경세서인 [[반계수록]], 문집인 [[반계집]] 등이 있다. [[이원진]], 동명 [[김세렴]], [[정언옹]], 미수 [[허목]]의 문인이다.
         외종조부 이지안은 [[이황]]의 학통을 계승한 [[정언옹]]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이지안의 동문은 [[허목]]으로 후일 그가 [[허목]]의 문하에 출입하게 되는 데는, 외종조부와의 인연이 작용했다. 아버지 [[유흠 (조선)|유흠]]과 할아버지 유성민(柳成民)은 [[북인]]이었다.
         뚜렷한 스승 없이 홀로 학문 연구에 진력하였으나 보통 [[이원진]], [[김세렴]]의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미수 [[허목]]의 문하에도 자주 출입하여 수학하였다.
         이지완의 아들이자 유형원의 외숙인 이원진([[1594년]] ~ [[1665년]])은 학문으로 이름이 높았고, 고모부인 김세렴 역시 호조판서를 지낸 고관으로 처조카인 유형원에게는 스승 역할을 하였다. 5세에 글을 배우기 시작하여 7세에 《서경(書經)》의 우공기주(禹貢冀州)편을 읽다가 감탄했다고 한다. 특히 김세렴은 함경도와 평안도의 관찰사를 역임한 경력도 있어 그 시절 유형원이 그곳으로 직접 찾아가 기거하면서, 북방에 관한 많은 지식을 얻을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외종조부 [[이지안]]은 정언창(鄭彦窓)의 문하에서 [[허목]](許穆) 등과 함께 수학<ref>[http://koreandb.nate.com/history/people/detail?sn=2260 이지안:네이트 한국학]{{깨진 링크|url=http://koreandb.nate.com/history/people/detail?sn=2260 }}</ref>하였는데, 이런 인연으로 그는 외종조부 이지안의 동문인 [[허목]]을 찾아가 가르침을 청했다.
         스승 미수 허목
         [[과거 시험]]의 폐단으로 생업에 종사하지 않고 공부한다는 이름하에 음식만 축내는 자들이 늘어난다고 비판하던 그는 과거에 응시하라는 [[이원진]], [[김세렴]], [[허목]] 등 스승들의 권고와 할아버지의 부탁을 거부하고 과거 시험에 응시하지 않았다. 그는 [[북인]]계 인사의 자손이라는 이유로 출사에 제한을 당했고, 실망한 그는 이후 관직을 단념한다.
         스스로 독서, 사색하며 학문을 연구하는 한편 의문나는 점이 있으면 [[이원진]], [[김세렴]], [[허목]] 등과 꾸준히 서신을 주고받으며 견문을 넓히기도 했다.
         그 뒤 [[허목]]과 [[윤휴]]가 조정에 출사하여 [[북인]]계 출신 인사들을 적극 관직에 천거하면서, 유형원 역시 학덕이 높음을 들어 계속 천거하였으나 모두 고사하였다. 당시 그의 스승이던 [[허목]]과 그의 지인인 [[윤휴]]는 [[조선 효종|효종]]의 유일 천거에 의해 출사하면서 [[북인]]계 출신 학자, 문사들을 적극적으로 발굴하여 등용시켰다.
         [[조선 효종|효종]]의 관직 제수를 사양하자 [[허목]]과 [[윤휴]]는 높은 이상을 품었더라도 현실 정치에 참여해야 실천할 수 있다하여 계속 그에게 조정에 출사할 것을 권고하였지만 이 역시 거절하였다. 또한 [[1659년]] [[조선 효종|효종]]의 사후 벌어진 [[예송 논쟁]] 역시 공리공담으로 판단하여 관망하였다.
         [[1668년]](현종 9) 스승인 [[허목]]이 [[조선 현종|현종]]에게 유형원이 국왕을 보좌할 재주(王佐之才)를 가진 인재라며 발탁을 건의하였다. 그러나 [[서인]]들은 그의 이론이 괴이하다며 반대하였다. 그해에 다시 [[윤휴]]가 유형원은 경세의 재능을 가진 식견있는 선비라며 추천하였으나 사양하고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
         생전 그의 학문에 관심을 준 인물은 절친한 친구였던 [[배상유]](裵尙瑜)와 스승 [[허목]], 선배였던 [[윤휴]], [[윤선도]]와 [[서인]]으로는 [[영의정]]을 지낸 잠곡 [[김육]]이 있었다. 그의 사상은 후에 [[서인]] [[이사명]]과 [[이이명]], [[소론]]의 [[윤증]]과 [[박세채]], [[노론]]의 [[홍계희]] 등 소수의 지식인들이 관심을 갖고 높이 샀고, [[조선 영조|영조]] 때에 이르러 재조명되기 시작하였다. 그의 사상은 [[양득중]], [[이익 (1681년)|이익]], [[안정복]], [[신후담]], [[정약용]] 등을 통해 계승되었다.
         [[1673년]](현종 15년) [[음력 3월 19일]] 향년 52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ref> [http://news.khan.co.kr/section/khan_art_view.html?mode=view&artid=200703091509091&code=900308 <역사의 땅, 사상의 고향>(5) 반계 유형원 ‘반계수록’ 의 산실 (上)] ([[경향신문]]) </ref> 그의 스승 중 한사람이자 외조부 [[이지안]]의 동문이던 [[허목]]과 논객 백호 [[윤휴]]는 그의 이른 죽음을 애석해하였다.
         * 외숙부 [[이원진]], 고모부 [[김세렴]], 학자 미수 [[허목]] 등의 문하에서 수학.
         * 45세 : 외숙부 [[이원진]]의 장례를 치르고, 연천에서 미수 [[허목]]을 다시 찾아감.
         * [[허목]]
         [[분류:조선의 문신]][[분류:조선의 교육인]][[분류:조선의 과학자]][[분류:한국의 농학자]][[분류:허목]][[분류:문화 류씨]][[분류:조선의 시인]][[분류:조선의 저술가]][[분류:병사한 사람]][[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사상가]][[분류:남인]]
  • 박세채
         그는 일찍이 [[이이]]를 사숙, [[이이]]의 《[[격몽요결]]》(擊蒙要訣)로써 학문을 출발했으며 평생 [[이이]]를 존경하였다. [[1638년]](인조 16) 아버지 박의에게 글을 배우며 가학을 수학하다가 [[김집 (1574년)|김집]]과 청음 [[김상헌]]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본격적으로 배웠다. 그 뒤 18세 때 [[성균관]]에 들어갔으며, 성균관 유생 시절에 [[이이]]와 [[성혼]]의 [[문묘]](文廟) 종사(從祀)와 추대를 주장, 영남유생 유직(柳稷)이 이들의 문묘종사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 이에 대해 박세채는 유직의 상소의 부당성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글을 내었는데, 이에 대한 효종의 비답(批答)이 [[남인]] 유생을 옹호하는 것이었으므로 이에 분개하였다. 그 뒤 [[허목]] 등 [[이이]]·[[성혼]]의 문묘 종사에 대하여 반대하는 세력들을 비판, 공격하다가 [[조선]] [[조선 효종|효종]]의 꾸지람을 듣고서 [[성균관]] 수학 2년만에 과거를 단념하고 과거 공부를 포기하였다.
         [[1659년]] [[조선 효종|효종]]이 죽고 [[자의대비]]의 복상 기간을 놓고 1차 [[예송논쟁]]이 일어나자 기년복설을 주장한 [[서인]]의 입장을 지지하였다. 그는 당초 [[허목]]과 [[윤휴]]의 견해도 일단 수용하자는 입장이었으나 [[윤선도]]의 상소 이후 [[송시열]], [[송준길]]의 예론을 무조건 지지하였다. [[1674년]] 2차 예송논쟁에서 [[서인]]이 패하고 [[남인]]이 집권하자 파직당하고 [[양근]]으로 유배되었다.
  • 성혼
         후일 미수 [[허목]], 고산 [[윤선도]], 백호 [[윤휴]]가 [[이이]]와 성혼의 문묘 종사를 반대하면서 내세웠던 논리는 바로 [[이홍로]]가 그를 공격한 것, 일부러 어가를 보고도 오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 송준길
         그 뒤 [[자헌대부]]로 승진 발탁되어 [[사헌부]][[대사헌]]겸 [[성균관]]제주가 된 뒤 이조판서로 있던 [[송시열]]과 함께 조정의 공론을 장악하였다. 그 뒤 이조참판 겸 좨주를 거쳐 [[1659년]](효종 10년) [[병조판서]]로 특별 발탁되었다. 이후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우참찬으로 송시열과 함께 국정에 참여하던 중 [[조선 효종|효종]]이 죽고 [[조선 현종|현종]]이 즉위, 효종상에 대한 [[자의대비]]의 복상문제로 이른바 1차 [[예송]]이 일어나자 송시열이 기년제(朞年祭, 만 1년)를 주장할 때, [[김수항]], [[원두표]] 등과 함께 송시열의 참최복 설을 지지하여 [[남인]]의 [[윤휴]]·[[허목]]·[[윤선도]] 등의 3년설과 논란을 거듭한 끝에 일단 참최복을 관철시켰다.
