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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온순 (1812년)
         '''김온순'''(金蘊淳, [[1812년]] ~ ?)은 [[조선]] 후기의 문신이다. 본관은 [[안동 김씨 (신)|신안동]]이다. [[음서 제도]]로 관직에 올라 [[참봉]] 등을 지내고 [[1862년]] 문화현령으로 부임한 이래 해주판관, 합천군수, 순창군수, 담양군수, 해주군수, 밀양부사, 수운판관, 임실군수, 진주목사, 청주목사, 안주목사, 다시 청주목사와 안주목사 등 20년간 지방관을 역임하고, [[1882년]] [[공조]][[참판]]으로 발탁되었다. 지방관으로 재직 당시 실적을 인정받아 여러 번 포상을 받았으며, 청주목사 처음 재직 시에는 통정대부로, 두 번째 청주목사 재직 중에는 1882년 1월에 가선대부, 1882년 4월에 가의대부로 승진하였다.
         [[1861년]] [[6월]] [[종친부]]전부(典簿), [[1862년]] 음력 윤 8월 문화현령(文化縣令)으로 부임하였다. 이후 해주판관(海州判官)으로 나갔다가 [[1865년]] [[1월 7일]] [[합천]][[군수]](陜川郡守)로 나갔다가 종3품으로 승진했다. 그해 [[5월 23일]] 순창 군수(淳昌郡守) 이승락(李承洛)과 직책을 교체하여 그가 [[순창군|순창]][[군수]](淳昌郡守)로 부임하였다.
         [[1872년]] [[7월 16일]] 해주판관(海州判官)이 되었다가 다시 [[해주]][[군수]]가 되었다. [[1874년]] [[7월 12일]] [[밀양]][[부사]](密陽府使)를 거쳐 [[11월]] [[수운]][[판관]]으로 내직으로 돌아왔다. [[11월 13일]]에는 황해도 암행어사(黃海道暗行御史) 조병필(趙秉弼)이 그가 해주판관으로 있을 때 군호(軍戶)가 고르게 보급되었다고 치적을 보고하여 특별히 [[통훈대부]]로 승진하였다. [[11월 27일]] [[수원부]] [[판관]]으로 부임하였다. 이후 [[1875년]] [[9월]] 부모의 병으로 사직을 청하는 임실 현감(任實縣監) 민두호(閔斗鎬)를 배려하여 [[대한제국 고종|고종]]은 특별히 임실현감 민두호를 수원부판관으로 임명하고 김온순을 [[임실]][[군수]]로 임명해 내려보냈다. [[1876년]] [[12월]] [[진주]][[목사]]로 부임하였다.
  • 윤휘
         [[1603년]] [[좌부승지]], [[참찬관]]을 지냈다. 한편 [[선조]]의 특명으로 돈피 사모 이엄(獤皮紗帽耳掩) 1부(部)을 하사받기도 했다. [[1604년]] [[승지]], [[호조]][[참의]]를 거쳐 [[1605년]] [[해주]][[목사]](海州牧使), 그뒤 [[전라도]] [[관찰사]]·[[경상도]] [[관찰사]]로 나가 치적을 올렸다. 당색으로는 [[서인]]이었으나 [[광해군]]의 조정에 참여하였다.
  • 정칠성
         해방 후 조선부녀총동맹을 결성해 부위원장이 되고, [[조선공산당]]과 [[민족주의민주전선]]에서 활동하다 [[1948년]] [[4월]] [[전조선 제정당 사회단체 연석회의|남북협상]]에 참가한 뒤, 그해 [[8월]] 미군정의 좌익 탄압을 피해 해주 남조선인민대표자 대회차 월북했다가 내려오지 않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부 수립에 참여하였다. [[1948년]] [[8월]] 제1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선출되었고, [[1948년]] [[10월]] [[조선민주여성동맹]] 중앙위원, 1955년 민주여맹 부위원장, 1956년 4월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을 역임하였으며, [[1957년]] [[8월]] 제2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재선되었다. [[1958년]] 국내파 [[공산주의]]자 및 사회주의자들을 제거할 때 숙청되었다.
         [[5월]] 근우회 각 지역순회강연 대표자를 전국에 파견할 때 근우회 중앙상무집행위원으로 경의선 라인 담당을 맡아 순회강연에 나섰다. [[5월 8일]] 그의 강연지는 장단, 개성, 사리원, 해주, 재령, 연백, 평양, 진남포, 정주, 의주, 신의주로 정해지고, [[5월 12일]] 경성에서 열차를 타고 황해도, 평안도를 다녔다.
         [[1947년]] 황해도 해주에서 열린 남조선인민대표자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비밀리에 3.8선을 넘어가 [[해주]]의 남조선인민대표자대회에 참석하고 되돌아왔다. [[1947년]] [[8월]]초, [[서울지방경찰청|서울경찰국]] 지휘하 좌파 인사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 때, 8·15폭동 음모사건 배후 선동혐의를 받고 [[서대문]][[경찰서]]에 체포, [[미군정]] 포고령 제2호 위반으로 [[서대문]][[경찰서]]에 억류되었다. [[8월 29일]] [[구류]]처분을 받고 다시 1개월간 투옥당했다. [[10월]] 가석방되었으나 곧 지하로 잠적했고, 소재불명으로 기소중지되었다.
         [[1948년]] [[6월]] [[황해남도]] [[해주]]에서 열린 제2차 [[전조선 제정당 사회단체 연석회의]]에 참석하였다. 그해 [[8월]] [[해주]]에서 개최된 남조선인민대표자 대회 참가차 3.8선을 넘어 월북했다가 내려오지 않고 [[북조선]]에 머물렀다. 그 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 수립에 참여하여 [[1948년]] [[9월]]에 [[최고인민회의]] 제1기 대의원에 선출되고 [[민주여성동맹]] 부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1948년]] [[10월]] [[조선민주여성동맹]] 중앙위원에 선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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