         효종이 인조의 맏아들로 왕위를 이었다면 별 문제가 없었겠지만 그는 차남이고 인조의 맏아들인 소현세자의 상중에 자의대비가 맏아들에게 행하는 예로써 3년상을 치렀기 때문에 다시 효종의 상을 당하여서는 몇 년 상을 해야 하는가가 문제가 되었다.<ref name="park0318">박영규, 한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 (도서출판 들녘, 1996) 318</ref> 이 문제에 직면하자 서인의 송시열과 송준길은 효종이 차남이므로 원칙대로 당연히 기년상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ref name="park0318"/> 하지만 남인의 허목과 윤휴는 효종이 비록 차남이지만 왕위를 계승하였으므로 장남과 다름없기에 3년상이어야 한다고 반론을 제기했다.<ref name="park0318"/> 서인과 남인의 복상 논쟁은 극단적인 감정으로 치달았고, 결국 돌이킬 수 없는 정쟁으로 확대되고 말았다. 그리고 이 정쟁은 지방으로 확대되어 재야 선비들 사이에서도 중요한 쟁점으로 부각되었다.<ref name="park0318"/>
         [[1661년]](현종 2년) [[윤선도]]가 유배된 [[삼수]]는 흉년과 기근이 심하여 그의 유배지를 북청으로 옮기는 논의가 있었다. [[허목]] 등은 윤선도의 유배지를 옮겨줄 것을 청하였다. 그러나 [[송시열]]과 송준길은 윤선도의 유배지를 옮기는 것을 반대하여 허목 등과 언쟁이 벌어졌고, 남인들은 송시열과 송준길이 잔인하다며 성토했다. 그러나 송시열과 송준길의 뜻이 관철되어 윤선도의 유배지는 옮겨지지 못했다.
         [[1673년]](현종 14년 [[2월]] [[조선 현종|현종]]의 특명으로 [[증직|증]]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시|의정부]]겸 영경연홍문관예문관성균춘추관관관상감사 세자사에 추증되었다. 1674년 [[조선 효종|효종]]의 왕비인 [[인선대비]]가 죽자 또 한 차례 [[자의대비]]의 복상문제가 일어나게 되고(제2차 예송 논쟁), 이번에는 남인의 기년제설이 서인의 대공설(大功說: 9개월)을 누르고 남인의 주장을 관철시킴으로써 남인이 정권을 장악, 1675년(숙종 1) [[허적]]·[[윤휴]]·[[허목]] 등의 공격을 받아 관작을 추탈당하였다. 이어 1680년 경신환국으로 서인이 재집권하면서 그해 2월 증작이 복작되었다.
         * [[허목]]
         [[분류:1606년 태어남]][[분류:1672년 죽음]][[분류:사상가]][[분류:조선의 문신]][[분류:조선의 성리학자]][[분류:조선의 철학자]][[분류:조선의 정치인]][[분류:조선의 교육인]][[분류:과거 급제자]][[분류:송시열]][[분류:허목]][[분류:예송 논쟁 관련자]][[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조선의 작가]][[분류:조선의 저술가]][[분류:서예가]][[분류:조선 효종]][[분류:은진 송씨]][[분류:서인]][[분류:노론]][[분류:17세기 한국 사람]]
  • 신후담
         부원군 [[신승선]]과 신도공 [[신수근]]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현감]]으로 [[증직|증]] [[예조]][[참판]] 겸 [[제학]]에 [[추증]]된 [[신구중]](愼龜重)이고, 어머니는 [[허목]]과 [[윤휴]]의 문인인 [[이서우]](李瑞雨)의 손녀이며 [[참봉]] [[이정관]](李正觀)의 딸 우계이씨(羽溪李氏)이다. 아버지 신구중은 통덕랑(通德郞)으로 [[1727년]]의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종묘서령, 현감을 거쳐 [[병조]][[좌랑]]에 이르렀다. 아버지 신구중은 [[신승선]]의 둘째 형인 신승복의 6대손 신지오의 아들이지만 아들이 없는 16촌 아저씨 신휘일의 양자로 입양되었다.
         당색으로는 [[남인]]으로, 그의 집안은 [[권대운]] 가문과 교류가 잦은 청남파였다. 5세 때에 글을 배우기 시작하여 6세 때부터 박세흥(朴世興)을 선생으로 모시고 수학하였다. 10세 때에는 《[[사략]]》과 통감(通鑑)을 다 읽고 그 내용을 이해하였으며, 12세 때에는 [[불교]]의 《능엄경》을 읽고 잘 이해하였다고 한다. 뒤에 [[이익 (1681년)|이익]]의 문인이 되어 허목, [[유형원]], 이익으로 이어지는 학맥을 계승하였으며, 순암 [[안정복]]에게는 동문수학한 선배였다.
         청소년기에 이르러 처음에는 [[노장사상]](老莊思想)에 심취하였으나 17세 때 《[[성리대전]] (性理大全)》을 읽게 되면서부터 [[성리학]]으로 기울었다. 그 뒤 허목과 [[송시열]] 등의 저서를 모두 탐독했는데 [[허목]]의 사상에 호의를 보이게 되고, 이는 그의 문하인 [[이익 (1681년)|이익]]에게 수학하면서 실학으로 옮겨가는 계기가 된다. 아버지 [[신구중]]에게서 글을 배웠는데, 그로부터 종증조부 [[신무 (1625년)|신무]]에게 배운 학문과 한강 [[정구 (1543년)|정구]], 여헌 [[장현광]]의 학문을 접하였다. [[신무 (1625년)|신무]]는 관설 [[허후]]에게 수학했고, 허후는 정구의 문인이자, 장현광의 문인이었다. 나중에는 다시 [[이익 (1681년)|성호 이익]]을 찾아가 그의 문하에서도 학문을 배웠다. 이익의 문하에서 [[안정복]]을 만나 그와도 가깝게 지냈다.
         이황을 이은 남인의 맥은 허목을 거쳐 이익, 신후담, 안정복 등으로 이어졌었다.<ref>한자경, 《한국 철학의 맥》 (이화여자대학교 출판부, 2008) 320</ref>
         [[유교]] 외에도 [[불교]]나 [[도교]]에도 진리가 있을 수 있으며 어느 한가지 만이 진리는 아니라는 [[허목]]의 보편적 진리 사상 측면에 입각하여 기독교의 구원론을 비판하였다. 그는 또 현실이 아닌 다른 세상에서 복을 찾는다는 것도 허황된 생각으로 보았다. 자칫 현실문제를 회피, 외면하는 것으로 전락할수 있다고도 봤다.
  • 어진익
         병조 낭관으로 전임되고 다시 정언에 옮겨졌다가 얼마 안 되어 어버이 봉양을 위해 지방관으로 나갈 것을 요청하여 현종이 승인, [[함평군|함평]] [[현감]]으로 부임하였다. 이때 어머니 안동권씨는 이미 형 어진열(魚震說)의 임지인 [[전라남도|전라도]] [[무안군|무안현]]에 있어, 형제가 교대로 어머니 권씨를 판여(板輿)에 모시고 왕래하며 봉양하였다. 다음해에 어떤 일로 파직되어 돌아왔다가 다시 서용되어 정언, 사서가 되고 사예, 장령에 승진되었다. 이후 [[사간원]]헌납(獻納), [[사간원]]사간을 거쳐, [[1673년]](현종 15) [[사복시]]정이 되고, 그해 [[세자시강원]]사서, 문학이 되어 [[조선 숙종|세자 광]](爌)을 보도하였다. 헌납에 옮겨졌다가 다시 1674년 [[세자시강원]] 보덕(輔德)으로 [[조선 숙종|세자 광]](爌)을 보도하였다. 그러나 그해 [[효종]]비 [[인선왕후]](仁宣王后)가 죽자, 살아있던 시어머니 [[자의대비]] [[장렬왕후]]가 입는 상복 문제로 [[윤휴]](尹鑴), [[허목]] 등 [[남인]]을 공격했다가, [[동래구|동래]][[부사]]로 좌천되었다.
         * [[허목]]
         [[분류:1625년 태어남]][[분류:1684년 죽음]][[분류:음서]][[분류:과거 급제자]][[분류:조선의 문신]][[분류:조선의 정치인]][[분류:송시열]][[분류:허목]][[분류:조선 숙종]][[분류:조선 경종]][[분류:함종 어씨]][[분류:서울특별시 출신]]
  • 오시만
         * [[허목]]
  • 유형원
         당색으로는 [[북인]]계열로, [[북인]] 당원이던 아버지 [[유흠]]이 [[인조 반정]]으로 장살된 이후, 과거에 여러 번 응시하였으나 낙방하였다. 그 뒤 [[1654년]](효종 5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이후 [[조선 효종|효종]] 때 [[북인]]계 인사들을 발탁, 등용하던 [[허목]], [[윤휴]]의 천거 등 관직에 나갈수 있는 주변의 배경이 있었으나 관직을 단념하고 학문 연구와 후학 양성에 전념하였다. [[남인]] 실학자의 첫 세대 인사 중의 한사람이다.
         초기 [[실학]]자의 한사람으로 그의 학문은 후에 중농학파인 [[이하진 (1628년)|이하진]], [[이서우 (1633년)|이서우]], [[오상렴]], [[이익 (학자)|이익]] 등에게로 이어진다. [[남인]] 실학자 [[이익 (학자)|성호 이익]]의 내재종형이나 생전에 한번도 만나본 적은 없다. 저서로는 경세서인 [[반계수록]], 문집인 [[반계집]] 등이 있다. [[이원진]], 동명 [[김세렴]], [[정언옹]], 미수 [[허목]]의 문인이다.
         외종조부 이지안은 [[이황]]의 학통을 계승한 [[정언옹]]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이지안의 동문은 [[허목]]으로 후일 그가 [[허목]]의 문하에 출입하게 되는 데는, 외종조부와의 인연이 작용했다. 아버지 [[유흠 (조선)|유흠]]과 할아버지 유성민(柳成民)은 [[북인]]이었다.
         뚜렷한 스승 없이 홀로 학문 연구에 진력하였으나 보통 [[이원진]], [[김세렴]]의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미수 [[허목]]의 문하에도 자주 출입하여 수학하였다.
         이지완의 아들이자 유형원의 외숙인 이원진([[1594년]] ~ [[1665년]])은 학문으로 이름이 높았고, 고모부인 김세렴 역시 호조판서를 지낸 고관으로 처조카인 유형원에게는 스승 역할을 하였다. 5세에 글을 배우기 시작하여 7세에 《서경(書經)》의 우공기주(禹貢冀州)편을 읽다가 감탄했다고 한다. 특히 김세렴은 함경도와 평안도의 관찰사를 역임한 경력도 있어 그 시절 유형원이 그곳으로 직접 찾아가 기거하면서, 북방에 관한 많은 지식을 얻을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외종조부 [[이지안]]은 정언창(鄭彦窓)의 문하에서 [[허목]](許穆) 등과 함께 수학<ref>[http://koreandb.nate.com/history/people/detail?sn=2260 이지안:네이트 한국학]{{깨진 링크|url=http://koreandb.nate.com/history/people/detail?sn=2260 }}</ref>하였는데, 이런 인연으로 그는 외종조부 이지안의 동문인 [[허목]]을 찾아가 가르침을 청했다.
         스승 미수 허목
         [[과거 시험]]의 폐단으로 생업에 종사하지 않고 공부한다는 이름하에 음식만 축내는 자들이 늘어난다고 비판하던 그는 과거에 응시하라는 [[이원진]], [[김세렴]], [[허목]] 등 스승들의 권고와 할아버지의 부탁을 거부하고 과거 시험에 응시하지 않았다. 그는 [[북인]]계 인사의 자손이라는 이유로 출사에 제한을 당했고, 실망한 그는 이후 관직을 단념한다.
         스스로 독서, 사색하며 학문을 연구하는 한편 의문나는 점이 있으면 [[이원진]], [[김세렴]], [[허목]] 등과 꾸준히 서신을 주고받으며 견문을 넓히기도 했다.
         그 뒤 [[허목]]과 [[윤휴]]가 조정에 출사하여 [[북인]]계 출신 인사들을 적극 관직에 천거하면서, 유형원 역시 학덕이 높음을 들어 계속 천거하였으나 모두 고사하였다. 당시 그의 스승이던 [[허목]]과 그의 지인인 [[윤휴]]는 [[조선 효종|효종]]의 유일 천거에 의해 출사하면서 [[북인]]계 출신 학자, 문사들을 적극적으로 발굴하여 등용시켰다.
         [[조선 효종|효종]]의 관직 제수를 사양하자 [[허목]]과 [[윤휴]]는 높은 이상을 품었더라도 현실 정치에 참여해야 실천할 수 있다하여 계속 그에게 조정에 출사할 것을 권고하였지만 이 역시 거절하였다. 또한 [[1659년]] [[조선 효종|효종]]의 사후 벌어진 [[예송 논쟁]] 역시 공리공담으로 판단하여 관망하였다.
         [[1668년]](현종 9) 스승인 [[허목]]이 [[조선 현종|현종]]에게 유형원이 국왕을 보좌할 재주(王佐之才)를 가진 인재라며 발탁을 건의하였다. 그러나 [[서인]]들은 그의 이론이 괴이하다며 반대하였다. 그해에 다시 [[윤휴]]가 유형원은 경세의 재능을 가진 식견있는 선비라며 추천하였으나 사양하고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
         생전 그의 학문에 관심을 준 인물은 절친한 친구였던 [[배상유]](裵尙瑜)와 스승 [[허목]], 선배였던 [[윤휴]], [[윤선도]]와 [[서인]]으로는 [[영의정]]을 지낸 잠곡 [[김육]]이 있었다. 그의 사상은 후에 [[서인]] [[이사명]]과 [[이이명]], [[소론]]의 [[윤증]]과 [[박세채]], [[노론]]의 [[홍계희]] 등 소수의 지식인들이 관심을 갖고 높이 샀고, [[조선 영조|영조]] 때에 이르러 재조명되기 시작하였다. 그의 사상은 [[양득중]], [[이익 (1681년)|이익]], [[안정복]], [[신후담]], [[정약용]] 등을 통해 계승되었다.
         [[1673년]](현종 15년) [[음력 3월 19일]] 향년 52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ref> [http://news.khan.co.kr/section/khan_art_view.html?mode=view&artid=200703091509091&code=900308 <역사의 땅, 사상의 고향>(5) 반계 유형원 ‘반계수록’ 의 산실 (上)] ([[경향신문]]) </ref> 그의 스승 중 한사람이자 외조부 [[이지안]]의 동문이던 [[허목]]과 논객 백호 [[윤휴]]는 그의 이른 죽음을 애석해하였다.
         * 외숙부 [[이원진]], 고모부 [[김세렴]], 학자 미수 [[허목]] 등의 문하에서 수학.
         * 45세 : 외숙부 [[이원진]]의 장례를 치르고, 연천에서 미수 [[허목]]을 다시 찾아감.
         * [[허목]]
         [[분류:조선의 문신]][[분류:조선의 교육인]][[분류:조선의 과학자]][[분류:한국의 농학자]][[분류:허목]][[분류:문화 류씨]][[분류:조선의 시인]][[분류:조선의 저술가]][[분류:병사한 사람]][[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사상가]][[분류:남인]]
  • 윤선도
         그는 [[남인]] 중진 문신이자 [[허목]], [[윤휴]]와 함께 [[예송 논쟁]] 당시 [[남인]]의 주요 논객이자 예송 논쟁 당시 선봉장이었다. [[서인]](西人) [[송시열]]과 함께 [[조선 효종|효종]], [[조선 현종|현종]]을 가르쳤으나 그는 승승장구하고 윤선도는 한직에 머물렀으므로 후일 갈등의 불씨가 되기도 했다. 1차 예송 논쟁 당시 [[송시열]]의 [[체이부정]] 주장과 [[서인]]이 당론으로 [[소현세자]]와 [[민회빈 강씨]], [[김홍욱]] 복권운동을 벌이는 점을 근거로 [[송시열]]이 효종의 정통성을 부정한다는 상소를 올렸다가 [[서인]]의 맹공을 받고 자신이 [[삼수]](三水)에 유배되어 오랜 세월 유배생활을 하였다. [[조선]] [[조선 효종|효종]]과 [[조선 현종|현종]]의 [[왕세자|세자]] 시절 [[세자시강원]] [[사부]]의 한사람이었던 덕에 사형은 모면하고 유배를 받았다. 유배지에서 울적한 심사를 달래며 지은 [[어부사시사]] 등은 유명한 작품이기도 하다.
         미수 허목 (윤선도와 함께 예송논쟁 당시 3년복 설을 주장하였다.)
         효종이 인조의 맏아들로 왕위를 이었다면 별 문제가 없었겠지만 그는 차남이고 인조의 맏아들인 소현세자의 상중에 자의대비가 맏아들에게 행하는 예로써 3년상을 치렀기 때문에 다시 효종의 상을 당하여서는 몇 년 상을 해야 하는가가 문제가 되었다.<ref name="park0318">박영규, 한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 (도서출판 들녘, 1996) 318</ref> 이 문제에 직면하자 서인의 송시열과 송준길은 효종이 차남이므로 원칙대로 당연히 기년상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ref name="park0318"/> 하지만 남인의 허목과 윤휴는 효종이 비록 차남이지만 왕위를 계승하였으므로 장남과 다름없기에 3년상이어야 한다고 반론을 제기했다.<ref name="park0318"/> 서인과 남인의 복상 논쟁은 극단적인 감정으로 치달았고, 결국 돌이킬 수 없는 정쟁으로 확대되고 말았다. 그리고 이 정쟁은 지방으로 확대되어 재야 선비들 사이에서도 중요한 쟁점으로 부각되었다.<ref name="park0318"/>
         그는 [[남인]]의 우두머리로서 3년 설을 주장하다가 기년 설을 주장하는 [[서인]]에게 꺾이게 된다. [[서인]]들은 그가 같은 [[조선 효종|효종]]과 [[조선 현종|현종]]의 사부였으나 [[송시열]]에 밀려서 빛을 보지 못한 점을 근거로 들어 그가 [[송시열]]을 질투, 투기하는 것으로 몰아 비방하였다. [[서인]]으로부터 송시열을 질투, 투기하는 편협한 인간으로 비난을 받자 감정이 상한 그는 [[송시열]]을 사형에 처해야 된다는 주장까지 하게 된다. 이후 그는 [[허목]](許穆), [[윤휴]]와 함께 [[송시열]]이 [[조선 효종|효종]]을 가짜 임금으로 취급한다며 격렬한 상소를 올렸다. 그는 [[송시열]]이 역심을 품고 있다며 [[송시열]]의 사형을 주장했다.
         [[1660년]] [[4월]] [[호군]]이 되었다. 곧 윤선도는 [[허목]]을 변호하면서 [[송시열]]이 종통과 적통을 분리하려 한다며 사형할 것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윤선도를 옹호했던 [[권시]]가 파직되자, [[윤선거]]의 형이자 [[송시열]]의 사돈인 [[윤문거]]<ref name="leedeok251">이덕일, 《당쟁으로 보는 조선역사》 (도서출판 석필, 2004) 251페이지</ref> 가 사직소를 올렸다. 이 사건의 여파로 교리 [[이익]](李翊) 등이 [[송시열]]을 떠나게 되었고, 재야 사림들도 [[허목]]과 [[윤휴]] 쪽으로 여론이 많이 기울어졌다.<ref name="leedeok252">이덕일, 《당쟁으로 보는 조선역사》 (도서출판 석필, 2004) 252페이지</ref>
         [[송시열]]은 [[조경]]을 삭탈관직하라는 자신의 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시골로 내려가겠다면서 [[사직소]]를 올리고 고향으로 내려갔다.<ref name="leedeok252"/> 그런데 이 사건 이후에 [[남인]] 유생들의 윤선도 구명 운동이 계속 일어나 조정에서 끝난 예송 논쟁은 지방 유생들의 대립으로 확산되었다.<ref name="park0322"/> 그러자 결국 [[허목]]이 [[송시열]]을 탄핵하는 것으로 사태가 확산된다. 결국 이러한 1차 예송 논쟁은 [[소현세자]]의 셋째 아들인 석견이 죽자 일단락되고, [[서인]]과 [[남인]]의 대립은 [[송시열]]과 [[허적]]의 정책 대립으로 발전하게 되었다.<ref name="park0322"/>
         윤선도가 효종, 현종의 사부가 아니었더라면 꿈짝없이 죽음을 당했을 것이다.<ref name="leedeok250"/> 윤선도는 귀향조치를 받고 고향으로 내려가게 되었다. 그러나 윤선도에 대한 [[서인]]의 집요한 공격에 분개한 [[허목]]이 다시 [[송시열]]의 사형을 청하는 상소문을 올림으로써 싸움은 격화되었다.
         [[1661년]] 전국적으로 가뭄이 들어 흉년이 일어났다. 4월에 가뭄이 극심해지자 이때 [[삼수]]도 흉년과 기근이 심하여 그의 유배지를 [[북청]]으로 옮기는 논의가 있었다. 그러나 이때 [[송시열]]과 [[송준길]]이 그의 유배지를 옮기는 것을 반대하여 [[허목]] 등과 언쟁이 벌어졌고, [[송시열]]과 [[송준길]]의 뜻이 관철되어 윤선도의 유배지는 옮겨지지 못했다. 흉년이 계속되자 현종은 구언(求言)을 하였고, 이때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조경]](趙絅)이 상소를 올려 윤선도를 동정하며 유배지를 옮겨줄 것을 청하였다.
         이후 [[남인]]계 유생과 선비들이 상소를 올려, 흉작지에 유배된 것과 윤선도가 팔순을 바라보는 고령임을 들어 선처를 호소하는 탄원서를 올렸으나 모두 묵살되었다. [[조선 현종|현종]]은 윤선도를 옹호하는 주장에 엄히 대처하였으나, [[남인]]계 유생과 선비들이 상소는 계속되었다. [[서인]]에서는 그를 죽여야 된다며 계속 상소를 올렸고, 이에 반감을 품게 된 [[허목]]은 도리어 [[송시열]]이 예를 그르쳐서 [[조선 효종|효종]]의 정통성을 부정했으니 사형시켜야 된다는 상소를 계속 올리게 된다.
         [[허목]]과 [[윤휴]]가 계속 그의 석방을 청하는 탄원서와 상소를 올렸으나 모두 묵살당하였다. [[1663년]] [[홍문관]][[수찬]] [[홍우원]](洪宇遠)이 또 상소하여 종통, 적통의 주장을 하며 윤선도를 너그럽게 풀어달라고 청하나, [[조선 현종|현종]]은 이를 거절했다. [[1663년]] [[4월]] [[홍우원]]은 다시 윤선도의 석방을 탄원했으나, [[조선 현종|현종]]은 도리어 [[홍우원]]을 [[금고형]]에 처하였다. 유배지에서도 시문을 짓고, 그의 명성을 듣고 찾아온 명사들과 시문으로 소일하였다. 그런데 그가 유배지에서도 [[음악]]을 즐긴다는 소문이 돌자 이를 염려한 용주 [[조경]](龍洲趙絅)은 [[1664년]]초 그를 염려하며 자숙하라는 편지 서신을 보낸다. 이에 그해 [[9월]] 윤선도는 [[조경]]에게 자신의 음악론을 피력한 <답조용주별폭 答趙龍洲別幅>을 보냈다. 한편 [[윤휴]]와 [[허목]]은 계속해서 윤선도를 석방할 것을 청원하는 탄원서를 계속 조정에 올렸다. [[1665년]] 다시 가뭄으로 흉년이 계속되자 배소를 옮겨 [[전라남도]] [[광양시|광양]](光陽)으로 이배되었다.
         [[1665년]] [[1월]] 흰무지개가 해를 꿰뚫고 [[2월]]에는 [[혜성]]이 나타나자 현종은 자신을 책망하며 구언(求言)을 하였는데 이때, 그해 [[2월 21일]] 유학(幼學) [[성대경]](成大經)이 구언에 따라 상소를 올려 윤선도의 방환을 탄원하였다. 이를 계기로 [[허목]]과 [[윤휴]] 등 [[남인]]에서는 계속 윤선도를 구명하는 상소를 올렸다. [[2월 27일]]에 다시 재앙으로 큰 가뭄이 발생하였는데, 그 결과 윤선도를 전라도(全羅道) 광양(光陽)으로 이배의 명이 내려졌다. 윤선도는 [[4월]]에 [[삼수]]를 출발, [[6월]]에 [[전라남도|전남]] [[광양시|광양]]에 도착하여 아래에서 유배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광양도 흉년으로 피해를 입었고, [[허목]]의 표현에 의하면 '남쪽 바다끝 바닷가로 풍토가 심히 나빠서 난환(難換)과 기괴한 병이 있어 객지에서 와 사는 사람 10명 가운데 8~9명은 죽었다. 2년 뒤에 큰 가뭄이 들었다.' 한다. [[1667년]] 초 [[조선 현종|현종]]은 그가 오랫동안 유배살이를 한 것을 생각하여 풀어주려고 대신들을 모아 의견을 묻자, 모두 석방하라 하였으나 [[의정부시|의정부]] [[홍명하]](洪命夏)만 안된다고 극력 반대하였다. 그러나 곧 윤선도의 석방이 결정되었다.
         성격이 곧고 직설적이었던 그는 적을 많이 만들었다. '조선의 정치에서 생존의 조건인 침묵을 지키지 않는 불 같은 성깔은 결국 정치에서 문학으로 전환하려는 잠재된 욕망 때문이었을지 모른다<ref name="bulggotnam"/>'는 평도 있다. [[1667년]](현종 9년) 그의 나이 81세에 이르러 겨우 석방된 뒤<ref name="youn2007"/> 자연 속에 묻혀서 시를 읊으며 남은 생애를 보냈다. 만년에는 [[이해창]](李海昌), [[조경]], [[허목]], [[윤휴]], [[홍무적]], [[홍우원]], [[하홍도]], [[권해]], [[이서우 (1633년)|이서우]], [[정길보]], [[나위소]] 등과 교유하였고, 그밖에 당색이 다른 인물로는 백강 [[이경여]], [[윤선거]], [[윤문거]], [[윤원거]] 등과 교유하였다. 문하생 중의 한사람인 [[이서우 (1633년)|이서우]]는 후대에 [[남인]]의 학문과 시맥(詩脈)을 후대에 전하였다.
         온갖 억측과 비판이 계속되었지만 미수 [[허목]] 등 소수의 친구들은 그와 계속 교류하였고, [[허목]]은 그를 '경외하는 외우', '이 시대의 의인'이라며 그를 칭송하였다.
         그의 사후 [[조선 효종|효종비]] [[인선왕후|인선대비 장씨]]가 [[1674년]] [[1월]]에 사망하면서 [[장렬왕후|자의대비]]가 다시 [[조선 효종|효종비]] [[인선왕후|장씨]]의 상복을 입는 문제를 놓고 논쟁이 벌어졌다. 이때 [[윤휴]], [[허목]] 등의 1년설이 채택되어 제2차 예송 논쟁에서 [[남인]]이 승리, 집권하면서 그도 복권된다. [[묘갈]]명과 [[신도비]]문은 [[1681년]] 미수 [[허목]](許穆)이 찬하였다.<ref>경신환국으로 남인이 숙청당한 직후였다.</ref>
         이어 [[1675년]](숙종 1년) [[2월]] 제1차 [[예송 논쟁]]으로 [[송시열]], [[송준길]] 등에 맞서다가 피해를 입은 [[남인]] 관료들을 복권시킬 때 [[허목]], [[윤휴]]의 건의로 그해 [[8월 2일]] [[증직|증]](贈) [[자헌대부]]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추증]](追贈)되었다. 이때 [[허목]]과 [[윤휴]]는 여러번 그가 예를 바로잡는데 기여하였으므로 마땅히으로 추증하고 작위를 내려야 한다고 건의했으나 [[의정부]][[영의정]] [[허적]](許積)은 옳지 않다하여 결국 1671년 1월 증직은 [[이조판서]]로 정해졌다. [[1676년]] [[2월 28일]] [[이조참판]] [[이무]]가 다시 윤선도에게 삼공을 증직할 것을 청하였다.
         [[1678년]] [[9월]] [[허적]]과 [[허목]], [[윤휴]] 등이 그에게 시호를 내릴 것을 상주하여 [[1679년]](숙종 5년) [[8월]] [[김덕원]](金德遠)의 상주로 충헌(忠憲)의 시호가 내려졌다.<ref>남파 홍우원이 지은 시장에 의하면 危身奉上曰忠 博文多能曰憲이라 하여 충헌이 되었다.</ref> 그러나 [[1680년]](숙종 6년) [[8월]]에 [[허견의 옥사]]로 [[남인]]들이 [[서인]]에 의해 대거 숙청, [[허적]](許積), [[윤휴]] 등이 처형당하고 [[허목]], [[홍우원]] 등은 파직당하여 [[문외출송]]당한 뒤, [[이사명]](李師命) 등의 상소로 그해 윤 [[8월 10일]] 윤선도에게 내려진 [[증직]]과 [[시호]]도 함께 추탈당하였다. 그 뒤 [[1689년]](숙종 15년)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집권하면서 그해 [[2월]] 다시 복작되었다.
         [[1725년]](영조 3) [[조선 영조|영조]]의 특명으로 [[불천지위]](영구히 제사지냄)의 명을 받았다. 그 뒤 추탈되었다가 [[1727년]](영조 5년) 다시 [[조선 영조|영조]]의 특명으로 불천지위가 회복되었다. 묘비문은 [[허목]]이 썼고, 신도비는 [[허목]]이 쓴 신도비와 문인 [[이서우 (1633년)|이서우]]가 쓴 신도비가 있다.
         미수 [[허목]]은 그의 원칙론과 강경함을 높이 평가하였다. [[허목]]은 [[경신환국]] 직후 쓴 신도비문에서 "준정(峻正)하여 인의(仁義)를 많이 쌓아 널리 베풀고 만물을 이롭게 하는 것으로 마음을 삼고 사곡한 예와 변변치 못한 은혜로 명예를 바라거나 구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며 언어와 행동에 있어서 언제나 남의 뜻에 구차하게 영합하려 하지 않아서 환난궁액(患難窮액)에 한결같고 바른 도리 때문에 배척을 당해 죄수명부에 있은 지 전후 20년이나 된다. 하늘을 두고 맹세하리 만큼 정당하여 비록 아홉 번 죽어도 뉘우치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으니, 의를 봄이 밝고 죽음으로서 지켜서 바꾸지 않는 이가 아니고서야 능히 이같이 하였겠는가!" 라며 평가했다.
  • 윤휴
         |친척 = 외할아버지 [[김덕민]], 서형 윤영, 할아버지 윤희손, 사돈 [[이원익]], 사돈 [[이순신]], 사돈 [[허목]]
         '''윤휴'''(尹鑴, [[1617년]] [[10월 14일]] ~ [[1680년]] [[5월 20일]])는 [[조선]] 후기의 문신, [[성리학]]자이다. [[남인]]의 거두이며, 청남의 중진이자 [[예송 논쟁]] 당시 남인의 주요 논객이었다. 본관은 [[남원 윤씨|남원]](南原). 자(字)는 두괴(斗魁), 희중(希仲), 호는 백호(白湖), 하헌(夏軒), 야보(冶父)이다. 이름 휴(鑴)를 잘못 오기하여 윤준(尹鑴), 윤전(尹鐫)으로 읽기도 한다. 학자 간서재(澗西齋) [[김덕민]]의 외손으로, 김덕민, [[이민구 (1589년)|이민구]], [[이원익]]의 문인이다. 학행(學行)으로 [[시강원]][[진선]]이 되었으며 이후 [[성균관]]사업, [[사헌부]][[대사헌]], [[이조]][[판서]], [[의정부시|의정부]][[좌찬성]] 등을 지냈다. [[윤선도]], [[허목]]과 함께 [[서인]] 공격의 선봉장이었다.
         [[1659년]] [[제1차 예송 논쟁]]에서는 허목, 윤선도 등과 함께 효종이 왕위를 계승했으므로 장남으로 봐야 된다며 3년설을 주장, 서인과 갈등하였다. 송시열의 예론을 반박, 서인 정권의 전복을 꾀하자 송시열과 원수가 되었고 [[사문난적]]으로 몰렸다. [[1674년]] [[제2차 예송 논쟁]] 당시 남인의 논객으로 [[인선왕후]]가 맏며느리의 예로써 1년복 설을 주장, 2차 예송에서 남인이 승리하면서 요직에 발탁, [[사헌부]] [[대사헌]], 이조판서, [[우참찬]] 등을 지냈다. 이때 호포법의 실시, 전제의 개혁 등을 꾀했으나 제대로 시행되지 못했고, [[사헌부]] [[대사헌]]으로 재직 중에는 [[청나라]]를 정벌할 것을 주장했으며, [[1679년]] [[의정부시|의정부]][[우찬성]]에 이르렀다. [[1675년]](숙종 1년) [[홍수의 변]] 때 숙종에게 “대비를 조관하라”고 충고하여 임금의 미움을 샀다. 이 일로 평소 숙종의 눈 밖에 났던 관계로 [[1680년]](숙종 6년) [[허견의 옥사]]와 무관했으나 함께 엮여서 그해 [[5월]] 갑산에 유배가던 중 사형을 선고받고 법살당했다.
         송시열, 윤선거 등과는 [[남해군]] 시절부터 오랜 친구였으나 그가 주자, [[성리학]]에 대한 의문, 의혹을 제기하면서 결별하였다. [[예송 논쟁]]의 과정에서 송시열의 사형을 주장하는 윤선도, 허목 등을 옹호하고 그들의 주장에 동의하면서 송시열과는 타협할 수 없는 원수가 된다.
         [[이수광]]은 왕족 출신 실학자였고, [[이원익]] 역시 왕족으로 [[남인]]의 거두이자 [[인조반정]] 이후 [[서인]] 내각에 의해 특별히 초빙된 [[남인]] 인사였다. [[이원익]]은 또한 그의 서형인 [[윤영]]의 장인으로, [[이원익]]의 첩이 낳은 서녀가 [[윤영]]의 아내였다. 서형수의 친정아버지인 덕에 그는 어린 나이에 [[의정부시|의정부]]을 지낸 [[남인]] 거물 [[이원익]]의 문하에 찾아가 수학할 수 있었다. [[이원익]]의 문하에 출입하면서 15년 연상인 그의 손녀사위 미수 [[허목]]을 만나 사귀었다.
         [[이원익]]은 [[서인]]조차 그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어 [[인조반정]] 이후에 다른 당원임에도 특별히으로 천거되었다. 또한 스승 [[이민구]]는 [[지봉유설]]을 쓴 [[남인]]계 왕족 실학자 [[이수광]]의 아들이며, [[허목]]은 그들로부터 [[실학]]의 근간이 되는 사상을 접한다. [[이원익]]과 [[오윤겸]]은 곧 죽었지만 그는 [[이민구]], [[허목]] 등과 교류하며 사물과 시국을 논하며 의견을 주고받았다. 28세 때 다시 [[경기도]] [[여주시|여주군]] 백호에 정착하였고, 이후 그의 후손들은 그곳에 대대로 살게 되었다. 그의 호(號) 백호는 금사면 백호리에서 따서 호를 지었다.
         이어 [[허목]], [[권시]](權諰), [[권준]](權儁), [[이유]](李木劉), [[장중함]](張沖涵), 이해(李澥), [[윤선도]], [[허적]] 등 남인계 인사들과 가깝게 지냈고, [[기해예송]](己亥禮訟) 문제가 비화되기 전까지는 [[송시열]], [[송준길]](宋浚吉), [[이유태 (1607년)|이유태]](李惟泰), [[유계]](兪棨), [[윤선거]](尹宣擧) 등 [[서인]]계 인사들과도 가깝게 지냈다. 또한 [[송시열]]은 윤휴의 이모의 아들들이던 [[송규정]], [[송규렴]] 형제의 스승이기도 했다. 윤휴의 명성은 입에서 입으로 널리 알려졌고, [[허적]]의 조카이자 송시열의 문인이며 같은 [[여주]] 출신인 [[민정중]](閔鼎重), [[민유중]](閔維重) 형제는 그의 집을 자주 찾아왔다.
         [[조선 인조|인조]] 즉위 초부터 시종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의 문묘 종사를 놓고 논란이 발생했다. 이때 남인 중에서 율곡과 우계의 문묘 종사를 반대한 핵심 인물들은 미수 허목과 고산 윤선도, 백호 윤휴 등이었다.<ref name="Leedeok211">당쟁으로 보는 조선역사 (석필, 1997) 211 페이지</ref>
         율우의 문묘종사 논쟁이 벌어지자 허목은 이이를 유학자의 옷을 입은 불교 승려라고 비판했다. 윤휴도 허목과 같은 시각에서 이이를 비판했다.
         [[민정중]]의 건의를 받아들인 효종은 사람을 보내 윤휴를 불러들이나 그는 사양하고 부름에 응하지 않았다. [[1653년]] 우의정 [[심지원]](沈之源)과 병조 판서 원두표(元斗杓)의 건의로 발탁되었다. [[우의정]] [[심지원]]은 "[[허목]](許穆)·윤휴(尹鐫)가 힘써 배워 재주가 많으며 행실이 남보다 낫다 하니, 이러한 사람은 발탁하여 써서 권장되게 해야 하겠습니다."라 하고, [[병조]] [[판서]] [[원두표]](元斗杓)가 아뢰기를, "윤휴는 [[윤효전]](尹孝全)의 아들인데 고서(古書)를 많이 읽었다 합니다."라 하여 그들을 발탁하여 교육과 학문 연구 등 조정에 문풍 진작에 힘써야 된다고 주장하였고, 윤휴는 경연관으로 등용되어 관직에 나간다.
         그는 [[북인]]계열로 [[서인]]이나 [[남인]] 중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는 않았다. 본래 당색에 구애됨이 적었으나, 예송을 통하여 [[서인]]측과 틈이 생겨 출사 뒤에는 남인으로 활약하였다. 그는 기해예송 때 포의(布衣)로서 송시열의 주장의 오류를 가장 먼저 지적하였으며, 후일 [[1674년]] 갑인예송 때에도 같은 기준에서 서인측 견해의 잘못을 지적하였다.<ref name="nate">[http://koreandb.nate.com/history/people/detail?sn=15008 윤휴:네이트 한국학]{{깨진 링크|url=http://koreandb.nate.com/history/people/detail?sn=15008 }}</ref> [[남인]]으로서 그는 [[허적]](許積), [[권대운]] 등을 중심으로 한 탁남(濁南)과는 입장을 달리하여 [[허목]](許穆)과 함께 청남(淸南) 일파를 형성하게 된다.
         고산 윤선도 (윤휴, 허목과 함께 남인 강경파 인사였다.)
         앞서 [[1660년]]([[조선 현종|현종]] 11년) [[복상문제]]가 일어나자 [[허목]](許穆)·[[윤선도]](尹善道)와 함께 [[송시열]], [[송준길]] 등의 예론(禮論)을 통박하다가 사문난적으로 낙인이 찍혔다. 논쟁 초기에 [[송시열]]은 윤휴의 주장을 접수하였으나, [[남인]]이 [[복상 문제]]로 [[송시열]]을 제거하려 하자 [[송시열]]은 그를 공격하였다.
         미수 허목 (윤휴, 윤선도와 함께 예송논쟁 당시 3년복 설을 주장했다.)
         효종이 인조의 맏아들로 왕위를 이었다면 별 문제가 없었겠지만 그는 차남이고 인조의 맏아들인 소현세자의 상중에 자의대비가 맏아들에게 행하는 예로써 3년상을 치렀기 때문에 다시 효종의 상을 당하여서는 몇 년 상을 해야 하는가가 문제가 되었다.<ref name="park0318">박영규, 한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 (도서출판 들녘, 1996) 318</ref> 이 문제에 직면하자 서인의 송시열과 송준길은 효종이 차남이므로 원칙대로 당연히 기년상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ref name="park0318"/> 하지만 남인의 허목과 윤휴는 효종이 비록 차남이지만 왕위를 계승하였으므로 장남과 다름없기에 3년상이어야 한다고 반론을 제기했다.<ref name="park0318"/> 서인과 남인의 복상 논쟁은 극단적인 감정으로 치달았고, 결국 돌이킬 수 없는 정쟁으로 확대되고 말았다. 그리고 이 정쟁은 지방으로 확대되어 재야 선비들 사이에서도 중요한 쟁점으로 부각되었다.<ref name="park0318"/>
         이때 윤휴와 [[허목]]은 약간 견해를 달리했는데, 같은 3년복 설을 주장했지만, [[허목]]은 어머니가 혈통을 계승한 장남에 대한 예로서 자최삼년설(齊衰三年)이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윤휴는 [[조선 효종|효종]]이 [[조선]]의 국왕이고 [[자의대비]]는 임금과 감히 촌수를 계산할 수 없는 신하라며 참최삼년(慘衰三年)을 주장했다. 이어 윤휴는 그 근거로 신모설(臣母說)을 주장하고 [[주 무왕|무왕]]이 자신의 어머니 읍강을 신하로 간주했다는 점을 근거로 들었다. [[허목]]은 다소 절충을 해야 한다고 하며 자최삼년을 주장했다.
         1차 예송 당시 송시열의 주장에 오류가 있음을 지적하였고, 이후 서인과는 틈이 생겼다. 그러나 [[송시열]], [[송준길]]은 처음에는 학문상의 견해차이로 보고 수용하였다. 그러나 학문 논쟁에서 출발한 [[예송 논쟁]]을 [[남인]]이 정치공세로 비화, 이 과정에서 남인 당원들이 송시열을 사형시키라고 주장하자 송시열의 남인에 대한 반감과 분노는 극에 달하게 되었다. [[송시열]]이 윤휴를 사문난적으로 공격하면서, 윤휴 역시 [[송시열]]을 죽여야 된다는 [[윤선도]], [[허목]] 등의 강경파의 입장에 동조하게 된다. 송시열은 윤휴를 참적(讒賊), 적휴(賊鑴), 흑수(黑水)라 불렀고, 소년기의 우정은 증오와 경멸로 변하였다.
         [[1668년]](현종 9) [[허목]]이 [[조선 현종|현종]]에게 [[유형원]]이 국왕을 보좌할 재주(王佐之才)를 가진 인재라며 발탁을 건의하였다. 그러나 [[서인]]들은 그의 이론이 괴이하다며 반대하였다. 그해에 다시 윤휴가 [[유형원]]은 경세의 재능을 가진 식견있는 선비라며 추천하였으나 [[유형원]]은 결국 사양하고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
         [[윤선거]]의 문인들은 윤증에게 윤휴의 제문을 받아서는 안 된다고 만류하였지만 [[윤증]]은 옛 정을 생각하여 윤휴의 제문과 추도문을 받았다. [[윤증]]은 [[송시열]]과의 관계상 받지 않으려다 받았지만 제문은 윤선거가 우유부단하다고 조롱하는 내용이었으므로, 윤증은 윤휴의 추도사를 받고 탄식했다 한다. 그 뒤 [[윤증]]으로부터 절교장을 받았다. [[윤증]]은 이후 윤휴에게 절교를 선언하고 다시는 만나지 않았다. 오히려 윤휴가 [[허목]] 등과 함께 [[장희빈]]의 편을 들게 되자 그를 사악한 인물들이라며 비난하였다.
         그는 [[허목]]과 함께 맏며느리의 예에 따라 1년복 설을 주장하였는데, 현종의 의중이 1년복 설에 있었으므로 승리를 거뒀다. [[1674년]](현종 15) [[7월]] 중국에서 [[오삼계]](吳三桂)의 반청(反淸)반란이 일어난 소식을 듣자 윤휴는 [[조선 현종|현종]]에게 '이 때가 전날의 치욕을 씻을 수 있는 기회'라며 북벌을 주장하는 상소인 대의소(大義疏)를 올렸다. 그러나 현종은 곧 사망했고 그의 상소는 묻혀졌다.
  • 이황
         학문상으로는 영남 지역이 기반인 동인과 남인의 종통이었다. 동서 분당의 원인이라 일컬어지는 성암 [[김효원]](金孝元), 그리고 한강 [[정구]] 등은 이황과 조식 둘에게서 배웠다. 그의 대표적인 제자는 [[유성룡]]과 [[김성일]]이며 많은 다른 제자들이 있었다. 한강 정구는·미수 [[허목]]에게 이어지며, 허목은·성호 [[이익]] 등 남인 실학자로 이어진다. 또한 여헌 [[장현광]] 등은 이황과 이이 학설의 절충을 한다. 이황은 영남학파의 핵심을 이루었으며, 그의 제자들은 당색으로는 [[동인]]과 [[남인]]이었다. 이황 자신은 동서 분당 전에 죽었기 때문에 당파에 소속되지 않았다.
         후대의 실학자 [[이익 (1681년)|성호 이익]]은 자신의 학문적 뿌리를 이황에게서 찾으려 했다. [[이익 (1681년)|성호 이익]]의 아버지 [[이하진 (1628년)|이하진]]을 비롯한 선대 인사들은 대부분 [[윤휴]]와 가깝게 지냈다. [[이익]]의 6촌 형님뻘 되는 반계 [[유형원]]도 윤휴와 어느정도 거리를 두면서도 절친한 사이였다. 또한 성호 이익의 스승 중 한사람인 [[송곡 이서우]]는 윤휴와 [[허목]] 모두에게서 수학하였다. 이에 따라 성호 이익의 문도들 중에는 [[윤휴]]와의 연관성을 주장하며 그의 학문을 계승했음을 강조하였다. [[윤휴]]와의 관계를 다소 부담스럽게 여겼던 [[성호 이익]]은 자신의 학통을 퇴계 이황이 근원임을 여러번 강조하였다.
         반면 뒷날 [[이익 (1681년)|이익]]이 계승한 인물로 평가받는 허목과는 정치적으로나 학문적으로 거리가 있었다. 이때까지 이익 집안의 학문은 성리학적 흐름과는 무관하였으며, 오히려 주희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었다.<ref name="신항수1"/>
         [[1699년]](숙종 25) 이잠은 정시한을 예방하여 가르침을 받았는데, 이는 퇴계학 수용의 증거로 지목된다.<ref name="신항수1"/> 정시한은 이황의 학문을 계승한 인물 중의 한사람이었다. 이서우는 주희의 경전 해석을 따르면서 이황의 학문을 수용하였다. 이익 단계인 [[1710년]] 이후에는 본격적으로 이기심성론과 관련된 저술을 하면서 학파를 개창하기에 이르렀다. [[퇴계학]]을 수용하고 이기심성론과 관련된 성과를 낸 [[이익 (1681년)|성호 이익]]은 이제 이황과 자신을 연결하고자 하였다.<ref name="신항수1"/> 그러나 [[윤휴]]의 학문이 다소 과격하고 급진적이라는 비판적인 견해가 계속 제기되자 이를 부담스럽게 느꼈던 [[이익 (1681년)|성호 이익]]은 학문적 전통을 [[윤휴]]에게서 찾던 형 섬계 [[이잠]]이나 [[유형원]] 등과 달리 [[허목]]을 거쳐서 [[퇴계 이황]]으로 연결하려 했다. 이러한 시도는 [이익의 스승 중 한사람인 [[이서우 (1633년)|이서우]]가 [[허목]]과 윤휴 모두에게서 수학한 것에서 근거로 삼았다.
         [[1715년]](숙종 41)에서 [[1720년]](숙종 46) 사이 [[이익 (1681년)|성호 이익]]은 전대에 거리가 있었던 허목과 이하진의 관계를 강조하면서, 허목을 자신이 사숙한 스승으로 규정하였다.<ref name="신항수1"/> 서인 노론이 율곡 이이를 자신들의 학문적 뿌리로 삼은 것에 대항해서, 이익은 서울 지역(近畿) 남인들의 학문적 근원을 이황에서 찾으려 시도했다. 이익은 47 논쟁에 관한 책을 쓰고, 또 이황의 글을 발췌한 {이자 수어}도 편찬한다. 이러한 시도는 서울지역 남인들에게 일반적으로 수용되었다.<ref name="신항수"/> 한편 이익은 [[허목]]의 후학으로 자정한 이후에도 경전해석이나 경세론 분야에서는 여전히 윤휴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 이에 따라 일부에서는 전통적인 윤휴와의 계통을 강조하였는데, 이들은 상대적으로 개방적인 학문 경향을 보였다. [[윤휴]]를 강조하던 인사들이 신유 박해로 몰락하면서 성호 학파의 학통은 오로지 퇴계학과 관련된 내용으로 전승되게 된다.<ref name="신항수1"/>
         [[이익 (1681년)|이익]]은 이황의 사상을 직접 계승하지는 않았으나 [[이익 (1681년)|이익]]의 스승 중 한명인 [[이서우 (1633년)|이서우]]가 [[허목]]의 문인이고, [[허목]]의 스승인 [[정구 (1543년)|정구]]는 이황의 문하에서도 배웠고, [[조식 (1501년)|조식]]의 문하에서도 공부하였다. [[이익 (1681년)|이익]]은 이 점을 들어 퇴계 이황과의 관련성을 계속 강조하였다.
  • 허목
         {{다른 사람|허목공||중국 허나라의 제후}}
         |이름 = 허목
         |설명= 허목 초상 (보물 제1509호)
         '''허목'''(許穆, [[1596년]] [[1월 10일]](음력 [[1595년]] [[12월 11일]]<ref>이익, 《성호전집》 권58, 미수 허 선생 신도비명</ref>) ~ [[1682년]] [[6월 2일]]([[음력 4월 27일]]))은 [[조선]]시대 후기의 문신 및 유학자, [[역사가]]이자 교육자, 정치인이며, 화가, 작가, 서예가, 사상가이다. 본관은 [[양천 허씨|양천]](陽川)으로, 자(字)는 문보(文甫)·문부(文父)·화보(和甫)<ref>[http://people.aks.ac.kr/front/dirservice/dirFrameSet.jsp?pUrl=/front/dirservice/ppl/viewDocumentPpl.jsp?pLevel2Name=&pLevel3Name=&pAgeCode=&pAgeName=&pGanadaFrom=&pRecordID=PPL_6JOb_A1595_1_0014464&pPplCount=&pOrderByType= 한국역사정보통합시스템]</ref>, 호(號)는 미수(眉叟), 태령노인(台領老人),대령노인(臺領老人), 석호장인(石戶丈人)이다. 별호는 미로(眉老), 희화(熙和), 공암지세(孔巖之世), 승명(承明)이고 별호로는 동교노인(東膠老人), 구주노인(九疇老人), 동서노인(東序老人), 이서포옹(二書圃翁),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허목 자신은 [[이언적]]과 [[이황]]의 학맥을 계승한 [[성리학]]자였으나 [[서경덕]]과 [[조식 (1501년)|조식]] 등 [[북인]]계 학통도 일부 계승하였다. 그는 후일 [[유형원]], [[이서우 (1633년)|이서우]], [[이담명]], [[이익]] 등에게로 학맥을 연결시킨, [[성리학]]과 [[실학]]의 과도기적 역할을 수행하였다. 또한 [[목내선]] 등의 [[남인]]계 성리학자들도 그의 문하에서 다수 배출되었다. 시문에도 능하여 당대의 대가, 부호들이 그에게 묘비명과 신도비명을 부탁하였다. 그림에도 능하여 [[학문]] 교육 외에 그림 해설, 강의도 하여 [[화가]]들을 길러냈다. [[조선 인조|인조]] 때의 [[남인]] 정승 오리 [[이원익]]의 손녀사위이다. [[조선]]왕조 역사에서 과거에 급제하지 않고 정승이 된 몇안되는 인물이기도 하다. [[이산해]], [[정언옹]], [[정구 (1543년)|정구]], [[문위 (조선)|문위]], [[장현광]]의 문인이다.
         미수 허목은 [[1595년]](선조 28년) 또는 [[1593년]](선조 26년) [[12월 11일]] [[한성부]] 창선방(彰善坊)에서 [[포천]][[현감]](抱川縣監)으로 사후 [[증직|증]] [[의정부]][[영의정]](贈領議政)에 [[추증]]된 [[허교]](許喬)와 [[정랑]](正郞) 백호(白湖) [[임제]](林悌)의 딸 임씨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증조는 동애 [[허자]](東厓 許磁)로 [[훈구파]]의 일원이었고 증조모 전주이씨는 왕족으로 [[조선 태종|태종]]의 장남 [[양녕대군]](讓寧大君)의 증손녀였다. 할아버지는 퇴계(退溪)가 그 학문과 덕망을 기린 송호처사(松湖處士) 허강(許橿)이고, 할머니 진주강씨는 문량공 [[강희맹]](文良公 姜希孟)의 5대손이며, 사용(司勇) 강복(姜復)의 따님이다. 또한 할머니 진주강씨는 한훤당 [[김굉필]]의 문인이자 정암 [[조광조]]의 동문인 모재 [[김안국]](慕齋金安國)의 외손녀이기도 하다.
         허목에게는 또 30년 이상 나이차이가 나는 서제(庶弟)가 몇명 더 있었는데, 아버지의 첩에게서는 [[허달]](許達)과 또다른 서모에게서는 [[허순]](許順)이라는 이복 동생들이 태어났다. 이복 동생 허순(許順)은 [[조선 현종|현종]] 때인 [[1672년]] [[무과]]에 급제하였다.<ref>[http://people.aks.ac.kr/front/tabCon/exm/exmView.aks?exmId=EXM_MU_6JOb_1672_009959&isEQ=true&kristalSearchArea=B 허순-무과 합격 기록]</ref>
         아버지 [[허교]](許喬)는 화담 [[서경덕]]의 제자인 [[박지화]]의 문인이었고, 외할아버지인 [[임제]] 역시 도학과 경학에 관심이 많았다. 허목은 [[유교]]를 신봉하는 [[성리학]]자였지만 아버지 허교와 외할아버지 [[임제]], 아버지 허교의 스승인 [[박지화]]와 [[서경덕]]의 영향을 받아, 도학과 노장 사상에도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었고, 유교, 성리학 외에도 사물의 현상에 대한 정답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는 10대 초반의 나이에 당대에 [[영의정]]을 지낸 [[북인]](北人) 아계 [[이산해]](李山海)의 문하에도 출입했다. 그러나 [[이산해]]가 [[인목대비]] 폐모론에 가담하지는 않았으므로 [[인조반정]] 이후 연좌되지는 않았다. 그는 [[시흥군]] 광명에 은퇴해 있던 [[남인]] 재상 오리 [[이원익]](李元翼)의 문하에도 출입하여 수학하였다. 그뒤 그가 21세 되던 해에 총산(鄭怱) 정언옹선생의 문하생이 되어 예기(禮記) 단궁(檀弓)편을 배웠다. 이 시절부터 이미 허목의 예론의 조예를 갖추게 되었고 23세에 부친의 임지인 거창으로 가서 모계(茅溪) 문위(文緯)를 찾아 뵙고 그의 학당에 출입하며 배우게 되었다. 스승 모계 문위는 [[이황]]과 [[조식]]의 학통을 계승한 [[한강 정구]]의 제자였다.
         (종전 내용(아래 서술된 내용)과 관련하여 내용이 논리적이지 않은 점들이 있어 내용을 바로 잡고자 합니다. 첫째, 미수 공은 서울 창선방에서 태어났으며, 아버지는 현감 이었고, 할아버니는 송호 강으로 역대사감 30권을 편찬하였고, 증조 할아버지는 좌찬성 이었습니다. 좌찬성은 의정부의 종1품 관직으로서 정 2품인 6조 판서보다도 높은 벼슬입니다. 미수 공의 가계 자체가 청렴 결백한 가계이기에 부유한 가계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집안이 가난하고 한미한 집안이 아니었음을 알려 드립니다. 더우기, 앞에서도 논의된 바와 같이 증조모가 왕족이고, 어머니 또한 그 유명한 백호 임제의 따님입니다. 또한, 선대에도 벼슬하신 분들이 많고, 명문벌족의 자손이기에, 많은 선비들이 집안에 왕래를 하고 이에, 미수 공은 그 인연들로 인해 유명한 분들로 부터 많은 가르침을 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이렇게 유명한 가계에서 왜 혼처를 찾지 못하겠습니까? 이에 "집안이 가난하고 한미하여 혼처를 찾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합당치 않습니다.) 두번째로, 오리 이원익 대감이 나이든 손녀 사위감을 찾고자 분주했던 것은 아닙니다. 손자도 아닌 손녀의 혼처를 왜 할아버지가 적극 찾아야 되겠습니까? 할아버지 보다는 부모가 딸의 혼처에 대해 더 관심이 많겠지요. 손주(아들)이라고 하면, 가계도 이어야 하는 등 여러 가지 이유로 하여 할아버지, 아버지 모두 적극적으로 혼처를 알아 보았을 것입니다. 또한, 오리 이원익은 예전부터 허목의 조부 증조부와도 잘 아는 사이 입니다. (조선왕조실록). 퇴청길에 아이의 됨됨이가 범상치 않아 이름과 가계를 물어보니, 본인이 잘 아는 집안의 아이였고, 이에 손녀 사위로 삼아야 겠다고 결심을 하게 된 것이지요. 그러나, 손녀와 허목 모두 나이가 어리기에 미리 혼담이야기를 하여 훗날 혼사를 하리고 약조를 해 두었던 것입니다. 오리 이원익 정승의 아들과 며느리가 좀 더 넉넉한 집안으로 딸을 시집 보내고 싶었기에 처음에 반대했던 것은 전해 오는 내용이 같습니다. 즉 오리 이원익 대감이 청백리 입니다. 벼슬이 정승에 이르렀지만 집안 살림이 아주 넉넉치 않았다는 것이지요. 그렇다고 생활하는데 큰 어려움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조선 시대의 유명한 청백리가, 황희 정승과 오리 이원익 정승이지요. 따라서 오리 대감의 아들 내외는 명문벌족 집안이나 역시 청렴하고 강직한 허목 집안 보다는 좀 더 부유한 다른 집안으로 딸을 출가시키기 원해서 처음에 반대를 했었던 것입니다. 두 번째 문장 "[이원익]에게는 결혼을 해야 할..." 중 4번째 줄에는 오리 정승이 허목을 본인의 부인에게 "시골의 가난한 선비의 자식이라오" 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러나 앞서 이야기 한 바와 같이 서울 창선방에서 출생하여 서울에서 공부를 하고, 동학재임 시절 유생 중 한 사람인 박지계가 임금에게 아첨하여 예를 문란시켰다고 박지계를 유생명부에서 제명을 시키는 바람에 임금님으로 부터 화를 사기도 하였습니다. 동학재임 시절이 32세이니, 19세때 혼인을 하여 32세때에도 한양(서울) 성균관에서 공부를 하고 있었다는 것이지요. 물론 아버님이 현감으로 여러 고을을 사셨기에 이 곳 저 곳 방문을 한 적은 있지만, 두번째 단락에서 이야기 하는 "시골의 가난한 선비의 자식이라오"는 합당치 않다는 것을 이야기 드립니다. 세번째로, 세번째 단락 둘째 줄에 묘사하고 있는 "... 처, 장인인 이의전 내외, 처숙모 등은 그가 가난한 집안 사람이고, 별다른 재주가 없는 점을 들어 딸이 고생할 것이라며 반대..."에서 허목은 어려서 부터 많은 재주가 있었다고 합니다. 특히 손에 글월 문자가 있었고, 글씨, 그림등 모든 방면에 아주 능한 것으로 다른 문헌들에 묘사되고 있습니다. 옛날 명문벌족 출신의 선비에게 무슨 재주가 필요합니까? 학문에 전념하고, 다른 사람을 포용할줄 알고, 어려운 사람들을 이해할 줄 알면 그 것이 최고 입니다. 즉 허목이 장사를 할 것도 아니고, 의술을 익힐 것도 아닌데 "재주가 없어 딸이 고생할 것 같아 반대를 했다는 것은 논리에 맞지 않는 다는 것이지요." 이런 연유들로 인해 내용을 바로 잡고자 하여 간략히 편집을 한 것입니다. 새 내용은, 미수공이 종손댁으로 미수공의 혼인과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를 요약한 것입니다. 미수 허목과 과련하여 바로 잡고자 하는 내용들은 시간이 나는대로 계속 편집을 하겠습니다. (끝)
         [[이원익]]에게는 결혼을 해야 할 나이 든 손녀가 있었다. 그래서 오리 이원익 대감은 오며 가며 손녀사위 감을 찾느라고 분주했다. 어느 날 정승의 눈에 번쩍 뜨인 젊은이를 만났다. 그래서 하인을 시켜 집으로 오게 하여 이것저것 물어보았다. 정승의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부인에게 말했다. 부인은 펄쩍 뛰면서 반대했다.<ref name="kwang">[http://gwangmyeong.grandculture.net/Contents/Index?contents_id=GC03101429 이원익의 손녀사위 허목 전설]</ref> "아니 대감, 신랑을 길에서 얻는 것도 아닐 텐데 무슨 말씀입니까? 대체 그래 어느 집안의 자식이랍디까?” 하자 정승은 “시골의 가난한 선비의 자식이라오.” 하니까 부인은 “대감, 그동안 좋은 댁의 청혼도 거절하고 고르신 것이 겨우 시골 가난뱅이 선비의 자식이란 말이오?" 하고 투덜거렸다.<ref name="kwang"/>
         관상을 볼 줄 알았던 [[이원익]]은 허목의 사람됨됨이를 한눈에 알아보고 손녀사위감으로 정했다고 한다. 처조모가 되는 [[이원익]]의 처, 장인인 이의전 내외, 처숙모 등은 그가 가난한 집안 사람이고 별다른 재주가 없는 점을 들어 딸이 고생할 것이라며 반대했었는데 이원익이 그를 알아보고 손녀사위로 결정하여 성사되었다는 것이다. [[이원익]]은 손녀사위감인 그의 관상을 보고 후일 재상이 될 재목이라고 평하였다. 당시 다른 사람들은 [[이원익]]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한다.
         시간이 지나 어느덧 혼례를 치르게 되었다. 하인이 신랑이 있는 방으로 음식상을 가지고 들어가자 신랑은 벌떡 일어나더니 밥상을 두 손으로 받기에 하도 이상하여 하인이 “어찌하여 상을 직접 받으십니까?”라며 그 연유를 물었다. 신랑은 “여보게 음식은 사람에게 가장 소중한 것이거늘 어찌 앉아서 받을 수 있단 말인가”하고 대답하였다. 하인은 그렇겠다고 고개를 끄떡였다. 신랑은 바로 허목이었다.<ref name="kwang"/> 집안의 모든 사람들이 신랑을 못마땅하게 여겼지만 [[이원익]] 정승만은 그렇지 않았다.하루는 [[이원익]]이 허목을 불러 여행을 하면서 학문을 닦으면 어떠냐고 물었다. 그래서 허목은 여행을 떠났다. 약 석 달 만에 집으로 돌아왔다. 오리 정승은 “잘 다녀왔느냐? 그래 어느 곳에서 누구를 만났느냐?”고 물었다. 허목은 “예, 장여헌 선생이라는 훌륭한 선비를 만나 학문을 배우고 책을 얻어 왔습니다.” 하자 오리 정승은 매우 만족해했다. 마침내 허목은 정승이 본대로 우의정이란 높은 벼슬까지 오르게 되었다.<ref name="kwang"/>는 것이다.
         [[한강 정구]]는 심학(心學) 예학(禮學)에 정통하였으며 문학, 의학, 서예, [[풍수지리]], 점술, 지지(地誌) 등 실로 다방면에 걸쳐 박학다식한데다 매우 실용적이었다. [[주자]]에 정통하면서도 [[주자학]]만을 강요하지는 않는 독특한 자세를 취하기도 했다. 이러한 [[한강 정구]]의 가르침은 허목에게 깊은 영향을 끼쳐 학문적 경지를 넓고 깊게 천착시켜 주었고 현실에 밀착할 수 있는 실학으로 접목케 하였다.<ref>그가 성리학자이면서도 유교 사상만이 진리를 보는 거울은 아니라고 한 것 역시 한강과 화담 [[서경덕]] 등의 영향을 받은 결과였다.</ref>
         [[1620년]](광해군 13년) 스승 [[한강 정구]]가 타계하자 상복을 입고 애사(哀詞)를 지어 바쳤다. 수 많은 [[정구 (1543년)|정구]]의 문도 가운데 허목은 가장 연소하였으나 뒷날 퇴계 이황, 남명 조식, 한강 정구의 학통을 근기지방으로 가져와 근기학파(近畿學派)를 형성시킴으로써 [[이황]]의 다른 제자들인 서애(西厓) [[유성룡]], 소고 [[박승임]] 학봉 [[김성일]](鶴峯 金誠一)의 문인과 후계자들이 영남학파를, [[조식]]의 다른 제자들인 [[김우옹]] 등이 경상좌도 학파를 이룬데 비해, [[경기도]] 지역에 [[이황]]과 [[조식]]의 학통을 전수하여 근기학파를 형성했다. 근기학파에서 남인계[[실학]]이 분파되었으며, [[이황]]과 [[조식]]의 학통을 모두 계승하였기에 다소 [[이황]]의 이기이원론이나 [[조식]]의 실용사상이 혼재되어 있었다. 이후 그는 관직에 욕심부리지 않고, 50여 세가 되도록 세상에 알려지지 않고 학문 연구와 후학 교육 등에 진력하여 일가를 이루었다.
         그는 아호를 스스로 미수(眉叟)라고 지었는데, 이는 '눈썹이 길어 눈을 덮으므로 별호를 미수라 정했다고<ref name="young200702">[http://www.yeongnam.co.kr/yeongnam/html/yeongnamdaily/plan/article.shtml?id=20070227.010220753350001 <nowiki>[</nowiki>한국의 혼 樓亭 .34<nowiki>]</nowiki> 미수 허목의 의령 대의면 '이의정'] 영남일보 2007-02-27일자</ref>' 한다. 재물욕심이 없어 생활은 가난하였으나 그의 아내는 불평한번 하지 않았고, 이는 그의 학문 활동에 큰 힘이 되었다.
         허목은 젊은 시절 과거 공부를 하던 중 [[조선 인조|왕]]의 심기를 거슬러 나라에선 그에게 평생 과거를 못 보게 만들었다. 그래서 스스로 산림에 묻혀 글만 읽다가 [[조선 효종|효종]] 때에 56세 나이로 말단 벼슬인 능참봉이 내려졌고 그 후 80세에는 정승까지 올랐다.<ref name="sugeun">
         [[1624년]](인조 2년) [[경기도]] [[광주군]](廣州郡) 우천(牛川)의 [[자봉산]](紫峯山)에 들어가 은거하며 학문에 전념하였다. 이때 독서와 글씨에 전념해 그의 독특한 전서(篆書)를 완성하였다. 이듬해 [[사부학당]](四部學堂) 중 동부학당(東部學堂)의 유생이 되었다. [[1626년]](인조 4년) [[1월 14일]]에 [[조선 인조|인조]]의 생모인 [[인헌왕후|계운궁]](啓運宮) [[인헌왕후|구씨]]가 죽자 [[조선 인조|인조]]는 자신의 모친의 장례식을 성대히 하려 했다. 예관들은 왕자 군부인의 예로서 장례를 치뤄야 된다고 주장했고, 이때 [[조선 인조|인조]]는 스스로 주상(主喪)이 되고자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고 상복도 3년복을 입으려다 1년복을 입을 수밖에 없었다. 이때 허목은 인조의 생모 [[인헌왕후|계운궁 구씨]]의 복상 문제와 관련하여 1년복을 입어야 된다고 주장했다가 [[조선 인조|인조]]의 눈밖에 났다.
         [[1626년]](인조 4년) 유생으로서 동학(東學)의 재임(齋任)을 맡고 있을 때 [[조선 인조|인조]]의 생모 [[계운궁 구씨]](啓運宮 具氏)의 복상(服喪)문제와 관련 생부 [[정원대원군]](定遠大院君)을 왕으로 추숭하려는 [[조선 인조|인조]]의 뜻에 부합하여 [[성리학]]자 [[박지계]](朴知誡) 등을 중심으로 [[조선 원종|원종]](元宗)의 추숭론(追崇論)을 제창하자, 허목은 원칙을 거스르고 임금의 뜻에 영합하여 예(禮)를 혼란시킨다고 규탄, "예를 어기고 임금에게 아첨하였다"며 유적(儒籍)에서 제적(除籍) 하는 [[유벌]]을 가하였다.
         [[조선 인조|인조]] 즉위 초부터 시종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의 문묘 종사를 놓고 논란이 발생했다. 남인 중에서 율곡과 우계의 문묘 종사를 반대한 핵심 인물들은 미수 허목과 고산 윤선도, 백호 윤휴 등이었다.<ref name="leedeok211">당쟁으로 보는 조선역사 (석필, 1997) 211 페이지</ref> 허목은 [[이이]]가 승려라며 불교 승려이자 노장 사상에 치우친 인물이라며 문묘 종사는 가당치 않다고 주장했고, [[서인]]들과 논쟁을 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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